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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의 정체에 대한 잘못된 오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을 단순히 신비한 능력으로 봅니다. 다른 이들은 성령님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에게만 허락해 주시는 비인격적인 능력으로 봅니다. 그러면 성경은 성령님의 정체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간단히 말하면, 성경은 성령님이 하나님이시라고 공표합니다. 또한 성경은 성령님께서 생각, 감정, 그리고 의지를 지닌 존재, 즉, 신성한 인격체시라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사도행전 5:3-4를 포함하여 많은 성경 말씀들 안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왜 성령님을 속였는지에 관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거짓말을 한 것” 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님을 속인 것은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는 분명한 주장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가지셨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하나님 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령님의 무소 부재하심이 시편 139:7-8에 보입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또한 고린도전서 2:10-11에서 우리는 성령님의 전지하신 속성을 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성령님께서 생각, 감정, 그리고 의지를 지니셨기 때문에, 진정으로 거룩한 인격체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생각하고 아십니다(고린도전서 2:10). 성령님께서는 슬퍼하실 수 있습니다(에베소서 4:30).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탄원하십니다(로마서 8:26-27).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을 내리십니다(고린도전서 12:7-11).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며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인격)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성령님이 그리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대로, 위로자와 상담자로서의 진정한 역할을 수행하십니다(요한복음 14:16, 2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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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은 사도행전 2:1-4에 기록된 오순절 날 처음으로 발생합니다. 사도들은 나아가서 군중들에게 군중 자신들의 언어들로 말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사도행전 2:11). 방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문자 그대로 “언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사역을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14장에서, 바울은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고린도전서14:6) 라고 말씀하면서 놀라운 은사들을 논합니다. 사도행전에 묘사된 방언과, 사도 바울에 따르면, 방언이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에게는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이 통역이나 변역이 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무용한 것입니다.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고린도전서 12:30)은 방언으로 말하여진 언어를 모른다 하더라도 방언하는 사람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방언을 말한 사람의 메시지를 소통할 수 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고린도전서 14:13). 통역되지 않은 방언에 관한 바울의 결론은 강력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린도전서 14:19).

오늘날에도 방언이 존재합니까? 고린도전서 13은 고리도전서 13:10의 비록 “온전한 것”이 올 때 패한다는 것과 관련된다 하더라도, 방언의 은사는 패하여 질것이라고 언급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언이나 지식이 “폐하고” 란 시제를 사용한 반면 방언이 “폐하여 질 것”을 가리키는 헬라어 동사의 시제가 이와 다름을 들어 방언이 “완전한 것”이 오기 전에 폐하여 지는 증거라고 지적합니다. 가능한 해석이나, 이것은 본문에 있어 아주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은 하나님의 다가오는 심판의 징조였다는 증거로서 아사야 28:11과 요엘 2:28-29 같은 말씀들을 지적합니다. 고린도전서 14:22은 방언을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징조”로서 묘사합니다. 이 논증에 따르면, 방언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서 거부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 하실 것이라는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을 때(A.D. 70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음), 방언의 은사는 더 이상 의도된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견해가 가능은 하지만, 방언의 주요 목적이 성취되었다는 것이 꼭 그것이 폐하여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방언의 은사가 폐하여졌다고 결정적으로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동시에, 만일 방언을 말하는 은사가 오늘날 교회에서도 활동적이라면, 그것은 성경과 부합하여 수행될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적이며 지적 언어일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4:10). 그것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목적을 위해서일 것입니다(사도행전 2:6-12).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주신 명령과 부합될 것입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린도전서 14:27-28). 그것은 또한 고린도전서 14:33과 부합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물론 의심의 여지 없이 사람들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게끔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실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영적 은사들을 나눠주심에 있어 주권적이십니다(고린도전서 12:11). 선교사들이 언어를 배우지 않고도 선교지의 사람들과 그들 만의 언어로 즉시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더 생산적이 될지를 그저 상상해 보십시오. 하시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십니다. 대단히 유용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방언은 신약 성경에 나타났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행한다고 주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믿는 자들은 위에 언급한 성경의 말씀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방언이 폐하였거나, 아니면 최소한, 오늘날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보기 드문 것이라는 결론을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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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침례란 구원의 순간에 하나님의 영이 믿는 자들을 예수님과 연합시키고 예수님의 몸 안에서 다른 믿는 자들과 연합시키는 작업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성령침례는 침례 요한과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에 의해 예측되었습니다: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사도행전 1:5). 이 약속은 오순절 날에 성취되었습니다(사도행전 2:1-4); 처음으로, 성령께서 믿는 자들 안에 영구적으로 내재하셨고,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12-13은 성령침례에 관한 중심 구절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린도전서 12:12-13). 우리 “모두”가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 모든 믿는 자들이 구원을 의미하는 침례를 받았는데, 이는 단지 몇 안되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경험이 아닌 것입니다. 로마서 6:1-4가 성령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고린도전서 구절과 유사한 어투로 하나님 앞에서의, 믿는 자들의 위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다음과 같은 사실들은 성령침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공고히 하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첫째, 고린도전서 12:23은 모두가 한 영을 마신 것(성령의 내재하심)처럼, 모두가 침례를 받았다고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성경 어디에도 믿는 자들에게 성령과 함께, 안에서 또는 의해서 침례를 받거나, 또는 어떻게든 성령침례를 쫓으라고 말해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모든 믿는 자들이 이러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셋째, 에베소서 4:5은 성령침례를 언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령침례는 “한 믿음”과 “한 아버님”처럼, 믿는 자 모두를 위해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침례는 두 가지 일들을 합니다. 1) 그것은 우리를 예수님의 몸에 속하게 하고, 2)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실현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됨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는, 고린도전서 12:23의 본문에 언급된 바와 같이 우리는 그 몸이 제대로 작동하게끔 영적 은사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5의 말씀과 같이, 성령침례 체험은 교회의 통합을 유지하기 위한 근거로 제공됩니다. 성령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지냄, 그리고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은, 우리가 내재된 죄의 권세로부터 분리되는 것이고 새 생명 안에서 우리 삶의 근거를 구축하는 것입니다(로마서 6:1-10; 골로새서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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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에 대한 ‘(신성)모독’은 마가복음 3:22-30과 마태복음 12:22-32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기적을 행하셨을 뿐이었습니다. 귀신 들린 남자가 예수님께 데려와 졌고, 주님은 실명되고 벙어리인 그 남자를 치유하면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이 귀신 쫓아내시는 것을 본 목격자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구세주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구세주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한 무리의 바리새인들은 군중 속에 싹트기 시작한 어떠한 믿음이라도 재빠르게 진정시켰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마태복음 12:24). 예수님께서는 왜 본인이 사탄의 힘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몇 가지 논리적 논증을 들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성령에 대한 모독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31-32절).

(신성)모독이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반항하는 불경스러움”으로 정의 될 수 있습니다. 이 용어는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고의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일들을 비하하는 것 같은 죄들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신성)모독은 어떠한 악함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거나 우리가 마땅히 그에게 돌려야 할 어떠한 선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성)모독의 특별한 경우는 마태복음 12:31에서 “성령에 대한 (신성)모독이라고 칭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기적들을 행하고 계시는 반박 할 수 없는 증거를 목격하고도,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귀신이 들리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마태복음 12:24). 마가복음 3:30에 주목하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신성)모독하는 바리새인들이 범한 짓에 관하여 매우 구체적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귀신을 힘입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에 대한 (신성)모독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 충만 대신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특별한 유형의 (신성)모독은 오늘 날 반복될 수 없는 성격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역사의 독특한 순간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과 선지자가 있었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하는 성령이 계셨으며, 그들의 바로 앞에 친히 서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셨고, 그리고 그들은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들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이 전의 세계의 역사 (그리고 그 후로도)에서 인간에게 그렇게 많은 신성한 빛이 비추어진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봤어야만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항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알고 증거가 있었음에도 의도적으로 성령의 일을 마귀의 일로 돌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도적 실명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 선포하셨습니다. 성령에 대한 그들의 (신성)모독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최종적으로 거부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길을 설정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방해 받지 않고 멸망으로 항해 가게끔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신성)모독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라고 군중에게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2:32). 이것은 그들의 죄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의 방법입니다. 지금도(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히(용서받지 못함). 마가복음 3:29에 쓰여진 것 같이, 그들은 “영원한 죄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바리세인들의 공개 거부(그리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의 즉각적인 결과는 다음 장에서 보여집니다(마태복음 13:3; 참고. 마가복음 4:2).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방법에 당황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자신께서 비유를 사용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태복음 13:11, 13).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이 공식적으로 자신을 맹렬히 비난하는 직접적인 결과로, 비유와 은유를 들어 진실을 가리셨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성령에 대한 (신성)모독은 어떤 이들이 시도한다 하더라도 오늘 날 반복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 위에 안 계십니다 - 그분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아무도 개인적으로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목격하고 그 능력을 성령 대신 사탄의 능력으로 돌 릴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용서받지 못할 죄는 계속되는 불신의 상태입니다. 성령은 지금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요한복음 16:8). 그 책망에 반항하고 의도적으로 회개치 않은 상태에 머무는 것이야말로 성령을 “(신성)모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야기하는 성령을 거부하고 불신가운데 죽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용서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그리고 선택도 분명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한복음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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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적을 행하시는 지의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말씀도 않으시며, 그리고 기적과 기사를 행하지도 않으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으며 성경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질문은 고린도전서 12-14에 주로 묘사된 것처럼 성령의 기적의 은사들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가의 여부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성령께서 누군가에게 기적의 은사를 주실 수 있느냐의 질문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적의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지의 여부를 묻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성령께서는 자신의 뜻에 따라 은사를 자유롭게 나누어 주신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합니다(고린도전서 12:7-11).

사도행전과 에베소서를 보면, 거의 대부분의 기적들은 사도들과 가까운 동료들에 의해 행하여졌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 이유를 주고 있습니다: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그리스도의 모든 믿는 자들이 표적, 기사, 기적들을 행하는 능력을 갖추었다면, 그 표적, 기사, 기적들은 결코 사도들을 구별하는 표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22은 예수님께서는 기적, 기사, 표적들로 “인정 받으셨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그들이 행했던 기적들에 의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사자로서의 “표식”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4:3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행한 기적들로 인해 복음의 소식이 “입증”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14은 성령의 은사들의 주제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평범한 기독교인들에게도 가끔은 기적의 은사들이 주어졌던 것처럼 보입니다(12:8-10; 28-30). 이것이 얼마나 흔한 일이었는지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습니다. 표적과 기사들로 사도들이 “표”해졌다는 사실에 근거하면, 기적의 은사들이 평범한 기독교인에게 주어진 경우는 예외이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닌 것처럼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과 그들의 가까운 동료들 외에는, 신약 성경 어느 곳에도 개인들이 성령께서 주신 기적의 은사들을 행했다고 특별히 묘사되고 있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는 우리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것 같이 완성된 성경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디모데후서 3:16-17). 그러므로, 예언, 지식, 지혜 등의 은사들은 초대 교회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예언의 은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의 새로운 사실과 소통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에 완성된 지금, “계시적”인 은사들은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적어도, 신약 성경에 있는 것 같은 정도의 능력으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기적적으로 사람들을 치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들을 수 있는 음성이든, 우리의 마음 속이든, 또는 감동과 느낌든 여러 방법들을 통해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놀라운 기적들, 표적들 그리고 기사들을 행하시며, 때로는 이러한 기적들을 기독교인을 통해 수행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성령께서 주시는 기적의 은사들이 아닐 수 도 있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은사의 주 목적은 복음은 진실이며 사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자들이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기적을 행하는 은사들이 폐하였다고 노골적으로 말씀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들이 신약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은 수준으로 발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토대를 갖추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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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순간 바로 성령을 받는다고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고린도전서 12:23 은 공표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9은 성령을 소유하지 않은 자는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았다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에베소서 1:13-14는 성령은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구원의 인증이 된다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날인)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세 구절들을 보면 성령은 구원의 순간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고린도 교회의 믿는 자들이 성령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우리 모두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우리가 마실 한 성령이 주어졌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서 8:9에 성령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았다고까지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소유는 구원을 받았느냐의 여부를 확인하는 요소가 됩니다. 나아가, 사람이 성령을 구원의 순간에 받지 못하면, 성령은 구원의 인침이 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에베소서 1:13-14). 성경의 많은 부분은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보장된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성령 사역들이 자주 혼란스럽기 때문에 논란이 많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 혹은 성령의 내주하심은 구원을 받는 순간 일어납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계속 진행중인 과정입니다. 우리가 성령 세례 역시 구원의 순간 일어난다고 믿는 반면, 어떤 신자들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종종 성령 세례와 구원에 따르는 행위인 “성령을 받는 것”을 혼동케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령을 어떻게 받습니까?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함으로써 우리는 성령을 받습니다(요한복음 3:5-16). 언제 성령을 받습니까? 우리가 믿는 그 순간 나는 성령을 영원히 소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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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구절은 요한복음 14:6인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실 것이고 그 내주하심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 충만과 성령의 거하심(내주하심)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의 영원한 내주하심은 선택된 몇 명의 믿는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결론을 지지하는 다수의 성경적 언급들이 있습니다. 첫째, 성령은 예수님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예외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고, 이 선물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 다른 조건이 주어지지 않습니다(요한복음 7:37-39). 둘째, 성령은 구원 받을 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3에 따르면, 성령은 구원 받는 순간에 주어집니다(에베소서 1:13). 갈라디아서 3:2은 이와 같은 진리를 강조하며 성령의 인치심과 내주하심이 믿을 때 일어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성령은 믿는 자들 안에 영원히 내주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미래에 올 영광에 대한 보증금, 또는 증명으로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고린도후서 1:22; 에베소서 4:30).

이는 에베소서 5:18에서 언급 된 성령 충만과 대조가 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완전히 따라야 하며 그래야만 그분께서 우리를 온전히 품으실 수가 있는데, 이런 의미로 우리를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9와 에베소서 1:13-14 은 성령께서 모든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시지만, 그분께서는 근심하실 수 있고(에베소서 4:30), 우리 안에서 그분의 역사가 소멸 될 수도 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9). 우리가 이런 상태를 허락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나 우리를 통한 성령의 역사나 그분의 능력의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를 인도하고 주관하면서, 우리 삶들의 모든 부분을 장악하시는 데 있어 그분을 자유롭게 해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행사될 수가 있어 우리가 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해 열매를 맺을 수 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외부적인 행위들에게만 적용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 행위들을 주관하는 제일 깊숙한 생각들과 동기들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시편 19:14은 말씀합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죄는 성령 충만을 방해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성령 충만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에베소서 5:18은 우리가 성령 충만할 것을 명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위한 기도가 충만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들에 대한 우리의 순종만이 성령께서 내 안에서 자유롭게 역사하는 자유를 가지시게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성령이 충만 되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우리는 바로 하나님께 그것을 고백하고,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위해 우리의 헌신을 새롭게 해야 합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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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은 영적 은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줄 어떤 마법같은 공식이나 은사 테스트는 없습니다. 성령님이 결정하시는 데로 나누어주시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2:7-11). 신자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문제는 자신이 받은 은사에만 전념해서 은사를 받았다고 믿는 그 영역 안에서만 하나님을 섬기려고하는 유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에 있어 자신을 순종하며 섬기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부르신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은사 혹은 은사들을 갖추어 주실 것입니다.

영적 은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알아낼 수 있습니다. 영적 은사 테스트만을 완전히 의지할 수 없지만 내게 가능한 은사들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확인도 내가 가진 은사를 감지할 수 있도록 합니다. 또 사람들은 나의 섬김을 통해, 내 자신은 당연시 여기거나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용되어지는 은사들을 발견해줄 수도 있습니다. 기도도 또한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영적 은사들로 준비되어있는지 아시는 단 한 분은 그 은사를 주시는 분이신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 좋게 사용할 수 있도록 기도를 통해 내가 어떤 영적 은사들을 가지고 있는지 성령님께 여쭈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들을 교사들이 되라고 부르시고, 그들에게가르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또 섬기는 자들이 되라고 부르시고, 그들에게 돕는 은사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은사를 특별히 안다는 것이 우리가 받은 은사 밖의 영역들에서의 섬김을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병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영적 은사를 아는 것은 유익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가진 영적 은사에만 매달려서 내가 받은 은사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다른 섬김의 기회들을 잃게 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까? 네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에 우리가 헌신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은사들로 우리를 준비시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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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영적인 은사 간에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둘 다 사용하면 효과가 배가됩니다. 둘 다 이기적인 목적이 아닌 남을 위해 사용되도록 의도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7절은 영적인 은사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고 언급합니다. 두 위대한 계명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 목적을 위해 우리의 재능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재능과 영적 은사는 사람마다 다르며 주어지는 시기도 다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상관없이) 유전과 환경(음악을 하는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는 음악적인 재능을 개발하는데 도움을 얻게 될 것임)의 조합의 결과로 인하여 자연적인 재능(음악, 예술, 수학에서 자연적인 능력을 가짐)을 부여 받으며, 또는 하나님이 특정한 개인에게 특정한 재능을 주시기도 합니다(예를 들어, 출애굽기 31장 1-6절에 나오는 브살렐). 성령의 은사는 성령에 의해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집니다 (롬 12:3, 6). 불신자가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는 순간, 성령께서는 그분 뜻대로 새신자에게 영적인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고전 12:11).

로마서 12장 3-8절은 영적인 은사들을 예언, 섬김(일반적인 의미), 가르침,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 베풂 등으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8-11절은 그 은사들을 지혜의 말씀(영적인 지혜를 전하는 능력), 지식의 말씀(실천적인 진리를 전하는 능력), 믿음(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신뢰), 기적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공부하지 않은 언어로 말할 수 있는 능력), 방언 통역 등으로 나열합니다. 세 번째 목록은 에베소서 4장 10-12절인데 하나님은 그분의 교회에 사도, 선지자, 선교사, 목사, 교사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들 목록의 내용들이 서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영적인 은사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성경 목록이 모든 은사들을 다 나열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에 언급되지 않는 추가적인 영적 은사들이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습니다.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 재능을 개발하다가 나중에 그 재능과 맞는 직업이나 취미를 취할 수 있는 반면, 영적인 은사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도록 하기 위해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 확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부름을 받음과 함께 "봉사의 일"(엡 4:12)에 관여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은사를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행한 모든 일에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역시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면서 삶의 성취감을 발견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임무는 성도들을 세워 하나님이 부르신 사역에 더 잘 준비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주께서 영적인 은사를 주신 의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들을 세워 교회 전체가 힘 있게 성장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영적인 은사와 재능의 차이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재능은 유전 및 훈련의 결과이며, 영적인 은사는 성령의 권능의 결과입니다. 2) 영적인 은사는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소유하지만, 재능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누구나 소유할 수 있습니다. 3) 재능과 영적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재능은 전적으로 비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지만, 영적인 은사는 이러한 과업들을 위해 집중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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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어떤 사역들은 죄와 위로와 능력에 대한 확신처럼 느낌을 포함할 수 있지만, 성경은 성령과 우리의 관계를 우리의 느낌 및 느낌의 방식에 두지 않도록 교훈합니다. 거듭난 모든 신자에게는 내주하시는 성령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혜사가 오시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 자신과 유사한 분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주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거듭난 모든 신자 안에는 성령께서 내주하시지만 모든 신자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아가면 성령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내주하시지만 우리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에 대해 언급하며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사용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고 사도 바울이 포도주를 마시는 것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맥락은 성령 충만한 신자의 삶과 내적 갈등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많은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한 경고 외에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술을 마시고 취하게 되면 특이한 특성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혀는 꼬부라지며, 판단은 흐려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분에서 비교를 합니다. 술에 취한 사람에게 어떤 특징이 나타나는 것처럼,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자에게도 특정한 특성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5장 22-24절에서 성령의 ‘열매’에 관해 읽습니다. 그 열매는 성령의 열매이며, 거듭난 신자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동사 시제는 진행형으로서 성령에 의해 "충만하여지는" 계속적인 과정을 나타냅니다. 한편, 이 말은 권면이기 때문에 신자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거나 또는 성령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에베소서 5장의 나머지 부분은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특권과 자격으로서 성령 충만을 입게 되는 것이지 성령을 느끼기 때문에 충만하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 및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주께 순종하여 행한 결과입니다. 성령 충만은 은혜의 선물이지 감정적인 느낌이 아닙니다. 감정은 우리를 속일 수 있고 속일 것이며, 우리는 성령이 아니라 순전히 육체의 욕심에서 나오는 감정적인 열광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갈 5:16, 25).

이렇게 말하였지만,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의해 압도당할 때 우리는 성령을 감정적으로 체험할 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생길 때는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칩니다. 다윗 왕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면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삼하 6:14). 성령에 의해서 기쁨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은혜에 의해 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느낌을 기준으로 하여 성령을 받았다고 확신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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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오케 문구는 성령과 관련하여 교회에서 있었던, 그리고 여전히 있는 논쟁입니다. 문제는 "성령님은 누구로부터 나왔습니까? 성부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성부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입니까?"라는 것입니다. ‘필리오케’라는 단어는 라틴어로 ‘아들’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아버지와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니케아 신조에 “그리고 아들”이라는 문구가 더하여졌습니다. 이 사실 때문에 이 문제는 “필리오케 문구”라고 불립니다. 이 문구 때문에 많은 논쟁이 있었고 결국 주후 1054년에는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가 분열하게 됩니다. 두 교회 측은 필리오케 문구에 대해 아직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14장 16절과 빌립보서 1장 19절을 보십시오. 이 성경 구절들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보내심을 받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필리오케 문구의 근본적인 문제는 성령의 신성을 보호하고자 하는 바람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성령님은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행 5:3-4). 필리오케 문구를 반대하는 자들은 성령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고 아들은 성령으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에게 ‘종속’하게 한다고 믿습니다. 필리오케 문구를 지지하는 자들은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는 사실이 성령님이 아버지 및 아들과 동등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필리오케 논쟁은 우리가 결코 충분히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품격을 포함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한한 존재이신 하나님을 결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며,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성령님이 성부에 의해 보냄을 받았는지, 또는 성부와 성자에 의해 보냄을 받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답변이 없어 보입니다. 또한 반드시 답변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필리오케 문구는 아마 계속 논쟁 거리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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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의 생명 안에 있는 성령의 현존하심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모든 신자가 성령을 받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롬 8:9, 고전 12:13, 엡 1:13-14). 그리스도인의 삶에 성령께서 들어오시는 주요 목적 중 하나는 그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는 그분과 더욱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성령의 임무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 있는 육신의 행위들과 직접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이 구절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채 성령의 영향 아래 있지 않은 사람들의 죄성에 대해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죄로 가득한 우리의 육신은 우리의 본성을 반영하는 그러한 종류의 열매를 산출하며, 반면에 성령은 그분의 본성을 반영하는 그러한 종류의 열매를 산출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새로운 본성과 육신과의 싸움입니다(고후 5:17).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여전히 죄악들을 바라는 육체에 갇혀 있습니다(롬 7:14-25).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며 그분은 우리를 통해 열매를 맺으십니다. 우리는 육신의 일들을 정복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고후 5:17, 빌 4:13). 그리스도인은 항상 성령의 열매를 드러내며 절대적으로 완전한 승리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고, 육신의 소욕을 정복하게 하시도록 성령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요 목적 중 하나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향해 바라는 것이며,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 열매를 맺는 것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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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소멸하다"라는 단어는 불을 진압하는 것을 말할 때 사용됩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의 일부인 믿음의 방패를 가질 때(엡 6:16) 그들은 사탄으로부터 날아온 불 화살의 힘을 진압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지옥을 불이 “소멸되지 않는” 곳으로 묘사하셨습니다(막 9:44, 46, 48). 마찬가지로, 성령은 각 신자들 안에 거하시는 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행동과 모습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신자인 우리가 우리의 행동에서 성령님이 나타나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때, 또는 그릇된 일인 줄 알면서도 행할 때, 우리는 성령을 억제하거나 소멸시키는 것입니다(살전 5:19). 우리는 성령께서 그분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성령이 인격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직 인격체만이 근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이러한 감정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divine person)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면, 주로 우리가 근심할 때 성령께서 어떻게 근심하시게 되는지 좀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은 우리가 성령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방인들처럼 살면서(4:17-19), 또는 거짓으로(4:25), 분노로(4:26-27), 도둑질로(4:28), 더러운 말로(4:29), 악독으로(4:31), 용서하지 않음으로(4:32), 음행으로(5:3-5) 성령님을 근심시킬 수 있습니다. 성령을 근심시키는 것은 생각 만으로든 또는 생각과 행동 모두로든 죄의 방식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시키거나 근심시키게 되면 그 효과가 비슷합니다. 둘 다 경건한 생활 방식을 방해합니다. 둘 다 신자가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짓고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을 따를 때 발생합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올바른 길은 오직 신자를 하나님과 청결함으로 더 가깝게 인도하고 세상과 죄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근심을 원치 않고 또한 선한 것을 억제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를 거절함으로써 성령님을 근심시키거나 소멸시켜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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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면, 성령은 참된 신자를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은 신약의 많은 다른 구절들에서도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8장 9절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누구든지 성령께서 내재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님을 분명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성령께서 어떤 신자를 떠났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의 구원 관계를 잃어버린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이는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안전을 가르치는 성경 말씀과 위배됩니다. 신자의 생명 안에 영구적으로 내재하시는 성령님을 말하는 또 다른 구절은 요한복음 14장 16절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면 그분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결코 신자를 떠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은 에베소서 1장 13-14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셔서 하나님이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신자의 소유권을 갖고 계시며 그 신자는 주의 소유물 중 하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으며,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보장으로 구속의 날까지 신자 안에 거하실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차 또는 집을 살 때 계약금을 지불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성도에게 성령을 보내어 내주하게 하심으로 미래의 관계에 대해 계약금을 지불해 주셨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고린도후서 1장 22절과 에베소서 4장 30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이전에는 성령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오셨다가 떠나셔야”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사울 왕과 함께 거하셨지만 나중에 그에게서 떠나셨습니다(삼상 16:14). 그 대신 성령은 다윗에게 임하셨습니다(삼상 16:13).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통 이후 성령이 그에게서 떠나실까 두려워했습니다(시 51:11). 성령님은 브살렐에게 충만하게 임하셔서 그로 하여금 성막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게 하셨지만(출 31:2-5) 영구적인 관계로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 바뀌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오순절 날을 시작으로 하여 신자들에게 영구히 거하기 시작하셨습니다(행 2). 성령의 영구적인 거주는 항상 우리와 함께하고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 약속의 성취입니다.

성령님은 결코 신자를 떠나지 않으시지만 우리의 죄가 "성령을 소멸"(살전 5:19)하거나 "성령을 근심하게"(엡 4:30)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죄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끼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자백되지 않은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할 수 있으며 우리 삶에서 성령의 역사를 효과적으로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요일 1:9)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지만 그분의 임재로 인한 유익과 기쁨은 사실 우리에게서 떠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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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에 대한 배경을 알기 위해 방언의 은사에 링크된 글을 읽기 바랍니다. 방언 기도에 대한 증거로 인용되는 성경 구절은 주로 로마서 8장 26절, 고린도전서 14장 4-17절, 에베소서 6장 18절, 그리고 유다서 1장 20절로서 네 군데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8절과 유다서 1장 20절은 “성령 안에서 기도함”에 대해 언급합니다. 하지만 방언 기도는 “성령 안에서 기도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8장 26절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가르칩니다. 로마서 8장 26절은 적어도 두 가지 핵심을 지적하면서 방언은 기도 언어가 아님을 분명하게 합니다. 첫째, 로마서 8장 26절은 탄식하는 분은 성령이시지 신자들이 아닙니다. 둘째, 성령의 탄식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방언의 본질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고린도전서 14장 4-17절만 남게 되며 특히 14절이 남습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은 분명하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언급합니다. 이것이 무슨 현상입니까? 첫째, 문맥을 연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주로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비교 및 대조합니다. 2-5절을 보면 분명히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방언의 은사보다 더 나은 은사로 보고 있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방언의 가치를 외치며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방언을 말하는 것을 기뻐한다고 선언합니다(18절).

사도행전 2장은 방언의 은사가 처음 발생한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날에 사도들은 방언을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은 사도들이 사람의 언어로 말하였던 것을 분명히 합니다(행 2:6-8). 사도행전 2장과 고린도전서 14 장에서 "방언"으로 번역된 단어는 언어를 의미하는 "글로싸"라는 헬라 용어입니다. 현대 영어 중에 "용어집(글로써리)"라는 단어가 이 헬라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방언으로 말하면 나는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언어를 아는 자는 그 방언으로 복음을 전달 받습니다. 다문화 지역이었던 고린도에서는 방언의 은사가 매우 가치가 있고 두드러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 신자들은 방언의 은사로 인해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방언이 사용될 때 "통역"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고전 14:13, 27). 고린도의 어떤 신자가 방언을 말하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선포된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신자 또는 교회의 다른 신자는 방언으로 선포된 그 내용을 전체 회중의 이해를 위해 통역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방언 기도는 무엇이며 방언을 말하는 것과 어떻게 다릅니까? 고린도전서 14장 13-17절은 방언 기도 역시 통역되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결과적으로, 방언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 것 같습니다. 그 방언 기도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익이 되지만, 교회 전체가 유익을 얻으려면 방언 기도 역시 통역되어야 했습니다.

이 설명은 방언 기도를 기도 언어로 보는 사람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견해는 방언 기도는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개인적인 기도 언어로서(고전 13:1) 자기의 덕을 세우는데 유익하다(고전 14:4)고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견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비 성경적입니다. 1) 방언 기도가 통역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개인적인 기도 언어가 될 수 있습니까 (고전 14:13-17)? 2) 성경은 성령의 은사는 자기가 아닌 교회의 덕을 위한 것이라는 말하는데 어떻게 방언 기도는 개인의 덕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까(고전 12:7)? 3) 방언의 은사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고전 14:22)이라면 어떻게 방언 기도는 개인적인 기도 언어가 될 수 있습니까? 4) 성경은 분명히 모든 사람이 반드시 방언의 은사를 소유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고전 12:11, 28-30). 모든 신자가 반드시 방언 기도의 은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방언이 개인의 덕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덕을 세워야 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방언 기도는 사탄과 그의 마귀들이 우리의 기도를 알아듣거나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비밀 암호”라고 이해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하여 비 성경적입니다. 1) 신약은 일관되게 방언을 사람의 언어로 묘사하고 있으며, 사탄과 그의 마귀들은 인간 언어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성경은 셀 수 없이 많은 신자들이 사탄이 그들의 기도를 가로채가는 것을 전혀 염려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언어로 크게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탄이나 그의 마귀들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이해한다고 해도, 그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뜻에 따라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는 것을 막을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사탄과 그의 마귀들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이해하든 말든 상관없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방언 기도를 체험한 후 개인적인 교화에 도움된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까요? 첫째, 우리는 체험이 아니라 성경 위에 우리의 믿음과 실천의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을 통해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되고 도리어 성경에 비추어 우리의 체험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둘째, 많은 사교들과 세상의 종교계에서도 방언 및 방언 기도 현상이 있음을 보고합니다. 분명히 성령님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귀들이 거짓 방언의 은사를 주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성령으로 우리의 체험을 더욱 신중하게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연구 보고에 따르면 사람들이 방언 및 방언 기도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관찰하게 되면 그 과정을 배울 수 있으며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 보고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는 대부분의 방언 및 방언 기도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하는 듯 합니다. 넷째, “개인적으로 덕 세움을 입었다”는 느낌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인체는 합리적인 사고로부터 분리된 새롭고 흥미진진한 감정적인 어떤 것을 체험할 때 아드레날린과 엔돌핀을 생성합니다.

방언 기도에 대한 해석 문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서로 정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방언 기도가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방언 기도가 성숙한 그리스도인과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인 기도 언어로 방언 기도를 드리든 말든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아닙니다. 따라서 비록 방언 기도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개인적인 기도 언어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믿지만, 그럼에도 방언 기도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형제 자매라고 믿으며 이에 우리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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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성령에 의해 쓰러지는” 현상은 일반적으로 목사가 누군가에게 손을 얹으면 그 사람이 성령의 권능에 의해 사로잡히면서 발생합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쓰러뜨리는 사람들은 사도 요한이 죽은 자 같이 된 현상(계 1:17)과 사람들이 환상을 보고 땅에 엎드려지는 현상(겔 1:28; 단 8:17-18; 단 10:7-9) 등을 말하는 성경 구절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묘사된 땅에 엎드려지는 현상과 성령에 의해 쓰러지는 현상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서로 대조적입니다.

1. 성경에 묘사된 쓰러지는 현상은 그리스도의 변모 사건(마 17:6)과 같은 특이한 사건이나 환상을 보았을 때 나타나는 한 사람의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에 의해 쓰러지는 비성경적인 현상은 다른 사람의 접촉이나 말하는 사람의 팔의 움직임에 반응합니다.

2. 성경의 쓰러짐 현상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가장 드물게 발생하였고 그 외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에 의해 쓰러지거나 엎드리는 현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거듭 반복되는 사건이며 많은 사람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3. 성경에 묘사된 현상은 사람들이 무엇을 보거나 또는 어떤 대상을 본 후에 엎드려집니다. 하지만 성령을 속여 쓰러뜨리는 자들에 의해 엎드려지는 자들은 연설자의 팔의 움직임에 따라, 또는 교회 지도자의 접촉의 결과로 뒤로 자빠집니다(어떤 경우에는 밀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쓰러지는 모든 현상이 다 사기이거나 또는 접촉 및 미는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힘이나 에너지를 체험하면서 뒤로 넘어졌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성경적인 근거를 찾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에너지 및 힘이 이러한 현상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 전혀 아닐 것이며 또한 성령의 역사의 결과도 아닐 것입니다.

신자들이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도록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실제적인 열매를 추구하기보다는 전혀 영적인 열매를 맺지 않는 기괴한 거짓 현상을 기대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갈 5:22-23).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그러한 거짓 현상에 의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넘쳐 흐르는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와 순종이 넘치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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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게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사들 가운데 성령의 임재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많은 기능과 역할과 활동을 행하십니다. 첫째, 그분은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역사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도록”(요 16:7-11) 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인정하든 말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공정하고 충분한 논증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의 마음에 적용하여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드십니다. 사람들은 그 확신에 응답하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일단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속하게 되면 성령은 영원토록 우리의 마음에 거주하시면서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녀인 사실을 확증하고, 보증하며, 증거하기 위해 인치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돕고 위로하고 인도하실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이 구절에서 “보혜사”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함께 부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격려하고 위로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신자의 마음 속에 영원히 거주하십니다(롬 8:9; 고전 6:19-20; 고전 12:13).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만일 우리와 개인적으로 함께 계셨더라면 우리에게 행하셨을 일들을 수행하도록 자기 대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일들 중에는 진리는 드러내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예배와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련한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알려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궁극적인 인도자이시며, 앞서 가시고, 길을 인도하시고,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모든 것을 분명하고 자명하게 알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영적인 일들에 대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오류에 쉽게 빠질 것입니다. 성령께서 진리에 대해서 알려주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요 15:26; 고전 12:3). 성령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메시아 되심,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승귀하심,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그분의 역할에 대해 우리에게 확신시켜줍니다(요 16:14).

성령의 역할 중 또 다른 역할은 은사를 주는 역할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이 땅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도록 신자들에게 부여된 영적 은사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 모든 은사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면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 크든 작든 성령께서 주신 은사입니다.

성령님은 또한 우리 삶에서 열매를 맺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열매를 맺는 일을 시작하십니다(갈 5:22-23). 이것들은 우리의 육체의 일들이 아닌데, 이는 육체는 이러한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열매는 우리 삶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거하시며 이러한 모든 기적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며 결코 우리를 떠나시거나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위로의 원인이 됩니다. 이 소중한 선물, 곧 우리의 삶에 거하시는 성령님과 그분의 역사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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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고 그들 안에는 영광의 소망이 있습니다(골 1:27).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순간마다 거룩을 나타낼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인도하시도록 의식적인 믿음으로 성령을 의지할 때 나타납니다(롬 6:11-14). 성령의 인도함을 의존하지 않는 신자는 구원이 제시하는 부르심과 기준에 따라 살 수 없습니다. (요 3:3; 엡 4:1; 빌 1:27). 만일 우리의 삶이 성령의 열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드러낸다면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갈 5:22, 23). 성령으로 충만한 것(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성경)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거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과 같습니다(골 3:16).

성령 충만의 결과는 감사와 노래와 기쁨입니다(엡 5:18-20; 골 3:16).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입니다(롬 8:14).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을 택하지 않고 죄를 지음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한 경우에는 잘못을 자백함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엡 4:30; 요일 1:9).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성령과 동행”하는 것으로서 그분이 당신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당신의 마음을 빚으시는 것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처럼,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러하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 “잘하였도다”라는 주인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골 2:5; 마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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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장 3-8절과 고린도전서 12장은 각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선택에 따라 영적인 은사를 받는다고 뚜렷하게 알려줍니다. 영적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사용하라고 주어집니다(고전 12:7, 14:12). 은사를 주시는 정확한 시기는 특별히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인 은사는 거듭날 때 (구원의 순간) 주어진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나중에 영적인 은사를 주신 사실도 몇몇 구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14절과 디모데후서 1장 6절은 디모데가 안수를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해 은사를 받은 것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디모데가 안수를 받을 때 그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받은 영적인 은사를 장로 중 한 사람이 예언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또한 고린도전서 12장 28-31절과 고린도전서 14장 12-13절에서 은사를 택하여 주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모든 사람이 어떤 특별한 은사를 다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영적인 은사를 갈망하거나 사모할 경우, 예언(다른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사)과 같은 덕을 세우는 은사들을 구해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자, 바울은 그들이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다 받았다고 하면서 왜 더 큰 은사를 구하라고 강력하게 말합니까? 그들이 이러한 더 큰 은사들을 받을 기회가 있는 것입니까? 이는 마치 솔로몬이 하나님의 백성을 바르게 통치하기 위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교회에 더 큰 유익을 끼치기 위해 더 큰 은사들을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은사들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은사들은 우리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여전히 분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모든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예언의 은사와 같은 특별한 은사를 강력하게 바라더라도, 단지 간절히 바란다고 해서 하나님은 그 은사를 모두에게 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 모두에게 예언의 은사를 주신다면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기능은 누가 섬기겠습니까?

대단히 분명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그 명령을 지킬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하시면(증거하는 삶,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삶, 열방을 제자로 삼는 것 등), 우리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복음 전도에 재능이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제자 삼으라고 명하십니다(마 28:18-20; 행 1:8).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은사가 내게 있든 말든 복음을 전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은사를 받고 그 은사를 개발하기로 다짐한 그리스도인은 가르침의 은사를 받고 그 은사를 방치한 사람보다 더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 할 때 영적인 은사를 받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은사들이 개발되는 것입니까? 대답은 둘 다입니다. 일반적으로, 영적인 은사는 구원을 받을 때 주어집니다. 하지만 받은 은사는 영적인 성장을 통해 개발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은사가 있다면 추구해도 되는 것입니까? 영적인 은사를 개발할 수 있습니까? 어떤 특별한 영적 은사를 구해도 되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2장 31절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해줍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당신은 하나님께 어떤 영적인 은사를 구할 수 있으며 그것과 관련된 영역을 개발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은사를 간절히 바랄 수 있습니다. 동시에 당신이 그 은사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며, 아무리 간절히 그 은사를 바라고 얻고자 노력해도 그 은사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어떤 은사가 주어질 때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가장 큰 결실을 맺게 될지 잘 아십니다.

우리가 한 두 가지 은사를 갖게 되는 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영적 은사 목록에 언급된 여러 영역을 개발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즉, 친절하고, 자비의 행위를 보이며, 서로 봉사하고,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세울 목적으로 사랑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고 그분의 교회를 성장시키시며 우리에게 보상하실 것입니다(고전 3:5-8, 12:31-14:1).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기쁨으로 삼을 때 우리 마음에 소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시 37:4-5). 이는 분명히 우리의 소망을 채울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겠다는 사실을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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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으면서 방언을 말하는 경우는 세 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 10장 44-46절, 19장 6절입니다. 성경 내에서 이 세 경우는 방언을 말함이 성령을 받은 증거가 되는 유일한 경우들입니다. 사도행전을 죽 보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만 그들이 방언을 말하였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행 2:41, 8:5-25, 16:31-34, 21:20). 신약 성경 어디에도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을 받은 유일한 증거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실 신약은 그 반대로 가르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성령을 받았다고 알려줍니다(롬 8:9, 고전 12:13, 엡 1:13-14). 하지만 모든 신자가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2:29-31).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세 경우에서는 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을 받은 증거가 되었습니까? 사도행전 2장은 사도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복음을 전할 권능을 부여 받은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다른 언어(방언)로 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사람들과 그들의 언어로 진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은 사도 베드로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복음을 나누기 위해 보냄을 받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교회에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사도들이 받았던 동일한 성령을 이방인도 받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방언을 말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행 10:47, 11:17).

사도행전 10장 44-47절은 이 사실을 묘사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더라”. 베드로는 나중에 이 사건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참으로 이방인을 구원하신 증거로 삼습니다(행 15:7-11).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이로 인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방언을 말하게 될 것으로는 기대되지 않습니다. 사실, 신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회심 사건에 있어서 회심을 맥락으로 하여 방언을 말하는 경우는 오직 두 경우입니다. 방언은 특별한 때에 특별한 목적을 지녔던 초자연적인 은사였습니다. 방언 말함은 성령을 받은 유일한 증거가 아니었으며, 지금까지도 결코 그렇게 받아들여진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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