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관한 성경의 견해는 무엇인가?

결혼에 관한 성경의 견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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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제정은 창세게 2:23-2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창조하시고 그리고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결혼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세기 2:18)란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입니다.

창세기 2:20에서 이브를 묘사하는데 사용된 “배필(helper)”이란 말은 “둘러 싸다, 보호하다, 또는 지원하다, 돕다”를 의미합니다. 이브는 아담의 “다른 반 쪽”으로서 지원하거나 돕는 자로서 아담 옆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결혼했을 때, 남자와 여자는 “한 몸”이 됩니다. 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성적 친밀감을 갖는 육체적 결합에서 가장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신약 성경은 이 하나됨에 관한 경고를 추가합니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태복음 19:6).

사도 바울에 의해 쓰여진 몇 개의 서신서들은 결혼과 결혼 관계 안에서 믿는 자들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의 본문은 고린도전서 7장이고, 다른 본문은 에베소서 5:22-23입니다. 같이 검토해 보면, 이 두 본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결혼관계를 위한 뼈대를 형성하는 성경적 원칙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 있는 본문은 성공적인 성경적 결혼에 관하여 특히 심오한 말씀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에베소서 5:22-23).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에베소서 5:25). “이와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에베소서 5:28-29).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에베소서 5:31).

믿는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의 원칙들을 구축할 때, 성경적인 결혼의 결실을 맺습니다. 성경 말씀에 기반을 둔 결혼은 그리스도를 남자와 아내 모두의 머리로 삼는 조화된 생활인 것입니다. 결혼의 성경적 개념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하나가 되신 것을 보여주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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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보좌 심판은 요한계시록 20:11-15에 묘사되고 있으며 믿지 않는 자들이 불못에 던져 지기 전의 마지막 심판입니다. 요한계시록 20:7-15로부터 우리는 이 심판이 천년왕국 후 그리고 사탄, 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가 불 못으로 던져진 후에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요한계시록 20:7-10). 펼쳐진 책들(요한계시록 20:12)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사람들의 행위들의 기록을 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말하여 지고, 행하여진 모든 것, 또는 생각 된 것 조차 아시기 때문에, 이에 따라 각 자에게 상이나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시편 28:4; 62:12, 로마서 2:6, 요한계시록 2:23; 18:6; 22:12).

또한 이때, 다른 책이 열리는데, 생명책이라고 불립니다(요한계시록 20:12). 이 책은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을 물려 받을 것인지 혹은 불못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행위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받았고 그들의 이름들은 세상의 창조 때부터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17:8). 성경으로부터 우리는 또한 죽은 자들이 “그들이 행했던 것들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고”, “누구든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못에 던져”질 것(요한계시록 20:15)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 모두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성경의 많은 글들에서 분명하게 확인이 됩니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그리스도 앞에 서서 자신들의 행위들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백보좌 심판이 최후의 심판이라는 것이 매우 분명하지만, 그것이 성경에 언급된 다른 심판들과, 특히 백보좌 심판에서 누가 심판을 받을 것인 지와 연관되어,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의견을 달리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다가 올 세 가지의 다른 심판들을 드러내고 있다고 믿습니다. 첫 번째는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심판, 즉, 나라들의 심판입니다(마태복음 25:31-36). 이것은 환란 이후 천년왕국에 앞서 일어납니다; 이것의 목적은 누가 천년왕국에 들어갈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이 두 번째 것은 믿는 자들의 행위들에 대한 심판인데, 자주 “그리스도의 심판대[bema]”로 묘사됩니다(고린도후서 5:10). 이 심판에서,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행위들이나 하나님께 대한 봉사의 정도에 따라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세 번째 것은 천년 왕국이 끝날 때의 백보좌 심판입니다(요한계시록 20:11-15).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의 심판인데, 여기서 그들은 그들의 행위들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불못에서의 영원한 형벌이 내려집니다.

다른 기독교인들은 세 가지 심판들 모두가 세 개의 분리된 심판들이 아닌 동일한 마지막 심판을 말한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계시록 20:11-15의 백보좌 심판은 믿는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 둘 다가 심판을 받을 때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름들이 생명책에 기록이 된 사람들은 그들이 받거나 잃을 상급들을 결정하기 위해 그들의 행위들이 심판 받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름들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은 불 못에서 받게 될 형벌의 정도를 결정하기 위해 그들의 행위들에 따라 심판 받을 것입니다. 이 견해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마태복음 25:31-46이 백보좌 심판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한 또 다른 묘사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이 심판의 결과가 요한계시록 20:11-15의 백보좌 심판 뒤에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양들(믿는 자들)은 영생으로 들어가는 반면, 염소들(믿지 않는 자들)은 “영벌”에 던져집니다(마태복음 25:46).

백보좌 심판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가지든, 다가 올 심판(들)에 관한 사실들을 결코 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판장이 되시고,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 받을 것이며,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행했던 행위들에 따라 처벌 받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자신들에게 진노를 쌓고 있고(로마서 2:5)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 하실 것임(로마서2:6)을 성경은 매우 분명히 합니다. 믿는 자들 역시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우리에게 전가되었고 우리의 이름들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고 우리의 행위들에 따라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로마서 14:10-12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며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 자백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죽은 후에도 삶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보편적인 질문입니다. 욥은 우리 모두를 위해 말합니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 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기 14:1-2, 14). 욥과 같이, 우리 모두는 이 질문에 도전 받아 왔습니다. 죽음 뒤에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단순히 존재하지 않게 되는가? 인생은 궁극적으로 개인적 위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땅을 떠나고 돌아오는 회전문인가? 모든 사람들이 같은 곳에 가게 되는가, 아니면 다른 장소들로 가는가? 실제로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인가?

성경은 죽음 뒤에도 삶이 있을 뿐 아니라, 영원한 삶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데 이 영원한 삶은 매우 영광스러워,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린도전서 2:9)고 말씀합니다. 육체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 영생의 선물을 주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5).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마땅할 형벌을 받고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삼일 뒤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신께서 죽음에 대해 승리하셨음을 입증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셨고,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목격되셨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25)

그리스도의 부활은 문서화가 잘 된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그것의 확실성을 위해 목격자들에게 문의해보라고 도전하였는데, 누구도 그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습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 뒤의 삶에 대한 궁극적인 증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아날 자들, 즉, 수많은 수확물들 가운데 첫 번째 열매이셨습니다. 육체적 죽음은 우리 모두가 관련이 있는 첫 사람인 아담을 통하여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모든 자들은 새 생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20-22).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몸을 일으키신 것처럼, 우리의 몸들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6:14).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부활한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다 천국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삶에서 각자가 선택해야만 하고, 자신의 영원한 목적지는 그 선택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고 죽음 뒤에는 심판이 있을 것(히브리서 9:27)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서 거부한 자들은 지옥에서의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입니다(마태복음 25:46). 지옥도 천국과 마찬가지로 단지 어떤 존재의 상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실제적인 장소입니다. 불의한 자들이 끝이 없고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를 겪게 될 장소입니다. 지옥은 그곳에 거하는 사람들이 밤과 낮으로 영원히 고문 받게 될(요한복음 20:10) 무저갱(누가복음 8:31; 요한계시록 9:1), 불 못, 그리고 유황으로 타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지옥에는 격렬한 슬픔과 분노를 나타내는 울음과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마태복음 13:42).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사악한 길들로부터 돌아와서 살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에스겔 33:1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종을 강요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거절하기로 선택한다면, 그분은 그분을 영원히 떠나 사는 결정을 받아들이십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시험, 즉,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준비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있어 죽음 후의 삶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불 못에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죽음 뒤에 영생을 얻고 영원한 불 못을 피할 수 있을 까요? 오직 한 길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11:25-26).

이 거저 주시는 영생의 선물은 모든 자들에게 주어질 수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한복음 3:36). 죽은 뒤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목적지가 결정됩니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2).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죄값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충분히 치러졌다고 믿는다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임재 안에서, 이 땅에서의 의미 있는 삶뿐만 아니라, 죽음 뒤의 영생 또한 우리는 보장받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일부다처제에 관한 질문은 성경 어디에서도 그것을 명백하게 정죄하고 있지 않은 반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일부다처제 및 중혼의 첫 번째 예는 창세기 4장 19절에 있는 라멕의 경우입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더라”. 구약 성경에서 몇몇 유명한 사람들은 일부다처자였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다윗, 솔로몬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여러 아내를 두었습니다. 사무엘하 12장 8절을 보면,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데 다윗의 아내와 첩이 부족하다면 더 주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열왕기상 11장 3절에 따르면, 솔로몬은 700명의 아내와 300명의 첩(아내보다 낮은 신분)을 두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일부다처제를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해 답변이 필요합니다. 1) 왜 하나님은 구약에서 일부다처제를 허락하셨습니까? 2) 하나님은 오늘날 일부다처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3) 왜 일부다처제는 바뀌게 되었습니까?

1) 왜 하나님은 구약에서 일부다처제를 허락하셨습니까? 성경은 왜 하나님이 일부다처제를 허락하셨는지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추측해 볼 때, 몇 가지 고려해야 할 핵심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여아보다 남아가 약간 더 많지만, 여성의 수명이 좀 더 길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남성보다 여성의 수가 항상 더 많았습니다. 현재 통계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약 50.5 %가 여성입니다. 고대에 똑같은 비율을 가정하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곱하면, 남성보다 여성이 수만 명 더 많게 됩니다. 둘째, 고대의 전쟁은 특히 잔인했으며, 치명적인 사망률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비율을 훨씬 더 증가 시킵니다. 셋째, 가부장적인 사회 때문에 미혼 여성이 스스로 공급하며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여성은 종종 교육을 받지 못했고 훈련도 받지 못했습니다. 여성들은 공급과 보호를 위해 아버지, 형제, 또는 남편을 의지했습니다. 미혼 여성들은 종종 매춘과 노예로 팔렸습니다. 여성과 남성의 수의 심각한 차이로써 많은 여성들이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에 남게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남편을 찾을 수 없는 여성들을 보호하시고 공급하시기 위해 일부 다처제를 허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데리고 그들 모두의 공급자이자 보호자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확실히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일부다처제 가정에서 생활하는 것은 매춘, 노예 또는 기아와 같은 대안보다 훨씬 낫습니다. 보호 및 공급 요인 외에도 일부 다처제는 인류의 훨씬 빠른 확장을 가능하게 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창 9:7)는 하나님의 명령을 성취하게 하였습니다. 남자들은 같은 시기에 여러 여인들을 임신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각 남자가 매년 한 아이를 낳는 것보다 훨씬 빨리 인류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은 오늘날 일부다처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심지어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동안에도, 성경은 일부일처제를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과 가장 근접한 계획으로 제시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한 사람이 오직 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창세기 2장 24절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연관되는지보다 결혼이 무엇인지를 묘사하는 한편, 신명기 17장 14-20절을 보면 한 사람과의 결혼이 일관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주목할 수 있고, 하나님은 왕들도 여러 명의 아내들(말들, 금)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내용은 왕들이 일부일처여야 한다는 명령으로 해석될 수는 없지만, 여러 아내를 취하는 것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선언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의 생애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왕상 11:3-4).

신약의 디모데전서 3장 2, 12절과 디도서 1장 6절은 영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자격 목록에 "한 아내의 남편"을 둡니다. 이 자격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서는 몇 가지 논쟁이 있습니다. 이 문구는 문자 그대로 "한 여인"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 구가 일부다처제만을 말하는 것이든 아니든, “한 아내의 남편”은 결코 일부다처주의자로 간주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자격 조건은 영적 지도자의 위치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되면서도 그 자격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책망할 것이 없으며 절제하며 신중하고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딤전 3:2-4) 하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벧전 1:16), 그리고 이러한 기준들이 장로들과 집사들을 위한 기준이라면, 그 기준들은 우리 모두를 위한 거룩한 기준들입니다.

에베소서 5장 22-33절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 말합니다. 그 구절은 남편(단수)을 언급할 때 언제나 아내(단수)도 언급합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단수)의 머리 됨이 …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단수) 사랑하기를 …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단수)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단수)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단수)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골로새서 3장 18-19절은 다소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복수형의 남편과 아내를 언급합니다. 하지만 이 내용은 바울이 한 남편이 여러 아내를 둘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골로새의 신자들 중에 모든 남편과 아내에게 언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에베소서 5장 22-33절은 대조적으로 부부 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일 일부다처제가 허용된다면,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비유하여 설명하려는 전체 논증이 무너지게 됩니다.

3) 왜 일부다처제는 바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이전에 허락하셨던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대로 결혼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심지어 아담과 하와로 돌아가더라도, 일부다처제는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문제 해결을 위해 일부다처제를 허락하셨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제도가 하나님의 이상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현대 사회에서 일부다처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여성들은 자신을 공급할 수 있고 보호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일부다처제의 ‘긍정적인’ 면을 대치하는 것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현대 국가에서는 일부다처제를 금지합니다. 로마서 13장 1-7절을 따르면 우리는 정부가 세운 법을 지켜야 합니다. 법에 불순종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성경에 의해 허락되는 경우로서 그 법이 하나님의 명령과 모순되는 경우입니다(행 5:29). 하나님은 일부다처제를 허락만 하실 뿐 그것을 명령하지 않으시므로 일부다처제를 금지하는 법은 지켜져야 합니다.

일부다처제가 여전히 허용될 수 있는 경우들이 있습니까? 아마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해결책이 불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결혼의 "한 몸"이라는 측면, 결혼에 있어서의 하나됨과 조화의 필요성, 그리고 일부다처제에 대한 진정한 필요성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일부다처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으며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고 확고하게 믿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한 몸"이라는 용어는 창세기에서 하와의 창조 기사에서 나옵니다. 창세기 2장 21-24절은 하나님이 아담이 잠든 사이에 그의 옆구리에서 갈빗대를 취하여 하와를 창조하신 과정을 묘사합니다. 아담은 하와가 그의 일부임을 인식했습니다. 그 둘은 사실 "한 몸"이었습니다. "한 몸"이라는 말은 우리 몸이 하나의 전체이며, 부분으로 나뉠 수 없고 여전히 전체이듯이 하나님이 결혼 관계를 그렇게 의도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두 개체(두 개인)가 아니라 하나의 개체(결혼한 부부)인 것입니다. 이 새로운 연합에는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감정적인 애착에 관한 한, 새로운 개체는 이전 및 미래의 모든 관계에 우선합니다(창 2:24). 일부 결혼한 자는 새로운 파트너보다 부모와의 관계에 계속해서 더 큰 비중을 둡니다. 이것은 결혼 생활에 재앙을 가져다 주며, "떠남과 합함"에 대한 하나님 원래의 의도를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한 배우자가 감정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신의 파트너보다 자녀에게 더 가까워지는 것 역시 유사한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지적으로, 재정적으로, 그리고 다른 모든 면에서, 부부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몸의 한 부분이 다른 신체 부위를 보살 피는 것처럼 (위장은 신체를 위한 음식을 소화하며, 두뇌는 몸 전체를 위해 몸을 지시하고, 손이 몸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각 파트너는 결혼 생활에서 상대방을 돌보아야 합니다. 각 파트너는 더 이상 자신이 번 돈을 ‘내 돈’으로 여겨서는 안 되고 ‘우리 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22-33절과 잠언 31장 10-31절은 남편과 아내의 역할에 이 ‘하나 됨’을 각각 적용시킵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한 몸이 되고, 연합의 결과로 자녀들을 낳게 됩니다. 그 아이들은 이제 부모의 연합에 따른 특별한 유전체 구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심지어 부부는 성적인 측면에서도, 자신들의 몸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보다 서로에게 속한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고전 7:3-5). 그들은 자신의 즐거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에게 즐거움을 주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 됨 및 서로에게 유익을 주려는 욕구는 특히 인류가 죄에 빠진 이후로 저절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창세기 2장 24절을 보면, 남자는 그의 아내에게 "합하여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단어의 배후에 두 가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의 아내에게 붙어야 한다는 것으로서 결혼 유대가 얼마나 단단한 지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다른 측면은 아내를 열심히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 "열심히 추구하다"는 것은 결혼 생활로 이어지는 구애를 넘어서서 결혼 생활을 지속시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성향은 배우자에게 무엇이 유익할지를 고려하기보다는 "나를 어떻게 기분 좋게 할지"에 관심을 쏟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신혼 여행이 끝나자마자 일반적으로 그 결혼을 지루한 결혼 생활로 이끌고 들어갑니다. 각 배우자는 자신의 필요가 충족되지 못한 것에 대해 계속 마음을 쓰는 대신에 상대 배우자의 필요를 채워주는데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함께 사는 것이 멋진 것처럼 하나님은 결혼에 대해 더 높은 요구를 하셨습니다. 결혼 전에 그들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섬겼더라도(롬 12:1-2), 이제는 한 몸 되어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고 그들의 자녀도 하나님을 섬기도록 양육해야 합니다(고전 7:29-34; 말 2:15; 엡 6:4). 사도행전 18장에 나오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부부로서 함께 그리스도를 섬기면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 우리의 결혼 생활에 차고 넘칠 것입니다(갈 5:22-23). 에덴 동산에는 아담과 하와와 하나님, 이렇게 셋이 있었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의 결혼 생활의 중심에 계시다면 기쁨 역시 넘칠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참되고 완전한 하나 됨은 불가능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불신자와 결혼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장 어려운 도전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결혼은 두 사람을 한 몸으로 결합시키는 거룩한 언약입니다(마 19:5). 신자와 불신자가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은 매우 어려울 수 있습니다(고후 6:14-15). 만일 한 배우자가 결혼 후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곧바로 서로 다른 두 권위 하에서 살아야 하는 어쩔 수 없는 갈등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결혼 생활에서 벗어날 길을 찾고,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은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그 상황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도전되는 그 환경에서 주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고전 7:17). 성경은 고린도전서 7장 12-14절에서 불신자와 결혼한 사람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룹니다.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느니라".

불신자와 결혼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빛 가운데 살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요일 1:7).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 내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갈 5:22-23). 신자인 아내는 불신자인 남편에게 복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벧전 3:1),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가까이 하며 그분의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독신 생활을 살도록 의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회와 성경 공부반과 같은 외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불신자와의 결혼 상태가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를 바꾸지는 못하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빛이 밝게 비칠 수 있도록 상대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고 또한 좋은 본을 보여야 합니다(빌 2:14). 베드로전서 3장 1절에서 발견되는 진리, 곧 불신자 배우자를 구원시키는 것이 불신자와 결혼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며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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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위한 적합한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며 각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성숙 수준과 삶의 경험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18세에 결혼할 준비가 되며 어떤 사람들은 전혀 결혼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이혼율이 50%가 넘는 것을 볼 때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결혼 생활을 영원한 헌신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과 언제나 상충되는 세속적인 관점입니다(고전 3:18).

성공적인 결혼을 위해서는 견고한 기초가 반드시 필요하며, 그 기초는 심지어 결혼을 전제로 하는 데이트나 연애가 시작되기 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단지 주일에 교회에 참석하고 성경 공부에 참여하는 그 이상을 포함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결혼에 임하기 전에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견해를 배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혼 생활을 하기 전에 성경이 사랑, 헌신, 성관계, 남편과 아내의 역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최소한 본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 결혼 부부 한 가정을 모델로 삼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이가 많은 부부는 성공적인 결혼 생활, 친밀감 형성 방법(신체의 관계를 넘어서는), 믿음의 중요성 등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결혼을 하게 될 커플은 그들이 서로를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들은 결혼 생활, 재정, 사돈, 자녀 양육, 훈육, 남편과 아내의 의무, 그들 중 한 사람 또는 모두가 직장을 가질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서로의 견해를 알아야 하고 또한 상대의 영적 수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 배우자가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을 그대로 믿고 결혼하지만 나중에 보면 단지 말 뿐인 것을 알게 됩니다. 결혼을 고려하는 모든 커플은 반드시 기독교 결혼 전문 상담자 또는 목사와 상담을 해야 합니다. 사실, 많은 목사들이 결혼 상담을 받지 않은 커플에 대해서는 결혼식을 집행하지 않습니다.

결혼은 헌신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맺는 언약입니다. 결혼은 나의 배우자가 부자이든 가난하든, 건강하든 병이 들었든, 살이 쪘든, 말랐든, 지루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나의 남은 인생을 그 사람과 함께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싸움, 분노, 황폐, 재앙, 우울함, 괴로움, 중독 및 외로움을 포함하여 모든 상황을 견뎌야 합니다. 이혼은 선택 사항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결혼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심지어 마지막 수단으로 여겨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통해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눅 18:27). 그리고 이 사실은 분명히 결혼을 포함합니다. 만일 어떤 커플이 처음에 헌신하기로 다짐하고 하나님을 우선으로 모신다면 이혼은 비참한 상황에 대한 불가피한 해결책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의 소망을 주시지만 그 소망은 우리가 그분의 뜻에 따를 때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단지 느낌 때문에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데이트의 초기 단계와 결혼 때의 상대 모습이 크게 다른 것을 보면서 너무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연애의 절정에 닿으면 당신은 ‘사랑에 빠진’ 느낌을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감정이 영원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결과 실망이 찾아오고 심지어 그러한 감정이 사라지면 이혼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와의 뜨거운 흥분이 끝나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당황하는 대신에 더 깊은 사랑, 더 강한 헌신, 더 든든한 기초, 그리고 깨어질 수 없는 안전한 관계에 이릅니다.

성경은 사랑이 감정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분명합니다(눅 6:35). 참된 사랑은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도록 하여 우리의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실 때 가능합니다(갈 5:22-23). 그 사랑은 날마다 내 자신과 이기심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빛을 내시도록 할 때 나타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가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이 묘사한 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준비가 되면 결혼을 해야 할 적절한 때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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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어떤 여인이 여러 번 결혼했다면 그 여인은 천국에서 누구와 결혼한 것이 되느냐는 질문에 답변하신 내용입니다(마 22:23-28). 분명히 하늘에는 결혼 같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과 아내가 더 이상 하늘에서 서로를 알아볼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남편과 아내가 여전히 천국에서 가까운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남편과 아내는 더 이상 하늘에서 결혼 상태로 있지 않을 것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아마 분명한 것은, 천국에서는 결혼이 필요 없기 때문에 결혼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혼을 제정하실 때 그분은 특정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아담이 동반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주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와는 아담의 외로움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그의 필요를 채워주는 해답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외로움이 없으며 돕는 배필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수 많은 신자들과 천사들에 의해 둘러싸일 것이며(계 7:9) 동반자에 대한 필요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필요가 다 채워질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사람이 자녀를 낳고 이 땅에 가득하여질 수 있도록 결혼을 제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천국은 출산에 의해 채워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 그곳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출산에 의해 태어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출생이나 외로움이 없기 때문에 결혼의 목적이 없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경은 하나님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이 성립되었다고 인정하시는 어떤 정확한 지점을 분명하게 명시하지 않습니다. 세 가지 일반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합법적으로 결혼할 때에야 결혼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즉, 법의 관점에서 남편과 아내가 되는 때를 결혼 성립으로 보는 것입니다. 2)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언약 맹세를 포함한 공식적인 결혼식을 마칠 때 하나님의 눈에 결혼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3)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성관계를 맺는 순간을 결혼 성립으로 보신다는 견해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견해를 각각을 살펴보고 각 견해의 강점과 약점을 평가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합법적으로 결혼했을 때를 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한 것으로 여기신다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 주어지는 일반적인 성경 구절은 정부의 법을 준수하라는 명령입니다. (롬 13:1-7; 벧전 2:17). 이 견해가 주장하는 바는 만일 정부가 결혼을 인정하기 전에 특정 절차와 서류 작업을 완료하도록 요구할 경우 부부는 그 절차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부의 요구 사항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고 합리적인 한, 부부가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는 이 주장은 분명히 성경적입니다. 로마서 13장 1-2절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견해에는 몇 가지 약점과 잠정적인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 정부가 조직되기 전에 결혼이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결혼 면허증과 같은 것이 없이도 결혼을 하고 살았습니다. 둘째, 심지어 오늘날에도 결혼에 대한 정부의 인정이 없거나 결혼에 대한 법적 요구 사항이 없는 국가들이 있습니다. 셋째, 합법적인 결혼으로 인정하기 전에 비 성경적인 요구 사항을 두는 몇몇 국가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국가는 합법적인 결혼이 되려면 카톨릭교의 가르침에 따라 카톨릭 교회 안에서 카톨릭 사제에 의해 결혼이 집례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카톨릭 교회 및 결혼을 성례로 이해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카톨릭 교회를 통해 결혼하라는 요구에 복종하는 것은 비 성경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넷째, 정부의 법령에만 의존하여 결혼을 합법화시키는 것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결혼에 대한 법적 정의를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2) 남자와 여자가 공식 결혼식을 마치면 하나님의 눈에 결혼한 것으로 인정된다는 견해입니다. 어떤 해석자는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에게 데리고 오신 것을(창 2:22) 하나님이 첫 번째 결혼을 주례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결혼식에서 아버지가 딸을 건네주는 현대의 관행은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을 반영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은 결혼식에 참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의 결혼식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 식에 참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결혼 예식에 예수님이 참석하신 것은 결코 하나님이 결혼 성립을 위해 결혼 예식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결혼식은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인류 역사의 거의 모든 문화는 여러 모양의 공식 결혼식을 준수하여 왔습니다. 모든 문화에는 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였음을 선언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사건, 행동, 언약, 서원 또는 선포가 있습니다.

3)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성관계를 맺을 때 결혼이 성립된 것으로 여기신다는 견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한 부부라도 육체적으로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면 아직 하나님 앞에서 결혼이 성립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어떤 남자와 여자가 성관계를 가졌다면, 하나님은 그 두 사람이 결혼한 것으로 여기신다고 주장합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근거로는 남녀 사이의 성 관계는 그 둘을 ‘한 몸’되게 한다는 성경 구절들입니다(창 2:24; 마 19:5; 엡 5:31). 이런 의미에서 성관계는 결혼 언약에 대한 최종 인침입니다. 하지만 성관계가 결혼을 성립시킨다는 견해는 성경적으로 건전하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부부가 합법적으로 결혼 예식을 치렀으나 어떤 이유로 인하여 성관계를 갖지 못하였더라도 그 부부는 여전히 결혼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우리는 구약이 종종 아내와 첩을 구별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은 성관계를 결혼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예를 들면, 역대하 11장 21절은 한 왕의 가정 생활을 묘사합니다. “르호보암은 아내 열여덟 명과 첩 예순 명을 거느려 아들 스물여덟 명과 딸 예순 명을 낳았으나 압살롬의 딸 마아가를 모든 처첩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이 구절에서 처첩들은 르호보암 왕과 성관계를 갖지만 아내들로 간주되지 않고 다른 구별된 부류로 언급됩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7장 2절은 결혼 전의 성행위는 부도덕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만일 성관계로 인하여 어떤 커플이 결혼한 부부가 되는 것이라면, 결혼 전의 성행위는 부정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커플이 성행위를 하는 순간 결혼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결혼하지 않는 커플이 먼저 성관계를 갖은 후에 결혼을 선포하고 그 이후의 모든 성관계에 대해 도덕적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인 지지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결혼이 성립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다음의 원칙들을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1)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합법적인 유구 사항이라면 남자와 여자는 공식적인 정부의 허락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2) 남자와 여자는 그 커플을 ‘공식적으로 결혼시키는’ 전형적인 문화적, 가족적, 언약적 관습을 따라야 합니다. 3) 가능하다면, 남자와 여자는 육체적으로 ‘한 몸’ 되는 원칙을 성취하기 위해 성적인 관계로 결혼을 완성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원리 중 하나 이상이 충족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한 커플은 여전히 하나님의 앞에서 결혼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까? 궁극적으로 결혼은 그 커플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요일 3:20). 하나님은 진정한 결혼 언약과 성적인 부도덕을 정당화시키려는 시도의 차이점을 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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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동성애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동성애자끼리/동성끼리의 결혼에 대해 명확히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동성애를 부도덕하고 비정상적인 죄로 정죄하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레위기 18: 22은 동성애 관계를 가증하고 혐오스러운 죄로 보고 있습니다. 로마서 1:26-27은 동성애에 대한 욕구들과 행위들을 부끄럽고, 비정상적이며, 탐욕스럽고, 불건전한 것이라 공표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 9은 동성애가 불의하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동성애에 대한 욕구들과 행위들 모두 성경에서 정죄되고 있기 때문에, 동성애자들 간에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사실, 죄가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이 결혼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간의 관계입니다. 결혼에 관해 첫 번째로 언급하고 있는 창세기 2: 24은 결혼은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연합하는 것이라고 묘사합니다. 고린도전서 7: 2-16 그리고 에베소서 5:23-33와 같은 결혼에 관한 지침들을 담고 있는 본문에서, 성경은 결혼이 한 남성과 한 여성 사이의 관계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성경적으로 말해, 결혼은 한 남성과 한 여성간의 평생의 연합이며, 주로 가정을 세우는 목적을 위한 것이고, 그러한 가정을 위한 안정된 환경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나, 오로지 성경만이 이러한 결혼에 대한 해석을 보여주는데 사용되지 않아도 됩니다. 결혼에 관한 성경적 관점은 세계 역사에서 모든 인간의 문명을 통해 결혼에 관한 일반적 해석이 되어 왔습니다. 역사는 동성애자끼리의 결혼에 대해 반대 의견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 세속적 심리학은 남성들과 여성들이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서로를 보완하도록 설계되어 있음을 인정합니다. 가정과 관련하여, 심리학자들은 배우자 상호간의 좋은 성 역할 모델로서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연합이 자녀들을 올바로 양육하기 위한 최선의 환경이라고 주장합니다. 심리학은 동성애자끼리의 결혼에 대해 반대론을 펼칩니다. 본질상/육체적으로, 명백하게, 남성들과 여성들은 성적으로 서로 적합하게 설계되었습니다. 출산을 위한 성행위의 본질적인 목적과 관련하여, 오직 남성과 여성 사이의 성관계만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본성은 동성끼리의 결혼에 대해 반대론을 펼칩니다.

따라서, 성경, 역사, 심리학, 그리고 본성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결혼에 대해 찬성 의견을 펼치고 있는데도, 왜 오늘날 그런 논란이 존재합니까? 왜 동성끼리의 결혼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정중하게 반대의 뜻을 제시하더라도, 미움에 차고, 편협하며, 편견이 심한 사람들로서 낙인이 찍히는 건가요? 종교적이든 비종교적이든,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자 커플을 어떤 합법적 동성끼리의 결혼의 형태로 있는 결혼한 커플로서 똑같은 법적 권리를 지지하고 – 최소한 훨씬 덜 반대함 – 있는데도, 동성애자 권리운동들은 동성애자끼리/동성끼리의 결혼을 왜 그렇게 공격적으로 밀어 붙이는 것일까요?

대답은, 성경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본질적으로 동성애가 부도덕하고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이렇게 내재하는 지식을 억제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동성애를 정상화하려하고 동성애에 대한 그 어떠한 반대라도 공격을 가한다는 것입니다. 동성애를 정상화하는 최선의 방법은 동성애자끼리/동성끼리의 결혼을 상반되는 성끼리의 전통적인 결혼과 같은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로마서 1: 18-32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에 진리는 알려졌습니다. 진리는 거부되고 거짓말과 대체됩니다. 그리고는, 거짓말이 장려되고 진리는 압제받고 공격을 당합니다.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동성애자 권리 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자들에 의해 표현되는 격렬함과 분노는, 사실, 그들이 그들의 위치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약한 입지를 극복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논쟁과 관련된 책에서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속임수입니다. 아마도 현대 동성애자 권리 안건에 관해 로마서 1:31의 말씀보다 더 정확한 묘사는 없을 것입니다: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동성애자끼리/동성끼리의 결혼을 허가한다는 것은 성경이 명백하게 그리고 일관적으로 죄악으로 정죄하고 있는 동성애적 삶의 방식에 인가를 내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동성애자끼리/동성끼리의 결혼을 굳건히 반대해야 합니다. 게다가, 동성애자끼리/동성끼리의 결혼에 반하는 강력하고 논리적인 주장들이 성경 밖에서도 존재합니다. 복음적인 기독교인만이 결혼이 한 남성과 한 여성간의 관계임을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따르면, 결혼은 한 남성과 한 여성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습니다(창세기 2장 21-24절, 마태복음 19:4-6절). 동성애자끼리/동성끼리 결혼은 결혼제도를 왜곡하는 것이며 결혼을 제정하신 하나님께 대한 공격입니다. 기독교인들로서, 우리는 죄를 용납하거나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동성애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 죄들의 용서를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야 하고(에베소서 4:15절), “온유함과 존중함”으로 진리를 주장해야 합니다(베드로전서 3:15). 기독교인들로서, 우리가 진리에 굳건히 선 결과가 개인적인 공격들, 모욕들 그리고 박해뿐일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한복음 15: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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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은 결혼 관계에 있어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음은 알기 쉬운 성경적이 주고 있는 명령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에베소서 5:22-24).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도, 남편이 머리가 되는 원칙이 여전히 존재하였습니다(디모데전서 2:13).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아담의 “돕는 배필”로서 지어졌습니다(창세기 2:18-20). 하나님은 세상 권위의 여러 형태들을 세우셨습니다: 사회 정의를 집행하고 보호를 제공하는 정부; 하나님의 양을 인도하고 먹이는 목자; 그들의 아내들을 사랑하고 부양하는 남편;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을 훈계하는 아버지. 각각의 경우에 순종이 요구됩니다(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순종, 목자에 대한 양떼들의 순종,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순종 등).

‘순종’으로 번역된 헬라어, ‘hupotasso’는 동사의 계속되는 형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정부와, 목자, 그리고 또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일회성 행위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행동의 양식이 되는, 계속되어야 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 책임이 있고,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따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야고보서 1:21; 4:7). 그리고 각각의 기독교인은 겸손하게 살아야 하며 다른 사람들과 피차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에베소서 5:21). 가족단위 내에서의 순종에 관해서, 고린도전서 11:2-3은 남편은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하고(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하신 것처럼), 아내는 그녀의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혼생활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들에 관한 많은 오해가 오늘날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성경적 역할들이 제대로 이해된 경우에서 조차, 많은 사람들이 소위 여성의 “해방”을 지지하며 그 역할들을 거부하는 선택을 하는데, 이는 가족 단위가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의도를 거부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분의 의도를 즐겁게 기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나쁜 단어가 아닙니다. 순종은 열등감이나 더 적은 가치가 반영된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가치를 조금도 포기함이 없이, 끊임없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누가복음 22:42; 요한복음 5:30).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에 관한 세상의 잘못된 정보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에베소서 5:22-24:1의 다음과 같은 점들을 신중하게 주목해야 합니다. [1] 아내는, 모든 남자들이 아닌, 한 남자(그녀의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슨종의 규칙은 여성의 지위를 사회로까지 전체적으로 확장하지 않습니다. [2] 아내는 예수 그리스도께 개인적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그녀의 남편에게 기꺼이 순종해야 합니다. 여자는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남편에게 순종합니다. [3] 아내가 순종하는 예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복종입니다. [4] 아내의 능력, 재능, 또는 가치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내가 자신의 남편에게 순종한다는 사실은 그녀가 열등하다거나 가치가 덜하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한, “범사(모든 일에)”를 제외하고는, 순종의 명령을 통해 순종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자기 아내의 순종을 받기 전에 적성 검사나 지능 테스트를 통과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보다 리더십에 있어, 많은 면에서 더 나은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남편의 리더십에 복종함으로써 주님의 지시를 따르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경건한 아내는 단순하게 그녀의 거룩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말없이” 자기의 믿지 않는 남편마저도 주님께 인도할 수 있게 됩니다(베드로전서 3:1).

순종은 사랑의 리더십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어야 합니다. 남편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의 아내를 사랑하면(에베소서 5:25-33), 순종은 자기의 남편에 대한 아내의 자연적 반응이 됩니다. 하지만, 남편의 사랑 또는 그것의 부족함과 관계없이, 아내는 “주님께 하듯이” 순종하라고 명령 받고 있습니다(22절).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아내의 순종 – 하나님의 계획을 그녀가 받아들이는 것 – 이 자기의 남편에 대해 자신이 순종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 하듯이”란 비교는, 또한, 그녀가 따라야 할 더 높은 권위가 있다는 것을 아내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따라서, 남편에게 “순종”한다는 미명 하에 그녀는 사회 법이나 하나님의 법을 거역할 의무가 없습니다. 아내는 옳고 합법적이고 하나님을 기리는 일들에서 순종합니다. 물론, 아내는 학대에 대해서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 이는 옳지도, 합법적이지도, 하나님을 기리는 것도 아닙니다. 학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순종’의 원칙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고 악을 장려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의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은 남편이 이기적이 되고 횡포를 부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사랑하라이고(25절), 남편은 하나님 앞에 그 명령을 이행할 책임이 있습니다. 남편은 지혜롭고, 자비롭게, 그리고 자신이 해명해야 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남편의 권위를 행사해야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해 사랑을 받는 것처럼 아내가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면, 순종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5:24는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혼에 있어, 순종은 남편에게 명예와 존경을 가져다 주고(에베소서 5:33 참조) 남편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는 마음가짐입니다. 이것은 가족이 어떻게 작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님께서의 지혜로우신 계획입니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 성경 주석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여자는 아담의 옆구리로 만들어졌다. 여자는 남자를 지배하기 위해 남자의 머리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남자에 의해 짓밟히도록 남자의 발로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오히혀 남자와 동등 하라고 남자의 옆구리고 만들어 졌고, 남자의 팔 아래에서 보호되고, 그리고 사랑 받기 위해 남자의 심장에 가까운 곳에서 만들어졌다.” 에베소서 5:19-33에 있는 남편과 아내에 대한 명령의 바로 다음 단락은 성령충만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믿는 자들은 예배하고(5:19), 감사하며(5:20), 복종해야 합니다(5:21). 그리고는 바울은 이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한 생각의 뒤를 이어 22-24절을 통해 그것을 아내들에게 적용시킵니다. 아내는 여자들이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성경은 결코 이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결혼 관계가 잘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시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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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브리서 13:4). 성경은 남편과 아내들에게 성적으로 허락된 것이나 허락되니 않은 것에 대해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남편들과 아내들은 가르침을 받습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고린도전서 7:5a). 아마 이 구절이 결혼에 있어 성관계에 대한 원칙을 규정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일이 행해지던, 서로가 동의해야 합니다. 누구도 그 또는 그녀가 불편하거나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는 어떤 것들을 권장 하거나 강제해서는 안됩니다. 남편과 아내 둘 다 어떤 것(오럴섹스, 다른 체위, 성인용품 등)을 시도해 보기를 원한다면, 성경은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어떤 이유도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혼한 부부에게 성적으로 결코 허락될 수 없는 몇 가지 것들이 있습니다. “부부 교환”이나 “추가적인 다른 사람의 참여”의 행위(세 명끼리, 네 명끼리 등)는 노골적인 간음입니다(갈라디아서 5:19; 에베소서 5:3; 골로새서 3:5; 데살로니가전서 4:3). 당신의 배우자가 허락하고, 인정하며, 또는 거기에 참여까지 한다 하더라도 간음은 죄입니다. 포르노는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부추기므로(요한일서 2:16) 하나님께 의해 역시 정죄 받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포르노를 자신들의 성적 결합에 끌어 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항목들 외에, 서로가 동의 하는 한 남편과 아내가 서로 행하는데 있어 성경에서 명백하게 금하는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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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 믿지 않는 자와 데이트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며, 결혼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6:14은 “믿지 아니하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같은 멍에를 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마리 소들의 모습입니다. 함께 짐을 끌어당기는 대신, 이 소 두 마리는 서로 상반되게 일하게 될 것입니다. 이 구절이 특별히 결혼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것은 분명하게 결혼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바알(사탄)이 조화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간의 결혼 안에 영적 조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믿는 자들은 그들이 구원을 받을 때 그들의 마음에 들어 온 성령의 거하시는 장소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줍니다(고린도후서 6:15-17).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합니다 – 세상 안에서이지 세상 밖으로가 아님. 그리고 삶에 있어 가장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결혼만큼 더 중요한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경은 또한 말씀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린도전서 15:33). 믿지 않는 자들과 어떤 방식이로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되는 어떤 길로 빠르게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과 친밀하게 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전도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과 좋은 우정을 쌓는 것에 있어서 잘못된 것은 없지만, 거기까지 입니다. 당신이 믿지 않는 자와 데이트를 한다면, 솔직히 당신의 우선 순위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연애 감정 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해 한 영혼을 구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믿지 않는 자와 결혼을 한다면, 당신들 둘은 결혼 생활에서 영적 친밀감을 어떻게 일굴 것입니까? 당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서로 동의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좋은 결혼생활을 구축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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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저는 이런저런 이유로 이혼했습니다. 제가 재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두 번 이혼했습니다 – 처음은 제 배우자의 외도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불화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세 번 이혼했던 남자와 연애 중입니다 – 처음은 불화로, 두 번째는 그 자신의 외도로, 세 번째는 그의 아내 쪽의 외도로. 우리는 서로 결혼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이혼 후 재혼에 대한 다양한 경우들에 관하여 성경은 자세하게 언급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결혼한 커플이 모두 살아 있는 한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창세기 2:24; 마태복음 19:6). 이혼 후에 재혼을 허락하는 유일하고 구체적인 사유는 간통(외도)인데(마태복음 19:9), 이것조차 기독교인들간에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내버려질 때 입니다 – 믿지 않는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를 떠날 때(고린도전서 7:12-15). 그렇다고, 이 문장은 특별히 재혼하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결혼 상태로 남아 있으라 권합니다. 육체적, 성적, 그리고 심각한 감정적 학대의 경우들은 갈라설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성경은 이혼과 재혼의 맥락에서 이러한 죄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싫어하시고(말라기 2:16),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고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혼은 한 쪽에 문제가 있든, 두 쪽 다 문제가 있든 간에,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용서하실까요? 물론입니다. 이혼은 다른 어떠한 죄처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26:28; 에베소서 1:7). 하나님께서 이혼의 죄를 용서하신다면, 이것이 재혼하는 것에 대한 자유를 뜻하는 걸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는 사람들이 독신으로 남을 것을 소명하십니다(고린도전서 7:7-8). 독신으로 지내는 것을 저주나 형벌로 보아서는 안되겠고, 오히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7:32-36).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정욕으로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고린도전서 7:9). 아마 이것이 때로는 이혼 후 재혼하는 것에 적용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재혼을 할 수 있거나 재혼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문제는 당신과, 당신의 잠재적 배우자,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 사이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지혜를 주시라고 그분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야고보서 1:5). 열린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시편 37:4).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잠언 3:5-6)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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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른 인종과 혼인을 맺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신명기 7:3-4). 그러나, 이 명령에 대한 이유는 피부 색이나 민족성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상당히 종교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다른 인종과의 결혼을 금지하신 이유는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거짓 신들의 숭배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 숭배자들, 사교도들, 또는 이교도들과 결혼을 한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2:11에 따르면, 이러한 염려는 정확하게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영적 순결의 유사한 원리가 신약에도 깔려있는데, 이는 인종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린도후서 6:14). 이스라엘 족속(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우상 숭배자들과 결혼하지 말 것을 명령 받았던 것처럼, 기독교인들도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결혼하지 말 것을 명령 받습니다. 성경은 결코 다른 인종과의 결혼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다른 인종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 말씀의 권위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한 것뿐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은 그 또는 그녀의 피부색이 아니라 그 또는 그녀의 성격으로 판단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는 인종에 근거한 편애의 여지가 없습니다(야고보서 2:1-10). 사실, 오로지 “하나의 인종”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성경적 관점입니다 – 인류, 아담과 이브로부터 내려온 모든 사람들. 배필을 선택할 때, 기독교인은 결혼할 지도 모르는 배우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거듭 났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요한복음 3:3-5). 피부색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배우자를 선택하는 성경의 표준입니다(요한복음 3:3-5). 다른 인종간의 결혼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지혜와 분별 그리고 기도의 문제인 것입니다.

결혼을 고려하는 두 사람은 많은 요인들을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피부색의 차이가 무시되어서도 안되겠지만, 그 또한 절대 두 사람이 결혼해야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서로 다른 인종의 커플은 차별과 조롱에 직면할 수도 있으니, 자신들은 그러한 편견에 대해 성경적 태도로 대응할 수 있게 준비되어야 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로마서 10:12). 피부색을 따지지 않는 교회 그리고/또는 국제결혼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평등을 나타내는 강력한 예증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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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그에게 “매여” 있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로마서 7:2). 여기서의 원리는 결혼의 끈이 끊어지려면 남편이나 아내 중 어느 하나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인데도, 우리의 현대 사회에서는 결혼한 경우들의 51 퍼센트 이상이 이혼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서약을 한 커플들의 반 이상이 이 서약을 깨뜨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결혼한 커플이 자신들의 결혼이 지속될 것을 보장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 전에 수행되어야 하는 원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아모스 3:3). 거듭난 믿는 자에게, 이것은 누구든지 믿지 않는 자와 친밀한 관계를 시작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어둠과 빛이 어떻게 같이 하겠느냐?”(고린도후서 6:14). 이 하나의 원칙이 지켜진다면, 이후의 결혼에 있어 많은 심적 고통과 괴로움을 덜어 줄 것입니다.

결혼이 오래 지속되도록 지켜주는 또 다른 원칙은 남편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아내를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고 존중하며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5:25-31). 상응하는 원칙은 아내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고 “주님께 하듯이” 자기 자신의 남편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5:22).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간의 관계를 묘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고 교회를 자신의 “신부”로서 사랑하고, 영예롭게 하며, 보호하십니다(요한계시록 19:7-9).

하나님께서 처음 결혼으로 아담에게 이브를 데려 오셨을 때, 그녀는 아담의 “살과 뼈”로 만들어졌고(창세기 2:31), 그들은 “한 몸”이 되었습니다(창세기 2:23-24).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결합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개체를 이루기 위한 마음과 혼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계는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매력을 넘어서서 영적인 하나됨의 경지에까지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나를 그리고 나의”가 아닌 “우리를 그리고 우리의”에 중점을 둡니다. 이것이 지속되는 결혼의 비밀들 중 하나입니다. 죽을 때까지 결혼을 지속시키는 것은 부부가 우선 순위가 되는 무언가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은 남편과 아내의 수평적 관계가 지속되어 두 사람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하나임을 확신하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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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제정은 창세게 2:23-2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창조하시고 그리고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결혼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세기 2:18)란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입니다.

창세기 2:20에서 이브를 묘사하는데 사용된 “배필(helper)”이란 말은 “둘러 싸다, 보호하다, 또는 지원하다, 돕다”를 의미합니다. 이브는 아담의 “다른 반 쪽”으로서 지원하거나 돕는 자로서 아담 옆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결혼했을 때, 남자와 여자는 “한 몸”이 됩니다. 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성적 친밀감을 갖는 육체적 결합에서 가장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신약 성경은 이 하나됨에 관한 경고를 추가합니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태복음 19:6).

사도 바울에 의해 쓰여진 몇 개의 서신서들은 결혼과 결혼 관계 안에서 믿는 자들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의 본문은 고린도전서 7장이고, 다른 본문은 에베소서 5:22-23입니다. 같이 검토해 보면, 이 두 본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결혼관계를 위한 뼈대를 형성하는 성경적 원칙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 있는 본문은 성공적인 성경적 결혼에 관하여 특히 심오한 말씀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에베소서 5:22-23).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에베소서 5:25). “이와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에베소서 5:28-29).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에베소서 5:31).

믿는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의 원칙들을 구축할 때, 성경적인 결혼의 결실을 맺습니다. 성경 말씀에 기반을 둔 결혼은 그리스도를 남자와 아내 모두의 머리로 삼는 조화된 생활인 것입니다. 결혼의 성경적 개념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하나가 되신 것을 보여주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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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과 여성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동등하지만 성경은 결혼 생활에서 각각의 역할을 정해줍니다. 남편은 집에서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고전 11:3; 엡 5:23). 이 지도력은 아내에게 독재적이거나 멸시적이거나 군림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교회를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본과 일치해야 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5-26). 그리스도께서는 연민과 자비와 용서와 존중과 이타적인 마음으로 교회(그의 백성)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의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2-24). 여성들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지만, 성경은 또한 남성들에게 그들의 아내를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여러 차례 말합니다. 남편은 독재자의 역할을 맡아서는 안되고 아내와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야 합니다. 사실 에베소서 5장 28-29절은 남편들은 자기 몸을 사랑하고 먹이고 돌보는 것처럼 똑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권고합니다. 아내에 대한 남자의 사랑은 그분의 몸인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동일해야 합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8-19).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사랑과 존중이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특징 짓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사랑과 존중이 존재한다면, 권위, 리더십, 사랑, 복종은 양 측 파트너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가정에서의 책임 분담과 관련하여 남편들에게 가족을 부양하도록 지시합니다. 이것은 그가 일하며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위한 모든 생필품을 충분하게 제공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분명한 영적 결과가 초래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그러므로 가족을 부양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이는 아내가 가족을 부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잠언 31장은 경건한 아내가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아내의 주된 책임이 아닙니다. 그 책임은 남편의 것입니다. 남편이 자녀 키우는 일과 가사를 도울 수는 있어도(즉, 아내를 사랑할 의무를 수행하더라도), 잠언 31장은 또한 여성의 영향력과 책임의 주요 영역이 가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녀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더라도, 그녀는 가족을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많은 여성들, 특히 풍요로운 서구 국가들의 여성들에게는 쉬운 생활 방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여성들이 너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파열 지점까지 가 있습니다. 그러한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서는 남편과 아내가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선 순위를 재정렬하고 각자의 역할에 대한 성경의 지침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결혼 생활에서 역할 분담과 관련한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양 측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면 이 갈등은 최소화될 것입니다. 부부가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이 빈번하고 격렬한 경우, 또는 논쟁이 결혼 생활에 있어서 너무 두드러지는 경우, 그 문제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러한 경우, 각 파트너는 먼저 기도에 힘쓰고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합니다. 그 후 사랑과 존경의 태도로 서로에게 헌신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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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적인 기질을 보이는 아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가혹하고 사랑 없는 비판적인 부모에 의해 성장하는 아이의 경우 거의 예외 없이 일종의 반항을 보입니다. 가장 잘 따르는 아이조차 그러한 대우를 받으면 내적으로 또는 외향적으로 반항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형의 양육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족이 어떤 양육 방식을 취하든 상관없이 반항적인 아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반항적인 자녀는 태어날 때부터 강한 의지의 성격을 소유한다고 가정하면, 그는 제약을 시험해 보려는 성향, 지배하고 싶은 큰 욕구, 모든 권위에 온 힘을 다해 저항하는 특징을 보일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반항은 그 아이의 성향입니다. 또한 이러한 강한 의지를 가진 반항적인 자녀들은 종종 매우 지능적이며 놀라운 속도로 상황을 파악하고 상황과 주변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이러한 아이들은 부모들에게 극도로 힘들고 피곤한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그러한 자녀들을 지으신 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며, 또한 부모들에게 그 도전을 감당할 수 있는 자원을 남겨 두셨습니다. 반항적이고 고집 센 자녀를 은혜롭게 다루는 성서적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잠언 22장 6절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모든 아이들은 하나님을 향하는 길로 가야 합니다. 아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 역시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떻게 그분을 가장 잘 섬길 수 있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강한 의지를 가진 아이를 다룰 때는 그 아이의 동기, 즉 다스리고 싶어하는 그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면 아이가 자신의 길을 찾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반항적인 아이는 자신이 이 세상을 다 책임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시며 그가 할 일은 단지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부모는 이 진리를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본인들부터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부모는 그의 자녀에게 복종을 설득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일단 하나님이 규칙을 세우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한 후에는 부모는 자녀의 마음 안에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이며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면 부모의 역할은 이끄는 것이고 자녀의 역할은 따르는 것임을 반항적인 자녀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 점에서는 연약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의지가 강한 아이는 미리 우유부단함을 발견하고, 곧바로 리더십의 공백을 메워 스스로 제어할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권위에 복종하는 원칙은 의지가 강한 아이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교훈입니다. 만일 어린 시절에 복종을 배우지 못하면, 나중에 고용주, 경찰, 법원, 군대 지도자를 포함한 모든 권위자들과 갈등을 맺는 삶이 될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1-5절은 우리 위에 하나님이 정하신 권위가 있고 우리는 그 권위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또한, 강한 의지를 가진 아이는 자신이 이해할 때에만 규칙이나 법을 기꺼이 준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규칙을 지켜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설명해 주고,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행하여야 하고 그 사실은 타협될 수 없다는 진리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알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모에게 자녀를 사랑하고 징계할 책임을 주신 것을 설명하고 만일 부모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임을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능할 때마다 자녀에게 결정을 내릴 기회를 주어서 그가 완전한 무력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 나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른 신자들과 함께 모이라고 명하신 것이기 때문에 타협할 수 없지만(히 10:25), 자녀들은 그들이 무엇을 입을 지 어디에 앉을지 등을 (타당한 범위 내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족 휴가 계획을 짤 때 그들에게 의견을 낼 수 있도록 숙제를 주십시오.

더욱이 양육은 일관성과 인내로 해야 합니다. 부모는 목소리를 높이거나 분노 가운데 손을 올리거나 혈기를 부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 인내를 놓치면, 강한 의지를 가진 아이는 그가 바라던 지배 감각이 채워지기 때문에 계속 당신이 감정적으로 반응하도록 당신을 좌절시키는 방법을 신속하게 알아낼 것입니다. 즉, 어떻게 당신을 지배할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이때 부모가 화가 난 상태에서 육체적인 징계를 내리는 것은 종종 이러한 아이들에게 먹혀 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매를 맞을 때 약간 아픔은 느끼더라도 그에 비해 부모로 하여금 화를 내게 만든 희열이 더 가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강한 의지를 가진 아이들 중에는 부모가 매를 때릴 때 도리어 웃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는 매를 때리는 것은 그들에게 최선의 징계가 되지 못합니다. 아마도 강한 의지를 가진 반항적인 아이를 키울 때 성령의 열매인 인내와 절제가(갈 5:23) 가장 필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녀를 키우는 것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시지 않는다는 약속은 부모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고전 10:13). 만일 하나님이 고집 센 자녀를 허락하신다면 부모는 주께서는 실수가 없으시고 그 일을 행하는데 필요한 지침과 자원을 제공할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부모의 삶에 있어서 고집 센 청소년을 키우는 때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말이 더 의미 있는 때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은 구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시겠다고(약 1:5) 약속하신 주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지혜를 구하는 시간이 더욱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의지가 강한 아이가 잘 훈련될 경우 종종 큰 일을 이루는 성공적인 어른으로 자라난다는 사실을 알 때 위로가 있습니다. 많은 반항적인 자녀들이 대담하고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되어 상당한 재능으로 주를 섬기며 또한 인내와 성실로 그들을 키워주신 부모를 사랑하며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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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임의 문제는 굉장히 힘든 고민이며, 특히 평생 자녀를 고대하고 있는 부부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주님, 왜 우리입니까?"라고 묻곤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과 양육의 복을 베풀기를 바라십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부부의 경우, 불임으로 인한 가장 가슴 아픈 면 중 하나는 그 불임이 일시적인지 또는 영구적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경우라면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그것이 영원한 것이라면,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그들의 대처 과정은 어떠해야 합니까?

성경은 여러 이야기를 통해 일시적인 불임 문제를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이를 약속하셨지만 그녀가 90세가 될 때까지 이삭을 낳지 못했습니다(창 11:30).

리브가의 남편 이삭은 간절하게 기도했고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창 25:21).

라헬은 기도했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녀의 태를 여셨습니다." 그녀는 두 명의 아들, 곧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습니다(창 30:1, 35:18).

마노아의 아내는 한동안 불임 상태였지만 삼손을 낳았습니다(삿 13:2).

엘리사벳은 노년에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을 낳았습니다(눅 1:7, 36).

사라와 리브가와 라헬(이스라엘 민족의 어머니들)의 불임 상태는 마침내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에 의한 것임을 알려주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하지만 불임 부부는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와 은총을 보류하고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되며, 그들이 어떤 면에서 벌을 받고 있다고 가정해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그들의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함 받았으며 자녀를 가질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불임 그리스도인 부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산부인과 의사나 기타 불임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남성과 여성 모두 임신 준비를 위해 건강한 생활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어머니들이 수태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 아이를 위해 계속 기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아이를 갖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뜻이 우리가 입양하여 양부모가 되는 것이든 또는 자녀 없이 사는 것이든, 우리는 주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사랑하는 자들 각자를 위한 거룩한 계획을 갖고 계심을 압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임신을 허락하기도 하시고 막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모든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고 계십니다(롬 11:33-36).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 1:17). 이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면 불임 부부의 마음의 아픔을 달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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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 존중하는 행동이며, 그들의 지위를 존경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공경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존경하다, 칭찬하다, 귀하게 여기다"라는 의미입니다. 공경은 공로뿐만 아니라 지위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부 시민들은 대통령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여전히 국가 지도자로서 그의 지위를 존중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연령대의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가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도록 권고하십니다. 그분은 십계명(출 20:12)과 신약 성경에 또 다시 그 명령을 포함시킬 만큼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귀중하게 생각하십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장수를 보상으로 약속 받은 유일한 명령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은 복을 받습니다(렘 35:18-19). 반대로 "타락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마지막 날에 경건치 못한 사람들은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롬 1:30; 딤후 3:2).

가장 현명한 사람인 솔로몬은 자녀들에게 부모를 존중하도록 권하였습니다(잠 1:8, 13:1, 30:17). 우리가 더 이상 직접적으로 그들의 권위 아래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마저 지상의 부모(눅 2:51)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마 26:39)께 복종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경외하는 방법으로 부모님을 대하여야 합니다(히 12:9; 말 1:6).

분명히,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행동과 태도로 그들을 공경하십시오(막 7:6). 그들의 숨은 소원과 말로 표현하는 바람을 들어주십시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잠 13:1). 마태복음 15장 3-9절을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상기시키셨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조문을 순종하고 있었지만 그들 자신의 전통을 덧붙임으로 인하여 실제로는 율법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로는 부모님을 공경하였지만, 행동은 그들의 진정한 동기를 드러냈습니다. 공경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 ‘공경하라’는 단어는 올바른 행동을 요구하는 동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노력하는 것과 거의 같은 방법으로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의 경우,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함께 합니다. 그것은 듣기, 주의를 집중하기, 그리고 부모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들이 자란 후에는 어릴 때에 배운 순종으로 인하여 정부, 경찰, 고용주와 같은 다른 권위를 존중하면서 잘 섬길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하지만 이는 경건하지 않은 부모를 본 받는 것을 포함하지는 않습니다(겔 20:18-19). 만일 부모가 행여 자녀에게 하나님의 명령에 모순되는 일을 하라고 지시한다면, 그 아이는 부모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행 5:29).

공경은 공경을 낳습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복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공경은 쉽지 않으며 항상 재미있는 일은 아니기에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공경은 우리 인생의 목표인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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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가족 관계의 우선 순위를 단계별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성경에서 가족 관계의 우선 순위를 결정할 수 있는 일반적인 원칙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신명기 6장 5절을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첫째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그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결혼하였다면 배우자가 그 다음입니다. 결혼한 남자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 하셨듯이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엡 5:25). 그리스도의 최고 우선 순위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고 그 다음이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하나님이 첫째이고, 그 다음은 자기 아내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내는 “주께 하듯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엡 5:22). 여성에게는 하나님이 첫째요 남편이 둘째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우리의 우선 순위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두 번째이고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면(엡 5:31), 결혼 관계의 결과는 자녀가 그 다음 우선 순위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부모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차세대가 될 경건한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데(잠 22:6; 엡 6:4), 이는 다시 한번 하나님이 최고 순위인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른 모든 가족 관계도 이 사실을 반영해야 합니다.

신명기 5장 16절은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면 오래 살고 또한 일들이 잘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이를 제한하는 문구는 없으므로, 부모님이 살아있는 내내 그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물론, 어린이가 성인이 되면 더 이상 부모에게 복종할 의무가 없지만("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부모들을 존중하는 데는 연령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부모가 하나님, 우리의 배우자 및 자녀들의 우선 순위 목록 다음에 있음을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부모 다음으로는 나머지 가족들을 우리의 우선 순위에 둘 수 있습니다(딤전 5:8).

우선 순위 목록에 있는 모든 가족들 다음으로 동료 신자들이 있습니다. 로마서 14장은 우리에게 형제들을 심판하거나 멸시하지 말고(10 절) 동료 그리스도인이 "실족하거나" 영적으로 타락하게 될 어떤 일도 하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고린도전서의 대부분은 교회가 어떻게 서로 조화롭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향한 다른 권고는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라”(살전 5:11),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히 10:24) 등이 있습니다.

우리의 우선 순위에서 마지막으로 오는 것은 세상입니다(마 28:19).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선 순위의 성경적 순서는 하나님, 배우자, 자녀, 부모, 나머지 가족들,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와 자매, 그리고 나머지 세상입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보다 어떤 한 사람에게 집중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나머지 관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성경적인 균형을 취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우리 가족 안과 밖의 모든 관계에서 모든 것을 잘 충족시킬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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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이유로 자신의 자녀를 돌 볼 수 없는 부모가 그 아이를 다른 집으로 입양시키는 것은 사랑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자녀를 가질 수 없는 많은 부부를 위한 기도 응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로서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려고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자녀가 아닌 아이들로 입양함으로써 대가족을 만들기도 합니다. 성경은 입양에 대해 좋게 말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바로 황제가 모든 히브리 남자 아기를 죽이라는 칙령을 내린 시기에 아들을 낳은 요게벳이라는 히브리 여인의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출 1:15-2). 요게벳은 바구니를 가져다가 방수 처리를 한 후에 그 아기를 넣고 강에 띄워 보냈습니다. 바로의 딸 중 한 명이 바구니를 발견하고는 그 아이를 꺼내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그를 왕실에 입양시키고 그에게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 아이는 잘 자라나서 충실하고 복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출 2:1-10).

에스더 서에는 에스더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여인이 나옵니다. 에스더는 부모가 죽은 후 사촌에게 입양되었고, 그 후 여왕이 되었고, 하나님은 유대 백성을 구원하는데 그녀를 사용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씨를 통하는 대신에 성령을 통하여 잉태되었습니다(마1:18). 요셉은 예수님을 자기 자녀로 입양한 후 그를 키웠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신뢰함으로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가족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자연적인 잉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입양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마찬가지로, 입양을 수단으로 하여 어떤 사람을 가족으로 삼는 것은 선택과 사랑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자들을 그분의 영적인 가족으로 입양하듯이 우리는 모두 기도하는 마음으로 육신의 가족에 아이들을 입양하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분명히 육체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 모두에서 입양은 성경에 좋은 것으로 비추어집니다. 입양하는 사람들과 입양된 사람들 모두 엄청난 복을 얻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에 입양 됨으로써 얻게 되는 특권을 예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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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부모들이 자신들이 양육했던 방법에 어긋나게 사는 자녀들을 다루고 대응하는데 있어 참고할 수 있는 돌아온 탕자(누가복음 15:11-32)의 이야기에 내재된 몇 가지 원칙들이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가 한 번 성인이 되면 그들은 더 이상 부모들의 권위 하에 놓여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보면, 작은 아들은 자신의 유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모두 탕진하고 맙니다. 거듭나서 믿는 자가 아닌 자녀의 경우에는, 이런 것은 그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한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분명히 고백하였던 자녀의 경우에 있어 이런 자녀를 우리는 “탕자”라 부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자신이 가진 자원들을 헛되이 낭비해 버린 사람”인데, 가정을 떠나 자신의 부모가 자신을 위해 쏟아 부은 영적 유산을 낭비하는 자녀에 대한 알맞는 묘사입니다. 이런 자녀가 하나님께 대적하게 되면서, 양육, 가르침, 사랑, 그리고 보살핌의 그 모든 시간들은 잊혀집니다. 모든 반항은 먼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모님과 부모님의 권위에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 떠나는 것을 말리지 않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그는 또한 자신의 자녀를 보호하려고 따라가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이 부모는 충실히 집에 머물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정신을 차리고” 돌아서서 다시 올 때, 부모는 기다리며 지켜보다가 자기 아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반기기 위해 뛰어 나갑니다.

우리의 아들들이나 딸들이 스스로 떠나려고 –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법적 나이가 되었다고 가정하고 –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이 힘든 결과들을 가져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있다 하더라도, 부모들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허락해야 합니다. 부모는 쫓아 가지 않고, 다가올 결과들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부모는 집에 머물며, 회개하고 마음을 바꾸는 조짐들이 있는지 계속해서 충실하게 기도하고 지켜봅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부모들은 자신들의 조언을 벗어나지 않고, 반항을 지지하지 않으며, 간섭하지도 않습니다(베드로전서 4:15).

자녀들이 법적 성인의 나이가 되면, 하나님의 권위와 정부에 부여된 권위에만 속하게 됩니다(로마서 13:1-7). 부모로서, 우리는 우리의 탕자들을 사랑과 기도로 지원할 수 있으며 자녀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한 번 마음을 돌리기만 한다면 같이 동행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혜롭게 하시기 위해 종종 자초한 고통을 사용하시는데, 올바르게 대응하는 것은 각 개인에게 달려있습니다. 부모로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우리는 지켜보고, 기도하며, 그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있으나, 성경 말씀에 따라 수행 되었을 때, 마음과 정신의 평강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다음의 말씀에 큰 위안이 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세기 18:25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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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은 결혼 관계에 있어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음은 알기 쉬운 성경적이 주고 있는 명령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에베소서 5:22-24).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도, 남편이 머리가 되는 원칙이 여전히 존재하였습니다(디모데전서 2:13).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아담의 “돕는 배필”로서 지어졌습니다(창세기 2:18-20). 하나님은 세상 권위의 여러 형태들을 세우셨습니다: 사회 정의를 집행하고 보호를 제공하는 정부; 하나님의 양을 인도하고 먹이는 목자; 그들의 아내들을 사랑하고 부양하는 남편;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을 훈계하는 아버지. 각각의 경우에 순종이 요구됩니다(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순종, 목자에 대한 양떼들의 순종,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순종 등).

‘순종’으로 번역된 헬라어, ‘hupotasso’는 동사의 계속되는 형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정부와, 목자, 그리고 또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일회성 행위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행동의 양식이 되는, 계속되어야 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 책임이 있고,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따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야고보서 1:21; 4:7). 그리고 각각의 기독교인은 겸손하게 살아야 하며 다른 사람들과 피차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에베소서 5:21). 가족단위 내에서의 순종에 관해서, 고린도전서 11:2-3은 남편은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하고(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하신 것처럼), 아내는 그녀의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혼생활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들에 관한 많은 오해가 오늘날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성경적 역할들이 제대로 이해된 경우에서 조차, 많은 사람들이 소위 여성의 “해방”을 지지하며 그 역할들을 거부하는 선택을 하는데, 이는 가족 단위가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의도를 거부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분의 의도를 즐겁게 기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나쁜 단어가 아닙니다. 순종은 열등감이나 더 적은 가치가 반영된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가치를 조금도 포기함이 없이, 끊임없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누가복음 22:42; 요한복음 5:30).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에 관한 세상의 잘못된 정보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에베소서 5:22-24:1의 다음과 같은 점들을 신중하게 주목해야 합니다. [1] 아내는, 모든 남자들이 아닌, 한 남자(그녀의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슨종의 규칙은 여성의 지위를 사회로까지 전체적으로 확장하지 않습니다. [2] 아내는 예수 그리스도께 개인적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그녀의 남편에게 기꺼이 순종해야 합니다. 여자는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남편에게 순종합니다. [3] 아내가 순종하는 예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복종입니다. [4] 아내의 능력, 재능, 또는 가치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내가 자신의 남편에게 순종한다는 사실은 그녀가 열등하다거나 가치가 덜하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한, “범사(모든 일에)”를 제외하고는, 순종의 명령을 통해 순종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자기 아내의 순종을 받기 전에 적성 검사나 지능 테스트를 통과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보다 리더십에 있어, 많은 면에서 더 나은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남편의 리더십에 복종함으로써 주님의 지시를 따르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경건한 아내는 단순하게 그녀의 거룩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말없이” 자기의 믿지 않는 남편마저도 주님께 인도할 수 있게 됩니다(베드로전서 3:1).

순종은 사랑의 리더십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어야 합니다. 남편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의 아내를 사랑하면(에베소서 5:25-33), 순종은 자기의 남편에 대한 아내의 자연적 반응이 됩니다. 하지만, 남편의 사랑 또는 그것의 부족함과 관계없이, 아내는 “주님께 하듯이” 순종하라고 명령 받고 있습니다(22절).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아내의 순종 – 하나님의 계획을 그녀가 받아들이는 것 – 이 자기의 남편에 대해 자신이 순종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 하듯이”란 비교는, 또한, 그녀가 따라야 할 더 높은 권위가 있다는 것을 아내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따라서, 남편에게 “순종”한다는 미명 하에 그녀는 사회 법이나 하나님의 법을 거역할 의무가 없습니다. 아내는 옳고 합법적이고 하나님을 기리는 일들에서 순종합니다. 물론, 아내는 학대에 대해서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 이는 옳지도, 합법적이지도, 하나님을 기리는 것도 아닙니다. 학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순종’의 원칙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고 악을 장려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의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은 남편이 이기적이 되고 횡포를 부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사랑하라이고(25절), 남편은 하나님 앞에 그 명령을 이행할 책임이 있습니다. 남편은 지혜롭고, 자비롭게, 그리고 자신이 해명해야 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남편의 권위를 행사해야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해 사랑을 받는 것처럼 아내가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면, 순종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5:24는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혼에 있어, 순종은 남편에게 명예와 존경을 가져다 주고(에베소서 5:33 참조) 남편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는 마음가짐입니다. 이것은 가족이 어떻게 작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님께서의 지혜로우신 계획입니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 성경 주석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여자는 아담의 옆구리로 만들어졌다. 여자는 남자를 지배하기 위해 남자의 머리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남자에 의해 짓밟히도록 남자의 발로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오히혀 남자와 동등 하라고 남자의 옆구리고 만들어 졌고, 남자의 팔 아래에서 보호되고, 그리고 사랑 받기 위해 남자의 심장에 가까운 곳에서 만들어졌다.” 에베소서 5:19-33에 있는 남편과 아내에 대한 명령의 바로 다음 단락은 성령충만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믿는 자들은 예배하고(5:19), 감사하며(5:20), 복종해야 합니다(5:21). 그리고는 바울은 이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한 생각의 뒤를 이어 22-24절을 통해 그것을 아내들에게 적용시킵니다. 아내는 여자들이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성경은 결코 이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결혼 관계가 잘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시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창세기 1:28).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안정적인 환경으로서의 결혼이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습니다. 슬프게도, 아이들은, 오늘날, 때로는 귀찮고 부담스러운 존재로 간주됩니다. 아이들은 사람들의 경력과 경제적 목표 달성을 막고 있고, 사회적으로는 “우리의 스타일을 방해”합니다.” 자주, 이런 유형의 이기심이 산아제한의 원인이 됩니다.

일부 산아제한의 이면에 있는 자기 중심적인 것과는 달리, 성경에서는 아이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제시합니다(창세기 4:1; 창세기 33:5). 아이들은 주님의 유산입니다(시편 127:3-5). 아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축복입니다(누가복음 1:42). 아이들은 노인의 면류관입니다(잠언 17:6). 하나님께서는 불모의 여성을 아이들을 가지게 함으로써 축복하십니다(시편 113:9; 창세기 21:1-3; 25:21-22; 30:1-2; 사무엘상 1:6-8; 누가복음 1:7, 24-25). 하나님게서는 모태에서 아이들을 만드십니다(시편 139:13-16). 하나님께서는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을 아십니다(예레미야 1:5; 갈라디아서 1:15).

성경에서, 산아제한을 특별히 책망하는 것으로 가장 근접하에 보이는 글은 창세기 38장에 있는 유다의 아들 에르와 오난의 이야기입니다. 에르는 다말이라는 이름의 여자와 결혼하였지만 그가 사악함으로 주님은 그를 죽였고, 다말은 남편도 아이들도 없이 남겨집니다. 다말은 신명기 25:5-6의 역연혼(죽은 자의 형이나 아우가 그 미망인과 결혼하는 관습)의 율법에 따라 에르의 형제인 오난에게 결혼을 통해 주어졌습니다. 오난은 그가 낳을지 모를, 그리고 그의 형제를 대신하는 어느 자녀에게도 자신의 재산이 나뉘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피임의 가장 오래된 형태인 사정을 참는 방법을 실행하였습니다. 창세기 38:10은 말씀합니다;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오난의 동기는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는 다말과 관계했지만, 그의 율법적 의무인 죽은 형제를 위해 계승자 만드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이 단락은 하나님께서 산아제한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증거로 종종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산아제한의 행위가 주님께서 오난을 죽이신 명쾌한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행위 뒤에 감추어진 오난의 이기적인 동기였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해서가 아닌, 하나님께서 아이들을 보시는 방식대로 그들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긴 해도, 성경은 산아제한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용어의 정의에 의하면, 산아제한은 단지 임신의 반대입니다. 옳고 그름을 정하는 것은 산아제한의 행위 그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오난의 경우로부터 배운바대로, 옳고 그름을 정하는 것은 피임 뒤에 감추어진(산아 제한의)동기입니다. 만일 부부가 자신들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취하기 위하여 산아제한을 했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만일 부부가 그들이 더 성숙되고 경제적으로나 영적으로 준비될 때까지 일시적인 시간을 가지기 위하여 산아제한을 했다면, 당분간 산아제한을 하는 것이 어쩌면 용납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이것은 동기로 귀결됩니다.

성경은 항상 아이들을 갖는다는 것을 좋은 일로 제시합니다. 성경은 남편과 아내가 아이들을 가지는 것을 “기대”합니다. 아이들을 가질 수 없는 것은 항상 나쁜 일로 제시됩니다. 성경 속의 그 누구도 어떤 자녀들도 가지지 않으려는 욕망을 표현한 적이 없었습니다. 동시에, 제한된 시간 동안 피임을 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주장될 수 없습니다. 모든 부부들은, 언제 그들이 임신을 시도해야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자녀를 두어야 할지에 관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자녀들을 어떻게 제일 좋은 방법으로 징계하느냐의 문제는 배우기 어려운 일일 수 있으나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엉덩이 때리기 같은 물리적 징계(체벌)만이 성경이 허락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물리적 징계를 수반하지 않는 “시간 제한” 그리고 다른 처벌들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성경은 물리적 징계가 적절하고, 유익하며, 그리고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결코 아동학대를 옹호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이는 실제로 물리적 손상이 발생할 정도로 물리적 징계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적절하고 절제된 물리적 징계는 좋은 것이고 아이의 안녕과 올바른 육성에 기여합니다.

사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물리적 징계를 권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언 23:13-14; 다음 또한 참조, 13:24; 22:15; 20:30). 성경은 징계의 중요성을 강하게 강조합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생산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하고, 이 점은 우리가 어릴 때 더 쉽게 학습됩니다. 징계받지 않은 아이들은 종종 반항적으로 자라고, 권위에 대한 존중이 없으며, 그 결과, 기꺼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따르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하나님 자신도 우리를 바로 세우시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그리고 우리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회계를 촉구하시기 위해 징계를 사용하십니다(시편 94:12; 잠언 1:7; 6:23; 12:1; 13:1; 15:5; 이사야 38:16; 히브리서 12:9).

올바르고 성경의 원칙에 따라 징계를 적용하려면, 부모는 징계에 대한 성경의 조언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잠언은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언 29:15)와 같이 자녀들의 양육에 관한 풍부한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자녀를 징계하지 않은 결과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 부모가 망신을 당합니다. 물론, 징계는 자녀가 잘되기를 목표로 삼아야 하고 자녀들의 학대와 혹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분노나 불만을 배출하기 위해 사용되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징계는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가게 하기 위해 그들을 바로 잡고 훈련하는 데 사용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브리서 12:11). 하나님의 징계는, 부모와 자식간에 마치 그래야 되는 것처럼, 애정 어린 것입니다. 물리적 징계는 지속적인 물리적 손상이나 고통을 유발시키는데 사용되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물리적 처벌은 항상 그리고 즉시, 남자/여자 아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들도록 위로가 뒤따라야 합니다. 이런 순간들이, ‘하나님게서 우리를 사랑 하기 때문에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 같이, 부모로서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와 같이 한다’는 사실을 자녀에게 가르칠 수 있는 완벽한 때입니다.

물리적 징계 대신에 “시간 제한”과 같은 다른 징계의 형태들이 사용될 수는 없을까요? 어떤 부모들은 물리적 징계에 그들의 자녀들이 잘 반응하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어떤 부모들은 “시간 제한,” 문 밖 출입 금지, 그리고/또는 자녀들로부터 무엇을 빼앗는 것들이 행동 변화를 촉구하는 데 더 효과적인 것을 발견합니다. 정말 그런 경우라면, 어떤 경우라도, 기대하는 행동 변화를 가장 잘 일으킬 수 있는 방법들을 부모는 채택해야 합니다. 성경은 명백히 물리적 징계를 옹호하지만, 경건한 성격 형성이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정확한 방법보다, 그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이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정부가 모든 방식의 물리적 징계를 아동 학대로 분류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부모들은 정부에 보고 되고 그들의 자녀들을 뺏기는 것이 두려워 자녀들의 엉덩이도 때리지 못합니다. 만일 정부가 아이들에 대한 물리적 징계를 불법으로 규정하면 부모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로마서 13:1-7에 따르면, 부모들은 정부(권세)에 굴복해야 합니다. 정부는 하나님 말씀을 부정해서는 안되고, 성경적으로 말하면, 물리적 징계는 자녀들을 위한 최선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자녀들을 약간의 징계라도 받을 수 있는 가족의 품에 두는 것이 정부의 “관리” 하에 두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낫습니다.

에베소서 6:4는, 아버지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대신에, 그들은 자녀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은 절제되고, 올바르며, 그리고, 물론이죠, 애정 어린 물리적 징계를 포함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많은 여성들에게 있어 주님께서 부여하시는 어머니가 된다는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디도서 2:4-5에 보면 기독교인으로서의 어머니는 자신의 자녀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침을 받고 있고(디도서 2:4-5), 그렇게 해야, 어느 정도는, 자신이 섬기고 있는 주님이자 구세주께 치욕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녀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시편 127:3-5). 디도서 2:4에서, 헬라어 philoteknos(필레오테크노스) 는 자신들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말은 특별한 형태의 “어머니 사랑(모성애)”을 나타냅니다. 이 말 속에 흐르는 의미는 우리의 자녀들을 돌보고, 그들을 양육하며, 다정하게 안아 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특별한 선물로서의 각 자녀에게 따뜻한 친구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기독교인인 어머니에게 주어진 몇 가지 명령들입니다.

언제나 접할 수 있어야 함 –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신명기 6:6-7)

관여함 – 서로 소통하고, 토론하며, 생각하고, 함께 삶을 보냄(에베소서 6:4)

가르침 – 성경, 성경적 세계관(시편 78:5-6, 신명기 4:10; 에베소서 6:4)

훈련 – 기술을 개발하고 그/그녀의 장점들(잠언 22:6)이나 영적 은사들(로마서 12:3-8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자녀들 돕는 것.

훈육 – 일관되게, 성실하게, 그리고 확고하게 선을 그으면서, 주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르침(에베소서 6:4; 히브리서 12:5-11; 잠언 13:24, 19:18, 22:15, 23:13-14, 29:15-17).

양육 – 끊임없는 격려, 실패를 받아들임, 수용함, 애정, 조건 없는 사랑의 환경을 제공함(디도서 2:4, 디모데후서 1:7, 에베소서 4:29-32, 5:1-2, 갈라디아서 5:22, 베드로전서 3:8-9).

진실한 모범 – 언행일치의 삶을 사는 것, 자녀들이 경건한 삶의 본질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모범이 되는 것(신명기 4:9, 15, 23; 잠언 10:9, 11:3; 시편 37:18, 37).

성경은 모든 여성들이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결코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축복으로 어머니들이 된 사람들은 그 책임감을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의 삶들에 있어 독특하고 주요한 역할을 가집니다.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허드렛일이나 불쾌한 일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임신 중에 아이를 배고, 유아기 때는 아이를 먹이고 돌보는 것처럼, 자녀들이 청소년들이거나 십대들이거나 청장년들이거나, 또는 그들 자신들의 자녀들을 가진 성년들이라 할지라도, 어머니들은 또한 자신들 자녀들의 삶에서 계속되는 역할을 합니다. 어머니의 역할이 변화되고 늘어나겠지만, 어머니가 베푸는 사랑, 보살핌, 양육, 그리고 격려는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서에서 가장 큰 계명은 이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5). 2절로 돌아가면,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말씀합니다. 신명기 6:5의 다음에서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과 자신들의 영적 성장과 안녕을 위해 주님의 방식과 말씀으로 자녀들을 가르치는 데에 부지런해야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성서의 계명들에 순종하였던 아버지는 그냥 그대로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를 잠언 22:6으로 이끕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가르치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녀에게 주는 첫 번째 지시인데, 즉, 조기교육을 가리킵니다. 가르치는 것은 그들이 의도하는 삶의 방식을 자녀들에게 명확하게 하기 위해 계획됩니다. 자녀의 조기 교육을 이런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에베소서 6:4는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두 방식 모두로 말하여진, 아버지에 대한 지침을 요약한 것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 구절의 부정적인 부분은 아버지가 그의 혹독함, 부당함, 편애, 또는 부당한 권위의 행사로 말미암아 자신의 자녀들의 부정적 성향을 조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자녀를 향한 거칠고 무리한 행동은 오직 마음에 악을 육성하게 할 것입니다. “노엽게 하다”라는 단어는 “짜증나게 하다, 몹시 화나게 하다, 불쾌하게 만들다, 또는 자극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방법에 의해 야기됩니다 – 혹독함, 부당함, 엄격함, 거침, 잔인한 요구들, 불필요한 규제, 그리고 독재적인 권위에서 나오는 이기적인 고집. 이렇게 노엽게 하는 것은, 자녀들이 어쩌면 그들의 부모들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면서, 역반응, 자녀들의 애정을 죽임, 거룩함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감소시키는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현명한 부모는 사랑과 온유로, 순종을 호감이 가고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에베소서 6의 긍정적인 부분은 포괄적인 방향으로 표현됩니다 – 아이들을 교육하고, 양육하며,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그들의 행위를 발전시키라. 이것은 교육과 훈육의 전 과정입니다. “훈계”란 단어는 아이들에게 잘못된 것들(구체적으로)과 의무들(책임들)을 생각나게 한다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 아버지는 정말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명령과 훈계의 전 과정은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꾸짖으시는 것이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권위가 아이들의 마음, 생각, 그리고 양심에 지속적이고 즉각적으로 와 닿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인 아버지는 진실과 의무를 결정하는 궁극적 권위로서 자기 자신을 제시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교육의 목표들은 모든 것들이 행해지는데 있어 따라야 하는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을 교사로 그리고 지도자로 삼을 때 가장 잘 달성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아이가 잘할 때 주기 위한 사과를 회초리 옆에 두라”고 말했습니다. 훈육은 많은 기도와 함께 주의 깊은 관심과 지속적인 훈련으로 행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한 징벌, 훈육, 그리고 조언은, 책망과 격려 모두를 가져다 주는, “훈계”의 핵심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온 지시는 기독교적 경험의 학교에서 배우게 되고, 부모에 의해 집행됩니다 – 주로 아버지에 의해, 그러나 또한, 어머니의 관리하에. 기독교적 훈육은 아이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자라고, 부모님의 권위를 존중하며, 기독교적 기준을 알고, 자기 절제의 습관을 가지면서 자랄 수 있게 하는데 필요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디모데후서 3:16-17). 아버지의 첫 번째 책임은 자기 자녀들이 성경에 익숙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아버지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들과 방법들은 각양각색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역할 모델에 충실하면서, 아이들이 하나님의 뜻에 관해 배운 것들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어디로 가든, 삶의 전반에 걸쳐 그들을 좋은 위치에 처하게 할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부모 노릇은 힘들고 도전적인 모험일 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하는 것 중에 가장 보람되고 성취감이 드는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남자와 여자로 키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많은 언급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것은 자녀들에게 하나님 말씀에 관한 진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더불어 그분의 명령에 우리 자신들이 순종함으로 경건한 본보기가 되면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신명기 6:7-9의 명령과 똑같이 가르침에 있어, 신명기 6:7-9의 명령에 주의를 기우려야 합니다. 이 문장은 그러한 가르침의 지속적인 특성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항상 수행되어야 합니다 – 집에서나, 길에서나, 밤이나, 아침이나. 성경적 진리는 우리 가정들의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명령들의 원칙들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일요일 아침이나 기도만을 위해 따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게 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직접적인 가르침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운다 할지라도, 그들은 우리를 바라봄으로써 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우리의 역할들을 먼저 인지해야 합니다. 남편들과 아내들은 상호간에 서로 존중하고 순종해야 합니다(에베소서 5:21).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위해 위계를 세우셨습니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린도전서 11:3). 우리는 아내가 그녀의 남편보다 열등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보다 열등하지 않으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위에 대한 순종 없이는, 질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정의 머리로서 남편의 역할은 그리스도께서 희생적으로 교회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자신의 아내를 자기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에베소서 5:25-29).

이러한 사랑의 리더십에 응하여, 아내가 자신의 남편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에베소서 5:24; 골로새서 3:18). 아내의 주요한 책임은 자신의 남편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지혜롭고 정결하게 살고, 가정을 돌보는 것입니다(디도서 2:4-5). 여성들은 천성적으로 남성들보다 자녀들을 더 잘 양육하는데, 이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자녀들의 주된 관리자들로 계획되었기 때문입니다.

징계와 훈계는 부모 노릇에 있어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잠언 13:24은 말씀합니다: “징계를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징계가 없는 가정들에서 자란 자녀들은 자신들을 원하는 곳이 없고 자신들이 가치가 없다고 느낍니다. 이들은 방황하고 자기의 절제가 부족하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반항하고 하나님을 포함한 그 누구의 권위도 존중하지 않게 됩니다.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의 생명을 망칠찌라”(잠언 19:18). 동시에, 징계는 사랑과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자녀들이 원망을 품거나, 낙심하거나, 반항적으로 자랄 수가 있습니다(골로새서 3:21). 하나님께서는 징계가 행해질 때 그것은 고통스럽지만(히브리서 12:11), 대신에,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사랑을 담은 징계를 하면 그것은 자녀에게 엄청난 유익이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

자녀들이 어릴 때, 그들을 교회의 가족으로 그리고 사역에 참여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규칙적으로 성경을 믿는 교회에 참석하고(히브리서 10:25), 당신이 말씀을 공부하는 것을 자녀들로 하여금 보게 하며, 또한 자녀들과 함께 말씀을 공부하십시오. 자녀들과 말씀을 살펴보면서 그들 주위의 세계에 대해 그들과 의견을 나누고, 일상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가르칩시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언 22:6). 좋은 부모가 된다는 모든 것은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만을 숭배하는 당신의 모범을 따라 할 자녀들을 키운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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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합니다. 그 뒤에, 창세기 2장 4절에서 또 다른, 두번째 창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창조 기사가 있었다는 생각은, 두 본문이 하나의 창조 사건을 묘사하는 것을 오해한 것입니다. 두 기사는 피조물이 만들어지는 순서에 있어서 일치하며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없습니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의 6일"(그리고 일곱째 날의 안식)을 묘사하고 있으며, 창세기 2장은 창조 주간 중 하루, 곧 여섯째 날만 다루고 있으므로 모순이 없습니다.

저자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여섯째 날까지의 시간을 순서대로 되돌아 갑니다. 저자는 창세기 1장에서 여섯 째 날에 사람을 창조된 사실을 창조의 절정 또는 최고점으로 제시합니다. 그 후 저자는 2장에서 사람의 창조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창세기 1-2 장에는 두 가지 주된 모순이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식물과 관련됩니다. 창세기 1장 11절은 하나님이 셋째 날에 식물을 창조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5절에서는 사람을 창조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식물을 창조하신 것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인 셋째 날입니까(창 1장), 아니면 사람을 창조하신 이후(창 2장)입니까? "식물"에 대한 히브리 단어는 두 구절에서 다릅니다. 창세기 1장 11절은 일반적인 식물을 가리키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창세기 2장 5절은 농사를 필요로 하는 식물, 즉 돌 볼 사람이 필요한 식물을 언급하는 좀 더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 구절들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 11절은 하나님이 식물을 창조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고 창세기 2장 5절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까지 "농경 가능한" 식물을 자라나게 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모순으로 주장되는 것은 동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4-25절은 하나님이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동물을 창조하신 것을 기록합니다. 창세기 2장 19절은 몇몇 번역본을 볼 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동물을 창조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 19-20절에 대해 멋지고 이치에 맞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미)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본문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동물을 지으시고 그 후 그 동물들을 사람에게 데리고 오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은 “주 하나님이 (이미) 모든 동물들을 지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순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섯 째 날에 동물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후 동물을 사람에게 데려오셨고 사람은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두 가지 창조 기사를 개별적으로 고려한 다음 서로 조화를 시킨다면,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창조의 과정을 묘사하시고, 창세기 2장에서는 특히 여섯 째 날의 가장 중요한 세부 내용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이는 단지 평범한 내용에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사건을 기술해 나가는 일반적인 문학적 방법으로서 여기에도 모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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