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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적을 행하시는 지의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말씀도 않으시며, 그리고 기적과 기사를 행하지도 않으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으며 성경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질문은 고린도전서 12-14에 주로 묘사된 것처럼 성령의 기적의 은사들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가의 여부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성령께서 누군가에게 기적의 은사를 주실 수 있느냐의 질문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적의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지의 여부를 묻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성령께서는 자신의 뜻에 따라 은사를 자유롭게 나누어 주신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합니다(고린도전서 12:7-11).

사도행전과 에베소서를 보면, 거의 대부분의 기적들은 사도들과 가까운 동료들에 의해 행하여졌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 이유를 주고 있습니다: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그리스도의 모든 믿는 자들이 표적, 기사, 기적들을 행하는 능력을 갖추었다면, 그 표적, 기사, 기적들은 결코 사도들을 구별하는 표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22은 예수님께서는 기적, 기사, 표적들로 “인정 받으셨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그들이 행했던 기적들에 의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사자로서의 “표식”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4:3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행한 기적들로 인해 복음의 소식이 “입증”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14은 성령의 은사들의 주제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평범한 기독교인들에게도 가끔은 기적의 은사들이 주어졌던 것처럼 보입니다(12:8-10; 28-30). 이것이 얼마나 흔한 일이었는지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습니다. 표적과 기사들로 사도들이 “표”해졌다는 사실에 근거하면, 기적의 은사들이 평범한 기독교인에게 주어진 경우는 예외이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닌 것처럼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과 그들의 가까운 동료들 외에는, 신약 성경 어느 곳에도 개인들이 성령께서 주신 기적의 은사들을 행했다고 특별히 묘사되고 있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는 우리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것 같이 완성된 성경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디모데후서 3:16-17). 그러므로, 예언, 지식, 지혜 등의 은사들은 초대 교회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예언의 은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의 새로운 사실과 소통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에 완성된 지금, “계시적”인 은사들은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적어도, 신약 성경에 있는 것 같은 정도의 능력으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기적적으로 사람들을 치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들을 수 있는 음성이든, 우리의 마음 속이든, 또는 감동과 느낌든 여러 방법들을 통해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놀라운 기적들, 표적들 그리고 기사들을 행하시며, 때로는 이러한 기적들을 기독교인을 통해 수행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성령께서 주시는 기적의 은사들이 아닐 수 도 있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은사의 주 목적은 복음은 진실이며 사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자들이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기적을 행하는 은사들이 폐하였다고 노골적으로 말씀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들이 신약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은 수준으로 발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토대를 갖추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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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에 대한 ‘(신성)모독’은 마가복음 3:22-30과 마태복음 12:22-32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기적을 행하셨을 뿐이었습니다. 귀신 들린 남자가 예수님께 데려와 졌고, 주님은 실명되고 벙어리인 그 남자를 치유하면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이 귀신 쫓아내시는 것을 본 목격자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구세주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구세주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한 무리의 바리새인들은 군중 속에 싹트기 시작한 어떠한 믿음이라도 재빠르게 진정시켰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마태복음 12:24). 예수님께서는 왜 본인이 사탄의 힘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몇 가지 논리적 논증을 들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성령에 대한 모독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31-32절).

(신성)모독이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반항하는 불경스러움”으로 정의 될 수 있습니다. 이 용어는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고의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일들을 비하하는 것 같은 죄들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신성)모독은 어떠한 악함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거나 우리가 마땅히 그에게 돌려야 할 어떠한 선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성)모독의 특별한 경우는 마태복음 12:31에서 “성령에 대한 (신성)모독이라고 칭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기적들을 행하고 계시는 반박 할 수 없는 증거를 목격하고도,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귀신이 들리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마태복음 12:24). 마가복음 3:30에 주목하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신성)모독하는 바리새인들이 범한 짓에 관하여 매우 구체적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귀신을 힘입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에 대한 (신성)모독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 충만 대신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특별한 유형의 (신성)모독은 오늘 날 반복될 수 없는 성격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역사의 독특한 순간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과 선지자가 있었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하는 성령이 계셨으며, 그들의 바로 앞에 친히 서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셨고, 그리고 그들은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들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이 전의 세계의 역사 (그리고 그 후로도)에서 인간에게 그렇게 많은 신성한 빛이 비추어진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봤어야만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항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알고 증거가 있었음에도 의도적으로 성령의 일을 마귀의 일로 돌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도적 실명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 선포하셨습니다. 성령에 대한 그들의 (신성)모독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최종적으로 거부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길을 설정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방해 받지 않고 멸망으로 항해 가게끔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신성)모독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라고 군중에게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2:32). 이것은 그들의 죄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의 방법입니다. 지금도(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히(용서받지 못함). 마가복음 3:29에 쓰여진 것 같이, 그들은 “영원한 죄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바리세인들의 공개 거부(그리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의 즉각적인 결과는 다음 장에서 보여집니다(마태복음 13:3; 참고. 마가복음 4:2).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방법에 당황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자신께서 비유를 사용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태복음 13:11, 13).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이 공식적으로 자신을 맹렬히 비난하는 직접적인 결과로, 비유와 은유를 들어 진실을 가리셨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성령에 대한 (신성)모독은 어떤 이들이 시도한다 하더라도 오늘 날 반복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 위에 안 계십니다 - 그분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아무도 개인적으로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목격하고 그 능력을 성령 대신 사탄의 능력으로 돌 릴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용서받지 못할 죄는 계속되는 불신의 상태입니다. 성령은 지금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요한복음 16:8). 그 책망에 반항하고 의도적으로 회개치 않은 상태에 머무는 것이야말로 성령을 “(신성)모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야기하는 성령을 거부하고 불신가운데 죽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용서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그리고 선택도 분명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한복음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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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침례란 구원의 순간에 하나님의 영이 믿는 자들을 예수님과 연합시키고 예수님의 몸 안에서 다른 믿는 자들과 연합시키는 작업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성령침례는 침례 요한과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에 의해 예측되었습니다: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사도행전 1:5). 이 약속은 오순절 날에 성취되었습니다(사도행전 2:1-4); 처음으로, 성령께서 믿는 자들 안에 영구적으로 내재하셨고,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12-13은 성령침례에 관한 중심 구절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린도전서 12:12-13). 우리 “모두”가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 모든 믿는 자들이 구원을 의미하는 침례를 받았는데, 이는 단지 몇 안되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경험이 아닌 것입니다. 로마서 6:1-4가 성령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고린도전서 구절과 유사한 어투로 하나님 앞에서의, 믿는 자들의 위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다음과 같은 사실들은 성령침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공고히 하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첫째, 고린도전서 12:23은 모두가 한 영을 마신 것(성령의 내재하심)처럼, 모두가 침례를 받았다고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성경 어디에도 믿는 자들에게 성령과 함께, 안에서 또는 의해서 침례를 받거나, 또는 어떻게든 성령침례를 쫓으라고 말해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모든 믿는 자들이 이러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셋째, 에베소서 4:5은 성령침례를 언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령침례는 “한 믿음”과 “한 아버님”처럼, 믿는 자 모두를 위해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침례는 두 가지 일들을 합니다. 1) 그것은 우리를 예수님의 몸에 속하게 하고, 2)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실현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됨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는, 고린도전서 12:23의 본문에 언급된 바와 같이 우리는 그 몸이 제대로 작동하게끔 영적 은사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5의 말씀과 같이, 성령침례 체험은 교회의 통합을 유지하기 위한 근거로 제공됩니다. 성령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지냄, 그리고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은, 우리가 내재된 죄의 권세로부터 분리되는 것이고 새 생명 안에서 우리 삶의 근거를 구축하는 것입니다(로마서 6:1-10; 골로새서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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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은 사도행전 2:1-4에 기록된 오순절 날 처음으로 발생합니다. 사도들은 나아가서 군중들에게 군중 자신들의 언어들로 말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사도행전 2:11). 방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문자 그대로 “언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사역을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14장에서, 바울은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고린도전서14:6) 라고 말씀하면서 놀라운 은사들을 논합니다. 사도행전에 묘사된 방언과, 사도 바울에 따르면, 방언이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에게는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이 통역이나 변역이 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무용한 것입니다.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고린도전서 12:30)은 방언으로 말하여진 언어를 모른다 하더라도 방언하는 사람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방언을 말한 사람의 메시지를 소통할 수 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고린도전서 14:13). 통역되지 않은 방언에 관한 바울의 결론은 강력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린도전서 14:19).

오늘날에도 방언이 존재합니까? 고린도전서 13은 고리도전서 13:10의 비록 “온전한 것”이 올 때 패한다는 것과 관련된다 하더라도, 방언의 은사는 패하여 질것이라고 언급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언이나 지식이 “폐하고” 란 시제를 사용한 반면 방언이 “폐하여 질 것”을 가리키는 헬라어 동사의 시제가 이와 다름을 들어 방언이 “완전한 것”이 오기 전에 폐하여 지는 증거라고 지적합니다. 가능한 해석이나, 이것은 본문에 있어 아주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은 하나님의 다가오는 심판의 징조였다는 증거로서 아사야 28:11과 요엘 2:28-29 같은 말씀들을 지적합니다. 고린도전서 14:22은 방언을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징조”로서 묘사합니다. 이 논증에 따르면, 방언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서 거부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 하실 것이라는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을 때(A.D. 70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음), 방언의 은사는 더 이상 의도된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견해가 가능은 하지만, 방언의 주요 목적이 성취되었다는 것이 꼭 그것이 폐하여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방언의 은사가 폐하여졌다고 결정적으로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동시에, 만일 방언을 말하는 은사가 오늘날 교회에서도 활동적이라면, 그것은 성경과 부합하여 수행될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적이며 지적 언어일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4:10). 그것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목적을 위해서일 것입니다(사도행전 2:6-12).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주신 명령과 부합될 것입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린도전서 14:27-28). 그것은 또한 고린도전서 14:33과 부합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물론 의심의 여지 없이 사람들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게끔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실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영적 은사들을 나눠주심에 있어 주권적이십니다(고린도전서 12:11). 선교사들이 언어를 배우지 않고도 선교지의 사람들과 그들 만의 언어로 즉시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더 생산적이 될지를 그저 상상해 보십시오. 하시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십니다. 대단히 유용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방언은 신약 성경에 나타났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행한다고 주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믿는 자들은 위에 언급한 성경의 말씀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방언이 폐하였거나, 아니면 최소한, 오늘날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보기 드문 것이라는 결론을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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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의 정체에 대한 잘못된 오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을 단순히 신비한 능력으로 봅니다. 다른 이들은 성령님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에게만 허락해 주시는 비인격적인 능력으로 봅니다. 그러면 성경은 성령님의 정체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간단히 말하면, 성경은 성령님이 하나님이시라고 공표합니다. 또한 성경은 성령님께서 생각, 감정, 그리고 의지를 지닌 존재, 즉, 신성한 인격체시라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사도행전 5:3-4를 포함하여 많은 성경 말씀들 안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왜 성령님을 속였는지에 관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거짓말을 한 것” 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님을 속인 것은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는 분명한 주장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가지셨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하나님 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령님의 무소 부재하심이 시편 139:7-8에 보입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또한 고린도전서 2:10-11에서 우리는 성령님의 전지하신 속성을 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성령님께서 생각, 감정, 그리고 의지를 지니셨기 때문에, 진정으로 거룩한 인격체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생각하고 아십니다(고린도전서 2:10). 성령님께서는 슬퍼하실 수 있습니다(에베소서 4:30).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탄원하십니다(로마서 8:26-27).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을 내리십니다(고린도전서 12:7-11).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며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인격)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성령님이 그리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대로, 위로자와 상담자로서의 진정한 역할을 수행하십니다(요한복음 14:16, 2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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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은 몇 가지 이유로 인하여 중요합니다. 첫째, 부활은 하나님의 막강한 능력을 증거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위에서 주관하고 계시다면, 그분은 죽은 자들을 일으킬 힘이 있으십니다. 만일 그분이 그러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시다면 그분은 우리의 믿음과 예배의 대상이 되시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오직 생명을 창조하신 분만이 죽은 생명을 일으킬 수 있고, 죽음 자체의 끔찍함을 되돌릴 수 있으시며, 죽음의 쏘는 것을 제거하고 무덤에게 승리하실 수 있습니다(고전 15:54-55). 하나님은 무덤에서 예수님을 일으키심으로써 생명과 죽음에 대한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또한 예수님의 주장대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그분의 부활은 그분의 사역이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보여주는 “하늘으로부터 오는 표적”이었고(마 16:1-4), 그분이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심을 입증하는 증거였습니다(요 2:18-22). 수백 명의 증인들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고전 15:3-8) 그분이 이 세상의 구세주라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성품과 신성한 성품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결코 썩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는데(시편 16:10), 예수님은 죽은 후에도 조금도 썩음을 당하지 않으셨습니다(행 13:32-37). 바울이 “이 사람(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고 전할 수 있었던 근거도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신성을 가장 분명하게 증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미리 알려준 구약의 예언들을 입증시켜줍니다(행 17:2-3). 그리스도의 부활은 또한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해 주었습니다(막 8:31; 9:31; 10:34).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역시 부활에 대해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이는 우리는 구주도 없고 구원도 없고 영생의 소망도 없습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의 믿음은 ‘쓸모 없게’ 될 것이며, 복음은 완전히 무력해 질 것이고, 우리의 죄는 용서받지 못한 채 그대로 남게 될 것입니다(고전 15:14-19).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자신이 부활과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주장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결코 부활이나 영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것 이상의 일을 하십니다. 그분은 생명이며, 이에 죽음은 그분에게 아무런 힘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그의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그분의 승리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요일 5:11-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개인적으로 부활을 경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생명을 갖게 되면서 죽음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부활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고전 15:53-57).

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이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죽음 이후에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 교리인 인간의 부활에 대한 증거로서 중요합니다. 다른 종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죽음을 초월한 창시자를 가지고 있으며, 그분을 따르는 자들도 똑같이 부활할 것을 약속합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무덤에서 끝을 마친 사람이나 선지자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무덤은 그분을 붙들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살아계시며 오늘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히 10:12).

하나님의 말씀은 휴거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교회를 위해 오실 때 신자의 부활을 보장합니다. 그러한 보증은 바울로 하여금 고린도전서 15장 55절의 위대한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참조, 호 13:14).

그리스도의 부활의 중요성은 지금 주를 향한 우리의 봉사에 영향을 미칩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부활에 대한 그의 담론을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우리는 우리가 새로운 삶으로 부활할 것을 알기 때문에 주께서 박해와 위험을 견디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와 위험을 견딜 수 있습니다(고전 15:30-3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역사 가운데서는 수천 수만의 기독교 순교자들이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약속을 위해 기꺼이 그들의 지상의 삶을 내려놓았습니다.

부활은 모든 신자에게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승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에 성경에 따라 셋째 날에 부활하셨습니다(고전 15:3-4). 그분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이며 그분이 오실 때 살아있는 자들은 변화되어 새롭고 영광스러운 몸을 받게 될 것입니다(살전 4:13-18). 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합니까? 부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명합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 대신 예수님의 희생을 받아들이셨음을 보여줍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에서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몸이 죽은 채로 남아있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될 것을 보증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많은 사람들이 회개(헬라어로 ‘메타노이아’)라는 용어를 "죄에서 돌아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회개의 성경적인 정의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회개는 "자기 마음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경은 참된 회개는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말합니다(눅 3:8-14; 행 3:19). 사도행전 26장 20절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라고 선언합니다. 회개에 대한 성경의 정의는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그렇다면 회개와 구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사도행전은 특히 구원과 관련하여 회개에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보입니다(행 2:38; 3:19; 11:18; 17:30; 20:21; 26:20). 구원과 관련된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행 2장)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요구하며 결론을 내립니다(행 2:38). 무엇으로부터의 회개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들에게(행 2:36) 그분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그분이 참으로 "주와 그리스도"(행 2:36)이시라는 것을 인식하라고 요구합니다. 베드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마음으로부터 그분을 메시아와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갖도록 요구합니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이 무엇을 행하셨는지에 대해서 먼저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고의적인 거부에 대한 회개이든, 또는 무지 및 무관심으로부터의 회개이든, 회개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구원과 관련한 성경적 회개는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마음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회개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는 공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에게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습니다(요 6:44). 사도행전 5장 31절과 11장 18절은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회개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회개를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회개할 수 없습니다. 회개와 믿음을 포함한 구원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고 눈을 뜨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내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인자하심으로 인하여(롬 2:4) 우리는 회개의 자리까지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벧후 3:9).

회개는 구원을 얻는 행위는 아니지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참으로 완전히 바뀌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회개는 행동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마 3:8)고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는 변화된 삶으로 그 증거를 나타냅니다(고후 5:17; 갈 5:19-23; 약 2:14-26). 제대로 정의된 회개는 구원에 필수적으로 필요합니다. 성경적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바꾸고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행 3:19).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회개의 정의는 아니지만,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믿음에 근거한 회개의 결과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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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구속(救贖, 죄를 대속하여 구원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자연 상태는 죄책감으로 특징 지어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를 죄책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구속의 유익은 영생(계 5:9-10), 죄 사함(엡 1:7), 의(롬 5:17),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갈 3:13),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됨(딛 2:14; 벧전 1:14-18), 하나님과의 평강(골 1:18-20), 성령의 내주하심(고전 6:19-20)을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구속을 받는다는 것은 용서를 받고, 거룩하여지며, 의롭게 되고, 자유롭게 되고, 양자가 되고,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참조, 시 130:7-8; 눅 2:38; 행 20:28).

구속이라는 의미는 "값을 치르고 사다"라는 뜻입니다. 특히 이 용어는 노예를 사서 자유를 주는 것과 관련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이 용어는 뚜렷하게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적용됩니다. 우리가 ‘구속’을 받았다면 우리의 이전 상태는 노예 상태였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사서 주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 또는 구약의 법에 속박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과 4장 5절은 ‘구속’에 대해 은유적으로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속 개념은 몸값이라는 단어와 관련됩니다. 예수께서는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풀어주기 위해 대가를 치르셨습니다(마 20:28; 딤전 2:6).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삶과 교환되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구속이 그분의 피, 곧 그분의 죽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합니다(골 1:14).

하늘의 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속 받고 용서 받고 자유롭게 된, 자신의 공로는 전혀 없는 이전의 포로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죄에 노예였던 자들이 성도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임 당한 구속자를 새 노래로 찬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계 5:9).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된 정죄 받은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대가를 치르셨고, 그 결과로 우리는 죄의 노예 상태 및 죄의 영원한 결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싸움이나 논쟁을 벌인 두 친구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한때 즐기던 좋은 관계는 깨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멈춥니다. 의사 소통은 너무나 어색하여졌습니다. 그 친구들은 점차 낯선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러한 멀어짐은 화해를 통해서만 되돌릴 수 있습니다. 화해를 하는 것은 우정 및 사이 좋은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옛 친구가 그들의 차이를 해결하고 관계를 회복하면 화목하여집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19절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롬 5:10; 고후 5:18; 골 1:20-21). 화목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기 때문에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은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라고 말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분은 하나님의 심판을 충족시키셨고, 하나님의 원수인 우리로 하여금 그분과 화해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로 인한 죄 사함과 관련됩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결과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적대감에서 우정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라”(요 15:15). 그리스도인의 화목은 영광스러운 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지만 이제는 그분의 친구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정죄 받은 상태에 있었지만 지금 우리는 용서를 받은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다투는 자들이었으나 지금은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다(빌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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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면, 칭의는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칭의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것을 근거로 하여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고후 5:21). 칭의의 원리가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지만, 신자들과 관련하여 칭의를 묘사하는 주된 구절은 로마서 3장 21-26절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구원을 받는 순간에 의롭게 여겨지고 의롭다는 선언을 받게 됩니다. 칭의는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믿음으로 비롯됩니다. 그분의 희생이 우리의 죄를 덮음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하고 흠 없는 자로 보십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그리스도의 의를 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함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십니다.

로마서 5장 18-19절은 이 사실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삶을 주관할 수 있는 것은 칭의 때문입니다. 신자가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칭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성화의 과정, 즉 이미 신분적으로 변화된 우리를 실제로 빚으시는 과정을 시작하실 수 있는 것도 칭의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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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흔히 물어보는 질문 중 "죄를 저지른 후, 하나님께 죄를 고백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입니다. 일반적으로 묻는 또 다른 질문은 "죄를 지은 뒤, 그 잘못을 망각하고 하나님께 고백하지 못면 어떻게 되나요?" 입니다. 이 두 질문은 모두 잘못된 가정 아래에 있습니다. 구원은 신자들이 죽기 전에 그들이 범한 모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인이 모든 죄를 고백하고 회개를 했는지 여부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죄를 지은 것을 의식하면 곧바로 하나님께 우리의 죄악을 자백해야 합니다. 하지만, 구원 받기 위해 항상 하나님께 죄 사함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 받습니다. 여기에는 작던 크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포함됩니다. 신자들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계속 죄 사함을 간구하거나 또는 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지불하기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때 모든 죄가 사함 받습니다(골 1:14; 행 10:43).

하지만 구원 받은 후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이 구절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하라고 말합니다. "자백"이라는 말은 "동의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우리가 틀렸고 죄를 범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가 자백하면 계속해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미쁘시며 의로우십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을 용서해 주시기로 하신 약속을 지키심으로 미쁘십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의 죄에 그리스도의 속량을 적용하심으로써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음을 인정하여 주심으로 의로우십니다.

동시에 요한일서 1장 9절은 어떤 식으로든 용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는 데에 달려 있음을 알려줍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에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 받았다면 왜 죄를 자백해야 합니까? 사도 요한이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관계적인’(relational) 용서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순간에 "신분 변화적인"(positional) 사함을 받습니다. 신분 변화적인 용서는 우리의 구원 및 천국의 영원한 거처를 보장합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하늘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신분 변화적인 용서입니다. 관계적인 용서의 개념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고 그분의 영을 근심시킨 사실에 근거합니다(엡 4:30).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저지른 죄를 용서해 주셨지만 그 죄악들은 여전히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거나 방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소년이 아버지에게 죄를 짓더라도 집 밖으로 쫓겨나지는 않습니다. 경건한 아버지는 자녀를 무조건 용서할 것입니다. 그러나 관계가 회복될 때까지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좋은 관계를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백하고 사과하는 경우에 좋은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이미 용서하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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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가 정의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기도를 했거나 또는 통로를 걸어 나온 적이 있거나,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일부 경험이 될 수는 있지만 이것들이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전적으로 신뢰하여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요 3:16; 행 16:31; 엡 2:8-9).

자, 이러한 정의 하에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잃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아마도 답을 찾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검토를 하고 또한 구원을 잃어버린다면 어떤 일들이 발생할지를 연구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리스도인은 단지 개량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하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는다면 새로운 피조물이 파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속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구속이라는 말은 값을 치르고 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치르고 산 바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는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귀한 핏값을 치르고 산 사람을 다시 취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롭다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의롭다고 칭하는 것은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는다면 하나님은 이전에 선언하셨던 것을 취소하고 다른 선언을 번복해야 합니다. 죄책을 사함 받은 자들이 다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성한 법정에서 내리셨던 판결을 다시 뒤집으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약속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영생은 하나님과 하늘에서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믿으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는다면 영생은 다시 정의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살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표시를 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십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믿는 순간에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표를 받고 성령에 의해 인쳐집니다. 성령은 하늘의 기업을 보증하시는 담보의 역할을 하십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이 칭송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는다면 하나님은 표를 지우셔야 하고 성령을 거두셔야 하며, 담보를 철회하고 약속을 깨뜨리고 보증을 취소하고, 상속을 주지 않고, 칭송 받기를 포기하시고, 그분의 영광을 깎아 내리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영화롭게 되는 것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로마서 5장 1절에 따르면 믿는 순간에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 따르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의롭게 된 자들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칭한 모든 자들은 영화롭게 될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약속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서 완벽한 부활의 몸을 받을 때 성취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을 수 있다면, 로마서 8장 30절은 오류가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칭하신 모든 자들의 영광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잃을 수 없습니다. 구원을 잃을 수 있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성경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발생한다고 언급한 내용들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무효가 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사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롬 11:29) 새롭게 지어진 그리스도인은 다시 옛 것으로 피조될 수 없습니다. 구속함을 받은 자는 되돌려질 수 없습니다. 영생은 임시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번복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딛 1:2).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을 수 없다는 믿음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두 가지 반대는 다음과 같은 경험적인 문제와 관련됩니다. 1) 죄 많은, 회개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2) 믿음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러한 이의 제기의 문제점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거듭난 자들이라고 추정하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회개하지 않는 죄의 상태에 계속 거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요일 3:6). 성경은 또한 믿음을 떠난 자는 누구든지 결코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적이 없음을 보여줍니다(요일 2:19). 그는 종교적이었을지는 몰라도, 또는 멋진 쇼를 했는지도 몰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 7:16). 하나님의 구속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롬 7:4) 속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아버지의 사랑에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롬 8:38-39). 하나님의 손에서 그리스도인을 떼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요 10:28-29).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유지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으며,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매고 집으로 갑니다”(눅 15:5-6). 어린 양이 발견되면 목자는 즐거이 책임을 집니다. 즉, 우리 주님은 잃어 버린 자를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오는 일에 전적인 책임을 지십니다.

유다서 1장 24-25절은 우리 구주의 선하심과 충실함을 더욱 강조합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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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가 정의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기도를 했거나 또는 통로를 걸어 나온 적이 있거나,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일부 경험이 될 수는 있지만 이것들이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전적으로 신뢰하여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요 3:16; 행 16:31; 엡 2:8-9).

자, 이러한 정의 하에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잃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아마도 답을 찾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검토를 하고 또한 구원을 잃어버린다면 어떤 일들이 발생할지를 연구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리스도인은 단지 개량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하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는다면 새로운 피조물이 파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속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구속이라는 말은 값을 치르고 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치르고 산 바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는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귀한 핏값을 치르고 산 사람을 다시 취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롭다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의롭다고 칭하는 것은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는다면 하나님은 이전에 선언하셨던 것을 취소하고 다른 선언을 번복해야 합니다. 죄책을 사함 받은 자들이 다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성한 법정에서 내리셨던 판결을 다시 뒤집으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약속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영생은 하나님과 하늘에서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믿으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는다면 영생은 다시 정의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살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표시를 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십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믿는 순간에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표를 받고 성령에 의해 인쳐집니다. 성령은 하늘의 기업을 보증하시는 담보의 역할을 하십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이 칭송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는다면 하나님은 표를 지우셔야 하고 성령을 거두셔야 하며, 담보를 철회하고 약속을 깨뜨리고 보증을 취소하고, 상속을 주지 않고, 칭송 받기를 포기하시고, 그분의 영광을 깎아 내리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영화롭게 되는 것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로마서 5장 1절에 따르면 믿는 순간에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 따르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의롭게 된 자들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칭한 모든 자들은 영화롭게 될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약속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서 완벽한 부활의 몸을 받을 때 성취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을 수 있다면, 로마서 8장 30절은 오류가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칭하신 모든 자들의 영광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잃을 수 없습니다. 구원을 잃을 수 있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성경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발생한다고 언급한 내용들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무효가 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사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롬 11:29) 새롭게 지어진 그리스도인은 다시 옛 것으로 피조될 수 없습니다. 구속함을 받은 자는 되돌려질 수 없습니다. 영생은 임시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번복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딛 1:2).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을 수 없다는 믿음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두 가지 반대는 다음과 같은 경험적인 문제와 관련됩니다. 1) 죄 많은, 회개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2) 믿음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러한 이의 제기의 문제점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거듭난 자들이라고 추정하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회개하지 않는 죄의 상태에 계속 거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요일 3:6). 성경은 또한 믿음을 떠난 자는 누구든지 결코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적이 없음을 보여줍니다(요일 2:19). 그는 종교적이었을지는 몰라도, 또는 멋진 쇼를 했는지도 몰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 7:16). 하나님의 구속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롬 7:4) 속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아버지의 사랑에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롬 8:38-39). 하나님의 손에서 그리스도인을 떼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요 10:28-29).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유지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으며,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매고 집으로 갑니다”(눅 15:5-6). 어린 양이 발견되면 목자는 즐거이 책임을 집니다. 즉, 우리 주님은 잃어 버린 자를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오는 일에 전적인 책임을 지십니다.

유다서 1장 24-25절은 우리 구주의 선하심과 충실함을 더욱 강조합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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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위험이나 고통으로부터 구출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구출 또는 보호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승리, 건강, 또는 보존이라는 생각을 전합니다. 때때로 성경은 구원 받음 또는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바울이 감옥에서 구출하는 것과 같은 일시적 육체적인 구출을 가리키기도 합니다(빌 1:19).

종종 "구원"이라는 단어는 영원하고 영적인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간수에게 그가 무엇을 해야 구원 받을 수 있는지를 말할 때 바울은 영원한 운명을 말한 것입니다(행 16:30-31). 예수께서는 구원받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동일시하셨습니다(마 19:24-25).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까? 구원에 대한 기독교 교리를 보면, 우리는 ‘진노’, 즉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에서 구원을 받습니다(롬 5:9, 살전 5:9). 우리의 죄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고 그 결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렀습니다(롬 6:23). 성경적인 구원은 죄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것을 말하며 나아가 죄의 제거를 포함합니다.

누가 구원 하십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없애시고 죄의 형벌에서 우리를 구해내실 수 있습니다(딤후 1:9, 딛 3:5).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구원의 기독교 교리를 보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요 3:17).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얻어내셨습니다(롬 5:10; 엡 1:7). 성경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면서(엡 2:5, 8),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행 4:12).

우리는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첫째, 우리는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엡 1:13). 그 후, 우리는 주 예수님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롬 1:16). 이것은 회개를 포함하며, 죄와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의 변화(행 3:19)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포함합니다(롬 10:9-10, 13).

구원의 기독교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로 인한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으며, 이 구원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조건들, 곧 회개를 하고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허락된다”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 안에서만 허락되며(요 14:6, 행 4:12), 구원의 보급과 확신과 안전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구원을 받는데 침례가 필수적이라는 믿음은 소위 “침례 중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침례가 그리스도인이 순종해야 하는 중요한 단계라고는 보지만 구원에 필수 조건이라는 주장에는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각 침수에 의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력히 믿습니다. 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에 신자가 함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3-4절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선언합니다. 물에 침수되는 행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에서 나오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묘사합니다.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외에 무엇이든 요구하는 것은 행위에 근거한 구원론입니다. 복음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은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충분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침례가 구원을 받는데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 외에 우리 자신의 선행과 순종을 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만이 우리의 죄값을 치렀습니다(롬 5:8, 고후 5:21). 우리의 죄에 대한 예수님의 속량은 믿음만으로 우리의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요 3:16; 행 16:31; 엡 2:8-9). 그러므로 침례는 구원 이후에 순종해야 하는 중요한 단계이지만 구원의 필수 요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몇몇 구절들은 구원을 받으려면 침례를 받아야 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분명히 말하기 때문에(요 3:16; 엡 2:8-9; 딛 3:5), 이 구절들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성경에 모순되지 않습니다. 성경 시대에는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한 사람은 종종 회심을 확인하기 위해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는 그 사람의 결정을 공개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침례 받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사도들과 초기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침례 받지 않은 신자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공개적으로 그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그는 참 신앙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침례가 필요하다면, 왜 바울이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침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라”고 말하였겠습니까?(고전 1:14) 왜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고 말해야 했습니까? 물론, 이 구절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퍼져 있는 분열을 반대하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을 위해 침례가 필요하다면 바울이 “침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라”랄지 또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였겠습니까? 만일 구원을 받는데 침례가 필요하다면, 바울은 문자적으로 “나는 너희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을 감사하노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너희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 됩니다. 바울이 이러한 말을 했다면 전혀 믿기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말이 될 것입니다. 더욱이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때(고전 15:1-8), 침례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침례가 구원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면, 복음을 제시할 때 어떻게 침례에 대한 언급이 빠질 수 있겠습니까?

 

침례는 구원에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침례는 죄가 아니라 악한 양심으로부터 구원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 침례는 육체적인 정결 의식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공약임을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침례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의 마음과 삶에 이미 발생한 사건들을 상징합니다(롬 6:3-5; 갈 3:27; 골 2:12). 침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중요한 순종의 단계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침례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만든다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충분성을 공격하는 것이 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경은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난 모든 사람은 영원히 구원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생명이 아닌 영생을 선물로 받습니다(요 10:28). 거듭난 사람(요 3:3)은 "다시 태어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족(로마서 8:15)에 입양 된 후에 우리는 쫓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시면 반드시 그 일을 마치십니다(빌 1:6).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구원에 있어서 영원토록 안전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배도에 대한 강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고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에 관한 교리를 의심합니다. 결국 우리가 구원을 잃을 수 없다면, 왜 주님으로부터 떨어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아야 합니까? 이것은 좋은 질문입니다. 첫째, "배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배교자는 자신의 종교적인 믿음을 저버린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은 배교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고백했던 사람이지만 결코 진심으로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합니다. 그들은 신자인 것처럼 가장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자들은 요한일서 2장 19절이 말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참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배도한 자들은 단지 그들이 참된 신자가 아니며 결코 참된 신자였던 적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마 13:24-30)는 배교를 보여주는 간단한 예화입니다. 같은 밭에서 곡식과 ‘가라지’(잡초)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두 종류의 식물의 차이가 감지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잡초는 구별됩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오늘날 교회에도 참된 거듭난 신자들이 가짜 신자들과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말씀을 듣고 찬양과 친교도 나눕니다. 그러나 가짜 신자들은 결코 죄를 회개한 적이 없으며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적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 신자와 거짓 신자의 겉 모습은 똑같아 보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중심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9절(씨 뿌리는 자의 비유) 역시 배도에 대한 또 다른 예화입니다.

신자와 불신자라는 두 가지 유형의 종교인이 있기 때문에 성경은 배교에 대해 경고를 합니다. 교회에는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아는 자들과 종교 행위만 일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표를 붙이는 것이 마음의 변화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지적으로 동의할지라도 마음으로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며 사역을 하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지라도 여전히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마 7:21-23).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였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참조, 막 7:6).

하나님은 교회에 앉아서 매주 일요일에 불을 가지고 장난하는 가짜 신자에게 경고하십니다. 궁극적으로 가짜 신자는 배도할 것입니다. 그가 만일 회개하지 않는다면 과거에 공언했던 믿음을 저버릴 것입니다. 알곡 사이에 있는 가라지처럼 가짜 신자는 그 본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배도에 대해 경고하는 구절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을 이룹니다. 첫째, 그 구절들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구원을 확신하도록 권고합니다. 사람의 영원한 운명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해 보라고 말합니다.

참된 믿음에 대한 한 가지 시험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입니다(요일 4:7-8). 또 하나는 선행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 할 수 있지만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말과 행동과 교리에 있어서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순종의 정도와 영적 은사에 따라 열매 맺는 정도가 다양합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이 그들 안에서 열매를 생산하시기 때문에 열매를 맺습니다(갈 5:22-23).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그들의 구원의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요일 4:13). 마찬가지로 배도 역시 결국 그들의 거짓 열매를 통해(마 7:16-20) 또는 참 열매의 결핍(요 15:2)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배도에 대해 경고하는 두 번째 목적은 교회가 배도자들을 식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이단을 받아들이고, 육체의 본성으로 행함으로써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벧후 2:1-3).

그러므로 배교에 대한 성경의 경고는 진실로 믿음을 행사하지 않고 ‘믿음’의 모양 아래 있는 자들을 경고합니다. 히브리서 6장 4-6절, 히브리서 10장 26-29절과 같은 성경 구절들은 거짓 신자들에게 주는 경고로서 너무 늦기 전에 자신들을 점검하라고 요구합니다. 마태복음 7장 22-23절을 보면 주께서 심판의 날에 ‘거짓 신자들’을 거절하시는 것은 그들이 "믿음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결코 그들을 아신 적이 없기 때문임을 알려줍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가진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종교로서 기독교를 좋아하며 자신은 예수님과 교회에 속한다고 여기는 자들이 많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복을 원하지 않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도의 "비용을 계산"하라고 경고하십니다(눅 9:23-26; 14:25-33). 참된 신자는 비용을 계산하고 헌신한 자들입니다. 배교 자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한 때 믿음을 고백하였으나 배도한 사람은 단 한 번도 믿음을 소유한 적이 없었던 자들입니다. 그들의 입은 그들이 마음으로 믿는 것과 다른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배도는 구원의 손실이 아니라 과거의 거짓이 드러나는 증거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하나님은 죄를 임시적으로 덮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하고 완전한 희생을 예표하기 위해 동물 희생을 요구하셨습니다(레 4:54, 5:10).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에”(참조, 히 9:22) 동물 희생은 성경 전반에 걸쳐 중요한 주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옷을 지어 입히시기 위해 동물을 죽이셨습니다(창 3:21). 가인과 아벨은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쳤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양의 첫 새끼”(창 4:4-5)였기 때문에 받아들여졌지만 가인의 제물은 열매라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홍수가 물러난 후에 노아는 하나님께 동물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창 8:20-21).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일정한 절차에 따라 여러 가지 제사를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첫째, 동물은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둘째, 희생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그 동물과 동일시 되어야 했습니다. 셋째, 동물을 바치는 그 사람이 그 동물을 죽이는 일에 가담해야 했습니다. 믿음으로 이 일들이 행하여졌을 때, 그 희생은 일시적으로 죄를 가려주었습니다. 또 다른 희생 제사는 레위기 16장에 설명된 속죄일에 드려지는 제사로서 죄 사함과 죄의 제거를 보여줍니다. 대제사장은 두 마리의 숫염소를 가져다가 속죄 제물로 바쳤습니다. 염소 중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로 희생되었고(레 16 :15), 다른 염소는 광야로 보내어졌습니다(레 16:20-22). 속죄 제물은 죄 사함을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염소는 죄의 제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왜 더 이상 동물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궁극적이고 완전한 희생 제사이기 때문에 동물 희생은 끝이 났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하면서 이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당신은 ‘왜 동물이 희생되어야 하지? 동물이 무슨 잘못을 했나?’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동물들은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희생 제사를 드리는 그 사람을 대신하여 죽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잘못한 것이 없으시지만 기꺼이 인류의 죄를 위해 자신을 죽음에 넘기셨습니다(딤전 2:6).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고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에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것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동물 희생은 각 개인이 죄 사함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해 명하여졌습니다. 동물은 대속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죄인을 위해 대신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 제물은 단지 임시적인 것이라서 계속 반복적으로 드려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동물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멈추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영원히 드려진 궁극적인 대속 제물이었으며(히 7:27), 지금은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딤전 2:5). 동물 희생은 우리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였습니다. 동물의 희생이 죄의 용서를 제공할 수 있었던 유일한 근거는 동물 희생이 묘사하고 예표하는,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신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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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연령’에 대한 개념은 어린이들은 특정한 나이에 이를 때까지 자신의 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거나 또는 ‘책임연령’에 도달하기 전에 어린 아이가 사망하면 그 아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의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책임연령의 개념은 관연 성경적일까요? 이런 "순수한 연령" 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책임연령에 관한 토론에서 종종 잊는 것은 아이들이 아무리 어려도 죄가 없다는 의미에서의 ‘무죄’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비록 어떤 유아나 어린 아이가 개인적인 죄를 범하지 않았을지라도, 유아와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물려받은 죄와 전가된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유죄하다고 말합니다. 물려 받은 죄는 우리 부모로부터 전달되는 죄입니다. 시편 51편 5절에서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윗은 그가 잉태될 때부터 죄인이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가끔 영아들이 사망하는 슬픈 사건들은 아담의 죄로 인해 심지어 영아들마저 영향을 받는 것을 보여줍니다. 육체 및 영적인 죽음은 아담이 지은 원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유아이든 성인이든 각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유죄합니다. 각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럽혔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실 수 있고 또한 동시에 사람을 의롭다고 칭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또한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베드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언급합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선택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선택을 할 수 없는 아기와 어린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책임연령’의 개념은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에 죽는 아이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의해 저절로 구원을 받는다는 개념입니다. 책임연령 개념은 그리스도를 위할지 또는 거절할지를 결정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 죽게 될 경우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어린이가 성인이 된다는 유대인의 관습에 근거하여, 13살이 가장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책임연령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13살이 되면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가 된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아이들마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일단 그리스도를 위할지 또는 거절할지에 대한 믿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면 그 아이는 책임연령을 지난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5살의 어린 아이도 성인처럼 구원을 받고 거듭날 수 있다”라고 보았습니다.

위의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음 사실을 고려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에 충분합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은 “그(예수님)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죽음은 구체적으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간 사람들의 죄뿐만 아니라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 충분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죄를 사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은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그 속량을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허용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 국가와 주님 사이의 언약 관계에서 남자 아기는 출생 후 8일째에 할례 외에 다른 아무런 요구가 부과되지 않는 사실을 들어 책임연령과 언약 관계 사이에서 연결 고리를 찾기도 합니다(출 12:48-50; 레 12:3).

그렇다면 “옛 언약의 포괄적인 특성이 교회에 적용됩니까?”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39)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자녀’는 원어로 볼 때 “아들, 딸, 아이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2장 39절은 죄 사함은 장래 세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행 1:8). 하지만 이것이 공동체적으로 가족 또는 가정 구원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한 사람들의 자녀들 역시 회개를 해야 합니다.

책임 연령 주제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한 구절은 사무엘하 12장 21-23절입니다. 이 구절의 맥락은 다윗 왕이 밧세바와 간음 죄를 저지른 결과로 임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주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죄 때문에 그 아이가 죽게 될 것을 알려주기 위해 선지자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다윗은 나단의 통고를 듣고 슬픔으로 반응하며 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죽자 다윗은 슬픔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다윗의 종들은 이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들은 다윗 왕에게 물었습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다윗이 대답했습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다윗의 반응은 믿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주 안에서 안전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자신이 아이에게 갈 수는 있지만 아이를 다시 데려올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다윗은 이 지식으로 위로를 받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윗은 죽은 아이를 데려올 수는 없더라도 그 갓난 아이를 (천국에서) 볼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량을 믿을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적용하시는 것이 가능할지라도 성경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주제는 우리가 확정하거나 독단적으로 말하지 말아야 할 주제입니다. 믿을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속량을 적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일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의 입장은 자신들의 죄악된 상태와 구세주에 대한 필요성을 정신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기들이나 정신 장애자들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량을 적용하신다고 봅니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독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확신하는 바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거룩하시며 자비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은혜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고 선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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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책임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구원 계획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함께 연관되어지는지를 아십니다. 아마 다른 어떤 교리보다도 더, 이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과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너무 멀리 치우치는 것은 왜곡되게 구원을 이해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지를 아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로마서 8:29; 베드로전서 1:2). 에베소서 1:4은 하나님께서 “이 땅의 기초를 세우시기 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믿는 자들을 “택하신 자들”(로마서 8:33; 11:5; 에베소서 1:11; 골로새서 3:12; 데살로니가전서 1:4; 베드로전서 1:2; 2:9) 그리고 “택하심을 입은 자들”(마태복음 24:22, 31; 마가복음 13:20, 27; 로마서 11:7; 디모데전서 5:21; 디모데후서 2:10; 디도서 1:1; 베드로전서 1:1)로 묘사합니다. 믿는 자들은 미리 예정되었고(로마서 8:29-30; 에베소서 1:5,11), 구원을 위해 선택 되었다는 사실은 솔직히 분명합니다(로마서 9:11; 11:28; 베드로후서 1:10).

성경은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서 영접 할 책임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요한복음 3:16; 로마서 10:9-10). 하나님께서는 누가 구원받을 것인지를 아시고, 구원받을 자를 선택하시며, 그리고 우리는 구원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합니다. 유한한 인간의 생각으로 이 세가지가 어떻게 함께 연관되는 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로마서 11:33-36). 우리는 예견, 선택, 예정에 관한 부분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데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라는 교리에 가장 빈번하게 반대되는 것은 이것이 아마도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아무렇게 살아도 구원받았다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엄밀히 따져” 맞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맞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진정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지속적이고, 고의적인 죄로 특정 되어지는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사람은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의 차이점을 구별해야 합니다.

성경은 구원이 오직 은혜에 의해, 오직 믿음으로만 말미암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진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요한복음 3:16; 에베소서 2:8-9; 요한복음 14:6).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순간, 그 또는 그녀는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을 보장 받습니다. 구원이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행위로 유지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3에서 다음과 같이 물음으로써 이 문제를 지목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면, 우리의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 유지되고 보장됩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은 우리가 일을 하여 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일을 하여 그 구원을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유지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유다서 24절). 우리를 자신의 손아귀에서 단단히 붙잡고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요한복음 10:28-29).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로마서 8:38-39).

한 번 받은 구원의 보장에 대한 어떠한 부인도,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우리의 선한 행위들이나 노력에 의해 유지해야 한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이는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과는 완전히 상반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지, 우리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로마서 4:3-8).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또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에 충분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구원 전과 구원 후의, 우리의 모든 죄값을 치르기에 절대적으로 충분하였습니다(로마서 5:8; 고린도전서 15:3; 고린도후서 5:21).

이것이 기독교인은 자기가 원하는 데로 아무렇게나 살고도 여전히 구원 받았을 수 있다는 뜻인가요? 이 것은 질문 자체가 근본적으로 가상적입니다. 성경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지 않을 것이라는 걸 분명히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들입니다(고린도후서 5:17).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갈라디아서 5:22-23), 육체의 일을 맺지 않습니다(갈라디아서 5:19-21). 요한일서 3:6-9은 진실한 신자는 계속되는 죄 가운데 살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은혜가 죄를 촉진한다는 비난에 대응하여, 사도 바울은 표명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로마서 6:1-2).

구원의 영원한 보장은 죄를 지어도 된다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그 보다는,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보증된다는 사실의 보장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선물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죄에 대한 면죄부를 주었다는 것과는 정 반대적인 것을 성취합니다. 어느 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지불 하셨던 죄에 대한 대가를 알면서도 죄스러운 삶을 계속해서 살 수 있겠습니까(로마서 6:15-23)? 어느 누가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보증된 사랑을 이해하면서도 그 사랑을 도로 하나님의 면전에 집어 던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 그에게 죄를 지어도 되는 면죄부를 준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또는 그녀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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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해 들어 보았든” 안 들어 보았든 간에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하여(로마서 1:20)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전도서 3:11) 자신을 분명히 계시하셨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인류가 죄악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입니다(로마서 1:21-23).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악스러운 마음의 욕망에 빠질 것이고, 하나님을 떠난 삶이 얼마나 가치 없고 절망스러운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속해서 거부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로마서 1:24-32).

사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는 그들이 들었던 것, 그리고 자연 가운데 쉽게 보이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4:29은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라고 선포합니다. 이 구절은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찾는 자는 누구든지 그분을 찾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 알기를 갈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알리실 것입니다.

문제는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로마서 3:11). 사람들은 자연과 자신들의 마음에 드러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하고, 대신에 자신들이 만든 신을 숭배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한 어떤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공정성을 따지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 알리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이 지식을 거부하고 있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옥으로 벌하심이 정당하다고 말씀합니다.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자들의 운명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대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들이 복음을 확실히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마태복음 28:19-20; 사도행전 1:8). 우리는 사람들이 자연에 드러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우리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사람들이 그들의 죄들로부터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분리된 영원으로부터 구조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면, 우리는 끔찍한 문제에 빠질 것입니다.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자가 구원 받는다면, 우리는 누구도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하게끔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이 논리적입니다. 우리가 범할지도 모르는 최악의 것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또는 그녀가 그것을 거부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 또는 그녀는 정죄 받을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정죄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다면 복음 전도의 동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전에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었기 때문에 구원 받았던 사람들을 무엇 때문에 굳이 복음을 듣고 거부하게 만들어 그들 자신들을 정죄받게 하는 위험을 감수하려 합니까?

-Got Questions Ministries

인간의 타락 이후, 구원의 근거는 항상 그리스도의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 이전이나 이후나, 세계의 역사에서 중심이 되는 이 하나의 사건이 없었었다면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약 시대 성도들의 과거의 죄들과 신약 성경 성도들의 미래의 죄들에 대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구원의 필요조건은 항상 믿음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구원에 대한 대상은 항상 하나님이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기록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편 2:12). 창세기 15:6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이를 하나님은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로마서 4:3-8도 참조). 히브리서 9:1-10:4에서도 분명히 가르치듯이, 구약시대의 희생 제사 제도는 죄를 제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악스러운 인류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실 날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변한 것은 믿는 자들이 믿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무엇이 믿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그 시점까지 인간에게 그분이 주신 계시의 양에 기초합니다. 이를 점진적인 계시라고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에서 하신 약속, 즉, 여자의 후손이 사탄을 이길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가 하와에게 이름을 명명함으로써 입증하였고(20절) 주 하나님께서는 가죽 옷으로 그들을 가려주심으로써 바로 자신의 수락함을 나타내셨습니다(21절). 그 시점에서는, 그것이 아담이 알았던 전부였으나, 그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과 15장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들과 새로운 계시에 따라 그분을 믿었습니다. 모세 이전에는 성경이 쓰여지진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나타내 보이신(계시하신) 것들에 대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 믿는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그들의 죄의 문제를 처리하실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뒤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의 죄들을 해결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요한복음 3:16; 히브리서 9:28).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셨고, 십자가와 부활 사건 전에 믿었던 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무엇을 믿었을까요?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셨다는 전체적인 그림을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사역이 끝날 무렵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태복음 16:21-22). 이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16:22).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이처럼 온전한 진리를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것을 성취하실지, 아담, 아브라함, 모세 또는 다윗이 알았던 것보다 더 정확히 아는 바가 없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전에 살았던 사람들 보다 더 많은 계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체적인 그림을 압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브리서 1:1-2). 우리의 구원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죽음에 근거하고, 우리의 믿음도 여전히 구원을 위한 필수조건이며, 그리고 우리 믿음의 대상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를 위한, 우리 믿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을 위해 죽으셨던 것과, 그분께서 장사되셨던 것과, 그리고 삼 일만에 부활하셨던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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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들이라고 가르칩니다(로마서 3:9-18, 3:23).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로마서 6:23은 말씀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 구절은 몇 가지 가르침을 줍니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죽을 것이고 우리의 죄들에 대한 대가로 지옥에서 영원을 보낼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망(죽음)은 “분리”를 뜻합니다. 모든 사람은 죽을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천국에서 살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히 지옥에서 삶을 살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지옥에서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두 번째 것은 영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대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되셨을 때 그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악의 삶들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십자가위에 놓여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 그분께서 우리를 자신으로 대체하셨고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마땅할 것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5:21).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베드로전서 2:24). 여기서 다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값을 치르기 위해 그분 자신께서 우리가 범했던 죄들을 짊어 지셨다는 것을 봅니다. 몇 구절 뒤에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베드로전서 3:18). 이 구절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에 관해서 우리를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속죄물이셨다는 것 또한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그분께서 인간의 사악함에 요구되는 대가를 충족시키셨다는 의미입니다.

대속에 관해 말하는 또 다른 구절은 이사야 53:5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언은 매우 상세하며, 십자가의 처형은 미리 예언한 것과 똑 같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형벌을 받고 영원토록 지옥에 있어야만이 우리 자신에 대한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값을 치르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우리의 죄들이 용서 받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뿐만 아니라, 그분과 영원히 함께할 기회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셨던 일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짊어지시는 대체자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곳에서 구원의 확신을 찾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독교적 삶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우리 삶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 우리의 영적 성장, 선행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함에서 구원의 확신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구원의 증거는 될 수 있지만, 우리는 이를 구원에 대한 확신의 기반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객관적 진실에 근거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관적인 경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표하신 약속에 근거해서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신뢰해야 합니다.

어떻게 당신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5:11-13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아들이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요한복음 1:12). 당신은 잠시가 아닌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구원을 확신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독교 삶을 살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매일 궁금해하고 염려하면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구원의 계획을 그렇게 분명하게 세운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요한복음 3:16; 사도행전 16:3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로마서 10:9). 당신은 당신의 죄를 회개했습니까? 당신은 예수님께서 당신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까(로마서 5:8; 고린도후서 5:21)? 당신은 구원받기 위해 오로지 그분만을 믿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당신이 “네”라고 한다면,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확신은 의심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취함으로써, 영원히 구원받았다는 현실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당신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확실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29).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한 것입니다. 심지어 당신 자신을 포함해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을 당신으로부터 뺏을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편 119:11)의 하나님 말씀은 의심의 죄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에 기뻐하십시오: 의심 대신,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절대 의심받아서는 안될 것이라는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완전하고 온전한 구원에 근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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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세주로 알게 되는 때, 그들은 그들의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유다서 24은 공표합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하나님의 능력은 믿는 자가 넘어지지 않게 붙드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하심 앞으로 우리를 바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우리의(구원에 대한)영원한 보장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신 결과이지,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관리한 결과가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표하셨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29). 예수님과 하나님 두 분 모두 우리를 그분들의 손 안에 꽉 붙잡고 계십니다. 어느 누가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의 움켜쥠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겠습니까?

에베소서 4:30은 믿는 자들이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 없다면, 인치심은 실제로 구속 때까지가 아닌, 오직 죄를 짓고 배교할 때까지, 아니면 불신할 때까지만 유효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3:15-16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가질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람이 영생을 약속 받고는, 다시 빼앗긴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영원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원한 보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성경에 나와 있는 영생의 약속들은 잘못된 것일 겁니다.

영생의 보장에 관한 가장 강력한 논증은 로마서 8:38-39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의 구원에 대한 영원한 보장은 하나님의 구원하신 자들에 대한 사랑에 근거합니다. 우리 구원의 영원한 보장은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값이 치러진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 약속 된 것이며, 성령님에 의해 인치심을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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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일까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세주로 알게 될 때, 영원히 안전하게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은 이 사실을 표명합니다. (a) 로마서 8:30은 표명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순간부터, 우리가 천국에서 그분의 임재하심 안에 영화롭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믿는 자들이 언젠가 영화롭게 되는 것을 아무 것도 막을 수 없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그렇게 되는 것을 이미 목적하셨기 때문입니다. 한번 사람이 의롭게 되면, 그의 구원은 보장됩니다. 천국에서 이미 영화롭게 된 것처럼 안전합니다.

(b) 바울은 로마서 8:33-34에서 두 가지 중요한 질문들을 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하나님께 선택 받은 사람들을 고소할 것입니까? 아무도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간구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아무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분, 그리스도께서 만이 정죄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세주로서 간구자와 심판자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3. 믿는 자들은 그들이 믿을 때 거듭납니다(다시 태어남)(요한복음 3:3; 디도서 3:5). 기독교인이 구원을 잃는다면, “다시 태어나지 않았어야” 됩니다. 성경은 새로운 탄생이 박탈 될 수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d) 성령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 안에 거하고(요한복음 14:17; 로마서 8:9) 모든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드는 세례를 주십니다(고린도전서 12:13). 믿는 자가 다시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면, 성령님께서 그에게 “거하지 않으시고” 그는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야 됩니다.

(e) 요한복음 3:15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오늘 믿고 영생을 얻었는데, 내일 그것을 잃는다면, 그것은 전혀 “영원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당신의 구원을 잃는다면 성경에 있는 영생에 대한 약속들은 잘못된 것이 됩니다. (f) 가장 결정적인 주장으로 성경 자체가 이를 가장 잘 말씀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당신을 구원하셨던 하나님과 당신을 지켜주실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한번 구원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가장 확실하게 영원히 보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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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질문은 모든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일 것입니다. 이 질문은 종교개혁과 개신교, 카톨릭 교회가 분리된 동기입니다. 이 질문의 본질은 성경적인 기독교와 대부분의 ‘기독교’ 이단 종파들을 핵심적으로 다르게 만듭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믿음과 그에 더해진 행위에 의한 것인가? 나는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구원 받았는가 아니면 예수을 믿는 것 외에 어떤 것들을 해야 하나?

오로지 믿음이냐 아니면 믿음과 그에 더해진 행위냐의 문제는 일부 조화되기 힘든 성경 구절들 때문에 어렵게 보입니다. 로마서 3:28, 5:1 과 갈라디아서 3:24을 야고보서 2:24과 비교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바울(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과 야고보(믿음과 행위로 얻는 구원)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바울이 오직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고 독단적으로 말하는 반면(에베소서 2:9), 야고보는 믿음과 그에 더해진 행위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이 분명하게 보이는 문제는 야고보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를 검토함으로써 답해집니다. 야고보는 사람이 선한 행위들을 동반함이 없이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에 반박하고 있습니다(야고보서 2:17-18). 야고보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정한 믿음은 변화된 삶과 선한 행위들을 가져온다는 점을 강조하고 하고 있습니다(야고보서 2:20-26). 야고보는 의롭게 되는 것이 믿음과 그에 더해진 행위들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진정 의롭게 된 자는 삶에 있어 선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믿는 자라고 하면서, 삶 가운데 아무런 선한 일을 맺지 못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한 믿음을 갖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야고보서 2:14, 17, 20, 26).

바울도 자신의 글에서 동일하게 말합니다. 믿는 자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가져야 하는 좋은 열매들이 갈라디아서 5:22-23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해서 구원받았음을 말하고 난 바로 뒤에(에베소서 2:8-9), 바울은 우리가 선한 일들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알려줍니다(에베소서 2:10). 바울도 야고보 만큼이나 우리의 변화된 삶을 기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야고보와 바울은 구원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에서 의견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같은 주제를 다른 시각에서 접근한 것입니다. 야고보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정한 믿음은 선한 행위들을 맺는다는 사실을 강조한 반면, 바울은 단지 오직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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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를 느끼십니까? 육체적인 배고픔이 아니라, 당신의 삶 가운데 채워지지 않는 빈 자리가 있습니까? 당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5).

혼란스러우십니까? 당신이 삶의 방향이나 목적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보입니까? 누군가가 불을 껐는데 당신이 그 스위치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보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

당신은 인생이 잠겨있는 것 같이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아주 많은 문들을 열어 보았으나, 그 문들 너머에서 허무하거나 의미 없는 것만을 발견하셨습니까? 충만한 삶으로 가는 입구를 찾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한복음 10:9).

다른 사람들이 항상 당신을 실망시킵니까? 당신의 인간관계가 가볍고 알맹이가 없이 유지되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항상 당신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 같이 보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한복음 10:11, 14).

당신은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합니까? 오직 썩거나 부패될 것들을 위해 당신의 삶을 사는데 지쳤습니까? 때때로 삶에 의미가 있는지 의심합니까? 죽은 뒤에도 살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11:25-26).

무엇이 길입니까? 무엇이 진리입니까? 무엇이 생명입니까? 예수님께서 답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당신이 느끼는 배고픔은 영적인 배고픔이고, 그것은 오직 예수님께서만이 채울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께서만이 어두움을 걷어낼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께서만이 만족하는 삶으로 인도하는 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당신이 찾고 있는 친구이자 목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이십니다(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길이십니다.

당신이 굶주림을 느끼고, 어두움 가운데 길을 잃은 것 같으며, 또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이유는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를 범하였기에,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전도서 7:20; 로마서 3:23). 당신이 마음속에 느끼는 빈 공간은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갖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 때문에 그 관계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훨씬 더 나쁜 점은, 우리의 죄가 지금과 다음 삶 모두에 있어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것이라는 사실입니다(로마서 6:23; 요한복음 3:36).

어떻게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길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님 자신께서 짊어지셨습니다(고린도후서 5:21).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로마서 5:8). 그리고 삼일 후,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입증하셨습니다(로마서 6:4-5). 왜 그리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질문에 친히 답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죄값의 지불이라는 사실을 신뢰하며, 예수님께 우리의 믿음을 드리면,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되고 씻기어 깨끗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 굶주림은 만족됩니다. 빛이 켜집니다. 충만한 삶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참되고 가장 좋은 친구이자 선한 목자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뒤에도 천국에서 영원히 예수님과 함께 하는 부활의 삶을 가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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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천국을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이 배타적인 말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귀에는 거슬리게 들릴 수도 있으나 사실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 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도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요한복음 14:6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많은 길들 가운데 하나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평판, 업적, 특별한 지식, 또는 개인적인 경건함에 상관없이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 올 자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천국을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이유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세주로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으셨습니다(베드로전서 2:4).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신 유일한 분이십니다(요한복음 3:13). 그분께서는 완전한 인간의 삶을 산 유일한 분이십니다(히브리서 4:15). 그분께서는 죄에 대한 유일한 속죄의 제물이십니다(요한일서 2:2; 히브리서 10:26). 예수님만이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7).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멸한 유일한 분이십니다(히브리서 2:14-15). 그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이십니다(디모데전서 2:5). 그분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신"(빌립보서 2:9)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요한복음 14:6 외에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21-27에서 믿음의 대상으로서 자기 자신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말씀이 생명이라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3:14-15). 그분께서는 양의 문이고(요한복음 10:7), 생명의 떡이며(요한복음 6:35), 부활이십니다(요한복음 11:25). 그 어떤 다른 누구도 이러한 명칭들을 당연하게 주장할 수 없습니다.

사도들의 설교는 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산 헤드린 공회를 향해 예수님만이 천국을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분명하게 선포하였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사도행전 4:12). 바울은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서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콕 짚어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사도행전 13:38-39). 요한은 전반적인 교회들에 글을 쓰면서 우리의 죄 사함의 근거로 유일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명시합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요한일서 2:12).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천국에서의 영생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으려면 우리는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죄에 대한 죄값으로서 죽으신 십자가에서의 예수님과 그분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로마서 3:22).

예수님 사역의 어느 시점에서 많은 군중들이 그분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구원자를 찾으려는 희망으로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요한복음 6:67) 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정확한 답을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한복음 6:68-69). 영생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다는 베드로의 믿음을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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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와 헬라어로 "책"을 의미하며, 이에 성경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책이기 때문에 잘 맞는 이름입니다. 성경은 다른 그 어떤 책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또한 독특한 부류의 책입니다.

66 개의 서로 다른 책이 성경을 구성합니다. 성경은 레위기, 신명기와 같은 율법 책, 에스라와 사도행전과 같은 역사적인 책들, 시편과 전도서와 같은 시가서, 이사야와 계시록과 같은 예언서, 마태와 요한과 같은 전기서, 그리고 디도서와 히브리서와 같은 서신서들(공식 편지)을 포함합니다.

성경은 무엇인가? - 저자들

성경은 대략 40 명의 다른 저자들에 의해 약 1500 년 동안 쓰여졌습니다. 저자들로는 왕, 어부, 제사장, 공무원, 농부, 목자 및 의사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주제가 섞여 있으면서 놀라운 통일성을 이룹니다.

성경의 통일성은 궁극적으로 한 분의 저자, 곧 하나님 자신으로 인하여 기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딤후 3:16). 인간 저자들은 하나님이 기록하기를 원하셨던 것을 정확하게 기록했으며, 이에 완전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시 12:6, 벧후 1:21).

성경은 무엇인가? – 분류

성경은 구약과 신약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구약은 ‘한 나라’의 이야기이며 신약은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나라는 그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데려 오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창립과 보존에 대해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용하여 온 세상을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2-3). 이스라엘이 나라로 세워지자, 하나님은 그 나라 내에서 한 가문을 일으키셨습니다. 바로 다윗의 가문입니다(시 89:3-4). 그 후 다윗의 가문으로부터 약속된 복을 가져올 그분이 약속되었습니다(사 11:1-10).

신약은 약속된 그 사람의 오심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그분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분은 완전한 삶을 살았고, 구주가 되기 위해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은 무엇인가? - 중심 인물

예수님은 성경의 핵심 인물입니다. 성경 전체가 사실 그분에 관한 것입니다. 구약은 그분의 오심을 예언하고 그분이 세상에 오실 수 있도록 무대를 마련합니다. 신약은 죄 많은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기 위한 그분의 오심과 사역을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인물 그 이상입니다. 사실 그분은 사람 그 이상입니다. 그분은 육신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오심은 세상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분이 누구신지 우리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요 1:14; 14:9).

성경은 무엇인가? - 요약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를 완벽한 환경에 두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뜻에서 벗어나 타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세상을 저주 아래 두셨지만 즉각적으로 인류와 모든 피조물을 원래의 영광으로 회복시키는 계획을 추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속의 계획의 일환으로 아브라함을 바빌론에서 불러내시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주전 2000 년경).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인 야곱(이스라엘이라고도 불림)에게 그들의 한 후손을 통해 세상을 축복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족은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한 나라로 성장하였습니다.

주전 1400년경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세의 지시 아래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후 그들이 소유하도록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주변 국가의 우상 숭배를 따르지 않으면 그들은 번영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라간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약 400 년 후,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통치 기간에 이스라엘은 크고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솔로몬에게 그들의 한 후손이 영원한 왕으로 통치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솔로몬의 통치 후에 이스라엘 국가는 분열되었습니다. 북쪽에 있는 열 지파는 "이스라엘"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상 숭배로 인하여 그들을 심판하기 전까지 약 200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앗시리아는 주전 721 년에 이스라엘을 점령했습니다. 남쪽에 있는 두 지파는 "유다"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조금 더 오래 지속되었지만, 결국 그들 또한 하나님을 저버렸습니다. 바빌론은 주전 600 년경에 그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약 70년 후, 하나님은 포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을 그들의 본래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수도 예루살렘은 기원전 444 년경에 재건되었으며, 이스라엘은 다시 한번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구약은 끝이 납니다.

그 후 약 400 년이 지난 뒤에 신약은 베들레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된 그 후손이었습니다. 그 후손은 인류를 구속하고 창조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충실하게 그분의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분은 죄를 위해 죽으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온 세상과의 새 언약(유언)을 위한 바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죄에서 구원을 얻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보내시며 그분의 삶과 구원의 권세를 온 세상에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방으로 나아가 예수님과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들은 소아시아, 그리스 및 모든 로마 제국을 다녔습니다. 신약 성경은 믿지 않는 세상을 심판하고 모든 피조물을 저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며 마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