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예수님이 구세주, 구원자이신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예수님이 구세주, 구원자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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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주 물어보는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과 달리, 일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여부에 관하여 질문합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땅을 몸소 걸었던 실제 사람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의 온전한 정체성이 논의의 주제가 될 때 많은 논쟁이 시작됩니다. 거의 대부분의 주요 종교가 예수님은 선지자, 좋은 선생, 또는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좋은 선생, 또는 경건한 사람보다 그 이상인 엄청난 분이시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C.S.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적 스승으로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을 그 누구도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예수와 같은 주장을 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도덕적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신병자—자신을 삶은 계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수준이 똑같은 정신병자—거나, 아니면 지옥의 악마일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여겨 입을 틀어 막을 수도 있고, 악마로 여겨 침을 뱉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요 주님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어쩌니 하는 선심성 헛소리에는 편승하지 맙시다. 그는 우리에게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여지를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라고 주장하십니까? 성경은 그분이 누구라고 말씀합니까? 첫째, 요한복음 10:30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언뜻 보면 본인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한복음 10:33).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라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계속되는 구절들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그럼으로써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결코 수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8:59)고 주장하심으로써 진정으로 자신이 하나님이라 말씀하고 계셨던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8:58은 또 다른 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다시 한번,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치려고 돌을 들었습니다(요한복음 8:59). 예수님께서는 이를 직접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신의 정체 “나는(I am)” 은 구약 성경이 직접적으로 적용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출애굽기 3:14). 예수님께서 무언가 신성을 모독하는, 즉,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고 믿었다면 왜 유대인들이 또 다시 예수님을 돌로 치려 했겠습니까?

요한복음 1:1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제자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라 표명했습니다(요한복음 20:28). 예수님께서는 도마의 고백을 수정하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디도서 2:13)라고 묘사합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똑같이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베드로후서 1:1)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예수님의 온전한 정체를 증언하십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구약 성경의 예수님께 대한 예언들도 그분의 신성을 표명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 9:6).

그러므로, C.S. 루이스는 예수님을 단지 한 분의 좋은 선생이라 믿는다는 것은 어떠한 선택도 될 수 없다고 논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고 부인할 수 없게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거짓말쟁이이므로 선지자나 좋은 선생, 또는 경건한 사람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변명하려는 시도에서, 현대 “학자들”은 성경에서 그분이 하셨다고 하는 많은 말씀들을 “실제 역사적 예수님”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고 말씀하지 않으셨는지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반박한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했고 말씀하지 않으셨는지 그로부터 이 천 년이나 떨어져 사는 “학자들”이 그와 함께 살았고, 섬겼으며,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보다 어떻게 더 나은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요한복음 14:26)?

예수님의 실제적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든 아니시든 왜 문제가 될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셔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만약 그 분께서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그분의 죽음이 온 세상의 죄값을 치르기에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2:2).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그런 무한한 죄값을 치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로마서 5:8; 고린도후서 5:2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빚을 예수님께서 갚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그분께서 죽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구원의 유일한 길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스스로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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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29절과 요한복음 1장 36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불리는 것은 그분이 죄를 위한 완전하고 궁극의 희생 제물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분이 행하신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속건제물”(사 53:10)로 예언하고 있는 구약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구약에서 세워 놓으신 희생 제사 제도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한 무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마련하신 완벽한 희생 제물입니다(롬 8:3; 히 10 장).

양들의 희생은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과 희생 제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때 그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당장 여러 중요한 희생 제사들 중 어떤 하나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월절 축제가 매우 가까워지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유월절 양의 희생입니다. 유월절 축제는 유대인의 주요 명절 중에 하나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여 주신 것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사실, 유월절 양을 죽이고 그 집의 문설주에 그 피를 바르는 것은(출 12 :11-13)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그분이 대신 죽으신 대상들은 (영적) 죽음의 천사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는 주님의 피로 덮여 있습니다.

양을 포함한 또 다른 중요한 희생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매일 드려지는 희생 제사였습니다. 아침과 저녁마다 백성의 죄 때문에 어린 양이 성전에서 희생되었습니다(출 29:38-42). 이러한 매일의 희생은 다른 모든 희생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십자가 상에서 드려진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간은 성전에서 저녁 희생이 드려지던 시간과 일치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양과 같은”(렘 11:19; 사 53:7) 어떤 분의 오심 및 그의 고난과 희생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구속이 임할 것을 예언한 예레미야와 이사야와 같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희생 제도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지불이나 배상의 개념은 여전히 이해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며 죄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 것을 압니다. 또한 우리는 성경이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다고 가르치는 것을 압니다(롬 3:23).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그분 앞에서 죄수로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화해의 길을 마련해 주시는 것인데, 그분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이때 그리스도는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의 죄를 속죄하고 그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죄를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희생 제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 및 삼일 후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이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죄를 위해 속죄 제물을 마련하셨다는 사실은 베드로전서 1장 18-21절에서 분명하게 선포된 영광스러운 복음의 일부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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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족보는 성경의 두 곳, 즉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 23-3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가 완전히 다른 족보를 추적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마 1:16)이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눅 3: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마 1:6)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지만,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눅 3:31)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서 각 족보가 공통으로 서술하는 이름들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뿐입니다(마 1:26; 눅 3:27).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성경의 오류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꼼꼼한 기록 관리자들이었으며, 특히 계보와 관련해서는 더욱 세심하였습니다. 마태와 누가가 동일한 혈통에 대해 완전하게 서로 모순되는 족보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윗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심지어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조차도 동명이인에 대한 언급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여고냐라고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알디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룹바벨이라고 짓는 것은 그런 이름을 가진 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것입니다(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 보십시오).

이에 대해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제시한 한 가지 설명은 마태가 장자 또는 생물학적 계보를 추적하는 반면 누가는 "수혼 결혼"의 경우들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 남자가 아들을 갖지 못하고 죽으면 그 남자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을 아들을 갖게 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멜기(눅 3:24)와 맛단(마 1:15)은 똑같은 여인(전통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에스다’임)에게 다른 시기에 결혼했습니다. 이에 헬리(눅 3:23)와 야곱(마 1:15)은 이부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헬리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이에 그의 이부 형제 야곱이 과부가 된 헬리의 아내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합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태와 누가는 모두 요셉의 동일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법적인 계보를 따르고 마태는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릅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성서 학자들은 누가는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고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요셉(예수님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계보를 따라가며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마리아(예수님과 혈연 관계)의 계보를 따라갑니다. 요셉은 헬리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헬리의 사위가 되었지만 헬라어에는 ‘사위’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헬리의 아들"로 불립니다. 아무튼 마리아의 계통을 따르든지 또는 요셉의 계통을 따르든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메시야가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모계 쪽으로 족보를 추적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더욱 그러합니다. 누가의 설명은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눅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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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되 동시에 여전히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계신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이셨습니다(요 8:58, 10:30). 그러나 예수님은 성육신 때에 사람이 되셨습니다(요 1:14). 신성에 인성이 더하여진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사람이십니다. 이것이 위격적 연합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체이시면서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의 두 본성인 인성과 신성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자 사람 이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으로서 그분의 한 인격 안에는 서로 구분되는 두 가지 본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은 혼합되지 않으며 각각 서로 구별되는 속성을 유지하면서 그분 안에서 연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때때로 인성의 한계(요 4:6, 19:28)를 보이시지만 또 다른 때에는 신성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요 11:43; 마 14:18-21). 예수님의 인성 및 신성을 나타내는 행동은 모두 그분에게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본성을 지니셨지만, 오직 하나의 인격(위격)을 가지셨습니다.

위격적 연합 교리는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신지를 설명하려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이 교리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유한한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서 무한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눅 1:35). 예수님은 언제나 존재하셨습니다(요 8:58, 10:30). 예수님이 잉태될 때 그분은 하나님이자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요 1:1, 14).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통해 잉태되기까지는 아직 사람은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부림치는 싸움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히 2:17), 더욱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죽으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빌 2 : 5-11). 요약하면, 위격적 연합은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며 또한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각 속성은 전혀 섞이거나 희석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원토록 두 속성이 연합되어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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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 이 구절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아들을 “때가 차매” 보내셨다고 선언합니다. 서기 1세기가 되니 적어도 사람이 보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에 이상적인 많은 일들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1) 그 당시 유대인 사이에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큰 기대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압제 때문에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2) 로마 제국의 통치는 다양한 지역에 일체감을 부여하면서 세계의 많은 부분을 통합시켰습니다. 또한 제국이 비교적 평화로웠고 여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러한 여행의 자유는 다른 때에는 불가능하였습니다.

3) 로마가 군사적으로 정복하는 동안, 그리스는 문화적으로 정복하였습니다. (고전 헬라어와는 다른) ‘공통’ 형태의 헬라어가 무역 언어였고 또한 제국 전역에서 사용됨으로써 하나의 공통 언어를 통해 여러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4) 많은 거짓 우상들이 침략자 로마 제국을 이기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우상 숭배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보다 ‘교양있는’ 도시에서는 마치 오늘날 공산주의 정부의 무신론이 많은 영적인 공허함을 남긴 것처럼 헬라 철학과 그 당시의 과학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공허함을 남겼습니다.

5) 그 당시 비밀스런 종교들은 구세주 신을 강조하면서 숭배자들에게 피의 희생 제물을 바치도록 요구했는데, 이는 궁극적인 희생 제사를 담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또한 영혼의 불멸을 믿었습니다(몸의 불멸은 믿지 않았습니다).

6) 로마 군대는 지방에서 병사들을 모집한 후 그들에게 로마 문화뿐만 아니라 변방까지 아직 전파되지 않은 사상들(복음 등)을 소개했습니다. 영국에 가장 처음으로 복음이 소개된 것은 거기에 주둔하고 있던 기독교 군인들의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위에 언급된 내용들은 그 당시의 시대를 바라보면서 왜 역사의 그 특별한 시점에 그리스도께서 오셨는지를 추측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사 55:8). 따라서 위의 내용들은 하나님이 왜 특정한 그 때에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과 4장의 문맥에서 보면, 하나님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시키기 위해 유대인의 율법을 통해 기초를 마련하려고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성의 깊이를 깨닫도록 도와주었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통한 죄의 치료를 더욱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만들었습니다(갈 3:22-23; 롬 3:19-20). 율법은 또한 사람들을 메시아이신 예수께로 인도하시는 ‘초등교사’였습니다(갈 3:24). 율법은 메시아에 관한 많은 예언들을 알려줌으로써 예수께서 그 예언들을 성취하실 때 그분을 알려주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율법이 언급하는 희생 제사 제도는(각 제사는 언제나 또 다른 추가 제사를 필요로 하는 점에서) 그 제도 자체의 부적당함을 드러내었을 뿐만 아니라 죄를 위한 어떤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시하였습니다. 구약의 역사 또한 여러 사건들과 종교적 절기(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기꺼이 이삭을 바친 의지, 또는 출애굽 기간 동안 유월절에 대한 세부 지시 사항 등)를 통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묘사하여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구체적인 예언을 성취하시면서 오셨습니다. 다니엘서 9장 24-27절은 “70이레” 또는 70개의 “일곱”을 언급합니다. 문맥에서 보면, 그 “이레” 또는 “일곱”은 칠일 기간이 아니라 칠년 기간을 언급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 69 이레를 역사적으로 구체적으로 추적해 볼 수 있습니다(70번째 이레는 미래에 발생할 것입니다). 70이레는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시작됩니다. 이 명령은 주전 445년 아닥사스 롱기마누스 왕에 의해 주어졌습니다(느 2:5). 다니엘의 예언은 일곱 이레와 예순 두 이레 이후, 또는 69 x 7 년 이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 후 다스리는 한 왕의 백성이 와서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릴 것이고, “그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심각한 파괴를 의미함)이라고 하였습니다(26절).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에서의 구세주의 죽음에 대한 명백한 언급을 보게 됩니다. 약 1세기 전, 로버트 앤더슨 경은 그의 저서 '왕의 오심'에서 윤년, 달력상의 오류, B.C.에서 A.D로의 변화를 고려한 '예언적 연대'를 사용하여 69 이레에 대한 상세한 계산을 했는데 69 이레는 예수께서 죽으시기 5일 전에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그 날에 정확하게 끝난 것을 알아냈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표를 사용하든 그렇지 않든, 요점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시기가 5 백 년 이상 전에 다니엘에 의해 상세하게 예언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시기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분의 오심을 위해 준비되어 있던 그러한 때였습니다. 그 이후로 매 세기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그분의 오심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예언하였던 성경의 내용들을 성취하신, 바로 그 약속된 메시아라는 충분한 증거를 더욱 갖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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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이 질문에는 두가지 측면의 답이 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이 죄를 지으셨는지 또는 안 지으셨는지의 여부를 가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분명히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에는 두 측면 모두 동의합니다(고후 5:21; 벧전 2:22). 지금 질문은 예수께서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완전무결’을 주장하는 측은 예수님은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었다고 믿습니다. ‘죄 지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믿는 측은 예수님은 죄를 지을 수 있었지만 짓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견해가 옳을까요?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은 완벽 무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님은 죄를 지을 수 없으셨던 분입니다. 만일 주께서 죄를 지을 수 있으셨다면 지금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와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도 죄를 지을 수 있으시다는 말이 됩니다. 주님은 하나님이며 사람으로서 앞으로도 계속 그 상태로 영원할 것이며, 이에 그분 안에는 완전한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지으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이 죄를 지으실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 골로새서 2장 9절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덧붙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지만 우리처럼 죄성을 지니고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시험 당할 때 우리와 똑같이 시험 당하신 것이 틀림없지만 하나님은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죄를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죄는 그분의 속성과 어긋납니다(마 4:1; 히 2:18, 4:15; 약 1:13). 죄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정의됩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지으셨고 율법은 그 속성상 하나님이 행하실 것과 행하지 않으실 것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죄는 하나님이 그분의 본성상 행하려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시험을 받는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살인이나 음행을 행하자고 유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것을 행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혀 그런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죄를 지을 가능성을 제시하였기에 당신은 시험을 받은 것입니다. ‘시험을 받다’라는 뜻에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사물에 의해, 또는 당신 자신의 죄성에 의해, 죄를 짓자는 제안을 받는 것

2) 실제로 범죄행위에 참여할 것을 고려하면서 그 행위가 가져올 쾌락과 결과를 마음으로 가늠하면서 고민하는 것

첫 번째 정의는 죄의 행위와 생각을 서술하지 않지만, 두 번째 정의는 서술합니다. 당신이 죄의 행위를 생각하며 어떻게 그 죄를 저지를 수 있을지 고민한다면 당신은 이미 죄의 선을 넘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정의에 따라 시험을 받은 것인데 죄성이 전혀 없으셨던 사실이 예외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어떤 죄의 행위를 제안하였지만 예수님은 그 죄에 참여할 마음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를 짓지 않음으로 죄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죄를 지을 수 있었다는 주장을 하는 자들은, 만일 예수께서 죄를 지을 수 없으셨다면 참으로 시험 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죄에 대한 우리의 갈등과 시험에 대해 진정으로 동정하실 수 없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해 그것을 체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에 대해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으실 욕망이 전혀 없으시며 당연히 죄를 지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무엇인지 아시며 이해하십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며 이해하십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시험에 동정하실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처럼 똑같이 모든 것을 ‘경험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죄를 짓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하십니다. 이 사실이 결코 그분이 우리를 돕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겪는 죄의 시험을 당합니다(고전 10:13). 죄는 일반적으로 세 종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자랑”입니다(요일 2:16). 하와가 받은 시험 및 죄를 검토해 보고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검토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 시험들이 각각 이 세 종류에 속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 및 영역에서 똑같이 시험 당하셨지만 완전한 거룩함을 지키셨습니다. 비록 우리의 부패한 속성 안에는 여전히 몇몇 죄에 참여하고 싶은 내면의 욕구가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롬 6: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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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관하여 아주 많은 혼란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의 죽음 뒤에 지옥을 가셨다는 개념은 “예수님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고 말씀하는 사도신경으로부터 주로 나옵니다. 또한 어떻게 번역이 되는가에 따라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셨다는 것을 묘사하는 몇몇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공부하는데 있어, 성경은 죽음의 영역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죽은 자들의 영역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은 sheol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죽은 자들의 장소” 혹은 “떠난 영들/혼들의 장소”란 의미입니다. Sheol에 대한 신약성경의 헬라어 동의어는 hades인데, 역시 “죽은 자들의 장소”를 지칭합니다. 신약 성경의 다른 구절들은 sheol/hades가 영들이 마지막 부활과 심판을 기다리는 일시적 장소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20:11-15 은 hades와 불못(lake of fire) 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불못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영원하고 최종적인 장소입니다. 하지만, hades는 일시적인 장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hades와 불못을 “지옥”이라고 지칭하는데, 이것이 혼란을 초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후에 고통의 장소에 갔던 것이 아니라, hades를 가셨습니다.

Sheol/Hades는 두 개로 나눠진 영역입니다 – 축복의 장소 및 심판의 장소(마태복음 11:23; 16:18; 누가복음 10:15; 16:23; 사도행전 2:27-31).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처소들은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hades”라고 불려집니다. 또한 구원받은 자들의 처소는 누가복음 16:22에서 “아브라함의 품”(KJV) 또는 “아브라함 쪽”(NIV)으로, 누가복음 23:43에서는 “낙원”이라고 불려집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처소는 누가복음 16:23에서 “지옥”(KJV) 또는 “Hades”(NIV)라고 불립니다.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처소들은 “큰 구렁텅이”에 의해 분리되어 있습니다(누가복음 16:26).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께서는 축복된 쪽의 sheol로 가서 거기로부터 믿는 자들을 자신과 함께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에베소서 4:8-10). 심판 쪽의 sheol/hades는 변함 없이 남아 있습니다. 죽은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은 거기로 가서 미래에 있을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sheol/hades에 가셨습니까? 에베소서 4:8-10과 베드로전서 3:18-20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혼란스러움의 일부는 시편 16:10-11같은 말씀들이 킹 제임스 역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될 때 생깁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hell)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여기서 음부(hell)는 옳은 번역이 아닙니다. 올바른 번역은 “the grave(무덤)”이나 “Sheol”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옆에 있었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거하리라”(누가복음 23:4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내가 너를 지옥에서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무덤에 있었습니다; 그분의 영/혼은 sheol/hades에 있는 축복받은 자들과 함께하러 가셨습니다. 불행히도, 성경의 많은 번역본들에 있어, 번역가들은 히브리어 그리고 헬라어인 “sheol,” “hades,’ 그리고 “hell(지옥)”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에 대해 일관적이지 않거나 정확하지 않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들을 위해 더 형벌을 받으려고 “지옥”이나 고통 받는 쪽의 sheol/hades를 가셨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생각은 완전히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충분한 죄값을 치른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습니다. 죄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씻게 하는 것은 그분께서 흘리신 보혈이었습니다(요한일서 1:7-9). 그분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시면서, 인간의 모든 죄의 짐을 자신이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분께서는 죄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5:21). 이 죄의 전가는 십자가에서 그분께 쏟아질 죄의 잔을 옆에 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리스도의 몸부림을 우리가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거의 죽음이 가까웠을 때,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한 그분의 고통도 끝이 났습니다. 그분의 영/혼은 hades(죽은 자들의 장소)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옥(hell)”이나 고통 받는 쪽의 hades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브라함 쪽” 또는 축복받은 쪽의 hades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그분께서 죽으신 순간에 끝이 났습니다. 죄에 대한 대가는 치러졌습니다. 그리고는 그분께서는 몸의 부활과 승천 시 다시 주어질 영광을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가셨냐고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sheol/hades를 가셨냐고요?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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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마태 복음 28:1-20, 마가복음 16:1-20, 누가 복음 24:1-53, 요한 복음 20:1-21:2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사도행전(사도행전 1:1-11)에도 등장하십니다.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당신은 그리스도 부활의 여러 "증거들"을 얻게 될 수 있습니다. 이 증거들의 첫 번째는 제자들의 극적인 변화입니다. 그들은 겁먹고 숨어 지내는 한 무리의 남성들이었지만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강하고 용감한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그리스도외에 그 무엇이 이런 극적인 변화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사도 바울의 삶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교회의 박해자에서 교회를 위한 사도로 변화시켰을까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러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사도행전 9:1-6). 세 번째 확실한 증거는 빈 무덤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의 몸은 어디에 있을까요?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은 그분이 묻힌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돌아 왔을 때, 그리스도의 몸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천사들은 그리스도가 약속하신 대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선포하였습니다(마태 복음 28:5-7). 네 번째 그리스도 부활의 추가적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많은 사람들입니다(마태 복음 28:5, 9, 16-17; 마가 복음 16:9; 누가 복음 24:13-35; 요한 복음 20:19, 24, 26-29, 21:1-14; 사도행전 1:6-8; 고린도 전서 15:5-7).

예수님 부활의 또 다른 증거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두는 엄청난 비중입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핵심 구절은 고린도 전서 15장에 있습니다. 이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부활을 이해하고 믿는 것이 왜 중대한지를 설명합니다. 부활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중요합니다: 1)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믿는 자들도 역시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15:12-15). 2)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죄에 대한 그분의 희생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 됩니다(고린도 전서 15:16-19).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죽음이 우리들의 죄에 대한 속죄로 하나님에 의해 받아 들여졌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죽어 죽음에 머무셨다면 이는 그분의 희생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믿는 자들의 죄는 용서받지 못하고 그들이 죽은 후에는 죽음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15:16-19). 요한 복음 3장 16절의 '영생' 같은 것은 있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린도 전서 15:20).

마지막으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분처럼 다시 살아 영생을 누린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고린도 전서 15:20-23). 고린도 전서 15장은 계속해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에 대한 그분의 승리를 증명하고 우리에게 죄에 대해 승리하는 삶을 사는 힘을 제공하는지를 설명합니다(고린도 전서 15:24-34). 고린도 전서 15장은 우리가 입게 될 부활의 몸의 영광스러운 특성을 설명하고(고린도 전서 15:35-49), 그리스도의 부활의 결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사망을 이긴 최후의 승리자임을 선포합니다(고린도 전서 15:50-58).

그리스도의 부활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실인지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린도 전서 15:58). 성경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가장 확실한 사실입니다. 성경은 400여 명에 의해 목격되었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 위에 매우 중요한 기독교 교리를 구축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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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예수님께서 일주일의 어떤 요일에 십자가 형에 처해 지셨는지에 대해 명쾌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금요일과 목요일입니다. 그러나, 일부는 금요일과 수요일 논쟁 둘 다를 종합하여 그 날이 목요일이라고 논증합니다.

마태복음 12:40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금요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3일동안 계셨다고 간주될 수 있는 타당한 이유가 여전히 있다고 말합니다. 1세기 때의 유대인의 생각에는, 하루의 일부분도 온전한 하루로 간주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요일의 일부, 토요일 모두, 그리고 일요일의 일부 동안 무덤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삼일 동안 무덤에 계셨던 것이라고 간주될 수 있습니다. 금요일 주장에 대한 주요 논증들 중 하나는 마태복음 16:21과 누가복음 9:22와 같은 구절들이 예수님께서 삼일째 되는 날 부활하셨음을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무덤에서 온전한 세 번의 날들과 밤들 동안 계실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번역들이 이 구절들에 대해 “삼일째(on the third day)”를 사용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니고, 또한 모든 사람들이 “삼일째(on the third day)”가 이 구절에 대한 최상의 번역이라고 동의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마가복음 8:31은 예수님께서 삼일 “후(after)”에 부활하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목요일의 주장은 금요일 견해에 대해 부연하는 것이고 금요일 저녁의 그리스도의 장사됨과 일요일 아침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어떤 사람들은 20가지나 많은 일들이라 함)이 일어났다고 주로 논증합니다. 목요일 견해 지지자들은 금요일과 일요일 사이에서 오로지 온전한 하루 전체로 볼 수 있는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뿐이라는 것이 특히 문제가 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추가적인 하루나 이틀 정도의 시간이 더 있어야 이런 문제를 해결 해 줍니다. 목요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월요일 저녁부터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고 가정합시다. 다음에 당신이 그를 본 때가 목요일 아침이면 당신은, 엄밀히 따지면 오로지 60시간(2.5일)일지라도, “나는 너를 3일 동안 보지 못했어”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목요일에 십자가 형에 처해지셨다면, 이 예가 어떻게 3일로 간주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수요일이라는 견해는 그 주에 2차례의 안식일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첫째 안식일(십자가에 처형되신 저녁 때인 안식일 [마가복음 15:42; 누가복음 23:52-54]) 후에, 여자들은 향유를 구입했습니다 – 그녀들이 안식일이 지난 후에 구입했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마가복음 16:1). 그리고, 수요일 견해는 이 “안식일”은 유월절이었다고 봅니다(레위기 16:29-31; 23:24-32; 39를 보면, 한 주의 꼭 일곱 째 날일 필요가 없는 아주 성스러운 날들이 안식일이라고 지칭됩니다). 그 주의 두번째 안식일은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보통의 안식일입니다. 누가복음 23:56에서, 첫 안식일이 지나 향유를 샀었던 여인들은 집에 돌아와 향료를 준비 하였고, “안식일에 쉬었다” 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이 주장은 두 차례의 안식일이 없었다면, 그녀들이 안식일이 지나 향유를 구매하고, 그 향유를 안식일 전에 준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차례의 안식일이 있엇다는 견해로 비추어 보면, 그리스도께서 목요일에 십자가 형에 처해지셨다면, 아주 성스러운 안식일(유월절)은 목요일 해가 질 때부터 시작되어 금요일 해가 질 때 – 매주 한번의 안식일 또는 토요일의 시작 – 까지가 될 것입니다. 첫번째 안식일(유월절)이 지나서 향유를 구입했다는 것은 그녀들이 향유를 토요일에 구입했다는 것이 되고 안식일을 범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므로, 수요일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여인들과 향료의 성경적 서술에 위반되지 않고 마태복음 12:40의 문자적 해석을 견지하는 유일한 해명이 될 것입니다. 아주 성스러운 날인 안식일(유월절)은 목요일이었고, 그 후 여자는 금요일에 향유를 구입했고, 같은 날 집에 돌아와 향유를 준비했으며, 그리고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인 토요일에 쉬었으며, 일요일 이른 아침에 향유를 무덤에 가지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달력으로 목요일이 시작되었던 수요일 해질 무렵에 장사되셨습니다. 유대 달력을 사용하면, 목요일 밤(밤 하나), 목요일 낮(낮 하나), 금요일 밤(밤 둘), 금요일 낮(낮 둘), 토요일 밤(밤 셋), 토요일 낮(낮 셋)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정확히 어느 시간에 부활하셨는지 모르지만, 일요일 해 뜨기 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분께서는 유대인에게 한 주의 첫 째 날이 시작되었던 토요일 저녁 해 진 후 바로 이른 시각에 부활하셨을 것입니다. 빈 무덤의 발견은 아직 어둡지만(요한복음 20:1), 바로 동이 틀 때 이루어졌습니다(마가복음 16:2).

수요일 견해의 문제가 될 수 있는 점은 엠마오를 향해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 걷고 있었습니다(누가복음 24:13). 예수님을 알아 차리지 못한 그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형을 예수님께 말씀하고(24:21) “오늘은 이 일이 일어난지 3일 되었다”고 말합니다(24:22). 가능한 해명은 그들이 유대인의 목요일이 시작되는, 예수님께서 장사되신 수요일 저녁부터 세었을 수도 있으며,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가 3일로 계산되었을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예수께서 무슨 요일에 십자가형을 당하셨는지를 안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매우 중요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날과 시간을 분명하게 전달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물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똑 같이 중요한 것은 그분께서 죽으셨던 이유입니다 – 모든 죄인들이 받아 마땅할 형벌을 짊어지는 것. 요한복음 3:16과 3:36 모두는 당신이 그분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형벌을 수요일, 목요일, 혹은 금요일에 받으셨던 여부와 관계없이 한결같은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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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아주 중요합니다(이사야 7:14; 마태복음 1:23; 누가복음 1:27, 34). 첫째, 성경이 이 축복된 사건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봅시다. 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당혹스러워 할 때, 가브리엘 천사는 말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엎으시리니”(누가복음 1:35). 천사는 요셉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라고(마태복음 1:20)” 설명해주면서, 마리아와 결혼해도 된다고 격려합니다. 마태는 처녀가(마태복음 1:18). 갈라디아서 4:4도 처녀를 통한 탄생을 가르칩니다.

이 구절들을 통해, 예수의 탄생은 마리아의 몸을 통한 성령의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물질적인 것(성령)과 물질적인 것(마리아의 자궁) 모두가 관련된 사건입니다. 물론 마리아는 이 임신을 막을 수 없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면, 그녀는 그저 도구로 쓰인 것 뿐 입니다. 이렇게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성육신의 기적을 이루십니다.

하지만, 마리아와 예수가 혈연 관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육체를 가진 온전한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육체는 마리아를 통해 주어진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그리고 죄 없는 온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요한복음 1:14; 디모데전서 3:16; 그리고 히브리서 2:14-17).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즉, 그분께는 죄의 속성이 없으셨습니다(히브리서 7:26). 죄는 아버지를 통해 세대에서 세대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듯 싶습니다.(로마서 5:12, 17, 19). 그러나, 동정녀를 통한 예수의 탄생은 이렇게 이어지는 죄를 막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죄 없는 온전한 인간이 되시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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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의미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하셔서 아들을 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와 함께 하셔서 그녀와 함께 아들을 나으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께서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셨다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요한복음 1:1, 14).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의해 마리아에게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누가복음 1:35은 표명합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예수님께서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재판 받으실 동안에, 대제사장이 요구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태복음 26:63). 예수님께서 “네가 말한 대로 그러하다고” 답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태복음 26:64).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정죄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마태복음 26:65-66). 후에,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그들은 고집합니다: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9:7). 왜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신성모독으로 여겨져야 하고 사형 선고를 받을 만큼의 일이 되어야 합니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구로 뜻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고 주장하는 것(사실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레위기 24:15를 따라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3은 이것을 매우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또 다른 예를 요한복음 17:12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유다는 “멸망의 자식”으로 묘사됩니다. 요한복음 6:71은 유다는 시몬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7:12에서 유다는 “멸망의 자식” 이라고 말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멸망”이란 말은 “파괴, 파멸, 폐기”를 뜻합니다. 유다가 말 그대로 파멸, 파괴, 그리고 폐기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유다의 삶의 정체였다는 뜻입니다. 유다는 멸망의 표상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표상이십니다(요한복음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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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으로, 이 질문이 던져질 때, 물은 사람은 이 질문을 ‘성경 밖’에서의 질문으로 한정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의 자료로서 고려될 수 없다는 생각은 우리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수백개의 참고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들의 기록을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 100년도 넘는, 기원 후 2세기까지로 날짜를 잡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맞다고 하더라도(우리는 강하게 반박합니다), 고대 증거 자료들의 측면에서, 사건들이 일어났던 때로부터 200년 안에 기록된 것은 매우 믿을 수 있는 증거들로 간주됩니다. 게다가,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모두)은 바울의 서신서들(최소한 그 중의 일부라도)이 실제로 1세기 중반, 즉, 예수님의 죽음 후 40년도 안되어 바울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볼 것입니다. 고대 문서 자료의 측면에서 볼 때, 이 것은 1세기 초 이스라엘에 예수라는 이름의 남자가 존재하였다는 매우 강력한 증거입니다.

서기 70년에, 로마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대부분의 지역을 침략하여 파괴하였고, 그곳의 거주자들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 도시들은 말 그대로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많은 증거가 당연히 파괴되었으리라고 우리는 짐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예수님께 대한 살아남은 목격자들의 증언의 양을 제한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대체로 로마제국의 조그만 구석의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지역에 한정되었음을 고려한다면,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놀랄만하게 많은 정보가 세속적인 역사적 자료들로부터 끌어낼 수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역사적 증거들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세기의 로마인이었던 타시투스(Tacitus)는 고대 시대의 아주 정확한 역사가들 중의 한 명으로 간주되는데, 그는 티베리우스(Tiberius)의 통치기간 동안 본디오 빌라도 밑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미신을 믿는 ‘기독교인들’(‘Christians’는 라틴어인 ‘Christus’로부터 유래)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수석 장관이었던 수에토니우스는 서기 1세기에 살았던 이름이 크래스투스(Chrestus 또는 Christ)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연대기, Annals 15.44).

조세푸스 플레비우스(Josephus Flavius)는 가장 유명한 유대인 역사가입니다. 그의 저서 고대사(Antiquities)에서, 야고보를 ‘그리스도라고 불려졌던 예수의 형제’로 언급합니다. 그 중에는 논란이 많은 구절(18:3)도 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그를 사람으로 부르는 것이 합법적이라면)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가 놀라운 축제들을 있게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였다. 경건한 선지자들이 이것들과 그에 관해 일만가지의 다른 놀라운 일들을 미리 예언했던 대로 그는 삼 일째에 다시 살아나 그들에게 나타났다.” 다른 번역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습니다. “그 당시 예수라 불리는 지혜로운 자가 있었다. 그의 행위는 선했고 고결하신 분으로 알려졌다. 많은 유대인들과 다른 나라들에서 온 사람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 형에 처해 죽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가 되었던 사람들은 제자의 신분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가 십자가형에 처해진 지 삼일 후에 그들에게 나타났고 그는 살아있었다고 그들은 보고하였다. 따라서 그는 아마도 선지자들이 경이롭다고 말하였던 구세주였을지도 모른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는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에 드리워졌던 어둠에 관한 논의에서 역사가 탈루스를 인용합니다(Extant Writings, 18).

플라이니 더 영거(Pliny the Younger)는, Letters 10:96에서,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서 경배하였으며 매우 윤리적이었다는 사실을 포함해 초기 기독교 예배 관습을 기록하였고, 애찬식과 성찬식을 언급하였습니다.

바빌론의 탈무드(산헤드린 43a)는 예수의 십자가형이 유월절 전날 이루어졌다는 것과 그리스도에 대한 혐의는 술법을 쓰고 유대인들의 배교를 고무시킨 것이라 확인시켜줍니다.

사모사타의 루시안은 예수님께서 기독교인들에 의해 경배를 받았고, 새로운 가르침을 소개하였으며, 또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처형되셨다는 것을 인정한 서기 2세기 때의 그리스 작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믿는 자들간의 형제애, 개종의 중요성, 그리고 다른 신들을 부인하는 것의 중요성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규율들에 따라 살았고, 자신들이 불멸한다고 믿었으며, 죽음에 대한 경멸, 자발적인 헌신, 그리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금욕으로 특징되었다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마라 바 세라피온은 예수님께서 현명하고 고결한 자로 간주되셨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여겨졌으며,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던 그대로 사셨다고 확인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갖 영지주의적인 글들(진리의 복음, 요한의 외경, 도마 복음, 부활에 관한 논문 등 (The Gospel of Truth, The Apocryphon of John, The Gospel of Thomas, The Treatise on Resurrection, etc.)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모두가 예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초기 비기독교적 자료들만으로도 우리는 거의 복음을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로 불려졌고(조세푸스), ‘마술’을 행하였고, 이스라엘을 새로운 가르침으로 이끌었고, 그들을 위해 유다에서(타시투스) 유월절 날 매달려 죽었으나(바빌론 탈무드), 자신이 하나님이며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했고(엘리에 잘),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하나님으로 경배하면서(플라이니 더 영거) 믿었습니다.

세속적 그리고 성경적 역사 모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너무나도 엄청난 증거가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존재하셨다는 가장 큰 증거는 1세기 때, 열두 사도들을 포함한 문자 그대로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들의 목숨들을 기꺼이 바쳐 순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료들이나 성경의 역사적 자료 양쪽 모두에서 이런 사실을 풍성하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실이라 믿는 것을 위해 죽을 수는 있으나, 아무도 자신들이 거짓인 줄 아는 것을 위해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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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18-19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여기서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대조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육체와 성령이 아닌, 그리스도의 육체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분의 영은 산 채로 남아있었습니다.

베드로전서 3:18-22은 그리스도의 고난(18절)과 그분의 영광(22절) 사이에 필요한 연계를 묘사합니다. 오직 베드로만 이 두 사건들 사이에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킹 제임스(KJV) 성경은 예수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고 말씀합니다(19절). 그러나, 사용된 그리스어는 신약 성경에서 복음을 전파한다고 할 때 흔히 쓰이는 말과 다릅니다. 그것은 단순히 “소식을 알리다”라는 의미입니다;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역 성경은 이것을 “선포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분의 육체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영은 살아계셨었고, 그분께서는 그 영을 아버지께 맞기셨습니다 (누가복음 23:46). 베드로에 따르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어느 시점에 예수님께서는 “옥에 있는 영들”에게 특별한 선포를 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영들(spirits)이라는 말은 인간들이 아닌 천사들이나 마귀들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3:20에서, 베드로는 사람들을 “혼들-souls(킹 제임스 역, KJV)로 언급합니다. 또한,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지옥을 방문하셨다는 말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2:31은 예수님께서 음부(hades)(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B)에 가셨다고 말씀하지만, 음부(Hades)는 지옥이 아닙니다. 음부(Hades)는, 넓은 의미로, 죽음의 영역, 즉, 죽은 사람들이 부활을 기다리는 일시적 장소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NASV 및 NIV 성경에서의 요한계시록 20:11-15은 음부(Hades)와 불못을 확연히 구별합니다. 불못은 영구적이며,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마지막 장소입니다. 음부(Hades)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구약의 성도들 둘 모두를 위한 일시적 장소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영을 아버지께 맡겼고, 육체적으로 죽었으며, 그리고 낙원으로 들어가셨습니다(누가복음 23:43). 그분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예수님께서는 또한 자신이 영적인 존재들(아마 타락한 천사들; 유다서 1:6 참조)에게 소식을 전해 줄 장소를 방문하셨습니다; 이 영적 존재들은 어떻게든 노아의 홍수 이전과 연관이 있습니다(베드로전서 3:20).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옥 안의 영들에게 무엇을 선포하셨는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천사들은 구원을 받들 수 없기에(히브리서 2:16) 구원의 소식은 선포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마 사탄과 그의 무리들에 대한 승리의 선포였을 것입니다(베드로전서 3:22; 골로새서 2:15).

또한 에베소서 4:8-10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일어났던 그분의 활동들과 관련된 단서를 주는 것 같습니다. 시편 68:18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에베소서 4:8). ESV(English Standard Version) 성경은 이것을 예수님께서 “사로잡힌 무리를 이끌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언급은, 예수님께서 낙원에 있는 모든 구원 받은 자들을 모아서 그들이 영원히 거주할 천국으로 데려가신 것 같이 보입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은, 성경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삼일 동안 정확히 무엇을 하셨는지 전적으로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성도들을 위로하셨고, 그들을 그들의 영원한 거처로 데리고 가셨으며, 옥 안에 갇혀있는 타락한 천사들에게 그분의 승리를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누구에게도 구원에 대한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구원의 사역은 십자가에서 완료되었습니다(요한복음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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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기도 했지만, 그분의 제자들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가능한 죄사함의 권능을 예수님께서도 가지셨다고 주장했습니다(사도행전 5:31, 골로새서 3:13, 시편 130:4, 예레미야 31:34). 이 주장과 밀접하게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또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디모데후서 4:1).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습니다(요한복음 20:28). 바울은 예수님을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디도서 2:13) 라고 불렀고, 성육신 이전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하셨다고 언급했습니다(빌립보서 2:5-8).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히브리서 1:8). 요한은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그 밖에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치는 예로써 많은 성경구절들이 있지만(요한계시록 1:17, 2:8, 22:13, 고린도전서 10:4, 베드로전서 2:6-8, 시편 18:2, 95:1, 베드로전서 5:4, 히브리서 13:20), 이들 중 단 한 구절만으로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 간주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구약의 여호와(YHWH, 하나님의 공식 명칭)께만 쓰여졌던 고유한 칭호들이 주어집니다. 구약의 “구원자” 란 명칭(시편 130:7, 호세아 13:14)은 신약의 예수님께도 쓰입니다(디도서 2:13, 요한계시록 5:9). 예수님은 마태복음 1장에서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라 불려집니다. 스가랴 12:10 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말을 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그들이 그 찌른 바 나를 바라보고.” 그런데 신약 성경은 이 말씀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적용합니다(요한복음 19:37, 요한계시록 1:7). 여호와께서 찔림을 당하셔서 사람들이 바라볼 것이라 했는데, 예수님이 찔림을 당하셨고 사람들에게 보여지셨다면, 예수님께서는 여호와이시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바울은 이사야 45:22-23을 빌립보서의 2:10-11의 예수님께 적용하여 해석합니다. 나아가, 기도문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여호와의 이름과 나란히 사용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라디아서 1:3, 에베소서 1:2).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이 기도는 신성모독이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단수형)”(마태복음 28:19, 고린도후서 13:14) 으로 세례를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이 여호와의 이름과 나란히 나타납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행위들이 예수님께로 돌려집니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요한복음 5:21, 11:38-44), 죄를 용서하였고(사도행전 5:31, 13:38), 온 우주를 창조하였고 지탱하십니다(요한복음 1:2, 골로새서 1:16-17). 이는 여호와께서 창조하는 동안 혼자였다고 말씀하신 것을 고려할 때 더 확실해 집니다(이사야 44:24). 나아가, 하나님께서만이 소유하실 수 있는 속성들을 예수님께서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영원성(요한복음 8:58), 무소 부재하심(마태복음 18:20, 28:20), 전지하심(마태복음 16:21), 전능하심(요한복음 11:38-44) 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입증해 보이는 것과 사람들을 그저 믿게 하려고 속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일부 몇 가지 기적들로는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요한복음 2:7), 물 위를 걷고(마태복음 14:25), 보이는 물체들을 배가시키고(요한복음 6:11), 눈먼 자와(요한복음 9:7), 절뚝거리는 자와(마가복음 2:3) 아픈 자를 치유하고(마태복음 9:35, 마가복음 1:40-42), 또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었습니다(요한복음 11:43-44, 누가복음 7:11-15, 마가복음 5:35). 게다가, 그리스도 자신께서도 친히 죽음에서 살아나셨습니다. 소위 말하는 이교도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죽고 사는 신들과는 거리가 멉니다. 부활 같은 것은 다른 종교들에 의해서 심각하게 주장되지 않았고, 그 어떠한 다른 주장도 그렇게 많은 추가적 경전의 인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비 기독교적 비판 학자들이라 할지라도 인정할 것으로 보이는 예수님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이 최소 12가지가 있습니다.

1. 예수는 십자가형으로 죽었다.

2. 그는 묻혔다.

3. 그의 죽음은 제자들을 절망시켰고, 모든 소망을 잃게 했다.

4. 예수의 무덤은 몇 일 뒤에 빈 채로 발견되었다(또는 발견되었다고 주장되었다).

5.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제 모습을 경험했었다고 믿었다.

6. 이 경험 후에, 제자들은 의심하는 자들에서 담대한 신자들로 변화되었다.

7. 이런 메시지는 초기 교회에 있어 설교의 중심이었다.

8. 이런 메시지는 예루살렘에서 설파되었다.

9. 이 설교의 결과로 교회가 탄생하였고 자라났다.

10. 부활일 즉 일요일이 안식일인 토요일을 대체하여 예배 드리는 주된 날이 되었다.

11. 회의론자 야고보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믿으면서 변화되었다.

12. 기독교도의 적이었던 바울은 그가 믿는바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경험하였던 것으로 말미암아 변화 되었다.

누군가가 이러한 사실들에 반대한다 하더라도, 부활을 증거하고 복음을 세우는데 있어서는 몇 가지 항목들만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죽음, 장사,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심(고린도전서 15:1-5) 입니다. 위 사실들의 한 두 개를 설명하는 몇 가지 이론들이 있을 수 있으나, 오직 부활만이 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해명합니다. 비평가들은 살아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보았다는 주장을 인정합니다. 거짓말이나 환영은 부활과 같이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첫째, 그들이 무엇을 얻으려 했겠습니까? 기독교는 인기가 있지 않았고, 돈을 벌게 해주지도 않았습니다. 둘째, 거짓말쟁이는 진실을 위해 희생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끔찍한 죽음도 마다하지 않은 제자들의 의지에 대해 부활보다도 더 나은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착각하는 거짓들을 위해 죽습니다만, 사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것을 위해서는 죽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여호와라고 주장하셨고, 하나님이셨습니다(단지 어떤 ‘하나의 신’이 아닌 유일하신 참 하나님). 그분을 따르는 자들(우상숭배라는 비난의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유대인들)은 그분을 믿었고 그분을 하나님으로 언급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바꾼 부활을 포함하는 기적들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주장을 입증하셨습니다. 다른 어떤 가설도 이러한 사실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경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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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주 물어보는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과 달리, 일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여부에 관하여 질문합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땅을 몸소 걸었던 실제 사람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의 온전한 정체성이 논의의 주제가 될 때 많은 논쟁이 시작됩니다. 거의 대부분의 주요 종교가 예수님은 선지자, 좋은 선생, 또는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좋은 선생, 또는 경건한 사람보다 그 이상인 엄청난 분이시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C.S.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적 스승으로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을 그 누구도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예수와 같은 주장을 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도덕적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신병자—자신을 삶은 계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수준이 똑같은 정신병자—거나, 아니면 지옥의 악마일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여겨 입을 틀어 막을 수도 있고, 악마로 여겨 침을 뱉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요 주님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어쩌니 하는 선심성 헛소리에는 편승하지 맙시다. 그는 우리에게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여지를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라고 주장하십니까? 성경은 그분이 누구라고 말씀합니까? 첫째, 요한복음 10:30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언뜻 보면 본인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한복음 10:33).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라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계속되는 구절들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그럼으로써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결코 수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8:59)고 주장하심으로써 진정으로 자신이 하나님이라 말씀하고 계셨던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8:58은 또 다른 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다시 한번,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치려고 돌을 들었습니다(요한복음 8:59). 예수님께서는 이를 직접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신의 정체 “나는(I am)” 은 구약 성경이 직접적으로 적용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출애굽기 3:14). 예수님께서 무언가 신성을 모독하는, 즉,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고 믿었다면 왜 유대인들이 또 다시 예수님을 돌로 치려 했겠습니까?

요한복음 1:1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제자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라 표명했습니다(요한복음 20:28). 예수님께서는 도마의 고백을 수정하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디도서 2:13)라고 묘사합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똑같이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베드로후서 1:1)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예수님의 온전한 정체를 증언하십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구약 성경의 예수님께 대한 예언들도 그분의 신성을 표명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 9:6).

그러므로, C.S. 루이스는 예수님을 단지 한 분의 좋은 선생이라 믿는다는 것은 어떠한 선택도 될 수 없다고 논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고 부인할 수 없게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거짓말쟁이이므로 선지자나 좋은 선생, 또는 경건한 사람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변명하려는 시도에서, 현대 “학자들”은 성경에서 그분이 하셨다고 하는 많은 말씀들을 “실제 역사적 예수님”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고 말씀하지 않으셨는지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반박한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했고 말씀하지 않으셨는지 그로부터 이 천 년이나 떨어져 사는 “학자들”이 그와 함께 살았고, 섬겼으며,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보다 어떻게 더 나은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요한복음 14:26)?

예수님의 실제적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든 아니시든 왜 문제가 될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셔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만약 그 분께서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그분의 죽음이 온 세상의 죄값을 치르기에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2:2).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그런 무한한 죄값을 치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로마서 5:8; 고린도후서 5:2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빚을 예수님께서 갚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그분께서 죽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구원의 유일한 길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스스로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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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정확히 말씀하셨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0:30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예로 들어 봅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우리는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시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그분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살펴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들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분을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한복음 10:33).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주장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예수님께서 부인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고 선언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자신과 아버지가 한 본성과 한 본질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8:58은 또 다른 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은 신성 모독으로 그분을 죽이려고 돌을 집어 드는 것이었고, 이는 모세의 율법에 그렇게 명해졌기 때문입니다(레위기 24:15).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개념을 되풀이하여 말합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한복음 1:1,14) 이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28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누가 자기 자신의 피로 교회, 즉 하나님의 교회를 사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행전 20:28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피로 자신의 교회를 사셨다고 표명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자 도마는 예수님에 관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 공표했습니다(요한복음 20:28). 예수님께서도 도마의 표명를 수정하지 않으십니다. 디도서 2:13은 우리의 하나님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라고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베드로후서 1:1 또한 참조). 히브리서 1:8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표명하십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며 예수님를 “하나님이여” 라고 언급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한 천사는 사도 요한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요한계시록 19:10).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여러 차례 경배를 받으십니다(마태복음 2:11, 14:33, 28:9,17, 요한복음 9:38).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경배하는 사람들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요한 계시록의 그 천사처럼, 사람들에게 자신을 경배하지 말라고 말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논증하는 성경의 다른 많은 구절들과 단락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셔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만약 그 분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의 죽음이 온 세상의 죄값을 치르기에 충분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2:2).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피조물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무한하신 하나님을 대적한 죄에 요구되는 무한한 형벌의 대가를 치를 수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그런 영원한 형벌의 대가를 치를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세상의 죄들을 짊어지고(고린도후서 5:21), 죽고, 부활하셔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입증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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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으면서 방언을 말하는 경우는 세 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 10장 44-46절, 19장 6절입니다. 성경 내에서 이 세 경우는 방언을 말함이 성령을 받은 증거가 되는 유일한 경우들입니다. 사도행전을 죽 보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만 그들이 방언을 말하였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행 2:41, 8:5-25, 16:31-34, 21:20). 신약 성경 어디에도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을 받은 유일한 증거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실 신약은 그 반대로 가르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성령을 받았다고 알려줍니다(롬 8:9, 고전 12:13, 엡 1:13-14). 하지만 모든 신자가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2:29-31).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세 경우에서는 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을 받은 증거가 되었습니까? 사도행전 2장은 사도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복음을 전할 권능을 부여 받은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다른 언어(방언)로 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사람들과 그들의 언어로 진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은 사도 베드로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복음을 나누기 위해 보냄을 받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교회에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사도들이 받았던 동일한 성령을 이방인도 받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방언을 말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행 10:47, 11:17).

사도행전 10장 44-47절은 이 사실을 묘사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더라”. 베드로는 나중에 이 사건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참으로 이방인을 구원하신 증거로 삼습니다(행 15:7-11).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이로 인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방언을 말하게 될 것으로는 기대되지 않습니다. 사실, 신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회심 사건에 있어서 회심을 맥락으로 하여 방언을 말하는 경우는 오직 두 경우입니다. 방언은 특별한 때에 특별한 목적을 지녔던 초자연적인 은사였습니다. 방언 말함은 성령을 받은 유일한 증거가 아니었으며, 지금까지도 결코 그렇게 받아들여진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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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장 3-8절과 고린도전서 12장은 각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선택에 따라 영적인 은사를 받는다고 뚜렷하게 알려줍니다. 영적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사용하라고 주어집니다(고전 12:7, 14:12). 은사를 주시는 정확한 시기는 특별히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인 은사는 거듭날 때 (구원의 순간) 주어진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나중에 영적인 은사를 주신 사실도 몇몇 구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14절과 디모데후서 1장 6절은 디모데가 안수를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해 은사를 받은 것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디모데가 안수를 받을 때 그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받은 영적인 은사를 장로 중 한 사람이 예언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또한 고린도전서 12장 28-31절과 고린도전서 14장 12-13절에서 은사를 택하여 주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모든 사람이 어떤 특별한 은사를 다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영적인 은사를 갈망하거나 사모할 경우, 예언(다른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사)과 같은 덕을 세우는 은사들을 구해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자, 바울은 그들이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다 받았다고 하면서 왜 더 큰 은사를 구하라고 강력하게 말합니까? 그들이 이러한 더 큰 은사들을 받을 기회가 있는 것입니까? 이는 마치 솔로몬이 하나님의 백성을 바르게 통치하기 위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교회에 더 큰 유익을 끼치기 위해 더 큰 은사들을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은사들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은사들은 우리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여전히 분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모든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예언의 은사와 같은 특별한 은사를 강력하게 바라더라도, 단지 간절히 바란다고 해서 하나님은 그 은사를 모두에게 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 모두에게 예언의 은사를 주신다면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기능은 누가 섬기겠습니까?

대단히 분명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그 명령을 지킬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하시면(증거하는 삶,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삶, 열방을 제자로 삼는 것 등), 우리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복음 전도에 재능이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제자 삼으라고 명하십니다(마 28:18-20; 행 1:8).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은사가 내게 있든 말든 복음을 전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은사를 받고 그 은사를 개발하기로 다짐한 그리스도인은 가르침의 은사를 받고 그 은사를 방치한 사람보다 더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 할 때 영적인 은사를 받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은사들이 개발되는 것입니까? 대답은 둘 다입니다. 일반적으로, 영적인 은사는 구원을 받을 때 주어집니다. 하지만 받은 은사는 영적인 성장을 통해 개발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은사가 있다면 추구해도 되는 것입니까? 영적인 은사를 개발할 수 있습니까? 어떤 특별한 영적 은사를 구해도 되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2장 31절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해줍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당신은 하나님께 어떤 영적인 은사를 구할 수 있으며 그것과 관련된 영역을 개발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은사를 간절히 바랄 수 있습니다. 동시에 당신이 그 은사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며, 아무리 간절히 그 은사를 바라고 얻고자 노력해도 그 은사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어떤 은사가 주어질 때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가장 큰 결실을 맺게 될지 잘 아십니다.

우리가 한 두 가지 은사를 갖게 되는 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영적 은사 목록에 언급된 여러 영역을 개발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즉, 친절하고, 자비의 행위를 보이며, 서로 봉사하고,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세울 목적으로 사랑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고 그분의 교회를 성장시키시며 우리에게 보상하실 것입니다(고전 3:5-8, 12:31-14:1).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기쁨으로 삼을 때 우리 마음에 소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시 37:4-5). 이는 분명히 우리의 소망을 채울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겠다는 사실을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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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고 그들 안에는 영광의 소망이 있습니다(골 1:27).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순간마다 거룩을 나타낼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인도하시도록 의식적인 믿음으로 성령을 의지할 때 나타납니다(롬 6:11-14). 성령의 인도함을 의존하지 않는 신자는 구원이 제시하는 부르심과 기준에 따라 살 수 없습니다. (요 3:3; 엡 4:1; 빌 1:27). 만일 우리의 삶이 성령의 열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드러낸다면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갈 5:22, 23). 성령으로 충만한 것(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성경)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거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과 같습니다(골 3:16).

성령 충만의 결과는 감사와 노래와 기쁨입니다(엡 5:18-20; 골 3:16).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입니다(롬 8:14).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을 택하지 않고 죄를 지음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한 경우에는 잘못을 자백함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엡 4:30; 요일 1:9).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성령과 동행”하는 것으로서 그분이 당신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당신의 마음을 빚으시는 것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처럼,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러하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 “잘하였도다”라는 주인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골 2:5; 마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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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게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사들 가운데 성령의 임재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많은 기능과 역할과 활동을 행하십니다. 첫째, 그분은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역사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도록”(요 16:7-11) 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인정하든 말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공정하고 충분한 논증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의 마음에 적용하여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드십니다. 사람들은 그 확신에 응답하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일단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속하게 되면 성령은 영원토록 우리의 마음에 거주하시면서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녀인 사실을 확증하고, 보증하며, 증거하기 위해 인치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돕고 위로하고 인도하실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이 구절에서 “보혜사”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함께 부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격려하고 위로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신자의 마음 속에 영원히 거주하십니다(롬 8:9; 고전 6:19-20; 고전 12:13).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만일 우리와 개인적으로 함께 계셨더라면 우리에게 행하셨을 일들을 수행하도록 자기 대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일들 중에는 진리는 드러내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예배와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련한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알려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궁극적인 인도자이시며, 앞서 가시고, 길을 인도하시고,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모든 것을 분명하고 자명하게 알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영적인 일들에 대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오류에 쉽게 빠질 것입니다. 성령께서 진리에 대해서 알려주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요 15:26; 고전 12:3). 성령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메시아 되심,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승귀하심,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그분의 역할에 대해 우리에게 확신시켜줍니다(요 16:14).

성령의 역할 중 또 다른 역할은 은사를 주는 역할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이 땅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도록 신자들에게 부여된 영적 은사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 모든 은사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면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 크든 작든 성령께서 주신 은사입니다.

성령님은 또한 우리 삶에서 열매를 맺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열매를 맺는 일을 시작하십니다(갈 5:22-23). 이것들은 우리의 육체의 일들이 아닌데, 이는 육체는 이러한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열매는 우리 삶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거하시며 이러한 모든 기적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며 결코 우리를 떠나시거나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위로의 원인이 됩니다. 이 소중한 선물, 곧 우리의 삶에 거하시는 성령님과 그분의 역사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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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성령에 의해 쓰러지는” 현상은 일반적으로 목사가 누군가에게 손을 얹으면 그 사람이 성령의 권능에 의해 사로잡히면서 발생합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쓰러뜨리는 사람들은 사도 요한이 죽은 자 같이 된 현상(계 1:17)과 사람들이 환상을 보고 땅에 엎드려지는 현상(겔 1:28; 단 8:17-18; 단 10:7-9) 등을 말하는 성경 구절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묘사된 땅에 엎드려지는 현상과 성령에 의해 쓰러지는 현상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서로 대조적입니다.

1. 성경에 묘사된 쓰러지는 현상은 그리스도의 변모 사건(마 17:6)과 같은 특이한 사건이나 환상을 보았을 때 나타나는 한 사람의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에 의해 쓰러지는 비성경적인 현상은 다른 사람의 접촉이나 말하는 사람의 팔의 움직임에 반응합니다.

2. 성경의 쓰러짐 현상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가장 드물게 발생하였고 그 외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에 의해 쓰러지거나 엎드리는 현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거듭 반복되는 사건이며 많은 사람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3. 성경에 묘사된 현상은 사람들이 무엇을 보거나 또는 어떤 대상을 본 후에 엎드려집니다. 하지만 성령을 속여 쓰러뜨리는 자들에 의해 엎드려지는 자들은 연설자의 팔의 움직임에 따라, 또는 교회 지도자의 접촉의 결과로 뒤로 자빠집니다(어떤 경우에는 밀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쓰러지는 모든 현상이 다 사기이거나 또는 접촉 및 미는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힘이나 에너지를 체험하면서 뒤로 넘어졌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성경적인 근거를 찾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에너지 및 힘이 이러한 현상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 전혀 아닐 것이며 또한 성령의 역사의 결과도 아닐 것입니다.

신자들이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도록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실제적인 열매를 추구하기보다는 전혀 영적인 열매를 맺지 않는 기괴한 거짓 현상을 기대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갈 5:22-23).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그러한 거짓 현상에 의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넘쳐 흐르는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와 순종이 넘치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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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에 대한 배경을 알기 위해 방언의 은사에 링크된 글을 읽기 바랍니다. 방언 기도에 대한 증거로 인용되는 성경 구절은 주로 로마서 8장 26절, 고린도전서 14장 4-17절, 에베소서 6장 18절, 그리고 유다서 1장 20절로서 네 군데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8절과 유다서 1장 20절은 “성령 안에서 기도함”에 대해 언급합니다. 하지만 방언 기도는 “성령 안에서 기도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8장 26절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가르칩니다. 로마서 8장 26절은 적어도 두 가지 핵심을 지적하면서 방언은 기도 언어가 아님을 분명하게 합니다. 첫째, 로마서 8장 26절은 탄식하는 분은 성령이시지 신자들이 아닙니다. 둘째, 성령의 탄식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방언의 본질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고린도전서 14장 4-17절만 남게 되며 특히 14절이 남습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은 분명하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언급합니다. 이것이 무슨 현상입니까? 첫째, 문맥을 연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주로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비교 및 대조합니다. 2-5절을 보면 분명히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방언의 은사보다 더 나은 은사로 보고 있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방언의 가치를 외치며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방언을 말하는 것을 기뻐한다고 선언합니다(18절).

사도행전 2장은 방언의 은사가 처음 발생한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날에 사도들은 방언을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은 사도들이 사람의 언어로 말하였던 것을 분명히 합니다(행 2:6-8). 사도행전 2장과 고린도전서 14 장에서 "방언"으로 번역된 단어는 언어를 의미하는 "글로싸"라는 헬라 용어입니다. 현대 영어 중에 "용어집(글로써리)"라는 단어가 이 헬라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방언으로 말하면 나는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언어를 아는 자는 그 방언으로 복음을 전달 받습니다. 다문화 지역이었던 고린도에서는 방언의 은사가 매우 가치가 있고 두드러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 신자들은 방언의 은사로 인해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방언이 사용될 때 "통역"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고전 14:13, 27). 고린도의 어떤 신자가 방언을 말하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선포된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신자 또는 교회의 다른 신자는 방언으로 선포된 그 내용을 전체 회중의 이해를 위해 통역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방언 기도는 무엇이며 방언을 말하는 것과 어떻게 다릅니까? 고린도전서 14장 13-17절은 방언 기도 역시 통역되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결과적으로, 방언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 것 같습니다. 그 방언 기도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익이 되지만, 교회 전체가 유익을 얻으려면 방언 기도 역시 통역되어야 했습니다.

이 설명은 방언 기도를 기도 언어로 보는 사람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견해는 방언 기도는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개인적인 기도 언어로서(고전 13:1) 자기의 덕을 세우는데 유익하다(고전 14:4)고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견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비 성경적입니다. 1) 방언 기도가 통역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개인적인 기도 언어가 될 수 있습니까 (고전 14:13-17)? 2) 성경은 성령의 은사는 자기가 아닌 교회의 덕을 위한 것이라는 말하는데 어떻게 방언 기도는 개인의 덕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까(고전 12:7)? 3) 방언의 은사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고전 14:22)이라면 어떻게 방언 기도는 개인적인 기도 언어가 될 수 있습니까? 4) 성경은 분명히 모든 사람이 반드시 방언의 은사를 소유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고전 12:11, 28-30). 모든 신자가 반드시 방언 기도의 은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방언이 개인의 덕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덕을 세워야 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방언 기도는 사탄과 그의 마귀들이 우리의 기도를 알아듣거나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비밀 암호”라고 이해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하여 비 성경적입니다. 1) 신약은 일관되게 방언을 사람의 언어로 묘사하고 있으며, 사탄과 그의 마귀들은 인간 언어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성경은 셀 수 없이 많은 신자들이 사탄이 그들의 기도를 가로채가는 것을 전혀 염려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언어로 크게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탄이나 그의 마귀들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이해한다고 해도, 그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뜻에 따라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는 것을 막을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사탄과 그의 마귀들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이해하든 말든 상관없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방언 기도를 체험한 후 개인적인 교화에 도움된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까요? 첫째, 우리는 체험이 아니라 성경 위에 우리의 믿음과 실천의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을 통해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되고 도리어 성경에 비추어 우리의 체험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둘째, 많은 사교들과 세상의 종교계에서도 방언 및 방언 기도 현상이 있음을 보고합니다. 분명히 성령님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귀들이 거짓 방언의 은사를 주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성령으로 우리의 체험을 더욱 신중하게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연구 보고에 따르면 사람들이 방언 및 방언 기도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관찰하게 되면 그 과정을 배울 수 있으며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 보고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는 대부분의 방언 및 방언 기도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하는 듯 합니다. 넷째, “개인적으로 덕 세움을 입었다”는 느낌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인체는 합리적인 사고로부터 분리된 새롭고 흥미진진한 감정적인 어떤 것을 체험할 때 아드레날린과 엔돌핀을 생성합니다.

방언 기도에 대한 해석 문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서로 정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방언 기도가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방언 기도가 성숙한 그리스도인과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인 기도 언어로 방언 기도를 드리든 말든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아닙니다. 따라서 비록 방언 기도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개인적인 기도 언어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믿지만, 그럼에도 방언 기도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형제 자매라고 믿으며 이에 우리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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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면, 성령은 참된 신자를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은 신약의 많은 다른 구절들에서도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8장 9절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누구든지 성령께서 내재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님을 분명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성령께서 어떤 신자를 떠났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의 구원 관계를 잃어버린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이는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안전을 가르치는 성경 말씀과 위배됩니다. 신자의 생명 안에 영구적으로 내재하시는 성령님을 말하는 또 다른 구절은 요한복음 14장 16절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면 그분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결코 신자를 떠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은 에베소서 1장 13-14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셔서 하나님이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신자의 소유권을 갖고 계시며 그 신자는 주의 소유물 중 하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으며,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보장으로 구속의 날까지 신자 안에 거하실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차 또는 집을 살 때 계약금을 지불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성도에게 성령을 보내어 내주하게 하심으로 미래의 관계에 대해 계약금을 지불해 주셨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고린도후서 1장 22절과 에베소서 4장 30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이전에는 성령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오셨다가 떠나셔야”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사울 왕과 함께 거하셨지만 나중에 그에게서 떠나셨습니다(삼상 16:14). 그 대신 성령은 다윗에게 임하셨습니다(삼상 16:13).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통 이후 성령이 그에게서 떠나실까 두려워했습니다(시 51:11). 성령님은 브살렐에게 충만하게 임하셔서 그로 하여금 성막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게 하셨지만(출 31:2-5) 영구적인 관계로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 바뀌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오순절 날을 시작으로 하여 신자들에게 영구히 거하기 시작하셨습니다(행 2). 성령의 영구적인 거주는 항상 우리와 함께하고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 약속의 성취입니다.

성령님은 결코 신자를 떠나지 않으시지만 우리의 죄가 "성령을 소멸"(살전 5:19)하거나 "성령을 근심하게"(엡 4:30)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죄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끼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자백되지 않은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할 수 있으며 우리 삶에서 성령의 역사를 효과적으로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요일 1:9)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지만 그분의 임재로 인한 유익과 기쁨은 사실 우리에게서 떠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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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소멸하다"라는 단어는 불을 진압하는 것을 말할 때 사용됩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의 일부인 믿음의 방패를 가질 때(엡 6:16) 그들은 사탄으로부터 날아온 불 화살의 힘을 진압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지옥을 불이 “소멸되지 않는” 곳으로 묘사하셨습니다(막 9:44, 46, 48). 마찬가지로, 성령은 각 신자들 안에 거하시는 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행동과 모습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신자인 우리가 우리의 행동에서 성령님이 나타나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때, 또는 그릇된 일인 줄 알면서도 행할 때, 우리는 성령을 억제하거나 소멸시키는 것입니다(살전 5:19). 우리는 성령께서 그분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성령이 인격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직 인격체만이 근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이러한 감정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divine person)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면, 주로 우리가 근심할 때 성령께서 어떻게 근심하시게 되는지 좀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은 우리가 성령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방인들처럼 살면서(4:17-19), 또는 거짓으로(4:25), 분노로(4:26-27), 도둑질로(4:28), 더러운 말로(4:29), 악독으로(4:31), 용서하지 않음으로(4:32), 음행으로(5:3-5) 성령님을 근심시킬 수 있습니다. 성령을 근심시키는 것은 생각 만으로든 또는 생각과 행동 모두로든 죄의 방식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시키거나 근심시키게 되면 그 효과가 비슷합니다. 둘 다 경건한 생활 방식을 방해합니다. 둘 다 신자가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짓고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을 따를 때 발생합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올바른 길은 오직 신자를 하나님과 청결함으로 더 가깝게 인도하고 세상과 죄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근심을 원치 않고 또한 선한 것을 억제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를 거절함으로써 성령님을 근심시키거나 소멸시켜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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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의 생명 안에 있는 성령의 현존하심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모든 신자가 성령을 받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롬 8:9, 고전 12:13, 엡 1:13-14). 그리스도인의 삶에 성령께서 들어오시는 주요 목적 중 하나는 그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는 그분과 더욱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성령의 임무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 있는 육신의 행위들과 직접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이 구절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채 성령의 영향 아래 있지 않은 사람들의 죄성에 대해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죄로 가득한 우리의 육신은 우리의 본성을 반영하는 그러한 종류의 열매를 산출하며, 반면에 성령은 그분의 본성을 반영하는 그러한 종류의 열매를 산출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새로운 본성과 육신과의 싸움입니다(고후 5:17).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여전히 죄악들을 바라는 육체에 갇혀 있습니다(롬 7:14-25).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며 그분은 우리를 통해 열매를 맺으십니다. 우리는 육신의 일들을 정복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고후 5:17, 빌 4:13). 그리스도인은 항상 성령의 열매를 드러내며 절대적으로 완전한 승리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고, 육신의 소욕을 정복하게 하시도록 성령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요 목적 중 하나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향해 바라는 것이며,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 열매를 맺는 것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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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오케 문구는 성령과 관련하여 교회에서 있었던, 그리고 여전히 있는 논쟁입니다. 문제는 "성령님은 누구로부터 나왔습니까? 성부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성부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입니까?"라는 것입니다. ‘필리오케’라는 단어는 라틴어로 ‘아들’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아버지와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니케아 신조에 “그리고 아들”이라는 문구가 더하여졌습니다. 이 사실 때문에 이 문제는 “필리오케 문구”라고 불립니다. 이 문구 때문에 많은 논쟁이 있었고 결국 주후 1054년에는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가 분열하게 됩니다. 두 교회 측은 필리오케 문구에 대해 아직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14장 16절과 빌립보서 1장 19절을 보십시오. 이 성경 구절들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보내심을 받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필리오케 문구의 근본적인 문제는 성령의 신성을 보호하고자 하는 바람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성령님은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행 5:3-4). 필리오케 문구를 반대하는 자들은 성령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고 아들은 성령으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에게 ‘종속’하게 한다고 믿습니다. 필리오케 문구를 지지하는 자들은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는 사실이 성령님이 아버지 및 아들과 동등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필리오케 논쟁은 우리가 결코 충분히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품격을 포함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한한 존재이신 하나님을 결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며,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성령님이 성부에 의해 보냄을 받았는지, 또는 성부와 성자에 의해 보냄을 받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답변이 없어 보입니다. 또한 반드시 답변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필리오케 문구는 아마 계속 논쟁 거리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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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어떤 사역들은 죄와 위로와 능력에 대한 확신처럼 느낌을 포함할 수 있지만, 성경은 성령과 우리의 관계를 우리의 느낌 및 느낌의 방식에 두지 않도록 교훈합니다. 거듭난 모든 신자에게는 내주하시는 성령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혜사가 오시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 자신과 유사한 분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주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거듭난 모든 신자 안에는 성령께서 내주하시지만 모든 신자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아가면 성령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내주하시지만 우리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에 대해 언급하며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사용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고 사도 바울이 포도주를 마시는 것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맥락은 성령 충만한 신자의 삶과 내적 갈등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많은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한 경고 외에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술을 마시고 취하게 되면 특이한 특성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혀는 꼬부라지며, 판단은 흐려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분에서 비교를 합니다. 술에 취한 사람에게 어떤 특징이 나타나는 것처럼,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자에게도 특정한 특성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5장 22-24절에서 성령의 ‘열매’에 관해 읽습니다. 그 열매는 성령의 열매이며, 거듭난 신자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동사 시제는 진행형으로서 성령에 의해 "충만하여지는" 계속적인 과정을 나타냅니다. 한편, 이 말은 권면이기 때문에 신자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거나 또는 성령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에베소서 5장의 나머지 부분은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특권과 자격으로서 성령 충만을 입게 되는 것이지 성령을 느끼기 때문에 충만하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 및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주께 순종하여 행한 결과입니다. 성령 충만은 은혜의 선물이지 감정적인 느낌이 아닙니다. 감정은 우리를 속일 수 있고 속일 것이며, 우리는 성령이 아니라 순전히 육체의 욕심에서 나오는 감정적인 열광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갈 5:16, 25).

이렇게 말하였지만,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의해 압도당할 때 우리는 성령을 감정적으로 체험할 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생길 때는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칩니다. 다윗 왕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면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삼하 6:14). 성령에 의해서 기쁨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은혜에 의해 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느낌을 기준으로 하여 성령을 받았다고 확신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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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영적인 은사 간에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둘 다 사용하면 효과가 배가됩니다. 둘 다 이기적인 목적이 아닌 남을 위해 사용되도록 의도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7절은 영적인 은사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고 언급합니다. 두 위대한 계명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 목적을 위해 우리의 재능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재능과 영적 은사는 사람마다 다르며 주어지는 시기도 다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상관없이) 유전과 환경(음악을 하는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는 음악적인 재능을 개발하는데 도움을 얻게 될 것임)의 조합의 결과로 인하여 자연적인 재능(음악, 예술, 수학에서 자연적인 능력을 가짐)을 부여 받으며, 또는 하나님이 특정한 개인에게 특정한 재능을 주시기도 합니다(예를 들어, 출애굽기 31장 1-6절에 나오는 브살렐). 성령의 은사는 성령에 의해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집니다 (롬 12:3, 6). 불신자가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는 순간, 성령께서는 그분 뜻대로 새신자에게 영적인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고전 12:11).

로마서 12장 3-8절은 영적인 은사들을 예언, 섬김(일반적인 의미), 가르침,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 베풂 등으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8-11절은 그 은사들을 지혜의 말씀(영적인 지혜를 전하는 능력), 지식의 말씀(실천적인 진리를 전하는 능력), 믿음(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신뢰), 기적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공부하지 않은 언어로 말할 수 있는 능력), 방언 통역 등으로 나열합니다. 세 번째 목록은 에베소서 4장 10-12절인데 하나님은 그분의 교회에 사도, 선지자, 선교사, 목사, 교사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들 목록의 내용들이 서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영적인 은사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성경 목록이 모든 은사들을 다 나열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에 언급되지 않는 추가적인 영적 은사들이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습니다.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 재능을 개발하다가 나중에 그 재능과 맞는 직업이나 취미를 취할 수 있는 반면, 영적인 은사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도록 하기 위해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 확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부름을 받음과 함께 "봉사의 일"(엡 4:12)에 관여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은사를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행한 모든 일에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역시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면서 삶의 성취감을 발견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임무는 성도들을 세워 하나님이 부르신 사역에 더 잘 준비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주께서 영적인 은사를 주신 의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들을 세워 교회 전체가 힘 있게 성장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영적인 은사와 재능의 차이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재능은 유전 및 훈련의 결과이며, 영적인 은사는 성령의 권능의 결과입니다. 2) 영적인 은사는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소유하지만, 재능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누구나 소유할 수 있습니다. 3) 재능과 영적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재능은 전적으로 비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지만, 영적인 은사는 이러한 과업들을 위해 집중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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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은 영적 은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줄 어떤 마법같은 공식이나 은사 테스트는 없습니다. 성령님이 결정하시는 데로 나누어주시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2:7-11). 신자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문제는 자신이 받은 은사에만 전념해서 은사를 받았다고 믿는 그 영역 안에서만 하나님을 섬기려고하는 유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에 있어 자신을 순종하며 섬기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부르신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은사 혹은 은사들을 갖추어 주실 것입니다.

영적 은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알아낼 수 있습니다. 영적 은사 테스트만을 완전히 의지할 수 없지만 내게 가능한 은사들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확인도 내가 가진 은사를 감지할 수 있도록 합니다. 또 사람들은 나의 섬김을 통해, 내 자신은 당연시 여기거나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용되어지는 은사들을 발견해줄 수도 있습니다. 기도도 또한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영적 은사들로 준비되어있는지 아시는 단 한 분은 그 은사를 주시는 분이신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 좋게 사용할 수 있도록 기도를 통해 내가 어떤 영적 은사들을 가지고 있는지 성령님께 여쭈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들을 교사들이 되라고 부르시고, 그들에게가르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또 섬기는 자들이 되라고 부르시고, 그들에게 돕는 은사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은사를 특별히 안다는 것이 우리가 받은 은사 밖의 영역들에서의 섬김을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병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영적 은사를 아는 것은 유익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가진 영적 은사에만 매달려서 내가 받은 은사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다른 섬김의 기회들을 잃게 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까? 네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에 우리가 헌신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은사들로 우리를 준비시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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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구절은 요한복음 14:6인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실 것이고 그 내주하심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 충만과 성령의 거하심(내주하심)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의 영원한 내주하심은 선택된 몇 명의 믿는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결론을 지지하는 다수의 성경적 언급들이 있습니다. 첫째, 성령은 예수님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예외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고, 이 선물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 다른 조건이 주어지지 않습니다(요한복음 7:37-39). 둘째, 성령은 구원 받을 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3에 따르면, 성령은 구원 받는 순간에 주어집니다(에베소서 1:13). 갈라디아서 3:2은 이와 같은 진리를 강조하며 성령의 인치심과 내주하심이 믿을 때 일어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성령은 믿는 자들 안에 영원히 내주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미래에 올 영광에 대한 보증금, 또는 증명으로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고린도후서 1:22; 에베소서 4:30).

이는 에베소서 5:18에서 언급 된 성령 충만과 대조가 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완전히 따라야 하며 그래야만 그분께서 우리를 온전히 품으실 수가 있는데, 이런 의미로 우리를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9와 에베소서 1:13-14 은 성령께서 모든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시지만, 그분께서는 근심하실 수 있고(에베소서 4:30), 우리 안에서 그분의 역사가 소멸 될 수도 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9). 우리가 이런 상태를 허락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나 우리를 통한 성령의 역사나 그분의 능력의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를 인도하고 주관하면서, 우리 삶들의 모든 부분을 장악하시는 데 있어 그분을 자유롭게 해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행사될 수가 있어 우리가 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해 열매를 맺을 수 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외부적인 행위들에게만 적용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 행위들을 주관하는 제일 깊숙한 생각들과 동기들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시편 19:14은 말씀합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죄는 성령 충만을 방해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성령 충만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에베소서 5:18은 우리가 성령 충만할 것을 명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위한 기도가 충만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들에 대한 우리의 순종만이 성령께서 내 안에서 자유롭게 역사하는 자유를 가지시게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성령이 충만 되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우리는 바로 하나님께 그것을 고백하고,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위해 우리의 헌신을 새롭게 해야 합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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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순간 바로 성령을 받는다고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고린도전서 12:23 은 공표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9은 성령을 소유하지 않은 자는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았다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에베소서 1:13-14는 성령은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구원의 인증이 된다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날인)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세 구절들을 보면 성령은 구원의 순간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고린도 교회의 믿는 자들이 성령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우리 모두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우리가 마실 한 성령이 주어졌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서 8:9에 성령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았다고까지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소유는 구원을 받았느냐의 여부를 확인하는 요소가 됩니다. 나아가, 사람이 성령을 구원의 순간에 받지 못하면, 성령은 구원의 인침이 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에베소서 1:13-14). 성경의 많은 부분은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보장된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성령 사역들이 자주 혼란스럽기 때문에 논란이 많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 혹은 성령의 내주하심은 구원을 받는 순간 일어납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계속 진행중인 과정입니다. 우리가 성령 세례 역시 구원의 순간 일어난다고 믿는 반면, 어떤 신자들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종종 성령 세례와 구원에 따르는 행위인 “성령을 받는 것”을 혼동케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령을 어떻게 받습니까?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함으로써 우리는 성령을 받습니다(요한복음 3:5-16). 언제 성령을 받습니까? 우리가 믿는 그 순간 나는 성령을 영원히 소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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