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이 아닌 자신의 몸을 드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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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0 18:38
영혼의 양식 91-09호 1991.03.03.
성서일과 ; 출 20:1-17, 고전 1:22-25, 요 2:13-22.
제목 ; 짐승이 아닌 자신의 몸을 드려라
어저께 우리는 이도식 권사의 간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은혜 받은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저는 특히 달게 자는 아내의 얼굴을 때렸다고 하는 부분이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술먹고 방탕하며 살던 이도식씨가 하루는 악몽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소가 나타나서 자기 얼굴을 짓밟는가 하면, 여러 다른 짐승들이 계속 나타나서 잡아먹을 듯이 괴롭히더라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 깨어 일어났다가 다시 잠을 청하면, 짐승은 다시 나타나서 자신을 괴롭히더라는 것입니다. 밤새 악몽에 시달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는데, 자기 아내는 코를 골면서 신나게 자고 있었습니다. 괜스레 심술이 난 이도식씨는 냅다 아내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갈겼다고 합니다. 잠자다가 따귀를 맞고 깜짝 놀라 일어난 아내가 “왜 따귀를 때리느냐?” 고 물었을 때에, 이도식씨는 할 말이 없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왜 때렸는지, 그 이유를 추궁하는 아내에게 둘러댈 핑계가 없는지라 사실대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잠을 자려고 하면 짐승이 나타나서 괴롭히는 바람에 고통을 겪고 있는데,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심통이 나서 때렸노라고 말입니다. 아내가 그때 말하기를, “그것은 당신이 죄를 지어서 그러니, 내게 그 잘못을 털어놓게 되면 잠을 잘 잘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도식씨는 악몽에 워낙 시달린지라, 자기가 어떤 잘못을 하게 되었는지를 털어 놓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여자를 만나서 살림을 차릴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래서 그 여자와 다방을 운영하기로 하고 이미 50만원을 건네주었노라, 그리고 다방을 운영하기 위하여 땅을 판 이야기 등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내의 얼굴은 창백해져서 무척 당황해 하는 모습을 감추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을 전도하려고 애쓰던 아내는 아무말 없이 기도를 한 후 다시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이도식씨도 잠을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짐승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잠을 잘 잘 수 있었노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이도식씨의 아내였다고 한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자기 남편이, 또는 자기 아내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노라는 고백을 들었을 때에 그냥 조용히 기도만 할 수 있겠는지요?
(고전 1:24)의 말씀에, “믿는 사람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지혜 된다” 고 했습니다. 이도식씨의 아내는, 믿는 그 힘으로 자신에게 닥친 시험 이겨냈고, 또한 믿음의 지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도식씨의 아내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바탕 싸움을 벌렸을 것이고, 어쩌면 서로 갈라서는 극한 상황에까지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십계명은, 한 마리도 말해서 “관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고 이웃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법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5계명에서 10계명 까지는 이웃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만을 그 관계가 악화되어 끊어질 위기에 처하게 되면, 대신 짐승이 죽어지는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잘못한 것을 짐승이 그 죄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짐승과 함께 마음까지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중에는 마음은 드리지 아니하고, 짐승만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를 치우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좋은 관계로 회복되지를 아니하고, 더욱 악화되어 갔습니다. 도저히 자기 잘못을 깨달을 줄 모르는 사람들,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웃형제에게 그 잘못을 뒤집어 씌우는 버릇만 늘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얼마든지 심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지만, 하나님 자신마저 인간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를 생각하면 금방 멸망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심판을 보류하고 구원의 방법을 찾아내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짐승이 아닌 자기 자신을 재물로 삼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행위입니다. 다시 한번 성경 말씀을 보면, (고전 1:18)에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나님의 힘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도식씨의 아내가, 믿는 믿음으로 힘으로 참아내지 아니하였으면, 오늘의 변화된 이도식 권사는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도식 권사의 아내인 최집사가 십자가에 자기 몸을 매다는 아픔을 겪어냄으로써, 하나님께는 참 예배를 드리고 자신과 남편, 그리고 가정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전 1:25)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해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하다” 고 했습니다.
결국 오늘의 말씀은, 사람이 구원을 받아 복된 길을 가려면 바로 자기 자신이 죽어지는 희생이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모든 문제의 해결은 나 자신이 손해를 보고 참아내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진리를 잘 드러내주는 표상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곧 “내가 손해를 보고 참는다는 것” 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어리석어 보이지만, 믿는 우리에게는 그 길이 하나님의 큰 능력이 되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임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려야 참된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방법을 믿고 행하는 것, 이것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제사는 없습니다. 이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여러 방법으로 축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1. 거짓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요 4:23)에,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참된 예배란, 물질만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바클레이가 말하고 있는 거짓된 예배를 살펴봄으로써 참된 예배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거짓된 예배란,
①하나님께 대해 알고 싶은 것만 취하고 원치 않는 것은 지나쳐 버리는 경우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 맞는 진리만 취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성경귀절만 찾아서 인용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무성의하게 말씀을 듣거나 예배드리는 것은 거짓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②무식한 예배를 말합니다. 이성을 무시한 경우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그 뜻을 이루어 사는 일이 신앙일진데, 이 대원칙을 무시하고, 믿음생활에서 뿐만 아니고 믿음 밖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이상한 현상을 가지고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인양 호들갑을 떨며 반지성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이 비치어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고 왜 예배를 드리는지 그 목적을 상실한 채 무조건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봉사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예배는 무식한 예배요, 거짓된 예배입니다.
③미신적인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위험한 일이 생길까봐 예방으로 드리는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기쁨과 감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두려운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 인간의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께 경배를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뵙고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이처럼 경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만나 뵙고 말씀을 들음으로써, 우리는 풍성한 삶을 누립니다. 풍성한 삶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만 가능합니다. 결국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나아가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기심이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또 다른 노략질을 일삼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요 2:13-22)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려면 예루살렘 성전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화로, 제사장들이 장사를 해서 막대한 이득을 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두 가지 큰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의 아름으로 도적질을 하는 죄를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짐승을 잡아 제물을 드리거나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먼데서 오려면 짐승을 끌고 오기가 힘드니까 성전 가까이에서 짐승을 사서 바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판매권을 제사장이 가지고 있어서 짐승을 엄청나게 비싸게 팔아 부당 이익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고 하시면서 채찍으로 양과 소를 몰아내고 장사하는 좌판들을 둘러 엎으셨던 것입니다. 결국은 예배를 드리는 신앙행위가, 자기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결단과 헌신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거짓예배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앞에 바로 서서, 거짓된 부분을 고쳐 바른 인간의 모습을 되찾아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반대로 거짓을 하나 더 추가하는 잘못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세상생활을 하는데 보탬이 되게 하기 위하여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것이 귀한 줄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살이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예수 믿는 척 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늘 세상 복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복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복과 하나님나라 복은 결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나라 복은 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여러분모두, 하나님 나라 복을 많이 받으시기 빕니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복은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인한 구원입니다. 이 구원의 길을
2.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열어 주셨습니다.
형식적인 예배가 아닌, 참된 예배의 모범을 예수를 통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물질만 드리고 마는 거짓예배가 아니라,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묶어서 드리는 예배를 예수님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십계명 중 제 1계명인,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 는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 인간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호와하나님 말고 다른 신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살아있는 신이십니다. 사람들이 섬기고 있는 다른 신들은 죽어있는 신입니다. 그런 신들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자존자이시며 인간을 만드신 분입니다.
모든 생활의 첫 출발은 하나님께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질서가 깨집니다. 순서가 뒤바뀌면 혼란과 무질서가 옵니다. 하나님은 영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방황을 합니다. 인간의 모든 비밀이,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이치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바로 안겨야 인간은 복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자기 몸과 마음을 드리는 진정한 예배가 없이는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2:1)의 말씀에서도,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구세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된다고 (고전 1:24)에서 바울 선생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엇이 구세주가 되고 능력과 지혜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다른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희생과 섬김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 순종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희생과 섬김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내가 죽어지고 손해보며 섬기는 일이 가장 큰 힘이 되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인간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3. 십자가의 길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한결같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고, 영적인 참된 예배를 드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의 요지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만이 우리가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느냐? 십자가의 길입니다. 내 이익이나 내 생각을 앞세우게 되면, 전혀 하나님과는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가 없게 됩니다.
처음에 유대백성이 하나님께 제물이나 예물을 드릴 때에는 짐승이든지 곡식이든 간에 제일 첫 것을 드리는 것이 법도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인간의 편의를 생각하다 보니 성전에서 짐승이나 곡식을 사서 바쳤던 것입니다. 요즘 편리하다고 해서 잔치 음식을 집에서 준비하지 않고 음식점에서 대접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과 정성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몸과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되 십자가의 정신을 가지고 영적으로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첫째는 영적으로 참되게 드려야 합니다. 물질만 드리는 거짓된 예배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과 물질은 드리지 아니하고 마음으로만 예배드릴 수도 없습니다. 마음의 표현이 시간과 물질에 나타납니다만, 마음과 정성이 없는 헌신 또한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되 정성껏 드리시기 바랍니다. 물질을 드리되 가장 귀한 것을 구별하여 드릴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웃과 마음을 교환하는 일입니다. 내 마음을 이웃에게 줄 수 있고, 또한 이웃의 마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는 참 예배가 됩니다. 십계명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의 관계를 말하고 있고,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이웃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나 이웃과의 관계는 십자가의 정신이 깃들어야 바른 관계가 됩니다.
십자가의 정신이란, 내 몸과 내것을 아끼지 않고 바칠 수 있는 마음과 생각입니다. 억울하게 빼앗긴다 할지라도 분노하지 않는, 참고 견디는 마음이 십자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정신을 지님으로써 거룩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
성서일과 ; 출 20:1-17, 고전 1:22-25, 요 2:13-22.
제목 ; 짐승이 아닌 자신의 몸을 드려라
어저께 우리는 이도식 권사의 간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은혜 받은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저는 특히 달게 자는 아내의 얼굴을 때렸다고 하는 부분이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술먹고 방탕하며 살던 이도식씨가 하루는 악몽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소가 나타나서 자기 얼굴을 짓밟는가 하면, 여러 다른 짐승들이 계속 나타나서 잡아먹을 듯이 괴롭히더라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 깨어 일어났다가 다시 잠을 청하면, 짐승은 다시 나타나서 자신을 괴롭히더라는 것입니다. 밤새 악몽에 시달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는데, 자기 아내는 코를 골면서 신나게 자고 있었습니다. 괜스레 심술이 난 이도식씨는 냅다 아내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갈겼다고 합니다. 잠자다가 따귀를 맞고 깜짝 놀라 일어난 아내가 “왜 따귀를 때리느냐?” 고 물었을 때에, 이도식씨는 할 말이 없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왜 때렸는지, 그 이유를 추궁하는 아내에게 둘러댈 핑계가 없는지라 사실대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잠을 자려고 하면 짐승이 나타나서 괴롭히는 바람에 고통을 겪고 있는데,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심통이 나서 때렸노라고 말입니다. 아내가 그때 말하기를, “그것은 당신이 죄를 지어서 그러니, 내게 그 잘못을 털어놓게 되면 잠을 잘 잘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도식씨는 악몽에 워낙 시달린지라, 자기가 어떤 잘못을 하게 되었는지를 털어 놓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여자를 만나서 살림을 차릴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래서 그 여자와 다방을 운영하기로 하고 이미 50만원을 건네주었노라, 그리고 다방을 운영하기 위하여 땅을 판 이야기 등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내의 얼굴은 창백해져서 무척 당황해 하는 모습을 감추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을 전도하려고 애쓰던 아내는 아무말 없이 기도를 한 후 다시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이도식씨도 잠을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짐승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잠을 잘 잘 수 있었노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이도식씨의 아내였다고 한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자기 남편이, 또는 자기 아내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노라는 고백을 들었을 때에 그냥 조용히 기도만 할 수 있겠는지요?
(고전 1:24)의 말씀에, “믿는 사람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지혜 된다” 고 했습니다. 이도식씨의 아내는, 믿는 그 힘으로 자신에게 닥친 시험 이겨냈고, 또한 믿음의 지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도식씨의 아내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바탕 싸움을 벌렸을 것이고, 어쩌면 서로 갈라서는 극한 상황에까지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십계명은, 한 마리도 말해서 “관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고 이웃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법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5계명에서 10계명 까지는 이웃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만을 그 관계가 악화되어 끊어질 위기에 처하게 되면, 대신 짐승이 죽어지는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잘못한 것을 짐승이 그 죄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짐승과 함께 마음까지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중에는 마음은 드리지 아니하고, 짐승만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를 치우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좋은 관계로 회복되지를 아니하고, 더욱 악화되어 갔습니다. 도저히 자기 잘못을 깨달을 줄 모르는 사람들,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웃형제에게 그 잘못을 뒤집어 씌우는 버릇만 늘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얼마든지 심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지만, 하나님 자신마저 인간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를 생각하면 금방 멸망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심판을 보류하고 구원의 방법을 찾아내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짐승이 아닌 자기 자신을 재물로 삼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행위입니다. 다시 한번 성경 말씀을 보면, (고전 1:18)에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나님의 힘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도식씨의 아내가, 믿는 믿음으로 힘으로 참아내지 아니하였으면, 오늘의 변화된 이도식 권사는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도식 권사의 아내인 최집사가 십자가에 자기 몸을 매다는 아픔을 겪어냄으로써, 하나님께는 참 예배를 드리고 자신과 남편, 그리고 가정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전 1:25)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해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하다” 고 했습니다.
결국 오늘의 말씀은, 사람이 구원을 받아 복된 길을 가려면 바로 자기 자신이 죽어지는 희생이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모든 문제의 해결은 나 자신이 손해를 보고 참아내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진리를 잘 드러내주는 표상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곧 “내가 손해를 보고 참는다는 것” 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어리석어 보이지만, 믿는 우리에게는 그 길이 하나님의 큰 능력이 되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임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려야 참된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방법을 믿고 행하는 것, 이것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제사는 없습니다. 이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여러 방법으로 축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1. 거짓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요 4:23)에,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참된 예배란, 물질만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바클레이가 말하고 있는 거짓된 예배를 살펴봄으로써 참된 예배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거짓된 예배란,
①하나님께 대해 알고 싶은 것만 취하고 원치 않는 것은 지나쳐 버리는 경우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 맞는 진리만 취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성경귀절만 찾아서 인용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무성의하게 말씀을 듣거나 예배드리는 것은 거짓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②무식한 예배를 말합니다. 이성을 무시한 경우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그 뜻을 이루어 사는 일이 신앙일진데, 이 대원칙을 무시하고, 믿음생활에서 뿐만 아니고 믿음 밖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이상한 현상을 가지고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인양 호들갑을 떨며 반지성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이 비치어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고 왜 예배를 드리는지 그 목적을 상실한 채 무조건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봉사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예배는 무식한 예배요, 거짓된 예배입니다.
③미신적인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위험한 일이 생길까봐 예방으로 드리는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기쁨과 감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두려운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 인간의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께 경배를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뵙고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이처럼 경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만나 뵙고 말씀을 들음으로써, 우리는 풍성한 삶을 누립니다. 풍성한 삶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만 가능합니다. 결국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나아가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기심이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또 다른 노략질을 일삼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요 2:13-22)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려면 예루살렘 성전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화로, 제사장들이 장사를 해서 막대한 이득을 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두 가지 큰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의 아름으로 도적질을 하는 죄를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짐승을 잡아 제물을 드리거나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먼데서 오려면 짐승을 끌고 오기가 힘드니까 성전 가까이에서 짐승을 사서 바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판매권을 제사장이 가지고 있어서 짐승을 엄청나게 비싸게 팔아 부당 이익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고 하시면서 채찍으로 양과 소를 몰아내고 장사하는 좌판들을 둘러 엎으셨던 것입니다. 결국은 예배를 드리는 신앙행위가, 자기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결단과 헌신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거짓예배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앞에 바로 서서, 거짓된 부분을 고쳐 바른 인간의 모습을 되찾아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반대로 거짓을 하나 더 추가하는 잘못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세상생활을 하는데 보탬이 되게 하기 위하여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것이 귀한 줄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살이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예수 믿는 척 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늘 세상 복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복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복과 하나님나라 복은 결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나라 복은 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여러분모두, 하나님 나라 복을 많이 받으시기 빕니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복은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인한 구원입니다. 이 구원의 길을
2.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열어 주셨습니다.
형식적인 예배가 아닌, 참된 예배의 모범을 예수를 통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물질만 드리고 마는 거짓예배가 아니라,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묶어서 드리는 예배를 예수님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십계명 중 제 1계명인,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 는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 인간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호와하나님 말고 다른 신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살아있는 신이십니다. 사람들이 섬기고 있는 다른 신들은 죽어있는 신입니다. 그런 신들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자존자이시며 인간을 만드신 분입니다.
모든 생활의 첫 출발은 하나님께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질서가 깨집니다. 순서가 뒤바뀌면 혼란과 무질서가 옵니다. 하나님은 영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방황을 합니다. 인간의 모든 비밀이,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이치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바로 안겨야 인간은 복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자기 몸과 마음을 드리는 진정한 예배가 없이는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2:1)의 말씀에서도,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구세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된다고 (고전 1:24)에서 바울 선생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엇이 구세주가 되고 능력과 지혜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다른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희생과 섬김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 순종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희생과 섬김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내가 죽어지고 손해보며 섬기는 일이 가장 큰 힘이 되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인간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3. 십자가의 길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한결같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고, 영적인 참된 예배를 드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의 요지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만이 우리가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느냐? 십자가의 길입니다. 내 이익이나 내 생각을 앞세우게 되면, 전혀 하나님과는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가 없게 됩니다.
처음에 유대백성이 하나님께 제물이나 예물을 드릴 때에는 짐승이든지 곡식이든 간에 제일 첫 것을 드리는 것이 법도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인간의 편의를 생각하다 보니 성전에서 짐승이나 곡식을 사서 바쳤던 것입니다. 요즘 편리하다고 해서 잔치 음식을 집에서 준비하지 않고 음식점에서 대접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과 정성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몸과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되 십자가의 정신을 가지고 영적으로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첫째는 영적으로 참되게 드려야 합니다. 물질만 드리는 거짓된 예배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과 물질은 드리지 아니하고 마음으로만 예배드릴 수도 없습니다. 마음의 표현이 시간과 물질에 나타납니다만, 마음과 정성이 없는 헌신 또한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되 정성껏 드리시기 바랍니다. 물질을 드리되 가장 귀한 것을 구별하여 드릴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웃과 마음을 교환하는 일입니다. 내 마음을 이웃에게 줄 수 있고, 또한 이웃의 마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는 참 예배가 됩니다. 십계명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의 관계를 말하고 있고,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이웃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나 이웃과의 관계는 십자가의 정신이 깃들어야 바른 관계가 됩니다.
십자가의 정신이란, 내 몸과 내것을 아끼지 않고 바칠 수 있는 마음과 생각입니다. 억울하게 빼앗긴다 할지라도 분노하지 않는, 참고 견디는 마음이 십자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정신을 지님으로써 거룩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