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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단이란 단어를 들을 때, 종종 사탄 숭배, 동물들 희생, 또는 사악한 것에 가담하는 것, 기이함, 그리고 이교도 의식들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단은 그러한 것들과 좀처럼 관련이 있지 않습니다. 사실, 이단은, 이 단어의 가장 넓은 의미에서, 그저 특정한 의식들과 관습들을 지닌 종교적 체계입니다. 특히 기독교 맥락에서의 이단의 정의는, “성경의 근본적 진리를 하나 또는 그 이상을 부인하는 종교 집단(종파)”을 뜻합니다. 이단은, 받아들여진다면, 사람을 구원받지 못하게 만드는 교리들을 가르치는 집단입니다. 이단은 종교의 일부라고 주장하지만, 그 종교의 핵심적 진리(들)를 부인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종파의 이단은 여전히 기독교 신앙이라 주장하면서 기독교의 근본 진리들의 하나 또는 그 이상을 부인합니다.

기독교 종파 이단들의 가장 일반적인 두 가지 가르침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며 구원은 오직 믿음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은 우리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데 있어 예수님의 죽음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견해를 낳습니다.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구원은 우리 자신들의 행위들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초기에 이단들을 상대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4:1에서 요한은 영지주의적인 가르침을 다룹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믿는가의 여부가 경건한 교리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 주요한 기준이 됩니다(2절) –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노골적인 반박(비교. 요한이서 1:7).

오늘 날 이단으로서 가장 잘 알려진 두 가지 예는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교입니다. 두 종파들은 기독교 신앙이라 주장하지만, 둘 다 모두 예수님의 신성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부인합니다.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교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거나 유사한 많은 것들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행위를 통한 구원을 전파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이단이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많은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그리고 기타 다른 이단들을 믿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기들이 진리를 붙들고 있다고 믿는 도덕적인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이단들에 속해 있는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간파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로 이끌릴 수 있게 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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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사이비, 거짓 종교에 관련된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들을 변화시키고 진리에 그들의 눈들을 여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고린도후서 4:4).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필요성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요한복음 3:16).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는 결코 어느 누구에게라도 진리를 납득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요한복음 16:7-11).

우리는 또한 거룩한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단들이나 거짓/사이비 종교들의 덫에 걸린 사람들이 우리 자신들의 삶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셨던 변화를 볼 수가 있습니다(베드로전서 3:1-2). 우리가 어떤 강력한 방법으로 그들을 사역할 수 있는지 우리는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야고보서 1:5). 이러한 모든 것들을 행한 후에, 실지로 복음을 전함에 있어 우리는 담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소식을 선포해야 합니다(로마서 10:9-10). 우리는 항상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지만(베드로전서 3:15), 온유와 존경(두려움)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리를 올바르게 선포하고, 말 싸움에서 이길 수는 있지만, 성난 우월감으로 말미암은 성난 태도 때문에 여전히 전도를 저해할 수도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증거하는 사람들의 구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지 우리들의 노력이 아닙니다. 힘찬 답변과 거짓된 믿음에 대한 지식을 준비하는 것은 옳고 현명한 일이지만, 이러한 어느 것들도 이단들과 거짓된/사이비 종교들의 거짓말의 덫에 걸린 사람들이 개종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령님이 이끌고, 확신을 갖게 하며, 개종시키실 것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증인이 되며, 그들 앞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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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심지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까지도 속이려 할 것이라 우리에게 경고하셨습니다(마태복음 24:23-27; 베드로후서 3:3, 유다서 17-18도 참조하십시오). 거짓과 거짓 선생들로부터 당신 자신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모조품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진짜를 공부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잘 구별”(디모데후서 2:15)하고 성경을 주의 깊게 공부한 믿는 자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거짓된 교리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3:16-17에 있는 성부, 성자, 성령님의 역할들을 읽어본 신자는 어떤 교리든간에 삼위일체를 부인한다면 그 교리에 의문을 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에 따라서 모든 가르침을 판단하는 것이 첫 단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마태복음 12:33)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남자든 여자든 어떤 사람의 가르침이 정확한지를 결정하는데 있어 그 어떤 선생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세 가지 구체적인 테스트가 있습니다.

1) 예수님에 관해서 이 선생은 무엇을 말하는가? 마태복음 16:15에서,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고 이 대답으로 인해 베드로는 축복받습니다. 요한이서 9장에 쓰여 있습니다: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의 업적이 최고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 되심을 부인하는 사람, 예수님의 희생적 죽으심을 경시하는 사람, 또는 예수님의 인간 되심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요한일서 2:22은 말씀합니다: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 이 선생이 복음을 전하는가? 복음은 성경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죽음, 장사됨, 그리고 부활에 대한 좋은 소식이라고 정의됩니다(고린도전서 15:1-4).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굶주린 자를 먹이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부자가 되길 원하십니다”와 같은 듣기 좋은 말은 복음에 대한 완전한 소식이 아닙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7에서 경고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아무도, 그 어떤 유명한 설교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메시지를 변경할 권한이 없습니다. “만일 너희가 받은 것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라디아서 1:9).

3) 이 선생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품들을 나타내 보이는가? 거짓 선생들에 대해, 유다서 11장은 말씀합니다: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다시 말하자면, 거짓 선생이다라는 것은 그의 자부심(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가인의 거부), 탐욕(돈을 위한 발람의 예언), 그리고 반역(고라가 모세 위에 자기 자신을 내세운 것)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조심하고 우리가 그 사람들의 열매들로 그들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7:15-20).

더 많은 공부와, 교회 안에서의 거짓 가르침을 방지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기록된 성경의 책자들을 검토하십시오: 갈라디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유다서. 거짓 선생들/선지자들을 찾아내기란 대체로 힘든 일입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고리도후서 11:14), 그의 졸개들은 의의 일꾼들로 가장합니다(고린도후서 11:15). 진리와 완전히 친숙해 져야만, 우리는 거짓/사이비 것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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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진 종파는 1870년 펜실베니아에서 찰스 T. 러셀(Charles Taze Russell)이 인도하는 성경 공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찰스 T. 러셀은 그의 모임을 "천년기 새벽 성경 연구"라 명명했습니다. 찰스 T. 러셀은 일련의 책자들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그 책자의 명칭을 "천년기 새벽"이라 칭하였고 그가 죽기 전까지 6권의 책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책들은 지금의 여호와의 증인이 믿고 있는 신학의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916년 러셀이 죽고 난 후, 그의 친구이자 후계자이며 판사였던 제이 에프 러더퍼드(J .F. Rutherford)는 "천년기 새벽" 책자 시리즈의 7 번째이자 마지막인 "종말을 고한 비밀(The Finished Mystery)"이라는 책을 1917년에 발간하였습니다.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The Watchtower Bible and Tract Society)는 1886년에 설립되었으며 곧 바로 "천년기 새벽(Millennial Dawn)"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교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하는데 있어 전달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직의 분열로 인해 1931년 "여호와의 증인들"이란 이름으로 변경되기 전까지는 이 집단은 "러셀교도(Russellites)"로 알려졌습니다. 분열 후 또 다른 집단은 "성경 연구생(Bible Students)"이란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무엇을 믿는가? 예수님의 신성, 구원, 삼위일체, 성령, 그리고 구속과 같은 주제들에 대한 그들의 교리적 입장을 가까이서 면밀히 검토해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이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기독교의 정통적 입장을 그들이 고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께서 가장 높은 피조물인, 천사장 미카엘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는 많은 성경의 말씀들과 모순이 됩니다(요한복음 1:1, 14; 8:58; 10:30). 여호와의 증인은 구원이 믿음과, 선행들, 그리고 순종의 조합에 의해 얻어진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하고 있는 수 많은 성경의 말씀들과 모순이 됩니다 (요한복음 3:16; 에베소서 2:8-9; 디도서 3:5).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께서는 피조물이시고 성령님은 본질적으로 생명이 없는 힘이라고 믿으며 삼위일체를 거부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리스도의 대속(대신 하신 속죄)의 개념을 거부하고 대신에 몸값 이론(Ransom Theory)을 고수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아담의 죄에 대한 몸값의 지불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여호와의 증인은 성경과 부합되지 않은 이러한 교리들을 정당화 할까요? 첫째, 그들은 교회가 여러 세기에 걸쳐 성경을 부패시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신세계역본(New World Translation)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을 다시 번역하였습니다.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The Watchtower Bible and Tract Society)는 성경이 실제로 가르치는 사실 위에 기반을 두는 대신, 자신들의 거짓된 교리들에 성경을 맞추기 위해 성경의 본문을 바꾸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자신들의 교리들과 모순되는 성경 말씀들을 더욱 더 발견하면서, ‘신세계역본'도 수 많은 편집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파수대(The Watchtower)는 찰스 T. 러셀, 판사 요셉 프랭클린 루더포드, 그리고 그들의 계승자들이 주었던 원래의 가르침과 그것들로부터 확대된 가르침에 자신들의 믿음과 교리들의 근거를 둡니다.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The Watchtower Bible and Tract Society)’의 지도부는 이 이단 안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체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의 말씀에 대해 지도부가 한 말은 마지막 결정으로 간주되며, 독자적인 생각은 강력하게 저지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된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하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멸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어야 한다는 바울의 권면에 상반됩니다. 디모데후서 2:15에서 볼 수 있는 이 권면은 하나님의 자녀들 각자가 매일 자신들이 배운 것이 하나님 말씀과 부합되는지를 비교하며 살펴 보았던 베뢰아 기독교인들과 같이 되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명한 지침입니다.

자신들의 소식을 전파하는데 있어 여호와의 증인들보다 더 충실한 종교적 집단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메시지는 왜곡, 속임, 그리고 거짓 교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 말씀의 참된 가르침에 여호와 증인을 믿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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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종자들이 몰몬교도들 및 말일성도/후기성도(Latter Day Saints)들로 알려진 몰몬교는 200년도 채 안된 과거에 죠셉 스미스라는 이름의 남자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방문을 개인적으로 직접 경험했고, 그에게 모든 교회들과 이들의 종교적 교리들이 가증스러운 것이라 말씀하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셉 스미스는 새로운 종교를 ‘지구 상에서 오직 참된 종교’라고 주장하며 창시하였습니다. 몰몬교의 문제는 그 가르침이 성경에 모순되고, 성경을 수정하고 확대시키는데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이 진실하거나 적절하지 않다고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믿고 신뢰한다는 것은 그분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믿는 것인데, 이는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인되었다는 의미입니다(디모데후서 3:16).

몰몬교도들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말씀은 오직 하나가 아닌 사실 4가지라고 믿습니다. 1) ‘올바르게 번역될 경우’, 성경. 어떤 구절들이 올바르지 않게 번역된 것인지는 항상 명시되지 않습니다. 2) 스미스에 의해 ‘번역되었고’, 1830년도에 발간되었던 몰몬경. 스미스는 지구 상에서 ‘가장 정확한 책’이며 사람이 ‘그 어떤 다른 책’보다 그 수칙들을 따르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 교회가 복구되면서’ 이에 대한 현대의 계시들을 모아 놓은 교리와 성약들(The Doctrine and Covenants). 4) 성경의 잃어버린 교리들과 가르침들을 명확하게 해주고 지구 창조에 관한 자체만의 정보를 더해 주는 것으로 몰몬교도들에 의해 간주되는 값진 진주(The Pearl of the Great Price).

몰몬교도들은 하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최고의 존재는 아니었으나, 정의로운 삶과 끈질긴 노력을 통해 지금의 지위를 얻었고. ‘인간과 같은 유형의 살과 뼈들을 가진 육체’를 지녔다고 믿습니다. 현대 몰몬교 지도자들에 의해 폐기되었지만, 브리검 영은 아담이 실제로는 하나님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였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반해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관한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직 유일하신 한 분의 하나님만 계시고(신명기 6:5, 이사야 43:10, 44:6-8), 그분은 항상 존재하였고 항상 존재 하실 것이며(신명기 33:27, 시편 90:2, 디모데전서 1:1), 그분은 창조되지 않았고 창조주이십니다(창세기 1장, 시편 24:1; 이사야 3:16). 그분 완벽하시며 그 어떤 누구도 그분과 동등하지 않습니다(시편 86:8, 이사야 40:25).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인간이 아니며, 한번도 인간인 적이 없으셨습니다(민수기 23:19, 사무엘상 15:29, 호세아 11:9). 그분은 영이시며(요한복음 4:24), 영은 살과 뼈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누가복음 24:39).

몰몬교도들은 사후에는 다른 계층들이나 왕국들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하늘의 왕국, 지상의 왕국, 가장 낮은 영광의 왕국, 그리고 외부의 흑암. 인간이 어디로 귀결 될 것인가는 이 생애에서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하는 가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서, 성경은 죽은 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었는가의 여부에 근거하여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로서, 우리의 몸들을 떠난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함을 의미합니다(고린도후서 5:6-8). 믿지 않는 자들은 지옥이나 죽은 자들의 장소로 보내집니다(누가복음 16:22-23).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새 몸들을 입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50-54). 믿는 사람들을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을 것이고(요한계시록: 20:1),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불 못으로 던져질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0:11-15). 죽은 후에는 구원을 위한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히브리서 9:27).

몰몬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마리아와의 육체적 관계의 결과였다고 가르쳤습니다. 몰몬교도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지만, 인간 또한 누구라도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몰몬교는 구원을 믿음과 선행들의 조합으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에 반하여, 기독교인들은 역사적으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함 - 가르쳤습니다(사무엘상 2:2).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오로지 하나님의 시각에서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시고(요한복음 3:16), 죄 없고, 결백한 삶을 살았던 유일한 분이셨고, 지금은 천국에서 가장 높은 영광의 보좌에 계십니다(히브리서: 26). 예수님과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하나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육체적 탄생 이전에도 존재하였던 유일한 분이셨습니다(요한복음 1:1-8, 8:56).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희생 제물로 주셨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빌립보서 2:6-11).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행위들로 말미암아 천국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며, 오로지 그분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19:26).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들의 죄들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는 그 형벌을 우리가 피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

분명히,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하나인데, 그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3). 그것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로마서 1:17, 3:28). 우리는 우리가 누구든 또는 우리가 무엇을 하였든 간에 이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로마서 3:2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더라”(사도행전 4:12)

몰몬교도들이 보통 상냥하고, 사랑이 있으며, 친절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고 구원의 수단을 왜곡하는 거짓된 종교에 의해 속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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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하는 우리 시대에 있어, 도덕적 상대주의는 최고의 미덕으로 칭찬받습니다. 모든 철학, 이상, 그리고 신념 체계는 동등한 미덕을 가지고 있고 동등하게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상대주의자는 말합니다. 한 믿음의 체계를 다른 믿음의 체계보다 선호하는 사람들이나 – 훨씬 더 나쁜 것으로 여겨지는 –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속이 좁고, 깨어있지 않거나, 아니면 심지어 편견이 아주 심한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다른 종교들도 역시 상호간에 배타적인 주장들을 하고 있는데, 상대주의자는 이 노골적인 모순들을 논리적으로 조화시킬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7)라고 성경은 주장하지만, 어떤 동양 종교들은 환생을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번 죽는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 번 죽는다는 것입니까? 두 가르침 모두가 진실일 수는 없습니다. 상대주의자는 다양하고 모순적인 ‘진리들’이 같이 공존할 수 있는 자기모순적인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본질적으로 ‘진리’를 재정립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기독교인은 진리를 개념이 아닌 인격으로서 받아들였습니다. 진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소위 오늘날의 ‘열린 마음’으로부터 기독교인을 멀어지게 합니다. 기독교인은 예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였습니다(로마서 10:9-10). 사람이 부활을 진정으로 믿고 있다면, 예수는 결코 부활하지 않았다고 믿는 불신자들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마음을 열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이란 진정으로 하나님을 배역하는 것이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가진 예들로서 믿음의 근본이 되는 것들을 인용하였습니다. 어떤 것들(예수님의 육체적 부활 같은)은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누가 히브리서를 썼느냐 또는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가시’와 같은 다른 문제들은 논쟁의 여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차적인 문제들에 관한 논쟁의 수렁에 빠지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디모데후서 2:23; 디도서 3:9).

아주 현저한 교리를 두고 논쟁/대화할 때라도, 기독교인은 절제하며 존중을 나타내야 합니다. 입장을 달리하는 것과 사람을 폄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진리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고수하면서 연민의 정을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는 은혜와 진리로 넘쳐야 합니다(요한복음 1:14). 베드로는 해답을 가지는 것과 온유함을 가지는 것 사이의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항상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베드로전서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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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지지자들, 지리적 분포 및 사회 문화적 영향 면에서 대표적인 세계 종교 중 하나입니다. 불교는 대체로 ‘동양’ 종교이지만, 서구 세계에서 점점 대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업보(원인과 결과 윤리), 마야(세상의 환상적인 특성), 윤회(환생의 주기)를 가르치는 점에서 힌두교와 공통점이 있지만 나름대로 유일한 세계종교입니다. 불교도들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깨달음"을 얻어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다르타(Siddhartha Guatama, 석가)는 주전 600년경 인도에서 왕족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바깥 세상에 거의 노출되지 않은 채 화려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하였고 통증과 고통으로부터 그를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피난처는 어느새 침투되었고 그는 노인, 병자, 시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네 번째로 본 사람은 평화롭게 보이는 수도승(사치와 편안을 거부한)이었습니다. 그는 수도승의 평화를 보고는 자신도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금욕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기 위해 부요하고 풍성한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자기 고행과 강도 높은 명상에 능숙하여졌습니다.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의 노력은 하나의 마지막 몸짓으로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는 한 그릇의 쌀에 자신을 몰입한 다음 무화과 나무(또는 보리수 나무라고도 불립니다) 아래 앉아서 "깨달음"에 도달하거나 또는 노력하다가 죽으려고 명상하였습니다. 그는 고행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아침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깨달음을 얻은 자” 또는 “부처”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고 이미 그에게 큰 영향을 받고 있던 동료 수도승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동료 다섯 명이 그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고타마(석가)는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깨달음은 호화로운 방종이나 자기 고행이 아니라 ‘중용’에 놓여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알아냈습니다. 1) 사는 것은 고통이다(두카). 2) 고통은 욕망에 의해 생긴다(탄하, 또는 ‘집착’). 3) 모든 집착을 제거함으로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 4) 이는 고귀한 8개의 길을 따름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여덟 개의 길”은 1) 관점, 2) 의도, 3) 말, 4) 행동, 5) 생활(수도사), 6) 노력(바른 방향으로 향하는 에너지), 7) 마음을 씀(명상) , 8) 집중(초점)입니다. 부처의 가르침은 “삼장” 또는 "3개의 바구니"로 모아졌습니다.

이러한 구별된 가르침 뒤에는 힌두교에 공통적인 가르침인 윤회, 카르마, 마야와 현실을 그 방향에 있어서 범신론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교는 또한 신(神)과 고귀한 존재에 대한 정교한 신학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불교 역시 힌두교처럼 하나님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명확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일부 흐름은 합법적으로 무신론으로 불릴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범신론으로 불릴 수 있고, 정토 불교와 같은 유신론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전 불교는 궁극적인 존재의 실체에 대해 침묵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무신론으로 간주됩니다.

불교는 오늘날 매우 다양합니다. 그것은 대략 소승 불교(작은 그릇)와 대승 불교(큰 그릇)의 두 부류로 나뉠 수 있습니다. 소승 불교는 승려가 궁극적인 깨달음과 열반에 이를 수 있도록 준비된 수도원의 형태이며, 대승 불교는 깨달음의 목표를 일반인들, 즉 비 승려들에게까지 확장시킵니다. 이러한 두 범주 내에는 텐다이, 바지라나(밀교), 일련 정종, 진언종, 정토, 선종, 료부 등의 여러 분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부인들이 불교를 이해하고자 할 때 그들이 공부한 것이 고전적이며 역사적인 불교일 때 그 외의 특정 불교학의 모든 세부 내용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는 결코 자신을 신이나 어떤 종류의 신성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길을 보여주는 자'로 여겼습니다. 그는 죽음 이후에야 그의 추종자들 중 일부에 의해 신의 지위에 올려졌지만, 모든 추종자들이 그렇게 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성경 안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진술되어 있습니다(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성경은 또한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하나(요 10:30)라고 말합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고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처럼 자신이 단지 그 길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타마(석가)가 죽을 때 불교는 인도에서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후 300년이 지난 후 불교는 대부분의 아시아에 퍼졌습니다. 부처에게 속한 경전과 말씀은 그가 죽은 후 400년 정도 지난 뒤에 기록되었습니다.

불교에서 죄는 주로 무지로 이해됩니다. 죄는 "도덕적 오류"로 이해되지만, "악"과 "선"을 이해하는 문맥은 도덕과 무관합니다. 카르마(업보)는 자연의 균형으로 이해되며 개인적으로 강요 당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도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업보는 도덕적 규범이 아니며, 죄는 궁극적으로 부도덕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불교의 사상에 따라 말하면, 우리의 실수는 궁극적으로 무인격적인 실수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며 대인 관계의 위반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의 결과는 파괴적입니다. 불교도에게 있어서 죄는 거룩한 하나님의 본성에 반하는 범법이라기 보다 실수에 더 가깝습니다. 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 때문에 정죄 받았다는 선천적인 도덕 의식과 맞지 않습니다(롬 1-2).

이처럼 불교는 죄를 비인격적이고 교정될 수 있는 오류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기본 교리인 타락의 교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는 영원하고 무한한 결과를 가져오는 문제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을 저주스러운 죄에서 구할 구세주가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은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을 얻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불교도에게는 깨달음과 궁극적인 열반에 이르기를 소망하면서 고양된 존재가 되기 위한 윤리적인 생활과 명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엄청난 업보의 빚을 갚으려면 수많은 환생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불교를 진심으로 추종하는 자들에게는 그 종교는 자아를 부인하는 삶으로 포장된 도덕과 윤리 철학입니다. 불교에서 실체는 비인격적이며 비관계적입니다. 그러므로 실체는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하나님은 단지 환상이며 죄는 도덕과 무관한 오류이고 모든 물질적인 실체는 마야("환영")로 거부되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우리 ‘자아’를 잃어 버리게 됩니다. 인격 그 자체도 환상이 됩니다.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누가 우주를 창조했는지 물으면, 불교에서는 시작과 끝이 없기 때문에 침묵을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그 대신 출생과 죽음에는 끝없는 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떤 존재가 우리를 살도록 만들었고, 이렇게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도록 했는지, 또한 왜 계속 죽고 또 죽게 했는지 물을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그 원인이 무엇인지, 왜 괴로움을 주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단번에 죽게 하신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홀로 있지 않으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죽음보다 더 많은 것이 생명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불교는 열반이 존재의 최고 상태이며 순수한 존재의 상태로, 그것은 각 개인과 관련된 수단에 의해 달성된다고 가르칩니다. 열반은 이성적인 설명과 논리적인 질서를 무시하므로 배울 수 없고 오직 깨달을 뿐입니다. 반면에 하늘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몸은 죽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늘에 계신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 위로 올라간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막 12:25). 부처는 각 개인의 자아 또는 존재는 환상이기 때문에 사람은 개인의 영혼을 갖고 있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불교도들에게는, 우리의 영혼과 구원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길을 마련하기 위해 죽으시는 자기 아들을 보내신 자비로우신 하늘 아버지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불교는 거절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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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톨로지(Scientology)는 요약하기가 어려운 종교입니다. 사이언톨로지는 1953년에 공상 과학 소설가인 론 허바드(L. Ron Hubbard)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이를 받아들인 일부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로 인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허바드는 사이언톨로지를 창안한 결과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사이언톨로지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비판 중 하나는 그것이 교묘한 돈벌이 계획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LA 타임스는 허바드 조직의 재정 정책이 허바드 자신의 말로 "돈을 벌고, 돈을 벌어, 다른 사람들도 돈을 벌 수 있도록 만들라"는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Joel Sappell and Robert W. Welkos. “The Scientology Story, Part 2: The Selling of a Church.” latimes. Monday, 6/25/1990, page A1:1. Los Angeles Times. WEB. 11/23/2015).

사이언톨로지는 인류는 원래 이 행성에서 생겨나지 않은 불멸의 존재(테탄이라고 불리움)이고 사람은 물질, 에너지, 공간, 시간(MEST)에 갇혀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이언톨로지 신도들에게 구원은 ‘감사’(監査)라고 불리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그 과정을 통해 "엔그램"(기본적으로 에너지 차단을 일으키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과 무의식)이 제거됩니다. 감사는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몇 억의 돈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모든 엔그램이 마침내 제거되면 테탄은 MEST에 의해 제어되지 않고 다시 MEST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각 테탄은 구원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환생합니다.

사이언톨로지는 매우 돈이 많이 드는 종교입니다. 사이언톨로지의 모든 측면에는 관련된 수수료가 있습니다. 이것이 사이언톨로지의 ‘좌석’이 부유한 사람들로만 채워지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또한 매우 엄격한 종교이며, 그 가르침과 회원권을 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매우 가혹한 처벌을 가합니다. 그 종교의 ‘경전’은 론 허바드의 저서와 가르침에 제한됩니다.

사이언톨로지 신도들은 사이언톨로지가 기독교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그들이 붙든 각각의 모든 믿음과 상충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주의 유일한 주권자이며 창조주라고 가르칩니다(창 1:1). 인류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창 1:27). 사람에게 가능한 유일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믿음으로 은혜에 의해 받게 됩니다(빌 2:8). 구원은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서 사람이 수고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엡 2:8-9).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며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행 2:33; 엡 1:20; 히 1:3). 그분은 천국에서 영원히 자신과 함께 살게 될 자기 백성을 다 모으게 되는 그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실제 지옥으로 떨어져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분리될 것입니다(계 20:5).

사이언톨로지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천국, 지옥의 존재를 단호하게 부정합니다. 사이언톨로지 신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는 불행히도 부당하게 죽임을 당하신 선한 교사에 불과합니다. 사이언톨로지는 모든 중요한 교리에 있어서 성경적인 기독교와 다릅니다. 몇몇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사이언톨로지는 다수의 신이 있으며 몇몇 신들은 다른 신들보다 높다고 믿습니다. 한편, 성경적 기독교는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한 참된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사이언톨로지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다른 이단들과 마찬가지로 사이언톨로지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를 취하는 대신에 그리스도는 수년에 걸쳐 전설적인 지위를 얻은 일종의 작은 신으로 받아들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은 사람의 몸은 입으신 하나님이시며 성육신을 통해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물로 행하실 수 있었다고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요 3:16).

죄: 사이언톨로지는 인간은 본래 선하다고 믿으며, 이에 사람은 회개해야 하고 또는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비열한 것이며 경멸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반면, 성경은 사람은 죄인이며 그를 위한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와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롬 6:23).

구원: 사이언톨로지는 환생을 믿으며, 한 평생 동안의 개인의 구원은 환생과 관련된 출생과 죽음의 순환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모든 종교의 신앙 행위들은 지혜와 깨달음과 구원에 이르는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성경은 오직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이언톨로지의 가르침을 성경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이언톨로지는 단지 하나님과 영생으로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사이언톨로지는 때때로 그들의 믿음을 기독교적인 언어로 가장하지만, 사실상 모든 핵심적인 믿음의 내용에 있어서 기독교와 정면으로 반대됩니다. 사이언톨로지는 분명히 그리고 틀림없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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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기독교와 영지주의는 서로 배타적인 믿음 체계이기 때문에 사실상 기독교 영지주의라는 것은 없습니다. 영지주의의 원칙은 기독교와 모순됩니다. 그러므로 몇몇 형태의 영지주의가 기독교라고 주장하더라도 실제로는 전혀 기독교가 아닙니다.

영지주의는 아마도 처음 3세기 동안 초기 교회를 위협했던 가장 위험한 이단이었을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두 가지 그릇된 전제를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첫째, 정신과 물질에 관한 이원론입니다. 영지주의자는 물질은 본래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전제의 결과로 영지주의자들은 몸으로 행한 일들은 아무리 지독한 죄라도 실제 삶이 존재하는 영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둘째, 영지주의자들은 특정 소수에게만 알려져 있는 "더 높은 진리", 곧 향상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영지주의는 "안다"는 의미를 지닌 헬라 단어 그노시스(gnosis)에서 유래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더 높은 지식을 소유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지식은 성경에서 온 것이 아니라 높은 차원의 신비한 존재로부터 얻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한 더 높고 깊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특권 계층에 속하여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와 영지주의가 양립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릇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신앙의 주요 교리를 비교해야 합니다. 구원에 관해서 영지주의는 어둠의 환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신성한 지식 습득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원래 가르침을 따른다고 주장하지만,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와 모순됩니다. 예수께서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에 관하여 말씀하신 적이 전혀 없으십니다. 구원은 오직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세주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시는 구원은 특별한 계시를 얻은 몇몇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거저 허락된 것입니다(요 3:16).

기독교는 진리의 근원은 하나라고 주장하며, 살아 있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오류가 없는 말씀, 곧 성경이며, 이것만인 믿음과 실천의 유일한 흠 없는 규정이라고 믿습니다(요 17:17; 딤후 3:15-17; 히 4:12). 성경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로서 결코 사람의 생각, 사상, 저술, 또는 비전에 의해 대체되지 않습니다. 한편, 영지주의자들은 영지주의 복음서로 알려진 소위 “성경의 잃어버린 책들”의 모음집이라는 다양한 초기의 이단적인 글들을 사용합니다. 감사하게도 초대 기독교 교부들은 영지주의적인 책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과 하나님과 다른 모든 중대한 기독교 진리에 대하여 거짓 교리들을 담은 사기 위조의 글들이라고 거의 만장일치로 인정했습니다. 영지주의적인 "복음서들"과 성경 사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상충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소위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이 성경을 인용할 때조차도 그들은 그들의 철학과 조화시키기 위해 성경 구절들을 변개시키는데, 이는 성경이 엄격하게 금하고 경고한 일입니다(신 4:2, 12:32; 잠 30:6; 계 22:18-19).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기독교와 영지주의는 크게 다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육체는 실제가 아니라 단지 육체적으로 보였을 뿐이라고 믿습니다. 그분의 영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에게 내려왔다가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처형되시기 직전에 떠났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예수님의 참된 인성뿐만 아니라 속죄까지도 파괴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이셨을 뿐만 아니라 죄를 대신할 수 있는 대속물이 되기 위해 십자가 상에서 실제로 고통 당하고 죽으신 (육체적으로 실제) 사람이기도 하셨기 때문입니다(히 2:14-17). 예수님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그분의 충만한 신성뿐만 아니라 그분의 완전한 인성을 확언합니다.

영지주의는 진리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전혀 새롭지 않은 신비주의적이고 직관적이며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접근을 하며 또한 그 바탕에 서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매우 오래되었으며 어떤 형태에 있어서는 에덴 동산까지 거슬러올라갑니다.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말씀에 질문을 던지며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거절하고 거짓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습니다. 사탄은 오늘날에도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으면서”(벧전 5:8) 똑같은 일을 합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과 성경을 의심하도록 요구하면서 순진하고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과 혹은 특별하고 독특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어떤 개인적인 계시를 찾는 사람들을 그물로 사로잡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여야”(살전 5:21)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유일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일들을 점검하며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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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영성과 건강에 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척한 메리 베이커 에디(Mary Baker Eddy, 1821-1910)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에디는 1866년에 자신의 치유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후 성경 공부, 기도, 다양한 치유 방법 연구에 수년을 보냈습니다. 그 결과로 1879 년에 그녀가 "크리스천 사이언스"이라고 명칭을 붙인 치유 시스템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책 "경전의 열쇠가 되는 과학과 건강(Science and Health with Key to the Scriptures)"은 정신-육체-영의 연결을 이해하는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대학, 교회, 출판사, 정평이 나 있는 신문사인 "더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The Christian Science Monitor)를 설립했습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다른 일반 단체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크리스천 사이언스를 비 기독교적인 사교라고 믿습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요 어머니인 하나님은 완전히 선하시고 그분 전체가 영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참된 본성을 포함하는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처럼 영적으로 흠이 없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선한 것이므로 질병, 죽음, 죄와 같은 악은 근본적인 실체의 일부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악은 하나님과 분리된 삶의 결과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인간의 병을 고치는 핵심 방법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사람이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에서 태어났으며 죄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우리는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없이는 결코 궁극적인 병인 죄를 치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예수께서 우리의 영적인 병을 치유한다고 가르치기보다는(참조, 사 53:5) 그분의 사역은 구원과 관련해서 치유가 중요한 것을 드러내신 것이라고 믿고 그분의 사역을 그들 자신의 패러다임으로 삼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도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실체와 그분의 사랑을 더욱 깨닫고 체험하기를 위해 기도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조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도들에게 있어서 영적 치유는 효과적인 첫 번째 선택이며, 따라서 그들은 치료 대신에 기도의 힘을 의지하게 됩니다. 정부 당국은 특히 미성년자에게 치료가 보류 되는 상황에서 때때로 이 접근법에 도전하곤 합니다. 하지만 교인들의 의료 관련 결정을 명령하는 교회 정책은 없습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목사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 과학과 건강이 목회자와 설교자의 역할을 합니다. 성경 수업은 매일 공부하고 일요일에는 지역 교회로부터 선출된 두 사람의 평신도가 성경을 크게 읽습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교회는 교회 회원 치유와 재생의 경험을 위해 주간 간증 집회를 개최합니다.

현존하는 모든 "기독교" 이단들 가운데서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가장 엉터리 사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기독교도 아니고 과학도 아닙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기독교 시스템을 구축하는 모든 핵심 진리들을 부인합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사실 과학에 반대하며,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인 치유를 위한 방법으로 신비주의의 뉴에이지 영성을 가리킵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반(反) 기독교 이단으로 인정되고 거부되어야 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세상에 있는 수 많은 서로 다른 종교들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 종교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분명히 도전적인 일입니다. 먼저, 전반적으로 이 주제에 대해 몇 가지를 고려한 다음 실제로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방법으로 이 주제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특정 쟁점에 대해 서로 다른 대답으로 도전하는 것은 종교의 주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100 명의 수학 학생들을 앉혀놓고 그들에게 풀기 힘든 문제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 대부분이 틀린 답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맞는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답을 틀리게 답변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오류가 무엇이고 또한 어떻게 정답에 도달할 수 있는지 그 기술을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한 진리에 도달합니까? 우리는 진리에 대한 여러 가지 테스트를 사용할 것인데 이를 위해 진리와 오류를 구분하도록 설계된 체계적인 방법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테스트의 최종 결과는 올바른 결론입니다. 과학자가 실험실에 들어가 이유도 까닭도 없이 아무렇게나 물질들을 섞기 시작했다면 최종 결과가 어떻게 될지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또는 의사가 환자에게 그가 낫기를 바라면서 아무렇게나 무작위로 약을 투여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학자든 의사든 이러한 접근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며, 증거가 있으며, 올바른 결과를 도출하는 것으로 입증된 조직적인 방법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신학(하나님에 대한 연구)이 달라야 합니까? 왜 신학은 아무렇게나 무작위로 접근해도 올바른 결론을 낼 것이라고 믿습니까? 불행하게도,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취하는 접근이며, 이것이 그렇게 많은 종교들이 존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즉, 우리는 이제 하나님에 관한 진실된 결론에 도달하는 방법에 관한 문제로 돌아갑니다. 어떤 체계적인 접근법을 사용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는 진리로 주장되는 다양한 교리들을 테스트하기 위한 틀을 구축할 필요가 있고,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따라야 할 지도가 필요합니다. 다음은 우리가 사용할 멋진 틀입니다.

1. 논리적 일관성 - 신앙 체계의 주장들은 논리적으로 서로 일관되어 있어야 하며 어떤 식으로든 모순되지 않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불교의 최종 목표는 모든 욕망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사람은 모든 욕망을 제거하려는 욕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모순이며 비논리적인 원칙입니다.

2. 경험적 타당성 - 신앙 체계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증거가 합리적인지, 외부 증거인지 등을 따져야 합니다). 당연히 어떤 주장을 입증하려면 중요한 주장들에 대한 증명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몰몬교는 예수님이 북미를 방문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고고학적 또는 다른 증거들이 전혀 없습니다.

3. 실존적 관련성 - 신앙 체계는 아래에 묘사된 삶의 큰 문제를 다루어야 하고 그 가르침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정확하게 반영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삶의 큰 문제에 대해 훌륭한 답변을 제공하지만, 때로는 참으로 악으로 가득한 세상과 함께 선하시고 전능하신 강력한 하나님이 존재하는 지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비평가들은 그러한 문제는 비록 훌륭한 많은 답변들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실존적 관련성의 기준을 위반한다고 주장합니다.

종교의 주제에 위의 틀을 적용하면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관점을 갖는데 도움을 받게 될 것이며 삶의 네 가지 큰 질문에 답변을 할 것입니다.

1. 기원 - 우리는 어디서 왔습니까?
2. 윤리 -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3. 의미 -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4. 운명 - 인류는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이 기본 틀을 어떻게 적용합니까? 단계별로 질문하고 답변하는 접근 방식은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가능한 질문들의 목록을 좁히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1. 절대 진리가 존재합니까?
2. 이성과 종교가 혼합됩니까?
3. 하나님은 존재합니까?
4.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5. 예수님은 하나님입니까?
6. 하나님은 나를 돌보십니까?

먼저 우리는 절대 진리가 존재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로 (영적이든 아니든) 무엇이든 확신할 수 없으며, 우리는 무언가를 참으로 알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불가지론자가 되든지 또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입장을 받아들이는 다원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절대 진리란 실체와 일치하는 것, 그리고 주장한 그대로 그 대상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정의됩니다. 어떤 이들은 절대 진리와 같은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런 입장을 취하는 것은 스스로 자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상대주의자는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다"라고 말하지만, 반드시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상대주의가 주장하는 그 진술은 절대적으로 사실입니까? 그 진술이 사실이라면 그 진술에 의해 절대 진리가 존재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 진술을 고려해야 합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은 아무런 진리를 확증하지 못하면서 한가지 절대 진리를 확증하는데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은 진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 입장에서 절대적인 진리가 부인될 수 없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절대 진리는 자연적으로 좁으며 그 반대를 배제합니다. 2+2는 4와 같으며 다른 대답은 불가능합니다. 이 점은 서로 다른 신앙 체계와 세계관을 비교할 때 대단히 중요합니다. 만일 어떤 신앙 체계에 사실로 입증된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경우 반대 주장을 하는 경쟁 신앙 체계는 반드시 틀린 것이 됩니다. 또한 절대 진리는 진심과 바람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거짓말을 받아들이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거짓말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원해도 거짓을 참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질문 1의 답은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불가지론, 포스트모더니즘, 상대주의, 회의론은 모두 잘못된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 다음은 종교 문제에서 이성 및 논리가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왜 안됩니까? 진실은, 영적 주장을 검토할 때 논리는 중요합니다. 그래야 어떤 비논리적인 주장들이 왜 배제되고 어떤 다른 주장들이 왜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논리는 다원주의(모든 진리 주장들은 서로 상반되더라도 동일하며 타당한 주장이라고 함)를 해체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와 유대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고 기독교는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논리의 핵심 법칙 중 하나는 동시에 무언가가 "A"와 "A가 아닌 것"이 될 수 없다는 비 모순의 법칙입니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주장에 이 법을 적용하는 것은 하나는 옳고 다른 둘은 틀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논리가 제대로 사용되면 다원주의를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왜냐하면 논리는 서로 상반되는 진리 주장에 있어서 양측 주장이 다 진리일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이해는 "당신에게 참되더라도 내게는 그렇지 않다”는 사고 방식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논리는 또한 다원론자들이 사용하는 "모든 길은 산 꼭대기로 연결된다"라는 유추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논리는 각 신앙 체계는 근본적으로 그 끝이 다른 표지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드러냅니다. 논리에 따르면 영적 진리를 찾는 모습에 대한 적절한 그림은 미로와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하나의 길만이 진리에 도달하고 나머지 길들은 막 다른 골목에 도착합니다. 모든 신앙은 표면적으로는 유사하지만 핵심 교리에 있어서는 크게 다릅니다.

결론은 종교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이성과 논리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원주의(모든 진리 주장이 똑같이 참되고 타당하다는 믿음)는 정반대의 진리 주장이 옳을 수 있다고 믿는 비논리적이고 모순적인 사상이기 때문에 배제됩니다.

그 다음으로 큰 질문은 ‘하나님은 존재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무신론자와 자연주의자(물리적 세계 및 우주를 초월하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음)는 "아니오"라고 말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역사를 통틀어 방대한 양이 기록되어 있고 논쟁이 격렬하였지만 실제로는 대답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 우선 이 질문을 하겠습니다. “왜 우리는 전혀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뭔가를 가지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당신과 당신 주변의 모든 것이 어떻게 여기에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논증은 매우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습니다.

무언가 존재합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뭔가를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필요하고 영원한 이가 존재합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 자신을 부정하기 위해 당신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전제인 “무언가 존재합니다”는 참입니다. 사람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재정의하지 않는 한, 뭔가 어떤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전제인 “당신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뭔가를 얻지 못합니다.”도 참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만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책임지는 영원한 존재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무신론자들이 이 입장에 대해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우주가 그 영원한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의 문제는 모든 과학적 증거에 따르면 우주가 시작을 가지고 있어야(빅뱅)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시작이 있는 모든 것은 그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주는 원인을 가지고 있으며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두 가지 영원한 근원은 영원한 우주(모든 현재의 경험적 증거에 의해 부인됨) 또는 영원한 창조주인데, 유일하게 내려지는 논리적인 결론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긍정적으로 확답할 경우 무신론은 타당한 신앙 체계로서 설 수가 없습니다.

자, 이 결론은 어떤 종류의 하나님이 존재하는가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지만, 놀랍게도 모든 범신론적인 종교를 배제시키면서 그러한 종교들을 한 방에 쓸어버리는 일을 합니다. 모든 범신론적인 세계관은 우주는 하나님이며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거짓입니다. 따라서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그리고 다른 모든 범신론적 종교는 타당한 신앙 체계에서 배제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우주를 창조하신 이 하나님에 대하여 흥미로운 것을 배웁니다. 그분은,

• 자연 속에 계신 초자연적인 존재입니다(창조물 밖에 존재하시는 것처럼)
• 전능하십니다(알려진 모든 것을 만드실 정도로)
• 영원하십니다(스스로 존재하며 시간과 공간 밖에 존재하시며 스스로 존재하십니다)
• 무소 부재하시고(그분은 공간을 창조하셨으며 공간에 의해 제한 받지 않으십니다)
• 시간을 초월하시며 변함이 없으십니다(그분은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 비 물질적이시고(공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 인격적이시며(무인격체가 인격체를 창조할 수 없으므로)
• 반드시 필요한 분이시고(다른 모든 것은 그분을 의존하고 있음)
• 무한하신 유일한 분이시고(두 개의 무한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 다양성을 지니시지만 통일성을 지닙니다(모든 다중성은 이전의 단일성을 의미합니다).
• 지능이 있으시며(모든 것을 창조하실 정도의 최고의 지능을 지니십니다)
• 목적이 있으시고(의도적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듯이)
• 도덕적이시며(도덕적인 법은 입법자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 돌보십니다(그렇지 않다면 도덕적인 법률이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분은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하나님과 매우 흡사한 특징을 보여주는데 흥미롭게도 이 종교들은 무신론과 범신론이 제거된 이후에 유일하게 남은 핵심 신앙들입니다. 또한 생명에 대한 가장 큰 질문 중에 하나(기원)가 이제 답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이 시점에서 종교의 필요성에서 계시의 필요성으로 넘어갑니다. 사람이 이러한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은 자신의 피조물에게 친히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는 모두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라는 책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문제는 그 중에 어떤 계시가 참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차이점을 제외하면, 논쟁의 두 가지 핵심 영역은 1) 성경의 신약과 2)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이슬람교와 유대교는 성경의 신약 성서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한편, 기독교는 두 핵심 모두가 진실임을 확증합니다.

이 땅에서 기독교처럼 그렇게 많은 증거를 가진 종교는 없습니다. 방대한 양의 고대 사본들로부터, 목격자들이 평생 동안 기록한 문서들(어떤 문서들은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겨우 15 년 정도 된 것도 있습니다), 기사의 다양성(신약 27 권에 9 명의 저자들이 관련되어 있습니다)과 고고학적인 증거에 이르기까지(이 증거들은 신약 성경이 주장하는 것들 중에서 단 하나라도 상충되는 것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죽음에 이르면서도 예수님을 실제로 보았고 또한 그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을 보았다는 사도들의 증언까지, 기독교의 주장들을 뒷받침해 주는 장벽처럼 쌓인 증거들이 있습니다. 일단 이 모든 증거들이 검토되면 신약 성경의 역사적인 진실성, 곧 실제 발생한 사건을 그대로 진실하게 기록하였다는 사실이 반드시 확인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관련해서는 매우 특이한 사항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육체로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내가 있었다"), 그분의 행동(예, 죄사함, 경배를 받으심), 죄 없는 기이한 삶(반대 주장에 대하여 자신의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사용하심), 그리고 그분의 부활은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그분의 주장을 전부 지지합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그들의 글에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 사실을 확증합니다.

자,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참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예수님이 성경은 그 모든 내용에 있어서 오류가 없고 참되다고 말하였다면, 성경이 선포하는 내용은 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배웠듯이, 두 개의 경쟁 진리 주장은 둘 다 옳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슬람 코란이나 유대교의 글에서 성경과 모순되는 것은 참일 수 없습니다. 사실, 모든 증거들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이슬람과 유대교는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에 불합격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에(하나님께서 그분의 기록된 말씀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모든 형태의 불가지론은 거부됩니다. 마지막으로, 삶에 대한 또 다른 큰 질문, 곧 윤리 문제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지침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답변을 얻게 됩니다.

이 동일한 성경은 하나님이 인류를 깊이 돌보시며 모든 사람이 그분을 친밀하게 알기를 바라신다고 선언합니다. 사실, 주님은 그의 피조물에게 자신이 어떠한 분인지 정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되고자 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사람이 되려고 했던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그분으로부터 영원토록 분리된 자들을 깊게 사랑함으로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기독교의 실존적 관련성을 보여주며 삶의 의미와 운명에 관한 마지막 두 가지 큰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합니다. 각 사람은 어떤 목적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디자인되었으며, 자기를 기다리는 운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 운명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거나 또는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운명입니다. 이러한 연역(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은 또한 하나님은 사람의 일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이신론을 반박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세계관 미로는 다양한 진리 주장들을 시험하고, 체계적으로 거짓을 제쳐두고 오직 진리만 남게 함으로써 성공적으로 탐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논리적 일관성, 경험적 타당성, 실존적 관련성의 테스트를 사용하여 올바른 질문을 던지면서 종교와 하나님에 관한 진실하고 합리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었습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믿는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라는데 동의합니다. 슬프게도, 아무리 많은 논리적인 증거를 제시하여도 실제 믿음은 의지의 문제인지라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참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분과 조화를 이루는 참된 길을 버리기를 선택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유대교란 무엇이며, 유대인들은 누구인가? 유대교는 단순한 종교인가? 문화적인 정체성인가? 아니면 단지 민족 집단입니까? 유대인은 민족인가, 국가인가? 유대인들은 무엇을 믿으며, 그들은 모두 똑같은 것을 믿는가?

사전은 "유대인"에 대해 정의하기를, "유다 지파의 일원", "이스라엘 사람", "기원전 6세기부터 주후 1세기까지 이스라엘 땅에 있었던 나라의 일원", "고대 유대인의 후손이거나 개종을 통해 연결된 사람", "종교가 유대교인 사람"을 포함합니다.

랍비 유대교에 따르면, 유대인은 유대인 어머니가 있거나 유대교로 공식 개종한 사람을 말합니다. 토라는 이 전통을 지지하는 구체적인 주장을 하지 않았지만 레위기 24장 10절은 종종 이 신앙의 신뢰성을 부여하기 위해 인용됩니다. 어떤 랍비들은 유대인이 되는 것은 개인이 실제로 믿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랍비들은 유대인이 유대인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율법과 관습을 따르는 사람일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유대인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더라도 위의 랍비적인 해석에 기초하여 여전히 유대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랍비들은 사람이 토라의 교훈을 따르지 않고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중세의 가장 위대한 유대인 학자 중 한 사람)의 "13 개의 신앙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유대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이런 사람은 "생물학적인" 유대인일수는 있어도 유대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인 토라 안에서 창세기 14장 13절은 일반적으로 첫 번째 유대인으로 인정된 아브람이 “히브리인"으로 묘사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유대인"이라는 이름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하나이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하나인 유다라는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분명히 유대인이라는 이름은 원래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언급되었지만 왕국이 솔로몬의 통치 이후에 나뉜 후에는(열왕기상 12장) 유다, 베냐민, 레위 지파를 포함하던 유다 왕국의 백성 모두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원래 열두 지파 중 유다 지파에 속하는지에 대해서는 상관없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실제 자손들을 유대인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믿는 것은 무엇이며 유대교의 기본 교훈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세계에는 유대교의 다섯 가지 주요 형태 또는 종파가 있습니다. 그 종파들은 정통 유대교, 보수 유대교, 개혁 유대교, 재건 유대교, 인본주의 유대교입니다. 각 파의 신앙과 요구 사항은 크게 다릅니다. 그러나 유대교에 대한 전통적인 신앙의 간추린 목록은 다음 사항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몸이 없는 무형의 존재이시며, 그분만이 우주의 절대 통치자로서 숭배를 받아야 한다.

히브리어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은 하나님에 의해 모세에게 계시되었다. 그 책들은 미래에 변경되거나 추가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유대인들과 교통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활동을 지켜보신다. 그분은 각 개인의 선한 행동에 상을 베푸시고 악에 대해 처벌하신다.

비록 기독교인이 유대인과 같이 그들 믿음의 상당 부분을 히브리어 성경에 두고 있지만 신앙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인은 일반적으로 활동과 행동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신앙은 행동에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보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행동은 믿음의 결과라고 믿습니다.

유대인의 믿음은 원죄에 대한 기독교 개념(모든 사람이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지시에 불순종했을 때 그들의 죄를 물려 받았다는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유대교는 세상과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선하다고 확증합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미츠바(mitzvoth, 하나님의 명령들)를 성취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원자가 필요 없고 또한 중보자도 필요 없습니다.

레위기 및 다른 책들에서 발견된 613 계명은 유대인 생활의 모든 면을 규제합니다. 출애굽기 20장 1-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에 묘사된 십계명은 율법의 간략한 개요를 형성합니다.

메시아(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장래에 오셔서 다시 한 번 유대인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모을 것입니다. 그 때에 죽은 자의 일반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로마인들이 주후 70년에 멸망시킨 예루살렘 성전은 재건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상당히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도덕 선생으로 봅니다. 다른 이들은 그분을 거짓 선지자 또는 그리스도교의 우상으로 봅니다. 유대교의 일부 종파는 우상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조차 말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종종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 불립니다. 이 말은 그들이 다른 그룹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과 같은 성경 구절은 하나님이 단지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토라를 받아 연구하게 하셨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안식일에 쉬며 절기를 지키도록 하셨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우월하도록 선택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이방인들에게 빛이 되고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선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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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業報, Karma)는 불교와 힌두교에서 발견되는 신학적 개념입니다. 업보는 당신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환생 이후에 살게 될 삶의 질이 결정된다는 사상입니다. 평생 동안 이타적이고 친절하며 거룩하게 살았다면 환생 이후에(이 땅에서 새로운 몸으로 태어난 후) 즐거운 삶으로 보상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악한 삶을 살았다면, 당신은 덜 즐거운 생활 방식으로 환생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생에서 뿌린 것을 다음 생에서 거두게 됩니다. 업보는 환생에 대한 신학적인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성경은 윤회 사상을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업보 사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합니다. 이 성경 구절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두 가지 핵심 사항, 곧 환생과 업보의 가능성을 분명하게 부정합니다. 첫째, 이 구절은 인간은 단지 한 번 태어나고 한 번만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한번 죽는 것은"이라고 명시합니다. 환생 이론에 내재하는 사상, 곧 생과 죽음의 끝없는 순환은 성경에 없습니다. 둘째로, 이 구절은 죽음 이후에 우리는 심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즉, 환생과 업보에 있는 것처럼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단 한번 살면, 그것이 전부입니다.

성경은 심고 거두는 파종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욥기 4장 8절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라고 말합니다. 시편 126편 5절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2장 24절은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말합니다. 심고 거두는 모든 내용들 및 위의 경우들을 살펴보면, 당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은 미래의 생애가 아닌 현생에서 받습니다. 그 구절들은 행동은 현재의 행동이며, 당신이 행한 행동에 합당한 열매를 거둘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당신이 이생에서 심은 것은 내세에서 당신이 받을 보상 또는 형벌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 내세는 이 땅에서 다시 태어나거나 또는 다른 몸으로 환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세는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거나(마 25:46)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과 영원히 하늘에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8-9절에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썼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거두도록 만든 것은 십자가 상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생과 업보의 개념이 삶과 죽음, 영생에 관해 심고 거두는 법칙으로 가르친 성경과 양립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종교와 영성의 차이를 탐구하기 전에 먼저 두 가지 용어를 정의해야 합니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행동과 의식으로 표현되는 숭배를 받을 하나님 또는 신들에 대한 믿음” 또는 “종종 윤리 강령을 포함한 어떤 특정 신앙, 예배 등의 체계”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영성은 “비 물리적인 영적인 질 또는 상태” 또는 “생각과 삶 등에서 보여지는 어떤 주된 영적인 특징, 영적인 성향 또는 분위기”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종교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사람이 가져야 할 신앙 또는 의식(儀式)의 집합이며, 영성은 육체적/세상적인 것들 대신에 영적인 것들과 영적인 세상에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종교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기독교가 단지 이슬람, 유대교, 힌두교 등과 같은 또 다른 종교 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기독교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종교처럼 취급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죽음 이후에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지켜야 할 규칙과 의식의 집합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가 아닙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메시아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에도 지켜야 할 의식들이 있습니다(예를 들면, 세례와 성찬). 그렇습니다. 기독교에도 따라야 할 규정들이 있습니다(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 서로 사랑하라 등). 그러나 이러한 의식과 규정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의식과 규정은 구원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으면, 그 믿음을 공표하기 위해 세례를 받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성찬을 지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분이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로 인하여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목록을 따릅니다.

영성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는 많은 영성의 형태들이 있고 그 형태들 모두가 똑같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신체 자세에서의 묵상, 자연과의 대화, 영의 세계와의 대화 추구 등은 "영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거짓 영성입니다. 참된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참된 영성은 성령께서 사람의 삶을 통해 맺는 열매로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입니다. 영성은 영이신 하나님(요 4:24)을 더욱 닮는 것이 전부이며 우리의 성품이 그분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롬 12:1-2).

종교와 영성이 갖는 공통점은 둘 다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데 있어서 잘못된 방법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대신에 마음도 없는 의식을 준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성은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대신에 영의 세계와 연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둘 다 종종 하나님을 향한 거짓 경로가 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종교는 하나님이 존재하고 우리는 어떻게든 그분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는 의미에서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종교의 유일하고 참된 가치는 우리는 부족하여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능력입니다. 영성은 물리적인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해 주는 점에서 귀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물질뿐만 아니라 영혼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영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영성의 진실한 가치는 우리가 연결할 필요가 있는, 어떤 물리적인 세계를 초월하는 존재 또는 인격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와 영성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직고해야 하는 대상이고, 참된 종교가 지시하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연결해야 할 분이시며 진정한 영성이 가리키는 분이 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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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모든 종교가 의심할 필요 없이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는 주장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때때로 절대 진리에 도달하는데 절망을 주며 혼란을 가져옵니다. 그들은 모든 종교가 하나님께로 인도한다고 주장하는 만인보편주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물론 회의론자들은 그렇게 많은 종교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 수 없거나 단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증거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로마서 1장 19-21절은 왜 그렇게 많은 종교가 있는지에 대한 성경적인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보이고 알게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대신에 진리를 거부하고 그들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에 관하여 깨닫도록 인도하지 못하고 단지 허망한 생각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종교들”의 기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와 도덕을 요구하는 하나님을 믿기를 원치 않으므로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 하나님을 지어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하늘에 올라갈 수 없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특정 단계를 완료하고, 특정 규칙을 따르고, 적어도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특정 법률을 준수하면 사람들을 천국에 수용하는 그런 하나님을 지어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권적이고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격적이고 주권적인 통치자로서의 하나님보다는 차라리 신비한 힘을 소유한 하나님을 상상합니다.

그렇게 많은 종교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반대하는 논쟁이나 하나님에 관한 진리가 분명하지 않다는 주장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종교가 존재하게 된 이유는 인류가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그들의 기호에 더 잘 맞는 신들로 하나님을 대체했습니다. 이것은 위험한 사업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형상대로 재창조하고자 하는 바람은 결국 “멸망을 거두게 되는”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에서 나옵니다(갈 6:7-8).

모든 종교가 하나님께로 인도합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도합니다. 오직 하나, 곧 기독교만이 그분의 용서와 영생으로 인도합니다. 사람이 어떤 종교를 받아들이든 모든 사람은 죽음 이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히 9:27). 모든 종교는 하나님께로 인도하지만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하나님의 승인을 받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들만이 자신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영원은 잘못되어 있기에는 몹시 긴 시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생각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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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가 언급하려는 것은 창조론 대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인 논쟁이 아닙니다. 창조론 대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인 논증을 위한 것으로, 창세기와 창조 연구 기관에서 제공하는 해답들을 우리는 자신 있게 추천합니다. 이 글의 목적은 창조론 대 진화론의 논쟁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성경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5은 공표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논쟁의 핵심 요인은 진화론을 믿는 대다수의 과학자들 역시 무신론자들이거나 불가지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어떤 형태의 진화론을 고수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은 존재하지만 세상에 관여를 하지 않고, 모든 것은 자연 법칙대로 움직인다). 데이터를 실제로 정직하게 살펴보고 진화론이 데이터에 더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일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진화론을 옹호하는 과학자들의 극소수의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진화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더 높은 존재의 어떠한 개입도 없이 생명은 전적으로 진화되었다고 믿습니다. 진화론은 자연 과학으로 정의됩니다.

무신론이 사실이 되려면, 우주와 생명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 창조자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 대체되는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진화론의 일부 형태를 믿는 것은 찰스 다윈 전에도 존재했었지만, 그는 진화 과정 – 자연 도태 – 의 그럴듯한 모델을 처음으로 발전시켰던 사람이었습니다. 찰스 다윈은 한때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밝혔지만, 그의 삶에 일어났던 어떤 비극들의 결과로 나중에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진화는 무신론자에 의해 고안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반증하려는 것이 다윈의 목적이 아니었지만, 그것은 진화론의 최종 결과물들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진화는 무신론이 성공하는 요인입니다. 진화론을 믿는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생명의 기원에 대해 대체되는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무신론의 기초를 마련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에 따르면, 바로 그것이 진화론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편 14:1; 53:1). 성경은 또한 사람들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핑계가 있을 수 없다고 공표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로마서 1:20).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어떤 사람이라도 어리석다 말합니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인들까지 포함해서,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을 믿는 과학자들이 과학적인 데이터를 편견 없이 해석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받아 들이려 하는 것일까요? 성경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어리석음은 지적 부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화론을 믿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지적으로 명석한 사람들입니다. 어리석음은 지식을 적절하게 적용할 수 없는 무능함을 가리킵니다. 잠언 1:7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진화론을 믿는 과학자들은 창조론과/또는 지적 설계를 비과학적이며 과학적 연구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비웃습니다. 어떤 것이 “과학”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관찰되고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그것은 “자연주의적”이어야 합니다. 창조는 정의상 “초자연적”입니다. 하나님과 초자연적인 것은 관찰되거나 검증될 수 없습니다(그래서 논증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창조나/또는 지적 설계는 과학으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진화도 역시 관찰되고 검증될 수 없지만, 진화론자들에게는 문제가 되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데이터는 대체적인 설명에 대한 고려도 없이, 선입관적이고, 미리 목적한 바가 있으며, 그리고 미리 받아들여진 진화론을 통해 걸러집니다.

그러나, 우주와 생명의 근원은 모두 실험으로 입증되거나 관찰될 수 없습니다. 창조와 진화 둘 다는 근원에 관한 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체계입니다. 어느 것도 검증될 수가 없는데, 이는 우리가 우주나 생명의 근원을 관찰하기 위해 수십 억년(또는 수 천년) 전으로 돌아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을 믿는 과학자들은 창조론을 거부하는데 이 거부하는 근거 또한 그들로 하여금 진화를 근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라고 논리적으로 받아 들일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최소한 근원을 밝히는 데 있어 창조론 보다 “과학”이란 정의에 더 맞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화가 근원에 대한 검증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일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러므로, 진화가 “과학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근원에 관한 유일한 이론이라고 합니다.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진화를 옹호하는 과학자들은 근원에 대해 사실일지도 모들 이론의 장단점을 정직하게 검토조차 하지 않고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데, 이는 그것이 그들의 비논리적이고 편협한 “과학”의 정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창조론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 창조주가 존재하게 됩니다. 진화는 무신론이 성공하는요인입니다. 진화는 무신론자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제쳐 놓고 생명의 존재를 설명하는 기반을 제공합니다. 진화는 하나님께서 우주에 관련하실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진화는 무신론을 믿는 종교를 “창조하는 이론”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선택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고, 아니면 비논리적이고 편견에 찬 바보 같은 사람들의 “과학적” 설명을 믿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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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어떤 현상의 “관찰, 파악, 설명, 실험적 조사, 그리고 이론적 설명” 으로 정의 됩니다. 과학은 자연적 우주에 대한 더 큰 이해를 얻기 위해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과학은 관찰을 통한 지식을 탐구합니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논리와 상상이 미치는 범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과는 절대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어떤 것이 완벽하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사실을 우리가 기억 하는 한, 기독교인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면서 과학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신앙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아들과, 교육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인도함을 받기 위한 성령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은 절대적이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로, 완벽하고,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에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과학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지적인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닙니다. 우리가 많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기 위해 과학을 의지할 수는 있으나, 실수들을 저지르는 과학 역시 인정해야 합니다. 과학을 믿는 다면, 우리는 또한 불완전하고, 죄스러우며, 유한하고,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들을 의지하게 됩니다. 역사를 통틀어 과학은 지구의 모양, 동력 비행, 백신, 수혈, 그리고 복제 같은 많은 것들에 대해 잘못들을 저질러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을 벗어나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진실은 두려워할게 하나도 없기에, 기독교인이 선한 과학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우주를 구축하신 방법에 대해 더 많이 배운다는 것은 인간 모두가 창조의 경이로움에 대해 감사하게끔 해줍니다. 지식의 영역을 넓힘으로써, 질병, 무지, 그리고 오해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우리의 창조주보다 인간적인 논리에 더 둘 때, 위험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종교에 헌신된 어느 누구와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선택한 것이며 그 믿음을 방어하기 위해 사실들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가장 이성적인 과학자들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들 조차, 여전히,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온전하지 않음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입증되거나 입증 될 수 없는 자신들이 선호하는 많은 이론들처럼, 하나님이나 성경도 입증되거나 입증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과학은 사안의 조장이 아닌 오직 진실만을 추구하는 참으로 중립적인 학문입니다.

과학은 대체로 존재와 하나님의 업적을 지지합니다. 시편 19:1은 말씀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현대 과학자들이 우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발견할수록, 우리는 창조의 더 많은 증거를 보게 됩니다. DNA의 놀라운 복잡성과 재생산, 물리역학의 복잡하게 얽히고 서로 맞물린 법칙들, 여기 지구의 환경 조건들과 화학적 요소들의 완전한 조화, 이 모두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실을 지지하는데 공헌합니다. 기독교인은 진실을 추구하는 과학을 포용해야 하지만, 인간의 지식을 하나님보다 더 높게 여기는 “과학의 성직자들”은 거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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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따라, 아담이 우리의 지구 행성이 존재하고 여섯 번째 날에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우리는 인류의 연대기적 세부 사항들을 통해 성경에 기초한 지구의 대략적 나이를 밝힐 수가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의 서술이 정확하고, 6일 동안의 창조가 문자 그대로 하루 24시간에 기준한 기간이며, 그리고 창세기의 연대순서에 있어 애매모호한 공백들이 없다는 추정 하에서 입니다.

창세기 5장과 11장에 나열된 계보는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이어지는 혈통에 있어 아담과 각 세대의 조상이 되었던 그의 후손들의 나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역사적으로 어느 연대에 속했는지를 결정하고 창세기 5장과 11장에서 제공 되는 나이들을 더 하면, 성경이 지구의 나이가 몇 백 년의 오차 범위 안에서 대략 6000년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

그럼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거의 대부분의 우리 교육 기관들에 의해 가르쳐지고 있는 수십 억년이란 지구의 나이는 어떻게 되나요? 이 나이는 주로 두 가지 연대 측정법들로부터 얻어집니다: 방사능 연령 측정과 지질 연대입니다. 약 6000년의 지구의 어린 나이를 옹호하는 과학자들은 지질 연대는 그것이 순환론을 채택하는데 있어 오류가 있고, 방사능 연령 측정은 일련의 불완전한 가정들에 기초하는 오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더욱이, 그들은 지층화, 화석화 되고 그리고 다이아몬드, 석탄, 석유, 종유석, 석순 등이 형성되는데 오랜 기간이 소요된다는 대중적인 오해처럼 지구가 오래되었다는 미신의 정체가 틀렸음을 폭로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린 지구 나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틀렸다고 폭로한 오래된 나이의 지구에 대한 증거들 대신에 지구의 나이가 어리다는 긍정적 증거를 제시합니다. 어린 지구 나이를 옹호하는 과학자들은 오늘날 자신들이 소수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과학자들이 더욱더 증거를 재 조사하고 현재 받아들여 지고 있는 오래된 지구의 인식 체계를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들의 순위는 시간이 지나면 바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지구의 나이는 입증할 수 없습니다. 6,000년이든 혹은 수십 억년이든, 이 두 견해들(그리고 둘 사이의 모든 견해들)은 믿음과 가정에 기초합니다. 수 십 억년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방사능 연령 측정과 같은 방법들이 신뢰할 수 있고 방사성 동위 원소의 정상적인 부식을 방해할 수 있는 그 어떤 사건도 역사상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6,000년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성경은 진실하고 다른 요인들이 전 세계적 홍수나 매우 오래 된 상태로 “보이는” 하나님의 우주 창조를 설명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한 예로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를 완전히 자란 성인들로서 창조하셨습니다. 의사가 아담과 이브가 사실상 하루보다 더 적은 나이일 때, 그들을 검사했었다면, 그 의사는 그들의 나이를 20살이라고 평가 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진화론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고 무신론자들인 과학자들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 더 좋은 이유는 항상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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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 Theory)은 복잡하고, 정보가 풍부한 생물학적 구조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적인 원인들이 필요하며 이러한 원인들은 경험적으로 탐지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생물학적 특성들은 표준적인 다윈의 무작위-기회 라는 설명에 반대하는데, 이는 그것들이 설계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설계는 논리적으로 지적인 설계자를 필요로 하고, 설계의 외관은 설계자가 있다는 증거로 인용됩니다. 이 지적 설계론에는 세 가지 주요 논증들이 있습니다: 1)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복잡성, 2) 특정화된 복잡성 3) 인류 발생론의 원리.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복합성은 “...기본적인 기능에 기여하고 서로 잘 어우러지는 몇 개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체계인데, 이 부분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거 되면 그 기능의 효과적 작용이 마비되는 체계”로 정의 됩니다. 간단히 말해, 생명이 작동하기 위해 상호 의존하며 얽혀 있는 부분들로 구성됩니다.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는 새로운 부분의 성장에 대해 설명할 수는 있겠으나, 체계를 작동하는데 필요한 여러 부분들에 있어 동시에 발생하는 성장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눈은 분명히 유용한 체계입니다. 안구, 시신경, 그리고 시각 피질 없이, 무작위적으로 돌연변이가 된 불완전한 눈은 실제로 어던 종의 생존에 역효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자연 선택의 과정을 통해 제거될 것입니다. 눈의 모든 부분들이 갖춰지지 않고 동시에 제대로 작동이 안 된다면 눈은 유용한 체계가 되지 않습니다.

특정화된 복잡성은, 특정화 되고 복잡한 패턴들이 생물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정보만이 그것들의 기원을 설명할 수 밖에 없다는 개념입니다. 특정화된 복잡성에 대한 논증은 복잡한 패턴들이 무작위적인 과정들을 통해 발달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면, 100마리의 원숭이들과 100대의 컴퓨터들로 가득 찬 방에서는 결국 몇 가지 단어들이나, 아니면 아마 한 문장 정도가 만들어질 수는 있다 할지라도, 결코 세익스피어의 극본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세익스피어의 극본보다 생물학적인 생명이 얼마나 훨씬 더 복잡합니까?

인류발생론의 원리는 세계와 우주가 지구에서의 생명을 감안하는 “미세 조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지구의 공기 안에 있는 성분들의 비율이 조금만 변해도, 많은 종들이 매우 빠르게 사라질 것입니다. 만일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몇 마일 더 가깝거나 멀다면, 많은 종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지구에서의 생명의 존재 및 발달을 위해서는 아주 많은 변수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이런 모든 변수들이 무작위적이고 조절되지 않은 사건들을 통해서 생성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적 설계론은 지적인 원천(하나님이든, UFO이든 또는 그 외의 다른 것이든)을 밝히기 위한 가정은 하지 않지만, 지적 설계론의 이론가들의 거의 대부분은 유신론자들입니다. 그들은 생물학적 세계에 만연한 설계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증거로 봅니다. 그러나, 설계를 했다는 강력한 주장을 부인 할 수 없으나,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기 꺼려하는 몇 몇 무신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자료를 지구가 외계의 생명체들(외계인들) 중 일종의 주된 종족에 의해 육종되었다는 증거로 해석하려 합니다. 물론, 그들은 외계인들의 기원도 역시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뢰할 수 있는 아무런 답변도 없이 논쟁의 시작점으로 돌아갑니다.

지적 설계론은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론이 아닙니다. 이 두 입장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성경적 창조주의자들은 성경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신빙성이 있고 사실이기 때문에 지구 상에서의 생명은 지적이신 분인하나님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결론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이러한 결론을 지지해 주는 증거를 자연적 영역에 에서 찾습니다. 지적 설계론자들은 자연적 영역에서 시작하여 지구상의 생명은 지적인 분(누구든 간에)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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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에 관한 성경 구절들은 홍수가 전 세계적인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창세기 7:11은 말씀합니다: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 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창세기 1:6-7과 2:6은, 홍수가 나기 전의 환경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는 매우 달랐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들과 또 다른 성경의 기술들에 근거해, 한때는 지구가 어떤 종류의 물로 된 덮개로 덮여 있었다는 합리적인 추측을 하게 됩니다. 이 덮개는 수증기로 된 것일 수도 있고, 또는 토성의 얼음으로 된 고리들과 비슷한 어떤 고리들로 구성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땅 속의 물로 된 층과 더불어 땅 위에 방출되었고(창세기 2:6), 전 세계적인 대홍수를 가져왔을 것 같습니다.

대홍수의 정도를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구절들은 창세기 7:19-23입니다. 물에 대한 말씀입니다: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십 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위 구절들에, 우리는 “모든” 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사용될 뿐만 아니라,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높은 산이 덮였고”, “물이 불어서 십 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였고, 그리고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서술들은 전 지구를 덮는 세계적인 홍수임을 분명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홍수가 지역적이었다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동해서 동물들을 이주시키라고 그냥 말씀하지 않으시고 왜 굳이 방주를 지으라고 지시하셨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왜 노아에게 이 땅에서 발견되는 모든 다른 종류들의 육지 동물들을 가두기에 충분한 큰 방주를 지으라고 지시하셨겠습니까? 홍수가 전 세계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방주를 지을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또한 베드로후서 3:6-7에서 이 노아 때의 홍수가 세계적이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이 구절들에서 베드로는 앞으로 올 “세계적인” 심판을 노아의 홍수와 비교하고 있고, 그 때 존재했던 세상이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하여, 많은 성경 저자들은 전 세계적인 대홍수에 대한 역사적 진실성을 받아 들였습니다(이사야 54:9; 베드로전서 3:20; 베드로후서 2:5; 히브리서 11:7). 마지막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전 세계적인 홍수를 믿으셨고 자신께서 다시 오실 때 세상에 임할 멸망의 상징으로 삼으셨습니다(마태복음 24:37-39; 누가복음 17:26, 27).

전 세계적인 홍수와 같은 세계적인 재앙을 나타내는 성경 밖의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대륙에서 발견된 거대한 화석 묘지들과 거대한 양의 식물이 갑자기 덮여져야만 형성되는 많은 양의 석탄 퇴적물들이 존재합니다. 바다에서나 발견될 수 있는 화석들이 전 세계에 걸쳐 산 꼭대기 위에서 발견됩니다. 전 세계적으로 모든 지역의 문화들은 어떤 형태로든 홍수에 대한 전설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사실들과 그 외 많은 것들이 전 세계적인 홍수였다는 증거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경에서 공룡이란 주제는 기독교 집단 안에서 지구의 나이, 창세기의 적절한 해석,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발견되는 물리적 증거를 해석하는 방법과 같은 더 큰 주제에 대한 지속적인 논쟁의 일부입니다. 지구의 나이가 아주 오래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성경에 공룡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에 동의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그들의 인식 체계에 따르면 공룡은 처음으로 사람이 지구를 걷기 수백만 년 전에 멸종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살아있는 공룡을 보았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구의 나이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은 공룡이 비록 실제로 “공룡”이란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이 공룡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신, 성경은 영어 성경에서 몇 가지로 다르게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타닌(tanniyn)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바다 괴물”, 그리고 때로는 “뱀”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용”으로 번역됩니다. 타닌(tanniyn)은 일종의 거대한 파충류의 일종으로 나타납니다. 이 생물들은 구약 성경에 거의 30번 정도 언급되고 땅 위와 물 속 모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거대한 파충류들을 언급 할뿐만 아니라, 성경은 몇 가지 생물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기록자가 공룡을 묘사하는 것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베헤못(behemoth)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장대한 것으로 말해지고 있고, 그 거대한 꼬리는 백향목에 비유되고 있습니다(욥기 40:15). 어떤 학자들은 베헤못(behemoth)을 코끼리나 하마로서 식별하려고 하였습니다. 다른 이들은 코끼리나 하마는 백향목과 비교될 수 없는 매우 짧은 꼬리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한편, 브라키오사우루스(앞다리가 뒷다리보다 훨씬 긴 거대 공룡)와 디플로도쿠스(거대한 공룡의 하나)는 백향목과 쉽게 비교 될 수 있는 거대한 꼬리를 가졌습니다.

거의 모든 고대 문명은 거대한 파충류 생물들을 묘사하는 일종의 어떤 예술 형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북미 지역에서 발견된 바위에 새긴 그림들, 공예품들, 그리고 심지어 작은 점토 인형들은 공룡의 현대적인 묘사와 유사합니다. 남미에 있는 바위에 새겨진 무늬는 디프로도쿠스와 같은 생물들을 타고 있는 남자들을 묘사하고 있고, 트리케라톱스, 익룡, 그리고 티라노사우루스 렉스 같은 생물들의 친숙한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로마시대의 모자이크, 마야의 도자기, 그리고 바빌론 성벽 모두는 문화를 뛰어넘어 지리적 제한이 없이 이러한 생물들에 대한 인간들이 가진 매력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폴로가 쓴 Il Milione처럼 냉철한 이야기들은 보물을 비축한 짐승들이 나오는 환상적인 이야기와 어우러집니다. 공룡과 사람이 공존했다는 상당한 분량의 인류적 그리고 역사적 증거들 외에도, 북미와 서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함께 발견된 인간과 공룡의 화석화된 발자국 같은 물리적 증거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공룡이 존재할까요? 이 문제는 해결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존재하는 증거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당신 주위의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달렸습니다. 성경이 문자 그대로 해석이 된다면, 지구의 나이가 젊다고 생각하는 해석 하에 공룡과 인간이 공존했었다는 아이디어는 받아 들여질 수 있습니다. 만일 공룡과 인간이 공존했다면, 공룡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성경에서 이 문제를 취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공룡은 홍수 후 언젠가 극적인 환경 변화와 인간의 끊임없는 사냥으로 말미암아 멸종되었을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자신을 순종하는 것과 불순종하는 것에 대한 선택권을 주시기 위해서 에덴 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으셨었다면, 그들은 그저 프로그램 된 것만을 하는, 본질적으로 로봇들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를 결정을 내릴 수 있고,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들로 창조하셨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실제로 “자유로운” 존재들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은 선택을 해야만 하였습니다.

나무나 나무의 실과에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 없습니다. 실과 그 자체가 아담과 이브에게 더 많은 어떠한 지식도 가져다 주었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즉, 물리적인 실과는 어떤 비타민 C나 유익한 어떤 섬유질을 함유할 수 있으나, 영적으로 영양가가 많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행위는 영적으로 해로웠습니다. 그 죄는 악에 대해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눈을 뜨게끔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그들은 악하게 되는 것, 수치심을 느끼는 것,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그들의 죄는 자신들의 삶과 세상에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순종의 행위인, 실과를 먹음으로 아담과 이브는 악과 그들의 벌거벗음을 알게 되었습니다(창세기 3:6-7).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결과들이 어떠할지를 미리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을 것과 그럼으로써 세상에 악, 고통, 그리고 죽음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도록 사탄을 허락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선택을 하도록 힘을 가하는 사탄의 유혹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 스스로의 자유 의지에 의해 하나님을 거역하고 금지된 실과를 먹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결과들인 악, 죄, 고통, 질병, 그리고 죽음이 그 이후로 줄곧 세상을 타락시켰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결정은 모른 사람들이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죄를 향한 성향을 가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담과 이브의 결정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를 대신해 흘리시는 그분의 보혈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는 죄의 결과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고, 궁극적으로 죄 자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로마서 7:24-25에 있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되새겨 보기를 기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Got Questions Ministries

가인의 아내가 누구였는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가인의 아내는 그의 여동생이었거나 조카 또는 조카딸, 등, 이었을 것이라는 게 오직 가능한 답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가인의 나이는 성경에 나와있지 않습니다(창세기 4:8). 그들 모두 농부들 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가정을 가질 법한 장성한 성인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벨이 살해되었을 때에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 외에도 더 많은 자녀들을 두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창세기; 5:4). 특히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느꼈다는 사실은(창세기 4:14) 아담과 하와의 많은 다른 자녀들 그리고 아마 손자 손녀들까지 많은 숫자의 자손들이 이미 동시대에 살고 있지 않았나 추측하게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가인의 아내(창세기 4:17)는 아담과 하와의 딸이거나 손녀였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그리고 유일한)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들은 그들끼리 서로 혼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근친결혼은 훨씬 후에 사람들의 숫자가 충분히 늘어나 근친결혼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질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셨습니다(레위기 18:6-18). 오늘날,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유전자적 이상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비슷한 유전자들을 가진 두 사람이(즉 형제와 자매) 함께 자녀들을 가지면, 그들의 열성 형질들이 우세해질 수 있는 높은 위험성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가족들로부터 온 사람들이 자녀들을 가지면, 두 부모가 같은 열성적 특성들을 가질 가능성은 아주 적습니다. 인간의 유전자 코드는 몇 세기를 지나는 동안 유전자 결함들이 배가되고, 증폭되며, 세대를 통해 유전되면서 갈수록 더 오염되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어떠한 유전적 결함도 지니지 않았기에, 그들 자신들과 처음 몇 세대의 그들 후손들은 지금의 우리들 보다 훨씬 더 나은 건강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은, 만일 있었다면, 약간의 유전적 결함들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간의 근친결혼은 안전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경은 "원시인"이나 "네안데르탈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성경에 따르면 "선사시대" 사람들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선사시대(先史時代)"라는 단어는 "역사를 기록하기 이전의 시대"을 의미합니다. 선사시대를 옹호하는 자들은 성경의 기록은 단지 조작이라고 전제합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는 사람을 창조하기 이전의 사건들을 기록(즉, 사람은 여섯째 날에 지어졌고, 그 이전 5일 동안에 다른 모든 것이 창조 되었다)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는 창조의 때부터 완전한 인간이었으며 더 낮은 생명 형태로부터 진화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러한 진술을 말한 성경은 지구 상의 충격적인 격변, 곧 대홍수 사건을 묘사합니다(창 6-9장). 그 사건에 의해 8명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문명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인류는 다시 시작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참조하여 몇몇 학자들은 사람들이 동굴에서 살며 석기를 사용했다고 믿습니다. 이들은 원시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궁핍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확실히 반쪽 유인원이 아니었습니다. 화석 증거에 따르면 원시인은 동굴에 살았던 사람들인 것이 매우 분명합니다.

다윈을 따르는 고대 인류 학자들은(paleo-anthropologists) 일부 화석이 된 유인원을 보고 그 화석은 유인원과 사람 사이의 진화 과정에 있는 어떤 존재라고 해석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시인을 상상할 때 이러한 해석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털로 덮인 반은 사람이고 반은 유인원인 생물이 불 옆에 있는 동굴에 웅크리고 앉아서 새로 개발된 석기로 벽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는 공통적인 오해입니다. 다윈을 따르는 고대 인류학에 관한 한, 우리는 이러한 해석이 특이한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으며 증거의 결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실, 학계 내에서도 이러한 해석에 대한 주요 반대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다윈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세부 내용에 대해 서로 완전히 동의하지 못합니다.

불행하게도 대중적인 주류 견해는 사람과 원숭이가 모두 같은 조상으로부터 진화되었다는 사상을 지지하지만 이것만이 유효한 증거에 대한 유일한 해석은 아닙니다. 사실, 이 특별한 해석을 지지하는 증거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그들은 완전히 발달된 인간이었으며, 의사 소통, 사회, 개발이 가능했습니다(창 2:19-25; 3:1-20; 4:1-12). 선사시대 원시인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진화론 과학자들이 설명하는 방식은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동굴에서 기형적인 이빨을 발견하고는 그 동굴에 유인원처럼 등이 굽은 기형적인 인간이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화석에 의해서는 동굴에 살던 원시인의 존재를 결코 증명할 수 없습니다. 진화론적인 과학자들은 단지 어떤 이론을 가지고 있으며, 그 후 그 이론에 맞는 증거가 있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장 먼저 창조된 최초의 인간이었고 완전히 발달된 형태로 지적이며 직립으로 지어졌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창조론의 타당성에 관한 논란이 굉장히 많습니다. 창조론은 "우주와 생물체는 진화론과 같은 자연적 과정보다는 성경의 기록대로 하나님의 구체적인 창조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믿음"으로 정의됩니다. 창조 과학은 종종 세속 공동체에 의해 묵살되고 과학적 가치가 부족하다고 비난 받습니다. 그러나 창조론은 어떤 주제에 대한 과학적 접근과 분명하게 호환됩니다. 창조론은 이 세상의 실제 사건, 장소 및 사물에 대해 진술합니다. 그것은 주관적인 생각이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창조론과 일치하는 과학적 사실들이 확립되어 있으며, 그 사실들이 서로 관련되어 창조론자의 해석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다른 광범위한 과학적인 사고들이 일련의 사실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창조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초자연적 또는 영적인 설명은 배제하거나 거부하고 오직 모든 것이 자연의 속성 및 원인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철학적인 관점”인 ‘자연주의’와 반대되는 창조론이 어떻게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그 대답은 “과학적”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과학"과 "자연주의"는 정의에 있어서 창조론적인 견해를 배제하기 때문에 너무나 자주 똑같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정의는 자연주의에 대해 불합리한 숭배를 요구합니다. 과학은 "관찰, 식별, 묘사, 실험 조사 및 현상에 대한 이론적 설명"으로 정의됩니다. 과학 그 자체로는 자연주의와 무관합니다. 자연주의는 창조론처럼 실험에 의해 생성된 것이 아닌 일련의 전제 조건들을 요구합니다. 그 전제 조건들은 데이터로부터 추정되거나 시험 결과에서 파생된 것들이 아닙니다. 이러한 철학적인 전제들이 어떤 데이터를 취하기도 전에 받아들여집니다. 자연주의와 창조론은 모두 입증이나 검증이 가능하지 않은 전제들에 의해 강력한 영향을 받으며 사실들을 확인하기도 전에 논쟁에 들어갑니다. 이에 창조론은 적어도 자연주의만큼이나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공평합니다.

자연주의와 마찬가지로 창조론은 발견에 있어서 과학적 방법과 양립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상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과학적"으로 여길 수 없는 면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과학이 아닙니다. 창조론도, 자연주의도 반증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즉, 어느 하나를 확정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실험이 전혀 불가능합니다. 어느 쪽도 예측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 두 이론들은 결과를 예측하는 능력을 생성하거나 향상시키지 못합니다. 이 두 이론만을 근거로 해서 보면,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더 과학적으로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주의자들이 창조론을 거부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기적의 개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주의자들은 전형적으로 특별 창조와 같은 기적은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관측되어 오던 자연의 법칙을 위반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견해는 몇 가지 점에서 아이러니합니다. 한 예로, 생명이 없는 물질로부터 생명이 생겨난다는 무생기원설(abiogenesis)을 생각해 봅시다. 무생기원설은 과학의 개념에서 철저하게 반박된 개념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연주의적인 관점은 이 땅의 생명, 곧 스스로 복제하고, 자립하고, 복잡한 유기체의 생명이 무생명 물질로부터 우연히 발생했다고 전제합니다. 그런 일은 인간의 모든 역사에 있어서 결코 관찰된 적이 없습니다. 더 유익한 진화적인 변화가 있으려면 피조물이 더 복잡한 형태로 발전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한 변화는 결코 관찰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창조론은 성경이 기적의 사건들에 대한 문서화된 기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실제로 기적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기적 때문에 창조론을 비과학적으로 분류한다면 자연주의도 비슷한 딱지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자연주의 대 창조론 논쟁에 있어서 양측이 사용하는 많은 사실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사실이지만, 절대적으로 단일 해석을 요구하는 그러한 사실은 없습니다. 창조론과 세속적인 자연주의 사이의 구분은 전적으로 서로 다른 해석에 달려있습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에 대해 찰스 다윈은 친히 이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의 소개 글에서 "나는 이 책의 그 어떤 한 가지 내용도 거의 사실들로부터 제시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사실로부터 오히려 내가 도달한 것과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윈은 분명히 창조론이 아니라 진화론을 믿었지만 그는 믿음을 택하는데 있어서 해석이 핵심이었음을 기꺼이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한 과학자는 어떤 특정 사실을 보면서 자연주의를 지지할 수 있고 다른 과학자는 똑같은 사실을 보면서 창조론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창조론이 진화론과 같은 자연주의적 사상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은, 특히 이 이분법이 과학을 이끄는 사람들에 의해 인정된 후로, 타당한 주제로 남게 되었습니다. 많은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과학자들은 생명에 대해 가능한 유일한 설명은 자연주의적인 진화 또는 특별 창조라고 말합니다. 모든 과학자가 어떤 것이 참인지에 대해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것은 둘 중에 하나만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왜 창조론이 배움을 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접근법인지를 알려주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것들 중에는 현실적인 가능성의 개념, 거시적 진화에 대한 증거의 결함, 경험의 증거 등이 있습니다. 자연주의적인 전제를 무작정 받아들이고 창조론적 전제들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데는 논리적인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창조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과학적 발견에 장벽이 되지 않습니다. 뉴톤, 파스퇴르, 멘델, 파스칼, 켈빈, 리나우스, 맥스월과 같은 이들의 성취를 검토해 보십시오. 그들 모두가 명확하고 부족함이 없는 창조론자들이었습니다. 창조론은 자연주의가 "과학"이 아니듯이 "과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창조론은 과학 그 자체와 전적으로 양립할 수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창세기 1장 1-2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말합니다. 간격이론(Gap Theory)은 하나님이 우리가 화석의 기록만으로 아는 공룡이나 다른 피조물들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과 함께 완전한 기능을 하는 지구를 창조하셨다는 견해입니다. 간격이론에 따르면, 그 이후에 지구를 완벽하게 파괴하는 어떤 사건이 있었는데 아마도 사탄이 지구로 떨어진 사건 같고, 그래서 지구는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셔서 창세기에 좀 더 자세히 묘사된 것처럼 낙원의 형태로 지구를 재창조하셨습니다. 유신론적 진화론과 ‘날-시대’ 이론과 구별되는 간격이론은 또한 오래된 지구 창조론, 간격 창조론, 파멸-재건 이론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젊은 지구 창조론에서는, 창세기 1장 1절은 히브리어 이야기 방식에서 전체 1장을 요약한 것으로 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2절은 1절이 요약한 것을 단계별 과정으로 나누어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창 1:2)라는 말은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쓸모 없고 모양이 없는 지구를 창조하셨다는 생각은 몇몇 보수 신학자들에게는 불편한 입장이며, 이로 인해 그들은 간격이론 또는 오래된 지구라는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간격이론을 옹호하는 보수 지지자들에 따르면, 창세기 1장 1절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본래 창조를 묘사합니다. 그런 다음 1절과 2절 사이에서 사탄은 하늘에서 반역하고 쫓겨났습니다. 사탄의 죄는 원래 창조물을 "망쳤습니다". 다시 말해, 그의 반란은 파멸과 궁극적 인 죽음을 가져 왔고, 지구는 "재건축"이 필요한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로 쪼그라들었습니다. 간격의 ‘시간적인 길이’는 지정되어 있지 않지만 수백만 년 동안 지속도 가능합니다.

물론, 사탄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타락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산에서 유혹이 없었을 것입니다.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사탄은 창세기 1장 31절 이후 어떤 때에 타락하였다고 말합니다. 간격 창조론자들은 사탄은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타락했다고 말합니다.

간격이론의 한 가지 어려움은 피조물이 아담의 타락 이전에 죽음과 파괴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5장 12절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간격이론은 두 세계를 언급하며 대응합니다. 사탄의 죄는 원래 창조물이 어떤 모양이었든 간에 그 창조물에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아담의 죄는 인간의 영역인 재창조된 지구에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아담의 죄를 통해 인간 세상에 악이 들어왔고 사람의 영역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탄과 그의 천사들은 이미 타락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영역 밖에서 이미 반란이 있었던 것입니다(사 14:12-14; 겔 28:12-18). 죄는 사람이 선택하기 전까지 인간의 영역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뱀을 통해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선택하도록 유혹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간격이론에 대한 이의는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어떤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지 가운데 두시고 추측하도록 하시기보다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또한 창세기 1장 31절은 하나님이 그분의 피조물을 "매우 좋았더라"고 선언 하셨는데 이 말씀은 사탄이 간격 사이에 타락했고 그로 인해 악이 이미 이 땅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간격이론과 조화되기 어려운 언급입니다.

문자 그대로 6 일간의 창조 주간을 유지하면서 간격이론을 고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간격이론은 창세기 1장 3절에서 첫째 날 사건이 시작되기 전에 그 간격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에 몇몇 보수 신학자들은 간격이론이 스코필드(C. I. Scofield) 및 버논 매기(J. Vernon McGee)를 옹호하는 자들이 많아지면서 많이 약해졌을지라도 그 이론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간격이론을 고수하는 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오래된 지구와 진화론을 창세기와 조화시키기 위해 그 이론을 따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억지로 조화를 이루려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창세기 1 장을 평범하게 읽으면 처음 두 구절 사이에 시간의 간격을 전혀 인식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알려줍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하나님이 처음에 땅을 창조하실 때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두웠다고 알려줍니다. 즉, 미완성이며 아무도 살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창세기 1장의 나머지 부분은 어떻게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두운 지구를 하나님이 생명과 아름다움과 선하심으로 채우셨는지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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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와 창세기에 나타나는 문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날"은 문자 그대로 24시간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날”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 욤(yom)은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 단어는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데 걸리는 24시간의 하루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예, “하루에는 24시간이 있다”). 또한 새벽에서 황혼 사이의 일광의 기간을 나타내는 ‘낮’일 수 있습니다(예, "낮 동안은 꽤 뜨겁지만 밤에는 조금 시원합니다"). 그리고 불특정 기간을 나타내는 ‘때’일 수 있습니다(예, "할아버지 때에"). 창세기 7장 11절에서는 ‘욤’은 24시간을 가리키는데 사용됩니다. 창세기 1장 16절에서는 새벽과 황혼 사이의 ‘낮’ 기간을 가리키는데 사용됩니다. 창세기 2장 4절에서는 불특정 기간을 가리키는데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 5절과 2장 2절 사이에서 서수(즉,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 그리고 일곱 째날)와 함께 쓰인 ‘욤’은 어떤 의미입니까? 24시간의 기간입니까? 아니면 다른 뜻입니까? 여기서 ‘욤’이 불특정 기간을 의미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창세기 1장 5절과 2장 2절 사이에서 ‘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그 단어가 사용되는 문맥을 검토하고 성경의 다른 곳에서 사용된 문맥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성경이 성경 자체를 해석하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 단어 ‘욤’은 구약에서 2301 번 사용됩니다. 창세기 1장을 빼면 ‘욤’에 숫자가 있는 경우(이런 경우는 410번이 있습니다) 늘 평범한 날, 즉 24 시간을 나타냅니다. "저녁"과 "아침"이라는 단어가 함께 쓰이면(38 번이 있습니다) 늘 평범한 날을 나타냅니다. ‘욤’과 "저녁"또는 "아침"이 사용되면(23 번 있습니다) 항상 평범한 날을 나타냅니다. ‘욤’과 "밤"(52 번 나옵니다)도 항상 평범한 날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1장 5절과 2장 2절 사이에서 사용되는 ‘욤’의 문맥은 각각의 날이 "저녁과 아침"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창세기의 저자가 24시간을 의미한 것이 분명합니다. "저녁"과 "아침"에 대한 언급이 문자 그대로 24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순이 됩니다. 이것은 1800년 시대에 이르러 과학 공동체 안에서 패러다임 변화가 일어나고 지구의 퇴적 지층이 재해석되기 전까지 창세기 1장 5절에서 2장 2절 사이를 해석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암석층이 노아의 홍수에 대한 증거로 해석되었지만, 과학 공동체는 대홍수를 부인하며 내다버렸고 암석층은 대단히 오래된 지구의 증거로 재해석되었습니다. 한편, 의도는 좋지만 큰 착각에 빠진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대홍수를 부정하고 성경을 대적하는 과학 공동체의 주장과 창세기 기사를 조화시키기 위해 ‘욤’을 엄청나게 긴 불특정 기간으로 재해석하였습니다.

사실, 오래된 지구를 지지하는 수많은 해석들은 잘못된 가정에 의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몇몇 꽉 막히고 완고한 과학자들이 우리의 성경 읽는 방법에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0장 9-11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의 한 주간의 일의 패턴을 알려주시기 위해 문자 그대로의 6일을 사용하여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즉, 6일을 일하고 하루를 쉬셨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원하기만 하신다면 즉시 모든 것을 창조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6일째 되는 날에)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를 마음에 두셨으며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을 제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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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세 가지 주요 세계관 중 하나이며, 다른 두 가지는 무신론적 진화론(일반적으로 알려진 다윈주의 진화론과 자연주의 진화론)과 특별 창조론입니다.

무신론적 진화론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생명은 기존의 무 생명체로부터 자연 법칙(중력 등)의 영향을 받아 출현할 수 있고, 출현하였다고 말합니다. 특별 창조는 하나님이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혹은 기존의 물질로부터 직접 생명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두 가지 중 하나를 말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계시지만, 그분은 생명의 기원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으셨다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은 아마 큰 무기체 덩어리들을 창조하신 후에 자연의 법칙을 창조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그분은 궁극적으로 생명의 출현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것들을 창조하셨을 수 있고, 어느 시점에서 일찍이 물러서서 피조물들이 알아서 발전하도록 두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또한 무엇을 행하든지 간에 그냥 두셨고 궁극적으로 생명체가 무생물 물질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이 견해는 자연주의적인 생명의 기원을 가정한다는 점에서 무신론적 진화론과 유사합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의 두 번째 대안은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의 기원을 유발하기 위해 단지 한두 가지 기적만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은 꾸준히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윈의 진화론적 생명 나무(조류와 포유류 등을 낳은 파충류, 파충류를 낳은 양서류, 양서류를 낳은 물고기 등등)와 유사하게, 태고의 단순함에서 동시대의 복잡성에 이르는 단계에 따라 생명을 이끄셨습니다. 생명체가 자연적으로 진화할 수 없었던 곳(파충류의 다리가 어떻게 자연적으로 새의 날개로 진화했습니까?)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이 우리가 아는 생명을 유발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셨다고 전제하는 점에서 특별 창조론과 유사합니다.

성경적인 특별 창조론의 관점과 유신론적 진화론의 관점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죽음에 대한 견해입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지구가 수십억 년이 되었으며, 화석 기록을 포함하고 있는 지질 주상 단면도는 장구한 시간의 시대를 나타낸다고 믿습니다. 인간은 화석 기록에서 후반에 나타나기 때문에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나타나기 오래 전부터 많은 생물들이 살았고, 죽었고, 멸종되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그의 범죄 이전에 죽음이 존재하였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적 창조론자들은 지구는 비교적 젊고, 화석 기록은 노아의 홍수 동안과 그 이후에 저장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층들의 계층화는 물의 분류 및 액화로 인해 발생했다고 생각하며, 또한 이 두 현상은 관찰이 가능한 현상들입니다. 그 견해는 화석 기록과 죽음과 모든 아수라장의 대학살은 아담의 범죄 이후 수백 년이 지난 후에 발생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두 견해 사이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창세기를 읽는 방법입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주간에 대해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날-시대’ 이론 또는 골격 이론에 동의하는 성향을 지닙니다.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창세기 1 장을 읽을 때 문자 그대로 하루 24 시간에 동의합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에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이 동의하는 두 견해 모두가 창세기의 창조 기사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결함이 있습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별이 진화한 후 태양계가, 그 다음은 지구, 그리고 식물과 동물, 그리고 결국 인간이 생겨났다는 다윈의 시나리오를 상상합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의 이 두 견해는 사건을 전개하시는 하나님의 역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일반적으로 다윈의 연대표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다윈의 연대표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와 상충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 장은 지구가 하루에 창조되었고 태양, 달, 별들은 넷째 날에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의 표현은 태양, 달, 별들이 실제로는 첫날에 창조되었지만 넷째 날까지는 그것들의 자리로 배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구의 대기를 통해 볼 수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지구는 둘째 날에 대기를 갖게 된 것을 분명히 하는 창세기의 기사와 부딪히게 됩니다. 만일 태양, 달, 별이 첫째 날에 만들어졌다면, 그 날에 보였어야 합니다.

또한 창세기의 기사에 의하면 조류는 다섯 째 날에 바다 생물과 함께 지어졌음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지상 동물은 6 일째에 창조되었습니다. 이 기록은 조류가 지상 동물로부터 진화했다는 다윈주의 견해를 직접적으로 반대합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새들은 지상 동물보다 앞서 있습니다. 하지만 유신론적 진화론자의 견해는 정반대입니다.

현대 기독교 내에서 가장 큰 불행한 경향 중 하나는 진화론을 수용하기 위해 창세기를 재 해석하는 것입니다. 많은 저명한 성경 교사와 변증론자들이 진화론자들에게 굴복하여 창세기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을 고수하는 것은 어떻게든 기독교의 신빙성에 해가 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우, 진화론자들은 성경에 대한 믿음이 약해서 신속하게 타협하려는 자들을 향한 존중을 잃게 됩니다. 진정한 창조론자들의 수가 학계에서 줄어들고 있지만, [창세기의 답변들](Answers in Genesis), [창조 연구 협회](the Creation Research Society), [창조 연구를 위한 기관](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등과 같은 여러 신실한 기관들은 성경이 실제 과학과 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말씀 하나라도 참된 과학에 의해 반증된 적이 없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며,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주신 계시이고, 그분이 우주를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친히 알려주신 설명은 진화론과 맞지 않으며 진화에 대한 "유신론적" 이해와도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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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합니다. 그 뒤에, 창세기 2장 4절에서 또 다른, 두번째 창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창조 기사가 있었다는 생각은, 두 본문이 하나의 창조 사건을 묘사하는 것을 오해한 것입니다. 두 기사는 피조물이 만들어지는 순서에 있어서 일치하며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없습니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의 6일"(그리고 일곱째 날의 안식)을 묘사하고 있으며, 창세기 2장은 창조 주간 중 하루, 곧 여섯째 날만 다루고 있으므로 모순이 없습니다.

저자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여섯째 날까지의 시간을 순서대로 되돌아 갑니다. 저자는 창세기 1장에서 여섯 째 날에 사람을 창조된 사실을 창조의 절정 또는 최고점으로 제시합니다. 그 후 저자는 2장에서 사람의 창조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창세기 1-2 장에는 두 가지 주된 모순이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식물과 관련됩니다. 창세기 1장 11절은 하나님이 셋째 날에 식물을 창조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5절에서는 사람을 창조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식물을 창조하신 것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인 셋째 날입니까(창 1장), 아니면 사람을 창조하신 이후(창 2장)입니까? "식물"에 대한 히브리 단어는 두 구절에서 다릅니다. 창세기 1장 11절은 일반적인 식물을 가리키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창세기 2장 5절은 농사를 필요로 하는 식물, 즉 돌 볼 사람이 필요한 식물을 언급하는 좀 더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 구절들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 11절은 하나님이 식물을 창조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창세기 2장 5절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까지 "농경 가능한" 식물을 자라나게 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모순으로 주장되는 것은 동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4-25절은 하나님이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동물을 창조하신 것을 기록합니다. 창세기 2장 19절은 몇몇 번역본을 볼 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동물을 창조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 19-20절에 대해 멋지고 이치에 맞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미)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본문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동물을 지으시고 그 후 그 동물들을 사람에게 데리고 오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은 “주 하나님이 (이미) 모든 동물들을 지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순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섯 째 날에 동물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후 동물을 사람에게 데려오셨고 사람은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두 가지 창조 기사를 개별적으로 고려한 다음 서로 조화를 시킨다면,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창조의 과정을 묘사하시고, 창세기 2장에서는 특히 여섯 째 날의 가장 중요한 세부 내용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이는 단지 평범한 내용에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사건을 기술해 나가는 일반적인 문학적 방법으로서 여기에도 모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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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노릇은 힘들고 도전적인 모험일 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하는 것 중에 가장 보람되고 성취감이 드는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남자와 여자로 키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많은 언급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것은 자녀들에게 하나님 말씀에 관한 진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더불어 그분의 명령에 우리 자신들이 순종함으로 경건한 본보기가 되면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신명기 6:7-9의 명령과 똑같이 가르침에 있어, 신명기 6:7-9의 명령에 주의를 기우려야 합니다. 이 문장은 그러한 가르침의 지속적인 특성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항상 수행되어야 합니다 – 집에서나, 길에서나, 밤이나, 아침이나. 성경적 진리는 우리 가정들의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명령들의 원칙들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일요일 아침이나 기도만을 위해 따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게 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직접적인 가르침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운다 할지라도, 그들은 우리를 바라봄으로써 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우리의 역할들을 먼저 인지해야 합니다. 남편들과 아내들은 상호간에 서로 존중하고 순종해야 합니다(에베소서 5:21).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위해 위계를 세우셨습니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린도전서 11:3). 우리는 아내가 그녀의 남편보다 열등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보다 열등하지 않으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위에 대한 순종 없이는, 질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정의 머리로서 남편의 역할은 그리스도께서 희생적으로 교회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자신의 아내를 자기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에베소서 5:25-29).

이러한 사랑의 리더십에 응하여, 아내가 자신의 남편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에베소서 5:24; 골로새서 3:18). 아내의 주요한 책임은 자신의 남편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지혜롭고 정결하게 살고, 가정을 돌보는 것입니다(디도서 2:4-5). 여성들은 천성적으로 남성들보다 자녀들을 더 잘 양육하는데, 이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자녀들의 주된 관리자들로 계획되었기 때문입니다.

징계와 훈계는 부모 노릇에 있어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잠언 13:24은 말씀합니다: “징계를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징계가 없는 가정들에서 자란 자녀들은 자신들을 원하는 곳이 없고 자신들이 가치가 없다고 느낍니다. 이들은 방황하고 자기의 절제가 부족하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반항하고 하나님을 포함한 그 누구의 권위도 존중하지 않게 됩니다.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의 생명을 망칠찌라”(잠언 19:18). 동시에, 징계는 사랑과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자녀들이 원망을 품거나, 낙심하거나, 반항적으로 자랄 수가 있습니다(골로새서 3:21). 하나님께서는 징계가 행해질 때 그것은 고통스럽지만(히브리서 12:11), 대신에,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사랑을 담은 징계를 하면 그것은 자녀에게 엄청난 유익이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

자녀들이 어릴 때, 그들을 교회의 가족으로 그리고 사역에 참여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규칙적으로 성경을 믿는 교회에 참석하고(히브리서 10:25), 당신이 말씀을 공부하는 것을 자녀들로 하여금 보게 하며, 또한 자녀들과 함께 말씀을 공부하십시오. 자녀들과 말씀을 살펴보면서 그들 주위의 세계에 대해 그들과 의견을 나누고, 일상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가르칩시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언 22:6). 좋은 부모가 된다는 모든 것은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만을 숭배하는 당신의 모범을 따라 할 자녀들을 키운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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