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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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당하다 suffer, 견디다 endure.||#1. 고전 헬라어 문헌||(a) 파스코는 호머 때부터 사용되었으며,|① 기본 의미는 선이든 악이든 간에 내 자신 밖에서 와서 나에게 영향을 주는 '어떤 것을 경험한다'를 뜻한다.|② 파스코는 원래 '해를 입다(당하다)'를 의미하였으나(Homer) 후에 '당하는 어떤 것을 경험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③ 따라서 '∼에 영향을 받다'(to be affected by)라는 의미도 함축한다. 그러므로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는 추가 단어들을 통하여 표현해야 했다. 예를 들어 카코스 파스케인(악한 상황에 있다, Homer), 유 파스케인(좋은 상황에 있다, Sophocles). 그러나 파스코 자체가 부정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에 '좋은'과 같이 그 반대 상황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을 때 외에는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게 되었다. 따라서 '영향을 받다'는 개념은 고난의 의미로 바꾸어졌다. 호머는 '죽다'를 뜻하는 말로도 사용했다.||(b) 파스코는 상당히 오래된 법정 용법으로, '형벌을 당하다, 벌을 받다'를 의미하며, 벌이나 중형을 나타낸다.||(c) 대부분의 경우에, 파스코는 '당하다, 겪다, 경험하다'라는 의미에서, 불행, 치명적 타격들, 사람들이나 신들의 냉대를 당하거나 겪는 것을 의미한다. 병이 든 경우에, 그 의미는 병든 것보다 병으로 고생하는 것, 병으로부터 고통을 겪는 것을 의미한다. 그 강조를 언제나 고통스런 느낌보다 재앙에 대한 경험에 두는 것이다. 파스코가 감정을 나타낼 때 고통보다는 분위기에 더 관련된다. 따라서 '당하다, 겪다'보다는 '∼기분이다, ∼에 영향(혹은 감동)을 받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 어군은 고통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이것에 대해서 많은 답변이 시도되었다.||(d) 스토아 철학자들은 고난의 개념을 보편적이며 우주론적인 의미로 확대시켰다. 그들에 의하면 비신적 존재의 생명은 모두 고난을 받는다. 즉 외부적 영향과 정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서들은 참된 지식과 덕의 실행을 방해하므로 정욕(파데)은 '평정함 dispassionateness'(아파데이아)의 이상이 이루어질수 있게 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e) 신비주의 문헌에는 창조된 모든 것을 고난의 대상이며 하늘의 영역에 속한 가장 숭고한 존재들은 알려지지 않은 최후의 존재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신비론자와 만나는데 필요한 조건은 자아가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방은 이성에 있어서는 무아경(ecstacy)의 순간에 발생한다. 그러나 죽음 후에만 영원히 향유될 것이다(Corp. Herm.1,l5; l.l22).||#2. 70인역본의 용법||파스코는 70인역본에서 21회 나오며, 3회 상당하는 히브리어를 번역한다. 파스코는 겔 16:5; 슥 11:5에서 하말(동정심을 갖다)의 역어로, 암 6:6에서 할라의 니팔(괴롭힘을 받다, 상함을 입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이 동사는 외경에서 더 많이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의 적들이 받는 고통이든지, 이스라엘의 고난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후자는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연단을 위한 것이라면, 전자는 심판이다.|마카베오이서와 마카베오사서에서 파스코는 고통을 당하는 순교를 나타내는 전문용어가 아니며, 심지어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마카베오이서 7:18, 32에서는 백성들의 고통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일 뿐이며, 마카베오사서 14:9에서의 의미는 '스스로 경험하다, 겪다'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에 파스코는 '(순교자로서) 고난을 당하다' = '죽다'라는 의미로 발전하였다.||#3. 신약성경의 용법||파스코는 신약성경에서 42회 사용되었으며, 구약성경의 인용문들이나 요한의 기록에서 요한계시록에는 한번 나올 뿐이다. 일반 서신들 중에는 베드로전서에만 나온다. 바울은 이 동사를 드물게 사용한다. 그러나 공관복음서. 사도행전, 히브리서에는 매우 자주 나온다.||1. 일반적인 의미. 파스코와 그의 파생어들이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몇 개의 구절들이 있다. 곧 갈 3:4; 눅 13:2; 행 28:5에서는 '경험하다'는 의미로 일률적으로 번역될 수 있다.|마 27:19에서 빌라도의 아내의 말에 나타난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여기서 우리가 파스코를 '형벌을 받는다'는 의미를 취한다면, 빌라도의 아내는 아마도 그녀가 그녀의 남편이 무죄한 자에게 행한 악행에 대하여 벌을 받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꿈에 번민과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다.|막 5:26에서 혈루증에 걸린 여인에 대하여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아마도 오로지 아프고 귀찮은 처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겪어야 하는 잡다한 치료 방법과 잘못된 치료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의미는 그녀가 이미 많은 의사들에게 많은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다|고전 12:26의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는 구절에서 파스코는 '해를 입는다, 불리하게 영향을 받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대조를 이루는 독사제타이(영광을 얻으면)가 밝혀 준다.||2. 그리스도의 고난.|(a) 파스코는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수난에 관련하여 두 가지 용법을 가지고 있다.|① 첫째로 파스코는 독립적으로(부정사로) 사용되어 분명히 '죽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이 명백하게 언급되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다른 사항들, 예를 들어 부활(눅 24:46; 행 3:18; 행 17:3), 영광에 들어가심(눅 24:26) 또는 스스로 살아계심을 나타내심(행 1:3)과 함께 나오는 구절들에서 특히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구절들에서 예수님의 고난은 히브리서와 베드로전서에서와 같이 죽음 그자체이다.|② 둘째로 파스코는 사용되는 구절들에서(막 8:3; 마 16:21; 눅 9:22; 막 9:12; 마 17:12; 눅 17:25), 강조점이 보다 수동적인 것이다(예: 마 17:12) . 여기서 폴라 파데인(많은 고난을 받는 것)이 주요 개념은 아니다(막 8:31; 눅 9:22). 이 문구의 목적은 아마 현재 벌어지는 사건에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보이려는 것이다. 임박한 그리스도의 고난이 처음으로 언급되는 곳에서 폴라 파데인(많은 고난을 받고)은 대제사장에게 재판 받기에 앞서 겪는 고난들을 언급할 뿐이며 그의 죽음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눅 17:25에서 처음의 두 가지 요소들의 사용은 "고난과 버림을 받으심이" 하나의 고정된 구절임을 암시한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운명은 폴라 파데인(많은 고난을 받는 것)이며,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포도키마스데나이(버린바 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태는 폴다 파데인의 범위를 신중하게 확대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죽으심까지 적용시키고 포함시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살아나야 하신다"(마 16:21).|비록 헬라어 번역본이 사 53:4,11에서 파스코를 사용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이 구절들이 신약성경의 구절들의 배후에 놓여 있어서 '담당하거나 견디다'는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이사야 3장은 분명히 대속적 고난 및 죽음이라는 개념을 나타내며, 그렇다면 예수님은 파데인(고난)의 대리적 주체이며, 그의 폴라 파데인(많은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임무 수행을 위한 순종적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리고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수난이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인 필연성에 기인한 것이며(마 16:21; 눅 17:25; 눅 24:26; 행 17:3),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것(막 9:l2; 눅 24:26; 행 3:18)이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예수님이 당한 고난의 유일성은 파도()라는 용어를 선지자들의 박해(마 5:12)나, 세례(침례) 요한의 경우(막 9:12)나, 자기 제자들의 고난(막 8:34 이하)에는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고난에만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b) 히브리서와 베드로전서에서 파데인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대분의 용법과 같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① 히브리서는 파데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타내는데, 그 의미는 '죽는 것'이다. 히 13:12에서 기자는 구약의 속죄제와 같이(레 16:2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예수님의 죽음을 분명히 말한다. 히 2:18에서는 히 2:9의 언명으로 보아 이 사실이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5:7에서는 물론 겟세마네 동산을 말한 것이지만, 히 5:8은 여기서 더나아가 골고다에까지 말하는 것이다(참조: 빌 2:8; 롬 5:19). 히 9:26에서도 문맥상("단번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브리서는 결코 '우리를 위하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나 이런 뜻을 포함하고 있다. 히브리서의 파데인은 죽음(히 2:9; 히 2:14,등), 피(히 9:12; 히 9:14), 그리고 십자가(히 12:2)와 관련되어 있다.|② 베드로전서도 히브리서에서와 마찬가지의 의미를 나타낸다. 벧전 2:21; 벧전 2:23에서 예수님의 파스데인은 그의 죽음이다: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4:1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심은 핵심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베드로전서는 이 죽음이 '죄를 인하여'(벧전 3:18), '우리를 위하여'(벧전 2:21)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이 서신은 죽음의 유일회적 성격(벧전 3:18), 죽음과 부활의 관계(참조: 벧전 3:21 이하; 벧전 3:18과 벧전 4:1의 사이), 고난과 영광의 연결(벧전 1:11)을 강조하며,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파스데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파스데인의 본보기로서의 성격을 크게 강조한다(벧전 2:21).||3. 그리스도인들의 고난.|(a) 사도행전. 신약성경 기자들은 예수님 자신과는 다르게 파데인을 신자들이 받는 고난을 표현하는 데도 사용하고 있다. 행 9:16에서는 행 9:15에서 말하는 임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것이라면 일반적인 의미의 고난을 뜻하며, 그 임무가 이방인들 "앞에서" 전하는 것이라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고난을 뜻한다. 오직 고난받는 것이 '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행 9:16에서 "받아야 할" 것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파데인은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사도를 선택된 그릇으로 확인해주는 것등이다(참조: 고후 11:23 이하).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은 적극적인 성격을 말해 준다.||(b) 바울의 서신. 바울은 보통 파스케인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독자들에 관련시켜 사용한다. 딤후 2:12에 보면 그는 자기의 고귀한 직분을 수행하는 중에 고난을 당하지만, 그러나 이 고난은 자신의 사역을 증진시킨다(딤후 1:8; 딤후 2:3).|살전 2:14에서만 바울은 수동태를 사용한다. 빌 1:29은 빌 1:30의 관점에서 보면 능동적 소리를 울린다: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안에서 듣는 바니라". 여기서 파스케인은 "그(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파스케인일 경우에는 전체 공동체체의 특권이다. 이것은 물론 구속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대상을 그리스도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마데마타(고난)는 그리스도의 마데마타(고난)로 간주되며(고후 1:5 이하), 또한 종말론적인 목적을 가진다(참조: 살후 1:5과 롬 8:17에서의 영광과의 연결).||(c) 베드르전서.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의 파스케인의 모범적인 성격을 더욱 강조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파스케인의 경우에는 '죽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통치자들이나 법정에서 부당하게 받는 형벌들과, 혹시 피난, 위협, 모욕, 차별대우,등을 포괄한다(참조: 벧전 4:16). 이 예들의 요점은 파스케인의 부당성에 있다.|벧전 3:14에서 부당성은 의무 이행에도 불구하고 처벌당할 뿐만 아니라, 바른 일을 하는데도 처벌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만일 의무를 다하는데도 처벌을 받는다면, 여기에 사상은 옳은 일을 행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는 사상이다. 고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반드시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의 자취를 따라가고 있으며(벧전 2:21), 또한 종말론적 지향을 나타낸다(벧전1:6-벧전 1:7; 벧전 5:1O). 벧전 4:1에서는 세례(침례)를 통한 거듭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참조: 벧전 3:21).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신 것과 같이 세례(침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그치고,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만 살아 가는 것이다(롬 6:11). 이것은 세례(침례)를 나타내기 위해 전용된 유일한 용례이며, 이것은 파데인을 '죽다'는 의미로만 사용할 때와 로마서 6장의 교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에 대해 다음 구성도 참고하기 바랍니다.||*【그리스도의 백성의 고난. (a) 고난과 교제: 고난의 사상은 코이노니아($2842: 친교)에 대한 신약성경의 개념과 분리 될 수 없다.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무장한 사람은 육체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벧전 4:1; 참조: 고후 11:23 이하).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는 것(벧전 4:16)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여(벧전 4:13; 빌3:10)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쉼파스코멘, 롬 8:17)을 의미한다. 진실로 이것이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 간에 존재하는 신비한 연합이므로 기독교인들의 고난은 하나로 또한 같은 몸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고후 1:5). 여러 교회들이 공통적인 고난의 끈으로 묶음으로써 연합되며(살전 2:14; 벧전 5:9). 또한 같은 원리가 개교회에도 적용된다.|만일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단순한 동정심뿐만 아니라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연민(쉼파스코)을 나타내려면 믿음에 있어서 참된 일치가 요구되는 것이다(고전 12:26; 히 10:34). 고난의 교제에 대한 더 중요한 예는 사도와 지역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고난의 교제(고후 1:6 이하), 또는 개별 제자와 사도 사이에 존재하는 고난의 교제이다(딤후 1:8; 딤후 2:21).|가장 큰 본은 예수 그리스도시니(벧전 2:21),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의 증인'으로서 사도 자신을 위한 일 뿐만 아니라(벧전 5:1; 참조: Ignatrus, 롬 6:3) 사도를 따르는 자들이나(딤후 3:l0 이하) 또는 자신을 본받으라는 부름을 받은 자들에게까지 본이 되신다(고전 11:1). 선지자들이 부당한 고난(카코파데이아, 약 5:1O; 광야의 세대에 의하여 보여진 악한 본과 대조, 광야의 세대는 악을 즐겼다, 고전 11:6)을 견디는 선한 본이 되었던 것과 똑같이 이제 사도들은 선한 본을 보인다. 그들의 고난은 그들의 사역의 일부분이었고, 교회의 참된 종들을 확인하는데에 기여하였다(참조: 고후 11:23 이하). 사도 바울의 "교회를 위한 고난"(골 1:24)은 성격상으로 구속의 고난이 아니라 선교의 고난이다.|그러나 모든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과의 교제는 아니다. 이 범주 안에 있는 고난에 부응하면, 사도와 교회는 자신들의 직분을 위한, 또 기독교인으로서의 소명을 위한 고난을 받아야 한다. 곧 그들은 기독교인들로서(벧전 4:16) 애매히(벧전 2:19) 고난을 받아야 했다. 마치 악을 행한 자나 살인자로(벧전 4:15; 눅 23:32 이하), 즉 당연하게(눅 23:4) 고난을 받아야 할 자로서 간주되지는 않을지라도 악을 행한 자와 같이(벧전 2:12) 고난을 받았다(카코파데오, 딤후 2:9).|이러한 의미에서 참된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고난(벧전 4:19),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고난(행 9:16; 빌 1:29), "복음을 위한" 고난(딤후 1:8), "하나님을 생각하는" 고난(벧전 2:19), "의를 위한" 고난(벧전 3:14),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소망 중에 기다리는 고난(살후 1:15)으로 칭해진다.||(b) 고난의 종말론적 측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위대한 종결, 즉 완전히 이름에 대한 수단이 되는 것(히 2:10)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백성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벧전 5:9).|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는 본질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영원한 영광"의 소망과 비교할 때 기독교인이 현재 받는 고난의 시기는 "잠간"에 불과하다(벧전 5:10). 롬 8:18에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들은 미래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고난까지도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 가게 하신 이"(벧전 5:1O)께서 주시는 귀한 은사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빌 1:29; 벧전 2:19).|요한복음도 그리스도의 모든 지상 생애를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본다. 곧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영광스러운 생애이므로 어떠한 파스코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일한 방법으로 바울은 빌 3:10에서 자신의 새생명의 목적을 (첫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다음에는) 주님의 고난에 참예함을 체험적으로 알게되는 것으로 말한다.|신약성경에서는 고난과 인내(살후 1:4 이하; 히 10:32) 뿐만 아니라 고난과 영광(롬 8:17; 벧전 5:1; 벧전 5:10)까지도 거듭 거듭 동일하게 언급된다. 바울은 고린도인들과 자기와의 교제 관계를 고난과 위로의 관계로 생각한다(고후 1:7). 실로 바울은 종말론적 영광으로 전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난의 개념을 일시적인 의미로 받아들였고 모든 피조물을 망라하는데까지 확대하였다(롬 8:18 이하). 곧 인간 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까지 영광스러운 목표(텔로스)에 이르는 구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고난의 종결을 기다리지 않고 고난의 목표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고통이 가득차고 죽을 운명으로 지워진 생명에 단순하게 위로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 굴욕과 모욕, 그리고 사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반격인 것이다'(J.Moltmann, TheoIogy of Hope, l967 21)】|(참조: W.Michaelis; J.H.Thayer; B.Gart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