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론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은 무엇인가?

속죄론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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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역사 전체에서 여러 개인 및 교파들이 속죄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였는데 어떤 것은 맞고 어떤 것은 틀립니다.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구약과 신약 모두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한 많은 진리를 드러냄으로 인하여 속죄의 부요함을 충분히 요약하거나 설명하는 어떤 하나의 ‘이론’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발견하는 것은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던 구속에 관한 많은 상호 연관된 진리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속죄에 대한 풍부하고 다면적인 그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속죄에 대한 여러 많은 이론들이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구속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것의 많은 부분이 구약의 언약 희생 제도 하에 있는 하나님 백성의 경험과 관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목적과 그것이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엄청난 분량의 글이 필요한 풍성한 주제입니다. 이 글은 단지 한 때 또는 다른 때에 제시된 수많은 이론들의 개요를 제공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우리는 속죄에 대한 여러 견해를 살펴보면서 인간의 죄성과 속죄의 대속적인 성격을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견해도 기껏해야 결함이 있고 최악의 경우는 이단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탄 보상설: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또한 사탄의 노예된 상태에서 풀어주기 위해 사탄에게 몸값을 지불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사람이 영적으로 사탄에게 속박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는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보장한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이 견해는 성경적인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하며 교회 역사에서도 거의 지지자가 없었습니다. 이 견해는 죄에 대한 지불을 요구하는 존재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라고 보는 데에서 비 성경적입니다. 따라서 이 견해는 성경 전체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견해는 사탄이 실제로 갖고 권세보다 더 많은 권세를 갖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사탄을 더 높게 보는 견해입니다. 성경은 죄인들이 사탄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에 대해 전혀 지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복원설: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인류의 역사를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바꿨다고 말합니다.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인간의 삶의 모든 단계를 반복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아담에 의해 시작된 불순종의 과정을 뒤집었다고 믿습니다. 이 견해는 성경적으로 뒷받침 될 수 없습니다.

드라마 이론: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선과 악 사이의 거룩한 갈등에서 승리를 보장하고 사탄의 굴레로부터 사람을 풀어주기 위한 것으로 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는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보장하고 세상을 악의 속박으로부터 구속할 길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신비설: 신비설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그리스도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자신의 죄 된 본성에 대해 승리한 사건이라고 봅니다. 이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이 지식이 신비하게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의 "신 의식"을 깨운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또한 인간의 영적 상태는 죄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신 의식"의 결여 상태라고 믿습니다. 분명히 이 견해는 비 성경적입니다. 이것을 믿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죄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은 완벽한 하나님이자 사람이시고, 그분의 본성은 모든 면에서 죄가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히 4:15).

도덕감화설: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속죄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서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회개하게 만든다는 믿음입니다. 이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사람은 영적으로 병들어 있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에 감동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인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과 의미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속죄가 하나님 사랑의 궁극적인 본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견해는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인간의 영적인 상태를 부정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이 실제로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에 비 성경적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이 견해는 인류에게는 참된 희생 또는 죄값 지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모범설: 이 견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단지 믿음과 순종의 모범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속죄를 봅니다. 이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사람이 영적으로 살아있다고 믿으며 그리스도의 삶과 속죄는 단지 참된 믿음과 순종의 모범이고 사람들에게 비슷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도록 영감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견해와 도덕감화설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제로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고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대가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도덕감화설과 모범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도덕감화설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가르치고 있고, 모범설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분의 죽음까지도 본 받아야 할 모범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범설은 사람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또한 하나님의 공의는 사람이 지불할 수 없는 죄값 지불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속죄만족설: 속죄만족설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하나님께 무한한 영예를 가져다 준다고 봅니다. 이 견해는 그러실 필요가 없으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보상을 주셨고, 그리스도는 그 보상을 사람에게 전달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이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사람의 영적 상태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임을 믿으며 따라서 하나님께 무한한 영예를 가져온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들의 구원에 적용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견해는 다른 많은 견해들과 마찬가지로 중생하지 않은 죄인들의 진정한 영적 상태와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는 그들의 완전히 새로운 본성에 대한 필요성을 부인합니다(고후 5:17).

속죄통치설: 이 견해는 율법과 죄에 대해 하나님이 대단히 심각하게 여기시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속죄를 봅니다. 하나님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야 하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를 붙든 사람들은 사람의 영적인 상태는 하나님의 도덕법을 어긴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는 죄의 형법을 대신 치르기 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대속물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합법적으로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이 견해는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어떤 사람의 실제 죄악에 대한 형벌을 치르셨다는 것을 가르치지 못하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단지 하나님의 율법이 무너졌고 이에 어떤 형벌이 치러졌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형벌대속론: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대리적이고 간접적인 희생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희생으로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지불하셨으며, 용서를 베푸시고, 의를 전가하시고,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 시키셨습니다. 이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사람의 모든 면, 즉 마음과 의지와 감정이 죄에 의해 더럽혀졌으며 그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영적으로 죽었다고 믿습니다.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에 대한 형벌을 지불했으며, 사람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대속을 죄 값에 대한 지불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속죄에 대한 이 견해는 죄와 인간의 본성,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의 결과에 대하여 성경과 가장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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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6-27은 인간에게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무언가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도록 의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물질적인 부분과 비물질적인 부분 둘 다 모두 갖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물질적인 부분은 분명히 가시적입니다: 신체, 뼈들, 장기들, 등은 인간이 살아있는 한 존재합니다. 비물질적인 측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적인 것들입니다: 혼, 영, 지적 능력, 의지, 양심,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개인의 육체적 수명을 초월해서 존재합니다.

모든 인간은 물질적인 부분과 비물질적인 특성들 모두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살, 피, 뼈들, 장기들, 그리고 세포들을 포함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자주 논쟁이 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형적 특성들입니다. 이것들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창세기 2:7은 사람이 살아있는 영(생령)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민수기 16:22은 모든 인간이 소유한 “영들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을 명칭하고 있습니다. 잠언 4:23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이 말씀은 마음이 사람의 의지나 감정들의 중심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3:1은 말씀합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여기서 바울은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케 해주는 마음의 한 부분인 양심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2는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구절들과, 많은 다른 구절들은 인간의 비 물질적인 부분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물질적인 그리고 비물질적인 특성들 모두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저 혼과 영뿐만이 아닌 더욱더 많은 부분들의 윤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혼, 영혼, 가슴, 양심, 그리고 마음들은 연결되어 있고 서로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혼과 영은 분명히 인간의 주요한 비물질적인 측면들입니다. 이것들이 다른 측면들을 포함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인간은 두 부분(둘로 나뉨, 육체/영혼)으로 이루어 졌습니까, 아니면 세 부분(세 개로 나뉨, 육체/혼/영)으로 이루어 졌습니까? 이에 대해 독단적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두 견해들에 대해 좋은 논증들이 있습니다. 핵심 구절은 히브리서 4:12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 구절은 이 논쟁에 관하여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혼과 영은 쪼개질 수 있다는 것과, 혼과 영의 분할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식별하실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우리를 “기묘하고 놀랍게” 창조하셨던 창조주에게 중점을 두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시편 1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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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연구하다"를 의미하는 두 개의 헬라어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단지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무한히 그리고 영원히 더 높으시기 때문에 그 어떤 신학도 하나님과 그분의 길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묘사하려는 시도는 미흡할 것입니다(롬 11:33-36).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가능한 만큼 그분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신학은 체계적이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예술이자 과학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학이 분열을 만든다고 믿기 때문에 신학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제대로 신학을 이해할 경우 신학은 사람들을 연합시킵니다. 적절하면서도 성경적인 신학은 좋은 것입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딤후 3:16-17).

그렇다면 신학에 대한 연구는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드러내신 것을 발견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캐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주, 만물의 유지자, 만물의 심판자로 알게 됩니다.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이며, 모든 것의 시작과 끝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누가 그를 바로에게 보냈는지 어떻게 답변해야 하는지를 묻자,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고 답변하셨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특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다른 존재들에게 이름을 주셨듯이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은 자유롭고 목적이 있는 자아충족의 특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힘이나 우주 에너지가 아닙니다. 그분은 의지와 지각을 지니신 전능하고 자존하시며 스스로 결정하시는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에게 자신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신학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의 사랑과 순종을 통해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과정을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 있기 전에 그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께 순종하기를 원하기 전에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께서는 부산물로서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데, 이로 인해 우리의 삶은 지극히 풍성하여집니다. 부실한 신학과 하나님에 대한 피상적이고 부정확한 이해는 우리가 바라는 위로와 소망을 가져오는 대신에 오히려 우리의 삶을 악화시킵니다.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잔인한 것입니다. 세상은 고통스러운 곳이고 그곳에서의 인생은 실망과 괴로움이 될 것입니다. 신학을 거절하면 당신은 방향 감각 없이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신학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낭비하고 영혼을 잃게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기쁘게 영원히 함께 살아갈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기 위해 신학, 곧 하나님에 대한 강렬하고 인격적인 연구에 불타올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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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삼위이시며, 하나님은 동등하고 영원한 세 위격이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상세한 성경적인 내용을 알려면 『성경은 삼위일체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가』 라는 우리의 기사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이 글의 목적은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에 대해 토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구원 받기 위해 삼위일체를 믿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대답은 "예"와 “아니요”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 받기 위해 삼위일체론의 모든 측면을 완전히 이해하고 동의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구원을 얻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삼위일체론의 몇몇 측면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신성은 구원의 교리에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분의 죽음은 죄의 무한한 형벌을 지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무한합니다. 그분은 시작이 없으며 끝도 없습니다. 천사를 포함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유한합니다. 그것들은 어느 시점에 지어졌습니다. 오직 무한한 존재의 죽음만이 영원토록 인류의 죄를 속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분은 구세주, 메시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 1:29). 예수님의 신성한 본성에 대한 비 성경적 관점은 구원에 관한 잘못된 견해를 가져옵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부인하는 모든 "기독교" 이단 역시 구원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우리 자신의 행함을 더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삼위일체론의 한 측면인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은 이러한 개념을 반박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삼위일체론을 철저하게 고수하지는 않더라도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일부 신자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양태론을 거부하지만, 하나님이 세 위격이 아니라 단지 자신을 세 가지 ‘모양’으로 계시하신다고 믿는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는 유한한 인간이 충분히 또는 완전히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성경적인 건전한 신학의 모든 교훈을 철저하게 옹호해야 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으십니다. 삼위일체론의 모든 측면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동의가 구원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이 성경에 근거한 교리라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고 믿는 것이 하나님과 구원, 신자들의 삶 속에서의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역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독단적으로 선언합니다. 동시에 삼위일체론의 측면에 대해 일부 의견 차이가 있는 경건한 사람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완벽한 교리를 취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완전하신 구세주를 신뢰함으로 구원받습니다(요 3:16). 구원 받기 위해 삼위일체론의 일부 측면을 믿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구원 받기 위해서 삼위일체론의 모든 영역에 완전히 동의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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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신학(교체신학)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스라엘을 대신했다고 가르칩니다. 대체 신학을 옹호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구체적인 미래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믿습니다.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모든 견해는 두 개의 캠프로 나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스라엘의 연장(대체/언약 신학)이라는 견해와 교회는 이스라엘과 완전히 다르며 구별된다는 견해입니다(세대주의/전천년주의).

대체 신학은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성경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많은 약속들이 이스라엘이 아닌 기독교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위한 복과 약속의 땅으로의 회복에 관한 예언들은 영적으로 변화되거나 우화화되어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복의 약속으로 대체됩니다. 이 견해와 관련하여 주요한 문제들이 존재하게 되는데, 수세기 동안 유대 민족이 계속 존재하여 왔다는 사실과 특히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과 같은 사건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다면 유대 민족에게는 장래가 없을텐데, 유대 민족이 그들을 파괴하려는 수 많은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지난 2천 년 동안 초자연적으로 생존하여 온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1천 9백 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나라가 20세기에 국가로서 다시 등장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과 교회가 다르다는 것은 신약 성경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는 이스라엘과 완전히 다른 별개이며, 이 둘을 절대로 혼동하거나 서로 바꾸어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교회는 오순절 날에 존재하게 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며 휴거에 의해 하늘로 들어올려질 때까지 계속해서 이 땅에 존재할 것을 알 수 있습니다(엡 1:9-11; 살전 4:13-17) . 교회는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 및 복과 관계가 없습니다. 언약들과 약속들과 경고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유효합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2천 년 동안 흩어져 있으면서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서 따로 있었습니다.

휴거 이후에(살전 4:13-18),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분 계획의 주된 초점으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이때 첫 번째 사건은 환란입니다(계 6-19 장). 이스라엘이 대환난의 시련을 통해 메시아의 재림을 위해 준비되는 동안 세상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후 대환난이 끝날 때 그리스도께서 지상으로 오실 것이며 이스라엘은 그분을 영접할 준비가 될 것입니다. 환난에서 살아남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여 이 땅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므로 이스라엘이 선도 국가가 될 것이고 모든 민족의 대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고 경배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돌아와 문자 그대로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계 20:1-5).

구약과 신약 모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전천년적 또는 세대주의로 이해하는 것을 지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천년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지지는 계시록 20장 1-7절의 분명한 가르침에서 발견됩니다. 그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왕국이 천 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여섯 번이나 말합니다. 대환난 후에 주님께서 돌아오셔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온 땅을 다스릴 것이며 이스라엘이 열국의 지도 국가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문자 그대로 천년 동안 주님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대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시대에 교회에 주된 관심을 집중하실 것이지만,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으며, 어느 날 이스라엘을 국가로 택하며 의도하셨던 역할을 그 나라에 회복시키실 것입니다(로마서 1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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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개혁주의 신학은 16 세기의 개신교 개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신앙 체계를 포함합니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솔라 스크립추라(sola scriptura)"라는 신조에 명시된 바와 같이 그들의 교리를 성경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은 ‘새로운’ 신앙 체계가 아니라 사도의 교리를 계속 추구하는 신앙 체계입니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의 권위, 하나님의 주권,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에 의한 구원, 그리고 전도의 필요성을 주장합니다. 때로 개혁주의가 언약 신학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온 새 언약(눅 22:20)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권위.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믿음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충분하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주권. 개혁주의 신학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를 통해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분은 모든 사건을 예고하셨으며 따라서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좌절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피조물의 의지를 제한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은혜에 의한 구원.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와 자비에 따라 한 백성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고 구속하기로 택하셨다고 가르칩니다. 개혁주의 구원의 교리는 일반적으로 특정 단어인 TULIP(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포인트라고도 알려져 있음)에 의해 대표됩니다.

T –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사람은 자신의 죄 많은 상태에서 완전히 무력하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전적 타락은 또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기 전까지 인간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창 6:5; 렘 17:9, 롬 3:10-18).

U -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영원한 과거로부터 하나님은 아무도 셀 수 없는 수많은 죄인들을 구원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롬 8:29-30, 9:11; 엡 1:4-6,11-12).

L -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특별한 구속"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택자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친히 담당하시고 그들이 살 수 있도록 죽음으로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단지 구원을 ‘가능하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분이 택하셨던 자들을 위해 구원을 얻어내셨습니다(마 1:21; 요 10:11, 17:9; 행 20:28; 롬 8:32; 엡 5:25).

I – 불가항력적인 은혜(irresistible grace). 사람은 타락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 속에 역사하여, 그가 이전에 거부한 것들을 원하게 만드십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택자들을 구원하는 일을 반드시 성취할 것입니다(요 6: 37, 44, 10:16).

P –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하나님은 그분의 성도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 따라서 구원은 영원합니다(요 10: 27-29; 롬 8:29-30; 엡 1:3-14).

복음 전도의 필요성. 개혁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인들이 전도를 통하여 영적으로, 그리고 거룩한 삶과 인도주의를 통해 사회적으로 이 세상에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다른 특징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성례(세례와 성찬), 영적 은사의 중지 견해 (은사는 교회에 더 이상 연장되지 않음), 성경의 무-세대적 관점 등을 포함합니다. 개혁주의 교회 내에서 귀하게 여겨지는 것들은 존 칼뱅, 존 녹스, 울리히 츠빙글리, 마틴 루터의 저술들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개혁주의 전통 신학을 구체화한 것입니다. 개혁주의 전통에 뿌리를 둔 현대 교회로는 장로교, 회중 교회, 그리고 일부 침례교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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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자신을 계시하기로 택하신 두 가지 방법입니다. 일반 계시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일반적인 진리를 말합니다. 특별 계시는 초자연적인 것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인 진리를 말합니다.

시편 19장 1-4절은 일반 계시와 관련하여 선포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이 구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은 우주의 관측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창조의 질서와 복잡함과 경이로움은 능력이 많고 영광스러운 창조주의 존재를 알려줍니다.

로마서 1장 20절 역시 일반 계시에 대해 가르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시편 19편처럼 로마서 1장 20절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보여 알려졌고, 지어진 피조물로부터 ‘이해되며’, 이 사실을 부인할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성경 내용을 염두에 두면, 일반 계시의 잠정적인 정의는 아마도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지혜와 능력과 초월하심을 증명하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별 계시는 하나님이 기적을 수단으로 하여 자신을 계시하기로 택하신 방법입니다. 특별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 꿈, 환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합니다. 성경은 여러 차례 물리적인 형태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기록하고 있으며(창 3:8, 18:1; 출 3:1-4, 34:5-7), 하나님이 꿈(창 28:12, 37:5, 왕상 3:5, 단 2)과 환상(창 15:1; 겔 8:3-4; 단 7; 고후 12:1-7)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계시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특별 계시의 한 형태인 그분의 말씀, 즉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성경 저자들의 문체와 성격을 사용하면서도 인류에게 전달할 그분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기록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습니다(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감동되어 있고 유익하며 충분합니다(딤후 3:16-17). 하나님은 구전이 부정확하고 신뢰성이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자신과 관련한 진리를 서면 형태로 기록하기로 정하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인간의 꿈과 환상이 오해될 수 있음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가 그분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그분이 기대하시는 것,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성경을 통해 계시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특별 계시의 궁극적인 형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습니다(요 1:1, 14). 히브리서 1장 1-3절은 이에 대해 가장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 이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가 되고, 우리를 위한 모범이 되고, 우리를 가르치고,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우리를 위해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사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이 되셨습니다(빌 2:6-8).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특별 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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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란 지혜와 사랑으로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돌보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교리는 하나님이 모든 일들을 완전하게 다스리신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만유를 다스리시며(시 103:19), 물리적인 세상을 다스리시고(마 5:45), 나라들의 사건들과(시 66:7), 인간의 운명(갈 1:15), 사람의 성공과 실패(눅 1:52), 자기 백성의 보호(시 4:8) 등을 주관하며 다스리십니다. 이 교리는 우주가 우연히 또는 운명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다는 사상을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하나님은 섭리를 통해 그분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그분의 목적이 확실히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의 일들을 다스리시며, 만물의 자연 질서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이 만유 가운데 일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 법칙에 어떤 고유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도록 다스리기 위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원칙들이 자연 법칙입니다. 자연 법칙은 단지 하나님이 그것들을 선포하셨기 때문에 존재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의지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는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주권자라는 것을 압니다. 이 두 진리가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성경에서 두 진리의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다소의 사울은 고의적으로 교회를 박해했지만, 그 와중에 그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가시채를 뒷발질”(행 26:14)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며 또한 죄인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기원자가 아니시며, 아무도 죄를 짓도록 시험하지 않으십니다(약 1:13). 그분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분명히 하나님은 어느 정도의 죄를 허락하십니다. 그분이 죄를 미워하실지라도 일시적으로 그것을 허용하시는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예가 요셉의 이야기에서 발견됩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아버린 후 수년 동안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속이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악했고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모든 죄는 도리어 선을 이루는데 쓰입니다. 요셉은 결국 애굽으로 끌려가더니 그곳에서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그의 지위를 사용해서 7년의 기근 동안 그의 가족을 포함한 방대한 지역의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기근이 시작되기 전에 요셉이 애굽에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비롯한 수백만 명이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습니까?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그의 형제들이 죄를 짓는 것을 허용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50장 15-21절은 하나님의 신성한 섭리에 대해 직접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죄를 극복하는 거룩한 섭리의 또 다른 명백한 예는 가룟 유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거짓말을 하고, 기만하고, 속이고, 훔치고, 마침내 주 예수님을 적들의 손에 넘겨 주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큰 악이었고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유다의 모든 음모와 책략은 인류의 구원이라는 더 큰 선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죄를 위한 희생이 되기 위해 로마인들의 손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죄 가운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유다에게 일련의 사악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2장 22절에서 이를 분명히 진술합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주권(“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과 사람의 책임(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을 둘 다 가르치시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분의 가르침에는 균형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가르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은 “모든 사건들”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제어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사탄은 그의 최악을 다할지라도, 심지어 세상을 뒤엎는 악을 저지를지라도, 그 악까지 더 큰 최종 목적을 이루는데 쓰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것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에는 이유가 있으며 그분의 계획은 선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 사실은 늘 사탄을 좌절시킬 것입니다. 사탄이 무엇을 하든 그는 계획이 좌절되고 결국 선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교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은 자신의 뜻의 경륜에 따라 발생할 모든 일을 정하셨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라도 하나님은 결코 죄의 저자가 아니시며, 인간의 책임이 제거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데 사용하시는 주된 수단은 이차적 원인들(자연 법칙과 인간의 선택)입니다. 즉,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간접적인 방법으로 그분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직접 역사하셔서 그분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기적은 짧은 기간 동안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자연 질서를 우회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임한 강한 빛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의 예입니다(행 9:3). 비두니아로 가려는 바울의 계획을 좌절시킨 것은 하나님의 간접적인 인도하심의 예입니다(행 16:7). 이 둘 모두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난 예들입니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개념은 자유 의지의 가능성을 파괴한다고 말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하게 통제하신다면, 어떻게 우리가 참으로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자유 의지가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인간 선택의 우발성과 같은 사건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 밖에 놓여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시 토론을 위해서 이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모든 우연한 일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신다면 어떻게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실 수 있습니까? 바울은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제하지 못하신다면 어떻게 이 약속 및 다른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만일 미래가 완전하게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이라는 완전한 보장을 갖지 못합니다.

더욱이 만일 하나님이 만유를 주관하지 못하신다면 그분은 주권자가 아니십니다. 만일 주권자가 아니시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는 어떤 우연한 일들을 주장한다면 이는 결국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결론을 가져옵니다. 만일 우리의 자유 의지가 하나님의 섭리를 능가할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누가 하나님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결론은 성경적인 세계관을 지닌 사람에게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자유를 고려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을 설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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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윤리는 골로새서 3 장 1-6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성경은 단지 "할 것"과 "하지 말 것"의 목록을 넘어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삶에서 직면하게 되는 모든 상황을 구체적으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윤리적인 딜레마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충분합니까? 이 질문이 기독교 윤리가 들어오는 지점입니다.

과학은 윤리를 "도덕 원칙의 집합, 도덕성의 연구"라고 정의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는 우리가 행동하는 기준인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파생되는 원칙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전체에서 직면하는 모든 상황을 다룰 수는 없지만, 그 원칙들은 구체적인 지시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표준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불법 약물 사용에 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배운 원리에 근거하여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를 들면, 성경은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합니다(고전 6:19-20). 우리 몸에 마약이 무엇을 행하는지를 알면(마약이 여러 장기에 미치는 해로움을 알면), 우리는 그 사용이 성령의 전을 파괴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권위를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롬 13 : 1). 마약의 불법적인 특성을 감안할 때, 우리가 마약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당국에 복종하지 않고 반역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불법 마약이 합법화되면 마약을 하는 것이 괜찮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전히 첫 번째 원칙을 위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한 원리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윤리적인 진로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골로새서 3 장에서 찾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처럼 간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경우들에 있어서는 좀 더 파고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신자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분의 역할 중 일부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 기도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고 가르치실 것입니다. 그분은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서야 할 지 그 원칙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서 직면하게 될 모든 상황을 다루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하는 데는 충분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단순히 성경이 말한 것을 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적절한 과정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성경이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는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그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원리를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따라 기도해야 하고 우리 자신을 주의 성령께 의탁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시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살 수 있도록 우리가 설 수 있는 원칙을 찾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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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apology"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방어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단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기독교 변증론은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는 과학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공격하는 많은 회의론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공격하는 많은 비평가들이 있습니다. 거짓 교리를 조장하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를 부인하는 많은 거짓 교사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변증론의 사명은 이러한 운동들을 물리치고 그 대신 기독교의 하나님과 진리를 장려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기독교 변증론의 핵심 구절은 베드로전서 3장 15 절일 것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을 철저하게 방어하지 못하는 데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합리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모든 기독교인이 변증론에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고, 왜 그것을 믿으며, 어떻게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거짓과 공격으로부터 신앙을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변증론에서 종종 망각되는 두 번째 측면은 베드로전서 3장 15절의 후반부인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는 부분입니다. 변증론으로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는 일은 결코 무례하거나, 분노하거나, 멸시하는 자세를 포함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변증하는 동안, 수비에도 강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처럼 진리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논쟁에 승리하더라도 우리의 태도 때문에 상대로 하여금 그리스도로부터 더 멀어지게 한다면, 우리는 기독교 변증의 진정한 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기독교 변증론에는 두 가지 기본 방법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전적인 변증론으로 알려진 첫 번째 방법은 기독교 메시지가 참되다는 증명 및 증거들을 나누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일반적으로 "전제적인" 변증론으로 알려져 있는데, 반 기독교 입장 배후에 있는 전제(선입관, 가정)를 직면하는 것입니다. 이 두 방법에 있어서 양 측의 기독교 변증론자들은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지에 대해 종종 서로 논쟁합니다. 아마도 사람과 상황에 따라 이 두 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 변증론은 기독교의 신앙과 진리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에게 기독교를 합리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독교 변증론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모두 복음을 선포하고 우리의 믿음을 방어할 수 있는 실력과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마 28:18-20; 벧전 3:15).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변증론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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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역사 전체에서 여러 개인 및 교파들이 속죄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였는데 어떤 것은 맞고 어떤 것은 틀립니다.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구약과 신약 모두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한 많은 진리를 드러냄으로 인하여 속죄의 부요함을 충분히 요약하거나 설명하는 어떤 하나의 ‘이론’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발견하는 것은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던 구속에 관한 많은 상호 연관된 진리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속죄에 대한 풍부하고 다면적인 그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속죄에 대한 여러 많은 이론들이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구속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것의 많은 부분이 구약의 언약 희생 제도 하에 있는 하나님 백성의 경험과 관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목적과 그것이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엄청난 분량의 글이 필요한 풍성한 주제입니다. 이 글은 단지 한 때 또는 다른 때에 제시된 수많은 이론들의 개요를 제공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우리는 속죄에 대한 여러 견해를 살펴보면서 인간의 죄성과 속죄의 대속적인 성격을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견해도 기껏해야 결함이 있고 최악의 경우는 이단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탄 보상설: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또한 사탄의 노예된 상태에서 풀어주기 위해 사탄에게 몸값을 지불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사람이 영적으로 사탄에게 속박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는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보장한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이 견해는 성경적인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하며 교회 역사에서도 거의 지지자가 없었습니다. 이 견해는 죄에 대한 지불을 요구하는 존재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라고 보는 데에서 비 성경적입니다. 따라서 이 견해는 성경 전체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견해는 사탄이 실제로 갖고 권세보다 더 많은 권세를 갖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사탄을 더 높게 보는 견해입니다. 성경은 죄인들이 사탄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에 대해 전혀 지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복원설: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인류의 역사를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바꿨다고 말합니다.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인간의 삶의 모든 단계를 반복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아담에 의해 시작된 불순종의 과정을 뒤집었다고 믿습니다. 이 견해는 성경적으로 뒷받침 될 수 없습니다.

드라마 이론: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선과 악 사이의 거룩한 갈등에서 승리를 보장하고 사탄의 굴레로부터 사람을 풀어주기 위한 것으로 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는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보장하고 세상을 악의 속박으로부터 구속할 길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신비설: 신비설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그리스도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자신의 죄 된 본성에 대해 승리한 사건이라고 봅니다. 이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이 지식이 신비하게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의 "신 의식"을 깨운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또한 인간의 영적 상태는 죄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신 의식"의 결여 상태라고 믿습니다. 분명히 이 견해는 비 성경적입니다. 이것을 믿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죄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은 완벽한 하나님이자 사람이시고, 그분의 본성은 모든 면에서 죄가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히 4:15).

도덕감화설: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속죄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서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회개하게 만든다는 믿음입니다. 이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사람은 영적으로 병들어 있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에 감동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인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과 의미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속죄가 하나님 사랑의 궁극적인 본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견해는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인간의 영적인 상태를 부정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이 실제로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에 비 성경적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이 견해는 인류에게는 참된 희생 또는 죄값 지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모범설: 이 견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단지 믿음과 순종의 모범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속죄를 봅니다. 이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사람이 영적으로 살아있다고 믿으며 그리스도의 삶과 속죄는 단지 참된 믿음과 순종의 모범이고 사람들에게 비슷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도록 영감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견해와 도덕감화설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제로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고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대가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도덕감화설과 모범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도덕감화설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가르치고 있고, 모범설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분의 죽음까지도 본 받아야 할 모범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범설은 사람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또한 하나님의 공의는 사람이 지불할 수 없는 죄값 지불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속죄만족설: 속죄만족설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하나님께 무한한 영예를 가져다 준다고 봅니다. 이 견해는 그러실 필요가 없으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보상을 주셨고, 그리스도는 그 보상을 사람에게 전달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이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사람의 영적 상태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임을 믿으며 따라서 하나님께 무한한 영예를 가져온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들의 구원에 적용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견해는 다른 많은 견해들과 마찬가지로 중생하지 않은 죄인들의 진정한 영적 상태와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는 그들의 완전히 새로운 본성에 대한 필요성을 부인합니다(고후 5:17).

속죄통치설: 이 견해는 율법과 죄에 대해 하나님이 대단히 심각하게 여기시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속죄를 봅니다. 하나님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야 하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를 붙든 사람들은 사람의 영적인 상태는 하나님의 도덕법을 어긴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는 죄의 형법을 대신 치르기 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대속물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합법적으로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이 견해는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어떤 사람의 실제 죄악에 대한 형벌을 치르셨다는 것을 가르치지 못하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단지 하나님의 율법이 무너졌고 이에 어떤 형벌이 치러졌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형벌대속론: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대리적이고 간접적인 희생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희생으로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지불하셨으며, 용서를 베푸시고, 의를 전가하시고,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 시키셨습니다. 이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사람의 모든 면, 즉 마음과 의지와 감정이 죄에 의해 더럽혀졌으며 그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영적으로 죽었다고 믿습니다.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에 대한 형벌을 지불했으며, 사람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대속을 죄 값에 대한 지불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속죄에 대한 이 견해는 죄와 인간의 본성,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의 결과에 대하여 성경과 가장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후천년설은 계시록 20장의 해석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기, 즉 기독교의 번영과 다스림의 황금 시대 이후에 일어나는 것으로 봅니다. 이 용어는 종말론에 대해 여러 유사한 견해를 포함하지만 전천년주의(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분의 천년 왕국 이전에 발생하며 천년 왕국은 실제로 1천년의 통치가 될 것이라는 견해)와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무천년설(문자적인 1천년의 통치는 없다는 견해)과도 덜 하기는 하지만 반대되는 입장을 취합니다.

후천년설은 그리스도가 일정 기간 후에 재림하시지만 반드시 그분의 통치가 문자적으로 1천년일 필요는 없다는 믿음입니다. 이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미 성취된 예언에 대해서는 보통의 문자적인 ​​방법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계시록 20장 4-6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1000년"은 단지 "긴 기간"을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더욱이 "후"라는 접두어는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이(그리스도가 아니라) 이 땅에 왕국을 세운 후에 재림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후천년설을 지지하는 자들은 모든 상황이 정반대로 나아가는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점점 더 좋게 되어 온 세계가 결국 ‘기독교화’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독교화의 일이 끝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제시하는 마지막 시대의 세계관이 아닙니다. 계시록을 보면, 우리는 세상의 미래에 끔찍한 일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3장 1-7절에서도 바울은 마지막 날들을 "고통하는 때"라고 묘사합니다.

후천년설을 고수하는 자들은 미 성취된 예언을 해석할 때 자신들이 친히 의미를 부여하는 비 문자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해석의 문제는 단어나 구와 문장의 일반적인 의미 대신에 자신들이 원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단어들의 의미에 관한 모든 객관성이 상실됩니다. 단어가 그 의미를 잃으면 의사 소통이 중단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언어와 의사 소통을 위해 의도하신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우리와 소통하시며, 말씀의 단어들은 객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상과 생각이 전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일반적이며 문자적인 해석은 후천년설을 거부하고 미 성취된 예언을 포함한 모든 성경을 일반적으로 해석합니다. 성경에는 성취된 예언들이 수백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예언들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생각해보십시오(사 7:14; 마 1:23). 우리의 죄를 위해 위한 그분의 죽음을 생각해보십시오(사 53:4-9; 벧전 2:24). 이 예언들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으며, 이는 장래에도 주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후천년설은 성경의 예언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천년 왕국이 그리스도 자신이 아니라 교회에 의해 세워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무천년주의는 그리스도의 문자적인 천년왕국 통치가 없다는 믿음에 주어진 이름입니다. 이 믿음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무천년주의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접두어 ‘무’는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무천년주의’는 천년왕국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전천년주의(그리스도의 재림은 천년 왕국 전에 발생할 것이며 천년왕국은 문자적으로 1천년 통치라는 견해)라고 불리는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관점과 다릅니다. 또한 후천년주의(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왕국을 세운 뒤 그리스도께서 재림할 것이라는 믿음)라고 불리는 덜 널리 받아들여진 견해와도 다릅니다.

하지만 무천년설자들을 위해 공평하게 말하면, 그들이 천년기가 전혀 없다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문자적인 천년, 즉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문자적으로 천년을 다스리시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들은 그리스도가 지금 다윗의 보좌에 앉아 계시며 현재의 교회 시대가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왕국이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가 지금 보좌에 앉아 계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성경이 언급한 다윗의 보좌는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기에 지금 통치하시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통치가 천년왕국을 통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하신 약속들과 다윗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는(삼하 7:8-16, 23:5; 시 89:3-4) 이 땅에 문자적이며 물리적인 왕국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의 바라심과 그분이 하신 약속들을 지키실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는 또 다른 많은 신학적인 문제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예를 들어, 만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약속들을 선포하신 후에 그 약속들을 취소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주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약속 및 그분이 하신 다른 약속들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그분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그분의 약속이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왕국이 문자 그대로 이 땅에 세워지는 왕국이라고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1)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지기 전에 그분의 발은 실제로 감람산에 닿게 될 것입니다(슥 14:4, 9).

2) 그 왕국의 기간 동안 메시아는 이 땅에서 공의를 세우는 심판을 집행할 것입니다(렘 23:5-8).

3) 그 왕국은 하늘 아래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단 7:13-14, 27).

4) 선지자들은 그 왕국 동안에 이 땅에서의 극적인 변화에 대해 예언했습니다(행 3:21; 사 35:1-2, 11:6-9, 29:18, 65:20-22; 겔 47:1-12; 암 9:11-15).

5) 계시록 사건의 연대 순서를 보면 세상 역사가 종결되기 전에 이 땅에 왕국이 존재하는 것을 나타냅니다(계 20 장).

무천년설적인 관점은 성취되지 않은 예언을 해석하는 방법과 비 예언적인 성경 내용 및 성취된 예언을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에서 유래합니다. 비 예언적인 성경 내용 및 성취된 예언은 문자 그대로 또는 정상적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무천년설주의에 따르면, 성취되지 않은 예언은 영적으로, 또는 비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무천년설을 지지하는 자들은 성취되지 않은 예언에 대해서는 영적으로 읽어야 본문을 정상적으로 읽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를 이중적인 해석학이라고 부릅니다(해석학은 해석의 원리에 대한 연구입니다). 무천년주의자들은 대부분 또는 모든 미성취된 예언들이 상징과 비유와 영적인 언어로 쓰여있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므로 무천년주의자는 성경의 어떤 부분들에 대해 그 단어들의 일반적이며 문맥에 맞는 의미를 취하는 대신에 다른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취되지 않은 예언을 해석할 때의 문제는 얼마든지 넓은 의미를 허용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정상적인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 한 하나의 의미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이신 하나님은 인간 저자들을 감동하셔서 기록하게 하실 때 어떤 한 가지의 구체적인 의미를 마음 속으로 두고 계셨습니다. 성경 구절을 여러 가지로 삶에 적용할 수는 있지만, 오직 한 가지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의미입니다. 또한 성취 된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성취되지 않은 예언도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최고의 근거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예언은 모두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예언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미성취된 예언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은 거부되어야 하며, 미성취된 예언에 대해서도 문자적이고 일반적인 해석이 채택되어야 합니다. 무천년주의는 일관성없는 해석학, 즉 성취된 예언과 미성취된 예언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그분께서 다스리게 될 천년 왕국 이전에 일어날 것이라는 견해이고, 천년왕국은 문자 그대로 1000년 동안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통치를 말합니다. 종말의 사건들을 다루는 성경 본문들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두 가지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 해야 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제대로 된 방법과 이스라엘(유대인들)과 교회(예수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자들의 몸) 사이의 구별입니다.

첫째, 제대로 된 성경 해석 방법은 성경이 그것의 배경과 일관되게 해석되는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어떤 구절이 누구에게 쓰여졌고, 무엇에 관해 쓰여졌으며, 누구에 의해 쓰여졌고, 등등과 일관되게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해석하려는 각 구절의 저자와, 의도하는 청중, 그리고 역사적 배경을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배경은 보통 본문의 올바른 뜻을 보여줄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성경이 해석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도 역시 중요합니다. 즉, 자주, 한 성경의 구절이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역시 이야기 되고 있는 화제나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구절들을 서로 일관되게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절들은 구절의 본문이 성질상 비유라고 지적하지 않는 한, 보통의, 정상적인, 있는 그대로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항상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사용되고 있는 비유적 표현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해석자로 하여금 그 문맥에 적절하지 않는 한 비유적 표현을 구절의 의미로 읽지 않도록 독려합니다. 제시된 것보다 “더 깊고, 더 영적인” 의미를 결코 쫓지 않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문장을 영적화하는 것은 위험한데, 그렇게 함으로써 성경의 정확한 해석을 위한 근거를 독자들의 마음으로 옮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해석을 위한 객관적 기준이 있을 수 없게 됩니다; 대신에, 성경이 의미하는 것이 각 개인마다의 인상에 종속되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1:20-21은 우리를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any private interpretation)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니라.”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이러한 원칙들을 적용하여, 이스라엘(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들)과 교회(모든 신약 성경의 믿는 자들)가 서로 구별된 집단이라는 사실이 파악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교회가 구별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데, 이것이 잘 못 이해 된다면, 성경이 잘 못 해석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들(성취 된 것들이나 안된 것들 둘 다)을 다루는 문장들이 잘 못 해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약속들이 교회에 적용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문장의 맥락이 그것이 누구에게 쓰여졌는지를 결정할 것이고 가장 올바른 해석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을 염두에 두면, 우리는 전천년설의 견해를 낳은 성경의 다양한 문장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창세기 12: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이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 약속들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많은 후손들이 있을 것과, 이들의 나라가 땅을 소유하고 차지할 것과, 그리고 아브라함의 계보(유대인들)를 통해 온 세상에 이르는 일반적인 축복이 임할 것. 창세기 15:9-17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자신의 언약을 세우십니다. 이것이 행해지는 방식에 있어,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만 이 언약의 유일한 책임을 지도록 만드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셨던 이 언약을 무효화시키는 그 무엇도 아브라함은 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 단락에서, 궁극적으로 유대인들이 차지하게 될 땅의 경계들이 설정됩니다. 경계들의 자세한 목록을 위해, 신명기 34를 참고하십시오. 땅의 약속을 다루는 다른 문장들은 신명기 30:3-5와 에스겔 20:42-44입니다.

사무엘하 7:10-17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하셨던 약속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가 후손들을 가질 것이고, 그 후손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영원한 왕국을 수립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천년 동안 그리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이 약속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어야 하며 아직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솔로몬의 통치가 이 예언의 문자 그대로의 성취라고 믿으려 하지만, 이것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솔로몬이 통치했던 지역은 오늘날 이스라엘에 의해 취해지고 있지 않으며, 솔로몬 또한 오늘날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이 땅을 영원히 소유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던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사무엘하 7장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통치하시는 왕을 세우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의 성취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입니다.

지금, 이 모든 것들을 염두에 두고, 요한계시록 20:1-7에 기록된 것을 살펴보십시오. 이 문장에 반복해서 언급된 천년은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문자 그대로의 통치와 일치합니다. 통치자와 관련해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어야 했으며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하십시오. 전천년설은 이 문장이 그리스도께서 왕좌에 앉으시는 이 약속의 미래의 성취를 묘사하는 것으로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 둘 다 모두와 무조건적 언약을 하셨습니다. 이 언약들 중 어느 것도 온전히 그리고 영구히 성취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문자 그대로의, 그리고 육체적인 통치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 언약들이 성취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경에 대해 문자 그대로의 해석 방법을 적용하면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초림)에 대한 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들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두 번째 오심(재림)에 관한 예언들 역시 문자 그대로 성취 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합니다. 전천년설은 하나님의 언약들과 종말의 예언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해석에 맞는 유일한 체계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언약신학은 체계적인 교리가 아니며, 단지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하나의 틀이기 때문에 ‘신학’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세대주의 신학” 또는 “세대주의”로 불리는 성경 해석의 틀과 대조됩니다. 세대주의 신학은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미국 복음주의 진영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해석 방법입니다. 언약신학은 종교개혁 때부터 개신교를 위해 보존된 다수의 의견이며, 개혁주의 또는 칼빈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선호하는 체계입니다.

세대주의는 (일반적으로) 성경을 일련의 일곱 개의 "세대"(세대는 하나님이 구속사의 주어진 기간 동안 사람과 피조물을 다루는데 사용하신 특별한 수단으로 정의 될 수 있다)가 전개되는 것으로 보는 반면, 언약 신학은 성경을 언약이라는 틀을 통해 봅니다. 언약 신학은 두 가지의 우선적인 언약을 정의합니다. 그 둘은 행위 언약(CW, covenant of works)과 은혜 언약(CG, covenant of grace)입니다. 때때로 구속 언약(CR, covenant of redemption)이라는 세 번째 언약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언약들을 차례로 토론할 것입니다. 명심해야 할 중요한 점은 성경에 묘사된 여러 가지 언약들은(예: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맺은 언약들, 그리고 새 언약) 모두 행위 언약 또는 은혜 언약의 외적인 역사들이라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다른 두 언약을 선행하는 구속 언약으로부터 시작하여 언약 신학에서 상세히 설명된 다양한 언약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언약 신학에 따르면, 구속 언약은 삼위 일체의 세 위격 사이에서 맺어진 언약으로서 선택된 각 개인의 공동체를 구원과 영생으로 인도하기 위해 택하고 속죄하고 구원하는 것입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이며 신학자는 구속 언약 안에서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위한 신부를 택하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구속 언약이 성경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성경은 구원 계획의 영원한 특성을 명백히 진술합니다(엡 1:3-14, 3:11; 살후 2:13; 딤후 1:9; 약 2:5; 벧전 1:2). 더욱이 예수님은 종종 자신의 임무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요 5:3, 43, 6:38-40, 17:4-12). 택함 받은 자들의 구원은 창조를 시작하신 때부터 하나님의 의도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구속 언약은 단지 이 영원한 계획을 언약의 언어로 공식화한 것입니다.

구속사의 관점에서 볼 때, 행위 언약은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첫 번째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를 에덴 동산에 두시며 한 가지 간단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우리는 이 명령에 암시된 언약적인 언어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동산에 두시고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한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생명은 순종에 대한 보상이며, 죽음은 불순종에 대한 형벌입니다. 이것은 언약적인 언어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행위 언약에서 "종주국-속국 언약"이라고 불리는 형식을 봅니다. 이러한 형태의 언약에서, 종주(즉, 왕이나 통치자)는 봉신(즉, 신하)에게 언약의 조건들을 제시합니다. 종주국은 속국의 공물에 대한 대가로 복과 보호를 제공합니다. 행위 언약의 경우, 하나님(종주)은 사람이 언약의 조항(즉,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마라.)에 순종할 경우 영생과 복을 약속하십니다(아담은 인류의 머리로서 봉신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구 언약에서도 비슷한 구조를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니다. 하나님은 언약 조항에 따라 이스라엘이 순종하면 그 보답으로 재건된 에덴(“젖과 꿀이 흐리는 땅”), 즉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이며 또한 복을 베푸시고 나아가 모든 원수로부터 보호를 제공할 것입니다. 반면, 언약 위반에 대한 처벌은 그 땅에서 추방되는 것입니다(주전 722 년 북 왕국 멸망과 주전 586 년 남 왕국의 포로).

아담이 행위 언약을 지키는데 실패하자 하나님은 은혜 언약이라는 세 번째 언약을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 언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죄인들(행위 언약에 따라 사는데 실패한 사람들)에게 거저 제안하십니다. 우리는 타락 직후에 창세기 3장 15 절에서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을 예언함으로 은혜 언약을 제시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행위 언약은 조건적인 언약으로서 순종에는 복을, 불순종에는 저주를 약속한 것이지만, 은혜 언약은 무조건적인 언약으로서 하나님 은혜의 바탕 위에 거저 주어진 언약입니다. 은혜 언약은 고대 토지 허락 조약의 형식을 취하는데, 그 조약에서 왕은 아무런 조건 없이 수여자에게 땅을 선물로 주곤 하였습니다. 한편, 믿음이 은혜 언약의 조건이라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의 수여자들에게 끝까지 충성되게 남아 있기를 권고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은혜 언약의 조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하는 믿음마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칩니다(엡 2:8-9).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개인들과 세우신 여러 무조건적인 언약에서 나타난 은혜 언약을 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은 그의 백성이 되는 언약) 은혜 언약의 연장입니다. 다윗 언약(다윗의 어떤 후손이 항상 왕으로 통치할 것이라는 언약) 또한 은혜 언약의 연장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율법을 쓰시고 우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시겠다는 언약으로서 은혜 언약의 최종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구약에 있는 여러 가지 언약을 볼 때 분명한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언약들이 다 성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다윗 계통의 왕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새 언약은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심지어 구약에서조차, 구약의 모든 희생 제사와 의식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히 8-10 장)이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예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 수훈에서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마 5:17).

구약을 보면 주의 백성들의 반복되는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을 보류하시는데 이때 우리는 은혜 언약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비록 모세 언약의 규정들(행위 언약의 적용)이 주의 명령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심판하리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 백성을 인내함으로 대하십니다. 이런 일은 보통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다”(왕하 13:23; 시 105; 사 29:22, 41:8)는 구절을 동반합니다. 은혜 언약을 성취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정의에 따르면 일방적인 언약임)은 종종 행위 언약을 집행할 수 있는 그분의 권리보다 우선합니다.

이것이 언약 신학 및 언약의 렌즈를 통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입니다. 언약 신학에 대해 가끔 던져지는 질문은 은혜 언약이 행위 언약을 대신하거나 폐기시켰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 언약이 낡아졌으니 행위 언약도 낡아졌는가 하는 것입니다(히 8:13). 구 언약, 곧 모세 언약은 적용 면에서 행위 언약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행위 언약은 순종에 대해서는 생명을, 불순종에 대해서는 죽음을 약속한 에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구 언약은 단지 10계명으로 성문화된 도덕법을 넘어섭니다. 구 언약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관련된 규칙들과 규정들을 포함합니다. 구 언약은 또한 신권 정치 및 군주 정치 기간 동안 이스라엘 국가를 통치하는 민법도 포함합니다.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하여 구 언약의 모형들과 예표들이 성취됨으로써 구 언약의 많은 측면들이 쓸모 없게 되었습니다(히 8-10장). 구약은 “모양과 그림자”를 대표하는 반면, 그리스도는 그 실체를 대표합니다(골 2:17). 다시 말하는데, 그리스도는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습니다(마 5:17).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도덕법으로 성문화된 행위 언약을 폐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셨으며(레 11:44), 신약에서 주의 백성들에게도 여전히 거룩을 요구하십니다(벧전 1:16). 따라서 여전히 우리에게는 행위 언약의 규정을 성취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마지막 아담이며 언약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위 언약의 요구를 완전하게 이루셨고 그 완전한 의 때문에 하나님은 은혜 언약을 택한 자들에게 확장시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5장 12-21절은 인류의 두 언약의 머리와 관련된 상황을 묘사합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인류를 대표하였으나 행위 언약을 지키는데 실패하였고, 이로 인하여 자신과 그의 후손을 죄와 죽음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대표로 오셔서 광야에서의 유혹으로부터 갈보리까지 가는 동안 완벽하게 행위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이에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언약 신학은 성경의 언약들을 행위 언약 및 은혜 언약의 표현으로 봅니다. 구속사에 대한 전체 이야기는 하나님이 은혜 언약을 초기 단계(창 3:15)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결실을 맺을 때까지 펼치시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 신학은 구약을 그리스도의 약속으로, 신약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로 보기 때문에 성서를 대할 때 대단히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약 신학이 소위 “대체 신학”(죽,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한다)을 가르친다고 비난합니다. 이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비난입니다. 언약 신학은 세대주의와는 달리 이스라엘과 교회를 날카롭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성했으며, 교회(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됨)는 신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성합니다. 둘 다 하나님의 한 백성을 이룹니다(엡 2:11-20). 교회는 이스라엘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은 교회입니다(갈 6:16). 아브라함과 똑같은 믿음을 행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속합니다(갈 3:25-29).

언약 신학에 관해서는 더 많은 것들이 언급될 수 있지만, 명심해야 할 중요한 점은 언약 신학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해석의 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언약 신학이 성경을 해석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언약 신학과 세대주의는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특정 이차적인 교리와 관련해서 서로 상반되는 결론을 낳기도 하지만, 둘 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충실합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에 의해,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며, 이에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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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는 일들을 정리 정돈하는 방법입니다 – 운영, 체계, 또는 관리. 신학에서의 세대는 일정 기간에 대한 하나님의 신성한 운영, 관리입니다; 각 세대는 하나님께서 신성하게 지정하신 시대입니다. 세대주의는, 세상의 일들을 정리 정돈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이러한 시대들을 인식하는 신학적 체계입니다. 세대주의는 두 가지 독특한 특성들을 가집니다: 1) 성서에 대한 일관된 문자적 해석, 특히 성경의 예언에 대해, 그리고 2)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 교회와 분리된 이스라엘의 독특성을 인정하는 견해. 전통적인 세대주의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일곱 가지 세대들을 식별합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최고의 해석 방법으로서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고수합니다. 문자적 해석은 각 단어에게, 그것이 일상적으로 사용될 때의 일반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물론, 상징들, 비유적 표현들, 그리고 유형들을 허용합니다. 심지어 상징들과 비유적 말들도 그것들 이면에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성경이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천년”을 이야기 할 때, 세대주의자들은 그것을 문자 그대로의 1,000년의 기간으로 해석하는데(왕국의 세대), 이는 달리 해석해야 하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자적 해석이 성서를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인 이유가 적어도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철학적으로, 언어 그 자체의 목적은 우리가 단어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를 요구합니다. 언어는 소통할 수 있게 할 목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습니다. 단어는 의미를 담은 그릇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성경적입니다. 구약 성경의 예수님에 대한 모든 예언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 이 모두가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정확히 일어났습니다. 예언들은 문자적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메시야(구세주)에 관한 예언들은 모두 문자 그대로 성취됩니다. 이는 문자적 해석 방법을 강하게 지지합니다. 성서를 공부할 때, 문자적 해석이 사용되지 않는다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 객관적 기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각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해석에서 “성경에서 말씀 하기를” 대신에 “이 구절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로 본말이 전도될 수 있습니다. 슬프게도, 오늘날 성경 공부라 불리 우는 많은 경우에서 그렇게 해석이 되고 있습니다.

세대주의적 신학은 독특한 두 가지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스라엘과 교회. 세대주의자들은 구원은 항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믿습니다 – 구약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특히 신약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의 약속들이 교회에 대한 것으로 옮겨지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세대주의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들(땅, 많은 자손들, 그리고 축복들에 관하여)은 궁극적으로 요한계시록 20장에 언급된 1,000년의 기간에 성취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시대는 관심을 교회에 집중하고 계신다면, 미래에는 다시 관심을 이스라엘에 집중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로마서 9-11 그리고 다니엘 9:24).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이 일곱 세대로 체계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수(창세기 1:1-3:7), 양심(창세기 3:8-8:22), 인간의 정부(창세기 9:1-11:32), 약속(창세기 12:1-출애굽기 19,25), 율법(출애굽기 20:1-사도행전 2:4), 은혜(사도행전 2:4-요한계시록 20:3), 그리고 천년 왕국(요한계시록 20:4-6).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세대들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경로는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과 관련되시는 방식을 나타냅니다. 각 세대는 하나님께서 그 세대에 사는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하시는지를 식별할 수 있는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패턴은 1) 책임, 2) 실패, 3) 심판, 그리고 4)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한 은혜입니다.

세대주의 체계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그리스도께서 천년 왕국을 세우기 전에 있을 것이라는 해석과, 휴거가 7년 환란 전에 일어난다는 해석을 낳습니다. 요약하면, 세대주의는 성경에 있는 예언의 문자적 해석을 강조하고,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차이점을 인식하며, 그리고 성경을 다른 세대들 또는 경영들로 편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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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29-30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한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또 에베소서 1:5과 11은 공표합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성경에 부합하는 교리입니다. 핵심은 예정론이 성경적으로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위에 언급한 “예정되었다”라고 번역된 말은 “사전에 결정하다,” “임명하다,” “미리 정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proorizo입니다. 그래서, 예정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미리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미리 정하셨을 까요? 로마서 8:29-30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개인들이 그분의 아들의 모습과 닮고, 부르심을 받고,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개인들이 구원 받게 될 것을 미리 정하십니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미리 선택 되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24:22, 31; 마가복음 13:20, 27; 로마서 8:33; 9:11; 11:5-7, 28; 에베소서 1:11; 골로새서 3:12; 데살로니가전서 1:4; 디모데전서 5:21; 디모데후서 2:10; 디도서 1:1; 베드로전서 1:1-2; 2:9; 베드로후서 1:10).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자진의 주권으로 어떤 개인들을 구원받게 선택하신다는 성경적 교리입니다.

예정론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대는 그것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아닌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 선택하시는겁니까? 중요한 것은 아무도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고(로마서 3:23), 모든 사람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로마서 6:23).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지옥에서 영원히 보내게 하셔도 그분께서는 완벽하게 공평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부를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선택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불공평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받아 마땅할 것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로 선택하시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공평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반대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20명의 군중 속에서 다섯 명에게 무작위로 돈을 거저 준다고 합시다. 돈을 받지 못한 15명의 사람들은 속상해 해야 할 까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들은 속상할 권리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돈을 준 사람은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저 몇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되는 것을 결정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가 구원받을지를 선택하신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믿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닙니까? 성경은 우리가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요한복음 3:16; 로마서 10:9-10).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는 그 어느 누구라도 거부하거나 자신을 찾는 그 어느 누구라도 외면하신다고 결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신명기 4:29). 어떻게든,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예정론은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 지고(요한복음 6:44) 구원받기 위해 믿는(로마서 1:16) 사람과 밀접하게 작동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구원을 받을지를 미리 예정하시고,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합니다. 두 사실들은 동등한 진리입니다. 로마서 11:33은 표명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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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관(Worldview)’은 구체적인 관점으로부터 본 세계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관점에서 본 세계에 대한 포괄적 개념입니다. 개인의 세계관은 ‘큰 그림’인 세계에 대해 사람이 믿는 것들 의 조화입니다. 이것이 현실을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개인의 세계관은 매일의 결정들을 내리는 데 있어 기초가 되며 그러므로 아주 중요합니다.

식탁 위에 놓여져 있는 사과를 여러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사과를 보고 있는 식물학자는 그것을 분류하고, 미술가는 정물로 보고 그것을 그립니다. 식료품 잡화점 주인은 그것을 자산으로 보고 목록을 만듭니다. 어린이는 그것을 점심으로 보고 먹습니다. 어떤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는 우리가 전체적으로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기독교적이든 아니든 간에, 모든 세계관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들을 다룹니다.

1)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리고 우리가 여기 왜 있는가?

2) 세계는 무엇이 잘못되어 있나?

3) 어떻게 내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나?

오늘날 만연된 세계관은 자연주의입니다. 자연주의는 이 세가지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1] 우리는 실제 목적이 없는 자연의 임의적 활동들의 산물입니다. [2]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만큼 자연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3] 우리는 생태학과 보존을 통해 세계를 구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며 세상을 섬길 수 있습니다.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도덕적 상대주의, 실존주의, 실용주의 그리고 공상적 이상주의와 같은 관련된 많은 철학들을 낳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인 세계관은 이 세가지 질문에 성경적으로 답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세상을 다스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어졌습니다(창세기 1:27-28; 2:15). [2]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짓고 온 세계가 저주 받게 만들었습니다(창세기 3). [3]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고(창세기 3:15; 누가복음 19:10), 언젠가 피조물들을 예전의 완벽한 상태로 복구하실 것입니다(이사야 65:17-25). 기독교 세계관은 우리로 하여금 도적의 절대성, 기적들,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구원의 가능성을 믿게 만듭니다.

세계관은 포괄적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계관은 돈부터 도덕성까지, 정치로부터 예술까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칩니다. 참된 기독교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일련의 생각들 그 이상의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쳐지는 기독교는 그 자체가 세계관입니다. 성경은 결코 ‘종교’와 ‘세속적인 삶’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존재하는 유일한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그리고 생명”이시라고 선포하셨고(요한복음 14:6),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세계관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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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적이다’는 것은 어떤 것이 체계화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은 그것의 다양한 영역들을 설명하는 체계화된 신학의 부서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의 많은 책들은 천사들에 관한 정보를 줍니다. 어느 하나의 책도 천사들에 대해 모든 정보를 주고 있지 않습니다. 조직신학은 성경의 모든 책들로부터 천사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취하여 그것을 천사론이라 불리는 체계로 조직화합니다. 이것이 조직신학에 관한 전부입니다 – 성경의 가르침을 범주적 체계들로 조직화 하는 것.

교부론(Paterology, Theology Proper)은 하나님 아버지에 관한 연구입니다. 그리스도론(Christology)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연구입니다. 성령론(Pneumatology)은 하나님 성령에 관한 연구입니다. 성서론(Bibliology)은 성경에 관한 연구입니다. 구원론(Soteriology)은 구원에 관한 연구입니다. 교회론(Ecclesiology)은 교회에 관한 연구입니다. 종말론(Eschatology)은 종말에 관한 연구입니다. 천사론(Angelology)은 천사들에 관한 연구입니다. 기독교 마귀론(Christian Demonology)은 기독교적 관점으로 본 마귀에 관한 연구입니다. 기독교 인간론(Christian Anthropology)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인간에 관한 연구입니다. 죄악론(Hamartiology)은 죄에 관한 연구입니다. 조직신학은 우리가 성경을 조직적 방식으로 이해 하고 가르치는 데 도움을 주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조직신학 외에도, 신학이 나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이 있습니다. 성서신학은 성경의 어떤 책(또는 책들)에 관한 학문이고 그것이 중점을 두고 있는 신학의 다른 측면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훨씬 더 많은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매우 그리스도론 적입니다(요한복음 1:1, 14; 8:58; 10:30; 20:28). 역사 신학은 교리들과 그 교리들이 기독교 교회의 수 세기의 역사에 걸쳐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교리신학은 체계화 된 교리를 가진 어떤 기독교 집단들의 교리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 예를 들면, 칼뱅주의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입니다. 현대신학은 근세에 발전되었거나 중점이 된 교리들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어떠한 방법으로 신학을 공부하든 간에, 중요한 것은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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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를 설명해 보려는 신학의 두 체계입니다. 칼뱅주의는 프랑스 신학자 존 칼뱅(1509-1564)의 이름을 따라 그리고 알미니안주의는 네델란드 신학자 야고보스 아르미누스(1560-1609)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습니다.

두 가지 체계는 다섯 가지 점들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칼뱅주의는 인간의 완전한 타락을 고수하고,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부분적 타락을 고수합니다. 완전한 타락을 고수하는 칼뱅주의 교리는 인간의 모든 측면들이 죄로 말미암아 부패되어 그들 자신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부분적 타락은 인간의 모든 면이 죄로 물들어 있지만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주목: 고전적 알미니안주의는 “일부 타락”을 거부하고 칼뱅주의적 “완전한 타락”과 매우 비슷한 견해를 고수합니다(하지만 그 타락의 정도와 의미는 알미니안주의를 믿는 집단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아르미안주의자들은 완전한 타락과 구원 사이에 “중간” 상태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죄인들이 선행적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께 이끌리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 가능합니다.

칼뱅주의는 선택이 무조건적이라는 믿음을 포함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는 조건적 선택을 믿습니다. 무조건적 선택은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타고난 어떠한 가치에 따르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전적인 뜻에 근거하여 구원할 개인들을 선택하신다는 견해입니다. 반면에 조건적 선택은 누가 구원에 이르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을 것인지를,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들이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을 미리 아시는 예지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개인들을 선택하신다고 말합니다.

칼뱅주의는 구속을 제한적이라고 보며, 알미니안주의는 무제한적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다섯 가지 점들 중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제한적 구속은 예수님께서는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믿습니다. 무제한적 구속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으나 그분의 죽음은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칼뱅주의가 하나님의 은혜는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포함하는 반면에, 알미니안주의는 개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거부할 수 없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려 부르시면,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합니다. 거부할 수 있는 은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 부르시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부름을 반대하고 거부한다고 말합니다.

칼뱅주의는 성도들의 인내를 고수하지만, 알미니안주의는 조건적 구원을 고수합니다. 성도의 인내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람은 믿음 안에서 인내하고 영원토록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그분으로부터 돌아서지 않을 것이라는 개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은 믿음으로 굳건해지게 되어 있고 결코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돌아서지 않을 것이라 봅니다. 조건적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그/그녀의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로부터 돌아설 수 있고 그것 때문에 구원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견해입니다. 주목 – 많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조건적 구원”을 부인하고 대신에 “영원한 보장”을 고수합니다.

그럼,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의 논쟁 가운데 누가 옳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교회의 다양성 안에,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썪인 온갖 종류의 견해들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5가지 점들의 칼뱅주의자들과 5가지 점들의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있고, 동시에 3가지 점들의 칼뱅주의자들과 2가지 점들의 알미니안주의자들도 있습니다. 많은 믿는 자들이 이 두 견해들의 어떤 혼합된 유형에 동조합니다. 궁극적으로, 두 체계들 모두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에 실패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입니다. 인간들은 이렇게 개념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주권적이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인간들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진정한 결정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 두 사실은 우리에게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의 생각으로는 이치에 맞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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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합니다. 성경에서 ‘새로운’으로 번역될 수 있는 헬라 단어는 두 개가 있습니다. 첫째는 네오스(neos)가 있는데 이 단어는 방금 생겨났지만 비슷한 것들이 이미 있을 때에 사용됩니다. 이 구절에서 ‘새롭게’로 번역된 헬라 단어는 카이노스(kainos)인데 이는 “이전에 있지 않던 전혀 새로운 것이 지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처음에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옛 자아를 깨끗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됩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분의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거주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중생하고 새로워지고 거듭나게 됩니다. 과거의 본성은 육체적으로 생각하는 반면, 새로운 이 피조물은 영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과 새로운 차원의 교제는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을 섬기는데 헌신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순종과 헌신은 옛 속성으로는 행할 수도 없고 심지어 바라지도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옛 속성은 영적인 일들에 죽어 있었고 스스로 살아날 수도 없습니다. 옛 속성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엡 2:1)에 있기 때문에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그분이 우리 안에 거주하실 때에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각성에 의해서만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완전히 새롭고 거룩한 본성과 썩지 않는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향해 죽어 있었고 장사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분과 함께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일으키셨습니다(롬 6:4).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분과 연합되어 더 이상 죄에 대하여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롬 6:5-6).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살아납니다(엡 2 : 5). 우리는 그분의 형상을 본 받습니다(롬 8:29). 우리는 정죄로부터 자유하며 이에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합니다(롬 8:1). 우리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그리스도 몸의 한 부분입니다(롬 12:5). 신자는 이제 새로운 마음을 가졌으며(겔 11:19)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습니다(엡 1:3).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삶을 바치고 구원을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자주 앞에서 묘사된 방식대로 살지 않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본성이 오래된 육체에 거주함으로써 이 둘이 서로 싸우기 때문입니다. 옛 속성은 죽었지만 새 속성은 그것이 머무는 오랜 ‘장막’과 싸워야 합니다. 악과 죄는 여전히 존재하며 신자는 이제 그것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것들은 과거처럼 더 이상 신자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제 옛 속성이 할 수 없었던, 죄에 대한 저항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과 기도와 순종을 통해 새 속성에 영양분을 공급하거나 또는 그러한 것들을 무시함으로써 육체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며”(롬 8:37),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우리 구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빌 4:1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고 용서받으며 안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입양되고, 의롭게 되고, 구속함을 받고, 화목되고, 선택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며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차며 인생에서 진정한 의미를 부여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얼마나 멋진 구세주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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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는 구속의 날을 위해 우리를 인 치시는 성령을 받게 됩니다(엡 1:13, 4:30). 예수님은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요 16:13)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진리의 일부는 하나님의 일들을 취하여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삶에 적용이 되면 신자는 성령께서 자신을 다스리도록 허락하는 선택을 합니다.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거듭난 신자가 자신의 삶을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에 맡기는 정도에 근거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이 구절의 시제는 진행형이기 때문에 “계속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말고 단지 성령님께 통치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술에 취하면 그는 혀가 꼬부라진 말을 하거나, 불안정하게 걷거나, 의사 결정의 장애라는 어떤 특징들을 드러냅니다. 술 취한 사람의 특징 때문에 그가 술에 취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거듭난 신자는 성령의 특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는 그 특성이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묘사된 소위 “성령의 열매”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 신자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에 의해 맺혀지는 진정한 기독교 영성입니다. 이러한 성품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거듭난 신자는 건전한 말과 일관된 영적인 행보를 보이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의사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삶에서 성령의 사역에 복종함으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상적인 관계에서 ‘알며 성장하기’ 위해 내리는 선택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신자로서 우리가 자백을 통해(요일 1:9) 성령님과의 분명한 소통을 유지하기로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성령을 근심하게 할 때(엡 4:30; 요일 1:5-8)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을 쌓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에 복종할 때,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가로막히지 않습니다(살전 5:19).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육체와 죄에 의해 가로막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영과의 교제에 대한 의식입니다. 거듭난 신자가 성령의 사역에 지속적으로 계속 순종하기를 선택할 때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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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징계는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 종종 무시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상황들이 죄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은혜로운 징계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무지는 신자의 삶에서 습관적인 죄를 형성하는데 기여할 수 있고 또한 더 큰 징계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징계는 냉담한 처벌과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징계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과 우리 각 사람이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는 주님의 반응입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1-12; 참조, 히 12:5-11). 하나님은 우리를 회개하게 하여 자신에게로 이끄시기 위해 시험과 시련과 여러 가지 곤경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징계의 결과는 특별한 죄가 우리를 붙들고 있었던 진을 파괴시키는 것은 물론, 더 강한 믿음과 하나님과의 새롭게 된 관계입니다(약 1:2-4).

주님의 징계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있으며 주께서 친히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 받고자 하심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거룩한 삶,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본성을 반영하는 삶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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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이지만 종종 기쁨을 붙드는 것이 어려워 보입니다. 기쁨을 경험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며,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심지어 가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조차 기쁨이 없는 기간을 경험한다는 것을 압니다. 예를 들어, 욥은 그가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랐습니다(욥기 3:11). 다윗은 현실을 대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옮겨지기를 기도했습니다(시편 55:6-8).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 450 명을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하여 패배시킨 후에도(왕상 18:16-46) 사막으로 피신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시기를 청하였습니다(왕상 19:3-5).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우선, 기쁨은 행복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행복은 상황에 따른 것으로서 덧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은 마음 자세입니다. 헬라어에서 기쁨의 어원은 "은혜"를 뜻하는 헬라어 카리스(charis)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기쁨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또한 하나님의 선물들에 대한 반응입니다.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은총을 의식할 때 옵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기쁨을 경험하는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이나 만족을 강탈하는 것들에 마음을 쏟지 말고 하나님께 마음을 둘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못마땅함을 부정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꽉 막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시편 기자들처럼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부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모든 것을 노골적으로 하나님께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것들을 주께 맡기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시편 3편, 13편, 18편, 43편, 103편은 좋은 예입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감옥에서 쓴 서신인데 기쁨에 대해 많은 말을 합니다. 빌립보서 4장 4-8절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쁨을 경험하기 위한 몇 가지 지침을 제공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여기서 우리는 그분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의 염려에 대해 기도하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선하심에 집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뜻을 가지고 찬양할 때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때 기쁨이 온다고 기록하였습니다(시 19:8).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과 못마땅한 일들보다 경건한 것에 집중함으로 기쁨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기쁨에 관한 몇 가지 교훈을 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9-11). 기쁨을 누리는 비결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쁨을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공동체를 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안식을 주시고 엘리사를 보내어 그를 돕게 하셨습니다(왕상 19:19-21). 우리 역시 상처와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합니다(전 4:9-12). 히브리서 10장 19-25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담대함으로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히 10:19). 우리는 우리의 죄가 씻겨진 것을 압니다(히 12:22).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인 신자들의 권속에 속하여졌습니다. 우리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며 믿음을 확고하게 붙듭니다. 또한 서로 격려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속하여있지 않습니다(요 17:14-16; 빌 3:20).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고대하며, 마침내 원래의 설계대로 회복될 것을 바랍니다. 삶은 고독하고 힘들 수 있습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리를 상기시켜주고 우리와 함께 짐을 짊어지며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더하여 줄 것입니다(갈 6:10; 골 3:12-14).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이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진리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기도로 그분과 교제하고, 주께서 마련하여 주신 신자들의 공동체를 의지할 때 이 선물을 가장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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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으며, 죄의 결과 중 하나는 죄책감입니다. 우리는 죄책감이 우리로 하여금 용서를 구하게 하기 때문에 죄책감에 대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죄에서 돌이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죄를 용서 받습니다. 회개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믿음의 한 부분입니다(마 3:2, 4:17; 행 3:19).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장 끔찍한 죄조차 지워집니다(용서받을 수 있는 불의한 행위 목록을 위해 고린도전서 6:9-11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고, 은혜는 용서합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은 후에도 그는 여전히 죄를 지을 것이며, 그러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용서를 약속하십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러나 죄로부터의 자유는 언제나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을 때조차도 우리는 여전히 그 죄악들을 기억합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실패와 잘못과 죄악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형제를 참소하는 자"(계 12:10)라는 영적인 원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죄책감을 느끼면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일을 해야 합니다.

1) 이전에 자백하지 않은 모든 아는 죄를 자백하십시오. 어떤 경우에는 자백이 필요하기 때문에 죄책감이 타당합니다. 우리는 죄가 있기 때문에 여러 번 죄책감을 느낍니다!(시 32:3-5, 다윗의 죄책감과 해결의 방법을 참조)

2) 자백해야 할 다른 죄를 알려달라고 주께 기도 드리십시오. 용기를 가지고 철저하게 주 앞에서 허심탄회하게 자백하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3)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하여 죄를 사하여 주시고 또한 죄책을 없애 주기로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십시오(요일 1:9; 시 85:2, 86:5; 롬 8:1).

4) 이미 자백하고 해결된 죄악에 대해 죄책감이 생기는 경우 그러한 감정을 거짓된 죄책감으로 여기고 거부하십시오. 주님은 용서하기로 하신 약속에 충실하셨습니다. 시편 103장 8-12절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5) 주님께 당신의 고소자인 사탄을 책망하도록 기도하고 죄책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때 누리는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십시오(시 51:12).

시편 32편은 매우 유익한 연구입니다. 다윗은 끔찍한 죄를 저질렀지만 죄와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죄책의 원인과 용서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시편 51편은 연구해 볼 또 하나의 좋은 구절입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다윗이 죄책감과 슬픔으로 가득 찬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처럼 죄를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로 회복과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면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때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간 우리는 그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사라진 "옛 것"의 한 부분은 과거의 죄와 그것이 만들어 낸 죄책에 대한 기억입니다. 슬프게도,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오래 전에 죽어 묻혀져야 했던 이전의 죄 많은 삶에 대한 기억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의미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상반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하수구에서 건져내신 후, 그 곳에 다시 들어가 헤엄치지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라는 누군가의 지혜로운 말을 빌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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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전신 갑주"라는 표현은 에베소서 6장 13-17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에베소서 6장 12절은 분명히 사탄과의 싸움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와 그 부하들에 대항하여 싸울 어떤 효과적인 유형의 무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탄이 사용할 특정 전술 목록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6장의 구절들은 우리가 그곳의 모든 지시 사항을 충실히 따르면 굳게 설 수 있을 것이며, 사탄의 전략과 상관없이 승리를 얻게 될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갑옷의 첫 번째 요소는 진리입니다(14절). 사탄은 "거짓의 아비"(요 8:44)라고 불리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쉽습니다. 기만은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는 목록 가운데 있습니다. "거짓된 혀"(잠 6:16-17)는 주께서 미워하시는 것들 중에 하나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거룩함과 구원뿐만 아니라 우리가 전도하는 대상들의 유익을 위해 진리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또한 14절을 보면, 의의 호심경을 입으라고 합니다. 호심경은 막지 못하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수 있는 병사의 중요한 기관을 보호해줍니다. 이 의는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가 아닙니다. 이 의는 하나님에 의해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로서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사탄의 고소와 협의로부터 우리 마음을 보호해 주고 그의 공격으로부터 우리의 가장 깊은 곳을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15절은 영적 전투를 위한 신발 준비에 대해 말합니다. 전쟁에서 때때로 적군은 병사들이 전진하는 길에 위험한 장애물을 놓습니다. 평화의 복음의 신발을 준비하라는 것은 그 길에 함정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가운데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은혜의 메시지를 가지고 사탄의 영역으로 전진하여 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탄은 복음 전파를 막기 위해 복음의 길에 많은 장애물을 둡니다.

16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방패는 사탄이 하나님의 충실함과 그분의 말씀에 대해 뿌리는 의심을 헛되게 만듭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히 12:2)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마치 소중하고 견고한, 튼튼한 황금 방패와 같습니다.

17절에 나오는 구원의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고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지켜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 방식이 보호를 필요로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머리는 지각이 머무는 자리로서 영생의 분명한 소망의 복음을 붙잡을 때 거짓 교리 및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것입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의 투구가 없고 또한 그의 지각은 영적인 진리와 속임수 사이에서 분별할 수 없기 때문에 거짓 교리의 타격을 막아낼 가능성이 없습니다.

17절은 성령의 검의 의미에 대해 직접 해석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적인 갑옷의 다른 모든 부분들은 방어의 특징을 갖고 있지만,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 중에서 유일한 공격 무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함과 능력에 대해 말합니다. 이 보다 더 큰 영적 무기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막에서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사탄에게 압도적인 답변이 되었습니다. 똑같은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니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18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는 것 외에도 성령으로(즉,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지고 그분의 마음과 우선 순위에 따라)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힘을 얻는 수단이기 때문에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 없이는,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함 없이는 영적 전쟁에서 우리의 노력은 헛되고 무익합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인 진리, 의, 복음, 믿음, 구원,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도구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고 사탄의 공격과 유혹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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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1-2절에서 이와 비슷한 질문에 답하였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후 계속 과거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다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 5:17).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육체의 열매를 맺지 않고(갈 5:19-21)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갈 5:22-23)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변화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 역시 변화됩니다.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와 다른 점은 기독교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신성한 공로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세상 종교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얻기 위해(인간적인 성취)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얻기 위해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다른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로 인해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또한 어떤 일을 그만 두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죄의 형벌과 영원한 지옥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이전처럼 지옥으로 향하는 똑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더러운 죄에서 깨끗해진 사람이 어떻게 과거의 동일한 부패함으로 돌아가기를 원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그분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계속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셨는지를 깨달은 사람이 어떻게 그 고난이 의미 없는 것처럼 계속 죄를 지을 수 있습니까?

로마서 6장 11-15절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진실로 회심한 자에게는 죄악으로 가득한 삶을 계속 사는 것이 선택 사항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회심은 완전히 새로운 본성을 가져오기 때문에 더 이상 죄 가운데 사는 것을 바라지 않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지만, 과거처럼 죄 가운데 뒹구는 대신에 이제는 그것을 미워하고 죄로부터 구출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이용하여 계속 죄에 물든 삶을 지속하겠다는 생각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으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죄악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그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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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엡 1:6-8)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 사함은 구원과 관련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취하셔서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시 103:13) 멀리 옮기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법적인 용서로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함으로 주시는 용서입니다. 우리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법적 근거에 의해 용서함을 받은 것이며 이는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영원한 심판을 받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 사는 동안 죄의 결과로 인한 고통을 받기 때문에 이 사실을 의심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이 에베소서 1장 6-8절과 다른 것은 요한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은 ‘관계적인’ 또는 ‘가족적인’ 용서를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아버지에게 잘못을 하면, 즉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규칙을 어기면, 아들과 아버지의 교제가 방해를 받습니다. 그 아들은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관계는 불편하게 됩니다. 그들의 관계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잘못을 인정할 때까지 방해를 받을 것입니다. 주의 자녀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기 전까지는 방해가 됩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됩니다. 이것이 관계적인 용서입니다.

"신분 변화적인" 용서 또는 법적인 용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 신분이 변화되면서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와 저지르게 될 모든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십자가 상에서 지불된 대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켰으며, 더 이상의 희생이나 지불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말씀 그대로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 변화적인 용서는 그때 그곳에서 얻어졌습니다.

죄의 자백은 우리를 주의 징계로부터 보호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죄의 자백이 있을 때까지 주의 징계가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의 죄는 구원 받을 때 사함 받지만(신분 변화적인 죄 사함), 하나님과의 일상적인 교제는 좋은 관계로 유지될 필요가 있습니다(관계적인 용서). 하나님과의 적절한 교제는 우리 삶에서 죄가 자백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하기 위해 죄를 지었을 때 이를 자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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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위선자’로 불려지는 것 보다 더 도발적인 비난은 없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위선자라고 여기며 그러한 견해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선자(hypocrite)"라는 영어 단어는 많은 유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용어는 "연극, 가장"을 의미하는 라틴어 히포크리시스(hypocrisies)를 통해 유래되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단어는 고전 헬라어와 신약 헬라어에서 유래하며 그 원어 역시 “연극하다, 가장하다”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이 주 예수께서 그 용어를 사용하신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 기도와 금식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선의 중요함을 가르치셨을 때 위선자들의 본을 따르지 않도록 권하셨습니다(마 6:2, 5, 16). 위선자들은 공 기도를 오래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금식하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고, 성전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는 모습을 과시하며 외적인 모양새를 드러냈습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대중 앞에서 종교적인 덕행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은 훌륭하게 수행했지만, 진정한 덕이 자리잡고 있는 마음의 내면 세계에 있어서는 비참하게 실패했습니다(마 23:13-33; 막 7:20-23).

예수님은 결코 그분의 제자들을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위선자라는 이름은 그릇된 종교적 열심을 지닌 자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도리어 주님은 제자들을 “추종자들”, “아이들”, “양들”, 그리고 그분의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신약에서는 위선의 죄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벧전 2:1), 베드로는 위선을 외식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위선에 대한 두 가지 노골적인 사례가 교회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사도행전 5장 1-10절을 보면 두 제자는 자신들의 원래의 모습을 감추고 더 관대한 것처럼 보이도록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는 가혹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베드로가 이방인 신자들을 대할 때 위선을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까지 위선을 빠지도록 하였습니다(갈 2:13).

우리는 신약의 가르침으로부터 적어도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첫째, 위선자들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 따르면 위선자들은 처음에도 있었으며, 세상 끝날 때까지 존재할 것이 분명합니다(마 13:18-30). 더욱이 사도마저 위선의 죄를 지을 수 있다면,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위선의 죄를 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우리는 위선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고전 10:12).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이 전부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명한 위선자들의 전부 또는 대부분이 사실 가짜 그리스도인들이거나 사기꾼들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끔찍한 죄를 짓곤 하였습니다. 횡령 또는 성추문은 때때로 기독교 공동체를 더럽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수의 행동을 취하여 기독교 전체를 모욕하는 대신에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수많은 성경 구절들은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속한 사람들이 성령의 열매를 나타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갈 5:22-23). 마태복음 13 장의 씨앗과 토양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전부 다 진짜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슬프게도, 예수님께 속한다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어느 날 그분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고 말하는 것을 듣고 망연자실할 것입니다(마 7:23).

둘째,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원래의 모습보다 더 거룩하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거의 위선자들로 구성되었다고 결론 지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 죄 사함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죄인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죄의 영원한 형량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아직 우리의 삶 속에서 위선의 죄를 포함한 죄의 실재로부터 구원 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향해 살아있는 믿음을 행사함으로써 결국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때까지 계속적으로 죄의 세력을 이겨야 합니다(요일 5:4-5).

성경이 가르치는 표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 어떤 그리스도인도 완벽하게 그리스도처럼 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고 추구하면서 책망하시고 변화시키시고 능력을 주시는 성령님을 더욱 의지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이생에서 그리스도인이 완벽하지 못하고 또한 실수를 하며 완벽에 이르는데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위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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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9장 14절은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묵상을 해야 합니까? 불행히도, "명상"이라는 단어는 신비주의적인 어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명상이란 특이한 자세로 앉은 상태에서 마음을 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리 주변의 영계와 소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절대로 기독교 묵상의 특징이 아닙니다.

기독교 묵상은 동양 신비주의를 기초로 삼은 관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한 관행으로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초월명상, 그리고 관상기도라고 불리는 것의 많은 형태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그 중심에 주의 말씀을 통해서가 아니라 명상을 통해서 개인적인 계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있다는 위험한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데 종종 서로가 상충이 되면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끝없는 분열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딤후 3:16-17). 만일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선한 일을 하도록 철저히 준비시키는데 충분하다면 어떻게 그 말씀에 더하거나 그 말씀 대신 신비로운 체험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의 묵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서는 것이며 말씀이 그분에 대해 계시하는 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발견한 후 복 있는 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라고 묘사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모든 진리 가운데로”(요 16:13) 우리를 이끄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의 조명하심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적극적인 생각의 과정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성경을 삶과 실천의 규칙으로 삼기로 다짐하고 그 진리를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성령을 따라 배우게 될 때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영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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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그리스도인이 육신에 속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먼저 "육신"이라는 용어를 정의해 봅시다. "육신"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육체"를 뜻하는 헬라어 사르키코스(sarkikos)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고린도전서 3장 1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납니다.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독자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단어는 뚜렷하게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그들을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에 속할 수 있다고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요일 1:8).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육신에 속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인은 잠시 육신에 속할 수는 있지만, 평생 육신에 속한 상태에 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거듭남의 증거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증거가 없이(고후 5:17) 남은 삶을 철저하게 육신에 속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함으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상을 남용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개념은 완전히 비 성경적입니다. 야고보서 2장은 진정한 믿음은 언제나 선행을 가져올 것을 매우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은 우리가 오직 은혜에 의해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 구원은 행함을 맺는다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실패 및 반항의 때에 육신에 속한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계속 육신에 속한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은 성경이 가르치는 사실이기 때문에,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조차 여전히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잃을 수 없으며 하나님은 구원을 다시 취하지 않으십니다(요 10:28; 롬 8:37-39; 요일 5:13). 고린도전서 3장 15절에서도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확신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5).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육신에 속한 삶을 살면 구원을 잃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처음부터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요일 2:19).

행동에 있어서 육신에 속한 모습을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사랑스럽게 그들을 징계하셔서(히 12:5-11) 하나님과의 교제로 회복시키실 것이며 또한 순종을 훈련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가지시는 소원은 우리가 성화라고 알려진 과정을 통해 점점 더 영적으로는 성장하고 육신적으로는 감소하면서 점차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에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롬 12:1-2). 우리가 죄 많은 육체로부터 구출되기까지는 육신의 세력이 발발하는 일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진정한 신자는 그러한 발발이 일반적이거나 규칙적인 것이 아니라 예외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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