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t Questions 5 페이지 > 기독정보닷컴

질문: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답변:
그리스도인이 독신으로 지내는 문제와 성경이 결코 결혼하지 않는 신자들에 관해 말한 것은 종종 오해를 받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7-8절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어떤 사람은 독신의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은 결혼의 선물로 받는다고 말한 사실을 주지하십시오. 거의 모든 사람이 결혼하는 것 같지만, 반드시 모든 사람이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결혼 및 가정과 연결된 추가적인 문제와 스트레스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만일 그가 결혼했다면, 그는 그처럼 유용한 복음 전파자가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부부로서 그리고 가정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팀으로 더 잘합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이 똑같이 중요합니다. 평생 동안 독신으로 지내더라도 죄는 아닙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자를 찾고 자녀를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교육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주님을 만나고 싶다고 기도하면 응답하실 것입니다(마 7:7).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주의 선한 역사를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구하면 주께서는 또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독신은 저주가 아니며 독신 상태에 있는 사람은 “뭔가 잘못된 사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결혼을 하며, 성경 역시 대부분의 사람이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독신 그리스도인들을 결코 ‘2 등급’ 그리스도인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7장이 지적하는 것처럼, 독신은 더 높은 소명입니다. 인생의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결혼에 관해서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약 1:5). 그것이 결혼이든 독신이든 하나님의 계획을 따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바라시는 열매들과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재정 관리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공적인 재정(돈)관리의 비결은 무엇인가?


답변: 재정 관리에 대한 많은 성경 말씀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돈을 빌리는 것에 관해 반대합니다. 잠언 6장 1-5절; 20장 16절; 22장 7절, 26-27절을 보십시오.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 너는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네게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성경은 반복해서 부의 축적을 경고하고 있으며 그 대신 우리가 영적인 풍요를 추구할 것을 권장합니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 28:20; 참조, 잠 10:15; 11:4; 18:11; 23:5).

잠언 6장 6-11절은 게으름 및 필연적으로 따를 재정적 파탄에 대한 지혜를 제공합니다. 자신들을 위해 먹이를 저장하기 위해 일하는 근면한 개미를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은 또한 우리가 뭔가 유익한 것을 해야 할 때 게으르게 누워서 잠을 자는 자세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태한 사람”은 일하기 보다는 차라리 쉬려고 하는 게으르고 태만한 사람입니다. 그의 마지막은 분명합니다. 빈궁과 곤핍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돈 버는데 혈안이 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자는 전도서 5장 10절에 의하면 만족할 수 있는 충분한 부를 절대 가질 수 없으며 끊임없이 더욱 더 움켜지려 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6-11절은 또한 부를 갈망하는 덫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성경적인 모범은 부를 쌓기 위해 남은 것을 취하는 자가 되기보다는 주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6-7). 성경은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잘 관리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라고 격려합니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6장 1-13절에서 형편없는 청지기가 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11절). 우리는 디모데전서 5장 8절의 권면처럼 우리 자신의 가정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요약하면, 성경은 돈 관리에 대해 무엇을 말합니까? 답은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바로 지혜입니다. 우리는 돈에 대해 지혜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돈을 모아야 하지만 그것을 축척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돈을 써야 하지만 신중하고 절제 있게 써야 합니다. 우리는 즐겁고 희생적으로 주께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돈을 써야 하지만,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분별 있게 써야 합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그릇된 것이 아니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가난하게 되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쓸데 없는 것에 돈을 낭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돈 관리에 있어서 성경의 일관된 메시지는 현명 하라는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수 세기 동안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인간 생명의 기원이 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시계 제조공 없이 시계가 존재할 수 있고 또한 이야기꾼 없이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우리 존재를 하나님께 의존합니다(창 1:27).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존자로서 지속적으로 생명을 주십니다(시 104:10-32). 그분은 생명이시며(요 14:6),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해 함께 유지되고 있습니다(골 1:17).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들조차도 그분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사람이 하나님이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해바라기가 빛 없이, 장미가 물 없이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자로서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으며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요 1:4).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여지는 것”(요 10:10)입니다. 그리스도께 믿음을 두는 모든 자들은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요 3:15-16). 사람이 참으로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요 17:3).

사람은 하나님 없이는 육체적인 삶만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그 날에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창 2:17). 우리가 알다시피, 그들은 불순종했으나, 그날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죽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누렸던 영적인 삶, 하나님과의 교제, 그분을 즐거워할 수 있는 자유, 영혼의 무죄와 순결 등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고 교제하도록 지음을 받은 아담은 저주를 받아서 전적으로 육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먼지로부터 영광으로 옮기려고 의도하셨던 것이 이제는 먼지에서 먼지로 옮겨가는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아담처럼 여전히 땅에서 활동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행복해 보일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의 삶에도 즐거움과 유쾌함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과 유쾌함 조차도 하나님과의 관계 없이는 충분하게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기분 전환 및 재미를 찾는 삶을 삽니다. 육체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삶은 태평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주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죄를 지을 때에도 일종의 낙이 있다고 말합니다(히 11:25). 문제는 그 낙이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짧습니다(시 90:3-12). 조만간, 쾌락주의자는 비유 속의 방탕한 아들처럼 세상적인 기쁨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눅 15:13-15).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이 허망한 쾌락 구도자는 아닙니다. 구원 받지 못한 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절제되고 똑바른 삶을 살면서 심지어 행복과 보람을 누립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충실과 정직, 절제 등, 유익을 주는 어떤 도덕적인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는데, 하나님 없이는 사람은 오직 이 세상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을 평탄하게 살아가는 것이 내세를 대비하는 것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6-21절에 있는 부유한 농부의 비유와 마태복음 19장 16-23절에 나오는 젊은 부자(그러나 매우 도덕적인)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를 보십시오.

사람은 하나님이 없이는 이 땅에서의 삶에서도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화평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도 화평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전혀 화평하지 못한 사람은 늘 불안을 느낍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내적으로 혼란하다는 신호입니다. 역사를 보면 쾌락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삶의 일시적인 기분 전환을 맛보기는 하지만 더욱 깊은 절망에 빠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뭔가 잘못됐다"는 짜증스러운 느낌은 떨쳐내기 어렵습니다. 솔로몬 왕은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추구해 본 후에 그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전도서에 기록했습니다.

솔로몬은 지식 그 자체는 헛된 것임을 발견했습니다(전 1:12-18). 그는 쾌락과 부의 헛됨을 발견했습니다(전 2:1-11). 물질주의는 어리석은 것이며(전 2:12-23), 재물은 덧없는 것입니다(전도서 6장).

솔로몬은 삶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전 3:12-13), 그리고 지혜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현명한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다른 말로 하면, 삶에는 육체적인 차원 그 이상의 것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핵심을 강조하십니다. 떡(육적인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영적인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우리의 모든 비참에 대해 우리 자신 안에서 그 해결책을 찾으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할 때만 생명과 만족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인간의 운명은 지옥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삶이 끝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됩니다. 부자와 나사로(눅 16:19-31)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부자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즐겁고 편한 삶을 누리는 반면, 나사로는 힘든 삶을 살지만 하나님을 압니다. 그 두 사람은 죽음 이후에 각자의 인생에서 택한 선택의 진정한 엄중함을 알게 됩니다. 부자는 삶에 부의 추구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한편, 나사로는 낙원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이 땅에서의 짧은 생존 기간은 그들 영혼의 영원한 상태와 비교할 때 희미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 중에 유일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에 영원한 느낌을 주셨습니다(전 3:11). 영원한 운명에 대한 느낌은 오직 하나님 그분 안에서만 만족될 수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모든 사람들이 어떤 시점에 부당하게 취급 받고, 감정이 상하고, 범죄의 피해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공격적 행위들이 일어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32은 공표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로새서 3:13은 비슷하게 말씀합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두 성경 구절들의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용서해야 합니까? 우리가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회개 속에서 용서를 구하러 온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그것을 오로지 받아 준다면 용서는 간단할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범한 사람을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분함과, 쓰라림, 그리고 분노를 나타내는 것인데, 이 것들의 어느 것도 진정한 기독교인의 특성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합니다(마태복음 6:12). 마태복음 6:14-15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의 용서를 말씀하는 다른 성경 말씀들에 비추어 보면, 마태복음 6:14-15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용서하셨던 것을 진실로 경험해 보지 못 했음을 말씀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들 중 하나라도 순종하지 않을 때마다, 우리는 그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취급할 때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또한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범죄들을 용서하신 정도를 우리가 고려할 때,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은혜를 거둬드릴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그 누구 보다 더 하나님께 무제한적인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만큼 많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너무나 작은 죄를 지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데 인색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18:23-35에서의 예수님의 비유는 이 진리에 대한 강력한 사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용서를 구하며 그분께 나아갈 때, 그분은 아낌없이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요한일서 1:9). 하나님의 용서가 무한한 것 같이, 우리가 베푸는 용서도 제한이 없어야 하겠습니다(누가복음 17:3-4).

-Got Questions Ministries

엑소시즘(마귀에게 명하여 사람에게서 떠나게 하는 의식)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여러 등장 인물들에 의해 시행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지시에 따라 시행하였고(마태복음 10장),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여 귀신을 내쫓았습니다(막 9:38). 그 외 바리새파 사람들(눅 11:18-19), 바울(사도행전 16장), 그리고 다른 여러 귀신 내쫓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행 19:11-16).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는 일을 시행한 목적은 마귀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보여주고(눅 10:17), 제자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권위로 행하고 있음을 입증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은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믿음이 있는지 아니면 부족한지를 드러내었습니다(마 17:14-21). 귀신을 내쫓는 행위는 분명히 제자들의 사역에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제자 훈련 과정에서 마귀를 내쫓는 것이 실제로 어떤 부분에 해당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흥미롭게도, 신약 성경의 후반부에서는 귀신과의 싸움에 관한 부분에서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약 성경의 교훈 부분(로마서부터 유다서까지)은 마귀의 활동에 관해 언급하고 있지만, 귀신을 내쫓는 행동에 관해서는 논의하지 않으며, 또한 신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으라고 권하는 내용도 없습니다. 우리는 마귀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엡 6:10-18).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고(약 4:7), 그를 조심해야 하며(벧전 5:8), 우리 삶에서 그에게 틈을 주지 말라는(엡 4:27) 명령을 받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사탄 및 그의 마귀들을 어떻게 내쫓는지 알려준 바 없으며, 심지어 마귀를 내쫓는 것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는 권면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악의 세력과 대항하는 전쟁에서 우리가 삶에서 어떻게 승리를 얻을 수 있는지 분명한 방법을 알려줍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믿음을 그리스도에게 두어(엡 2:8-9)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의 통치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또다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경건치 못한 습관을 벗어 버리고 경건한 습관을 취하는 것입니다(엡 4:17-24). 이는 마귀를 내쫓는 것과는 무관하고 도리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엡4:23).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께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에 대해 여러 실천적인 교훈을 한 후에 영적인 전쟁에 대해 상기시킵니다. 그 전쟁은 우리가 마귀를 내쫓는 싸움이 아니라 마귀의 간계(엡 6:11)에 대항하기 위해 전신 갑주를 입고 대항하는 싸움입니다. 우리는 진리와 의와 복음과 믿음과 구원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서서 대항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됨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많은 영적 전쟁의 무기를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귀신을 내쫓는 일은 대체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전도와 제자 훈련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신약에서 영적 전쟁의 방법은 귀신을 내쫓는 것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귀신을 내쫓는지 방법을 결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일 참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이 필요하다면 그 개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면 될 것으로 보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기독교인이 불신자와 동업해도 괜찮은가?

답변: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사업을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일반적인 질문입니다. 이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성구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입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자주 인용됩니다. 이 구절이 결혼을 말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단지 결혼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유형의 ‘어울리지 않는 멍에’를 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 친밀한 친구, 그리고 많은 경우 동업자와 같은 것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은 신자와 불신자간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의 동기, 목표 및 방법은 불신자의 동기, 목표 및 방법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사람의 성격을 변화시킵니다. 인생에서 그리스도인의 가장 높은 소망은 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고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기껏해야 그러한 목표에 무관심합니다. 만일 사업에서 그리스도인의 방법과 목표가 불신자의 방법과 목표와 동일하다면, 그는 자신의 우선 순위를 재평가하고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은 계속해서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라고 묻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나눌 때 사귐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동업자는 서로 뭔가를 나누어야 하는 그러한 관계로 연결됩니다. 즉, 한 사람에게 속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속하게 됩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사귐’입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사업을 통해 주께 영광을 돌리고자 한다면 불신자인 동업자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는가?”(암 3:3).

-Got Questions Ministries

재능과 영적인 은사 간에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둘 다 사용하면 효과가 배가됩니다. 둘 다 이기적인 목적이 아닌 남을 위해 사용되도록 의도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7절은 영적인 은사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고 언급합니다. 두 위대한 계명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 목적을 위해 우리의 재능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재능과 영적 은사는 사람마다 다르며 주어지는 시기도 다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상관없이) 유전과 환경(음악을 하는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는 음악적인 재능을 개발하는데 도움을 얻게 될 것임)의 조합의 결과로 인하여 자연적인 재능(음악, 예술, 수학에서 자연적인 능력을 가짐)을 부여 받으며, 또는 하나님이 특정한 개인에게 특정한 재능을 주시기도 합니다(예를 들어, 출애굽기 31장 1-6절에 나오는 브살렐). 성령의 은사는 성령에 의해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집니다 (롬 12:3, 6). 불신자가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는 순간, 성령께서는 그분 뜻대로 새신자에게 영적인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고전 12:11).

로마서 12장 3-8절은 영적인 은사들을 예언, 섬김(일반적인 의미), 가르침,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 베풂 등으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8-11절은 그 은사들을 지혜의 말씀(영적인 지혜를 전하는 능력), 지식의 말씀(실천적인 진리를 전하는 능력), 믿음(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신뢰), 기적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공부하지 않은 언어로 말할 수 있는 능력), 방언 통역 등으로 나열합니다. 세 번째 목록은 에베소서 4장 10-12절인데 하나님은 그분의 교회에 사도, 선지자, 선교사, 목사, 교사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들 목록의 내용들이 서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영적인 은사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성경 목록이 모든 은사들을 다 나열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에 언급되지 않는 추가적인 영적 은사들이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습니다.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 재능을 개발하다가 나중에 그 재능과 맞는 직업이나 취미를 취할 수 있는 반면, 영적인 은사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도록 하기 위해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 확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부름을 받음과 함께 "봉사의 일"(엡 4:12)에 관여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은사를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행한 모든 일에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역시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면서 삶의 성취감을 발견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임무는 성도들을 세워 하나님이 부르신 사역에 더 잘 준비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주께서 영적인 은사를 주신 의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들을 세워 교회 전체가 힘 있게 성장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영적인 은사와 재능의 차이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재능은 유전 및 훈련의 결과이며, 영적인 은사는 성령의 권능의 결과입니다. 2) 영적인 은사는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소유하지만, 재능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누구나 소유할 수 있습니다. 3) 재능과 영적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재능은 전적으로 비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지만, 영적인 은사는 이러한 과업들을 위해 집중되어야 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염려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염려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명령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염려하는 대신에 우리의 모든 필요와 걱정을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가져가야 함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옷과 음식과 같은 육체적인 필요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권고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돌보실 것이라고 확신시켜주십니다(마 6:25-34).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의 삶에 염려가 있어서는 안된다면, 어떻게 해야 염려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5장 7절을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문제 및 무거운 짐에 짓눌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염려와 걱정을 주께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감당하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은 그분이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주님의 관심을 끌기에 너무 크거나 너무 작은 염려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를 맡기면,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평강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빌 4:7).

물론 구주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걱정과 염려가 삶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분께 삶을 바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Got Questions Ministries

사탄에 대해 사람들은 아주 어처구니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추상적으로만 생각합니다(예를 들면, 사탄을 당신의 어깨 위에 앉아서 당신이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머리에 뿔이 난 조그맣게 생긴 빨간 녀석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악을 인격화 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이라고 여기는 것까지). 그러나, 성경은 사탄이 누구인지 또한 우리의 삶들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그에 대한 분명한 묘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은 사탄을 죄로 말미암아 천국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잃었고 지금은 하나님의 목적을 무산시키기 위해 온갖 힘을 쓰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대적하는 천사의 존재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거룩한 천사로 창조되었습니다. 이사야 14:12은 사탄이 타락하기 전의 이름이 아마 루시퍼였음을 보여 줍니다. 에스겔 28:12-14은 사탄이 케루빔으로 창조 되었다는 것과 명백하게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천사였다는 것을 묘사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지위로 말미암아 교만하게 되어,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기로 작정하였습니다(이사야 14:13-14; 에스겔 28:15; 디모데후서 3:6). 사탄의 교만은 그의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이사야 14:12-`5에 있는 많은 “내가...하리라(I will)”의 말들을 주목하십시오. 그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하늘로부터 쫓아버리셨습니다.

사탄은 이 세상을 주관하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가 되었습니다(요한복음 12:31; 고린도후서 4:4; 에베소서 2:2). 그는 고소하는 자(요한계시록 12:12), 꾀는자/ 유혹하는 자(마태복음 4:3; 데살로니가전서 3:5), 그리고 속이는 자(창세기 3장; 고린도후서 4:4; 계시록 20:3)입니다. 사탄의 이름 자체가 “적대자” 또는 “대적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사탄의 또 다른 칭호인, 악마(the devil)는 “비방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사탄은 비록 하늘에서 쫓겨 났지만, 여전히 하나님보다 자신의 보좌를 더 높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따라 하고, 세상으로부터 숭배 받기를 원하면서 하나님의 왕국을 대적합니다. 사탄은 모든 거짓 이단과 세상 종교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인 원천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을 대적하는 일이라면 있는 힘을 다해 무엇이든지 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불 못 가운데 영원히 처해지는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0:10).

-Got Questions Ministries

귀신들은 요한계시록 12:9절이 지적하듯이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사탄의 하늘에서의 타락은 이사야 14:12-15와 에스겔 28:12-15에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타락할 때, 그는 천사들의 일부와 함께 하였는데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천사들의 삼분의 일이었습니다. 유다서 6장 역시 그렇게 죄를 범한 천사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귀신들은 사탄과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을 택한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귀신들 중 일부는 이미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어졌습니다”(유다서 1:6). 다른 천사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에베소서 6:12에 묘사된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로 묘사됩니다(골로새서 2:15). 귀신들은 여전히 그들의 지도자인 사탄을 따르고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거룩한 천사들과 전투를 벌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방해합니다.

귀신은 영적 존재들로서 육체를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귀신 들림은 사람의 몸이 귀신에 의해 완전히 제어될 때 발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일어날 수 가 없는데, 이는 성령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4:4).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사역 동안, 많은 귀신들과 맞닥뜨리셨습니다. 물론 어느 귀신도 그리스도의 능력과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귀신 들린 자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마태복음 8:16). 귀신들에 대한 예수님의 권능은 그분께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증거들 중 하나였습니다(누가복음 11:20). 예수님과 마주쳤던 귀신들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았고,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귀신들은 소리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태복음 8:29). 귀신들은 자신들의 결국이 고통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탄과 그의 귀신들은 하나님의 일을 궤멸시키려 하고 있고, 할 수 있는 한 누구라도 현혹시키려 하고 있습니다(베드로전서 5:8; 고린도후서 11:14-15). 귀신들은 더러운 영(마가복음 1:27), 거짓말 하는 영(열왕기상 22:23), 그리고 사탄의 천사들(요한계시록 12:9)로 묘사됩니다. 사탄과 그의 귀신들은 세상을 혼미케하고(고린도후서 4:4), 거짓 교리를 퍼뜨리고(디모데전서 4:1), 기독교인들을 공격하고(고린도후서 12:7; 베드로전서 5:8), 그리고 거룩한 천사들과 싸웁니다(요한계시록 12:4-9).

귀신들/타락한 천사들은 하나님의 원수지만, 이미 패배한 적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무력화시켰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습니다”(골로새서 2:15). 우리는하나님께 복종하고 두려울 것 없이 마귀를 대적하면 됩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한일서 4:4).

-Got Questions Ministries

하나님의 섭리란 지혜와 사랑으로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돌보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교리는 하나님이 모든 일들을 완전하게 다스리신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만유를 다스리시며(시 103:19), 물리적인 세상을 다스리시고(마 5:45), 나라들의 사건들과(시 66:7), 인간의 운명(갈 1:15), 사람의 성공과 실패(눅 1:52), 자기 백성의 보호(시 4:8) 등을 주관하며 다스리십니다. 이 교리는 우주가 우연히 또는 운명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다는 사상을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하나님은 섭리를 통해 그분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그분의 목적이 확실히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의 일들을 다스리시며, 만물의 자연 질서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이 만유 가운데 일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 법칙에 어떤 고유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도록 다스리기 위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원칙들이 자연 법칙입니다. 자연 법칙은 단지 하나님이 그것들을 선포하셨기 때문에 존재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의지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는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주권자라는 것을 압니다. 이 두 진리가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성경에서 두 진리의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다소의 사울은 고의적으로 교회를 박해했지만, 그 와중에 그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가시채를 뒷발질”(행 26:14)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며 또한 죄인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기원자가 아니시며, 아무도 죄를 짓도록 시험하지 않으십니다(약 1:13). 그분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분명히 하나님은 어느 정도의 죄를 허락하십니다. 그분이 죄를 미워하실지라도 일시적으로 그것을 허용하시는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예가 요셉의 이야기에서 발견됩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아버린 후 수년 동안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속이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악했고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모든 죄는 도리어 선을 이루는데 쓰입니다. 요셉은 결국 애굽으로 끌려가더니 그곳에서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그의 지위를 사용해서 7년의 기근 동안 그의 가족을 포함한 방대한 지역의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기근이 시작되기 전에 요셉이 애굽에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비롯한 수백만 명이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습니까?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그의 형제들이 죄를 짓는 것을 허용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50장 15-21절은 하나님의 신성한 섭리에 대해 직접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죄를 극복하는 거룩한 섭리의 또 다른 명백한 예는 가룟 유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거짓말을 하고, 기만하고, 속이고, 훔치고, 마침내 주 예수님을 적들의 손에 넘겨 주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큰 악이었고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유다의 모든 음모와 책략은 인류의 구원이라는 더 큰 선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죄를 위한 희생이 되기 위해 로마인들의 손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죄 가운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유다에게 일련의 사악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2장 22절에서 이를 분명히 진술합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주권(“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과 사람의 책임(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을 둘 다 가르치시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분의 가르침에는 균형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가르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은 “모든 사건들”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제어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사탄은 그의 최악을 다할지라도, 심지어 세상을 뒤엎는 악을 저지를지라도, 그 악까지 더 큰 최종 목적을 이루는데 쓰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것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에는 이유가 있으며 그분의 계획은 선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 사실은 늘 사탄을 좌절시킬 것입니다. 사탄이 무엇을 하든 그는 계획이 좌절되고 결국 선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교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은 자신의 뜻의 경륜에 따라 발생할 모든 일을 정하셨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라도 하나님은 결코 죄의 저자가 아니시며, 인간의 책임이 제거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데 사용하시는 주된 수단은 이차적 원인들(자연 법칙과 인간의 선택)입니다. 즉,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간접적인 방법으로 그분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직접 역사하셔서 그분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기적은 짧은 기간 동안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자연 질서를 우회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임한 강한 빛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의 예입니다(행 9:3). 비두니아로 가려는 바울의 계획을 좌절시킨 것은 하나님의 간접적인 인도하심의 예입니다(행 16:7). 이 둘 모두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난 예들입니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개념은 자유 의지의 가능성을 파괴한다고 말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하게 통제하신다면, 어떻게 우리가 참으로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자유 의지가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인간 선택의 우발성과 같은 사건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 밖에 놓여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시 토론을 위해서 이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모든 우연한 일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신다면 어떻게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실 수 있습니까? 바울은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제하지 못하신다면 어떻게 이 약속 및 다른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만일 미래가 완전하게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이라는 완전한 보장을 갖지 못합니다.

더욱이 만일 하나님이 만유를 주관하지 못하신다면 그분은 주권자가 아니십니다. 만일 주권자가 아니시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는 어떤 우연한 일들을 주장한다면 이는 결국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결론을 가져옵니다. 만일 우리의 자유 의지가 하나님의 섭리를 능가할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누가 하나님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결론은 성경적인 세계관을 지닌 사람에게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자유를 고려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을 설정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영어의 "apology"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방어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단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기독교 변증론은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는 과학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공격하는 많은 회의론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공격하는 많은 비평가들이 있습니다. 거짓 교리를 조장하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를 부인하는 많은 거짓 교사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변증론의 사명은 이러한 운동들을 물리치고 그 대신 기독교의 하나님과 진리를 장려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기독교 변증론의 핵심 구절은 베드로전서 3장 15 절일 것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을 철저하게 방어하지 못하는 데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합리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모든 기독교인이 변증론에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고, 왜 그것을 믿으며, 어떻게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거짓과 공격으로부터 신앙을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변증론에서 종종 망각되는 두 번째 측면은 베드로전서 3장 15절의 후반부인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는 부분입니다. 변증론으로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는 일은 결코 무례하거나, 분노하거나, 멸시하는 자세를 포함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변증하는 동안, 수비에도 강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처럼 진리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논쟁에 승리하더라도 우리의 태도 때문에 상대로 하여금 그리스도로부터 더 멀어지게 한다면, 우리는 기독교 변증의 진정한 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기독교 변증론에는 두 가지 기본 방법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전적인 변증론으로 알려진 첫 번째 방법은 기독교 메시지가 참되다는 증명 및 증거들을 나누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일반적으로 "전제적인" 변증론으로 알려져 있는데, 반 기독교 입장 배후에 있는 전제(선입관, 가정)를 직면하는 것입니다. 이 두 방법에 있어서 양 측의 기독교 변증론자들은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지에 대해 종종 서로 논쟁합니다. 아마도 사람과 상황에 따라 이 두 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 변증론은 기독교의 신앙과 진리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에게 기독교를 합리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독교 변증론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모두 복음을 선포하고 우리의 믿음을 방어할 수 있는 실력과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마 28:18-20; 벧전 3:15).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변증론의 본질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영성과 건강에 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척한 메리 베이커 에디(Mary Baker Eddy, 1821-1910)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에디는 1866년에 자신의 치유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후 성경 공부, 기도, 다양한 치유 방법 연구에 수년을 보냈습니다. 그 결과로 1879 년에 그녀가 "크리스천 사이언스"이라고 명칭을 붙인 치유 시스템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책 "경전의 열쇠가 되는 과학과 건강(Science and Health with Key to the Scriptures)"은 정신-육체-영의 연결을 이해하는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대학, 교회, 출판사, 정평이 나 있는 신문사인 "더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The Christian Science Monitor)를 설립했습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다른 일반 단체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크리스천 사이언스를 비 기독교적인 사교라고 믿습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요 어머니인 하나님은 완전히 선하시고 그분 전체가 영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참된 본성을 포함하는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처럼 영적으로 흠이 없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선한 것이므로 질병, 죽음, 죄와 같은 악은 근본적인 실체의 일부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악은 하나님과 분리된 삶의 결과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인간의 병을 고치는 핵심 방법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사람이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에서 태어났으며 죄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우리는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없이는 결코 궁극적인 병인 죄를 치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예수께서 우리의 영적인 병을 치유한다고 가르치기보다는(참조, 사 53:5) 그분의 사역은 구원과 관련해서 치유가 중요한 것을 드러내신 것이라고 믿고 그분의 사역을 그들 자신의 패러다임으로 삼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도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실체와 그분의 사랑을 더욱 깨닫고 체험하기를 위해 기도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조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도들에게 있어서 영적 치유는 효과적인 첫 번째 선택이며, 따라서 그들은 치료 대신에 기도의 힘을 의지하게 됩니다. 정부 당국은 특히 미성년자에게 치료가 보류 되는 상황에서 때때로 이 접근법에 도전하곤 합니다. 하지만 교인들의 의료 관련 결정을 명령하는 교회 정책은 없습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목사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 과학과 건강이 목회자와 설교자의 역할을 합니다. 성경 수업은 매일 공부하고 일요일에는 지역 교회로부터 선출된 두 사람의 평신도가 성경을 크게 읽습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교회는 교회 회원 치유와 재생의 경험을 위해 주간 간증 집회를 개최합니다.

현존하는 모든 "기독교" 이단들 가운데서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가장 엉터리 사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기독교도 아니고 과학도 아닙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기독교 시스템을 구축하는 모든 핵심 진리들을 부인합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사실 과학에 반대하며,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인 치유를 위한 방법으로 신비주의의 뉴에이지 영성을 가리킵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반(反) 기독교 이단으로 인정되고 거부되어야 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그리스도인이 보험에 가입해도 되는가?

답변: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보험 가입에 관한 질문에 갈등을 겪습니다. 보험에 가입한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부족한 것일까요? 이것은 건전한 의문이며, 성도들은 성경을 검토하여 성경적으로 변호할 수 있는 답변인지 알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이 보험을 드는 문제는 성경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동의합시다. 그러한 경우 우리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으로부터 원리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신자들마다 서로 다른 개인적인 확신을 갖게 될 수 있지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14장은 그러한 경우는 타인의 확신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롬 14:5). 로마서 14장 23절은 우리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든지 믿음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보험에 드는 것은 확신의 문제입니다. 보험을 드는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보험 들기를 원하신다고 확신해야 하고, 보험에 들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 다르게 확신해야 합니다.

다음은 우리를 인도하는 성경의 원리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위에 있는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따라서 법이 자동차 보험과 같은 보험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는 경우 반드시 준수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가족을 돌봐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가족의 미래 이익을 미리 계획해야 하며 보험을 드는 것이 그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앞서 계획하는 것은 가족 구성원의 예기치 못한 조기 퇴직을 위한 준비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생명 보험은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의 부족이나 돈을 사랑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신중한 계획과 현명한 기금 마련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각 개인의 조건과 확신은 이 분야에서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앞선 계획을 옹호하십니다. 요셉의 이야기와 그의 현명한 계획은 애굽 나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과 그리스도의 혈통을 구원했습니다(창 41장).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분께 부르짖으며 이 분야 및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약 1:5). 히브리서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질문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기쁘게 해줄 것인가?" 야고보서 4장 17절은 우리가 고려해야 할 또 하나의 구절인데, 만일 우리가 선을 행할 기회가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또 다른 구절은 디모데전서 5장 8절인데,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를 원한다면 가족부터 섬기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보험을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로 볼 수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하나님은 천사와 인간 모두에게 선택을 제시하기로 택하셨습니다. 성경은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의 반란에 관해 자세히 알려주지는 않지만, 사탄은 아마도 모든 천사 중에서 가장 높은 자 (겔 28:12-18)로서 교만 가운데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나님을 대적하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사탄(루시퍼)은 하나님을 경배하거나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사 14:12-14). 계시록 12장 4절은 천사들 중 1/3이 사탄의 반란에 가입함으로 타락한 천사들, 곧 마귀들이 된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사람과는 달리 천사들이 사탄을 따를 것인지 또는 하나님께 충성할 것인지에 대해 내린 선택은 영원한 선택이었습니다. 성경은 타락한 천사들이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는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성경은 천사들이 이제는 더 이상 죄를 짓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나님께 충성스럽게 남아있던 천사들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딤전 5:21)로 묘사됩니다.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은 완전한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역을 한 것은 악의 극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지 않으십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실지라도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믿을 그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습니다(벧전 5:8).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은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의 기회를 사탄과 천사들에게 주셨습니다. 천사들은 자유 의지로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천사라도 죄를 짓도록 강요하거나 장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 죄를 지었고, 따라서 불못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받기에 합당합니다.

하나님은 결과가 어떠할지 아시면서 왜 천사에게 이 선택을 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천사들 중 1/3이 반역할 것이고 따라서 영원한 불에 떨어지는 저주를 받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사탄이 인류를 죄에 빠지게 유혹함으로써 그의 반역을 더 증대시킬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습니까?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정확하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악한 행동에 대해서도 거의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십니까? 궁극적으로, 그것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문제로 다시 돌아옵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다”(시 18:30)고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도가 완전하다면 우리는 그분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무엇을 허락하시든 그 뜻 역시 완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완전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완전한 계획은 죄를 허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55장 8-9절에서 주께서 상기시킨 말씀처럼,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며 우리의 길은 그분의 길과 다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투표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는가?

답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책임은 기독교 원칙을 지지하는 지도자를 뽑기 위해 투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모든 것을 완전하게 주관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딤전 2:1-4). 하나님은 때때로 정치와 지도자와 관련해서 우리가 그릇된 지도자를 택한 사실에 대해 못마땅해 하십니다(호 8:4). 이 세상에서 죄가 주관하는 증거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많은 고통은 사악한 지도자들 때문에 생겨납니다(잠 28:12).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명령과 모순되지 않는 한 합법적인 권위에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행 5:27-29; 롬 13:1-7). 우리는 거듭난 신자로서 창조주의 인도하심을 받으려고 하는 지도자를 선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삼상 12:13-25). 생명, 가족, 결혼 또는 신앙에 대해 성경의 명령을 어기는 후보자들 또는 공약은 절대로 지지되어서는 안됩니다(잠언 14:34). 그리스도인들은 투표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 현실을 감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함으로 올바른 투표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많은 국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압제와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미워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소리를 묵살시키는 정권 하에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변화 시킬 힘이 없습니다. 이 신자들은 생명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미국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 및 가족이 해를 입을 두려움 없이 지도자에 대해 말하고 선택할 수 있는 복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최근 선거를 보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5명 중 약 2명이 투표권을 양보하고 투표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투표권 자격을 가질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 1/5은 등록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공공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이름과 메시지를 완전히 몰아내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투표는 경건한 정부를 지지하고 보호하며 보존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 기회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출하거나 또는 아무 생각 없이 수용하는 지도자들은 우리의 자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그들은 예배와 복음 전파의 권리를 보호하거나 그 권리를 제한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민족을 의를 향하도록 이끌 수도 있고 도덕적인 재앙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시민의 의무를 완수하라는 명을 따르기 위해 일어서야 합니다(마 22:21).

-Got Questions Ministries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합니다. 그 뒤에, 창세기 2장 4절에서 또 다른, 두번째 창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창조 기사가 있었다는 생각은, 두 본문이 하나의 창조 사건을 묘사하는 것을 오해한 것입니다. 두 기사는 피조물이 만들어지는 순서에 있어서 일치하며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없습니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의 6일"(그리고 일곱째 날의 안식)을 묘사하고 있으며, 창세기 2장은 창조 주간 중 하루, 곧 여섯째 날만 다루고 있으므로 모순이 없습니다.

저자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여섯째 날까지의 시간을 순서대로 되돌아 갑니다. 저자는 창세기 1장에서 여섯 째 날에 사람을 창조된 사실을 창조의 절정 또는 최고점으로 제시합니다. 그 후 저자는 2장에서 사람의 창조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창세기 1-2 장에는 두 가지 주된 모순이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식물과 관련됩니다. 창세기 1장 11절은 하나님이 셋째 날에 식물을 창조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5절에서는 사람을 창조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식물을 창조하신 것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인 셋째 날입니까(창 1장), 아니면 사람을 창조하신 이후(창 2장)입니까? "식물"에 대한 히브리 단어는 두 구절에서 다릅니다. 창세기 1장 11절은 일반적인 식물을 가리키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창세기 2장 5절은 농사를 필요로 하는 식물, 즉 돌 볼 사람이 필요한 식물을 언급하는 좀 더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 구절들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 11절은 하나님이 식물을 창조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창세기 2장 5절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까지 "농경 가능한" 식물을 자라나게 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모순으로 주장되는 것은 동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4-25절은 하나님이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동물을 창조하신 것을 기록합니다. 창세기 2장 19절은 몇몇 번역본을 볼 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동물을 창조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 19-20절에 대해 멋지고 이치에 맞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미)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본문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동물을 지으시고 그 후 그 동물들을 사람에게 데리고 오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은 “주 하나님이 (이미) 모든 동물들을 지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순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섯 째 날에 동물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후 동물을 사람에게 데려오셨고 사람은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두 가지 창조 기사를 개별적으로 고려한 다음 서로 조화를 시킨다면,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창조의 과정을 묘사하시고, 창세기 2장에서는 특히 여섯 째 날의 가장 중요한 세부 내용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이는 단지 평범한 내용에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사건을 기술해 나가는 일반적인 문학적 방법으로서 여기에도 모순이 없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그리스도인이 정신과 의사 및 심리상담사를 보러가도 되는가?

답변: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는 정신 건강 분야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의 역할을 혼동하며, 그들을 심리 치료사, 정신 분석가 또는 정신 건강 상담원과 같은 다른 정신건강 전문가들과 혼동합니다.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여러 다른 교육 경로를 통해 만들어지며 그들은 다양한 치료 방법을 사용합니다. 심리학자는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해야 하고, 주로 연구, 대학 수준의 수업, 그리고 개인 상담을 하는데 중점을 둡니다. 그들은 많은 인지 및 감정 평가를 위한 테스트를 운영할 수 ​​있습니다. 처방전 특권은 2002년 뉴멕시코에서 심리학자들에게 제공되었으며, 다른 나라에서도 다양한 심리학자 그룹들이 그러한 특권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편, 정신과 의사는 실제로 정신 질환을 전문하는 의사입니다. 정신과 의사는 정신건강을 위한 약리학적 치료에 대해 고등 훈련을 받았으며 약물을 처방하는 주요 정신건강 전문가입니다. 일반 의사와 간호사 역시 심리 치료를 위한 처방을 할 수 있습니다.

난독증 테스트나 상담을 위한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은 심리학자에게 가는 것이 좋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와 연결되기 전에 심리학자 또는 다른 상담 전문가를 만납니다. 일부 정신과 의사는 상담을 실시하지만 일부는 단지 치료를 수행하는 다른 전문가와 협력하여 약물 치료를 관리하고 감시합니다. 어떤 직업에서든 마찬가지로 일부 심리학자 및 정신병 의사는 기독교인이며 다른 사람들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성경이 이러한 전문직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심리학이나 정신 의학이 죄는 아닙니다. 둘 다 합당하며, 유익을 제공합니다. 정신건강 전문가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만드셨는지,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왜 우리가 그렇게 느끼고 행동하는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신 및 정서 문제에 관한 세속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이론이 많이 있지만, 성경적 관점에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많은 경건한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 지식을 표현하고 경건한 성품을 보이는 기독교 신자 전문가를 찾는 것이 최선입니다. 우리가 받는 그 어떤 상담도 세상의 모든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통해 진리인지 거짓인지 분별되어져야 합니다.

심리학자 또는 정신과 의사를 만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지할 것은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다양한 신앙과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심리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조차도 완벽한 해답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성경 지식의 어떤 영역에 대해서는 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갖게 되는 모든 병에 대해 첫 번째 해답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진리로 우리 자신을 무장시키는 것은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지를 분별하는데 반드시 필요합니다(엡 6:11-17; 고전 2:15-16). 모든 신자는 각각 자신의 영적 성장과 분별력을 위해 성경을 연구할 책임이 있습니다. 성령은 말씀을 사용하여 우리를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닮게 할 것이며,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엡 5:1-2; 골 3:3).

-Got Questions Ministries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저는 이런저런 이유로 이혼했습니다. 제가 재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두 번 이혼했습니다 – 처음은 제 배우자의 외도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불화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세 번 이혼했던 남자와 연애 중입니다 – 처음은 불화로, 두 번째는 그 자신의 외도로, 세 번째는 그의 아내 쪽의 외도로. 우리는 서로 결혼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이혼 후 재혼에 대한 다양한 경우들에 관하여 성경은 자세하게 언급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결혼한 커플이 모두 살아 있는 한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창세기 2:24; 마태복음 19:6). 이혼 후에 재혼을 허락하는 유일하고 구체적인 사유는 간통(외도)인데(마태복음 19:9), 이것조차 기독교인들간에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내버려질 때 입니다 – 믿지 않는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를 떠날 때(고린도전서 7:12-15). 그렇다고, 이 문장은 특별히 재혼하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결혼 상태로 남아 있으라 권합니다. 육체적, 성적, 그리고 심각한 감정적 학대의 경우들은 갈라설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성경은 이혼과 재혼의 맥락에서 이러한 죄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싫어하시고(말라기 2:16),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고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혼은 한 쪽에 문제가 있든, 두 쪽 다 문제가 있든 간에,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용서하실까요? 물론입니다. 이혼은 다른 어떠한 죄처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26:28; 에베소서 1:7). 하나님께서 이혼의 죄를 용서하신다면, 이것이 재혼하는 것에 대한 자유를 뜻하는 걸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는 사람들이 독신으로 남을 것을 소명하십니다(고린도전서 7:7-8). 독신으로 지내는 것을 저주나 형벌로 보아서는 안되겠고, 오히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7:32-36).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정욕으로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고린도전서 7:9). 아마 이것이 때로는 이혼 후 재혼하는 것에 적용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재혼을 할 수 있거나 재혼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문제는 당신과, 당신의 잠재적 배우자,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 사이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지혜를 주시라고 그분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야고보서 1:5). 열린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시편 37:4).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잠언 3:5-6)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십시오.

-Got Questions Ministries

 "영혼수면설"이란 사람이 사망한 후 부활과 최종 심판이 있을 때까지 그 사람의 영혼이 ‘잔다’는 믿음입니다. 영혼수면설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이 죽음과 관련하여 사람을 ‘잠자는’ 것으로 묘사할 때(눅 8:52; 고전 15:6), 그것은 문자 그대로 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자는 것은 시체가 잠자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죽음을 묘사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입니다. 죽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게 됩니다(히 9:27). 신자들에게는 몸을 떠나는 것이 주님과 곧바로 함께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고후 5:6-8; 빌 1:23). 불신자들에게 죽음이란 지옥에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눅 16:22-23).

하지만 마지막 부활 때까지 임시적인 천국이 있습니다. 바로 낙원입니다(눅 23:43; 고후 12:4) 또한 일시적인 지옥이 있습니다. 바로 음부(하데스)입니다(계 1:18, 20:13-14). 누가복음 16장 19-31절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낙원이나 음부(하데스)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영혼이 천국이나 음부에 있는 동안 그 사람의 몸은 "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 때에 이 몸은 "깨어나" 천국에서든 지옥에서든 영원히 소유할 몸으로 변화됩니다. 낙원에 있던 사람들은 새로운 하늘과 새 땅으로 보내질 것입니다(계 21:1). 음부(하데스)에 있던 사람들은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계 20:11-15). 이 둘은 모든 사람들의 최종적이고 영원한 목적지로서 전적으로 그 사람이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현재 영혼수면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그리스도 형제파 등 여럿이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가?

답변: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결정은 삶의 궁극적인 선택입니다.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숫자 만큼이나 많겠지만, 다음의 네 가지 이유로 일반적인 범주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1) 어떤 사람들은 구세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기본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하며, 모든 사람들처럼 자신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것이며 자신의 공로로 자신들에 대해 성공적으로 변호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인 거부 또는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2장 42-43절을 보면,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보다 동료들 사이에서의 지위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에”(요 12:43) 그들의 눈을 가리는 세상 지위 및 다른 사람들의 존중을 택한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3) 어떤 사람들에게는 현재의 세상이 제시하는 것들이 영원한 것보다 더 매력적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9장 16-23절에서 그러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기 위해 이 땅의 소유를 내려놓고자 하지 않았습니다(참조, 고후 4:16-18).

4) 많은 사람들이 단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인도하려는 성령의 시도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지도자인 스데반은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8장 23-27절에서 복음을 거절한 무리들에 대해 비슷한 언급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의 거부는 영원한 재앙을 낳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예수의 이름 외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그리고 어떤 이유이든 예수님을 거절하는 자들은 지옥의 바깥 어둠 속에서 영원을 직면하게 되어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마 25:30)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은퇴에 관한 기독교의 입장는 무엇인가?

답변:
그리스도인들은 은퇴 연령이 가까워질 때 종종 은퇴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직장에서 은퇴할 때 기독교 봉사에서도 은퇴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은퇴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까?

1) 어떤 나이에 도달하면 은퇴해야 한다는 성경적인 원칙은 없지만, 성막에서의 레위 사람들의 모범과 사역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민수기 4장을 보면, 레위 사람은 25세에서 50세 사이에서 성막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순서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50세가 되면 정규적인 일에서 은퇴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형제들을 도울 수는 있었어도 계속 제사장의 일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민 8:24-26).

2) 비록 우리가 우리의 직업(심지어 기독교 전임 사역)에서 은퇴할지라도, 또한 주님을 섬기는 방법은 바뀔지라도 우리는 결코 주를 섬기는 일에서 은퇴해서는 안됩니다. 누가복음 2장 25-38절을 보면 충실하게 주님을 계속 섬겨온 매우 연로한 두 사람(시므온과 안나)의 본을 접하게 됩니다. 안나는 금식과 기도로 매일 성전에서 일을 한 늙은 과부였습니다. 예를 들면, 디도서 2 장은 나이든 남자와 여자가 젊은 남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3) 노년기는 오직 즐거움을 추구하는 데에만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향락을 위해 사는 과부는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 말합니다(딤전 5:6). 성경의 가르침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은 은퇴를 가능한 만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이것은 퇴직자가 골프, 사회적인 기능 또는 즐거움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러한 것들이 어떤 나이에서든지 사람의 주된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4) 고린도후서 12장 14절은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저축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축’해야 하는 가장 위대한 것은 자녀, 손자, 증손자에게 전달될 수 있는 영적 유산입니다. 후손들의 세대는 가족 중에 나이든 어른들의 충실한 기도에 의해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기도는 아마도 은퇴한 사람들을 위한, 가장 열매를 맺는 사역의 출구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의 직장 주소만 바뀌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사람이 "은퇴 연령"(그 나이가 무엇이든지 간에)에 이르면 직업은 변할 수 있지만 주님을 섬기는 일은 변하지 않습니다. 평생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후에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 하셨는지를 연관지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종종 이러한 “어르신 성도들”입니다. 시편 기자의 기도는 우리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드려야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8).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우울증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우울증을 겪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답변: 우울증은 기독교인들이든 비기독교인들이든 상관없이 수백만 명에게 영향을 끼치는 널리 퍼진 질환입니다. 우울증으로부터 고통 받는 사람들은 극심한 슬픈 감정, 분노, 절망, 피로 등, 그 밖의 다른 다양한 증상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때 즐겼던 것들과 사람들에 관한 흥미를 잃으면서 자신들이 쓸모 없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또한 심지어 자살 충동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우울증은 흔히 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혼, 또는 학대나 열등감 같은 심리적 문제와 같은 삶의 상황에 의해 촉발됩니다.

성경은 기쁨과 찬양으로 충만하라고 말하는데(빌 4:4; 롬 15:11), 이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즐거운 삶을 살기를 의도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것이 상황으로 말미암은 우울증을 겪는 자에게는 쉽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 즉, 기도, 성경 공부와 적용, 지원하는 단체, 믿는 사람들간의 교제, 고백, 용서, 상담 등을 통해 치유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바깥쪽으로 관심을 돌리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의 우울한 감정은 종종 관심의 초점이 자신들로부터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들에 맞추어질 때 치유 될 수 있습니다.

병리학적인 우울증은 의사에 의해 진단을 받아야 하는 신체적 상태입니다. 이것은 불행한 삶의 상황에 기인한 것이 아닐 수 있으며, 또한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완화될 수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 내의 일부 사람들이 믿는 것과는 반대로 병리학적인 우울증은 항상 죄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우울증은 오직 약물 치료 및 상담으로 치료해야 하는 신체 장애에 의해 초래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어떤 질병이나 장애도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우울증 때문에 의사를 찾는 것은 부상 때문에 의사를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울증으로부터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안감을 완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몇 가지 것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럴 기분이 아닐 때 조차도 자신들이 말씀 안에 머물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감정은 우리를 방황하게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견고하며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강한 믿음을 유지해야 하고 시험과 유혹을 겪을 때 일수록 더욱 더 굳건히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고전 10:13). 우울증에 걸리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사람은 여전히, 필요한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것을 포함하여, 고통에 대응하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Got Questions Ministries

불교는 지지자들, 지리적 분포 및 사회 문화적 영향 면에서 대표적인 세계 종교 중 하나입니다. 불교는 대체로 ‘동양’ 종교이지만, 서구 세계에서 점점 대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업보(원인과 결과 윤리), 마야(세상의 환상적인 특성), 윤회(환생의 주기)를 가르치는 점에서 힌두교와 공통점이 있지만 나름대로 유일한 세계종교입니다. 불교도들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깨달음"을 얻어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다르타(Siddhartha Guatama, 석가)는 주전 600년경 인도에서 왕족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바깥 세상에 거의 노출되지 않은 채 화려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하였고 통증과 고통으로부터 그를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피난처는 어느새 침투되었고 그는 노인, 병자, 시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네 번째로 본 사람은 평화롭게 보이는 수도승(사치와 편안을 거부한)이었습니다. 그는 수도승의 평화를 보고는 자신도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금욕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기 위해 부요하고 풍성한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자기 고행과 강도 높은 명상에 능숙하여졌습니다.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의 노력은 하나의 마지막 몸짓으로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는 한 그릇의 쌀에 자신을 몰입한 다음 무화과 나무(또는 보리수 나무라고도 불립니다) 아래 앉아서 "깨달음"에 도달하거나 또는 노력하다가 죽으려고 명상하였습니다. 그는 고행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아침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깨달음을 얻은 자” 또는 “부처”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고 이미 그에게 큰 영향을 받고 있던 동료 수도승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동료 다섯 명이 그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고타마(석가)는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깨달음은 호화로운 방종이나 자기 고행이 아니라 ‘중용’에 놓여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알아냈습니다. 1) 사는 것은 고통이다(두카). 2) 고통은 욕망에 의해 생긴다(탄하, 또는 ‘집착’). 3) 모든 집착을 제거함으로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 4) 이는 고귀한 8개의 길을 따름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여덟 개의 길”은 1) 관점, 2) 의도, 3) 말, 4) 행동, 5) 생활(수도사), 6) 노력(바른 방향으로 향하는 에너지), 7) 마음을 씀(명상) , 8) 집중(초점)입니다. 부처의 가르침은 “삼장” 또는 "3개의 바구니"로 모아졌습니다.

이러한 구별된 가르침 뒤에는 힌두교에 공통적인 가르침인 윤회, 카르마, 마야와 현실을 그 방향에 있어서 범신론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교는 또한 신(神)과 고귀한 존재에 대한 정교한 신학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불교 역시 힌두교처럼 하나님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명확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일부 흐름은 합법적으로 무신론으로 불릴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범신론으로 불릴 수 있고, 정토 불교와 같은 유신론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전 불교는 궁극적인 존재의 실체에 대해 침묵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무신론으로 간주됩니다.

불교는 오늘날 매우 다양합니다. 그것은 대략 소승 불교(작은 그릇)와 대승 불교(큰 그릇)의 두 부류로 나뉠 수 있습니다. 소승 불교는 승려가 궁극적인 깨달음과 열반에 이를 수 있도록 준비된 수도원의 형태이며, 대승 불교는 깨달음의 목표를 일반인들, 즉 비 승려들에게까지 확장시킵니다. 이러한 두 범주 내에는 텐다이, 바지라나(밀교), 일련 정종, 진언종, 정토, 선종, 료부 등의 여러 분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부인들이 불교를 이해하고자 할 때 그들이 공부한 것이 고전적이며 역사적인 불교일 때 그 외의 특정 불교학의 모든 세부 내용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는 결코 자신을 신이나 어떤 종류의 신성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길을 보여주는 자'로 여겼습니다. 그는 죽음 이후에야 그의 추종자들 중 일부에 의해 신의 지위에 올려졌지만, 모든 추종자들이 그렇게 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성경 안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진술되어 있습니다(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성경은 또한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하나(요 10:30)라고 말합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고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처럼 자신이 단지 그 길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타마(석가)가 죽을 때 불교는 인도에서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후 300년이 지난 후 불교는 대부분의 아시아에 퍼졌습니다. 부처에게 속한 경전과 말씀은 그가 죽은 후 400년 정도 지난 뒤에 기록되었습니다.

불교에서 죄는 주로 무지로 이해됩니다. 죄는 "도덕적 오류"로 이해되지만, "악"과 "선"을 이해하는 문맥은 도덕과 무관합니다. 카르마(업보)는 자연의 균형으로 이해되며 개인적으로 강요 당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도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업보는 도덕적 규범이 아니며, 죄는 궁극적으로 부도덕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불교의 사상에 따라 말하면, 우리의 실수는 궁극적으로 무인격적인 실수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며 대인 관계의 위반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의 결과는 파괴적입니다. 불교도에게 있어서 죄는 거룩한 하나님의 본성에 반하는 범법이라기 보다 실수에 더 가깝습니다. 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 때문에 정죄 받았다는 선천적인 도덕 의식과 맞지 않습니다(롬 1-2).

이처럼 불교는 죄를 비인격적이고 교정될 수 있는 오류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기본 교리인 타락의 교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는 영원하고 무한한 결과를 가져오는 문제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을 저주스러운 죄에서 구할 구세주가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은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을 얻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불교도에게는 깨달음과 궁극적인 열반에 이르기를 소망하면서 고양된 존재가 되기 위한 윤리적인 생활과 명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엄청난 업보의 빚을 갚으려면 수많은 환생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불교를 진심으로 추종하는 자들에게는 그 종교는 자아를 부인하는 삶으로 포장된 도덕과 윤리 철학입니다. 불교에서 실체는 비인격적이며 비관계적입니다. 그러므로 실체는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하나님은 단지 환상이며 죄는 도덕과 무관한 오류이고 모든 물질적인 실체는 마야("환영")로 거부되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우리 ‘자아’를 잃어 버리게 됩니다. 인격 그 자체도 환상이 됩니다.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누가 우주를 창조했는지 물으면, 불교에서는 시작과 끝이 없기 때문에 침묵을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그 대신 출생과 죽음에는 끝없는 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떤 존재가 우리를 살도록 만들었고, 이렇게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도록 했는지, 또한 왜 계속 죽고 또 죽게 했는지 물을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그 원인이 무엇인지, 왜 괴로움을 주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단번에 죽게 하신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홀로 있지 않으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죽음보다 더 많은 것이 생명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불교는 열반이 존재의 최고 상태이며 순수한 존재의 상태로, 그것은 각 개인과 관련된 수단에 의해 달성된다고 가르칩니다. 열반은 이성적인 설명과 논리적인 질서를 무시하므로 배울 수 없고 오직 깨달을 뿐입니다. 반면에 하늘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몸은 죽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늘에 계신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 위로 올라간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막 12:25). 부처는 각 개인의 자아 또는 존재는 환상이기 때문에 사람은 개인의 영혼을 갖고 있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불교도들에게는, 우리의 영혼과 구원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길을 마련하기 위해 죽으시는 자기 아들을 보내신 자비로우신 하늘 아버지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불교는 거절되어야 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하나님은 죄를 임시적으로 덮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하고 완전한 희생을 예표하기 위해 동물 희생을 요구하셨습니다(레 4:54, 5:10).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에”(참조, 히 9:22) 동물 희생은 성경 전반에 걸쳐 중요한 주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옷을 지어 입히시기 위해 동물을 죽이셨습니다(창 3:21). 가인과 아벨은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쳤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양의 첫 새끼”(창 4:4-5)였기 때문에 받아들여졌지만 가인의 제물은 열매라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홍수가 물러난 후에 노아는 하나님께 동물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창 8:20-21).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일정한 절차에 따라 여러 가지 제사를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첫째, 동물은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둘째, 희생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그 동물과 동일시 되어야 했습니다. 셋째, 동물을 바치는 그 사람이 그 동물을 죽이는 일에 가담해야 했습니다. 믿음으로 이 일들이 행하여졌을 때, 그 희생은 일시적으로 죄를 가려주었습니다. 또 다른 희생 제사는 레위기 16장에 설명된 속죄일에 드려지는 제사로서 죄 사함과 죄의 제거를 보여줍니다. 대제사장은 두 마리의 숫염소를 가져다가 속죄 제물로 바쳤습니다. 염소 중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로 희생되었고(레 16 :15), 다른 염소는 광야로 보내어졌습니다(레 16:20-22). 속죄 제물은 죄 사함을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염소는 죄의 제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왜 더 이상 동물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궁극적이고 완전한 희생 제사이기 때문에 동물 희생은 끝이 났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하면서 이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당신은 ‘왜 동물이 희생되어야 하지? 동물이 무슨 잘못을 했나?’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동물들은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희생 제사를 드리는 그 사람을 대신하여 죽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잘못한 것이 없으시지만 기꺼이 인류의 죄를 위해 자신을 죽음에 넘기셨습니다(딤전 2:6).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고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에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것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동물 희생은 각 개인이 죄 사함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해 명하여졌습니다. 동물은 대속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죄인을 위해 대신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 제물은 단지 임시적인 것이라서 계속 반복적으로 드려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동물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멈추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영원히 드려진 궁극적인 대속 제물이었으며(히 7:27), 지금은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딤전 2:5). 동물 희생은 우리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였습니다. 동물의 희생이 죄의 용서를 제공할 수 있었던 유일한 근거는 동물 희생이 묘사하고 예표하는,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신 그리스도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하나님 모양의 빈 자리"(God-shaped hole) 개념은 모든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영혼(영과 생명)의 공허함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모양의 자리"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그 마음에 존재하는 무엇인가 저 밖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것, 또는 어떤 ‘다른 것’을 향한 갈망을 말합니다. 전도서 3장 11절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사람을 지으셨고,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을 향한 우리의 욕구를 채우실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하나님과 연결되고자 하는 타고난 욕구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 소욕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소욕은 “하나님 모양의 자리”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무시하거나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으로 그 자리를 채우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은 우리 마음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솔로몬은 같은 개념을 반복합니다.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전 9:3). 신약은 다음과 같이 동의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 : 7). 로마서 1장 18-22절은 사람들이 “하나님 모양의 자리”를 포함하여 하나님에 관해 알려주는 여러 계시들을 무시하고 그 대신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을 숭배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슬프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사업, 가족, 스포츠 등 하나님이 아닌 다른 뭔가를 추구하며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하지 않은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면서 결코 만족하지 못하며 왜 그들의 삶이 결코 만족스럽지 못한 지를 알지 못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추구하면서 한 동안 어느 정도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모든 재물과 성공과 존경과 능력을 소유하였던 자, 곧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솔로몬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갈망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는 모든 것을 "헛되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그가 추구했던 것들이 만족을 주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사각 못이 둥근 구멍을 채울 수 없듯이, 우리 각 사람 안에는 오직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사람 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하나님 모양의 자리”가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하나님 모양의 자리”가 채워질 수 있으며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만족될 수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경은 술을 마시는 것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레위기 10:9; 민수기 6:3; 신명기 14:26; 29:6; 사사기 13:4, 7, 14; 잠언 20:1; 31:4, 6; 이사야 5:11, 22; 24:9; 28:7; 29:9; 56:12;). 하지만 이 말씀은 기독교인이 맥주, 와인, 또는 그 밖의 알코올을 함유한 음료들을 마신다는 것을 반드시 금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어떤 성경 구절들은 긍정적인 용어들로 술을 논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9:7은 가르칩니다: “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시편 104:14-15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아모스 9:14은 자신의 포도원에서 마시는 와인은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라고 논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5:1은 “...포도주와 젖을 사라...” 고 격려합니다.

하나님께서 술에 대해 기독교인들에게 명하시는 것은 술 취함을 피하라는 것입니다(에베소서 5:18). 성경은 출 취함과 그것의 결과들을 정죄합니다(잠언 23:29-35). 기독교인들은 또한 어떤 것도 자신들의 육체를 다스리게 허락하지 말라고 명을 받습니다(고린도전서 6:12; 베드로후서 2:19). 술을 과하게 마시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중독입니다. 성경은 또한 기독교인이 다른 기독교인들을 불쾌하게 할 수 있거나, 그들의 양심을 거슬려서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그 어떤 행위도 금하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 8:9-13). 이런 원칙들에 비추어 보면, 어떤 기독교인이 자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술을 과하게 마시고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심히 어려울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0:31).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끔 포도주를 마셨던 것처럼 보이기 조차 합니다(요한복음 2:1-11; 마태복음 26:29). 신약성경의 시대에는 물이 매우 깨끗하지 않았습니다. 정화시설이 없었기에, 물은 종종 박테리아, 바이러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오염물질로 차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그렇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종종 포도주(또는 포도주스)를 마셨는데, 물보다 오염될 가능성이 훨씬 적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 5:23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물을 그만 마시고 대신 포도주를 마시라고 지도하였습니다(이것은 아마도 물이 디모데의 위장 문제들을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그 시대에는, 포도주는 발효되었는데(알코올이 함유됨), 꼭 오늘날의 정도까지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포도주스였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것이 오늘날 흔히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맥주, 와인, 또는 그 밖의 알코올 함유한 음료를 마시는 것을 금하고 있지 않습니다. 알코올 자체는 죄로 오염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절대적으로 삼가 해야 하는 것은 술 취함과 중독입니다(에베소서 5:18; 고린도전서 6:12).

적은 량의 알코올 섭취는 해롭다거나 중독성이 있지는 않습니다. 사실, 어떤 의사들은 적은 양의 적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건강, 특히 심장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적은 양의 알코올 섭취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한 문제입니다. 취하거나 중독되는 것은 죄입니다. 어쨌든, 알코올과 그것의 영향에 대한 성경적 염려, 알코올 과다 섭취로의 쉬운 유혹,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고/하거나 헤매게 할 가능성 등을 고려할 때, 기독교인에게는 술을 마시는 것을 삼가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인종주의, 편견, 차별에 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사람을 피부색을 근거로 해서 판단하는 것에 대해 성경적인 어떤 근거가 있는가? 


답변: 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이 세상에는 오직 한 인종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 인종은 인류입니다. 백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 인도인, 아랍인, 유대인은 다른 인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인류의 다른 족속들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똑같은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동등하게 지어졌다는 사실입니다(창 1:26-27). 하나님은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시어 예수님을 보내어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놓게 하셨습니다(요 3:16). 이 ‘세상’은 분명히 모든 민족 집단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편애나 차별을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에(신 10:17; 행 10:34; 롬 2:11; 엡 6:9), 우리도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 4절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우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약 2:8).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두 “인종” 집단으로 나누셨습니다. 바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입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이방 나라들을 보살피는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러한 나라가 되는 대신에 그들의 지위로 인하여 교만하여져서 이방인들을 멸시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적대감을 낳는 막힌 담을 허시고 이러한 분리를 종식시키셨습니다(엡 2:14). 모든 형태의 인종 차별과 편견과 멸시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업적에 모욕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요 13:34). 만일 하나님이 공평하시고 우리를 공정하게 사랑하신다면, 우리도 똑 같은 높은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그분께 한 것이라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멸시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예수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어떤 사람을 해치는 것입니다.

다양한 형태들과 다양한 정도로 나타나는 인종 차별은 수천 년 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고질병입니다. 모든 민족들의 형제와 자매들이여! 인정 차별은 안 됩니다. 인종 차별과 편견과 멸시의 희생자들은 용서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선언합니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당신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훨씬 더 없습니다. 인종차별, 편견, 멸시를 행하는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말씀이 완전히 실현되기를 기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Got Questions Ministries

  대체신학(교체신학)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스라엘을 대신했다고 가르칩니다. 대체 신학을 옹호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구체적인 미래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믿습니다.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모든 견해는 두 개의 캠프로 나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스라엘의 연장(대체/언약 신학)이라는 견해와 교회는 이스라엘과 완전히 다르며 구별된다는 견해입니다(세대주의/전천년주의).

대체 신학은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성경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많은 약속들이 이스라엘이 아닌 기독교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위한 복과 약속의 땅으로의 회복에 관한 예언들은 영적으로 변화되거나 우화화되어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복의 약속으로 대체됩니다. 이 견해와 관련하여 주요한 문제들이 존재하게 되는데, 수세기 동안 유대 민족이 계속 존재하여 왔다는 사실과 특히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과 같은 사건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다면 유대 민족에게는 장래가 없을텐데, 유대 민족이 그들을 파괴하려는 수 많은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지난 2천 년 동안 초자연적으로 생존하여 온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1천 9백 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나라가 20세기에 국가로서 다시 등장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과 교회가 다르다는 것은 신약 성경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는 이스라엘과 완전히 다른 별개이며, 이 둘을 절대로 혼동하거나 서로 바꾸어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교회는 오순절 날에 존재하게 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며 휴거에 의해 하늘로 들어올려질 때까지 계속해서 이 땅에 존재할 것을 알 수 있습니다(엡 1:9-11; 살전 4:13-17) . 교회는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 및 복과 관계가 없습니다. 언약들과 약속들과 경고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유효합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2천 년 동안 흩어져 있으면서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서 따로 있었습니다.

휴거 이후에(살전 4:13-18),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분 계획의 주된 초점으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이때 첫 번째 사건은 환란입니다(계 6-19 장). 이스라엘이 대환난의 시련을 통해 메시아의 재림을 위해 준비되는 동안 세상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후 대환난이 끝날 때 그리스도께서 지상으로 오실 것이며 이스라엘은 그분을 영접할 준비가 될 것입니다. 환난에서 살아남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여 이 땅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므로 이스라엘이 선도 국가가 될 것이고 모든 민족의 대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고 경배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돌아와 문자 그대로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계 20:1-5).

구약과 신약 모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전천년적 또는 세대주의로 이해하는 것을 지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천년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지지는 계시록 20장 1-7절의 분명한 가르침에서 발견됩니다. 그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왕국이 천 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여섯 번이나 말합니다. 대환난 후에 주님께서 돌아오셔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온 땅을 다스릴 것이며 이스라엘이 열국의 지도 국가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문자 그대로 천년 동안 주님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대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시대에 교회에 주된 관심을 집중하실 것이지만,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으며, 어느 날 이스라엘을 국가로 택하며 의도하셨던 역할을 그 나라에 회복시키실 것입니다(로마서 11 장).

-Got Questions Ministries

주의만찬을 연구한다는 것은 심금을 울리는 경험일 수 밖에 없는데 그것에 담긴 깊은 의미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날까지 우리가 준수하고 있는 의미 있고 새로운 친교의 성찬을 제정하셨던 때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날인 오래된 유월절을 기념하는 중이셨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예배의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게 하고 미래에 있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고대하게 해 줍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한 해의 가장 성스러운 종교적인 축제였습니다. 이것은 이집트 사람들의 장자들이 죽었던 마지막 재앙과 이스라엘 족속들이 그들의 문설주들에 뿌려진 양의 피로 말미암아 보호되었던 일들을 기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양은 구워져서 무교병과 함께 먹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가오는 모든 세대들에 걸쳐 이 축제가 기념되어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출애굽기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유월절 축제) 예수님께서는 한 쪽의 떡을 취하시고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그분께서 그것을 쪼개어 그분의 제자들에게 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들에게 주는 나의 몸이니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그와 같이, 저녁을 드신 후, 잔을 취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누가복음22:19-21). 예수님께서는 축제를 찬양으로 마치셨고(마태복음 26:30), 그리고 그들은 밤에 감람산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예언된 데로 유다에게 배반당하셨습니다. 그 다음날 그분께서는 십자가 형에 처해 지셨습니다.

 

주의만찬에 대한 기록은 복음서들에서 발견됩니다(마태복음 26:26-29; 마가복음 14:17-25, 누가복음 22:7-22; 그리고 요한복음 13:21-30).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3-29에 주의만찬에 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서들에서 발견되지 않는 말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1:27-29). 우리는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떡과 잔의 진정한 의미를 무시하거나 구세주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치르신 그 엄청난 대가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뜻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것은 주의만찬을 단지 형식적인 죽은 의식이 되게 한다거나 고백하지 않은 죄를 지닌 체 주의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바울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떡을 먹고 잔을 마시기 전에 우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복음서 말씀들에 포함되지 않은 또 다른 말씀을 바울이 하였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1:26). 이는 이 의식에 대해 시간적 제한을 둡니다(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짧은 말씀들로부터,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두 개의 부서지기 쉬운 것들을 자신의 몸과 피의 상징으로 사용하셨고 그것들을 자신의 죽음의 기념비로 삼으셨는지를 배웁니다. 이것은 조각된 대리석이나 성형된 놋쇠가 아닌 떡과 포도주로 된 기념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은 부서지게 될 자신의 몸을 말하였다고 표명하셨습니다. 부서진 뼈는 없었지만, 그분의 몸은 매우 심하게 고문을 받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포도주는 그분의 피를 말씀하고 있었는데, 그분이 곧 당할 끔찍한 죽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아들인 그분께서는 구세주에 관한 구약 성경의 셀 수 없는 예언들의 성취가 되셨습니다(창세기 3:15; 시편 22; 이사야 53 등등). 예수님께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이것이 미래에서도 계속되어야 하는 의식임을 가리키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양의 희생을 요구하고 세상의 죄를 제거하실 하나님의 양의 오심을 고대하였던 유월절이 주님의 주의만찬에서 완료되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새 언약은 유월절의 양(고린도전서 5:7)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을 때 구 언약을 대체하였습니다(히브리서 8:8-13). 희생 제사 제도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히브리서 9:25-28). 주의만찬/주의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셨던 일을 기념하는 것이며 그분의 희생의 결과로 우리가 받은 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