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 어떻게 성경이 진실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신뢰할 수 있는가?

성경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 어떻게 성경이 진실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신뢰할 수 있는가?

incharity 0 970 0 0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성경을 보는 우리의 관점과 삶에 대한 성경의 중요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알아가며, 순종하고,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성경을 묵살하는 것은 하나님 자체를 묵살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경을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증거이자 예증입니다. “계시”라는 용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은 어떠한 분이시고 어떻게 우리가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를 인간에게 알려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이를 거룩하게 드러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 안에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약 1,500년 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주어졌을지라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기 위하여 인간이 알아야 하는 모든 것들은 항상 담겨 있었습니다.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믿음, 종교적 활동, 그리고 도덕에 관한 모든 문제들의 최종적 권위가 됩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성경이 그저 하나의 좋은 책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입니다. 지금까지 기록된 다른 종교 서적들과 구별되는 성경의 독특한 특성은 무엇일까요?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어떠한 증거가 있습니까?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으며, 믿음과 실천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 완전하고 충분하다는 성경 속 주장의 타당성을 우리가 밝히려면, 이런 유형의 질문들이 심각하게 검토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성경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권면에서 분명히 보입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서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디모데후서 3:15-17).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외적인 증거들은 모두 있습니다. 내부적 증거들은 성경 안에서 성경의 신성한 기원을 증거하는 것들입니다. 성경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첫 번째 내부적 증거는 그것의 통일성에서 보여집니다. 성경은 실제로 각각의 책으로 구성된 66권의 책들의 모음이고, 세 개의 대륙에서, 세 개의 언어들로, 약 1500년에 걸쳐, 서로 다른 다양한 삶의 계층을 살아온 40명 이상의 저자들에 의해 쓰여졌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된 책으로 남았습니다. 이런 통일성이 다른 모든 책과 구별되는 고유한 점이며,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감동시켜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음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내는 내부적 증거의 또 다른 하나는 성경에 담긴 예언들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각 나라, 특정 도시들, 그리고 인류의 미래와 관련된 수 백 개의 상세한 예언들을 담고 있습니다. 다른 예언들은 모든 믿는 사람들의 구세주, 메시아가 되실 분의 도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른 종교 서적이나 노스트라다무스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들에서 발견되는 예언들과는 달리, 성경의 예언들은 매우 상세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300개가 넘는 예언들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태어날 장소 및 혈통뿐만 아니라, 어떻게 죽으실 것인지 그리고 부활할 것이라는 것 또한 예언되었습니다. 그저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기인했다는 신성한 기원 외에는, 성취된 성경의 예언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다른 어떤 종교적 문헌도 성경과 같은 형태나 비슷한 수준의 예언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신성한 기원의 세 번째 내부적 증거는 성경만의 독특한 권위와 능력입니다. 이 증거는 앞의 두 가지 내부적 증거보다 더 주관적이지만,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기인했다는 강력한 증거로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성경의 권위는 이제까지 쓰여진 다른 서적과 다릅니다. 하나님 말씀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변화된 셀 수 없는 삶들이 이 권위와 능력을 제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의해 약물중독자들이 치유되고, 동성연애자들이 온전케 되고, 부랑자들과 사회의 낙오자들이 변화되고, 상습적 범죄자들이 개선되고, 죄인들이 책망받고, 미움이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성경은 오직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가능한, 역동적이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가리키는 외부적 증거들 또한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입니다. 성경이 역사적 사건들을 상세히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진실성과 정확성은 다른 역사적 문헌처럼 검증될 수 있습니다. 고고학적 증거들 및 많은 글을 통해, 성경의 역사적 기술들은 정확한 사실임이 몇 번이고 계속해서 입증되어 왔습니다. 사실, 성경을 뒷받침 하는 모든 고고학적 증거와 고고학적 사본의 증거는 성경을 고대 시기로부터 가장 잘 문서화된 문헌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역사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건들을 정확하고 진실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종교적인 주제들이나 교리들을 다룰 때 성경의 진실성을 크게 보여줄 뿐 아니라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을 입증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또 다른 외부적 증거는 인간인 저자들의 진실함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들을 기록하기 위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의 삶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들이 정직하고 진실된 사람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믿는 것을 위해 때때로 몹시 고통스러운 죽음을 기꺼이 택했다는 사실은 이런 평범하지만 정직한 사람들이 진실로 그들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신약 성경을 썼던 사람들과 수백 명의 다른 믿는 자들은(고린도전서 15:6) 그들의 메시지가 진실하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후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었고 함께 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것은 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두려움에 숨던 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시하신 메시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은 성경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성경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마지막 외부적 증거는 성경의 불멸성입니다. 성경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자체적 주장 때문에, 성경은 역사적으로 그 어떤 다른 책보다 더 악독한 공격들과 그것을 파괴하려는 시도들로부터 시달려 왔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같은 초기 로마 황제들로부터, 공산주의자 독재자들에 걸쳐 현대의 무신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모든 공격을 견뎌내고 그 위치를 유지하여 왔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책이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회의론자들은 성경을 신화로 간주해 왔지만, 고고학은 성경을 역사적인 것으로 확인해 주어 왔습니다. 반대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원시적이고 낡은 것이라고 비난해 왔지만, 성경의 도덕적 그리고 법적 개념들과 가르침들은 전 세계를 통해 사회와 문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성경은 사이비 과학, 심리학, 정치적 운동들에 의해 계속해서 공격 당하지만, 처음 기록되었을 때와 같이 참되고 적절한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성경은 지난 이 천 년에 걸쳐 수 많은 삶과 문화들을 변화시켜 온 책입니다. 반대자들이 성경을 아무리 공격하고, 파괴하고, 평판을 손상시킬지라도, 성경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삶에 대한 성경의 진실성과 영향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부패시키고, 공격하고, 파괴시키려는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보존되어 온 성경의 정확성은 성경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분에 의해서 초자연적으로 보호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증거입니다. 성경이 어떻게 공격을 받든, 항상 변함없고 아무 탈 없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가복음 13:31). 이런 증거를 살피고 나면, 우리는 의심 할 여지없이, ‘그렇습니다, 성경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0 Comments

처음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성경이 책의 시작과 끝까지 수월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는 평범한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사실 여러 저자가 1500 년 이상 걸쳐 여러 언어로 된 서적들의 모음집입니다. 마틴 루터는 모든 성경의 역사와 예언이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성경은 "그리스도의 요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처음 읽는 것은 복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마가복음은 신속하고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성경 읽기를 시작하는데 좋은 책입니다. 그 다음 책으로는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주장하신 것에 초점을 맞춘 요한복음을 읽으면 좋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 말하는 반면,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에는 가장 간단하고 분명한 구절들이 있고 또한 가장 깊고 심오한 구절들도 있습니다. 복음서를(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읽으면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익숙해질 것입니다.

그 후, 몇몇 서신서(로마서, 에베소서, 빌립보서)를 읽으십시오. 그 책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구약을 읽기 시작할 때는 창세기부터 읽으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어떻게 인류가 죄에 빠졌는지, 그리고 타락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려줍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율법을 알려주기 때문에 읽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 책들을 피해서는 안되지만 아마도 나중에 공부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 책들 때문에 교착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알려면 여호수아부터 역대기까지 읽으십시오. 시편부터 솔로몬의 노래까지 읽으면 히브리 시와 지혜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예언서들, 즉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는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약 1:5).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이시며, 당신이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성공적으로 성경을 배우는 학생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 공부에 필요한 ‘자격들’을 갖춘 자들만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성경을 배우는데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 ‘자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까?(고전 2:14-16)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함을 느낍니까?(벧전 2:2)
당신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있습니까?(행 17:11)

만일 당신이 이 세 가지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면, 당신이 어디서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하든,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공부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알기 위한 당신의 노력에 복을 베푸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즉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았고 당신 안에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성경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숨겨져 있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고전 2:13-14; 요 6:63).

-Got Questions Ministries

  구약을 연구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이 신약에서 발견되는 교훈들과 사건들의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점진적인 계시입니다. 좋은 책의 앞의 반 정도를 건너 뛰고 마치려고 하면, 당신은 인물들과 줄거리와 결말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약 성경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구약의 사건들과 인물들과 율법과 희생 제도와 언약 및 약속들의 토대를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신약만 갖고 있다면, 우리는 복음서를 대할 때 왜 유대인들이 메시아(구주이신 왕)를 기다렸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메시야가 와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참조, 사 53 장), 그분에 관해 주어진 많은 상세한 예언을 가지고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식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의 탄생지(미 5:2), 죽음의 방식(시 22:1, 7-8, 14-18; 시 69:21), 부활(시 16:10)과 사역에 대한 더 많은 세부 내용들입니다(사 9:2; 사 52:3).

구약에 대한 공부는 신약 성경에 언급된 유대인의 관습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더함으로써 어떻게 하나님의 율법을 왜곡시켰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왜 예수께서 성전 안뜰을 정결하게 하실 때 그렇게 분노하셨는지, 또는 예수께서 원수들에게 수많은 답변을 하실 때 사용하셨던 말씀들을 어디에서 가져오셨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구약은 성경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어야만 성취될 수 있는 수많은 상세한 예언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예, 다니엘서 7 장과 그 다음 장들). 다니엘의 예언은 국가의 흥망에 대하여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합니다. 이 예언들은 매우 정확합니다. 사실, 회의론자들은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그 예언들이 쓰여진 것이라고 믿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구약이 우리를 위한 수많은 교훈을 담고 있기 때문에 구약을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의 인물들의 삶을 관찰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한 지침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권면을 받습니다(단 3 장). 우리는 우리의 확신(단 1장)을 굳게 해야 하는 것과, 또한 충성의 보상을 기다리는 것을 배웁니다(단 6장). 우리는 변명보다는 가능한 빨리 죄를 고백하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것을 배웁니다(삼상 15장). 우리는 죄가 우리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죄를 가지고 장난해서는 안 되는 것을 배웁니다(삿 13-16장). 우리는 죄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하는 자들에게도(창 3 장) 악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배웁니다. 또한 그 반대로 우리의 선한 행동은 우리와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보상을 준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출 20:5-6).

구약에 대한 연구는 우리로 하여금 예언을 이해하는데에도 도움을 줍니다. 구약은 유대 민족을 위해 하나님이 성취할 많은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구약은 대환난의 기간을 계시하여주며, 어떻게 그리스도의 장래의 일천 년의 통치가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성취하는지, 그리고 성경의 결론이 시간이 시작될 때 풀린 느슨해진 목표들을 어떻게 묶는지 등을 알려줍니다.

요약하면, 구약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 더욱 많이 알려줍니다. 구약의 예언들이 반복적으로 성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성경이 왜 경건한 책들 중에서 유일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성경 그 자체가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입증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만일 당신이 아직 구약 성경의 각 페이지를 과감하게 걸어 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준비한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서의 "잃어버린 책"이나 성경에서 빼내거나 빠진 서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영감을 넣으신 모든 책은 성경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책들에 대한 많은 전설들과 소문이 있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진실이 아닙니다. 실제로 수백 권의 종교 서적들이 성경의 책들이 기록되던 같은 기간에 쓰여졌습니다. 그 서적들의 일부는 실제로 발생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예, 마카베오상). 이 서적들의 일부는 훌륭한 영적인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예를 들어, 솔로몬의 지혜). 그러나 이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 서적들 중 하나를 읽는다면, 예를 들어 외경을 읽는다면, 우리는 그 책들을 오류가 담긴 역사 책으로 대해야 하지, 무오한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여서는 안 됩니다(딤후 3:16-17).

예를 들어, 도마의 복음은 사도 도마에 의해 쓰인 것으로 주장되고 있으나 그 책은 3 - 4 세기에 꾸며진 거짓 복음입니다. 그것은 도마에 의해 쓰인 것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거의 보편적으로 도마의 복음을 이단으로 거부했습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으로 주장되는 거짓들과 이단적인 말들이 많이 담겨있습니다. 그 책의 그 어떤 것도 (또는 거의 대부분이) 사실이 아닙니다. 바나바의 서신은 성경의 진짜 바나바가 쓴 것이 아니라 사기꾼이 쓴 것입니다. 빌립의 복음, 베드로의 묵시록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한 분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성경은 한 분의 창조주를 계시합니다. 성경은 한 권의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의 은혜의 계획을 가지고 그 은혜의 시작부터 실행과 완성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정에서 영화까지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친히 택하신 사람들을 구속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적인 목적과 계획이 성경에서 펼쳐지듯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강조되는 주제는 하나님의 성품, 죄와 불순종에 대한 심판, 믿음과 순종을 향한 축복, 구주이신 주님과 죄를 위한 희생, 다가오는 왕국과 영광입니다. 우리의 삶과 영원한 운명이 그러한 주제에 달려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다섯 가지 주제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중대한 정보를 어떤 식으로든 ‘잃어 버리게’ 하시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읽고 이해하는 사람이 “온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기 위해”(딤후 3:16-17) 완전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하나님이 하나가 아닌 네 권의 복음서를 주신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1) 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완전한 그림을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지만(딤후 3:16),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배경과 성격이 다른 인간 저자들의 글을 사용하셨습니다. 각 복음서의 저자들은 각각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을 다른 측면으로 강조했습니다.

마태는 히브리 청중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 그의 목적 중 하나는 예수님의 족보와 구약의 예언에 대한 성취를 보여 주면서 그들이 오랫동안 기대했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믿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의 강조점은 예수님이 약속된 왕, 곧 이스라엘의 왕좌에 영원히 앉으실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입니다(마 9:27; 마 21:9).

바나바의 사촌인 마가(골 4:10)는 사도 베드로의 친구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애에 일어난 사건들을 목격한 자였습니다. 마가는 이방인 청중을 위해 복음서를 썼고 이에 유대인 독자들에게 중요한 것들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계보, 유대인 지도자와의 그리스도의 논쟁, 구약에 대한 잦은 언급 등이 빠져 있습니다). 마가는 그리스도를 고난 받는 종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많은 사람을 섬기려 하고 그분의 삶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신 분(막 10:45)임을 강조합니다.

전도자이자 사도 바울의 동반자였던 “사랑 받는 의사” 누가는(골 4:1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신약 성경의 저자들 가운데 유일한 이방인 저자입니다. 누가가 쓴 계보 및 역사적인 연구들을 사용해 온 사람들은 그를 부지런한 역사가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는 역사가로서 목격자들의 증언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생애를 차례대로 정돈하여 기록하는 것이 그의 의도라고 말합니다(눅 1:1-4). 그는 높은 지위를 지닌 이방인 데오빌로의 유익을 위해 그의 글을 썼기 때문에 그의 복음은 이방인 청중을 염두에 두고 작성되었으며, 그의 의도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검증 가능한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있었습니다. 누가는 종종 그리스도를 “인자”라고 부르며 그분의 인성을 강조하고 있고, 또한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많은 세부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쓴 요한 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와 구별되며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공관복음”으로 불리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같이 다루고 있고 또한 유사한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이나 지상에서의 사역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람이 되시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활동과 특성으로 시작됩니다(요 1:14). 요한복음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세상의 구주"(요 4:42), "하나님의 아들”(반복적으로 사용됨), "주님이시요 하나님"(요 20:28)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내가 그니라”(I am)라는 진술을 통해 자신의 신성을 확증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요한복음 8장 58절에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는 예수님의 진술입니다(비교, 출 3:13-14). 그러나 요한은 또한 그리스도의 인성을 믿지 않던 그 시대의 종교 분파였던 영지주의의 오류를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사실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은 그 글의 전반적인 목적을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네 가지의 구별되지만 동등한 정확한 설명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의 다양한 측면들이 드러납니다. 각 기록은 사람의 묘사를 초월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좀 더 완전한 그림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함께 짜인 태피스트리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요 20:30), 우리는 네 복음서를 통해 그분이 누구시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이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알게 됨으로 그분을 믿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2) 우리가 그들의 기록의 진실성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도록 하려 함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한 명의 목격자의 증언에 근거하지 않고 최소한 2-3명의 증언을 근거로 하여 법정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언급합니다(신 19:15).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그분에 관한 정보가 정확하다는 것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법정에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증거를 구성하는 것에 대해 유명한 인정받는 권위자, 사이몬 그린리프(Simon Greenleaf)는 법적인 관점에서 네 복음서를 점검했습니다. 그는 네 복음서의 증인의 기록 유형을 보며 일치하는 구절들도 보고 또한 세부 내용에 있어서 각 저자가 다른 저자들과는 달리 어떤 세부 내용을 생략하거나 추가하는 것을 보고는 이러한 증거는 법정에서 강한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을만하고 독립적인 전형적인 자료라고 지적했습니다. 만일 모든 복음서가 똑같은 세부 내용으로 정확하게 동일한 정보를 똑같은 관점에서 담고 있었다면, 이는 결탁을 의미하였을 것입니다. 즉, 저자들이 그들의 글을 믿을 만하게 조작하기 위해 사전에 함께 모여 "이야기를 바로 잡는" 시간을 가졌을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서들 간의 차이, 심지어 당장 보아도 모순처럼 보이는 세부 내용들은 각 기록의 독립적인 속성을 말합니다. 따라서 정보에 있어서는 일치하지만 관점과 세부 내용의 기록 양과 기록된 사건에 있어서 다르다는 것은 복음서에서 제시하는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대한 기록들은 사실이며 신뢰할 만한 것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3)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보상하기 위해서입니다. 각 복음서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를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의 특정한 사건들에 대해 여러 기록들을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4장에는 5천 명을 먹인 사건과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은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이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마태의 기록에는 그 이유가 명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6장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보내시면서 주신 권세를 가지고 마귀를 내쫓고 병을 치료한 후에 돌아오게 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위치를 망각하고 교만하여져서 예수님을 가르치려고 합니다(마 14:15). 이에 예수님은 그 날 저녁에 그들을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시면서 두 가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들은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까지 자기들의 힘으로 바람과 파도와 싸우면서(막 6:48-50) 1) 자신들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위해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과 2) 주를 부르며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여 살 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들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성경을 비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 성경의 귀한 보물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경은 통일된 책이지만 구약과 신약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 면에서 신,구약은 서로 보완이 됩니다. 구약은 기초가 됩니다. 신약 성서는 그 기초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추가 계시를 세웁니다. 구약은 신약의 진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원칙들을 세웁니다. 구약에는 신약에서 성취된 많은 예언들이 들어 있습니다. 구약은 한 백성의 역사를 제공합니다. 신약의 초점은 ‘한 분’에게 있습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은혜를 살짝 보여주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줍니다. 신약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를 살짝 보여주면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구약은 메시아를 예언하고(사 53 장), 신약은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알려줍니다(요 4:25-26). 구약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신약은 메시아 예수께서 어떻게 그 율법을 성취하셨는지 보여줍니다(마 5:17; 히 10:9). 구약에서 하나님은 주로 택한 백성인 유대인들을 다룹니다.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주로 그분의 교회를 다룹니다(마 16:18). 옛 언약 아래에서(신 29:9) 약속된 이 땅의 축복은 새 언약 아래에서는 영적인 축복으로 바뀝니다(엡 1:3).

그리스도의 오심과 관련된 구약의 예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하지만 상당히 모호한 부분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그 모호한 부분들은 분명하여집니다. 예를 들어,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의 죽음(사 53 장)과 메시아의 왕국(사 26 장)의 설립에 대해 말하였지만 두 사건의 연대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단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즉, 메시아의 고통과 왕국의 설립 사이에는 수천년의 기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힌트를 주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은 메시야가 두 번 출현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처음에 오셔서는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고(그리고 부활하셨고), 두 번째로 오실 때는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점진적이기 때문에 신약은 구약에서 소개된 원칙들에 대해 더욱 예리하게 밝혀줍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어떻게 참 대제사장이신지, 그리고 어떻게 그분의 단번의 희생이 과거의 모든 희생 제사를 대신하는지 설명합니다. 구약의 유월절 양(스 6:20)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됩니다(요 1:29). 구약은 율법을 제시합니다. 신약은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의 필요성을 보여주려는 것이지 결코 율법이 구원의 수단으로 의도되었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롬 3:19).

구약은 아담 때문에 잃어버린 낙원을 보여줍니다. 신약은 두 번째 아담(그리스도)을 통해 어떻게 낙원이 회복되는지 보여줍니다. 구약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실을 선언하고(창 3장) 신약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롬 3-6장). 구약은 메시아의 삶을 예언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서신서는 그분의 생애를 해석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에 반응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요약하면, 구약은 세상 죄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실 메시아가 오실 수 있도록 토대를 놓습니다(요일 2: 2).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록한 다음 그분이 행하신 일을 되돌아 보며 어떻게 우리가 반응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이 두 언약은 죄를 정죄하면서도 속죄의 희생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거룩하고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계시합니다. 하나님은 신-구약 전체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어떻게 우리가 믿음을 통해 그분께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창 15:6; 엡 2:8).
 

-Got Questions Ministries

 "정경”(canon, 캐논)이라는 단어는 어떤 책이 기준에 부합되는지를 결정하는 법규에서 유래됩니다. 성경의 글들은 기록된 순간에 정경이 된다는 사실을 주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펜이 양피지에 글을 쓸 때 성경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기독교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또는 구원을 정의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의 기초는 성경의 권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식별해 낼 수 없다면, 신학적인 진리와 오류도 제대로 구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책이 성경으로 분류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데 사용되는 척도 또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성경으로 분류되는 과정과 목적, 그리고 아마도 성경을 주신 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핵심 구절은 유다서 1장 3절, 곧 그리스도의 믿음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것”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경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에 유다는 본질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유익을 위해 성경이 단번에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추가로 발견해야 할 숨겨진 사본이나 잃어버린 사본이 없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성경은 오직 특수층의 몇 사람에게만 알려진 비밀 책이 아닙니다. 또한 깨달음을 받기 위해서는 히말라야 산에 올라가야 한다는 특별 계시를 받은 사람들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증거를 남겨 두신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제작하시기 위해 사용하셨던 초자연적인 능력은 또한 성경을 보존하는데도 사용되어 왔습니다.

시편 119장 160절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진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전제에서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것 외의 저서들을 정경으로 비교하여 점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사 9:6-7; 마 1:22-23; 요 1:1, 2, 14; 요 20:28; 행 16:31, 34; 빌 2:5-6; 골 2:9; 딛 2:13; 히 1:8; 벧후 1:1). 그러나 소위 성서로 주장되고 있는 성경 외적 문서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명백한 모순이 존재할 때는 확정된 신뢰를 받는 성서는 정경으로 남고 다른 것들은 성경의 영역 밖에 남게 됩니다.

교회의 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성경 사본을 소지한 사실 때문에 죽음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박해로 인해 "어떤 책들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것들인가?"라는 질문이 생겨났습니다. 어떤 책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담고 있었지만 과연 디모데후서 3장 16 절에 언급 된 것처럼 영감을 받았을까요? 교회 공의회가 공개적으로 정경을 인정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종종 개별 교회 또는 교회들의 연합 단체가 영감을 받은 책을 인정하기도 하였습니다(골 4:16; 살전 5:27). 교회의 초기 몇 세기 동안, 논란의 여지가 없는 책은 거의 없었고, 근본적인 정경의 목록은 주후 303년 정도에 정착되었습니다.

구약 성서와 관련해서는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이 고려되었습니다. 1) 신약 성경은 두 책을 제외한 모든 구약 성경을 인용하거나 암시합니다. 2)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35절에서 그 시대의 성경의 처음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인용하시면서 히브리 정경을 실질적으로 인준하셨습니다. 3)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보존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어떤 부분이 성경에 속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거의 논란이 없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외경은 성경의 정의에 맞지 않았고 또한 기준 미달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결코 외경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책이 성경에 속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대부분의 질문은 그리스도의 시대부터 다루어졌습니다. 초대 교회는 어떤 책들이 신약 성경에 속하는지 판단하기 위해 매우 구체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기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한 사람이 이 책을 썼는가? 그 책이 "진리 시험"을 통과했는가?(즉, 이미 승인된 다른 성경과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그 때에 그들이 받아들인 신약에 속하는 책들은 시간의 시험을 견뎌왔고, 정통 기독교는 수세기 동안 거의 아무런 도전 없이 이 책들을 정경으로 유지하여 왔습니다.

특정 책들의 수용에 대한 확신은 그 책들의 신빙성을 직접 증언한 1 세기의 수령자에게 거슬러 올라갑니다. 더욱이 계시록의 마지막 때에 대한 주제 및 계시록 22장 18절에서 그 책의 말씀에 무엇을 더하는 것을 금한 사실은 계시록이 쓰일 당시에 정경이 마무리되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입니다(서기 95 년경).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신학적인 요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고 인류와 소통하기 위한 주된 목적을 위해 수천 년 동안 그분의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교회 공의회가 어떤 책이 성경인지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결정되는 때는 하나님이 인간 저자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무리하고 그 말씀을 수 세기 동안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은 초대 교회의 공의회를 인도하셔서 정경을 인정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본성, 우주와 생명의 기원, 삶의 목적과 의미, 구원의 경이로움, (인류의 운명을 포함한) 미래의 사건들과 관련한 지식 습득은 자연 관찰과 인류의 과학적인 능력을 초월합니다. 이미 수세기 동안 귀하게 평가 받고 각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으로 적용해 왔던 하나님의 정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며(요 5:18; 행 18:28; 갈 3:22; 딤후 3:15), 우리를 가르치고, 바르게 하고, 모든 의를 교훈하기에 충분합니다(딤후 3:16).

-Got Questions Ministries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을 더하기 위해 또 다른 계시를 주실 것이라고 믿을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은 인류의 시작(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인류의 종말(계시록)로 끝납니다.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은 신자인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진리로 능력을 얻을 수 있도록 유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디모데후서 3장 16-17절로부터 이 사실을 압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성경에 더 많은 책이 추가되어야 한다면, 이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미완성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지금 성경은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다 알려주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8-20절은 오직 계시록에만 직접 적용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추가하는 것에 대해서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우리는 현재 66 권의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있습니다. 인생 속의 그 어떤 상황이라도 성경에서 다루어질 수 없는 상황은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것은 계시록에서 결론을 찾습니다. 성경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더하실 수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또는 신학적으로 볼 때 그분이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믿을 이유가 없으며, 그분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믿을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우리는 잘못된 오류를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며 대수롭게 지나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포스트 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빌라도처럼 "무엇이 진리인가?”라고 묻는 대신에 "진리는 없다”라고 말하거나 또는 “진리가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거짓말에 익숙해져 있고,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도 오류가 있다는 거짓된 개념에도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진리는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의 무오설 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며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토대가 됩니다. 우리는 왜 우리가 성경의 무오를 절대적으로 믿어야 하는지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1. 성경은 성경 자체에 대해 완전하다고 주장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 12:6).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며”(시 19:7).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잠 30:5). 성경의 순전함과 완전함에 대한 주장은 절대적인 진술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대부분’ 순수하거나 또는 ‘거의’ 완벽하다고 말하지 않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성경은 완전한 완벽함을 주장하기 때문에 "부분적인 완전성"과 같은 그러한 이론들을 위해 그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습니다.

2. 성경은 전체적으로 함께 서거나 함께 무너집니다. 만일 주요 신문이 일상적으로 오류를 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 사람들은 신속하게 그 신문을 불신할 것입니다. 신문사가 "모든 오류는 3쪽에 국한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할지라도 그 신문은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신문이 어떤 부분에서든 신뢰를 얻으려면 신문 전체가 사실을 담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이 지질학을 말할 때 부정확하다면 어떻게 신학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신뢰할 수 있는 문서이거나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3. 성경은 저자를 반영합니다. 모든 책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영감이라는 방법으로 인간 저자들을 통해 성경을 기록하셨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참조, 벧전 1:21; 렘 1:2).

우리는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책을 기록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완전하신 하나님은 완전한 책을 쓰실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단지 "성경에 오류가 있습니까?"가 아니라 "하나님이 실수를 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됩니다. 성경에 사실적인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전지하지 않고 또한 잘못을 저지르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잘못된 정보가 들어있다면 하나님은 진실하지 않고 그 대신 거짓말쟁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모순이 있다면, 하나님은 혼동의 저자가 되십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무오성이 사실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4. 성경이 우리를 판단하는 것이지 우리가 성경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마음’과 ‘말씀’ 사이의 관계를 주목하십시오. 말씀은 판단하고, 마음은 판단을 받습니다. 어떠한 이유이든 말씀의 일부분을 무시하는 것은 이 관계를 역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관이 되고 말씀이 우리의 ‘뛰어난 통찰력’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롬 9:20)고 질문하십니다.

5. 성경의 메시지는 전체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 메시지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교리들의 혼합체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구절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구절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성경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고르거나 택한 후에 나머지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이 지옥에 대해 잘못된 언급을 하고 있다면 천국이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옳게 언급하고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이 창조에 관하여 올바른 설명을 할 수 없다면, 구원에 대한 설명 역시 신뢰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요나 이야기가 신화라면 예수님의 이야기도 마찬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진리를 말씀하셨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체적인 그림을 제시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시 119:90).

6. 성경은 믿음과 실천을 위한 우리의 유일한 규칙입니다. 만일 성경이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어디에 세워야 합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실 때 그 믿음은 그분이 하신 말씀을 신뢰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요한복음 6장 67-69절은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목격하셨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열 두 사도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남은 자들을 대신하여 말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 및 그분의 영생의 말씀을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여기서 제시한 것들 중에 그 어떤 것도 참된 학문을 거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성경의 무오설은 우리가 지성을 사용하는 것을 멈추거나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연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딤후 2:15), 말씀을 확인하고 상고하는 자들은 칭찬을 받았습니다(행 17:11). 또한 우리는 성경에는 어려운 구절이 있고 해석에 있어서도 진지한 의견 차이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경건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면, 우리는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많이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해답을 찾지 못하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경이 영감되어 있고 무오하다고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요 3:16; 엡 2:8-9; 롬 10:9-10). 그러하더라도 동시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게 되고 또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한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고후 5:21; 롬 5:8). 구원을 받기 위해 성경의 모든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해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분명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때로는 구원 받기 이전이 아니라 구원 받은 이후에 생겨납니다.

사람들이 처음에 구원을 받으면 일반적으로 성경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합니다. 구원은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우리의 죄악 된 상태에 대한 이해와 함께 시작하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 자신의 공로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기에 충분할 정도로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온전히 신뢰합니다. 그 시점부터 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완전히 새롭고 순수한 본성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의 마음 속에 사시면서 영원히 우리를 인치십니다. 우리는 그 시점부터 앞으로 나아가며 날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순종합니다. 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의 일부는 더욱 영적으로 자라나고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기 위해 날마다 그분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성경만이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기적을 나타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믿고 신뢰한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할 때 성령님은 우리 마음과 생각에 역사하시면서 성경이 참되고 신뢰할만하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실 것입니다(딤후 3:16-17). 만일 우리 마음 속에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의구심이 있다면 그 문제를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달라고 주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온 마음을 다해 정직하게 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마 7:7-8).

-Got Questions Ministries

구약 성경은 대략 주전 1400년부터 주전 400년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대략 주후 40년부터 주후 90년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각 권이 쓰여진 이래로 각각 3400년에서 1900년 사이의 기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에 원본 원고는 소실되었습니다. 원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성경의 책들은 여러 번 복사되었습니다. 사본의 사본이 끝없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여전히 성경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맨 처음에 사람들에게 그분의 말씀을 기록하도록 영감을 주셨을 때, 그 책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면서 오류가 없었습니다(딤후 3:16-17; 요 17:17). 성경 어디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원본의 사본들에게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꼼꼼한 서기관들이 성경을 손으로 복사하였을지라도 완벽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성경의 여러 사본에서 사소한 차이가 발생하였습니다. 주후 1500년경에 인쇄기가 발명될 때까지는 현존하는 수천 개의 헬라어 및 히브리어 사본들 중에는 완전하게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편파적이지 않은 문서 학자라면 성경은 수세기 동안 탁월하게 잘 보존되었다는 것에 동의 할 것입니다. 주후 14 세기의 성경 사본으로 여겨지는 사본들이 서기 3세기의 성경 사본들과 거의 동일합니다. 사해 두루마리가 발견되었을 때 학자들은 그것이 이전에 발견된 사본들보다 수백 년이 더 오래되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구약의 다른 고대 사본들과 대단히 유사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성경 회의론자들과 비평가들조차도 성경이 수세기에 걸쳐 전달되면서도 다른 어떤 고대 문서보다 훨씬 정확하게 전달되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성경이 어떤 체계적인 방식으로 수정, 편집, 또는 변조되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방대한 양의 성경 사본들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려는 시도는 쉽게 인식됩니다. 사본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소한 차이의 결과 때문에 의심 받게 된 성경의 주요 교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시 질문합시다. 우리는 성경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도하지 않은 실수 및 의도적인 인간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말씀을 보존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처음에 기록된 성경과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전적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에 우리는 성경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딤후 3:16; 마 5:18).

-Got Questions Ministries

궁극적으로, 성경은 인간 저자들보다 하나님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인간 저자들을 감독하여 그들의 문체와 성격을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을 정확히 기록하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직접 받아 쓴 것은 아니지만 그분에 의해 완벽하게 인도되었고, 성경 전체가 영감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입장으로 보면, 성경은 1500년 동안 다양한 배경을 가진 약 40 명의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선지자였고, 에스라는 제사장이었고, 마태는 세리였고, 요한은 어부였으며, 바울은 장막을 짓는 자였고, 모세는 목자였고,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성경은 1500년 이상 다른 저자들이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으로 전혀 모순된 내용이 없으며 또한 어떠한 오류도 없습니다. 저자들은 모두 다른 관점을 제시하지만, 그들 모두 똑같은 한 분의 참된 하나님, 그리고 구원의 동일한 한 가지 방법, 즉 예수 그리스도(요 14:6; 행 4:12)를 선포합니다. 성경의 책들은 거의 저자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다음은 성경의 학자들에 의해 성경의 각 책의 저자로 가장 추측되는 사람의 이름 및 대략적인 저작 날짜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 모세 - 주전 1400 년경
여호수아 = 여호수아 – 주전 1350 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 사무엘 / 나단 / 갓 - 주전 1000 – 900 년경
열왕기상, 열왕기하 = 예레미야 - 주전 600 년경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 에스라 - 주전 450 년경
에스더 = 모르드개 - 주전 400 년경
욥기 = 모세 - 주전 1400 년경
시편 = 여러 명의 다른 저자들, 주로 다윗 - 주전 1000 - 400 년경
잠언, 전도서, 아가서 = 솔로몬 - 주전 900 년경
이사야 = 이사야 - 주전 700 년경
예레미야, 애가 = 예레미아 - 주전 600 년
에스겔 = 에스겔 - 기원전 550 년
다니엘 = 다니엘 - 주전 550 년경
호세아 = 호세아 - 주전 750 년경
요엘 = 요엘 - 주전 850 년경
아모스 = 아모스 - 주전 750 년경
오바댜 = 오바댜 - 주전 600 년경
요나 = 요나 - 주전 700 년경
미가 = 미가 - 주전 700 년경
나훔 = 나훔 - 기원전 650 년
하박국 = 하박국 - 주전 600 년경
스바냐 = 스바냐 - 기원전 650 년경
학개 = 학개 - 주전 520 년경
스가랴 = 스가랴 - 주전 500 년경
말라기 = 말라기 - 주전 430 년경
마태복음 = 마태 - 주후 55 년경
마가복음 = 마가 - 주후 50 년경
누가복음 = 누가 - 주후 60 년경
요한복음 = 요한 - 주후 90 년경
사도행전 = 누가 - 주후 65 년경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 바울 - 주후 50-70년경
히브리서 = 무명, 아마도 바울, 누가, 바나바 또는 아볼로 - 주후 65 년경
야고보서 = 야고보 - 주후 45 년경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 베드로 - 주후 60 년경
요한 1서, 요한 2서, 요한 3서 = 요한 - 주후 90 년경
유다서 = 유다 - 주후 60 년경
요한계시록 = 요한 - 주후 90 년경

-Got Questions Ministries

성경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입김”입니다(디모데후서 3:16).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철학자들이 던져 왔던 그렇게 많은 질문들을 우리를 위해 성경으로 하나님께서 답하십니다. 삶에 대한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죽음 후의 삶은 존재하는가? 나는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나? 왜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을까? 왜 나는 선한 일을 하려고 노력하나? 이렇게 ‘거대한’ 질문들 외에도, 성경은 다음과 같은 영역에 있어 많은 현실적인 조언을 해 줍니다: 배우자로부터 내가 찾는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내가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내가 좋은 친구가 되는지? 어떻게 해야 내가 좋은 부모가 되는지, 성공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내가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지? 어떻게 내가 변할 수 있는지? 삶에서 정말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내가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내가 불공정한 상황들과 삶에 일어나는 나쁜 사건들을 성공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지?

성경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오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은 소위 말하는 ‘성스러운’ 책들 가운데 유일무이하며 단순히 도덕적 가르침을 주거나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수백개의 상세한 예언들, 성경이 기록한 역사적 기술들, 성경과 관련된 과학적 사실들을 검토하여 성경을 검증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진리에 자신들의 귀를 닫고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남께서 “네 죄가 사해졌노라 하는 것”과 일어나 네 자리를 거두고 걸어라”고 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운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분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침으로써(그분의 주위에 있는 그들의 눈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 자신이 죄를 사하는 능력(우리가 우리들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으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역사적 정확성, 과학적 정확성, 예언의 정확성 과 같이 우리가 검증할 수 있는 영역들에서 성경 자체가 사실임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감각들을 통하여 검증할 수 없는 영적 영역들에 대해 논할 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말씀은 사실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본성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은 쓰여졌던 때 그랬던 것 같이 우리에게도 관련이 있습니다. 기술은 변하더라도, 인간의 본성과 욕구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적 역사의 장들을 읽으면서, 개인간의 관계들을 말하든 사회를 말하든, “해 아래는 새 것이 없음”을 우리는 발견합니다(전도서 1:9). 그리고 인류 전체는 계속해서 잘못된 모든 곳들 안에서 사랑과 만족을 구하는 반면에, 하나님(우리의 선하고 은혜로우신 창조주)께서는 지속되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너무 중요하여 예수님께서도 이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태복음 4:4).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삶을 완전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생을 온전히 살고 싶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너무나도 많은 잘못된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오류로부터 진실을 구분해 낼 수 있는데 필요한 잣대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대해 잘못된 인상을 갖는 것은 우상과 거짓된 신을 숭배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아닌 어떤 것을 숭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사람이 진실로 천국에 가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고, 그것은 좋은 사람이 되거나 세례를 받거나 또는 그 외 우리가 해야하는 다른 것들에 의해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요한복음 14:6; 에베소서 2:1-10; 이사야 53:6; 로마서 3:10-18; 5:8; 6:23; 10:9-13).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로마서 5:6-8; 요한복음 3:16). 그리고 이런 배움을 통해 우리는 보답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에 마음이 끌리게 됩니다(요한일서 4:19).

성경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킵니다(디모데후서 3:17; 에베소서 6:17; 히브리서 4:12).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죄로부터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대해, 그리고 죄의 궁극적 결과를 깨닫는 데에 있어 도움을 줍니다(디모데후서 3:15). 말씀을 묵상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순종하면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여호수아 1:8; 야고보서 1:25).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 가운데 있는 죄를 보게 해주고 그것을 제거하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시편 119:9,11). 성경은 우리를 스승들보다 더 지혜롭게 만들어 주면서, 삶에 있어 우리를 인도합니다(시편 32:8; 119:99; 잠언 1:6). 성경은 사소한 것이나 일시적인 것들에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게 해줍니다(마태복음 7:24-27).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우리가 죄악된 유혹들이 “고통스러운 “낚시 바늘”로 유혹하는 “미끼” 너머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주인공이 되어 배우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실수들로부터 배울 수가 있습니다. 실제 경험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스승이지만, 죄를 통한 경험은 너무 끔찍하게 힘든 스승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실수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배울 수 있는 아주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그들의 삶의 다른 시점에 따라 긍정적 그리고 부정적 역할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신께서 우리에게 직면하라고 요구하시는 어떤 것보다 더 크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사무엘상 17). 그러나 밧세바와의 간음으로 향하는 유혹에 굴복한 다윗은 “한 순간의 죄악된 쾌락”이 얼마나 길고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사무엘하 11장).

성경은 단지 읽기만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적용할 수 있도록 공부해야 할 책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음식을 씹지 않고 삼켰다가 그 음식을 다시 밖으로 뱉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면 아무 영양 성분도 얻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의 법칙들처럼 구속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가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다면 우리 자신들이 손상을 입듯이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삶들에 얼만큼 중요한 것인지는 그저 아무리 강하게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금을 캐는 것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적은 노력을 들여서 냇가에서 조약돌만 찾는다면, 적은 양의 금가루를 얻을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게을리하여 그저 “개울가의 자갈”들 속을 뒤지면, 우리는 오로지 약간의 사금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그것을 파헤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면, 우리의 노력에 대한 더 많은 보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사람들이 성경을 감동 받은 것이라고 말 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들이 쓴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신성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맥락에서, “감동”이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의 숨결이 깃든” 이라는 뜻입니다. “감동”은 성경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다른 모든 책들로부터 성경을 유일무이하게 만듭니다.

성경이 어느 정도까지 감동으로 쓰여졌는지에 대해 다른 의견들이 존재하지만, 성경의 모든 부분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성경 자체의 주장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고린도전서 2:12-13; 디모데후서 3:16-17). 성경에 대한 이러한 견해에서는 종종 “성경 안의 모든 기록의 한마디 한마디가 다(verbal plenary)” 감동되었다고 말해집니다. 이것은 감동이 각 단어들에 미치고(한 마디마다, verbal) – 그저 개념들이나 생각들이 아닌 – 이 감동은 성경의 모든 부분들과 모든 주제들에까지 전체적으로(plenary)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일 부분들만 감동되었다거나 종교를 다루는 생각들이나 개념들만 감동되었다고 믿습니다만, 이런 감동에 대한 견해들은 성경에 대한 성경 자체의 주장에 미치지 못합니다. 성경 전체의 말씀의 한마디 한마디가 온전히 감동되었다는 사실이 하나님 말씀의 근본적인 특성입니다.

감동의 정도는 디모데후서 3:16절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이 구절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고 유익하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저 종교적 교리들을 다루는 성경의 부분들만 감동 된 것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의 각각의 그리고 모든 말씀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교리를 세우는데 있어 권위를 가지며, 사람에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방법을 가르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고 온전케 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의 감동을 다룬 또 다른 구절은 베드로후서 1:21 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비록 각자의 독특한 개성들과 쓰기 스타일들을 가진 인간들을 사용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썼던 그 말씀들을 신성하게 감동시키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성경이 전체적으로 한마디 한마디가 감동되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실 때에 확증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거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 5:17-18). 이 구절들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세부사항 그리고 최소한의 부호에까지 미친 정확성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셨는데, 이는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감동받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오류가 없고 권위를 지닌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그리고 전적으로 완벽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 또한 그 성격에 있어 똑 같은 특성들을 가질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수립한 이 같은 구절들은 성경이 오류가 없으며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수립합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성경은 성경 자체가 주장하듯이 부인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경의 의미를 밝히는 것은 이 삶에서 믿는 자들의 중요한 과제들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그저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공부해야 하고 올바르게 다루어야 합니다(디모데후서 2:15).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을 대충 또는 간략하게 훑어 보는 것은 때때로 매우 잘못된 결과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올바른 의미를 결정하기 위해 몇 가지 원칙들을 이해하는 것이 주요합니다.

첫째,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기도해야 하고 성령께 이해시켜 주시라고 간구해야 하는데, 이것이 성령의 역할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13). 성령께서는 신약 성경이 쓰여질 때 사도들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또한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는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그분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는 당신 안에 거하고 계시고, 그분 자신이 쓰셨던 책을 당신이 이해하기를 바라십니다.

둘째, 주위를 둘러싼 구절들과 동떨어지게, 성경 구절을 따로 빼내어 문맥에 어울리지 않게, 어떤 구절의 뜻을 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본문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 구절들과 장들을 읽어야 합니다. 모든 성경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지만(디모데후서 3:16; 베드로후서 2:1)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록하도록 사람들을사용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 속에 생각한 주제와, 글 쓴 목적,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특정한 이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가 책을 썼는지. 누구에게 쓰여졌는지, 언제 쓰였는지, 그리고 왜 쓰였는지를 알기 위하여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성경 책의 배경을 읽어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성경 자체가 말씀할 수 있게 주의해야 합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해석을 이끌어내기 위해, 말씀에 자기 자신들만의 의미를 부여하려 합니다.

셋째, 성경을 공부함에 있어 완전히 독자적으로 하려고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했던 다른 사람들이 평생에 걸친 노고를 통해 이룬 결과물을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오직 성령에만 의지하면 성경에 감추어진 모든 진리들을 발견 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으로 성경에 접근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허락하시면서, 자신의 몸이 된 사람들에게 영적인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이런 성령의 은사들 중의 하나가 가르치는 은사입니다(에베소서 4:11-12; 고린도전서 12:28). 이런 은사를 가진 교사들은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라고 주님께 의해서 주어진 자들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이해하고 적용하는데 있어 다른 믿는 자들과 서로 도우면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항상 지혜로운 것입니다.

요약해서, 성경을 공부하는 올바른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째, 기도와 겸손함으로 이해시켜 주시는 성령께 의존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성경 자체가 스스로 성경을 우리에게 설명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항상 문맥에 맞게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올바른 성경 공부를 똑같이 추구했던 과거 그리고 현재의 다른 믿는 자들의 노고를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저자이시고,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Got Questions Ministries

  ‘정경(Canon)’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책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고, 그러므로 성경에 속한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성경적 canon을 결정하는데 있어 어려운 점은 성경이 성경에 속한 책들의 목록을 주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Canon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었는데, 처음에는 유대교의 지도자들에 의해, 나중에는 초대 기독교인들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어떤 책들이 성경적 canon에 속하느냐를 정하셨던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성경의 각 책들은 하나님께서 그 글에 감동을 주신 순간부터 canon에 속하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분을 따르는 인간들에게 어떤 책들이 성경에 포함 되어야 하는 지를 확신시켜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신약 성경과 비교해서, 구약 성경의 canon에 대한 논란은 아주 적었습니다. 믿는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알아 보았고 그들의 글들을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쓴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구약 성경의 canon에 대한 약간의 논쟁이 명백히 존재했지만, A.D. 250년까지 히브리 성경의 canon과 관련하여 거의 전 세계적인 동의가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남았던 문제는, 오늘날에도 계속되어 논쟁과 논의가 되고 있는 외경(Apocrypha)이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히브리 학자들은 외경을 좋은 역사적, 종교적 문서로 고려하였지만, 히브리 성경만큼의 수준으로까지 보지는 않았습니다.

신약의 경우, 인지하고 수집하는 과정은 기독교 교회의 첫 세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아주 초기에, 신약 성경의 일부는 인지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누가복음의 글들을 구약 성경 만큼의 권위로 간주하였습니다(디모데전서 5:18; 신명기 25:4; 누가복음 10:7 역시 참조하십시오).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서들을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베드로후서 3:15-16). 신약 성경의 일부는 교회들 사이에 유포되고 있었습니다(골로새서 4:16; 데살로니가전서 5:27). 로마의 클레멘트는 최소한 8권의 신약 성경 책들을 언급하였습니다 (A.D.95). 안디옥의 이그나시우스는 약 7권의 책들을 인정하였습니다. (A.D. 115),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카프는 15권의 책들을 인정하였고(A.D. 108), 그 후에, 이레니우스는 21권의 책들을 언급했습니다 (A.D. 185). 히폴리투스는 22권의 책들을 인정했습니다(A.D. 170-235).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신약 성경의 책들은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그리고 요한삼서입니다.

첫 “canon” 은 A.D. 170년에 편찬된 무라토리안 캐논이었습니다. 무라토리안 canon은 히브리서, 야고보서 그리고 요한삼서를 제외한 지금의 신약 성경 책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기 363년, 라오디케아 종교 회의는 오직 구약 성경(외경과 함께)과 27권의 신약 성경만이 교회에서 읽혀져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히포 종교 회의(393)와 칼티쥐 종교회의(397)에서도 동일한 27권의 책들의 권위를 지지했습니다.

종교 의회들은 신약 성경의 책이 진정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았는를 결정하는데 있어 다음과 같은 원칙들과 비슷한 방향을 따랐습니다: 1) 저자는 사도였나 또는 사도들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나? 2) 책이 그리스도의 몸(교회)에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졌는가? 3) 책이 교리의 일관성과 정통적 가르침을 담고 있는가? 4) 책이 성령의 사역을 반영하는 높은 도덕적 그리고 영적 가치의 증거를 담고 있는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교회가 canon을 결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초기 종교 회의도 canon을 결정짓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한 분께서만이 어떤 책들이 성경에 속한 것인지 결정하신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이미 결정하셨던 것을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그저 알려 주셨던 것뿐입니다. 성경의 책들을 모으는 인간적인 과정에서는 결함이 있었으나, 우리의 무지와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관 하에 자신이 감동을 주신 책들을 초기 교회가 알아보게끔 인도하셨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성경을 보는 우리의 관점과 삶에 대한 성경의 중요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알아가며, 순종하고,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성경을 묵살하는 것은 하나님 자체를 묵살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경을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증거이자 예증입니다. “계시”라는 용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은 어떠한 분이시고 어떻게 우리가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를 인간에게 알려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이를 거룩하게 드러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 안에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약 1,500년 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주어졌을지라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기 위하여 인간이 알아야 하는 모든 것들은 항상 담겨 있었습니다.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믿음, 종교적 활동, 그리고 도덕에 관한 모든 문제들의 최종적 권위가 됩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성경이 그저 하나의 좋은 책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입니다. 지금까지 기록된 다른 종교 서적들과 구별되는 성경의 독특한 특성은 무엇일까요?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어떠한 증거가 있습니까?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으며, 믿음과 실천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 완전하고 충분하다는 성경 속 주장의 타당성을 우리가 밝히려면, 이런 유형의 질문들이 심각하게 검토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성경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권면에서 분명히 보입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서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디모데후서 3:15-17).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외적인 증거들은 모두 있습니다. 내부적 증거들은 성경 안에서 성경의 신성한 기원을 증거하는 것들입니다. 성경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첫 번째 내부적 증거는 그것의 통일성에서 보여집니다. 성경은 실제로 각각의 책으로 구성된 66권의 책들의 모음이고, 세 개의 대륙에서, 세 개의 언어들로, 약 1500년에 걸쳐, 서로 다른 다양한 삶의 계층을 살아온 40명 이상의 저자들에 의해 쓰여졌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된 책으로 남았습니다. 이런 통일성이 다른 모든 책과 구별되는 고유한 점이며,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감동시켜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음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내는 내부적 증거의 또 다른 하나는 성경에 담긴 예언들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각 나라, 특정 도시들, 그리고 인류의 미래와 관련된 수 백 개의 상세한 예언들을 담고 있습니다. 다른 예언들은 모든 믿는 사람들의 구세주, 메시아가 되실 분의 도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른 종교 서적이나 노스트라다무스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들에서 발견되는 예언들과는 달리, 성경의 예언들은 매우 상세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300개가 넘는 예언들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태어날 장소 및 혈통뿐만 아니라, 어떻게 죽으실 것인지 그리고 부활할 것이라는 것 또한 예언되었습니다. 그저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기인했다는 신성한 기원 외에는, 성취된 성경의 예언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다른 어떤 종교적 문헌도 성경과 같은 형태나 비슷한 수준의 예언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신성한 기원의 세 번째 내부적 증거는 성경만의 독특한 권위와 능력입니다. 이 증거는 앞의 두 가지 내부적 증거보다 더 주관적이지만,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기인했다는 강력한 증거로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성경의 권위는 이제까지 쓰여진 다른 서적과 다릅니다. 하나님 말씀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변화된 셀 수 없는 삶들이 이 권위와 능력을 제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의해 약물중독자들이 치유되고, 동성연애자들이 온전케 되고, 부랑자들과 사회의 낙오자들이 변화되고, 상습적 범죄자들이 개선되고, 죄인들이 책망받고, 미움이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성경은 오직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가능한, 역동적이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가리키는 외부적 증거들 또한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입니다. 성경이 역사적 사건들을 상세히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진실성과 정확성은 다른 역사적 문헌처럼 검증될 수 있습니다. 고고학적 증거들 및 많은 글을 통해, 성경의 역사적 기술들은 정확한 사실임이 몇 번이고 계속해서 입증되어 왔습니다. 사실, 성경을 뒷받침 하는 모든 고고학적 증거와 고고학적 사본의 증거는 성경을 고대 시기로부터 가장 잘 문서화된 문헌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역사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건들을 정확하고 진실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종교적인 주제들이나 교리들을 다룰 때 성경의 진실성을 크게 보여줄 뿐 아니라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을 입증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또 다른 외부적 증거는 인간인 저자들의 진실함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들을 기록하기 위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의 삶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들이 정직하고 진실된 사람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믿는 것을 위해 때때로 몹시 고통스러운 죽음을 기꺼이 택했다는 사실은 이런 평범하지만 정직한 사람들이 진실로 그들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신약 성경을 썼던 사람들과 수백 명의 다른 믿는 자들은(고린도전서 15:6) 그들의 메시지가 진실하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후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었고 함께 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것은 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두려움에 숨던 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시하신 메시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은 성경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성경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마지막 외부적 증거는 성경의 불멸성입니다. 성경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자체적 주장 때문에, 성경은 역사적으로 그 어떤 다른 책보다 더 악독한 공격들과 그것을 파괴하려는 시도들로부터 시달려 왔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같은 초기 로마 황제들로부터, 공산주의자 독재자들에 걸쳐 현대의 무신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모든 공격을 견뎌내고 그 위치를 유지하여 왔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책이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회의론자들은 성경을 신화로 간주해 왔지만, 고고학은 성경을 역사적인 것으로 확인해 주어 왔습니다. 반대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원시적이고 낡은 것이라고 비난해 왔지만, 성경의 도덕적 그리고 법적 개념들과 가르침들은 전 세계를 통해 사회와 문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성경은 사이비 과학, 심리학, 정치적 운동들에 의해 계속해서 공격 당하지만, 처음 기록되었을 때와 같이 참되고 적절한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성경은 지난 이 천 년에 걸쳐 수 많은 삶과 문화들을 변화시켜 온 책입니다. 반대자들이 성경을 아무리 공격하고, 파괴하고, 평판을 손상시킬지라도, 성경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삶에 대한 성경의 진실성과 영향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부패시키고, 공격하고, 파괴시키려는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보존되어 온 성경의 정확성은 성경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분에 의해서 초자연적으로 보호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증거입니다. 성경이 어떻게 공격을 받든, 항상 변함없고 아무 탈 없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가복음 13:31). 이런 증거를 살피고 나면, 우리는 의심 할 여지없이, ‘그렇습니다, 성경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의 차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교회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를 알아야 합니다. 지역 교회는 정기적으로 특정 장소에서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보편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교회라는 용어는 함께 모이는 모임이거나 "집회"(살전 2:14; 살후 1:1)와 관련이 있는 헬라어 단어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신자를 “불러내어” 그들을 구원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이 있습니다. 소유권을 말하고 문자적으로 "주께 속하여 있는"이라는 뜻을 가진 또 다른 헬라어 단어가 교회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신약에서는 오직 두 번 사용되었고, 결코 교회를 직접 언급한 적은 없습니다(고전 11:20; 계 1:10).

지역 교회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의 지역 모임으로 정의됩니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는 헬라어(에클레시아)로서 지역 집회와 관련하여 사용됩니다(살전 1:1; 고린 4:17; 고후 11:8). 어느 한 지역에 특정 지역 교회가 단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도시에는 많은 지역 교회가 있습니다.

보편 교회는 전세계의 교회에 주어진 이름입니다. 이 경우, 교회의 개념은 모임 자체가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자들입니다. 보편 교회는 공식 모임을 갖지 않을 때에도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8장 3절을 보면, 교인들이 집에 있을 때에도 그들이 여전히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을 보면, 흠정역 성경은 교회라는 단어를 복수 형태로 번역하였는데 사실 단수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단지 지역 교회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 교회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보편 교회는 “무형 교회”라고 불립니다. 즉, 거리 주소, GPS 좌표, 또는 물리적 건물이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참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점에서 무형 교회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묘사되는 교회는 결코 "보이지 않는" 교회를 의지하지 않고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처럼 분명히 보이는 교회를 의미합니다(마 5:14). 보편 교회에 관해 언급하는 추가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 15장 9절; 마태복음 16장 18절; 에베소서 1장 22-23절; 골로새서 1장 18절.
 

-Got Questions Ministries

성경은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엡 4:5)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한 성령이 우리 안에 내재하시니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4절). 바울은 3절에서 하나됨을 위해 필요한 겸손, 온유, 인내, 사랑을 호소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13절에 따르면, 성도들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11절) 그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고(11절) 가르치십니다(13절). 성령의 이러한 활동을 조명이라고 부릅니다.

완전한 세상에서는 모든 신자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조명을 의지하면서 성경 연구에 충실할 것입니다(딤후 2:15).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이 세상은 완전한 세상이 아닙니다. 또한 성령을 소유한 모든 사람이 전부 실제로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을 근심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엡 4:30). 어떤 교사에게라도 물으십시오. 심지어 최고의 수업 교사라도 그가 무엇을 가르치든 배우기를 거부하는 고집 센 학생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 사이에 성경 해석이 다른 이유는 교사이신 성령의 가르침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앙이 뚜렷하게 차이가 나게 되는 몇 가지 이유들입니다.

1. 불신앙. 사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거듭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를 갖고 있지만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성경을 진리로 믿지 않으면서도 성경을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불신앙의 상태로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그릇된 성경 해석은 이러한 자들로부터 나옵니다.

불신자가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성경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조명이 없습니다. 더욱이 목사나 신학자라 할지라도 신분이 사람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신앙에 의해 야기되는 혼란의 예가 요한복음 12장 28-29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늘로부터 들리는 소리로 답변하십니다. 이때 해석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요 12:29). 모든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나오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인 똑같은 음성을 들었지만, 그들은 각각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2. 훈련 부족. 사도 베드로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그는 그들이 잘못 가르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벧후 3:16). 디모데는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는 당부를 받았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지름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형편없는 해석학. 많은 오류들이 훌륭한 해석학(성경 해석의 과학)을 적용하는데 실패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직접적인 맥락에서 한 구절을 빼내는 것은 그 구절의 의도에 큰 피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장과 책의 더 넓은 맥락을 무시하거나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데 실패하면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 전체에 대한 무지. 아볼로는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설교자였지만 그는 오직 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그분이 주시는 구원에 대해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메시지는 불완전하였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렀습니다”(행 18:24-28). 그 후에 아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오늘날 몇몇 그룹과 개인은 어떤 구절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구절들을 배제함으로써 불완전한 메시지를 갖게 됩니다. 그들은 성경으로 성경을 비교하는데 실패합니다.

5. 이기심과 자존심. 슬픈 일이지만, 성경에 대한 많은 해석들이 한 개인의 편견 및 애용하는 교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장려함으로써 개인적인 유익을 얻으려는 기회로 삼습니다(유다 서신서의 거짓 교사에 대한 묘사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6. 성숙하지 못함. 마땅한 성숙을 이루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룰 때도 그 영향을 받습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고전 3:2-3).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의 "고기"를 먹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인이 육신에 속하여 있는 증거는 교회의 분열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4절).

7. 전통에 대한 부당한 강조. 어떤 교회는 성경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해석은 언제나 이미 정립된 교회의 전통에 맞추어집니다. 전통과 성경의 가르침이 상충되는 곳에서는 전통을 우선시 합니다. 이는 말씀의 권위를 효과적으로 무효화시키고 교회 지도자들에게 최고의 권위를 허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 천국과 지옥의 실체,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에 관해서 모호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일부 사안들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은 덜 분명합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여러 다양한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성만찬의 횟수나 사용할 음악 스타일에 대한 직접적인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지엽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는 정직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라도 서로 다른 해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것에 대해 서는 타협해서는 안되지만,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독단적이 되는 것을 피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를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초대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사도들의 교리에 굳세게 서 있었기 때문에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도들의 교리로 돌아가서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다른 교리들과 유행들과 술책을 버리면 교회 내에 하나됨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디모데전서 3장 2절의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뜻은 적어도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1) 일부다처주의자는 장로, 집사 또는 목사 자격이 없다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은 그 구절을 가장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이지만, 바울이 이 글을 쓰고 있을 당시에 일부다처제가 매우 드물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런 뜻은 아닐 것 같습니다. 2) 헬라 말 그대로 "한 여인의 남자"로 문자적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즉, 감독은 그가 결혼한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충실해야 합니다. 이 해석은 원문이 혼인 상태가 아니라 도덕적 순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는 해석입니다. 3) 이 구절은 장로/집사/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홀아비가 재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직 한 번만 결혼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목사는 이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해석 2와 3이 오늘날 가장 널리 퍼져 있는 해석입니다. 해석 2는 성경이 예외적인 상황에서 이혼을 허용하는 것을 고려할 때 가장 강력한 해석으로 보입니다(마 19:9; 고전 7:12-16). 여기서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이혼하고 재혼한 남자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이혼하고 재혼한 남자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알기 전에 행하였던 행동 때문에 교회 지도자의 자격이 되는 사람이 제외되어서는 안됩니다. 한편, 디모데전서 3장 2절이 이혼하거나 재혼한 사람이 장로/집사/목사로 섬기는 것을 반드시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고려해야 할 다른 사안들이 있습니다.

장로/집사/목사의 첫 번째 자격은 "책망할 것이 없는"(딤전 3:2) 것입니다. 성경적인 근거 없이 이혼이나 재혼을 할 경우, 그 사람은 교회와 공동체에서 증거자로서의 역할을 손상시킨 것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는 자격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는 요구 사항보다 그가 목사가 되는 것을 제외시킬 것입니다. 장로/집사/목사는 교회와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경건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며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과거 이혼 및 재혼이 이러한 모범을 보이는데 문제가 된다면 그는 장로/집사/목사로 섬겨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가 장로/집사/목사로 섬기는데 있어서 실격을 당했더라도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의 소중한 구성원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은사를 소유하고 있고(고전 12:4-7), 그 은사로 다른 신자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고전 12:7). 장로/집사/목사의 직에 실격을 당한 사람이라도 여전히 ​​교회에서 가르치고 설교하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기독교의 역사는 실제로 서구 문명의 역사입니다. 기독교는 거의 2천년 동안 전반적으로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예술, 언어, 정치, 법률, 가정 생활, 달력, 음악 및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까지 전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야기는 꼭 알아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 - 교회의 시작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 후 50 일째 되는 날에 시작되었습니다(주후 30년).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으며(마 16:18), 오순절 날에 성령께서 오심으로(행 2:1-4) 교회(에클레시아, 부름을 받은 모임)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베드로의 설교에 3 천 명의 사람들이 반응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단했습니다.

기독교로의 초기 개종자는 유대인이나 유대교 개종자였으며 교회는 예루살렘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기독교는 처음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또는 에센파와 유사한 유대교 종파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전파한 내용은 다른 유대교 종파들과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메시아(기름 부음을 받은 왕)로서 율법을 성취하시고(마 5:17) 그분의 죽음에 기초한 새 언약을 제정하기 위해 오셨습니다(막 14:24). 하지만 이 메시지는 유대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메시아를 죽였다고 고발하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격분 시켰고, 다소의 사울과 같은 일부 유대인들은 "그 도"를 근절하기 위한 행동을 취하였습니다(행 9:1-2).

기독교가 유대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합당합니다. 구약은 신약의 기초를 놓았기 때문에 구약에 대한 실제 지식이 없으면 기독교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마태복음과 히브리서를 참조). 구약은 메시아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메시아의 백성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합니다. 신약은 메시아의 오심과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분의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생애에서 300 개가 넘는 구약의 구체적인 예언을 성취하심으로써 자신이 바로 구약이 예언하였던 메시아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 초대 교회의 성장

오순절 사건이 발생한지 오래지 않아서 교회의 문이 비 유대인들에게 열렸습니다. 전도자 빌립은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행 8:5),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복음을 전하자(행 10 장), 그들 역시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전에 교회 박해자)은 그리스-로마 전역과 로마 도시에까지 복음을 전파하였고(행 28:16) 아마도 스페인에 이르는 모든 길 상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것입니다.

주후 70년 즈음에는 예루살렘이 파괴되었고, 신약 성서의 대부분이 완성되어 교회들 사이에서 회람되고 있었습니다. 그 후 240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때로는 무작위로, 때로는 정부 칙령에 따라 로마에 의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2세기와 3세기에 교회 지도층은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점점 더 계층화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몇몇 이단들이 노출되고 논박되었으며, 신약 정경이 합의되었습니다. 박해는 계속 심화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 로마 교회의 부상

312 년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는 회심의 체험을 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약 70 년 후, 데오도시우스 통치 기간 동안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습니다. 주교들은 정부로부터 명예로운 지위를 얻었으며, 주후 400 년 즈음에는 "로마"와 "기독교"라는 용어는 실제적으로 거의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박해를 받게 된 자들은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이교도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강제 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마음의 변화가 없는 상태로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이교도들은 그들에게 익숙했던 우상들과 관행을 가지고 교회로 들어왔고 이에 교회는 바뀌었습니다. 성화(icons), 정교한 건축, 성지 순례 및 성자 숭배 등이 초대 교회의 단순한 예배 형태에 추가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일부 기독교인들은 로마에서 멀리 벗어나 수도사로 고립되어 살기를 택하였고, 유아 세례는 원죄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도입되었습니다.

그 다음 수 세기 동안 교회의 공식 교리를 결정하고, 성직의 남용을 비난하고, 분파간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다양한 교회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로마 제국이 약해짐에 따라 교회는 더욱 강해졌으며 서방의 교회들과 동방의 교회 사이에는 많은 불일치가 발생하였습니다. 로마에 기반을 둔 서방(라틴) 교회는 자신들이 다른 모든 교회들 위에 사도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로마의 주교는 심지어 자신을 "교황"(아버지)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주장은 콘스탄티노플에 기반을 둔 동방(그리스) 교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신학적, 정치적, 절차적, 언어적인 차이도 모두 로마 카톨릭( "보편적") 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서로 파문을 선포하고 모든 관계를 끊게 만든 1054년의 대분열에 기여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 중세 시대

유럽의 중세 시대 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는 권력을 유지하였고 주교들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위를 주장하며 왕처럼 살았습니다. 교회 지도부의 부패와 탐욕은 흔했습니다. 1095년에서 1204년까지 교황은 이슬람의 진보를 격퇴하고 예루살렘을 해방시키기 위해 유혈이 낭자하고 값비싼 대가를 치른 십자군 전쟁을 지지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 종교 개혁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사람들이 로마 교회의 신학적, 정치적인 남용과 인권 유린에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모양으로 모든 것이 묵인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1517년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라는 이름을 가진 독일 수도사가 교회를 대항하여 섰고 모든 사람이 그의 반박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루터로 인하여 개신교 종교 개혁이 발생하였고 중세 시대는 종결되었습니다.

루터, 캘빈, 츠빙글리를 포함한 종교 개혁자들은 신학의 여러 섬세한 핵심 부분에서는 서로 달랐지만, 교회의 전통보다 높은 성경의 최고 권위와 죄인들이 행함이 아닌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일치하였습니다(엡 2:8-9).

비록 카톨릭이 유럽에서 복귀하여 개신교와 카톨릭 사이에서 일련의 전쟁이 계속되었지만 종교 개혁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력을 성공적으로 해체시키고 현대 시대의 문호를 여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 선교 시대

1790년부터 1900년까지 교회는 선교 사역에 전례 없는 관심을 보였습니다. 신대륙의 식민지화는 선교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하였고, 산업화는 사람들에게 선교 기금을 지원할 재정적인 능력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였고, 전 세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 현대 교회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는 카톨릭교와 루터교가 관계 회복을 하는 것처럼 그들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여러 조치들을 취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교회는 개혁 신학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강력하게 홀로 서 있습니다. 교회는 또한 오순절주의, 은사 운동, 에큐메니칼(ecumenicalism) 운동과 다양한 이단들의 등장을 겪어왔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 우리의 역사에서 배우는 것

만일 우리가 교회 역사를 통해 다른 어떤 것도 배우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도록”(골 3:16)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성경이 말한 내용을 알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망각하고 예수님의 교훈을 도외시 할 때 혼란이 지배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있지만 오직 단 하나의 복음이 있습니다. 성도들 모두에게 의탁된 것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입니다(유 1:3). 우리가 그 믿음을 보존하고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는 그분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약속을 쉬지 않고 성취하실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첫째, "그렇게 많은" 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스캔들에 휩싸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스캔들이 엄청난 관심을 끌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스캔들"에 전혀 연루된 적이 없는 수천 수만의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 목사들, 교수들, 선교사들, 작가들, 그리고 복음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대다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들의 배우자와 가족에게 충실한 남성들과 여성들이며, 최대한의 정직과 성실로 그들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몇몇 소수의 실패가 모든 사역자의 인격을 공격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때때로 스캔들을 만드는 문제가 여전히 있습니다.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간통죄 또는 매춘에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일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세금 사기 및 기타 재정적인 불법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1) 복음주의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믿음이 없는 엉터리 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2) 복음주의 기독교인 지도자들 중 일부는 그들의 지위로 인해 교만하여지기 때문입니다. 3) 사탄과 마귀들은 교회 지도자와 관련된 스캔들이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모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집중적으로 그들을 공격하고 유혹합니다.

1) 스캔들에 걸린 일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엉터리 신자들이거나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5-20)고 경고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을 경건한 신자로 가장하고 또한 견고한 복음주의 지도자로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열매’(스캔들)는 결국 그들이 자기들이 주장하던 바와 정반대의 존재인 것을 드러냅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사탄의 본을 따릅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2)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은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상기시킵니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교만에 대해 경고합니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역이 성장하고 번창하여지면 그들은 그 영광의 일부를 자신들을 위해 취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일부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힘과 지혜로 사역을 관리하고 세우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종류의 교만은 타락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호 13:6)고 경고하였습니다.

3) 사탄은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스캔들을 선동함으로써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밧세바와 간통죄를 짓고 우리아를 살해함으로 다윗의 가족과 이스라엘 전체가 큰 타격을 입은 것처럼 교회 지도자의 도덕적인 부패로 인해 많은 교회들과 사역이 훼손되거나 파괴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의 타락을 보고 신앙이 약해집니다. 비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실패를 빌미 삼아 기독교를 거부하는 근거로 사용합니다. 사탄과 그의 마귀들은 이를 알고 있으며 따라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을 더욱 시도합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경고합니다.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가 스캔들의 혐의를 받거나 잡혔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1) 근거가 없거나 확인되지 않은 고발을 듣거나 받아들이지 마십시오(잠 18:8, 17; 딤전 5:19). 2) 죄를 범한 사람들을 책망하기 위해 성경적인 적절한 조치를 취하십시오(마 18:15-17; 딤전 5:20). 만일 죄가 입증되고 심각하다면, 사역의 지도층 자리에서 영구히 물러나게 해야 합니다(딤전 3:1-13). 3)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고(엡 4:32; 골3:13), 회개가 입증되면 그들을 공동체로 회복시키지만(갈 6:1; 벧전 4:8) 지도자로 삼지는 마십시오. 4) 우리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충실하십시오. 그들이 당면한 문제, 그들이 겪는 유혹, 그리고 그들이 겪어야 하는 스트레스를 안다면, 우리는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강건하게 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격려하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5)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의 실패를 보면서 당신의 궁극적인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고, 결코 죄를 범하지 않으시며,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으십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Got Questions Ministries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교단들과 비기독교적인 사교들과 거짓 종교를 구별해야 합니다. 장로교와 루터교는 기독교 교단의 예입니다. 몰몬과 여호와의 증인은 이단(기독교라고 주장하지만 신앙의 본질을 하나 이상 부인하는 단체)의 예입니다. 이슬람과 불교는 완전히 별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 내에서 교파가 생겨난 것은 개신교 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개신교 개혁은 16 세기에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개혁"하려는 운동이었는데, 그 운동으로부터 개신교의 4개의 주요 교파와 전통이 등장하였습니다. 그것은 루터교, 개혁주의, 재침례교, 성공회입니다. 또한 이 네 교파로부터 수세기에 걸쳐서 수많은 교단들이 생겨나서 자라났습니다.

루터교 교파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그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감리교도들(the Methodists)은 그들의 창립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가 영적 성장을 위한 ‘방법’(methods)으로 유명하여졌기 때문에 그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장로교(Presbyterians)는 교회 지도자에 대한 그들의 견해로 인하여 이름 지어졌으며, 장로에 해당하는 헬라어(프레스부테로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침례교회는 침례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각 교단은 다른 교단들과 약간의 다른 교리를 지니거나 강조점이 틀립니다. 예를 들어, 세례의 방법에 따라, 교회 지도자들이 간증을 들어보고 인정받은 사람만이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지 아니면 교인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지에 따라, 구원의 문제가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는지에 따라, 이스라엘과 교회의 장래에 대한 견해에 따라, 환난 전 휴거인지 환난 후 휴거인지에 따라, 현대 시대에 기적의 은사가 있는지의 견해에 따라 교단들이 발생하여 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열의 핵심은 절대로 주이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경건한 신자들이 비록 오류가 있더라도 그들의 양심과 성경 이해에 따라 교리의 순수성을 정직하게 지키려는 서로 다른 의견차이일 뿐입니다.

오늘날 교파는 수없이 많고 다양합니다. 위에 언급된 원래의 "주류" 교파로부터 하나님의 집회, 기독교 선교 연합, 나사렛 교회, 복음주의 자유 교회, 독립 성서 교회 등과 같은 수많은 분파들이 생겨났습니다. 일부 교단들은 경미한 교리상의 차이점을 강조하지만, 수많은 교단들은 기독교인의 다양한 취향과 선호도에 맞는 다양한 예배 스타일을 제공하기도합니다. 그러나 신자로서 우리가 절대로 실수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 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공동체 내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다양성이 기독교 내에 수많은 교단을 생성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간다에 있는 어떤 장로 교회는 콜로라도에 있는 장로교와는 매우 다른 예배 스타일을 가질 수 있지만 교리적 입장은 거의 동일합니다. 다양성은 좋은 것이지만, 불일치는 그릇된 것입니다. 만일 두 교회가 교리적으로 동의하지 못한다면, 말씀을 둘러싼 논쟁과 대화가 요구될 수 있습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잠 27:17)은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단지 스타일과 형식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분리된 상태로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고(요일 4:11-12)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해야 하는 책임을 제거하는 것은 아닙니다(요 17:21-22).

기독교 교단의 단점:

교파주의에는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로, 성경 어디에도 교파주의에 대한 명령이 없고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연합과 연결을 명령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역사를 보면, 교파주의는 분파와 분열로 이끄는 갈등과 대립의 결과이거나 요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설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반 원리는 교회에 적용될 수 있고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열과 분리 문제로 고투하였던 고린도교회에서 이 예를 발견합니다. 바울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아볼로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고전 1: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라.” 이 구절만 보더라도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을 분리하고 나누는 교파주의자들 및 이와 유사한 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살펴 봅시다. 바울은 13절에서 매우 예리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이것은 바울이 어떻게 느끼는가를 분명하게 해줍니다. 그(바울)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아니며 그의 메시지는 결코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몇몇 사람들을 이끌어 그리스도 대신에 바울을 경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에 따르면 단 하나의 교회와 하나의 신앙 공동체가 있고 이와 다른 교회는 교회를 약화시키고 파괴합니다(17절 참조). 그는 3장 4절에서 바울이나 아볼로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육의 사람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점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교파주의 및 최근의 역사를 볼 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몇 가지 문제들:

1. 교단은 성경 해석에 대한 의견 차이에 근거합니다. 예를 들어, 세례의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세례는 구원의 필수 조건입니까 아니면 구원의 과정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이 문제로 인하여 나뉘는 양쪽 교단이 있습니다. 사실, 세례(예식의 의미, 방식,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사람 등등)는 교회 분리와 새로운 교파 형성에 있어서 중심적인 문제였습니다.

2. 성경 해석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개인적으로 이뤄지면서 논란거리가 됩니다. 이것은 교회의 복음 전파를 무너뜨릴 수 있는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킵니다.

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그 차이점들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하지만, 다시 한번 역사는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세속 언론은 우리가 생각이나 목적에 있어서 연합되어 있지 않은 것을 드러내며 우리의 차이점을 이용하여 우리를 반대합니다.

4. 교단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에 의해 이용됩니다. 오늘날 개인적인 야망을 추진하는 자들에 의해 교단들이 배도로 이끌리는 것처럼 자기 파멸의 상태에 있는 교단들이 있습니다.

5. 연합의 가치는 멸망하는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나라를 알리는데 있어서 우리의 은사들과 자원들을 함께 모을 수 있는 능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파주의에 의해 야기된 분열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습니다.

신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교단을 무시해야 합니까? 교회에 가지 않고 집에서 예배해야 합니까?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개인적으로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또한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경적인 사역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중요하며 모든 신자는 위의 기준에 맞는 공동체에 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자들의 공동체에서만 누릴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고 교회만이 제공할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하며, 우리는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어떻게 돕는지, 교회 공동체를 얼마나 잘 섬기는지를 근거로 하여 교회를 고르십시오. 목사가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선택하고 그렇게 권하는 교회를 택하십시오. 우리는 신자로서 우리가 믿어야만 하는 기본적인 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 우리가 섬기고 예배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자유가 있습니다. 교단을 위한 자유가 있다면 오직 이러한 자유 외에는 없습니다. 이러한 자유는 다양성이며 불일치가 아닙니다. 다양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각 개인에게 허용되지만, 불일치는 교회를 분리시키고 멸망시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경은 교회 성장에 대하여 특별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교회 성장의 원리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가 그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고 있음을 확언했습니다(고전 3:11).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엡 1:18-23) 교회의 생명입니다(요 10:10). 이 점을 분명히 한 후, 우리는 "성장"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장에는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으며, 그 중에는 숫자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도 있습니다.

회원 또는 출석하는 사람의 수가 바뀌지 않더라도 교회는 살아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만일 교회의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그들의 삶을 주의 뜻에 순복하는 가운데 주 예수님의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자라나고 있다면, 그 교회는 성장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동시에, 교회는 매주 그 수가 늘어나고 거대한 교회가 되더라도 여전히 영적으로 정체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성장도 전형적인 패턴을 따릅니다. 성장하는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지역 교회에는 씨를 심는 사람들(복음 전도자), 씨에 물을 주는 사람들(목사/교사), 그리고 지역 교회의 회원들의 성장을 위해 영적인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씨를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사실을 주목하기 바랍니다(고전 3:7). 심는 사람들과 물을 주는 사람들은 각각 그들의 수고에 따른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고전 3:8).

지역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씨를 뿌리는 일과 물을 주는 일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즉, 건강한 교회에서 각 사람은 자신의 은사를 찾아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가장 적절한 봉사를 해야 합니다. 만일 심는 것과 물의 공급이 균형을 잃으면 교회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번영할 수 없습니다. 물론 날마다 성령을 의존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씨를 심고 물을 주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자라나게 하시는 역사가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살아서 성장하는 교회에 대한 묘사가 사도행전 2장 42-47절에 있습니다. 그 교회의 신자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들은 서로 봉사하였으며 주를 알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뻗쳤습니다". 이에 주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교회에서 있을 때 교회는 수적인 증가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영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주님은 이 땅에서의 교회가 어떻게 조직되고 관리되기를 바라시는지를 그분의 말씀 안에 분명하게 기록하여 두셨습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 최고의 권위입니다(엡 1:22; 엡 4:15; 골 118). 둘째, 지역 교회는 자치적이어야 합니다. 즉, 외부의 권위나 통제가 없이 자치권을 가져야 하고, 개인이나 조직의 지배 계층적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딛 1:5). 셋째, 교회는 두 개의 주요 직분, 곧 장로와 집사에 의해 구성되는 영적 지도층에 의해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장로들"은 모세 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지도층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훗날의 역사 속에서 정치적인 결정을 내리고(삼하 5:3; 삼하 17:4, 15), 왕에게 조언을 하고(왕상 20:7), 영적인 문제에 대하여 백성들을 대표하는 것을(출 7:17; 출 24:1, 9; 민 11:16, 24-25)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초기 헬라어 역본인 70인역은 “장로”에 대해 프레스부테로스(presbuteros)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장로”로 번역된 헬라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신약 성경은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장로들에 관하여 여러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행 14:23, 15:2, 20:17; 딛 1:5; 약 5:14). 장로라는 단어가 보통 복수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각 교회는 한 명 이상의 장로가 있었습니다. 이와는 다른 유일한 예외들은 어떤 이유로 인하여 한 명의 장로가 선출되는 경우입니다(딤전 5:1, 19). 예루살렘 교회에서 장로들은 사도들과 함께 지도층의 일부가 되었습니다(행 15:2-16:4).

장로의 지위가 "감독자"또는 "감독"으로 번역된 에피스코포스(episkopos)의 지위와 동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행 11:30; 딤전 5:17). “감독/감독자”라는 용어는 권위와 의무를 묘사하는 반면, "장로"라는 용어는 직분의 위엄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벧전 2:25, 5:1-4). 빌립보서 1장 1절에서 바울은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안부를 묻지만 장로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는 아마도 장로들은 감독들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디모데전서 3장 2, 8절은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 언급하지만 장로의 자격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디도서 1 장 5-7절은 이 두 용어를 하나로 묶는 것처럼 보입니다.

“흙을 통해”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디아코노스(diakonos)로부터 유래한 "집사"의 위치는 교회에서 섬기는 지도층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집사는 장로와 별개이며, 여러 면에서 장로와 비슷한 자격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딤전 3:8-13). 집사는 사도행전 6장에 기록된 대로 교회의 필요를 돕는 일을 합니다.

교회의 인간 지도자와 관련하여 언급되는 "목사"라는 단어는 헬라어 포이멘(poimen)에서 왔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단 한번 발견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대부분의 학자들은 목사와 교사를 하나의 직분과 관련된 용어라고 보고 “목사이며 교사”로 해석합니다. 아마 “목사이며 교사”인 지도자는 어떤 특별한 지역 교회의 영적인 목자였을 것입니다.

위의 구절에서 항상 여러 장로들이 있었던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는 하나님이 어떤 특정 장로들에게는 가르침의 은사를 주시고, 다른 장로들에게는 행정, 기도 등의 은사를 주신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롬 12:3-8; 엡 4:11). 또한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 은사를 사용할 사역으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도 않습니다(행 13:1). 따라서 한 장로는 "목사"로 등장할 수도 있고, 다른 한 장로는 긍휼의 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로 심방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장로는 조직의 세부 사항을 다루는 의미에서 "다스리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한 명의 목사와 집사회로 조직된 많은 교회들은 사역을 나누고 어떤 결정을 함께 내린다는 점에서 복수 장로들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성경을 보면 결정을 내릴 때 회중의 의견을 많이 수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로, 감독 또는 목사로 불리는) 어떤 ‘독재’ 지도자가 홀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행 1:23, 26; 6: 3, 5; 15:22, 30; 고후 8:19). 반면, 장로나 교회 지도자들의 의견에 비중을 두지 않는 회중 통치의 교회 역시 비성경적입니다.

요약하면, 성경은 교회를 섬기는 집사 그룹과 함께 여러 명의 장로들(감독/감독자)로 구성된 지도층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장로들 중 한 명이 주요한 "목회적" 역할로 섬기도록 하는 것이 복수 장로 제도에 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목사/ 교사"(심지어 사도행전 13장에서는 어떤 사람들을 선교사로 부르셨던 것처럼)로 부르시고 그들을 교회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엡 4:11). 따라서 교회는 여러 장로들이 있을 수 있지만, 모든 장로들이 목회적인 역할을 하도록 부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장로들 중 한 사람으로서 목사 또는 "가르치는 장로"는 다른 장로들과 동등한 의사 결정권을 갖지 않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교회의 권징은 교회를 지키고, 죄를 지은 자를 다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고, 교회 지체들 사이에 교제를 새롭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역 교회의 지체들 간에 발생한 죄스러운 행동을 바로 잡는 과정입니다. 어떤 경우, 교회 권징은 한 개인을 향해 교회 회원권에서 공식적으로 제거하는 출교까지의 모든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5-20절은 교회가 권징을 위해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고 또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그 절차를 알려줍니다. 예수께서는 피해를 입은 개인이 사적으로 가해자를 만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가해자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 상황의 상세한 내용을 확인하기 2-3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갑니다. 그럼에도 만일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회개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죄를 고집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문제를 교회에 알립니다. 이제 가해자는 죄를 회개하고 그의 죄스러운 행동을 버릴 수 있는 세 번째 기회를 갖습니다. 만일 교회의 권징이 진행되는 동안 아무 때라도 죄 지은 그 사람이 회개한다면 “형제를 얻은 것”(마 18:15)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 절차가 진행될 때까지 죄 지은 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예수님은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징계할 때에 결코 즐겁지 않은 것처럼 교회의 권징 과정은 결코 즐겁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교회의 권징이 필요합니다. 교회 권징의 목적은 죄 지은 자를 향해 멸시하는 마음 자세를 취하거나 또는 영적인 우월감을 갖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권징의 목표는 한 개인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다른 신자들과 온전히 교제할 수 있도록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권징은 사적으로 다루기 시작하고 그 후 점차적으로 공개해야 합니다. 권징은 개인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교회의 다른 지체들을 위하는 경건한 두려움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 권징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 회원제의 필요성을 암시합니다. 교회와 목회자는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아닌 특정 그룹의 사람들(지역 교회의 구성원들)의 영적 안녕을 책임집니다. 바울은 교회 권징의 맥락에서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고전 5:12)라고 묻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권징을 받아야 하는 자는 교회 ‘안에’ 있어야 하며 교회 앞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론할 수 있는 자라야 합니다. 치리를 받게 되는 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맹백한 죄를 지속하는 자입니다.

성경은 지역 교회인 고린도교회(고전 5:1-13)를 통해 교회 권징의 예를 보여줍니다. 이 경우 치리는 출교에 해당하는데, 사도 바울은 치리를 해야 하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죄는 누룩과 같다는 것입니다. 만일 죄를 허용되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고전 5:6-7)처럼 죄가 주변으로 퍼질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멀어져서 “누룩 없는 자”가 되거나 또는 영적으로 부패시키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고전 5:7-8). 자기의 신부인 교회를 향해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것은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엡 5:25-27). 불신자들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죄를 범하였을 때, 그 죄의 결과들 중 하나는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원수들에 의해 모독을 받은 것이었습니다(삼하 12:14).

교회가 회원에 대해 취하는 징계 조치마다 경건한 슬픔과 진정한 회개를 가져오는데 성공하기를 소망합니다. 회개를 하게 되면, 그 개인은 다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 관련된 사람은 회개하였고, 나중에 바울은 교회가 그를 받아들여 교회와 온전한 교제를 할 수 있게 하라고 격려하였습니다(고후 2:5-8). 불행하게도, 치리 조치가 사랑 안에서 올바르게 수행되더라도 사람을 회복시키는데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권징이 회개를 이끌어내지 못하더라도, 세상에서 선한 증거를 유지하는 것과 같은 여러 다른 선한 목적들을 성취하기 때문에 치리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일관된 징계 없이 제 멋대로 하도록 방치된 젊은이들의 행동을 목격하곤 합니다. 그 광경은 보기에 흉합니다. 지나치게 관대한 부모의 사랑은 아이를 제대로 인도하지 못함으로써 그 아이의 장래를 암담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징계를 받지 않고 자라난 아이는 통제를 벗어나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며 제대로 적응하지 못합니다. 교회에서의 권징은 결코 즐겁거나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권징은 때때로 필요합니다. 사실, 권징은 사랑입니다. 권징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경적인 분리란 하나님이 신자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셔서 죄 많은 문화 가운데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으로 정결을 이루도록 하신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분리는 일반적으로 개인과 교회의 두 영역에서 고려됩니다.

개인적인 분리는 경건한 행동 기준을 지키려는 개인적인 헌신과 관련됩니다.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단 1:8)고 뜻을 정함으로써 개인적인 분리를 실천했습니다. 그의 기준은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했기 때문에 그의 분리는 성경적인 분리였습니다.

개인적인 분리에 대한 현대적인 사례는 술이 제공되는 파티 초대장을 거부하기로 결정하는 것 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결정은 유혹을 피하거나(롬 13:14), "모든 종류의 악"(살전 5:22)을 피하기 위해, 또는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확신(롬 14:5)을 위해 내려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4-17; 참조, 벧전 1:14-16).

교회의 분리는 신학이나 관례에 근거하여 다른 기관과의 관계에 대하여 교회가 내리는 결정과 관련됩니다. 분리주의는 “부름 받은 모임”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에클레시아, ekklesia)에서 유래한 "교회"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에 보낸 예수님의 편지를 보면, 주께서는 거짓 교리를 가르친 사람들을 허용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계 2:14-15). 교회는 이단과의 관계를 끊고 분리되어야 합니다. 교회 분리의 최근 실례는 교회를 배교자들과 결합시키는 에큐메니칼 연합에 대한 교단의 입장일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과 접촉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는 죄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죄인과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눅 7:34). 바울은 분리주의에 대한 균형적인 견해를 표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9-10).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의 빛을 약화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Got Questions Ministries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단순한 대답은 ‘침례’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발견됩니다. 이 단어는 "물에 잠기다"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물 뿌리거나 붓는 방식은 그 자체로 모순이 됩니다. 세례는 "물을 뿌려서 누군가를 물 속에 담그는 것"을 의미합니다. 침례는 그 본래의 정의에 따라 물에 잠기는 행위여야 합니다.

침례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에 함께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3-4). 물에 잠기는 행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에서 나오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결과적으로, 침수에 의해 받는 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물을 뿌려주거나 붓는 방식은 유아세례라는 비성경적인 실천의 결과로 실행되게 된 것입니다.

침수에 의한 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성경적인 방식이지만 구원의 전제 조건은 아닙니다. 순종의 행위, 또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그분과의 하나됨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침례는 우리의 옛 삶을 떠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실을 묘사하는 것입니다(고후 5:17). 침수에 의한 침례가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충분히 설명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안식일과 출애굽기 20:11의 창조 관련 기록과의 연관성을 들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안식일을 제정하셨다”고 종종 주장됩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쉬셨다(창세기 2:3)는 것이 미래의 안식일 법을 예시한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을 떠나기 전까지 안식일에 대한 성경 기록이 없습니다. 성서의 어디에도 아담에서 모세의 때까지 안식일이 지켜졌다는 암시조차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안식일 준수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징표였다는 것을 매우 분명히 합니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출애굽기 31:16-17).

신명기 5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다음 세대에게 십계명을 다시 말합니다. 여기 12-14 절에서, 안식일 준수를 명한 뒤, 모세는 안식일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이유를 제시합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명기 5:15).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창조를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애굽의 노예였었다는 것과 주님께서 그들을 인도해 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을 준수에 대한 요구 사항을 참고하십시오: 안식일 법 안에 놓인 사람은 안식일 날 자신의 집을 떠나면 안되고(출애굽기 16:29), 불을 지펴서도 안되며(출애굽기 35:3),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켜도 안되었습니다(신명기 5:14). 안식일 법을 어긴 사람은 사형에 처해져야 했습니다(출애굽기 31:15; 민수기 15:32-35).

신약 성경 구절들을 검토해 보면 네 가지 중요한 점들을 볼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시고 그 날이 언급될 때마다, 그 날은 항상 한 주의 첫 번 째 날입니다(마태복음 28:1, 9, 10; 마가복음 16:9; 누가복음 24:1, 13, 15; 요한복음 20:19, 26). 2) 사도 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통해 안식일이 언급된 유일한 때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있었을 때였고, 그 장소는 항상 회당 안이었습니다(사도행전 13-18장).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라고 썼습니다(고린도전서 9:20). 바울은 성도들과 교제하고 그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회당에 갔습니다. 3) 바울이 “지금부터 나는 이방인들(비유대인들)에게 갈 것이다”라고 한번 말하고 나서(사도행전 18:6), 안식일은 다시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4) 안식일 준수를 고수할 것을 제안하는 대신, 신약 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를 넌지시 나타냅니다(골로새서 2:16에서 발견되는 위 (3)의 경우의 한 가지 예외를 포함).

좀 더 자세히 위 (4)를 살펴 보면, 신약의 믿는 자에게슨 안식일을 준수해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고, 또한 일요일인 “기독교 안식일” 발상 또한 비성서적일 수 있습니다. 상술 한 바와 같이, 바울이 이방인에 집중하기 시작한 후 안식일이 한번 언급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로새서 2-16-17). 유대교의 안식일은 그리스도께서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신”(골로새서 2:14) 십자가에서 폐지되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신약 성경에서 한 번 이상 반복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로마서 14:5-6a).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갈라디아서 4:9-10).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A.D.321년 콘스탄틴에 의한 칙령으로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초대 교회는 예배하기 위하여 어떤 날 모였을까요? 성서는 믿는 자들이 교제와 예배를 위해 어느 안식일(토요일)에도 모였다고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의 첫날을 언급한 명확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20:7은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2에서 바울은 고린도의 믿는 자들에게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라”고 촉구합니다. 고린도 후서 9:12에서 바울이 이 제물을 “봉사”라고 지명했기 때문에, 이 모금은 기독교 집회의 일요일 예배에서의 봉사와 연관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역사적으로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이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모이는 정상적인 날이었고, 이런 관행은 1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안식일은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안식일은 여전히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이고 바뀐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구약 율법의 일부이고, 기독교인들은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갈라디아서 4:1-26; 로마서 6:14). 안식일 준수는 그것이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간에 기독교인에게 요구되지 않습니다. 일주일의 첫날이고 일요일인 주의 날(주일)(요한계시록 1:10)은 우리의 부활이시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창조를 기념합니다. 우리는 모세의 안식일의 휴식을 따라야 할 의무가 없고, 오히려 지금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자유롭습니다(섬김).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은 제각기 안식일의 안식을 준수 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로마서 14:5). 우리는 그저 토요일이나 일요일뿐만 아니라 모든 날에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골로새서 2:16-17에서 바울은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마찬가지로 로마서 14:5는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이 성경 구절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이 아닌 영적 자유의 문제임을 분명히 합니다.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선상의 문제입니다. 안식일 준수는 각각의 기독교인이 그/그녀 자신의 마음에 그럴 필요가 있는냐는 확신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도행전의 앞 장들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선물을 받기 시작하면서,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어떤 측면의 모세의 율법과 유대 전통을 이방인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따르도록 가르칠 것인가? 사도들은 예루살렘 의회에서 만나 이 문제를 의논하였습니다(사도행전 15). 결정은,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사도행전 15:19-20)였습니다. 안식일 준수는 사도들이 느끼기에 이방인 신자들에게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필요가 있는 명령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는데도, 사도들이 안식일 준수를 포함시키는 것을 등한시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안식일 준수에 있어 일반적 오류는 안식일이 예배의 날이라는 개념입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라는 집단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예배가 토요일인 안식일 날에 이루어질 것을 요구하신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대한 명령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대한 명령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출애굽기 208-11). 성경 어디에도 안식일이 예배의 날로 명령된 곳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 신약, 그리고 현대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예배의 날을 토요일로 하지만, 이것은 안식일에 대한 명령의 본질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모임이 안식일 날 이루어 졌다고 말할 때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아닌 유대인의 모임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언제 만났을까요? 사도행전 2:46-47은 우리에게 답을 줍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기독교인들이 정기적으로 만난 날이 있었다면, 그것은 안식일 날이 아닌 일주일의 첫날(우리의 일요일)이었습니다(사도행전 20:7; 고린도전서 16:2). 일요일에 발생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초기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의 안식일”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특별히 예배하는 날로 일요일을 준수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 드리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토요일이나 일요일만이 아닌 모든 날에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에 예배서비스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로마서 8:21; 고린도후서 3:17; 갈라디아서 5:1). 기독교인은 토요일 날 일하지 않아야 한다는 안식일 준수를 지켜야 합니까? 어떤 기독교인이 그렇게 느낀다면, 전적으로, 그렇습니다(로마서 14:5). 하지만, 안식일 준수를 선택한 사람들은 안식일 준수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골로새서 2:16). 더 나아가, 안식일 준수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안식일 준수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8:9). 갈라디아서 5:13-15는 이 모든 문제를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Got Questions Ministries

‘종교’의 사전적 정의는 ‘하나님 또는 숭배되는 신들에 대한 믿음, 대개 행위와 의식으로 표현됨, 모든 믿음, 숭배, 등의 특정한 체계, 종종 윤리적 강령에 관련 있음’과 비슷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정의에 비추어, 성경은 조직화된 종교를 말하고 있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 “조직화된 종교”의 목적과 영향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1:1-9은, 아마도 조직화된 종교의 첫 번째 사건으로, 노아의 후손들이 온 세상에 충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대신 바벨탑을 짓기 위해 자신들을 조직화 하였다는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관계보다 자신들의 단결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입하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란케 하셨고, 그리하여 이 조직화된 종교를 분산시키셨습니다.

출애굽기 6장과 그 다음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국가를 위해 종교를 “조직”하셨습니다. 십계명, 성막에 관한 율법들, 그리고 희생 제사 제도가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고 이스라엘 족속들에 의해 지켜져야 했습니다. 신약성경을 더 연구하다 보면 이 종교의 의도는 구세주, 즉, 구원자의 필요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갈라디아서 3장; 로마서 7장).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를 잘못 이해하였고 하나님보다는 규율과 의식을 더 숭배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틀어,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많은 갈등들은 조직화된 종교들과의 갈등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런 예들은 바알 숭배(사사기 6; 역대상 18), 다곤(사무엘상 5), 몰렉(열왕기상 23:10)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종교들을 따르는 자들을 무찔렀으며, 자신의 주권과 전능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서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셨을 당시 조직화된 종교를 대표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들과 위선적인 삶의 태도에 관한 문제로 그들과 끊임없이 맞서셨습니다. 서신서들은, 복음을 행위와 의식을 요구하는 어떤 목록들과 썩어버린 조직화된 집단들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또한 이런 “기독교 신앙에 더해지는 것”을 요구하는 종교들을 받아들이도록 믿는 자들이 변화되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갈라디아서와 골로새서는 이러한 종교들에 관한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에는, 조직화된 종교가 적그리스도에 의해 단일 세계 종교가 세워질 때 세상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사실이 나와있습니다.

많은 경우들에 있어, 조직화된 종교의 마지막 결과는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의도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계획의 한 부분인 조직화된 믿는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조직화된 믿는 자들의 집단들을 “교회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 묘사가 된 교회는 조직화 되고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조직은 보호, 생산성, 그리고 전도로 이끌어 줍니다(사도행전 2:41-47). 교회의 경우에는, 이것을 “조직화된 관계”라고 더 좋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종교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인간의 시도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획은 없습니다(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 로마서 5:8). 자랑함도 없습니다(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 에베소서 2:8-9). 주도권에 대한 갈등이 있으면 안됩니다(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십니다 – 골로새서 1:18). 편견이 있으면 안됩니다(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 갈라디아서 3:28). 조직화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의 규율과 의식에 중점을 두는 것이 문제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