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생명의 말씀]
⭕ 태초부터 있는. - 이것은 1:1과 병행된 표현으로 생명의 말씀이 영원 전에 선재하였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하나로 영원전부터 선재하셨으며(요 10:30; 13:3) 복음이 하나님께 속하여 태초부터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Smalley, Barker).
⭕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 헬라어 본문상 본절은 주절이 문장의 맨 끝에 오는 일종의 도치문으로 네 개의 관계절, 즉 '태초부터 있던 것', '우리가 들었던 것', '우리가 눈으로 보았던 것', '우리가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것'이 '생명의 말씀'을 수식하고 있다. 요한은 이러한 매우 복잡한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격렬한 감정을 적절히 언어화시키고 있다(Barker). 본문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Stott, Smalley, Westcott, Dodd). 첫째로, 영원하시고 인격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현을 의미한다. 즉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요 1:1). 둘째로, 복음을 의미한다. '생명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스'(*)는 '말씀의 내용'(행 5:20; 빌 2:16)을 의미하기도 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요 8:12; 6:35, 48:4:10, 11; 계 21:6; 22:1)을 가리킨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이기 때문이다(Smalley, Houlden, Westcott, Marshall).
⭕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 '들은 바요'(*, 아케코아멘)와 '본 바요'(*, 헤오라카멘)는 완료시제이다. 이것은 생명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마침내 실현되었으며 그것을 사도들이 예수께서 설교하셨을 때 듣고, 예수께서 사역하셨을 때 눈으로 보고 확인하였음을 의미한다(히 1:1,2). 이 '듣고'와 '본'은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연결된다(요 10:27; 20:29). 한편 '만진 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살라페산'(*)은 부정과거 시제로 과거 한때 직접 만져서 느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러한 관계절, 즉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라'는 표현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역사 속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으며 그의 사역과 설교를 통해 자신 안에 실현될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강조한다(Stott, Smalley).
성 경: [요일1:2]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생명의 말씀]
본절은 일종의 삽입어구로 앞절의 내용을 확대시킨 것이다. 헬라어 본절 처음에 나타나는 접소사 '카이'(*, 그리고)는 이어지는 3, 4절을 소개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으며, 본서 내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 방법이다(2:27; 3:19-24, Smalley).
⭕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 '생명'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헤 조에'(*)는 1절에서처럼 예수 자신의 존재와 그의 복음을 가리킨다(Westcott). 한편 '나타내신 바'는 예수위 지상 사역을 의미한다. 즉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산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이 역사적으로 예수 안에서 계시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시지 않는한 인간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Stott, Smalley).
⭕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고 너희에게 전하노니. - 본문은 세동사, 즉 '보았고', '증거하고', '전하노니'를 통하여 경험의 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CSmalley). '보았고'의 헬라어 '헤오라카멘'(*)은 그 진의와 중요성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살펴본다'는 의미로서 요한의 개인적 경험을 시사하며, '증거하여'는 요한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개인적으로 전할 뿐만 아니라 사도로서 공적으로 선포하였음을 나타낸다(Law, Brooke).
⭕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 헬라어 본문에는 바로 앞에 '영원한 생명'(*, 텐 조엔 텐 아이오니온)이 자리잡고 있어서 본절 처음에 나타난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와 같은 의미의 반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표현으로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부각시키고 동시에 생명의 결정적인 근원으로 '아버지와 함께'를 제시한다(Smalley). 이러한 사실로 보아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길이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생명이 갖고 있는 신적인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Barker, Wilder).
성 경: [요일1:3]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생명의 말씀]
⭕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가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 본절에서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사귐'이다(Stott, Barker, Smalley, Wilder). 요한이 본절에서 '사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행위로써 표현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사상과 연결된다(2:3). '사귐'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코이노니아'(*)는 문자적으로 '공동 소유', '협동'을 뜻하나 본절에서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공동자금을 모금한 '서로 나눔'의 의미(롬 15:27; 고전 9:23; 고후 13:13) 둘 다를 함축한다(Smalley, Barker).
⭕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 본문은 1절 전반부부터 암시되어 온 예수의 이름을 명백하게 소개하고 있다. 요한은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사귐'의 본질이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임을 분명히 제시함으로 그 사귐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즉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고 영원한 생명이시며 동시에 온전히 하나님과 하나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하는 것임을 시사한다(2:1; 3:23; 4:2; 5:6, 20, Smalley, Wilder).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는 수신자들 사이에 퍼져 있었던 예수의 인성이나 신성을 경시하는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한 경고를 내포한다(고전 1:9, Smalley, Stott).
성 경: [요일1:4]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생명의 말씀]
⭕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다. - 본문은 요 15:11을 반영한다. '기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는 사귐의 결과이며 동시에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 Smalley, Stott). 이러한 기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현재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불완전하므로 기쁨 또한 불완전하다. 그러나 불완전한 사귐 가운데 누리는 완전치 못한 기쁨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인 사귐과 기쁨의 표징이며 보증이다. 그러기에 이 기쁨의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헌신적인 사귐 가운데 기쁨을 누려야만 하는 것이다.
성 경: [요일1:5]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 '소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앙겔리아'(*)는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사용된 것으로 2, 3절에서 언급된 사도들이 선포한 생명의 말씀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 소식에 대해 '저에게서 듣고'라고 표현함으로 생명의 말씀이 역사적인 예수의 생과 가르침 가운데 들려진 복음임을 강조한다(Smalley). 이 소식의 내용이요 주제는 바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빛'은 진리와 의로움울 상징하는 것으로(시 27:1; 36:9; 119:130; 사 5:20; 미 7:8b; 말 4:2). 하나님은 영이시고(요 4:24), 사랑이시라(요일 4:8)는 표현과 함께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낸다. 요한은 자주 '빛과 어둠'을 대조시켜서(요 1:4; 8:12; 9:5; 12:35, 36) 하나님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하는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본성에 합당한 생활, 즉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도록 도덕적인 요청을 하고 있다(6,8,10절; 2:4,6,9;눅16:8; 요 8:12; 엡 5:8-14, Houlden, Wilder, Barker).
성 경: [요일1:6]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5절)는 말씀을 전제로 하여 영지주의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공격하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원론적 사상에 빠져 물질 세계를 악한 것으로 배척함으로써 죄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로 인해 그들의 행위는 방종을 면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하나님과 영적인 사귐이 있다는, 하나님의 본성과 선하심에 모순되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헌 주장은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빛 가운데 행해야 함을 강조하는 진리인 '하나님은 빛이시라'를 그릇되게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Smalley). 그리스고 안에서 생명을 부여하며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하시는 하나님과의 사귐은 죄된 삶을 상징하는 어둠과 분리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둠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근거하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절대적인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Smalley, Stott). 한편 '행하면'의 헬라어 '페리파토멘'(*)은 문자적으로 '동행한다'라는 의미로 구약 성경에서 유래된 표현이다(2:6, 11; 창 17:1; 왕상 2:4; 왕하 20:3; 요 8:12; 요이 1:4). 이것은 '말하는 것'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는바, '진리를 말하는 것'은 '진리를 행하는 것'의 일부이며, 계속해서 최상의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함을 내포한다(Barker). 그러기에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할때는 진리 안에서 행함이 뒤따라야 하며 빛 가운데의 삶을 동반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귐과 전혀 관계없는 거짓말에 불과하다.
성 경: [요일1:7]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 요한은 계속해서 빛과 어두움위 이미지를 대조하고 있다. 어두움이 결과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차단해 버리기 때문에 '빛 안에 거함'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한 필수 요건이 된다. 그런데 그 '빛'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사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시다(Smalley, Wilder).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이 당신과의 사귐을 가능케 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결과에 대해 두 가지로 진술하고 있다.
⭕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 하나님이 빛이시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사귐은 단순히 그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진보하여 그리스도인 사이의 사귐을 성취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귐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전제로 함을 암시한다.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피'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위 대속의 사역을 가리킨다. 또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는 단순히 죄를 용서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락된 성품까지 깨끗하게 하심을 의미한다(Barker, Stott, Smalley). 이러한 두 가지 결과는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비롯된 것이다(Smalley).
성 경: [요일1:8]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 요한이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서도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이다. '죄없다 하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하마르티안우크 에코멘'(*)은 죄가 자신들에게 지속적인 힘을 가지고 실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부인하는 것을 암시한다(Low, Brooke, Barker, Smalley). 죄가 부재함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스스로를 기만하며 속이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에게는 진리가 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리이신 예수께서 거할 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기 때문이다.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 혐오감을 느껴 거부할때 빛 가운데 거하게 되며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된다.
성 경: [요일1:9]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우리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스'(*)는 복수로 구체적이고도 상세한 '죄들'을 가리키며, '자백'은 구체적으로 죄를 깊이 생각하고 뉘우치며 진실하게 고백함으로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시 32:1-5; 잠 28:13, Stott). 한편 '시하시며'의 헬라어 '아페'(*)는 빛의 탕감이나 '허물의 제거', '책임의 해제' 등과 같은 의미이며 '깨끗하게 하실'로 번역된 헬라어 '카다리세'(*)는 죄로 오염된 상태를 정화 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묘사는 사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이며, 사죄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은혜로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구별되고 빛 가운데 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신다(Stott, Smalley).
⭕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 본문은 하나님께서 죄를 자백한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근거를 나타낸다. '미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는 약속을 잘 지키시는 '신설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죄사함을 약속하셨으며(렘 32:34; 미 7:19, 20)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시는 신설한 분이다(시 89편; 롬 3:25; 고전 10:13; 딤후 2:13; 히 10:23; 11:11). 그러므로 미쁘신 당신의 성품대로 죄를 사하시겠다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카셔서 죄를 자백한 자들을 용서하신다. 한편 '의로우사'로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스'(*)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십자가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tott, Ross). (2) 혹자는 언약 혹은 약속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3) 혹자는 하나님의 본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Dodd). (4) 혹자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와 지배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ultmann). 이러한 네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고백한 죄인들을 사죄하신다(Barker).
성 경: [요일1:10]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 요한이 염두에 둔 영지주의자들의 그릇된 주장이 6, 8절에 이어 세번째로 소개된다. 본절에서 요한은 보다 보편적인 진리를 통해 도전적으로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공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인간 전체가 범죄하였으며 죄에 신음하고 있음을 선언하셨다( 시 14:3; 사 53:6; 요 2:24, 25; 룸 3:22-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언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는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전체를 부인하는 것이며(렘 31:34; 엡 4:32)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요 16:8; 롬 8:1, Smalley). 한편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는 말은 선포된 말씀과 구약성경의 모든 증거가 이들 이단적 경향을 가진 자들에게 수용될 여지가 없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죄를 부인하는 것은 구원과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말씀과 빛 가운데 살 수 없게 하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죄의 은혜를 바랄 수 없게 함을 시사한다(Barker).
성 경: [요일2:1]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 '나의 자녀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니아 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을 수신자들을 향한 요한의 자비롭고 따뜻한 사랑을 암시한다((Stott, Smalley). 한편 '이것을'이 가리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1:6-10을 가리킨다. (2) 1장 전체를 가리킨다. (3)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 가능한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보고 듣고 만지며 계속적으로 사귐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치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사귐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당시 영지주의자 들처럼 사귐이나 사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본문에서 본서 전체의 기록 목적이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유지하며 단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제시한다.
⭕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 '죄를 범하면'이 헬라어 '하마르테'(*)는 상반절의 '하마르테테'(*, '죄를 범치')와 마찬가지로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나타낸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15:26;16:7)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롬 8:9;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Stott).
⭕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주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Smalley).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성 경: [요일2:2]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하마르티온'(*)은 복수형이다. 이는 범죄의 행위들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의로우신'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으로서 '화목 제물'임을 제시한다. '화목 제물'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모스'(*)는 제의적인 용어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혹자는 '속죄'(expiation)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Dodd).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제사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속죄의 근원이 된다. (2) 혹자는 '달램'(propitiation)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ill). 이 해석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희생 제사의 대상이 되셔서 희생 제사를 받으신다. 이 두가지 해석은 서로 배타적이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Barker, Smalley, Stott, Law).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희생 제사를 제정하심으로 속죄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 제사를 제정하심으로 속죄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 제사를 받으셨다(레 16:34).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고 믿음으로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을 의럽다고 선언하신다(롬 3:21-26). 즉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셔서 속죄의 수단을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을 통하여 원수되었던 인간과 자신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다.
⭕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속죄 사역은 그리스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를 위한 것이다. 여기서 '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홀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가 인류 전체에서 미친 것임을 시사한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요 3:16;4:42).
성 경: [요일2:3]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계명을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계명'(*, 타스엔톨라스)은 구약성경에서 십계명 안에 내포되어 있으며(출 20:2-17)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압축 되었다(마 22:37-40;롬 13:8-10;갈 5:14). 이러한 계명에의 순종은 비록 하나님을 아는 조건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특징이며, 앎을 분별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Bultmann, Smalley).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도덕적인 행위를 동반하게 된다(Barker).
⭕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 '우리가...알 것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코멘'(*, '지식')는 본서나 요한복은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 즉 신비한 지식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으며 구원을 얻은 자들은 죄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도덕 폐기론을 염두에 둔 듯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절대로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성취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한은 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동사를 사용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적이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이며 역동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일련의 사고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영적인 관계이다(Smalley). 그래서 요한은 '아는 줄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완료 시상인 '에그노카멘'(*)으로 표현하여 과거에 알았던 경험이 지속적으로 발전해야 함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계멸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도덕법을 지키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저'로 번역된 헬라어 '아우톤'(*)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Stott) 보다 세밀하게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성 경: [요일2:4]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 본절은 앞절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이다. '저를 아노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영생을 소유하였음을 나타내는 주장이다(요 17:3).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를 형성한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요구인 계명에 순종하는 모습이 드러나야만 한다. '지키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론'(*)은 3절의 '테로멘'(*, '지키면')과 같이 현재 시상이다. 이는 항상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저를 아노라'고 주장하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이 없는 영지주의자들과 같이 도덕 폐기론을 주장하고 죄를 가볍게 여긴다면 그는 거짓말장이일 뿐만 아니라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1:6). 여기서 '진리'는 요한이 '구원의 복음'이나 '참된 것'을 나타낼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본문의 '진리'는 사변적이거나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이다. 즉 '하나님을 아노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나타난 도덕을 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요한은 이 진술을 통해서 영지주의자들의 도덕폐기론을 강력하게 반박하고 있다.
성 경: [요일2:5]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개역성경에는 '드'(*,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절이 앞절과 연결된 상반된 측면의 진술임을 시사한다.
⭕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 '그의 말씀'(*, 아우투 톤 로곤)에서 '그의'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 더욱이 요한은 본절에서 앞절의 '계명' 대신에 '말씀'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하신 도덕적인 계명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신 모든 복음의 내용에 대한 순종으로 그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Barker). 한편 '지키는'의 헬라어 '테레'(*)는 현재 시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지속적인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 '하나님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투 데우'(*)에서 나타난 속격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주격으로 해석하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Houlden, Bultmann). (2) 혹자는 목적격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3) 혹자는 특성을 나타내는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일종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본절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은 세 가지견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한편 '온전케 되었나니'의 헬라어 '테텔레이오타이'(*)는 완전과 성숙의 개념을 내포한다(Barker). 더욱이 '테텔레이오타이'는 완료 시상이다. 이는 완전과 성숙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 지속되어 성숙의 과정 속에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 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숙되어가며 완전하여져 간다.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으로 순종함으로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숙되고 온전해질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안에 내주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성 경: [요일2:6]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 저 안에 거하는 자는. - '저'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Stott) 문맥상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Barker). 그러기에 '저 안에 거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안에 내주함을 시사한다. 이 내주는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비한 지식을 획득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즉 믿음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성취된다(5절).
⭕ 그의 행하신는 대로 자기도 행할 지니라. - 본문은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자들의 삶 속에 윤리적인 행위가 동반되어야 함을 나탸낸다. 여기서 지시 대명사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이노스'(*)는 상반절의 '저'와는 달리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Stott, Smalley, Barker). 왜냐하면 본서에서 '에케이노스'는 그리스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3:3, 5, 7, 16;4:17). 한편 '행하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파텐센'(*)은 부정과거 시상으로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신 삶을 가리킨다.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한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함으로 하나님 안에 내주함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생활하신 것과 같이 생활해야 함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윤리적인 계명은 물론 복음에 대해 순종함이 그 삶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드러나야 한다.
성 경: [요일2:7]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부를 때 즐겨 사용하는 호칭으로 새로은 단락이 시작될 때 자주 나타난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두 가지를 암시하고 있다. (1) 하나님 안에 내주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삶에는 사랑이 드러나야 함을 암시한다. (2)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고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증거로 사랑을 제시함으로써 도덕폐기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공격하고자 한다.
⭕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 요한은 상호 보완적인 본문의 두 개의 절을 이용해서 이제부터 언급할 '사랑의 계명'이 수신자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계명임을 밝히고 있다. 즉 '새 계명...이 아니라'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은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 여기서 '처음부터 가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롬 2:14;13:8-10) 동시에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사하는 자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엡 5:2;약 2:8;벧전 2:17).
⭕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 본문에서 '계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 안토레'(*)는 단수이다. '엔통레'가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옛 계명이 의미하는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완성한 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십계명을 하나의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고 계신다(마 22:37-39). 한편 '들은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는 사랑의 계명이 이미 선포되었으며 수신자들이 사랑의 계명에 대해 과거에 들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요 13:34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임을 암시한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며 따라서 사랑의 계명은 수신자들에게 결코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알고 있었던 익숙한 계명이었다.
성 경: [요일2:8]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다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팔린'(*)을 본문과 같이 '다시'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again, KJV)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yet, NIV, RSV).
⭕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로 참된 것이라. - 본문의 '새 계명'은 앞절에서 사랑의 계명을 옛 계명으로 지칭한 것과 모순되는 듯 보인다. 여기서의 '계명'은 예전부터 수신자들이 전해들었다는 의미에서의 옛 계명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새 계명'이다. 그 이유는 네 가지이다(Stott, Smalley, Barker). (1)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셨다(4:9;요 3:16). (2) 예수께서는 순종으로 모든 계명의 완성인 사랑을 행하셨다(요 12:27;롬 10:4). (3)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삶, 즉 영생을 부여하셔서 자신이 행했던 바와 같이 사랑의 계명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신다(4:8-11;5:11, 12). (4)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시고 모든 믿는 자들로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사랑의 계명을 자각하고 성취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의 계명은 한편으로 옛계명이지만 새 계명이 된다. 이러한 새 계명은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자에게 성취되어 분명한 실체로 나타났다(Barker, Stott).
⭕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 본문은 새 계명이 그리스도와 믿는 자 안에서 성취될 수 있는 이유이다. 본문에서 '어두움'과 '참빛'의 대조는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참빛, 즉 실재하는 빛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어두워진 이 세상에 오셨다(1-5-7;요 8:12). 한편 '비췸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네이'(*)는 현재 시사이다. 이것은 빛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에 빛을 비추셨으며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구속의 빛을 비추심을 의미한다. 이 빛은 완전한 빛이 비추는 다가올 세대, 즉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Smalley).
성 경: [요일2:9]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 '...하는 자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호 레곤'(*)은 문자적으로 '말하는 자'를 의미한다. '호 레곤'은 '하나님을 아는 자'(6절;요 15:4), 그리고 본절의 '빛 가운데 있는 자'(요 12:46)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어 세 가지 주장이 하나의 주장, 즉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빛 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빛 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관계는 윤리적인 계명에 대해서만 아니라 복음 전체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빛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치 않는다는 것은 모순된 주장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빛 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한편 본절의 '형제'는 일반적인 모든 사람을 지칭하기 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신자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요한은 본서를 쓰면서 기본적으로 수신자 공동체의 문제와 관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인 모든 사람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형제'를 일차적으로 수신자 공동체를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으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도 사용하여 모든 사람을 배제시키지 않고 있다(8절, Barker, Smalley).
성 경: [요일2:10]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두운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과는 반대로 진정으로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자들이 모두 빛 가운데 거한다는 뜻은 아니다. 본절은 앞절과 대조를 이루어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에게 '사랑하라'는 윤리적 계명에 순정하는 삶의 모습이 드러나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 '자기 속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아우토'(*)에서 대명사 '아우토'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빛 가운데 거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그 사람속에'를 의미한다(Barker, Haas). (2) 빛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빛 안에'를 의미한다(Schnackenburg, Smalley).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전자의 경우로 해석하면 빛 안에 거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걸림돌이 될만한 것이 전혀 없음을 의미하며, 후자의 경우로 해석하면 빛 안에는 사람들로 걸림돌이 되거나 넘어지게 하는 것이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 한편 '거리낌'의 헬라어 '스칸달론'(*)은 신약성경에서 배교나 범죄토록 하는 유혹을 가리킨다(고전 1:23). 이러한 '스칸달론'의 대상에 대해서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빛 가운데 거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자 자신이며(Brooke, Westcott, Barker) 또 다른 하나는 타인이다(Stott). 본문은 두 종류의 대상을 모두 내포하는 듯하다. 빛 가운데 거하며 셩젤마 사랑하는 자는 스스로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 뿐더러 타인에게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 다.
성 경: [요일2:11]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 본절은 9절에 언급된 진술의 부연 설명이다. 빛 가운데 거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눈이 멀어서 스스로의 실체를 본명히 인식하지 못하는 자다. 즉 그들은 스스로가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구분하는 분별력을 상실하여 어두움에 속해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빛 가운데 거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는 빛 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함으로 스스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상실하였으며, 실상 하나님을 멀리 떠나 어두움 가운데 헤메고 있다.
성 경: [요일2:12]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자녀들아...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 본문은 1, 2절과 1:9을 반영한다. '죄사함'은 구약성경에서 새 언약에 속한 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다(렘 31:34;겔 36:22-25). 신약성경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행하신 예수의 이름과 연관되어 나타난다(마 1;21;행 4;12;10:43;딛 2:14). 여기서 '이름'은 그 이름의 소유자의 인격을 비롯한 모든 것을 나타낸다(Smalley).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본문은 죄사함이 그리스도께서 하목 제물이 되심으로(1, 2절) 그의 이름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시사한다(Stott). 한편 '사함을 얻음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온타이'(*)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수신자들이 처음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죄사함을 경험하였음을 시사한다.
성 경: [요일2:13]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아비들아...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 '태초부터 계신 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Bruce, Dodd). 이 들에 의하면 본문은 시대에 상관 없이 전혀 변함이 없으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2) 혹자는 하나님과 성육신 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alley). (3) 혹자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arker, Westcott, Brooke). 이들에 의하면 본문은 선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다음절의 '아이들을' 향한 말씀에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이', 즉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당시에 팽배해 있던 이단 교리에 대해 공격하고 있다. 당시 이단자들은 하나님의 선재하신 말씀, 즉 로고스가 나사렛 예수 안에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요한은 이러한 거짓 교리가 흔하던 수신자 공동체에서 '태초부터 계신 이'로서의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이단 교리의 거짓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앎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테'(*)는 현재 완료 시상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개종할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이단자들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선재하신 말씀이셨음을 알았고 그 앎이 현재까지 지속되어 신앙이 성숙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 청년들아...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 '악한 자'의 헬라어 '톤 포네론'(*)은 남성 명사이다. 이는 사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악을 인격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 사단은 빛과는 상관이 없으며 어둠의 세계를 조종하고 통제한다(14절;3:12;5:18, 19;요 17;15;엡 6:16;살후 3:3).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빛 가운데 거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들은 스스로 빛 가운데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사실상은 어두운 가운데 행하여 사단의 조종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기었음이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네니케카테'(*)도 현재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성취한 승리가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종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해서 승리하였으며(눅 10:18;골 2:15;계20:2), 그 승리를 근거로 현재도 지속적으로 사단과의 영적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악을 향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삶을 산다(Stott, Smalley).
성 경: [요일2:14]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아이들아...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 12절에서는 '테크니아'(*, '자녀들아')로 부르고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파이디아'(*, '아이들아')로 부르고 있다. '테크니아'와 '파이디아'는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엄밀하게 구별하면 '테크니아'는 부모와 유아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아이가 약하여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을 더 강조하는 반면에 '파이디아'는 아이의 미숙에 초점을 맞추어 교육과 지도가 필요함을 나타낸다(Westcott, Stott). 한편 '아버지를 알았음이요'에는 13절의 아비들을 향한 말씀인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재 완료 시상이 사용되어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죄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12절) 개종할 때부터 지도자 아래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해 배워 알고 있음을 나타낸다(Barker).
⭕ 청년들아...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본문은 13절과 병행된다. '강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스퀴로이'(*)는 육체의 강함보다는 영적인 강건함을 의미한다(엡 6:10;계 18:8). 청년들아 영적으로 강건해서 악한 자, 곧 마귀의 대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실체로서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영적으로 강건케 하여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악한 자에 대한 승리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Smalley).
성 경: [요일2:15]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본절에서 17절까지는 '세상'이란 단어가 6번 등장한다. 여기서 나타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에 의해 통제를 받는 체제를 가리킨다(4:3-5;5:19;요 16:11, Barker, Stott). 이러한 세상은 본질상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한다(요 15:18, 19;17:25). 한편 본문의 '사랑'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기호'나 '매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Bultmann). 그러나 사실상 사랑과 매력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기호나 매력'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이기에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그것의 방향과 동기가 문제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욕구나 매력, 사랑은 빛 가운데 거하는 자로서 타인에 대해 올바르고 창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닌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사랑은 옳지 못하고 이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니게 된다(Smalley).
⭕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 본문은 요한이 수신자 공동체에서 세사을 사랑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세상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투 파트로스'(*)에서 속격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목적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이 견해에 따르면 세상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 없도록 만든다. (2) 혹자는 주격으로 보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주장한다(Houlden). 이 견해에 따르면 세상을 사랑할 경우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 안에 거할 수 없다. 두 가지 견해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성 경: [요일2:16]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예이다. 이 세 가지 예중에서 첫번째는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나타내는 듯하다(Smalley). (1) 육신의 정욕. '육신'의 헬라어 '사르코스'(*)는 일반적으로 신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의미하나 본문에서는 '영적인'것과 대조를 이루는 악한 욕망의 근원을 의미한다. '육신의 정욕'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자세를 의미한다(Barker, Stott). (2) 안목의 정욕. 이것은 외적인 것을 봄으로 유혹을 일으키는 성적인 욕망은 물론 모든 사물을 탐닉하는 욕망을 의미한다(Marshall, Bultmann). (3) 이생의 자랑(*, 헤 알라조네이아 투 비우). 여기에 나타난 속격에 대한 견해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주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물질이나 명성에 대해 과대 평가하여 자랑하는 허세를 의미한다. 2. 목적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것에 대한 자랑을 의미한다. '이생의 자랑'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즉 그것은 소유하고 있는 물질 뿐만 아니라 태도나 행위를 자랑하거나 혹은 과대 평가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을 의미한다(Marshall, Law).
⭕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로 좇아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요한은 '에크'를 사용하여 상반절에서 언급된 세 가지 예,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상, 곧 사단이 지배하는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과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성 경: [요일2:17]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또다른 이유이다. 세상은 한시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세상과 세상을 사랑한 모든 사람은 공동의 운명으로 파멸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죄를 미워하며 오직 사랑의 계명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거하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때문이다(3;14;5:11, 12;고후 4:18).
성 경: [요일2:18]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약속의 땅을 소유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하며, 열국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온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입증될 날을 기대하였다(사 2:2, 3;겔 38:14-23).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박해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야를 대망하였다. 이러한 메시야 대망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파루시아 때의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마지막 때'(*, 에스카테 호라)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엄은 의미의 말세로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하거나 혹은 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말세에 나타나는 포괄적인 징후나 성격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Brooke, Dodd). (2) 혹자는 좁은 의미로 이해하여 마지막 날들 중의 마지막 때, 곧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요한복음에서 '시간'이 구속을 성취시키는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요 2:4;4:21; 7:30; 8:20;12:23)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내포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Barker).
⭕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 '적그리스도'로 번역된 헬라어 '안티크리스토스'(*)는 관사가 없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본문의 '적그리스도'는 어떤 특정한 인물을 가리키기 보다는 그리스도, 즉 메시야를 대적하거나 반대하는 자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문에 나타난 '안티크리스토 폴로이'(*, '많은 적그리스도')가 복수인 사실로도 입증된다. 그래서 혹자는 본문의 '안티크리스토스'에서 접두어 '안티'(*)를 '적'이 아니라 '거짓'의 의미로 이해하여 그리스도에 대해 거짓말 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Law, Stott, Dodd). 요한이 이러한 '적그리스도'가 당시에 많이 나와 있음을 언급한 것은 당시 그리스도에 대해 잘못된 교리를 전파하던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때문인 듯하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완전한 인간이심을 부정함으로 그리스도를 부정하였다(요이 1:7, Smalley).
성 경: [요일2:19]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저희가 우리에게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 본문은 앞절에 언급된 '적그리스도'가 다른 종교를 가진 자가 아니라 수신자 공동체 일원으로 있다가 거짓 교리에 빠진 자임을 나타낸다. 여기서 '나갔으나'는 수신자 공동체에서 강제로 출교시킨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신자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스스로 나간 것을 보고 요한이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진술하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이 형식적으로는 수신자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었지만 사실상은 전혀 공동체에 일원이라 할 수 없었음을 암시한다. 그들이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은 스스로 그 공동체의 일원이 아님을 증명하는 행위였다(Barker).
⭕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리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 개역성경 본문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문이 공동체에서 이탈한 자들이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다는 앞의 진술에 대한 근거임을 시사한다.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참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수신자 공동체의 교리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공동체를 떠났다. 그들의 이탈은 자신들이 거짓 교리를 전파하는 적그리스도임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호티 우크 에이신 판테스 여스 헤몬'(*)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서이 가능하다. (1) '에이신'의 주어를 '적그리스도'로 볼 때 본문은 '적그리스도 모두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한다'(that they all are not of us, RSV)의 뜻이다. 이 경우에 '모두'를 의미하는 '판테스'(*)는 강조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2) '에이신'의 주어를 '수신자 공동체'로 볼 때 본문은 '공동체 회원들 모두가 우리에게 속한 것은 아니다'(that not all in our company truly belong to it, NEB)라는 의미가 된다. 이 경우에 본문은 수신자 공동체 내에 사이비 일원들이 있음을 나타내다.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이제까지의 문맥과는 달리 주어가 바뀌기 때문이다(Smalley).
성 경: [요일2:20]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 성경에서 '거룩하신 자'라는 칭호는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된다. (1) '하나님'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시 78;41;사 1:4;합 3:3). (2)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데도 사용되었다(요 14:18;15:26;16:7;행 2:27;3:14). '하나님'과 '그리스도'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한편 '기름 부음을 받고'는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지식을 깨닫고 기름 부음을 받는 성유식(聖油式)을 행한 것을 반영한다(Dodd, Schnackenburg). 요한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과 의식을 염두에 두고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기름 부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눅 4:18;요 14:17;15:26;16:13;행 4:27;10:38;고후 1:21, 22, Barker, Stott, Smalley).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은 영지주의자들처럼 단순히 성유식을 행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셔서 자신 안에 거하게 하셨다. 그러기에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지식을 깨달아 구원을 얻고 하나님 안에 내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임이 분명하며 진정한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은 그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다.
⭕ 모든 것을 아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테 판테스'(*)는 '너희 모두가 안다'(you all know, RSV)나 '너희 모두가 진리를 안다'(all of you know the truth, NIV)를 의미한다. 두 가지 중 후자에서 '진리를'이 삽입된 것은 다음절과의 연관성을 나타낸 해석이다. 요한은 본문은 통해서 신비한 지식을 깨달은 극소수만이 하나님과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거짓된 주장을 수신자 공동체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진술함으로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교리를 공격하고 있다(Smalley). 또한 극소수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요한은 '너희 모두'라고 진술하여 수신자 공동체 중 일부만 아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알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 영지주의자들의 거짓을 드러내고 있다.
성 경: [요일2:21]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 본절은 세 개의 '인함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티'(*)로 구성되어 있다. 세 번 사용된 '호티' 중에서 처음 두 번에 대해 혹자는 선언이나 진술을 나타내는 서술격(that,'...것')이라고 주장한다(Blutmann, Haas, Schnackenburg). 그러나 세 번 중 처음 두 번의 '호티'는 원인격(because, '때문에')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왜냐하면 요한은 본절에서 앞절에 언급한 내용을 더 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즉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이 모두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아 진리를 식별할 수 있기 때문에 본서를 기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세번째 '호티'에 대한 해석의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원인격으로 보아 본문이 '거짓이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썼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2) 혹자는 서술격으로 이해하되 '쓴 것'과 연결시킨다(Schnackenburg).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나는 거짓이 진리에서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희에게 썼다'를 의미한다. (3) 혹자는 서술격으로 이해하되 '너희가...앎을'과 연결시킨다(Dodd, Smalley).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거짓이 진리에게서 날 수 없다는 것을 너희가 안다'를 의미한다.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요한은 앞에 나타난 두 번의 '호티'를 원인격으로 기술함으로 수신자 공동체가 기름 부음을 받아 온전히 진리를 식별할 수 있음을 밝히고, 마지막'호티'를 서술격으로 사용함으로 '거짓이 진리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진리를 선언하고 있다.
성 경: [요일2:22]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 앞절에서 진리가 '거짓'에서 나올 수 없음을 선언한 요한은 본절에서 '거짓'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거짓말하는 자'란 예수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메시야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땅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4:2, 3;요이 1:7). 이들은 예수께서 참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것이며, 아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요 12:44, 45).
성 경: [요일2:23]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 본절은 앞절의 결과에 대해 부연 설명한 것이다. '없으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데...에케이'(*)와 '있느니라'의 헬라어 '에케이'(*)에서 '에케이'는 문자적으로 '가지다'란 뜻이다. 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영적인 경험을 시사한다. 또한 본장에서 '에케이'는 '거하다'의 헬라어 '메노'(*)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여(24, 27, 28절) 확신의 동기를 제공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하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를 소유하지도 못하고, 그와 교제를 나누지 못할 뿐 아니라 상호간의 내주도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셨으며(요 1:18;14:9) 아들 예수께서 죄로 인한 하나님과 인간의 원수 관계를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1, 2절;요 14:6).
성 경: [요일2:24]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리라. - (*, 휘메이스 호에쿠사테 아프 아르케스 엔 휘민 메네토). '처음부터'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수신자들이 처음 복음을 듣고 개종한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2) 혹자는 사도들이 초대 교회에 처음 복음을 선포한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들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는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과거에 선포된 복음을 들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과거에 사도들이 선표했던 복음을 지속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리라고 명령한다.
⭕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안 엔 휘민 메이네 호 아프 아르케스 에쿠사테'(*)이다. 본문의 헬라어 어순과 본절 상반절의 헬라어 어순을 살펴보면 두 가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1) '너희 안에'에 해당하는 '엔 휘민'(*)이 상반절에서는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으나 본문에서는 앞에 기술되어 있다. 이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20절) 수신자 개인의 삶에 거하고 있는 복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 상반절에서는 '에쿠사테'(*, '들은')가 '아프 아르케스'(*, '처음부터')보다 앞에 기술되어 있으나 본문에서는 '아프 아르케스'가 '에쿠사테' 보다 앞에 진술되어 있다. 이는 본문과 상반절에 교차 대구법을 사용하여 복음이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 22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기술되어 '아버지'가 '아들'보다 먼저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문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기술되어 있다. 이는 요한의 강조점이 아들에 있음을 시사한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임을 시인할 때 아버지와 교제를 나누고 상호간의 내주가 성취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거하리라'의 헬라어 '메네이테'(*)는 상반절에서 현재 시상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미래 시상이다. 이것은 지속적인 상호간의 내주를 통한 현재의 영적 경험이 미래의 온전한 구원을 향하고 있음을 강조한다(Smalley).
성 경: [요일2:25]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 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2)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oulde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한편 '약속'은 본서에서 처음 나타나나 성경 전체에서는 자주 나타난다. 성경은 구약의 족장들과 예언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메시야이신 예수 안에서 완성되며(행 13:23;롬 15:8;고후 1:20-22) 새 언약이 옛 언약을 대치할 것이라고 말한다(갈 3;16;엡 2:12;히 10:23;11:13, 39, 40). 또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구속받은 자들이 약속된 성령에 의한 새 시대, 즉 메시야 시대의 종말론적 축복을 공유하게 될 것을 나타낸다(눅 24:49;행 1:4, 5;2:33). 목회 서신은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본질이 영생임을 진술하고 있다(딤전 4:8;딤후 1:1;딛1:2).
⭕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 이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아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 안에서 복음을 굳게 견지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대한 순종을 수반해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는 아들을 알지 못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인 영생을 소유할 수 없게 된다.
성 경: [요일2:26]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 '미혹케 하는 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플라논톤'(*)은 현재 분사이다. 이는 앞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하는 적그리스도들의 특성이 거짓말로 미혹하는 마귀의 특성을 닮고 있음을 나타낸다. 더욱이 요한은 현재 분사를 사용하여 적그리스도의 미혹행위가 지속적인 것으로서 현재에 볼 수 있는 실제적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썼노라'의 헬라어 '에그랖사'(*)는 서간체 부정 과거이다. 이 '에그랖사'는 본서의 수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의 시점, 즉 수신자 공동체가 본서를 받아보면서 요한의 기록 시점을 생각하는 당시 표현 방식이다.
성 경: [요일2:27]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 24절에서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수신자 공동체에게 권면한 것과 같이 본절에서도 요한은 이단적인 교리를 전파하여 미혹하는 적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안에 안전하게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수신자들이 거룩한 자에게서 받은 '기름 부음'을 강조하고 있다. '기름 부은'은 성령을 가리킨다(20절 주석 참조).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진리이시다(5:7). 여기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는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교사직에 대한 언급(행 4:18;5:28, 42;고전 12:29;엡 4:11;딤후 2:24)과 상치되는듯 보인다. 그러나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직분을 받은 교사들은 진리이신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가르쳐야 하며 그들의 가르침의 은사를 통해서 가르쳐야 하며 그들의 가르침의 내용은 진리에 의해서 시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4:1, 5;요이 1:9, 10, Schnackenburg). 즉 그 가르침의 내용은 이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각 개인에게 가르쳐져야만 한다. 그런 반면에 당시에 이단적 교리를 전파하는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요한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음을 강력하게 권고하여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을 공격하고 있다(Brooke, Houlden). 한편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는 요한복음에 언급된 보혜사 성령의 성격과 병행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셔서(요14:17; 15:26)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요16:13)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요14:26). 이런 사실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유식과 대조를 이룬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유식은 지적인 것이며 거짓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기름 부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영적 지식을 소유하게 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그 안에 거하게 한다.
⭕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데스 에스틴 카이 우크 에스틴 프슈도스'(*)는 문자적으로 '그것은 참되고 거짓이 아니다'란 뜻이다. 여기서 '에스틴'(*, '이다')의 주어인 그것은 기름 부음에서 비롯된 가르침보다는 기름 부음 자체를 가리킨다(Smalley). 기름 부음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그는 물론 그의 가르침 전체가 참되며 거짓이 없다. 한편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의 주어는 '기름 부음'으로 보기 보다는 '예수'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더욱이 '가르치신'의 헬라어 '에디닿센'(*)은 부정 과거 시상이어서 예수께서 지상 사역 때에 행하신 가르침과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Smalley). 성령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야 할 일을 가르치신다(요14:26).
성 경: [요일2:28]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 본문은 요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자신의 권면을 요약한 것이다. '그 안에 거하라'는 본장에서 자주 언급된 권면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영원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내주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게 되며 '사랑하라'는 계명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계명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동반한 그리스도인의 내주는 그리스도인들로 약속된 영생을 소유하게 한다.
⭕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하려 함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종말론적이다. 즉 요한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이유를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심판과 연결시키고 있다. '나타내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네로데'(*)는 육신을 입으신 예수께서 역사 위에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은 '파네로데'와 '강림'의 헬라어 '파루시아'(*)를 연결시켜서 그리스도게서 눈에 보이게 광채를 입고 재림하실 것을 시사하고 있다(Barker). 한편 '담대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안'(*)은 신약성경에서 31번이나 나타나며 그 중에서 13번이 요한이 쓴 책들에서 나타난다. '파르레시안'은 헬라 세계에서 '자기의 의견을 공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시민의 권리'를 의미하며 성경에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나(행4:29; 고후7:4)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딤전3:13; 히10: 19) 담대함을 의미한다. 본절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라'는 계명과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성 경: [요일2:29]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거듭나고 영생을 소유한 자들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할 표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의'이다. 여기서 '그'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하나(Smalley)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Law, Barker, Stott). 왜냐하면 다음 절인 3:1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언급되어 있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서 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아버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야만 한다. 그래서 요한은 본장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것이며 어두움에 있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3-6절).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가운데서 보여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순종의 생활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아버지에게서 난 자라고 말할 수 없다.
성 경: [요일3:1]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데테'(*)는 감탄사의 역할을 하는 명령형으로 복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 복수 형태는 가시적인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어법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였음을 암시한다(Smalley, Westcott).
⭕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 '어떠한'의 헬라어 '포타펜'(*)은 신약 성경에서 대개 놀라움이나 경탄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데(마8:27; 막13:1; 벧후3:11), 본문에서는 '어떠한 정도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를 의미한다(Brooke). 한편 '자녀'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나'(*)는 실제적인 부자 관계에서의 자녀됨을 강하게 함축하는 단어이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주로 '휘오스'(*, '아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법적인 부자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이다(Plummer, Wilder).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써 값없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우신 사랑인가를 선포하고 있다(Calvin). 요한은 '우리가 그러하도다'를 부가하여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한다.
⭕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토'(*)는 문법적인 연결이 명백하지 않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혹자는 '디아 투토'가 뒷부분의 내용과 연결되어 '호티'(*, '왜냐하면') 이하의 절을 설명하는 것으로 본다(Smalley, Stott). (2)혹자는 '디아 투토'가 앞부분의 내용과 연결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보고, '호티' 다음에 따라오는 절은 부가적 기능만을 한다고 주장한다(Haas, Marshall). 어느 견해를 취해도 의미상 큰 변화는 없으나 문맥상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를 모르는 것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단순히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강조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본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aas). (2)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ultmann, Stott). (3)혹자는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Briike). 본문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지만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분리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1:3; 2:1,24). 요한은 세상이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사실 '세상에 속한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에 속한 자요 어두움에 거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영접하거나 인정하기를 거부한 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은혜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알 수가 없다.
성 경: [요일3:2]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 본문은 '지금...아직'이라는 종말론적 긴장 관계(eschatological tension)에 놓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를 나타낸다.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을 알아보든 못 알아보든 간에, 혹은 그리스도인의 현재 모습이 육체의 소욕(所慾)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을지라도 분명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다(Calvin, Stott). 신자의 미래에 대해서는 구원의 영광이 약속되었다. 그러나 비록 현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특권과 하나님의 성품을 누리며 미래에 주어질 구원이 확실하다 할지라도 장차 되어질 그리스도인의 미래 상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계시 되지 않았기에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야 신자는 장래에 자기 자신에게 일어날 구체적인 상태를 알 수 있을 것이다(Stott).
⭕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안 파네로데'(*)에는 주어가 없어서 이를 해석하는데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그'를 바로 앞 문장의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을 가리키는 비인격적 주어로 보면서 바로 뒷 문장에 나타난 '그'는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Plummer, Bengel). (2)혹자는 '그'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Stott, Barker, Bru- ce, Smalley). (1)의 견해는 두 가지 점에서 부당하다. 첫째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1절) 본서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를 명백히 구분짓지 않고 있음을 간과하였으며 둘째로, 이어지는 본문의 논의가 하나님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쪽으로 발전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Smalley). 그러므로 본문에 사용된 '그'는 후자의 견해와 같이 전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편 우리가 주와 같을 줄 아는 것이 주의 계신 그대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그날에 '우리가 새사람을 입고'(엡4:24) '주와 같은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하게 되어서'(빌3:21) 주와 같이 됨을 의미한다(Stott).
성 경: [요일3:3]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 '소망'의 헬라어 '엘피다'(*)는 바울 서신이나 베드로 서신에는 빈번하게 나타나지만(롬5:4; 8:24; 고후1:7; 벧전1:3) 요한 복음이나 요한 서신 중에서는 본문에서 단 한 번 나타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이루리라는 확신에 찬 기대'라는 소망의 개념은 2절에서 명백히 설명되고 있다(Smalley). 따라서 '이 소망'은 2절에 나타난 장래의 일들에 대한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리킨다(Barker).
⭕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요한은 처음으로 예수의 특징을 '깨끗하심'으로 묘사하고 있다. '깨끗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그노스'(*)는 '디카이오스'(*, '의로운')와 거의 같은 의미로 그리스도의 정결하심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힘써 따라야 할 본보기임을 시사한다(2:1,29;3:7, Smalley). 한편 '깨끗하게 하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하그니제이'(*)는 '하그노스'(*, '깨끗하심')와 같은 어원을 갖는 동사로 제의적 정결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출19:10,11; 민8:21; 요11:55; 행21:24). 그러나 본문에서는 시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성품으로서 도덕적인 깨끗함을 의미한다(Law, Stott, Smalley, Barker).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진 자는 주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하여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마5:48).
성 경: [요일3:4]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 본문은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하여 자신들은 죄가 없으며 불법을 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요한은 죄를 짓는 사람은 모두가 예외없이 불법을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영지주의의 거짓 가르침을 배격하고 있다.
⭕ 죄는 불법이라. - 여기서 '불법'(*, 아노미안)은 문자적으로 '율법을 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요한이 '율법'(*, 노모스)이란 용어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불법'은 율법을 범한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려는 인간의 본성적인 불법을 의미한다(Barker). 요한은 자기 자신들이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영지주의자들이 사실상 하나님을 배반하는 무서운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성 경: [요일3:5]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스'(*)는 복수형이다. 이는 죄악된 모든 행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Smalley, Stott). 한편 '나타내신'의 헬라어 '에파네로데'(*)는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것은 과거의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수의 성육신이 역사적 사건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이러한 역사적인 실재 사건을 기반으로 해서 예수의 '죄를 없애는 사역'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으며(요1:29), 모든 죄를 친히 자기 몸에 짊어지심으로써 우리 죄를 없이 하셨다(사53:11,12; 히9:28; 벧전2:24, Stott).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 '죄가 없다'는 말씀은 3절의 '깨끗하심'과 2:29; 3:7의 '의로우심'과 동일한 의미이다. 예수의 무죄성은 초대 교회의 케리그마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신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고후5:21; 히4:15; 벧전1:19). 한편 본문에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 '에스틴'(*, '~이다')으로 현재형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지상 사역 기간 동안만 죄로부터 자유로우셨던 것이 아니라 영원히 무죄하심을 암시한다(Smalley).
성 경: [요일3:6]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 본문은 1:8,10의 진술과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이에 대해 네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주 안에 거하는 자의 인격에 주목하여 그리스도인은 고의적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아니하는 것으로 해석한다(Wesley). (2)혹자는 요한이 신자의 삶의 원리를 선포한 것으로 보고 '범죄치 아니함'을 신자의 이상적 특징으로 해석한다(Alford, Calvin). (3)혹자는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아니하는 것으로 해석된다(Lange, Smith, Barker, Westcott, Stott). (4)혹자는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원리상 이미 범죄하지 않는 자이지만 실제상 아직 범죄하는 자라고 본다. 즉 그리스도인이 현재 긴장과 역설의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Smalley, Schn- a ckenburg).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세 번째 견해의 경우 '범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타네이'(*)는 현재형으로서 동작의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상태를 묘사해 주기 때문이며, 네번째 견해의 경우 루터(Luther)가 '그리스도인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치 아니하는 동시에 범죄한다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Smalley). 앞 절에서 진술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죄와 상관없는 깨끗한 분이시기에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와 상관없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만약 죄를 범한다면 그는 회개함을 용서함을 받고 불법의 생활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가 지속적이며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기보다 죄를 좋아하며 죄 안에 거하길 즐겨한다면 그는 완전히 깨끗하신 그리스도를 알거나 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알지도, 보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요5:37,38; 8:19; 14:7,9; 요삼1:11, Stott, Barker).
성 경: [요일3:7]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 본문은 수신자 내에 있던 영지주의를 전파하는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요한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니의 비밀스런 지식, 즉 영지(靈智)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영지를 깨달은 자는 육신에서 자유로워져 도덕적인 방종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신학과 윤리의 가르침은 요한 당시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미혹시켰다. 그래서 요한은 사도들이 전하여 준 복음 이외의 것을 가지고 미혹하는 자들을 멀리하며, 거절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 본문은 2:29의 반복이다. 여기서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의로움의 동기와 근거를 나타낸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가능함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문은 의를 행함이 조건이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자로서 그의 의로움을 행위로 보여 주어야 함을 의미한다(Bruce).
성 경: [요일3:8]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 본문은 7절 하반절과 정반대되는 내용으로서 대조를 이룬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반면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다. 요한은 이러한 대조법을 사용하여서 수신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누구에게 속하느냐'란 질문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동시에 영지주의자들이 방종을 통해 범죄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누구에게 속하였는가를 분별할 수 있도록 한다. 한편 요한은 본문에서 마귀의 기원에 대해서는 어떠한 암시도 주지 않으며, 단지 죄의 기원이 마귀에게 있다는 사실만을 말한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을 암시하는 듯하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하는 자로서 진리가 그 안에 전혀 없기에(요8:44) 속이는 자이며 사람들로 범죄하게 한다. 이러한 죄의 기원에 대해 바울이 아담에게까지 소급시킨 것과 달리(롬5:12-19), 요한은 그보다 더욱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Westcott).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 '마귀의 일'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들을 미혹시켜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다(창3:1-6). 이러한 마귀의 일을 파괴하고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 그르스도께서 세상에 오셨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죄인을 어둠에서 구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오셨다(5절; 히9:28; 벧전2:24). 요컨대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죄를 없애고 동시에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인 것이다(Plummer).
성 경: [요일3:9]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본절은 6절의 반복이다. 요한은 1:8,10에서 믿는 자들이 죄를 지을 가능성을 언급하였으나 본절에서는 믿는 자들이 범죄치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본절은 6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습관적으로 마귀와 같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하여는 본문이 수신자들 사이에 있던 영지주의자들을 향한 경고인을 전제로 할 때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요한 당시의 영지주의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었다. 하나는 영지를 깨달은 자는 육신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가 되었으므로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죄가 영지를 깨달은 자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으므로 범죄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부류이다. 요한은 전자의 영지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범죄함을 역설하였고(1:8,10), 후자의 영지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신자들은 범죄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역설하고 있다(6절).
⭕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 '하나님의 씨'에 대한 견해는 다섯 가지이다. (1)혹자는 신적인 생명의 원리라고 주장한다(Smith, Marshall). (2)혹자는 집합적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ohlenberg, Stott). (3)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Oecumenius, Theophylactus). (4)혹자는 말씀 또는 복음이라고 주장한다(Augustine, Dodd). (5)혹자는 성령이라고 주장한다(Calvin). 다섯 가지 견해 중 마지막 두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Smalley).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말씀이 심기워 있음(시119:11; 렘31:33)과 성령께서 내주하심(롬8:11; 고전3:16)은 동시적이고 불가분리적이다. '하나님의 씨' 즉 말씀과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거할 때 그 그리스도인은 범죄하지 않게 된다.
성 경: [요일3:10]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창조주시며 모든 인간들을 낳으신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가 아니다. 마귀의 자녀들도 있다(요8:44).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섞여서 살고 있다(마13:24-30). 자녀들이 부모를 닮아 가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닮고, 마귀의 자녀들은 마귀를 닮는다(Stott, Bruce).
⭕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 저자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마귀의 자녀인가를 판별하는 시금석으로 '의와 사랑'을 제시한다. 의와 사랑이 없는 자는 자기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스스로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드러낸다.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든 아니면 타인과의 관계에서든간에 '온전함'을 의미하며 '사랑'은 타인에 대한 의로움을 뜻한다(Westcott, Plummer). 이러한 '의와 사랑'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닮아야 할 하나님의 본성이다.
성 경: [요일3:11]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 '사랑할지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멘'(*)은 현재형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사랑이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한다(Smalley).
⭕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 '처음부터'는 문맥상 요한의 수신자들이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를 의미한다. 그러나 요한은 틀림없이 복음의 본질이 사랑이며(요3:16; 15:12; 눅10:27; 고후13:13) 사랑이 태초의 창조 원리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요17:24; 요일4:16)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한편 '소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리아'(*)는 1:5와 동일한 단어이다. 1:5에서의 '소식'은 교리적 내용을 담고 있어 하나님이 빛이심을 드러내는 반면 본절에서의 '소식'은 윤리적 내용을 담고 있다(Stott). 그 윤리적인 내용은 '복음의 본질인 동시에 근원적인 요구인 사랑의 실천을 권면하는 것'이다.
성 경: [요일3:12]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 저자는 8절과 10절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마귀의 자녀의 모델로 가인을 제시한다. 요한이 가인을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가인은 동생 아벨의 의로움을 시기하여 죽임으로 자기 자신이 마귀에게 속하였음을 스스로 입증하였다(Burce). 둘재로, 요한 당시의 한 이단 종파인 에비온주의자들은 채식주의자들이었다. 요한은 그들에게 고기를 드린 아벨은 열납되고 농산물을 드린 가인은 거부되는 사건을 제시함으로써, 율법적인 채식주의보다는 사랑의 계명에의 순종이 우선임을 보여주려 한 듯하다(Smalley).
⭕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 창4장에 기록된 사건에서는 가인의 살인 동기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가인에 대한 언급(히11:4; 유1:11)을 통하여 추론해보면, 가인은 믿음과 순종과 형제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요한은 다른 어느 성경보다도 분명한 살인의 동기를 제시한다. 그 동기는 동생 아벨의 의로움에 대한 시기이다.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물질적 축복이나 안녕보다는 의로움 자체를 더욱 시기하고 증오한다(Stott). 이런 의미에서 가인은 자신의 살인 행위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스스로 드러내었다.
성 경: [요일3:13]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 전후 문맥상 세상과 하나님의 자녀와의 관계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Law).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의 대립은 아벨-가인, 이삭-이스마엘, 야곱-에서를 통하여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요한은 '미워하거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세이'(*)를 현재 시상으로 사용함으로 암시하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롭다는 사실만으로 미워하므로(12절) 양자간의 대립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세상의 증오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이김에 기초하여 넉넉히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요16:33; 요일4:4; 5:4, Bruce).
성 경: [요일3:14]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 본문에서 요한은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서 형제 사랑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간 자의 증거로서 형제 사랑을 논하고 있다. 사랑은 율법의 대강령이요(마22:34-40),율법의 완성이요(롬13:10),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최고 표현이다(요13:35; 고전13:13). 그러므로 비록 세상이 영생의 근거는 아닐지라도 형제 사랑이 없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Calvin, Bruce).
⭕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 '사랑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폰'(*)에는 목적어가 없다. 이 사실로 인해서 본문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형제'를 목적어로 보아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로 해석하는 것이다(Stott). 다른 하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Plummer, Smalley).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은 제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6절; 2:2). 한편 '거하느니라'의 헬라어 '메네이'(*)는 현재형으로 사랑치 아니하는 자의 영적 죽음의 상태가 지속됨을 암시한다.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랑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과거 상태처럼 지속적으로 죽음과 진노하에 있는 상태이기에(엡2:2) 사망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사망에 거하고 있는 상태이다.
성 경: [요일3:15]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자니. - 요한은 '사랑하지 않음'의 개념에서 '미워함'의 개념으로 발전시켜 진술하고 있다. 본문은 분명히 12절을 반영한 것으로 세 가지 즉 '사랑하지 않음'과 '미워함' 그리고 '살인'이 동일한 것임을 시사한다. 즉 사랑하지 않는 자는 미워하는 자요,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이다(Plummer). 그러나 여기서 요한이 살인자의 회개와 사죄 가능성을 부인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께서도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의 사죄를 위해 기도하셨기 때문이다(눅23:34, Smalley, Stott). 단지 요한은 본문에서 미움이 잠재적 살인이라는 사실, 즉 살인이 미움과 시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과 살인하는 자의 현재는 영생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우크 에케이 조엔 아이오니온 엔 아우토 메누산'(*)운 문자적으로 '그 속에 거하는 영생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가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이'(*)는 현재형으로서 '영생을 가질 수 있는 지속적인 능력'을 뜻한다(Haas). 이것은 살인하는 자의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 차 있어서 영생을 소유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움에서 비롯된 살인과 사랑으로 드러나는 영생이 서로 상극임을 시사한다.
성 경: [요일3:16]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 '알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멘'(*)은 완료형이다. 이 단어는 이 서신의 다른 곳에서는 거의 현재형으로 쓰였으나(2:5,18,20; 5:15) 본문에서는 특히 완료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우리가 알게 된 것이 특별한 역사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15절에서 미워하는 자의 표본으로서 가인을 내세운 뒤 본절에서 사랑하는 자의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자신이 강조하고 있는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요한은 상반절에서 자기 희생적 사랑의 본보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제시함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본받아 자기 희생적 사랑을 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강조한다(2:6). 이는 예수께서 친히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상토하는 것으로(요15:12,13)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행해야 할 사랑이 자기 부정임을 시사한다.
성 경: [요일3:17]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 '재물'의 헬라어 '비온'(*)은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삶의 수단으로서의 재물'을 의미한다(막12:44). 또한 '보고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로레'(*)는 그냥 한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켜보는 상태'를 가리킨다(Smalley). 본절에서 요한은 생활에서 충분히 실행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랑의 예로 최소한의 생활조차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은 생활이 어려운 형제를 보고도 그의 궁핍함을 고와주지 않면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한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4:10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해석한다(Plummer) (2)혹자는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해석한다(Bro- oke, Bengel, Alford). (3)혹자는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같은 사랑으로 해석한다(Law, Marshall). 본절의 중심 사상이 그리스도의 사랑하심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성 경: [요일3:18]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말과 혀'는 같은 의미로서 실천이 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행함과 진실함'은 실천하는 사랑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한다(Smalley). 즉 '행함'은 사랑의 역동적 측면을 나타내고, '진실함'은 사랑의 질적 측면을 나타낸다. 요한은 본절에서 사랑의 실천을 선언(약2:15-17)함으로써 이제까지 논해온 것, 즉 하나님에게서 난 자마다 의와 사랑이 있어야 함을 요약하고 있다.
성 경: [요일3:19]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 '이로써'가 가리키는 것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다음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Nauck, Brooke). (2)혹자는 앞에 언급된 내용과 뒤에 언급될 내용 둘 다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3)혹자는 앞에서 언급된 10-18절까지의 내용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malley, Stott).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문맥상 가장 타당하다. 한편 '굳세게 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소멘'(*)에 대하여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1)'확신케하다', 이 의미로 해석하려면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데 목적어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바로 앞 문장인 '우리가 진리에 속함'을 목적어로 보는 견해와(Plummer) 2. 20절 초두의 '호티'(*, '왜냐하면')가 이끄는 절을 목적어로 보는 견해이다(Bruce). 그러나 양자 모두 무리한 문법적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2)'설득시키다'. 이것은 의미상 본문에 부적절하다. (3)'안심시키다'. 이 의미로 해석할 경우 '우리 마음의 두려움과 염려'라는 목적어가 생략된 것으로 본다(Westcott). 비록 만족스러운 해석은 되지 못하나 그래도 세 가지 의미중 마지막 의미가 타당성을 지닌다(Stott, Smalley). 본절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진리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20절과 연결하여 주 앞에서 두려움없이 담대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성 경: [요일3:20]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 본절에서 두 번 사용된 '호티'(*, 왜냐하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첫번째 '호티'를 명사절을 이끄는 접속사(that)로 보고, 두번째 '호티'는 불필요한 반복으로 간주하여 생략한다. 이 해석은 20절 전체를 19절의 '페이소멘'(*, '확신케 하다')이란 동사의 목적어로 본다(Bruce). (2)혹자는 첫번째 '호티'를 '왜냐하면'으로 해석한다. 이 경우 19절의 동사 '페이소멘'(*, '안심시키다')의 목적어는 생략된 것으로 본다(AV). (3)혹자는 첫번째 '호티'(*)를 '호'(*)와 '티'(*)로 분리시켜서 관계대명사 중성 명사로 보고, '에안'(*, '...이면')과 합쳐서 '...할 때마다'라는 의미로 본다. 이때 두번째 '호티'는 종속절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왜냐하면'의 뜻이 된다(Stott, Smalley).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요한은 본서에서 서로 대조되는 구문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1:9,10; 2:10,11; 3:8,9) 본절 역시 21절과 대립되는 구문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 본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묘사라고 주장한다(Alford, Wohlenberg).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우리 자신도 우리 마음을 보시면 책망할 것이 너무 많을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2)혹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묘사라고 주장한다(Brooke, Luther).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두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 마음을 책망할 때마다 오히려 위로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문맥상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성 경: [요일3:21]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 문장의 형식상 전절과 본절은 조건문으로서 대조를 이루지만 내용상은 본절이 전절의 결과에 해당한다. 본문은 설사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서 책망할 것이 있을지라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용서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Bruce).
⭕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 위에서 담대함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서 항상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히10:19).
성 경: [요일3:22]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 '구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토멘'(*)과 '받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람바노멘'(*)은 모두 현재 시상이다. 이는 계속되는 기도와 계속되는 응답의 경험을 암시한다(Stott).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응답하신다는 사상은 신약 여러 곳에 나타난다(마7:7,8; 18:19; 요11:41,42; 15:7). 그러나 이 응답에 대한 약속에는 선행 조건이 있다.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요15:7, Smalley).
⭕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 그리스도인들이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말한 공적이 아니라 신자의 마땅한 의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 기도 응답의 조건이 되는 것처럼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됨을 드러내는 외면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Law, Stott). 예수께서도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행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아셨다(요8:28,29; 11:42).
성 경: [요일3:23]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 전절에서는 '계명들'(*, 엔톨라스)이라고 하여 복수 형태를 취하는데 본절에서는 '계명'(*, 엔톨레)이라고 하여 단수 형태를 취한다. 이는 본절의 두 가지 내용인 '믿음'과 '사랑'이 사실은 불가분리적인 하나의 계명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여기서 '믿고'의 헬라어 '피스튜소멘'(*)과 '사랑할 것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멘'(*)은 시상이 서로 다르다. 즉 '피스튜소멘'은 부정과거형으로서 '단번에 이루신 예수의 역사적 속죄 사역'(히9:28)을 믿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아가포멘'은 현재형으로서 '형제 사랑이 변함없이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믿음은 사랑의 근거요 사랑은 믿음의 증거이다.
성 경: [요일3:24]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형제 사랑]
⭕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 헬라어 본문에는 두 번의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아우토스'(*, '그')라는 인칭대명사로 나타난다. 이 '아우토스'는 19-23절까지 계속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지칭했다는 점을 고려하여,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Plummer, Stott, Smalley). 그러나 사도 요한의 기독론(Christology) 자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구분을 뚜렷하게 짓지 않고 오히려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하며, 요15:1-7의 말씀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를 가리킬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또한, 하나님이 예수 안에 예수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요17:21) 내용상으로는 '주'가 하나님이든지 예수이든지 같은 의미이다. 앞 절에서 언급된 두 가지 계명, 즉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잘 지키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도 역시 그 안에 거하신다.
⭕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 본문에서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로 성령이 제시된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주 안에, 주가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신다는 약속의 확실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保證)이다. 23,24절의 연결이 18,19절의 연결처럼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안다'고 하지 않고 성령을 등장시킨 점은 의미가 있다. 아마도 저자는 주 안에 거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사랑'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선물'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러한 성령은 그리스도인에게 각종 은사를 주셔서(갈5:22,23)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의롭게 행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Stott).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심을 알게 된다.
성 경: [요일4:1]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성령과 악령]
⭕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수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저자 요한이 진술하고자 하는 주체로 수신자들의 관심을 전환시키기 위한 호칭이다. 요한은 본절 외에도 이와 같은 표현을 본장에서 두 번 더 사용하여 수신자들의 관심을 야기시키고 있다(7,11절, Brooke).
⭕ 영을 다 믿지말고. - '믿지 말고'의 헬라어 '메...피스듀에테'(*)는 '진실한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말라'라는 의미이다. 이는 '시험하라'와 연결되어 모든 영을 대할 때에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잘 분별하여 받아들여야 함을 시사한다.
⭕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 '영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타'(*)는 복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나 악한 자의 영이 많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후에 언급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가리킨다(Marshall). 한편 '시험하라'는 기준을 가지고 분별하는 것을 가리킨다(Stott). 이것은 바울 서신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 바울에 따르면 영들을 시험하여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의 특별한 은사이다(고전12:10). 그러나 여기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하는 분별력을 가리킨다(Westcott). 요한은 당시 수신자들 사이에 스스로 영감을 받았다고 자장하던 이단자들을 염두에 두고 수신자들이 이들을 시험하여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가를 분별함으로 무조건 따르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 본문은 수신자들이 영들을 시험해야 할 이유이다. '거짓 선지자'는 신약성경에서 '진실한 선지자'를 대적하는 자나(눅6:26; 벧후2:1), 혹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사도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가리킨다(마7:15; 24:11,24; 행13:6).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은 종말론적 현상이다(2:18; 막13:22, Barker). 거짓 선지자는 적그리스도와 깊은 연관을 맺으며 그리스도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자신들의 거짓된 가르침이나 교리로 미혹하는 자들로서(마24:11; 살후2:3; 계20:10)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유혹한다.
성 경: [요일4:2]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성령과 악령]
⭕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 '하나님의 영'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13절; 3:24, Stott).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증거하심을 의미한다. (2)혹자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JB, Smalley). 이들은 본절이 앞절과 연관되어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나 문맥상 후자의 견해가 더 나은 듯하다. 한편 '알지니'로 번역된 헬라어 '기노스케테'(*)에 대해서 혹자는 명령법으로 해석하나(Law), 본서 어디에서도 명령법으로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Westcott, Smalley, Brooke). 요한은 본문네서 수신자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신자들이 알고 경험했던 영적인 사실들을 잘 지키며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상기시키고 있다(13절; 3:16; 5:2)
⭕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 본문은 영감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거짓 영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분별하는 기준이다. 그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의 인정 여부이다. 요한 당시 수신자들 가운데에는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에 빠져서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공동서신 개론의 "공동서신의 이단 사상" 참조). 요한은 본절에서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를 공격하고 있다. 한편 '오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렐뤼도타'(*)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요이1:7에서 현재 시상으로 사용된 것과 대조를 이루어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으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이 영원한 사실이며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시사한다(Stott, Smalley).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셨다(1:1,2; 3:1; 5:1; 요1:12-14, Westcott).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음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한다. 즉 그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신이셨다(Marshall, Smalley).
성 경: [요일4:3]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성령과 악령]
⭕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 비록 '육체로 오신'이 생략되어 있다 할지라도 본문은 앞절과 대조를 이루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반대로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고 거짓 영에게 지배를 당하는 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참된 성령의 도움으로 성육신을 시인하는 것과 거짓 영의 지배를 받아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에는 절대로 중간 지대란 있을 수 없다(Law). 오직 양극만이 존재할 뿐이다.
⭕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번역된 헬라어 '토 투 안티크리스투'(*)는 헬라어 어순상 앞절의 '토 프뉴마 투 데우'(*, '하나님의 영')와 대조를 이루어 '프뉴마'(*, '영')가 생략되어 있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토 투 안티크리스투'가 거짓 영을 의미하나(Law) 문맥상 본문은 거짓 영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들, 즉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Stott, Smalley).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세상에 오심을 부인하거나, 그리스도께서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은 사단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거짓 선지자들이다.
⭕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 '이제 벌써'는 강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요한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들이 종말에 출현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했고(2:18) '이제 벌써' 수신자들 사이에 존재함을 밝힘으로 종말의 긴박성을 암시하고 있다(Smalley). 한편 '세상에'는 1-6절 사이에 무려 6번이나 나타나며 모두 부정적인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다. '세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며 통제하는 곳으로 하나님과 그의 뜻을 대적하는 세상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것을 지칭한다.
성 경: [요일4:4]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성령과 악령]
⭕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 요한은 본문에서 다시 '자녀들아'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 수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수신자들이 적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를 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여 그들을 이기었음을 확신시키고 있다. '하나님께 속하였고'는 수신자들이 하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세상과 연합하지 않고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시사한다. 한편 '이기었나니'의 헬라어 '네니케카테'(*)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승리가 과거에 결정적으로 성취된 것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효과가 현재까지 지속됨을 시사한다(Houlden). 이 승리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교리가 거짓임이 판명되었다는 사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Stott) 본서에서 믿음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승리는 지식적인 면에서 거짓된 교리에 대한 분별 뿐만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통해서 거짓된 교리를 정복하고 있음을 시사한다(Smalley). 그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된 교리의 유혹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 본문은 하나님께 속한 수신자들이 세상을 이긴 이유이다. '너희 안에 계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엔 휘민'(*)에서 '이'를 의미하는 '호'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3:20, Haas). (2)혹자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2:14; 3:24; 요14:20,23, Westcott). (3)혹자는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6절; 2:20,27; 요14:16,17; 16:13-15, Stott, Houlden). 이 세 가지 견해 중 어느 하나를 택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이신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가운데 역사하셔서 사단의 영향력 하에서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이기게 하시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에게 속하게 되며 그 결과로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Barker, Smalley). 한편 '세상에 있는 이'는 사단이나 악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2:13,14; 3:12; 5:18,19) 그는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아니하고 세상에 속한 자들을 미혹하며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오직 세상에 속한 자들에 한하며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에게는 그 세력을 행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단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이루셨으며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그 승리에 동참하기 때문이다(6절; 요16:33; 롬8:31, Stott, Calvin).
성 경: [요일4:5]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성령과 악령]
⭕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 '저희'는 적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교훈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킨다(Barker, Smalley). 한편 '세상에 속한 고로'의 헬라어 '에크 투 코스무'(*)에서 '에크'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로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서 비롯되었으며 세상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임을 시사한다. 또한 '세상'을 지칭하는 '코스무'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복음과 반대되는 사상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요한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주장하던 성육신을 부인하는 사상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사상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2)그러한 사상에 미혹된 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대치되는 당시 사상에 탐닉했고 그것에 빠져 거짓된 가르침을 전파하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려 했다.
성 경: [요일4:6]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성령과 악령]
⭕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 요한은 4절까지 '너희'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수신자들만을 지칭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인칭 대명사 '우리'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에 대해 혹자는 사도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Stott, Brooke)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Barker, Haas, Schnackenburg). 왜냐하면 이미 수신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4절).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으며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그의 영향력 하에 있다.
⭕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 본문은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 '우리의 말을 듣고'와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를 대조시키고 있다. '아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콘'(*)은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가르친 거짓 교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는 지식을 가리킨다. 더욱이 본절의 '아는'은 현재 시상으로 그 지식이 지속적이며 성장하는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한편 '우리의 말'은 사도들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복음, 즉 처음부터 있었던 말씀을 가리킨다(2:7, 24; 3:11; 요이1:5,9). 거짓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부인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 '진리의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요14:17; 15:26; 16:13, Marshall, Stott). (2)혹자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Dodd, Haas).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며 의미상으로 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지배 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서 진술해 온 것으로 보아 후자가 보다 적합한 듯하다. 한편 '미혹의 영'은 '진리의 영'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이것 역시 사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사단의 지배 하에서 거짓 가르침을 전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청종하는 여부에 달려있다.
성 경: [요일4:7]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 '사랑하는 자들아'는 본서에서 6번 나타난다(1,11절; 2:7; 3:2,21). 이 호칭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도로서 수신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서로 사랑해야 함을 요구하기 이전에 자신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한편 '사랑하자'의 헬라어 '아가포멘'(*)은 현재 시상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하나님의 요구임을 시사한다. 이 명령은 예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3:11; 요13:14-17,35).
⭕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 본문은 다음절의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와 연결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해야 하는 근거이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는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본질상 사랑이시며 모든 사랑의 근원으로서 그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셨다(Westcott, Marshall, Barker).
⭕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 호'(*)는 사랑하라는 명령이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혹자는 수신자 공동체 일원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하나(Bultmann) 보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Schnackenburg, Smalley). 한편 이러한 사랑은 단순히 사랑하는 태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 행위를 내포한다(3:18).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은 물론 행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러한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녀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드러낸다(Law). 곧 행위를 동반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자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드러내는 기준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으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요일4:8]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메 아가폰'(*)에는 앞절의 '사랑하는 자마다'(*, 파스 호 아가폰)에 삽입되어 있는 '파스'가 생략되어 있다. 본절에서 '파스'가 생략된 것은 본절의 사랑이 개인적인 권면을 가리키는 앞 절과는 달리 일반적인 의미임을 암시한다(Smalley). 한편 '알지'의 헬라어 '에그노'(*)는 부정 과거로 현재 시상을 사용한 앞절의 '기노스케이'(*, '알고')와 대조를 이룬다. '기노스케이'가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에 본절의 '에그노'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하나님을 전혀 알거나 경험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Marshall). 사랑하는 자가 모두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자는 반드시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앞절과의 대조를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본문은 7절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보다 더 발전된 표현이다. 요한은 7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랑의 근원이심을 밝힌데 이어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심을 선언한다. 즉 이것은 사랑이 하나님의 모든 행위들 중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사랑임을 시사한다. 요한은 본서에서 사랑을 언급할 때 행위와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이 사실은 수신자들 사이에 존재한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 즉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공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나 사실상 그들의 삶에서는 사랑의 행위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상 사랑이시기에 그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 경: [요일4:9]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 '우리에게'로 번역된 헬라어 '엔 헤민'(*)에 대한 해석은 네 가지이다. (1)혹자는 '우리 사이에'(among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alley, Stott). (2)혹자는 '우리 안에'(in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Westcott). (3)혹자는 '우리게게'(to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4)혹자는 '우리를 위하여'(for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ultmann). 이러한 네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Barker). 한편 '나타난 바 되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네로데'(*)는 '파네로오'(*, '나타내다')의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요한은 '파네로오'를 예수의 사역(1:2; 3:5,8),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나타나심(요21:1,14), 그리고 예수의 강림(2:28)에 사용하고 있다. 본절에서 사용된 부정 과거 '네파네로데'는 명확한 역사적 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다음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건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성육신을 가리킨다(Law, Smalley). 요한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랑을 현시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 '독생자'의 헬라어 '모노게네'(*)는 히브리어 '야히드'(*)를 번역한 것이다. '야히드'는 70인역에서 두 가지로 번역된다. (1)'사랑하는'(beloved)을 의미한다. (2)'유일한'(uni- que)을 의미한다. 본절에서의 '모노게네'도 예수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유일한 아들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한편 '보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스탈켄'(*)은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사건이 지속적으로 그 효력을 발휘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 사랑을 증거하신다.
⭕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 본문은 '히나'(*, '위하여')로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나타낸다. '살리려 하심이라'는 인간이 전에 '죽은 상태'임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시고 이루심으로 영적으로 죽은 인간을 생명으로 인도하셨다(3:14).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 사역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
성 경: [요일4:10]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 '여기 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투토 에스틴'(*)은 앞서 기술된 내용, 즉 9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3:16). 한편 '우리가...사랑한 것'(*, 에가페카멘)는 부정 과거 시상으로 본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는 시상의 변화가 있다. '에가페카멘'은 완료 시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결코 지속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반면에 '에가페센'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적인 특별한 사건에 의해서 나타났음을 시사하는데 곧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9절). 요한은 이러한 시상의 변화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의 사랑이 지속적이지 않아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Law, Smalley). 반면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인간에게 계시되어 사랑의 궁극적인 기원을 이루셨다.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사랑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것이다(Hou- lden).
⭕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본문은 앞 절의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와 병행을 이룬다. 9절에서의 '보내심'(*, 아페스탈켄)은 완료 시상인 반면에 본절의 '보내셨음이니라'(*, 아페스테일렌)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 부정 과거 시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구현된 특별한 속죄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화목제'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몬'(*)은 본래 '달래는 것'(propitiation)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의미는 단순히 성난자를 달래는 차원이 아니라 속죄(expiation)를 전제로 한다(Dodd, Westcott).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속죄함이 없이는 죄로 인해 형성된 하나님과의 소원한 관계는 절대로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본절의 '힐라스몬'은 '속죄'(expiation)의 의미와 '화목'(Propitiation)의 의미 둘 다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죄를 위한 화목제로 보내심으로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다(9절, Barker, Stott).
성 경: [요일4:11]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 '이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는 9,10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현시된 방법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한편 '하셨은즉'의 헬라어 '에이'(*)는 사실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것으로 사실상의 이유나 근거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문이 이후에 언급되는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의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께서 주신 계명으로(요13:34,35; 15:12,17)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요한의 이 권면은 당시 사랑의 계명을 평가절하하는 이단적 교리가 수신자들 사이에 팽배해진 것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Smalley). 한편 '마땅하도다'로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로멘'(*)은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시사한다. 물론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택 사항은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당연히 나타나야 할 실천 행위이다.
성 경: [요일4:12]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본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유대적인 사상으로(출33:20,23; 신4:12)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본문에 대해 혹자는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못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Houlden). 그러나 그렇게 해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본문은 수신자들 사이에서 영지주의를 전파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기 때문이다(Schnackenburg, Barker). 영지주의자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보아서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한다. 요한은 이러한 이단자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대하면서 하나님을 보는 것과 사랑의 계명을 연결시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영적으로 식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그리스도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라는 예수의 말씀과 동일한 것으로(14절; 1:1-3; 요1:18; 12:45; 14:9; 17:24).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영적으로 인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 요한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보았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격하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비록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을지라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행함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 품 속에 독생하신 예수께서 자신의 사랑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자신들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다.
⭕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 '거하시고'의 헬라어 '메네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 간의 지속적인 친근한 관계를 나타낸다(요15:1-10). 하나님의 내주와 깊은 관계를 나타내는 '메네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랑이 하나님의 내주와 지속적인 관계로 인해서 이루어 진다(Stott). 즉 하나님의 내주와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사랑의 행위의 근거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들 안에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내주하심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 '그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아우투'(*)에 대한 이해는 그 안에 나타난 속격과 관련하여 세 가지가 가능하다. (1)혹자는 주격적 속격으로 이해하여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Brooke, Wengst). (2)혹자는 목적격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odd, Lewis). (3)혹자는 속성을 나타내는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tott, Schnackenburg, Law). 이러한 세 가지 해석은 긴밀한 연관성을 맺고 있는 것으로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온전히 이루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테텔레이오메네'(*)는 완료 시상으로 지속적인 성취를 나타낸다. 이러한 사랑의 성취에 대한 요한의 주장은 2:5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요한은 2:5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케하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반면 본문에서는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것임을 암시한다(Smalley).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랑을 통해서, 즉 인간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Barker, Westcott, Stott).
성 경: [요일4:13]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는 '호티'(*, '왜냐하면')로 시작하는 절로서 본문 하반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의 근거가 됨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1-3절; 고전12:3).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한 성령은 그들로 하여금 믿음과 사랑을 경험하게 하여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즉 상호간의 내주를 확신할 수 있도록 내적인 증거를 제시한다(3:24). 한편 상호간의 내주를 나타내는 '거하고'(*, 메노멘)와 '아느니라'(*, 기노스코멘)는 현재 시상이다. 이 현재 시상은 믿는 자가 경험한 내주의 확신이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요한이 '기노스코멘'을 사용한 것은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신비한 지식을 깨달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나 요한은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성령을 공유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상호간의 내주를 경험하며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이며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교제함으로써 상호간의 내주를 확신한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이러한 교제, 즉 상호간의 내주(內住)는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을 가리킨다(3:24; 요3:5,6; 갈5:6).
성 경: [요일4:14]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 아들의 칭호인 '구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테라'(*)는 예수께서 승귀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2:22,23) 사람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셨음을 시사한다. 이 역시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것인 듯하다. 그들은 구원을 신비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죄보다는 무지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육체로 오신 예수께서 구주이시며 그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죄를 사함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선언함으로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하고 있다(2,10절; 1:7; 2:2; 5:6, Schnackenburg). 한편 '보내신'의 헬라어 '아페스탈켄'(*)은 9절과 같이 완료 시상이다. 이는 과거에 아들을 보내신 성육신 사건과 그의 구속 사역의 효력이 현재까지 지속됨을 시사한다(Stott).
⭕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 '우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활을 직접 지켜 본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Brooke, Schnackenburg, Wengst). (2)혹자는 기본적으로 사도들을 의미하며 그들에 의해 설립된 교회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Westcott). (3)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애를 지켜 본 목격자들과 연합한 교회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malley, Dodd). 이와 같이 '우리'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 할지라도 포괄적인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보았고'(*, 테데아메다)는 완료 시상이며 '증거하노니'(*, 마르튀루멘)는 현재 시상이다. 비록 둘 사이에 시상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속성을 나타낸다. 즉 과거에 보고 응답한 믿음과 현재에 그 믿음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연속적이며 지속적인 효과를 시사한다. 성령을 수여받은 사도들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12절)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주되신 예수를 알게되며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그 깊이를 더해 갈 뿐만 아니라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요15:26).
성 경: [요일4:15]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 '누구든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가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한 지식을 소유한 자신들만이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단 하나의 전제 조건,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기만 하면 누구나 예외없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선언한다. 한편 '시인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게세'(*)는 부정 과거이다. 영역 성경에서는 이 과거 시상을 표현하기 어려워 두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1)미래 시상으로 번역한다(shall confess, KJV). (2)현재 시상으로 번역한다(acknowledges, NIV, NEB; confess, RSV). 그러나 본문의 '호몰로게세'는 미래 시상이나 현재 시상이라기 보다는 비록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을지라도 공적으로 고백하는 자체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봄이 훨씬 더 타당하다(Stott, Smalley).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상호간의 내주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과 인간 상호간의 내주를 가능하게 하는 믿음과 순종의 고백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13절).
⭕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 본문은 13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를 나타낸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처럼 상호간의 내주도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 사역을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식하고 확신하게 된다(3:1,2).
성 경: [요일4:16]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본절이 속한 단락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본절이 11-15절에 속한 것이 아니라 본절부터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Marshall, Schnackenburg). (2)혹자는 앞절과 연결되어 11-16절까지 한 단락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Law, Stott, Barker).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문맥상 13,15절에서 언급된 상호간의 내주에 대한 진술이 본절에서 보다 발전된 형태로 진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번역된 헬라어 '텐 아가펜 헨 에케이 호 데오스 엔 헤민'(*)은 문자적으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사랑을'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삶 속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Law, Marshall, Westcott, Smalley). 한편 '알고 믿었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멘 카이페피스튜카멘'(*)은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사도들은 물론 모든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미 과거에 경험하여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알고 믿고 있음을 시사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확신할 수 있다. 요한은 이러한 진술을 통해서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황홀경이나 특별한 지식에 의해서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주장하나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한 것에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의지하는 믿음에 달려있음을 선포하고 있다(9,10,14절).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본문은 8절의 반복이다. 요한은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임을 주장하여 하나님을 알고 믿으며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나누는 자에게 사랑은 절대적인 속성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 본문은 13,15절에서 전술된 바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에 대한 보다 발전적인 표현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며(13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할 때 성취된다(15절).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이루어 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이 나타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의 삶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드러내는 증거이며 그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Smalley, Dodd).
성 경: [요일4:17]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이로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투토'(*)가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본문 다음에 언급되는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Schnackenburg). (2)혹자는 16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Marshall).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본문은 앞절과 이어지는 단락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 '사랑'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생활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2)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tott). (3)혹자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aas). (4)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Houlden). 이러한 네 가지 견해 중 포괄적인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담대함'의 헬라어 '파르레시안'(*)은 2:5에서 온전히 성취된 사랑과 연결되어 '순종'으로 묘사되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담대함이 믿음과 결과로 나타난다(요3:18; 5:24). 이러한 사실은 사랑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지속적인 내주를 이루며, 그 내주로 말미암아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됨을 시사한다. 즉,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생활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근거를 이룬다(Smalley, Westcott).
⭕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호티 카도스 에케이노스 에스틴 카이 헤메이스 에스멘 엔 토 코스모 투토). - 이는 문자적으로 '왜냐하면 그가 어떠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1)예수의 영원한 순수성, 사랑, 의로우심, 그리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의미한다(Brooke, Westcott, Haas). (2)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유혹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고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교제를 나누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할 것을 암시한다(Barker, Smalley, Stott).
성 경: [요일4:18]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 '두려움'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보스'(*)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한다(행9:31; 롬3:18; 고후5:11; 7:1; 엡5:21). 그러나 본절에서의 '포보스'는 앞절의 담대함의 반대 개념으로 노예가 갖는 두려움을 가리킨다(요19:38; 20:19; 롬8:15). 이러한 '포보스'는 사랑과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면 앞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전혀 두려움이 없이 담대해질 수 있다. 비록 죄는 두려움을 유발시킬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사랑을 소유한 자들에게 사랑은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 본문은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이다. '형벌'에 대해서 혹자는 마지막 날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정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며(Schnackenburg), 혹자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방해하는 고통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Bultmann). 이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Haas, Marshall). 즉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사랑 안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상호간의 내주와 사랑의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게 되며 그 결과 마지막 날에 죄로 인한 정죄함에서 오는 두려움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갖는 담대함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사랑은 공존할 수 없는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이다.
⭕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개역성경에는 반의 접속사인 '데'(*,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헬라어 본문의 '데'는 본문이 17절 상반절의 내용, 즉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하나님의 사랑'을 역으로 진술한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로 인하여 사랑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Westcott, Law). 그러기에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었다. 이와 반대로 만약 누구든지 담대함이 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지 못하였으며 그 사랑의 실체를 온전히 성취하지 못한 자이다.
성 경: [요일4:19]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요한은 10절을 반복하여 진술함으로 가장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사랑의 원리에서 출발하여 20,21절에서 형제 사랑의 문제로 요약하고 있다.
⭕ 우리가 사랑함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멘'(*)은 문자적으로 '우리가 사랑한다'라는 의미로 목적어가 없다. 목적어의 부재로 인해 '사랑'의 대상인 누구인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로 나뉜다. (1)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Stott, Houlden). 이들은 앞절의 진술과 연결시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 (2)혹자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이들은 20,21절에서 형제 사랑에 대해 언급된 것과 연결시켜 해석한다. (3)혹자는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aas, Marshall).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전후 문맥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어느 하나를 제외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본문은 이유를 나타내는 '호티'(*, '왜냐하면')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근거를 나타낸다. '사랑하셨음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가페센'(*)은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 시상은 전순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성육신 사건을 통해 계시된 것을 가리킨다(9,10절, Law, Smalley).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사랑의 삶은 본질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성 경: [요일4:20]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 '누구든지'의 헬라어 '에안 티스'(*)는 본서에서 거짓 이단자들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된 표현 방법이다(1:6,8,10; 2:4,9). 본문 역시 수신자 공동체 내에 팽배해 있던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공동체 내에서 신비한 지식을 통해 구원을 받고 다른 일원보다 우월하다는 환상에 빠져 타인을 돌보지 않았다. 요한은 그러한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반드시 다른 형제들을 사랑하게 됨을 강조한다. 여기서 '형제'는 수신자 공동체 일원을 가리키는 것은 물론 교회 밖의 일반적인 사람들 전체를 가리킨다(7,11,19절). 즉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만을 향한 것이며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게 된다. 한편 '거짓말하는 자니'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된다(Barker, Smalley). (1)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진리를 말하지 않는 자며, 그 진리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자이다. (2)거짓말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가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임을 드러낸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나 실상은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자들이다.
⭕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 개역성경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문이 상반절에서 언급된 '거짓말하는 자'의 근거임을 시사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거짓말쟁이인 것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형제에 대한 사랑 안에서 표현된다(12절). 즉 그리스도인은 타인에 대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타인을 사랑하게 된다.
성 경: [요일4:21]
주제1: [사랑의 본질과 필연성]
주제2: [사랑의 실천]
본절의 헬라어 본문은 '카이'(*, '그리고')로 시작하여 본절이 20절과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 요한은 이제까지 진술해 온 '사랑'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단 하나의 계명이기 때문이다(Stott). 이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반영한 것으로(막12:29-31) 요한은 이 계명에 대해 본서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위대한 계명으로 진술하고 있다(3:23; 요이1:5,6). 한편 '주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프 아우투'(*)는 문자적으로 '그로부터'라는 의미이다.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illiams, Stott, Westcott). (2)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니며 상호보완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성 경: [요일5:1]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 '믿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온'(*)은 현재형이고 '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겐네타이'(*)는 완료 시상이다. 양자의 헬라어 시상에 의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먼저요 믿음은 그 다음이다. 즉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 혹은 증거인 것이다(Smalley, Stott, Barker). '믿음'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으로(4:15; 요9:22)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를 분별하는 시금석이다.
⭕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 본문은 4:21의 반복이다. '내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겐네산타'(*)는 '낳다'러눈 의미의 동사 '겐나오'(*)의 부정 과거 분사형으로서 '아버지'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낳으시고 자녀삼아 주셨으며 친히 아버지가 되셨다. 요한이 이같이 하나님을 '내신 이'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과 신자들을 가족 관계로 유비(類比)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에게서 난 자'로 번역된 헬라어 '게겐네메논'(*)은 단수형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나(Augustine)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문법상 단수로도 집합적인 의미의 그리스도인 전체를 지칭할 수 있으며, 문맥상 본문이 믿음과 모든 그리스도인들 간의 사랑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또한 하나님 안에서 형제를 사랑한다. 요한은 본절에서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 사랑의 불가 분리적 관계성을 강조한다(4:19,20).
성 경: [요일5:2]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 본서는 전반적으로 형제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는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본절에서는 그 표현이 반대 형태로 되어 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에 나타난 역설적 표현의 어색함을 해소하기 위해 '이로써'가 앞절에 설정된 원리를 가리키며, '우리가...사랑하는 줄을'을 '우리가 사랑해야만 한다'로 해석한다(Marshall, Dodd). 그러나 '이로써'가 앞절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이유는 없다. '이로써'는 본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형제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근거함을 나타낸다(4:8,16,19, Smalley).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불가 분리의 관계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며 형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입증된다.
성 경: [요일5:3]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즉 순종과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는다. 모든 계명 중 가장 우월한 계명이 사랑 계명인 바 그 안에 하나님의 계명이 내포되어 있으며(Smalley) 그 계명에 대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그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이미 예수께서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요14:31; 15:10).
⭕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 '무거운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레이아이'(*)는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주장하는 무거운 또는 가벼운 율법이라는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마23:23, Smalley, Schnackenburg).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주장한 율법과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었던 반면에(마23:4; 눅11:46) 그리스도께서 주신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이다(마11:30). 하나님께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셨고(4:19)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주셨으며(Dodd) 설사 그 계명을 만족시키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용서해주시기 때문에(Calvin) 하나님의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므로 그것은 가벼운 것이다.
성 경: [요일5:4]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 여기서 '난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 토 게겐네메논'(*)은 중성이다. 계속 남성 명사를 사용하다가 갑자기 중성 명사로 바꾸어 쓴 것은 이 말씀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 세상을 이기느니라. -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인간적 욕망을 가리킨다(2:15-17, Smalley).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역사하는 이러한 악에 대해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승리한다(18-20절; 2:13,14). '이기느니라'의 헬라어 '니카'(*)는 현재 직설법으로서 계속해서 이겨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투쟁 속에서 이러한 계속적인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신 이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요16:33; 19:30). 사도 요한은 본절에서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삶을 말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요16:33)를 우리가 믿고 고백할 때 그 이김은 우리의 거싱 되고 우리는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게 된다(롬8:37). 여기서 '이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사사'(*)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 한 개인의 회심과 같은 개별적인 경험을 표현할 때나 공동체의 역사에서 특별한 한 순간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시제이다(Brooke). 본절에서 사용된 '니케사사'는 과거에 성취된 명확한 승리와 상관 관계를 갖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신 세상에 대한 승리를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것을 시사한다(Haas, Smalley).
성 경: [요일5:5]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1절의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이라는 표현과 거의 동일한 의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안에 계시되어 있음을 시사한다(Marshall).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세상을 능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유하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된다. 한편 '이기는 자'의 헬라어 '니콘'(*)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4절의 '니카'(*, '이기느니라')와 같은 시상이다. 이는 투쟁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이겨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승리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성 경: [요일5:6]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 본문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옆구리를 창에 찔렸을 때 흘리신 물과 피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ugustine, Williams) (2)혹자는 요4장과 6장을 근거로 하여 세례와 성찬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ullmann, Westcott, Luther, Calvin). (3)혹자는 구약 시대의 희생제사와 연관하여 물은 정결케하는 것이며 피는 희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lummer, Candlish). (4)혹자는 물은 예수께서 받으신 요한의 물 세례요 피는 십자가의 대속의 보혈이라고 주장한다(Tertullian, Alford, Meyer, Barker, Stott, Marshall).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요한 당시에 케린투스(Cerinthus)와 같은 영지주의자들은 천상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을 때 예수에게 임하셨다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떠났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였다. 요한은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오셔서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것을 분명하게 설파함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육체를 가지신 인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 본문은 앞서 언급된 상반절의 반복으로 영지주의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강조한다. 본절 상반절에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할 때는 '디'(*, '...을 통하여')를 사용한 반면에 본문에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할 때는 '엔'(*, '...안에서')을 사용한다. 본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께서는 물과 피를 통하여 임하셨을 뿐만 아니라 물 안에서 그리고 피 안에서 임하신 자이다'라는 의미이다. 요한은 위치나 장소를 나타내는 두개의 전치사를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더욱 강도하고 있다(Marshall, Smalley).
성 경: [요일5:7]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 개역성경에는 본절이 앞절과 분리되어 또 하나의 절로 기술되어 있으나 헬라어 본문에서는 본절이 앞절에 포함되어 있다. '증거하는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마르튀룬'(*)은 현재 분사로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증거하심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로 오셨음을 믿게 하는 성령께서 믿는 자안에 내주하셔서 지속적으로 예수에 대해 증거하신다(2:20,27; 4:1-6, Stott). 또한 성령은 예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임하심으로 객관적인 증거를 보이셨다(요1:32).
⭕ 성령은 진리니라. - 예수께서는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요14:6) 성령을 가리켜 진리의 성령이라고 증거하셨다(요15:26; 16:13).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이 본문에서 성령께서 진리이심을 선언한 것은 진리이신 성령만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증거할 수 있음을 밝히기 위함이다(Johnson).
성 경: [요일5:8]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 '성령과 물과 피'에 대한 견해는 다섯 가지이다 (1)혹자는 성령과 물과 피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세 가지 등급으로 생각하여 예언자와 세례요한, 그리고 요한 일서의 저자인 자신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engel). 그러나 성령을 예언자와만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한 발살이며 피를 요한 일서의 저자와 연결시키는 것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논리이다. (2)혹자는 세 가지 증거들이 세례(요3:5-8), 성만찬(요6:54-56), 그리고 성령을 받음(요20:22)의 '신비적인 사건들'에 각각 상응한다고 주장한다(Windisch). 그러나 이 주장은 상당히 작위적이다. 이 견해는 정당성을 주장키 위해 본절의 세 가지 증거들의 순서를 바꾸고 있으며 더욱이 근거로 제시된 참고 성경 구절들도 예수를 증거한다는 개념과는 무관한 것들이다. (3)혹자는 세 가지 증거들이 기독교 초기에 존재한 '기름 부음과 세례와 주의 만찬'이라는 예배 의식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한다(Manson, Nauck).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세례 이전에 기름 부음을 실행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 (4)혹자는 물과 피를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성례전의 상징으로 보아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된다는 견해를 주장한다(Dodd, Bultmann, Law, Westcott, Barker). 세례와 성만찬 즉 이 두 가지 성례전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여 증거한다. (5)혹자는 '물과 피'를 6절과 같은 의미로 보아 물은 예수의 세례를 상징하고 피는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의 피를 상징하며, '성령'은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의 머리 위로 강림하셨고(요1:32),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의 피를 흘리사 그의 사역을 다 이루시고(요19:30) 영광을 받으신 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증거하심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요7:39; 20:22, Smalley). 이러한 견해들 중 마지막 두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 요한은 본문에서 성령과 물과 피가 같은 결과를 향하여 함께 작용함으로써 한 점에 수렴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세 가지 증거들이 예수께서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증거함을 시사한다. 한편 구약 시대 율법에 의하면 증인이 둘 이상이라야 어떤 사실이 입증되었다(신19:15). 요한이 이러한 율법을 염두에 두고 세 가지 증거를 제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Stott).
성 경: [요일5:9]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 율법에 의하면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증거하는 일은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신19:15). 죄악되고 부패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의 증거일지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면 더욱 크고 완전한 하나님의 증거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증거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속에 선포되며 물과 피를 통하여 역사 속에 선포된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면(裏面)에서 세 가지 증거 즉 성령과 물과 피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가장 근원적인 증거이다.
⭕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호티 하우테 에스틴 헤마르튀리아 투 데우, 호티 메마르튀레켄 페리 투휘우 아우투). - 본문은 두 개의 '호티'(*, '왜냐하면')로 구성되어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을 받아들일 만한 이유를 나타낸다. 그 하나님의 증거는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세 가지 증거들, 즉 성령과 물과 피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증거하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마르튀레켄'(*)은 완료 시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신 것이 지속적으로 유효함을 나타낸다. 즉,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에 성령의 임재와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자신의 아들임을 확증하셨으며(마3:16,17; 요1:33,34) 예수의 고난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증언하셨다(요12:28-30). 이러한 역사적 증언은 성령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사람들에게 증언되고 있으며 두 가지 성례전 가운데 성령의 내증으로 실현되고 있다(Stott, Barker).
성 경: [요일5:10]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9절). 그 결과 믿는 자들은 자기 자신 안에 하나님의 증거를 소유하게 된다. 이 증거는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내주하여 증거하시는 내적 증거를 의미한다(8절, Brooke, Law, Williams). 이러한 내적 증거는 외적 증거인 '물과 피'와 조화를 이루어 믿는 자들의 믿음을 근원이 됨과 동시에 결과가 된다(Stott).
⭕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 본문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음이란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믿지 않음을 말한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물과 피로 임한 인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해 이렇게 증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증거를 거짓으로 만들며,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취급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요한은 이러한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주장을 극단적으로 확증한다. 한편 본절은 롬1:19,20을 상기시킨다. 우주 만물 속에 하나님의 신성이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으므로 믿지 않는 자들은 도무지 자기의 불신앙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을 것이다.
성 경: [요일5:11]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 '영생'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이 생명은 본래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가(1: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안에서 완벽하게 현시된 것이다. 이것은 아들이신 예수와의 관계성 속에서 믿는 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과 유일하시며 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지고의 생활이다(요17:3, Smalley). 이러한 영생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성육신하신 인간이심을 증거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 들일 때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그러기에 이 결과인 영생을 알고 소유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증거가 참되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인간임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한편 '주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도켄'(*)은 유일회적인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보정 과거 능동태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를 통해 구속 사역을 행하신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활동의 실제성과 역사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생을 이미 주셨으며, 영생을 주신 사실은 불변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 본문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영생과 아들의 불가 분리적 관계를 나타낸다. 그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한 인간이신 예수 안에 현시되어서 그 아들이 행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 즉 '물과 피'의 증거를 통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곧 생명임에도 불구하고(요14:6) 요한이 예수와 생명을 동일시하지 않고 생명이 아들 안에 있다고 표현한 것은 아마도 예수께서 성육신하셨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듯하다.
성 경: [요일5:12]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 여기서 '있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콘'(*)은 '에코'(*, '가지다')에서 파생된 현재 분사이다. 요이1:9에서는 같은 뜻의 현재 동사 '에케이'(*, '가지다')가 '모시다'란 말로 번역된 것으로 보아 본절에서 아들이 있는 자란 현재 아들을 마음 속에 모신 자를 가리킨다. 아들이 생명 자체이며 아들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11절; 1:2; 요11:25; 14:6) 아들을 모신 자는 영생을 소유하게 되며 아들의 말씀에 순종하여 높은 수준의 영적, 도덕적 삶을 영위함과 동시에 그러한 삶 속에서 아들의 인격을 닮아가게 된다. 아들은 그리스도인 안에 거주하면서 함께 삶을 영위하며(3:24) 완전하게 하며(4:12) 영원한 삶을 영위케 한다.
⭕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생명을 주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길 이외의 어떤 길에서도 생명을 찾을 수 없다(요14:6; 행4:12).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를 마음 속에 모시지 못한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한편, 본절 상반절에서는 '아들'이라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점에 주목하여 '하나님의'란 말이 추가된 것에 대해 혹자는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Bengel, Plummer) 혹자는 영생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며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Brooke, Marshall).
성 경: [요일5:13]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이것을 쓴 것은. - '이것을'의 헬라어 '타우타'(*)는 문자적으로 '이러한 것들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타우타'가 가리키는 것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1-12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Schnackenburg). 혹자는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Smalley, William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에 나타난 기록 목적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인 요20:31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타우타'가 다양한 주제를 가리키는 복수로서 1-12절까지 언급된 영생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만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랖사'(*)는 서신체 부정 과거로 비록 요한이 현재 본서를 기록한다 할지라도 본서를 받아보는 수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과거의 행위이기 때문에 단순과거로 기록되어 있다.
⭕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본문은 '히나'(*, '위하여')로 시작하는 목적절로서 본절이 본서를 기록한 목적임을 나타낸다. 본절에 나타난 기록 목적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요20:31).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영접한 모든 이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시키기 위함이다. 한편 혹자는 본절이 요한 일서의 본론이고 14-21절은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한다(Bultmann). 본절이 요한 일서의 전체적 결론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타당성을 가지나 결론적 언급이 꼭 이 편지의 맨 마지막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본절은 요한이 자신의 편지를 끝맺기 위한 결론적 언급의 서두로 간주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Johnson).
성 경: [요일5:14]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 여기서 '향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는 '생동적인 교제 안에서 실현되는 관계'를 암시하는 전치사이다. 이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생동적이고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암시한다(Brooke). 한편 '담대함'의 헬라어 '파르레시아'(*)는 본서에서 네번 사용되었다. 즉 주의 재림과 심판날에 믿는 자들이 갖는 담대함과(2:28 ;4:17),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3:21,22). 본절에서 믿는 자들이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은 기도 응답의 확신에서 비롯된다.
⭕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 '구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토메다'(*)는 중간태로서 간구하는 행위 자체가 주어인 간구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기도자의 간구가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응답자이신 하나님의 계명 즉 그의 뜻에 부합되어야 한다(요15:7, Marshall). 이러한 기도는 단순한 요구사항이 아니며 기도자의 생활과 뜻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부합되게 하여 복종하겠다는 고백이다(Johnson). 그럴 때에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된다.
성 경: [요일5:15]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 본문은 14절의 반복이다. 14절의 간구와 응답은 구체적 현실성이 강조된 반면에 본절의 경우는 일반적 원리성이 강조된다. '무엇이든지'라는 말씀에는 죄악된 인간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간구는 당연히 제외되며 앞절에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올바른 기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요11:42) 믿는 자들의 기도도 들어주신다.
⭕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 '구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테카멘'(*)은 직설법 완료형으로서 기도자의 객관적 기도 사실과 그 결과를 강조한다.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진정한 간구는 이미 그 결과를 얻은 것이다. 기도의 가시적인 응답이 미래에 나타날지라도 그 기도는 이미 효력을 발생하였다(Plummer, Brooke, Dodd). 한편 본절은 '안즉...아느니라'(*, 오이다멘...오이다멘)로 되어 있어 지도자가 갖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확신을 초래하여 기도자의 확신이 더욱더 확실하게 됨을 시사한다(Stott).
성 경: [요일5:16]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 본절에 나타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살인이나 간음 혹은 우상 숭배와 같은 특별한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주장한다(Tertullian). 그러나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로 분류한 것을 찾아 볼 수 없기에 이 견해는 적합하지 않다(Stott). (2)혹자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배교나 적그리스도 혹은 거짓 교사들의 죄와 같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과 부합되지 않는 죄를 가리키며,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믿는 자들이 유혹에 넘어가 범할 수 있는 일반적인 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Smalley, Johnson, Alford, Clarke). 이 견해는 이제까지 요한이 언급한 문맥과 일치한다. 이 두 번째 견해에 대해 혹자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게서 '생명'을 주시는 것으로 보아 그 형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 반론을 제기한다(Stott). 그러나 이 반론 역시 문맥에서 해결이 가능하다. 즉 지속되는 불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배교를 하도록 하는 가능성을 내포하기에 요한은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며 우상을 멀리하라고 경고하고 있으며(18,21절) 초대 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배교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히6:4-6, 10:26-31). 한편 요한은 앞에서 기도와 응답에 대해서 진술한 바와 같이 본절에서도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범죄한 형제를 위한 기도는 굶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직접 제공하는 것과 같은 사랑의 행위로(3:17)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기도이다(Johnson). 이러한 중재 기도를 통해서 범죄한 형제는 죄의 고백의 필요성과 서로의 용서의 필요성을 확인하며 행하게 된다(요20: 23). 이러한 중재 기도의 권면과는 달리 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 즉 배교의 죄를 범한 자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금하지도 않고 권하지도 않는다.
성 경: [요일5:17]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모든 불의가 죄로되. - 여기서 '불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디키아'(*)는 '옳지 못한 행실'을 의미한다. 요한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의 문제를 언급하다가 갑자기 본문을 진술한 것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인간적으로 구분하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죄들의 경중을 마음대로 구분함으로써 '죄 자체의 심각성'이 축소되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인 듯하다.
성 경: [요일5:18]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하나님게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앞절과 관련시켜서 믿는 자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Calvin). (2)혹자는 '범죄치 아니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하마르타네이'(*)가 현재에도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내는 현재시상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믿는 자는 계속 반복되는 범죄나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Stott).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우리가 아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멘'(*)은 18-20절에 걸쳐 세 번 사용되고 있다. 이 '오이다멘'은 지식으리 활동 상황을 나타내는 '기노스코'(*, '알다')와 달리 주로 지식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절에서 영적 지식의 확실성을 한층 더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 본절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 호겐네데이스 에크 투 데우)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1)상반절의 '난자'(*, 게겐네메노스)는 완료 분사형인 반면에 본문의 '나신 자'(*, 겐네데이스)는 부정 과거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라는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기 때문이며, (2)'나신 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만 문맥상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개념은 신약성경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요17:12; 벧전1:5; 유1:24). 요한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악과 사단의 영향력에서 보전하실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요17:12,15).
성 경: [요일5:19]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 본절은 하나님과 세상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여기서의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단의 세력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비록 사단의 세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속하여 사단이 만지지도 못할 정도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보호하신다.
성 경: [요일5:20]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키며(1:1,2) '참된 자'는 하나님을 지칭한다(Smalley, Stott, Brooke).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로서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으며(요14:6)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셔서 대속 사역을 이루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참된 자되신 하나님의 실재를 깨닫도록 인도하셨다.
⭕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 본문은 본절 상반절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시는 중보자가 되신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자들은 참된 자이신 하나님 안에 있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예수께서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요17:21).
⭕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는 문자적으로 '이 사람'을 의미한다. '후토스'가 가리키는 자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Stott, Smalley, Brooke). (2)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uther, Calvin, Marshall, Hass, Schnackenburg, Brown).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녀서 어느 하나를 지지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토스'는 문맥상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낫다(Johnson).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는 참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여 하나님을 부정한 것에 대한 요한의 결론적인 공격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영생'이라는 사실은 이미 본서 서두에 언급된 것으로(1:1,2; 요11:25; 14:6)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곧 영생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수신자들이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음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요한의 결론적 진술이다(Smalley).
성 경: [요일5:21]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 -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저자의 권고는 요한 서신 전체의 논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우상 숭배란 용어 자체가 본서에서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서 자체가 당시의 이단 종파인 영지주의에 대하여 날카롭게 공격하고 있음을 볼 때 본절에서 말하는 우상 숭배는 영지주의 사상을 인정하고 승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말은 영지주의의 위험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굳게 믿으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요한은 이러한 파격적인 결론을 통해서 수신자들에게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