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t Questions 12 페이지 > 기독정보닷컴

답변: 다신론은 많은 신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헬라어 폴리(poly)는 많다는 뜻이며 씨즘(theism)은 신이라는 뜻입니다. 다신론은 아마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신론일 것입니다. 고대에 가장 잘 알려진 다신론의 예는 그리스 로마 신화입니다(제우스, 아폴로, 아프로디테, 포세이돈 등)입니다. 가장 분명한 다신론의 예는 힌두교로서 3억이 넘는 신들이 있습니다. 힌두교는 본질적으로 범신론이지만 많은 신들을 믿는 신앙도 받아들입니다. 다신교에서조차도 한 신이 다른 신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제우스와 힌두교의 브라마 등이 그러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은 구약에서 다신론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틀림없이 몇몇 구절들은 복수형의 ‘신들’을 가리킵니다(출 20:3; 신 10:17, 13:2; 시 82:6, 단 2:47). 고대 이스라엘은 오직 한 분의 참된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였지만, 종종 계속적으로 우상 숭배와 이교 신들을 숭배함으로써 자신들의 믿음대로 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여러 신들을 말하고 있는 이 구절들과 다른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히브리 단어 엘로힘(elohim)은 한 분의 참 하나님과 거짓 신들 및 우상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 단어는 "하나님"과 거의 동일한 기능을 하였습니다.

무언가를 "신"으로 묘사한다고 해서 당신이 그것을 신의 존재로 믿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서 신들을 말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신들이라고 불리지만 신이 아닌 거짓 신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개념은 열왕기하 19장 18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시편 82편 6-7절은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다신론에 반대되는 것을 가르칩니다. 신명기 6장 4절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고 말합니다. 시편 96편 5절은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고 선언합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은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합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인 것처럼 가장하는 거짓 신들이 있지만,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십니다.
답변: 펠라기우스(Pelagius)는 서기 300년대 후반과 400 년대 초반에 살았던 수도승이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원래 또는 유전된 죄로 인한 부패가 없이 순수하게 태어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영혼을 직접 창조하셨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의 영혼은 원래부터 죄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는 미래 세대의 인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이 견해는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많은 성경 내용 및 성경 원리와 상충합니다. 첫째, 성경은 우리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죄 중에 있다고 말합니다(시 51:5). 더욱이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의 결과로 인하여 죽는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겔 18:20; 롬 6:23). 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이 죄에 대한 자연스러운 성향이 없이 태어난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그 반대라고 말합니다(롬 3:10-18). 로마서 5장 12절은 아담의 죄가 남은 인류를 감염시킨 사실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양육한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이 바른 행동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죄를 짓는지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펠라기우스주의는 분명히 비성경적이고 거부되어야 하는 사상입니다.

준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는 근본적으로 인류는 죄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가르치지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준펠라기우스주의는 본질적으로 전적 타락을 반대하는 부분적인 타락을 주장합니다.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박하는 똑같은 성경 구절들이 또한 준펠라기우스주의를 반박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18절은 절대로 인류가 죄에 부분적으로만 오염되어 있다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일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펠라기우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준펠라기주의는 비성서적이며 거부되어야 합니다.
답변: 범신론은 하나님이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며,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은 하나님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범신론은 다신론(많은 신을 믿는 신앙)과 유사하지만 다신론을 넘어서서 모든 것이 신이라고 가르칩니다. 나무도 하나님, 바위도 하나님, 동물도 하나님, 하늘도 하나님, 태양도 하나님, 당신도 하나님입니다. 범신론은 많은 사교들과 거짓 종교 배후에 있는 가정입니다(예를 들면, 힌두교와 불교는 어느 정도까지, 다양한 하나됨 및 통일 이교들의 주장들, 그리고 "대자연" 숭배자들).

성경은 범신론을 가르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범신론과 혼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편재 교리입니다. 시편 139편 7-8절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편재란 그분이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주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범신론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지만 모든 것이 그분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무 안에, 사람 안에 계시지만 그 사실이 나무와 사람을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범신론은 전혀 성경적 믿음이 아닙니다.

범신론에 반하는 가장 분명한 성경적 논증은 우상 숭배에 대한 수많은 명령들입니다. 성경은 우상, 천사, 천체, 자연물 등을 숭배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만일 범신론이 사실이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이므로 그러한 대상을 실제로 숭배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범신론이 사실이라면, 바위 나 동물을 숭배하는 일은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당한 일입니다. 성경이 분명하고 일관적인 자세로 우상 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범신론을 반대하는 결정적인 논증입니다.
답변: 도덕적 상대주의는 도덕적 절대주의와 비교하면 더 쉽게 이해됩니다. 절대주의는 도덕성이 보편적인 원칙(자연 법칙, 양심)에 의존한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 절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우리의 공통적인 도덕성의 궁극적인 근원이며, 그러므로 일반 도덕성은 그분처럼 변함이 없다고 믿습니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도덕은 어떤 절대 표준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윤리적 ‘진리’는 상황, 문화, 사람의 감정 등과 같은 변수에 달려 있다고 주장합니다.

모호한 특징을 나타내는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해 몇 가지 반론을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상대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사용된 많은 논점들이 처음에는 맞게 들릴 수는 있지만, 모두가 따라야만 하는 ‘올바른’ 도덕적 방안을 제안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논리적인 모순이 있게 됩니다. 즉, 그 방안 자체가 절대주의인 셈입니다. 둘째, 심지어 소위 상대주의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상대주의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어떤 살인자 또는 강간범이 자신의 기준을 위반하지 않는 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상대주의자들은 다른 문화들 사이의 다른 가치들을 주장하며 도덕도 사람들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개인의 행동(그들이 행하는 일)과 절대 표준 (그들이 행해야 하는지의 여부) 사이에서 혼동을 빚습니다. 문화가 옳고 그름을 결정한다면 우리는 나치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결국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문화의 도덕을 따랐던 것이 아닙니까? 오직 살인이 보편적으로 잘못이라고 여겨져야만 나치가 틀린 것이 됩니다.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도덕성"을 가졌다는 사실은 그러한 보편적인 잘못을 바꾸어내지 못합니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다른 도덕 관행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공통적인 도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낙태 지지자와 반대자는 모두 살인이 잘못이라는 점에 대해 동의하지만 낙태가 살인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절대적 보편적 도덕은 사실로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변화하는 상황이 변화하는 도덕성을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어떤 행동이 옳지 않아도 다른 상황에서는 그 행동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동을 판단하는 데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황, 행동, 그리고 의도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실패 (행동)하더라도 살인 미수(의도)로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상황은 도덕적 결정의 일부가 되는데 그 이유는 상황은 어떤 특정한 도덕적 행위(보편적 원리 적용)를 선택하는 맥락을 설정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주의자들이 외치는 주된 주장은 관용입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그들의 도덕성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으며, 상대주의는 모든 견해를 용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선, 악은 용납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여성은 학대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성폭행자의 견해를 용인해야 합니까? 둘째, 상대주의자가 무관용 및 절대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셋째, 상대주의는 어떤 사람이 첫 번째로 용납될 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용인해야 한다(비록 동의하지 않더라도)는 바로 그 사실은 우리가 항상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도덕 규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시 절대주의입니다! 사실 보편적 도덕 원칙이 없다면 선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양심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우리는 모두 우리가 잘못하였을 때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악한 일을 당할 때 본능적으로 죄를 인식합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도 그 죄 된 행위를 인식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심지어 아이들마저 ‘공평’과 ‘불공평’의 차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편적 도덕성이 틀렸고 도덕적인 상대주의가 맞는다고 주장하는 철학은 잘못된 철학입니다.
답변: 간단히 말해서, JEDP 이론은 성경의 첫 다섯 권의 책들, 곧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주전(기원전) 1400년에 죽은 모세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모세 이후의 다른 저자들 및 편집자에 의해 전적으로 쓰였다는 주장입니다. 이 이론은 하나님에 대한 이름이 모세오경의 여러 부분에서 다르게 사용된 사실에 기초를 두고 언어학적 문체의 차이를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JEDP 이론의 각 문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여호와를 사용하는 저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엘로힘을 사용하는 저자, 신명기의 저자 및 레위기의 제사장 저자인 4명의 작가를 나타냅니다. JEDP 이론은 모세오경의 여러 다른 부분이 기원전 4세기에 아마도 에스라에 의해 편집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 만일 모세오경이 한 명의 작가가 쓴 책이라면 왜 하나님의 이름이 다릅니까?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은 엘로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창세기 2장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이와 같은 패턴은 모세오경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중요한 점을 지적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강력한 창조주이신 엘로힘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여호와, 곧 인류를 창조하시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다른 저자를 가리키지 않고, 한 저자가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을 사용하여 그분 성품의 다양한 측면을 묘사하거나 어떤 면을 강조하려고 한 것입니다.

다른 문체에 관해서는, 저자는 역사(창세기)를 쓰고, 법령을 쓰고(출애굽기, 신명기), 희생 제도의 복잡한 내용(레위기)을 쓸 때에 다른 문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JEDP 이론은 모세오경에서 설명될 수 있는 차이점을 오해하여 사실 및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정교한 이론을 고안해 낸 것입니다. J, E, D, P 문서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고대 유대인이나 기독교 학자는 그런 문서가 존재할 것을 암시한 적도 없습니다.

JEDP 이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논쟁은 성경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2장 26절에서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모세가 출애굽기 3장 1-3절의 불타는 가시나무 떨기 사건을 기록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3장 22절에서 신명기 18장 15절에 대해 언급하면서 모세가 그 구절의 저자임을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5절에서 모세가 레위기 18장 5절에서 묘사한 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세가 레위기의 저자임을 말합니다. JEDP 이론이 사실이 되려면 예수님, 누가, 바울은 모두 거짓말쟁이이거나 구약에 대해 잘못 이해한 것이 됩니다. 우리는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JEDP 이론보다는 예수님과 성경의 저자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딤후 3:16-17).

답변: 신학에서 이원론의 개념은 동등하게 강한 선과 악, 두 개의 분리된 실체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이원론에서는 하나님은 선한 존재를, 사탄은 악한 존재를 대표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비록 사탄이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반역하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천사였기 때문입니다(사 14:12-15; 겔 28:13-17). 성경은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고 말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원론은 없으며, 선과 악이라고 불리는 동등한 반대되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대표되는 선은 틀림없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사탄에 의해 대표되는 악은 선과 상대가 될 수 없는 약한 힘입니다. 악은 선과의 싸움에서 매번 패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의 본체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반면, 사탄에 의해 의해 대표되는 악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리가 선과 악을 두 개의 동등한 반대 세력으로 묘사한다면, 그 교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대표되는 선이 우주를 다스리는 권세라고 가르치는 성경적 입장과 상충됩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으며 결코 그렇게 될 수도 없기 때문에 사탄이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교리는 거짓 교리로 표시될 수 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보다 더 높게 올라가려 했다가 하늘에서 쫓겨난 사실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하거나 더 우월해지려는 시도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주로 인간 지혜의 철학적인 줄기를 통해 내려온 "이원론"의 기본 교리를 볼 때에 그의 변함없는 시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주의 어떤 구석에도 이원론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유일한 힘이 있으며, 그 힘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성경의 증거에 따르면, 오직 한 가지 힘이 전능한 것이지 두 가지 힘이 아닙니다. 따라서 서로 반대하는 두 가지 동등한 힘(선과 악)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원론의 교리는 거짓 교리입니다.

English  

답변: 관상 영성은 성경적이며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매우 위험한 관행입니다. 그것은 거짓 가르침으로 가득 차있는 이머징 교회 운동과 가장 일반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한 관상 영성은 기독교와 연관성이 거의 없는 여러 다른 그룹들에 의해서도 사용됩니다.

실제로, 관상 영성은 주로 명상에 중점을 두지만, 성경적인 관점의 명상은 아닙니다. 여호수아 1장 8절과 같은 구절은 실제로 우리에게 묵상을 권합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명상의 초점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합니다. 관상적인 영성 중심의 명상은 말 그대로 아무것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실행자는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그저 "있을" 것을 권고받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더 큰 영적 경험을 가능하게 도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시키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도록 권고받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우는 것은 그러한 적극적이고 의식있는 변화에 반하는 것입니다.

관상 영성은 또한 신과 신비로운 경험을 추구하도록 장려합니다. 신비주의는 주관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 영적 진리, 그리고 궁극적인 현실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경험 지식에 대한 강조는 성경의 권위를 침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압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정의로 가르치고, 책망하고, 수정하고, 훈련하는데 유용하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할 수 있습니다"(디모데 후서 3:16-17). 하나님의 말씀은 완벽합니다. 하나님이 신비한 경험을 통해 그의 말씀에 추가적인 가르침이나 진리를 추가한다고 믿을만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사실에 근거합니다.

관상 영성 센터(Center for Contemplative Spirituality) 웹 사이트는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세속적, 종교적 배경에서 왔으며 우리는 영적 연습과 세계의 위대한 영적 전통 연구를 통해 우리의 여행을 풍성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 퍼져 나가며 모든 존재에 대한 우리의 연민을 고무시키는 사랑의 성령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목표들은 성경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을 제외한 모든 영적 전통은 거짓이기 때문에 세계의 "영적 전통"을 연구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있는 유일한 길은 그분이 정하신 길, 즉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English  

답변: 먼저 "관상 기도"를 정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상 기도는 단지 "기도하는 동안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으로 기도하도록 지시합니다(고전 14:15). 따라서 분명히 기도는 묵상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관상 기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관상 기도는 많은 비성경적인 사상과 관행을 받아들인 이머징 교회 운동의 부상과 함께 실제적으로나 대중적으로 천천히 퍼져나갔습니다. 관상 기도는 그렇게 퍼져나간 실행법입니다.

관상 기도는 실행자가 어떤 단어에 집중한 후 기도를 하는 동안 계속 반복하여 그 단어를 명상하는 "구심 기도"로 시작됩니다. 그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음성을 더 쉽게 들을 수 있도록 외부의 관심에 대해 마음을 비우기 위한 것입니다. 구심 기도 후에, 실행자는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들으며 그분의 임재를 느껴야 합니다.

이것은 해롭지 않은 방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러한 기도 유형은 성경적인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합니다. 사실, 그것은 성경에서 정의된 기도 방법과 정반대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 이 구절들 및 여러 다른 구절들은 기도가 비밀스럽고 신비한 명상에 의한 하나님과의 교통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의사소통임을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관상기도는 그 의도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신비 체험에 초점을 둡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순전히 주관적이며 진리나 사실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과 삶을 진리의 기초에 두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딤후 3:16-17).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은 사실에 근거합니다. 신자가 성경의 기록을 넘어서는 체험적인 지식을 신뢰하는 것은 신앙의 표준인 성경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관상기도는 동양 종교와 뉴에이지 사교에서 사용되는 명상 훈련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구원은 오직 자신을 통해서만 온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요 14:6) 관상 기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자들은 모든 종교로부터 지지자들을 얻기 위해 열린 영성을 받아들입니다. 현대 기도 운동 가운데 실행되고 있는 관상 기도는 성경적인 기독교에 반대하는 입장이기에 우리는 그 기도를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English  

답변: 아리우스주의(Arianism)는 4세기 초의 선생인 아리우스(Arius)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가장 일찍이, 아마도 가장 중요한 논쟁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주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육신으로 계신 하나님이셨습니까 아니면 피조물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단지 하나님과 유사합니까? 아리우스는 예수님은 가장 먼저 지음 받은 피조물이며 모든 피조물의 영광의 관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이후로 아리우스주의는 예수님은 신성한 속성을 지닌 피조물일 뿐, 그분 자신은 하나님은 아니라는 견해가 되었습니다.

아리우스주의는 예수님은 피곤함을 느끼셨고(요 4:6) 자신의 재림 날짜도 모르는 것(마 24:36)을 지적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피곤을 느끼고 뭔가를 모른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피조물로 격하시킨다고 해서 답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전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온전한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심으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제약을 지니신 사실은 그분의 신성 및 영원성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아리우스주의의 두 번째 큰 오해는 "맏아들"의 의미입니다(롬 8:29; 골 1:15-20). 아리우스를 추종하는 자들은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창조의 첫 번째 행위에 의해 태어났거나 지음 받았음을 의미한다고 이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자존하심과 영원하심을 선포하셨습니다(요 8:58, 10:30).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합니다. 성경 시대에서 가족의 맏아들은 큰 영예를 받았습니다(창 49:3; 출 11:5, 34:19; 민 3:40; 시 89:27; 렘 31:9).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가족 중에 출중한 맏아들입니다.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사 9:6)이십니다.

거의 1 세기 동안 교회 초기의 여러 총회를 거친 논쟁 끝에 기독교 교회는 공식적으로 아리우스주의를 거짓 교리로 선언하고 거절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아리우스주의는 기독교의 믿음의 교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리우스주의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리우스주의는 수세기 동안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어 왔습니다.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교도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 거의 아리우스주의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가 공식적으로 거절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주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공격하는 모든 견해들에 대해 공식적으로 거절해야 합니다.

English  

답변: “열린신론”(Open Theism)은 “열린신학”(Openness Theology), 또는 “열린 하나님”(Openness of God)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인간의 자유 의지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예지를 설명하려는 시도입니다. 열린신론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들은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미래를 절대적으로 아신다면 인간들은 참으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미래에 대한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열린신론은 미래를 알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알 수 있는 모든 것만을 아시지 미래는 모르십니다.

열린신론은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또는 “이제야 아노라”, “그들을 행한 것을 보시고” 등의 성경 구절에 그들의 믿음의 바탕을 둡니다(창 6:6; 22:12; 출 32:14; 욘 3:10).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을 선언하는 여러 많은 성경 구절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성경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을 묘사하시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과 결정이 어떠할 줄 미리 아시지만 우리의 행동에 따른 주의 행동과 관련해서 “주의 뜻을 돌이키사”라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악함에 대해 하나님이 실망했다고 해서 미래를 알지 못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시편 139장 4절, 16절은 열린신론과 상충되는 언급을 합니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 미래를 모르신다면 어떻게 구약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잡한 세부 사항들을 예측할 수 있으셨겠습니까?

궁극적으로 열린신론은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 의지 사이의 설명될 수 없는 관계를 설명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실패합니다. 극단적인 칼뱅주의의 형태들이 인간들을 단지 미리 프로그램된 로봇들에 불과한 것으로 만듦으로 실패한 것처럼 열린신론은 하나님의 참된 전지하심과 주권을 거부함으로써 실패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이해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기”(히 11:6)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린신론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도전하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열린신론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거부되어야 합니다. 열린신론은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지만, 성경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English  

답변: 과거주의(Preterism)에 따르면, 성경 속의 모든 예언은 실제적인 역사입니다. 성서에 대한 과거주의 해석은 요한계시록이 종말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1세기 때의 분쟁들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과거주의라는 용어는 ‘과거’란 의미의 라틴어 (프래터)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과거주의는 ‘종말’에 관한 성경의 예언들은 과거에 이미 성취되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과거주의는 종말적 예언들을 여전히 미래에 성취될 것으로 보는 미래주의(Futurism)와 정반대입니다.

과거주의는 두 유형으로 나뉘어 집니다. 완전 (일관적인) 과거주의와 부분적 과거주의입니다. 이 글은 완전 과거주의(또는 소위 극단적인 과거주의)에 관한 논의로 한정됩니다.

과거주의는 요한계시록에 있는 예언의 미래적 성격을 부인합니다. 과거주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신약 성경의 모든 종말적 예언들이 로마가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파괴했던 주후 70년에 성취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과거주의는 일반적으로 종말과 관련된 모든 사건들, 즉, 예수님의 재림, 환난, 죽은 자의 부활, 마지막 심판이 이미 발생하였다고 가르칩니다. (마지막 심판의 경우는, 여전히 성취되는 과정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땅으로의 재림은 ‘영적’인 재림이지 육체적인 재림이 아니라고 합니다.

과거주의는 율법이 주후 70년에 성취되었고, 이스라엘과의 하나님의 언약도 종료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과거주의자들에게는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언급된 “새 하늘과 새 땅”은 새 언약 아래에 있는 세상에 대한 묘사입니다. 기독교인이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듯이, 새 언약 아래에 있는 세상도 “새 땅”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주의의 이러한 측면은 쉽게 대체 신학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과거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예수님의 감람 산 강화(Olivet Discourse)의 한 구절을 지적합니다. 예수께서 종말에 일어나는 일들을 몇 가지 묘사하신 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마 24:34)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과거주의자는 이 구절의 의미를 예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씀하신 모든 일들이 그 말씀을 하신 때로부터 한 세대 내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즉, 주후 70년의 예루살렘의 멸망은 “심판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과거주의는 많은 문제점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과거주의는 이스라엘과의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한 것이며(렘 31:33-36) 또한 미래에 이스라엘의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놓친 점입니다(사 11:12). 사도 바울은 후메내오와 빌레도와 같은 자들에 대하여 경고하면서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의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언급하신 “이 세대”는 마태복음 24장에 묘사된 사건들의 시작을 보게 될 세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은 복잡한 주제이며, 많은 예언들과 관련된 성경의 종말적 이미지들의 사용은 종말적 사건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로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기독교 내에서도 일부 이견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과거주의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물리적 특성을 부인하고, 또한 환난의 사건을 예루살렘의 멸망에 국한시킴으로써 환난의 끔찍한 성격을 경시하는 심각한 결함을 드러냅니다.

English  

답변: 영혼절멸설은 불신자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죽음 후에 ‘소멸’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람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 받는다는 생각은 너무나 끔찍하기 때문에 영혼절멸설은 매력적입니다. 영혼절멸설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몇 개의 구절들이 있지만, 사악한 자들의 운명에 관한 성경의 말씀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지옥에서의 형벌은 영원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영혼절멸설을 믿는 것은 1) 죄의 결과들, 2) 하나님의 공의, 3) 지옥의 특성, 이 세 교리 중에 하나 또는 그 이상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부터 기인합니다.

영혼절멸론자들은 지옥의 특성과 관련된 불못의 의미를 오해합니다. 분명히 불타는 용암의 못에 사람을 던져 넣으면 그 사람은 거의 즉각적으로 소멸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못은 물리적이면서 또한 영적인 영역입니다. 불못에 던져지는 것은 그저 인간의 육체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육, 혼, 영입니다. 영적인 특성은 물리적인 불에 의해 소멸될 수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영원을 위해 준비된 몸으로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계 20:13; 행 24:15). 이런 육체들은 영원한 운명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영원은 영혼절멸론자들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측면입니다. 일반적으로 ‘영원’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아이오니온)은 영혼절멸론자들의 주장처럼 그 정의는 영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세대’ 또는 ‘영겁’처럼 어떤 구체적인 기간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아이오니온)은 때때로 영원 기간을 지칭하는데 사용된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0절은 사탄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불못에 던져져서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 존재는 불못에 던져짐으로 인해 ‘소멸’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이 뭔가 달라야 합니까(계 20:14-15)? 지옥의 영원성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는 마태복음 25장 46절입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악인들과 의인들의 운명을 지칭하는데 동일한 헬라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만일 악인들이 어떤 ‘세대’ 동안만 고통을 당한다면, 의인들 역시 어떤 ‘세대’ 동안만 천국에서의 삶을 경험할 것입니다. 만일 신자들이 천국에서 영원토록 거한다면, 믿지 않는 자들도 영원토록 지옥에 있게 될 것입니다.

지옥의 영원성에 대한 영혼절멸론자들의 가장 흔한 또 다른 반대는 하나님께서 유한한 분량의 죄 때문에 불신자들을 영원토록 지옥에서 벌하신다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 가운데 70년을 산 사람에게 영원한 벌을 주는 것이 어떻게 정당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죄가 영원하신 하나님을 대적하여 저질러졌기 때문에 영원한 결과를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간음과 살인의 죄를 저질렀을 때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언급하였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우리아에게 범죄를 저질렀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하나님께만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까? 다윗은 모든 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하여 지은 것임을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이십니다. 그 결과, 그분을 대적하는 모든 죄는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짓는 시간의 길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죄를 짓는 상대인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영혼절멸설에 있어서 좀 더 개인적인 측면은 만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몇몇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아마도 천국에서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도착하면 우리가 불평할 것이나 슬퍼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일부가 천국에 있지 않다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을 그들 스스로 거부하였기에 정죄 받아 그곳에 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100% 완전히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요 3:16; 14:6). 이것을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우리는 그들의 부재로 인해서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마음을 두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그곳에 있지 않을 경우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보다는 그들이 천국에 있게 하기 위해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지옥 때문에 우리의 죗값을 치르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죽은 뒤에 ‘소멸’된다면 두려워할 운명이 아니지만, 지옥에서 영원히 거한다면 이는 분명히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무한한 죽음이었고, 우리의 무한한 죄값을 치르신 것이기에, 우리는 영원토록 지옥에서 그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됩니다(고후 5:21).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예수님께 둘 때, 우리는 구원받고, 죄 사함 받으며, 정결하게 되고, 천국의 영원한 집을 약속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생의 선물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 결정의 영원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English  

답변: 무신론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인데, 최근에 새롭게 제기된 견해가 아닙니다. 대략 주전 1,000년에 다윗에 의해 기록된 시편 14장 1절은 무신론에 대해 언급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최근 통계는 무신론자들이라 증가하는 것을 보여 주는데 세계적으로 10%까지 됩니다. 그렇다면 왜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무신론자들이 되고 있습니까? 무신론은 참으로 그들의 주장처럼 논리적인 입장일까요?

왜 무신론이 여전히 존재할까요? 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지 않으실까요?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믿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문제는, 하나님의 바람은 자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단지 확인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바람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그분을 믿고(벧후 3:9) 그분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요 3:16).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서 수 차례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보이셨습니다(창 6-9; 출 14:21-22; 왕상 18:19-31), 그때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악한 길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까? 아닙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 들이기를 꺼려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서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엡 2:8-9).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바람은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지, 단지 유신론자들(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앙하고 신뢰할 때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비논리적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많고 좋은 논증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가 우주(시 19:1-4)와 자연(롬 1:18-22)과 우리 자신의 마음(전 3:11) 안에서 분명히 보인다고 가르칩니다. 언급된 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존재는 입증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에 의해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동시에 무신론을 믿는 것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만큼의 믿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진술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완벽하게 알며, 우주 안의 모든 곳을 가보았으며, 눈에 보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목격했다고 주장과 다름이 없습니다. 물론 그 어떤 무신론자도 이러한 주장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 됩니다. 예를 들면,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태양의 중심이나, 목성의 구름 아래나, 머나먼 어떤 성운에 살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장소들은 우리의 관찰 능력을 초월한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입증될 수가 없습니다.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유신론자가 되는 만큼의 믿음을 요구합니다.

무신론은 입증될 수 없고, 하나님의 존재는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강력하게 믿으며, 하나님의 존재는 믿음의 문제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비논리적이라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가 분명히 보여질 수 있다고 믿으며, 또한 뚜렷하게 감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필요하다면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 19:1-4).

English  

답변: 불가지론은 하나님의 존재는 알 수도 없고 입증할 수도 없다는 견해입니다. “불가지”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지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불가지론은 지적으로 좀 더 정직한 형태의 무신론입니다. 무신론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입증될 수 없는 입장입니다. 불가지론은 하나님의 존재는 입증될 수도 입증되지 않을 수도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불가지론의 주장은 옳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경험에 의해서 입증되거나 또는 부정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요 4:24) 그분을 볼 수 없고 또한 만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친히 드러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분을 감각적으로 볼 수 없습니다(롬 1:20).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가 우주 안에서 분명하게 보이며(시 19:1-4), 자연을 통해 느낄 수 있고(롬 1:18-22), 우리 마음 속에 확증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전 3:11).

불가지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의 여부에 대해 어느 쪽으로도 결정 내리기를 꺼려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양다리를 걸친’ 자세입니다. 유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불가지론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의 존재를 믿어서도 안되고 부정해서도 안 된다고 믿습니다.

논증의 전개를 위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분명하고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을 곁으로 밀어둡시다. 그리고 유신론과 불가지론을 동등한 입장에 둔다면, 사후의 삶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어느 쪽이 더 ‘합리’적 입니까? 하나님이 없다면, 유신론자들이나 불가지론자들 모두가 죽음과 함께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유신론자들이나 불가지론자들 모두가 죽음 이후에 직고해야 할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불가지론자보다 유신론자가 되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 두 입장 모두가 입증 및 부정이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어떤 입장이 더 나은 무한하고 영원한 최종 결과를 가져올지 철저히 검토해 보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의심을 갖는 것은 정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과 허락하신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한 인간의 존재로서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1장 33-34절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고 외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믿음으로 그분의 길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을 사람들에게 놀라운 방법으로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4장 29절은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고 선언합니다.

English  

답변: 만인 구원설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인 구원을 고수하고 모든 사람들이 결국에는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일부 사람들이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통 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이 문제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도외시한 채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떤 사람들은 지옥에서 영원토록 보내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영원토록 지옥에 거할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천국에서 보내는 시간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지옥에서 보내는 시간만큼 지속될 것을 확증합니다. 마태복음 25장 46절을 보면,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형벌은 의인들의 삶처럼 영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믿지만, 주님께서는 친히 지옥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라고 확증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과 마가복음 9장 44절은 지옥을 “영원한 불” 과 “꺼지지 않는 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이 “꺼지지 않는 불”을 피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모든 길들, 즉, 모든 종교들과 신앙들이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믿든지, 또는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풍부하시기 때문에 모른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과 자비가 풍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그분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는 단 하나밖에 없는 문이십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증거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기로 택한다면, 우리는 구원을 위한 필요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게 됩니다(요 3:16, 18, 36).

이러한 구절들로 인하여 만인 구원설 및 보편적 구원은 비성경적인 믿음인 것이 자명해집니다. 만민 구원설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 정면으로 모순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은 관용적이지 않고 ‘배타적’이라고 비난하지만, 이런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인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 멋대로 이러한 사상들을 발전시키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단지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대면하는 것과 또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주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자기 아들을 통해 구원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들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를 경시하고 우리 대신에 예수님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English  

질문: 그리스도인의 자긍심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답변:
많은 사람들은 자긍심을 "자신의 기술, 성취, 지위, 재정적 자원 또는 외모에 근거하여 느끼는 가치"라고 정의합니다. 이런 종류의 자긍심은 사람을 독자적이고 교만한 마음으로 이끌 수 있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둔하게 만들면서 자아 숭배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은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땅의 자원들만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교만에 기초한 가치관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낮은 자존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는 선한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서 겸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시편 16편 2절은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우리를 상기시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짐으로 자기 가치와 자긍심을 얻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의 피로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사실 때문에 우리가 귀중하다는 것을 압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낮은 자긍심은 교만의 반대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낮은 자긍심은 교만의 한 형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도록 하여 관심을 갖게 하고 위로하도록 하기 위해 낮은 자긍심을 갖습니다. 이는 낮은 자긍심은 교만만큼이나 “나를 보세요”라고 선포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즉, 동일한 목표, 곧 자아 도취, 자아 집착, 이기심를 이루는데 있어서 다른 길을 택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기심을 버리고 자아에 대해 죽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관심을 우리를 창조하시고 붙들어주시는 위대한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셔서 그분의 백성이 되게 하셨을 때 우리에게 가치를 부여하셨다고 말합니다(엡 1:14). 이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과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우리가 건강한 자긍심을 가지면, 우리는 우리를 속박하는 죄에 관여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소중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 겸손하게 행동해야 합니다(빌 2:3). 로마서 12장 3절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경고합니다.

English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교만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교만의 종류(잠 8:13)와 잘된 일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긍지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자기 의로부터 나오는 교만은 죄입니다. 하나님은 그 교만이 주를 찾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싫어하십니다. 시편 10편 4절은 교만한 자들은 자신에게 빠져있기 때문에 그들 생각은 하나님과 멀다고 설명합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이런 종류의 거만한 교만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겸손한 정신의 정반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철저하게 영적으로 파산한 상태라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한편, 교만한 자들은 자신의 교만에 의해 눈이 가려져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받아들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전반에 걸쳐 우리는 교만의 결과에 대해 듣습니다. 잠언 16장 18-19절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교만 때문에 하늘에서 내쫓겼습니다(사 14:12-15). 그는 우주의 합당한 통치자이신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려는 이기적인 대담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때에 지옥에 던져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여 일어서는 자들에게는 그 앞 날에 오직 재앙 밖에는 없습니다(사 14:22).

많은 사람들이 교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죄를 시인하고 우리 힘으로는 전혀 영생을 얻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교만한 사람들에게는 끊임없는 걸림돌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자랑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야 합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고후 10:13).

교만은 왜 그렇게 죄가 됩니까? 교만은 하나님이 성취하신 일의 영광을 우리 자신들에게 돌리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하나님께만 속한 영광을 취하여 내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교만은 본질적으로 자기 숭배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취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붙들어 주지 않으셨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이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분만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English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게으름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뉴턴의 첫 번째 운동 법칙은 움직이는 물체는 움직이는 성향이 있고 멈춘 물체는 안정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법은 사람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프로젝트를 부지런히 완료하지만 다른 이들은 무력감을 극복할 동기가 필요할 만큼 무관심을 보입니다. 이런 일부 사람들의 삶의 스타일은 게으름인데, 게으름은 사실 모든 사람들이 받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께서 인간을 위해 일을 정하셨기때문에 게으름이 죄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

성경은 게으름에 대해 많은 말을 합니다. 잠언은 특히 게으름과 관련한 지혜와 게으른 사람을 향한 경고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잠언은 게으른 사람은 일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 21:25). 그는 잠을 좋아합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잠 26:14). 게으른 자는 변명을 합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잠 26:13). 그는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합니다.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잠 18:9). 그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믿지만 사실은 어리석습니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잠언은 또한 게으른 사람들을 위해 끝이 정해져 있다고 알려줍니다. 게으른 사람은 종(또는 채무자)이 됩니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 12:24). 게으른 자의 장래는 어둡습니다.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잠 20:4). 그는 가난하게 될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 13:4).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게으름이 생길 여지가 없습니다. 새로운 신자는 성실하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는 내용을 배웁니다. 그러나 어떤 신자가 하나님이 그의 변화된 삶으로부터 아무런 열매를 기대하지 않으신다고 그릇되게 믿으면 게으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그리스도인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로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약 2:18, 26). 게으름은 하나님의 목적인 선행을 위반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심으로써 육체의 게으른 성향을 극복하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힘을 주십니다(고후 5:17).

새로운 본성을 가지면 우리는 우리를 구속하여 주신 구세주를 향한 사랑으로부터 근면과 열매를 맺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됩니다. 게으름과 다른 모든 죄를 향한 우리의 옛 성향은 경건한 삶을 살고 싶은 욕구로 바뀌었습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우리는 우리의 수고를 통해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을 느낍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또한 하나님의 가족 안에 있는 다른 지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4-35).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지런히 견디면 우리의 수고가 주님께 보상받을 것을 압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9-10).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24).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 6:10).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 삼는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수고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모범입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심지어 천국에서 더 이상 저주에 의해 지장을 받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섬김은 계속될 것입니다(계 22:3). 질병과 슬픔과 죄, 심지어 게으름이 없는 상태에서 성도들은 영원히 주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질투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질투하다"는 단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부러워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합니다. 이런 종류의 질투는 죄이며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자신의 욕망에 의해 통제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전 3:3). 갈라디아서 5장 26절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신 완벽한 사랑을 소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4-5). 우리가 내 자신과 나의 바람에 집중할수록 하나님께 덜 집중하게 됩니다. 진리를 향해 마음을 강퍅하게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할 수 없으며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치료하도록 허락하지도 않습니다(마 13:15).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다스리도록 허락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으실 것입니다(갈 5:22-23).

질투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해 만족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히 13:5). 우리는 질투와 싸우기 위해서 내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야 합니다. 성경 공부, 기도, 성숙한 신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그분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내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법을 배울 때, 우리의 마음은 변화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험담(가십)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구약에서 “험담”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비밀을 드러내는 사람, 남의 이야기와 추문을 돌아다니며 전하는 사람"으로 정의됩니다. 험담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비밀 정보를 갖고 그 정보를 알 필요도 없는 무관한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험담은 두 가지에 있어서 정보를 나누는 것과 구별됩니다.

1. 의도: 험담하는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을 나쁘게 보이도록 함으로 자기들을 높이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일종의 지식을 아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2. 공유되는 정보의 유형: 험담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나 실패에 대해 말하거나 그들이 허락하거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들의 삶에 대한 창피하고 부끄러운 내용을 들춰냅니다. 비록 그러한 험담이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더라도 여전히 험담은 험담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인류의 죄악 된 본성과 불법을 드러내며 하나님이 그분의 율법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노를 어떻게 부으셨는지를 언급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죄의 본성에 넘기셨습니다. 이때 죄의 목록에는 험담과 비방이 포함됩니다(롬 1:29b-32). 우리는 이 구절에서 험담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으며, 험담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험담에 빠졌던 또 다른 그룹은 (현재도 여전한) 과부들입니다. 바울은 과부들에게 게으름과 험담하는 습관을 즐기는 것에 대해 경고합니다. 이러한 여인들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딤전 5:12-13)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성들은 서로의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또한 다른 여성들과 긴밀하게 일하기 때문에 왜곡된 상황에 대해 듣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반복해서 말을 듣고 말할 때는 왜곡이 더욱 심하여집니다. 바울은 과부들이 자신들의 게으름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찾고, 이 집 저 집으로 돌아다니는 습관을 가질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게으른 손은 마귀의 작업장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게으름을 허용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십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잠 20:19).

여성만이 험담의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비밀스럽게 들은 것을 반복만 하더라도 험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잠언에는 험담의 위험성과 그로 인해 받는 잠정적인 피해를 다룬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혜 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 11:12-13).

성경은 우리에게 “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잠 16:28)고 말합니다. 많은 친구들이 험담으로 시작된 오해 때문에 우정에 금이 갑니다. 이러한 험담에 관여한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키고 친구들 사이에서 분노와 괴로움과 고통을 유발합니다. 슬프게도, 어떤 사람들은 험담에 전문가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무너뜨릴 기회를 엿봅니다. 그러나 잘못이 드러났을 경우, 그들은 혐의를 부인하며 변명과 합리화로 답변합니다. 그들은 잘못된 행동을 인정하기보다는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죄의 심각성을 최소화하려고 시도합니다.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의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7-8).

혀를 지키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재앙으로부터 보호합니다(잠 21:2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혀를 지키고 험담의 죄악된 행위를 자제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주님께 맡기면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험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필요한 때에 적절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귀신 또는 유령현상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유령(귀신)이 존재하나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유령(귀신)’이라는 용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이 용어가 "영적인 존재"를 의미한다면 대답은 당연히 "그렇습니다". 만일 이 용어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의미한다면 대답은 "아닙니다". 성경은 선한 영적 존재와 악한 영적 존재가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지구상에 머물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생각을 부정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고 선언합니다. 즉, 사람이 죽은 이후에 그 영혼에게 발생하는 일은 심판입니다. 이 심판의 결과로 신자에게는 천국이(고후 5:6-8; 빌 1:23), 불신자에게는 지옥이(마 25:46; 눅 16:22-24) 결정됩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 ‘유령’의 형태로 이 땅에 남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귀신과 같은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절대로 죽은 사람의 몸에서 벗어난 영혼들이 아닙니다.

성경은 육체적인 세계와 연결되어 나타날 수 있는 영적인 존재가 실제로 있음을 매우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존재들을 천사들과 마귀들이라고 말합니다. 천사는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천사들은 의롭고 선하며 거룩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거역한 타락한 천사들로 사악하고 속이며 파괴적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15절에 따르면 마귀는 "빛의 천사"와 "의의 종"으로 가장합니다. 유령(귀신)으로 등장하여 죽은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마귀가 가진 힘과 능력으로 가능할 것 같습니다.

유령현상과 가장 유사한 성경의 예는 마가복음 5장 1-20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귀의 한 무리가 어떤 사람을 장악한 후 그 사람으로 하여금 무덤에 출몰하게 합니다. 이 경우 유령의 출몰은 없었습니다. 이 경우는 일반 사람이 마귀가 들린 경우로서 그 지역 사람들에게 공포가 되었습니다. 마귀들은 오직 "죽이고 훔치고 파괴"합니다(요 10:10). 그들은 사람들을 속여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만 할 수 있다면 가능한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유령현상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귀신, 좀비, 도깨비로 불리든, 악령의 활동이 실제로 발생하면 이는 마귀의 역사입니다.

유령(귀신)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을까요? 죽은 자를 소환하여 그들로부터 진실하고 유용한 정보를 얻어내는 심령술사는 어떠냐고요? 다시 말하지만, 마귀의 목표는 속이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에 심령술사를 신뢰하게 되는 것이라면 마귀는 기꺼이 맞는 정보를 알려줄 것입니다. 하지만 사악한 동기로 제시하는 정보는 그것이 맞든 틀리든 사람들을 그릇되게 이끌고 부패시키고 파괴하는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돈을 받고 당신의 집에 있는 유령을 제거해 주겠다는 사람들과 "유령 사냥꾼" 사업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심령술사, 죽은 자와의 교통, 타로카드 및 영매들이 점점 정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영적인 세계를 의식합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분의 말씀을 연구함으로써 영의 세계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는 대신에 영의 세계가 자신들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것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마귀들은 분명히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엄청나게 많은 영적인 기만들을 보며 웃고 있을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음식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기독교인이 먹으면 안되는 음식도 있는가?


답변: 레위기 11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셨던 규제 음식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음식규제법은 돼지 고기, 새우, 갑각류 및 해산물, 대부분의 곤충, 죽은 고기를 먹는 새들 및 기타 여러 동물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면 전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음식규제법의 목적은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모든 국가와 구별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적을 마친 후에 예수께서는 모든 음식을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막 7:19).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 사도 베드로에게 이전에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던 동물들을 이제는 먹을 수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구약의 율법(롬 10:4; 갈 3:24-26; 엡 2:15)을 성취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관한 법도 포함됩니다.

로마서 14장 1-23절은 모든 사람이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만큼 믿음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음을 가르쳐줍니다. 결과적으로, 만일 우리가 먹는 ‘부정한’ 음식으로 인해 시험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의 권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음식을 먹을 권리가 있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걸림돌이 될 권리는 없습니다. 이 시대의 기독교인에게는 다른 사람의 믿음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은혜의 새 언약 안에서는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먹는 음식보다 우리가 먹는 양에 더 큰 관심을 나타냅니다. 몸의 식욕은 우리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으로 비유됩니다. 만일 우리가 먹는 습관을 통제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마음의 욕구(정욕, 탐욕, 불의한 증오, 분노)와 같은 여러 다른 습관들을 다스릴 수 없고 우리의 입을 비방과 싸움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식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소욕들을 통제해야 합니다(신 21:20; 잠 23:2; 벧전 1:5-7; 딤후 3:1-9; 고후 10:5).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염려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염려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명령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염려하는 대신에 우리의 모든 필요와 걱정을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가져가야 함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옷과 음식과 같은 육체적인 필요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권고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돌보실 것이라고 확신시켜주십니다(마 6:25-34).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의 삶에 염려가 있어서는 안된다면, 어떻게 해야 염려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5장 7절을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문제 및 무거운 짐에 짓눌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염려와 걱정을 주께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감당하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은 그분이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주님의 관심을 끌기에 너무 크거나 너무 작은 염려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를 맡기면,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평강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빌 4:7).

물론 구주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걱정과 염려가 삶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분께 삶을 바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인내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될 때는 인내심을 보여주는 것은 쉽습니다. 인내에 대한 진정한 테스트는 우리의 권리가 침해 당했을 때, 가령 다른 차량이 도로에서 우리를 차단할 때, 우리가 불공평하게 대우받을 때, 동료가 우리의 신앙을 조롱할 때 등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짜증나는 일들과 시련에 직면하면 화를 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급함은 거룩한 분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내가 칭찬받을 만한 덕목으로서(살전 5:14)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이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갈 5:22)라고 말합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적절한 시기, 전능하심,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내가 소극적인 기다림 또는 친절한 관용이라고 생각하지만 신약에서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의 대부분은 적극적인 강력한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2장 1절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경주하는 사람이 소극적은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서 누가 와서 찔러주어야 달리고 또한 아무렇게나 경주를 해도 친절하게 눈 감아주는 그러한 사기꾼을 기다립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서 “인내”로 번역된 단어는 “견딤”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을 견디면서 인내로 경주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인내는 시련을 견뎌내거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대하면서 목표를 향해 끈기 있게 달리는 것을 말합니다.

인내는 하룻밤 사이에 발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은 인내의 발전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골로새서 1장 11절은 우리가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야 한다고 말하고, 야고보서 1장 3-4절은 시련은 우리의 인내를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알려줍니다. 우리의 인내는 하나님의 완전한 뜻과 시기를 신뢰함으로 더욱 발전하며 강해집니다. 심지어 우리의 인내심은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시 37:7)를 만날 때 더욱 자라나게 됩니다. 우리의 인내는 결국 "주의 강림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약 5:7-8) 보상받습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애 3:25).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예들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의 특징이 인내인 것을 보게 됩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고난을 당할 때 오래 참음의 본으로 선지자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약 5:10). 그는 또한 욥의 인내 및 주께서 보상으로 주신 결말을 언급합니다(약 5:11). 아브라함 역시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받았습니다(히 6:15). 모든 면에서 우리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은 오래 참는 인내를 보이셨습니다. 주께서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히 12:2).

우리는 그리스도의 특징인 인내를 어떻게 표현합니까? 첫째,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일반적으로 "왜 나입니까?"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빌 4:4; 벧전 1:6). 둘째, 우리는 그분의 목적을 추구합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증거를 삼으시려고 우리를 어려운 상황에 두십니다. 또 다른 때에는 우리의 거룩한 성품을 위해 시련을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목적이 우리의 성장과 주의 영광이라는 것을 기억할 때 시련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로마서 8장 28절과 같은 그분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서 “모든 것”은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는 것들을 포함합니다.

다음에 당신이 교통 체증 가운데 있을 때, 친구에게 배신 당할 때, 또는 당신의 증거로 인해 조롱 받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입니까? 자연스러운 반응은 스트레스, 분노 및 좌절로 이어지는 성급함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연적인 반응’에 속박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고후 5:17). 그 대신 우리는 아버지의 능력과 목적에 대한 완전한 신뢰 가운데 인내함으로 반응할 수 있는 주의 힘을 얻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 2:7).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두려움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성경은 두 가지 유형의 두려움을 언급합니다. 첫 번째 유형은 유익하며 장려되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해가 되며 극복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첫 번째 유형의 두려움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반드시 무언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경외하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은 또한 그분의 진노와 분노에 대한 마땅한 경의를 표현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을 알게 됨으로써 오는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인정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면 많은 축복과 유익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지혜의 시작이며 명철로 인도합니다 (시 111:10). 오직 어리석은 자만 지혜와 훈계를 경멸합니다(잠 1:7). 또한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생명과 안식과 평강과 만족으로 인도합니다(잠 19:23). 그것은 샘과 생명이며(잠 14:27) 우리에게 보장과 안전의 장소를 제공합니다(잠 14:26).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고무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언급된 두 번째 유형의 두려움은 전혀 유익이 없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언급된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 두려움과 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두려워하며 때로는 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아무도 완벽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이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 전체에 걸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를 풍성하게 뿌려 놓으셨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상기시켜주십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41장 10절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격려합니다. 우리는 종종 미래와 우리에게 발생할 일들로 인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공중의 새들을 돌보시는데 하물며 얼마나 그분의 자녀를 위해 주실지를 상기시켜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1). 이 몇 구절들은 많은 다른 유형의 두려움을 다룹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홀로 있게 되는 것과 너무 약하게 되는 것과 무시 받는 것과 육체적인 필요의 부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권고는 성경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두려워하는 마음"의 여러 측면을 다룹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56편 11절에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힘에 대한 놀라운 증언입니다. 시편 기자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하나님의 권능을 알고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두려움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것은 가장 어두운 때에도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며, 주께서 형통케 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이 선하시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옵니다. 욥은 성경에 기록된 가장 어려운 몇몇 연단을 경험할 때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분을 신뢰하리라”(욥 13:15)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대적하는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자신 있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 5:11).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분노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분노를 다루는 것은 중요한 생활 기술입니다. 기독교 상담자는 상담을 위해 찾아오는 50 퍼센트의 사람들에게 분노 문제가 있다고 보고합니다. 분노는 의사 소통을 파괴하고 관계를 끊을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기쁨과 건강을 파괴합니다. 슬프게도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를 책임지는 대신에 분노를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정도 차이는 있지만 분노와 다툽니다. 고맙게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경건한 태도로 분노를 다루는 방법과 분노의 죄를 극복하는 방법에 관한 원칙이 있습니다.

분노가 항상 죄인 것은 아닙니다. 보통 “의분”으로 불리는 성경이 인정하는 분노의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진노하십니다(시 7:11; 막 3:5). 성도들도 분을 내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엡 4:26). 신약 성경에 나오는 두 개의 헬라어 단어는 "분노"로 번역됩니다. 하나는 "열정, 에너지"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끓어 오르다"를 의미합니다. 성경적인 분노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하나님의 에너지입니다. 성경적인 분노의 예로는 다윗이 나단 선지자가 전하는 불의한 사건에 대해 듣고 분노한 점이며(삼하 12장), 일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더럽히는 것을 보신 예수님의 분노입니다(요 2:13-18). 이러한 분노는 자기 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원칙을 보호하려는 것임을 주목하십시오.

이런 사실들을 고려한 가운데 우리는 내게 가해진 부당함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적절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노는 경고 깃발이라고 불리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경계를 침범하려고 시도하거나 위반했을 때 분노가 우리를 깨워줍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돌보십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항상 상대를 위해 일어서지는 못합니다. 즉, 때때로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일어서야 합니다. 피해자가 종종 느끼는 분노를 고려할 때 이러한 분노는 특히 중요합니다. 학대, 폭력 범죄 등의 피해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침해를 당한 것입니다. 종종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는 분노를 경험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충격에서 벗어나면 분노가 일어날 것입니다. 희생자가 참으로 다시 회복되고 용서를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충격을 사실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불의한 행위를 충분히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는 때때로 분노를 겪어야 합니다. 충격에서 회복되는 것이 복잡한 양상을 띄우기 때문에 어떤 분노는 오랫동안 지속되며 특히 폭행 희생자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희생자들은 그들의 분노 과정을 지나야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용서의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이는 종종 긴 여정입니다. 하나님이 희생자를 고치실 때 뒤따르는 희생자의 감정에는 분노가 포함됩니다. 이러한 과정이 지나도록 허락하는 것은 그 사람이 죄 속에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분노는 교만에 의해 일어날 때 비생산적이며 또한 하나님의 목적을 왜곡하거나(고전 10:31) 계속 분노가 남아있음으로 인하여(엡 4:26-27)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분노가 죄로 바뀔 때 나타나는 분명한 표시는 바로 가까이에 있는 문제를 공격하는 대신 나쁜 행위를 한 그 사람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5-19절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다른 사람들을 세우기 위한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썩은 말과 파괴적인 말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하십시오. 불행히도, 독한 말은 타락한 인간의 공통된 특징입니다(롬 3:13-14). 분노를 절제 없이 끓어 오르도록 내버려두면 그 분노는 죄가 되며 많은 상처를 발생시키는 각본으로 이어지고(잠언 29:11) 결국에는 대대적인 파괴를 낳습니다. 종종 통제 불능의 분노의 결과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화가 난 사람이 진정되기를 거부하고 앙심을 품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면 그 분노는 죄가 됩니다(엡 4:26-27). 이러한 분노는 우울증을 야기할 수도 있고, 중요한 문제와 무관한 사소한 것들에 대해 과민반응 중세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교만에서 나온 분노와 그러한 분노를 잘못 다루는 것은 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성경적으로 분노를 다룰 수 있습니다(잠 28:13; 요일 19). 이 자백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우리의 분노로 상처받은 사람들 앞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분노를 변명하거나 남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죄를 가볍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련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봄으로써 성경적으로 분노를 다룰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일을 하였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 로마서 8장 28-29절, 창세기 50장 20절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지나는 모든 상황과 사람을 주권적으로 다스린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거나 의도하지 않으신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발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더라도 그분은 항상 백성의 유익을 위해 신실하게 그들을 구속(redeem)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이십니다(시 145:8, 9, 17). 이 진리가 우리의 머리에서 마음으로 움직일 때까지 이 진리를 묵상하면 해를 가한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수 있도록 여지를 마련함으로써 성경적으로 분노를 다룰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악한’ 사람들이 ‘순진한’ 사람들을 학대하는 그러한 불의한 경우에 특히 중요합니다. 창세기 50장 19절과 로마서 12장 19절은 우리가 하나님 역할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공평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아시고 또한 모든 것을 공정하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창 18:25).

우리는 악을 선으로 갚음으로써 성경적으로 분노를 다룰 수 있습니다(창 50:21; 롬 12:21). 이것은 분노를 사랑으로 전환시키는 비결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마음에서 흘러나오듯이 우리의 마음은 행동에 의해 바뀔 수 있습니다(마 5:43-48). 즉, 우리가 사람을 향하여 행동하는 방식을 바꿀 때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감정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사 소통을 함으로써 성경적으로 분노를 다룰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 그리고 25-32절에는 소통을 위한 4가지의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1) 정직하게 말하십시오(엡 4:15, 25). 사람들은 우리의 마음을 읽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2) 현 상태를 유지하십시오(엡 4:26-27). 우리가 통제력을 상실할 때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허용하면 안됩니다. 인내의 한계에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다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문제를 공격하십시오(엡 4:29, 31). 이때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잠 15:1).

4) 선하게 행동하고 악한 말에 대꾸하지 마십시오(엡 4:31-32). 우리의 타락한 본성 때문에, 우리의 첫 번째 충동은 종종 죄악 된 충동입니다(31 절). "열까지 세면서" 시간을 버는 것은 경건한 방법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생각할 기회를 주고(32 절), 분노가 지닌 에너지가 더 큰 문제를 만드는데 사용되지 않고 도리어 문제 해결에 쓰이도록 생각하게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더 엄격한 경계를 둠으로써 미리 분노를 다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별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고전 2:15-16; 마 10:16). 우리는 돼지에게 진주를 던질 필요가 없습니다(마 7:6). 때때로 우리는 위험한 사람을 인식할 때 분노를 통해 반응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용서할 수 있지만, 다시 관계를 맺지 않기 위해 분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을 행해야 합니다(롬 12:18).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 방식이나 반응 방식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해야 할 부분에서 변경을 가할 수 있습니다. 성질을 극복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성경 연구,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함으로써 불경건한 분노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분노함으로써 분노가 우리의 삶에 뿌리를 내리게 할 수도 있고, 또는 분노가 생길 때마다 올바르게 대처함으로써 그 대처가 습관이 되어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책임의 중요성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오늘날 세상에는 이미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사탄은 항상 더 많은 유혹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유혹에 직면할 때 영적 전쟁을 수행함에 따르는 짐을 나누기 위해 함께 기도하고 돕기 위한 "책임 동반자"를 찾습니다. 우리가 유혹에 직면 할 때 의지할 수 있는 형제나 자매가 있으면 좋습니다. 다윗 왕이 저녁에 홀로 있을 때, 사탄이 그를 유혹하여 밧세바와 간통죄를 짓도록 하였습니다(삼하 11 장). 성경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둠의 세력과 전쟁 중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우리 주위로부터 가능한 많은 도움을 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이는 전쟁에서 우리를 격려할 수 있는 다른 신자에게 우리의 형편을 알려주는 것을 포함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 전쟁에서 싸우는데 필요한 모든 힘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유혹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언제 약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결혼한 부부가 언제 싸우는지 알며, 행여 그들이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원하는 때를 압니다. 사탄은 언제 아이가 부모에게 벌을 받고 앙심을 품는지 압니다. 그는 사람들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집에 오다가 술집에 들르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어디서 도움을 찾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일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약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잠언 27장 17절은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친구의 얼굴이란 친구의 방문 또는 위로의 표현, 그리고 도덕적인 지원을 말합니다. 당신의 친구가 당신의 안부를 묻기 위해 전화한 때가 언제입니까? 당신이 마지막으로 친구와 전화하여 안부를 물은 때는 언제입니까? 사탄과 대항하여 전투하면서 때때로 우리가 놓치는 요소는 친구들의 격려와 도덕적인 지원입니다. 서로 영적으로 책임을 지면 이러한 누락된 요소를 채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작가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요약합니다.(히 10:24-25) 그리스도의 몸은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는 서로를 세워줄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는 독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고 말하며 암시적으로 책임을 묻습니다.

함께 책임을 나누는 것은 죄와 싸우는 전투에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책임 동반자가 그 전투에서 당신을 격려하고, 책망하고, 가르치고, 당신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함께 기도하고 대화하고 형편을 알려주고 또한 자백할 수 있는 책임 동반자를 갖기를 고려해야 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전쟁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은 전쟁을 정죄하는가 아니면 허용하는가? 어떤 상황에서 한 국가가 다른 국가와 전쟁을 하는 것이 옳은가?


답변: 많은 사람들이 출애굽기 20장 13절, 즉,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읽고 오해한 후, 이 명령을 전쟁에 적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악의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사전에 계획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 살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다른 나라들과 전쟁을 치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삼상 15:3; 수 4:13).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범죄에 대해 사형을 명령하셨습니다(출 21:12, 15; 22:19; 레 20:11).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살인 외에는, 모든 상황들에 있어서 죽이는 것을 반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은 결코 좋은 일은 아니지만 때로는 필요한 것입니다. 죄악의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롬 3:10-18), 전쟁은 불가피합니다. 때로는 악한 사람들이 결백한 사람들에게 큰 해를 입히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을 치르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민 31:2)고 명하셨습니다. 신명기 20장 16-17절은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고 선포합니다. 또한 사무엘상 15장 18절은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이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항상 아버지와 완벽하게 일치하십니다(요 10:30).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은 오로지 구약 성경에서만 허락된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십니다(말 3:6; 약 1:17).

예수님의 재림은 극도로 과격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1-21절은 ‘공의’(11절)로 심판하시며 전쟁을 치르시는 승리의 사령관이신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전쟁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유혈이 낭자할 것이고(13절) 잔혹할 것입니다. 새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사람들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17-18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대적에게 동정을 갖지 않으시고, 그들을 완전히 정복하여 “유황으로 불타는 못”에 처넣을 것입니다(20절).

하나님은 결코 전쟁을 옹호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평화주의자가 아니십니다. 악한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때로는 더욱 큰 악을 방지하기 위해 전쟁은 필요합니다. 만일 히틀러가 2차 세계 대전에서 폐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습니까? 미국의 남북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었다면, 얼마나 더 오래 동안 흑인들이 노예로서 고통을 받아야 했겠습니까?

전쟁은 끔찍한 일입니다. 어떤 전쟁들은 다른 전쟁들보다 더 ‘정당’하지만 전쟁은 항상 죄의 결과입니다(롬 3:10-18). 동시에 전도서 3장 8절은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죄와 미움과 포악이 가득 찬 이 세상에서(롬 3:10-18) 전쟁은 불가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을 원해서는 안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세우신 정부의 권위에 대항하는 것 또한 삼가해야 합니다(롬 13:1-4; 벧전 2:17). 전생 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도자들을 위해 경건한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고, 우리 군대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며, 분쟁의 빠른 해결을 위해 기도하고, 양쪽 모두에 있어 시민들의 최소한의 인명 피해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빌 4:6-7).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신유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리스도의 속죄 안에 치유의 역사가 있는가? 치유는 우리가 많은 믿음을 가져야만 가능한가?


답변: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 인용된 이사야 53장 5절은 치유에 대한 핵심 구절이지만, 종종 오해되거나 잘못 적용이 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기서 “나음을 받았다”는 말은 영적인 치유 및 육체적인 치유 모두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과 베드로전서 2장의 문맥을 보면 이 치유는 영적인 치유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이 구절은 죄와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 아픔과 질병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두 구절들에서 “나음을 받았다”는 것은 용서받고 구원받았음을 말는 것이지, 육체적으로 치유 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육체적인 치유와 영적인 치유를 구체적으로 연결시키고는 않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믿음을 둘 때 육체적인 치유를 받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치유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올바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기적을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람들을 치유하십니다. 아픔, 질병, 고통, 죽음은 오늘날 여전히 이 세상에서 직면하는 현실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지 않으신다면, 오늘날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을 것이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육체적인 문제(질병, 아픔, 부상)로 말미암아 죽을 것입니다. 우리를 육체적으로 치유하시는 것이 항상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온전한 육체적인 치유는 천국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천국에는 더 이상 아픔, 질병, 병마, 고통, 죽음이 없을 것입니다(계 21).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체적인 상태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우리의 영적인 상태에 더욱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롬 12:1-2). 그렇게 하면 우리는 더 이상 육체적 문제를 다루지 않아도 될 천국에 우리의 마음을 쏟을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은 우리 모두가 갈망해야 하는 참된 치유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재정 관리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공적인 재정(돈)관리의 비결은 무엇인가?


답변: 재정 관리에 대한 많은 성경 말씀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돈을 빌리는 것에 관해 반대합니다. 잠언 6장 1-5절; 20장 16절; 22장 7절, 26-27절을 보십시오.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 너는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네게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성경은 반복해서 부의 축적을 경고하고 있으며 그 대신 우리가 영적인 풍요를 추구할 것을 권장합니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 28:20; 참조, 잠 10:15; 11:4; 18:11; 23:5).

잠언 6장 6-11절은 게으름 및 필연적으로 따를 재정적 파탄에 대한 지혜를 제공합니다. 자신들을 위해 먹이를 저장하기 위해 일하는 근면한 개미를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은 또한 우리가 뭔가 유익한 것을 해야 할 때 게으르게 누워서 잠을 자는 자세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태한 사람”은 일하기 보다는 차라리 쉬려고 하는 게으르고 태만한 사람입니다. 그의 마지막은 분명합니다. 빈궁과 곤핍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돈 버는데 혈안이 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자는 전도서 5장 10절에 의하면 만족할 수 있는 충분한 부를 절대 가질 수 없으며 끊임없이 더욱 더 움켜지려 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6-11절은 또한 부를 갈망하는 덫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성경적인 모범은 부를 쌓기 위해 남은 것을 취하는 자가 되기보다는 주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6-7). 성경은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잘 관리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라고 격려합니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6장 1-13절에서 형편없는 청지기가 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11절). 우리는 디모데전서 5장 8절의 권면처럼 우리 자신의 가정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요약하면, 성경은 돈 관리에 대해 무엇을 말합니까? 답은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바로 지혜입니다. 우리는 돈에 대해 지혜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돈을 모아야 하지만 그것을 축척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돈을 써야 하지만 신중하고 절제 있게 써야 합니다. 우리는 즐겁고 희생적으로 주께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돈을 써야 하지만,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분별 있게 써야 합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그릇된 것이 아니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가난하게 되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쓸데 없는 것에 돈을 낭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돈 관리에 있어서 성경의 일관된 메시지는 현명 하라는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