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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신하다
nhvfw
술취하지 않다, 정신차리고 있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네포(Soph., pta., Xen.이래)는 기본어이며, '술취하지 않다, 정신차리고 있다, 근신하다, 침착하다'를 의미한다.|이 단어의 배후에 있는 사상은 술취함의 반대인 맑은 정신, 제정신(Sobriety)이란 개념을 전달한다. 이 단어들은 문자적 의미로 포도주를 먹지 않은 상태에 대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또한 비유적으로 '완전히 맑은 정신 상태', 또한 '맑은 정신에서 나오는 올바른 판단'을 나타내기도 한다.||#2. 구약시대의 용법||동사 네포가 70인역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필로에 있어서 네포는 하나님에게 알맞게 다가가는 필수조건이며 하나님을 거스리는 모든 것을 사려 깊게 회피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De. Ebr. 131).||#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네포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주로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a) 살전 5:6; 살전 5:8의 네포는 임박한 파루시아에 요구되는 각성과 관련하여 나타난다: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b) 딤후 4:5에서 네포는 허탄한 신화들의 교활한 유혹에 저항할 수 있는 맑은 정신을 가리킨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c) 베드로전서에서 네포는 일반적으로 종말론적 배경을 갖고 있다. 벧전 1:13에서 예수님의 임박한 현현을 위한 적절한 마음 가짐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4:7에서 마지막 때의 기도를 위한 적절한 마음 가짐을 나타낸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5:8에서 마지막 날에는 악마의 흉폭한 대적 행위가 분명하게 나타나므로 이에 저항할 수 있는 각성이 필수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참조: Walter Bauer; P.J.Budd).
아비야
!Abiav
아바야(인명)||#1. 구약성경||아비아는 히브리어 아비이야(29)의 음역이며, '여호와는 아버지이시다'를 의미한다. 이 아비야는 구약성경에서 아비야로 불리워지는는 9명 중 한 사람이다.|아비아는 아론 자손이며, 다윗 때의 제사장이다: 레위 사람 느다넬의 아들 서기관 스마야가 왕과 방백과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과 및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족장 앞에서 그 이름을 기록하여 엘르아살의 자손 중에서 한 집을 취하고 이다말의 자손 중에서 한 집을 취하였으니... 일곱째는 학고스와 여덟째는 아비야요(대상24:6,10).||#2. 신약성경||(a) 아비아는 마태복음의 족보에서 예수님의 조상으로 나온다: (마 1:7).||(b) 족보에 세례(침례)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는 아비야 반열에 속하는 제사장이었다: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눅1:5).
욕을 받다
loidorevw
모욕하다 insult, 욕설하다 abuse, 욕하다 revil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로이도레오(pinder 이래)는 '책망(비난)하다, 모욕하다, 욕설하다', 종교적 용어는 아닐지라도 심지어 '모독하다'를 의미한다.|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적수에 대한 비방, 모욕, 험담 등에 중요성이 부여된 것은 오히려 헬라인들의 정치적, 사회적 생활에서였다. 예를 들면 정치 논쟁에서의 웅변 무기로서 또는 호머의 영웅들의 무기와 같은 경우이다.||#2. 70인역본의 용법||로이도레오는 70인역본에서 9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리브(다투다, 싸우다, 비난하다, 분투하다, 출 17:7; 출 21:18; 민 20:3; 민 20:13; 신 33:8)의 역어로 6회, 가아르(책망하다, 렘 29[36]:27)의 역어로 1회 사용되었다.|창 49:23; 마카베오이서 12:14에서는 이 동사가 상당어 없이 출현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로이도레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타난다. 이 단어는 고전 헬라어에서와는 달리 주로 종교적 문맥에 사용되었다.||(a) 헬라인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법 또는 자신에 대한 모욕을 참는 법을 아는 것이 생활 술책들 중의 하나였다면, 신자에게 있어서 비방과 모욕을 받는 것은 기독교인 제자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의 증거인 것이다(벧전 2:23; 고전 4:12).|벧전 2:23에 인용된 그리스도 찬양가에서 그의 "욕받으신 것을 표현한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이것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이상의 어떤 문제이다. 제자는 순종하기 위하여 자유함을 받은 자로서, 구속 받지 못한(unredeemed ) 세상의 성격과 끊임없이 직면하여 있으며, 또한 세상에서 자신의 주님이 받은 고난에 참여한다.|고전 4:12의 공식적 진술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는 형태의 믿음을 유지시키는 문제이다: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우리가 비방을 받되 축복으로 응대하는 것은, 터득할 수 있는 생활의 기술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복음의 능력의 증거인 것이다. 우리는 이를 믿음으로써 성취하여야 한다.|요 9:28에서 '욕지거리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이 사람들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함으로, 그들의 종교 형식을 힘들게 옹호하고 있다.||(b) 행 23:4이하에서 로이도레오는 블라스페메오($987)와 동일하게 사용된다: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은 대제사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며 예언적 저주를 발한다. 왜냐하면 그 대제사장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권세를 남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그를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하였다는 진술은 아마도 반어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곧 아나니아는 자신의 직분을 행사하는 방법에 있어서 대제사장 답게 행동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타당한 방식으로 행동하였다면 이 저주는 모독(blasphemy)이 되었을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H.Thayer; H.Wahrisch ).
찬송 받을
eujloghtov"
축복받는, 찬송받는 blisse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율로게토스는 율로게오($2127: ~좋게 말하다, 칭찬하다, 찬양하다, 축복하다)에서 유래했으며,||(a) '좋게 말해지는',|(b) '칭찬받는, 찬양받는',|(c) '축복받는, 복받는'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a) 형용사 율로게토스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나오며, 히브리어 바라크(1288: 무릎을 꿇다, 찬양하다, 축복하다, 복주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찬양을 필요로 하신다는 히브리적 관념에서 생겨났지만, 후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는 통찰로 변화되었다.||(b) 구약성경에서는 사람 역시 '여호와께 복받은 자'로 불리우며(창 12:2; 26:29; 43:28), 보다 자주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신 28:6; 삿 17:2; 토빗 13:12; 유딧 13:18). 그러나 더 흔하게는 다음과 같은 관용 문구로 사용된다: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창 9:26; 14:20; 삼상 25:32; 삼하 18:28; 왕상 1:48; 왕상 8:15; 대하 2:11). 에스드라상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할지로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토빗 3:11; 8:5; 시 41:13; 68:19; 슥 11:5. 창 14:19 이하의 멜기세덱의 축복에서 둘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본다. 히브리어 바루크는 두 관용 문구에서 사용된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율로게토스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온다.||(a) 율로게토스는 신약성경에서 결코 사람에게 사용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만 사용되었다.|① 눅 1: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② 롬 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③ 롬 9: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④ 고후 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⑤ 고후 11: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⑥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⑦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아마도 전례적 형식 문구는 회당의 그것과 유사하게 매우 이른 초기에 생겨난 것 같다. 하나님은 스스로 찬양 받으시지만 우리 가운데서 찬양 받으시도록 우리가 여기서 기도한다는 루터의 사상을 따를 때 이 단어의 종교적 의미를 가장 잘 취하게 된다.||(b) 막 14:61에서 그리스도는 '호 휘오스 투 율로게투'("찬송받을 자의 아들")이라고 불리우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바꿔 쓰는 유대적 습관의 반영이다: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그리스도냐".|(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W. Beyer; H. -G. Link).
긍휼히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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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운, 동정적인.||#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엘레에몬(Homer 이래)은 엘레에오($1653: 불쌍히 여기다, 자비나 동정을 베풀다)에서 유래했으며, '동정심이 있는, 자비로운'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엘레에몬은 70인역본에서 약 30회 나오며, 히브리어 한눈(2587: 호의적인, 자비로움)의 역어로 '자비로운'이나 '은혜로운'(출 22:26; 대하 30:9; 느 9:17; 시 111:4)을, 헤셋(2617a: 선함, 친절, 경건, 긍휼)의 역어로 '인자한'(잠 11:17; 잠 20:6)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엘레에몬은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고전 헬라어 용법과 같이 사용되었다.||(a) 히 2:17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그의 '자비스러운' 성격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b)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구절에서 그 동기는 명백히 하나님의 자비이며, 긍휼히 여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이 구절에서 동사는 수동태가 사용되어 그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간접적으로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아바
!Abba'
아바, 아버지||아람어에서 아버지를 뜻하는 '압바(abba)'라는 말은 신약성경에는 세 곳에만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사용하셨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바울이 주기도문을 생각하고 말한 두 구절에 나타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4; 롬 8:15)."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아람어 원문에는 '압바'로 나타난다(눅 1:2).||아람에서 압바(abba)는 원래 그에 동등한 여성 명사 임마(imma)처럼 유아 언어에서 파생되었다. 어린애가 젖을 떼게 되면 그 아이는 압바(아빠)와 임마(엄마)라고 말하는 것을 배운다.|이러한 의미가 확장하여 아버지의 호칭형인 압바란 단어가 더 이상 아이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성인이 된 아들 딸들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단어의 유아적 성격(아빠)은 사라지고, 압바는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러한 따뜻하고 친숙한 느낌을 얻게 되었다.|예수님은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름으로서 완전히 새롭게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식을 가르치고 있다.||압바라는 어린애답고 친근한 용어를 기도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한 것이다. 고대 유대주의가 낳은 신앙에 관한 모든 문헌 중 어디서도 압바가 하나님을 부르는 방식으로 사용된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예레미아스(J.Jeremias)는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호칭형으로 압바를 사용했는지를 조사한 결과…모든 유대 문서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말로서 압바를 사용한 예는 단 한군데도 없었다'고 하였다.||신앙심 깊은 유대인들은 일상 가정생활에서 사용되는 친숙한 언어로 하나님을 부르기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큰 격차가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전 5:1).|하나님은 무한히 자애로운 아버지의 사랑을 가지신 분이시지만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열국을 다스리시며, 파도를 명령하시며, 창조와 재 창조를 하시며, 온 세상의 왕으로서 심판과 자비를 내리시며, 무한히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꺼려한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압바로 부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어린애답고 친근한 용어, 압바를 기도에서 사용하신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독특한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향한 예수님의 신뢰와 순종의 태도 뿐아니라(막 14:36) 비할데 없는 권위를 표현한다(마 11:25).||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 그들에게 자기를 따라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르는 권세를 주시고, 그렇게 함으로 그들을 아들인 자기의 지위에 동참하게 하셨다.||그리고 초대교회는 기도에서 압바를 사용하는 것을 이어받았다, 이것은 바울이 주기도문을 생각하고 있었던 두 구절에 나타나 있다(롬 8:14; 롬 8:15; 갈 4:6). 바울은 사랑하는 아버지 압바를 부르는 것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아들로 삼으시는 증거와 성령을 받은 증거를 찾아보고 있다(롬 8:14이하; 갈 4:4-갈 4:7).||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압바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은 또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나타내는 것이다: "내가…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후 6:18; 삼하 7:14의 자유로운 인용).[참조, 0. Hofius].
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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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 무한히 긴 시대, 시대, 수명, 신기원, 영원.||#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이온(Homer 이래)은 세속 헬라어에서|(a) '생명력'이나 '생명' vital force, life(Hom., Od., Pind.), 호머는 아이온과 프쉬게(영혼, 생명)를 유사어로 사용했다.|(b) '일생, 수명' lifetime(Hesiod., Pind., Thuc., Xen).|(c) '시대' age, '세대' generation(Aeschyl.),|(d) '시간의 기간' space of time, '시간' time(Demosth.), 과거나 미래, 현재와 관련될 수 있다.|(e) '영원' eternity(Plat.), '영원부터'(Lycurg. Diod. 등), '영원히'를 의미한다.||후대의 철인들은 아이온이 까마득한 과거, 세상의 태초와 먼 미래, 영원(예: Plato, Tim. 37d) 양자를 뜻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겼다. 플라톤(Plato)에게서 아이온은 발전되어, 무시적이고, 측량할 수 없는 초월적인 초시간(super-time)을 의미한다. 플루타크(Plutarch)와 초기 스토아 학자들이 시간을 이렇게 이해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아이온은 영원한 신의 이름이 되었으며, 이 아이온, 즉 '영원의 신'을 위한 제전이 알렉산드리아에서 거행되었다.||헬레니즘 철학에서 아이온들의 개념이 세계 질서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공헌하였다. 아이온들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무한한 질적 상위를 조정하는 중재 세력으로 생각되었다. 아이온들은 신의 플레로마(pleroma)의 유출, 신적 존재의 충만이다. 신성의 존재의 다른 양태인 아이온들은 영구적 순환 운동으로 이어지는 여러 세계사적 시대들을 지배한다. 인격적, 신적 아이온 사상이 고대 동방의 공론들에서, 예를 들면 페르시아 사상에서, 조로아스터 종교와 필로(Philo)에게서 널리 퍼져 있었다. 영지주의에서, 한편으로 영원하며 초시간적인 세계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일시적이며 추이적인 세계를 나타내는 두 시대(aeons)의 교리가 보여진다.||#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아이온은 70인역본에서 약 450회 이상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올람 어군(영원, 영원히, 긴 시대, 항상, 오래된, 고대의, 세상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a) 아이온은 일정 기간의 범위를 나타낸다.|종의 고용 기간(신 15:17; 출 21;6), 사무엘의 성전 봉사를 위한 헌신 기간(삼상 1:22), 아론의 자손들의 제사장 복무 기간(출 29:9)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모든 경우에 그 기간은 사람의 전 생애에 걸치며, 또한 그 생애 내에만 국한된다. 이것은 평생 왕직의 약속의 경우(삼상 13:13), 모세가 생존하는 한 백성들이 그를 신뢰함의 경우(출 19:9) 혹은 평생 가신 관계의 경우(삼상 27:12)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것이 그 관련자의 죽음과 더불어 종결됨은 물론이다.||(b) 아이온은 '긴 기간'을 나타낸다.|① 아이온은 개인 뿐만 아니라 세대나(예: 출 40:15; 출 32:13; 시 18[17]:51) 혹은 전 민족(수 4:7; 삿 2:1)에 대해 사용될 경우에도 역시 위의(a)와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이러한 실체들의 쇠퇴와 더불어 그들의 시간도 종식된다.|이것은 '영원'이나 '영원'이라는 말들로 표현되는 관용구들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도 신뢰할만한 단서를 제공한다. 대상 16:36에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하리로다"고 하였다. 찬양의 계속은 이처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민족의 영속과 연관된다. 사실상 대상 16:15에서 "영원히"와 "천대에"가 병행한다. 그러므로 관용구 "영원부터 영원까지"는 다른 문구 "대대로"(출 40:15; 사 13:20)에서 유래하였음이 아주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관용구는, 여기에서도 추상적이고 무한정적인 관점에서 생각되는 영원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결부된 인간의 생애와 찬양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되찾는다. 삼상 2:30과 삼상 3:13 이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은 추상적 불변성이 아니라, 인간과의 상호적 관계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고스란히 보존되는 한, 영원하지만 부서질 수 있다.|② 영원히 세워진 큰 약속이라도 단지 초시간적, 불변적으로 유효한 것이 아니다. 이 약속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있는 관련점에 결속되어 있다. 성전의 영원성이 하나님의 임재에 달려있으며(왕상 9장), 왕권의 영원성도 그러하다(삼하 7장).||(c) 아이온는 완전한 의미에서 '영원'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명은 제한되었으므로(창 6:3), 그 수명이 끝없는 지속의 바탕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완전한 의미에서 아이온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멸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영원히 살아계시고(신 32:40; 참조: 창 21:33)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며(참조: 사 40:28)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신다(시 90:2)라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은 무궁한 시간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시므로 말씀은 영원하며(사 40:8), 그의 구원은 영원하다(사 45:17).||(d) 아이온은 미래의 시간(출 14:13; 신 13:16; 신 23:3, 신 23:6; 신 29:29; 수 8:28; 미 4:7) 뿐만 아니라, 먼 고대의 시간도 의미할 수 있는 그 까닭을 설명해 준다(창 6:4; 신 32:7). 여호와의 미래의 날과 관련하여 암 9:11; 미 5:2[1]에 나타난다.||(e) 우리가 또 주목할 것은 서력 기원 전환기의 랍비 유대주의와 A.D.1세기의 묵시 문학에서(예: 에스드라스 하) 시간적 의미와 공간적 의미를 아울러 나타내는 올람의 아주 새로운 용법이다. 분명히 페르시아 사상의 영향 하에서 최초의 시간과 최후의 시간에 관한 구약의 진술들(사 24-27; 욜 2)은 두 세계(aeons) 교리로 체계화되었다. 이 교리에서 유일한 공통 요소는, 하나님은 이 세계와 저 세계의 주이시며, 이 시대와 저 시대의 주이시라는 점이다. 이 시대는 불의와 죄, 고통의 시대이므로 이 두 세계는 대조적으로 관련된다. 장차 올 시대가 이 시대를 밀어내고 대신 들어서게 될 때 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니, 그 때에는 의인이 살 새 땅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용어 아이온(aion: 영원)과 코스모스(kosmos: 세계)의 신약적 유사성도 이 사상에 근거한다. 대망되는 메시야가 미래 시대에 친히 오시거나 혹은 "메시야의 날"이 새 시대가 뒤따를 과도기로서 생각된다. 이것은 "이 시대"(헬, 호 아이온 후토스/ 히, 하올람 핫제), "장차올 시대"(헬, 호 멜론 아이온/ 히, 하올람 합바)라는 용어에 반영되어 있다(참조: Arndt.27).||#3. 신약성경의 용법||아이온은 신약성경에서 약 122회 나오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a) 아이온은 '긴 시간'이나 '시간의 지속' 또는 '영원'이란 의미를 나타낸다.|아이온은 이 경우에 특정하게 제한된 시간의 기간을 뜻하며, 무제한적 기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주로 전치사와 함께 사용된다. '영원'(eternity)이란 의미는, 신약을 크게 좌우하고 있는 구약의 시간 개념이 영원성을 일시성의 정반대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그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① 아이온은 종종 전치사와 함께 사용되어 '영원'을 나타낸다(요 6:51; 요 12:34; 요 14:16; 고후 9:9; 히 15:6; 히 7:17, 히 7:21 등; 벧전 1:25; 요일 2:17; 유 1:13). 그것은 특히 복수형으로 사용될 때 적용된다(마 6:13; 눅 1:33; 롬 1:25; 롬 9:5; 롬 11:36; 고후 11:31; 히 13:8; 유 1:25). 이 복수의 사용은 영원의 개념을 더욱 충분히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히 1:8; 히 13:21; 벧전 4:11; 벧전 5:11 등에서도 영원의 개념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된 것인데, 이것은 엡 3:21("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에 나오는 문구와 같은 것이다. 벧후 3:18에서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라고 한다.|② 아이온은 하나님과 연관될 때 완전한 의미에서 '영원'을 의미한다(롬 16:26; 딤전 1:17). 신약성경은 구약의 방식(c)을 따르지만 하나님의 영원을 그리스도에게까지 확대 적용하는데 이는 새로운 발전이다(히 13:8; 계 1:17이하; 참조: 히 1:10이하; 계 2:8; 계 22:13).||(b) 아이온은 세상의 시간을 나타낸다.|① 세상의 시간이란 의미의 아이온은 세상의 끝을 말할 때 사용되었다(마 13:39; 마 13:40; 마 13:49; 마 24:3; 마 28:20). 히 9:26; 고전 10:11에 나오는 복수형은 본질적인 차이점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러한 표현은 본질적으로 세계의 존속 기간이며, 큰 아이온은 일련의 보다 작은 아이온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암시한다.|② 세상이라는 의미의 아이온은 '세상의 시간'이라는 의미로부터 쉽게 우주와 아이온이라는 방정식을 가진(고전 1:20; 고전 2:6; 고전 3:18이하) '세상'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마 13;22; 참조: 고전 7:33). 복수형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세상들'을 의미할 수 있다(히 1:2; 히 11:3).||(c) 아이온은 현재와 미래 시대, 그리고 태고에 대하여 사용되었다.|① 현재 시대에 대해서는 마 12:32; 눅 16:8; 눅 20:34, 눅 20:35; 롬 12:2; 고전 1:20; 고전 2:6; 고전 2:8; 고후 4:4; 갈 1:4; 딤전 6:17; 딤후 4:10; 딛 2:12; 엡 1:21, 미래 시대에 대해서는 막 10:30(눅 8:30); 히 6:5에 나타난다. 그리고 아이온이 에이스와 결합된 표현으로, 마 21:19; 막 3:29; 눅 1:55; 요 13:8; 고전 8:13 같은 구절들은 언급된 그 시간의 지속과 연관된, 시간 내의 미래를 말함이 분명하다.|② 아이온('~부터'를 뜻하는 아포와 에크, '전에'를 뜻하는 프로와 함께)의 태고의 의미는 누가의 기록에서(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없음) 하나님께서 예로부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는(눅 1:70; 행 3:21; 행 15:18), 그리고 -세 구절 모두가 밝히듯이- 첫 선지자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다는(눅 24:27) 진술의 문맥에서 나타난다. 이 단어는 또한 요 9:32에서 "창세 이후로"의 의미로 보여진다. 고전 2:7; 엡 3:9; 골 1:26 및 특히 유 1:25에서 그 의미는 시간 이전의 영원(pre-temporaleternity)에 가깝다.||(d) 아이온이 부정어와 결합되었을 때, '결코 …아니'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전 8:13; 요 13:8).||(e) 엡 2:2에서 아이온은 아마도 '영' sprit을 나타낸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 세상의 풍속이란 표현은 '이 시대(세대)의 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F.Foulkes).|(참조: Walter Bauer; H.Sasse; J.Guhrt).
갈리오
Gallivwn
갈리오 Gallio||갈리온은 '우유를 먹고 사는 자'라는 뜻이며, 한글개역성경에서 '갈리오'로 음역한다. 신약성경에서 행 18:12; 행 18:14; 행 18:17(3회)에 나타난다: "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와서 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치 아니하니라".||갈리오는 A.D. 51-52 또는 52-53년에 고린도에 주재하고 있던 아가야의 지방 총독(KJV '총독 대리', 행 18:12-행 18:17)이다.|수사학자 안네우스 세네카의 아들이며 철학자 세네카의 형제인 그는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마르쿠스 안네우스 노바투스(Marcus Annaeus Novatus)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수사학자 루시어스 주니어스 갈리오(Lucius Junius Gallio)의 양자가 되어 양부에게서 행정과 정치 교육을 받았다(Tac. 16, 17). 그는 매우 상냥한 사람이었다. 세네카는 그의 논문 "de vita Beata"를 그에게 헌정하였고, Naturales Quaetiones의 서문에서 그를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델피(Delphi)의 비문은 그가 로마 황제 글라우디우스로부터 26번째 대갈채를 받은 후에 아가야 지방의 지방총독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그의 재직 기간은 51-52년 혹은 52-53년이다. 플리니(Pliny)에 의하면 아가야의 기후는 갈리오 자신의 말과 그를 병들게 했다. 그는 그의 재직 기간이 끝난 후 폐출혈에서 회복되기 위해 이집트로 갔다. 이 후 그는 로마로 돌아와 네로 통치 초기에 원로원 의원(consul suffectus)이 되었다. 그는 그의 형제와 함께 네로를 타도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고 일시적으로 용서를 받았으나 그 후 이내 네로의 명령으로 자살을 강요받았거나 사형되었다(Dio Cassius, History 62.25. Seutonius, Rhetoric).||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고린도에 주재하는 동안, 유대인의 무리가 사도 바울을 재판 자리 앞으로 끌고 와서 그가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권한다고 고소하였다. 갈리오는 우선 로마법에 따라, 이 사건을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도록 허용하지 않은채 기각하였다. 유대인 무리가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 재판석 앞에서 때렸을 때에도 갈리오는 자기의 특권을 사용하지 않았다(행 18:12-행 18:17).|(참조: A. Rupprecht)
고통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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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곤란한, 악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칼레포스(Homer. 이래)는||(a) '힘든, 어려운, 곤란한'을 의미하며, 참기 어려운 말들, 또는 다루기 힘들어서 위험한 인간들이나 동물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참조: 예: Josephus, Antiquities 15,98).|(b) 도덕적으로 '나쁜, 악한'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칼레포스는 70인역본에서 11회 나오며, 오직 히브리어 야레(3372: 두려워하다, 경외하다, 사 18:2)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칼레포스는 지혜서에서는 도덕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악'과 '사악'을 뜻한다(지혜서 3:19; 지혜서 17:11; 지혜서 19:13). 한편 집회서 3:21에서는 지적 어려움, 즉 학생들에게 너무 어려운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칼레포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마태복음과 디모데후서에만 사용되었다.||(a) 마 8: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만하더라". 여기서 칼레포스는 가다라 지방에 있는 귀신들린 두 사람의 격렬한 난폭성을 가리킨다. 이것은 마태 특유의 표현 수법이다.||(b) 딤후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여기서 칼레포스는 특이한 방식으로 종말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이 때는 자기 이익이 인간 관계의 결정적 요인이 되는 고통과 고난의 때이다(참조: 딤후 3:2-4).|(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P. J. Budd).
오타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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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ear||#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오타리온은 오티온($5621: 귀)에서 유래했으며, '귀' ear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오타리온은 신약성경에서 2회,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만 나온다.|막 14:47(병행구 요 18:10),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고난을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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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당하다 suffer, 견디다 endure.||#1. 고전 헬라어 문헌||(a) 파스코는 호머 때부터 사용되었으며,|① 기본 의미는 선이든 악이든 간에 내 자신 밖에서 와서 나에게 영향을 주는 '어떤 것을 경험한다'를 뜻한다.|② 파스코는 원래 '해를 입다(당하다)'를 의미하였으나(Homer) 후에 '당하는 어떤 것을 경험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③ 따라서 '∼에 영향을 받다'(to be affected by)라는 의미도 함축한다. 그러므로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는 추가 단어들을 통하여 표현해야 했다. 예를 들어 카코스 파스케인(악한 상황에 있다, Homer), 유 파스케인(좋은 상황에 있다, Sophocles). 그러나 파스코 자체가 부정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에 '좋은'과 같이 그 반대 상황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을 때 외에는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게 되었다. 따라서 '영향을 받다'는 개념은 고난의 의미로 바꾸어졌다. 호머는 '죽다'를 뜻하는 말로도 사용했다.||(b) 파스코는 상당히 오래된 법정 용법으로, '형벌을 당하다, 벌을 받다'를 의미하며, 벌이나 중형을 나타낸다.||(c) 대부분의 경우에, 파스코는 '당하다, 겪다, 경험하다'라는 의미에서, 불행, 치명적 타격들, 사람들이나 신들의 냉대를 당하거나 겪는 것을 의미한다. 병이 든 경우에, 그 의미는 병든 것보다 병으로 고생하는 것, 병으로부터 고통을 겪는 것을 의미한다. 그 강조를 언제나 고통스런 느낌보다 재앙에 대한 경험에 두는 것이다. 파스코가 감정을 나타낼 때 고통보다는 분위기에 더 관련된다. 따라서 '당하다, 겪다'보다는 '∼기분이다, ∼에 영향(혹은 감동)을 받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 어군은 고통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이것에 대해서 많은 답변이 시도되었다.||(d) 스토아 철학자들은 고난의 개념을 보편적이며 우주론적인 의미로 확대시켰다. 그들에 의하면 비신적 존재의 생명은 모두 고난을 받는다. 즉 외부적 영향과 정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서들은 참된 지식과 덕의 실행을 방해하므로 정욕(파데)은 '평정함 dispassionateness'(아파데이아)의 이상이 이루어질수 있게 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e) 신비주의 문헌에는 창조된 모든 것을 고난의 대상이며 하늘의 영역에 속한 가장 숭고한 존재들은 알려지지 않은 최후의 존재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신비론자와 만나는데 필요한 조건은 자아가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방은 이성에 있어서는 무아경(ecstacy)의 순간에 발생한다. 그러나 죽음 후에만 영원히 향유될 것이다(Corp. Herm.1,l5; l.l22).||#2. 70인역본의 용법||파스코는 70인역본에서 21회 나오며, 3회 상당하는 히브리어를 번역한다. 파스코는 겔 16:5; 슥 11:5에서 하말(동정심을 갖다)의 역어로, 암 6:6에서 할라의 니팔(괴롭힘을 받다, 상함을 입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이 동사는 외경에서 더 많이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의 적들이 받는 고통이든지, 이스라엘의 고난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후자는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연단을 위한 것이라면, 전자는 심판이다.|마카베오이서와 마카베오사서에서 파스코는 고통을 당하는 순교를 나타내는 전문용어가 아니며, 심지어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마카베오이서 7:18, 32에서는 백성들의 고통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일 뿐이며, 마카베오사서 14:9에서의 의미는 '스스로 경험하다, 겪다'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에 파스코는 '(순교자로서) 고난을 당하다' = '죽다'라는 의미로 발전하였다.||#3. 신약성경의 용법||파스코는 신약성경에서 42회 사용되었으며, 구약성경의 인용문들이나 요한의 기록에서 요한계시록에는 한번 나올 뿐이다. 일반 서신들 중에는 베드로전서에만 나온다. 바울은 이 동사를 드물게 사용한다. 그러나 공관복음서. 사도행전, 히브리서에는 매우 자주 나온다.||1. 일반적인 의미. 파스코와 그의 파생어들이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몇 개의 구절들이 있다. 곧 갈 3:4; 눅 13:2; 행 28:5에서는 '경험하다'는 의미로 일률적으로 번역될 수 있다.|마 27:19에서 빌라도의 아내의 말에 나타난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여기서 우리가 파스코를 '형벌을 받는다'는 의미를 취한다면, 빌라도의 아내는 아마도 그녀가 그녀의 남편이 무죄한 자에게 행한 악행에 대하여 벌을 받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꿈에 번민과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다.|막 5:26에서 혈루증에 걸린 여인에 대하여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아마도 오로지 아프고 귀찮은 처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겪어야 하는 잡다한 치료 방법과 잘못된 치료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의미는 그녀가 이미 많은 의사들에게 많은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다|고전 12:26의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는 구절에서 파스코는 '해를 입는다, 불리하게 영향을 받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대조를 이루는 독사제타이(영광을 얻으면)가 밝혀 준다.||2. 그리스도의 고난.|(a) 파스코는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수난에 관련하여 두 가지 용법을 가지고 있다.|① 첫째로 파스코는 독립적으로(부정사로) 사용되어 분명히 '죽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이 명백하게 언급되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다른 사항들, 예를 들어 부활(눅 24:46; 행 3:18; 행 17:3), 영광에 들어가심(눅 24:26) 또는 스스로 살아계심을 나타내심(행 1:3)과 함께 나오는 구절들에서 특히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구절들에서 예수님의 고난은 히브리서와 베드로전서에서와 같이 죽음 그자체이다.|② 둘째로 파스코는 사용되는 구절들에서(막 8:3; 마 16:21; 눅 9:22; 막 9:12; 마 17:12; 눅 17:25), 강조점이 보다 수동적인 것이다(예: 마 17:12) . 여기서 폴라 파데인(많은 고난을 받는 것)이 주요 개념은 아니다(막 8:31; 눅 9:22). 이 문구의 목적은 아마 현재 벌어지는 사건에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보이려는 것이다. 임박한 그리스도의 고난이 처음으로 언급되는 곳에서 폴라 파데인(많은 고난을 받고)은 대제사장에게 재판 받기에 앞서 겪는 고난들을 언급할 뿐이며 그의 죽음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눅 17:25에서 처음의 두 가지 요소들의 사용은 "고난과 버림을 받으심이" 하나의 고정된 구절임을 암시한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운명은 폴라 파데인(많은 고난을 받는 것)이며,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포도키마스데나이(버린바 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태는 폴다 파데인의 범위를 신중하게 확대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죽으심까지 적용시키고 포함시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살아나야 하신다"(마 16:21).|비록 헬라어 번역본이 사 53:4,11에서 파스코를 사용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이 구절들이 신약성경의 구절들의 배후에 놓여 있어서 '담당하거나 견디다'는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이사야 3장은 분명히 대속적 고난 및 죽음이라는 개념을 나타내며, 그렇다면 예수님은 파데인(고난)의 대리적 주체이며, 그의 폴라 파데인(많은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임무 수행을 위한 순종적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리고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수난이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인 필연성에 기인한 것이며(마 16:21; 눅 17:25; 눅 24:26; 행 17:3),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것(막 9:l2; 눅 24:26; 행 3:18)이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예수님이 당한 고난의 유일성은 파도()라는 용어를 선지자들의 박해(마 5:12)나, 세례(침례) 요한의 경우(막 9:12)나, 자기 제자들의 고난(막 8:34 이하)에는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고난에만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b) 히브리서와 베드로전서에서 파데인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대분의 용법과 같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① 히브리서는 파데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타내는데, 그 의미는 '죽는 것'이다. 히 13:12에서 기자는 구약의 속죄제와 같이(레 16:2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예수님의 죽음을 분명히 말한다. 히 2:18에서는 히 2:9의 언명으로 보아 이 사실이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5:7에서는 물론 겟세마네 동산을 말한 것이지만, 히 5:8은 여기서 더나아가 골고다에까지 말하는 것이다(참조: 빌 2:8; 롬 5:19). 히 9:26에서도 문맥상("단번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브리서는 결코 '우리를 위하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나 이런 뜻을 포함하고 있다. 히브리서의 파데인은 죽음(히 2:9; 히 2:14,등), 피(히 9:12; 히 9:14), 그리고 십자가(히 12:2)와 관련되어 있다.|② 베드로전서도 히브리서에서와 마찬가지의 의미를 나타낸다. 벧전 2:21; 벧전 2:23에서 예수님의 파스데인은 그의 죽음이다: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4:1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심은 핵심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베드로전서는 이 죽음이 '죄를 인하여'(벧전 3:18), '우리를 위하여'(벧전 2:21)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이 서신은 죽음의 유일회적 성격(벧전 3:18), 죽음과 부활의 관계(참조: 벧전 3:21 이하; 벧전 3:18과 벧전 4:1의 사이), 고난과 영광의 연결(벧전 1:11)을 강조하며,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파스데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파스데인의 본보기로서의 성격을 크게 강조한다(벧전 2:21).||3. 그리스도인들의 고난.|(a) 사도행전. 신약성경 기자들은 예수님 자신과는 다르게 파데인을 신자들이 받는 고난을 표현하는 데도 사용하고 있다. 행 9:16에서는 행 9:15에서 말하는 임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것이라면 일반적인 의미의 고난을 뜻하며, 그 임무가 이방인들 "앞에서" 전하는 것이라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고난을 뜻한다. 오직 고난받는 것이 '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행 9:16에서 "받아야 할" 것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파데인은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사도를 선택된 그릇으로 확인해주는 것등이다(참조: 고후 11:23 이하).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은 적극적인 성격을 말해 준다.||(b) 바울의 서신. 바울은 보통 파스케인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독자들에 관련시켜 사용한다. 딤후 2:12에 보면 그는 자기의 고귀한 직분을 수행하는 중에 고난을 당하지만, 그러나 이 고난은 자신의 사역을 증진시킨다(딤후 1:8; 딤후 2:3).|살전 2:14에서만 바울은 수동태를 사용한다. 빌 1:29은 빌 1:30의 관점에서 보면 능동적 소리를 울린다: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안에서 듣는 바니라". 여기서 파스케인은 "그(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파스케인일 경우에는 전체 공동체체의 특권이다. 이것은 물론 구속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대상을 그리스도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마데마타(고난)는 그리스도의 마데마타(고난)로 간주되며(고후 1:5 이하), 또한 종말론적인 목적을 가진다(참조: 살후 1:5과 롬 8:17에서의 영광과의 연결).||(c) 베드르전서.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의 파스케인의 모범적인 성격을 더욱 강조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파스케인의 경우에는 '죽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통치자들이나 법정에서 부당하게 받는 형벌들과, 혹시 피난, 위협, 모욕, 차별대우,등을 포괄한다(참조: 벧전 4:16). 이 예들의 요점은 파스케인의 부당성에 있다.|벧전 3:14에서 부당성은 의무 이행에도 불구하고 처벌당할 뿐만 아니라, 바른 일을 하는데도 처벌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만일 의무를 다하는데도 처벌을 받는다면, 여기에 사상은 옳은 일을 행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는 사상이다. 고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반드시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의 자취를 따라가고 있으며(벧전 2:21), 또한 종말론적 지향을 나타낸다(벧전1:6-벧전 1:7; 벧전 5:1O). 벧전 4:1에서는 세례(침례)를 통한 거듭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참조: 벧전 3:21).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신 것과 같이 세례(침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그치고,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만 살아 가는 것이다(롬 6:11). 이것은 세례(침례)를 나타내기 위해 전용된 유일한 용례이며, 이것은 파데인을 '죽다'는 의미로만 사용할 때와 로마서 6장의 교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에 대해 다음 구성도 참고하기 바랍니다.||*【그리스도의 백성의 고난. (a) 고난과 교제: 고난의 사상은 코이노니아($2842: 친교)에 대한 신약성경의 개념과 분리 될 수 없다.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무장한 사람은 육체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벧전 4:1; 참조: 고후 11:23 이하).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는 것(벧전 4:16)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여(벧전 4:13; 빌3:10)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쉼파스코멘, 롬 8:17)을 의미한다. 진실로 이것이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 간에 존재하는 신비한 연합이므로 기독교인들의 고난은 하나로 또한 같은 몸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고후 1:5). 여러 교회들이 공통적인 고난의 끈으로 묶음으로써 연합되며(살전 2:14; 벧전 5:9). 또한 같은 원리가 개교회에도 적용된다.|만일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단순한 동정심뿐만 아니라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연민(쉼파스코)을 나타내려면 믿음에 있어서 참된 일치가 요구되는 것이다(고전 12:26; 히 10:34). 고난의 교제에 대한 더 중요한 예는 사도와 지역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고난의 교제(고후 1:6 이하), 또는 개별 제자와 사도 사이에 존재하는 고난의 교제이다(딤후 1:8; 딤후 2:21).|가장 큰 본은 예수 그리스도시니(벧전 2:21),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의 증인'으로서 사도 자신을 위한 일 뿐만 아니라(벧전 5:1; 참조: Ignatrus, 롬 6:3) 사도를 따르는 자들이나(딤후 3:l0 이하) 또는 자신을 본받으라는 부름을 받은 자들에게까지 본이 되신다(고전 11:1). 선지자들이 부당한 고난(카코파데이아, 약 5:1O; 광야의 세대에 의하여 보여진 악한 본과 대조, 광야의 세대는 악을 즐겼다, 고전 11:6)을 견디는 선한 본이 되었던 것과 똑같이 이제 사도들은 선한 본을 보인다. 그들의 고난은 그들의 사역의 일부분이었고, 교회의 참된 종들을 확인하는데에 기여하였다(참조: 고후 11:23 이하). 사도 바울의 "교회를 위한 고난"(골 1:24)은 성격상으로 구속의 고난이 아니라 선교의 고난이다.|그러나 모든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과의 교제는 아니다. 이 범주 안에 있는 고난에 부응하면, 사도와 교회는 자신들의 직분을 위한, 또 기독교인으로서의 소명을 위한 고난을 받아야 한다. 곧 그들은 기독교인들로서(벧전 4:16) 애매히(벧전 2:19) 고난을 받아야 했다. 마치 악을 행한 자나 살인자로(벧전 4:15; 눅 23:32 이하), 즉 당연하게(눅 23:4) 고난을 받아야 할 자로서 간주되지는 않을지라도 악을 행한 자와 같이(벧전 2:12) 고난을 받았다(카코파데오, 딤후 2:9).|이러한 의미에서 참된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고난(벧전 4:19),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고난(행 9:16; 빌 1:29), "복음을 위한" 고난(딤후 1:8), "하나님을 생각하는" 고난(벧전 2:19), "의를 위한" 고난(벧전 3:14),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소망 중에 기다리는 고난(살후 1:15)으로 칭해진다.||(b) 고난의 종말론적 측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위대한 종결, 즉 완전히 이름에 대한 수단이 되는 것(히 2:10)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백성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벧전 5:9).|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는 본질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영원한 영광"의 소망과 비교할 때 기독교인이 현재 받는 고난의 시기는 "잠간"에 불과하다(벧전 5:10). 롬 8:18에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들은 미래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고난까지도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 가게 하신 이"(벧전 5:1O)께서 주시는 귀한 은사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빌 1:29; 벧전 2:19).|요한복음도 그리스도의 모든 지상 생애를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본다. 곧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영광스러운 생애이므로 어떠한 파스코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일한 방법으로 바울은 빌 3:10에서 자신의 새생명의 목적을 (첫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다음에는) 주님의 고난에 참예함을 체험적으로 알게되는 것으로 말한다.|신약성경에서는 고난과 인내(살후 1:4 이하; 히 10:32) 뿐만 아니라 고난과 영광(롬 8:17; 벧전 5:1; 벧전 5:10)까지도 거듭 거듭 동일하게 언급된다. 바울은 고린도인들과 자기와의 교제 관계를 고난과 위로의 관계로 생각한다(고후 1:7). 실로 바울은 종말론적 영광으로 전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난의 개념을 일시적인 의미로 받아들였고 모든 피조물을 망라하는데까지 확대하였다(롬 8:18 이하). 곧 인간 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까지 영광스러운 목표(텔로스)에 이르는 구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고난의 종결을 기다리지 않고 고난의 목표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고통이 가득차고 죽을 운명으로 지워진 생명에 단순하게 위로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 굴욕과 모욕, 그리고 사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반격인 것이다'(J.Moltmann, TheoIogy of Hope, l967 21)】|(참조: W.Michaelis; J.H.Thayer; B.Gartner).
아비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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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아달(인명)||#1. 구약성경||(a) 아비아달은 히브리어 에브야탈의 음역이며, '아버지께서 풍성히 주신다'를 의미한다.||(b) 아비아달은 아히멜렉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와 함께 제사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사울의 학살을 피하여 다윗에게로 갔으며(삼상22:20-23).|이 때 에봇을 가지고 내려와 대제사장이 되었다(삼상23:6,9; 삼상30:7).||(c) 압살름의 반란 때에 다윗의 피신처로 옮기려던 법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삼하15:24,27-29).||(d)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다윗의 모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고, 아히도벨의 모략을 다윗에게 알리었다(삼하15:34-36; 삼하17:15,16).||(e) 다윗 때에 사독과 함께 제사장의 일을 보았다(삼하19:11; 대상15:11; 대상24:6).||(f) 아비아달은 모반하려는 아도니야를 도왔으며(왕상1:7,25).|다윗의 통치가 끝날 무렵에 아도니아의 왕위 옹립과 관련을 물어 솔로몬에 의해 그의 제사장 직분 등을 박탈당했다(왕상2:26,27). 사독이 그의 직분을 대신했다(왕상2:35).||* 아비아달에게 그의 부친과 같은 아들이 있었는지,그렇지 않으면 기록의 착오가 있었는지 분명치 않다(삼하 8:17; 대상 24:6).||#2. 신약성경||아비아달은 신약성경에서 막 2:26에 한번 그리스도께서 그에 관하여 언급하신다: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다윗이 진설병을 구하던 때가 제사장 아비아달 때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아비아달의 아버지가 살았던 당시의 사람들을 포함한 아비아달 자신의 제사장으로서 일한 시기만을 언급한 것이다. 아비아달 제사장이 그 아버지보다 다윗과 오랜 교제로 더 잘 알려져 유명하였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러한 식의 표현이 더욱 편리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가 있겠다.
스르디스
suvrti"
스르디스 Syrtis (지)||쉬르티스/스르디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27:17에 한번 나온다: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스르디스는 지중해의 선원들이 두려워한 아프리카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표사 모래톱이다(행 27:17). 시드라 만(Gulf of Sidra)은 시실리(Sicily)의 맞은편 북 아프리카 해안의 크게 침하된 동편을 따라 234마일 가량 뻗어 있다. 가베스 만(Gulf of Cabes)은 두 섬 사이에 약 69마일 가량 뻗어 있다. 바람과 조수가 항해를 위험하게 한다; 배들은 자주 표사에 빨려 들어가는 위험을 만났다.|(참조: HBD).
아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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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웃 Abioud.||아비우드는 '나의 아버지는 존엄하시다'를 의미한다. 마 1:13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나오며, 스룹바벨의 아들이며, 예수님의 조상 가운데 한 사람이다: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선한 일을 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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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행하다 do goo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가도에르게오는 아가도스($18: 선한)와 에르곤($2041: 일)이나 에르가조마이(일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선을 행하다, 선행(자선)을 행하다'(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 대하여),즉 어떤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는 매우 드물게 나오는 단어로서, 70인역본과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아가도에르게오는 신약성경에서 딤전 6:18에만 한번 나온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여기서 부자에 대한 충고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표출인 선행을 요구하고 있다.|행 14:17에서는 단축형 아가두르게오(%352)가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의 친절한(자비로운) 행동을 지적한다.|(참조: J.H.Thayer; W.Grundmann; E.Betreu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