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중심의 개인주의를 극복하라
기독정보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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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0 19:03
영혼의 양식 91-44호 1991.11.03.
성서일과 ; 신6:1-9, 히7:23-28, 막12:28하-34.
제목 ; 가족 중심의 개인주의를 극복하라
어제 아침 신문에는 서로 비교가 되는 두 사람의 기사가 각각 문화면과 사회면에 실려 있었습니다. 하나는 중소 기업인으로서 많은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 왔다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주부가 자가용을 끌고 다닌다는 것이 눈꼴 사나와서 납치극을 벌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중소 기업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분의 이야기가 알려지게 된 것은 천진암 대성당 건립 공사에 5억이라는 돈을 내놓는 과정에서 드러났습니다. 신문에 난 대로 이 분의 이야기를 옮겨 보겠습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희 회사는 천진암과 같은 마을에 있습니다. 한 동네의 성당에서 좋은 일을 하려는 데 돈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어 이웃 사촌을 돕는 마음으로 조금 내놓은 것뿐입니다. 원래 우리 풍습이 그런 것 아닙니까?』
이분의 이름이 최 무웅 씨입니다. 최씨는 근처의 고학생, 소년 소녀 가장, 자식이 없는 가난한 노인 백명에게 매달 10만원 내지 6만원씩 전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학교와 군인 부대, 기타 각 기관을 수 없이 많이 돕고 있는 것입니다. 이분이 회사 돈을 가지고 이런 선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 호주머니를 털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씨가 운영하고 있는 회사의 사원들 월급여가 평균 1백 50만원 가량이랍니다. 그러니 사원들에 대한 대우도 보통이 아닙니다. 신문은 이분의 이야기를 결론 삼아 적고 있습니다. 『고생을 할만큼 해보니, 돈이란 자기 분수에 맞을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감당 못할 돈이 있다면 이웃을 위해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못 배웠지만 저도 그런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한편 또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인 강 충효라는 사람은, 현대백화점에서 과일을 사가지고 승용차에 타려던 주부인 오 아무개를 칼로 위협하고 납치극을 벌인 것입니다. 결국 남편으로부터 돈을 긁어내려다가 경찰한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만.
그런데 범인 강씨의 말이 재미있습니다. 백화점에 약을 사러 차를 몰고 갔다가 주부가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것이 순간적으로 꼴 보기가 싫어 평소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상대로 한탕 하려고 갖고 다니던 칼로 협박해 오 아무개를 납치했다는 것입니다. 더욱 가관이 아닌 것은, 범인 강씨가 캐피탈 승용차를 사느라 빚을 진데다, 교통사고를 내어 돈에 쪼들려 왔다는 것입니다. 빚을 내어 자가용을 사서 타고 다니면서도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시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대조적인 이야기입니까? 9살 때 고아가 되어 머슴살이 등 갖은 고생을 해서 돈을 모은 최씨가 그 돈을 자기만을 위하여 사용치 않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쓰고 있음에 비해서, 강씨라는 사람은 빚을 내면서까지 자가용을 사서 굴리다가 더 나은 차를 갖고 있는 사람을 시샘한 끝에 납치극을 벌이는 범행을 저지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성경의 중심 내용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 가운데서도 이웃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은 복음 전파인데, 그 복음 전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어 사랑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따라 주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려면, 나 중심 가족 중심의 생활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는 강씨와 같은 사람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은 눈꼽 만큼도 없이 제 각기 자기 중심으로 살다보면, 이 세상은 아수라장으로 변화하고 맙니다.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요, 누구 하나 믿을 수 없게 되어 총을 가지고 다녀야 할 것입니다. 총을 가지고 다닌다 해서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난데없이 강씨와 같은 사람이 나타나 총을 쏘면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러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마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첫째가는 계명이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가는 계명은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 중심의 생활이 되어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더 귀중히 여기다 보면 강씨 같은 생각을 하게 되고, 그 결과는 비극으로 끝나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런 비극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1. 많은 사람들이 이웃을, 사랑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성당 건축에 5억 원을 내놓은 최씨가 전통적인 생각인 이웃사촌 정신에 따라 많은 이웃을 도운 반면에, 납치극을 벌인 강씨는 현대산업사회의 모순에 따라 발생하고 있는 개인주의에 푹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웃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사랑을 다르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어떤 신분, 어떤 성씨를 가지고 있느냐를 구분하지를 않고 이웃에 살고 있으므로 사랑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함에 따라 이웃이 자주 바뀌게 되어 정을 붙이고 살만 하면 이사를 가버리는 바람에, 점점 이웃관계가 서먹해지고 뻣뻣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영춘 지역은 아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먼저 있던 김포만 해도, 옆집과 서로 이름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집이 아주 많았습니다. 우체부가 주인을 찾을 수 없는 편지를 가지고 와도, 그 사람이 어디 사는 누군지 몰라 어려움을 겪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방벽을 사이에 두고 이웃해 살면서도 끝내 이름을 나누지 못하고 1년을 살다가 이사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1년 동안 벽 하나 사이로 바로 이웃해 살면서 서로 얼굴을 마주치고서도 인사 없이 살다가 헤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과연 사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직장 동료나 친척들과는 사이좋게 지낼는지 모르나, 바로 이웃집 사람과 인사도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라는 말 자체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의미하는데, 정말 별 볼일 없다고 해서 인사도 할 줄 모른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무리 별 볼일 없다고 해도 최소한 인사는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인간 관계가 의리나 인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 타산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급격한 사회변동도 한 원인이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자기 중심과 가족 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내게 이익이 될 것 같으면 좀 멀더라도 접근을 시도하지만,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글자 그대로 상관하려 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최씨가 개신교 신자였다면 과연 5억이라는 돈을 천주교회 성당을 지으라고 내 놓을 수 있었을까요? 저라도 그런 결정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 단지 이웃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5억 원이라는 돈을 내 놓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돈이 있다면, 이왕이면 하고 개신 교회 예배당 짓는데 내 놓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신앙을 가짐으로써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넓이가, 넓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좁아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떤 돈이나 물질 때문에 이웃간에 서로 멀리 지내는 것은 고사하고,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 원수시 하면서 다투는 경우가 교회 안에 없지 않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은 물질 중심은 물론 아니거니와 의리나 인정을 중심한 관계도 아닌, 하나님 말씀 안에서의 인간 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죽음까지 당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예수님, 그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들로서는, 어떤 손해나 억울한 일을 당했다 했을지라도 용서 못할 원수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너희는 원수까지라도 살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참 내 제자라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믿기 이전보다 더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나 의심이 갈 때가 있습니다.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는 몰라도,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쉽게 정죄를 하거나 이단시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치 못하면 우리는 참된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해 지려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웃이 바로 ‘나 자신’ 이라 생각한다면 손해를 본다든지 억울한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에게 손해를 입혔는데, 무슨 손해라는 말입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내 것이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식을 달라고 하니, 군소리 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돈으로 몇 억을 내 놓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헌신이 좀 부족한 듯 싶습니다. 내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선뜻 돈을 내 놓는 경우가 극히 드뭅니다. 전에는 아주 잘했다는데, 이제 다시 회복되리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여기지 않고 많은 손해를 보더라도 억울해 하지 않는 신앙으로 자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2.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신명기 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근본 정신은 하나님 사랑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 말씀이란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 기울이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곧 이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7절에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부편지 10월 호에는 한국유리 회장인 최 태섭 장로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일제 시대 때 무역을 하던 중에, 말씀을 따르자면 파산을 당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쌀 6만 가마 값이 해당하는 순이익을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최 장로님은 말씀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따르고 손해 보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중국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계기가 되어 손해본 것을 메우고도 사업이 더욱 번창하게 되어 오늘의 한국유리공업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부인은 사업에서 생긴 이익을 가지고 150명의 장애자를 모아 우성원을 세우고, 벙어리 150명을 모아 구화 학교를 세워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값진 옷 한 벌, 보석 반지 하나 없이 검소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는 대우 그룹의 김 우중 회장이 우리 나라에서 가장 작은 차인 티코를 나고 다닌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일입니까? 김 회장의 어머니는 정동감리교회 권사입니다. 김 회장도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것은 아니나, 본인이 기독교 신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김 회장이 더욱 하나님 말씀 따라 물질을 선히 사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 기독신자는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것이 삶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말씀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면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 말씀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보장해 주시지만, 우상을 섬기게 되면 그 결과가 허무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고 아끼게 되면 그 결과는 번민과 고통, 후회와 아쉬움만 남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죽으심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이웃과도 화해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깨닫고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잘못된 이웃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피 대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몹쓸 죄까지 용서하신 것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 또한 용서 못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라 이웃을 진정으로 살아할 수 있으려면, 가족 중심의 개인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3. 세상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의 생활로 바꾸어야 합니다
자식이 살인죄를 짓고 감옥에 갔을지라도 그 어머니는 그 자식을 찾아갈 것입니다. 남편이 흉악한 범죄를 행하고 교도소에 있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면회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까지도 자식이나 남편처럼 생각하고 사랑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재산을 팔아다가 사업을 하던 중 실패를 하게 되어 몇 억을 손해보았다 해서 그 자식보고 돈 내놓으라고 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식구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빌어먹을 새끼, 나가 뒈져라』고 하면서 야단쳤다고 해서, 그 부모를 걸어 명예 훼손죄로 고발할 자녀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누가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욕을 한다 할지라도 참고 인내할 것을, 하나님은 원하고 있습니다.
점점 세월이 갈수록, 이 사회는 가족 중심의 개인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더욱 삭막한 사회가 되고 인간사는 맛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회는 먹을 것과 마실 것과 마실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기갈과 기근에 허덕이게 되는, 비참한 세상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어두워지고 타락해 가는 이 세상을 밝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명령하시고 있습니다. 가족 중심의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이란 하나도 없음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꾸어 가야 합니다. 누구랄 것 없이 우리 모두가 내 것을 내놓아 주의 사랑을 실천하게 되면, 분명히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께서 크신 축복으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세상은 아무리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습니다. 세상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이 변함에 따라 그 사람도 변하여 세상 물질과 함께 사라지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는 그 말씀이 영원하듯이,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가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성서일과 ; 신6:1-9, 히7:23-28, 막12:28하-34.
제목 ; 가족 중심의 개인주의를 극복하라
어제 아침 신문에는 서로 비교가 되는 두 사람의 기사가 각각 문화면과 사회면에 실려 있었습니다. 하나는 중소 기업인으로서 많은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 왔다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주부가 자가용을 끌고 다닌다는 것이 눈꼴 사나와서 납치극을 벌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중소 기업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분의 이야기가 알려지게 된 것은 천진암 대성당 건립 공사에 5억이라는 돈을 내놓는 과정에서 드러났습니다. 신문에 난 대로 이 분의 이야기를 옮겨 보겠습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희 회사는 천진암과 같은 마을에 있습니다. 한 동네의 성당에서 좋은 일을 하려는 데 돈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어 이웃 사촌을 돕는 마음으로 조금 내놓은 것뿐입니다. 원래 우리 풍습이 그런 것 아닙니까?』
이분의 이름이 최 무웅 씨입니다. 최씨는 근처의 고학생, 소년 소녀 가장, 자식이 없는 가난한 노인 백명에게 매달 10만원 내지 6만원씩 전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학교와 군인 부대, 기타 각 기관을 수 없이 많이 돕고 있는 것입니다. 이분이 회사 돈을 가지고 이런 선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 호주머니를 털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씨가 운영하고 있는 회사의 사원들 월급여가 평균 1백 50만원 가량이랍니다. 그러니 사원들에 대한 대우도 보통이 아닙니다. 신문은 이분의 이야기를 결론 삼아 적고 있습니다. 『고생을 할만큼 해보니, 돈이란 자기 분수에 맞을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감당 못할 돈이 있다면 이웃을 위해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못 배웠지만 저도 그런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한편 또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인 강 충효라는 사람은, 현대백화점에서 과일을 사가지고 승용차에 타려던 주부인 오 아무개를 칼로 위협하고 납치극을 벌인 것입니다. 결국 남편으로부터 돈을 긁어내려다가 경찰한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만.
그런데 범인 강씨의 말이 재미있습니다. 백화점에 약을 사러 차를 몰고 갔다가 주부가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것이 순간적으로 꼴 보기가 싫어 평소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상대로 한탕 하려고 갖고 다니던 칼로 협박해 오 아무개를 납치했다는 것입니다. 더욱 가관이 아닌 것은, 범인 강씨가 캐피탈 승용차를 사느라 빚을 진데다, 교통사고를 내어 돈에 쪼들려 왔다는 것입니다. 빚을 내어 자가용을 사서 타고 다니면서도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시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대조적인 이야기입니까? 9살 때 고아가 되어 머슴살이 등 갖은 고생을 해서 돈을 모은 최씨가 그 돈을 자기만을 위하여 사용치 않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쓰고 있음에 비해서, 강씨라는 사람은 빚을 내면서까지 자가용을 사서 굴리다가 더 나은 차를 갖고 있는 사람을 시샘한 끝에 납치극을 벌이는 범행을 저지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성경의 중심 내용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 가운데서도 이웃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은 복음 전파인데, 그 복음 전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어 사랑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따라 주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려면, 나 중심 가족 중심의 생활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는 강씨와 같은 사람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은 눈꼽 만큼도 없이 제 각기 자기 중심으로 살다보면, 이 세상은 아수라장으로 변화하고 맙니다.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요, 누구 하나 믿을 수 없게 되어 총을 가지고 다녀야 할 것입니다. 총을 가지고 다닌다 해서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난데없이 강씨와 같은 사람이 나타나 총을 쏘면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러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마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첫째가는 계명이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가는 계명은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 중심의 생활이 되어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더 귀중히 여기다 보면 강씨 같은 생각을 하게 되고, 그 결과는 비극으로 끝나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런 비극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1. 많은 사람들이 이웃을, 사랑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성당 건축에 5억 원을 내놓은 최씨가 전통적인 생각인 이웃사촌 정신에 따라 많은 이웃을 도운 반면에, 납치극을 벌인 강씨는 현대산업사회의 모순에 따라 발생하고 있는 개인주의에 푹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웃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사랑을 다르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어떤 신분, 어떤 성씨를 가지고 있느냐를 구분하지를 않고 이웃에 살고 있으므로 사랑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함에 따라 이웃이 자주 바뀌게 되어 정을 붙이고 살만 하면 이사를 가버리는 바람에, 점점 이웃관계가 서먹해지고 뻣뻣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영춘 지역은 아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먼저 있던 김포만 해도, 옆집과 서로 이름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집이 아주 많았습니다. 우체부가 주인을 찾을 수 없는 편지를 가지고 와도, 그 사람이 어디 사는 누군지 몰라 어려움을 겪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방벽을 사이에 두고 이웃해 살면서도 끝내 이름을 나누지 못하고 1년을 살다가 이사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1년 동안 벽 하나 사이로 바로 이웃해 살면서 서로 얼굴을 마주치고서도 인사 없이 살다가 헤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과연 사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직장 동료나 친척들과는 사이좋게 지낼는지 모르나, 바로 이웃집 사람과 인사도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라는 말 자체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의미하는데, 정말 별 볼일 없다고 해서 인사도 할 줄 모른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무리 별 볼일 없다고 해도 최소한 인사는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인간 관계가 의리나 인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 타산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급격한 사회변동도 한 원인이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자기 중심과 가족 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내게 이익이 될 것 같으면 좀 멀더라도 접근을 시도하지만,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글자 그대로 상관하려 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최씨가 개신교 신자였다면 과연 5억이라는 돈을 천주교회 성당을 지으라고 내 놓을 수 있었을까요? 저라도 그런 결정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 단지 이웃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5억 원이라는 돈을 내 놓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돈이 있다면, 이왕이면 하고 개신 교회 예배당 짓는데 내 놓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신앙을 가짐으로써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넓이가, 넓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좁아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떤 돈이나 물질 때문에 이웃간에 서로 멀리 지내는 것은 고사하고,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 원수시 하면서 다투는 경우가 교회 안에 없지 않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은 물질 중심은 물론 아니거니와 의리나 인정을 중심한 관계도 아닌, 하나님 말씀 안에서의 인간 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죽음까지 당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예수님, 그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들로서는, 어떤 손해나 억울한 일을 당했다 했을지라도 용서 못할 원수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너희는 원수까지라도 살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참 내 제자라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믿기 이전보다 더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나 의심이 갈 때가 있습니다.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는 몰라도,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쉽게 정죄를 하거나 이단시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치 못하면 우리는 참된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해 지려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웃이 바로 ‘나 자신’ 이라 생각한다면 손해를 본다든지 억울한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에게 손해를 입혔는데, 무슨 손해라는 말입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내 것이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식을 달라고 하니, 군소리 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돈으로 몇 억을 내 놓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헌신이 좀 부족한 듯 싶습니다. 내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선뜻 돈을 내 놓는 경우가 극히 드뭅니다. 전에는 아주 잘했다는데, 이제 다시 회복되리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여기지 않고 많은 손해를 보더라도 억울해 하지 않는 신앙으로 자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2.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신명기 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근본 정신은 하나님 사랑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 말씀이란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 기울이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곧 이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7절에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부편지 10월 호에는 한국유리 회장인 최 태섭 장로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일제 시대 때 무역을 하던 중에, 말씀을 따르자면 파산을 당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쌀 6만 가마 값이 해당하는 순이익을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최 장로님은 말씀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따르고 손해 보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중국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계기가 되어 손해본 것을 메우고도 사업이 더욱 번창하게 되어 오늘의 한국유리공업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부인은 사업에서 생긴 이익을 가지고 150명의 장애자를 모아 우성원을 세우고, 벙어리 150명을 모아 구화 학교를 세워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값진 옷 한 벌, 보석 반지 하나 없이 검소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는 대우 그룹의 김 우중 회장이 우리 나라에서 가장 작은 차인 티코를 나고 다닌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일입니까? 김 회장의 어머니는 정동감리교회 권사입니다. 김 회장도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것은 아니나, 본인이 기독교 신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김 회장이 더욱 하나님 말씀 따라 물질을 선히 사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 기독신자는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것이 삶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말씀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면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 말씀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보장해 주시지만, 우상을 섬기게 되면 그 결과가 허무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고 아끼게 되면 그 결과는 번민과 고통, 후회와 아쉬움만 남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죽으심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이웃과도 화해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깨닫고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잘못된 이웃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피 대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몹쓸 죄까지 용서하신 것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 또한 용서 못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라 이웃을 진정으로 살아할 수 있으려면, 가족 중심의 개인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3. 세상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의 생활로 바꾸어야 합니다
자식이 살인죄를 짓고 감옥에 갔을지라도 그 어머니는 그 자식을 찾아갈 것입니다. 남편이 흉악한 범죄를 행하고 교도소에 있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면회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까지도 자식이나 남편처럼 생각하고 사랑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재산을 팔아다가 사업을 하던 중 실패를 하게 되어 몇 억을 손해보았다 해서 그 자식보고 돈 내놓으라고 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식구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빌어먹을 새끼, 나가 뒈져라』고 하면서 야단쳤다고 해서, 그 부모를 걸어 명예 훼손죄로 고발할 자녀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누가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욕을 한다 할지라도 참고 인내할 것을, 하나님은 원하고 있습니다.
점점 세월이 갈수록, 이 사회는 가족 중심의 개인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더욱 삭막한 사회가 되고 인간사는 맛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회는 먹을 것과 마실 것과 마실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기갈과 기근에 허덕이게 되는, 비참한 세상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어두워지고 타락해 가는 이 세상을 밝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명령하시고 있습니다. 가족 중심의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이란 하나도 없음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꾸어 가야 합니다. 누구랄 것 없이 우리 모두가 내 것을 내놓아 주의 사랑을 실천하게 되면, 분명히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께서 크신 축복으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세상은 아무리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습니다. 세상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이 변함에 따라 그 사람도 변하여 세상 물질과 함께 사라지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는 그 말씀이 영원하듯이,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가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