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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으로 묘사됩니다(신명기 9:7; 여호수아 1:18). 죄는 천사들 중 아마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루시퍼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의 위치에 만족 못한 그는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 하였고, 그것이 그의 몰락이었으며, 죄의 시작이었습니다(이사야 14:12-15). 사탄으로 다시 명명된 그는 죄를 에덴 동산에 있는 인간에게 가져왔는데, 여기서 그는 “네가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라는 똑 같은 꼬임으로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였습니다. 창세기 3장은 아담과 이브의 하나님과 그분의 명령에 반한 반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죄는 인간의 모든 세대를 걸쳐 물려져 왔고, 아담의 후손들인 우리도 그로부터 죄를 물려받았습니다. 로마서 5:12은 아담을 통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왔고, 그리하여 “죄의 삵은 사망”(로마서 6:23)이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임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을 통해 물려 받은, 죄를 향한 성향(죄성)이 인류에게 들어 왔고, 인간들은 본질상 죄인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그의 내적인 속성은 그의 죄로 말미암아 변하였고, 그의 뒤를 이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되는 영적인 죽음과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들이라기 보다는, 죄인들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달 된 타락한 속성은 상속 받는 죄, 즉, 원죄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들로부터 육체적 특징들을 물려 받는 것 같이,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우리의 죄성들을 물려받습니다. 다윗은 시편 51:5에서 타락한 인간성의 이런 상태를 애도하였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5).

죄에 대한 또 다른 유형은 귀속죄로(전가죄)로 알려져 있습니다. 금융과 법적 환경 둘 모두에서 사용되는데, “귀속하다(전가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어떤 사람에게 속한 무언가를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인간이 물려받은 죄 때문에 여전히 죄인들이었다 할지라도, 죄가 인간에게 전가되지 않았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후에는, 법을 위반한 죄들은 그들에게 귀속(책임 전가)되었습니다(로마서 5:13). 법을 어긴 범죄가 인간에게 귀속되기 전에도 죄에 대한 궁극적 형벌(죽음)은 계속해서 왕 노릇 하였습니다(로마서 5:14).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들은 죽음의 적용을 받았는데, 이는 모세의 율법(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에 반하여 그들이 범한 죄악의 행위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물려 받은 죄성 때문이었습니다. 모세 이후에, 사람들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들을 위반한 귀속죄, 둘 모두 때문에 죽음의 적용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유익을 위해 귀속(전가)의 원리를 사용하셨는데, 그분께서 믿는 자들의 죄를 십자가에서 그 죄의 대가인 죽음을 치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책임으로 전가시키실 때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귀속(전가)시키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 아니셨지만, 마치 죄인이셨던 것처럼 취급하셨고, 이 온 세상의 죄들을 대신해 죽으시게 하셨습니다(요한일서 2:2). 죄는 그분께 전가되었지만, 그분께서는 아담으로부터 죄를 물려받지 않으셨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께서는 죄의 대가를 치르셨지만, 결코 죄인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순수하고 완전한 본성은 죄로 말미암아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무 죄도 짓지 않으셨음에도, 인간에 의해 저질러졌던 모든 죄들에 대한 책임이 있었던 것처럼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들을 그리스도의 계좌(책임)로 돌리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믿는 자들에게 돌리고, 그 의로움으로 우리의 계좌를 채우셨습니다(고린도후서 5:21).

죄의 세 번째 형태는 모든 인간에 의해 매일 범해지고 있는 개인적 죄입니다.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죄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결백해 보이는 거짓말로부터 살인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이고 사적인 죄들을 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을 둔 적이 없는 사람들은 물려받고 귀속되었던 죄뿐만 아니라 이러한 개인적 죄들의 대가를 치러야만 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죄의 영원한 형벌인 지옥 그리고 영적 죽음에서 벗어났고, 또한 지금은 죄 짓는 것을 저항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죄를 범할지 범하지 않을 지의 여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를 성결케 하며, 우리가 죄들을 범하였을 때 그 죄들을 정죄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죄에 저항하는 능력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9-11).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9).

우리는 물려받은 죄, 귀속된 죄(전가된 죄), 그리고 개인적인 죄로 인해 모두 세 번 정죄 받습니다. 공평한 죄의 대가는 오로지 죽음인데(로마서 6:23), 그냥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원한 죽음입니다(요한계시록 20:11-15). 감사하게도, 물려받은 죄, 귀속된 죄, 그리고 개인적 죄 모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았고, 지금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에베소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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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는 두 가지 문제들이 관련되어 있는 데, 성경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죄라고 공표한 것들과 성경이 직접적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은 것들 입니다. 다양한 죄들의 성경적 목록들은 잠언 6:16-19; 갈라디아서 5:19-21; 고린도전서 6:9-10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들이 죄악된 행위들, 즉, 하나님께서 승인하지 않으신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에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살인, 간음, 거짓말, 도적질, 등과 같은 것들을 성경이 죄라고 제시하고 있다는 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좀 더 어려운 문제는 성경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는 영역들에서 무엇이 죄악된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있습니다. 성경이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지 않을 때, 그분의 말씀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어떤 일반적 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성경에서 참조할 만한 구체적인 구절이 없을 때는, 어떤 것이 나쁘냐의 여부 보다는 그 것이 절대적으로 좋은 것인지를 묻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우리가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십니다(골로새서 4:5). 이 땅에서의 우리의 몇 안 되는 날들은 영원한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 짧고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결코 이기적인 일로 낭비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는데”(에베소서 4:29) 사용해야 합니다.

좋은 기준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목적들을 위한 우리의 솔직하고 선한 양심에 기인한 특정한 행위를 하나님께서 축복하고 사용해 주실 것을 간구하느냐의 여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던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있다면, 포기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니라”(로마서 14:23). 우리의 영혼들뿐만 아니라 육체들도 구원받아서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일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전서 6:19-20). 이 위대한 진리는 우리가 하는 것들과 가는 방향에 있어 중요하게 작용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판단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도 고려해야 합니다. 어떤 특정한 일이 우리에게는 개인적으로 상처를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로마서 14:21; 15:1).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님이고 구세주이심을 기억하고, 다른 그 어느 것도 그분의 뜻을 우리가 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우선 순위가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습관이나 오락 또는 야망이 우리의 삶들을 부당하게 주관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께서만이 그 권위를 지니고 지니고 계십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린도전서 6:12).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로새서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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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죄를 극복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있어 도움이 되는 여러 수단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수명 동안 우리는 죄에 대해 절대적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지만(요한일서 1:8),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말씀의 원칙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점진적으로 죄를 극복하고 더욱 더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습니다.

죄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 있어 성경이 언급하는 첫째 방법은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삶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라디아서 5:16-25에서 육체적 행위들을 성령의 열매와 대조하십니다. 이 구절들을 보면 우리는 영 안에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이미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가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르면서 성령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 삶 속에서 육체를 따르는 것 보다 성령님의 인도를 지속적으로 따르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님께서 만드시는 차이는 성령 충만 하기 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그리고 그 후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한 베드로의 삶에서 입증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진 후, 그는 오순절 날 유대인들에게 거리낌 없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감동을 소멸하려 하지 않고(데살로니가전서 5:19) 대신에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구하며(에베소서 5:18-21) 성령 안에서 걷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해 집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구약 성경에 나온 것 같이 하나님의 선택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 개인들을 선택하고 그들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십니다(창세기 41:38, 출애굽기 31:3, 민수기 24:2, 사무엘상 10:10).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증거가 에베소서 5:18-21과 골로새서 3:16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두 번째 방법으로 인도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디모데후서 3:16-17). 하나님 말씀은 어떻게 살며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잘못된 길을 선택했을 때 우리에게 알려주며, 옳은 길로 다시 돌아와서 그 길에 머물게끔 우리를 도와줍니다. 히브리서 4:12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우리의 마음을 관통할 수 있고 마음과 생각의 가장 깊은 죄들을 뿌리 뽑고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시편 저자는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힘에 대해 시편 119장에서 상세하게 말합니다. 여호수아에게 적들을 극복하기 위한 성공의 열쇠는 이 방법을 잊지 않고 낮과 밤으로 묵상하고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군사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명령을 하셨을 때도 그는 따랐으며, 약속된 땅을 위한 전투들에서 그가 승리한 열쇠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너무나 자주 가볍게 여기는 자원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성경을 가지고 간다든지 매일의 종교 의식을 위해 읽거나, 하루에 한 장씩 읽는 식으로 명목상으로만 성경을 취급하고 있지, 그것을 외우고, 묵상하며, 우리의 삶들에 적용하는 데에는 실패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일깨워주는 죄들을 고백하거나, 그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선물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실패합니다. 성경을 비유 하자면, 우리는 종종 거식증이나 폭식증에 걸려있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먹음에 있어 영적으로 그저 살아있을 만큼만 취하든지(그러나 결코 건강하기 위해 충분한 만큼 창성한 기독교인들의 섭취가 아님), 아니면 많이는 먹지만 그것으로부터 영적인 영양분을 취하기에 충분한 명상을 결코 오래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매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 공부하고 외우는 습관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러한 습관을 들이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전문 잡지로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당신이 말씀을 통해 얻은 것들을 적기 전에는 말씀을 떠나지 않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영역에 있어 변화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실 것을 요청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기도들을 기록합니다. 성경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사용하시는 도구이며(에베소서 6:17), 우리가 영적 전쟁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전신 갑주의 근본적이고 주요한 부분입니다(에베소서 6:12-18).

죄에 대적하는 우리의 싸움에 있어 세 번째 중요한 방법은 기도입니다. 이것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입술로만 사용하고 실제로 거의 사용하지 않는 자원입니다. 우리는 기도 모임 과 기도 시간 등을 가지고 있지만, 기도를 초기 교회와 같은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사도행전 3:1, 4:31, 6:4, 13:1-3). 바울은 그가 사역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했는지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에 관한 아주 엄청난 약속들을 주셨으며(마태복음 7:7-11, 누가복음 6:23-27, 요한일서 5:14-15), 바울은 영적 전쟁의 준비를 위한 글들에 기도를 포함시켰습니다(에베소서 6:18).

우리의 삶에 있어 죄를 극복하는데 기도가 얼마나 중요할까요? 베드로가 부인하기 바로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베드로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깨우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태복음 26:41). 우리도 베드로처럼 옳은 것을 하고 싶으나 그럴 능력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찾으라, 계속 두드리라, 계속 구하라는 하나님의 권면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마태복음 7:7). 기도는 마법의 공식(주문)이 아닙니다. 기도는 단순히 우리 자신의 한계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해 그분께 의지하는 것입니다(요한일서 5:14-15).

죄를 정복하기 위한 우리의 전쟁에서 네 번째 방법은 교회, 즉, 다른 믿는 자들과의 교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두 명씩 내보내셨습니다(마태복음 10:1). 사도행전에 있는 전도 여행들에서 한 번에 한 사람씩 나가지 않고, 둘 또는 그 이상이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들이 함께하는 모임을 폐하지 말고 사랑과 선행들로 서로 격려하는데 모임의 시간을 사용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히브리서 10:24-25). 그분은 우리들의 잘못을 서로에게 고백하라고 말씀하십니다(야고보서 5:16). 구약 성경의 지혜의 말씀은,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도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잠언 27:17). 다수는 혼자보다 힘이 있습니다(전도서 4:11-12).

많은 기독교인들이 완강한 죄를 극복하는데 책임 있는 동반자가 있음을 엄청난 혜택으로 압니다. 당신과 이야기하고, 함께 기도하며, 격려해주고, 심지어 꾸짖어 주는 사람을 갖게 된다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입니다. 유혹은 우리 모두에게 흔한 일 입니다(고린도전서 10:13). 책임 있는 동반자나 집단을 가진다는 것은 가장 완강한 죄들마저도 극복하는데 필요로 하는 격려와 동기의 마지막 보루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죄에 대한 승리가 빠르게 다가옵니다. 또 다른 때는 승리가 더디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들을 사용할 때, 하나님께서는 점진적으로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충실하신 분임을 알기에 죄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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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들의 목록은 죄에 대한 인간의 타락한 성향에 관해 추종자들을 가르치고 훈육하는데 있어 초대 기독교인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하실 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용서 못 하실 유일한 죄는 계속 되는 불신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불신이란 용서를 얻기 위한 유일한 수단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의 그분의 대속적인 죽음).

치명적인 일곱 가지의 죄들은 성경적입니까? 그럴 수 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잠언 6:16-19은 공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곧 (1) 교만한 눈과 (2) 거짓된 혀와 (3)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4)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5)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6)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7)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그러나, 이 목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치명적인 일곱 가지 죄들이 아닙니다.

6 세기의 그레고리 교황에 따르면,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만, 시기, 탐식, 색욕, 분노, 탐욕. 이 모든 것들이 부인할 수 없는 죄들이라 할지라도,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들”이라고 성경에 묘사된 적이 없습니다. 치명적인 일곱 가지 죄들의 전통적 목록은 존재하는 다른 많은 죄들을 범주화 하는 좋은 방법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종류의 죄들은 이 일곱 가지 범주들 아래 분류될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하게, 우리는 이 일곱 가지 죄들이 어떤 다른 죄 보다 더 “치명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죄는 사망을 낳습니다(로마서 6:2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들”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죄들이 용서받을 수 있음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마태복음 26:28; 사도행전 10:43; 에베소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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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21-28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음욕을 품은 것도 간음한 것이고, 미워하는 마음만 먹어도 살인한 것과 같은 것으로 동일시 합니다. 그라나, 이것은 죄들이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하려고 하셨던 것은, 사람이 실제로 그것을 수행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행위를 하기 원하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죄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당신이 그러한 욕구들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 한, 원하는 어떤 것이라도 생각만 하는 것은 괜찮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들뿐만 아니라 사람의 생각들도 심판하신다는 것을 당신이 깨닫도록 예수님께서 강권하고 계십니다. 행위들은 우리의 마음들에 가득한 것의 결과라고 예수님께서는 공표하셨습니다(마태복음 12:34).

그래서, 예수님께서 정욕과 간음 둘 다 모두 죄라고 말씀하셨다 할지라도, 이것은 이 둘이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떤 사람을 단순히 미워하는 것보다, 둘 다 모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일지라도, 훨씬 나쁜 짓입니다. 죄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죄들은 다른 죄들보다 더 나쁩니다. 동시에, 영원한 결과들이나 구원에 관한 점에 있어서는, 모든 죄들이 동일합니다. 모든 죄는 영원한 정죄로 이끌 것입니다(로마서 6:23). 아무리 “작은” 죄일지라도 모든 죄는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무한하고 영원한 대가를 치러야 마땅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수 없을 만큼 너무나 큰 죄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죽으셨습니다(요한일서 2:2).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고린도후서 5:21). 모든 죄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동일할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정도에 있어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형벌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용서함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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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용어가 포르노와 관계가 있습니다. 포르노는 오늘날 이 세상에 만연해 있습니다. 아마, 다른 어떤 것보다 사탄은 성을 뒤틀리게 하고 왜곡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사탄은 좋고 올바른 것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스러운 성관계)을 취하여 성욕, 포르노, 간음, 강간, 그리고 동성연애로 대체시켰습니다. 포르노는 계속 증가되고 있는 사악함과 부도덕함으로 향하는, 매우 미끄러운 비탈 면 위의 첫 발자국이 될 수 있습니다(로마서 6:19). 포르노의 중독성은 문서로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약 사용자가 똑 같은 “효과”를 얻기 위해 더 많은 그리고 더 강한 마약들을 복용해야 하는 것처럼, 포르노도 사람을 성에 대한 극심한 중독과 사악한 욕망으로 더욱 더 깊이 끌고 갑니다.

죄의 세가지 주요 범주들은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입니다 (요한일서 2:16). 포르노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육체의 정욕을 일으키고, 너무나도 자명한 안목의 정욕입니다. 빌립보서 4:8에 비추어 보면, 포르노는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포르노는 중독적이고 (고린도전서 6:12; 베드로후서 2:19), 파괴적입니다 (잠언 6:25-28; 에스겔 20:30; 에베소서 4:19). 포르노의 본질인,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욕정은 하나님께 대한 공격입니다(마태복음 5:28). 포르노그에 습관적으로 열중하는 것은 개인의 삶을 특정 지우는데, 아직 그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고린도전서 6:9).

포르노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줄 수 있고 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포르노에 관련되어 있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합니까? 여기에 승리를 위한 몇 가지 단계들이 있습니다: (1) 당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십시오 (요한일서 1:9). (2)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을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하고 또 변화시켜 주시라고 구하십시오 (로마서 12:2). (3) 당신의 마음이 빌립보서 4:8로 채워지기를 구하십시오. (4) 거룩함 속에 당신의 육체를 소유하는 것을 배우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4:3-4). (5) 성에 대한 올바른 의미를 이해 하고 필요할 때 배우자에게만 의지하십시오(고린도전서 7:1-5). (6) 당신이 성령과 함께 동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갈라디아서 5:16). (7) 포르노 이미지에 대한 당신의 노출을 감소시키는 현실적인 단계들을 취하십시오. 당신의 컴퓨터에 포르노 차단 막을 설치하고, 텔레비전과 비디오의사용을 제한하며, 그리고 당신을 위해 기도해 주고 당신이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다른 기독교인을 찾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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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흡연을 한 번도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흡연에 확실히 적용할 수 있는 원칙들은 있습니다. 첫째, 성경은 우리의 몸들을 어떤 것으로부터도 “제제 받게” 만들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린도전서 6:12). 흡연이 매우 중독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같은 문장의 후반부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전서 6:19-20). 흡연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당신의 건강에 대단히 해롭습니다. 흡연은 폐와 심장에 손상을 입힌다고 밝혀져 왔습니다.

흡연이 유익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요(고린도전서 6:12)? 흡연이 진정으로 몸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고린도전서 6:20)? 흡연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정직하게 인간은 말할 수 있을까요(고린도전서 10:31)?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확실히 “아니오”일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흡연은 죄이고,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흡연같이 몸에 중독적이고 나쁠 수 있는, 건강에 해로운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이 견해에 반하는 주장을 합니다. 한 예로서, 많은 사람들이 꼼짝없이 카페인에 중독되어 아침에 마시는 첫 번째 커피 한잔 없이는 하루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이 사실이 흡연을 정당화 시킵니까? 기독교인들은 폭식과 몸에 지나치게 해로운 음식 섭취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한 죄는 정죄하고 다른 죄는 용납함으로써 자주 위선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이것이 흡연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흡연에 대한 이러한 견해에 반하는 또 다른 주장은 담배를 피웠던 것으로 알려진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 같이, 경건한 많은 사람들이 흡연자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이런 주장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흡연에 관한 한 스펄전은 잘못된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다른 점에서 그는 경건하고 하나님 말씀의 훌륭한 교사였습니까?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이것이 그의 모든 행위들과 습관들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만들어 줍니까? 아닙니다.

흡연은 죄라고 말하는 것이 모든 흡연자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믿는 많은 흡연자들이 있습니다. 흡연이 사람을 구원받지 못하게 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것은 구원을 잃어버리게 하지도 않습니다. 흡연은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거나 하나님께 기독교인으로서 죄를 고백함에 있어, 어느 다른 죄와 마찬가지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요한일서 1:9). 동시에, 우리는 흡연이 떨쳐버려야 하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극복해야 하는 죄라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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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명합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위기 19:28). 오늘날의 신자들은 구약의 율법 아래 있지 않지만(로마서 10:4; 갈라디아서 3:23-25; 에베소서 2:15), 문신을 금지하는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은 몇 가지 의문을 불러옵니다. 신약은 그리스도인들이 문신을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전저 3:3-4에 있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이 말씀이 기독교 여성들에게 직접적으로 언급된 것이지만, 여기에 제안할 수있는 원칙이 있습니다: 즉, 사람의 외형적 모습이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머리를 꾸미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보석으로 장식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여성의 진실한 아름다움은 이러한 것들에 놓여있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문신이나 피어싱 역시 “외형적인 장식”입니다. 우리는 성별에 관계없이 “내적 자아”의 성장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문신과 피어싱에 관해 옳고 그름을 우리가 점검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양심적으로 하나님께 솔직하게 축복해 달라고 구할 수 있는 것인지 또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에 사용하시라고 구할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 성경은 문신이나 바디 피어싱을 금하는 명을 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믿을 만한 이유도 주지 않습니다.

또 고려할 사항은 단정함입니다. 성경은 옷을 단정하게 차릴 것을 지적합니다(디모데전서 2:9). 단정하게 옷을 입었는지 알아보려면 옷으로 가려야 될 몸을 적절히 가렸는지 확인해 보면 됩니다. 사실 단정함의 근본적인 뜻은 당신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옷을 적절히 입은 사람들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습니다. 문신과 바디 피어싱은 대부분 사람의 주의를 끕니다. 이런 면에서 문신과 바디 피어싱은 단정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성경적 원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지 의심의 여지가 있다면 연루되지 않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4:23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은 죄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은 구속되었고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6:19-20에 문신이나 바디 피어싱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주의를 줍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하고 어디를 가던지 이 진리는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면, 문신이나 피어싱으로 우리 몸을 치장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허락”하셨는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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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도박, 내기, 복권을 특별히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것을 우리에게 경고합니다(디모데전서 6:10; 히브리서 13:5). 성경은 또한 “빠르게 부자가 되려는(일확천금)” 시도를 하지말라고 우리를 격려합니다(잠언 13:11; 23:5; 전도서 5:10). 도박은 틀림없이 돈에 대한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빠르고 쉬운 부의 약속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게 분명합니다.

도박이 뭐가 잘못이라는 말입니까? 도박은 어려운 문제인데, 그것이 적당하게 가끔씩만 행해진다면, 돈이 낭비가 되지만, 꼭 악한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행위들에 돈을 씁니다. 도박은 영화를 보거나(많은 경우들), 불필요하게 비싼 음식을 먹는다거나, 또는 쓸모 없는 물건을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돈을 낭비합니다. 동시에, 다른 것들에도 돈이 낭비된다는 사실이 도박을 정당화 시킬 수 없습니다. 돈은 낭비되어서는 안됩니다. 과도한 돈은 미래의 필요를 위해 저축되거나 주님의 사역에 쓰여져야지, 도박으로 탕진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명쾌하게 도박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운” 또는 “기회”에 관한 행사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에서는 재물로 드릴 양과 희생양을 가르기 위하여 제비 뽑기(추첨)가 사용됩니다. 도박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운”이나 “기회”라는 단어를 들어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 에서는 추첨을 통해 재물로 드릴 양과 속죄양을 골랐습니다. 여호수아는 다양한 부족들에게 할당할 땅을 결정하기 위하여 제비를 뽑았습니다. 느혜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안에 거주 할 사람들을 결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사도들은 유다의 공백을 대신할 사람을 결정하기 위하여 제비를 뽑았습니다. 잠언 16:33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성경은 카지노나 복권에 대해 뭐라고 말씀 할까요? 카지노는 가능한한 많은 돈의 위험을 무릅쓸 도박꾼들을 끌어 들이기 위해 모든 유형의 마케팅 전략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자주 저렴하거나 공짜인 술을 제공하는데, 이는 술에 취하는 것을 고무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명하게 판단하는 능력을 저하시킵니다. 카지노 안의 모든 것은 거액의 돈을 취하기 위해 완벽하게 조작 되어 있고 순식간의 공허한 즐거움 외에는 결국 아무 것도 돌려 주지 않습니다. 복권은 교육 그리고/또는 사회 프로그램의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이라고 자신들을 묘사하려 합니다. 하지만, 연구 조사에 따르면, 복권 참가자들은 일반적으로 복권 사는 지출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빨리 부자가 된다”는 매력은 절망적인 사람들이 거부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유혹입니다. 이길 확률은 극미하고, 많은 사람들의 삶들이 파괴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복권을 산다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나 어떤 다른 좋은 일에 돈을 쓸 수 있게 복권이나 도박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동기는 좋을 수 있으나, 실지로는 경건한 목적으로 도박으로 딴 돈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연구 조사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의 복권 당첨자들이 잭팟을 터트리고 난 몇 년 후에는 경제 사정이 그 전 보다 훨씬 더 나빠져 있다고 합니다. 설령 좋아진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좋은 일에 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선교를 위한 자금을 조성하는 데에 우리의 돈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잠언 13:11은 말씀하십니다: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이시고 교회에 필요한 것은 정직한 수단을 통하여 제공하실 것입니다. 기부된 마약에서 번 돈이나 은행 강도로 훔쳐진 돈을 받는 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걸까요?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가 되려는 유혹으로 말미암아 가난한 자들로부터 “훔쳐진” 돈은 필요하지도 원치도 않으십니다.

디모데전서 6:10 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히브리서 13:5은 선포합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또 마태복음 6:24은 분명히 보여줍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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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술을 마시는 것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레위기 10:9; 민수기 6:3; 신명기 14:26; 29:6; 사사기 13:4, 7, 14; 잠언 20:1; 31:4, 6; 이사야 5:11, 22; 24:9; 28:7; 29:9; 56:12;). 하지만 이 말씀은 기독교인이 맥주, 와인, 또는 그 밖의 알코올을 함유한 음료들을 마신다는 것을 반드시 금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어떤 성경 구절들은 긍정적인 용어들로 술을 논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9:7은 가르칩니다: “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시편 104:14-15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아모스 9:14은 자신의 포도원에서 마시는 와인은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라고 논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5:1은 “...포도주와 젖을 사라...” 고 격려합니다.

하나님께서 술에 대해 기독교인들에게 명하시는 것은 술 취함을 피하라는 것입니다(에베소서 5:18). 성경은 출 취함과 그것의 결과들을 정죄합니다(잠언 23:29-35). 기독교인들은 또한 어떤 것도 자신들의 육체를 다스리게 허락하지 말라고 명을 받습니다(고린도전서 6:12; 베드로후서 2:19). 술을 과하게 마시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중독입니다. 성경은 또한 기독교인이 다른 기독교인들을 불쾌하게 할 수 있거나, 그들의 양심을 거슬려서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그 어떤 행위도 금하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 8:9-13). 이런 원칙들에 비추어 보면, 어떤 기독교인이 자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술을 과하게 마시고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심히 어려울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0:31).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끔 포도주를 마셨던 것처럼 보이기 조차 합니다(요한복음 2:1-11; 마태복음 26:29). 신약성경의 시대에는 물이 매우 깨끗하지 않았습니다. 정화시설이 없었기에, 물은 종종 박테리아, 바이러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오염물질로 차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그렇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종종 포도주(또는 포도주스)를 마셨는데, 물보다 오염될 가능성이 훨씬 적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 5:23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물을 그만 마시고 대신 포도주를 마시라고 지도하였습니다(이것은 아마도 물이 디모데의 위장 문제들을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그 시대에는, 포도주는 발효되었는데(알코올이 함유됨), 꼭 오늘날의 정도까지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포도주스였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것이 오늘날 흔히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맥주, 와인, 또는 그 밖의 알코올 함유한 음료를 마시는 것을 금하고 있지 않습니다. 알코올 자체는 죄로 오염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절대적으로 삼가 해야 하는 것은 술 취함과 중독입니다(에베소서 5:18; 고린도전서 6:12).

적은 량의 알코올 섭취는 해롭다거나 중독성이 있지는 않습니다. 사실, 어떤 의사들은 적은 양의 적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건강, 특히 심장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적은 양의 알코올 섭취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한 문제입니다. 취하거나 중독되는 것은 죄입니다. 어쨌든, 알코올과 그것의 영향에 대한 성경적 염려, 알코올 과다 섭취로의 쉬운 유혹,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고/하거나 헤매게 할 가능성 등을 고려할 때, 기독교인에게는 술을 마시는 것을 삼가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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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동성연애 행위는 죄라고 우리에게 일관되게 말씀합니다(창세기 19:1-13; 레위기 18:22; 로마서 1:26-27; 고린도전서 6:9). 로마서 1:26-27은 동성연애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불순종한 결과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와 불신 가운데 계속 머물 때, 하나님을 떠난 삶의 헛됨과 절망을 그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훨씬 더 사악하고 타락된 죄로 “그들을 넘기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떠난 삶이 얼마나 무익하고 절망적인지 알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6:9은 동성연애를 “범하는 자”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표명합니다.

하나께서는 동성연애의 욕구를 가진 사람을 창조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죄(로마서 1:24-27)와 궁극적으로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사람들이 동성애자가 된다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천성적으로 폭력이나 다른 죄들을 선호하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듯이, 사람은 동성애에 대한 더 큰 감수성을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죄악된 욕망에 굴복하여 사람이 죄를 선택하는 것에 대한 핑계가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천성적으로 잘 분노하고 격노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가 그러한 욕망에 굴복하는 것을 정당화 시키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동성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성연애가 다른 죄보다 “더 큰” 죄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해 반하는 것입니다. 동성연애는 사람을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할, 고린도전서 6:9-10에 나열된 많은 것들 중 단지 하나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용서는 간음한 자, 우상숭배자, 살인자, 절도범, 등과 같이 동성애자에게도 유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신들의 구세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모든 사람들에게 동성애를 포함한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약속하십니다(고린도전서 6:11; 고린도후서 5:17; 빌립보서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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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자위행위를 명쾌하게 언급하거나 그것이 죄가 되는지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자위행위에 관하여 가장 자주 초점이 맞춰지는 성경의 내용은 창세게 38:9-10에 있는 오난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이 “씨를 바닥에 뿌리는 것”이 죄임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는 이 구절이 정확히 말하고 있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난이 “씨를 뿌렸다고”해서가 아니라 오난이 그의 형제를 위해 상속을 제공하는 자신의 의무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그를 벌하셨던 것입니다. 자위행위가 죄가 된다는 증거로 가끔 쓰여진 두 번째 구절들은 마태복음 5:27-30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음탕한 생각들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였고, 그리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이 구절과 자위행위 사이에 유사점은 있지만, 예수님께서 자위행위를 시사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성경에 어디에도 명쾌하게 자위행위가 죄라는 말씀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위행위로 이끄는 행위들이 죄인지에 관해서는 질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위행위는 항상 거의 음탕한 생각들, 성적 자극, 그리고/또는 도색적 이미지들의 결과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처리될 필요가 있습니다. 정욕, 부도덕한 생각들, 그리고 외설물의 죄들이 버려지고 극복된다면, 자위행위는 이슈거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위행위에 대한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행위로 이끈 것들이 훨씬 더 회개의 대상이 됩니다.

자위행위의 문제에 적용될 두 있는 몇 가지 성경적 원리들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5:3은 선포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자위행위가 이 특별한 시험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지 힘들어 보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 당신이 어떤 것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면, 당신은 그런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하는 것이라는 온전한 확신이 없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로마서 14:23). 더 나아가, 우리의 지체들이 대속되었고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전서 6:19, 20). 이 위대한 진리는 우리의 몸들로 우리가 무엇을 할 때 실제로 실현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원리들에 비추어, 자위행위가 죄라는 결론은 성경적입니다. 분명히, 자위행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부도덕함이 드러남을 피하지 못하고, 우리 몸들의 소유권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시험도 통과하지도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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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은 기독교인들이 쉽게 무시하는 죄인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속하게 흡연과 음주를 죄라고 표시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식탐은 허용되거나 적어도 용인됩니다. 건강과 중독과 같은 흡연과 음주에 대한 많은 논쟁들이 과식에도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많은 신자들은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는 것에 대해 생각조차 꺼려하지만 식탁에서 과식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 23장 20-21절은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 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고 경고합니다. 잠언 28장 7절은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고 선언합니다. 잠언 23장 2절은 “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고 선포합니다.

육체의 식욕은 우리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먹는 습관을 제어할 수 없다면, 우리는 마음의 습관(정욕, 탐욕, 분노)과 같은 다른 습관들을 제어할 수 없고, 우리의 입을 비방이나 다툼으로부터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식욕이 우리를 제어하지 못하도록 하고 우리가 식욕을 제어해야 합니다(신 21:20; 잠 23:2; 벧전 1:5-7; 딤후 3:1-9; 고전 10:5). 절제, 곧 정도에 지나치려는 것에 대해 ‘안돼’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된 성령의 열매 중 하나입니다(갈 5:22).

하나님은 맛있고 영양가 있는 즐거움을 주는 음식으로 이 땅을 채우심으로 우리에게 복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음식을 즐기고 적당한 양을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물을 귀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식욕에 의해 제어되는 대신에 그것을 제어하라고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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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죄를 물려받았으며, 특히 아담으로부터 죄를 물려 받았습니다. 죄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요일 3:4)과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신 9:7; 수 1:18)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 장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그분의 명령에 반역한 사건을 묘사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때문에 죄는 그들의 모든 자손들에게 상속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은 죄가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전달되었다고 알려줍니다. 이 전달된 죄는 유전된 죄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육체의 특성을 물려받는 것처럼,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죄 많은 본성을 물려받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습니다(창 1:26-27, 9:6). 그러나 우리는 아담의 모양과 형상도 받았습니다(창 5:3). 아담이 죄에 빠졌을 때 그 결과는 그의 자손들도 모두 죄에 감염된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이 사실에 대해 애통하였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이것은 그의 어머니가 그를 부정한 방법으로 임신하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의 어머니가 부모로부터 죄를 상속 받았고 그 부모는 그들의 부모로부터 죄의 본성을 물려 받았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의 부모로부터 죄를 물려받았습니다. 우리가 가능한 최선의 삶을 살더라도 우리는 상속받은 죄의 결과로 인하여 여전히 죄인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들은 모두 죄를 짓게 됩니다. 로마서 5장 12절의 전개를 주목하십시오. 죄가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 왔고, 죽음은 죄를 따라오고,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오고, 모든 사람들은 아담으로부터 죄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롬 3:23) 우리는 죄를 씻어내는, 완전하고 죄가 없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고맙게도, 예수 그리스도는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입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못 박혔으며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엡 1:7). 하나님은 그분의 무한한 지혜로 우리가 물려받은 죄에 대한 구제책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제책은 모든 사람에게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라”(행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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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라는 용어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의 불순종의 죄와 그로 인하여 나머지 인류에 끼친 영향을 다룹니다. 원죄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지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지니게 된 죄와 그 죄책"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원죄에 대한 교리는 특히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본성과 우리의 처지에 끼친 영향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그 영향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죄를 짓기에 충분한 나이가 되기 이전에 발생합니다. 그 영향을 다루는데 있어서 세 가지 주요 견해가 있습니다.

펠라기안주의(Pelagianism): 이 견해는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들의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견해입니다. 단지 아담은 후손들에게 죄를 짓도록 영향을 끼친 죄악의 본보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사람은 단지 죄를 안 짓겠다고 선택하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사람이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는 아무런 가망 없는 죄의 노예 상태에 있으며 또한 그의 선행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에 ‘죽은 것’이거나 가치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수많은 구절들과 상충됩니다(엡 2:1-2; 마15:18-19; 롬 7:23; 히 6:1, 9:14).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소위 "죄성"으로 언급되는 죄의 성향을 물려받는다고 믿습니다. 고양이가 그의 본성에 따라 ‘야옹’하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사람은 그 죄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그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그칠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알미니안 주의에서는 그 은혜를 “선행적인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아담의 죄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고 단지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아담과 유사한 방법으로 죄를 짓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형벌을 받는다는 사실과 상충됩니다(고전 15:22; 롬 5:12-18). 또한 “선행적인 은총”에 대한 교훈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칼뱅주의(Calvinism): 칼뱅주의 교리는 아담의 죄는 우리로 하여금 죄성을 갖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유죄 상태가 되게 만들었다고 언급합니다. 우리가 원죄를 가지고 잉태됨으로 인한 결과는(시 51:5)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렘 17:9) 마음으로 묘사되는 사악한 본성을 물려 받는 것입니다. 아담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죄책과 형벌(죽음)은 우리에게도 속하게 되었습니다(롬 5:12, 19). 하나님 앞에서 왜 아담의 죄책이 우리에게 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견해는 인류가 아담 안에 씨의 형태로 있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아담이 범죄했을 때,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창 14:20; 히 7:4-9), 레위도 아브라함 안에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으로 간주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다른 견해는 아담이 우리의 대표로서 죄를 지었으므로 우리 역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칼뱅주의적인 견해는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극복할 수 없다고 봅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십자가 상에서의 그분의 속죄를 의지할 때만 얻을 수 있습니다. 원죄에 대한 칼뱅주의적인 견해는 성경적 가르침과 가장 잘 일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죄의 본성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로 선택할 때 원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그럴듯한 해석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죄악됨을 의식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죄성을 거절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죄성을 거부하는 대신에 ‘승낙’합니다. 이는 사실상 죄성에 대해 좋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죄성을 승낙할 때 에덴 동산에서 있었던 아담과 하와의 행동에 동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제로는 그 죄를 범하지는 않았지만 그 죄에 대해 유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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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부모가 저지른 죄 때문에 처벌받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들 역시 자녀의 죄로 인하여 처벌받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에스겔 18장 20절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죄를 지은 자가 그 죄에 대한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죄에 대한 형벌이 세대에 이어진다는 “가계 저주론”를 믿는 몇몇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기 20장 5절 등의 구절로 그들의 주장을 전개합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그러나 출애굽기 20장 5절을 문맥에서 보면 당장 우리는 하나님이 우상 숭배의 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의 죄를 거룩한 믿음을 배반하는 가장 끔찍한 죄로 여기셨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항하는 반역자들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우상 숭배와 함께 동반되었던 혐오스러운 관습들(신 12:31) 외에도 우상 숭배는 한 문화 안에 뿌리를 내리곤 하였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전통을 계속 지키고 또한 유사한 우상 숭배를 행하게 됨으로 이미 확립된 불순종의 패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불순종하는 세대의 결과는 그 악함이 너무 깊게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그 뿌리를 제거하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렸습니다.

출애굽기 20장 5절의 함축적인 의미는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대는 선조들의 죄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벌하는" 하나님이란 단지 자녀들이 조상들의 죄를 반복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방법일 뿐입니다. 역사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경향은 우상 숭배 문화에서 특히 강합니다.

또 다른 고려 사항은 출애굽기 20장 5절의 경고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모세의 율법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세대 간 저주는 각 가족에 대한 개인적인 저주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집단적인 형벌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만일 어떤 남자가 은행을 털면, 그 아들이 강도 행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남자의 아들을 처벌하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행을 털었던 그 아버지는 자신의 범죄로 인한 자연스런 결과로 인해 아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만일 그 남자가 은행 강도의 기법을 아들에게 전수한다면, 그 아들이 부정직한 동일한 경로를 따르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경우 그 죄는 아들에 의해 반복되고 그 죄에 대한 형벌은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 18장 20절이 보여 주듯이, 우리 각자는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이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해 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범죄의 책임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으며 다른 사람도 우리의 잘못에 대해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규칙에는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그 예외는 모든 인류에게 적용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감당하고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롭고 순수하게 될 수 있도록 죄값을 치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우리의 죄를 위해 그분의 완전함과 바꾸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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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5장 16절은 신약 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중 하나입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이 구절에 대한 모든 해석 중에 이 구절에 관한 모든 질문에 답하는 해석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은 도아마 사도행전 5장 1-10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일어난 일과 비교될 때 가장 잘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참조, 고전 11:30). "사망에 이르는 죄"는 고의적이고 연속적이며 회개하지 않는 죄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거룩으로 부르셨습니다(벧전 1:16). 하나님은 그들이 죄를 지을 때 그들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우리는 구원을 잃거나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된다는 의미로 우리의 죄에 대해 형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징계를 받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6).

요한일서 5장 16절은 신자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 범죄할 때 하나님이 더 이상 허락하지 않으시는 시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시점에 이르면 하나님은 완고하게 죄를 짓는 신자의 생명을 거두기로 결정하실 수 있습니다. "사망"은 육체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고의적으로 그분에게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분의 교회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사망으로 인도하는 죄"와 "사망으로 인도하지 않는 죄"를 구별합니다. 교회의 모든 죄는 동일하게 처리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모든 죄가 "사망으로 인도하는 죄"의 수준까지 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5장 1-10절과 고린도전서 11장 28-32절을 보면, 하나님이 죄인의 육신의 삶을 취하심으로써 교회에서 고의적이고 계획적으로 진행된 죄를 다루십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5장 5절에서 말한 "육신의 멸망"이 의미했던 바일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죄를 짓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죄를 짓는 신자의 생명에 대해 하나님이 그 생명을 거두기로 결정하시는 때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고집 센 사람을 위한 기도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의로우십니다. 그분은 마침내 우리를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엡 5:27) 만드실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징계하십니다. 주여! 우리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우리 마음이 강퍅하여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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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을 수 없는 죄, 또는 성령모독죄 / 성령훼방죄”는 마가복음 3장 22-30절과 마태복음 12장 22-32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막 3: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예외를 알려주십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막 3:29).

예수님에 따르면 사하심을 얻을 수 없는 죄 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유일합니다. 그 죄는 결코(여기서 ‘결코’는 마태복음 12장 32절의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라는 의미) 용서받지 못할 한 가지 죄악입니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모독하는(노골적으로 무시하며 대항하는) 죄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마태복음 12장과 마가복음 3 장에서 볼 수 있는 신성 모독의 경우는 유일합니다. 이 죄를 지은 바리새인 무리들은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시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목격했지만, 여전히 예수께서 귀신들의 왕인 바알세불에 사로잡혔다고 주장하였습니다(마 12:24; 막 3:30).

예수님 시대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귀신 들렸다고 비방함으로써 사하심을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행동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지 또는 오해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보았고, 진리에 대한 그분의 명백한 제시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도적으로 진리를 부인하고 성령을 비방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통해 나타나는 세상의 빛 앞에 서서, 반항하는 자세로 눈을 감고 고의적으로 맹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죄를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성령에 대항하는 신성 모독은 바리새인들의 상황에 구체적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반복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시지 않으므로 아무도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개인적으로 볼 수 없고 또한 그 기적의 능력을 성령 대신에 사탄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용서받을 수 없는 유일한 죄는 계속적인 불신의 죄입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상태에서 죽는 자에게는 결코 죄 사함이 없습니다. 성령님은 구원받지 않은 자들에게 죄와 의와 심판을 책망하시면서 이 세상에서 일하고 계십니다(요 16:8).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책망을 저항하고 회개하지 않은 상태로 남으면 그 사람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을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히 11:6),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입니다(행 16:31).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은 사람에게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준비해 주셨습니다(요 3:16). 용서는 예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요 14:6). 유일한 구세주를 거절하는 것은 구원의 수단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유일한 사면을 거부하는 자는 분명히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용서하실 수 없거나 또는 용서하지 않으실 죄를 저질렀다고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느낍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그러한 오해 상태에 묶어 두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죄에 대해 책망을 느끼는 죄인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 4:8).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바울의 증언은 하나님이 믿음으로 주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으며 구원하실 것이라는 적극적인 증거가 됩니다(딤전 1:12-17). 만일 당신이 오늘 무거운 죄책감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당신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하나님은 팔을 펴고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히 7:25)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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