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1: [솔로몬의 즉위(卽位)]
주제2: [솔로몬의 일천 번제]
(주); 왕위가 견고하여 가며 - 본절은 다윗의 뒤를 이어 통일 이스라엘의 차기(次期) 왕이 된 솔로몬이 점차 자신의 왕권과 통치 위상을 정립해 나갔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견고하여 가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하자크'(*)는 '강해지다', '강하게 하다' 또는 '단단하게 하다' 등의 뜻인데 본서 기자는 대개 왕권을 공고히 한 왕들에 대하여 이 용어를 쓰고 있다(12:13; 21:4; 27:6). 솔로몬은 자신의 대적자들을 제거하고 왕권을 견고히 하였다. 그 과정을 간략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왕위 찬탈을 노리는 아도니야 제거(왕상 2:25), (2) 제사장 아비아달의 파면 및 추방(왕상 2:26,27), (3) 군대 장관 요압 살해(왕상 2:34), (4)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 제거(왕상2:46) 등이다.
(주); 여호와께서...심히 창대케 하시니라 - 본절은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여호와께서 솔로몬과 함께 하셨기 때문임을 보여
준다(대상 29:25). 실상 솔로몬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택정(擇定) 받았는데(삼하 12:24, 25), 그러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분도
여호와이시며 또한 그를 이스라엘 모든 왕보다 뛰어나게 하신 분도 여호와이시다(12절; 왕상 3:12, 13).
성 경: [대하1:2]
주제1: [솔로몬의 즉위(卽位)]
주제2: [솔로몬의 일천 번제]
(주); 솔로몬이...명하고 - 본절과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왕상 3:4에서는 왕이 기브온에 제사드리러 갔다고 간단히 언급되어 있는 반면
본절에서는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3절)까지 온 이스라엘의 장관들 및 각 방백과 족장들을 수행한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본서가 열왕기서와 나란히 동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긴 하나 단순히 반복 기록하는데 급급해 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본서
기자는 열왕기 기자와는 다른 관점에서 동일한 사건을 평가하면서 상호 보충적 자세를취하고 있는 것이다. 본서 서론, '주제 및 특징' 참조. 한편
솔로몬의 경우와 유사하게 과거 다윗 왕도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나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려고 할 때 솔로몬과 같이 온 회중을 동원하여 상의하는
등 여호와께 대한 남다른 열심을 보였었다(대상13:1; 28:1). 따라서 여호와께 대한 열심에 있어서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서 손색이 없었음을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성 경: [대하1:3]
주제1: [솔로몬의 즉위(卽位)]
주제2: [솔로몬의 일천 번제]
(주); 온 회중과 함께 - 솔로몬이 사적(私的)으로 하지 아니하고 이와 같이 온 회중과 함께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는 사실은 종교적, 정치적으로 의의가 크다. 즉, (1) 이러한 범국가적인 행사는 솔로몬 왕정이 갖는 종교적 성격을 나타내 준다. 다시 말해 이는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서 왕으로서의 헌신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 왕과 함께 여호와와의 언약에 함께 동참한 것을 보여 준다. 삼하 5:3 주석 참조. 또한 (2) 정치적으로 이것은 온 이스라엘이 솔로몬을 중심으로 화합하게 되었으며 솔로몬 왕정이 혼란기를 지나 이제 정치적 안정권에 돌입하였음을 나타내 준다.
(주); 기브온 산당으로 갔으니...거기 있음이라 - 과거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여호와의 장막과 번제단은 솔로몬 당시 예루살렘 서북방 약 11km
지점에 위치한 기브온(Gibeon)에 있었다(대상 16:39;21:29). 이 기브온 성읍에 관한 자세한 사항들은 왕상 3:4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을 찾은 것과 관련, 열왕기 기자는 기브온 산당의 크기에 관심을 두었으나(왕상 3:4) 본서 기자는 기브온 산당을 모세가 만든 하나님의
회막과 연관시켜 생각했다. 사실 법궤는 다윗에 의해 이미 예루살렘으로 옮겨지고(4절;대상 13, 15, 16장) 그곳에 없었지만 기브온에는 아직도
모세의 번제단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곳은 국가적 종교 행사인 번제를 드리기에 적법한 장소였다. 따라서본서 기자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I, p. 305). 더욱이 당시 산당은 대체로 바알 숭배로 말미암아 오염되어 있었다. 왕상 3:3 주석 참조.
그러므로 본서 기자는 더욱더 의도적으로 산당의 부정적 개념을 약화하고 모세의 회막과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대하1:4]
주제1: [솔로몬의 즉위(卽位)]
주제2: [솔로몬의 일천 번제]
(주); 그 궤는 다윗이 이미...예비한 곳으로 메어 올렸고 - 다윗의 법궤 운반 과정은 대상 15:1-29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물론 동일 기사가 삼하
6:12-23에 나와 있긴 하나 그것은 상당히 간략하다. 그러므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려면 대상 15:1-29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1:5]
주제1: [솔로몬의 즉위(卽位)]
주제2: [솔로몬의 일천 번제]
(주); 브사렐의 지은 놋단 - 일찍이 출애굽 당시 시내 광야에서 브사렐(Bezale)이 만든 '놋단'은 조각목으로 제조한 후 그 표면을 놋으로 싼 것이었다(출 38:1, 2). 그런데 본절에서 본서 기자가 그 같은 놋단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까닭은 솔로몬의 희생 제사의 합법성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즉, 비록 기브온 산당에 법궤는 없었지만 모세 당시 만든 놋단이 여전히 안치(安置)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회막과 마찬가지로 그곳이 하나님께 제사드리기에 적절한 장소였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3절 주석 참조).
(주); 솔로몬이 회중으로 더불어 나아가서 - 여기서 솔로몬과 회중이 정확히 어디로 나아갔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가 다양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가리킬 때에 쓰는 히브리어 단어는 '다라쉬'(*)이나 (대상21:30), 본문에서는 제단 앞에 나아가는 것을
가리킬 때 쓰는 '알라'(*)가 사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단편적인 사실만 보아서는 솔로몬과 온 회중이 제단 앞에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서 기자의 진정한 의도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제단 앞에 나아간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Curtis).
성 경: [대하1:6]
주제1: [솔로몬의 즉위(卽位)]
주제2: [솔로몬의 일천 번제]
(주);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단 - 이는 5절 주석에서 다룬 견해를 뒷받침해 준다. 즉, 본절은 솔로몬과 온 회중이 회막 앞에 있는 놋단보다 여호와 앞에 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주); 일천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 - 왕상 3:4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7]
주제1: [솔로몬의 즉위(卽位)]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주); 이 밤에 하나님이...나타나사 -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일천 번제를 드리고 난 그 날밤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는 본문(7-13절)은 대체로
왕상 3:4-15의 내용과 일치한다. 그러나 두 기사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1) 열왕기서는 다윗과 관련한 솔로몬의
고백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왕상3:6, 7) 본문은 그 중 중요한 부분만 요약 기록하고 있다(8, 9절). (2) 열왕기서는 솔로몬의
지혜로움을 높이 부각시키고 있으나(왕상 3:11, 12) 본문은 그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왕임을 강조하고 있다(11, 12절). (3) 열왕기서는 솔로몬이
꿈을 꾼 것에 대해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나(왕상 3:5) 본문은 그날 밤에 주신 꿈을 계시의 차원에서 기록하고 있다(7절). (4) 열왕기서는
순종의 대가로 '네 날을 길게 하리라'(왕상3:14)는 신명기적 축복을 기록하고 있으나 본문에서는 그것이 생략되어 있다(Curtis).
성 경: [대하1:8]
주제1: [솔로몬의 즉위(卽位)]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주); 큰 은혜를 나의 아비 다윗에게 베푸시고 - '은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대개 언약에 충실한 여호와의 신실성을 의미한다(신
7:9, 12; 왕상 8:23).그런데 여기서 이는 하나님께서 이전에 다윗에게 언약하신 바, 곧 솔로몬이 다윗을 계승하여 왕이 되리라는 언약에
충실하셨음을 가리킨다(대상 22:9).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상 3:6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1:9]
주제1: [솔로몬의 즉위(卽位)]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주); 허(許)하신 것을 이제 굳게 하옵소서 - 본절에 기록된 솔로몬의 기도는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신 영원한 집과 나라와 그 나라를 이을 아들에 관한 언약의 내용과 연관된 것이다(대상 17:11-14; 22:9). 이 언약은 솔로몬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왕상 1장). 그러나 솔로몬은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언약의 궁극적이고도 완전한 성취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과론적으로 만왕의 왕 메시야로 예표되는 솔로몬이 그 실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실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삼하 7:12 주석 참조.
(주); 땅의 티끌같이 많은 백성의 왕 -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창13:6; 22:17)의 잠정적인 성취를 나타냄과 동시에 아브라함의
언약과 다윗 언약간의 언약적 연속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티끌같이 많은 백성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셨다. 그리고 그와 동일한 언약은 구속(救贖)역사의 진행 과정 속에서 다윗에게도 새롭게 주어져(삼하 7:8-16; 왕상 8:25) 솔로몬때에 이르러
일차적인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는 만 백성의 왕이 되심으로써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되었다(계 17:14). 이러한 의미에서 솔로몬이 백성의 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었음을 분명히 시사해
준다.
성 경: [대하1:10]
주제1: [솔로몬의 즉위(卽位)]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주); 지혜와 지식 - 여기서 '지혜'(*, 호크마)는 단순히 기교적인 지식이나 사변적인 학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대신 이는 하나님과 언약 백성이라는 관계를 정상적으로 유지시켜 주는 이론적인 명철함과 실천적인 슬기로움, 그리고 도덕적인 성실함과 영적인 청결함을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말이다. 이러한 지혜는 결코 세상에서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지혜, 곧 '호크마'의 근본이라 하겠다(시 111:10). 다음으로 여기서 '지식'(*, 마다)은 일반적으로 지식으로서 어떤 사실이나 사물에 대한 통찰력을 가리킨다. 그런데 일국의 통치자는 반드시 이상의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어야만 하나님의 뜻에 입각, 올바로 백성들을 통치할 수 있다. 이에 이 같은 사실을 처음부터 인식하고 있던 솔로몬은 하나님께 무엇보다도 먼저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던 것이다.
(주);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 여기서 '재판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차'(*)의 문자적인 뜻은 백성들 앞에 '출입한다'는 것이다(신 31:2;
삼상 18:13, 16; 왕상3:7). 때문에 KJV, RSV, NASB 등과 같은 영역 성경들은 이 부분을 직역하여 'go outand come in'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통치자가 백성들 가운데 출입한다는 것은 곧 백성들의 형편을 직접적으로 감찰(監察)하는 국정 수행과 다름없다. 따라서 본절 전체는 Living
Bible이 번역하고 있듯이 '누가 능히 통치하리이까'(who is able to govenby himself)로 의역(意譯)함이 바람직하다.
성 경: [대하1:11]
주제1: [솔로몬의 즉위(卽位)]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본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1)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것 :부(富)나 재물, 존영, 원수의 생명 멸하기, 장수 등은 대체로이방적인 요소이거나 솔로몬 이전의 다윗적 요소이다. 특히 원수의 피를 흘리며 전쟁하는 것은 다윗의 통치시에 자주 있었던 일이다(왕상 5:3; 대상 22:8). (2) 솔로몬이 구한 것 : 하나님의 백성을 재판하기 위한 지혜와 지식, 이것은 솔로몬이 다스릴 그 나라의 성격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주의 택한 백성을 맡아 다스릴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참된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무엇보다도 올바른 통치와 재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기 때문이다. 10절 주석 참조.
(주); 원수의 생명 멸하기 - 여기서 '원수'는 비단 개인의 원수 뿐 아니라 국가의 원수도 가리킨다. 따라서 '원수의 생명 멸하기'란 전쟁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왕상 3:11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12]
주제1: [솔로몬의 즉위(卽位)]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주); 너의 후에도 이 같음이 없으리라 -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약속하신 바는 온전히 성취되었다. 그의 지혜는 잠언서, 전도서, 아가서에서 볼 수
있고, 부(대상 22:14)와 영화(대상 29:25; 마 6:29)에 있어서도 그를 능가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Expositor'sBible Commentary). 이에 대하여
열왕기 기자는 증거하기를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왕상 4:30) 하였으며 솔로몬이 누린 부귀
영화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하였다(왕상 4:20-28).
성 경: [대하1:13]
주제1: [솔로몬의 즉위(卽位)]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주); 기브온 산당 회막 앞에서부터 - 여기서 다시 한번 저자는 산당이란 말 다음에 '회막'이란 설명어를 첨가함으로써 솔로몬 번제의 합법성을
드러내고 있다. 3절 주석 참조. 한편 왕상 3:15-28에 의하면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후 하나님께 감사제사를 드렸으며
창기(娼妓)의 아들과 관계된 그 유명한 재판을 시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장에는 그 기사가 생략된 채 다만 솔로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이스라엘을 치리 하였다고 간략히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열왕기와 역대기의 이같은 차이점은 이후에도 계속 발견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2절 주석에서 언급하였으니 참조하라.
성 경: [대하1:14]
주제1: [솔로몬의 즉위(卽位)]
주제2: [솔로몬의 부귀]
솔로몬의 부귀에 대해 상술하고 있는 14-17절은 왕상 10:26-29과 병행하고 본서9:25-28과도 부분적으로 일치한다. 한편 열왕기 저자는 기브온에서의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기사 다음에 왕상 4, 5장에서 솔로몬의 통치 기사와 그의 왕국의 번성함과 위대함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 역대기 기자는 이를 모두 생략하고 단순히 기브온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역사적인 증거만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즉, 열왕기 기자는 기브온에서의 솔로몬의 기도에 하나님이응답하신 증거 자료를 될 수 있는 대로 충분히 소개하고 있으나 역대기 기자는 종교적 성격이 빈약한 자료는 될 수 있는 대로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주); 병거와 마병 -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기록된 전쟁에서는 병거나 마병이 사용된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 영토 대부분은 산지가 많은 팔레스틴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던 고로 병거나 마병의 사용이 용이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 시대에 와서 영토가 점차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병거와 마병이 이스라엘에 소개되었다(삼하 8:4; 대상 18:4). 그리고 16, 17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솔로몬은 상인들을 통해 병거와 마병을 계속 사들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군대가 얼마나 강성했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주); 병거가 일천 사백이요 - 왕상 4:26에서는 병거를 끄는 말의 외양간이 40,000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본절에서는 병거가 1,400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같은 병행구들이 서로 다른 기록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솔로몬이 통치 초기에는 병거 1,400과 외양간 40,000을 보유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Curtis).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같은 숫자상의 차이를 필사상의 오기(誤記) 탓으로 보고 있다(Keil). 왕상 4:26 주석 참조.
(주); 병거 성에도 두고 - 솔로몬 왕의 외양간이 있는 병거성과 그밖의 성읍 건축물들은 므깃도와 하솔, 벧호론과 게셀, 바알랏 그리고 아라바의
다말 등 각처에 축조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국경 수비를 위한 것이었는데 곧 블레셋과 에돔족 따위의 침략을 막기위한 것이었다. 왕상 4:26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15]
주제1: [솔로몬의 즉위(卽位)]
주제2: [솔로몬의 부귀]
(주); 은금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 - 솔로몬이 은과 금을 그 양에 있어서 돌같이 흔하게,풍부하게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상업과 통상 무역을 통한 것이었다(왕상 10:10-22).한편 병행 구절인 9:27과 왕상 10:27에서는 '금'에 대한 언급이 없다(3:5-10; 왕상 10장) 당시 솔로몬이 은 뿐만 아니라 금도 상당히 많이 소유하고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Keil).
(주);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 백향목(cedar tree)은 나무 결이 아름다울 뿐아니라 병충해를 적게 타는 탓에 고급 건축 자재로
이용되었다. 레바논은 고대에 이러한 백향목의 산지(産地)로 유명하였는바 솔로몬은 품질이 우수한 목재인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수입하였다(2:8).
그런데 이러한 백향목이 이스라엘의 평야 지대에 있는 뽕나무(대상 27:28)와 같이 흔했다는 것은 앞의 '은금을 돌같이 흔하게'란 말과 대구를
이루는데 이 역시 솔로몬의 엄청난 부귀를 나타낸다.
성 경: [대하1:16]
주제1: [솔로몬의 즉위(卽位)]
주제2: [솔로몬의 부귀]
(주); 말들은 애굽에서 내어 왔으나 - 솔로몬은 그의 통치 기간 중 애굽의 바로의 딸과 정략(政略) 결혼을 했었다(왕상 3:1). 따라서 그 같은
혼인을 통하여 동맹 관계를 맺은 솔로몬은 애굽으로부터 말과 별거를 쉽게 수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애굽은 말과 병거의 주요
수출국이었는데, B.C.1800년경부터 애굽을 지배하였던 힉소스 왕조가 말과 병거를 애굽에 전래시켰었다. 왕상 10:29 주석 참조. 한편 구약 시대에
언급된 말은 대개 전쟁의 무기였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말을 두지 말라고 명하셨는데(신 17:16) 그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로 하여금 물질적인 군대의 힘에 의지하여 전쟁놀음을 즐기는 이방 민족과 구별된 독특한 신정 국가를 유지토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삼상
8:11). (2) 말을 사기 위해 이방인과 교류하는 것을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솔로몬이 이를 어긴 것은 말년의 그의 타락과 실패(왕상
11:1-43)를 예고해 주는 일종의 전조(前兆)였다고 볼 수 있다. 왕상 10:26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17]
주제1: [솔로몬의 즉위(卽位)]
주제2: [솔로몬의 부귀]
(주); 헷 사람의 모든 왕과 아람 왕들을 위하여도...내어 왔었더라 - 여기서 우리는 솔로몬이 말과 병거를 중계 무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병거는 약 은 7kg 정도, 말은 1.7kg 정도에 거래되었다. 그런데 솔로몬은 애굽에서 그 같은 가격으로 말과 병거를 사들인 후 그보다 비싼 가격으로
헷족과 아람족에게 되팔았던 것이다. 왕상 10:29주석 참조. 한편 헷은 성경에서 자주 가나안 사람들로 언급되고 있다(창 15:20; 출3:8, 17; 13:5
등). 그러나 그들이 거주한 지역은 주로 소아시아의 고지대나 시실리아, 갑바도기아로서 팔레스틴의 북부 지역에 해당된다. 수 9:1, 2 강해,
'가나안의 일곱 족속' 참조. 다음으로 아람은 다메섹과 마가, 게술, 르흡, 소바 등의 소왕국들로 이루어진 도시 국가이다. 삼하 8:3; 5, 9 주석
참조. 따라서 솔로몬이 거래한 나라는 애굽 뿐만 아니라 많은 이방 나라를 포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실로 이러한 교류는 훗날
솔로몬이 이방의 우상 숭배 죄에 빠져들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왕상 11:4-8).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기 기자가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하신 약속(11, 12절) 성취의 증거로서 소개하고 있는 것은 이방인들과의 교류 자체가 죄가 아니라 그러한 관계를 통하여 범죄에 빠지고
마는 인간의 사악함이 죄임을 암시해 준다.
성 경: [대하2:1]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성전 건축 준비]
본절은 히브리 원문상 1:18에 해당된다. 그리고 성전 건축 준비에 관한 기사를 다루고 있는 본문(1-18절)은 왕상 5:1-18과 병행을 이룬다. 그런데 그의 왕궁 건축에 대해서는 본장 1벌과 7:11; 8:1 등에서 간단히 언급되어 있을 뿐 왕상 7:1-12에서와 같은 상세한 기술은 하지 않고 있다.
(주); 솔로몬이...결심하니라 - 여기서 '결심하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마르'(*)는 본래 '선언하다', '공표하다', '명령하다' 등의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떤 목적을 위하여 준비하도록 명령하는 것을 가리킨다(Keil). 즉, 솔로몬은 성전과 궁궐 건축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한 것이다.
(주);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고 - 6절과 더불어 성전 건축의 목적이 잘 나타나 있는 부분이다. 즉, 솔로몬은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택하신 곳"(신 12:5)에서만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분의 영광을 기리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려 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신 12:4-14 강해. '예루살렘 중앙 성소의 의의'를 보다 참조하라.
(주); 자기 권영을 위하여 궁궐 건축하기를 - 여기서 '자기 권영을 위하여'는 히브리 원문상 '자기 왕궁을 위하여'(KJV, for his kingdom)로
번역되어야 옳다. 이는 솔로몬이 궁궐을 짓는 목적이 자기 개인의 영광이나 부(富)를 과시하는 하나님께서 강성케 하신 이스라엘 왕국의 영광을
대외적으로 증거하기 위하여 그에 걸맞는 궁궐을 지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성 경: [대하2:2]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성전 건축 준비]
본절은 18절에서 다시 반복 언급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다만 역대기 저자가 17, 18절에 근거하여 솔로몬이 사전(事前)에 담군(擔軍) 칠만과 작벌할 자 팔만을 뽑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실상 이들은 다윗이 성전 건립을 위하여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이방 사람들 중에서 이미 선발해 놓은 역꾼들이었다(대상 22:2). 솔로몬은 이들 외에도 이스라엘인과 이방인 중에서 일을 감독할 관리 삼천 여명을 선발하였는데(왕상 5:16) 바로 본절과 18절에 언급되고 있는 삼천 육백 명의 감독들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상 5:16 주석을 참조하라.
(주); 담군 - '짐 나르는 자'(transporter)를 가리킨다. 이들은 주로 벌목한 나무나 채석한 돌을 일정한 장소에로 옮기는 일에 종사하였을 것이다.
(주); 작벌할 자 - 이의 문자적 뜻은 '나무베는 자'이다. 그러나 '작벌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차브'(*)는 나무나 돌 또는 기타 재료들을
떠내거나 베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NIV, Living Bible처럼 '채석꾼'(stonecutters)으로 번역하는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평행 구절인
왕상 5:15에도 '작벌한 자' 대신 '돌을 뜨는 자'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 경: [대하2:3]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성전 건축 준비]
(주); 두로 왕 후람 - 후람(Huram)은 열왕기에서 일명 히람(Hiram)으로 불리우고 있다(왕상 5:1). 그는 다윗과도 친근한 교분(交分)을 나누었으며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 주기도 하였다(삼하 5:11). 본절에 언급되어 있는 "당신이 전에 내 부친 다윗에게...궁궐을 건축하게 한 것"이란 바로 이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한 후람은 솔로몬과도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적어도 20년 이상 동안이었던 것 같다. 한편 두로(Tyre)는 그 자매 항구인
시돈(Sidon)에서부터 약 40km 정도 남쪽에 위치한 베니게(Phoenicia)의 항구 도시이다. 왕상 5:7-12 강해, '베니게의 고도 두로' 참조.
성 경: [대하2:4]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성전 건축 준비]
(주); 전을 건축하여...번제를 드리려 하니 - 역대기 저자는 성전을 주로 레위인들 및 제사장들과 연관시켜 생각하고 있다(대상 23:28-32).
본절에서 성전 건축 목적과 관련향 재료를 사르며(출 30:7), 떡을 진설하며(출 25:30), 여호와의 절기에 조석으로 번제를 드리는 것(민 28:1-31)
등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에 대해서 일일이 나열하고 있는 것 역시 그러한 본서 기자의 독특한 특징이다(Curtis).
성 경: [대하2:5]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성전 건축 준비]
(주);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보다 크심이라 -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신보다 높고 크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수사학적(修辭學的) 표현이지 결코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다신교(Polytheism) 사상은 아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고백은 구약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출 18:11; 신 10:17;시 135:5). 한편, 본문에서 솔로몬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얼마나 중히 여기고 있었는가를 익히 알 수 있다.
성 경: [대하2:6]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성전 건축 준비]
본절은 1절과 더불어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즉, 여호와를 전에 모시기 위하여 성전을 짓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여호와 앞에 분향하기 위하여 성전을 짓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전이 여호와를 모시어 두는 곳이 아니라 여호와를 예배하는 곳이라는 개념 또한 역대기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 이 부분은 6:18과 왕상 8:27에 기록된 솔로몬의 기도와 연관된다. 히브리인들은 '하늘'(*, 솨마임)을 '궁창' 또는 '땅의 천정'이라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하늘들의 하늘'의 문자적인 뜻은 '최고 높은 하늘'(the highest heaven)이다(Curtis). 한편 후기 유대인들은 하늘이 몇개의 층으로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고후 12:2). 따라서 '하늘들의 하늘'이란 최상층의 하늘을 지칭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무한성을 강조하는 문학적 표현이라고 할 수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상 8:27 주석을 참조하라.
(주); 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 - 이처럼 솔로몬은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심을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제한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실상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과 계획에 따라 스스로 모든 것을 초월하시기도 하시는 초월자이시며 동시에 인간과 함께하실 수도 있는
내재자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지 그러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영광돌릴 수 있을 따름이다.
성 경: [대하2:7]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성전 건축 준비]
(주); 자색 홍색 청색실로 직조하며 - 청색, 자색, 홍색실로 짠 베는 성전의 문장(門帳)을 짓는 데 사용된 것으로 나타난다(3:14). 한편 당시 두로(Tyre) 해변에서 나는 뼈고등(murex)은 자주색 물감의 재료가 되었다. 두로인들은 이 물감으로 실과 베 따위를 염색하였을 것이다.
(주); 공교한 공장(工匠) 하나를 내게 보내어 - 이처럼 솔로몬은 두로 왕 후람에게 금속을 다룰 줄 알고, 자색, 홍색, 청색실로 직조할 줄 알며 나무를 조각할 줄 아는 예술가와 같은 공장(工匠)하나를 보내어 달라고 요구했다. 솔로몬이 이러한 기능공을 요구한 이유는 성전 건축에 필요한 가공해야 할 금속과 많은 보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대상 29:2). 물론 당시 솔로몬에게도 이스라엘인 공장(工匠)은 많이 있었다(대상22: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두로 왕 후람에게 기술자 파견을 요청한 까닭은 금속을 가공하고 돌을 정교하게 조각하는 기술 등에 있어서 아직은 이스라엘의 수준이 북방 민족들보다 훨씬 열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이스라엘의 문화 수준도 그나라들보다 많이 뒤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Payne).
(주); 내 부친 다윗이...예비한 나의 공교한 공장과 함께 - 여기서 솔로몬은 성전 건축사역이 솔로몬 당대의 독자적인 사업이 아니라 선왕(先王)
다윗의 사역을 계승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다윗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예비했었다(대상
22장). 뿐만 아니라 다윗은 자신이 계시로 받은 성전의 모든 양식(form)까지도 상세하게 솔로몬에게 전수했었다(대상 28:11-19).
성 경: [대하2:8]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성전 건축 준비]
(주); 레바논에서 백향목 - 레바논의 백향목(cedar tree)은 향기가 좋고 병충해를 잘 타지 않아 옛부터 고급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거의 남벌되어 깊은 산간 지대에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Wycliffe, Expositor's Bible Commentary).1:15 주석 참조.
(주); 잣나무와 백단목 - 여기서 잣나무(fir tree)는 베니게(Phoenicia)의 노간주나무(Juniper)를 지칭하는 것 같다(Payne). 그리고 '백단목'은
'붉은 백단향 나무'(학명,Pterocarpus santalinus)를 가리키는데 원산지가 베니게가 아닌 인도와 실론이다. 이나무는 그 결이 곱고 또한 재질이
단단하여 건축 자재 뿐 아니라 가구나 악기 제조에도 자주 사용된다. 왕상 10:11 주석 참조, 그런데 본절에서 역대기 기자가 레바논에서 생산되지
않는 백단목을 여기에 삽입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은 정확한 기록이라고 볼 수가 없다(Keil, Curtis). 실제로 본절과 평행 구절인 왕상 5:6, 8에서는
백단목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성 경: [대하2:9]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성전 건축 준비]
(주); 내가 건축하려 하는 전은 크고 화려할 것이니이다 - 본절은 5절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다. 솔로몬이 이방 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와같이
여호와의 광대하심에 걸맞는 성전을 지을 것을 거듭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성전 건축에 참여할 이방인 공장(7절)에게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피력하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편 12절에 의거하면 두로 왕 후람은 솔로몬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대하2:10]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성전 건축 준비]
(주); 내가...주리이다 - 당시 이스라엘은 선왕 다윗이 정복해 놓은 광범위한 주변 국가로부터 조공과 충성을 받고 있었던 대제국이었다. 따라서 솔로몬이 마음만 먹었다면 일개 항구 도시에 불과했던 두로의 일꾼들을 강제로 노역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평화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결코 그들의 노역을 강제로 착취하거나 부당하게 대우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일꾼들의 노동력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후람에게 약조하였다. 이 같은 솔로몬의 태도는 생산 수단(자본, 기술)을 가지지 못한 유약(柔弱)한 자들에 대한 부당한 경제적 착취가 횡행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주); 밀 이만 석과...기름 이만 말 - 본절과 달리 왕상 5:11에서는 솔로몬이 두로 왕 후람에게 성전 건축이 계속되는 동안 해마다 밀 이만 석과
맑은 기름 이십 석을 준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때문에 일부 비평주의 학자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들어 역대기의 진정성(眞正性)을 의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본절에 언급된 내용물은 솔로몬이 후람에게 준 사례품(謝禮品)과는 별도로 후람의 일꾼들에게 지불한 품삯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
서두에 '당신의 벌목하는 종에게'라는 말이 언급되어 있어 더욱 분명해진다. 한편 '석'(*, 코르)은 액체 또는 고체의 용량을 재는 단위로서 1석은
약 230ℓ에 해당된다. 그리고 '말'(*, 밧)은 액체의 용량을 측정하는 단위로서 약 23ℓ에 해당된다. 왕상 5:11 주석 참조. 따라서 밀 이만 석, 보리
이만 석, 포도주 이만 말, 기름이만 말은 대단한 수량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이러한 막대한 지출은 이스라엘 경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던
듯한데 이는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메운 멍에'(왕상12:9)라는 말에 의해서도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성 경: [대하2:11]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후람의 조력(助力) 약속]
(주); 후람이...답장하여 가로되 - 본문의 두로 왕 후람의 답장(11-16절)은 왕상 5:7-9을 기초한 것이다. 그런데 역대기 저자가 기록한 솔로몬의 서신 30절과 마찬가지로 후람왕의 답장에도 열왕기의 자료 이외의 다른 자료가 포함되어 있어서 열왕기와 함께 그 내용을 상호 보충해 주고 있다.
(주); 당신을 세워 그 왕을 삼으셨도다 - 본절에서 후람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왕으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솔로몬의 현명함과 성전 건축 의사를 칭찬하고 있다. 물론 당시 후람은 이스라엘과 확고한 결속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 했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스바 여왕도 동일한 의도로 솔로몬을 칭찬한 적이 있다(9:8). 한편 본절은 평행구절인 왕상
5:7에 비해 보다 상세한 기록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절의 내용을 통해 역대기 저자가 이방 나라의 왕 후람의 답장을 매우 의미있고 중대하게 다루고
있음을 알수 있다. 아마도 그것은 솔로몬이 성전 건축 사역에 두로인들을 동참시킨 것과 연관이있는 듯하다(7, 8, 13, 14절).
성 경: [대하2:12]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후람의 조력(助力) 약속]
(주); 여호와는 송축을 받으실지로다...하시도다 - 본절에 기록된 후람의 여호와께 대한 찬양은 왕상 5:7과 병행하지만 두 절이 모두 솔로몬을
다윗의 아들로 부각시킨 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열왕기 기자는 하나님께서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서의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주신 데 대하여
찬양하였지만 본서 기자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자로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주신 데 대하여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처럼 후람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하여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유일신(唯一神)으로 믿었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다만 그는 고대 근동인들과
마찬가지로 다신(多神) 사상에 입각,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를 많은 신 중의 한분으로 인정한 것일 뿐이다. 왕상 5:7주석 참조.
성 경: [대하2:13]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후람의 조력(助力) 약속]
(주); 공교하고 총명한 사람 - 이는 성전 건축 기술자 '후람아비'(Huramabi, 일명 '히람'으로도 불리웠음. 왕상 7:13, 14)를 가리킨다.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은 '후람아비'란 이름을 '내 부친 후람에게 속하였던 자라'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4:16에서는 '후람아비'로 바른 이름을 제시하고
있다. '후람아비'는 '나의 아버지', '나의 모사'라는 뜻의 '아비'(*)와 '진실된' 또는 '고귀한'이란 뜻의 '후람'(*)이 합성된 단어로 '나의 진실된
모사(Counsellor)'라는 뜻의 이름이다. 한편 이 후람아비는 부친이 두로인이었으나 어머니는 단(또는 납달리) 지파 사람이었다(14절; 왕상7:14).
이와 유사하게 이스라엘인의 성벽을 재건하는 데 공헌한 아닥사스다도 에스더와 이방 바사왕 아하수에로 사이에서 출생한 자이다(스 7장).
성 경: [대하2:14]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후람의 조력(助力) 약속]
(주); 이 사람은 단의 여자 중 한 여인의 아들이요 - 본절에서 후람아비의 어머니는 단지파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병행 구절인 왕상 7:14에서는 납달리 지파로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양자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그런데 추측컨대 이 여인은 본래 단 지파 출신으로 납달리 지파의 한 성읍에서 산 과부(왕상 7:14)였던 것 같다. 한편 단 지파의 태생인 이 여인이 어떻게 납달리 지파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당시 단 지파는 북쪽 라이스 지방으로 이주한 뒤 많은 단 지파 사람들이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삿 18장) 이 여인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는가 추측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왕상 7:14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주); 그 아비는 두로 사람이라 - 후람아비는 두로 사람을 아버지로 한 베니게 국적(國籍) 히브리인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두로의 두 나라 일꾼들을 감독함에 있어서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제반 사항을 처리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주); 모든 기묘한 식양에 능한 자니 - 열왕기 기자와는 달리 본서 기자가 후람아비의 어머니가 단 지파 사람임을 밝히고 있는 것은 후람아비를
과거 모세 당시 성막을 세울때 브사렐의 동역자로 일했던 단 지파 사람 오홀리압(출 31:6)과 대비시키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실상 후람아비는 금은
동철과 돌과 나무와 직물을 다루며 아로새기는 일에 있어서 모세의 성막을 세운 오홀리압에 비견될 만하였다(왕상 7장).
성 경: [대하2:15]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후람의 조력(助力) 약속]
(주); 내 주의 말씀하신 - 여기서 후람이 솔로몬을 가리켜 '내 주'라고 한 것은 그가 솔로몬의 봉신(vassal)이었음을 의미한다(Curtis). 그런데 열왕기서에는 이러한 표현이 없다.
(주);밀과 보리와...보내소서 - 베니게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형성된 길고 좁은 나라이다. 그런데 그 국토는 대개 산악 지대로 이루어져 있어
임산물(林産物)은 풍부한 대신 농작물이 부족하였다. 따라서 베니게는 식량 충당을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상당량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스라엘로부터 목재와 식량 교환 제의가 들어왔으니(8-10절) 후람은 이에 기꺼이 응한 것이다.
성 경: [대하2:16]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후람의 조력(助力) 약속]
(주); 욥바 - 이곳은 예루살렘 서북방 약 56km 지점에 있는 항구 도시이다. 레바논에서 수운(水運)된 목재는 이곳에서 육로를 통해 예루살렘까지
운반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욥바에서 예루살렘까지는 평탄한 길도 있지만 언덕지고 울퉁불퉁한 길이 56km나 되었다. 따라서 정작 레바논에서
욥바까지 목재를 운반하는 것보다 욥바에서 예루살렘에까지 운반하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왕상 5:9 주석 참조.
성 경: [대하2:17]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성전 건축에 동원되는 이방인들]
본절에는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위한 역꾼을 징발(徵發)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땅에 거주한 이방 사람의 수를 조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 이방 사람 - 솔로몬 당시 이스라엘에 거주하던 이방 사람들은 이미 다윗 시대에 전쟁의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이거나 가나안 원주민들로서
이스라엘 백성 밑에서 종살이하던 사람들이었다(O. Zockler). 그런데 평행 구절인 왕상 5:13에는 이러한 이방인의 인구 조사에 대한 기사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왕상 9:20, 22에서는 이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대적했던 가나안의 남은 자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인과 같이 전쟁의 포로들이나 이방인들을 심하게 학대하고(출1:8-14) 이스라엘 사람은 사역에서 제외시키는 차별 정책을
썼다고 비난하는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해석은 옳지 않음이 분명하다(Payne, Barker).
성 경: [대하2:18]
주제1: [성전 건축 준비]
주제2: [성전 건축에 동원되는 이방인들]
(주);삼천 육백 인은 감독을 삼아 - 본절과 17절을 통해 역대기 저자는 이방인 153,600인 중에서 3,600인을 감독으로 삼았다고 세분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왕상 5:16에는 감독의 수가 3,300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숫자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즉, 솔로몬
당시 성전 건축 사역을 감독하였던 전체 감독의수는 이방인 감독 3,600명과 이스라엘인 감독 250명(8:10)으로 도합 3,850명이다. 이는 왕상 5:16에
언급된 이방인 감독 3,300명과 왕상 9:23에 언급된 감독 550명을 합친 수 3,850명과 일치한다. 그러면 전체 수에 있어서는 일치하나 각각의 수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니라 바로 '감독'을 구별하는 방법에 있어서 열왕기 기자와 역대기 기자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즉, 열왕기 기자는 계급이 낮은 감독 3,300과 높은 감독 550명으로 구별한 반면 역대기 기자는 이방인 감독 3,600과 이스라엘인 감독
250명으로 나누었기 때문이다(O. Zockler, Keil & DelitzschCommentary, vol III. p. 313). 이와같이 이방인과 이스라엘인을 엄격히 구별하는 것
또한 역대기 기자의 특징 중 하나이다(Payne). 왕상 5:16 주석 참조.
성 경: [대하3:1]
주제1: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건축 시작]
본절은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된 장소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주);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 '모리아 산'(Mt. of Moriah)은 일찍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바로 그 산이다(창 22:2). 또한 다윗이 '하나님의 전'을 짓기로 결정한 곳이기도 하다(대상 22:1). 이러한 사실은 온전한 순종으로 자기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아브라함의 신실한 제사와 솔로몬의 성전이 서로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암시해 준다. 즉, 솔로몬의 성전 역시 신령과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라는 점(요 4:20-24)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주); 오르난의 타작 마당 - 이곳은 다윗이 백성을 계수(計數)한 죄 때문에 징벌을 받을때 하나님께서 심판의 진노를 멈추신 장소이자(대상 21:15)
다윗이 번제단을 쌓았던 곳이다. 다윗은 이곳을 오르난(일명, 아라우나)으로부터 금 육백 세겔을 주고 사들였는데 이제 바로 이곳에 솔로몬의
성전이 건축되게 된 것이다(대상 21:25). 이것은 장차 진정한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택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어질
것임을 상징한다.
성 경: [대하3:2]
주제1: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건축 시작]
(주); 왕위에 나아간 지 사 년 이월 초이일에 - 왕상 6:1에 따르면 이 해는 출애굽한 지 480년째 되는 해 '시브월'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브월(the
month Ziv)은 유대 종교력으로는 2월이지만 오늘날의 양력으로 치면 4,5월로 봄철이다.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한편
솔로몬은 B.C. 970년경에 즉위한 것으로 알려지고있으니 솔로몬의 통치 4년이면 B.C. 966년경이 된다. 그런데 이때까지 성전 건축이 시작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1) 대내외적인 혼란 정국(政局)을 안정시키기까지 그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1 주석 참조. (2) 그리고
성전 건축을 위한 계획과 준비 기간도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 경: [대하3:3]
주제1: [성전 건축]
주제2: [성전의 규모와 장식]
(주); 전을 위하여 놓은 지대 - 여기서 '지대'(支臺)란 성전의 기초를 가리킨다. 건축 작업시에는 어떠한 건물을 짓던 간에 반드시 땅을 다지고 건물이 들어설 자리에 돌로써 지대를 놓는데 이는 건물의 하중(荷重) 때문에 지반(地盤)이 내려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이다.
(주); 옛적 재는 법대로...이십 규빗이며 - 히브리인들이 보통 사용하던 규빗(Cubit)은 어른의 팔꿈치에서부터 중지(中指)까지의 길이로 약
45.6cm이다. 그러나 에스겔서에 나타나는 규빗은 이보다 손바닥 폭만큼이나 더 긴 52-54cm 가량이었다(겔 40:5;43:13). 그런데 여기서는 '옛적 재는
법', 즉 이스라엘인들이 평소 사용하던 정상 규빗에 의거 성전의 지대를 측정하였음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따라서 1규빗을 45.6cm로 잡고
계산한다면 성전의 지대는 길이가 약 27.36m, 너비가 약 9.12m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왕상 6:2에는 성전의 높이도 언급되어 있는데 '삼십 규빗'
곧 13.68m이다.
성 경: [대하3:4]
주제1: [성전 건축]
주제2: [성전의 규모와 장식]
(주); 그 전 앞 낭실의...고가 일백 이십 규빗이니 - 여기서 '낭실'(*, 울람)은 성전 입구에 부속된 건물로 일종의 대기실이다. 그런데 KJV나 RSV는 이를 '현관'(porch or vestibule)으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왕상 6:2에 따르면 성전의 고(height)는 30규빗이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성전 앞에 있는 낭실의 높이가 120규빗이라는 기록은 어딘가 모순된 것 같다. 이에 대해 카일(Keil)은 그것의 높이가 120규빗이라면 그것은 낭실이라고 할 수 없으며 '망대'(*, 마그달)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망대라고 할지라도 120규빗(약 55m)이라는 와이는 건축물의 외형상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절의 '일백 이십 규빗'을 필사상의 오기(誤記)로 보고 그 높이를 낭실의 길이와 너비에 어울리게 20내지 30규빗 정도로 추측한다. 바로 이 같은 견해에 따라 히브리어 원문을 수정, 번역하고 있는 영역본 성경도 있는데 곧 NIV(The portico...twenty cubits high)이다. 왕상 6:3 주석 참조.
(주); 안에는 정금으로 입혔으며 - 이것은 평행 구절인 왕상 6:3에는 없는 기록이다. 한편 솔로몬이 성전을 정금으로 장식한 것과는 달리 훗날
요시야가 퇴락한 성전을 수리하였을 때에는 정금을 사용하였다는 언급이 없다(왕하 22:3-7). 아마도 이는 분열 왕국 기간 동안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략, 성전의 보물들을 모두 약탈해 가버렸기 때문일 것이다(왕상 14:26). 또한 이후에도 수차례 외적이 침입하여 남은 것을 몰수히
노략해 가버렸기 때문에(왕하 14:14; 18:15, 16; 24:13; 25:15) 여력이 없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성 경: [대하3:5]
주제1: [성전 건축]
주제2: [성전의 규모와 장식]
(주); 그 대전 - 대전(大殿)은 성막의 '성소'(the Holy Place)에 해당되는 성전 내부의 공간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를 대전(the great house)이라 칭하고 있는 까닭은 그곳이 지성소(the Holy of Molies)와 더불어 성전 전체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은 일명 '외소'(外所)라고도 불리웠다(4:7, 8).
(주); 정금으로 입히고 - 여기서 '입히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파'(*)는 4절의 '입혔으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파'(*)와 동의어로서 다 간이 덮어 도금하는 것을 가리킨다.
(주); 종려나무 - 이것은 성경에서 주로 '번영'(시 92:12), '아름다움'(아 7:7, 8), '승리의 표'(요 12:13; 계 7:9) 등을 상징하고 있다. 때문에 이 종려는 많은 조각품이나 고대 유대의 회당에도 양각(陽刻)되었다. 왕상 6:29 주석 참조.
(주); 사슬 - 왕상 6:18, 29, 32, 35에서는 이것을 '핀 꽃'이라고 표현했다. 아마도 이는 금사슬(gold chains)의 형태가 마치 꽃장식과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금사슬은 제사장의 제복에도 달았으며(출 28:14, 22, 34, 36) 성전 기둥의 장식으로도 쓰였다(16절; 왕상 7:17). 한편
사슬은 은유적으로 '환란', '결박'(욥 36:8; 행 26:29; 히11:36)을 의미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보호하심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다(겔 16:11). 그리고 열왕기에서 이것을 '핀 꽃'으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우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로 볼 때
열왕기 기자는 성전을 묘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역대기 기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대하3:6]
주제1: [성전 건축]
주제2: [성전의 규모와 장식]
(주); 바르와임 금 - 금의 산지로 알려져 있는 바르와임(Parvaim)의 정확한 위치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지역으로는
다음과 같은 세 지역이 유력시되고 있다. (1) 예마마(Yemamah)에 있는 '샅 엘 파르웨인'(Sak el Farwein), (2)창 10:30에 나오는 '스발'(Sephar),
(3) 예멘(Yemen)에 있는 '파르와'(Farwa). 이 중에서 특히 유력시되고 있는 곳은 예멘의 '파르와'이다. 한편 유대 전승에 따르면 바르와임 산(産)
금은 불그스레한 광택을 발하였는데 속죄일에는 그 빛이 더욱 불그스레하였다고 한다(Talmud Yoma, 45a).
성 경: [대하3:7]
주제1: [성전 건축]
주제2: [성전의 규모와 장식]
(주); 들보와 문지방 - '들보'는 지붕을 받치기 위하여 벽위를 건너지는 커다란 목재를 가리킨다. 그리고 '문지방'은 문 아래 문설주 사이에 가로 놓인 목재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는 들보가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좀더 넓은 의미로 문설주는 문의 기둥까지도 가리키는 것 같다.
(주); 벽에 그룹들을 아로새겼더라 - 왕상 6:29에 의하면 성전 벽에는 비단 그룹들 뿐 아니라 종려와 핀 꽃 형상도 아로새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그룹(cherub)에 관해서는 삼상 4:1-10 강해, '그룹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성 경: [대하3:8]
주제1: [성전 건축]
주제2: [지성소 건축]
(주); 지성소(至聖所) - 이곳은 외소(外所)인 대전(大殿)과 달리 일명 내소(內所)라고도 불리웠다(4:20). 왕상 6:20에 따르면 지성소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모두 20규빗인 정육면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역대기 저자는 3절에서 성전의 고(高)에 대한 기록을 생략하였듯이 본절에서도 지성소의 고에 대한 기록을 생략하고 있다. 한편 성경에서 정육면체는 절대적 완전성을 의미한다(겔 48:20; 계 21:16). 따라서 지성소는 절대 완전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주); 정금 육백 달란트로 입혔으니 - 이 금 600달란트는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하여 예비해 두었던 금 십만 달란트 중의 일부분이다(대상 22:14).
그렇지만 1달란트(Talent)는 약 34.27kg이니 600달란트만 하여도 20.562kg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었음을 알 수있다.
성 경: [대하3:9]
주제1: [성전 건축]
주제2: [지성소 건축]
(주); 못 중수가 오십 금 세겔이요 - 1세겔(Shekel)은 약 11.4g에 해당하는 무게이다. 그러므로 50세겔은 약 570g에 지나지 않는 적은 양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지성소를 치장한 데 사용된 금이 600달란트였던 데 반해(8절) 그 금장식들을 고정시키는 '못'에는 600g도 채 안 되는 너무 적은 양의
금이 쓰인 데 대하여 일부 비평 학자들은 이 수치가 필사상의 오기(誤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카일(Keil)의 주장에 따르면 그 못은 약간의 금으로
도금한 것이라고 한다. 사실 만일 못이 정금으로만 되어 있다면 못의 역할을 할 수 없었을 터이니 이는 단단한 금속에다가 약간의 금을 도금한
것임이 분명하다.
성 경: [대하3:10]
주제1: [성전 건축]
주제2: [지성소 내의 그룹 제작]
(주); 두 그룹의 형상을 새겨 만들어 - 지성소의 그룹은 대전(大殿) 벽에 새긴 그룹 장식(7절)과 달리 직접 조각하여 만들어 세운
조상(彫像)이다(Keil). 이것은 언약궤 위에 놓인 작은 두 그룹과(출 25:18-20)는 다른 것으로서 두 그룹의 날개 길이가 모두 20규빗이나 되며
지성소 전면(全面)을 가득채웠다(11절). 왕상 6:23에 의하면 이 그룹은 감람목(olive tree)에 정금을 입혀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3:11,12]
주제1: [성전 건축]
주제2: [지성소 내의 그룹 제작]
(주); 두 그룹의 날개 길이가 모두 이십 규빗이라 - 각 그룹의 날개 하나의 길이는 5규빗이며, 두 그룹의 한쪽 끝은 양쪽 벽에 닿아 있고 다른 한쪽
끝은 두 그룹끼리 서로 맞닿아 있었다. 때문에 너비가 20규빗인 지성소 전면(8절)은 완전히 그룹들로 가득차 있었던 셈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의 임재를 암시하는 그룹들이 전면에 가득찬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의 충만함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왕상6:25에는
이 두 그룹이 모두 동일한 크기와 형상을 지녔음이 언급되어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3:13]
주제1: [성전 건축]
주제2: [지성소 내의 그룹 제작]
(주); 그 얼굴을 외소로 향하고 서 있으며 - 여기서 외소(外所)란 성소, 즉 대전을 가리킨다. 5절 주석 참조. 이처럼 솔로몬이 감람목으로 만든
그룹들은 법궤 뚜껑, 즉 속죄소 위에 올려져 있는 작은 그룹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도록 세워져 있는 것과는 달리(출 25:20) 성소를 향하여 앞으로
보도록 세워져 있었다. 한편 그룹이 정확히 어떠한 형상을 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본절과 에스겔서 등을 참조할 때 사람의 얼굴과
독수리의 날개 그리고 사자 또는 황소의 몸통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겔 1:5, 6).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이 그룹을 반인 반수(半人半獸)인 어떤
신화적인 괴물 곧 스핑크스(Sphinx)와 같은 것에 연관시켜 생각하기도 한다. 왕상 6:25, 26 주석 참조.
성 경: [대하3:14]
주제1: [성전 건축]
주제2: [지성소 내의 그룹 제작]
(주); 문장 - 이것은 모세의 성막에서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짓던 휘장에 해당되는 것이다(출 26:31). 대제사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문장을
젖히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수 없었는데, 그나마 대제사장도 일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을 뿐이었다(히 9:6-8).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
속인(俗人)들 간의 거리감을 시사할 뿐 아니라 구약 시대 제사 제도의 잠정적, 예표적 성격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이 문장을 둘로 갈랐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의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이제는 일반 그리스도인들조차 담대히 지성소 앞에까지
나아갈 수있게 되었다(히 10:19-22).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 26:33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3:15]
주제1: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기둥 건축]
(주); 고가 삼십 오 규빗이요 - 성전 앞에 분리하여 세운 이 두 기둥(왕상 7:21)의 높이에 관해서는 역대기와 열왕기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즉, 본절에는 35규빗으로 나와있는 반면 왕상 7:15에는 18규빗으로 나와 있다. 추정컨대, 이 역시 필사자가 '18'(*)을 '35'(*)로 오기(誤記)한 결과인 듯하다(Keil &Delitzsch Commentary,vol. III, p. 318). 그런데 어떤 학자(Curtis)는 주장하기를, 역대기 기자가 왕상 7:15을 텍스트로 사용하여 읽었을 때 '소는 각각 십 팔 규빗이라 각각 십 이 규빗 되는 줄을 두를 만하며'에서 둘레 12규빗을 높이로 잘못 읽어서 높이를 18+12=30규빗으로 해석했다고도 본다. 그럴 경우 기둥 꼭대기의 머리 높이가 5규빗이기 때문에 전체 높이는 35규빗이 되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는 양 기록의 차이를 조화시키기 위한 지나친 억측이라 하겠다. 왕상 7:15 주석 참조.
(주); 기둥 꼭대기의 머리가 다섯 규빗이라 - 이처럼 기둥 위에 높이 5규빗인 장식용 머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왕상 7:16; 렘 52:22 등에 의해 확인
되고 있다. 그런데 유독 왕하 25:17에서만 기둥 머리의 높이가 3규빗이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이러한 차이점 역시 필사자의 실수로 밖에는 달리
시원스럽게 설명될 수 없다. 왕상 7:16 주석 참조. 한편 이처럼 기둥에 장식용 머리가 달린 것들은 고대에 유행하던 양식(樣式)이었던 것같다.
왜냐하면 하솔(Hazor)에서도 이와 유사한 고고학적 유물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H. G. M. Williamson).
성 경: [대하3:16]
주제1: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기둥 건축]
(주); 성소같이 사슬을 만들어 - 여기서 '성소같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데비르'(*)의 문자적인 뜻은 '성소 안에'이다. 그런데 본문은 낭실
앞의 기둥들에 관한 기록이므로 여기서 성소가 언급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Keil).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바데비르'를 '카르비드'(*)로 고쳐 읽기도
한다(Betheay, Kittel). 이에 따라 본절 전체를 재해석하면 '목걸이 같은 사슬을 만들어'가 된다(Curtis). 그러나 혹자는 본문을 수정해서는 안
되며 본절은 지성소에서 낭실 앞 기둥까지 이르는 '50규빗 길이의 사슬'을 뜻한다고도 주장한다(O. Zockler).
성 경: [대하3:17]
주제1: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기둥 건축]
본절에서 성전 기둥에 명명된 두 이름 야긴과 보아스는 바로 성전의 건립 의미와 부합되는 것으로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성전을 영원히 붙드심을 나타낸다.
(주); 야긴 - '그가 세우신다'(*, 야킨)는 뜻이다. 이는 솔로몬의 성전 및 다윗왕조를 세우시고 지탱해 가시는 분이 곧 하나님이심을 상징한다.
(주); 보아스 - '그의 능력으로'(*, 보아즈)라는 뜻이다. 이는 솔로몬의 성전 및다윗 왕조에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상징한다. 왕상
7:21 주석 참조.
성 경: [대하4:1]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놋 기구 제작]
본서 저자는 본장에서 성전 기물들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희생(犧牲) 제물을 드리던 곳인 놋단에 관하여 기술 하고 있다.
(주); 놋으로 단을 만들었으니 - 열왕기서 기자는 성전 기물들을 다루면서 이 놋단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왕상 8:64; 왕하
16:14) 역대기 저자와 같은 방법으로 언급한 적은 없다. 그래서 일부 주석가들은 본절과 상응하는 구절이 열왕기 7장 22절과 23절 사이에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나 필사 과정에서 누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솔로몬의 놋단은 높이가 10규빗인바 이는 모세 시대 때 성막에 있던
것(높이 3규빗, 출 27:1)보다 7규빗 정도 더 높다(1규빗은 약 45.6cm). 그리고그 모양은 에스겔이 말했던 단과 같은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겔
43:13-17). 에스겔서에 나오는 단의 형태는 탑 모양으로 단의 기초 부분이 장, 광 각각 16규빗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져 꼭대기 부분은
12규빗의 정방형이었다(Keil). 따라서 이 놋단은 성전 울타리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성전 바깥 뜰에서 경배하던 사람들조차도 충분히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궁극적으로 광야에서 모세의 놋뱀이 높이 들리운 것처럼(민 21:4-9)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 이것을 바라보는 모든 인간들이 자신들의 죄를 애통해 하고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을 보여 준다(요 3:14, 15). 또한 단은
성소로 들어서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눈에 띄이는 성전 기물이다. 이것은 구약 시대 사람들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히 9:11-14)을 상징한다(Wycliffe,Expositor's Bible Commentary).
성 경: [대하4:2]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놋 기구 제작]
(주); 바다를 부어 만들었으니 - '바다'는 놋으로 만든 일종의 대야를 가리킨다.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이 '바다'(sea)라는 이름은 그것의
크기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 놋바다는 제사장들이 성직(聖職)을 수행하기에 앞서 손과 발을 씻는데 사용한 것으로
성막의 놋 물두멍과 대비된다(6절, 출30:18-21).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과 관련하여 중요한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곧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정결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출 30:19; 딛 3:5 주석 참조).
성 경: [대하4:3]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놋 기구 제작]
(주); 그 가장자리 아래에는 돌아가며 소 형상이 있는데 - 본절과는 달리 왕상 7:24에는 놋바다에 '소 형상'대신 '박'(gourds)이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점에 대하여 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즉, (1) 베카림(*, 소 형상)은 '페카임'(*, 박)을
잘못 필사한 것이라는 주장이다(O. Zockler, Payne). (2) 놋바다에 새겨진 소 형상이 마치 둥근 박 같은 모양이었으므로 열왕기 기자가 '박'으로
언급하였다는 주장이다(P.C. Barker). 그런데 본절의 '소 형상'은 4절에 나오는 '열 두 소'와 중복되는 듯한 감이 있어 어색하다. 따라서 위의 두
견해 중 첫 번째 견해가 비교적 더 타당성을 지닌다. 왕상 7:24 주석 참조.
성 경: [대하4:4]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놋 기구 제작]
(주); 그 바다를 열 두 소가 받쳤으니 - 이 열 두 소는 3절의 '소 형상'과는 다른 것으로 놋바다를 받쳐 주는 받침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 소들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데 이는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회막(會幕)의 사면에 각각 세 지파씩 12지파가 진을 쳤던 사실에 근거한 것
같다(민 2장; 겔 48:30-35).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왕상 7:25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4:5]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놋 기구 제작]
(주); 바다의 두께는 한 손 넓이만하고 - 여기서 '한 손 넓이'란 '손바닥 폭'(handbreadth)을 가리킨다. 이는 통상 1/6규빗(cubit)에 해당되는 길이로 대략 7.4-7.6cm이다.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주); 그 바다에는 삼천 밧을 담겠으며 - 여기서 '밧'(bath)은 액체의 양을 측정하는 부피 단위로 1밧은 약 23ℓ이다. 한편 왕상 7:26에는 본절과
달리 3,000밧이 2,000밧(약46,000)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혹자는 놋바다의 크기로 볼 때 역대기 기자의 3,000밧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한다(Curtis). 그러나 우리는 성경 기자가 의도적으로 과장하여 거짓되게 기록하였다고 보기보다는 필사자에 의해
우연히 오기(誤記)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본절의 기록은 '2'(*,벧)를 '3'(*, 깃멜)으로 혼동한 데서 발생한 잘못일 것이다. 왕상 7:26
주석 참조.
성 경: [대하4:6]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놋 기구 제작]
(주); 또 물두멍 열을 만들어 - 물두멍의 크기와 재료 등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왕상7:27-39에 상세히 나와 있으니 참조하라. 역대기 저자는
본절에서 물두멍의 세부적인 구조보다는 물두멍을 만든 목적과 쓰인 용도에 더욱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편 물두멍은 본래 모세 당시의 성막에서는
제사장들이 수족(手足)을 씻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다(출 30:18-21). 그러나 솔로몬의 성전에서는 놋바다의 양편에 다섯씩 놓여져 있어 희생 제물을
씻는 데 사용되었다. 아무튼 여기서 물두멍은 놋바다와 더불어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시 29:10)라고 시편 기자가 노래했던 것처럼
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상징하며(창 1:2, 6, 9; 시 24:2; 93:3). 바퀴와 그룹장식이 있는 물두멍 받침(왕상 7:29 이하)은
여호와가 타고 다니시는 그룹과 구름들을 상징한다(시 18:10) 고도 볼 수 있다(Curtis). 왕상 7:38 주석 참조.
성 경: [대하4:7]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금 기구 제작]
(주); 정식을 따라 금으로 등대 열을 만들어 - 모세의 성막에는 금 등대가 하나밖에 없었던 것과는 달리 솔로몬 성전에는 금 등대 열 개가 있었다. 이로 볼 때 본절은 솔로몬이 갯수에 있어서는 모세의 옛 정통을 따르지 않았으나 금 등대를 만드는 방법이나 모양에 있어서는 정식(定式)을 그대로 따랐음을 가리킴이 분명하다(출 25:31-40). 한편각 등대에는 일곱 등잔을 달 수 있는 일곱 가지가 있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도들의 심령을 밝히시는 성령의 역사를 상징하며 또한 하나님을 위해 끊임없이 빛을 발하여야 하는 교회의 임무를 상징한다(레 24:3, 4; 슥 4:2-6; 마 5:14). 이와 연관하여 생각해 볼 때, 모세 시대와 달리 솔로몬 성전에 등대 열 개가 있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시사해 준다. 즉, 모세 당시의 구원 역사가 주로 지리적, 인종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에 제한되었던 것에 반하여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신약 시대의 교회는 지역과 민족을 초월한 우주적이고도 보편적인 성격을 띠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주); 외소 안에 두었으니 - 본절과 달리 왕상 7:49에는 '내소(內所) 앞에' 정금 등대 열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거기서 '내소
앞'이라는 것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 짓는 휘장 앞을 가리키는 것으로 외소(外所) 안쪽에 해당된다. 따라서 양 기록은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 경: [대하4:8]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금 기구 제작]
(주); 또 상 열을 만들어 - 대상 28:16에도 상(床)이 분명히 복수로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의 상만 있던 모세 성막과는 달리 솔로몬 성전에는 상이 열 개 있었음이 분명하다(19 절). 이와 관련, 혹자는 솔로몬 성전에 이처럼 열 개의 상을 둔 까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도 한다. 즉, 안식일마다 진설병(陳設餠)과 상을 새것으로 바꾸어 진열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항상 새롭게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정신을 갖도록 고취하기 위함이었다는 설명이다(Payne). 출 25:30 주석 참조.
(주); 금으로 대접 일백을 만들었고 - 여기서 대접은 진설상보다는 놋단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번제물의 피를 담아 뿌리거나(출 24:6; 레 1:5) 또는
음료수나 술을 붓기 위해 사용한 그릇(출 29:40; 레 23:18)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P. C. Barker, Payne, Keil,O. Zockler).
성 경: [대하4:9]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뜰문 제작과 바다 배치]
(주); 제사장의 뜰과 큰 뜰 - 이 같은 성전의 뜰에 관해서는 왕하 21:5과 겔 40:17-19에도 언급되어 있다. 모세의 성막에는 뜰이 하나밖에 없었으나
성전에는 일반 백성들의 출입이 제한된 제사장의 안뜰(왕상 6:36)과 일반 백성들을 위한 바깥의 큰 뜰이 있었다(왕상 7:12). 이 중 세자상의 안뜰은
일명 윗뜰이라고도 불렸는데 그 이유는 온 백성들이 그 뜰에서 의식을 수행하는 제사장들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 뜰을 조금 높게 만들었기
때문이다(렘 36:10). 한편 신약 시대의 헤롯 성전에는 또 하나의 다른 뜰 곧 '여인의 뜰'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성경상의 언급은 없다(Smith).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왕상 6:36; 7:12; 왕하 21:5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4:10]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뜰문 제작과 바다 배치]
(주); 그 바다는 전 우편 동남방에 두었더라 - 놋바다의 위치에 관한 본절의 묘사는 내용상 왕상 7:39과 일치하지만 기록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난다. 즉, 열왕기 기자는 물두멍의 받침대가 각각 전 좌우편에 놓인 것과 비교하여 놋바다의 위치를 언급하였다.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그것들의
위치에 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고 단지 추가적으로 본절에서 놋바다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왕상 7:39 주석 참조.
성 경: [대하4:11]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후람이 제작한 기구들]
(주); 후람이 또 솥과 부삽과 대접을 만들었더라 - 여기서 솥은 번제단의 재를 쓸어담는 통 또는 항아리이거나(출 27:3) 아니면 희생 제물을 삶는 가마일 것이다(삼상 2:14). 다음으로 부삽은 제단에서 재를 제거하는 삽이다. 왕상 7:40 주석 참조. 한편 여기에 언급된 대접의 용도에 대해서는 이미 8절에서 언급하였으니 그곳을 보라.
(주); 이와같이 후람이...일을 마쳤으니 - 1절부터 지금까지 언급된 성전 기물들이 곧 후람의 작업 결과임을 증거하고 있는 부분이다. 한편 본절
이하 22절까지는 후람이 한작업에 대하여 다시 한번 총괄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바 그가 성전 기물들을 제작하는데 있어 얼마나 세심한 정성을
기울였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제 이와 관련, 그가 제작한 성전 기물들을 도표로 정리해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성 경: [대하4:12]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후람이 제작한 기구들]
(주); 곧 기둥 둘과 - 여기서 말하는 기둥 둘은 3:15-17에 기록된 성전 앞의 두 기둥을 가리킨다.
(주); 그 기둥 꼭대기의 공 같은 머리 둘과 - 여기서 '공 같은 머리'란 기둥 맨 끝의 둥근 부분을 가리킨다. '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굴라'(*)는 본래 사발(bowl)을 의미한다.
(주); 그물 둘 - 왕상 7:17에 의하면 이 그물은 '바둑판 모양으로 얽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용도는 기둥 머리를 장식하는 것이었다.
즉, 공 같은 기둥 머리의 높이는 5규빗이었는데(왕상 7:16) 그물은 아랫 부분 1규빗 정도에 둘러 쳐져 있었고 위의 4규빗에는 활짝 핀 백합화
모양이 보조되어 있었다(왕상 7:19).
성 경: [대하4:13]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후람이 제작한 기구들]
(주); 사백 석류와 - 석류는 '풍요'의 상징으로 고대 근동 지방에서 장식용 소재로 많이 쓰였다. 한편 평행 구절인 왕상 7:20에는 "각기 석류
이백이 줄을 지었더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본서 3:16은 "석류 일백 개를 만들어 사슬에 달았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각 구절들은 얼핏
보기에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즉, 한 기둥에는 석류 백 개를 엮은 줄이 두 줄씩 걸려있었다.
그러므로 한 기둥에 석류 200개씩, 두 기둥 모두에는 석류 400개가 걸려 있었던 셈이다.
성 경: [대하4:14]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후람이 제작한 기구들]
(주); 또 받침과 - 6절에서 물두멍의 받침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을 이제 본절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역대기 기자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되는 것을 생략하거나 또는 본절처럼 종합적으로 간단히 기술하는 특징을 지닌 듯하다. 이에 반해 열왕기 기자는 물두멍 받침에 있어서 조차
모든 사항을 비교적 자세히 열거하며 기록 하였다(왕상7:27-31). 그러니 물두멍 받침에 관해서는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4:15]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후람이 제작한 기구들]
(주); 그 바다 아래 열 두 소와 - 놋바다를 받치는 받침인 열 두 소는 이미 4절에서 언급된 바 있다. 바다가 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한다면(6절 주석 참조) 소는 고대 근동에서는 '힘'과 '비옥'을 상징하며 또한 성경에서는 종종 '순종'을 상징한다. 즉, 여기서 소는 이스라엘의
순종에 따라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짐을 상징한다고볼 수 있다. 왕상 7:25 주석 참조.
성 경: [대하4:16]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후람이 제작한 기구들]
(주); 고기 갈고리 - 이것은 희생 제물을 불속에 집어 넣거나 꺼내는 데 사용되었다(출27:3). 아마도 그 형태는 삼상 2:13에 나오는 '세살 갈고리'와 동일하였을 것이다.
(주); 후람 아비 - 11절에 나오는 후람(Huram)의 별칭이다. 이의 문자적인 뜻은 '나의 아비 후람'으로 여기서 '아비'란 치리자 또는 조언자(창
45:8; 삿 17:10)를 뜻한다. 2:13 주석 참조.
성 경: [대하4:17,18]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후람이 제작한 기구들]
(주); 요단 평지 - 여기서 말하는 '요단 평지'(*, 키카르 하야르덴)는 '요단 온 들'(round district of the Jordan)을 의미하는 말로서 보통 요단 계곡의 넓은 부분을 가리킨다. 롯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은 사해를 중심한 그 일대의 광활한 지역으로서 대단히 비옥한 평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창 13:10, 11).
(주); 숙곳과 스레다 - 숙곳(Succoth)은 요단 동편에 있는 오늘날의 '텔 데이르 알라'(Tell Deir Alla)와 동일한 곳으로 얍복 강에서 북쪽으로 약
1.6km 정도 떨어져 있다. 수 13:27 주석 참조. 그리고 스레다(Zeredah)는 왕상 7:46의 사르단(Zarethan)과 같은 곳으로 오늘날 요단 서편에 있는
'에드 다미에'(ed Damieh)일 것으로 추측된다(Curtis). 이 사르단은 요단 강 입구에서 약 3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곧 여리고 북방 약
20km지점이다. 수 3:16 주석 참조. 한편 갈릴리와 사해 중간 지점의 이곳 차진 흙은 커다란 놋기물을 제조하기에 적당한 거푸집을 만들기에
용이했다(Payne). 왜냐하면 이곳의 흙이 주물을 하는 데 적합한 토질이었을 뿐 아니라 좋은 숯을 위한 나무도 풍부했기 때문이다. 왕상 7:46 주석
참조.
성 경: [대하4:19]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성전의 모든 기구]
(주); 금단 - 이는 곧 성소에 두었던 분향단을 가리킨다. 그런데 모세 성막의 분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든 것이었음에 반해(출 30:1) 솔로몬 성전의 분향단은 백향목에 정금을 입혀 만든 것이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왕상 6:20 주석 참조.
(주); 진설병 상들 - 솔로몬이 모세 당시에 비해 열 배나 늘어난 열 개의 진설병 상을 만든 사실은 이미 8절에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숫자의 증가는
비록 상징적인 것이기는 하나 오늘날 모든 성도들이 생명의 떡인 그리스도의 말씀을 풍성히 접하게 되었음을 시사해 준다(요 6:51). 보다 자세한
내용은 8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4:20]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성전의 모든 기구]
(주); 규례대로 불을 켤 정금 등대 - 출 27:20, 21에 따르면 성소의 등불은 해질녘 정한 시간에 켜고 아침에 껐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밤 동안
성소에 불을 밝힌 것은 하나님께서 어둠 가운데서도 쉬지 않고 당신 백성들을 지키심을 상징한다(시 121:3-8).
성 경: [대하4:21]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성전의 모든 기구]
(주); 순정한 금으로 만든 꽃 - 출 25:33에 따르면 이것은 등대에 부착된 장식품으로서 살구꽃 형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왕상 7:49에서는
이것이 단지 '금꽃'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이에 대해 보다 자세히 언급함으로써 이 금꽃이 도금한 것이 아닌 순수한 금으로
만든 것임을 강조해 준다.
성 경: [대하4:22]
주제1: [성전의 기구들]
주제2: [성전의 모든 기구]
(주); 문을 금으로 입혔더라 - 지성소의 문과 성소 문은 우선 감람나무와 잣나무로 만든 다음에 금으로 덧입힌 것이다(3:7; 왕상 6:31-35). 이 중
내소 곧 지성소의 문은 내실을 향해 있었으며 지성소의 문장(3:14)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편 본절과 달리 평행 구절인 왕상 7:50에는 문
대신에 문의 금돌쩌귀가 언급되어 있다. 돌쩌귀라는 것은 문짝을 여닫기 위하여 문설주와 문짝에 박아 놓은 암수 두짝의 쇠붙이이다. 열왕기 기자는
성소와 지성소의 문이 금으로 도금된 것임을 이미 기술한 적이 있다(왕상6:32-35). 때문에 본절의 병행구인 왕상 7:50에서는 돌쩌귀 부분도 금으로
되었음을 언급하였을 것이다.
성 경: [대하5:1]
주제1: [언약궤의 안치]
주제2: [성전 건축 필역(畢役)]
(주);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드는 모든 것을 마친지라 - 솔로몬의 성전은 B.C. 966년에 기공(起工)되어 B.C. 959년 8월에 완공되었다(왕상 6:38). 따라서 성전 건축에 소요된 기간은 만 7년이었다.
(주); 이에 그 부친 다윗이 드린 은과 금과 모든 기구 - 여기서 말하는 은과 금과 모든 기구(vessels)는 다윗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과 자신의 소유물들을 가리킨다(삼하8:7, 11, 12; 대상 18:7-11). 다윗은 이 모든 것들을 성전 건축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쳤다(대상 22:14, 16; 29:2-8). 그런데 본절은 그 헌물(獻物)들 중 많은 부분이 성전 건축의 경비로 지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은 것들이 있어 성전 곳간에 보관되었음을 증거해 준다. 왕상 7:51 주석 참조.
(주); 하나님의 전 곳간 - 여기서 '곳간'은 성전 바깥 벽에 잇대어 하층, 중층, 상층으로 지은 다락과 그 골방들을 가리킨다(왕상 6:5-10). 이
방들은 성전 기구 및 헌물을 보관하는 창고 뿐 아니라 성전 봉사자들이 기거하는 거처로도 이용되었다. 왕상 6:5 주석 참조.
성 경: [대하5:2]
주제1: [언약궤의 안치]
주제2: [성전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 언약궤를...메어 올리고자 하여 - 다윗 당시 예루살렘의 시온 성(일명 다윗 성)으로 옮겨진 여호와의 언약궤(삼하 6:12-19)는 이후 40여년
동안 다윗이 쳐놓은 장막 속에 그대로 안치되어 있었다. 이에 솔로몬은 성전이 완공되자 무엇보다 먼저 이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기려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족장들을 예루살렘에 소집시켰다. 즉, 솔로몬은 국가적인 중대사를 처리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각 지파 가문의 대표자들을
소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성군(聖君)의 공통된 경향인바 일찍이 다윗도 성전 건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장로들을 소집하고(대상 28:1)
성전 장식용 보물을하나님께 드린 적이 있다(대상 29:6-9). 한편 이로 볼 때 솔로몬은 과거 다윗이 언약궤를 옮길 때 당한 봉변을 생각하며(삼하
6:1-10)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언약궤 이런 계획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국가적인 대사(大事)를 통하여 온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케 하기
위한 신앙 부흥 운동을 도모했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성 경: [대하5:3]
주제1: [언약궤의 안치]
주제2: [성전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 칠 월 절기 - 여기서 칠월은 에다님월(the month Ethanim), 즉 유대 종교력 7월로서 오늘날 태양력의 9-10월에 해당된다. 그리고 칠월 절기라
함은 출애굽 광야의 장막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이자 또한 1년 동안 수고한 모든 곡식을 거두기를 다 마치면서 지키는 절기인 초막절(일명 장막절
또는 수장절)을 가리킨다. 왕상 8:2 주석 참조. 그런데 성전 건축이 완공된 것은 솔로몬 11년 불월(유대력 8월)이므로 (왕상 6:38) 언약궤를 메어
오기 위해 모인 이 칠월 절기 때의 소집은 그후 11개월이 지난 솔로몬 12년 7월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이견(異見)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은 왕상 8:1 주석에서 살펴보았으니 참조하라.
성 경: [대하5:4]
주제1: [언약궤의 안치]
주제2: [성전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 레위 사람이 궤를 메니라 - 본절과 병행하는 왕상 8:3에 따르면 언약궤를 멘 사람은 '제사장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본절과 상충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직(聖職)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역대기 기자가 이러한 부분의 기록을 소홀히 하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사실 대상
15:2, 15을 보면 역대기 기자는 레위 사람 외에 그 누구도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다는 규례를 잘 알고 있었음이 나타난다(민 4:2, 15; 신10:8).
그러므로 역대기 기자의 본절의 기록은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왕상 8:3에서의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직접 메었다기 보다는 그 일을
감독하였다고 하겠다. 본절 5절과 왕상 8:4을 보면 동일하게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것들을 메고 올라갔다'고 기록되어 있어 제사장과 레위인들
간의 이러한 상호 협력 관계를 잘 보여준다. 물론 다시 본장 7절에서는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성소는 본래 제사장들 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므로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없다. 한편 혹자는 본절과 왕상 8:3의 기록상의 차이를 두고
역대기 기자는 P문서를 더 선호하고 열왕기 기자는 J, E 문서를 더 선호한 결과라고 문서설 입장에서 해결하려고 하였다(Curtis). 그러나 문서설
자체가 가설(假說)에 지나지 않으니 이는 지나친 선입견에 의한 해석이라고 하겠다. 모세 오경 개론, '문서설'참조.
성 경: [대하5:5]
주제1: [언약궤의 안치]
주제2: [성전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 궤와 회막과 장막 안에 모든 거룩한 기구 - 여기서 '궤'는 언약궤를 위하여 세운 것(삼하 6:17; 대상 15:1)과는 다른 모세의 회막(출 40:2,
17)을 가리킨다. 당시 이회막과 '장막 안에 모든 거룩한 기구', 즉 모세 회막의 옛 기구들(놋제단, 향단, 떡상, 촛대 등, 출 36:1-39:43)은
기브온에 있었다(1:3; 대상 16:39; 21:29). 그런데 이제 언약궤와 회막, 회막의 옛 기구들은 솔로몬 성전으로 운반되었다. 왕상 8:4 주석 참조.
성 경: [대하5:6]
주제1: [언약궤의 안치]
주제2: [성전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 궤 앞에 있어 양과 소로 제사를 드렸으니 - 본절과 7절에 의거할 때 언약궤는 우선 번제단이 있는 성전 뜰에 놓여졌던 것 같다. 한편
언약궤를 옮길 때 이처럼 제사를 드리는 전통은 다윗 때에 세워졌다(대상 15:26; 16-1-3). 처음에 다윗은 제사를 드리지도 않고 함부로 언약궤를
옮기려다가 큰 비극을 초래했기 때문에(삼하 6:7) 후에 다시 제사를 드리고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겼었다(삼하 6:16). 아마도 이 사실을 잘
알고있던 솔로몬은 (1) 돌연한 사고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2)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백성들의 기쁨을 배가(倍加)키 위해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왕상 8:5 주석 참조.
성 경: [대하5:7]
주제1: [언약궤의 안치]
주제2: [성전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 내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 여기서 '내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데비르하바이트'(*)는 4:20에서 '내소'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로
'지성소'를 가리킨다. 그런데 '데비르 하바이트'의 문자적 뜻은 '말씀하시는 곳'(the oracleof the house)이다. 아마도 이는 출애굽 시에
하나님께서 지성소의 언약궤 위에 임재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워진 것 같다(출 25:22). 한편 솔로몬이 새로이
만들어 지성소에 세운 그룹과 속죄소 위의 본래의 두 그룹에 관해서는 3:11-13 주석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그러니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곳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5:8]
주제1: [언약궤의 안치]
주제2: [성전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 그 채를 덮었는데 - 여기서 '채'(pole)라는 것은 언약궤를 운반할 때는 쓰는 긴 장대를 가리킨다. 이것은 언약궤의 고리에 꿰어져 앞뒤로
길게 나와 있었다. 출25:12-15 주석 참조.
성 경: [대하5:9]
주제1: [언약궤의 안치]
주제2: [성전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 그 궤가 오늘까지 그곳에 있으며 - 언약궤는 B.C. 586년 예루살렘 멸망 당시 솔로몬 성전의 파괴와 더불어 소실(消失)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오늘까지'란 말은 에스라가 역대기를 기록하던 당시(B.C. 450년경)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본절은 왕상 8:8의
단순한 인용이다. 그러므로 '오늘까지'란 열왕기 기사(記書) 시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열왕기의 자료들은 대체로 B.C. 586년 예루살렘
멸망 이전의 기록들이다. 왕상 8:8 주석 참조.
성 경: [대하5:10]
주제1: [언약궤의 안치]
주제2: [성전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 궤 안에는 두 돌판 위에 아무것도 없으니 - 히 9:4의 기록에 따르면 언약궤 안에는 본래 십계명 두 돌판 외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출 16:32-34)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민 17:8-11)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 완공 후 언약궤를 지성소에 안치시킬 때 십계명 두 돌판밖에 없었던 것을 보면 아마 나머지 것들은 출애굽 이후 솔로몬에 이르는 동안(약 500여년) 언약궤를 이리 저리 옮기는 과정에서 분실되었던것 같다(삼상 4:11; 5:1). 왕상 8:9 주석 참조.
(주); 호렙 - 시내 산(Mt. Sinai)과 같은 의미로 쓰인 호렙 산(Mt. Horeb)은 본래 시내산의 여러 봉우리 중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후 율법을 수여하셨다(출 19, 20장). 출 3:1 주석 참조.
성 경: [대하5:11]
주제1: [언약궤의 안치]
주제2: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찬양]
(주); 제사장들이 그 반차대로 하지 아니하고 - 11-13절은 열왕기에 없는 기록들로서 솔로몬의 성전 봉헌 당시 제사장들이 행했던 의식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반차대로'라는 말은 다윗이 조직한 제사장들의 24반열을 염두에 둔 것이다(대상 24:1-19). 그런데 여기 성전
봉헌식에서는 제사장들이 반차대로 나누어 직무를 수행하지 않고 동시에 모든 제사장들이 함께 직무를 수행했다. 이때에 이와같이 규례를 무시한
이유는 성전 봉헌 의식이 너무 방대했고 따라서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요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 325).
성 경: [대하5:12]
주제1: [언약궤의 안치]
주제2: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찬양]
(주); 아삽과...형제들 - 이들은 모두 다윗에 의해 조직된 성가대원들이다(대상25:1-31). 이 가운데 아삽(Asaph), 헤만(Heman), 여두둔(Jeduthun)은 특히 성가대를 지휘하던 책임자들이다. 대상 25:1 주석 참조.
(주); 다 세마포를 입고 - 레위 지파 사람들도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세마포 겉옷을 입었다는 사실은 이미 대상 15:27에서 언급된 사항이다.
(주); 제금과 비파와 수금 - '제금'은 심벌즈의 일종이다. 그리고 '비파'와 '수금'은 모두 현악기이다. 대상 15:16 주석 참조.
(주); 나팔 부는 제사장 - 민 10:8에 따르면 과거 모세는 율례를 따라 제사장들로 하여금 은 나팔을 불게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본절의 나팔
부는 제사장 120인은 제사장의 24반열 중에서 각각 5인씩 차출한 숫자일 것이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성 경: [대하5:13]
주제1: [언약궤의 안치]
주제2: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찬양]
(주);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 이것의 문자적인 의미는 나팔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마치 한 사람인 듯이 일제히 찬양하였다는 뜻이다.
(주); 선하시도다...영원히 있도다 - 지극히 평이하고 간결한 이 찬양 속에 기독교 신앙의 정수가 드러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때로는 죄의 결과로 혹독한 징계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언약 백성으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선함과 자비는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출 19:1-6 강해, '성경의 언약' 및 '성경의 주요 언약들' 참조. 그래서 다윗을 비롯한 모든 믿음의 선조들은 본 구절과 같은 신앙을 고백해 왔다(신 28:63; 스8:22; 시 23:6; 86:5; 135:3; 애 3:25; 나 1:7 등). 이같이 기독교 신앙은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찬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시25:8; 33:5; 롬 2:4).
(주); 그 때에...구름이 가득한지라 - 성경에서 구름은 종종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상징한다(시 18:11; 사 4:5). 이 구름은 모세 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났는바 모세의 장막과 마찬가지로(출 40:34, 35) 솔로몬의 성전도 여호와께서 열납하셨음을 뜻한다. 왕상8:10 주석 참조.
성 경: [대하5:14]
주제1: [언약궤의 안치]
주제2: [성전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
(주);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검기지 못하였으니 - 본절의 적절한 해석은 '구름의 영광에 압도되어 더 이상 예식을 진행할 수 없었더라'이다(KJV). 즉,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여호와를 위한 봉사를 계속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버린 나머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신약 시대의 복음의 능력과 영광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모든 민족이 복종할 것과 종말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모든 세력들이 주의 통치에 굴복당할 것을 나타낸다(사 45:23;말 3:1, 2; 롬 14:11; 빌 2:10).
(주);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 여기서 '여호와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혹자는
여호와의 전에 가득했던 구름(13절)과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영광은 인간이 직접 대면할 수 없는 것인바(출
33:20) 구름이 여호와의 영광 자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짙은 구름은 그만치 강렬한 하나님의 영광을 반증(反證)해 주는 것일 수는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평행 구절인 왕상 8:1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6:1]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하나님이 거할 성전]
(주);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 하셨사오나 - 1, 2절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새성전으로 옮긴 후 여호와께서 성전에 임하셨음을
보고(5:13, 14) 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그런데 여호와께서 스스로 직접 본절과 같이 말씀하신 적은
없다. 다만 본절은 이전 모세 시대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던 방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여기서 '캄캄한 데'에 해당하는'아라펠'(*)은
'짙은 구름'을 가리킨다. 실제로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캄캄하고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백성들에게 말씀하셨고(출 19:9; 신 4:11), 모세의 회막에
임재하실 때로 구름 가운데 임재하셨다(출 40:34, 35; 레 16:2). 그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지존(至存)한 영광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출
33:18-23). 한편 본문 중1절과 2절을 연결시키는 접속사 '웨'(*)는 통상적으로 역접 관계를 나타내는 '그러나'로 해석되는데 이것은 1절의 내용을
부정적으로 보고 2절의 내용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즉, 다시 말하면 1절에서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근거로 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삼하 7:6에서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시길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라고 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는 사람이 지은 집에 거하지 않고 어두운 구름
가운데만 계시겠다고 말씀하셨다.그러나 이제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여호와께서 임재해 주셨으니, 이것은 장차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임하실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의 도래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마 1:18-25). 왕상 8:12 주석 참조.
성 경: [대하6:2]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하나님이 거할 성전]
(주); 거하실 전...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 - 여기서 솔로몬이 언급한 '전'은 표면적으로는 솔로몬의 성전을 가리키나 궁극적으로는 솔로몬의
성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전에(2:6) 솔로몬은 "누가 능히 하나님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이라고 명백히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상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솔로몬의 성전은 결코 하나님께서 거하실
영원한 처소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삼하 7:13에 근거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할 영원한 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즉, 이는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영원히 드러내 주는 예수 그리스도(요 1:14)와 그의 교회(요 14:23) 그리고 그의 영원한 나라(계
21:1-3)을 예표하는 것이다. 왕상 8:13 주석 참조.
성 경: [대하6:3]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회중을 위한 축복]
(주); 얼굴을 돌이켜...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니 - 여기서 '얼굴을 돌이켜'는 사실적인 의미와 상징적인 의미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이 중
전자는 솔로몬이 지금까지 성전을 향하여 섰다가 이제 백성들에게로 돌아선 것을 의미한다. 왕상 8:14 주석 참조. 그런데 후자는 이에서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본래 '얼굴을 돌이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축복하실 때 자주 언급되는 말이므로(민 6:25; 시 31:16 등) 여기에
어떤 신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다시 말하면 솔로몬은 다윗 언약의 핵심 요소인 '나라'와 '아들' 가운데(삼하 7:13, 14) 자신을
'아들'로 인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솔로몬이 백성들을 향하여 축복하였다는 것은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그의 백성들을
축복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로 볼 때 1-3절의 내용은 삼하 7장에 나오는 다윗 언약의 부분적 실현이하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삼하 7:12 주석 참조.
성 경: [대하6:4]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성전 건축의 배경]
(주); 왕이 가로되 - 본절에서 솔로몬은 다시 그리스도의 예표로서가 아닌 이스라엘의 왕이며 하나님의 백성의 자세로서 여호와를 송축하고 있다.
(주);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제 그 손으로 이루셨도다 - 여기서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이란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언약(삼하 7:14-17)을 가리킨다. 이것은 1-3절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손', 즉 '하나님의 손'이란 신인 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또는 능력을 의미한다(시 10:12; 37:24; 사 59:1). 그러므로 여기서 '그 손으로'라는
표현은 다윗의 언약이 사람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 자신에 의해 역사적인 사실로 성취 되었음을 뜻한다. 왕상 8:15 주석 참조.
성 경: [대하6:5]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성전 건축의 배경]
본절은 삼하 7:6, 7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러한 본절은 다윗의 때와 솔로몬의 때가 그 성격상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다윗의 때는 하나님의 전이 건축될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으나 솔로몬의 때는 여호와 집이 예루살렘에 세워지기에 적절했다. 이와같이 모든 일의 때와 시기는 여호와로 말미암는 것이다(전 3:1, 11).
(주); 내 이름을 둘 만한 집 - 이는 성전을 가리키는 말로서 하나님께서 성전을 중심으로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실 것을 상징한다(출 25:22). 왕상 8:16 주석 참조. 한편 오늘날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거하시는 성전이다(고전 6:19). 따라서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지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주);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였으며 - 이는 6절과 연결시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본절은 수많은 이스라엘 성읍들 중 오직 예루살렘을 택하사
성전터로 삼으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성 경: [대하6:6]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성전 건축의 배경]
(주); 예루살렘...다윗 - 히 12:22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都城)을 상징한다. 그리고 행 13:22에 따르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 나라가 새 하늘과 새 땅(계 21:1)에서 다윗으로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건설될 것을
보여 준다. 이와 관련,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도성새 예루살렘을 사모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성 경: [대하6:7]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성전 건축의 배경]
(주); 다윗이...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더니 - 다윗이 얼마나 성전 건축하기를 갈망했는가는 그가 지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시 122:1-9)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성전을 건축할 마음만 가지고 있지 않았고 성전 건축에 쓰일 많은 재료들을 손수 준비함으로써(대상 22:2-5, 14-16;
28:2; 29:2-9) 그의 진실된 마음을 표현하였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의 성전을 짓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을 기뻐하시고 성전 모든 부분의
식양(式樣)을 그에게 계시해 주셨다(대상 28:12-29). 따라서 비록 성전 건축은 솔로몬이 하였으나 그 대부분의 공로는 다윗에게 돌려도 무방할
것이다.
성 경: [대하6:8]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성전 건축의 배경]
(주);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 여기서 하나님이 칭찬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열정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일단
다윗이 품은 성전 건축 계획 그 자체는 기쁘게 여기셨던 것이다. 이는 마치 나드 향유한 옥합을 예수의 머리 위에 부어 예수의 죽으심을 미리
준비한 한 여인의 마음과 유사하다. 때문에 그때 예수께서는 "내가 좋은 일을 하였다"(막 14:6)고 그 여인을 칭찬하셨다. 한편 공동 번역에는
본절이 "네가...생각하는 것은 기특한 일이다"로 번역되어 있다.
성 경: [대하6:9]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성전 건축의 배경]
(주); 너는 그 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 대상 28:3에 따르면 다윗은 용사로서 전쟁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건축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성전은 화평과 화해를 상징하는 장소이다(마 5:23, 24; 딤전 2:8). 그러므로 타인의 피를 흘리게 한 자가 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평화의 왕인 다윗의 아들 솔로몬(그의 이름은 히브리어 '솰롬' 이란 단어와 동일한 어근에서
나온 것으로 '평화'라는 뜻이다)으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하도록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성전)가 결코 세속적인 힘이나 다툼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평화로운방법에 의해 성취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성 경: [대하6:10]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성전 건축의 배경]
(주); 여호와의 허(許)하신 대로 - 세상 만물을 지배하시고 인간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절대권이 하나님께 있으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결코 어떠한 일도 일어날수 없음을 시사해 주는 구절이다(대상 29:12).
(주); 내 부친 다윗을 대신하여...이스라엘 위에 앉고 - 솔로몬은 자신이 다윗의 위(位)를 계승한 사실을 누차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왕상 2:12;
10:9). 이는 솔로몬으로 예표되었던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사실을 상기케 한다(눅 1:27). 그리고 또 솔로몬이 다윗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위에 앉았다는 사실은 그의 왕권이 신적인 기원을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성 경: [대하6:11]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성전 건축의 배경]
(주);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 넣은 궤 - 여기서 '언약'은 과거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시내 산 언약의
요체(要諦)이자 핵심인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을 가리킨다. 이 돌판은 언약궤 속에 보관되었는데(출 25:16) 솔로몬이 그 언약궤를 새로 지은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시켰다(5:2-10). 따라서 역대기 저자가 본절을 통해 의도한 바는 솔로몬의 성전 건축의 의의 및 가치를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맺은 언약과 관련시켜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혹자는 본서 저자가 의도적으로 '시내 산 언약'이라 하지 않고 단순히
'언약'이라고 한 것은 시내 산 언약을 다윗 언약으로 완전히 대치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 보다는 본서 저자가 언약의
전반적인 흐름을 중시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장 강해를 참조하라.
성 경: [대하6:12]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왕권 보존을 위한 기도]
(주); 여호와의 단 앞에서 - 여기서 말하는 단은 번제를 드리는 놋 제단을 가리킨다(4:1). 솔로몬은 이 놋 제단 앞에 놋으로 만든 대를 세우고 그
위에 서서 이스라엘 회중을 향하여 손을 편 채 기도하였다(13절).
성 경: [대하6:13]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왕권 보존을 위한 기도]
(주); 놋으로 대를 만들었으니 - 왕상 8:22에서는 이 대(臺)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다. 여기서 '대'(*, 키요르)는 일반적으로 물동이나 물두멍 또는 단지처럼 둥근 것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단상'을 가리키는데 아마도 그 모양이 마치 물동이처럼 둥근 모양이었던 것 같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 326).
(주); 무릎을 꿇고 - 이것은 존경(왕하 1:13), 경배(롬 14:11; 빌 2:10), 겸손(마 17:14;막 10:17)의 자세를 나타낸다. 우리는 성경에서 에스라(스 9:5), 다니엘(단 6:10), 베드로(행 9:40) 등은 물론 예수께서도 종종 이처럼 무릎 꿇고 기도하셨음을 볼 수 있다(눅 22:41). 그런데 솔로몬이 이와같이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나라와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백성들 앞에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라 하겠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주);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 이러한 모습은 자신의 존재를 진솔하게 하나님께 의탁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을 구하는 기도와 자세이다(시
28:2; 63:4; 134:2). 이 같은 솔로몬의 기도 자세는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를 연상시켜 준다(마26:36-46). 왕상 8:22 주석 참조.
성 경: [대하6:14]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왕권 보존을 위한 기도]
(주); 천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 병행 구절인 왕상 8:23에는 '상천 하지(上天下地)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보다 크심이라'(2:5)는 말과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唯一性)을 강조하는 것이지 여타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왕상 8:23 주석 참조.
(주); 주의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 본절에서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실 때 그것은 주의 종들에게 곧 은혜가 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언약하에 있는
오늘날의 성도들(히 8:7-13)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는 그분의 도우시는 은혜가 영원토록
함께할 것이다.
성 경: [대하6:15]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왕권 보존을 위한 기도]
(주); 주께서...허하신 말씀을 지키시되 - 14절과 더불어 여호와께서는 인생(人生)과 같이 식언(食言)치 않으시는 분임을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다(민 23:19).
(주); 오늘날과 같으니이다 - 이에 해당하는 '카욤 하제'(*, as atthis day)는 현재 자신이 받고 있는 축복이 하나님의 언약 성취임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 같은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감사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이로 볼 때 기독교는 참으로 체험적인 종교임을 알 수 있다. 왕상 8:24 주석
참조.
성 경: [대하6:16]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왕권 보존을 위한 기도]
(주); 주께서...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셨던 언약의 말씀은 삼하 7:8-16과 대상 17:7-14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중 다윗의 후손과 관계된 조건부적 약속은 오히려 솔로몬에 대한 다윗의 유언(왕상 2:1-4)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주); 자기 길을 삼가서 - '삼가다'에 해당하는 '솨마르'(*)는 그 기본 개념이 '...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다'이다. 따라서 이는 소극적으로 조심하거나 경계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실천하는 행동적 의미를 지닌다. 왕상 8:25 주석 참조.
(주); 이제 다윗을 위하여 그 허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 - 14, 15절에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백한 솔로몬은 이제 본절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속성에 의지하여 다윗에게 말씀하신 바 언약을 보존시켜 달라고 기도한다. 여기서 우리는 좋은 기도의 본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곧 자신이 체험하고 경험한 하나님의 속성에 의지하여 기도할 때 힘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이다.
성 경: [대하6:17]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왕권 보존을 위한 기도]
(주);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 본절은 16절 후반부의 반복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시(詩)나 노래, 기도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조적 용법이다. 한편여기서 '확실하게 하옵소서'에 해당하는 '예아멘'(*)은 이미 언급되어진 사항을 확언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이미 언급되어진 사항이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셨던 '다윗 언약'(삼하 7:8-16)을 가리킨다.
성 경: [대하6:18]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주);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 여기서 '사람과 함께'란 말은 특별히 역대기 저자가 첨가한 것이다(왕상 8:27 참조). 아무튼 본절은 하나님이 인간처럼 공간적으로 제한받지 않으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 - 이의 문자적 의미는 '최고 높은 하늘'(the highestheaven)이다. 따라서 이러한 하늘조차도 하나님의 처소로서
부족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탁월성을 강조하는 문학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6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6:19]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주); 종의 기도와 간구 - '기도'에 해당하는 '테힌나'(*)는 자비와 동정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전제한 '간청'을 의미한다. 따라서 솔로몬의 본 기도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왕상 8:28 주석 참조.
(주); 주의 앞에서...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 20, 21절에 의거하면 솔로몬은 성전이 기도하는 집임을 인식하고 또 그러한 집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음을 알 수있다. 이는 예수께서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연관이 있다(사 56:7; 마 21:13).
성 경: [대하6:20]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본절에서 여호와의 전은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되고 있다. (1) 여호와가 당신 이름을 두신 곳이다. (2) 여호와께서 주야(晝夜)로 감찰 하시는
곳이다. (3) 주의 종들이 향하여 기도하는 곳이다. 이 중 (1), (2)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내재성(內在性)과 초월성(超越性)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2), (3)에서 성전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만나는 자리임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이러한 성전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예수로 말미암아 오늘날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엡 2:14).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친히 당신 자신을 가리켜 '성전보다 더 큰 이'(마 12:6)라고 지칭하기까지 하였다.
성 경: [대하6:21]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주);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들으시고 - 본절에서 과거 예루살렘 성전은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던 중보의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요 5:43; 14:6).
(주); 사하여 주옵소서 - 기도는 죄사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기도자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할 때 그를
용납하시며 그 기도에 응답하여 주신다(눅 18:9-14).
성 경: [대하6:22]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주); 이웃에게 범죄하므로 - 여기서 '범죄'란 넓게는 (1) 법률상의 죄(crime), (2) 윤리적, 도덕적 잘못들(wrongs), (3) 종교상의 죄(sin)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웃'이라는 말이 앞에 전제되어 있으므로 주로 (1)과 (2)를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이것은 십계명 중에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규정한 부분(1-4계명)보다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규정한 명령을(5-10계명) 파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출20:1-17).
(주); 맹세시킴을 받고 - 어떤 사건에 대하여 최종 판결을 내릴 수 없을 경우, 하나님께 맹세토록 한 것을 가리킨다. 즉, 예를 들면 어떤 이가 우연히 분실물을 습득한 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였을 경우, 그는 그 물건을 결코 훔친 것이 아님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여야 했다(출 22:10, 11).
(주); 이 전에 있는 주의 단 - 이는 성전 뜰에 있던 '번제단'을 가리킨다(4:1). 왕상8:31 주석 참조.
성 경: [대하6:23]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주); 주의 종들을 국문(鞠問)하사 - '국문하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파트타'(*)는 본래 단순히 '심판하다'라는 뜻보다는 더 광범위한 입법, 사법, 행정적통치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맹세자의 기도가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해내는 판단 행위를 뜻한다. 이것은 십계명 가운데 제 3계명과 관련된 것으로 거짓 맹세함으로써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자에 대하여 벌할 것을 요구하는 기도이다(출 20:7).
(주); 그 행위대로...돌리시고 -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값없이 주시지만 또한 그것과는 관계없이 인간의 행위에 따라 인간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다(시 62:12; 잠 24:12; 전12:14; 렘 17:10; 겔 18:30). 그런데 이 같은 원리는 신약 성경에도 명백히 드러난다(마 16:27; 롬 2:6; 고후
5:10; 벧전 1:17; 계 20:12).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자신의 믿음이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약2:14-17).
성 경: [대하6:24]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주);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하는 것은 순전히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임을 증거해 주는 구절이다. 왕상 8:33 주석 참조.
(주); 주께로 돌아와서...간구하거든 - 본절을 통해서 우리는 참된 회개의 요소와 순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곧 (1) 죄에서 돌이킴, (2) 주의
이름을 인정, (3) 기도와 간구(욥 33:27, 28; 시 34:18; 요일 1:9)이다. 왕하 19:8-19 강해, '기도의 요소와 형태' 참조. 한편 18-21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역시 '이 전에서'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이스라엘의 참 회복이 있을 것임을 암시해 준다.
20절 주석 참조.
성 경: [대하6:25]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주);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과의 언약에 따라 그 후손들에게 주신 기업(基業)이다(창
12:7; 13:14, 15).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그 언약을 저버릴 경우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는 징벌까지 당하였다(왕하
25:8-12). 따라서 그들이 조상들의 기업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 왕상 8:34 주석 참조.
성 경: [대하6:26]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주);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 가뭄과 같은 자연 재해는 종종 범죄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언급된다(레 26:19; 왕상 17:1). 예를 들면 하나님은 우상을 숭배하던 아합왕을 징계 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셨다(왕상17:1; 약 5:17). 이에 비추어 볼 때 최근 세계적으로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자연 재해들(기아, 지진, 환경 오염, 가뭄, 이상 기온) 역시 인간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주);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 이는 곧 지금까지의 모든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분의 돌보심과 간섭하심 하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권위 및 주권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왕상 8:35 주석
참조.
성 경: [대하6:27]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주); 마땅히...가르쳐 주옵시며 - 여기서 '가르쳐 주다'에 해당하는 '야라'(*)는 어떤 사건을 통해 주는 교훈이나 깨우침을 의미한다. 즉,
본절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이란 결코 스스로는 깨달을 수 없는 우매한 인간들에게 재난이나 징벌 등을 통해 돌발적, 강제적으로 임하는 깨우침을
의미한다. 왕상 8:36 주석 참조.
성 경: [대하6:28]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주); 온역 - 이에 해당하는 '데베르'(*)는 흑사병(pestilence)과 같은 악성 전염병을 가리킨다(출 9:15).
(주); 황충 - 메뚜기의 일종이다. 이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농작물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 준다. 때문에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벌의 수단으로 언급되고 있다(사 33:4; 욜 1:4; 계 9:3).
성 경: [대하6:29]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주);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 하나님의 징계가 한 개인이나 전체 백성에 의하여 올 수 있듯이 이에 따른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도 한 개인이나 전체 공동체에 의하여 행해질 수 있다. 여기서 '한 사람'이란 말은 하나님 백성들의 개인적인 회개를 뜻하며 '온 백성'이라는
말음 민족적, 공동체적인 회개를 뜻한다.
성 경: [대하6:30]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주);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 본절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 하는 외면적 행위 때문에 구원을 주시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실상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 하는 진정한 마음을 보시고 구원을 베푸신다. 그런데 그처럼 인간의 마음을 온전히 분별하고 그에 따라 판결을
내리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뿐이다(렘 17:9, 10).
성 경: [대하6:31]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주); 그리하시면...주의 길로 행하리이다 - 본절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면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의 공의로우심을 인정하며 경외하고
주의 뜻을 따르게 될 것이라는 조건부적 의미가 아니다. 대신 이는 하나님의 사유(赦宥)의 은총을 확신하게 되면 그로 인해 백성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왕상 8:40 주석 참조.
성 경: [대하6:32,33]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본문은 다섯 번째 간구로서 지금까지의 기도와는 다른 독특한 형식과 내용, 그리고 대상을 취하고 있다. 먼저 형식면에서 지금까지의 기도는 거의가
(1) 범죄, (2) 재앙,(3) 회개, (4) 자비를 간구하고 있다. 그러나 본 기도는 (1)-(3)항 없이 곧바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다. 둘째로
지금까지의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본 기도는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다. 마지막으로 내용면에 있어서 이 기도는 유대인
특유의 민족적인 배타성과 편협성을 초월한 복음의 우주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때문에 이제 이스라엘의 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어지기에충분하다. 그리고 성전이 그렇게 우주적인 성격을 지니게 될 때 이스라엘과 이방인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그분을 경외케 될
것이다. (민 15:14, 15; 사 43:19,20; 56:3, 7, 8).
성 경: [대하6:34]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주); 주의 보내신 길로 나갈 때에 - 본절은 하나님께서 적국을 이스라엘 손에 붙이실 때에 이러한 성전을 치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상태가
매우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성전(聖戰)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이 교만해져서 주를 향한 열심이 부족할 때는 반드시 그 전쟁에 실패하는
것이다. 여호수아의 아이 성 공격 실패가 그 좋은 예이다(수 7:4, 5).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함께하사 백전 백승을 거둘 수 있을 터인에 이는 영적
그리스도의 군사인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엡 6:10-17). 수5:13-15 강해. '성전(聖戰)' 참조.
성 경: [대하6:35]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본절과 40절은 노래의 후렴구와 같은 것으로서 기도자의 간절한 염원을 증거해 주기에 충분하다. 한편 본절의 '돌아보옵소서'에 해당하는 '아사
미쉬파트'(*)는 원래 '공의를 행하다'란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무조건하고 기도자들의 모든 기도를 다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게 기도할 경우에만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대하6:36]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두 번째 기도]
(주);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 여기서 솔로몬은 인간의 전적 부패(렘 17:9 ; 엡 2:3)로 인하여 필연코 인간들이 범죄케 됨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전적 부패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있었기에 솔로몬은 더욱더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하심을 사모하고 백성들을 의해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이다.
(주);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 이스라엘이 범죄하므로 원방(遠方)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회개하므로 열조의 땅으로 돌아오리라는 사실은 일찍이
모세 시대부터 예언되었던 바이다(레 26:27-39, 44, 45 ; 산 28:64-68). 또한 솔로몬이 간청했던 바대로 B.C.722년, 앗수르에게 멸망단한 북
이스라엘과 B.C.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해 포로로 잡혀간 유다는 70년만에 다시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처럼 허너남께서는 비록 택하신
백성이라도 범죄하면 징계하심으로 회개케 하고(잠 15:10), 그래도 회개하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당신의 입에서 토해 버릴 것이다(계 3:16)
성 경: [대하6:37]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주); 스스로 깨닫고 - 솔로몬의 이러한 기도는 다른 구절들과 더불어 참 회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1)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24, 26절), (2) 그 죄에서 떠나며(26절), (3) 자기의 마음에 재앙과 고통을 깨닫고(29)절, (4) 주의 이름을 알며(33절), (5)
스스로 깨닫고(37절) 회개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참된 회개란 철저한 자기 인식과 주님을 올바로 알고 인정하는 것임을 가르쳐 준다.
성 경: [대하6:38]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주); 온 마음과 온 뜻으로 -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전적인 헌신과
사랑이다. 신 6:5 주석 참조.
성 경: [대하6:39]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백성을 위한 첫 번째 기도]
(주);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들으시고 - 솔로몬은 계속해서 이처럼 주가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응답해 달라고 기도한다(23, 25, 27, 30,
33, 35, 39절). 그런데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이 땅에 있는 인간과
대조적으로 구별되는 거룩하신 분이심을 가리키며,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의미를 드러내 준다. 이와같이
우리의 기도는 마땅히 주의 주(主)되심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성 경: [대하6:40]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마무리 기도]
(주); 눈을 드시고 - 이 역시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으로서 인간을 살피시고 구원코자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행동을 의미한다(시 33:18;
34:15). 한편 이에 반해 하나님께서 '눈을 가리우신다'는 표현은 은총을 거두사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또한 기도에도 응답치 않으심을
뜻한다(사 1:15). 왕상 8:52 주석 참조.
성 경: [대하6:41]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마무리 기도]
본절에서 솔로몬은 자신을 위한 기도 보다는 우선적으로 하나님과 주의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다. 이와같이 기도는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에서 벗어나 이타적이 될 때 참된 기도가 될 수 있다.
(주); 주의 능력의 궤 - 공동 번역은 '당신의 힘이 깃들인 궤'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한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리킨다(11절; 5:2-7).그런데 이 궤를 가리켜 '주의 능력의 궤'라 칭한 까닭은 그 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궤 안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관계를 유지해 주는 언약의 요체인 십계명 판이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1절 주석 참조.
성 경: [대하6:42]
주제1: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주제2: [마무리 기도]
(주);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 - 이는 다름 아니라 솔로몬 자신을 가리킨다. 즉,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고서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하였던 것이다(왕상 1:39). 그런데 이러한 솔로몬은 만왕의 왕 메시야의 모형이다. 왜냐하면 다윗의 자손 중 영원한 왕권을 약속받은 자는 솔로몬이 아니라 바로 다윗의 혈통을 좇아 난 하나님의 외아들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대상 17:11-14).
(주); 얼굴을 돌이키지 마옵시고 - 이 또한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으로서 하나님을 친근하게 표현한 것이다. 특히 '얼굴'은 사람의 심리 상태를 가장 명확히 나타내 주는 부분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기쁨과 슬픔 등을 묘사할 때에도 이 단어가 자주 사용되었다(시 4:6; 10:11; 사 64:7). 그러므로 솔로몬의 본 기도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지속될 것을 간절히 바란 것이라고 하겠다.
(주); 은총을 기억하옵소서 - 여기서 '은총'(*, 헤세드)이란 '언약'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사 45:3). 역대기에서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7:1]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여호와의 응답]
(주);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자 곧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번제물들을 소거(消去)시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봉헌된 성전을 열납하셨을 뿐만 아니라 솔로몬의 봉헌 기도도 응답하셨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레 9:23, 24; 왕상 18:38). 하나님은 종종 이와 같은 방식으로 기도 응답을 확증해 주셨는데 모세가 성막에서 희생 제사를 드렸을 때와 모리아 산에서 다윗이 제단을 쌓았을 때(대상21:26)도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다(Wycliffe). 또한 신약 시대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성도에게 응답하실 때도 불이 임하였다(행 2:3). 물론 이때의 '불'은 자연적인 불과는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는 초자연적인 불이다.
(주); 여호와의 영광이 그전에 가득하니 - 5:13, 14에 의거할 때 여기서 '영광'은 전(殿)에 가득한 구름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구름은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매체로 언급되었다(출 19:16; 40:35). 아무튼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들을 사른 이적적 사건과 동일하게
여호와의 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는 것은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자기 선포이다(O. Zockler).
성 경: [대하7:2]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여호와의 응답]
(주); 제사장이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 여기서 제사장은 그 당시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직분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에 직접 맞닥뜨리면 감히
그 앞에 설 수 없음을 시사해 준다(출 3:1-6; 단8:17). 이와 유사한 예로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던' 사건을 들 수 있다(출 34:29-35). 한편 오늘날의 성도들 역시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는 온전히 영광으로 가득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4:16).
성 경: [대하7:3]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여호와의 응답]
(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은...엎드려 경배하며 - 여호와의 영광을 목격하고 엎드려 경배하는 것은 은혜를 체험한 성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레 9:24).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의 영광을 간접적으로, 그리고 잠깐이라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주); 박석 깐 땅 - 겔 40:17에 따르면 박석(薄石)은 성전 바깥 뜰 삼면에 모두 깔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윗뜰 곧 제사장의 뜰에도 역시 박석이 깔려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만일 그렇다면 이곳에 엎드린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일반 백성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한편 '박석'은 빛나는 돌로 만든 석판을 가리키는데 성경에서 이는 대개 '성결'을 상징한다.
(주); 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 이 구절은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를 찬양할 때 전형적으로 언급되는 찬양의 후렴구이다(5:13; 시
106:1; 136:1).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5:13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7:4]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감사 제사]
(주); 이에...제사를 드리니 - 여기에 언급된 제사는 성전 봉헌식의 마지막 감사제이다(Keil). 이와 달리 1절의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태운 번제물은 5:6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언약궤 안치식을 위해 차린 제물이었다. 한편 본절 이하에 의거하면 성전 봉헌식의 마지막 감사제는 언약궤 안치식(5:5, 6, 12, 13)보다 더 웅장하게 치루어졌음을 알수 있다.
(주); 왕과 모든 백성이 - 이처럼 왕과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함께 제사를 드리는 화목하고도 단합된 모습은 신정(神政) 통치의 이상적
형태이다. 그런데 지도자를 중심한 성원(成員)들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신앙 공동체에서 마땅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성 경: [대하7:5]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감사 제사]
(주); 소가 이만 이천이요...낙성식(落成式)을 행하니라 - 혹자는 성전 낙성식에 쓰인 제물로 소가 2만 2천 마리, 양이 12만 마리 소비되었다는데
대하여 이는 과장된 수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Thenius). 그러나 역대기와 열왕기의 기록(왕상 8:63)이 일치하는 점을 볼 때 이는 결코 과장된
수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신 그러한 수치는 낙성식 축제가 2주간 동안 계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Wycliffe, P.C. Barker,Payne). 즉,
왕상 8:63에서는 이 제물이 화목제로 드려진 제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목제 제물은 백성들이 먹을 수가 있었는데(대상 16:1-3; 29:21, 22),
이로 볼때 당시에 성전 봉헌식에 참여한 인원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2주간 동안 그 인원들이 소 2만 2천 마리, 양
12만 마리를 처리하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성 경: [대하7:6]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감사 제사]
(주); 제사장들은 직분대로 모셔 서고 - 5:12에서는 구체적으로 제사장들의 수가 120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비록 이들은 제사장의 24반열(대상 24:1-19)에서 각기 5명씩 차출된 자들이었지만 파당을 이루어 나누어 서지 아니하고 직분대로 정해진 자리에 섰다. 이것은 성전 안에서는 지파 간의 모든 파벌 의식이 사라지고 하나가 된 것을 가리킨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 332). 그런데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도 모든 사람들 간에 차별이란 있을 수 없다(고전1:26-31).
(주); 여호와의 악기 - 이스라엘인들이 여호와를 찬양하는 데 주로 사용한 악기들은 대개 제금, 비파, 수금, 나팔 등이었다. 5:12, 13 주석 참조.
성 경: [대하7:7]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감사 제사]
(주); 전 앞뜰 가운데를 거룩히 구별하고 - 솔로몬은 놋단만으로 번제물과 소제물과 기름을 다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처럼 전 앞뜰 가운데를 거룩히 구별하여 임시 제사장소로 삼았다. 솔로몬이 모든 제물들을 다 수용하기 위해서 단을 확대 신축하거나 새로운 한 단을 만들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당시 성전의 놋제단만이 참되고 유일한 제단이었음을 강조해 준다. 왕상 8:64 주석 참조.
(주); 놋단이 능히...용납할 수 없음이더라 - 병행 구절인 왕상 8:64에서는 "여호와의 앞 놋단이 작으므로...용납할 수 없음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4:1에 따르면 단의 크기가 가로, 세로 9.12m(20 규빗) 정도임을 알 수 있는데 실로 이것은 대단히 큰 것이다. 이에 대해
커티스(Curtis)는 열왕기의 과장이 심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는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왕상 8:64에서 놋단이 작다고 한 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에서 많은 제물을 수용하기에 작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성 경: [대하7:8]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성전 낙성식(落成式)]
(주); 그때에...칠 일 동안 절기를 지켰는데 - 본절과 9절에 의거하면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히브리 종교력 7월 8일부터 7월 22일까지 두
주간에 걸쳐 성전 낙성식과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장막절 축제를 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장절 또는 장막절은 광야에서의 장막
생활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이기도 하지만 일년간의 모든 추수를 다 마치고 드리는 절기이기 때문에 이때에는 소출이 대단히 많았다. 레위기 서론,
'히브리 절기와 축제' 참조. 율법에 따르면 이 장막절은 7월 15일부터 7일 동안지키며 제팔일에는 성회(聖會)로 모이도록 되어 있었다(레
23:33-36). 그러므로 솔로몬은 7월 8일부터 14일까지 7일 동안 먼저 낙성식 축제를 행한 후 이어서 또 한 주간을 장막절 절기로 지켰던 것이다.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하수까지 - 여기서 '하맛(Hamath) 어귀'는 유브라데(Euphrates) 강의 한 줄기인 오론테스 강을 가리킨다. 그리고 '애굽
하수'는 가나안땅 서남쪽 바란 광야에서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와디 엘 아리쉬'를 가리킨다. 이는 일명 '애굽 강'(창 15:18), '애굽 시내'(수
15:4)로도 불리웠는데 '나일 강'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민 34:5, 8 주석 참조. 그런데 본절에 제시된 이러한 구역은 당시 솔로몬 왕국의
경계이다(왕상 4:21; 대하 9:26). 이러한 이스라엘 땅의 경계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간의 언약에서이다(창 15:18). 이로 볼 때
성전 건축과 낙성식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히 취한 뒤에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전의 영향이 이스라엘 땅
전지역 구석구석까지에 미치게 되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실로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통치하기에 온전한 보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대하7:9]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성전 낙성식(落成式)]
(주); 제 팔 일에 무리가 한 성회를 여니라 - 여기서 '제 팔 일'이란 한 주간의 낙성식이 끝나고 난 다음날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장막절이 끝나고
난 다음날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전후 문맥으로 보아 낙성식이 끝난 다음 날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렇다면 '한 성회'란 낙성식이
끝나고 난 제 8일부터 다시금 한 주간 동안 지킨 장막절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한편 히브리 종교력으로 7월 10일은 일년에 단 한번 열리는
대속죄일이다(레 16:29-34). 따라서 2주간에 걸친 낙성식과 장막절 축제 기간에 이 대속죄일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더 축제의 의의를
고양(高揚)시켜 주었다고 하겠다.
성 경: [대하7:10]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성전 낙성식(落成式)]
(주); 칠 월 이십 삼 일에...그 장막으로 돌려 보내매 - 왕상 8:65에는 솔로몬이 '칠 일칠 일합 십 사 일'을 보내고 난 '제 팔 일', 즉 22일에
백성을 돌려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어 본절과 차이가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다음과 같이 해결할 수 있다. 즉, 본절에서의 23일은
솔로몬이 백성들을 해산시킨 날이 아니라 백성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간 날이다. 실제로 솔로몬은 22일에 백성들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무리들은
1주간의 장막절이 끝나고 난 제 8일째(22일) 역시 성회로 모이는 날인 것을 알고 성회를 가졌고 그 성회에서 왕을 위하여 축복하였다. 물론
솔로몬도 이 날이 성회인 줄은 알았고 또 성회에 참여도 했을 것이지만 솔로몬이 성회의 주체자가 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백성들을 미리
해산시켜 그 성회를 백성들의 주체 하에 맡긴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상 8:66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7:11]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솔로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주); 어떻게 만들고자 한 것을 다 형통하게 이루니라 - 이것은 성전 건축에 있어서 솔로몬이 하고자 했던 대로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마쳤음을
뜻한다(3, 4장). 그러나 실제로 성전 건축은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부친 다윗에게 주신 설계도에 따라 지어진 것이지(대상 28:11-19) 솔로몬 자신의
의도대로 지어진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세의 회막도 하나님이 주신 설계도에 따라 만들어졌다(출 25:9).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
솔로몬이 원하던 대로 다 형통하게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자원하고 순종하는 자를 들어서 하나님의 사역에 사용하고
계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계획에 의하여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며 자원하는 자에 의하여
건설되는 것이다.
성 경: [대하7:12]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솔로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주);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 본절과 병행인 왕상 9:2에는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열왕기 기자는 이것이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두 번째 현현(顯現)임을 강조하고 있으나 본서 기자인 에스라는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다. 대신 그는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필역하고 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현현하신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또 에스라는 본절에서 열왕기 기자가 말한 기브온 사건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의 관심을 계속 솔로몬과 예루살렘 성전에로 집중시키고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상 9:2 주석을 참조하라.
(주); 제사하는 전 - 이것은 왕상 9:2에는 없는 에스라의 삽입이다. 한편 이처럼 여호와의 전을 '제사하는 전'으로 표현한 것은 왕상 9:3에서
성전을 '여호와의 이름을 두는 곳'으로 표현한 신명기적 개념과 상충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제사장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Curtis).
성 경: [대하7:13]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솔로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본절에 언급된 재앙은 경제를 핍절하게 하고(가뭄), 자연을 파괴하며(메뚜기), 육체를 고통 속에 몰아 넣는 것(염병)으로 인간 생활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포괄적인 것이다(6:26, 28).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재앙이 있을 때는 모두가 즉시로 회개하고 기도할 때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14절). 실제로,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죄 때문에 3일간의 온역으로 징벌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이 범죄하였음을 깨닫고 회개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삼하 24장).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역시 개인적 또는 국가적인 재앙을 당할 때 그것의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여 회개함으로써
재앙을 종식시킴과 아울러 이를 신앙 성숙의 전기(轉機)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성 경: [대하7:14]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솔로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주);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 - 이와 유사한 표현은 역대기서에 간혹 나타나는데(6:5, 33) 이것은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불리우는 백성들'을 가리킨다. 즉, 이 말은 그들이 여호와께 속했고, 그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의미이다. 다른 한편으로 본절은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여호와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죄악된 길에서 떠나지 아니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이방인의 사도이며 큰 능력의 사람이었던 사도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부탁했었다(Wycliff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주); 그 악한 길에서 떠나...내 얼굴을 구하면 -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은 그분의 자비와 긍휼 그리고 사유(赦宥)하심 및 도움 등을 구한다는 의미이다. 6:42주석 참조. 아무튼 본절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있어 요구되는 조건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쳐 준다. 그것은 곧 겸손, 회개, 기도, 헌신 등이다. 실상 철저한 회개는 하나님의 자비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죄악이 관영했던 니느웨 성읍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서 철저히 회개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면한 사실(욘 3장)이 이를 잘 증거해 준다.
(주); 그 땅을 고칠지라 - 땅의 회복은 용서함 바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큰 축복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주를 비롯한 전반적인
생활이 토지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하나님은 종종 땅을 통하여 축복과 저주를 내리시는데(창 2:9; 3:17;신 26:15), 산상 보훈에서도 땅은
온유한 자, 즉 겸비(兼備)한 자에게 축복의 선물로 주어진다고 언급되어 있다(마 5:5).
성 경: [대하7:15]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솔로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주);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귀를 기울이리니 - 이곳은 '성전'을 가리킨다. 그런데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다(6:6). 따라서 본절은
포괄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부르짖는 모든 성도들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다는 뜻이다.
성 경: [대하7:16]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솔로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 앞서 솔로몬은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6:20)라고 기도한 적이 있다. 따라서
본절과 같은 하나님의 응답은 솔로몬의 기도 이상으로 풍성한 약속이라 하겠다. 한편 성전을 향한 이러한 하나님의 맹세의 말씀은 완전한
성전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마 12:6)와 성전의 각 지체요 성령이 내주하시는 전인 신약 백성들(엡 2:21, 22)을 염두에 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마음이 향하고 있는 '하나님의 전'인 것을 명심하고서 모든 언행(言行)에 있어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고전 3:16, 17).
성 경: [대하7:17]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솔로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주); 네 아비 다윗같이 하여 -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왕상 9:4과 본절은 '다윗'을 언급함에 있어 그 시각이 다르다. 즉, 열왕기 기자는
다윗을 대표적인 신명기적 왕으로서 주의 법도와 율례를 잘 지킨 인물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본서 기자인 에스라는 다윗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대표적인 신앙의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열왕기 기자는 축복의 약속 대로 지속될 '왕위'(王位)에 강조점을 두고 있으나(왕상9:5)
에스라는 '다스릴 자'(18절)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 다스릴 자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만국을 통치할 메시야(계 19:16)를 상징한다. 아무튼
다윗은 비단 솔로몬뿐 아니라 모든 왕들이 따라야 할 삶의 척도 또는 표본으로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었다(28:1; 29:2; 왕상 15:3, 11; 왕하 14:3).
그것은 다윗이 전혀 범죄치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삼하 11장) 그가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며 변치 않는 마음으로 온전히 행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상 9:4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7:18]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솔로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주); 내가 네 나라 위를...한 대로 하리라 - 이 언약은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적 의미의 다윗 왕조가 계승될 것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역사적으로 다윗 왕가는 분열 왕국으로 멸망의 조짐을 보였고 마침내 바벨론 포로로 그 왕통은 사실상 끊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사단의 역사 진행 방법을 무너뜨리고 마침내 남겨 놓은 씨를 들어 사용하셨으니 곧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그것이다(마 1:18-25). 여기서
우리는 사단의 온갖 방해와 인간의 부패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당신이 택하신 '씨'를 보전하신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롬 9:29).
성 경: [대하7:19,20]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솔로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본문은 왕상 9:6, 7과 병행 구절들이다. 그러나 동일한 자료를 가지고도 저자의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 즉,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강조하고 있으나(왕상 9:7) 여기서 에스라는 '너희',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하나님의 백성'(14절)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백성과 나라라는 두 강조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지만 백성들 하나하나의 하나님의 편으로 볼 때 그 의미는 달라 진다. 즉, 에스라는 본문에서 백성들 하나하나 개개인적인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수 있다.
(주); 이 전을...이야기거리가 되게 하리니 - 위의 관점에서 볼 때 열왕기서 기자는 하나님의 전을 왕국의 중심으로 강조하고 있으나 에스라는
성전과 성도 하나하나를 서로깊게 연관지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에스라는 이스라엘 국가 전체의 운명은 개개인의 신앙 여부에 달려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나라의 흥망 성쇠(興亡盛衰)를 단지 연대적(連帶的)인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실제적인 자신의 죄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즉, 소돔 고모라가 멸망한 것은 단지 전체 백성의 연대적인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임을 볼 때
에스라의 강조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속담거리'나 '이야기 거리'는 단순한 경멸이나 조롱거리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즉,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줄 수 있는 '본보기'란 의미를 지닌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할 경우 당할 비참한 지경이 어떠한 것인지를 능히
짐작케 해준다. 왕상 9:7 주석 참조.
성 경: [대하7:21,22]
주제1: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
주제2: [솔로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본문은 왕상 9:8, 9과 전저긍로 일치하나 단지 본문에는 '비웃어'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 역대기 저자는 성전을 모독하는 이런 용어를 꺼렸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생략해 버렸을 것이다.
(주); 이 전이 비록 높을지라도 - 이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의 헛됨을 보여 준다. 실상 성전은 여호와께서 그곳에 마음을 두시고 거하실 때(16절)만이 성전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주); 무릇 그리고 지나가는 자가 놀라 가로되 - 왕상 9:8에는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로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저주하실 때 종종 이방인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신다(신 29:24-27; 렘 18:16; 19:8). 롬 1:23에서 이방인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꾼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이러한 이방인의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주);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섬기므로 - '부종하다'에 해당하는 '하자크'(*)는왕상 9:9에 나오는 '다바크'(*)와 같은 의미로 상대방에 대하여
전인격적으로 집착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은 곧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라는
것이다(마 22:37, 38).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신들을 연애하듯 섬겼으니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왕상 9:9 주석 참조.
성 경: [대하8:1]
주제1: [솔로몬의 업적]
주제2: [솔로몬의 성읍 재건]
(주); 이십 년 동안에 건축하기를 마치고 - 솔로몬은 7년 동안 성전을, 13년 동안 자기 왕궁을 건축하였다(왕상 6:38-7:1). 따라서 모든 건축은
솔로몬 통치 4년 곧 B.C. 966년경에 시작하여 B.C. 946년에 끝이 난 셈이다.
성 경: [대하8:2]
주제1: [솔로몬의 업적]
주제2: [솔로몬의 성읍 재건]
(주); 후람이 자기에게 준 성읍들 - 본절과 병행 구절인 왕상 9:11-14을 서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즉, 열왕기 저자에 따르면 솔로몬이 후람에게 갈릴리 땅의 성읍 이십을 주었다고 되어 있으나 역대기 저자는 도리어 후람이 솔로몬에게 성읍들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있다. (1). 솔로몬은 후람에게 성전 건축을 도와 준 대가로 성읍 이십을 주었다. 하지만 그 성읍들의 상태가 나쁘고 좋지 않자 후람은 그 땅 이름을 '가불'이라 부르고 솔로몬에게 다시 돌려주었다(왕상 9:12, 13). 그 후에 솔로몬은 후람에게서 받은 성읍들을 다시 재건하여 백성들에게 준 것이다(P.C. Barker, Starke). (2) 솔로몬도 후람에게 이스라엘 성읍 이십을 주었고 후람도 솔로몬에게 페니키아 성읍들을 선물로 준 것이다. 그런데 열왕기 저자는 전자만을, 역대기 저자는 후자만을 기록한 것이다(Kimchi). 위의 두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정확히 사실과 부합되는지는 알 수 없다.그러나 비교적 전자가 더 옳은 것 같다. 왜냐하면 솔로몬과는 달리 후람이 솔로몬에게 성읍들을 선물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역대기 기자는 될 수 있는 대로 다윗이나 솔로몬의 약점을 감추고 장점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는 바 본절에서도 역시 솔로몬의 공적만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주); 다시 건축하여 - 혹자는 솔로몬이 성읍들을 단지 확장하였다고 보고 있으나(F.Brown), 혹자는 요새화한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Benzinger,
Kittel). 아무튼 왕상9:11-13에 따르면 그 성읍들은 거의 황폐해 있어 볼품이 없었기 때문에 솔로몬이 성을 다시 재건하였음이 분명하다.
성 경: [대하8:3]
주제1: [솔로몬의 업적]
주제2: [솔로몬의 건축 사업]
(주); 하맛소바를 쳐서 취하고 - '하맛소바'(Hamath-Zobah)는 소바 땅에 있는 하맛 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소바 왕국에 접해 있는 하맛 왕국을
가리킨다. 소바(Zobah)는 다메섹의 동북 방향, 하맛의 남쪽에 위치한 수리아 사람들의 왕국이다(대상 18:3). 그리고 하맛(Hamath)은 아람 사람들의
왕국으로 다윗 때에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은 이래계속 조공을 바쳐 왔다(삼하 8:9-12). 그런데 여기서 두 지역을 '하맛소바'라는 한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은 에스라 시대 때에 이 지역이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하나로 합쳐졌기 때문이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한편 솔로몬이
하맛과 소바를 친 것은 그들이 이제까지 바치던 공물을 거부하고 반역을 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Keil).그런데 솔로몬이 군사를 일으켰다고 기록된
곳은 이곳 뿐이다. 즉, 왕상 9:17-19에서는 솔로몬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사실이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혹자들은 이 기록의 역사성에 대하여
의혹을 품고 있기도 하다(Curtis, Kittel). 그러나 4절에 기록된 다드몰과 하맛의 국고성 등이 왕상 9:18, 19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본절의 역사성 또한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성 경: [대하8:4]
주제1: [솔로몬의 업적]
주제2: [솔로몬의 건축 사업]
(주); 다드몰을 건축하고 - 다드몰(Tadmor)은 다메섹과 유브라데 강 상류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 전략상 요충지이다. 이곳은 바벨론에 이르는 최단거리 교역로(交易路)와도 관련된 상업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한편 후대에 이곳은 팔미라(Palmyra)로 불리웠는데 로마 시대의 제노비아 여왕(Queen Zenobia)이 이곳을 크게 중흥시켰다(P.C. Barker,Wycliffe).
(주); 하맛에서 모든 국고성을 건축하고 - 왕상 9장에는 하맛이란 지명(地名)이 생략된채 솔로몬이 국고성을 건축했다는 기록만이 나온다. 한편
국고성(the store city)이란 나라에 필요한 물품들을 비축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하맛은 이스라엘의 북단 경계 지역의 성으로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땅의 경계이다(민 34:8; 왕상 8:65;왕하 14:25; 대상 13:5). 따라서 본절에 언급되어 있는 다드몰과 하맛은 솔로몬 왕국의
북방 경계 지역에 있는 중요한 두 도성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대하8:5]
주제1: [솔로몬의 업적]
주제2: [솔로몬의 건축 사업]
(주); 윗 벧호론과 아래 벧호론 - 왕상 9:17에는 아래 벧호론만 언급되어 있다. 벧호론(bethhoron)은 예루살렘 서북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 이곳은 에브라임의 딸 세에라가 세운 곳으로(대상 7:24) 성읍 중간을 가로 지르는 계곡 때문에 '윗 벧호론'(베잇 우르 엘포카)과 '아래
벧호론'(베잇 우르 엘 타흐타)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 10:10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8:6]
주제1: [솔로몬의 업적]
주제2: [솔로몬의 건축 사업]
(주); 바알랏 - 이곳은 단 지파 지역의 성으로서(수 19:44) 블레셋을 막기 위한 요새였다(Keil). 한편 왕상 9:15-17에 따르면 솔로몬은
변방(邊方)을 방어하기 위하여 바알랏(Baalath)뿐 아니라 하솔, 므깃도, 게셀 등의 성읍들도 건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솔로몬이 왕궁의
재산이나 군량미 혹은 구제용 식량을 비축하기 위한 국고성(창41:35; 출 1:11; 왕상 9:19) 뿐만 아니라 병거성(the chariot city)과 마병(馬兵)의
성을 세운 것 역시 동일한 목적에서였다.
성 경: [대하8:7,8]
주제1: [솔로몬의 업적]
주제2: [솔로몬의 역군(役軍)]
솔로몬은 당시 자신의 영토 내에 남아 있던 가나안 족속들의 자손들을 솔로몬의 건축 사업에 동원되었던 '역군'으로 삼는 정책을 폈다(2:17, 18).
당시 솔로몬의 건축사업에 동원되었던 역군 18만명 가운데 3만명 정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고 나머지 15만명은 모두 가나안인이었다(왕상
5:13-16). 이로 보아 솔로몬의 정책이 상당히 강압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후에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킬 때 바로 이러한 강압 정책에 대하여
비난했었다(10:4).
성 경: [대하8:9]
주제1: [솔로몬의 업적]
주제2: [솔로몬의 역군(役軍)]
(주); 오직 이스라엘 자손은 솔로몬이 노예를 삼아 일을 시키지 아니하였으니 - 솔로몬의 건축 사업과 관련, 이스라엘인들도 역군(役軍)으로 일한
것은 사실이나(왕상 5:13) 군사와 장관의 두목과 같은 고급 인력으로 동원되었으며, 노예처럼 취급되지는 않았다. 이는 동족을 종으로 부려서는
안된다는 율법의 가르침(레 25:39-46)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이스라엘인은 하나님께 속한 자유민으로서 거룩한 위치에 있었지(출 19:6) 결코
이방인이나 동족의 종으로 전락될 위치에 있지 않았다. 한편 솔로몬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징발하여 강제 노역을 시킨 직접적 이유는 20년 동안이나
계속된 건축 사업(1절)에 막대한 노동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시적(巨視的)인 측면에서 볼 때이 일은 오래 전 노아를 통해 주셨던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창 9:25)로 볼 수 있다.
성 경: [대하8:10]
주제1: [솔로몬의 업적]
주제2: [솔로몬의 역군(役軍)]
(주); 공장을 감독하는 자가 이백 오십 인이라 - 왕상 9:23에는 550인이라고 나와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감독의 분류 방법에 의한 것으로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즉, 본절의 250인은 오직 이스라엘인 감독관을 가리킨 것이고 왕상 9:23의 550인은 이스라엘인과 가나안인으로 구성된 상급
감독관을 가리킨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2:1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8:11]
주제1: [솔로몬의 업적]
주제2: [신성시되는 다윗성]
(주);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궁에 거하지 못하리니 - 본절은 왕상 9:24의 해설로 볼 수 있다. 즉, 왕상 3:1에 따르면 솔로몬은 바로의 딸과 결혼한 후 그녀를 위한 궁이 완성되기까지 그녀를 다윗 성에 두었다. 그리고 왕상 9:24에 따르면 솔로몬은 그녀를 위한 궁이 완성되자 그녀를 다윗 성에서 이끌어 내어 그녀의 궁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그런데 본절에서 역대기 기자는 그에 대하여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솔로몬의 신앙적인 동기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솔로몬의 실수를 감추고 장점만을 밝혀 미화하려는 역대기 저자의 의도를 볼 수 있다.
(주);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 성소에 대한 이러한 엄격한 구별 의식은 역대기 저자의 독특한 사상이다. 이는 겔 44:9에 기록된
에스겔은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못하리라"고 했다. 사실 에스라의
편에서 볼 때 바로의 딸이 다윗 성에 머문 것은 대단히 신성 모독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어 언약궤를 그곳에
안치하기 전까지는 언약궤가 바로 다윗 성에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5:2).
성 경: [대하8:12]
주제1: [솔로몬의 업적]
주제2: [준수되는 3대 절기]
(주); 낭실 앞에 쌓은 여호와의 단 - 여기서 '낭실'(廊室)은 솔로몬 성전의 현관(porch)을 가리킨다(3:4). 그리고 '여호와의 단'은 성전 뜰에 놓여 있는 번제단을 가리킨다(4:1). 솔로몬이 성전 낙성식의 제사를 드릴 때에는 이 번제단이 상대적으로 작아 성전 뜰을 구별, 번제단 대용(代用)으로 쓰기도 하였다(7:7).
(주);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 - 본절은 솔로몬이 직접 하나님께 번제(燔祭)를 드리는 것을 가리키는 양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분향하며
번제를 드리는 일은 제사장의 고유 직무이다(26:16). 따라서 이는 솔로몬이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제사드린 것을 가리킨다고 이해하여야 한다.
성 경: [대하8:13]
주제1: [솔로몬의 업적]
주제2: [준수되는 3대 절기]
(주); 모세의 명을 좇아 - '모세의 명'이란 모세 5경에 기옥된 율법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율법은 크게 '하나님에 관한 법'과 '인간에 관한 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절기(節期)에 관한 법은 전자에 속한다. 레 18:6-18 강해, '모세 오경에 나오는 각종 법규' 참조.
(주);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 - 흔히 유대인들의 3대 절기라고 불리우는 이 절기들에 관해서는 왕상 9:25 주석에 자세히 언급해 놓았으니
참조하라.
성 경: [대하8:14]
주제1: [솔로몬의 업적]
주제2: [제사 직무 정비]
(주); 다윗의 정규(定規)를 좇아 - 솔로몬은 다윗이 전에 정한 규례대로(대상 23-26장) 제사장들을 24반차로 나누어 정하여 섬기게 하고 레위인들도
그 직분대로 찬양대와 문지기로 나누어 서게 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대상 23-26장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8:15]
주제1: [솔로몬의 업적]
주제2: [제사 직무 정비]
(주); 국고 일에든지 무슨 일에든지 - 대상 26:20-28에 따르면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성전의 곳간과 성물(聖物)의 곳간을 맡아 보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성물 곳간에는 다윗왕이 전쟁에서 노획한 물건들이 있었는데 이런 성물들은 성전을 수리, 보수하는 일이나 기타 성전을 위한 일에 사용되었다.
성 경: [대하8:16]
주제1: [솔로몬의 업적]
주제2: [제사 직무 정비]
(주); 결점이 없이 필역하니라 - 이미 성전 건축은 완공되었다(1절). 그런데 이제 본절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필요한 사소한
물건들까지도 모두 완공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곧 성전의 예배적 기능이 완벽하게 갖추어졌다는 뜻이다. 이와같이 성전 건축은 외형적인
건물을 완공하였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온전한 예배가 수행될 수 있어야만 완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문에서 역대기
기자가 모세의 율법에 따른 모든 제사 준수와 성직 임명이 끝난 후에 비로소 '여호와의 전이 결점이 없이 필역하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성 경: [대하8:17]
주제1: [솔로몬의 업적]
주제2: [제사 직무 정비]
(주); 에시온게벨과 엘롯 - 이 도시들은 모두 홍해의 아카바(Aqaba) 만 최북단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들이다. 왕상 9:26 주석 참조.
성 경: [대하8:18]
주제1: [솔로몬의 업적]
주제2: [제사 직무 정비]
(주); 배와 바닷길을 아는 종들을 보내매 - 왕상 9:27에 따르면 솔로몬이 엘롯 근처 에서온게벨에서 배들을 짓고 있을 때에 후람(히람)이 솔로몬의 종과 함께 사공들을 그 배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절에는 솔로몬이 에시온게벨에 도착했을 때 후람이 배와 바닷길을 아는 종들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두 부분은 다음과 같이 조화시킬 수 있다. 즉, 솔로몬은 후람이 육로를 통해 에시온게벨로 보낸 물자들로 그곳에서 선박을 건조했다. 그리고 후람이 파송한 종들은 경험이 적은 히브리인들을 지도하여 선박을 조정할 수 있도록 3년간 함께 원정을 다녔다(9:21). 그런데 역대기 기자는 이 두 일이 실상 후람의 원조에 힘입은 것이므로 후람이 배와 종들을 보냈다고 언급한 것이다. 왕상 9:27 주석 참조.
(주); 오빌에 이르러 - 오빌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패터슨(Patterson)은 오빌이 아라비아 남서부 해안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했고, 올브라이트(Albright)는 아프리카의 동북부 해안 지역으로 보았다. 또한 와이즈맨(Wiseman)은 인도의 봄베이(Bombay) 근처에 위치한 수파라(Supara)로 주장한다. 따라서 이상의 제 견해 중 어느 것이 정확한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 볼 때 어쨌든 오빌은 아카바 만과 홍해를 경유하여 도착할 수 있는 장소였던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Payne).
(주); 금 사백 오십 달란트 - 왕상 9:28에는 '금 사백 이십 달란트'로 표기되어 있어 본절과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20'(*, 카프)과
'50'(*, 눈)이라는 숫자의 필사상의 오류 때문인 듯하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한편 당시 금 한 달란트(talent)는 약 34.3kg이었으니 '금
사백 오십 달란트'는 약 15톤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다. 이처럼 오빌은 성경에서 자주 유명한 금 생산지로 언급되고 있다(왕상 9:28;22:48, 49; 욥
22:24; 시 45:9; 사 13:12). 그런데 오빌에서 이렇게 받아오게 한 금은 솔로몬의 세입금(歲入金)이었던 것 같다(9:13).
성 경: [대하9:1]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스바 여왕의 방문]
(주); 스바 여왕 - '스바'(Sheba) 왕국은 아라비아 반도 서남부 곧 지금의 남예멘에 해당하는 지역에 위치했던 사베안(Sabaeans) 왕국을 가리킨다. 이들 국민 대부분은 셈족이었지만 함족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스바는 향료와 각종 보석과 황금으로 무역하는 상업국으로도 유명하였는바(겔 27:22, 23) 상품들이 매우 고가(高價)로 유통되었다. 한편 이와 같은 그 당시의 역사적 정황으로 볼 때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한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소문으로만 듣던 솔로몬의 명예와 지혜가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었다(5, 6절). 그래서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와서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였다. 둘째, 당시 에시온게벨을 거점으로 급격히 팽창하던 이스라엘의 교역(8:17, 18) 때문에 입은 자국의 상업적 타격을 해결코자 하는 외교적 목적에서 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에시온게벨' 항구는 홍해와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 영향을 미칠 만큼 무역이 활발했는데, 이로 인하여 스바왕국은 많은 시장을 보호하고자 했을 것이다.
(주);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 솔로몬 왕국의 부강함은 물론이려니와 그의 뛰어난 지혜는 주변의 모든 나라에까지 알려졌다(왕상 4:29-31). 그런데 이러한 명성은 당시 이스라엘을 거쳐 다메섹을 왕래했던 아라비아 상고(商賈)들에 의해 멀리 스바 여왕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것이다.
(주); 어려운 문제 - 이에 해당하는 '히다'(*)는 '매듭을 묶다'는 뜻의 '후드'(*)에서 파생된 단어로 쉽게 풀 수 없는 '수수께끼'나 '비사'(比辭)를 가리킨다. 스바 여왕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로써 솔로몬이 과연 얼마나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인지를 시험(test)하려 한 것이다. 왕상 10:1 주석 참조.
(주);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 여기서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이란 스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물어보고 싶어 한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공동 번역은 이를 '묻고 싶었던 것'이라 번역하였다. 물론 스바 여왕은 그 모든 것들을 수수께끼 형식을 빌어 질문하였을 것이다.
성 경: [대하9:2]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스바 여왕의 방문]
(주); 은미하여 대답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 - 이는 곧 솔로몬이 하나도 숨기지 않고 스바여왕이 묻는 대로 다 대답했다는 뜻이다. 아마 솔로몬은
스바 여왕이 제시한 수수께끼에 관한 것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세세한 질문에도 다 대답하였을 것이다. 그 근거로 우리는 솔로몬이 초목과 짐승,
새, 물고기 등에 관해서까지 논할 정도로 다방면에 걸쳐 해박(該博)하였음을 들 수 있다(왕상 4:33).
성 경: [대하9:3]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을 향한 스바 여왕의 찬양]
(주); 솔로몬의 지혜 - 예수께서는 회개치 않고 표적만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남방 여왕이 일어나...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마 12:42)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솔로몬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 의를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때 예수께서는 솔로몬보다 더 풍성한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는 당신의 말씀을 당시 유대인들이 거부한 것과 관련, 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예수께서 그 당시에 남방 여왕에 관하여 언급하신 것은 비록 그 여왕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의심은 갈지라도 '지혜를 구하는 태도'는 온 인류가 본받아야 할 귀한 것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여기서 '지혜를 구하는 태도'란 여호와를 구하며 찾는 태도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사 51:1).
(주); 그 건축한 궁과 - 여기서 궁이란 솔로몬의 성전과 궁전(8:1)을 통칭하는 것이다. 즉, 스바 여왕은 예루살렘을 방문, 솔로몬이 지은 모든
건물들을 다 목도(目睹)하였던 것이다(Curtis).
성 경: [대하9:4]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을 향한 스바 여왕의 찬양]
(주); 그 상의 식물 - 솔로몬의 식탁에 오르는 일일분 식물에 대해서는 왕상 4:22, 23에 잘 나와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솔로몬의 식탁은 엄청나게 풍성하게 차려졌었음을 알수 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주); 여호와의 전에는 올라가는 층계 - 여기서 '층계'에 해당하는 '올라'(*)는 비단 '계단'(stair, as cent) 뿐 아니라 '번제'(burnt offerings)를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다(레 3:5; 민 28:19; 삼상 6:14; 삼하 24:22). 때문에 70인역(LXX)을 비롯한 몇명 고대 역본(라틴 벌게이트역, 수리아역)들은 이를 '번제'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그에 따라 NIV, RSV와 같은 영어 성경 및 공동 번역 등도 '번제'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과 솔로몬의 궁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층계'를 굳이 '번제'로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따라서 본절에서 스바 여왕의 정신을 현황하게 만든 것은 솔로몬이 여호와께 드린 엄청난 규모의 번제가 아니라 층계였던 것으로 봄이 무난하다. 왜냐하면 그 층계는 왕궁에서 성전으로 올라가는 특별 계단으로서 매우 예술적으로 꾸며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왕상 10:5 주석 참조.
(주); 정신이 현황(眩慌)하여 - 수 2:11; 5:1에 따르면 '현황하여'라는 말은 '두렵고 떨림으로 간담이 녹아내리고 정신을 잃어버리는 상태'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즉, 스바여왕은 모든 건물들의 호화로운 자신의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휘황찬란하여 숨이 막힐정도였던 것이다.
성 경: [대하9:5]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을 향한 스바 여왕의 찬양]
(주);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 - '지혜'에 해당하는 '호크마'(*)는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나 일반적인 지식을 가리키지
않는다. 대신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근원적인 지혜를 의미한다. 1:10 주석 참조. 이러한 지혜는 솔로몬의 대내외적 통치 부분에 있어서 뿐
아니라 그의 건축 사업에서도 빛을 발휘하였다. 여기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란 바로 그 같은 사실을 일컫는 말이다.
성 경: [대하9:6]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을 향한 스바 여왕의 찬양]
(주); 당신의 지혜가 크다 한 말이 - 본절은 병행 구절인 왕상 10:7과 조금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여기서 역대기 기자는 솔로몬의 물질적인
부(富)보다 그의 지혜를 더욱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본서 기자는 남방 여왕이 놀라게 된 원인을 솔로몬의 부보다는 그의 뛰어난 지혜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대하9:7]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을 향한 스바 여왕의 찬양]
(주); 복되도다...지혜를 들음이로다 - 본절은 잠언 8:34과 일맥 상통하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잠언 기자는 그곳에서 날마다 지혜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복되도다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솔로몬의 신복들이 그의 지혜의 말을 듣는 것은 물론 복된 일이나 솔로몬보다 더 큰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듣고 보는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보다 더욱 복되다고 하겠다(마 12:42).
성 경: [대하9:8]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을 향한 스바 여왕의 찬양]
(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 몇몇 학자들은 본절과 마 12:42에 근거하여 스바 여왕이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했으며, 솔로몬과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녀가 실제로 개종했다는 증거는 성경상에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본문에 비추어 보아 그녀가 다른 이방인들과는 달리 꽤 온전한 여호와 신관(新觀)을 가지고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한편 이와같이 이방 여왕의 입에서 여호와께 대한 찬양이 흘러 나왔다는 것은 장차 이방인들도 여호와 신앙에 동참, 구원얻게 될 날이 이르를 것임을 시사해 준다(행 10:44-46).
(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왕이 되게 하셨도다 - 병행 구절인 왕상 10:9에는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역대기 기자는이 말을 강조함으로써 신정(神政) 정치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Curtis). 즉,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최고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인간들이 뽑은 왕은 다만 하나님을 대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위임을 맡은 자일 뿐이다. 대상 28:5과
29:25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증거해 주고 있으니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9:9]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예물 교환]
스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바친 예물은 이스라엘과의 호혜적(互惠的) 통상 교역을 염두에 둔 것이긴 하다. 12절 주석 참조. 그러나 솔로몬이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동방 박사들이 예수께 예물을 드린 것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마 2:11).
(주); 금 일백 이십 달란트 - 금 한 달란트(talent)는 약 34.27kg에 해당한다. 따라서 금일백 이십 달란트는 약 4.1톤(ton)에 해당하는 '베셈'(*)은
'발삼'(*)과 같은 말로 발삼나무 수지(樹脂)로 만든 향품, 향료를 가리킨다. 왕상 10:10 주석 참조.
성 경: [대하9:10]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예물 교환]
(주); 오빌 - 8:18 주석 참조.
(주); 백단목 - 후람의 신복들과 솔로몬의 신복들이 오빌에서 금을 실어 올 때에 가져온 이 나무는 인도와 실론이 원산지인 '붉은 백단향
나무'(학명, Pterocarpussantalinus)인 것 같다. 이 나무는 매우 값진 것으로서 형상을 새기거나 향을 피우는데 사용되었다. 솔로몬은 이것을
가지고 왕궁의 층대와, 수금, 비파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11절).
성 경: [대하9:11]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예물 교환]
(주); 층대를 만들고 - 병행 구절인 왕상 10:12에는 '층대'가 '난간'으로 나와 있다. 혹자는 이를 '층계'라 하기도 하고(Luther), '좌석'이라 히기도 한다(Thenius). 그러나 '층대'에 해당하는 '메실라'(*)는 여호와의 전이나 왕궁으로 들어가는 길 바닥에 계단식으로 깔아 놓은 테라스(terraces)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KJV, LivingBible).
(주); 노래하는 자 - 성전과 궁정에서 활동한 성가대원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전문 찬양대가 조직된 것은 다윗 때이다(대상 25:1-31). 그
이전까지 이스라엘 사회에는 전문 음악인 제도가 없었다. 왕상 10:12 주석 참조.
성 경: [대하9:12]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예물 교환]
(주); 답례하고 - 고대 근동 국가에서 외국의 사절(使節)이 보낸 선물에 대하여 똑같은 차원에서 보답하는 것은 널리 인정된 관습이긴 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답례는 대개 서로간에 만족할 만한 교역상의 거래가 성취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따라서
솔로몬은 스바 여왕에게 공식적인 답례를 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녀에게 대하여 큰 호의를 베풀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아라비아와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 스바 여왕은 솔로몬을 통해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아비시니아(Abysinia) 왕조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일뿐 그 사실 여부가 확인된 적은 없다(Winer).
성 경: [대하9:13]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의 부귀]
(주); 솔로몬의 세입금 - 여기서 말하는 세입금에 대하여 혹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과된 직접세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는 육상과 해상 무역 수입(21, 28절), 왕의 소유지 수입(대상 27:26-31), 외국 사신들의 예물(23, 24절). 정복 국가들로부터의 공물(14절) 등과 같은 모든 수입을 총칭한 것으로 봄이 더 타당하다. LivingBible은 '솔로몬의 세입금'이라는 말 앞에 '아랍 왕들과 다른 나라의 왕들로부터 받아들인'이라는 구절을 덧붙이고 있어 위의 해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주); 육백 육십 육금 달란트 - 이는 무게 단위로 환산하면 금 약 23톤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를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왕상 10:14 주석 참조.
성 경: [대하9:14]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의 부귀]
(주); 그 외에 또 상고와 객상들의 가져 온 것 - 본절의 바른 번역은 '상고와 객상들이 가져온 것 이외에...'이다(KJV, RSV). 즉, 다시 말하면 솔로몬의 세입금에는 상고와 객상들이 가져온 것이 포함되었고 그 외에 아라비아 왕들과 그 나라 방백들이 가져온 것이 있었다는 뜻이다. 한편 여기서 '상고'(商賈)란 무역을 목적으로 각 나라를 탐색하며 여행하는 군소 상인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객상'(客商)은 상고와 마찬가지이긴 하나 그들보다는 좀더 규모가 큰 상업 행위에 종사하는 자들을 가리킨다(Keil, O.Zockler). 추측컨대 이들 상고나 객상들의 상업 활동에는 일정한 세금이 부과되었을것이다.
(주); 아라비아 왕들 - 이스라엘과 인접한 아라비아 사막의 소국(小國) 왕들을 가리킨다. 당시 이 지역에 왕들은 모두 솔로몬의 통치 하에 있어
해마다 솔로몬에게 공물(貢物)을 바쳤던 것 같다. 왕상 10:15 주석 참조.
성 경: [대하9:15,16]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의 부귀]
(주); 매 방패에 든 금이 육백 세겔이며...삼백 세겔이라 - 히브리 원문에는 '세겔'(shekel)이라는 금의 단위 표시가 없다. 대신 평행 구절인 왕상 10:17에는 작은 방패에 든 금이 삼 마네(maneh)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마네는 약 571.2g으로 50세겔 정도에 해당한다. 따라서 삼 마네는 150세겔이 되어 본절의 삼백 세겔의 1/2에 해당된다. 그래서 NIV에서는 세겔 대신 '베가'(beka)라는 단위를 쓰고 있는데 베가는 5.71g으로 세겔의 1/2에 해당된다. 따라서 300베가는 150세겔, 즉 3마네와 일치하게 된다. 한편 페인(Payne)의 주장에 따르면 마네에는 중(重) 마네가 있고 경(輕) 마네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 마네는 100세겔, 경 마네는 50세겔 정도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역대기 저자는 왕상 10:17에 나오는 마네를 중 마네로 보고 본절에 이를 삼백 세겔로 계산했음이 분명하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주); 레바논 나무궁 - 솔로몬은 금으로 만든 방패들을 자기 궁에 보관하였다. 그런데 솔로몬의 궁을 '레바논 나무궁'이라고 부른 까닭은 그 궁의
주요 기둥과 들보, 마루 등을 레바논의 백향목(ceder)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왕상 7:2-5).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상 7:2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9:17]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의 부귀]
(주);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 상아(象牙)는 코끼리의 어금니이다. 그리고 솔로몬이 이것으로 보좌를 만들었다는 것은 상아로 장식한 보좌를
만들었다는 뜻이다(B hr). 한편 고대 근동 사회에서 상아는 대개 유브라데 강 상류 지역에 서식하던 코끼리 떼에서 얻었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극히 구하기 힘든 상아를 해운업을 통하여 얻었다(Curtis). 이로 볼 때 솔로몬의 위력은 구하기 힘든 것 조차도 쉽게 구할 수
있을 만큼 근동 지역에서는 대단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대하9:18]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의 부귀]
(주); 여섯 층계...사자가 하나씩 섰으며 - 솔로몬의 보좌가 이렇게 여섯 층계로 이루어져 있고 팔걸이 양 옆에는 사자가 한 마리씩 서 있으며 또
보좌 뒤에는 둥근 머리(왕상 10:19)가 있었다는 사실은 솔로몬 왕의 막강한 권세와 힘을 상징해 준다. 왕상10:20 주석 참조. 그러나 그러한 그의
영화로운 왕권도 실상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반면에 영원한 평강의 왕이신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초라한 모습으로 오셔서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저를 살리사 결코 쇠하지 않는 영광으로 가득찬 영원한 보좌에 앉히셨으니 솔로몬의 영광은 그에
비할 바가 못되는 것이다(눅 1:33; 히 2:9; 5:9; 8:1; 12:2).
성 경: [대하9:19]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의 부귀]
(주); 또 열 두 사자가 있어 그 여섯 층계 좌우편에 섰으니 - '사자'는 백수(百獸)의 왕으로서 흔히 통치와 심판을 상징한다. 그런데 솔로몬의 보좌의 열 두 사자 형상은 만민 중 제사장 나라로 택함받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상징한 것으로 이해된다(출19:6). 한편 마 19:28에서 예수께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하셨다(눅 22:30; 계 3:21). 따라서 본절과 마 19:28의 말씀을 비교해 볼 때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은 훗날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임을 알 수 있다.
(주); 아무 나라에도...없었더라 - 이 말은 당시 근동 지역에서 솔로몬의 보좌만큼 그 규모나 형태 및 화려함 등에 있어 웅장한 것은 없었다는
뜻이다. 한편 솔로몬의 보좌에 팔걸이가 있고 또한 사자 장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양식(樣式)은 애굽의 것에서 영향받은 듯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발굴되고 있는 페르시아 왕들의 보좌에는 솔로몬의 것과 같은 팔걸이가 없기 때문이다(Toombs). 왕상 10:19 주석 참조.
성 경: [대하9:20]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의 부귀]
(주); 은을 귀히 여기지 아니함은 - 은을 페르시아 시대(B.C. 500년경) 이전까지는 모든 금속들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이었다. 그러다가 페르시아 때
많은 은이 시장에 흘러 나옴으로써 은과 금의 비율이 비로소 역전되었다. 그러므로 그 이전 시대에 이미 솔로몬이 은을 돌같이 흔하게 여길
만큼(27절; 왕상 10:27) 풍부히 사용하였다는 것은 솔로몬의 왕국의 부(富)가 그만큼 극에 달했다는 강조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성 경: [대하9:21]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의 부귀]
(주); 왕의 배들이...다시스로 다니며 - 평행 구절인 왕상 10:22에서는 솔로몬 왕의 배들을 '다시스 배'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왕상 22:48에도
'다시스의 선척'이라는 호칭이 있고 이 배는 에시온게벨에서 파선(破船)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왕의 배들이 '다시스로 다니며'라는 본절의
기록은 잘못된 것 같다(Curtis, Payne). 왜냐하면 왕상 22:48에 의거할 때 '다시스의 선척'이 지중해 서부 지역에 해당하는
에시온게벨(Ezion-geber)까지 운행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다시스(Tarshish)는 오늘날 스페인의 타티스(Tartessus)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왕상 10:22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9:22]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의 권세]
(주); 왕의 재산과 지혜가...큰지라 - 솔로몬의 막대한 부(富)와 뛰어난 지혜는 일찍이 그의 통치 초기 기브온 산당에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1:12)의 성취이다. 그런데 그러한 솔로몬의 지혜와 재산의 크기가 천하 열왕의 그것과 비교되고 있는 것은 그가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19절 주석 참조.
성 경: [대하9:23]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의 권세]
(주); 그 얼굴을 보기 원하여 - 여기서 '보기 원하여'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메바케쉼'(*)은 '찾다'는 뜻의 '바카쉬'(*)에서 온 말로서 '계속해서
찾는다'는 뜻이다. 이는 곧 이방 왕들이 솔로몬 왕 만나기를 몹시 원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 백성을 통하여
스스로 영광을 취하시게 될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계 1:6, 7).
성 경: [대하9:24]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의 권세]
(주);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나 -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 예물을 가지고 가는 것은 그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널리 알려진
관습이었다(왕하 5:15). 그러나 본절 하반부의 '해마다 정한 수가 있었더라'는 말에 비추어 볼 때 여기서 '예물'이란 공물(貢物)로서의 성격을
지녔던 것 같다. 왕상 10:25 주석 참조.
성 경: [대하9:25]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의 권세]
(주); 말의 외양간이 사천이요 - 본절과 달리 왕상 4:26에는 솔로몬이 소유한 말의 외양간이 '사만'이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필사상의 오기(誤記)일 것이다. 왜냐하면 왕상 10:26에 나오는 솔로몬의 병거 일천 사백과 마병 일만 이천의 숫자로 미루어 보아 본절의 '사천'이란 수가 보다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상 4:26 주석을 참조하라.
(주); 마병이 일만 이천이라 - 솔로몬이 이처럼 병거와 마병을 모은 행위가 하나님의 율법에 저촉된 것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1:16 주석에서 살펴본
바이다. 이에 관해서는 왕상 10:26 주석에서 상세히 언급하였으니 참조하라.
성 경: [대하9:26]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의 권세]
(주); 솔로몬이...열왕을 관할하였으며 - 본절은 병행 본문인 왕상 10장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솔로몬은 에돔 왕인 하닷과 아람족 르손의 반역(왕상
11:14-25)으로 인해 제국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그의 통치 말년에 이르기까지 선왕(先王) 다윗이 정복해 놓은 영토를 잘
수호하였다(삼하 8:11, 12; 왕상 4:20-25; 대상18:11-13). 솔로몬이 국내적으로 거대한 건축 사업을 진척하여 국력을 소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1) 주변 국가, 특히 애굽 왕의 딸과의 정략 결혼(왕상 11:1), (2) 국제 무역을 통한 경제적 번성으로
외교적 우위 확보(22-24절), (3)성읍의 요새화 및 군대의 대규모화(25절; 8:4-6)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이 이같이 넓은 땅을
치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언약 성취 때문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즉, 창 15:18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땅에 대한 언약(출
23:31)이 다윗과 솔로몬 치세에 이르러 구체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역대기 기자가 솔로몬의 통치권의 광대함을 기록한 데에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권을 드러내고자 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성 경: [대하9:27]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의 권세]
본절은 이미 1:15에서 언급된 내용이다. 그런즉 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그곳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주); 은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 - 당시 화폐로 통용되던 은이 돌같이 흔했다는 것은 솔로몬 왕국의 부와 영화가 극에 달하였음을 가리키는 강조적 표현이다. 20절 주석 참조.
(주);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같이 - 본절은 앞 부분과 함께 히브리인들의 전형적인 대구법을 이룬다. 즉, 본절 역시 앞 부분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귀중한 것(백향목)을 흔해 빠진 것(뽕나무)에 비유하여 그 많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왕상 10:27 주석 참조.
성 경: [대하9:28]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의 권세]
(주); 솔로몬을 위하여...말들을 내어왔더라 - 솔로몬이 수입한 말들에 관해서는 평행 구절인 왕상 10:28 주석을 참조하라.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주변국들이 솔로몬에게 어떤식으로든 말들을 제공했다는 것은 일종의 군사적인 복속(服屬)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있다. 14절 주석 참조.
성 경: [대하9:29]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의 죽음]
(주); 이 외에 솔로몬의 시종(始終) 행적은...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 본절과 왕상11:41에 의거할 때 솔로몬의 행적에 관한 많은 기사는 '선지자
나단의 글'과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과 '선견자 잇도의 묵시책' 그리고 '솔로몬의 행장' 등에 의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자료에 관해서는
역대상 서론, '역대기의 자료'에서 언급하였으니 참조하라.
성 경: [대하9:30,31]
주제1: [솔로몬의 영광]
주제2: [솔로몬의 죽음]
(주); 그 열조와 함께 자매 - 본절은 열왕들의 통치를 마감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 쓰이는 전형적인 표현이다(왕상 11:43; 14:31; 15:24; 왕하 9:28). 그런데 본서 기자는 특히 '그 열조와 함께 자매'와 같은 표현을 통하여 솔로몬이 조상들과 깊은 연관이 있었음과 또한 솔로몬의 후대에도 선대(先代)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동일한 언약(대상17장)이 역사가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주); 다윗의 성에 장사 되고...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B.C. 970년경에 등극한 솔로몬이 40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다윗성에 장사된 해는 B.C.
930년경이었다. 여기서 역대기 기자는 솔로몬 통치 후기에 발생했던 우상 숭배, 속국(屬國)들의 반란 및 여로보암의 반역에 관한 기사들(왕상
11:26-40)을 모두 생략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르호보암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죄악이나 실수가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나
통치를 바꾸지 못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또 역대기 저자의 관심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의 역사에 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성 경: [대하10:1]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에 대한 백성들의 요구]
(주);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 솔로몬과 암몬 여인 나아마의 소생(왕상 14:31)인 르호보암(Rehoboam)은 성경상에 유일하게 언급되고 있는 솔로몬의 아들이다. 따라서 그러한 그가 솔로몬의 사후(死後), 차기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왕위에 오른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당시 신정 국가인 이스라엘 사회에서 비록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세워지는 왕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백성들의 지지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르호보암은 북쪽 이스라엘 열 지파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당시 북쪽 지파들의 중심지였던 세겜(수24:1; 삿 9:7)을 방문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회에서 왕의 추대는 온 백성의 일치된 마음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사울, 다윗, 솔로몬의 경우 역시 그러하였다(삼상 11:15; 삼하 5:3; 대상 11:3). 그러므로 온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왕은 진정한 그들의 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주); 세겜 -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 있는 성읍으로 예루살렘 북쪽 약 58km 지점이다. 오늘날의 지명은 나불루스(Nabulus)인데 한때는
네압볼리(Neabolis)로도 불리운것 같다(P.C. Barker). 이곳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속하였는바(수 20:7) 일찍부터 종교, 정치의 중심지였다. 왕상
12:1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0:2]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에 대한 백성들의 요구]
(주); 여로보암...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 -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Jeroboam)은 일찍이 아히야의 예언(왕상 11:30-32)을 통하여 장차 자신이 이스라엘 10지파를 통치할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사전(事前)에 솔로몬에게 발각되어 애굽으로 망명하여(왕상 11:40) 시삭(Shishak)의 보호 아래 있었다. 그런데 역대기 기자가 여로보암에대한 이와 같은 서론적 배경을 제시하지 않고(왕상 11:26-40) 곧바로 본절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당시에 독자들이 그러한 역사적 배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Curtis).
(주); 이 일을 듣고...돌아오매 - 여기서 '이 일'이란 솔로몬 왕의 죽음(9:31)을 가리킨다. 이제 솔로몬이 죽었기 때문에 여로보암은 더이상 애굽
망명 생활을 계속할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자신에게 주어진 이스라엘의 10지파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속히 애굽에서부터 돌아오려 했을
것이다.
성 경: [대하10:3]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에 대한 백성들의 요구]
(주); 무리가 보내어 저를 불렀더라 - 본절과 병행 구절인 왕상 12:1-3에서는 '여로보암이 애굽에 있는 중에 무리가 보내어 저를 불렀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와 달리 본문에서는 여로보암이 애굽에서 돌아온 이후에 무리가 저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두 저자들이 여로보암이 애굽에서 돌아온 동기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따른 차이이다. 즉, 열왕기 저자는 여로보암의 환국(還國) 동기가 북쪽 10 지파의 반란 요청에 의하여 정권을 잡기 위한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보았다. 반면에 역대기저자는 여로보암의 환국이 단지 망명 생활의 청산을 의미하며 그 후에 10지파의 요청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미묘한 차이이긴 하지만 역대기 저자는 여로보암이 타의에 의해서 보다는 좀더 자의에 의해서 반란을 주도했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다.
(주);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이 와서 -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란 1절과 마찬가지로 '북쪽 열 지파'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같이 쉽게 여로보암과 결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인 듯하다. 즉, 과거 솔로몬이 다윗 성을 수축할 때 여로보암은 요셉
족속을 감독하는 자로서(왕상 11:28) 강제 노역과 막중한 세금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불평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여로보암과 백성들의
마음이 통하였기 때문이다.
성 경: [대하10:4]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에 대한 백성들의 요구]
(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니 - 성경에서 '멍에'는 대개 비유적으로 속박과 노예 상태를 의미한다(레 26:13; 사 14:25). 여기서도 이는 과거 솔로몬이 백성에게 지운 강제 노역을 의미한다. 왕상 12:4 주석 참조. 이로 볼 때 솔로몬은 성전과 궁전을 완공하고 난 이후에도 기타 여러 건축 사업을 무모하게 추진하여 지나치게 개인적인 영화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8:1-6). 따라서 통치자의 그러한 무모한 정책과 계속적인 허영심은 백성들에게 못내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멍에를 안겨 준 것이다(신17:17, 20).
(주); 왕은...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 430년 동안 애굽의 혹독한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출 12:40, 41) 자유로운 몸이 된
자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처럼 자기들의 왕에게 강제 노역을 감해 달라고 간청하게 되었다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로 볼 때 솔로몬이 끝까지
백성을 위한 통치를 펼쳤더라면 왕국 분열의 비극은 발생치 않았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왕상 12:4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0:5]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에 대한 백성들의 요구]
(주); 삼 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 - 르호보암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온 여로보암을 보고 신중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강제
노동과 과중한 부역(賦役)을 감해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가 어느 정도 정당한 것이긴 하지만 선뜻 응해 주었다가는 여로보암의 기세가 앙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르호보암은 자기의 모사(謀士)들과 이 일에 대하여 논의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왕상 12:4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0:6,7]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노인들의 충언과 소년들의 간언(間言)]
(주); 노인들과 의논하여 - 여기서 '노인들'(*, 제케님)이란 '장로' 또는 '원로신하'를 가리키는 말로서 과거에 솔로몬이 거느렸던 '모사들'을 가리킨다. 이 노인들은 르호보암에게 백성들을 후대하는 유화 정책(宥和政策)을 쓸 것을 충고했다. 본절과 병행하는 왕상 12:7에는 보다 강력한 어조인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란 말이 나온다. 그렇지만 역대기 저자의 입장에서는 왕이 백성들의 종이 된다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왕이 유화 정책을 쓴다면 백성들이 왕의 종이 될 것이라'고 달리 표현하였을 것이다. 즉, 역대기 저자는 '왕은 오직 하나님의 종이지 백성들의 종은 될 수 없다'는 사상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 선한 말 - 이에 해당하는 '드바림 토빔'(*)은 본래 상대방을 기쁘게 해 주는 말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는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정당한
요구에 대하여 승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왕상 12:7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0:8]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노인들의 충언과 소년들의 간언(間言)]
(주); 왕이 노인의 교도(敎導)하는 것을 버리고 - 여기서 '교도하는 것'(*, 에차)이란 타인에게 주는 진정한 충고나 조언을 의미한다. 그리고 '버리다'(*, 아자브)란 탐탁치 않게 여기거나 무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보아 르호보암은 자신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여로보암을 대동하고 나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크게 분노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노인들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주); 함께 자라난 소년들과 의논하여 - 여기서 '함께 자라다'는 말은 르호보암과 같은 교육을 받고 비슷한 경험을 하므로 말미암아 같은 사상과
같은 경향을 지니게 된 것을의미한다. 그리고 '소년'에 해당하는 '옐레드'(*)는 어린아이로부터 장성한 청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때 나이 41세였으니(왕상 14:21) 여기서 '소년'이란 르호보암 또래의 동년배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즉, 르호보암은 왕이 된 후 자신과 함께 자라 온 측근들을 새로이 모사로 기용하였던 것이다. 왕상 12:8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0:9]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노인들의 충언과 소년들의 간언(間言)]
(주); 너희는 어떻게 교도하여 - 이 질문 속에서 우리는 이미 르호보암이 어떤 답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르호보암은 이미 이 신진
세력들을 중심으로 왕권을 구축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성 경: [대하10:10]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노인들의 충언과 소년들의 간언(間言)]
(주); 나의 새끼 손가락이 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 이러한 비유적 표현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나는 나의 부친이 했던
것보다 더욱 혹심하게 너희들을 억압할 능력과 의지가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여기선 르호보암의 하찮은 재주나 능력이 솔로몬의 전능력과
힘보다 뛰어나다고 역설됨으로써 르호보암의 철권(鐵券) 통치 의지가 시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상 12:10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10:11]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노인들의 충언과 소년들의 간언(間言)]
(주); 채찍으로 - 여기서 '채찍'은 솔로몬의 가혹한 통치를 의미한다. 한편 당시 애굽에서의 왕권의 상징은 채찍이었다. 그러므로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솔로몬의 정책을 애굽의 바로 왕과 같은 폭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에 상응하는 표현이라 하겠다.
(주); 전갈로 하리라 - 여기서 '전갈'은 단순히 '채찍'으로 비유하기에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엄청난 압정(壓政)을 상징한다. 그런데 대개의
학자들은 본절의 전갈을 절지 동물로서의 전갈(scorpion)이 아니라 날카로운 금속 조각으로 만든 채찍의 한 종류로 이해한다(Curtis. 왕상 12:11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0:12]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르호보암]
(주); 여로보암과 모든 백성이...나아왔으니 - 약속대로 여로보암과 모든 백성은 다시 삼일만에 르호보암 앞에 나아왔다(5절). 그런데 이미 그 삼일
동안 르호보암의 마음은 강경 정책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따라서 이제 남북 분열은 피할 수 없게 되었는바 하나님의 예언 성취의 때가 목전에
도래한 것이다(왕상 11:26-39).
성 경: [대하10:13]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르호보암]
(주); 포학한 말로 대답할새 - 여기서 '포학한 말'이란 '완고한 말' 또는 '분노에 찬 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르호보암은 몹시 마음이 강퍅하여지고
분노하여진 상태에서 대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르호보암은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친 나머지 다윗의 왕권이 얼마나 큰 백성들의 지지에 의해
세워진 것인가를 기억하지 못하고 전형적인 동양의 전횡(專橫) 군주처럼 백성들을 무시하려 든 것이다.
성 경: [대하10:14]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르호보암]
(주); 나는 더할지라...나는 전갈로 하리라 - '내가...하리라'와 같은 르호보암의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간 어리석은 통치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분명히 솔로몬에게 '내가 너로 내 백성을 치리하게 하였다'고 말씀하셨고 솔로몬도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라고 했다(1:10, 11).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정치인들은 기껏해야 채찍과 칼로 마치 백성들이 자기 소유물인 양 다스릴
뿐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무고히 피흘린 자들의 음성을 들으시고 반드시 보수(報酬)해 주시는 분이시다(창 4:10; 9:6). 예수께서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고 말씀하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성 경: [대하10:15]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르호보암]
(주); 이 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 '이 일'은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요청에 대하여 거부한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역대기 저자는 이
일을 하나님의 섭리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했다. 즉, 이로써 이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하게 되었는데 이는 분명 솔로몬에게 예고되었던 형벌이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 성취되게끔 배후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셨음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왕상 11:29-33). 왕상 12:15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0:16]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열 지파의 반란]
(주);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 이것은 다윗 왕조 자체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이고도 강경하게 표현한 말이다. 본래 이 말은 세바(Sheba)가 다윗을 거스려 반역 운동을 일으킬 때 사용한 '격문'이었는데(삼하 20:1) 이제 르호보암 대적자들의 구호가 되었다. 한편 백성들의 이 구호는 단순히 르호보암의 왕권을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윗의 왕조 전체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이 다윗 왕조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대상 17장)을 파기하는 죄악을 범하고 말았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가 여호와이심을 망각하고 단지 르호보암의 악정을 비난한 탓에 생긴 어리석은 소치이다. 백성들은 비록 자기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여호와께서 참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심을 믿어야 했으며 그 근본을 부인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남북 분열 책임은 솔로몬, 르호보암,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 있었다고 하겠다.
(주); 온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 이는 백성들이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 뜻이 아니라 세겜에 있는 그들의 집합 장소로
돌아갔다는 뜻인 것 같다. 한편 팔레스틴은 지리적으로 남북이 크게 나누어져 있어서 더욱더 정치적 분열을 조장하기가 쉬웠다(Payne, Wycliffe).
성 경: [대하10:17]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열 지파의 반란]
(주);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 - 이는 당시 유다 지경(地境)에 거주하고 있던 북쪽 이스라엘 열 지파 출신들도 포함해 지칭하고 있는
말이다. 왕상 12:17 주석 참조. 아마 그러한 북쪽 출신 사람들은 자기 고향 사람들이 여로보암과 함께 르호보암앞에 나섰을 때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협상이 결렬된 뒤에도 그들이 여전히 유다 성읍들에 남아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다시금 르호보암을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남북이 서로 단절된 상태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기가 힘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다윗 왕조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는 경건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11:17).
성 경: [대하10:18]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열 지파의 반란]
(주); 감독 하도람을 보내었더니 - 하도람(Hadoram)은 왕상 12:18에서 아도니람(Adoniram)으로도 번역되어 있긴 하나 실제 원문상의 이름은
'아도람'(*)이다. 그런데 시대적으로 보아 이 자는 다윗 시대의 인물인 아도니람(삼하 20:24)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듯하다. 한편 르호보암이
하도람을 북쪽 열 지파에게 보낸 까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즉, (1) 격노한 지파를 달래어 협상을 하려고 했거나(Keil), (2) 아니면
그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하려고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때 까지만해도 르호보암은 이스라엘 열 지파가 유다 지파에게서 분리되어 나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감독 하도람을 돌로 쳐죽인 것을 보고는 자신의 강압이 그들에게 소용이 없음을 알고 예루살렘으로 피신한
것이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북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으니 유다와 베냐민 지파 18만명을 모아 무력으로 그들을 굴복시키고자 한 것이 바로
그 단적인 증거이다(11:1).
성 경: [대하10:19]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열 지파의 반란]
(주);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 역대기 저자는 북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였다는 사실을 결론으로 더 이상 북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즉,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북쪽 지파들이 어떻게 여로보암을 그들의 왕으로 삼았는가(왕상 12:20 이하)를 전혀 언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 북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해서도 모두 생략해 버렸는데 떠났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도 우리는 역대기 저자가 철저히 다윗의 언약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기술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 본서 기자인 에스라가 여기서 열왕기와 똑같이 '오늘날까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시대적 착오에
의한 잘못된 기록이 아니다. 대신 이는 에스라 시대에도 과거 남북 왕국의 분열 및 대치 상황을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었다는 뜻으로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왕상 12:19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성 경: [대하11:1]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전쟁을 막으시는 하나님]
(주); 유다와 베냐민 족속을 모으니 - 르호보암은 남유다로부터 분리해 나간 열 지파(10:16-19)를 무력으로 회복하기 위해 용사 18만을 징집했다.
이들 중에는 의외로 베냐민 지파가 함께 하였는데 예루살렘 상실을 원치 아니한 저들의 목적이 유다 지파와의 연합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왕상
12:21 주석 참조. 한편 징집된 용사는 모두 18만이라고 했는데, 아비야 왕 때는 40만(13:3). 아사 왕 때는 58만(14:8). 여호사밧 왕때는
116만(17:13-19)이었던 것에 비교해 볼 때 그리 많은 수는 아니다.
성 경: [대하11:2]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전쟁을 막으시는 하나님]
(주);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 -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이란 '선지자'를 일컫는 또 다른 표현이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의 남북 전쟁을
중단시켰던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는 애굽 왕 시삭(Shishak)의 침입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했었으며(12:5-7) 르호보암의 행적에 관한
역사를 기록하기도 했다(12:15). 한편 '제사장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역대기서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등장하고
있다(12:5;15:1;18:6,7;19:2;20:37;21:12;24:20-22). 그런데 역대기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선지자들은 다른 성경에 나타나는 선지자들과는 달리 신정
국가(神政國家) 수호자로서의 기능이 매우 두드러진다. 그래서 이들은 대부분 유다 왕들 곁에서 왕을 인도, 충고, 교훈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 경: [대하11:3]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전쟁을 막으시는 하나님]
(주); 유다와 베냐민의 이스라엘 무리에게 - 본서 기자는 남유다를 지칭할 때는 대개 '이스라엘' 앞에 다른 수식 어구를 붙이고, 북이스라엘을
지칭할 때는 '이스라엘'만으로 표기한다. 그러나 다른 성경 저자들과는 달리 유다를 가리켜 종종 '이스라엘'로 표기하는 것 또한 본서 저자의
특징이다(12:1;15:17;21:4;28:19, 27).
성 경: [대하11:4]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전쟁을 막으시는 하나님]
(주); 너희 형제와 싸우지 말고 - '형제'에 해당하는 '아흐'(*)는 한 뿌리에서 나온 광범위한 후손을 모두 지칭하는 말이다. 사실 남왕국 유다도 북왕국 이스라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점에서 한 형제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동족 상잔(同族相殘)의 비극만은 피해야 했던 것이다. 왕상 12:24 주석 참조.
(주);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 10:15에서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남북 왕국의 분열을 죄를 징치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를 돌이키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왕국의 분열은 긴 계시 역사적
안목에서 볼 때 행악자와 불신자를 제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가지치기에 해당하는 것이며 마지막 '남은 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
하겠다(사 10:22;롬 9:27).
성 경: [대하11:5]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유다의 방비성]
(주); 유다 땅에 방비(防備)하는 성읍들을 건축하였으니 - 르호보암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북이스라엘 공격하는 것을 포기하고(1-4절) 이제
이처럼 자체 정비 사업에 몰두하였다. 한편 르호보암이 건축한 도시들과 과거 솔로몬이 건축했던 도시들(왕상 9:15,17, 18)을 비교해 보면 서로
전혀 다른 도시들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과거에 이미 애굽의 침입으로 혼이 났던 이스라엘은(왕상 9:16) 이제 남북이 서로 분열된 상태에서
또다시 애굽의 침입을 받게 될 때 치명적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대비하여 새로운 성읍을 더 건축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성 경: [대하11:6]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유다의 방비성]
(주); 베들레헴 - 예루살렘 남방 8km 지점의 고지대에 위치한 베들레헴은 지형이 험악한 편이어서 천연적으로 요새로서의 여건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룻 1:2 주석을 참조하라.
(주); 에담 - 혹자에 따르면 오늘날의 '아인아다'에 해당되는 에담(Etam)에는 예루살렘에 물을 보낸 주는 급수지가 있었다고 한다(O. Zockler). 그런데 이곳은 삿 15:8;대상4:32에 나오는 '에담'과는 이름만 같을 뿐 서로 다른 지역이다.
(주); 드고아 - 베들레헴 남쪽 약 8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산지이며 이전부터 요새로 유명했다(삼하 23:26;대상 4:5;암 1:1).
성 경: [대하11:7]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유다의 방비성]
(주); 벧술 - 헤브론 북쪽 약 6km 지점에 위치해 있었으며 당시 가장 강한 요새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단지 조그만 마을로 남아 있을 뿐이다(수15:58;느 3:16).
(주); 소고 - 예루살렘 남서쪽 약 14km 지점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전에 솔로몬 왕국에 식물을 공급해 주었다(왕상 4:7). 이 '소고'(Shoco)는 오늘날의 '에스 수웨크'(es-suweke)에 해당되며 대상 4:18의 소고와는 다른 곳으로 추정된다.
(주); 아둘람 - 오늘날의 '텔 에쉬-세이크 마드쿨'(Tell esh-Sheikh Madhkur)로 추측되는 이 도시는 부근에 회석벽의 굴이 많아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이곳에 숨은 적이 있다(삼상 22:1, 2).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11:8]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유다의 방비성]
(주); 가드 - 블레셋의 5대 도시 중의 하나(삼하 1:20)인 가드(Gath)는 다윗이 정복한 도시이나(대상 18:1) 그곳은 블레셋 사람들이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솔로몬 때에는 자체 내에 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왕상 2:39). 그러나 솔로몬 시대 이후로 이곳은 분명히 유다의 정복지였는바(9:26) 르호보암이 이곳을 개수 보강(改修補强)하였다.
(주); 마레사 - 헤브론과 블레셋 사이 쉐펠라(Shephelah) 지역에 있는 도시로서 현재의 '마라스'이다(수 15:44).
(주); 십 - 헤브론 동남방 1km 지점에 있는 산지의 성읍이다. 한때 다윗이 사울을 피해 이곳에 숨기도 했다(삼상 23:14-24).
성 경: [대하11:9]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유다의 방비성]
(주); 아도라임 - 헤브론 서쪽 10km 지점에 위치해 있었는데 오늘날의 두라(Dura)이다(Rabinson).
(주); 라기스 - 예루살렘 남서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었으니 곧 가사에서 헤브론으로 가는 도상이다. 최근에 발굴된 이 도시의 이름은 '텔 엘 헤시'(Tell-el-Hesy)이다. 과거에도 이 성읍은 주요한 변방 도시로 성경에 자주 나타난다(수 10장;왕하 18:14;미1:13).
(주); 아세가 - 베들레헴 남쪽 27km 지점이다. 다윗의 블레셋의 골리앗을 쳐죽인 곳으로도 유명하다(수 10:10, 14;삼상 17:1-49;느 11:30;렘 34:7).
성 경: [대하11:10]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유다의 방비성]
(주); 소라 - 예루살렘 동쪽 65km 지점에 위치했던 곳이다. 원래는 단 지파의 땅이었으나(삿 18:2-11) 단 지파가 북족으로 이주한 이후에는 베냐민 지파의 땅이 되었던 것 같다.
(주); 아얄론 - 여리고와 지중해 사이에 위치했던 성읍이다. 이 땅도 본래는 단지파의 소유였으나(수 19:42;21:24;대상 6:69) 후에 베냐민 지파에 속하게 된 것 같다(대상 8:13). 한편 여호수아의 승리의 노래를 보면 이곳 아얄론 골짜기에 달이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수 10:12, 13).
(주); 헤브론 - 예루살렘 남쪽 30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원래는 기럇아르바(Kirjath-arba)로 불리웠다. 오늘날 이곳은 요르단의 주요 상공업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창 23:2 주석 참조. 한편 이상의 성읍들 중 소라와 아얄마론을 르호보암이 재건한 요새들 중에 가장 북방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헤브론(대상 3:1;6:55, 57)과 다른 성읍들은 모두 유다의 중앙이나 남서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들은 애굽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재건된
성읍들이었다.
성 경: [대하11:11,12]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유다의 방비성]
(주); 유다와 베냐민이 르호보암에게 속하였더라 - 본문은 르호보암이 위의 성읍들(6-10절)을 건축한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즉,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의 성읍들을 강성하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각 성읍들의 복지(福祉)를 꾀하여 민심을 얻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읍들을
강화하여 외적의 침입에서 백성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유다와 베냐민 백성들의 호감을 얻는 데 충분하였을 것이다.
성 경: [대하11:13]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르호보암에게로 돌아온 제사장과 레위인 및 백성들]
(주); 모든 지방에서부터 르호보암에게 돌아오되 - 본절은 당시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예루살렘 성전 부근에만 거주한 것이 아니라 전국에 흩어져
있었다는 사실(민 35:1-8)을보여 준다. 한편 왕상 12:26-28에 따르면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적으로 유다에 의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레위인들을 배척하는 정책을 썼다. 그러자 그들은 북 왕국을 떠나 남왕국으로 이주하였는데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정책에 반대하여남 유다로
남하(南下)한 이 같은 사례는 아사 왕(15:9)과 히스기야 왕 통치 때(30:11,12)에도 있었다. 이들이 향리(鄕里)와 산업을 버리고 유다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고,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가 파괴된 곳에서 누리는 안락한 생활보다 자신들의 본분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더 우선적으로 생각하였다는 증거이다. 그들의 이 같은 행동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해 준 땅으로 간'(창
12:1-4) 아브라함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열 두 제자(마 19:27-29;눅 5:11)들의 행동과 흡사하다.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길에서 만나는 궁핍은 죄악의 길에서 만나는 풍요보다 더 낫고, 타락된 양심을 가지고 부귀와 쾌락 속에 뒹구는 것보다는 연보에 의존하여
먹고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은 삶이다"(Matthew Henry). 한편 역대기 기자는 이때에 여호와의 신실한 종들이 르호보암 편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하여 본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었음이 분명하다(Curtis).
성 경: [대하11:14]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르호보암에게로 돌아온 제사장과 레위인 및 백성들]
(주); 향리(鄕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그라쉬'(*)는 목축지나 마을과 건물들로 둘러 쌓여 있는 땅을 가리킨다. 당시의 마을들은 이러한 땅을 중심으로 둥글게 집들이 세워져 있었다. 한편 율법에 따르면 레위인들의 땅은 절대로 팔 수가 없게끔 규정되어 있었다(레 25:34). 따라서 남유다로 이주한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땅을 버리고 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 산업을 떠나 - 여기서 '산업'이란 레위인들이 가지고 있던 집이나 부동산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소유물도 결코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없었다(레 25:29-34). 그러므로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이전의 향리와 산업을 떠난다는 것은 완전한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그들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낸 자들은 그들을 죽음가운데로 몰아넣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여로보암의 악정(惡政)에 의한 성직자들의 희생이 얼마나 컸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주); 여로보암...저희를 폐(廢)하여 - 평행 구절인 왕상 12:31에서는 여로보암이 레위인들 대신 레위인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소극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본서에서는 이처럼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폐한 사실이 강조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여로보암의 행위가
여호와께 대한 범죄임을 부각시키고 제사장들의 수난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즉, 비록 여로보암이 여호와 숭배를 폐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본서
기자인 에스라의 편지에서 볼 때 그가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을 몰아낸 것은 여호와께 범죄한 것이었음이 틀림없었다.
성 경: [대하11:15]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르호보암에게로 돌아온 제사장과 레위인 및 백성들]
본절에서 역대기 저자는 여로보암식의 여호와 숭배를 전적으로 우상 숭배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주); 산당 - 이에 해당하는 '바마'(*)는 본래 '높은 곳'(hights)을 가리킨다(신32:13;사 58:14;암 4:13;미 1:3). 이곳에서는 대개 우상 숭배가 성행하였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여호와 숭배도 행해졌었다(삼상 9:12-25;왕상 3:4;왕하15:35). 그런데 열왕기 저자는 이러한 산당을 일시적인 여호와의 예배처에서 점점 더나아가 전적인 우상 숭배의 근거지가 된 것으로 보았으나 역대기 저자는 처음부터 이를 우상 숭배지로 단정짓는 경향이 강했다(14:3;15:17;17:6;20:33;21:11;34:3).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하 16:1-9 강해, '산당 예배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주); 수염소 우상 - 여로보암의 후계자들은 수염소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기도 했는데 이 우상은 황량한 사막의 신으로 순수한 영(spirits)이 아닌 몸이 있고 털이 많은 신으로 알려져 있다. 애굽의 판(Pan) 신이 바로 이와 유사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여로보암이 애굽에서 이 신을 빌어온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창안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Curtis). 이 수염소 신은 레 17:7에도 언급되어 있으니 보다 자세한 사항은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주); 송아지 우상 - 여로보암은 여호와를 상징하는 금송아지를 둘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세웠다(왕상 12:28, 32). 여로보암이 이와 같은 상징을
도입한 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했던 역사적 사실(출 32:1-4)에서도 힌트(hint)를 얻었겠지만 가나안인들이 황소로 바알
신의 상징을 삼았던 것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Curtis).
성 경: [대하11:16]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르호보암에게로 돌아온 제사장과 레위인 및 백성들]
(주); 마음을 오로지하여...여호와를 구하는 자들 - 이미 13절에서 언급하였듯이 아사 왕때나(15:9), 히스기야 왕 때에도(30:11) 북왕국의 경건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왕국으로 내려왔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내려옴으로 말미암아 남왕국은 더욱더 강성해져
갔었다(17절). 이처럼 역대기 저자는 남왕국이 강성케 됨을 경건한 자들의 이동탓으로 봄으로써 참 신앙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성 경: [대하11:17]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르호보암에게로 돌아온 제사장과 레위인 및 백성들]
(주); 삼 년 동안 - 르호보암의 번영이 3년만에 끝난 이유는 바로 르호보암 제 5년에 애굽의 시삭(Shishak)이 침입한 때문이다(12:2;왕상 14:25). 그러나 시삭의 침입은 역대기 저자의 관점에서 볼 때 르호보암과 백성들의 종교적인 열심이 식어버렸다는 단적인 증거였다. 즉, 그들이 순종하며 종교적인 열심이 뜨거웠을 때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되어 나라는 강해져 갔으나 르호보암 제 4년부터 그 종교적인 열기가 식어가면서 왕국은 약화되었고 급기야 시삭의 침입으로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 다윗과 솔로몬의 길 - 역대기 저자는 솔로몬의 우상 숭배(왕상 11:4-8)를 완전히 무시하면서 그를 다윗과 같은 선상에 두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열왕기 저자는 왕상11:4-8에서 솔로몬의 우상 숭배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양 저자의 각기 다른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역대상 서론, '주제 및 특징'을 보다 참조하라.
성 경: [대하11:18]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르호보암의 아내와 자녀들]
한글 개역 성경상의 번역만으로는 본절에 나오는 자들의 인척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그런데 공동 번역의 번역문은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그것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르호보암은 다윗의 아들 여리옷이 이새의 아들 엘리압의 딸 아비하일에게서 낳은 마할랏을 아내로 맞았다."
(주); 다윗의 아들 여리못 - 다윗의 아들 중에 여리못(Jerimoth)이 있었다는 기록은 이전까지는 전혀 없었다(삼하 3:2-5;5:14-16;대상 3:1-9;14:4-7). 그래서 혹자는 '여리못'이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인 '이드르암'(*)의 이름(대상 3:3)을 잘못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O. Zockler). 그러나 그가 다윗의 많은 첩들 중에 한 첩에게서 난 아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Curtis).
(주); 엘리압의 딸 아비하일 - 엘리압(Eliab)은 다윗의 맏형이다(삼상 16:6;17:13). 그런데 그의 딸 아비하일(Abihail)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언급된 적이 없고 동명 이인(同名異人)이 나올 뿐이다(대상 2:29). 한편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에서는 아비하일이 르호보암의 두 번째
아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본문 18-20절을 볼 때 아비하일은 그의 첫 번째 아내임이 분명하다(Keil & Delitzsch, vol. III, p. 346).
성 경: [대하11:19]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르호보암의 아내와 자녀들]
본절에 기록된 르호보암의 세 아들 여우스와 스마랴와 사함은 여기 이외에는 재차 언급된 적이 없다. 따라서 그들에 대해서는 이름의 뜻 외에는
달리 알 수 있는 바가 없다. 이 중 먼저 '여우스'(Jeush)는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란 뜻이며 '스마랴'(Shemariah)는 '여호와께서
지켜 주심'이란 뜻이다. 그리고 '사함'(Zaham)은 '몹시 싫어함'이란 뜻이다.
성 경: [대하11:20]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르호보암의 아내와 자녀들]
(주); 압살롬의 딸 마아가 - 압살롬에게는 다말(Tamar)이라는 딸 하나밖에 없었다(삼하14:27). 그러므로 본절의 마아가(Maachah)는 그의 손녀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아가(일명, 미가야)는 다말의 딸인 셈인데 다말은 기브아의 우리엘과 결혼했었다(13:2).
(주); 아비야 - 마아가의 장남인 아비야(Abijah)는 르호보암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22절; 12:16). 그런데 열왕기에는 그의 이름이
아비얌(Abijam)으로 나오는데(왕상 14:31) 아비얌이 본래 이름이고 후에 아비야로 개명(改名)한 것으로 보인다(Keil). 한편 여우스, 스마랴,
사함(19절)과 마찬가지로 르호보암의 다른 아들 앗대, 시사, 슬로밋도 여기 이외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성 경: [대하11:21]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르호보암의 아내와 자녀들]
(주); 아내 십 팔과 첩 육십 - 요세푸스(Josephus)는 르호보암의 첩이 30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어떤 근거에서인지는 분명치 않다(O. Zockler).
그런데 솔로몬도 이와 동일하게 많은 아내와 첩을 두었으나(왕상 11:1-3)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지 않던 역대기 기자가 르호보암의 죄에
대해서는 이처럼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에스라가 솔로몬 만큼은 얼마나 특별하게 다루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일부다처제도의 폐단에 대해서는 창 4:16-24 강해, '일부다처제'와 창 16:1-6 강해, '축첩 제도의 부당성'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11:22]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르호보암의 아내와 자녀들]
(주); 아비야를 세워 장자를 삼아 - 여기서 '장자'란 '머리'(*, 로쉬)라는 뜻인데이는 공식적으로 왕위 계승자임을 나타내기 위한 직함이었던 것
같다(Keil). 따라서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장자로 세워 공동 통치(섭정)의 형태를 취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솔로몬 때와 같이(대상 23:1;29:22)
왕위 계승으로 인한 논란이나 싸움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Payne).
성 경: [대하11:23]
주제1: [르호보암의 초기 통치 3년]
주제2: [르호보암의 아내와 자녀들]
(주); 르호보암이 지혜롭게 행하여 - 르호보암은 일찌감치 아비야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한 후 다른 모든 아들을 유다와 베냐민 땅에 있는 각
성읍으로 보내어 성들을 다스리는 두목이 되게 하였고 재산과 많은 아내를 주어 그들로 불만이 없도록 하였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형제들이 서로
반란하여 왕위 쟁탈전을 벌일까 우려해서이다. 그런데 역대기 저자가 이러한 그의 정책을 지혜롭다고 평한 것은 그가 현명하게 '다윗 왕권'을
보전(保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공(功) 때문에 르호보암이 자식들에게 일부 다처주의를 권장한 잘못을 간과해서는 안됨을
물론이다.
성 경: [대하12:1]
주제1: [르호보암의 쇠퇴]
주제2: [애굽 왕 시삭의 침략]
(주);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매 - 이러한 상태는 그의 통치 초기 3년동안에만 지속되었다(11:17). 즉, 르호보암은 그 3년 동안에는 비교적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나 즉위 4년째 되는 해부터는 점차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나라가 강성해지자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교만과 착각에 빠졌을 것이다.
(주);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 이는 시삭의 침입이 발생한 근본적 원인이 무엇이었는가를 나타내 준다. 왕상 14:23에 따르면 르호보암은 우상 숭배치 말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고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에 하나님께서는 '시삭'이란 도구를 들어 쓰사 르호보암을 징계한 것이다(5, 8절).
(주);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란 유다 왕국의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본서 기자는 이 용어를 모든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데도 사용하였고(9:30), 유다와 대비되는 북왕국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하였다(11:1). 추측컨대 본서 기자가 여기서 유다 백성들의
범죄를 말하면서 그들을 '온 이스라엘'이라고 한 것은 그래도 그들이 지금까지 온 이스라엘 가운데서 하나님의 율법을 고수(固守)해 왔던
자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대하12:2]
주제1: [르호보암의 쇠퇴]
주제2: [애굽 왕 시삭의 침략]
(주); 애굽 왕 시삭 - 시삭(Shishak)은 애굽 역사에서 '솨산크 1세'(Shashank I) 또는'쉐숑크 1세'(Sheshonk I)로 알려져 있으며 애굽의 22왕조를
일으킨 왕이다. B.C. 926년경 시삭이 유다를 침입한 결과들이 오늘날까지 데베(Thebes)의 카르낙(Karnak)에 있는 아몬(Amon) 사원의 벽에 새겨져
있는데 이에 따르면 시삭이 성읍 180개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P.C. Barker, Payne, Wycliffe). 한편 그 성읍의 명단에는 북이스라엘의 성읍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데 혹자는 여로보암이 시삭에게 뇌물로 주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Curtis). 즉, 이전에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은
애굽에서 망명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왕상 11:4), 그때 이후 시삭과 친분을 맺어 온 여로보암이 시삭에게 성읍을 뇌물로 주면서 르호보암과 유다를
공격하도록 직접적으로 요청했다는 주장이다(Curtis).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진위(眞僞) 여부는 아직껏 판명되지 않고 있다. 아무튼 시삭의
침입으로 인하여 유다 왕국의 세력이 매우 약화되었음이 분명하다.
성 경: [대하12:3]
주제1: [르호보암의 쇠퇴]
주제2: [애굽 왕 시삭의 침략]
(주); 애굽에서 좇아 나온 무리 곧 튓과 숩과 구스 사람 - 여기서 '애굽에서 좇아 나온 무리'란 곧 보병들을 가리킨다. 이 보병들 가운데는
(1) '훗 사람'(*, 루빔)이 있는데 이들은 오늘날 애굽의 서쪽 북 아프리카의 리비아 사람들(Libyans;NiV,Living Bible)이다(P.C. Barker). 이들은
종종 애굽인들과 섞여 살면서 애굽의 용병(傭兵)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시삭도 바로 이 리비아 사람이었다. 이들은 나 3:9과 단11:43에서 '루빔'
또는 '리비아 사람'으로 각기 언급되고 있다. (2) 다음으로 '숩 사람'(*, 숙키임)은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에서는 '동굴
거주인들'(Troglodytes)로 지칭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아마 홍해 서쪽 해만(海灣) 쪽 산악 지대의 동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Keil & Delitzsch, vol,III, p. 348). 한편 히브리 어원으로 볼 때 '숙키임'은 '오두막집(booth)에 거주하는 자들'이란 뜻이다. 이를 근거로
하여 혹자는 이들이 애굽 19왕조 때에 군경으로 활동했던 '택틴인'(Tktin)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Spiegelberg). (3) 마지막으로 '구스 사람'(*,
쿠쉼)은 이디오피아인(Ethiopians)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애굽의 남쪽을 가리키는 '구스'(Cush)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워진 것
같다(P.C. Barker). 한편 나 3:9에도 리비아인들과 구스인들은 애굽의 동맹군으로 나타나있다.
성 경: [대하12:4]
주제1: [르호보암의 쇠퇴]
주제2: [애굽 왕 시삭의 침략]
(주); 시삭이 유다의 견고한 성읍을 취하고 - 시삭이 정복한 유다 성읍들에는 르호보암이 애굽의 공격에 대비하여 요새화했던 성읍들도 포함되었다.
이로 볼 때 참으로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시 127:1)임을 실감케 된다. 르호보암은 애굽의 공격을 예상하고
미래 대비하여 견고한 성읍들을 세웠지만, 시삭은 유다의 모든 성읍을 탈취하였고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까지 이르렀다. 이에 대하여 역대기 기자는
르호보암이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한편 시삭이 점령한 성읍들에 대해서는 아래 지도를 참조하라.
성 경: [대하12:5]
주제1: [르호보암의 쇠퇴]
주제2: [회개하는 왕과 방백]
(주); 선지자 스마야 - 르호보암이 이스라엘 열 족속과 싸우려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고하였던 자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1:2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열왕기서에는 스마야가 시삭의 유다 침입에 대하여 예고한 본문의 기사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주);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붙였노라 - 본절은 시삭의 침입이 유다의 불순종의 결과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신 28:15;대하 15:2). 즉, 왕과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출 20:1-17)을 버리고 우상 숭배와 이방 종교 의식을 자행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 전쟁을 초래한 이유이다(왕상
14:22-24).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죄악을 징계하시기 위해 이집트와 리비아 지원병, 그리고 이디오피아 용병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도구로
사용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는 성전 파괴(9-11절)가 일어났고, 백성들은 육체적인 고난을 받았다(8절). 이와같이 하나님은 때때로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심으로써 당시 백성들이 회개하도록 유도하신다. 이것이 바로 공의의 심판 뒤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성 경: [대하12:6]
주제1: [르호보암의 쇠퇴]
주제2: [회개하는 왕과 방백]
(주); 스스로 겸비하여 - '겸비하다'에 해당하는 '카나'(*)는 '무릎꿇다', '엎드러지다'는 듯이다. 이 단어는 아합 왕이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자기 옷을 찢는 등 통렬히 회개한 것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었다(왕상 21:27-29). 이로 보아 르호보암과 그의 방백(方伯)들 역시 그에 준하는 회개의 자세를 보였음이 분명하다.
(주);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 이것은 유다와 유다 백성들이 악하다는 사실을 상대적으로 표현한 말로서, 인간의 죄악 및 불완전성과 달리 여호와께
있어선 항상 불의(不義)가 없으심을 나타낸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여호와의 의로우심은 오히려 인간의 죄가 많은 곳에서 돋보이기
마련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출 9:27;단 9:14;롬 5:20;딤전1:14).
성 경: [대하12:7]
주제1: [르호보암의 쇠퇴]
주제2: [회개하는 왕과 방백]
(주); 대강(大綱) 구원하여 - 르호보암과 백성들의 겸비함을 보신 후에 하나님은 다시금 스마야를 보내셔서 이처럼 그들을 대강 구원하여
주시겠다고 응답하셨다. 그런데 '대강 구원하여'라는 말 뜻에 대하여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 견해를 보이고있다. (1) '짧은 시간',
'곧'(soon)이라는 뜻으로 이러한 견해는 '대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메아트'(*)가 '짧은 시간'이란 의미도 지니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 견해자들은 본절의 의미를 여호와께서 지체치 않고 곧 구원해 주신다는 뜻으로 보고 있다(P.C. Barker, Curtis, NIV). (2) 완전한
구원과 대조되는 것으로 '부분적인 구원'(some deliverance)을 뜻한다는 주장이다. KJV와 RSV가 지지하고있는 이 견해는 유다가 시삭의 침입으로
인하여 전부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중 일부는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가 부분적으로밖에 파괴당하지 않은 것은 시삭의
침입이 부분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즉시 유다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의 두 견해 중 비교적 전자의 견해가 더 옳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징계하실 때 결코 그들을 포기하시거나 완전히 버리시지 않고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합 3:2)에
비추어 볼 때 후자의 견해 역시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때문에 우리는 양 견해 중 어느 한쪽을 취하고 어느 한쪽을 버리는 대신 두 견해 모두를
절충적으로 취함이 보다 나을 것이다.
성 경: [대하12:8]
주제1: [르호보암의 쇠퇴]
주제2: [회개하는 왕과 방백]
(주); 저희가...알게 되리라 - 본절에는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궁극적인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즉, 유다를 잠깐 동안 시삭의 종이 되게
함으로써 여호와를 섬기는 것과 세상을 섬기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참으로 그들에게 유익한 것인지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행여라도 뜻하지 않은 환난을 당하거나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을 때엔 반드시 그로 인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마 11:28-30).
성 경: [대하12:9]
주제1: [르호보암의 쇠퇴]
주제2: [시삭의 약탈]
(주);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 4절에 이어 시삭의 유다 공격에 대한 설명이 재개되고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본절 이하 11절까지의 내용은 왕상 14:25-28에도 나와 있으니 참조하라. 한편 시삭은 군대를 2개조로 편성하여 벧호론과 기럇여아림을 각각 통과한 후 기브온에서 합세하여 예루살렘을 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4절 지도 참조.
(주); 솔로몬의 만든 금방패 - 솔로몬이 '쳐서 늘인 금'으로 만든 이백 개의 큰 방패와 삼백 개의 작은 방패를 가리킨다(9:15, 16). 금방패는
이스라엘 흥왕기(興旺期)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자랑거리를 시삭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 역사의 흥왕기가
끝났음을 시사해 준다.
성 경: [대하12:10,11]
주제1: [르호보암의 쇠퇴]
주제2: [시삭의 약탈]
(주); 그 대신에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 시삭의 침입으로 빈궁하게 된 르호보암 왕정은 놋으로 방패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는 솔로몬의 금방패의 대용(代用)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한 시대가 가고 다른 한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금방패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흥왕기가 종식되고 이제 놋방패로 상징되는 쇠퇴기가 시작된 것이다. 왕상 14:27 주석 참조.
(주); 시위하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하라침'(*)의 문자적인 의미는 '달리는 자들'(runner)이다. 이 용어는 '호위대'(삼상 22:17;왕상 1:5)에도
사용된 적이 있다. 따라서 여기서 '시위하는 자'란 왕궁과 성전을 오가면서 왕을 경호하던 왕의 경호원들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Curtis).
성 경: [대하12:12]
주제1: [르호보암의 쇠퇴]
주제2: [시삭의 약탈]
(주); 유다에 선한 일도 있으므로 - 본절은 시삭의 침입에 대한 역대기 저자의 주석적 설명으로서 열왕기에는 없는 기록이다. 여기서 '선한 일'이란
회개한 후(6절) 다시금 자세를 회복한 유다 백성들의 여호와께 대한 경건함과 충성을 가리킨다(Matthew Henry).여호와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유다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러한 본절에서도 우리는 참 회개란 단순히 뉘우치는 것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선한 일'로 나타나야 함을 알
수 있다. 삿 10:6-18 강해, '참된 회개의 본' 참조.
성 경: [대하12:13]
주제1: [르호보암의 쇠퇴]
주제2: [르호보암의 행적과 죽음]
(주); 스스로 강하게 하여 치리하니라 - 공동 번역은 본절을 '예루살렘에서 왕위를 굳혔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르호보암이 시삭의 침입 이후에 다시 그 힘과 권력을 회복하였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나마 르호보암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한 결과이다(12절).
(주); 그 이름을 두신 성 - 이것은 여호와의 전(殿)이 있는 예루살렘성을 가리킨다(6:32;대상 22:7). 역대기 저자가 예루살렘 성을 가리켜 이와같이 표현한 것은 유다의 왕정이 성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해 준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6:5 주석을 참조하라.
(주);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여인이더라 - 왕의 통치를 평가할 때 왕의 모친에 관하여 기록하는 것(왕상 15:2, 10;22:42)은 이스라엘 역사
기록에 있어서 전형적인 것이다. 즉 이는 왕들에게 끼친 모친의 영향력이 지대(至大)함을 나타낸다. 그런데 나아마(Naamah)는 암몬의 가증한 우상
밀곰(Milcom)을 숭배하던 여인이다(왕상 11:5, 7). 그러므로 르호보암이 그 어미에게서 받은 영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있다. 왕상
14:31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2:14]
주제1: [르호보암의 쇠퇴]
주제2: [르호보암의 행적과 죽음]
(주); 마음을 오로지하여...아니함으로 - 본절은 르호보암 통치 전반에 대한 평가이다. 즉 르호보암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서 일시 겸비한 자세를
보이긴 하였으나(5, 6절) 일평생 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데엔 온 심혈을 기울이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편 역대기저자는 자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열왕들을 평가했는데 여호사밧(19:3)에 대해서는 그가 마음을 오로지 하여 여호와를 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본서 저자인 에스라에게
있어서 '마음을 오로지 하여 여호와를 구한다'는 것은 곧 여호와의 율법을 준행하는 것을 가리킨다(스 7:10).
성 경: [대하12:15]
주제1: [르호보암의 쇠퇴]
주제2: [르호보암의 행적과 죽음]
역대기 저자가 사용한 자료에 대해서는 역대상 서론, '역대기의 자료'를 참조하라.
(주); 선지자 스마야와 선견자 잇도의 족보책 - 이 족보책은 선지자 스마야(Shemaiah)와 선견자 잇도(Iddo)가 공동 저술한 책이 아닌 듯하다. 다만 그 두 사람의 역사 기록이 공통적으로 다윗 집의 족보들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편의상 그것들을 한 책으로 보고 그렇게 지칭한 것 같다(Curtis).
(주); 르호보암과...항상 전쟁이 있으니라 - 왕국 분열 초기의 남북 전쟁은 그 발발 일보직전에 선지자 스마야의 제지로 일어나지 않았다(11:1-4).
그렇지만 그 후에도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적대감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소규모의 국지전(局地戰)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왕상 14:30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12:16]
주제1: [르호보암의 쇠퇴]
주제2: [르호보암의 행적과 죽음]
(주); 아비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르호보암을 계승한 아비야(Abijah)는 르호보암과 압살롬의 딸 마아가(Maachah)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는 르호보암에 의해 이미 일찌감치 왕위 계승자로 지명 받았었다. 11:22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3:1]
(주); 여로보암 왕 제 십 팔 년에 - 여로보암의 즉위 연대는 B.C. 930년경이다. 그러므로이 해는 B.C. 913년경이 되는 셈이다. 한편 역대기 기자가 동시대의 이스라엘 왕의 통치 연대를 소개하면서 유다 왕의 등극(登極) 사건을 기록한 곳은 단지 여기뿐이다. 여기서 '여로보암 왕 제 18년'이란 기록은 동일한 연대에 통치를 시작한 르호보암(10:16-19)보다 여로보암이 더 오랫동안 통치를 하였으며 여로보암의 영향력이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 때에도 여전하였음을 암시해 준다.
(주); 아비야가 유다 왕이 되고 - B.C. 913년경 유다의 제 2년 왕으로 등극한 아비야에 대해서 열왕기서는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 마음이 그 조상 다윗의 마음 같지 아니하여"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었다(왕상 15:3).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 아비야가 여로보암을쳐부순 공적(13-19절)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20절에서 "아비야 때에
여로보암이 다시 강성하지 못하고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고"라는 기록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성 경: [대하13:2]
(주); 그 모친의 이름은 미가야라 - 이미 11:20 주석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비야의 모친은 마아가(Maachah)로서 압살롬의 손녀였다. 따라서 본절의 '미가야'(* ,미카야후)는 '마아가'(* , 마아카)의 오기(誤記)일 가능성이 크다(P.C. Barker,O. Zockler, Keil). 한편 '마아가'란 이름은 '압제'란 뜻인 반면 '미가야'는 '누가 여호와와 같으랴'는 뜻이다.
(주); 기브아 사람 우리엘의 딸이더라 - 11:20에서 이미 설명하였듯이 '우리엘'은 압살롬의 딸 다말의 남편이며 마아가는 압살롬의 손녀이다.
이러한 가족 관계를 도표상으로 간략히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압살롬
│
다 말 ─────────┬───────── 우리엘
│
│
마아가(일명 미가야)
│
│
아비야(일명 아비얌)
한편 우리엘의 고향인 기브아(Gibeah)가 헤브론 근처에 있는 기브아인지(수15:57;대상 2:49) 베냐민 땅 기브아(삼상 10:26;15:34;삼하 21:6)인지
분명히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단순히 '기브아'란 말만 가지고서는 양자를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 경: [대하13:3]
(주); 아비야는...사십 만으로...여로보암은...팔십 만으로 - 르호보암 왕 때에는 유다의 군사가 18만에 불과하였다(11:1). 그런데 여기서 40만의
군사가 모였다는 것은 유다가 시삭의 침입 이후에 군사적으로 꾸준히 발전해 왔음을 암시한다. 한편 여기 기록된 이스라엘과 유다의 군사 수는 다윗
때에 요압이 조사한 수와 비슷하다(삼하 24:9;대상21:5). 그 후에도 유다는 계속해서 군세(軍勢)를 확장해 나갔으니 아사왕 때에나(14:8), 여호사밧
때에는(17:14-18) 훨씬 많은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성 경: [대하13:4]
(주); 스마라임 산 - 수 18:22에 따르며 스마라임(Zemaraim)은 베냐민의 한 성읍으로서 벧아라바와 벧엘 사이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나있다(Curtis).
그곳은 오늘날 '라스 에즈 제이마라'(Ras ez-Zeimara)로 베냐민 지파 경계(境界)와 에브라임 지파 경계의 접경지이다. 추측컨대 이곳의 스마라임
산은 에브라임 산맥 중에 포함되었던 것 같다(P.C. Barker). 한편 아비야가 스마라임 산에서 이스라엘 열 지파에게 연설하는 모습은 옛적 요담이
그리심 산에서 세겜 사람들에게 연설하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삿 9:7).
성 경: [대하13:5]
(주); 소금 언약 - 성경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가리켜 '소금 언약'(a Covenant of Salt)이라고 표현한 곳은 여기와 민 18:19 두 곳이다. 그리고 레
2:13에는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소금'이 뜻하는 바는 '불변성', '방부제',
'영원함'이다. 몇몇 주석가들에 따르면 언약을 매끼의 식사로 표현한다면 소금은 그 식사의 양념에 해당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절이 뜻하는
바는 단순한 양념으로서의 소금이 아니라 부패를 방지하여 끝까지 변치 않게 하는 방부제로서의 소금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또 소금은 음식들을 섞었을 때 맛이 서로 어울리도록 하는 양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아 둘 사이를 강하게 맺어주는 결속력,
또는 유대감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아비야가 말한 소금 언약은 '다윗 언약'을 가리킨다(대상 17장). 그런데 아비야가 여기서
다윗 왕조를 소금 언약과 연관시키고 있음은 (1) 다윗 언약의 영원성을 강조하며 (2) 다윗의 후손인 르호보암과 아비야 자신의 왕위 계승이
적법(適法)하다는 사실을 변호하기 위함이다. (3) 그리고 그 반대로 북이스라엘의 건국 자체는 언약을 깨뜨리는 패역한 행위이며 (4) 따라서 그들이
유다를 대적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점을 피력하기 위해서였다.
성 경: [대하13:6]
(주); 솔로몬의 신복 -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Jeroboam)을 가리켜 '솔로몬의 신복'이라고 한 것은 열왕기에 나오는 표현이기도 하다(왕상 11:11,
26). 여기서 이 말은 특별히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왕위를 계승하기에 적합치 못한 자였음을 나타낸다. 즉, 여로보암은 솔로몬과 그의 왕조를 마땅히
섬겨야 할 신하의 위치에 있었던 자이지 그의 적법한 후계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구약 시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왕의 계보가 아닌 자가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신명(神命)을 내세워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역으로 종종 정통성 시비를 제기하는 문제의 소용돌이가 되곤
하였다.
성 경: [대하13:7]
(주); 난봉과 비류(匪類) - 이는 다윗의 왕조를 배반한 무리들을 비아냥거리는 말이다. 여기서 '난봉'(* , 아나쉼 레킴)은 '허탄하고 변덕스런 사람'이라는 뜻인데 삿 9:4에는 '방탕하고 경박한 유'로, 11:3에는 '잡류'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비류'(* , 베네 벧리야알)는 문자적으로 '벧리알의 아들들'이라는 뜻인데 '사람같지 않은 사람', '불량자'를 가리킨다. 훗날 신약 시대에는 이말이 사단(고후 6:15)이나 적그리스도(살후 2:3)를 지칭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Wyciffe).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삿 19:22 주석을 참조하라.
(주); 르호보암이 어리고 - 여기서 '어리고'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나아르'(* )는 일반적으로 '소년'(왕하 2:24), '종'(왕하 4:12)을 가리키나 때때로 '경험없는 젊은이'(대상 22:5;29:1;왕상 3:7)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41세에 왕위에 오른 르호보암(12:13)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어쩐지 매우 어색하다. 그래서 혹자들은 르호보암의 즉위시 나이를 21세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뒷받침할 만한 다른 근거가 없다(O. Zockler, Oettli). 따라서 여기서 르호보암이 어리다는 말은 그가 매우 무지하고 경험이 없었던 사람으로 비난받아 마땅함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P. C. Barker).
(주); 마음이 연약하여 능히 막지 못하였었느니라 - 같은 말이 신 20:8에서는 '두려워하고 겁내는 마음'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르호보암의
실제 성격을 이렇게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10장에 나타난 그의 성격은 매우 강직하고 포학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1:5-12을 보면
국방을 견고케 하는 일 속에서도 그의 과감성을 잘 나타난다. 따라서 본절은 르호보암이 대(對) 북이스라엘 정책에 있어서 하나님의 제지 탓에 미처
민족적 반역자들을 처단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11:1-4)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르호보암이 계속해서 여로보암과 전쟁을
했지만(12:15) 뚜렷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사실들에 대한 아비야 나름의 평가라고도 볼 수 있다. 더욱이 본절 속에는 대(對) 북이스라엘에 대한
아비야의 강력한 의지도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즉, 르호보암은 북 왕국 정벌을 포기하고 말았자만 자신은 결코 그러지 않겠다는 것이다.
성 경: [대하13:8]
(주); 다윗 자손의 손으로 다스리는 여호와의 나라 - 본절에는 유다의 정통성과 이스라엘의 비정통성에 대한 아비야의 주장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유다는 다윗의 왕권을 물려받은 여호와의 나라이며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신으로 모신 패역한 나라라는 것이다. 5절 주석 참조.
(주); 너희는 큰 무리요...함께 있도다 - 여기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큰 무리'라고 했는데 '무리'(* , 하몬)란 '짐승떼' 또는 '스끄러운 소리를
내는 것들'을 가리킨다. 아마도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했기 때문에 조롱거리로 붙여진 말인 듯하다. 즉, 올바른 제사장이 없이
금송아지만을 추종한 그들은 정통성을 지닌 여호와의 나라의 백성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짐승 떼와 같다는 의미이다. 한편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 두
성읍에 세운 금송아지에 대해서는 왕상 12:28, 29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13:9]
(주); 아론 자손 된 여호와의 제사장과 레위 사람 - 일반적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아론의 자손으로 언급되었다(출 28:40;29:44;40:12;민 3:6;8:6;18:6 등). 그런데 여기서 이는 특히 '허무한 신의 제사장'과 대비되는 말로서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쫓아낸 제사장과 레위인 역시 하나님이 세우신 아론의 자손들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아비야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비정통성을 공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 이방 백성의 풍속을 좇아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백성들처럼 정통적인 제사장 가문 중에서 제사장을 세우지 아니하고 보통 사람으로 아무나 일정한 의식(儀式)만 거치면 제사장이 될 수 있게 하였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왕상 12:31과 13:33에서도 충분히 입증된다. 아비야의 이러한 공박은 외형적인 종교의 모양만 갖추면 된다는 안일주의에 빠져있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왕상 12:31 주석 참조.
(주); 장립을 받고자 하는 자마다 - 본절의 문자적인 뜻은 '그의 손을 채우려 오는 자마다'이다. 이는 성경에서 '제사장직을 맏다'라는 뜻으로 자주
쓰이는 관용적 표현이다(출 28:41;29:9, 29, 33, 35;레 8:33;16:32;삿 17:5, 12;왕상 13:33 등). 한편 출 29장에 따르면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을 때
드리는 제물은 하루에 어린 수송아지 하나와 흠없는 숫양 둘이며(출 29:1), 이것을 7일 동안 계속 드려야 했음을 알 수 있다(29:35-37).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새 제사장을 급히 필요로 했기 때문에 수송아지 하나와 숫양 일곱을 끌고 오기만 하면 누구나 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더욱이 아비야가 이 사실을 미완료 시제(imperfect)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처음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일을 계속해서 행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O. Zockler). 하지만 그렇게 하여 제사장이 된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장이 아닌 금송아지 신, 즉 허무한 신의 제사장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던 금송아지가 참 신이 아님은 호세아 선지자도 주장했던 바이다(호 8:6).
성 경: [대하13:10]
(주);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 아비야는 이스라엘의 허무한 신 금송아지(8절)와는 대조적으로 이처럼 여호와가 자신들의 신임을 주장함으로써 유다 왕국의 정통성을 설득력있게 표명하였다.
(주);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있으니...수종을 들어 - 아비야는 계속해서 유다 왕국의 정통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근거로 (1)
자신들에게 '올바른 제사장'이 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그리고 (2) 레위인들이 정규적인 방법으로 직무를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든다. 여기서
'수종을 들다'(* , 바멜레케트)는 말은 자신에게 부과된 직무를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와같이 아비야가 유다 왕국의 종교적 정통성을
정치적으로 문제화한 것은 유다 군사와 대치(對峙)하고 있던 이스라엘 군대(3절)의 사기를 꺾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성 경: [대하13:11]
본절에서 아비야는 유다 왕국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율법에 정해진 규례대로 하나님을 섬겼음을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주); 조석으로...번제를 드리며 - 이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상번제(常幡祭)를 가리킨다(출 29:38-46;민 28:3-8). 이때 드리는 제물은 일년되고 흠없는 수양으로서 아침에 한마리, 저녁에 한 마리씩 바쳤다.
(주); 분향하며 - 여호와의 제단 앞에 향 재료를 사르는 일은 매일 두 차례씩 행해졌다(출 30:6-8). 이때 향은 하나님께 상달되는 성도의 기도를 상징하였다.
(주);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 진설병(陳設餠)을 놓는 규례는 출 25:30에 잘 나타나 있다. 제사장들은 매 안식일마다 떡상에 진설병 12개를 놓아야 했는데 그 진설병은 이스라엘 12지파의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상징하였다. 한편 솔로몬 당시 진설병 상은 모두 10개가 만들어졌는데(4:8) 본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매번 깨끗한 상을 사용하기 위해 하나씩 번갈아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주); 금 등대 - 성소 안을 밝히기 위한 기구이다. 이 등대는 매일 저녁에 불을 켰다가 아침에 끄는 것이 상례였다(출 25:31 이후;30:7, 8:40:24,
25;레 24:3).
성 경: [대하13:12]
(주); 경고의 나팔을 불어 - 성경에서 나팔은 엄격히 말하자면 음악적 도구보다는 신호용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새로운 달(新月), 안식일의 시작, 유명 인사들의 죽음을 알리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집회시나 전투시에도 사용되었다. 본절에서 제사장이 나팔을 분 것은,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함락할 때(수 6:5, 20)와,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를 패퇴시킬 때(삿 7:20) 불었던 나팔과 마찬가지로, 먼저는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고,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적군을 놀라게하기 위해서였다. 즉, 민 10:9에 기록된 바와 같이 나팔을 불 때 여호와가 저희를 기억하사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리고 이 나팔은 제사장들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5:12) 여호와는 나팔이 있는 유다의 편이 되신다는 것이 아비야의 논리이다.
(주);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 이것은 지금까지 행한 아비야의 연설을 마무리 짓는 논리적 결론이다. 즉,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하시므로 유다를 대적하여 싸우는 것은 곧 여호와를 대적하여 싸우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대적하는 이스라엘에게
형통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 경: [대하13:13]
(주); 여로보암이 유다의 뒤를 둘러 - 군대의 수가 유다의 배나 되었던 여로보암(3절)은 아비야가 연설을 하고 있는 동안에 유다 진영을 포위하였고
뒤에는 복병(伏兵)을 숨겨두었다. 아마도 그는 아비야의 연설로 인하여 자기 군사의 사기가 많이 꺾였다고 판단했든지 아니면 아비야에 대하여 매우
쾌씸하게 생각하여 분노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로보암은 유다를 기습 공격하여 아비야를 단번에 쳐부수려고 서둘렀을 것이다.
성 경: [대하13:14]
(주); 유다 사람이...여호와께 부르짖고 - 대적을 만났을 때 여호와가 계신 전(殿)을 향하여 기도하면 이에 대해 응답해 주시겠다는 것은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었다(대하 6:34, 35). 여로보암은 유다를 겁주기 위해 복병 전술을 썼지만 이로 인하여 유다는 더욱더 하나님께 믿음으로 간절히 매달릴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성도들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바,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 세속적이며 인위적인 수단에 호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고 기도할 때에라야 바울과 실라를 거두었던 철문이 열렸던 것처럼(행 16:26) 모든 어려움은 제거될 것이다.
(주); 제사장은 나팔을 부니라 - 유다가 급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나 제사장들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나팔을 크게 불었다. 역대기 기자는
이때에 유다가 전적으로 여호와께만 의지하였다(18절)고 기록하고 있다.
성 경: [대하13:15]
(주);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르매 - 이와같이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와 백성들의 함성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자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유다 앞에서 패하게 하셨다. 이는 마치 수 6:20에서 보는 바, 여호수아의 여리고 성 전투를 연상케
하는데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합심한 마음이 여호와의 역사(役事)하심을 불러일으킨 귀중한 역사적 사실이다.
성 경: [대하13:16]
(주); 하나님이 그 손에 붙이신 고로 - 이는 성전(Holy War)과 관련, 널리 쓰이는 표현으로서 여호와께서 직접 그 전쟁을 주관하고 계심을
의미한다(신 2:30-36;수 10:8;11:6;21:44). 이에 대해서는 수 5:13-15 강해, '성전'(聖戰)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13:17]
(주); 엎드러진 자가 오십만이었더라 - 이는 여로보암의 전체 군대 80만(3절)의 과반수를 훨씬 초과하는 수치로서 여로보암의 완전한 패배를
나타낸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전쟁의 승패가 군대의 다수나 전술상의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십자가의 군병된 우리 역시 대적자 사단의 막강한 세력에 대하여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단의 정수를 찍어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하셨으니(창 3:15;마 4:1-1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넉넉히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요
16:33).
성 경: [대하13:18]
(주); 그 때에...유다 자손이 이기었으니 - 이는 대(對) 이스라엘 전투에서 승리로 기록된 첫 번째 역사적 사건이다. 왕상 22:13-28 강해, '유다의
전쟁' 참조. 역대기 저자는 이 사건을 단순한 동족간의 싸움으로 보지 않고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신(8절)과 유다의 여호와(10절)의 전투로 보았기
때문에 매우 의미있게 다루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이 역대기 저자가 열왕기 기자처럼 아비야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게 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1절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3:19]
(주); 성읍들을 빼앗았으니 - 성읍의 탈취는 대개 전쟁에서의 승리의 상징으로 언급된다(수 6:20;삼하 12:26). 이는 현대전(現代戰)에 있어서도 중요한 개념이다.
(주); 벧엘 - 이는 예루살렘 북쪽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베이틴'(Beitin)이다. 이 벧엘(Beth-el)은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웠던 곳이며(왕상 12:29)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성지(聖地)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금송아지 탈취나 파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금송아지 우상은 이번 전쟁 이전에 벌써 다른 곳으로 옮겨진 듯하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주); 여사나 - 혹자는 여사나(Jeshanah)가 삼상 7:12에 나오는 '센'(Shen)과 동일한 곳이라고 생각한다(Cheyne, Reed). 그리고 요세푸스는 유다 변방 지역인 사마리아에 동일한 지명의 장소가 있었다고 말한다(Antique).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사는 벧엘 북쪽 약 5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아인 신자'(Ain Sinja)일 가능성이 크다.
(주); 에브론 - 히브리어 원문에는 '에브라인'(Ephrain), 또는 '에브론'(Ephron)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요 11:54에 따르면 에브라임과 동일한
곳이며, 수 18:23과 삼상 13:17에 따르면 오브라와 동일한 곳으로 추측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에브론을 오늘날 벧엘에서 북동쪽으로
6.4km 지점에 위치한 '엘 타이이베'(El-Taiyibeh)와 동일한 곳으로 간주하고 있다(Josephus, P.C. Barker). 한편 이번 전쟁에서 유다군의 출정로와
정복한 성읍들을 지도상으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성 경: [대하13:20]
(주);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고 - 이러한 표현은 나발의 죽음을 묘사할 때도 나타나는데(삼상 25:38), 어떤 갑작스런 죽음이나 하나님의
재앙으로 인한 죽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열왕기의 기록에 따르면 여로보암은 아비야에게 패한 이후로 점점 그 세력을 잃고 급기야 그의 즉위
22년(B.C. 910년경)에 죽고 말았음을 알 수 있다(왕상 14:20). 따라서 여로보암은 아비야(B.C. 913-910)와 거의 동시대에 죽은 셈이다. 이 때문에
혹자는 본절이 '아비야보다 여로보암이 먼저 죽은 것을 가리키므로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Curtis). 그러나 본절은
여로보암이 아비야에게 패한 이후로 계속 강성하지 못하였고 급기야는 죽고 만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에게 재앙을
내리신 사실이 왕상 14:1-18에 나타나 있으니 참조하라.
성 경: [대하13:21]
(주); 아비야는 점점 강성하며 - 본절은 여로보암과 대조적인 아비야의 축복된 삶을 보여주고 있다. 역대기 기자는 종종 많은 아내와 자녀들을
얻게된 것을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으로 기록하고 있다(11:21). 물론 이는 일부 다처제가 옳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아비야의
가정이 번영할 수 있었음을 나타낸다. 이로 볼 때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중에도 완연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한편 혹자는
본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아비야의 부정적인 평가를 담은 기록(왕상 15:3)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강성하며'를 '살찌우며 타락하였더라'(wzxed
fat and wanton)로 해석한다(KJV, P.C. Barker). 그러나 역대기 저자의 관점은 결코 아비야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지 않는다. 대신 역대기 저자는
아비야를 뛰어난 웅변가이며, 여로보암의 우상 척결에 공헌한 개혁자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강성하며'라는 말뜻을 액면 그대로 이해함이
옳은 듯하다.
성 경: [대하13:22]
(주); 선지자 잇도의 주석책 - 선지자 잇도(Iddo)는 솔로몬과 르호보암 및 여로보암의 행적을 기록한 선지자이다(9:29;12:15). 그런데 여기서
'주석책'(* , 미드라쉬)이란 저자 나름의 해석을 첨가한 기록으로서 왕의 공식적인 통치 행적에 대한 잇도의 주석서인 듯하다(Payne, Wycliffe)
성 경: [대하14:1]
본절은 히브리 원문에 13:23로 기록되어 있다.
(주);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십 년을 평안하니라 - 아사(Asa, B.C. 910-869)의 통치 처음 10년 동안은 B.C. 910년부터 900년까지이며 이때에
이스라엘은 바아사(B.C. 909-886)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상 15:16에 따르면 아사와 바아사 사이에 '일생' 전쟁이 있었다고 하고, 본장 6절을
보면 '그 땅이 평안하여' 성읍들을 건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즉, 아사의 처음 통치 10년 기간은
이스라엘의 세 왕, 여로보암 1세(B.C. 930-910), 나답(B.C. 910-909), 바아사의 즉위 기간과 맞물린다. 그리고 여로보암의 말기 2년, 나답의 2년,
바아사의 6년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에는 전쟁이 없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아사와 바아사 사이에 전쟁이 지속되었던 것이다(왕상 15:16 주석 참조).
그러므로 아사의 처음 통치 10년 동안에는 실질적으로 전쟁이 없이 평안을 누렸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유다가 이렇게 10년 동안 평안을 누리게 된
이유는 (1) 선왕(先王) 아비야가 이스라엘을 크게 패주시켰던 일(13장)과, (2) 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선을 행했기 때문이다(2-8절). 즉, 아비야는
승리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3년 만에 죽었는데 그것은 아마 아비야 자신의 죄 때문이었을 것이다(왕상 15:3). 그리고 그는 비록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을지라도 그가 이루어 놓은 큰 업적 때문에 그의 아들이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를 뒷받침한 결정적인 것은 아사의
선정(善政)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때문이었다.
성 경: [대하14:2]
(주);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 역대 왕들의 통치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이와 같은 정도로 호평을 받은 왕은 아사 외에 히스기야 왕
정도가 있을 뿐이다(31:20). 이로 볼 때 역대기 기자는 유다가 10년 동안 평안했던 요인 중에 가장 큰 요인으로 아사의 종교 개혁과 선행을 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대하14:3]
(주); 이방 제단 - 이는 '이방인들의 신의 제단'을 가리킨다. 창 31:19, 30-35;35:2, 4과 수 24:20, 23;삿 10:16;삼상 7:3;렘 5:19 등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드라빔(Teraphim)과 같은 가정신을 가정에 두고 있었고 개인적으로 이러한 이방인의 풍습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주); 산당을 없이하고 - 본절과 달리 15:17을 보면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기록되어 있고, 왕상 15:14에도 "오직 산당은 없이하지 아니하니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차이점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즉, 아사는 우선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 위치한 산당들을 즉각적으로 없앴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조처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사의 개혁 의지에도 불구하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산당 예배가 근절되지 않았다.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아사가 미처 산당을 다 제하지 못하였음을 강조한 반면 본절에서는 아사가 실제로 산당을 제거하려 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P. C. Barker, Wycliffe). 이러한 산당에 대해서는 왕하 16:1-9 강해, '산당 예배에 관하여'를 보다 참조하라.
(주); 주상을 훼파하며 - '주상'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마체보트'(* )는 예배처에 세워 두는 '성스러운 돌들'을 가리킨다(출 34:13;삿 3:7;왕하 3:2). 이것은 본래 성전이 없던 고대 시대에 어떤 장소를 성스럽게 구별하고 특별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사용되던 것이다(창 28:18, 22). 그러나 율법에는 이런 주상들을 세우는 것을 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신 16:22), 파괴를 명하고 있다(신 7:5;12:3). 그 이유는 아마 그것이 점차 우상시되고 또 이방 바알(Baal) 종교와 연관되어 큰 타락의 요인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 7:5 주석 참조.
(주); 아세라상을 찍고 - 주상(柱像)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율법에서는 숭배가 금지되어 있는 우상이며(신 16:21), 파괴하도록 되어 있다(신
7:5;12:3). 이 아세라(Asherah) 상은 대개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고대 근동의 여러 족속 중 특히 아모리족과 가나안족이 숭배하였다. 한편 이
아세라 숭배에는 항상 음란한 제의(祭儀)가 수반되었는바 많은 사람들을 타락케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에서 이 우상 숭배를 철저히
금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출 34:13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4:4]
(주); 명하여...행하게 하고 - 본절은 아사왕이 종교 개혁에 얼마나 열심이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즉, '명하여'라는 구절이 보여 주듯이 종교
개혁은 왕명에 의하여 거국적(擧國的)으로 실행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왕상 15:12-15에는 본장에 언급되지 않은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곧
아사가 남창(男娼)을 제거하며 우상 숭배에 골몰한 조모 마아가를 폐위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당시 아사의 종교 개혁이 얼마나
철저하며 거족적인 것이었던가를 잘 알 수 있다(15:16).
성 경: [대하14:5]
(주); 산당과 태양상을 없이하매 - 이는 산당이 태양신 숭배에 사용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서 34:3, 4과 레 26:30에는 태양상이 바알 숭배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바알 신이 태양을 지배한다는 사상에서 비롯된 듯하다. 한편 태양상은 항상 복수로만 언급되고 있는데(사 17:8;27:9) 이로 보아 그것은 여러 개의 돌비들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 같다(Curtis, P. C. Barker).
(주);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으니라 - '평안함'이라는 단어가 우상 척결과 연관해서 계속해서 나타나는데(1, 5, 6, 7절), 이는 우상 숭배로 인하여
여호와를 두려워하던 일이 이제 없어졌음을 뜻한다(시 72:5). 그리고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서는 우상 척결로 인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풍성히
내렸음을 암시한다. 즉, 아사의 처음 통치 10년 동안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유다 백성들이 여호와 신앙을 회복했던 탓이다.
성 경: [대하14:6]
(주); 그 땅이 평안하여 - 마 5:5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심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고래(古來)로 땅은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깊은 연관이 있다.
(주);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니라 - 아사는 유다가 평안을 누리고 있는 동안에 성읍들을 건축하는 일에 전력을 쏟았는데 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그가 주력한 것은 과거 시삭의 침입으로 무너졌던 성읍들을 재건하는 일이었을 것이며(12:4) 그의 조부
르호보암이 건축하였던 많은 성읍들을 다시 재건하여 회복하는 일이었을 것이다(11:5-12). 한편 렘 41:9에 따르면 아사는 바아사의 공격에 대해서도
항상 방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왕상 15:16에서 그 두 왕 사이에 늘 전쟁이 있었다는 기록으로도 입증된다.
성 경: [대하14:7]
(주); 우리에게 사방의 평안을 주셨느니라 - 여기서 '평안'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노아흐'(* )는 '거하다'라는 뜻의 동사 '누아흐'(* )에서 온 말로 떠돌이 생활하던 유목민들이 한 곳에 정착하여 쉼을 누리개 된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리고 '사방의 평안'이란 외적의 침입에서 완전히 보호된 상태의 안전한 정착 생활을 가리킨다. 즉, 아사 왕은 팔레스틴의 지리적 여건상 유다가 끊임없는 전쟁의 위기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나라이지만 이처럼 사방의 외적으로부터 평안할 수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 때문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주); 성읍을 형통하게 건축하였더라 - 이는 아무런 외적인 방해도 없이 순조롭게 성읍을 건축하였음을 가리킨다. 이와같이 어떤 일의 결과를 놓고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 덕분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과 간섭하심을 발견하는 것은 경건한 신앙인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성 경: [대하14:8]
(주); 유다 중에서...삼십 만이요 베냐민 중에서...이십 팔만이라 - 즉, 아사의 전체 군대 수는 58만이다. 이는 그의 아버지 아비야의 군대 수보다(13:3) 휠씬 많은 수이다. 그런데 역대기 기자는 이 58만의 군사가 다 '큰 용사'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큰 용사'(* , 깃보르 하일)라 함은 특별히 훈련된 용사를 가리키는 제한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아사가 전체 군대 훈련에 매우 신경을 써서 모든 군사가 잘 훈련되었음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즉, 아사 왕은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잘 훈련시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슬기로움을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아사가 큰 지파인 유다에서 30만의 군대를 동원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으나 작은 지파인 베냐민 중에서 28만 군대를 동원한 데에는 다소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어쨌든 성경에서 '베냐민은 물어 뜯는 이리'(창 49:27)이며 특히 활을 잘 쏘는 용사들도 나타난다(삿 20:15, 16;대상 8:40;12:2).
(주); 큰 방패와...활 - 여기서 큰 방패와 창은 접근전에서 쓰는 무기였으며 작은 방패와 활은 먼 거리의 적과 싸울 때 쓴 무기였던 것 같다.
아무튼 이 것들은 실제 전투용이었는바 솔로몬의 장식용 금방패(9:15, 16)와는 다른 것이다.
성 경: [대하14:9]
(주); 구스 사람 세라 - 대부분의 학자들은 '세라'(Zerah)가 애굽 22왕조의 제 2대 왕인 오소르콘 I세(Osorkon I)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Keil, O. Zockler, Payne, Curtis, P. C. Barker). 그의 선왕(先王)인 애굽의 22 왕조 1대 왕 시삭 쉐숑크(Shishak-Sheshonk)에 대해서는 12:4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으니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구스'(Cush)는 에티오피아, 즉 애굽의 남쪽에 있는 아프리카 지역을 지칭하는데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누비아(Nubia), 세나르(Sennaar), 코르도판(Kordofan) 그리고 아비시니아(Abyssinia)의 일부를 가리킨다(P. C. Barker). 한편 브룩쉬(Brugsch)는 세라가 애굽의 통치자가 아니라 타켈롯 1세(Takeloth I) 때(B.C. 944년)의 구스 통치자로서 그가 아사 때 유다의 서남방과 애굽을 침공했다고 한다. 이는 애굽 역사 가운데서 정확히 세라와 동일 인물로 간주될 만한 자가 나오지 않는 데에 근거한 주장인데 아직 그 사실성 여부는 입증되지 못하고 있다.
(주); 군사 백만 - 많은 학자들은 이 수가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이라고 말한다(Keil, O. Zockler). 그런데 12:3에 기록된 시삭의 군대 수와 비교해 볼 때 세라의 군대는 병거가 불과 3백 승이었으나 시삭의 병거는 천 2백 승이었다. 그리고 또 시삭은 훗, 숩, 구스 사람 중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의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라도 이러한 이방의 용병들, 즉 아라비아의 베두인(bedouin Arab)들을 함께 대동하였다고 한다면 그 수는 가히 백만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Payne). 또한 백만이란 수는 천에 천을 곱한 수로서 극히 많은 수를 가리키며 12:3에 나오는 '불가 승수'(不可乘數)와 동의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Keil).
(주); 마레사 - 이는 헤브론과 아스돗 사이(11:8) 유다 평지에 있던 성읍이다(수 15:44).
성 경: [대하14:10]
(주);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진치고 - 로빈스(Robinson)은 스바다 골짜기(the valley of Zephathah)가 마레사(mARESHAH)에서 아주 가까운 '텔
에스 사피예'(Tell-es Safiyeh)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70인역(LXX)에서 이곳을 '마레사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라고 설명하고 있는바 로빈슨이 말하는 곳은 그 반대 방향에 있기 때문이다(Curtis, Keil).
성 경: [대하14:11]
(주);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 본절의 해석에 있어서 영역본들 간에 많은 이견(異見)을 보이고 있다. 먼저 NIV는 본절을 "강한 자를 대항하여 힘없는 자를 도우시는 당신과 같은 이가 아무도 없나이다"로 한글 개역과 유사하게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KJV는 "여호와는 수가 많거나 힘이 없거나에 따라 도우시는 분이 아니시니"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본절을 삼상 14:6의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와 유사하게 번역한 것이다. 다음으로 의역성(意譯性)이 강한 Living Bible에서는 "우리를 도울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 지금 우리는 이 강한 군대에 비해 무기력하나이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상의 번역들을 살펴보면 NIV의 번역에는 '악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부각되어 있고, KJV에는 '당신을 의지하는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부각되어 있다. 아무튼 전후 문맥 관계를 통해서 볼 때 본절은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판단한 아사 왕이 하나님의 성품에 의거, 도우심을 구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품이란 비록 인간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이는 경우에라도 당신을 의지하기만 하면 능히 도와 구원해 주시고야마는 하나님의 자비와 권능을 가리킨다.
(주);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 여기서 사람(* , 에노쉬)은 '깨어지기 쉬운 존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특벌한 뜻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아사의 이 기도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이 영영히 죽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기지 못하게
하소서'라는 뜻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여기에는 구스의 군대가 표면적으로는 백만에 이르는 대군이지만(9절)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수의 많고
적음(삼상 14:6)을 개의치 않으신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즉, 궁극적으로 본절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삼상 2:10).
성 경: [대하14:12]
(주);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을...패하게 하시니 - 아사 왕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여호와께서는 유다 앞에서 세라의 군대가 패하여 도망가게
하셨다. 물론 13:15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구스 사람들을 패하여 도망가게 하셨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여호와께는 군대의 수가 많고 적음이 상관없다는 사실이 분명히 입증된 셈이다.
성 경: [대하14:13]
(주); 구스 사람을 쫓아 그랄까지 이르매 - '그랄'(Gerar)은 가사(Gaza) 남쪽에 위치해 있던 과거의 블레셋 성읍이다(창 10:19). 일반적으로 이곳은 오늘날의 '움 제랄'(Umm Jerar)과 동일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Curtis).
(주); 살아 남은 자가 없었으니 - 어떤 주석가들은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단지 구스(Cush)가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패배하였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Keil, O. Zockler). 어쨌든 이는 구스 사람들이 완전히 섬멸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에는 분명하다. 이후로 유다는 애굽의 22왕조와 23왕조에게서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았는데 애굽에서는 이 일로 인하여 22왕조가 무너지고 23왕조가 들어섰던 것으로 추측된다(Payne). 실상 다시금 이스라엘이 애굽 왕의 간섭을 받기 시작한 것은 호세아(B.C. 732-722) 당시 소(So)에 의해서이다(왕하 17:4).
(주); 여호와 앞에서와 그 군대 앞에서 - '그 군대'가 히브리어 원무에는 '그의 군대'(his army)로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고대의 주석가들은 이를
창 32:2에 나오는 '천군 천사'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메튜 헨리(Matthew Henry) 같은 주석가도 그렇게 보았는데 그 이유는 '군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하네'(* )라는 말이 상징적으로 '천사들', '별들의 대군(大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아사의 군대'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사의 군대를 당신의 군대처럼 사용하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경우 아사의 군대를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천군 천사를 대동하고 구스인을 치는 것과 동일한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I, p. 359).
성 경: [대하14:14]
(주); 그랄 사면 모든 성읍 백성을 두렵게 하시니 - 이로 볼 때 당시 그랄 사면에 거주하던 이들은 모두 구스 사람들의 지지자들이었음이 틀림없다. 이 지역의 거주자들은 본래 블레셋 사람드로서 반유목민(半遊牧民)이었기에 짐승과 양과 약대를 많이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사 그들이 여호와를 두려워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주); 무리가...많은 물건을 노략하고 - 이스라엘 사회에서 전쟁에서의 노략물은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로 간주되었다(신 20:14).
더욱이 본문에서 아사의 군대는 실제적으로 전투도 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구스인들을 쫓아내신 후에 노략물만 거두어들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는
참으로 주를 의지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신 20:14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14:15]
(주); 짐승 지키는 천막 - 이는 문자적으로 '가축의 막사'라는 뜻이다. 그러나 한글 개역 성경에서 작은 글씨로 '지키는'이라는 설명어를 삽입한 바와 같이 이는 그 지역 유목민들의 천막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주); 양과 약대 - 노획물 가운데 '약대'(camels)는 아비시니아인들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구스 사람 세라의 군대에 아비시니아인들이 많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9절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5:1]
(주); 하나님의 신이...임하시매 - 이는 주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어떠한 행위를 하거나 예언, 말씀 선포하는 것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20:14;24:20;대상 12:18). 한편 성경에는 '하나님의 신'이라는 표현과 '여호와의 신'이라는 표현이 서로 번갈아 나타나는데 이는 각기 다른 성령의 사역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 같다. 즉, '하나님의 신'이라는 표현은 주로 일반 은총적인 측면에서 언급된 듯하고(창 1:2), '여호와의 신'은 특별 은총과 연관된 듯하다(20:14-17). 그렇지만 특별한 의미없이 두 말이 교호적(交互的)으로 쓰인 경우 또한 많으니 반드시 다 그렇다고 만은 볼 수 없다(삼상 10:6, 10). 아무튼 이상의 사실들은 구약 시대에도 성령께서 성부(聖父), 성자(聖子) 하나님과 더불어 활약하셨음을 증거해 준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창 1:26 주석을 참조하라.
(주); 오뎃의 아들 아사랴 - '아사랴'(Azariah)란 동명 이인(同名異人)은 성경에 여러 명 나온다(21:2;23:1;대상 2:8;스 7:3;느 7:7). 그렇지만
오뎃의 아들 아사랴가 언급된 곳은 여기뿐이다. 아마 역대기 저자는 대제사장 요하난의 아들 아사랴(대상 6:10)와 구별하기 위해서 이 선지자를
'오뎃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 고대 역본들(Vulgate, LXX)에는 '오뎃의 아들 아사랴'가 단지 '오뎃'이라고만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혹자(Movers)는 본절을 '아사랴의 아들 오뎃'이라고 읽어야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근거로 본장 8절에서 '오뎃의 아들 아사랴' 대신 '선지자
오뎃'이 언급되고 있음을 든다. 그렇지만 8절에서 '선지자 오셋' 뒤에는 '...의 아들 아사랴'가 필사자의 실수로 인해 빠졌거나 '오뎃'이라는
이름이 잘못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Pulpit Co-mmentary). 따라서 위의 주장의 사실성 여부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한편 '오뎃'(Oded)의 행적에
대해서는 성경에 달리 언급된 바가 없다. 고대 주석가들은 '오뎃'을 선견자 잇도(9:29;12:15;13:22)와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하는데 어디까지나
추측일 따름이다(O.Zockler).
성 경: [대하15:2]
(주);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 - 이스라엘 열지파의 반 역시 그들에게 동조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다윗 왕조를 섬긴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가리킨다(10:1-19). 이 중 베냐민 지파가 다윗 왕조를 섬기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왕상 12:21 주석에서 상세히 언급하였으니 참조하라.
(주); 함께하실지라...버리시리라 -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말씀으로서 모세 때에도(신 4:29), 다윗과 솔로몬의 때에도(24:20;대상 28:9),
그리고 신약 시대에도(약 4:8) 주어졌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선하여 돌아오는 아사 왕에게도 선지자 아사랴를 통하여 이 같은 언약의 말씀을
상기시키신 것은 그로 하여금 언약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축복을 계속해서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대하15:3]
(주); 이스라엘에는...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제사장이 없었던 시대는 많았다. 사사기 시대에도 그랬고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 때에도 그랬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육이 부재(不在)할 때 참신이신 여호와가 인식되지 못하고 진리가 밝히 드러나지 못했다.
(주); 이제 오래였으나 - 이것은 과거 시제로만 국한하여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원문에 따라 본절은 "많은 날들을...그렇게 할
것이다"로도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P.C. Barker). 따라서 본절은 과거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부재했던 때가 있었듯이 앞으로도 그러한 때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성 경: [대하15:4]
(주); 그 환난 때에...돌아가서 찾으매 - 본절의 시제는 3절의 시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와우(* ) 접속법에 따라 본절의 완료형
동사도 미완료 동사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면 저가 그들의 만난 바가 되신다는
말씀은 어느 시대에든 적용될 수 있는 영원한 언약의 말씀이라 하겠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약속하셨다(렘 29:13).
성 경: [대하15:5]
(주); 그때에 - 이것은 어떤 특정한 때를 가리키기보다는 3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참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을 때, 즉 일반적을 그러한 현상이 있는 때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주); 열국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아라초트'(* )의 본래 뜻은 단순히 '그 땅들'이다. 물론 이 말은 '열국'을 의미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역대기 저자는 이 단어를 이스라엘 땅의 여러 지역을 가리키는 단어로 자주 사용하고 있다(11:23;대상 13:2). 따라서 본절 역시 열국이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땅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전후 문맥과도 잘 부합된다.
(주); 사람의 출입이 평안치 못하며 - 이는 이스라엘 땅에 평화가 사라지고 큰 공포 분위기가 조성될 것을 가리킨다(삿 5:6;6:2). 즉, 다시 말하면
외적이 이스라엘을 침입하여 이스라엘을 다시르게 되고 나라는 무정부 상태로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박탈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출입'이
끊어지게 되는 것은 성경에서 대개 완전한 멸망을 상징한다(수 6:1;대하 16:1). 하나님 앞에서 패역했던 북왕국과 남왕국은 모두 이러한 경우를
당했었다(왕하 17:6;25:8-12).
성 경: [대하15:6]
(주); 이 나라가 저 나라와 서로 치고 - 혹자는 이를 민족 간의 전쟁으로 해석하나(Kamphausen)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배교(背敎)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고로 그러한 해석은 맞지 않다. 따라서 이것은 이스라엘 지파 간의 싸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베냐민 지파와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과의 싸움(삿 20:35-45)이나, 길르앗 사람과 에브라임 사람간의 싸움(삿 12:4-6) 등을 들 수 있다. 즉, 본절은 여호와의 율법이 부재할 경우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다툼과 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주); 이는 하나님...요란케 하셨음이니라 - 위와 같은 경우를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심판을 당할
때에는 반드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그를 찾아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저가 만나 주실 것이라는 의미이다(4절).
성 경: [대하15:7]
본절은 선지자 아사랴의 예언의 결론 부분으로서 아사 왕으로 하여금 내부적인 종교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말고 박차를 가하도록 촉구하는 말씀이다.
(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 이는 용기를 잃지 말라는 뜻으로(느 6:9;습 3:16)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갈 6:9)라는 말씀과 일맥 상통한다. 즉, 이는 다시 바꾸어 말하면 개혁의 대의 명분(大義名分)이 여호와께 있으므로 아사는 낙심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하게 예수께서도 자신이 세상을 이기셨으므로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담대'하라고 당부하셨다(요 16:33). 한편 본절은 아사의 종교 개혁이 강력히 실시되므로 인해 우상 숭배자들의 반발과 저항이 거세게 일어날 것을 예견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후에 나오는 구절들 속에는 그러한 반발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는데 이는 아사가 얼마나 훌륭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종교 개혁을 수행했는가를 암시해 준다.
(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 - 의(義)를 행하는 자가 받을 상급에 관해서 성경은 여러 번 자주 언급하고 있다(창 15:1;잠 11:18;전
4:9;렘 31:16;고전 3:8;15:58). 그 가운데서도 특히 예수께서 말씀하신 '팔복'(八福)은 백미(白眉)를 이루는 것이니 참조하라(마 5:1-12).
성 경: [대하15:8]
(주); 선지자 오뎃의 예언 - 1절의 '오뎃의 아들 아사랴'와는 달리 본절에서 단순히 '선지자 오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이유를 정확히 규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본절은 1절에서와 같이 '선지자 오뎃의 아들 아사랴의 예언'이라고 보아야 한다면 '예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명사의 연계형(construct state)이 되어야 하는데 원문에는 독립형(absolute state)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즉, '예언'이라는 단어에 어떠한 수식어가 붙든지 이 단어는 연계형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왜 독립형으로 기록되어 있는지 아무도 설명을 못 한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에서 '선지자 오뎃'이라는 단어를 빼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비교적 유력시되는 견해이다(Pulpit Commentary).
(주); 가증한 물건 - 이는 우상 또는 우상 숭배와 관계있는 물건들을 가리킨다(왕상 11:5;15:12;왕하 23:13, 24;겔 30:7, 8;단 9:27). 이는 곧 하나님께서 그 같은 우상들을 얼마나 혐오하시는지를 잘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
(주); 에브라임 산지에서 빼앗은 성읍들에서 제하고 - 아사가 등극한 이래 지금까지 남왕국과 북왕국 간에는 전쟁이 없었다. 아사가 북왕국과 전쟁한 것은 이스라엘 왕 바아사 때에 가서이다(왕상 15:16-22). 그러므로 본절은 아사의 부친 아비야가 여로보암 왕에게서 빼앗은 성읍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13:19). 이는 많은 학자들도 지지하는 견해이다(Payne, P.C. Barker).
(주); 여호와의 낭실 앞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 솔로몬 성전의 제단은 여호와의 낭실 앞에 있었다(8:12). 그런데 여기서 '중수하고'(* ,
하다쉬)라는 단어는 '깨끗하게 하다', '새롭게 하다'(삼상 11:14;시 51:10)라는 뜻도 지니고 있는바 비유적으로 우상으로 더러워진 것을 '다시
성별한다'는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아사가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오염된 여호와의 제단을 깨끗하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Bertheau). 그러나 '하다쉬'(* )라는 단어가 문자적으로 사용될 때도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는 '고치다', '수선하다'(repair)라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본절 역시 문자적인 의미로 보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Pulpit Commentary). 한편 이와 관련하여 카일(Keil)은 솔로몬 성전을
건축한 지 이미 60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여호와 신앙을 새롭게 장려하기 위해서 아사가 제단을 수축(修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Keil & Delitzch,
vol. III, p. 364)
성 경: [대하15:9]
(주); 무리를 모으고 - 아사 왕은 전국가적인 개혁을 수행하고 새롭게 언약을 세우며 백성들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대집회를 열었다. 이는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기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열었던 대집회(5:2) 이후 처음 있었던 대집회로서 이때 치르었던 제사의 규모도 상당히 컸다(11절).
(주); 에브라임과...저희 중에 우거하는 자 - 이러한 표현은 이방인들을 가리킬 때 종종 사용되는 것이다(출 12:49;신 28:43;수 20:9). 그런데 여기서 이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남하(南下)한 에브라임과 므낫세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한 이주 사건은 과거 르호보암 때에도 있었는데(11:13-17) 본문은 이제 아사 왕 때에도 여호와께서 아사 왕과 함께하심을 보고 남하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증거해 준다.
(주); 시므온 가운데서 나와서 - 시므온 지파는 유다 남쪽 지방에 거주하면서 유다 자손의 기업 가운데서 기업을 얻었다(수 19:1-9). 그러므로
여기서 시므온 지파가 북쪽의 에브라임 및 므낫세 지파와 함께 나왔다는 말은 좀 이상하게 보인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시므온 지파가 이전에
북쪽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함께 내려온 것이라고 생각한(Bertheau), 이에 대한 역사적인 근거가
불확실하다. 그리고 카일(Keil)은 이에 대해서 정치적으로는 시모온 지파가 유다 지파와 함께 하였지만 종교적으로는 예루살렘에서 여호와를
숭배하지 않고 북이스라엘처럼(왕상 12:25-33) 자기 성읍들에 우상을 세워 숭배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근거로 아모스서에서 시므온
땅인 브엘세바가 벧엘이나 길갈과 함께 우상 숭배지로 언급되고 있음을 든다(암 4:4;5:5;8:14). 그러나 왕상 11:31을 보면 시므온 지파도 분명히
정치적으로 북왕국의 열 지파에 속하였음을 시사하고 있으므로 이 견해는 타당치 않다. 한편 대상 4:24 이후를 보면 시므온의 성읍이 대체적으로
유다 지파에 흡수되어 버린 것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그 일로 인해 시므온 지파의 상당수가 북쪽으로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창
49:7에서 시므온 지파에 대하여 예언한 바,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고 한 것의 성취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그를 뒷받침해 주는 정확한 역사적인 자료가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더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성 경: [대하15:10]
(주); 아사 왕 십오 년 - 14:1에 보면 아사가 즉위한 지 10년 동안은 유다가 평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세라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입한 것(14:9-15)은 아사 왕 11년경의 일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Pulpit Commentary). 그렇다면 아사와 구스 왕 세라 간의 전쟁은 적어도 4년 정도 걸렸다는 뜻이 된다(Curtis). 무론 이것은 아사 왕 15년에 열린 축제(11-15절)가 세라에게서 승리한 직후에 있었다는 가정(假定)에서 비롯된 결론이다(P.C. Barker, Keil). 실제적으로 아사 왕이 노획물을 거두고 그랄 사면 모든 성읍들을 평정하는 데에는(14:13-15) 상당 기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11-15절에 언급된 축제가 아사 왕 십 오년(B.C. 895년경)에 있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주); 삼월에 - 이는 '시완 월'로서 양력으로 5, 6월에 해당되는데 이 달에 칠칠절(오순절) 절기가 있었다. 이 절기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이다. 레위기 서론, '히브리 절기와 축제' 참조. 아사 왕은 이 절기를 맞아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새롭게 하였다(12-15절).
성 경: [대하15:11]
(주); 그 날에 노략하여 온 물건 중에서 - 아사가 구스 사람에게서 탈취한 노획물 가운데에는 소에 대한 언급이 없다(14:13, 15). 따라서 본절에
언급된 소 제물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아사가 특별히 구별하여 준비한 것인 듯하다. 한편 당시 아사가 탈취한 양과 약대 따위는 그 동안 상당한
숫자로 불어났을 것이다.
성 경: [대하15:12]
마음을 다하고...언약하고 - 이것은 백성들이 엄중한 맹세로 자신들을 여호와께 결속시켰음을 나타낸다. 렘 34:10에서도 이와 유사한 언약식이
소개되고 있다. 즉, 그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맹세한 것이다(신 4:29).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사랑은 실상 인간의 제일가는 기본 의무이다. 때문에 아사는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이에 대하여 맹세한 것이다.
성 경: [대하15:13]
(주); 무릇...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 일견 잔혹하게 보이는 이 처형은 시명기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출애굽 당시 가나안인들의
다신교(polytheism)와 저속한 풍습은 이스라엘의 유일 신앙에 정신적인 위협이 되어 왔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인들과 우상 숭배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하셨다(신 7:1-4;13:6-10;17:2-7). 이 명령은 이스라엘 신앙의 순수성을 보전하기 위한 필연적인 조치였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악한 신학과 타락한 윤리로부터 결별하고 나아가 그것들을 멸절시키기 위해 단호한 행동을
취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차원에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징계 조례는 재고(再考)되고 강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교회
내에서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거나 복음의 진리를 흐리는 자들에 대해서 교회는 지체없이 징계 조례에 의거하여 명확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5:3-5, 13;딤전 1:20). 신앙의 순결함을 수호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일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결국 파괴적인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계 3:16).
성 경: [대하15:14]
(주); 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나팔을 불어 - 이는 백성들이 이 언약의 맹세에 순종으로 응답하여 화답한 것을 가리킨다. 한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갱신하거나 기타 다른 기쁜 일이 있을 때 이와같이 악기를 동원한 사실은 다른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23:13;느 12:27).
성 경: [대하15:15]
(주); 여호와께서도...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 이는 온 유다 백성이 언약 맺는 것을 기뻐하고 그 언약의 말씀을 준행한 데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이다. 그런데 이 평안의 기간이 얼마나 지속되었는가에 대해서는 19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15:16]
(주); 아사 왕의 모친 마아가 - 이미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마아가(Maachah)는 아사의 모친이 아니라 아비야의 모친이며(11:23;13:2) 아사의 조모(祖母)이다. 이 마아가는 르호보암의 아내였는바(11:20) 이때까지 왕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Payne). 따라서 아사가 감히 마아가의 태후의 위(位)를 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가히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태후가 왕보다 더 큰 권위를 행사한 것이 통례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녀의 손자 요아스 일족을 완전히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던 경우를 들 수 있다(왕하 11:1-3). 이로 볼 때 아사의 개혁 의지가 얼마나 단호했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주); 그 우상을 찍고 빻아 - 본절과 병행 구절인 왕상 15:13에는 '빻아'라는 단어가 없다. 이 단어는 당시에 아세라 목상 뿐만 아니라 그 주위에 돌비나 금속 재료로 된 우상도 있었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금송아지를 빻아 가루를 만든 것을 가리킬 때(출 32:20), 아세라 목상 이외의 것들을 파괴한 것을 가리킬 때(34:4, 7;왕하 23:6)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주); 기드론 시냇가 - 이 강은 예루살렘 동편 갈람 산 사이를 흘러 사해(死海)로 들어가는 길이 약 5km의 간헐천이다. 왕상 2:37 주석 참조.
역사적으로 이 기드론(Kidron) 시냇가에서 우상 숭배하던 가증한 것들이 자주 파괴되었다(29:16;30:14;왕상 15:13;왕하 23:4, 6, 12). 그리고
요시야 시대에 이곳은 공동묘지로서 부정한 것들을 버리는 장소로 인식되기도 하였다(렘 26:23;31:40). 왕상 15:13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5:17]
(주);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 - 산당의 제거 문제에 관해서는 14:3 주석에서 상세히 다르었으니 참조하라. 한편 본절에서 '이스라엘'이란 국명(國名)은 남왕국 유다를 가르키며 유다만이 합법적인 이스라엘 백성임을 암시하고 있다. 혹자는 "산당을 없이하고"(14:3)라는 표현과 본절의 "산당은...제하지 아니하였으나"라는 표현 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북왕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Curtis, P.C. Barker). 그러나 본문은 북왕국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사 왕이 북왕국의 내적 문제에 관여할 하등의 정치적 권한도 없었다. 따라서 위의 견해는 마땅히 철회되어야 할 것이다.
(주);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 - 본절과 병행 구절인 왕상 15:14에는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온전'(* ,
솰렘)이란 단어는 그 마음을 끝까지 일관되게 지속하여 어떤 일을 끝마쳤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로 볼 때 아사는 종교 개혁에 평생을 바쳤음이
틀림없다.
성 경: [대하15:18]
(주); 하나님의 전에 드렸더니 - 아사가 하나님의 전에 드린 보물들은 그 부친 아비야가 여로보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거둔 전리품(13:19)과
아사가 구스 사람 세라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이다(14:13-15). 여호와의 전 곳간에 이같이 많은 보물들을 쌓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아사가 여호와께
큰 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성 경: [대하15:19]
(주); 삼십 오 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 - 본절은 해석상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1) 왕상 15:16, 32에는 아사와 북왕국의 바아사
사이에 일생 전쟁이 있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본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2) 이스라엘의 바아사는 유다의 아사 왕 3년에 즉위하여 아사 왕
26년에 죽었는데(왕상 16:8) 본절 및 16:1에서는 아사 왕 35년까지 평안했고 아사 왕 36년에 바아사와 전쟁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제들에
대하여 혹자는 여기서 35년은 왕국 분열 이후부터 35년을 가리크는 것이며 바아사와의 전쟁은 아사 왕 즉위 16년(르호보암 17년+아비야 3년+아사
15년=35년)에 있었다고 생각한다(Keil, Payne). 만일 그렇다면 아사의 생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처음 10년간은
평안했고(14:1), 아사 왕 11년에 세라와의 전쟁이 있었으며, 16년에 바아사와의 전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왕상 15:16,
32의 '아사와 바아사 사이에 일생 전쟁이 있으니라'는 구절의 해석에는 도움이 되지만 왕상 16:8의 구절을 해석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본절의
35년은 아사 왕 25년을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P.C. Barker)이 비교적 옳은 듯하다. 그렇다면 아사와 바아사 사이에는 일생 실제적인 전투가
있었다기보다는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의 관계처럼(이에 대해서는 12:15의 주석을 참조하라) 일생 서로 적의에 가득차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아사 왕 26년에 죽임을 당했던 것 같다(왕상 16:1-4). 더욱이 26년에 있었던 바아사와의 전쟁에서도 아사 왕은 아람 군대의 원조를 요청하여
바아사를 물리쳤으니(16:2-5) 이로 보아 아사 왕 때에는 그 후에도 평안했음이 분명하다.
성 경: [대하16:1]
주제1: [아사의 실정(失政)과 죽음]
주제2: [바아사의 유다 침략]
(주); 아사 왕 삼십 륙년에...유다를 치러 - 왕상 16:8, 10에 따르면 바아사(baaha)는 아사 통치 26년에 그의 후계자 엘라(elah)에 의해 살해되었다. 따라서 15:19에서 이미 주석한 바와 같이 본절의 36년은 26년으로 수정하여야 할 것이다.
(주); 라마를 건축하여 - 베냐민 지파의 기업인 라마(수 18:21-28)는 예루살렘 북쪽 약6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오늘날의 '엘-람'(xlRam)에
해당된다(삿 4:5;19:13). 이라마(Ramah)는 에브라임에서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바아사는 아사의 명성을 듣고
남하(南下)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기 위하여(15:9) 이곳을 요새화하여 경비를 강하했다. 또한 이로써 유다 정복을 위한 전초(前哨) 기지
확보라는 전략적 목적도 꾀하였다. 왕상 15:17 주석 참조. 한편 라마보다 더 북쪽에 있는 벧엘은 과거 아비야가 여로보암에게서 빼앗은
성읍이다(13:19). 그런데 이때에 라마와 함께 이 벧엘도 바아사에 의해서 탈환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Payne). 이와 같은바아사의 침략은 아사가
아람 왕 벤하닷에게 원조를 요청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성 경: [대하16:2]
주제1: [아사의 실정(失政)과 죽음]
주제2: [아람의 도움을 청하는 아사]
(주); 은금을 취하여 - 본절과 병행 구절인 왕상 15:18에는 '은금을 몰수히 취하여' 벤하닷(Ben-hadad)에게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아사는 바아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그 부친의 구별한 물건과 자기의 구별한 물건'(15:18) 전부를 아람 왕 벤하닷에게 도움을 청할 목적으로 갖다 바쳤던 것이다. 이처럼 아사는 초기에 온전히 여호와께만 의지함으로 받은 축복의 선물들을 이제 여호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의지함으로 다 잃게 되었다. 도한 그는 이와같이 아람 왕을 이스라엘 민족간의 문제에 개입토록 함으로써 그 다음 한 세기 동안 계속해서 아람이 이스라엘을 간섭하게끔 만들었다(왕하8:28, 29;16:5-9).
(주); 아람 왕 벤하닷 - 벤하닷의 계보가 여기서는 생략되어 있지만 병행 구절인 왕상15:18에는 '헤시온의 손자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자(者)는 벤하닷 1세(B.C.900-860년)로서 사마리아 성을 공격하여 성읍 백성들을 기아에 허덕이게 했던 유능한 정치 군인 벤하닷
2세(왕하 6:24)의 아버지이다. 한편 헤시온(Hezion)은 르손(Rezon, 왕상 11:23-25)과 동일인이라는 주장도 있는데(Corney) 분명치 않다. 왕상 15:18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6:3]
주제1: [아사의 실정(失政)과 죽음]
주제2: [아람의 도움을 청하는 아사]
(주); 내 부친과 당신의 부친 사이에와 같이 - 이는 벤하닷의 아버지인 다부림몬(왕상15:18)과 아사의 아버지 아비야 사이에 상호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던 적이 있음을 가리킨다(Payne). 당시 아비야가 여로보암에게서 크게 승리하였기 때문에(13:13-19) 다브림몬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조약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볼 때 아람은 항상 이스라엘의 정세(政勢) 변동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주);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하자 - 이처럼 아사는 그의 부친 아비야는 달리 비굴하게 먼저 아람에게 약조를 청하였다. 이는 마치 유다 왕 아하스가 앗스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원조를 요청하던 때의 모습과 유사하다(왕하 16:7 이하). 그렇지만 이같이 하나님 대신 외국 군대를 의지하던 자들의 결말은 다 동일하여 도리어 이방인의 압제 하에 놓이고 말았으니 자승 자박(自繩自縛)의 대표적 경우라 하겠다.
(주);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서 - 아람(Aram)은 이미 북이스라엘과 약조를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사의 요청에 기꺼이 응하여 쉽게
약조를 깨뜨렸다(4절). 아람이 이와같이 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아람은 처음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는 틈을 타서 남왕국
보다 많은 지파와 세력을 가진 북왕국(왕상 11:29-36)과 동맹을 맺어 안전을 구가했다. 그런뒤 어느 정도 세력을 키워 팔레스틴 진출을 꿈꾸고 있던
차에 아사가 그 명분을 제공해 준 것이다. 그래서 앞서 이스라엘과 맺은 약조를 무시한 채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자국(自國)의 이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역사적 사건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즉, 오늘날에도 성도들 간의 분쟁은 오히려 사단이
성도들을 이간질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다는 점이다(눅 11:17;고전 1:10;3:3).
성 경: [대하16:4]
주제1: [아사의 실정(失政)과 죽음]
주제2: [아람의 도움을 청하는 아사]
아사로부터 많은 뇌물을 얻었을 뿐 아니라(2절) 팔레스틴으로 진출할 기회를 얻는 일석 이조의 이득을 본 벤하닷(3절)은 지체없이 이스라엘 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본절은 이때 벤하닷이 공략한 이스라엘 성읍들의 명단을 보여준다.
(주); 이욘 - 이는 '메리아윤'(Merj 'Ayun)이라는 지명으로 현존하고 있는 곳으로서 남달리 지파의 산지 아래에 타원형으로 형성되어 있는 기름진 땅이다. 그 부근에는 리타니(Litany)라는 강이 있었는데 오늘날 납달리 평야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텔 디빈'(Tell Dibbin)과 동일한 것으로 추측된다(Curtis).
(주); 단 - 이는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선 지역에 있는 성읍이다(삿 18:29). 본래의 이름은 '라이스'(Laish)였는데 단지파가 이곳으로 이주해 와 '단'(Dan)이라고 개명(改名)하였다(삿 18:1, 2, 29-31).
(주); 아벨마임 - 왕상 15:20에서는 일명 아벨벧마아가(Abel-beth-maachah)로도 불리우고 있다. 이곳은 레바논 기슭에 위치하고 있던 납달리 지파의 성읍으로서 시돈과 해안지대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는 베가가 디글랏 빌레셋에게 빼앗겼던 성읍이기도 한데(왕하 15:20) 삼하 20:18에서는 단순히 '아벨'(abel)로도 불리웠다.
(주); 납달리의 모든 국고성 - 병행 구절인 왕상 15:20에는 '긴네렛 온 땅과 납달리 온 땅'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거기서 접속사 '과'(*,
와우)는 '즉'(namely)으로 수정 번역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긴네렛 온 땅이 곧 납달리의 곡창 지대로서 솔로몬이 국고성(國庫城)을 많이 세운
곳이기 때문이다(8;6). 한편 긴네렛(chinnereht)은 신약 시대의 '게네사렛'과 동일한 지역으로서 갈릴리 바다 서쪽 지역을 가리킨다(민
34:11;수11:2;12:3;19:35). 역대기 기자는 당시 그곳이 '긴네렛'보다는 납달리 국고성으로 더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언급한 듯하다(Keil).
한편 이상의 이욘, 단, 아벧마임, 납달리의 모든 국고성은 이스라엘의 북쪽 변방 지대로서 바아사가 성을 건축하던라마와는 반대 위치에 있었다.
이로 볼 때 아람이 직접 이스라엘과 접전한 것이 아니라 반대편에서 공격함으로써 바아사로 하여금 유다 공격을 포기하도록 만든 것임에 틀림없다.
성 경: [대하16:5]
주제1: [아사의 실정(失政)과 죽음]
주제2: [아람의 도움을 청하는 아사]
(주); 라마 건축하는 일을...그친지라 - 자신의 주력 부대가 거개 라마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북쪽 변방에 아람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아사는 라마 건축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본절과 병행 구절인 왕상15:21에는 바아사가 "라마 건축하는 일을 그치고 디르사에
거하니라"고 언급되어 있다. '디르사'(Tirzah)는 당시에 북왕국의 수도이다(왕상 14:17;15:21, 33). 이로 볼 때 바아사는 라마 건축하는 것보다
수도를 방어하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하여 라마에서 디르사로 돌아갔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역대기 저자는 이 사실을 생략하고 있다. 왕상 15:21
주석 참조.
성 경: [대하16:6]
주제1: [아사의 실정(失政)과 죽음]
주제2: [아람의 도움을 청하는 아사]
(주); 아사왕이...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 바아사가 벤하닷의 침입을 맞아 수도를 방비하러 간틈을 타 아사 왕은 유다 백성들을 거느리고
가 라마를 재탈환하였다. 그리고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가져다가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는 데 사용하였다. 여기서 게바(Geba)는
예루살렘 북쪽 약 9.6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예바'(jeba)를 가리킨다 (Curtis). 이 게바는 아사 때부터 줄곧 유다 왕국의 북방 한계선에 있는
성읍으로 나타난다(왕하 23:8;슥 14:10). 다음으로 미스바(Mizpah)는 예루살렘 북서쪽 약8km 지점에 위치했던 성읍으로 오늘날의 '나비 삼월'(Nabi
Samwil)이다. 이 성읍 역시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삿 20:1, 3:21:1,5,8;삼상 7:5등). 한편 아사 왕이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한 것은 북왕국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인데 렘41:9에 보면 아사가 미스바에 큰 '구덩이' 곧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Keil).
성 경: [대하16:7]
주제1: [아사의 실정(失政)과 죽음]
주제2: [하나님의 책망]
(주); 선견자 하나니 - 하나니(hanani)란 이름은 성경에 여러 명 나온다(대상 25:4,25;스10:20;느 1:2;12:36). 그렇지만 선견자 하나니에 대한 언급은 여기 밖에 없다. 이 선견자 하나니는 바아사의 집안이 몰락할 것을 예언하고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을 도왔던 선견자 예후의 아버지이다(19:2;20:34;왕상 16:1).
(주);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 이는 곧 아사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기만 하였다면 바아사에게서 승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그와 동맹 관계에 있던(3절) 아람도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한편 본서에서 외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았던
왕들은 여호사밧(19:2), 여호람(21:11-15),요아스(24:19), 아마샤(25:15) 등이 있다.
성 경: [대하16:8]
주제1: [아사의 실정(失政)과 죽음]
주제2: [하나님의 책망]
(주); 룹사람 - 세라의 군대속에 룹 사람(the Lubims)이 있었다는 말이 14:9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역대기 저자는 그곳에서 단지 '군사
백만'이라고만 기록했다. 그렇지만 본절로 볼 때 시삭의 군대처럼(12:3) 세라의 군대에도 다른 용병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본저의 '룹' 12:3에는 '튓'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원어로 다같이 '루빔'(*)으로서 리비아 사람들을 말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2:3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16:9]
주제1: [아사의 실정(失政)과 죽음]
주제2: [하나님의 책망]
(주); 여호와의 눈은...감찰하사 - 이는 하나님의 전지하심(Omniscience)과 보호 하시고 섭리하심을 가리키는 성경의 관용적 표현이다(잠 15:3;슥 4:10).
(주);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 - 여기서 '전심으로'(*, 솰렘)는 '일관된', '신실한'이란 뜻을 지닌 단어이다. 이것은 신실하신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요청하시는 언약의 한 조항이며 핵심이다(신 6:5). 그러기에 이전에 아사 왕도 자기 백성들과 함께 이 같은 자세를 견지할 것을 맹세하였었다(15:12).
(주);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 이미 1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아사와 바아사간의 전쟁은 아사 왕 26년에 바아사가 죽음으로써 끝이
났다(왕상 16:8). 따라서 이후부터 왕에게 계속해서 전쟁이 있었다는 성경적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본절의 내용은 아사의 후손들에게
적용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 경: [대하16:10]
주제1: [아사의 실정(失政)과 죽음]
주제2: [하나님의 책망]
(주);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 아사는 선견자 하나니의 질책에 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고 말았다. 그가 이렇게 분노한 것은 벤하닷과의 동맹으로 이스라엘군을 축출하는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니가 왕을 책망하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전쟁의 방법보다는 결과만을 중시한 나머지 자신이 하님을 의지하지 않은 채 인간적인 교만을부린 것을 새각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비록 아사가 인간적인 모략으로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하나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실패를 자초하였음을 본절에서 발견하게 된다. 한편 여기서 '옥'(*, 마흐페케트)은 '바꾸는 곳', '떨게하는 곳', '구르게 하는 곳'을 가리키는데 어떤 고문(拷問) 장소를 가리키는 것 같다(Keil &Delitzch, vol. III, p. 369). 실상 이 단어는 성경에서 단 세 번밖에 쓰이지 않았는데 모두 선지자의 고문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렘 20:2, 3;29:26). 그리고 본절은 구약 성경에서 최초로 왕이 선지자를 박해한 데 대한 기록이다. 이런 일은 이후로 자주 일어났는데 미가야에 대해서(24:21), 그리고 우리야에 대해서(렘 26:20-23) 가해진 박해 등을 들 수 있다.
(주); 또 몇 백성을 학대하였더라 - 여기서 '학대하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라차츠'(*)는 '파괴하다', '부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O.
Zockler). 이로 볼때 선지자에 대한 왕의 학정(虐政)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백성들이 상당수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아사 왕은 본보기로 몇명의
백성을 학대함으로써 다른 백성들이 불만을 표시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한번의 죄악은 연쇄적으로 다른 죄악을 몰고 오기가
십상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의 사슬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다윗처럼 하나님으로부터의 책망이 있을 때 곧 바로 회개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삼하 12:7, 13).
성 경: [대하16:11]
주제1: [아사의 실정(失政)과 죽음]
주제2: [아사의 죽음]
(주);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 - 여기서 아사 왕의 시종 행적을 기록한 사료(使料)는 왕상15:23에서 말하는 '유다 왕 역대 지략'과는 다른 사료인
듯하다. 역대기 저자는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라는 자료에 대해서 여기서 최초로 공개하고 있는데 이 자료를 통하여 그는 열왕기에 없는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소개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역대상 서론, '역대기의 자료'를 참조하라.
성 경: [대하16:12]
주제1: [아사의 실정(失政)과 죽음]
주제2: [아사의 죽음]
(주);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 아사 왕은 그의 통치 39년에(왕상 15:23, 저가 늙을 때에) 그 발에 병이 들었다. 여기서 '심히 중하나'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할라'(*)의 문자적인 뜻은 '닳아 빠지다'이다. 이로 보아 그의 병은 가려움증이 아주 심한 피부병이었던 듯하다.
(주); 여호와께 구하지 이니하고 -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아사에게 바아사와 전쟁할 때에 가졌던 교만한 마음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마지막 죽음의
병을 앓게 된 때까지도 그의 교만이 계속돠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유사하게 히스기야 왕도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그는 인간 질병의 궁극적인
치유자는 여호와이심을 믿었기 때문에 나음을 입었다(왕하20:5;시 103:3). 이와같이 아무리 좋은 약이나 의원이 있다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온전한 치유란 있을 수 없다(렘 8:22). 물론 의술이나 의약 그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일반
은총으로서 만민에게 허락하셨으며 바울도 디모데가 병이 났을때 치료의 일환으로 포도주를 쓰라고 권고했기 때문이다(딤전 5:23). 따라서 본절은
아사가 의원을 찾아간 그 자체를 정죄한 것이 아니라(1) 치유의 하나님(욥 42:10;시6:2;30:2;41:4) 대신 인간적인 방법을 의지한 것과 (2)미신적인
방법(삼상 28:7;왕하1:2이하;대상10:14)으로 의원을 의지한 것에 대한 정죄라 할 수 있다.
성 경: [대하16:13]
주제1: [아사의 실정(失政)과 죽음]
주제2: [아사의 죽음]
(주); 아사가 위에 있은 지 사십 일 년에 죽어 - 본절과 병행 구절인 왕상 15:23에는 아사가 늙어서 병들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에
아사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만일 열왕기의 기록처럼 아사가 많이 늙었다면 혹자의 주장처럼 아사는 아비야의
아들(14:1)이 아니라 모친인 셈이 된다(15:16). 그러나 성경에서는 아사가 아비야의 아들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14:1;왕상 15:8). 그러므로
마아가는 그의 조모임이 틀림없다. 15:16 주석 참조. 한편 아사의 조모가 아사 통치시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는 사실(15:16)은 아사 왕이 상당히
어렸을 때 왕위에 올랐음을 암시해 준다. 그러므로 41년간을 통치한 아사의 당시 나이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혹자는 아사 왕이 요시야
왕과 비슷한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그가 죽을 때의 나이는 50세가 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P.C. Barker).
성 경: [대하16:14]
주제1: [아사의 실정(失政)과 죽음]
주제2: [아사의 죽음]
(주); 자기를 위하여 파 두었던 묘실에 - 왕상 15:24에는 "그 열조와 함께 그 조상 다윗의 성에 장사되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열왕기의 일반적인 진술보다 더욱 자세하게 아사의 다윗 성에 장사되긴 하였으나 자신을 위한 묘실을 따로 마련하여 두었다가 그곳에 묻히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상15:24 주석을 참조하라.
(주); 많이 분향하였더라 - 이와같이 왕을 장사할때에 향을 피운 일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21:19;렘 34:5). 죽은 자를 위하여 향을 피우는
관습은 동양의 많은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성 경: [대하17:1]
주제1: [여호사밧의 즉위]
주제2: [여호사밧의 선정(善政)]
(주); 여호사밧이...스스로 강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방비하되 - 20:31에 따르면 이때에 여호사밧(B.C.871-847)의 나이는 35세였다. 따라서 아사의
말년(16장)을 충분히 목격하고 인식했던 여호사밧은 바아사의 침략시에 보여 주었던 아사의 연약함과 달리 이스라엘을 방비하는 일에 전력을 쏟았던
것 같다(2절).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은 아합(B.C. 874-853년)이었던 바 그는 오므리 왕조의 두 번째 왕이며 그의 아내 이세벨과 함께 바알
숭배자로 유명했다. 한편 여호사밧(jehosoaphat)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자' 또는 '하나님께서 변호하시는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는 초창기 그의 삶이 여호와께 정직했음을 보아 대단히 적절한 이름이라 하겠다(3-5절).
성 경: [대하17:2]
주제1: [여호사밧의 즉위]
주제2: [여호사밧의 선정(善政)]
(주); 군대를 주둔하고 - 여기서 '군대를 주둔하고'의 뜻은 곧 싸움을 벌이기 위해 진영(陳營)을 갖추어 놓은 것을 가리킨다(대상 11:15). 따라서 바아사와 아사로 인한 남북왕국의 전쟁의 긴장은 여호사밧의 통치 초창기에도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 아사의 취한 바 에브라임 성읍들 - 이는 15:8에 언급된 성읍들과 요새 라마(16:1)를 가리킨다. 그런데 15:8에 언급된 에브라임 산지의 성읍들은 아사가 빼앗은 성읍들이라기보다는 그의 부친 아비야가 빼앗은 성읍들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 15:8 주석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 역시 그 성읍들을 아사가 빼앗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혹자들은 본절의 기록이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역대기 저자가 의도하는 바는 그 성읍들이 비록 아비야에 의해 탈취된 것이긴 하지만 그곳을 실제로 요새화하여 견고케 한 것은 아사에 의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 영문을 두었더라 - 이는 사령관이나 장교를 포함한 수비대를 주둔시킨 것을 의미한다(삼상 10:5;13:3). 본래 영문(營門)이라 함은 군대(army)
또는 진영의 출입구를 가리킨다.
성 경: [대하17:3]
주제1: [여호사밧의 즉위]
주제2: [여호사밧의 선정(善政)]
(주); 그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 이는 여호사밧이 과거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삼하 11장), 인구 조사(삼하 24장;대상 21장)를 한 집권 후기의 다윗의 잘못된 행위를 본받지 아니하고 초창기의 정직한 다윗의 길을 따랐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70인역(LXX)에는 본절의 '다윗'이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성경에서 다윗의 생애를 처음과 나중으로 구분한 경우가 발견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다윗대신 여호사밧의 부친 아사에 관한 언급으로 보고있는데 초창기의 아사는 선했지만(14, 15장) 후기의 아사는 악했기 때문에(16장) 이에 잘 어울린다. 그러나 성경에서 열왕의 통치를 평가할 때는 대개 다윗을 표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왕상 15:4) 본절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여도 별 문제는 되지 않는다.
(주);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 여기서 '바알들'(*, 베알림)은 복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유일하신 여호와와 대조적인 모든 거짓된 우상들을
통틀어 가리킨다(삿 2:11). 한편 '바알'(*)은 '주'(Lord)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서 초기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는 '여호와'를 지칭했다(대상
8:34;14:7). 그런데 후대에 이방인들의 바알(Ball) 종교가 이스라엘에 들어 온 후 이 명칭은 주로 가나안 싱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전용(轉用)되었다. 선지자 호세아(호2:16)가 하나님에 대하여 '바알'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후에 '바알'을 빼버리고 다른 이름으로 대치한
경우들이 성경에서 가끔 발견된다(삼상 12:11;삼하11:21).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하 2: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17:4]
주제1: [여호사밧의 즉위]
주제2: [여호사밧의 선정(善政)]
(주); 그 부친의 하나님 - 이는 3절에서 주석하였듯이 '그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수정되어야 함을 뒷받침해 준다. 이러한 사실은 6절에 기록된 여호사밧의 개혁이 아사의 개혁을 본받은 것이라는 점에서(14:3, 5) 더욱 그러하다. 왕상 22:43 주석 참조.
(주); 이스라엘의 행위 - 이는 11:15에 언급된 수염소 우상이나 송아지 우상등을 만든 여로보암의 행위 뿐만 아니라 온갖 우상들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행을 아울러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역대기 저자가 '이스라엘의 행위'라는 특별한 용어를 씀으로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대조되는
유다의 역사를 상대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대하17:5]
주제1: [여호사밧의 즉위]
주제2: [여호사밧의 선정(善政)]
(주); 나라를 그손에서 견고하게 하시매 - 구약에서 '손'(*, 야드)은 흔히 권력, 능력등을 상징한다. 여기서도 여호와 께서 유다 왕국을 여호사밧의 손에서 견고하게 하셨다는 것은 (1) 그를 통한 정권 확립(왕상 2:46;왕하 15:19)과 (2) 국력의 신장(24:23,24)등을 의미한다. 즉, 여호사밧의 부친 아사가 통치 말년에 실정(失政)으로 국력을 약화시켰으나(16:9)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계명을 준수하므로 다시금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주); 유다 무리가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렸으므로 - 여기서 '예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민하'(*)는 '선물', '조공', '제물'(특히 피없는 제물, 창 4:3) 등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여호사밧이 국민들에게 세금을 징수하였고 백성들은 자원하여 납세의무에 충실하였던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한다(O. zockler). 그러나 11절에도 블레셋인 중에서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백성들과 신하들 및 주변국들이 여호사밧에 대한 존경과 복종의 표시로 자발적으로 바친 선물들과 조공을 뜻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주); 저가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더라 - 여호사밧이 받은 이러한 축복은 솔로몬과 다윗이 받은 축복에 비길 만하다.(1:12;대상 29:28). 왜냐하면 그
역시 다윗의 길로 정직하게 행한 결과 하나님께로부터 그러한 축복을 받았기 때문자이다.
성 경: [대하17:6]
주제1: [여호사밧의 즉위]
주제2: [여호사밧의 선정(善政)]
(주); 저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도를 행하여 - 여기서 '전심으로'의 문자적인 뜻은 '그의 마음을 들어 올렸다'이다. 이러한 표현은 주로 '교만하다'는 등의 나쁜 뜻으로 쓰였는데(26:16;32:25;겔 28:2, 5, 17;시 131:1;잠 18:12) 여기서는 좋은 의미로 쓰였다. 즉, 본절은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으로 인하여 크게 용기를 얻어 종교 개혁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음을 뜻한다.
(주); 산당...유다에서 제하였더라 - 본절은 병행 구절인 왕상 22:43의 "여호사밧이...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는 내용과 서로 조화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아사에게도 있었는데 이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호사밧이 공식적으로 산당을 폐하도록 명령하고 이 일을 손수 시행하였으나 그 백성들이 이 공식적인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4:3 주석 참조. 또한 이는 여호사밧이 산당을 전부 다 제하였다는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호사밧이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마음을 정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20:33)는 기록이 충분히 뒷받침한다. 한편 이처럼 산당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남북 왕국의 문제거리로 작용하였다. 그러기에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종교 개혁을 일으킬 때에도 '산당'을 제거하였다는 기록이 재차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31:1;34:3). 이로 볼때 처음에는 여호와 숭배를 위하여 지어진 산당들이라 할지라도 산당의 성격 때문에 우상 숭배의 온상으로 탈바꿈하기가 매우 쉬었음을 알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산당을 헐라고 명령하신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레 26:30;민 33:52). 왕하 16:1-9 강해, '산당 예배에 관하여' 참조.
(주); 아세라 목상들 - 아세라(Ascherah)는 바알 신의 어머니로 고대 근동의 여러 지방에서 숭배되었다. 혹자는 이 아세라를
아스다롯(Asharoth)으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엄연히 구별된다. 이에 대해서는 14;3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성 경: [대하17:7,8]
주제1: [여호사밧의 즉위]
주제2: [율법교사 파송]
(주); 저가 위에 있은 지 삼 년에 - 이것은 여호사밧이 통치 벽두부터 백성들을 여호와의 율법으로 교육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 일을 위하여 여호사밧은 5명의 방백과 9명 레위인, 2명의 제사장을 전국 각지에 보내어 '여호와의 율법책'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게
했다. 그런데 이들의 명단이 다른 곳에서는 언급되어있지 않는 바 개개인의 신상(身上)에 관하여서는 달리 알 수 없다.
성 경: [대하17:9]
주제1: [여호사밧의 즉위]
주제2: [율법 교사 파송]
(주); 저희가...인민을 가르쳤더라 - 여호사밧에 의해 유다 각 성읍에 파송된 자들은 '여호와의 율법책', 즉 모세 오경을 가지고 백성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5명의 방백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7절) 그들의 가르침이 단지 종교적인 가르침뿐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들은 백성들의 관습과 민정(民政) 등에 관한 많은 규례들도 함께 가르쳤을 것이다. 즉 그들은 비단 종교 교육 뿐만 아니라 당시 만연했었던
악습과 우상 숭배를 척결하는 방법등 종교적, 도덕적 삶의 전반적인 부분을 세세히 지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구체적인 교육 활동은
여호사밧의 종교 개혁을 보다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성 경: [대하17:10]
주제1: [여호사밧의 즉위]
주제2: [여호사밧의 강성]
(주); 여호와께서 유다 사면 열국에 두려움을 주사 - 이는 여호사밧이 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경외한 데 대한 보상으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이웃 나라들이 유다를 두려워하도록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셨음을 가리킨다. 역대기 기자는 이런 류의 여호와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다(14:14;20:29). 그러나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추측컨데 그것은
여호와께서 유다에 부어 주신 축복으로 인하여 이방 나라들이 두려워 떨도록 하신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성 경: [대하17:11]
주제1: [여호사밧의 즉위]
주제2: [여호사밧의 강성]
본절에는 통일 왕국의 분열 이후 날로 쇠퇴해 가던 다윗 왕가가 여호사밧 시대에 이르러 맞이한 부흥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본서 기자는 주변 국가들이 바친 조공의 내역을 알리면서 이 기록의 문자적 사실성보다는 그 의미에 중점을 둔 것 같다. 즉, '칠천 칠백'등의 상징적 숫자를 보여줌으로써 여호사밧 시대의 번성이 극에 달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주); 블레셋 중에서는 -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전치사 '민'(*)은 '...중에서 얼마'(some of...)를 뜻한다. 따라서 이는 블레셋 전체가 여호사밧에게 국가적인 사절단을 보내어 예물을 드린 것이 아니라 블레셋인들 가운데 유다와 인접한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예물을 드렸음을 뜻한다. 이들은 아마 아사 때에 유다에 의해서 크게 혼이 난 그랄 사면에 살고있던 유목민들이 아닌가 추측된다(Curtis). 14:14 주석 참조.
(주); 은으로 공을 바쳤고 - 여기서 '공'(貢)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마사'(*)는 '무거운 짐'을 뜻한다. 20:25에서 이 단어는 '능히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많은'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절에서 블레셋인들이 가져온 많은 은(銀)은 매년마다 바치기로 정해진 공물(貢物)이 아니라, 일시적인 예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외 다른 예물 중에는 조공의 성격을 띤 것이 있어서 매년마다 정해진 만큼 바치는 예물들도 있었다(삼하 8:2;왕상 4:21;10:25).
(주); 아라비아 사람 - 이에 해당하는 '아랍'(*)이라는 용어는 '사막의 사람들'을 뜻한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에서 '아라비아 사람들'이라고 할
경우 북 아라비아의 거주자들(느2:19;6:1)만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역대기 기자가 '아라비아 사람'이 라고 말할 당시에는 이미 유다의
남쪽과 남동쪽에 나바티안(Nabatean) 왕국이 건립되어 있었는바 그들 남 아라비아 거주자들도 반영하고 있는 듯 하다(Curtis). 만일 사실이
그러하다면 이 아라비아인들이 여호사밧에게 짐승들을 바친 것도 유다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즉, 아사로부터 여호사밧에게로 이어지는
유다 왕국의 강성함 때문에(14:9-15;15:15) 유다 사면 열국들은 더욱더 유다를 두려워 하게 된 것이다. 한편 짐승들을 공물로 바치는 경우는 왕하
3:4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는 유목(遊牧) 민족 뿐 아니라 농경 사회에 있어서도 가축이 중요한 재산으로 취급되었던 당시의 시대 상황에 의거한
습속(習俗)이다.
성 경: [대하17:12]
주제1: [여호사밧의 즉위]
주제2: [여호사밧의 강성]
(주); 유다에 견고한 채와 국고성을 건축하고 - 여기서 '채'(castles)는 성채, 요새(fortresses)를 뜻한다. 그리고 '국고성'(cites of store)은
국가의 여러 가지 공공물자들을 보관하는 일종의 창고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는 8:4의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고대 근동인들의 성읍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잘 대응하기 위하여 여러 부대 시설 및 형태를 갖추었다. 돌출형 성벽이라든지, 보루, 성탑, 망대 따위 등이 곧
그것들이다(26:15;삿 9:46;사 5:2).
성 경: [대하17:13]
주제1: [여호사밧의 즉의]
주제2: [여호사밧의 군대]
(주); 역사를 많이 하고 - 역사(役事)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멜라카'(*)는 '일'(work)이라는 뜻도 있으나 여기서는 일이나 사업을 통해 얻은
'재산'(property)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본절 후반부와 전반부가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다고 볼 때 전반부는 전쟁에 필요한
물건들, 즉 칼이나 창, 방패같은 군수품들을 많이 만들어 저장해 두었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본절의 '역사'를 성채를 짓고 준비하는
작업'(Bertheau)을 뜻한다고도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본절의 전후반부의 문맥에 잘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12절에서 그러한 작업에 관해
언급한 바 있으므로 옳지 못하다.
성 경: [대하17:14]
주제1: [여호사밧의 즉위]
주제2: [여호사밧의 군대]
(주); 군사의 수효가...이러하니라 - 본절 이하 19절까지에서 우리는 유다 군대가 가계별(家係別)로 잘 조직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중 유다 지파는 둘로 분류되어 있고 베냐민 지파는 둘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아드나, 여호와난, 아미시야가 유다 지파이고, 에리아다와 여호사밧이 베냐민 지파이다.
(주); 천부장 - 이는 군대의 지휘관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때의 천부장은 로마 시대의 천부장처럼 보병 760명, 기병 240명을 거느린 지휘관이 아니다. 이때의 천부장은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경우에 따라 수십만을 거느릴수도 있었다. 이러한 부장제도에 관하여서는 출 18:21 주석을 참조하라.
(주); 아드나 - 대상 12:20에 보면 다윗을 따랐던 므낫세 지파의 천부장 중에도 '아드나'(Adnah)라는 이름을 가진 군대 장관이 있었다. 그러나
그자와 본절의 인물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윗 당시와 여호사밧 시대 사이에는 적어도 100년 이상의 시대적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성 경: [대하17:15]
주제1: [여호사밧의 즉위]
주제2: [여호사밧의 군대]
(주); 장관 여호하난 - 여기서 '장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방백'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 '사르'(*)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군사적인 용어로도
많이 사용되었는바 한 고을을 다스리는 우두머리 뿐만 아니라(방백) 군대 지휘관도 가리킨다(왕하 9:5 주석참조). 한편 '여호하난'(Jehohanan)이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심'이다. 이와 동일한 이름의 소유자는 성경에 여러 명 나온다(23:1;대상 26:3;스10:28;느 6:17,18;12:13, 42).
성 경: [대하17:16]
주제1: [여호사밧의 즉위]
주제2: [여호사밧의 군대]
(주); 저는 자기를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자라 - 이처럼 시그리의 아들 '아마시야'(Amasiah)에 대해서는 특별한 직위 표시가 없고 다만 그가
하나님께 헌신된 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그도 '방백'이었던 것 같으며 특별한 헌신으로 주변에 널리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한편 '아마시야'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품으셨다'이다.
성 경: [대하17:17]
주제1: [여호사밧의 즉위]
주제2: [여호사밧의 군대]
(주); 활과 방패를 잡은자 - 과거 아사의 군대 가운데에도 작은 방패를 잡으며 활을 당기는 자가 28만이나 있었다(14:8). 한편 베냐민 지파는
전통적으로 활을 잘쏘는 지파로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서는 대상 12:2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17:18]
주제1: [여호사밧의 즉위]
주제2: [여호사밧의 군대]
(주); 싸움을 예비한 자 - 이는 중무장한 것이 아니라 간단한 무기들만을 갖추고 있던 자들인 듯하다. 아무튼 14절 이하에서 보듯 여호사밧의 전체
군대 수는 약 116만에 달하는 엄청난 수였다. 이는 아사의 군대 총수 58만(14:8)의 2배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크게 용맹한
군사'(13절)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역대기 저자는 여호와께서 도우시는 군대를 사밧의 군대 수가 이렇게 급증한 것이 단 지파나 블레셋에서 온
파견대와 시므온과 에브라임 사람들, 그리고 아라비아 사람들이 유다 군대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라고도 주장한다(Murphy, Belfast).
성 경: [대하17:19]
주제1: [여호사밧의 즉위]
주제2: [여호사밧의 군대]
(주); 이는 다 왕을 섬기는 자요 - 13절을 보면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크게 용맹한 군사를 두었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하에서
116만의 군대 조직을 설명해가고 있다. 그러므로 자칫하면 이들이 모두 예루살렘에서 왕의 수비대로 활동한 것처럼 본문을 해석하기가 쉽다. 물론
여호사밧이 특별한 전략적인 목적에 따라 예루살렘에 군대를 두었긴 하나 116만의 군대를 다 그곳에 둔 것은 아니다. 대신 116만이란 유다의 모든
성읍에 배치된 전체 군대 수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즉 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예루살렘과 여호사밧을 보호하는 수비대라고 볼 수 있다.
성 경: [대하18:1]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고 - 여호사밧은 다윗의 경건한 통치를 따랐다. 그는 바알에게 구하지 않고 그 부친의 하나님께 구하였으며 여호와의 계명을 지켜 행하였다. 그는 유다를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로 세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17:7-9). 온 유다 백성이 이러한 통치에 존경과 사랑의 표시로 예물을 여호사밧에게 자발적으로 바쳤다. 주변국인 블레셋와 아라비아도 그에게 예물을 바쳤다. 그 결과 여호사밧은 부귀와 영광을 누림에 있어 절정에 이르렀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 축복은 아합 왕과 혼인 동맹을 맺는 그릇된 목적에 잘못 사용되었다.
(주); 연혼하였더라 - 이것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아합의 딸 아달랴의 혼인(婚姻)을 가리킨다. 이들의 결혼은 약 9년 전인 B.C. 865년 경에
거행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혼인 동맹은 아합의 제안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며, 그것은 두 나라의 존립과 번영을 그들의 힘에 의지하려는 의도를
은연 중 드러내고 있다. 이 혼인 동맹의 목적과 의도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이것은 여호사밧의 큰 실정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이혼인의
씨를 뿌림으로 그 자신과 다윗 왕가와 유다 백성에게 큰 해악을 불러 들였기때문이다. 즉, 여호사밧은 예후의 지적대로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19:2) 어리석은 행동을 함으로써 다윗 왕가의 왕손이 전멸할 위경(危境)에처하였으며(22:10, 11) 아합의 딸 아달랴에 의해
우상 숭배가 유다에 유입되어 그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었다.
성 경: [대하18:2]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 두어 해 후에 -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해들의 끝에'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영역 성경들(KJV, RSV, NIV, JB, NEB)은 이를 '몇 해 후에'로 번역한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 처럼 '두어 해 후에'라고 번역할 때 '두어'는 '둘 가량'이라는 뜻이므로 '두해 가량 후에'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원문이 정확히 몇년을 가리키는지 제시하지 않음으로 영역 성경에서처럼 '몇 해 후에'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공동번역처럼 '여러 해 지나서'로 번역하는 것도 적절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주); 저가...아합에게 나아갔더니 - 여호사밧이 아합을 방문한 것은 아합의 초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아합이 그를 초대한 이유는 수리아(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라못을 되찾기 위해 양국이 연합하여 원정하자는 것이었다.
(주); 길르앗 라못 - 이는 요단 동편 갓 지파의 중요한 성읍(수 20:8;21:38)으로, 아합의 부친 오므리가 벤하닷의 부친에게 빼앗긴 성읍이었다(Barker). 이 성읍은 국경 지대의 고지(高地)에 위치하였다.
(주); 권하더라 - 이는 '설득하다', '유혹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쓰트'(*)의 히필형(Hiphil;사역형 능동)으로서, 아합이 여호사밧으로
하여금 그 전쟁에 동참토록하기 위해 온갖 설득을 다하였음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사실 아합은 여호사밧을 설득하기 위해 그와 그 수행원에게
우양을 많이 잡은 연회까지 배설하였다. 아합은 수리아가 카르카르(Qarqar)에서 패배하여 국력이 약화된 틈을 노려 그런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Payne).
성 경: [대하18:3]
주제1: [여호사밧의 아합과 동맹]
주제2: [여호사밧과 아합과 동맹]
(주);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싸우리이다 - 여호사밧은 아합의 제의에 적극 찬동했다. 그가 이와 같이 찬동한 이유는 결혼으로 맺어진 동맹을
견고히 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유다에 큰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사밧의 그런 찬동의 표현은 비신앙적이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두 나라가 본질적인 차원에서 하나가 되어 연합 전선을 펼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유다는 여호와의 신앙을
회복하는 상태였고,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성 경: [대하18:4]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하나님의 뜻을 묻는 두 왕]
(주); 먼저...물어보소서 - 여호사밧은 아합과 군사 동맹을 맺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그분에게 물은 적이 없다. 그런데 길르앗
라못 원정에 대해서 여호와의 뜻을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의 믿음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영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선별적으로 묻거나 행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 경: [대하18:5]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하나님의 뜻을 묻는 두 왕]
(주); 선지자 사백 인을 모으고 - 여기에 나타난 선지자 400인의 정체에 대해서 혹자는 엘리야에 의해 죽임을 당한 바알 선지자 450명 외에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일 것으로 생각한다(왕상 18:19). 그러나 본문의 맥락 속에서 그러한 암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요구한 점(4절), 그리고 그 선지자들이 여호와께 물으며 예언했다는 점(10절), 그 선지자들 중 한 선지자인 시드기야의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공평하시다'인 점등을 볼 때 그들은 참선지자로 자처한 무리인 것같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선지자'는 이세벨이 멸한 '여호와의
선지자'(4절)와는다른 종류의 선지자로서 아합의 곁에서 국가 종교를 관장하고 이방 종교에 대해서도 타협적인,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선지자들, 즉
궁전 선지자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13:8).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이들 400인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셨다고 주장하고 있다(22절).
성 경: [대하18:6]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하나님의 뜻을 묻는 두 왕]
(주);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 - 이는 여호사밧이 보기에 400인의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거짓으로
말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진정한 선지자를 찾았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그는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에 대해 의심을 품었거나
미심쩍어 했던 듯하다. 한편,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도 할 수 있는 바 어느 견해만이 옳다고
하기는 어렵다.
성 경: [대하18:7]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하나님의 뜻을 묻는 두 왕]
(주);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 선지자 미가야에 대해서는 본사건과 관련된 것 이외에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그리고 진실한 여호와의 선지자는 모두 멸하고 박해하던 시대에 미가야와 같이 아합의 죄를 지적하여 흉한 일만 예언하던 선지자가 어떻게 아합 곁에 생존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 길이 없다. 단지 다른 이스라엘의 참 선지자들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왜곡됨이 없이 담대하게 외쳤던 선지자인 것으로 추측된다(렘23:22;미 3:8).
(주); 항상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 여기서 진리에 일관된 미가야의 태도와 항상 왜곡되이 범죄하며 사는 아합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주);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 또 다시 여호사밧은 아합의 태도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는데, 오히려 그러한 아합의 태도 때문에 아합에게 흉한
일만 예언하던 선지자 미가야에 대하여 크게 관심이 쏠렸던 것 같다.
성 경: [대하18:8]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하나님의 뜻을 묻는 두 왕]
(주); 한 내시를 불러 - 여기서 '내시'(*, 사리스)는 '거세된 자'란 뜻으로 왕의침실 일을 맡아보던 신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아합 왕은 미가야를
불러오는 일에 대해 급히 서둘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잔일을 담당하던 내시를 불러 명령한 것이다.
성 경: [대하18:9]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하나님의 뜻을 묻는 두 왕]
(주);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 - 전통적으로 서문 앞 광장은 특별한 장소로서 이곳에서 공적인 판결을 내리곤 하였다(창 23:10;룻 4:1). 그런데
여호사밧이 이곳에서 선지자들의 예언을 들은 것은 당시의 관습을 따른 것이기도 하겠으나 아합이 추진하고 있는 아람과의 전쟁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과 선지자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한 목적 때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람과의 전쟁에 유다 백성들이 참여하는 이유와 그 정당성을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하여 부각시킴으로써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목적도 함께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성 경: [대하18:10]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하나님의 뜻을 묻는 두 왕]
(주); 철로 뿔들을 만들어 - 여기서 '뿔'은 공격력의 상징인데 아합의 승리를 암시하고자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가 철로 뿔을 만들었다(신 33:17;렘
48:25;단 8:3;암 6:13). 한편 선지자들은 흔히 자신들의 메시지를 보다 실감나게 전하기 위해서 이 같은 상징들을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선지자
예레미야가 줄과 멍에로 바벨론 포로 생활을 예언했던 경우를 들 수 있다(렘 27:2;28:10 이하).
성 경: [대하18:11]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하나님의 뜻을 묻는 두 왕]
다른 선지자들도 모두 시드기야의 예언과 동일한 예언을 함께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아마 그들은 시드기야를 중심으로 하여 왕의 정책을 옹호하며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철저하게 계획했던 모양이다.
성 경: [대하18:12]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미가야의 예언]
(주); 여출일구(如出一口)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 거짓 선지자들이 이구 동성으로 길르앗 라못 원정에 대해 길하게 예언하였다. 이와같이 불의한
자에게는 그의 불의한 욕심에 찬동하고 그것을 만족시켜 주는 사단의 역사가 있다. 한편, 본절의 '여출일구'는 '이구 동성'(異口同聲)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성 경: [대하18:13]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미가야의 예언]
(주);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이같이 미가야의 단호한 맹세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 미가야 자신은 다만 하나님의 대언자일 뿐이므로 여호와의 뜻을 임의로 왜곡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2) 여호와께서는 발락과 같은 자의 일을 그의 나귀를 통해서라도 막으시는 분이므로 (민 22:27-31) 그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자에게는 반드시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주); 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 - 이는 여호와의 말씀은 주관적인 사고나 욕망으로부터 발생하는 것과는 다른 객관적인 계시(啓示)임을
나타낸다(렘 14:14).
성 경: [대하18:14]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미가야의 예언]
(주);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 미가야는 여호와의 메시지를 요구하지 않고 다만 미가야 자신의 개인적인 소견을 묻는 왕에게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라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 속에는 좋은 대답만을 요구하는 아합에 대한 빈정거림과 가시돋힌 책망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본절을
미가야의 거짓말로 해석하거나 아이러니 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의 첫번째 대답은 여호와에게서 받은 메시지가 아니라 아합의
본심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위한 미가야 자신의 빈정거림의 말이기 때문이다.
성 경: [대하18:15]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미가야의 예언]
(주); 내가 몇번이나 너로 맹세케 하여야 하겠느냐 - 미가야의 빈정거림을 아합도 금방 깨달았다. 아합은 보다 진지한 미가야의 태도에서
우러나오는 동일한 답을 듣기를 원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왕에게 찬성하는 말과 함께 진정한 존경의 태도까지도 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합은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여호와의 메시지, 곧 그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미가야에게 들어야 했다(19절).
성 경: [대하18:16]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미가야의 예언]
(주); 온 이스라엘이 목자없는 양같이 - '목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를 가리킨다(민 27:17). 아합은 이스라엘의 목자였지만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의 길을 걷게 하고 그들을 포학(暴虐)으로 다스리는 지도자였다. 이러한 아합이 이끄는 군대가 출정하여 진을 치겠지만 그 처지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참목자가 아니라 삯꾼 목자이기 때문이다.
(주); 이 무리가...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 선지자 미가야는 출정한 이스라엘 군대가 전쟁에서 패하여 무사히 귀환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표현은 앞의 말과 대단히 모순된 것처럼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된다'라고 하는것은 전혀 반대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을 중단하고 귀향하게 되는 상황을 백성들 편에서 볼 때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유인즉, 전쟁에서의 죽음보다 살아서의
귀향이 훨씬 더 평안이기 때문이다.
성 경: [대하18:17]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미가야의 예언]
(주);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 아합은 미가야의 예언을 올바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를 자신에 대해서 흉한 것만 예언하는
선지자로 여호사밧에게 재천명함으로서 여호사밧으로 하여금 미가야의 예언을 업수이 여기도록 유도하였다. 아합이 여호사밧에게 한 반문, 곧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하는 말은 그의 말이 또다시 입증된 것이 아니냐 하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는 여호사밧을 동요치 못하게 하고
참 선지자의 말에 귀기울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성 경: [대하18:18]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미가야의 예언]
(주);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 본절을 볼 때 17절의 아합의 말은 미가야가 예언을 계속하고 있는 도중에 여호사밧의 관심을 다른곳으로 쏠리게 하기 위해 아합이 불쑥 꺼낸 말인 듯싶다.
(주); 여호와께서...그 좌우 편에 모시고 섰는데 - 여호와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주로 후기 유대 묵시 문학에서 많이 나타난다(사 6:1-5;단
7:9,10). 이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과 많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왕상 22:19-23 참조).
성 경: [대하18:19]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미가야의 예언]
(주); 아합을 꾀어... 죽게 할꼬 - 미가야는 환상으로 여호와께서 거짓 영을 아합의 400인 선지자들 입에 두어 아합을 멸망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는 여호와께서 천상 회의의 주재자로 등장하는 모습과, 악한 자를 처리하시는 방법이 실감있게 잘 나타나 있다.
시18:26에서도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라고 했다.
성 경: [대하18:20]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미가야의 예언]
(주); 한 영이 나아와 - 여기서 '한 영'은 특정한 영을 가리키는데, 21절을 보면 '거짓말하는 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욥 1:6에는 이가 곧
'사단'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고,예수께서는 이러한 사단을 가리켜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 하셨다(요 8:44).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섭리
가운데 마귀도 주장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벧전5:8).
성 경: [대하18:21]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미가야의 예언]
(주); 나가서 그리하라 - 이 부분에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악'을 주관하심을 발견한다. 이외에도 여호와께서는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고(출 4:21;7:3;9:12;10:1,2027;11:10),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속에 악한 영을 보내시고(삿 9:23), 다윗의 마음을 감동시켜 인구 조사를
실시토록 하시며(삼하 24:1), 동방의 의인 욥을 시험토록 마귀를 보내셨다(욥 1:6).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여호와의 속성에 전적으로 위배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직접 이런 일을 행하신 것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 학자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이런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허용'(許容) 또는 '묵허'(默許)하신다고 설명한다. 이는 여호와의 주권은 인정하되 여호와는 죄와는 상관이 없는분이라는 뜻을 내포하는 신학적
개념이다.
성 경: [대하18:22]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미가야의 예언]
(주); 여호와께서...화를 말씀하셨나이다 - 이는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이 곧 여호와께서 아합에게 내리신 저주임을 볼 수 있다. 그는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도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여호와의 뜻을 굽히지 않고 전달하였다.
성 경: [대하18:23]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핍박받는 미가야]
(주); 여호와의 영이...네게 말씀하더냐 - 이 시드기야의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1)자신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는
뜻과, (2) 한 하나님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예언을 주실 수 없다는 뜻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미가야의 예언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자는 선지자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이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영을 더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고 말했다. 그리고 신 13:1-5에서는 모세 율법에 나타난 종교적, 도덕적 계명과 그들의 예언이 서로
부합되는지를 보면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때린 것은 자신이 부도덕하며
자신의 메시지가 거짓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진정 시드기야는 자신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서 이와같이 부도덕한 말과 행위들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참 선지자는 그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욕과 핍박을 받는다. 그러나 하늘의 상이 클 것이다.
성 경: [대하18:24]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핍박받는 미가야]
(주);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날에 보리라 - 미가야는 시드기야의 공격적인 태도에 조금도 움츠러 들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시드기야가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여 골방에 숨는 날에 자신의 예언이 거짓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드기야가 골방에 들어가 숨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역사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추측컨데 이는 아합이 사망한 후 그의 가족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보복할 것을 예언한 것일 것이다(Payne).
성 경: [대하18:25]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핍박받는 미가야]
(주); 부윤(府尹) 아몬과 왕자 요아스 -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 대해서는 본절과 병행절인 왕상 22:26이외에 기록된 바가 전혀 없다. 한편
'부윤'이란 직책은 방백과 동일하며 이러한 직책이 두드러진 것은 중앙 정부의 권위가 떨어지고 지방 분권이 강화되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Barker). 공동번역은 부윤을 '성주'로 번역한다.
성 경: [대하18:26]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핍박받는 미가야]
(주);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 - 한글 개역은 흠정역과 동일하게 번역하고 있다. 다른 영역본들은 각각 '빵과 물 이외에는 아무 것'(NIV), '소량의
빵과 물'(RSV)로 번역하며, 공동 번역은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의역한다.
성 경: [대하18:27]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핍박받는 미가야]
(주);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 여기 '백성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암밈'(*)은 복수로서 보통은 '열국들'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가리키거나,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미가야의 예언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 백성들이
증인이 되어달라는 뜻이다. 1세기 후에 미가 선지자도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미 1:2).
성 경: [대하18:28]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아합의 전사]
(주); 여호사밧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 여호사밧은 분명 미가야의 예언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가 왜 그런 행동을 취했는지 본문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럴지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미 바른 판단을 할 수 없을 만큼 흑암의 길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신령한 상태에 있지 않아 자신의 판단과 아합의 뜻을 따라 길르앗 라못 정벌에 나서게 된다. 여호사밧은 더욱 흑암과 위험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대하18:29]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아합의 전사]
(주); 이스라엘 왕이 변장하고 - 왜 이스라엘 왕만 변장하고 여호사밧은 변장하자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이는 한
군대에 두 나라의 왕이 있음을 감추기 위한 계획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아합은 궁수(弓手)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변장한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찌되었든 분명한 것은 아합이 미가야의 예언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던 것만은 사실인듯하다.
그래서 인간의 눈을 속여 자신의 죽음을 방지하려했던 것이다.
성 경: [대하18:30]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아합의 전사]
(주); 아람왕이...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 흔히 전쟁에서 왕을 죽이는 것은 승리의 관건이 된다(삼하 21:17). 그러나 본절은 벤하닷이
이전에 아합에게 무릎 꿇었던 굴욕적인 사건(왕상 20:31-34)으로 인하여 크게 분노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을 치게 된 동기와
벤하닷과 아합의 이전의 적대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왕상 22:1,3의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18:31]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아합의 전사]
(주);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 여호사밧은 아람 장관들의 집중적인 공격에 매우 위급해졌음을 느끼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때 그가 외친 소리로 보았던 것 같다(왕상22:32). 그래서 아합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아람 군대 장관들이 그가 아합이 아님을 알고는 추적을 멈추었다고 열왕기 기자는 기록하고 있다(32절).
(주); 여호와께서...저를 떠나가게 하신지라 - 역대기 기자는 아람 병거 장관들이 그와 싸우지 않고 물러간 것을 여호와의 은혜에 의한 것으로 적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위급한 상황 가운데 처한 여호사밧을 향해 간섭하심으로 적군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던 것이다. 아합과 죄악의 동맹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도 못하고 이 전쟁에 참여하여 죽음의 위경에 처한 그는 여호와의 은혜를 받았다.
성 경: [대하18:32]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아합의 전사]
아람 병거 장관들은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 아합이 아님을 확인하고 쫓기를 그만두었다. 그들은 아람 왕의 명령을 받들어 순종한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사밧이 아닌 아합을 그들에게 내어주어 심판하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성 경: [대하18:33]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아합의 전사]
(주);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 여기서 '우연히'는 진 중에서 마구 쏘아 대던 화살 하나가 아합 왕을 맞히게 된 것과 관련된다.
여호와께서는 미가야의 예언대로 아합을 죽이시기 위하여 사기가 충천(衝天)해 있는 아람의 군사 한 사람을 사용하신 것이다. 한편 그 아람의
궁수가 아합 왕인 것을 분명히 알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열심으로 활을 쏘는 그 궁수를 사용하셨음이 분명하다.
성 경: [대하18:34]
주제1: [여호사밧과 아합의 동맹]
주제2: [아합의 전사]
(주); 왕이 병거에서 스스로 부지하며...죽었더라 - 아합은 화살에 맞아 부상당했지만 전쟁이 격렬하여 그것을 처리할 여유도 갖지 못한 채 병거에
버티고 서 있어야만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에 따라 원정 계획을 결단하고 행동으로 옮긴 결과
이런 결말을 맞게된다. 그는 참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을 좇지않고 거짓 예언을 따랐기 때문에 죽게 된 것이다. 거짓이 아합을 죽였다. 믿지 않아야
할 거짓을 믿고 따르다 결국 이런 형벌을 받게 되었으며 자기의 영욕을 따라 무엇을 행하려다 형벌을 받았다. 그의 죽음은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다(27절). 한편, 왕상 22:35-38에는 아합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그런데 역대기 저자가 그러한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것은 여호사밧과 관계있는 부분만 기록하고자 한 의도 때문이며, 아합의 죽음으로 자신의 기록 의도가 다 드러난 것으로 판단한 것같이
보인다.
성 경: [대하19:1-3]
주제1: [여호사밧의 사법 제도 개혁]
주제2: [예후의 책망]
대하19:1-3 본문은 아합과 동맹하여 대(對)아람전을 치르고 패전하여 돌아오는 여호사밧을 선지자 예후가 책망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역대기 저자는 북왕국을 완전히 여호와를 떠난 나라이며, 여호와께서 미워하는 나라로 단정하여 밝히고 있다. 따라서 여호사밧이 그러한 나라의
오항 아합과 군사 동맹을 맺고 처신한 것은 명백한 죄이며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성 경: [대하19:1]
주제1: [여호사밧의 사법 제도 개혁]
주제2: [예후의 책망]
(주);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 역대기 저자는 전쟁에서 돌아오는 여호사밧을 묘사하여 이르기를 '평안히' 돌아왔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1) 여호사밧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을 뻔 하였으나 여호와의 보호하심으로 예루살렘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 (2) 18:16에 기록된 미가야의 예언, 즉 '이 무리가...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했던 예언의 성취를
뜻한다(Zockler, Pavne).
성 경: [대하19:2]
주제1: [여호사밧의 사법 제도 개혁]
주제2: [예후의 책망]
(주);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 - 선견자(先見者) 예후의 부친 하나니는 아사 왕을 책망했던 선지자였다(16:7 주석 참조). 그런데 그의 아들 예후도 아사와 동(同)시대의 왕인 북왕국의 바아사를 비난한 적이 있다(왕상 16:1, 7). 즉, 그는 일찍부터 그의 부친과 함께 활동한 선견자이며 또한 유다의 선견자로서 북왕국에서도 활동했던 유일한 선견자였다. 한편 바아사는 아합보다 약 35년 전의 인물이었으므로 여호사밧 앞에 선 그의 나이는 적어도 60세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20:34을 보면, 예후는 60세에 죽은 여호사밧보다(20:31) 더 오래 살았던 것으로 암시되어 있다. 따라서 예후는 70세 이상 장수하였던 것 같다.
(주);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 - 이것은 아합 왕을 일컫는 말이다. 아합은 백성에게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여호와를 미워한 증거이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이러한 야합과 연혼(連婚)하고서 남북 화해를 도모하고자 했으며 더 나아가 군사 동맹을 맺고 길르앗 라못 전투에까지 참가하였던 것이다. 이를 두고 선견자 예후는 여호사밧에게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나이까'라는 신앙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사도 바울도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 6:14)고 했다. 한편 이런 정신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예수의 가르침과 비교할 때 서로 모순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관찰은 피상적인 살핌에 불과하다. 우리가 유의할 점은 마음의 태도 문제와 악행에 적극 가담하는 행동의 문제를 혼동해서는 안되다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은 마음의 태도 문제이지 원수의 악행에 동조 가담하는 행동의 문제와는 다른 것이다. 여호사밧에 대한 예후의 책망은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의 일에 적극 가담한 실책과 관련된 것이었다. 여호사밧이 같은 민족인 야합과 북왕국에 대해 개인적인 연민을 품을 수 있었을지라도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해서는 안 되었다. 시편 기자의 심정처럼 주를 미워하는 자에 대해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시 139:22)하는 자세가 그에게 필요했다.
(주);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 여호와의 진노는 여호사밧의 생존 시에도 있었고, 사후(死後)에도 있었다. 생존 시에는 모압과 암몬의
침입(20:1-4), 배가 난파하는 사건(20:37) 등이 있었고, 사후에는 그의 자식들에게 재난이 있었다(22:10 ; Keil). 한편 선견자 예후의 저주의
예언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어서 여호사밧은 그의 부친 아사와는 달랐다. 아사는 선견자 하나니의 저주의 예언을 듣고 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으나(16:10),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징계하심에 순순히 승복하였다. 자신에게는 해가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여호와의 판단이기 때문에
순복하는 그의 신앙은 그로 하여금 2차 종교 개혁(4절)과 사법개혁(5-11절)을 추진하도록 촉진시키는 힘이 되었다(Payne).
성 경: [대하19:3]
주제1: [여호사밧의 사법 제도 개혁]
주제2: [예후의 책망]
(주);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 '그러나'라는 접속사 뒤에 나오는 내용은 여호사밧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이란 그의 1차 개혁, 특히 아세라 목상을 제거한 일(14:3 ; 17:6)을 가리킨다. 북왕국의 선지자 엘리사도 여호사밧의 선한 일을 인정했다(왕하 3:14). 이러한 인정과 위로는 여호사밧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주); 마음을 오로지하여 - 이것은 여호사밧이 열심으로 여호와의 계명을 준수하였음을 가리킨다(17:4, 6).
성 경: [대하19:4-11]
주제1: [여호사밧의 사법 제도 개혁]
주제2: [여호사밧의 민간 순행(民間 巡行)]
본문에 나오는 여호사밧의 개혁은 그의 통치 3년에 시행되었던 1차 개혁과 그 성격이 매우 유사하다. 즉, 그의 개혁은 대체로 종교적인 측면과
사법적인 측면에서의 개혁이었다. 그의 예루살렘 성을 비롯한 유다 전역의 백성을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했고, 재판관을 세워 의로운 판결을 하게
했다. 그는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쳐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사법을 개선하여 공의의 통치를 이룩하려 했다.
성 경: [대하19:4]
주제1: [여호사밧의 사법 제도 개혁]
주제2: [여호사밧의 민간 순행(民間 巡行)]
(주); 브엘사밧에서부터 에브라임 산까지 - 여기서 처음으로 남왕국의 경계선이 소개되고 있다. 브엘세바는 유다의 남쪽 국경이며 에브라임 산지는 유다의 북쪽 국경이다. 에브라임 산지가 유다의 경계 내에 처음으로 속하게 된것은 아비야가 여로보암에게서 벧엘을 빼앗을 때였다(13:19). 한편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을 분열 전 이스라엘 왕국 전체의 경계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삿 20:1 ; 삼하 3:10 ; 17:11).
(주); 민간에 순행하며 - 여기서 '순핸자하며'는 그가 '다시 나갔다'(he went out again)로 번역함이 좋다(RSV, NIV). 왜냐하면 우리 말의 '순행'은 '이것저곳 돌아다님'을 뜻하기 때문이다. 한편, 17:7-9에는 여호사밧이 직접 민간을 순행하였다고 하는 언급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사밧은 지금의 경우와 같이 1차 개혁 때에도 민정을 살피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 - 이것은 여호사밧이 북왕국과 동맹을 맺음으로 인하여 유다에 우상 숭배 행위가 또다시 발생하였음을 암시한다.
특히 후에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아내인 아합의 딸 아달랴가 유다에 우상 숭배를 관장하기도 했었던 것으로 보아(왕하 11:18 주석 참조)
틀림없이 그 당시에도 그녀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또다시 배교(背敎)한 백성을 가르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성 경: [대하19:5]
주제1: [여호사밧의 사법 제도 개혁]
주제2: [성읍 재판관 임명]
(주); 재판관을 세우되 성마다 있게 하고 - 신 16:18-20에 따르면, 각 성에 재판관을 두되 자기 지파에서 뽑은 재판관과 유사(有司)을 두라고
하였다. 물론 이전에도 각 고을의 방백들이 성을 다스리기는 하였으나 여호사밧은 따로 재판관들을 직접 세움으로써 재판관의 권위와 사법적 처리를
강화시켰다.
성 경: [대하19:6]
주제1: [여호사밧의 사법 제도 개혁]
주제2: [성읍 재판관 임명]
(주);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 이는 재판관들이 여호와의 대리자임을 의미한다(출 18:15, 16 ; 신 1:17). 왜냐하면 재판은
사람들이 판단을 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의(義)와 질서,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드러내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사도 바울은, '권세로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롬 13:1)라고 재천명함으로 인해 재판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 부터 왔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법을 집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지 인정이나 자신의 욕심에 끌려 그릇된 판결을 해서는 안된다.
성 경: [대하19:7]
주제1: [여호사밧의 사법 제도 개혁]
주제2: [성읍 재판관 임명]
(주); 삼가 행하라 - 재판관들이 삼가 행해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께는 불의함도 없고 편벽됨이 없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판관이 하나님 편에 서서 재판하기보다 권세자나 부자의 편에 서기 쉽고, 고아도 과부와 병든자의 송사를 굽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 경: [대하19:8]
주제1: [여호사밧의 사법 제도 개혁]
주제2: [예루살렘 재판관 임명]
여러 역본과 학자들에 의하면, 이 구절은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번역된다. (1)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예루살렘에서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재판을 위해 그리고 시비(是非)를 가리기 위해 레위 사람과 제사장과 이스라엘 족장 중에서 사람들을 세웠다(KJV, Keil). (2) 또
예루살렘에서 여호사밧은 여호와의 법을 집행하고 소송을 처리하기 위해 레위 사람과 제사장과 이스라엘 족장 중에서 사람들을 뽑아 임명하여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되었다(RSV, NIV, JB, Payne). 그러나 개역 성경은 이 두 입장과 전혀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오늘날은 후자의 입장에서
지지를 보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여호사밧은 예루살렘에 최고 재판을 세우고 뽑은 재판관을 통해 여호와께 속한 일(종교적인 일)과 모든
송사(민사적인 일)를 재판하게 하였다(Keil).
성 경: [대하19:9]
주제1: [여호사밧의 사법 제도 개혁]
주제2: [예루살렘 재판관 임명]
(주); 충의와 성심으로 - 이는 15:17의 '온전한 마음'과 16:9의 '전심으로'와 동일한 뜻이며 변치 않는 성실함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방법은 10절에 설명되어 있다.
성 경: [대하19:10]
주제1: [여호사밧의 사법 제도 개혁]
주제2: [예루살렘 재판관 임명]
(주); 무릇 어느 성읍에 거한 너희 형제가 - 여기서 '어느 성읍'은 복수로서 '그들이 성읍들'이라는 문자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중앙 재판소에 있는 재판관들이 타(他)지방의 일도 관여할 수 있었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살인 사건 등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신 17:8에는 '네 성 중에서'라고 기록되어 있어 한 성에서 일어난 일들은 그성의 재판관들이 관장하도록 하였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여호사밧은 모세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보다 재판 제도를 더욱 세밀화 하였던 것이 분명하며 지방에서 해결하지 못한 특별한 사건은 중앙에서 해결토록 하였던 것이다.
(주); 피를 흘림이나 - 문자적으로는 '피와 피 사이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고살(故殺)과 모살(謀殺)에 관한 형사 소송을 가리킨다.
(주); 율법이나 계명이나 율례나 규례를 인하여 - 이는 율법, 계명, 율례, 규례의 유권해석을 가리키는 듯하다. 왜냐하면 법률 조항의 형식으로 된 율법, 계면, 율례, 규례는 해석자에 따라 그 해석이 조금씩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는 중앙 재판소는 오늘날 사법의 최고의 권위를 부여해 해석하는 대법원과 같이 당시의 법률을 유권해석한 듯하다. 그렇게 해서 해석된 것은 공권적 권위를 지녔다.
(주); 저희를 경계하여...너희와 너희 형제에게 진노하심이 임하지 말게 하라 - 여호사밧은 재판관들에게 여러 가지를 명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
부분의 권고는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소송 사건을 공의에 근거하여 판결하는 것이 재판관의 주업무지만, 그것으로 자기의 직무를 다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신정 국가에서 재판관의 역할이란 공의의 판결을 내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즉 재판관은 소송 사건에 연루된 자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여 여호와께 죄를 얻지 않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형제들로 하여금 죄의 실상을 알고 선(善)을 행하는 거룩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경계하는 일까지 수행해야 재판관에게 죄가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성 경: [대하19:11]
주제1: [여호사밧의 사법 제도 개혁]
주제2: [예루살렘 재판관 임명]
(주); 여호와께 속한 모든 일 - 종교와 예배에 관련된 모든 문제(Keil), 곧 모세 오경에 나타난 의식법(Payne)에 관계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일들은 율법에 능통한 대제사장이 관할하도록 되어 있었다.
(주); 대제사장 아마랴 - 대상 6:10, 11에 따르면 아마랴는 솔로몬의 예루살렘에 제사장으로 세운 사독의 5대손인 아사랴의 아들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대상 6:11의 아마랴와 본절의 아마랴는 서로 동일 인물이 아닌 것이 분명한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대상 6:9-11 주석을 참조하라(Zockler).
(주); 왕에게 속한 모든 일 - 이것은 모든 민사 소송(Keil), 곧 민법에 관계된 것들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종교적인 일과 민사적인 일 사이의 구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B.C. 9세기 중엽에 이러한 구별이 선명해진 것 같다(Payne). 한편, 이 재판에 대해서는 이스마엘의 아들 스바댜가 맡았는데 그의 직위는 재판관들의 최고 책임자인 듯하다.
(주); 이스마엘의 아들 스바댜 - 이 사람에 대해서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으며 17:8에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파견된 레위 사람들 가운데 동일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나 이들이 동일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주); 레위 사람들 - 이들은 두 최고 재판관 밑에서 수종드는 관리들로서 서기관들이었던 같다(Payne).
성 경: [대하20:2]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금식 선포]
(주); 큰 무리가 바다 저편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 '아람'(*)을 여러 역본(RSV, NIV, JB, 공동번역)과 많은 학자들(Keil, Curtis, Payne, Barker)은 '아람'이 아닌 '에돔'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한글 개역 성경은 흠정역과 같이 '아람'(KJV, 수리아)으로 번역한다. 이 입장이 타당치 않은 이유는 유다 쪽으로 볼 때 '바다 저편'은 사해 바다 남동쪽을 가리키며 그곳에 에돔 땅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람은 사해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람'은 많은 역본들처럼 '에돔'으로 번역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1절에서 언급되지 않은 에돔 사람이 모압과 암몬 자손과 동맹하여 여호사밧을 침략한 셈이 된다. 따라서 1절의 '마온 사람'은 세일 산에 거주하던 비에돔계 사람을 대표하며 세일 산에 거주하여 에돔계 사람과 비에돔계 사람이 모두 이 전쟁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하사손다말 곧 엔게디 -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수 15:62;삼상 23:29;겔47:10)는 본래 아모리 족속의 땅이었다(창 14:7). 이는 사해 서부
중앙의 샘이 있는 지역으로서 종려나무와 포도원의 고벧화가 유명한(아 1:14), 오늘날의 아인 지디(Ain Jidi)에 해당된다. 한편 엔게디의 옛 이름인
하사손다말에서 하사손(Hazazon)이란 이름은 엔게디북서 쪽에 위치한 후사세 와디(Husaseh Wady)라는 지명(地名)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다말(Tamar)은 종려나무를 뜻한다. 한편 이 동맹군들의 유다 침략경로는 사해 남쪽 근처에서 사해 서부 엔게디를 통과하여 유다의 구릉지로
이어진다(Curtis).
성 경: [대하20:3]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기도]
(주);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 이는 여호사밧이 마음을 정하여 크게 결심하고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기로 하였음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얼굴은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얼굴을 든다'는 존경심을, '...에게서 얼굴을 돌렸다'는 경멸이나 무관심을 나타낸다(왕상 21:4; 겔 7:22). 이런 점에서 여호사밧의 행동을 살펴볼 때 그가 매우 다급하였고 간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 금식하라 공포하매 - 이것은 왕이 공식적으로 공포한 최초의 금식 선포이다(Barker). 물론 그 이전에도 급박한 재난이 있을 때에나 특별한
회개가 요청될 때 백성들을 모으고 금식을 선포한 적이 있었다(삿 20:26; 삼상 7:6). 그러나 왕조 시대에 이르러 왕이 개인적으로 금식한 일은
있어도(삼하 12:16) 온 백성들을 향하여 금식을 선포한 것은 이것이 최초이다.
성 경: [대하20:4]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금식 선포]
(주); 유다 사람이...간구하더라 - 예루살렘 거민 뿐만 아니라 유다 백성 전체가 여호사밧의 명령에 순응하였으며 민족의 재난을 맞아 크게
두려워하고 여호와께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인간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의 지혜와 능력에 맡겼다. 여호사밧이 다른 나라의 도움을
청하지 않고 백성을 향해 여호와께 도움을 청하라고 명한 것은 신정국가(神政國家)의 왕으로서 바른 조처를 한 것이다. 그는 여호와만이 그의
힘이시요 방패시요 산성이심을 알고 여호와께 의지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성 경: [대하20:5]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기도]
(주); 새 뜰 앞에서 - 이것은 성전 앞에 있는 솔로몬이 지은 큰 뜰(4:9)을 가리키는데 이 뜰을 '새 뜰'이라고 한 것은 아사 왕이나 혹은 여호사밧
왕이 복원 또는 확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Keil, Curtis). 이 뜰은 회중이 모인 바깥 뜰이며, 여호사밧은 제사장의 뜰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모인
회중을 바라보았다(Keil).
성 경: [대하20:6]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기도]
(주);하늘에서 하나님 - 이는 여호와의 전능하심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모세는 바란 광야에서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두고 백성들을 향해 이스라엘보다 강대한 열국을 쳐서 이기신 여호와의 능력을 말하면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신 4:39). 기생 라합도 홍해사건과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하나님의 능력을 말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수 2:11).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3).
(주);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 - 전능하신 여호와와 무기력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대비시킨 구절이다(14:11 주석 참조, 대상 29:12; 시
94:16).
성 경: [대하20:7]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기도]
(주);전에 이 땅 거민을...쫓아내시고 - 이는 가나안 정복 사건을 가리킨다(수 23:9;24:12).
(주);주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 간의 친밀성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사 41:8; 약 2:2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벗이라 부르심은 지극히 그를 가까이 하셨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주의 벗으로서 그분의 뜻을 깨닫고 언약의 나라를 이루는 초석을 놓았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따라서 그의 자손은 이런 기초 위에 놓임으로써 여호와와 친밀성을 갖는다.
성 경: [대하20:8,9]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기도]
여기에 솔로몬이 성전 봉헌을 하면서 드린 기도가 요약되어 나타난다(6:28-30;7:13-15). 여호사밧은 전쟁의 위협 앞에서 이 기도를 언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드린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으로 예상한다. 솔로몬이 그곳에서 드린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으로
성전을 가득 채우신 일이 있기 때문이다(7:1-3).
성 경: [대하20:10]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기도]
(주); 세일산 사람 - 이는 직접적으로는 에돔 사람을 가리키며 본장에서는 비에돔계인 마온 사람도 포함된다.
(주); 이에 치우쳐 저희를 떠나고 멸하지 아니하였거늘 - 민 20:14-21과 신 2:5-9을 통해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로를 열어주지 않는
에돔과 모압 그리고 세일산 백성들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땅을 비켜서 간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여호와의 은혜로 멸망을 면하게 된 암몬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들의 배은망덕(背恩忘德)을 고발하고 있다.
성 경: [대하20:11]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기도]
(주);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 세일 땅은 여호와께서 에서의 후손들에게 주신 땅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치지
못하게 하셨다. 이에 반하여 세일땅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에게 주신 땅을 침공하여 쫓아내려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의 기업으로 주시고 그 땅에서 여호와를 예배하고 섬기며 살도록 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침략 행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도전이므로
부당하다. 여호사밧은 그의 기도에서 이런 사실을 여호와께 아뢰어 도움을 청한다.
성 경: [대하20:12]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기도]
(주);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 기도하기 위해 모인 구성원들을 살펴 볼때 그들의 기도는 출전(出戰)을 앞두고 하는 일반적인 그런
기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온전히 여호와께만 맡기고 온 백성들이 합심하여 힘쓰는 기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여호와께 기도할
때 성인만 모인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까지도 여호와앞에 나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시 절박한 상황에 대해 온 백성이 신앙적으로 대처했었음을
본서 저자는 나타내려 했던 듯하다.
성 경: [대하20:14]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야하시엘의 예언]
(주); 레위 사람 야하시엘 - 한 레위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하는 선지자로 등장하고 있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Curtis). 즉, 야하시엘은 단지 성전 일에 종사하는 레위인으로서 이 거국적인 기도회에서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 특별한 예언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이다.
(주); 아삽 자손 - 대상 16:5에 따르면, 아삽은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직무를 맡은 자들의 책임자, 곧 그 대표자로서 제금을 다루는 유명한 음악인이었다.
(주); 맛다냐 - 본절의 아삽 자손 맛다냐는 헤만의 아들 맛다냐와 다른 인물이다(대상 25:4,6).
성 경: [대하20:15]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야하시엘의 예언]
(주); 이 전쟁이...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 야하시엘의 이 말은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울 때 한 말과 동일한 것으로 전적으로 여호와 만을
의지하도록 촉구한 말이다(삼상 17:47). 일반적으로 전쟁은 훌륭한 작전 계획과 우수한 군사력에 비례하여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러나 야하시엘은
이런 일반 원리에 입각하여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합리성에 근거하여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그것을
초월한 믿음의 원리에 근거하여 역사하시기도 한다. 야하시엘은 이 시점에서 백성들에게 이런 믿음을 요청하고 있다. 다윗의 정신이 이런 믿음의
정신이었다.
성 경: [대하20:16]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야하시엘의 예언]
(주); 시스 고개 - 이 지명(地名)은 다른 곳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지역 주민에게만 알려진 별칭이었다. 이 고개는 엔게디(2절)근처 사해 서부 해안의 한 지점으로부터 유다광야로 올라가는 고개로 추정된다. 이 고개길을 따라 발견된 몇 개의 성채는이 침략 이후에 재침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고개는 하사사 와디 근처에 위치한다(Williamson, Curtis).
(주); 여루엘 들 - 여루엘은 드고아 들 남동 쪽에 위치해 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 길은하사사 와디(Hasasa Wady)쪽으로 통해있다(Curtis). 따라서
야하시엘이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위치하게 한 곳은 적들이 올라오는 고개위가 아니라 적들이 그 고개로 올라와 진행하는 들판, 곧 골짜기 어귀
여르엘 들판이다. 즉, 이는 전쟁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그 동맹군들이 서로 다투어 자멸하는 장면을 분명히 목격할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
성 경: [대하20:17]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야하시엘의 예언]
(주);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 야하시엘은 우수한 작전과 군사력에 근거하는 합리성의 원리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의 원리가 실제로 거둘 결과를 목격하라고 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구원의 현장을 목격하도록 한 사건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할 때에도 있었다(출 14:13). 그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세등등하여 추격해 오던 애굽 군대가 홍해 바다에
수장(水葬)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성 경: [대하20:18]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야하시엘의 예언]
(주);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 이는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승리의 약속으로 인하여 감사함을 표현한 모습이다. 일개 레위인의 입술에서 나온
예언을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경배를 드린데서 여호사밧의 진실한 신앙과 염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태도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에 대해 보였던 태도와는 크게 차이난다(18장).
성 경: [대하20:19]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야하시엘의 예언]
(주);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 - 유다를 구원하시겠다는 구원의 계시가 야하시엘에 의해 전해지자 여호사밧과 그 백성은 하나님께 경배(18절)와
찬송을 드렸다. 찬송은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이 맡았다. 고라 자손은 그핫 자손이라는 더 큰 가문에 속한다(대상6:22, 37, 38). 고라 자손은
시편에서 노래하는 자들로 나타나지만(시 42-49), 역대기에서는 성막 문지기로 나타나기도 한다(대상 9:19;26:1).
성 경: [대하20:20]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모압 연합군의 자멸]
(주);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 여호사밧은 드고아 들로 나아가는 백성을 향해 승리의 확신을 갖도록 권했다. 그는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 선지자(히브리어 원문에는 '그 선지자들')를 신뢰하라'고 말했다. 이것은 신뢰하라는 것에 대한 이중적 강조이지만 그
뜻은 하나이다. 곧,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과 선지자를 신뢰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똑같은 의미이다. 왜냐하면 선지자를 신뢰한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 곧, 승리한다는 계시를 믿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쓰시는 종들의 말을 믿는 것은 여호와를 믿는 것이
된다. 여호사밧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성 경: [대하20:21]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모압 연합군의 자멸]
(주);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 여호사밧은 이 전쟁을 치름에 있어서 특별한 방법을 위했다. 즉, 그는 백성들과 의논하여 찬양대를 그 군대 앞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로 볼때 유다 백성들은 단순히 소극적으로 왕의 명령에 순종만 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 아니라 담대함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주); 거룩한 예복 - 이는 거룩성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옷'일 것이다(Pulpit Commentary). 그리고 이 예복을 입고 노래하였던 자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로 추정된다.
성 경: [대하20:22]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모압 연합군의 자멸]
(주); 여호와께서 복병(伏兵)두어 - 혹자는 여기서 '복병'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또는 군대, 특히 은밀히 활동하는 천사(insidiatores)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Ewald). 그러나 여기서 '복병'(*,메아레빔)은 잠복하여 기다리는 사람들을 의미하지(삿 9:25) 하늘의 군대를 가리키지는
않는다(Keil). 그리고 또 유다군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없다(Curtis). 왜냐하면 유다 군대는 전혀 싸울 채비를 갖추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17절).
그렇다면 그 복병은 동맹군의 일부, 즉 세일 산의 거민들일 가능성이 크다(Keil,Zockler). 세일 산 사람들은 매복하는 기술에 능란했다(Zockler).
그들은 암몬과 모압을 치고 전리품을 약탈해 가려고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이를 먼저 알아 차리고 세일 거민을 먼저 진멸시킨
것 같다(23절). 그리고 암몬과 모압도 동일한 이유로 의심을 갖고 서로 격전을 벌여 피차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왜 서로
공격했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사사시 7: 22에도 기록되어 있다.
성 경: [대하20:23]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모압 연합군의 자멸]
(주);저희가 피차에 살륙(殺戮)하였더라 - 이에 대해서는 삿 7:22과 삼상 14:20, 그리고 왕하 3:23을 참조하라. 한편 후기 선지서들은 다가올 심판
날에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피차 간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파멸하게 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겔 38:21; 학 2:22; 슥
14:13). 이처럼 하나님 백성의 원수는 자멸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도 당신 백성의 원수를 막아 이기게 하시는 것이다.
성 경: [대하20:24]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강성]
(주); 들 망대 - 이 망대는 인위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하26:10을 보면 인위적으로 만든 망대는 '미게달'(*)이라는 단어를 쓰기
때문이다. 이 '들 망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높은 지대를 가리킨다. 그곳은 여루엘 광야를 내려다 볼 수있는 장소였다(Keil). 그곳에서 유다
사람들은 침략군들이 모두 자멸하게 된 현장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성 경: [대하20:25]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강성]
(주);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는 고로 - 여기서 '그 가운데'란 쓰러진 병사들의 시체들 가운데를 가리킨다. 그 가운데서 취한 '재물'(*, 레쿠쉬)은 유목민들의 재산으로 취급되는 가축들을 가리키며(Keil, Curtis), '의복'(*,페가림)은 사람들의 의복과 군장과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장식들(삿 8:26)을 가리키고, '보물'(*,켈레 하무도트)은 금,은 장식들, 무기, 값진 그릇들(삿 8:25)을 가리킨다(Keil). 이러한 전리품을 세라의 군대에게서 취한 전리품(14:13-15)과 미디안 족속들에게서 취한 전리품(삿 8:24-26)과 비교 참조해 보라.
(주); 능히 가져 갈 수 없을 만큼 많으므로 - 전리품이 이렇게 대단히 많은 것은 이 족속들이 유다 사람들을 쫓아내고(11절) 그 땅에 거주할
목적으로 모든 재산을 가지고 왔기 때문일 것이다(Keil). 그러나 이런 목적으로 침략한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기이한 방법으로 파멸시키셨다.
왜냐하면 아직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추방될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 경: [대하20:26]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강성]
(주);브라가 골짜기 - 이는 '축복의 골짜기'라는 뜻이며 현재 드고아의 서쪽에 위치해 있는 '베레이쿠트 와디'(Bereikut Wady)일 것으로 추측된다.
학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통하는 길 근처에 있는 이 골짜기에는 어떤 큰 재난에 의해서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 옛 주거지의
흔적들이 있다고 한다(Robinson). 한편 욜 3:2에는 '여호사밧의 계곡'이 나오는데 이것이 '축복의 계곡'과 같은 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여호사밧의 계곡은 일반적으로 기드론 계곡의 위쪽 부분을 가리킨다(Zockl-er, Keil)고 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은 구원의
하나님을 송축했다.
성 경: [대하20:27]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강성]
(주); 여호와께서...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 유다 사람들은 여호사밧을 선두로 하여 기쁘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역대기 저자는 이같은
즐거움이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스 6:22과 느 12:43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20:28]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강성]
(주); 무리가...합주(合奏)하고 -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레위인과 제사장들이다(5:12, 13). 그들은 승리를 주신 주님께 감사제를
드리며 찬양하였다.
성 경: [대하20:29]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강성]
(주); 하나님을 두려워한 고로 - 유다는 이 전쟁의 승리로 말미암아 유다의 경계 지역에 있는 나라들, 즉 북쪽의 이스라엘과 아람, 남쪽의 애굽과
모압 등의 주변 이방 국가들과 군사적인 평화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지리적으로 열강의 전쟁의 회오리 속에 놓여 있던 유다에게 주어진
특별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성 경: [대하20:30]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강성]
여호와의 이 놀라운 행사는 고라 자손의 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주제가 되었다. 이는 시편 46,47,48에 나타나며 83편에도 나타난다. 이
시들은 아마 아삽 자손 야하시엘에 의해 쓰여졌을 것이다(Keil).
성 경: [대하20:31]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행적]
(주);예루살렘에서 이십 오 년을 치리하니라 - 왕상 22:41에는 여호사밧이 아합 왕 제4년에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역대기 저자는 북왕국의 왕들과 비교하는 연대기를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역대기 저자가 여호와께 배반한 북왕국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대기와 열왕기의 내용은 본질상 일치한다.
(주); 그 모친의 이름은 아수바라 - 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참고로 유명한 갈렙의 아내 중에 아수바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다(대상
2:18).
성 경: [대하20:32]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행적]
(주); 그 부친 아사의 길로 행하여 - 17:3,4에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기록이 있다.
성 경: [대하20:33]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행적]
(주);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 17:6에 의하면, 여호사밧이 산당을 유다에게 제거한 것으로 언급된다. 그러므로 피상적으로는 본절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가 그런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를 남겨 두었다고 할 수는 없다. 본절의 의미는 여호사밧이 산당을 없애는 종교 개혁을 폈지만 백성이 계속적으로 그 일에 동참하지 않았거나 여호사밧이 그 개혁을 일관되게 추진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주); 백성이 오히려 마음을 정하여 - 이 표현은 유다 백성의 신앙 상태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로 정했다. 그러므로 산당은 그대로 존속될 수밖에 없었다.
성 경: [대하20:34]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의 행적]
(주); 하나님의 아들 예후의 글 - 이에 대해서는 19:2을 참조하라. 한편, 이 글은 이스라엘 열왕기에 실린 한 부분임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열왕기'에 대해서는 32:32의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20:35]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과 아하시야의 교제]
(주); 나중에 - 이는 막연한 시간을 나타내지만 여호사밧과 아하시야의 교제가 암몬과 모압 족속에게서 승리한 후에 이루어졌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모압과 암몬과 마온의 동맹군이 여호사밧을 공격한 것은 B.C. 853년이었다(1절 주석참조). 그리고 아하시야의 통치는 B.C.853년에서 852까지 1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다(왕하 1:17 강해 참조). 따라서 여호사밧과 아하시야의 교제는 매우 짧은 기간의 일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왕상
22:47에 따르면 이때에 에돔에 왕이 없고 섭정왕(攝政王)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에돔의 동맹군이 유다 공격에 실패한 후 여전히 유다의
속국으로 남아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아카바 만의 북쪽 끝에 위치한 에시온게벧에서 배를 건조하기가 매우 쉬웠을 것이다(8:17 주석 참조).
성 경: [대하20:36]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과 아하시야의 관계]
(주); 다시스로 보내고자 - 왕상 22:48에는 '다시스의 선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다시스 지역과 무역하는 데 사용되던 배들을 가리킨다. 그 배의 실제 목적지는 오빌이었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배의 목적지를 '다시스'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상의 차이는 9:21과 왕상 10:22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1)역대기 저자의 기록상의 실수이거나(Keil), (2)다시스가 오빌의 방향에 있어 1차적으로 먼저 다시스로 배들을 보낼 필요가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Zockler).
(주); 에시온게벨 - 솔로몬 때에도 이곳에서 선박을 건조한 적이 있는데(8:17)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솔로몬 시대 이후 이곳은 곧바로 에돔인의 손에
떨어졌다가 여호사밧 시대때 다시 재탈환한 것이라고 한다(Payne).
성 경: [대하20:37]
주제1: [여호사밧의 승리와 통치 말기]
주제2: [여호사밧과 아하시야의 교제]
(주); 마레사 - 이 지역에 관해서는 11:8의 주석을 참조하라.
(주); 도다와후의 아들 엘리에셀 - 이 선지자에 관해서는 본절 이외에 더 이상 알려진 바가 없다.
(주); 여호와께서 왕의 지은 것을 파하시리라 - 왕상 22:48에 따르면 이 배는 에시온게벨에서 파괴되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아하시야는 새로운 배를 건조하여 오빌로의 항해를 시도하도록 여호사밧에게 요청하였으나 여호사밧은 첫번째 파선된 배가 건조에는 동참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주); 이에 그 배가 파상(破傷)하여 - 배가 부서진 원인은 폭풍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Barker) 요나서에 따르면 욥바에서 다시스로
이어지는 항로에는 큰 폭풍이 자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욘 1:4). 그러나 폭풍을 일으키기도 하시고 잠잠케도 하시는 분은 바로 여호와이신
것이다.
성 경: [대하21:1]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여호람의 악정과 하나님의 신실성]
(주); 여호사밧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 여호사밧의 죽음은 여호람의 틔치 헹위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여호람은 여호사밧이 사망하기 4년전부터
그의 부친과 함께 섭정을 해오다(Payne) 여호사밧이 장사되던 해인 B.C. 848년에 드디어 단독 통치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여호람은 그의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성 경: [대하21:2,3]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여호람의 악정과 하나님의 신실성]
여호사밧은 왕위에 오를 여호람을 제외한 여섯 아들들에게 많은 은금과 보물을 주었고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다스리게 했다. 우리는 여호사밧이 이러한 조치를 취한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 왕위 계승 문제로 다툴 것을 염려하여 그렇게 조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 아사랴 - 한글 개역 성경에는 여호사밧의 아들 중 두 사람의 이름이 동일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에서 전자의 아사랴는 '아자르야'(*)로, 후자의 아사랴는 '아자르야후'(*)로 나타난다.
(주); 유다 왕 여호사밧 - 히브리 원문에는 '이스라엘 왕 여호사밧'으로 되어 있다. 역대기 저자가 유다 왕을 이스라엘 왕이라고 기록한 이유를
학자들은 다음과 갈이 추측한다. (1) 여호사밧이 하나님 백성의 참된 왕이었기 때문이다(Keil). (2) 역대기저자가, 사용한 자료를 그대로
반영시켰기 때문이다(Williamson).
성 경: [대하21:4]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여호람의 악정과 하나님의 신실성]
(주); 그 모든 이유와...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 - 여호람이 이들을 살해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이 여호람과 그의 아내의 우상숭배를
반대했기 때문이다(13절, Keil,Zockler). (2) 그들이 여호람의 폭군적인 행동을 경계했기 때문이다(S. Oettli).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여호람은 그들을 그의 정적(政敵)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살해했을 것이다. 그는 여호사밧과는 달리 북 이스라엘 왕들처럼 폭군이었다.
성 경: [대하21:5]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여호람의 악정과 하나님의 신실성]
(주); 예루살렘에서 팔 년을 치리(治理)하니라 - 이 팔 년은 공동 섭정을 한 것을 제한 그의 통치 기간(B.C. 848-841)을 가리킨다. 이 통치 기간은
유다에 있어서 비극 그 자체였다. 한편, 그가 무고한 자의 피를 흘리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소비한 시간과 심한 중병으로 오년간 앓은 것을
제외하면 그의 통치 기간은 그리 긴 것이 아니었다.
성 경: [대하21:6]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여호람의 악정과 하나님의 신실성]
(주);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 - 여호람은 선왕(先王)들인 아사와 여호사밧의 선한 길을 좇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북이스라엘
왕들처럼 행했다. 그 원인으로서 역대기 저자는 여호사밧의 결혼 동맹(18:1)의 실책을 지적한다. 아합의 딸 아달랴가 여호람의 아내가 되어 그
남편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쳐 다윗 왕가를 아합 왕가와 같이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여호람의 잘못된 혼인으로 말미암아 유다 왕국의 통치의
반신정 통치의 성격을 띄게 된다. 여기서 참된 혼인의 중요성을 배워야 할 것이다.
성 경: [대하21:7]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여호람의 악정과 하나님의 신실성]
(주);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음은 - 여호람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즉, 그는 유다를 우상 숭배하는 나라로 이끌어 갔다. 그럼에도 블구하고 하나님은 다윗과 세우신 언약(삼하 7:13-16) 때문에 '다윗의집' 곧 다윗 왕가를 멸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즉, 여호람에게는 형벌을 내리시겠지만, 그 왕위는 그의 아들로 이어져다윗 왕가를 계속 존속시키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 왕조가 북이스라엘의 여러 단명한 왕조들과 다른 점이다.
(주);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許)하셨음이더라 - 역대기 저자는 '등불'을 생명의 상징으로 사용한다(욥 18:6;잠 13:9;24:20). 다시 말하면 다윗의
씨는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삼하 7:12-17, Curtis).
성 경: [대하21:8]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에돔과 립나의 유다 베반]
(주); 여호람때에 에돔이 배반하여 - 에돔은 다윗에 의해 유다의 속국이 되었다가(삼하8:13, 14; 대상 18:11-13) 솔로몬의 통치 이후 잠시 독립을 했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왕상 11:14 이하, Curtis). 그러나 여호사밧 때에 다시 유다의 속국이 되었다가(20:36의 에시온게벨은 에돔 땅이다) 여호람 때에 다시 유다의 지배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로 보아 유다는 여호람의 악정으로 인하여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대외적으로도 그 면모를 크게 잃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 - 이는 에돔이 여호사밧에 의해 파견된 유다의 섭정왕(왕상 22:47)을 죽이고 그들이 스스로 왕을 세웠음을
가리킨다.
성 경: [대하21:9]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에돔과 립나의 유다 베반]
(주); 자기를 에워싼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쳤더라 - 여호람은 에돔을 쳐서 다시 속국으로 삼기 위하여 출정 (出征)하였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에돔 군사에 포위되어 사경(死境)에 몰리게 되었던 바람에 일어나서 에돔의 포위망이 약한 곳올 쳐서 가까스로 살아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여호람의 대(對) 에돔전(戰) 실패가 에돔으로 하여금 완전한 독립을 얻도록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성 경: [대하21:10]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에돔과 립나의 유다 배반]
(주);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여 - 립나는 블레셋 근방 유다의 남서 변방 지역에 있는 라기스에서 얼마 멀지 않은 도시이다(수 15:42;대상 6:57). 한때 이스라엘 제사장들의 도시이며 도피성(수 12:15;21:13) 중의 하나였던 이곳이 유다를 배반한 이유는 아마도 이웃에 있던 블레셋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립나가 하나의 독립국이 되었는지 아니면 블레셋의 한 도시로 편입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후에 앗수르의 산헤립이 립나를 장악한 일이 있다(왕하 19:8).
(주); 이는 저가...여호와를 벼렸음이더라 - 이것은 열왕기에 없는 역대기 저자의 독자적인 주석이다. 즉, 유다가 속국들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여호람의 배교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그는 그의 왕후 아달랴가 유입한 이방 종교를 유다에 퍼뜨렸던 것이다.
성 경: [대하21:11]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엘리야의 경고]
(주); 음란하듯 우상을 섬기게 하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젠'(*)은 직역하면 그가... 음행케 하였다'가 된다. 이 '예젠'이라는 동사는 '음행을 하다', '간음하다'라는 뜻의 동사 '자나'(*)의 히필형(Hiphil; 사역형 능동)으로서 영적 간음행위, 즉 우상 숭배 행위를 가리키는 데도 쓰인다. 당연히 본절에서도 이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여호와와 결혼한 신부들로 생각했고. 다른 이방신들을 섬기는 것은 간음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 미혹케 하였으므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흐'(*)는 '밀다', '강요하다', '재촉하다'라는 뜻의 동사 '나다흐'(*)의 히필형이다.
따라서 이 동사는 누구 누구를...하게끔 하였다는 뜻을 갖는다. 즉, 이는 여호람의 종교 정책에 따른 우상 숭배의 강요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대하21:12]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엘리야의 경고]
(주);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 여기서 '엘리야'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는 다른 두 입장이 주장되고있다. (1)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디셉 사람 엘리야(Grove, Keil, Payne, williamson):이들은 편지를 엘리야의 것으로보는 데는 일치한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을 때 보낸 것인지 승천 이후에 보내진 것인지에는 의견의 차이가 있다. (2) 이스라엘의 선지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닌 다른 엘리야 선지자(Murphy, Curtis):이들은 그 유명한 선지자 엘리야가 편지 전달 당시에 살아있지 않았으며(왕하3:11), 그가 남왕국 유다와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1)의 견해를 취하는 보수주의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2)의 견해를 거부한다. 첫째로, 엘리야가 남왕국 유다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왕상 19:3 이하). 둘째로, 엘리야의 승천 사건(왕하 2:11)은 여호람이 단독 통치자로 등극하고 아우들과 방백을 살해한 사건(21:4)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편지를 보낼 수 있다. 셋째로, 열왕기하 3:11에서 엘리사에 대한 언급은 그가 단지 엘리야의 조력자였음을 말하는 것이지 엘리야가 더 이상 땅에 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엘리야의 글은 여호람의 두 가지 큰 실책에 대해 책망한 것이다. 즉, (1) 아합의 집을 좇아 우상을 숭배하며 백성으로 그 죄에 빠지도록 미혹하였다. (2) 그 아우들은 살해했다. 이 실책에 대해 여호와께서 보옹하신다는 것이다.
(주);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치 아니하고 - 역대기에서는 여호사밧과 아사왕이 특별히 동일한 유형의 선왕(善王)으로
언급되고 있다(14:2;17:3;20:32).
성 경: [대하21:13]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엘리야의 경고]
(주); 아합의 집과 같이 -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초기에는 극히 일부에서만 바알 숭배가 행해졌으나, 북왕국 오므리 왕조패에 이르러 그것은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특히 이세벨과 아합으로 인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바알 종교가 국교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극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본서 기자는 아합의 가문을 바알 종교의 대명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주); 너보다 선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 여호람이 그의 아우들을 죽인 것은 단지 그들의 소유가 탐나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의 우상 숭배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사실로 그들이 선한 아우들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편지에 이 살륙 사건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
편지가 여호사밧 사후에 보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 경: [대하21:14]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엘리야의 경고]
(주); 큰 재앙으로 치리라 - '재앙'(*,막게파)은 '치명적인 타격', '전투에서 의학살', '역병'의 의미로 쓰인다. 이 재앙이 그의 백성과 그의
자녀와 아내들과 그의 모든 재물에 내려질 것이므로 온역이나 역병과 같은 의미로 쓰여졌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16,17절에 기록된
블레셋의 침입에 의한 손상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성 경: [대하21:15]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엘리야의 경고]
(주); 그 병이 날로 중하여 창자가 빠져나오리라 - 이것은 여호람이 오랜 기간 동안 병을 앓다가 죽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19절). 여호람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맺은 시내산 언약에 충실하지 않았다. 그는 그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 백성을 언약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도록 가르치고 모범을 보이고 통치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방 종교를 도입하는 죄악을 범하였다. 그 결과 언약의 약속대로
그에게 저주가 임했던 것이다.
성 경: [대하21:16]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여호함의 최후]
(주); 블레셋 사람...아라비아 사람 - 여호람의 부친 여호사밧에게 조공을 바쳐왔던 이 무리들이(17:11) 이제 유다를 침략하였다. 역대기서에서
이들의 존재는 주로 팔레스타인과 애굽사이의 접경 지대에 사는 유목민들로 나타나는데, 어느 때는 이스라엘 사방에서 여호와의 행하심을 목격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고(14:14;20:29), 또 어느 때는 이스라엘을 징벌하기 위한 하나님을 지팡이로 사용되기도 했다.
성 경: [대하21:17]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여호람의 최후]
(주); 유다를 침노하여...탈취(奪取)하였으므로 - 이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이 왕궁의 모든 재물과 여호람의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여 갔다. 여기서 '왕궁'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가 있다. (1) 예루살렘에 있는 왕궁(Zockler,Curtis), (2)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왕궁(Keil, Williamson). 이중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첫째, 예루살렘의 왕궁과 성전의 보물이 탈취당했다는 언급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 여호람의 아들들이 모두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번째 이유는 왕자들을 견고한 성읍에 거하게 했던 당시의 관습과 연관되어진다(3절). 만일 여호람의 아들들이 예루살렘에 있었다면 침략자들에게 잡혔다 하더라도 재물을 통해 교환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Williamson). 그러나 그들은 요새 성읍에 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살되고 말았을 것이다.
(주); 여호아하스 - 그는 22:1에서 '아하시야'로 불리워지고 있다. 이 두 이름은 '여호와'의 이름과 '붙들다' 라는 뜻의 동사 '아하즈'(*)가 결합된
것으로서 두 이름의 의미는 동일하나 두 단어의 결합 순서가 뒤바뀌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러한 징계 가운데서도 한 아들을 남기신 것은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며 다윗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함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7절).
성 경: [대하21:18]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여호람의 최후]
(주); 능히 고치지 못할 병 - 이는 여호람의 병이 하나님의 형벌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궁중의 의사들이 그 병의 원인도 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치료법도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성 경: [대하21:19]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여호람의 최후]
(주); 여러 날 최후 이 년 만에 - 2년 동안의 병고(病苦)는 오히려 죽음 자체보다도 더큰 형벌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는 날마다 더 심해지는 병을 앓으면서 무고한 형제들을 죽인 죄의 대가를 받은 것이다.
(주); 저에게 분향하지 아니하였으며 - 백성들은 이전의 왕이 죽을 때처럼 분향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호람의 죽음에 애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것은
여호람의 악정에 대한 벽성들의 공개적인 불만의 표시였다.
성 경: [대하21:20]
주제1: [여호람의 악정(惡政)]
주제2: [여호람의 최후]
(주);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 여기서 '아끼는 자 없이'란 구절을 많은 영역본과 주석 학자들이 '애도하는 자 하나 없이' 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여호람이 죽었을때 백성들은 분향도, 애호도 하지 않았으며 그의 시체를 열왕의 묘실에 두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언약의 나라에서
왕으로서의 정당한 역할을 전혀 행하지 못했기때문일 것이다.
성 경: [대하22:1]
주제1: [아하시야와 아달랴의 악행]
주제2: [아하시야의 악정]
(주); 예루살렘 거민이...왕을 삼았으니 - 본절의 병행 구절인 왕하 8:24에는 아하시야가 어떻게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으나, 본절에는 아하시야의 즉위 사건에 예루살렘 거민이 미친 영향이 암시되어 있다. 즉,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혼선이 있었다는 것이다(Keil, Zockler, Payne, Williamson). 아하시야의 모친인 아달랴가 왕권을 장악하려는 어떤 계략에 대해 예루살렘 거민이 반대하고 아하시야를 적극적으로 왕위에 계승시켰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 추론의 타당성은 아하시야가 일년을 통치하고 죽자 그녀가 유다 왕가의 씨를 진멸시키려한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10절).
(주); 아라비아 사람과 함께 와서 영(營)을 치던 부대가 - 이것은 여호람의 아들들이 진영에 있을 때 아라비아 사람과 블레셋 사람의 침입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것은 21:17에 있는 여호람의 아들들의 죽음에 관한 기록의 보충적 설명이다.
성 경: [대하22:2]
주제1: [아하시야와 아달랴의 악행]
주제2: [아하시야의 악정]
(주); 사십 이 세라 - 왕하 8:26에는 아하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를 나이 이십 이세라고 했다. 그런데 본절에는 '사십 이세'로 나타난다. 이것은 필사자가 '이십'을 '사십'으로 오기한 것으로 대부분의 주석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다. 아하시야의 부친 여호람이 40세에 죽었는데(21:5) 1년을 다스리고 사망한 그의 아들이 42세일 수는 없는 것이다.
(주); 오므리의 손녀더라 - 여기서 손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트'(*)는 '딸'이란 뜻이다. 그래서 혹자는 아달랴를 오므리의 딸이요, 아합의 누이(21:6과 비교하라)라고 주장한다(Hitzig). 그러나 여기서 아달랴를 오므리의 딸이라고 한 것은 오므리가 아달랴의 부친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므리 왕가의 시조(始祖)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므리는 아합의 부친이며 아달랴는 그의 손녀가 된다. 이런 때에 히브리어 '바트'(*)는 '손녀'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대하22:3]
주제1: [아하시야와 아달랴의 악행]
주제2: [아하시야의 악정]
(주); 이는 그 모친이 꾀어 악을 행하게 하였음이라 - 아달랴가 왕후로서 모든 세력을 잡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를 조종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아달랴는 배후에서 그의 아들 아하시야를 조정하여 유다를 더욱 바알 숭배로 몰아가려 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여인이 유다의 심장부, 곧 왕궁에
들어옴으로 유다는 그 존재의 성격을 상실하여 가고 있었으니 유다는 하나님의 소유요, 제사장의 나라요, 거룩한 백성의 성격을 거의 상실한 지경에
이르렀다.
성 경: [대하22:4]
주제1: [아하시야와 아달랴의 악행]
주제2: [아하시야의 악정]
(주); 아합의 집 교도(敎導)를 좇아 - 이는 아달랴가 아합 종교의 전파를 위해 종교 지도자들을 아하시야에게 보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아합의 집과 연혼한 것이(18:1) 얼마나 악한가 하는 사실을 강조한다. 아하시야는 다윗의 통치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다윗이
세운 모범, 곧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을 철저히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로 규정지어 가려 했던 통치 성격을 본받지 않고 도리어
배교(背敎)의 자리로 떨어진 아합의 통치를 본받았다. 비록 그가 형식상으로는 철저히 언약의 나라의 왕으로 군림했다 할지라도 실질적으로는
이방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성 경: [대하22:5]
주제1: [아하시야와 아달랴의 악행]
주제2: [요람의 부상]
(주);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 요단 동편에 위치한 길르앗 라못은 레위 지파의 므라리 자손에게 분배된 성읍이다(수 21:38). 이 성읍은 남북 분열 이후 아람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B.C. 853년에 아합은 그곳을 되찾으려고 여호사밧과 연합 공격을 했지만 도리어 전사(戰死)하고 말았다(18:34). 한편, 몇년 후에 아합의 둘째 아들 요람이 그 성읍을 재탈환했지만 다시 하사엘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퇴각했다. 이 시기에도 남왕국과 북왕국의 동맹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어서 군사 행동을 양국이 함께 했음을 볼 수 있다.
(주); 아람 왕 하사엘 - 이 사람은 벤하닷 왕 수하(手下)에 있던 장군이었으나 역모를 꾀하여 그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가 왕이 된 과정과 그의 잔인함에 대한 선지자 엘리사의 예언에 관해서는 왕하 8:12,13을 참조하라.
(주); 아람 사람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아람밈'(*)인데 히브리 원문에는 이것의 단축형인 '하람밈'(*)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무시한 70인역에서는 '하람밈'을 '궁수들'이라고 번역했다.
(주); 요람 - 이 이름은 '여호람'(*)의 단축형이다. 따라서 여호사밧의 아들 유다 왕 여호람과 아합의 아들 요람은 동명 이인(同名異人)인 셈인데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존귀하시다'이다. 성경에서는 이 두 이름이 서로 바뀌어 나타나기도 한다.
성 경: [대하22:6]
주제1: [아하시야와 아달랴의 악행]
주제2: [요람의 부상]
(주); 이스르엘 - 이곳은 오늘날의 '제르인'(Zer'in)에 해당되며 므깃도와 벱세안(Beth-shean) 사이 에스드렐론(Esdraelon) 평지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Curtis). 이곳에도 북왕국의 왕족이 거처하고 있는 왕궁이 있었다.
(주);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사랴가 이스르엘에 내려가서 - 여기서 '아사랴'(*)는 '아하시야'(*)를 잘못 표기한 것이다(Keil, Curtis).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스라엘 왕 요람을 방문할 때 길르앗 라못(라마)에서 이스르엘로 내려갔는지,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이스르엘로 내려갔는지는 분명치
않다. 왕하 9:14,15에 따르면, 요람이 이스르엘로 치료하러간 이후에도 이스라엘 군대는 예후와 함께 여전히 라마에서 하사엘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아하시야가 계속 하사엘과 싸우다가 요람을 방문한 것인지 아니면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방문한 것인지 본문의 문맥을 통해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한편, '내려가서'(*, 야라드)라는 단어가 예루살렘에서 이스르엘로 내려간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학자가 있다(Curtis). 어쨌든
아하시야의 이 방문은 아합의 집과 관련있는 모든 왕족, 즉 유다와 이스라엘의 두 왕족이 예후의 손에 참형을 당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여호와를 배반한 자들을 벌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할 수 있다(7a절).
성 경: [대하22:7]
주제1: [아하시야와 아달랴의 악행]
주제2: [예후의 반역]
(주); 해를 받았으니 - 이에 대한 히브리어는 '테부사트'(*)라는 명사이다. 이말은 '파멸', '몰락'이라는 뜻이다. 아하시야의 패망은 하나님의 엄위로운 심판이었다. 반면에 열왕기 기자는 이 사건을 신학적 해석을 가하지 않고 단지 역사적 사실로 보고한다(왕하 9:27).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그 사건을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으로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임을 지적한다.
(주); 임시의 아들 예후 - '임시'는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님시'이다. 왕하 9:2에는 예후를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원문을 직역하면 '님시의 아들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예후는 적어도 님시의 손자임을 알 수 있다.
(주);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아합의 집을 멸하게 하신 자더라 -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을 멸하시기 위해 어떻게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셨는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왕하 9:1-10을 참조하라. 그런데 역대기 저자는 이 사실을 본문과 같이 간략하게 기록하면서 아하시야도 아합의
집안 식구임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후가 아하시야를 죽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다음의 8,9절에서는 주로
아하시야와 그의 가족들에 대한 예후의 심판적 행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성 경: [대하22:8]
주제1: [아하시야와 아달랴의 악행]
주제2: [예후의 반역]
(주);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 - 학자들간에 해석상 논란이 많은 구절이다. '형제의 아들들'에 해당하는 '베네 아헤'(*)는 '형제의 아들들'(KJV,
RSV, NASB, 한글개역), '조카'(JB, 공동변역), '친척의 아들들'(NIV), '친척'(NEB) 등으로 번역된다. 보수주의 학자들은 이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과 그 병행 구절인 왕하10:13,14의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일단 동일인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을 이해하는 과정에는 차이가 있다.
카일(Keil)은 열왕기하의 '형제'(*, 아헤)를 아하시야의 조카와 사촌으로 이해한다. 아하시야의 실제 형제들은 침략자들에 의해 이미 살해되었기
때문에(1절;21:17), '형제'라는 말은 조카와 사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왕기하와 역대하의 기록을 조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도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 조카와 사촌이 과연 아하시야 왕을 섬길 수 있는(8절) 성년이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학자들은 본절의 '형제'(*, 아헤)가 NIV에서처럼 '친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Payne,Williamson). 그리고 역대기 저자가
열왕기 저자와는 달리 '아하시야의 형제들' 대신에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로 바꾼 것은 그가 열왕기하에는 없는 사실 곧 아하시야의 형제들이
죽었다는 점(1절;21:17)을 더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의 오해를 없애고 정확히 제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이란 아하시야의 조카와 사촌일 필요가 없다. 그들은 아하시야의 친척의 아들들, 곧 그 왕을 섬길 수 있는 성년이 된
친척의 아들들을 뜻하게 된다. 따라서 열왕기하의 기록도 이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성 경: [대하22:9]
주제1: [아하시야와 아달랴의 악행]
주제2: [예후의 반역]
열왕기하에는 역대기하와는 달리 아하시야의 죽음이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의 죽음보다 먼저 나온다(왕하 9:27;10:13,17). 이 차이는 역대기의 짧은 언급이 시간상의 배열보다 주제상의 배열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역대기 기자는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의 죽음을 먼저 언급하고, 다음으로 아하시야의 죽음과 그의 장례와 왕권의 약화를 차례로 언급하려는 목적 때문에 그 순서를 뒤바꾸었을 것이다(Keil,Chronicles, p.407).
(주);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에 숨었더니...잡아다가 죽이고 - 이 언급은 열왕기하의 언급(9:27,28)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열왕기하에 빠진 기사를 더 첨가시켜 보충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전제 하에 아하시야의 최후 행적을 추적한다면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아하시야는 예후의 추격을 받고 사마리아로 대피하였으나 곧 예후의 부하들에게 발각, 체포되어 예후에게로 이송되어 오던 중, 이블르암 근처 구르 비탈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큰 상처를 입고 므깃도로 도망하였으나 그곳에서 절명(絶命)하였다(Keil, Kings,pp.343-344, Payne).
(주); 이에 아하시야의 집이 약하여 왕위를 지키지 못하게 되니라 - 이것은 아하시야의 뒤를 이을 마땅한 계승자가 없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막을 만한 힘이 아하시야의 집에 없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성 경: [대하22:10]
주제1: [아하시야와 아달랴의 악행]
주제2: [아달랴의 반란과 요아스의 피신]
(주);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殄滅)하였으나 - 여기서 '왕의 씨'라고 하면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는 아하시야의 모든 아들들과 친척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때에 아하시야의 친척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아라비아 사람들(21:16,17)과 예후(본장)에 의해서 모두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2세에 왕위에 오른 아하시야에게서 난 자식들은 모두 대단히 어렸을 것이다. 한편 아달랴는 그녀의 친정 아합의 집이
이미 멸망한 상태에서 정권을 잡지 않으면 자신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손자 손녀까지도 모두 살해하였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유다 백성들은 어린 왕자 하나를 왕위에 옹위(擁衛)하여 아달랴를 몰아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난 요아스가 7살 되던 해, 즉 그로부터 7년 후 제사장 여호야다에 의해서 유다 왕이 되었다. 이것은 다윗의 집과 맺으신 언약(21:7;삼하
7:14-16)에 신실함을 보이신 하나님의 섭리이다.
성 경: [대하22:11]
주제1: [아하시야와 아달랴의 악행]
주제2: [아달랴의 반란과 요아스의 피신]
(주); 왕의 딸 여호사브앗 - 여호사브앗은 여호람의 딸이며 아하시야의 누이이다. 그러나 아달랴가 아닌 다른 아내에게서 난 딸일 것이다. 그녀는 아하시야 집의 멸망을 막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왕궁에서 요아스를 훔쳐내어 유모와 함께 성전에 있는 침실에 숨겼다.
(주);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더라 - 제사장 여호야다가 대상 6장의 족보 가운데도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전까지는 그렇게 세력 있는
제사장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여호사브앗(열왕기에는 '여호세바')으로 인하여 여호야다는 후에 세력을 얻게 되었고 아달랴를 몰아내고
왕위를 복원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됨으로써 새로운 세력으로 역사의 전면(前面)에 등장하게 된다.
성 경: [대하22:12]
주제1: [아하시야와 아달랴의 악행]
주제2: [아달랴의 반란과 요아스의 피신]
(주); 하나님의 전에 육 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 요아스가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7세였다. 따라서 요아스가 태어난 지 몇 개월이 안되어 아달랴의
살륙 사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모세 시대의 유아 살해 사건(출 1:15-22)과 예수 시대의 유아 살해 사건(마 2:13-18)을
연상하게 된다. 이처럼 다윗의 씨에 대한 무서운 사단의 공격 속에서도 그 씨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의 이행인 것이다.
성 경: [대하23:1]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여호야다의 거사]
(주); 제 칠 년에 - 아달랴가 다윗의 후손의 씨를 모두 진멸하려 했으나 하나님의 기이한 손길로 요아스는 보존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에 대한 신실한 성취였다. 그런데 아달랴가 왕의 씨를 진멸하려 한 것은 다윗 왕가를 통해 역사상에 전개시키려는 여호와의 경륜을 크게 대적하는 일이었다. 즉, 여호와께서 다윗 왕가를 통해 이 땅에서 드러내시려는 그의 통치의 성장과 활동을 사단이 아달랴를 통해서 저지하고 파괴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런 흑암의 세월이 6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제7년째로 접어들었다.
(주); 여호야다가 세력을 내어 - '세력을 내어'에 해당하는 '히트하자크'(*)는여러 역본들에서 '힘을 내어', '용기를 내어'(KJV, RSV, NIV, 공동변역)등으로 번역된다. 여호야다는 백성들이 아달랴의 악정(惡政)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용기를 내었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 용기는 전적으로 백성의 지지를 바라보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주); 백부장...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매 - 이 부분은 왕하 11:4을 보충 설명하는 곳이다. 즉, 이름이 밝혀진 다섯 사람의 백부장은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들이라는 것이다(Keil, Payne, Williamson, O.Zockler). 윌리암슨(Williamson)에 의하면 이 백부장들은
레위인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엘리사밧을 제외한 그들의 이름이 제사장 또는 레위인의 명단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역대기 저자가 그들의 이름을
밝힌 것은 제사장과 레위인 이외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기(6절) 때문에 성전에 들어간 그들을 레위인으로 밝혀 아무 하자가 없었음을 제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성 경: [대하23:2]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여호야다의 거사]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명을 받은 5명의 백부장들은 유다 모든 고을을 다니며 반정(反正)의 거사(擧事)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다. 이 호소에
'이스라엘 족장들', 곧 유다 왕국에 속하는 족장들이 그 정당성을 인정하고 예루살렘으로 모였다. 이 과정은 지극히 비밀리에 수행되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왕위를 찬탈한 아달랴가 요아스의 즉위식 행사를 목격하고서야 '반역이로다'(13절) 할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이다(Payne).
성 경: [대하23:3]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여호야다의 거사]
(주); 여호와께서 다윗의 자손에게...즉위(卽位)하여야 할지니 - 여호야다는 요아스의 즉위식에 즈음하여 공식적으로 반정(反正)의 정당성과 그
근거를 위와같이 제시하였다. 그는 반정을 함에 있어서 어떤 지식을 가지고 움직였다. 이 지식은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이요, 이전에 주신
계시에 근거한(삼하 7:13-16)것이다. 그는 비록 요아스가 어릴지라도 그만이 다윗의 자손이며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혁명을 추진하였고 유다가 모두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성 경: [대하23:4,5]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여호야다의 거사]
여호야다는 반정의 정당성을 먼저 이야기하고 다음으로 즉위식과 관련한 경호 배치에 대해 명령을 내린다. 즉, 그는 안식일에 근무에 들어가는 자, 곧 안식일에 입번(入番)하는 자들인 제사장과 레위인 가운데 삼분의 일은 성전의 문들을 지키고 다른 삼분의 일은 왕궁을 지키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기초문을 지키게 하였다.
(주); 문...왕궁...기초문 - '문'은 원문에 복수로 기록되어 있어 성전의 문들을 가리킨다. '왕궁'은 단지 '왕의 집', 곧 성전에 있는 '왕의 방'을
가리킨다. 아달랴가 들어올 수 있도록 이 왕궁은 열려져 있었다(12절). '기초문'은 열왕기에서 '수르 문'(왕하11:6)으로 불린다. 이 문도 성전에
있던 문 중의 하나이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Payne).
성 경: [대하23:6]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여호야다의 거사]
(주); 그 외의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못할 것이니 - 여호야다는 제사장과 수종 드는 레위 사람(대상 23:28-32)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일체
여호와의 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했다. 그런데 왕하 11:4에는 여호야다가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들을 불러 여호와의
전(殿)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1절 주석을 참고하라.
성 경: [대하23:7]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여호야다의 거사]
(주); 레위 사람은 각각 손에 병기를 잡고 - 4,5절에 언급된 삼 대로 나뉜 경호원을 가리킨다(Keil). 열왕기에서는 이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으나(왕하 11:8) 역대기 저자에 의해 보충되어 밝혀진다.
(주); 다른 사람이 전에 들어오거든 죽이고 - 혹자는 이 명령이 왕하 11:8의 '너희 반열을 침범하는 자는 죽이고'라는 명령과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역대기의 명령은 성전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보이고, 열왕기의 명령은 호위병들의 반열을 침범하는 자가 왕을 시해하러 왔기 때문에 죽이라고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Curtis). 그러나 이 주장은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본절과 열왕기의 기록은서로 다른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역대기 저자가 성전의 신성성(神聖性)에 관심을 두고 기록하였기 때문에 '너희 반열을 침범하는 자는 죽이고'라는 식으로 표현하지 않은 것 뿐이다. 그런데 반열을 침범하는 것, 곧 반열에 접근하는 것은 새로 즉위한 요아스 왕을 살해할 목적으로 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만일 요아스가 성전내에서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전에서 피를 흘리는 불상사가 되므로 성전의 신성성을 해치는 셈이다. 즉, 역대기 저자는 여호야다의 명령이 이 사실에 더 집중되어 있다고 보고 이를 부각시킨 것이다. 성전의 신성성이 지켜지면 요아스 왕의 살해도 자연적으로 막을 수 있게 된다.
(주); 왕의 출입할 때에 시위(侍衛)할지니라 - 요아스 왕이 성전과 왕궁을 출입(出入)할 때를 가리키지 않고, 성전과 성전 뜰을 출입할 때를
의미한다(Keil). 그렇다면 '시위할지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유'(*)는 이런 출입시에 경호원은 각자 배치된 자리에서 근무를 바로 수행하라는
뜻이 될 것이다.
성 경: [대하23:8]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요아스의 즉위]
(주); 레위 사람과 유다 무리 - 병행 구절인 왕하 11:9에서는 '백부장들'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백부장들'이 '레위 사람과 유다 무리'와 동일한 대상일 수 없다. 이처럼 역대기 저자가 열왕기 저자와 달리한 것은 여호야다가 이스라엘 족장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려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Keil).
(주); 출번(出番)하는 자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함마흐레코트'(*)이다. 이들은 다윗이 제정한(대상 24-26장) 성전 봉사의 임무를 맡았던
반열을 의미한다(Keil).
성 경: [대하23:9]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요아스의 즉위]
(주); 여호야다가...주고 - 여호야다는 백부장들에게 성전 안에 소장되어 있던 무기들을 나누어 주고 무장하게 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무장하지 않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에게 주어졌을 것이다.
(주); 다윗 왕의 창과 큰 방패와 작은 방패 - 혹자는 이것들이 모두 다윗 자신의 창과 방패였으며 매 대관식 때마다 성전에 소장되어 있던 이것들을
사용했다고 주장한다(Ewald). 그러나 그것은 단지 추측일 뿐이며 오히려 다윗 왕이 하닷에셀의 종들에게서 노략한 '금방패'(삼하 8:7)였다고 보는
주장이 더 타당하다(P.C.Barker).
성 경: [대하23:10]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요아스의 즉위]
(주); 또 백성들로 각각 손에 병기를 잡고 - 왕하 11:11에는 '호위병이 각각 손에 병기를 잡고'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언급된 '백성들' 중에는 비 레위 지파 족장들(2절)과, 여호야다와 언약을 한 5명의 백부장이 충실하다고 여긴 왕의 호위병도 포함되었을 것이 분명하다(Payne).
(주); 왕을 호위하되 - 이 도열(堵列)은 왕을 둘러싸는 것, 성전 우편에서부터 좌편까지 단과 전(殿)곁에 서게 한 것을 가리킨다.
성 경: [대하23:11]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요아스의 즉위]
(주); 무리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 병행 구절에는 '여호야다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왕하 11:12)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여호야다' 대신에 '무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것은 다윗 왕권의 회복이 모든 백성들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된 것임을 직접적으로 밝히려는 저자의 의도 때문이다. 반면 열왕기에서는 여호야다가 백성의 지지를 얻어 반정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그 대표자만 거론되고 있을 따름이다.
(주); 면류관을 씌우며 율법책을 주고 - 율법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에두트'(*)이다. 이 말은 '증거'(KJV, RSV), '언약의 사본'(NIV, a copy
of thecovenant), '율법'(JB), '율법책'(공동번역)등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커티스(Curtis)는 이 말이 왕권을 상징하는 '팔찌'(*, 체아두트)라는
말을 오기(誤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에두트'(*)가 문자적으로는 '증거'라는 뜻이지만, 역대기가
기록될 당시에는 '언약', 곧 율법을 의미하였다. 본서 저자는 여기서 율법서의 사본을 왕에게 주도록 한 신 17:18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JB
난하주).
성 경: [대하23:12]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아달랴의 최후]
(주); 백성들이 분주하며 - 왕하 11:13에는 '호위병과 백성의 소리'로 기록되어 있다. 역대기 저자는 그들도 모두 포함하여 '백성들'이라 칭하였다.
성 경: [대하23:13]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아달랴의 최후]
(주); 왕이 전 문 기둥 곁에 섰고 - 병행구절인 왕하 11:14에는 '구례대로 대(臺) 위에 섰고'로 기록되어 있다. 해석상 어려운 곳이다. 여러 역본에 의하면, 열왕기는 '규례대로 기둥 곁에 서 있고'(KJV, RSV, NIV, JB), '규례대로 단에 서 있고'(NEB)로 각각 번역된다. 그리고 본절은 '입구 그의 기둥 곁에 서 있고'(KJV, RSV, NIV), '입구 단위에 서 있고'(NEB), '기둥 곁 입구 그곳에 서 있고'(JB) 등으로 번역된다. 영역본들은 대체로 기둥 곁에 서 있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JB 난하주에서는 열왕기하의 그곳을 해석하기를 "성전 입구에 있는 두 기둥 중 하나 곁에 왕을 위해 마련한 장소"였다고 주장한다.
(주); 노래하는 자는...찬송을 인도하는지라 - '노래하는 자'는 레위인들이었다(5:12,13;대상 25:7,8). 여기서 우리는 역대기 저자가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활동에 더욱 주의하여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왕기에는 이런 표현이 없다.
성 경: [대하23:14]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아달랴의 최후]
(주); 반렬(班列) 밖으로 몰아내라 - 여기서 반렬(*, 세데로트)은 왕을 호위하고 있는 군사들의 열(Barker), '성전의 경내'(벌게이트 라틴어
역본)로 해석된다. 전자의 해석도 무시하기 어려우나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Payne).
성 경: [대하23:15]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아달랴의 최후]
(주); 왕궁 마문 어귀에 - '마문'(馬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서는 알 수 없으나 성전구역을 벗어나 왕궁과 통하는 문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여호야다가 "여호와의 전에서는 저를 죽이지 말라"고 명했기 때문에 성전 구역을 벗어난 곳임이 분명하다. 이 마문이 느헤미야 시대에 복원된 성전
구역 남동쪽 모퉁이에 위치한 마문(느 3:28)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나 확정키는 어렵다.
성 경: [대하23:16]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여호야다의 개혁 의지]
(주); 여호와의 백성이 되리라 - 본절에서는 여호야다가 핵심이 되어 언약을 새롭게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언약의 핵심은 여호와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에 있다. 여호야다는 이런 사실을 회복함으로써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언약의 백성임을 깨닫게
하였다. 실제로 언약은 아달랴가 연혼 정책(18:1)에 의해 여호람의 왕비가 됨으로써 유다에서 파기(破棄)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호야다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유다를 다시 언약의 나라로 회복시켜 놓은 것이다.
성 경: [대하23:17]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여호야다의 개혁 의지]
여호야다가 언약을 새롭게 하고 언약 갱신의 의식을 거행한 수 바로 이어 그는 그 의식이 유명무실한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행동을 취하였다. 그
첫째 조치는 바알 종교를 없애는 것이었다. 본절은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즉, 온 국민이 바알의 당을 부수고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였다.
성 경: [대하23:18]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여호야다의 개혁 의지]
(주); 직원을 세워 - 병행 구절인 왕하 11:18과는 달리 직원(관리)을 세운 이유에 대해서 역대기 저자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성전에서
드리는 번제가 율법대로 지켜지게 하기 위해서 임명된 관리였다. "여호와의 전 사무를 보살피는 자"(대상 23:4)로서 이들은 제사장을 도와 제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을 감당해야 했다(대상23:28-32). 또한 그들은 다윗이 정한 규례대로 즐거이 부르고 노래하며 모세의 율법에기록된 대로
번제를 드릴 임무를 맡은 자들이었다. 이렇게 여호와의 전에 직원을 세운것은 언약 갱신(16절)에 따른 자연스런 후속 조치이다. 여호야다가 제사
제도를 모세의 율법과 다윗의 정한 바대로 회복시키려 한 것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회복시키려 한 일종의 종교 개혁이었다.
성 경: [대하23:19]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여호야다의 개혁 의지]
(주); 또 문지기를 여호와의 전 여러 문에 두어 - 문지기는 다윗이 정한 규례에 의하면 세번째 계열의 사람들이다(대상 23:5). 그들은 성전 동, 서, 남, 북의 문과 곳간을 지키는 자들이었다(대상 26:12-19).
(주); 부정한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 여기서 부정한 자는 단순히 의식(儀式)적으로 부정한 자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포함한다(Curtis).
성 경: [대하23:20]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여호야다의 개혁 의지]
(주); 왕을 인도하여 - 왕의 대관식(戴冠式) 도중 아달랴의 개입으로 중단되었던 행사가 11절에 이어 다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새롭게 기름부음 받은 새 왕이 보좌에 앉게됨으로써 사실상 반정(反正)은 종결되었다.
(주); 윗문으로 좇아 - 여기서 '윗문'이란 성전의 문이다(27:3). 한편 열왕기에서는 '호위병의 문 길'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 성전과
왕궁을 서로 잇는 통로였을 것이다.
성 경: [대하23:21]
주제1: [여호야다의 혁명과 요아스의 즉위]
주제2: [여호야다의 개혁 의지]
(주); 아달랴를 무리가 칼로 죽였었더라 - 아달랴는 이미 성전으로부터 도피하다 왕궁 마문(馬門) 어귀에서 죽임을 당한 것으로 기록된다(15절).
그렇다면 이 기록은 아달랴의 죽음을 다시 언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재언급한 이유는 요아스 왕의 즉위와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을 되찾은 사실을 마귀의 앞잡이 아달랴의 죽음과 대비시키려는 저자의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 경: [대하24:1,2]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요아스의 선정(善政)]
(주);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을 치리하니라 - 요아스 왕의 통치 기간은 B.C. 835년부터 796년까지 40년 동안이며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 그때까지 그로 하여금 정직한 왕으로 살게 하였던 힘은 바로 여호야다의 교훈(왕하 12:2)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성 경: [대하24:3]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요아스의 선정(善政)]
(주); 두 아내에게 장가들게 하였더니 - 여호야다는 마치 요아스의 아버지된 심정으로 요아스에게 아내를 선택해 주었다. 이렇게 여호야다가 왕의 아내를 선택함에 있어서 혼신의 정성을 다 쏟은 것은 요아스가 고아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달랴와 같은 악한 여인과의 결혼으로 인한 비극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윗 왕통을 이어감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호야다는 그의 개혁 과정에서 왕가의 풍습에 일부일처제의 원리를 확고히 세우지는 못하였다.
(주); 자녀를 낳았더라 - 왕족이 거의 멸절된 상태에서 자녀를 낳는 일이 요아스 왕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성 경: [대하24:4]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성전 수리를 명하는 요아스]
(주); 중수(重修)할 뜻을 두고 - 요아스가 집권 초기에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고자 했던 것은 그 동안 아달랴의 악정 하에서 성전이 많이 파괴되었고
성전의 모든 성물이 바알들에게 드려졌기 때문이었다(7절).
성 경: [대하24:5]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성전 수리를 명하는 요아스]
(주); 제사장과 레위 사람 - 열왕기하에는 '제사장'만이 등장한다(왕하 12:4). 성전에 관한 직무를 수행하는 데에 레위인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역대기 저자는 이일에 보다 많은 사람이 참여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주);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 열왕기하에서는 예루살렘 성 이외의 성읍에서 돈을 거두었다는 언급이 없으나 역대기 저자는 유다 여러 성읍에서 직접 돈을 거두어 오도록 왕이 명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역대기 저자의 기록이 보다 구체적임을 알수 있다.
(주); 레위 사람이 빨리 하지 아니한지라 - 요아스가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성전 수리를 명하였으나 그의 재위 23년까지 성전은 수리되지 않고
퇴락한 상태 그대로 있었다(왕하 12:6).
성 경: [대하24:6]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성전 수리를 명하는 요아스]
(주); 어찌하여...아니하였느냐 - 요아스 왕이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성전 보수 공사의 책임을 맡겼으나 이 공사가 지연되자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불러 질책하였다. 요아스는 제사장, 레위 사람 모두의 무책임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제사장이 받은 질책은 열왕기하에만 나타난다(왕하
12:6,7). 이 차이점, 곧 역대기 하에서 제사장이 언급되지 않는 것에 대해 혹자는 역대기 저자가 다른 자료에 근거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Rudolph).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역대기 저자는 사건의 전모를 알고서 열왕기하에 언급되지 않은 사실을 보충시켜 사건 전체를
균형있게 제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여호야다가 목숨을 걸고 반정(反正)을 일으켰고 개혁을 추진시켰음에도 성전 보수 공사의 일에는 힘을
다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요아스의 계획이 시기적으로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신앙의 한계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경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인물일지라도 연약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 경: [대하24:7]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성전 수리를 명하는 요아스]
본절은 왜 성전 중수가 필요하였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달랴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전(殿)을 부수고 성전의 성물까지 바알들을 위해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주); 아달랴의 아들들 - 이 '아들들'이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비유적으로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전자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죽임을 당한 아하시야의 아저씨와 형제들을(Keil) 가리키고(21:4;22:1), 후자의 의미로 이해하면 '아달랴의 추종자'(Barnes, NEB), 또는 그녀의 '제사장들'(Oettli, Benzinger)을 가리킨다.
(주); 하나님의 전을 깨뜨리고 - '깨뜨리고'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원형은 '파라츠'(*)이다. 이 단어가 여기서는 주로 두 가지 뜻으로 번역된다. 즉, 하나는 '깨뜨리다'(KJV, JB), 다른 하나는 '부수고 들어가다'(RSV, NIV, NEB, 공동번역)로 나타난다. 근래에는 후자로 번역되는 것이 지배적이다.
(주); 모든 성물을 바알들에게 드렸음이었더라 - 아달랴는 여호와의 전에 보관되어 있던 모든 금그릇 은그릇 등을 바알을 숭배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에 대하여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호 2:8)라고
기록한다.
성 경: [대하24:8]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성전 수리를 위한 헌금]
(주); 한 궤를 만들어...전 문밖에 두게 하고 - 새로운 계획이 왕에 의해 제시된다. 그것은 궤를 만들어 성전 문밖에 두고 모세의 정한 세를
하나님께 드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 방식은 이전의 것(5,6절)과 다른 방식이었다. 이전에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여러 성읍에 돌아 다니면서 성전
보수를 위해 세를 거두는 방식이었으나 잘 시행되지 않았다. 한편, 본절과 열왕기하의 기록에는 차이점이 있다. 즉, 궤가 어디에 위치하였느냐 하는
문제다. 왕하 12:9에 의하면 궤는 '여호와의 전문 어귀 우편 곧 단 옆에'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역대기 저자는 '여호와의 전 문밖에' 두게
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열왕기하의 상세한 기록에 따라 '단 옆' 곧 '번제단 옆'에 놓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문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손에서 은을 받아 그 궤에 넣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왕하 12:9). 그렇다고 양자의 차이를 모순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주석학자들은 역대기 저자가 '전 문밖에'라고 고쳐 기록한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하고 있으나 그 설명의 불충분성 때문에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을 따름이다.
성 경: [대하24:9]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성전 수리를 위한 헌금]
이 명령은 이전에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주어졌던 것이다(5,6절). 그러나 이제 왕이 직접 유다와 예루살렘에 반포하여 정한 세를 여호와께
드리라고 명령한다.
성 경: [대하24:10]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성전 수리를 위한 헌금]
(주); 모든 방백과 백성들이 기뻐하여 - 열왕기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본절에서 유다의 모든 백성들이 성전 수리를 위한 헌금 활동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지를 명백히 밝히고 있다.
(주); 마치기까지 - 이것을 히브리 원문에 따라 직역해 보면 '그 궤에 가득차기까지'이다. 방백들과 백성들은 왕의 뜻을 기꺼이 받들어 그 궤가
가득찰 때까지 계속해서 헌금하였고, 그 궤를 비우고 다시 그곳에 궤를 갖다 놓으면 또 그 궤를 채웠다(11절).
성 경: [대하24:11]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성전 수리를 위한 헌금]
(주); 왕의 유사(有司) - '유사'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페쿠다'(*)는 '소집', '돌봄', '관리', '직분'이라는 뜻의 여성 명사로서 왕의 일을 처리, 관리, 보호하는 일을 맡은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은 고정된 직책이 아니라 임시로 어떤 목적을 위해 세운 직책을 가리키는 듯하다. 즉, 이들은 요아스 왕이 헌금 관리를 위하여 특별히 세운 관리였을 것이다.
(주); 왕의 서기관과 대제사장에게 속한 아전 - 왕의 서기관은 헌금 액수를 기록하고 문서화하여 보관하는 업무를 수행한 듯하며(왕하 12:10 주석 참조), 대제사장의 아전은 그 돈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전 간역자에게 주어 인건비로 사용케 하는 역할을 담당한듯하다(12절).
(주); 때때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욤 베욤'(*)은 '궤에 돈이 가득 찼을 때마다'라는 뜻이다(Keil).
성 경: [대하24:12]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성전 수리 필역(畢役)]
(주); 여호와의 전 간역자(幹役者) - 왕하 12:11에는 '여호와의 전을 맡은 자'로 표현되어 있다. 즉, 이는 성전 수리를 위하여 고용된 석수, 목수,
철공장, 놋공장들을 지휘하는 총책임자를 가리킨다.
성 경: [대하24:13]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성전 수리 필역(畢役)]
(주); 수리하는 역사가 점점 진취(進就)되므로 - 여기서 '수리'에 해당되는 히브리 단어'아루카'(*)는 '시간이 오래 걸리다'라는 뜻의 동사
'아라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연장'(prolongation)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종종 '회복', '수리'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느 4:7;사 58:8;렘 8:22;30:17;33:6). 따라서 이 '아루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이 회복되고 진척되는 모양을 묘사할 때쓰는 단어임이
분명하다.
성 경: [대하24:14]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성전 수리 필역(畢役)]
(주); 전에 쓸 그릇을 만들었으니 - 본절과 병행 구절인 왕하 12:13에는 '그릇을 만들지 아니하고'로 기록되어 있다. 본절은 모든 사업을 다 필역한 후에 그 '남은 돈'으로 그릇을 만든 사실을 기록하고 있고, 열왕기 기자는 성전 수리 사업이 한창 진행 중에 있는 동안에는 결코 다른 목적으로 그 궤의 돈을 사용치 못하도록 하여 일의 진행을 신속히 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릇을 만들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주); 제사드리는 그릇 - 이것은 번제에 직접 쓰이는 그릇들, 즉 지성소 안에 있는 제단 그릇과 주발 및 금은 숟가락을 가리킨다(민 4:12). 이
그릇들은 성전 업무에 쓰이는그릇, 제사장들이 쓰는 다른 그릇들이나 잔과 구별된다(출 25:29). 한편 본래의 제사드리는 그릇들은 아달랴에 의해
바알 숭배에 사용됨으로 더럽혀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이렇게 새롭게 제사에 쓰일 그릇들을 만듦으로써 여호와께 대한 예배 업무를완전히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본절 끝부분에 '항상 번제를 드렸다'는 기록은 바로 이러한 완전한 제사 회복을 의미한다.
성 경: [대하24:15]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여호야다의 죽음]
(주); 여호야다가...죽을 때에 일백 삼십세라 - 비평학자들은 여호야다의 나이 130세에 대해 의문점을 시사한다(Myers, Curtis). 그러나 이 장수는
축복의 표지(Williamson)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여호야다를 통해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그를 오랫 동안 살게 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 경: [대하24:16]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여호야다의 죽음]
(주); 무리가 다윗 성 열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 여호야다는 왕이 아닌 자로서 유일하게 열왕의 묘실에 안치되었다. 아마 그가 요아스의
목숨을 구하여 다윗 왕권을 잇게 하고 성전을 정결케 하며 여호와 숭배를 회복하였기 때문에 이런 특별한 영예가 그에게 주어졌던 것 같다. 그리고
당시 여호야다의 위치가 왕에 버금가는 위치였고 왕의 외척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대우를 하였을 것이다. 또 130세나 되는 그의 많은 나이도 존경의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성 경: [대하24:17]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요아스의 우상 숭배]
(주);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 여호야다의 죽음은 요아스의 통치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되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사는 날 동안에는 정직히 행하였다(2절). 또한 여호야다가 사는 모든 날에는 여호와의 전에서 항상 번제가 드려졌다(14절). 그러나 이제 여호야다가 죽자, 유다 방백들이 요아스를 우상 숭배에로 유혹하였다.
(주); 유다 방백들이 와서 - 이들은 그동안 여호야다로 인하여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할 수 없었던 파당(a Party)이었을 것이다(Curtis).
그들은 아달랴 생존시 바알을 숭배하던 자로서 바알 숭배를 회복하려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파당이 집권 세력으로 부상(浮上)하기
위하여 '우상 숭배'를 주장한 것은 그것이 당시 국제정세에 대처하는 데 보다 용이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대하24:18]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요아스의 우상 숭배]
(주);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 고로 - 아세라 목상에 대해서는 14:3의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여기서 우상이란 아세라 목상과 깊은 연관이
있는 주상들(14:3)을 가리키는 듯하다(Curtis).
성 경: [대하24:19]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요아스의 우상 숭배]
(주); 선지자들 - 이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를 '스가랴'(Barker), 또는 '요엘'(Zockler)로 추정하나 단정키는 어렵다.
(주); 경계하나 듣지 아니하니라 - 여호와께서는 종종 유다의 왕들과 백성들의 실수와 죄악을 경계하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보내시는데 이것은 자기
백성들을 향한 자비임과 동시에 자신들의 죄악을 핑계치 못하게 하는 저주가 된다.
성 경: [대하24:20]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스가랴의 책망과 죽음]
(주);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 학자들은 마 23:35에 언급된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를 본절의 스가랴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한다(Barker, Zockler). 그렇다면 스가랴는 여호야다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일 가능성이 크며 이는 여호야다가 나이가 많았다는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주); 감동시키시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브솨'(*)는 '옷 입히다'라는 뜻의 동사 '라바쉬'(*)의 완료형 3인칭 여성 단수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하나님의신이 스가랴를 옷 입히셨다'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성령에 감동된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스가랴가 온전히 성령에 감싸여 성령의 도구가 되었다는 뜻을 나타낸다(대상 12:18 주석 참조).
(주);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 스가랴가 백성들에게 설교할 때 서 있었던 위치는 백성들보다 높은 장소였던 것 같다. 백성들은 바깥 뜰에 있었고 제사장인 그는 안뜰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21절) 안뜰은 바깥 뜰보다 높아서 백성들이 잘 바라볼 수 있었다.
(주);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 이는 스스로 축복의 길을 버리고 저주의 길을 가고 있음을 가리킨다. 한편, 스가랴가 예언할 이 때에 이미
'전쟁의 소문들'이 횡행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Barker).
성 경: [대하24:21]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스가랴의 책망과 죽음]
(주); 전(殿) 뜰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 - 요아스는 무리의 꾀임에 빠져 의로운 스가랴를 돌로 처죽이도록 명하였다. 모세의 법에 의하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였거나(레24:16), 몰렉에게 자녀를 바쳤거나(레 20:2), 아들이 아비에게 완악하고 패역하였거나(신 21:20,21), 간음을 하였을 경우에
이런 형벌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스가랴는 이런 종류의 죄를 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배교의 길을 걷고 있는 요아스와 대립된다는
이유로 처형된 것이다. 언약의 나라에서는 왕권이 최종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권위가 최종적이다.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왕권은 그 자체가
육적이요, 세상적이요, 이방적이다. 요아스는 언약의 나라의 왕으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유다를 다스려야한다는 본연의 자세를 완전히 상실한
자였다.
성 경: [대하24:22]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스가랴의 책망과 죽음]
(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 '은혜'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이며 여기서는 세속적 의미의 구출(Williamson), 즉 목숨을 구출받은 사실(22:10-12)을 뜻한다.
(주);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 여기서 '감찰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다라쉬'(*)는 죄를 찾아 응징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혹자는 선지자인 스가랴가 어떻게 복수와 저주의 기도를 할 수 있는가 하고 의구심을 갖는다. 특히 스데반의 기도(행 7:60)나 십자가 상의
예수님의 기도(눅 23:34)와 비교해 볼 때 이런스가랴의 기도가 매우 부당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요아스 왕과 스가랴 사이에
올바른 공의의 판단을 구하는 기도이며, 백성들에게 공의가 가리워지지 아니하고 명백히 나타나기를 요구한 기도로 판단된다(대상 28:9;시 130:3;잠
16:2;렘11:20).
성 경: [대하24:23]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아람의 침략과 요아스의 죽음]
(주); 일 주년 후에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리트쿠파트 핫솨나'(*)이다. 이것은 '그 해 마지막에'(KJV, RSV), '그 해가 바뀔 무렵에'(NIV,
VEB,공동번역)등으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한글 개역이 '일 주년 후에'로 번역한 것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일 주년 후란 만 1년이 지난 시점을
말하기 때문이다.
성 경: [대하24:24]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아람의 침략과 요아스의 죽음]
(주); 심히 큰 군대를 그 손에 붙이셨으니 - 침략한 아람 군대는 적은 무리였고 유다는 '심히 큰 군대'였음에도 여호와께서 이 유다 군대를 아람
군대에 붙이시므로 유다는 패배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이 여호와께 속해 있음을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다(20:15).
성 경: [대하24:25]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아람의 침략과 요아스의 죽음]
(주); 모반하여 그 침상에서 쳐죽인지라 - 요아스가 아람 군대의 침략으로 큰 부상을 입자, 그 신복들은 이를 호기(好機)로 삼아 침상에 누워있는 그를 살해하였다. 그들의 모반의 명분은 스가랴의 피를 갚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명목은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25:3,4).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원수 갚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며 정당한 사법적 절차를 걸친 형집행이 수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요아스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주); 열왕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하였더라 - 이 사실은 요아스의 통치에 대한 유다 백성들의 역사적 평가가 어떠했으며 역대기 저자의 평가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성 경: [대하24:26]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아람의 침략과 요아스의 죽음]
(주); 시므앗의 아들 사밧 - 왕하 12:21에는 사밧이 '요사갈'로 기록되어 있다.
(주); 시므릿의 아들 여호사밧 - 병행 구절에서 여호사밧은 '소멜'의 아들로 나타난다. 소멜은 시므릿의 아버지요 시므릿은 여호사밧의 어머니일
가능성이 있다(Payne). 그렇다면 여호사밧은 소멜의 외손이 되는 것이다.
성 경: [대하24:27]
주제1: [요아스의 선정(善政)과 타락]
주제2: [아람의 침략과 요아스의 죽음]
(주); 요아스의 중대한 경책(警責)을 받은 것 -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19,20절의 예언으로 생각하고 있고(Payne), 또 다른 사람들은 아람 왕
하사엘에게 바친 조공과 뇌물에 대한 경책(왕하 12:18)이라고 생각한다(Zockler). 열왕기 주석의 왕하 12:19에는 '유다 왕 역대지략'이라고 되어
있다. '주석'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드라쉬'(*)는 '보다 기초적인 왕궁 연대기에 대한 해석'(Payne)을 뜻한다.
성 경: [대하25:1]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초기 행적]
(주); 이십 구 년을 치리하니라 - 아마샤는 유다의 제9대 왕으로서 B.C. 796-767년까지 다스렸다.
(주); 그 모친의 이름은 여호앗단이라 - 여호앗단은 여호야다가 요아스를 위해서 선택해준 두 명의 아내 중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24:3).
그녀가 예루살렘 사람이라는 사실은 여호야다가 요아스의 아내를 주의깊게 선택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Barker).
성 경: [대하25:2]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초기 행적]
아마샤의 통치에 대한 총평이다. 그의 통치 성격은 병행 구절인 왕하 14:3,4에 더 상세히 나타난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다윗 왕의 훌륭한 통치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의 통치는 부왕(父王) 요아스의 통치와 비슷하였다. 그 역시 산당을 제하지 않아 백성들이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였다.
(주);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 - 역대기 저자가 아마샤의 통치 후반부를 한마디로 평가한 표현이다. 그는 이런 평가를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그 자료를 제시하였다. 즉, 아마샤는 에돔 정벌시 세일 자손의 우상을 가져 왔고 그것을 숭배하였다(14절). 또한 그는 선지자의 권고도 듣지
아니하고 에돔 신들을 의지하였다(20절).
성 경: [대하25:3]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초기 행적]
(주); 그 나라가 굳게 서매 - 나라가 굳게 섰다는 사실을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모반(謨叛) 세력(24:25)의 약화와 아마샤의 왕권 강화를 들 수 있다. 요아스를 죽인 신복들의 추종 세력과 왕위를 새로 이은 아마샤의 추종 세력 사이에는 정치적 갈등, 힘의 갈등이 존속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아마샤가 반대 세력을 처단할 수 있을 정도로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2)유다가 등을 돌린 에돔을 정벌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과 군사력(5,6절)을 갖춘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3)아마샤의 통치 성격이 여호와의 말씀에 근거하여 행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반자들의 재판과 용병 10만을 돌려 보낸 사실(10절)에서 엿볼 수 있다.
(주); 그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 다윗도 기름부음 받은 사울 왕을 해(害)하였다고 말한 아말렉 소년을 처형하였다(삼하 1:5-15).
성 경: [대하25:4]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초기 행적]
(주); 저희 자녀는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 동양에서는 모반자의 일가 전체까지 죽여 후환을 없애는 예가 다반사였다. 그러나 아마샤는 부왕을
살해한 자들만 처형하였다. 그는 복수심에 불타는 감정을 억누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법적 처리를 하였다.그는 '모세 율법책에 기록한
대로' 곧, 신 24:16에 근거하여 형을 집행하였다. 신명기의 이러한 법 정신, 즉 범법(犯法) 행위에 대한 사법적 형집행 원리에 있어서 범법자만
처벌한다는 정신은 고등한 것이다. 이러한 법 정신은 반(反)국가 단체에 가담, 협력하였을 경우 그 자녀와 친척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우리의
형법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성 경: [대하25:5]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에돔 정복]
(주);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우되 - 이러한 군대 조직에 대해서는 민 1:2-2:34을 참조하라. 아마샤는 지금까지 국내의 혼란으로 약화되었던 군대를 다시 강화하고 조직화하였다.
(주); 삼십 만을 얻고 - 이는 아사의 군대 58만(14:8)과 여호사밧의 군대 116만(17:14-19)에 비해 오히려 작은 수이다. 이러한 병력의 감축으로
인하여 아마샤는 북이스라엘로부터 10만의 용병을 사들였다.
성 경: [대하25:6]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에돔 정복]
(주); 은 일백 달란트 - 1달란트는 약 34kg이므로 이것은 약 3.4톤에 해당되는 엄청난 양이다.
성 경: [대하25:7]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에돔 정복]
(주); 어떤 하나님의 사람 - '하나님의 사람'이란 표현은 구약에서 선지자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칭호이다(Curtis). 모세(30:16;신 33:1;수 14:6;대상 23:14;스 3:2), 다윗(8:14;느 12:24,36)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 표현하기도 했으며, 삼손의 부친 마노아의 부인은 천사를 가리켜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삿 13:6,8). 그러나 위의 경우를 제외한 일반적인 용법에서는 선지자를 지칭한다(삼상 2:27;9:6;왕상12:22;13:1,26;17:18,24;20:28;왕하 1:9등).
(주); 이스라엘 군대로 왕과 함께 가게 마옵소서 - 하나님의 사람은 아마샤에게 이스라엘의 용병을 에돔 정벌에 쓰지 말 것을 권고한다. 그는 그 이유로서 두 가지를 제시하였다. 본절에 그 첫 번째 이유가 나오는데,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다 왕 아비야가 북왕국 여로보암과 더불어 싸울때 밝혀진 것으로(13:4-12) 유다가 하나님의 언약대로 다윗 왕통을 잇고 있으며 여호와를 예배하는 나라이지만, 북이스라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과 함께하시지 않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주); 온 에브라임 자손 - 이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에브라임 지파는 북이스라엘의 최고 지파이기도 하고 그 영토도 북왕국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종종 북이스라엘을 가리켜 '에브라임'이라 호칭하였다(사9:9;17:3;28:3;호 14:8).
성 경: [대하25:8]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에돔 정복]
하나님의 사람은 여기서 용병을 쓰지 않아야 할 두 번째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유다 군대가 용병 대신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용병을 쓰는 것은 아마샤에게 믿음이 없음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들보다 우월하심에도 불구하고 아마샤 왕을 대적 앞에 엎드러지게 하실 것이다.
(주); 왕이 만일 가시거든 힘써 싸우소서...엎드러지게 하시리이다 - 이는 '만일 왕이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전쟁에 나간다면 아무리 용감하게
싸운다해도 하나님께서는 왕을 원수 앞에서 패하게 하실 것입니다'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카일(Keil)은 전통적인 이러한 해석에 반대한다.
그는 주절(主節)에서 동사 앞에 부정사 '로'(*)를 삽입하여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면 그것은 '왕이 만일 가시거든 힘써 싸우소서
하나님이 왕을 대적 앞에 엎드러지게 아니 하시리이다'라는 의미가 된다. 즉, 아마샤가 이스라엘과 함께 나가지 아니하고 힘써 싸운다면 패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한글 개역 성경과 많은 역본(KJV, RSV, NIV, NEB, JB, 공동번역)들은 이러한 카일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어떤 입장을 취한다 할지라도 그 근본 취지는 변치 아니하며 아마샤의 믿음을 촉구하는 데 모아지고 있다.
성 경: [대하25:9]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에돔 정복]
(주); 어찌 할꼬 - 아마샤는 선지자의 충고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눈앞의 손실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것인가 하는 일대 선택의 기로에
처하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더 풍성히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어 눈앞의 손실을 기꺼이 감수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성 경: [대하25:10]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에돔 정복]
(주); 심히 노하여 - 이들이 분노한 것은 단순히 감정상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용병들은 비록 삯을 받고 고용되긴 했지만 그들이 전쟁에
참여할 때는 많은 전리품 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얻지 못한 데 대하여 분노한 것이다(Curtis). 그래서 그들은 유다 성읍을
노략하였다(13절).
성 경: [대하25:11]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에돔 정복]
(주); 담력을 내어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트하자크'(*)는 '강하게 되다'라는 뜻의 동사 '하자크'(*)의 히트파엘형(Hithpael:강조형 재귀)으로서 '스스로 강하게 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외형적인 군비(軍備)보강 등에 의하여 강해진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용기를 얻은 것을 가리킨다.
(주); 염곡 -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하 14:7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25:12]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에돔 정복]
(주); 바위 꼭대기 - 왕하 14:7의 '셀라'는 '바위'라는 뜻의 히브리어 '셀라'(*)를 그대로 음역한 것이다. '셀라'는 에돔의 수도인 듯하며 오늘날의
'페트라'(Petra)로 추정된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하 14:7 주석을 참조하라. 이 지역은 곧에돔 사람들에 의해 재탈환되었다(28:17;사
16:1,2;암 1:11).
성 경: [대하25:13]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에돔 정복]
(주); 사마리아에서부터 벧호론까지 - 아마샤가 돌려 보낸 용병들은 사마리아까지 되돌아갔으나 곧장 다시 돌이켜 사마리아와 벧호론 사이에 있는
유다 성읍들을 약탈하고 유다 사람 3천을 죽였다. 이때 이들은 아마샤가 자신들을 단순히 되돌려 보낸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이같은 약탈 행위를
저지른 것 같이 생각된다. 한편 벧호론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상 7:24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25:14]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우상 숭배]
(주); 세일 자손의 우상들 - 아마샤는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에돔 사람(세일 자손)의 우상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에돔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이 무엇인지 성경에는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 유다 왕 아마샤가 패배시킨
나라의 신들을 섬기기 위해 그 우상들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는 그 우상들의 화려하고 웅장한 외형에 현혹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승리에 도취되어 여호와를 잊는 만심(慢心)에 빠진 것이 분명하다.
성 경: [대하25:15]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우상 숭배]
(주); 저 백성의 신들이...구원하지 못하였거늘 - 세일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엘로헤)이 다신(多神)임은 (1)복수형 명사에서 알 수 있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 엘로힘)도 복수로 나타내어 그 광대함이나 웅장함을 표현하므로 명확하지는 않다. (2)그런데 결정적으로 그 명사의
서술 동사인 '구원하다'(*, 히찔루)가 3인칭 복수형인 것을 보면, 분명히 '신들'이 광대함이나 웅장함을 나타내는 복수형이 아니고, 숫자적으로
복수인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아마샤는 다신교 배경에서 온 우상들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섬기려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를 면치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에 대하여 선지자는 오직 여호와만 구원자이시며, 그 신들은 자기 백성인 세일 사람들을 아마샤의 손에서조차 구원하지 못한
무능한 신임을 지적하면서 아마샤의 어리석음을 꼬집었다.
성 경: [대하25:16]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우상 숭배]
(주); 우리가 너로 왕의 모사(謨士)를 삼았느냐 - 여기서 '우리'는 왕과 그 신하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구문의 의미는 '어찌하여 네가 우리의
일을 간섭하느냐'이다. 아마샤의 이 반박으로 볼 때 그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승리로 인하여
매우 교만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성 경: [대하25:17]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이스라엘에 패한 아마샤]
(주); 상의하고 - 이는 '모사를 구하고', '충고를 받아들여'라는 뜻으로서 아마샤가 선지자의 경고를 거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다른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였음을 가리킨다.
(주); 오라 서로 대면하자 - 이는 아마샤가 북이스라엘에게 보내는 정식 선전 포고문이다. 아마샤는 북이스라엘 용병들의 약탈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대가를 요구하기 위하여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상대를 위축시키려 했을 것이다. 이때 아마샤가 북이스라엘왕에게 요구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혹자는 18절에 나오는 우화(寓話)를 근거로 결혼 동맹을 요구하였다고 추측한다(Curtis). 그러나 18절의 우화가 실제적인
사실을 반영하는 지는 분명치 않다. 오히려 요아스의 무분별한 행동을 지적하기 위한 풍자적인 표현법으로 보인다.
성 경: [대하25:18]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이스라엘에 패한 아마샤]
본절의 우화는 아마샤를 모욕하기 위한 것으로서, 요담의 비유와 유사하다(삿 9:7이하). 여기서 풍자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나무들'을
의인화시켰는데 가시나무는 유다를, 백향목은 이스라엘을 지칭하여 요아스는 결코 아마샤가 이스라엘과 대등한 관계로 대면할 수 없다고 비꼬아
말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하 14:9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25:19]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이스라엘에 패한 아마샤]
(주); 어찌하여 화를 자취(自取)하여 - 이는 24:20의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라는 말과 의미가 동일하다. 이는 순리에 어긋나게 교만하여
욕심을 부리는 자들은 결국 파멸할 수 밖에 없다는 뜻으로 요아스가 아마샤를 따끔하게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대하25:20]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이스라엘에 패한 아마샤]
(주);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 이 구절은 역대기 저자가 14-16절과 연관지어 언급한 해석으로 보인다. 교만하여져서 마음이 굳어진
아마샤는 결국 선지자의 예언(16절)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마샤에게 강퍅한 마음을 넣어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버려 두셨다는 뜻이다. 즉, 아마샤의 교만과 강퍅한 마음을 그대로 방치해 두신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완악해진 그는 선지자의
예언(16절)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성 경: [대하25:21]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이스라엘에 패한 아마샤]
(주); 유다의 벧세메스 - 요아스가 유다의 중심부를 치기에 가장 유리한 고지이면서 유다땅이었던 벧세메스에 올라왔다는 것은 이 전쟁이 북왕국에
의해 먼저 시작된 것임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래서 커티스(Curtis)는, 왕하 14:11은 북이스라엘이 먼저 전투를 시작한 것임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즉,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선전 포고문을 받은 뒤 일단 유다 왕 아마샤에게 경고하고, 아마샤가 자긍하고 있는 틈을 타 기습적으로 공격하였을
것이다. 한편, 벧세메스의 위치에 대해서는 왕하 14:1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25:22]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이스라엘에 패한 아마샤]
(주);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 이는 모든 병사들이 놀라 자기 집으로 도망간 것을 가리킨다(10:16;왕상 8:66). 이처럼 아마샤의 군대는
전의(戰意)를 상실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성 경: [대하25:23]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이스라엘에 패한 아마샤]
(주);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 '에브라임 문'은 '베냐민 문'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데 예루살렘 성읍 북쪽에서 에브라임 땅으로
통하는 통로였다. 그리고 '성모퉁이 문'은 옛 성벽의 북서쪽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다메섹으로 통했다. 이처럼 북이스라엘의 군대는 북쪽으로
향해 있는 모든 벽을 헐어 버리고, 유다 왕 아마샤를 포로로 잡았다. 즉, 유다는 이스라엘의 세력권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기타 성문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병행 구절인 왕하 14:13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25:24]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이스라엘에 패한 아마샤]
(주); 오벧에돔의 지키는 모든 금은 -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의 전(殿) 안에 있는 모든 금은과 기명들을 '오벧에돔'이 지키던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왕하 14:14에는 그런 표현이 없다. 한편 대상 26:15에 따르면, '오벧에돔'의 가문은 레위 지파로서 성전의 곳간을 지키는 책임을 맡았다.
(주);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지고 -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아마샤를 잡아갔다가 다시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볼모로 잡아간 것
같다(Josephus). 따라서 볼모로 잡혀간 사람들은 왕의 자녀들이거나 왕족일 가능성이 크다(Barker). 이와같이 이스라엘이 유다 사람들을 볼모로
잡아간 것은 유다가 다시는 이스라엘에 대해 대항하지 못하게 하고, 또 이스라엘이 유다의 내정(內政)을 간섭하겠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성 경: [대하25:25]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최후]
(주); 아마샤가 십 오 년을 생존하였더라 - 이스라엘에게 패한 후유증으로, 아마샤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죽은 이후에도 그 세력은 회복되지 못하였고, 온갖 음모의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이 15년의 기간은 아마 그에게있어 형벌과 같았을 것이다.
성 경: [대하25:26]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최후]
(주);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 - 왕하 14:18에는 '유다 왕 역대지략'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주요하게 사용된 역사 자료들로
보이며(O.Zockler, Curtis), 이 두 자료는 서로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Curtis).
성 경: [대하25:27]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최후]
(주); 아마샤가 돌이켜 여호와를 버린 후로부터 - 이것은 무리들이 아마샤를 대항하여 모반을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모반이 곧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역대기 기자는 말한다.
(주); 무리가 저를 모반한 고로 - 여기서 '무리'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 요아스 통치 말기부터 아마샤의 통치 때까지 유다를 집권한 방백들에 대항하여 반감을 품고 있던 무리들일 것으로 추측된다. 즉, 여호야다가 죽은 이후 그 세력을 상실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24:15-19)과 의로운 백성들이 바로 그 무리들인데 이들은 유다를 '제사장의 나라'로 만들기를 원했다. 그래서 일찍이 16세로 부친과 함께 통치를 시작한 어린 웃시야를 완전한 통치자로 옹립시키고자 했을 것이다(Curtis). 그리고 아마샤가 이렇게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은 교만해져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대기 기자는 이것을 '아마샤가 여호와를 버린' 시기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주);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 라기스는 예루살렘의 남서쪽 약 40km지점에 위치한 요새로서 여로보암 때로부터 애굽인을 막는 중요한 기지로
사용되어 왔다(11:9). 한편 아마샤가 이곳으로 피신한 것은 이미 위태해진 왕권을 회복시키려는 시도 때문이었거나(Payne), 아니면 다급한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객에게 살해됨으로써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성 경: [대하25:28]
주제1: [아마샤의 선정(善政)과 악정(惡政)]
주제2: [아마샤의 최후]
(주); 유다 성읍에 장사하였더라 - 병행 구절인 왕하 14:20에는 '다윗성'이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역대기 필사자의 실수인 것으로
추측된다(Barker, Keil, Curtis). 한편 앗수르 왕 에살핫돈(Asarhaddon)의 비문에는 유다 왕 므낫세가 '유다 성읍의 왕'이라고 표기되어
있다(Curtis). 여기서 우리는 '유다 성읍'이 바로 남유다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후대에는 '다윗성'이라는 이름 대신 '유다 성읍'이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Payne).
성 경: [대하26:1]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형통]
(주); 유다 온 백성이...왕을 삼으니 - 본절에서 '유다 온 백성'이 왕위 계승 사건의 주체로 등장한 것이 좀 어색하게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유다 온 백성'은 아마샤에 대하여 모반(謨叛)을 일으킨 무리들을 지칭하며(25:27), 역대기 기자는 웃시야의 즉위가 모든 백성의 환호를 받았음을 시사해 주기 위하여 이같이 기록하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왕위 계승 문제를 백성들이 결정짓는 것은 아니었지만, 역대기에는 직접적으로(23장), 또는 간접적으로 백성들이 왕위 계승에 관여하였음이 기록되어 있고 백성들이왕위 계승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태도들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22:1;23:21;왕하11:20).
(주); 웃시야 - 열왕기에서는 주로 '아사랴'(왕하 14:21)로 쓰고 있다. 이처럼 두 개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통상 웃시야는 공식적인 왕명으로, '아사랴'는 본명으로 쓰였다고 생각한다(Keil, Barker). 솔로몬의 경우에도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공식적인
왕명이 었으며, 또 다른 이름으로는 '여디디야'라고 불리웠다(삼하 12:24,25).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하 14:2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26:2]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형통]
(주); 엘롯을 건축하여 유다에 돌렸더라 - '엘랏'(왕하 14:22)이라고도 불리우는 엘롯은 다윗 시대 이래로 유다에 복속된 에돔 땅이었다(8:17).
이는 여호람 때에 에돔의 반란으로 잃었다가(21:8-10), 웃시야의 부친 아마샤에 의해 다시 찾은 땅이다(25:14). 그리고 유다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로 이 땅은 거의 방치 상태에 있다가 웃시야에 의해 비로소 건축되고 유다 성읍의 일부가 된 것이다.
성 경: [대하26:3]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형통]
(주); 예루살렘에서 오십 이 년을 치리하니라 - 웃시야가 통치한 기간은 B.C.791년부터 739년까지이다(Payne, Wood). 그의 부친 아마샤가 24년간 웃시야와 함께 통치했고, 웃시야는 그의 아들과 함께 12년을 통치했다(Wood). 따라서, 웃시야가 단독으로 통치했던 기간은 16년 정도가 된다.
(주); 여골리아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콜르야'(*)는 케레(Qere:읽히는 것)로서, 많은 사본들과 왕하 15:2에서도 동일하다.
케티브(Ketib:쓰여지는 것)는 모음만 바꾸어서 '예킬르야'라고 표기한다. 그런데, 개역 성경 왕하 15:2에서의 '여골리야'와 다르게 '여골리야'로
표기된 것은 번역상의 오류인 것같다. 그리고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강하게 만드신다'이다.
성 경: [대하26:4]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형통]
(주); 정직히 행하며 - 왕하 15:4에서는 그가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山堂)은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웃시야의 실수들을 후반에 기록하여 둠으로써(16절), 웃시야가 전반적으로 선한
왕이었음을 강조하는 듯하다.
성 경: [대하26:5]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형통]
(주); 하나님의 묵시(默示)를 밝히 아는 스가랴 - 이 선지자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으며, 단지 본절을 근거로 하여 그가 웃시야 왕의
조언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을뿐이다. 한편, '묵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르오트'(*)가 어떤 자질이나 활동만을 의미한다고 킴취(Kimchi)는
언급했다. 그러나, 이는 '비르아트'(*)에 대한 철자법 실수로 보인다. 따라서, 70인역과 다른 고대 역본들은 본절을 해석할때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교훈을 주는 자 스가랴'로 해석한다(Keil).
성 경: [대하26:6]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강성]
(주); 블레셋 사람과 싸우고 - 웃시야는 여호람 때에 유다를 침공하며 예루살렘을 약탈하였던(21:16,17)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을 응징하기 위해 출전하였고, 이 전쟁에서 블레셋의 주요 성읍 가드, 야브네, 아스돗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아스돗 땅과 블레셋 땅 여러 지역에 새롭게 성읍을 건축하였는데, 이는 웃시야가 블레셋을 완전히 정복하였음을 보여준다(Keil).
(주); 가드성 - 이 성은 본래 블레셋의 주요한 다섯 성읍들 가운데 하나로(삼상 6:17), 초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대상 7:21).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30여 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기름진 평야 지대이기 때문에 르호보암 때에는 가드가 전략적으로도 중요하게 취급되었다(11:8). 하지만, 이 성의 정확한 위치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Payne).
(주); 야브네 - 성경에서는 단지 이곳에서만 언급되어 있으며, 수 15:11의 얍느엘이 동일 지명인 것으로 추측된다(Crutis). 그리고 오늘날은 '예브나'(Yebna)로 알려져 있으며 욥바의 남쪽 19.2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헬라어 지명은 '얌니아'(Jamnia)로 알려져있는데 유대 역사상 마카비 시대 이후에 부각되어 나타난다(마카비상 4:15). 또한 예루살렘 몰락후(A.D. 70년) 산헤드린이 이곳으로 옮겨옴으로써 유대인의 종교적 민족적 중심지가 되었다(Jewish Encyclopedia).
(주); 아스돗성 - 이는 욥바와 가사 중간에 있는 유명한 블레셋 성읍으로 오늘날에는 '에스돗'(Esdud)으로 알려져 있다. 해안에서 4.8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해안 도시로 (Curtis) 개역 성경의 행 8:40에는 '아소도'로 표기되어 있다.
(주); 아스돗 땅과 블레셋 사람 가운데 성읍들을 건축하매 - 웃시야는 이 성읍들을 정복한 후에 이 지역을 다스리고 또 더 나아가 이 지역에
성읍들을 건축하여 전초 기지로 삼았는데, 이는 블레셋의 다른 지역에서 애굽으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고, 그 통로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Barker).
성 경: [대하26:7]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강성]
(주); 구르바알 - 이곳의 위치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며 혹자는 이 문자의 판독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Curtis). 아람어 성경에는 이 지명이 '게랄'(Gerar)로 번역되어 있고 70인역에는 에돔 족속의 수도인 '페트라'(Petra)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페트라'보다는 오히려 탈무드가 제시한 대로 '게랄'(그랄, 창20:1)이라 할 수 있다(Keil, Zockler). 한편, '구르바알'의 뜻은 '바알의 거처'인데 이곳에 바알의 신전이 있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인 것으로 추측된다(Barker).
(주); 마온 사람 - 이는 사해의 남동쪽, 에돔의 동쪽 변방에 거주했던 사람들로서(대상4:41), 세일 산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어서 세일 산
사람과 동일시 되는 경우도 많았다(20:1).
성 경: [대하26:8]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강성]
(주); 암몬 사람이...조공(朝貢)을 바치매 - 본절과 7절의 문맥은 서로 연관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웃시야가 정복한 지역은 블레셋과 아라비아와 마온인데 조공을 바친 족속은 그와 반대편인 요단강 동편에 있는 암몬 족속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70인역에서는 암몬 대신 '마온'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것을 인정하는 학자들도 많다(Benzinger, Zockler).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본절이 그대로, '암몬'을 가리킨다는 견해를 가진 학자들도 많은데(Keil, Kittel), 그들은 웃시야가 요단강 동편에 있는 암몬 족속까지 정복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10절에 '평지'(mishor)가 나오는데 이곳은 본래 르우벤 지파의 땅으로서 이스라엘이모압과 암몬에게 빼앗긴 것을 웃시야가 다시 정복했다는 것이다. 위의 두 견해 중 '암몬'을 '마온'으로 보는 전자의 견해가 옳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1)문맥의 흐름상 '마온'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2)암몬과의 싸움은 후에 요담에 의해서 치러지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27:5).
(주);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 - 이것은 웃시야의 세력과 영향력이 얼마나 확대되었는가를 나타내 보여 준다.
성 경: [대하26:9]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강성]
본절은 웃시야가 나라를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성채의 벽과 문들에 망대를 세워 예루살렘을 더욱 요새화하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주); 성 모퉁이 문 - 이는 성벽의 북서쪽 모퉁이에 있는 문이다(25:23).
(주); 골짜기 문 - 이는 일반적으로 성의 서쪽 야파(Jaffa)문이라고 본다(Robinson,Keil). 그러나 성의 남서쪽 모퉁이 문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느 2:13;3:13;Guthe,Mitdell).
(주); 성굽이 - 이것은 '모퉁이'(corner) 또는 '모서리들'(angles)을 가리키며 의미상 성벽이 굽어져 있는 여러 곳을 가리킨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Benzinger), 여기서는 특정한 한 지역을 가리키는 듯하며, 동북쪽 모퉁이일 것으로 보인다(BDB).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느
3:19,20,25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26:10]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강성]
(주); 거친 땅에 망대를 세우고 - 여기서 '거친 땅'은 사해 서편에 있는 유다 광야를 가리키며, 망대가 세워진 곳은 목초지가 있는 곳으로 추측된다. 웃시야 왕은 국가의 주요 소득원이 되는 가축을 주위 유목민들의 강탈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망대들을 이곳에세웠는데, 이 망대는 전시(戰時)에 피난처로도 용이하게 사용되었다.
(주); 물 웅덩이를 많이 팠으니 - '물 웅덩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보로트'(*)는 '샘'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사람과 동물들을 위하여 인공적으로 만든 물저장 탱크를 가리키는 듯하다(Curtis).
(주); 평야와 평지에 육축을 많이 기름이며 - 여기서 평야(Shephelah)는 지중해 근방에 있는 저지대를 가리키며(1:15;9:27;대상 27:28) 평지(mishor)는 아르논과 요단 동편의 헤스논 사이에 있는 평평한 지역을 가리킨다(신 3:10;4:43;수 13:9;렘 48:8,21). 그런데 이 평지는 8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암몬 족속의 정복을 통해서 얻은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그러나 웃시야가 암몬 족속이 차지한 이 땅의 많은 부분을 빼앗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본절의 '평지'가 요단 동편 땅 만을 지칭하는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Curtis).
(주); 여러 산과 좋은 밭 - 여기서 '좋은 밭'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카르멜'(*)은 고유 명사로 '갈멜 산'을 가리키기도 하고(수 12:22;암 1:2),
보통 명사로 '비옥한 땅'을 뜻하기도 하는데(사 29:17;32:15), 여기서는 '비옥한 땅'을 뜻한다(Zockler). 웃시야 왕은 산과 밭에 농사 짓기를 크게
장려하였는데, 이같이 강력한 중농 정책(重農政策)을 실시한 왕을 다윗 가계의 왕들 중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성 경: [대하26:11]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군대]
(주); 왕의 장관 하나냐의 수하에 속하여 - 이 군사를 뽑는 일은 서기관 여이엘과 영장 마아세야의 임무였으나, 이 군대의 지휘는 하나냐에게
맡겨졌다.
성 경: [대하26:12]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군대]
(주); 족장 - 유다나 이스라엘의 군대 편성은 가계별로 이루어졌으며, 한 가계의 지휘는 족장의 손에 맡겨졌다(대상 9:33).
(주); 모두 큰 용사요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기보레 하일'(*)은 '용감한 용사', '영웅'을 뜻하기도 하지만 재산이 많아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족장이 단순히 용감한 용사를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여기서는 한 가계(家系) 내(內)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Davidson, Curtis).
성 경: [대하26:13]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군대]
(주); 그 수하의 군대가 삼십만 칠천 오백명이라 - 족장의 수는 2600명이고 군대 수는 307,500명이었다. 이것은 아마샤의 군대보다 7,500명이 더
많은 수이다(25:5).
성 경: [대하26:14]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군대]
(주); 방패와 창 - 14:8;17:17;대상 5:18을 참조하라.
(주); 투구 - 겔 27:10;38:5 등에서 창, 방패와 함께 언급되어진다(삼상 17:5;사 59:17;렘 46:4).
(주); 갑옷 - 18:33과 삼상 17:5,38;왕상 22:34;느 4:16등을 참조하라.
(주); 활과 물매 돌 - 주로 베냐민 사람들이 사용하던 무기였으며 이들은 간편한 차림으로 전쟁에 참여했다(14:8;삿 20:16;대상 12:2).
성 경: [대하26:15]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군대]
(주); 공교한 공장으로 기계를 창작(創作)하여 - 이는 분명히 새로운 형태의 무기가 기술자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가리킨다. 본절의 설명에 의하면, 이 무기는 망대나 성곽 위에 세워진 일종의 투석기(投石機)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이전에 이러한 무기가 사용된 적이 없으며 성경에도 그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당시 애굽이나 앗수르에서는 많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비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혹자는 이 무기가 유다에 의해 창작된 것이 아니라 앗수르의 무기를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문이 보여주는 대로, 분명히 유다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무기였을 것이다. 벤징거(Benzinger)는 이 무기들이 주로 방어용으로 쓰였을 것이라고 한다.
(주);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더라 - 이렇게 웃시야가 군대를 강하게 하고 군사 시설을 잘 정비함으로 인하여 이후 유다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예로서 (1)히스기야가 블레셋을 크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웃시야의 강력한 군사 정책의 결과였다. (2)앗수르가 예루살렘을
공격해 왔을 때, 히스기야가 잘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웃시야에 의해 만들어진 강력한 방어 시설 덕택이었다. (3)이사야의 예언들을 살펴보면,
아하스 당시에 유다가 상당히 번영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것 또한 웃시야의 영향이다(Curtis). 한편, 역대기 기자는 웃시야가 이루어 놓은
이러한 업적의 결과들이 여호와의 '기이한 도우심'에 의한 것이라는 해석을 전제로 덧붙이고 있다.
성 경: [대하26:16]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교만과 문둥병]
(주); 저가 강성하여지매 - 본절을 유도하는 접속사 '우'(*)는 전(前)절과 역접 관계로 '그러나'라고 해석할 수 있다(KJV, NIV, RSV, NEB, JB). 이것은 지금까지의 웃시야의 선정과는 반대로 이제부터 교만하여 여호와께 불순종하는 삶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러한 교만한 삶은 군사적, 경제적 권력을 얻게 되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그는 그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종교까지 자신의 권력에 통합시키려 했던 것 같다.
(주); 향단(香壇)에 분향하려 한지라 - 이러한 종교적 예배 행위는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었고, 아론의 자손들, 즉 제사장들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출 30:1-10;민16:40;18: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시야가 향단에 분향하려 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1)왕직과
제사장직을 겸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당시 애굽이나 근동의 왕들은 왕직과 대제사장직을 겸하고 있었다. 웃시야가 보기에는 그것이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확고하게 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웃시야는 두 직분을 겸함으로써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를 이방의 나라와
같이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2)다윗과 솔로몬과 같은 대왕이 되려는 야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그는 이 두 왕들처럼 대제사장 직분까지도
행함으로써 스스로 위대한 왕이 되고자 했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그는 다윗과 솔로몬의 대제사장직 사역을 잘못 이해하였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윗과 솔로몬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특별한 사역에 따라성전 봉헌 때의 봉헌 기도, 제사장의 반차 제정, 희생제 등과 같은 일들을
행하였을 뿐 분향이나 지성소의 출입과 같은 제사장들의 고유한 업무를 침해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해도 역시 그의 교만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대하26:17]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교만과 문둥병]
(주); 제사장 아사랴 - 아사랴에 관해서는 본문 이외에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한편 그가 제사장이었는지 대제사장이었는지는 분명히 단정지을 수 없으나, 20절에 '대제사장'이란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호야다의 경우와 같이(24:6 주석 참조) 그의 역할상 '대제사장'이라는 존칭이 주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Zockler). 한편 카일(Keil)은그가 대상 6:36에 언급된 아사랴와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하나, 그는 다윗 시대의 제사장 헤만(대상 6:33)의 조상이므로 결코 동일 인물이 될 수 없다.
(주); 여호와의 제사장 용맹한 자 팔십 인 - 제사장 아사랴가 이끌고 온 제사장 80인은 모두 용맹한 자라고 했는데, 여기서 '용맹한'(*, 하일)의
의미는 제사장 가운데 '신실한 자', '세력있는 자', '유지'(有志)를 가리킨다. 따라서 아사랴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대표자들을 대동하여 웃시야
왕의 월권(越權) 행위를 막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성 경: [대하26:18]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교만과 문둥병]
(주); 웃시야 왕을 막아 - 여기서 '막아'에 해당하는 히브리 본문의 원뜻은 '웃시야의 얼굴을 대면하고 섰다'이다. 즉, 이것은 단순한 경고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저지하였음을 가리킨다.
(주); 여호와께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 이는 단순히 웃시야의 명예와 영광이 더 이상 하나님에 의해 증대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Zockler)가
아니라, 웃시야의 모든 행위가 여호와에게서 옳다 인정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 경: [대하26:19]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교만과 문둥병]
(주); 저가 제사장에게 노할 때에...문둥병이 발한지라 - 제사장들이 율법의 규례를 상기시키면서 죄악을 지적하였으나, 웃시야는 도리어
분노하면서 분향하는 일을 계속하려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문둥병에 결리고 말았다. 이처럼 제사장의 권위에 도전하고 또한 성전을
모독하다가 비침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들로는 나답과 아비후(출6:23;레 10:1,2), 고라 자손들(민 16:1-3,28-35), 웃사(삼하 6:6,7)등이 있다.
성 경: [대하26:20]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교만과 문둥병]
(주); 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 문둥병은 웃시야를 전에서 몰아낼 가장 확실한 구실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율법에 따르면 문둥병자는 항상 성
밖으로 격리 수용시켜서, 성전이든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든지 일체 접근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다(레13:46).
성 경: [대하26:21]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남은 사적]
(주); 별궁에 홀로 거하였으므로 - 문둥병자가 된 웃시야는 죽는 날까지 왕의 직분을 행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따로 특별히 마련된 별궁에
격리 수용되어 있었다. 여기서 '별궁'(*, 베트 하하프쉬트)에 해당하는 부분의 자세한 내용은 병행 구절인 왕하 15:5의 주석을 참조하라. 그가
이처럼 별궁에 격리 수용된 것은 더이상 여호와의 전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성 경: [대하26:22]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남은 사적]
(주);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 - 선지자 이사야(사 1:1;6:1)는 주로 히스기야 왕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웃시야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주로 전승이나 자료를 통해 썼을 것이다(Barker). 혹자는 이 기록이 이사야의 독립적인 한 작품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의 한 부분으로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Bertheau, Zockler).
성 경: [대하26:23]
주제1: [웃시야의 강성(强盛)과 교만]
주제2: [웃시야의 남은 사적]
(주); 저는 문둥이라 하여...장사하니라 - 병행 구절인 왕하 15:7에는 단순히 그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장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본절에서는 보다 상세하게 '열왕의 묘실에 접한 땅 곧 그 열조의 곁에' 장사되었다고 기록하고있다. 이것은 아마 그가
문둥병자였기 때문에 왕의 가족 묘실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따로 그 묘실 곁에 만든 묘실에 장사되었음을 가리킬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장사는
이전의 여호람(21:20)이나 요아스(24:25)의 경우처럼 불명예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문둥이였기 때문에 다른 열왕들과는 달리 '그 곁에' 묻히게
되었다.
성 경: [대하27:1]
주제1: [요담의 통치]
주제2: [요담의 치세]
(주); 나이 이십 오 세라 - 그가 약 10년 정도를 그의 부친 웃시야와 함께 통치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는 35세 때부터 비로소 독자적인 통치를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 십 육 년을 치리하니라 - 여기서 16년은 웃시야가 섭정한 기간도 포함하고 있다.
(주); 여루사 - 이 이름의 히브리어 표기는 '예루솨'(*)인데 왕하 15:33에는 끝 자음이 알렙(*)이어서, '예루솨'(*)로 되어 있고(BHS), 몇몇 사본들에서는 역대기 본문과 일치한다(BHS Appartus).
(주); 사독의 딸이더라 - 이 사독이 대상 6:12에 기록된 대제사장 사독일 가능성이 있는데(Curtis), 요담의 부친 웃시야가 제사장의 역할을 하기
위해(26:16-19) 정책적으로 사독의 딸과 결혼하였을 수도 있고, 반면에 제사장들의 간섭에 의해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였을 수도 있다(24:3).
성 경: [대하27:2]
주제1: [요담의 통치]
주제2: [요담의 치세]
(주);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정직히 행하였으나 - 요담이 통치하던 기간 중 상당히 오랜 동안 웃시야가 살아 있었다. 요담의 부친 웃시야는 비록 문둥병에 걸려 별궁에 거하였지만(26:21),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Leon Wood). 따라서 요담은 웃시야의 많은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웃시야는 자신이 당한 징계로 인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을 것이고, 요담은 아버지의 모습을 접하면서 하나님께 대해 더욱 정직하게 행하였을 것이다.
(주);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 맛소라 본문(MT)에는 본 구절 앞에 '단지'(only)라는 뜻을 가진 부사, '라크'(*)가 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행하였)으나'로 번역된 이 접속사가 앞 문장과 대조를 이루게하여 요담이 웃시야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행하였지만, 예외적으로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범죄하는 일 만큼은 삼가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주); 백성은 오히려 사악(邪惡)을 행하였더라 - 병행절인 왕하 15:35에서는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산당 제사를 '사악을 행하였다'고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역대기 저자가 이에 대해 얼마나 엄격했는지 발견하게 된다.
성 경: [대하27:3]
주제1: [요담의 통치]
주제2: [요담의 건축 사업]
(주); 전 윗문 - 이 문은 성전 마당의 북편 성벽에 있는 문으로서 '베냐민의 윗문'(렘20:2)이라고도 불리워진다(Benzinger). 그리고 또 23:20에서 묘사한 것을 보면 이 문은 왕궁에서 성전 바깥 뜰로 통할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문은 아마샤 왕 때 헐린 것으로 보여진다.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와 전쟁하던 아마샤가 사로잡히고, 예루살렘 성벽이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이 헐렸는데, 이 때에 윗문도 무너졌을 것이다(25:23;왕하 14:13). 그리고 이때 무너진 성벽의 많은 부분은 요담의 부친 웃시야에 의해 거의 보수되었고(26:9), 요담도 웃시야의 건설 정책(26:9f)을 이어받아 공사를 계속하였을 것이다.
(주); 오벧성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펠'(*)의 원뜻은 언덕, 낮은 야산을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의 모리아산(3:1)
남쪽 경사지를 그렇게 불렀다(33:14;느 3:26,27;11:21). 어떤 학자들은 이 성을 다윗성과 동일시하지만(G.A.Smith), 오벧성은 다윗성과는 분명히
다르며, 다윗성이 있는 언덕의 북동쪽 지점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후기 유다 왕들이 요새화하려 했던 곳이다.
성 경: [대하27:4]
주제1: [요담의 통치]
주제2: [요담의 건축 사업]
(주); 유다 산중에 - 여기서 '산'은 평지 또는 저지대를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서 요새화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에 성읍들은 산지나 산지의 숲 속에 세워졌다(사 2:15;호 8:14).
(주); 영채(營寨)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라니요트'(*)는 '성'(castle) 또는 '궁'(palace)을 의미한다. 하지만 대상 11:16의 '영채'(*, 네치브)나 삼하 11:11의 '영채'(*, 숙코트)와는 달리 여기서는 '요새'라는 의미에 더욱 가깝다(Lange, Keil & Delitzsch). 따라서 이는, 상당히 큰 규모의 군대가 숙영(宿營)할 수 있는 요새를 가리킨다. 수풀 가운데 견고하게 세워진 요새는 그만큼 위장이 잘 되어 있어서, 적의 공격이 있을 때는 언제라도 기습적으로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주); 망대 - 이것은 적의 침공을 사전에 발견하여 대비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적의 동태를 감시하여 대비하는 데 용이했다(14:7;26:9;삿 8:9).
이와같이 웃시야 때로부터 계속되어 온 건축 사업은 당시 북쪽에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던 앗수르의 위협과,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성 경: [대하27:5]
주제1: [요담의 통치]
주제2: [요담의 강성]
(주);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 이 기록이 열왕기에는 없다. 부친 웃시야가 이루어 놓은 군사력과 명예를 배경으로 하여, 요담은 정복 사업을 계속 추진했다. 웃시야는 블레셋과 아라비아와 마온 등 요단 서편 지역을 주로 정복한 반면, 요담은 반대편인 요단 동편 지역의 땅을 차지했다(Kittel). 한편 혹자는 요담이 암몬과 싸운 이유를 암몬 자손이 웃시야때부터 바쳐오던 조공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Barker, Keil).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명백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요담이 분명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추진한 정복 사업의 결과로, 암몬과 싸우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주); 밀 일만 석과 보리 일만 석 - 요담이 암몬으로부터 이렇게 많은 양의 밀과 보리를 조공으로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암몬 족속의 주산물의
밀과 보리였으며 그 땅이 매우 비옥하였음을 입증해 준다(Barker). 3년 동안 계속해서 바쳐진 이 밀과 보리는 아마 군량미로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3년 뒤에는 더 이상 암몬 족속이 조공을 바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들이 독립하였거나, 아니면 요담 말년에, 유다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암몬 족속이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Keil). 이 시기에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실(왕하15:37)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조공에 대해 거부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사 7:1-8:8). 한편 역대기 저자가
르신과 베가의 침략에 대해 전혀 언급지 않는 것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아해 한다. 그 이유는 베가와 르신의 침략이 요담과 아하스 때 두번
있었던 것처럼 열왕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왕하 15:37;16:5). 그러나 왕하15:37의 기록과 16:5의 기록이 각각 다른 사건을 가리키지 않으며
그 사건은 아하스때에 있었음이 분명하다(사 8:6ff.). 그래서 역대기 저자는 아람.이스라엘 동맹군의 침략과 요담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참고로 열왕기 저자가 같은 사건을 두 번에 걸쳐 반복하여 기록한 것은 요담과 아하스가 섭정 통치를
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더욱이 왕하 15:30에서는 '요담 이십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 반해 본장에서는 '16년을 치리했다'(1절)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섭정을 했다는 증거는 더욱 확실해진다. 따라서, 아람.이스라엘 동맹군이 공격했던 시기는 요담과 아하스가 섭정을 하고
있던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전쟁이 발발한 원인은 아하스의 범죄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왕하15:30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27:6]
주제1: [요담의 통치]
주제2: [요담의 강성]
(주); 요담이...점점 강하여졌더라 - 본절은 역대기 저자가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실제적으로도 요담의 왕국이
강하여졌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다. 즉, 요담이 통치하던 시기에 유다의 관할 아래 있던 에시온게벧에서 그의 공식적인
인장(印章)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Payne).
성 경: [대하27:7]
주제1: [요담의 통치]
주제2: [요담의 남은 사적]
(주); 모든 전쟁 - 역대기 저자는 본장에서 요담의 사적을 긍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편 웃시야가 말년에 문둥병으로 격리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만든 동맹군(26:11ff.)을 요담이 맡았을 것이다(26:21). 이는 요담이 그때부터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딜리(Thiele)는 앗수르의 연대기를 근거로 하여 B.C.743년경에 디글랏빌레셋 3세에 의해 유다가 패퇴되었다고 제안하는데(Payne), 역대기 기자는 이러한 패전 사실 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한 어떠한 사실도 언급하지 않는다.
(주);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 - 왕하 15:36에는 '유다 왕 역대 지략'이라고 기록되어 '이스라엘'이 생략되어 있으나, 본문은 역대기 기자의
규칙적인 관습에 의한 것이며(16:11, Williamson), 열왕기서의 내용을 요약해 놓은 것에 해당한다(Curtis).
성 경: [대하27:8]
주제1: [요담의 통치]
주제2: [요담의 남은 사적]
본절은 1절의 되풀이이긴 하지만 글의 형식상 이러한 반복이 생긴 것 같다. 즉, 1절은 통치 서론으로서, 8절은 통치의 결론으로서 기록된 것이다. 또한 28:1의 표현과 명확하게 대조하기 위해 반복한 것 같다.
(주); 예루살렘에서 치리한 지 십 육 년이라 - 딜리(Thiele)는 베가 17년(B.C. 743)부터 요담이 그의 아들 아하스와 섭정하였고, 따라서 그의 통치
기간이 실제로는 20년간이라고 한다. 이는 왕하 15:30에서 '요담 이십 년'이라고 언급한 것에 근거한 것이다. 요담 20년은 그의 아들 아하스가 24세
되던 때이다(자세한 내용은 왕하 16:2의 주석을참조하라). 뿐만 아니라, 혹자는 웃시야 - 요담 - 아하스 시대 가운데 4년 동안은 그들이 모두 살아
있어서, 3대에 걸친 섭정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Wood).
성 경: [대하27:9]
주제1: [요담의 통치]
주제2: [요담의 남은 사적]
(주);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8절의 논의가 타당한 것으로 볼 때, 본문은 아하스가 웃시야와 요담의 섭정을 함께 받았다가(Wood), 요담의
섭정을 거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독자적인 통치를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성 경: [대하28:1]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아하스의 우상 숭배]
(주); 아하스 - 아하스의 공식적인 통치 기간은 B.C. 735년에서부터 B.C. 716년까지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움켜잡다'란 뜻을 지닌 '아하즈'(*)란 단어에서 파생되었으며, '여호아하스'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디글랏 빌레셀의 연대표에는 '야우하지'(Yauhazi)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아하스'라는 히브리어 이름을 앗수르 식으로 표현해서 그런 것 같다.
(주);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 이는 다윗과 같이 여호와를 의뢰하며 통치자가 행할 마땅한 도리를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도모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그는 이방신을 섬기며, 이방 나라인 앗수르의 제국적인 힘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16절).
성 경: [대하28:2]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아하스의 우상 숭배]
(주);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 이는 아하스가 유다를 제사장의 나라요,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된 나라로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역사적인 역할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북이스라엘 왕들이 저질렀던 동일한 오류와 배도(背道)의 길로 나아갔음을 보여 준다.
(주);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 이것은 왕하 16장에는 없는 기록이다. 아하스는 유다 열왕들 가운데 최초로 우상을 부어 만드는 범죄를
저질렀다(P.C. Barker). 이러한 아하스의 우상 숭배에 관해서는 사 2:8-18,20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28:3]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아하스의 우상 숭배]
(주);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 왕하 16장에서는 장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한편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하였으며 오늘날의 '에르 라바비'(er-Rababi)로 추정된다(Curtis). 여기에서 인간 희생 제사가 시행되었었다(렘7:31).
(주); 그 자녀를 불사르고 - 아하스가 자기 자녀를 희생 제사로 드린 사실로 보아 이방의 종교 의식이 도입되었음이 분명하다(왕하 16:3 주석
참조). 커티스(Curtis)는 이러한 인간 제물의 유형을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고자 했던 것(창 22장)과 입다의 맹세(삿 11:30,34ff.)에서
찾고자 하나, 결과적으로 두 사건 모두 실제로 인간 희생제사가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아하스 이전에는 이러한 제사가 언급된 적이 전혀 없고,
아하스 이후에 므낫세가 인간 제사를 시행하였다(33:6;왕하 21:6). 그리고 유다 말기에도 적잖이 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Curtis). 그런데 이러한
인간 제사는 여호와께 대하여 악한 행위로 규정되었다(왕하 17:17;21:6;23:10;시 106:37,38;렘7:31;19:5;겔 16:20,21;미 6:7). 그리고 모세
율법으로는 사형에 해당되는 가증한 일이었다(레 20:1-5).
성 경: [대하28:4]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아하스의 우상 숭배]
(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 이는 열왕기와 예레미야에서 많이 쓰이는 표현이다(신 12:2;왕상 14:23;왕하 16:4;17:10;렘 2:20;3:6,13). 그리고
'푸른 나무'라는 표현은 단순히 나무의 색이 푸르다는 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상태나 크기에 있어서 멋지고 우람한 나무를 의미한다(Curtis).
따라서, 이는 자연 숭배를 말하는 것이고, 역대기 기자는 이것이 하나님께 정죄되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스가 이러한
자연 숭배의 제례를 시행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적극적인 거역 행위였다.
성 경: [대하28:5]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하나님의 징계]
(주); 아람 왕 - 왕하 16:6에는 '아람 왕 르신'으로 나타나 있다.
(주); 저희가 쳐서...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 왕하 16:5에는 르신과 베가가 아하스를 이기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사실들을 볼 때 유다가 크게 패하였음이 분명하다. 이 두 사실을 서로 조화시켜 볼 때, 르신과 베가는 아하스의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까지는 점령하지 못하였지만(사 7:1), 엘랏을 비롯한(왕하 16:6) 많은 성읍들을 점령하고, 유다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을 것이다.
(주);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붙이시매 - 본절에서 아람 왕과 북이스라엘 왕의 공격은 각각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두 나라가 동맹하여
함께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공격의 방법이나 시간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 수 있으며, 하나의 지휘 체제로 연합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지형상으로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서로 인접해있었기 때문에 동맹 맺기가 쉬웠을 것이다.
성 경: [대하28:6]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하나님의 징계]
(주); 하루 동안에 용사 십 이만 명을 죽였으며 - 역대기만이 이렇게 자세하게 살륙당한 자의 수를 밝히고 있는데, 혹자는 이것이
'미드라쉬'(Midrash)의 특징이라고 본다(Curtis). 그러나 역대기 저자가 '하루 동안'이라는 기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 여호와의 징벌로
인한 살륙임을 극명하게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한편 혹자는 120,000명을 120 '엘레프'(*, 천)로 나타낼 수 있는데, 이 '엘레프'란 단어는 '특별히
훈련된 용사들', 즉 '모든 용감한 사람들'(all valiant men, NASB)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제안한다(Payne). 따라서, 십 이만 명의 용사가 죽었다는
사실은 매우 타격적으로 중요한 전투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 주며, 패배를 예고하고 있다고 할수 있다.
성 경: [대하28:7]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하나님의 징계]
(주); 에브라임의 용사 시그리 - 여기서 특별하게 '시그리'라는 용사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그 당시 대단한 위세를 떨쳤던 영웅으로서, 특별히 유다와의 전쟁에서 큰 공훈을 세운 이스라엘의 장수였기 때문일 것이다.
(주); 왕의 아들 마아세야 - 이는 아하스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 대부분 학자들의 견해이다. 왜냐하면 20세에 왕위에 오른 아하스가 그의 즉위 1년에 발생한 이 전쟁에서 무기를 들 만한 큰 아들을 두었을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왕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왕이나 궁전에 속한 어떤 특별한 직책을 가리킨다는(18:25) 것이다(P.C.Barker). (2)아하스의 삼촌이나 형제라고 추측하여 왕족에 해당된다고 본다(Keil, Curtis). 어쨌든 '왕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왕과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거나, 왕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주); 궁내 대신 - 이에 대해서는 왕상 4:6;왕하 18:18을 참조하라.
(주); 총리 대신 - 이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미쉬네 함멜렉'(*)을 직역하면 '왕의 바로 다음 사람'이다. 이 직책에 대하여 분명히 밝혀진 바는
없으나, 어떤 중요한 일에 왕을 대신하여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고관인 듯하다. 이처럼 궁궐의 중요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 것은 그당시
아하스 왕의 신변에 매우 위급한 상황이 닥쳤음을 보여 준다.
성 경: [대하28:8]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오뎃의 책망]
(주); 그 아내와 자녀 합하여 이십 만명을 사로잡고 - 페인(Payne)은 "이백 명의 알루프(alluphs)와 그 아내와 자녀를 사로잡고"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낫다고 제안한다(6절 주석 참조). 이처럼 유다가 매우 중요한 전투력을 빼앗긴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의 공격이 얼마나 치밀하고 정예화 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다는 거의 황폐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선지자 오뎃의 표현 가운데(9절), "노기(怒氣)가 충천하여
살륙하고"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이스라엘 군대의 잔인성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유다에 대해서 이렇게 노를 품고 잔인하게 행한 이유는
짐작컨대 당시 르신과 베가가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유다를 동맹에 끌어들이려 했으나 아하스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앗수르에 대하여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카일(Keil)은 이러한 북이스라엘 군대의 만행을 에브라임 사람들의 잔인성(왕하 15:16)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 경: [대하28:9]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오뎃의 책망]
(주); 그곳에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는데 - 이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선지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주); 오뎃 - 이 선지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15:1,8에 동일한 이름을 가진 선지자가 나오는데, 그는 이 선지자 보다 약 130년 전의 인물로서 동일 인물은 아니다.
(주); 유다를 진노하신 고로 너희 손에 붙이셨거늘 - 이것은 북이스라엘이 유다를 징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가리킨다. 비록 이스라엘이 유다에 승리는 했지만 선지자의 경고를 받았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스라엘의 승리는 그들의 의로움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28:10,13).
(주); 너희 노기가 충천하여 살륙하고 - 이는 북이스라엘 군대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온갖 잔인함으로
무자비하게 살륙을 행하였음을 지적하는 구절이다. 한편 극한 범죄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창 18:20,21과 스 9:6을 참조하라. 결국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무절제한 살륙을 자행함으로 인하여 여호와께 범죄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에게 여호와의 진노가 임박하였다는 것이다(11절).
성 경: [대하28:10]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오뎃의 책망]
(주); 노예를 삼고자 - 유다 백성이 동족(同族)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으려는 북이스라엘의 그릇된 행위에 대해 선지자 오뎃은 혹독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이스라엘이 오뎃에게 비난받는 이유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심판자이신 것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고 선지자가 반문했을 때, 그 말의 의미는
죄인이 죄인을 징벌할 수 있는 심판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고자 했던 무리들에게 던진 예수님의 말씀과
흡사하다(요 8:1-11). (2)동족을 노예로 삼으려 한 것은 엄연히 율법에 어긋난 행위였다는 사실이다. 즉, 이스라엘에서는 동족을 학대하거나 노예로
삼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다(레 25:39,46;신28:68). 물론 이방인의 습성으로 인해 여호와의 율법을 소홀히 여기는 그들에게 있어서 전쟁 포로를
노예로 삼는 것은 당연지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비추어 본다면, 역대기 저자가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백성으로, 유다의
동족이며 형제로 표현한 것은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일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 백성에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엿볼 수 있다.
성 경: [대하28:11]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오뎃의 책망]
(주);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박하였느니라 - 여기서 '임박하였느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론'(*)은 '빨갛게 되다'는 뜻을 가진 동사
'하라'(*)에서 온 말로서 부글부글 끓어서 넘칠 것 같은 급박함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진노받아 멸망하기에 마땅한
자들도 성급히 징계치 않으시는데,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극렬함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로
참으신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는 경계의 선포이다.
성 경: [대하28:12]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오뎃의 책망]
(주); 에브라임 자손의 두목 몇 사람 - 사건의 서술상 선지자 오뎃의 선포 후에(11절)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타난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본절에
기록된 네 사람은 선지자 오뎃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일어나...막기'까지 하면서 적극적인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는 북왕조가 이미 타락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Williamson). 한편 역대기 저자는 분열 왕국 시대 이후 하나님의 계시
역사에서 잠정적으로 사라졌던 북이스라엘 10지파를 부각시키고 있다. 즉, 에브라임의 두목들의 행동을 인상적으로 기술하여 북이스라엘도
회개함으로 여호와께 돌아올것이라는 소망을 보여 준다. 따라서 중요한 전환기에 그들의 이름을 열거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사실로 보여진다.
성 경: [대하28:13]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오뎃의 책망]
(주);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더하게 함이로다 - 여기서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트'(*)는 '과녁을 빗나가는 것', '발을 헛디디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율법을 오해하거나, 그릇되이 해석하여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허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쉐마트'(*)는 어떤 인격체를 분노케 하여 발생하는 감정상의 죄책 뿐만 아니라, 범죄가 드러나 유죄라고 판결받은 상태도 가리킨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유죄로 정죄되기에 충분한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선포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유다 백성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성 경: [대하28:14]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오뎃의 책망]
(주); 이에 병기를 가진 사람이...온 회중 앞에 둔지라 - 포로들을 사마리아까지 호송해온 이스라엘 병사들은 에브라임 자손의 두목들의 설득을
받아들인다. 이처럼 베가의 군대가 설득을 받아들이고 포로와 노략물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형제애(8절) 때문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Payne),
'에브라임의 두목'(12절)이라는 권위가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포로를 돌보고 돌려보내는 역할을 한 사람들이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15절)이라고 재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 군사들은 포로들을 돌려 보내는 것에 대해 냉소적이고 비협조적이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관용을 받은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직 떠나지 않았음을 경험했을 것이다.
성 경: [대하28:15]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오뎃의 책망]
(주);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쉐르 닉크부 브쉐모트'(*)는 '앞 구절에서 언급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유명하거나, 특별히 어떤 일을 위해 지명되어 있던 자들'을 가리킨다(31:19;대상 12:31;16:41). 따라서 여기에는 12절에서 이름이 열거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유명한 자들도 포함된다(Keil, Lange, Williamson). 한편 이들은 포로들에게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먹이고 마시우며, 기름을 발라주고, 약한 자는 나귀에 태워 여리고로 돌려 보냈다. 이와같이 원수에게 조차 사랑을 보이라는 율법(출23:4;잠 24:17;25:21;마 5:44)은 깨어 있는 지도자들에 의해서 지켜졌던 것이다(Payne).
(주); 종려나무 성 - 이는 여리고를 지칭하는 별명(別名)으로(신 34:3;삿 1:16;3:13), 베냐민 지파에게 할당된 땅이었다(수 18:21).
(주); 여리고에 이르러 그 형제에게 돌린 후에 - 당시 여리고는 북왕국의 영토이긴 했으나, 남유다와 매우 인접해 있던 곳으로 보인다(Curtis).
그래서 여리고 성에서 포로들을 유다 백성에게 돌려보내기가 손쉬웠을 것이다.
성 경: [대하28:16]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앗수르를 의지하는 아하스]
(주); 아하스 왕이...도와주기를 구하였으니 - 아하스는 아람-북이스라엘 연합군의 침략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 이미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블레셋과 에돔까지 반란을 일으키자, 이번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도움을 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하스는 앗수르의 '왕들'(NIV
난하주)에게 굴복하였다. 이러한 아하스의 태도를 선지자 이사야는 사악한 일이며 믿음 없는 태도라고 규정하고, 유다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사 7:4-7). 그러나 아하스는 이 말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대신 앗수르의 힘을 의뢰하려 하였다. 역대기 기자는 하나님께서
신실한 왕을 도우신다고 기록하고 있다(14:11;18:31;25:8;26:7,15;32:8;대상 5:20). 그런데 본문에서는 아하스가 신앙이 결핍되어 있음을 21절과
23절에서 보여주고 있다(Williamson). 한편 아하스가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당시의 국제 정세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결과로
여겨진다. 당시 앗수르는 디글랏 빌레셀의 지휘 아래 팽창 정책을 재개(再開)하여 수리아와 팔레스틴의 군소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대제국을
이루었고, 그 세력이 계속 뻗어나가고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국제 정세로 볼 때, 아하스는 앗수르와 동맹을 맺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하스의 이러한 판단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즉, 그는 제국을 형성하고 있는 앗수르가 당연하게
무엇인가를 요구할 것에 대해 판단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자기 중심적인 판단으로 도움을 요청하여 앗수르 군대가
왔으나, 앗수르 왕은 도리어 유다를 협박하여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다(20,21절). 뿐만 아니라, 자기 민족인 북이스라엘을 멸망하게 하였고(왕하
17:6), 유다 역시 산헤립의 군대에게 황폐케 되는 결과(왕하 18:13)을 초래했다(Payne).
성 경: [대하28:17]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앗수르를 의지하는 아하스]
(주); 에돔 사람이 다시 와서 - 여기서 '다시 와서'라는 표현은 에돔의 이전 공격(21:8ff.)을 암시하거나, '또 다른', '그 위에'의 뜻으로,
아람.북이스라엘 연합군의 공격에 더하여 에돔 사람이 쳐들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Curtis). 에돔은 유다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Keil, Payne) 보충적인 자료는 왕하 16:6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아람 왕 르신이 엘랏을 회복하여 '에돔'(* ;BHS
Apparatus, LXX, Vulgata;왕하 16:6 주석 참조)에 돌리고"라는 구절은 아람왕 르신과 동맹한 에돔이 독자적으로 엘랏을 공격하였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왜냐하면 아람 왕 르신이 있던 다메섹은 엘랏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공격하기가 매우 어려웠을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돔은 처음에는
약간의 아람 군대의 도움을 입어 그들의 영토였던 엘랏을 회복하였고, 또다시 르신이 이끄는 아람 정규군과 합류하여 전면적인 공격을 하였다가
앗수르의 군대를 만나 아람 왕 르신이 죽게 되었을 것이다.
성 경: [대하28:18]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앗수르를 의지하는 아하스]
(주); 벧세메스 - 대상 6:59 주석 참조.
(주); 아얄론 - 대상 6:69 주석 참조.
(주); 그데롯 - 이는 오늘날의 '카트라'(Katra)에 해당되며, '얍네'(Jobneh)의 남서쪽에 위치한다. 수 15:41과 비교해 보라.
(주); 소고 - 11:7 주석 참조.
(주); 딤나 - 이는 오늘날의 '티브네'(Tibne)이며, 벧세메스 근방에 위치해 있다(수 15:10).
(주); 김소 - 오늘날의 '짐수'(Jimzu)이며, 릿다(Lydda)의 남동쪽 약 4.8km 지점에 위치한다. 한편, 유다가 에돔과 블레셋에게 이처럼 많은 영토를
빼앗기게 되었다는 명확한 기록은 역대기에서만 발견된다.
성 경: [대하28:19]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앗수르를 의지하는 아하스]
(주); 이스라엘 왕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 역대기 저자는 특별한 경우에 유다 왕을 가리켜 이스라엘 왕이라 칭하기도 했다(11:3;12:6;19:8;21:2,4). 그러나 여기서는 아하스의 행실을 비꼬기 위하여 우상으로 더럽혀진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의미로 표현한 듯하다(Zockler, Keil). 또한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였다'는 진술은 유다 왕으로서는 그처럼 여호와께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고, 우상을 섬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풍자적 표현이다.
(주); 유다를 낮추심이라 - 여기서 '낮추심이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히케니아'(*)는 '굴복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카나'(*)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유다가 그들의 속국이었던 에돔에게 굴복하게 된 것은 매우 큰 수치이고, 이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다.
성 경: [대하28:20]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앗수르를 의지하는 아하스]
(주);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군박하였더라 - '군박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라르'(*)는 적대적인 감정으로 억압하는 것을 뜻한다. 아하스 왕의
요청에 의하여 유다에 온 디글랏 빌레셀은 구원자나 조력자라기 보다는 제국의 힘을 배경으로 약소국의 소유물과 재물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제국주의적 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따라서 돕기 위해 불려온 앗수르 군대는 압제자로 변하여, 유다 나라의 중요한 재물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열왕기 저자는 앗수르의 협박에 의한 탈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사 7:17ff.)
유다가 앗수르에 의하여 적잖이 고통을 받은 사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성 경: [대하28:21]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앗수르를 의지하는 아하스]
(주); 아하스가...취하여 - 여기서 '취하여'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할라크'(*)는 '약탈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Vulgata, Lange). 따라서 아하스는 앗수르에게 뇌물을 주기 위하여 성전과 왕궁의 재물을 탈취하다시피 모았을 뿐만 아니라, 왕궁에 거처하는 고관들의 재물까지도 빼앗아 앗수르 왕에게 건네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하여 그는 권세의 상징인 앗수르 왕에게 환심을 사고자 노력하였을 것이다.
(주); 유익이 없었더라 - 이것은 디글랏 빌레셀의 압력이 계속되었음을 뜻한다(Curtis). 그런데 왕하 16:9에 따르면, 앗수르 왕이 아하스의 요청을
받고 다메섹을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르신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유다는 아람의 공격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실제적으로
앗수르의 큰 도움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아무런 유익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이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즉, 디글랏 빌레셀이 아람을 공격한 것은 비록 아하스의 요청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하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앗수르 제국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한 것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아하스의 요청은 앗수르가 아람을 공략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을
만들어 준 것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나서 앗수르는 유다를 침입하고 있는 에돔과 블레셋의 공격 같은 국지전(局地戰)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면서,
오히려 유다에 대해서 계속 협박하여 조공을 바치게 한 것이다. 이처럼 앗수르가 아하스를 협박했다는 역사적 증거로 두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1)디글랏 빌레셀의 비문에 보면, 앗수르 왕은 유다 왕 아하스에게서 뿐만 아니라 블레셋과 에돔에게서도 공물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Zockler).
이 사실은 아하스가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한 결과, 유다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국가들이 제국주의적 착취에 시달리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2)왕하
16:18에는 아하스가 앗수르 왕을 인하여 낭실을 여호와의 전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낭실은 아하스가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왕이 성전으로 들어갈 때에 사용했던 통로이다. 그런데 앗수르 왕이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자 이 통로가 전략적으로 아하스 왕 자신을 잡는 데
사용될까 두려워 낭실을 성전 안으로 옮기게 되었다(왕하 16:18 주석 참조).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디글랏 빌레셀은 어떻게 해서라도
예루살렘을 차지하고자 했으며, 아하스는 앗수르의 무력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Keil).
성 경: [대하28:22]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아하스의 거듭된 우상 숭배]
(주);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 여기서 '곤고할 때'란 아하스가 디글랏 빌레셀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를 정점으로 하여, 그
이후에 있었던 모든 외세의 침공시를 가리킨다.
성 경: [대하28:23]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아하스의 거듭된 우상 숭배]
(주);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 왕하 16:10에 따르면, 아하스는 당시 다메섹을 장악하고 있던 디글랏 빌레셀을 접견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갔다(왕하 16:10 주석 참조). 그리고 거기에서 디글랏 빌레셀이 숭배하던 우상을 본따서 제사장 우리야가 단을 쌓았고, 아하스는
다메섹에서 유다로 돌아와 이 우상에 제사하였다. 한편 본문에서는 '다메섹의 신들'을 '아람 열왕의 신들'과 동일시하는 반면에
바네스(Barnes,Cambridge Bible)는 이를 '앗수르 열왕의 신들'이라고 번역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볼때, B.C. 732년에 앗수르에 의해 다메섹이
멸망했기 때문에 아람.북이스라엘 연합군이 유다를 점령했던(5절) 기간은 매우 짧다. 따라서 '앗수르의 열왕'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Curtis).
성 경: [대하28:24]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아하스의 거듭된 우상 숭배]
(주); 전의 기구들을 모아 훼파하고 - 왕하 16:17에 따르면 아하스는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어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두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여호와의 전 앞에 있던 놋단도 옮기고, 다메섹 단의 형식을 따라 만든 큰 단에서 제사를 드리도록 했다(왕하 16:14,15). 이러한 그의 이방신 숭배는 단순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종교적으로 보완하려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였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다른 신의 어떠한 것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전면적으로 이방신을 섬기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종교 정책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나타냄으로써 호감을 얻어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주); 여호와의 전(殿) 문들을 닫고 - 아하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성전으로 통하는 낭실(왕하 16:18)을 제거하였을 뿐만 아니라(21절 주석 참조),
우상 숭배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성전에서는 더 이상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가 시행되지 않았다. 한편 여기서의 '여호와의 전'은 성전 건물 전체를
집합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주요한 장소, 즉 성소와 지성소를 의미한다. 따라서 성소와 지성소에서의 여호와 경배는 중단되었지만, 성전
안에 있는 제단에서는 이방신에 대한 제사가 계속 치러 졌음을 알 수 있다(Keil). 이처럼 닫혀진 문은 히스기야 때에 다시 열린다(29:7 참조).
성 경: [대하28:25]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아하스의 거듭된 우상 숭배]
(주); 산당을 세워 - 우상 숭배하는 왕들에 의하여 산당은 종종 혼합주의의 본산지가 되었다. 본문에서도 아하스는 다른 신에게 분향하기 위해
거국적으로 종교 개혁을 일으켰는데 이로써 우리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대하28:26]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아하스의 죽음]
(주); 유다와 이스라엘의 열왕기 - 이와 병행 구절인 왕하 16:19에는 '유다 왕 역대지략'이라고 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추가되는 것은 역대기
기자의 일반적인 경향이다(역대기 서론 참조).
성 경: [대하28:27]
주제1: [아하스의 악정(惡政)]
주제2: [아하스의 죽음]
(주); 그 열조와 함께 자매 - 이사야 선지자가 '블레셋을 치던 막대기'라고 표현한(사14:28,29)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죽은 해에 아하스도 죽었다(Payne). 한편 그 열조와 '함께' 잤다는 표현은 아하스가 열왕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과 대조되고 있다(Payne).
(주); 열왕의 묘실에 들이지 아니하고 - 자신의 사악함 때문에 열왕의 묘실에 묻히지 못한 왕들 중에는 여호람(21:10), 요아스(24:25) 등이 있다.
그리고 웃시야도 자신의 죄로 인하여 발병한 문둥병 때문에 열왕의 묘실에 묻히지 못했다(26:23). 므낫세의 죽음도 참조하라(33:20). 한편, 역대기
저자는 아하스 역시 그의 배교(背敎) 때문에 열왕의 묘실에 들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는 듯하다(Williamson). 이와같이 역대기 저자는 왕들의
선악(善惡)간의 판단을 그의 마지막 죽음에 관한 묘사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성 경: [대하29:1]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명령]
(주); 히스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 히스기야의 통치 기간은 공식적으로 B.C. 728년에서부터 B.C. 687년까지이다(왕하 18:1-3 주석 참조). 한편,
그의 42년간의 통치 기간에는 그가 병에서 회복되어 수명을 연장 받은 15년도 포함되어 있다.
성 경: [대하29:2]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명령]
(주);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 여대기에서 통치에 대한 평가를 말할 때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라고 평가받은 왕은 히스기야와
요시야(34:2) 뿐이다.
성 경: [대하29:3]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명령]
(주); 원년(元年) 정월에 - 이것은 히스기야의 통치 첫해, 니산월(태양력으로는 3, 4월)을 가리킨다. 이는 히스기야가 통치권을 맡은 해라기 보다는, 단독으로 통치권을 받았던 해인 B.C. 725년에 해당되는 것이 확실하다(Payne).
(주);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 여호와의 전 문이 폐쇄된 것은 히스기야의 부친인 아하스 왕이 통치하던 때였다(28:24), 여호와의 전 마당에 다메섹 신들의 우상을 세워 성전을 더럽혔다. 반면에 경건한 히스기야는 실질적인 통치권을 부여받자 마자, 성전을 복구하고 우상을 척결하는 일을 시작했다.
(주); 수리하고 - 왕하 18:16에 따르면 히스기야는 그 당시 여호와의 전 문과 기둥에 금을 입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 경: [대하29:4]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히스기아의 성전 정화 명령]
1-3절은 히스기야가 성전을 정결케 한 사건을 총괄적으로 요악한 것이고, 본절부터 19절까지는 성전을 정결케 하는 과정을 사건 서술의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주); 동편 광장에 모으고 -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으며, 대체적으로 성전의 동편 외곽지에 있는 광장일 것으로
추측한다(Keil). 이곳은 스 10:9의 '하나님의 전(殿) 앞 광장'이나, 느 3:26;8:1, 3, 16에 기록된 '수문(수문) 앞 광장'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히스기야 당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모임은 주로 성전 안뜰에서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므로(Bertheau, Benzinger) 왜 하필이면 백성들이
모이는 곳인 이 외곽지의 광장에서 모였는지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동편 광장'은 성전을 벗어나 수문으로 나가는 광장이며,
이곳에서 백성들이 곧잘 모였고, 성전이 닫혀져 방치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 무리가거기에서 모였다고 생각하였다(Curtis).
또한, 이 광장은 보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데 용이했을 것이고, 성전 마당조차 우상 숭배로 많이 더럽혀져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모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5,15,16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가운데 우상으로 더럽혀져 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먼저 자신을 정결케
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모였을 가능성도 크다.
성 경: [대하29:5]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명령]
(주); 너희는 성결케 하고 -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성전의 일을 수행할 때, 몸을 정결케하는 일은 규례에 따른 의무였다(대상 15:12, 14). 이처럼 히스기야가 성전을 성결케하기 위하여 성결의 법에 다라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에게 먼저 자신들을 성결케 하라고 명령한 것은 여호와를 향한 신실함과 경외심의 표현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서는 이와 같은 성결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히스기야는 이스라엘 전체의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엇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절대적이라는 이해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주);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이 하라 - 여기서 '그 더러운 것'(*, 한닛다)은 '불결함'을 가리키는데, 이는 우상 숭배와 관련하여 다메섹 단의
모양대로 만든 제단을 비롯해서, 온갖 우상 숭배를 위해 사용된 기구들과 그에 관계된 불결함을 가리킬 것이다. 유사어로 16절에 '더러운 것'(*,
핫투므아)이 나오는데 이 또한 우상의 가증스러운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조치는 곧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하라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하는 첫 행동 지침이었다. 한편 본절에서 '성소'(*, 하코데쉬)는 성전 내부의 건축물만을 가리키지 않고, 성전 전체 구석구석을
의미하는 것이며(Curtis), 성전 제사와 관련되는 모든 장소와 사람, 그리고 성전 기구들을 총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성 경: [대하29:6]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명령]
(주); 우리 열조(列祖)가 범죄하여 - 여기서 '우리 열조'란 아하스와 그 당시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구체적인 범죄 내용은 7절에 소개되고 있다.
(주); 얼굴을 돌이켜 - 성경에서 '얼굴'은 항상 인격의 표현으로 '인격적인 관계'와 연관되어 나타나며, 상대에 대한 인격의 총체, 즉 마음의 표현을 나타낸다. 따라서 '얼굴을 돌이켜'라는 표현은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으며, 여호와에게서 그 마음이 떠났음을 나타낸다.
(주); 여호와의 성소를 등지고 - 이것은 성전 제사를 폐하고, 우상 숭배한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삶의 방식까지도 우상을 섬기는 적극적인
표현으로 나타남을 보여준다.
성 경: [대하29:7]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명령]
(주); 낭실(廊室) 문을 닫으며 - 28:24 에 따르면 아하스는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여호와께 대한 모든 성전 예배를 완전히 폐지하였다. 그러나
왕하 16:10-16에는 아하스가 여호와의 전 마당에서 계속해서 번제를 드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Curtis). 그러나 역대기 저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아하스의 번제는 다메섹의 신들에게 드려진 것이요. 여호와께 드려진 번제 라고 할 수 없다(Keil).
성 경: [대하29:8]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명령]
(주); 여호와께서...내어 버리사 - 이는 유다가 아하스 치하에서 아람과 이스라엘에 의해 곤욕을 치른 것과 블레셋과 에돔으로부터 당한 수치스러운 패배, 그리고 앗수르의 디그랏 빌레셀에게 당한 군박(窘迫) 등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유다가 범죄로 인하여 겪게 된 고난을 내버려 두시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에 해당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근거하는 것이다.
(주); 두려움과 놀람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신 것 - 28:19에서는 '여호와께서 유다를 낮추심이라'고 이와 유사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편, 이 세
단어들은 불같은 여호와의 진노하심과 심판하심으로 당하는 극심한 고통을 나타내는데(Curtis), 이는 선지자들의 말 가운데 많이 나타나는
표현이며, 특히 예레미야가 많이 사용했다. 이에 대해서는 신 28:25; 렘 15:4;19:8;24:9;25:9,18; 29:18;51:37;겔 23:46;미 6:16 등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29:9]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명령]
본절에 대해서는 28:5, 8, 17을 참조 하라.
성 경: [대하29:10]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명령]
(주); 언약을 세워 - 본절에는 여호와와 언약을 세우기 위해 히스기야가 성전을 성결케 했다고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히스기야가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이미 주어진 언약의 의무를 수행한다는 의미는 갖는다(Williamson, Curtis). 15:12;23:16;34:31;왕하23:3 등에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주); 마음이 내게 있노니 - 이것은 성전을 향한 히스기야의 열정을 표현한 말로서 이는 성전을 건축할 마음을 품었던 다윗의 열정과
유사하다(6:7;대상 22:7;28:2).
성 경: [대하29:11]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명령]
(주); 게으르지 말라 - '게으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틸솰루'(*)는 '움츠리다'라는 뜻의 '솰라'(*)의 나팔(niphal,단순수동) 동사 미완료형으로서, 본구절은 '너희 자신을 움츠리지 말라' 또는 '방심하지 말라'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방종하는 가운데 참여치 말라는 의미를 나타낸다(욥 27:8). 이는 중요한 시점에서 규모없이 아무렇게나 행동하거나, 어리석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을 경계하는 듯하다.
(주); 이미 너희를 택하사 - 이것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이미 율법에 명시한 바(신 10:8)와 같이 특별히 구별된 직분자임을
가리킨다(26:18;대상23:13). 따라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위치를 알게 하여,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고,
그렇게 역할을 신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것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성 경: [대하29:12]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정화되는 성전]
본문에서 그핫과 므라리와 게르손의 자손들을 열거함은 레위 족속 전체를 언급하는것과 다름없다(대상 6:1,16-19). 그런데 각 자손들 가운데 2명씩 열거한 것은 적어도 그들이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거나, 의도적으로 선출된 대표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 아마새의 아들 마핫 - 이 사람의 이름은 그핫 자손 사무엘의 계보에 나타난다(대상6:35).
(주); 아사랴의 아들 요엘 - 마핫과 동일한 계보에서 언급되고 있다(대상 6:36).
(주); 압디의 아들 기스 - 므라리 자손 에단의 계보에 나타난다(대상 6:44).
(주); 여할렐렐의 아들 아사랴 - 레위인의 족보에는 나타나는 여할렐렐(대상 4:16)과 본문의 여할렐렐이 동일인인지는 확실치 않다. 한편, 아사랴는 31:13에서 하나님의 전을 관리하는 자로 나타난다.
(주); 심마의 아들 요아 - 게르손 자손의 계보에 나타난다(대상 6:20,21).
(주); 요아의 아들 에덴 - 레위인의 족보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는 백성이 드린 예물을 그 형제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하였다(31:12ff.).
성 경: [대하29:13]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정화되는 성전]
(주); 엘리사반 - 이는 모세 시대의 그핫 사람들의 족장으로서(출 6:22;민 3:30;대상15:8), 그핫, 므라리, 게르손과 동등한 위치에서 항상 독립된 계보로 소개되고 있다.
(주); 시므리 - 므라리의 자손 중 호사의 아들의 이름과(대상 26:10), 시므온 족속 중에서(대상 4:37) 그 이름이 나타난다.
(주); 여우엘 - 레위인의 명단에 자주 나타나는 이름인데, 엘리사반과 함께 언급된 곳은 본문 밖에 없다(Curtis).
(주); 스가랴와 맛다냐 - 두 이름은 다른 곳에서도 아삽 자손의 계보 가운데 함께 나타난다(20:14;느 11:17;12:35,41). 아삽은 헤만, 여두둔과 함께
노래와 음악을 맡은 족장들이다(대상 25장).
성 경: [대하29:14]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정화되는 성전]
(주); 여후엘과 시므이 - 이 두 이름이 헤만과 연관해서 나타난 곳은 이곳 뿐이다(Curtis).
(주); 스마야 -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이름으로,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도 나온다(대상9:16).
(주); 웃시엘 - 개인의 이름으로는 드물게 나타난다. 그리고 헤만 자손의 음악 담당자로 이름이 나오고(대상 25:4), 레위 족속의 이름으로
나타난다(대상 15:10).
성 경: [대하29:15]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정화되는 성전]
(주); 저희가 그 형제를 모아 - 여기서 '형제'란 레위 지파의 지도자 14명과 그의 가계에 속한 모든 레위인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로 볼때, 히스기야의 개혁 운동은 모든 민족들의 호응을 얻는 대역사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 여호와의 말씀대로 - 히스기야의 명령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히스기야의 명령을 여호와의 명령과 동일하게
여겼음이 분명하며, 온 회중이 이에 동의했을 것이 확실하다. 혹자는 어떤 선지자의 권고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한다(Barnes).
성 경: [대하29:16]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강화]
주제2: [정화되는 성전]
(주); 제사장들도 여호와의 전 안에 들어 가서 - 전절(前節)에서는 레위인들이 성전의 외부와 건물 전체를 성결케 하였고(15절). 본절에서는 제사장들이 성전 내부, 즉 성소와 지성소를 성결케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곳에는 재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레위인들은 그곳을 성결케 하였다고 기록하고 일에 참여할 수 없었다(Barker,Curtis, Keil).
(주); 레위 사람들이 취하여 - 여기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간의 역할 분담이 잘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 기드론 시내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5:16 주석과 왕하 23:4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29:17]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정화되는 성전]
(주); 성결케 하기를 시작하여...마치고 - 처음 8일 간은 성전 마당에 있는 것들을 깨끗이 제거하여 태웠고, 그리고 또 8일 간은 성전 건물의 내부와 외부를 정결케 하여, 약16일 만에 성결케 하는 일을 마쳤다. 이는 니산 월 14일에 시작되는 유월절과 이틀이 겹치게 된다((Barker). 따라서 유월절 절기를 염두에 두고 성전을 청결케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하여 - 여기서 '성결케 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다쉬'(*)는 '구별하다', '성스럽게 지키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여호와의 전을 깨끗케 하는 작업을 통해서 그들은 여호와의 거룩하심올 인정하였으며, 여호와 예배가 외적으로 회복되었음을
가리킨다.
성 경: [대하29:18]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정화되는 성전]
(주); 안으로 들어가서..가로되 - 그들은 왕궁에 있는 히스기야 왕에게로 가서 모든 일의 경과를 자세히 보고하였다.
(주); 떡을 진설(陳設)하는 상 - 이에 대해서는 4:19과 대상 28:16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29:19]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정화되는 성전]
(주); 범죄할 때에 모든 기구 - 이것은 아하스가 훼파했거나, 내다 버린 전(殿)의 기구들울 가리키는데(28:24), 구체적으로 놋제단과 놋바다,
그리고 놋대야 등이다(왕하16:14,17). 본절은 이것들을 다시 수리하고 복구하여 원래 놓아야 할 위치인 여호와의 단, 즉 빈제단 앞에 두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성 경: [대하29:20]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히스기야의 속죄제]
(주); 성읍의 귀인들을 모아 - 여기서 귀인들이란 주로 방백들(24:17;30:1-4)을 가리킨다(Barker). 이렇게 귀인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국가적인
일이 있을 때 통례적으로 흔히 있는 일이다(Curtis).
성 경: [대하29:21]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히스기야의 속죄제]
본절에는 히스기야가 제사를 위해 드린 속죄 제물을 세부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주);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과 어린 양 일곱 - 이것은 번제를 위한 제물이다(24절). 반면에 숫염소 일곱은 속죄 제물이다(23절). 여기서 '일곱'이라는 수는 완전하고 구별된 의미를 가진 수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의 수를 '일곱'으로 하고있다(민 28:11 ff.; 겔 45:23). 한편, 이 두 종류의 제사는 성전을 성결케 하여 재봉헌하는 의미를 지닌다(Curtis).
(주); 나라와 성소와 유다를 위하여 - 일반적으로 번제는 여호와와 화해하기 위한 제물이어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따라서 그의 구속함을
의미하며, 이는 제사장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도 행하여졌다(레 1:3, 4;14:20;16:24). 따라서 히스기야가 '나라와 성소와 유다'를 위하여
속죄 제물을 삼은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위한 제사를 의미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총체적으로 여호와와 언약을 새롭게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구약시대의 예배에서 번제는 필수적이었다. 그것은 백성들의 일반적인 죄를 용서해 주어 평안을 주는 기능을 가졌다. 반면에 속죄제는 특정한
범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려졌다(Curtis). 따라서 여기서의 제사는 단순히 성전의 재봉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하스 때에 이스라엘 전체가
범죄한 모든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사죄를 구하는 의미도 지닌다.
성 경: [대하29:22]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히스기야의 속죄제]
(주); 수소를 잡으매 - 제사장이 번제(燔祭) 의식의 규례를 따라 수소를 잡고 그 피를 받아 제단에 뿌리고, 또한 숫양과 어린 양도 그렇게 하였다.
한편, 수소, 또는 수송아지의 희생제사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출 24:5에서 발견되어지고, 출 29:1,3;레4:3;8:2,14 등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숫양의 희생 제사는 창 22:13에서 최초로 언급되는데,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 숫양으로 제사하였다. 숫양의 희생 제사는 출29:15-21과 레 5:15;8:2,
22 등에서도 발견된다. 한편, 어린 양의 희생 제사는 출12:3-7과 출 29:38 등에서 언급되고 있다.
성 경: [대하29:23]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히스기야의 속죄제]
(주); 속죄 제물로 드릴 수염소 - 숫염소는 일반적으로 번제로 드려졌다(레 1:10;3:12). 숫염소가 속죄제로 드려진 사실은 본절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며, 그 이후에 스 8:35에서 한번 언급되고 있다.
(주); 저희가 그 위에 안수하고 - 왕과 회중은 제사장이 이끌어 온 숫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어 속죄제의 의식올 거행했다. 그런데 본래 제물로
드려지는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는 의식은 번제가 드려질 때 행하여 졌다(레 1:4). 그러나 여기서는 속죄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언급되었다(Curtis,
Williamson). 즉, 아하스로 말미암아 저질러진 여호와께 대한 범죄를 염두에 두고,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구속을 강조함으로써 속죄제를 더욱
의미있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대하29:24]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히스기야의 속죄제]
(주); 그 피로 속죄제를 삼아 단에 드려 - 속죄제의 피는 번제의 피와는 아주다르게 처리된다. 즉, 번제의 피는 단에 뿌리는 반면에(22절), 속죄제의 피는 번제단 뿔에 손가락으로 찍어 바르고 그 단 밑에 쏟아버렸다.(레 4:25, 34).
(주);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 여기서는 단순히 남유다만을 가리키지 않고 이스라엘 12지파 모두를 가리킨다(30:5). 이는 '유다를 위하여' 드린 것(21절)과 대조를 보이는데, 히스기야 왕은 속죄 받아야 될 대상을 북왕국까지 확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히스기야의 속죄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시행되었다. 이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전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합법적인 성소였기 때문이다(Keil).
(주); 속죄하니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카페르'(*)는 '계속해서 덮어 버리다'라는 뜻을 갖고 있고 주로 '보상하다'(atone),
'화해하다'(reconcile) 등의 뜻으로 쓰였다(Barker). 이 단어는 '역청으로 칠하여 덮다', '구속하다', '화해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카파르'(*)의 피엘형(Piel;강조형 능동) 부정사이다. 이러한 제사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바라보게 하는 임시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희생 제물을 통한 구속으로 죄가 없다고 인정되었으며 이러한 속죄 제사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바른 관계가
유지되었다.
성 경: [대하29:25]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회중의 여호와 경배]
본절은 히스기야가 전통에 따라 레위 사람들을 성전에 두어서 악기를 연주하게 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주); 다윗 왕의 선견자 갓과 선지자 나단의 명한 대로 -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하여금 찬양케 하고 악기를 연주토록 한 사람은 다윗이었다(8:14).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사역에 선지자 갓과 나단이 관여했다는 언급은 본절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Curtis). 짐작컨대 갓과 나단은 성전 예배와 레위인들을 24반차로 나누는 일에 관여했을 것이다(대상 29:29).
(주); 이는...명하셨음이라 - 이 구절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여호와의 손 안에서 그의 선지자들의 손으로 하신 명령 때문이라'(For in the hand of YHWH the command by thehand of His prophets)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손'과 '그의 선지자의 손'은 설명적동격이라고 볼 수 있는데(Keil), 이것은 선지자들의 중개에 의하여 하나님의 명령이 수행되는 것을 뜻한다(Zockler).
(주); 그 선지자들로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에는 '손'(*, 야드)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어떤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 잡는 힘을
상징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지시 아래 모든 일이 수행되었음을 가리킨다. 한편, '선지자들'이라는 호칭 속에는 다윗이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8:14에서는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갓과 나단을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 권능 아래
있던 선지자들의 명령에 의해서 다윗이 이 일들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본절의 '선지자'라는 호칭은 다윗보다 선지자들을 지시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본절은 하나님을 그 주체로서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대하29:26]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회중의 여호와 경배]
(주); 다윗의 악기 - 이는 다윗이 만들어 예배에 사용케 했던 악기들을 가리키는데(대상23:5), 앞절(25절)에서 열거한 악기들이다(대상 15:16 참조).
(주); 제사장은 나팔을 잡고 서매 - 본래 나팔을 부는 일은 제사장의 임무이다(5:12;대상15:24;16:6).
성 경: [대하29:27]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회중의 여호와 경배]
(주); 여호와의 시로 노래하고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쉬르-야웨'(*)는 문자 그대로 '여호와의 노래'((NASB)를 의미하는데, 히스기야 당시에 정경화된 시편들을 가리키는 듯하다(Payne).
(주); 다윗의 악기를 울리고 - 문자적으로는 '다윗의 악기에 의하여'인데(Zockler), 이는 악기의 연주가 회중의 노래나 제사장의 나팔 연주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성 경: [대하29:28]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회중의 여호와 경배]
본절은 모든 회중들의 경배가 있으면서 노래와 나팔 연주가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다윗의 악기를 연주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노래하는 자 중에 다윗의 악기를 연주하는 자가 있었음을 의미한다(23:12; 대상 25:1ff.).
성 경: [대하29:29]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회중의 여호와 경배]
(주); 엎드려 경배하니라 - 번제와 속죄 제사를 마치자, 왕과 그 함께 있는 자가 다 엎드려 경배하여 예배의 절정을 이룬다. '경배하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쉥타하우'(*)는 단지 육체적인 자세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자세를 말한다. 즉, 이는 존경과 경외가 커지고, 충성심이 점점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제사에 참여한 자들이 심령에 큰 감흥이 있어서 우러난 행동일 것이다.
성 경: [대하29:30]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회중의 여호와 경배]
(주);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詩) - 이는 27절에서 이미 언급한 '여호와의 시'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즉, 히스기야 시대에 정경화되어 있던
시편들 가운데는 다윗의 시편인 1권과 4권, 그리고 솔로몬의 시편인 2권(시 42-72편), 선견자 아삽의 시(시 50, 73-83편) 등이 포함된다(Payne).
역대기 저자는 본절에서 레위인들이 바로 이러한 시편들로 하나님을 찬양한 사실을 강조하려고 한 것이다(Keil). 한편 아삽을 '선견자'(*,
호제)라고 불렀는데, 성경에서는 아삽의 자손들이 성전 예배시에 노래하는 직분을 맡은 레위인으로 소개되고 있다(20:14;대상 6:39;15:19;25:1,
2;스 2:41;3:10;느 7:44;11:22;12:46). 이 선견자라는 칭호는 레위인 헤만(대상 25:5)과 여두둔(35:15)에게도 주어졌다.
성 경: [대하29:31]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회중의 감사제]
(주); 이에 히스기야가 일러 가로되 - 히스기야는 제사와 찬양, 그리고 온 회중과 왕의 경배를 마치자, 백성들로 하여금 화목 제물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전에 바치도록 권고(勸告)했다.
(주); 너희가 이제 몸을 깨끗케 하여 여호와께 드렸으니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너희가 여호와께로 향한 너희 손을 가득 채웠으니'(you have filled your hand to YHWH, Green)이다. 이 구문은 주로 무엇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봉헌하는(consecrate) 의미로 사용되었다(Barker). 그런데 본문을 앞서 드린 제사와 연관지워 볼 때, 제사에 참여한 모든 회중과 제사장, 레위인이 성결케 되었음을 가리킨다.
(주); 제물과 감사 제물 - 여기서 '제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제바힘'(*)은 희생 제물 전체를 가리키는 총체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화목제의 성격을 지닌, 감사를 표현하기 위한 희생 제물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레 7:11-21, 29-36). '감사 제물'(*, 토도트)은 이미 받은 어떤
특별한 은혜 때문에 희생제물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성전에서 여호와의 예배가 다시 새롭게 시작된 것을 기뻐하여 드린 제물을 가리킨다. 이 희생
제물은 기름을 떼어서 제단 위에서 태우고, 가슴과 오른쪽 넓적다리 부분은 제사장에게 바치며, 나머지 부분은 제물을 드리는 자들이 먹게 되는데,
유월절 절기 때와 유사하게 치러 진다(Curtis). 본래 번제와 속죄제의 경우, 제물을 드리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속죄제의
경우 태우지 않는 부분이 제사장에게 돌려졌으며, 더욱이 번제는 완전히 태워지는 것으로 그 제물은 마음에 원하는 자만이 바칠수 있는 것이었다.
성 경: [대하29:32]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강화]
주제2: [회중의 감사제]
(주); 회중의 가져 온 번제물의 수효는 - 이렇게 회중들이 스스로 자원하여 가져 온 번제물의 수효가 엄청나게 많은 것은 당시에 회중들의 신앙이
얼마나 열정적이었고 순수하였던가를 잘 말해준다.
성 경: [대하29:33]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강화]
주제2: [회중의 감사제]
(주); 또 구별하여 드린 - 여기서 언급된 동물들은 감사 제물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감사 제물들을 대부분 백성들이 먹고 즐겼을 것이다(Curtis).
성 경: [대하29:34]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강화]
주제2: [회중의 감사제]
(주); 그런데 제사장이 부족하여 - 레 1:6에 따르면 번제로 드릴 짐승을 잡고 그 가죽을 벗기며 각(脚)을 뜨는 일은 예배자들이 해야할 일이다. 그런데, 역대기 기자는 이 일을 제사장의 임무로 간주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레위기와의 차이에 대하여 보통 두 가지 견해가 지배적인데, 제물을 공적으로 드릴 때는 그 일을 제사장들이 수행하였다고 보는 견해이다. 따라서 이 일은 특징적인 제사장의 직무가 아니기 때문에 레위인들이 도울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Keil,Barker). 탈무드 문학에서는 제사장들이 도살자들로 지목되고 있다(Curtis). 한편 당시 이 일을 맡아 볼 제사장들이 부족했던 것은 번제 제물의 수가 너무 많았거나(32,33절), (2) 아하스 왕 이후로 우상 숭배로 한 제사장들(28:24,25;왕하 16:15,16;18:4)이 히스기야 왕으로부터 직무 정지를 받아 그 수가 감소되었기 때문인듯하다. 그래서 우상 숭배에 가담한 제사장들은 다시 성결함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Zockler).
(주); 이는 레위 사람의 성결케함이 제사장들보다 성심(誠心)이 있었음이라 - 제사장들은 레위인들보다 훨씬 더 정치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
그들이 국정(國政) 전반에 크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기 때문에, 레위인들보다 오히려 덜 종교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에도
소극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제사장들이 비록 직분때문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려고 했어도, 레위인들보다 성심이 부족했던 것은 그들이 아하스의
우상 숭배에 더 많이 관여했기 때문일 것이다(Keil). 또한 혹자는 역대기 저자가 레위인들을 더 선호하고 제사장들을 싫어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Benzinger, Curtis).
성 경: [대하29:35]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강화]
주제2: [회중의 감사제]
본절에서는 위에 언급된 일 이외에 다른 많은 일들로 제사장들이 분주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제사장들은 단 위에 피를 뿌리고 제물을 태우는 일 외에 감사 제물과 화목 제물, 자원하는 번제물(31절) 등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모든 번제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일까지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Curtis,Keil).
(주); 전제(奠祭) - 전제(the drink-offering)에는 포도주가 사용되었데 피를 붓는 것처럼 제단 밑에 부었던 것 같다(민 15:1-16,Curtis).
(주); 순서대로 갖추어지니라 - 이것은 성전을 성결케 하고 재봉헌하는 일 뿐만 아니라 정규적인 성전 예배가 완전히 부활되었음을 가리킨다.
성 경: [대하29:36]
주제1: [히스기야의 성전 정화]
주제2: [회중의 감사제]
(주); 이 일이 갑자기 되었을지라도...기뻐하였더라 - 이것은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을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은혜로 보고 그 일이 속히
이루어진 것을 히스기야와 백성들이 기뻐하였다는 뜻이다(Curtis). 이와같이 사악한 아하스의 배교(背敎)로 인하여 우상을 섬기던 상태에 있다가
여호와께 대한 열심과 충성의 상태로 급속하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하스 치하에서도 히스기야와 같은 신실한 자들을 예배해
두셨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그들은 기뻐한 것이다. 이처럼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은 인간의 시각에서 볼 때는
갑작스럽게 된 일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오랜 준비 과정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잠 16:1).
성 경: [대하30:1-27]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히스기야의 유월절 준수 명령]
본장은 히스기야가 성전 성결 사업과 재봉헌식을 마친 후에 지킨 유월절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열왕기에는 기록되지 않은 역대기 저자의
독자적인 기록이다.
성 경: [대하30:1]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히스기야의 유월절 준수 명령]
여기서는 2-9절의 내용을 개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주);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브라임과 므낫세 - 여기서 '온 이스라엘'의 동격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이다. 즉, '온 이스라엘'은 북왕국의 10지파를 가리킨다. 그런데 본절에 같은 의미의 두 단어, 즉 '온 이스라엘'과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함께 쓰여 있어 좀 이상하게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두 거지 해석이 있다. (1) 북왕국에만 특별히 편지를 보냈음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Barker). 그러나 당시 왕들이 보발군에게 보내는 것(6절)은 통상적인 연락 방법이었기 때문에 유다에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2)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비롯한 다른 지파들을 진술하여, '온 이스라엘'을 총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보는 견해(Keil). 이 주장은 매우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유월절은 북왕국 백성들까지 참여하는 최초의 행사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역대기 저자가 '유다'를 가리켜 '온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기도 하였기 때문에(11:3 ; 12:1,6 ; 15:17 ; 21:4 ; 28:19, 27), 온 이스라엘을 유다로 오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렇게 두 번에 걸쳐 구체적으로 기록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주); ...에 보내고...편지를 보내어 - 전자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 '이슐라흐'(*)는 '(사람, 물건 따위를)보냈다'는 뜻을 가진 동사 '솰라흐'(*)를 원형으로 갖는다. 또한 후자의 동사 '카타브'(*)는 '편지를 쓰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혹자는 전자의 단어가 편지 없이 보발군만 보낸 것을 뜻하고, 후자의 단어는 편지를 보낸 것을 뜻한다고 주장한다(Barker). 즉, 유다에는 편지를 보내지 않고 보발군만을 보냈고 이스라엘에게는 편지까지 써서 보발군을 통해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 이 두 단어는 서로 의미상 결합되어 '보빌군에게 편지를 주어 보내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는 (1) 6절에서 분명히 유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고, (2) 유다에는 편지를 보내지 않고 북이스라엘에만 편지를 보낸 이유가 본문 가운데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왕이 서신으로 각 성읍에 명령서를 보내는 것은 당시에 널리 사용되던 통상적인 연락 방법인 것이다. 한편, 북왕국 백성들이 유월절에 동참(同參)하는 것은 솔로몬 왕국이 여로보암에 의해 분열된 후 2세기 동안 금지되었다(5절, 26절 ; 왕상 12:27f.).
(주); 유월절(逾越節)을 지키라 - 히스기야가 유월절을 지키도록 선포한 때가 언제인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매우 다양하다. (1) 유월절 행사가
히스기야 통치 원년에 있었다는 견해 : 이 견해의 근거는 (까)29장과 30장이 접속사 '와우'(*)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고, (다)3절에사 제사장의
수가 부족했다는 기록은 29:34과 동일한 시기에 있었던 상황이며, (따) 2절의 2월은 29:3, 17의 정월의 다음달임을 나타내며, (마) 히스기야의
법으로 정해진 정월에 유월절을 지키지 않고 2월로 연기한 사실등을 들고 있다(Barker, Payne) (2)유월절 행사가 북왕국이 완전히 멸망한 이후에
있었다는 견해 : 이 견해의 근거는 (까) 성전 성결이 끝난 정월 17일부터 2월 14일까지의 기간은 유월절을 준비하기에는 너무나 촉박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단에서 브엘세바까지'(5절) 전 백성을 다 불러 모으는 데 3주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북왕국 백성들이 그렇게 빨리
모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 호세아 왕이 유월절 행사에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히스기야의 사신들을 비웃고 업신여긴(10절) 자들이
유월절 행사 후 온 이스라엘의 우상들을 파괴할 때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따) 앗수르가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사로잡아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하기도 쉽고 또 그것이 자연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Caspari, Keil). 위의 두 견해 가운데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10 히스기야의 명령서(5-9절)에 북왕국의 멸망이 암시되어 있고, (2) 이 견해가 역사적인 사실성을 충분히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후자의 견해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닌데, 살펴보면, (1) 왜 유월절이 다음 달로 연기되었느냐 하는
것이고(3절 주석 참조), (2) 어떻게 그 당시까지 바알 숭배가 근절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왕국의 우상들까지 제거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31:1), 그것은 충분한 반대 이유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히스기야가 유월절을 지키게 한 것은 히스기야가 즉위한 지 6년 뒤인,
사마리아 멸망(왕하 18:10)후임이 틀림없다(Keil).
성 경: [대하30:2]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히스기야의 유월절 준수 명령]
(주); 이 월에 유월절을 지키려 하였으니 - 본래 율법에서 규정한 유월절은 정월(니산월) 14일부터 7일간 지키도록 되어 있다(출 12:1-28, 43:49 ;
민 9:1-14). 그러나 만일 시체로 인하여 부정케 되든지, 먼 여행 중에 있어서 정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다음 달(이야르월) 14일
해질 때에 유월절을 지키도록 했다(민 9:10, 12). 그런데 히스기야와 방백들이 의논하여 유월절을 다음 달로 연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분명한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역대기 제자는 (1) 성결케 한 제사장이 부족하였고, (2)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3절).
성 경: [대하30:3]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히스기야의 유월절 준수 명령]
(주); 제사장이 부족하고 - 정규적인 유월절 때인 니산월(정월) 14일까지 성전 성결 사역을 마치지 못한 것을 보면 (29:17), 그때부터 이미 제사장이 부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에 성전 제사를 치룰 때에도 역시 제사장의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29:34). 이처럼 제사장이 부족했던 이유는 당시 유다의 제사장들 만으로 북왕국을 포함한 전국민의 유월절 행사를 치르어야만 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신당에서 우상을 숭배하던 제사장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Keil).
(주); 백성도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한 고로 - 여기서 '백성'은 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전체 백성을 가리킨다. 당시 백성들이 모이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10절을 볼때 북왕국의 역사적 상황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대하30:4]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히스기야의 유월절 준수 명령]
(주); 이 일을 선히 여기고 - 왕과 방백들과 예루살렘 온 회중이 공동 의회를 연 결과, 유월절을 이월로 연기해도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민 9:6-13), 유월절을 이월에 지키기로 결정하였다. 이와같이 왕이나 특권을 한 지배자에 의해서 독단적으로 일이 결정되지 아니하고,
방백들 뿐만 아니라, 온 회중과 더불어 합심하여 합의한 것을 볼 때, 히스기야의 개혁이 얼마나 민주적이며, 의로웠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대하30:5]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히스기야의 유월절 준수 명령]
(주);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 이것은 왕국이 분열되기 이전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 전국토를 지칭하는 경계선이다(대상 21:2).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북이스라엘의 존재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북왕국이 이미 멸망(滅亡)했다는 것을 보여준다(6절). 그뿐 아니라, 히스기야의 통치 영역이 북이스라엘까지 확장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 오래동안 지키지 못하였음이더라 - 여기서 '오랫동안'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라로브'(*)이다. 이는 전치사 '르'(* ; to)와 '다수',
'위대함', '큼'등의 뜻을 지닌 명사로 '로브'(*)가 결합한 것으로 부사구이다. 그런데, 이 부사구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되어 진다. (1)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로 '오랫 동안'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KJV, 한글개역 ; Rashi, Wette, Luther) : 이 경우는 유월절이 왕국 분단 이후로 오랜
기간 동안 지켜지지 않았음을 뜻하게 된다. (2) 양을 나타내는 부사로 '군중들 가운데', '무수한 대중에 의해서'라는 뜻을 나타내는 경우(RSV, NIV,
NEB ; Keil, Barker, Zockler) : 이렇게 볼 때 본절은 '이는 많은 무리들이 규정된 대로 그것을 지켜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RSV, for they had
not kept it in great numbers as prescribed)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전자의 견해보다 더욱 타당하다. 왜냐하면 히스기야가 통치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유월절을 치르지 않았다고 보기가 어려우며(Keil), 이전의 선한 왕들, 즉 아사, 여호사밧, 웃시야 등에 의해서도 유월절은
지켜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유월절을 지킬 수 없었고, 따라서 매우 많은 무리가 유월절을 지켜본 적이
없었으므로 히스기야가 브엘세바에서부터 단에 이르기까지 포고령을 내렸다고 해석될 수 있다.
성 경: [대하30:6]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왕의 보발군]
(주); 보발군(步撥軍) - 이들이 왕의 친위대(12:10)인지, 왕궁 수비대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쨌든 보발군의 임무는 왕의 포고령이나 편지를 각 지방의 방백들과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이었다.(에 3:13, 15; 8:14의 '역졸'과 비교).
(주); 왕과 방백들의 편지 - 왕의 편지 뿐만 아니라 방백들의 편지도 전달되었는데, 아마 방백들의 편지는 북왕국 백성들에게 '형제 의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왕의 편지만 전달되었다면, 히스기야의 통치를 거부하는 북왕국의 백성들이 크게 반발(反撥)을 일으켰을 것이다.
(주); 이스라엘 자손들아 - 이는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한 호칭인데, 내용상 북이스라엘에 초점이 및추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로 많은 백성이 잡혀간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유다 백성 뿐만 아니라 북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너희 열조와 형제'처럼 하지 말고 여호와께 돌아오라고(7절f.) 권유하고 있다.
(주); 너희 남은 자 곧 앗수르 왕의 손에서 벗어난 자 - 확실히 이 구절은 북왕국이 앗수르 왕 살만에셀(Shalmaneser)과 사르곤(Sargon)에 의해
멸망하였다는 사실(B.C. 722-721)을 전제로 하고 있다(왕하 17:6참조). 여기서 살만에셀은 3년간 사마리아를 포위(包圍)했던 왕이고(왕하 17:5).
사르곤(B.C. 722-705)은 사마리아를 완전히 점령한 왕이다.(사 20:1). 한편 살만에셀의 아들 사르곤의 기록에 의하면,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사람은 27,290명이었고, 그 이전에도 디글랏 빌레셀 왕에 의해서 많은 포로들이 잡혀갔다(왕하 15:29 ; 대상 5:26).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이 여러
차례에 걸쳐 잡혀간 후, '남은 자'는 히스기야 왕의 부분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으므로 그 '남은 자'들에게까지 편지가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성 경: [대하30:7]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왕의 보발군]
(주); 너희 열조와 너희 형제같이 하지 말라 - 여기서 '너희 열조'는 앗수르 왕, 불이나 디글랏 빌레셀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대상 5:26), 또 '너희 형제'는 사마리아 멸망 당시 사르곤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가리킨다(Keil) 따라서,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은 자로 간주되었고, 그들은 남유다의 백성과 동일하게 언약의 백성으로 이해된 것 같다.
성 경: [대하30:8]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왕의 보발군]
(주); 목을 곧게 하지 말고 - 열왕기의 느헤미야 기자도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여로보암 시대 이후 북왕국 백성들이 목을 곧게 하였기(왕하 17:14 ; 느 9:16) 때문이라고 각각 기술하고 있다. 이는'남은 자'들 역시도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심판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주); 여호와께 귀순하여 - '귀순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누- 야드'(*)의 원뜻은 '손을 내어 주다'(give a hand, Green)이다. 이는 자신을
온전히 여호와께 맡김으로 충성하겠다는 사약(誓約)을 뜻한다(왕하 10:15 ; 스 10:19 ; 겔 17:18). 이와 동일한 단어가 대상 29:24에서는
'복종하다'로 번역되었다.
성 경: [대하30:9]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왕의 보발군]
(주); 너희가 만일...돌아오면 - 본절은 왕상 8:50을 반복한 것으로(Williamson), 포로된 자들이 다시 본향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먼저 남은
자들의 회개가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한편 본절과 8절은 솔로몬의 성전 봉헌기도와 깊은 연관이 있다(6:24, 25). 또한 이는 모세에 의해 선포된
예언(레 26:40-42)에 근거한 것이다.
성 경: [대하30:10-12]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백성들의 상반된 반응]
히스기야의 초청(招請)에 대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성 경: [대하30:10]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백성들의 상반된 반응]
(주); 스불론까지 이르렀으나 - 스불론은 아스라엘 북쪽 경계 지역인 단으로부터 남으로 약 40km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본래 단에까지 이르러 유월절을 선포하라는 명령(5절)에 미치지 못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즉, 스불론 북쪽에 있는 단이나 납달리 지방의 주민들은 디글랏 빌레셀에 의해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에 거주자들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왕하 15:29). 따라서 '스불론'만을 언급하게 된 이유는 보발군이 단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갔다 하더라도 아무런 성과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주); 사람들이 저희를 조롱하여 비웃었더라 - 이런 일은 유다가 멸망하던 당시에도 있던 일로서(36:16),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도덕적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성 경: [대하30:11]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백성들의 상반된 반응]
(주);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중에서 - 여기서'아셀'은 북쪽 경계선 지역이 아니라 보다 남쪽 지역을 가리킨다(Zockler). 북쪽 이스라엘 지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롱하며 비웃었지만, '몇 사람'은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성 경: [대하30:12]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백성들의 상반된 반응]
(주); 하나님이 또한 유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사 - '하나님이 감동시키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예타 야드 하엘로힘'(*)을 직역하면 '하나님의 손이 있었다'(RSV, The hand of God was)는 뜻이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자에게는 진노(震怒)를 베푸심을 나타낸다(스 8:22). 그런데 구약 성경의 '야드 야웨 하예타 브'(* ; 여호와의 손이 ~안에 있다. The hand of YHWH was in)라는 구절에서의 '하나님의 손'은 주로 자법적인 형벌을 의미한다(출 9:3 ; 신 2:15).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미하는 것이고(Keil),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유다 사람들에게 선한 뜻을 품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한 명령 - 29:15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규례(規例)와 말씀에 준한 히스기야의 명령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여기고 받아들였음을 가리킨다. 한편 '말씀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데바르'(*)는 '대로'에 해당하는 전치사'브'(* ; in,
by)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서 '말씀'(*, 데바르 : 연계형)은 단수로 쓰였는데, 이는 29:15의 복수형 '여호와의 말씀'(개역, the words of
YHWH)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말씀'(the words)을 인성화(人性化 : hypostatization)하는 예이다. 즉, '말씀'은 대부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재하는 영(spirit)으로 생각되어졌다(삼상 3:21 ; 왕상 13:1, 2, 5, 9, 17, 18, 32 ; 20:354, Curtis). 이러한 '말씀의 인성화' 개념은 신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곧 '태초에'('E* ' , 엔 아르케), '그 말씀'(*, 호로고스)이 계셨고(요 1:1),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 , 호
로고스사륵스 에게 네토). 따라서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구약에 계시된 '그 말씀'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완전히 드러난 것이다.
성 경: [대하30:13]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무교절 준수]
(주); 무교절 - 이 절기는 유월절과 동일시 되는데, 특별히 유월절은 첫날의 전야, 즉 14일(레 23:5)을 가리키며, 그 날에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제가 드려지고, 그 다음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며 무교절을 지킨다. 그러나 '유월절'이라는 명칭에는 7일간의 무교절이 포함되기도 하는데(신
16:2, 3 ; 겔 45:21-25), 그 이유는 유월절 음식 자체가 무교병이었기 때문이다(신 16:4). 이 절기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출
13:6-10)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 이전에도 이스라엘 자손들이 지키던 절기가 있었는데(출 5:1 ; 10:9), 이것이 유월절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IBD). 혹자는 유월절이 본래 유목민들의 축제였고, 무교절은 가나안의 농업 축제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이 두 축제를 하나로 결합시켰다고 본다(Welhausen, Curtis). 이는 셈족 문화 가운데 나타난 유사한 의식에 대한 고고한적 지식을
근거로 하여 가설을 세워서 재구성하였을 뿐이며, 사실과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IBD). 단지 여기서는 무교절과 유월절이 동일시 되고 있을
뿐이며, 신약에서도 이 두 절기는 같은 절기로 인식되고 있다(막 14:1, 12; 눅 22:1).
성 경: [대하30:14]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무교절 준수]
(주); 제단과 향단들을 모두 제하여 -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이미 성전을 성결(聖潔)케 하였던 것처럼(29:15ff.), 백성들도 모인 후에 예루살렘
성읍을 성결케 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읍 구석구석에 이하스가 설치해 두었던 제단들(28:24f.)을 모두 제거하여, 제사장과 레위인들과
마찬가지로(29:16) 기드론 시내에 던졌다.
성 경: [대하30:15]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무교절 준수]
(주); 유월절에 양을 잡으니...부끄러워하여 - 백성들이 성읍을 정결케 한 뒤 드디어 유월절 양을 잡으므로 모든 행사 준비를 완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은 여전히 지체하여 자신을 성결케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29:34), 백성들의 종교적인 순수함과 열정이 그들에게는 채찍이 되었을 것이다(Pavne). 한편 제사장들이 여태까지 자신을 성결케 하는 하는 일을 지체하였던 이유는 예전에 우상 숭배에 관여했던 일로 인해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거나, 백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종교적인 열정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Zockler).
(주); 번제물을 가지고 - 번제는 백성들 자신의 속죄를 위한 대속물로서 특별히 유월절 어린 양을 드리는 제사이다. 이 제사의 특별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열 번째 재앙으로부터 구원하셨던 사건을 기념하고(출 12:27), (2) 모든 죄인들에게 대속의
희생 제사가 반드시 있어야 함을 상징하며(출 13:15), (3) 장차 모든 사람들의 구속주로서 오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궁극적인 구원이 있음을
예표한다(고전 5:7).
성 경: [대하30:16]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무교절 준수]
(주); 규례대로 각각 자기 처소에 서고 - 유월절 양의 제사는 율례에 규정된 대로 진행되었다.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위치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레 1:11-13에 따르면 제물을 드리는 자는 제단 북편에서 어린 양을 잡고, 제사장들은 그 피를 받아 단 사면에 뿌리도록 되어 있다.
(주); 제사장이 레위 사람의 손에서 피를 받아 - 출 12:6에 따르면, 유월절 어린 양은 회중(會衆)들을 잡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회중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성결치 못하였기 때문에(17절), 레위인들이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제사장에게 전해 주었다. 동일한 이유로 요시야 왕
때에도 유월절 양을 레위인들이 잡았다(35:11). 그리고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스 6:19, 20).
성 경: [대하30:18]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무교절 준수]
(주); 자기를 깨끗케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정규적인 제사나 성결케 하는 의식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의
상태에 있다고 간주되었으므로, 법적으로도 부정한 상태대로는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었다(민 9:6). 한편, 이들이 유월절 규례에 따라 스스로
정결케 못한 이유는 아마 시간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보발군들이 히스기야의 초청장을 전하고, 또 초청장을 받아 그들이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왔다 할지라도 사실상 한 달이라는 시간은 너무 촉박할 수밖에 없다(1-3절). 그러므로 본래 부정한 상태에 있던 그들이 스스로 성결케 하는 일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 여기서 히스기야의 기도는
부정한 자들이 유월절 양의 피에 동참할 수 있게 하는 중보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 경: [대하30:19]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무교절 준수]
(주); 여호와를 구하는 아무 사람이든지 - 본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즉, 율법을 여자적(女子的) 으로 준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찾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또한, 히스기야의 중보 기도 후에 '크게 즐거워'한 것을 보면, 그들의
결례로 인하여 죄책 가운데 있었던 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기록한 규례보다 심령의 상태를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도 율법을 제정한 본래 의도를 중요하게 여기셨고, 바리새인을 비롯한 형식적인 종교인들을 향하여 참 믿음과 의(義)가 없음을 책망하셨다.
이는 믿음이 형식보다 앞선다는 성경적 원칙(요 7:22f. ; 9:14ff.)을 뒷받침 해준다. 한편, '구하는 아무 사람'에게나 용서를 해달라는 간구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함을 의미한다(요 16:23 ; 엡 4:32). 이러한 배경하에서 십자가 우편에 있던 강도의 구원도 구속자로 말미암은
이러한 은혜의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눅 23:40-43).
성 경: [대하30:20]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무교절 준수]
(주); 백성을 고치셨더라 - '고치셨더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동사 '라파'(*)는 엄밀한 의미에서 육체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혹자는 실제적으로 자신을 정결케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은 사람들이 질병에 걸려 히스기야의 중보 기도로 치유함을 받았다고
주장한다(Bertheau). 그러나 여기서는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보다는 죄로 말미암은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Keil,
Curtis). 이 단어를 이와 같은 용례로 쓴 곳은 많다(시 41:4 ; 렘 3:22 ; 호 7:1).
성 경: [대하30:21]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무교절 준수]
(주); 크게 즐거워하며 - 주로 큰 절기나 새로운 언약적 사건들이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쁨을 표시하였다(23:21 ; 대상 29:22 ; 시 112:1). 예루살렘에 모인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7일 간의 무교절을 지키면서, 자신들의 죄를 사해 주시고 다시 언약의 백성으로 영접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즐거워 하였다.
(주); 큰 소리 나는 악기를 울려 - 이 악기들은 여호와의 능력을 찬양하기 위해 사용되었다(Keil). '큰 소리 나는 악기'에는 예배시에 사용되는
레위인들의 형악기, 제사장들의 나팔, 시편을 노래하는 성가대의 찬양(29:25 - 28)이 포함될 것이다(Keil). 그리고 이와 같은 큰 성회는 무교절의
맨 마지막 날인 제7일째에 있었는데(레 23:6-8), 여기서는 7일 동안 계속 있었던 것 같다.
성 경: [대하30:22]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무교절 준수]
(주);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통달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여호와에 관하여 좋은 지혜를 소유한'이란 뜻이 된다. 이는 좀더 전문적인 지식과 연구를 통하여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종사하는 특별히 구별된 사람들을 가리킨다(Keil).
(주); 위로하였더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아무개의 마음에 말했다'(spoke to heart of someone, Green)이다.
(주); 무리가 먹으며 화목제(和睦祭)를 드리고 - 음식을 통하여 사람들과의 교제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도 증진하게 된다. 이는 또한 생명의 떡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요 6:35)로 말미암은 진정한 화목을 예표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만찬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됨의 증표이며, 영원한 세계에서 갖게 될 기쁨의 잔치를 보여 주는 것이다.
(주);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였더라 - 여기서 '감사하였더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미트외딤'(*)은 '던지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야다'(*)의
히트파엘(Hitpael)형인 '히트왓다'(* ; 고백하다, 찬양하다)의 분사 남성 복수형이다. 따라서 '고백하였다'(KJV, LB, NEB), '찬양했다'(NIV, JB,
공동번역),'감사했다'(NASB, RSV 개역, 현대인의 성경)등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이 '감사하였다'에 동의 한다(Keil, Lange,
Curtis).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그 열조의 하나님이 되셔서, 언약을 깨지 않았음을 보여 주시는 것으로 인하여 기쁨으로 고백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 경: [대하30:23]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백성들의 희락]
(주); 다시 칠일을 지키도록 결의하고 - 온 회중이 결정하여 절기를 한 주 더 연장시켜 2주 동안 계속 절기를 지켰다. 이와 유사한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奉獻式) 때에도 그 행사가 2주 동안 계속되었는데(7:8-11), 그 때에도 백성들의 자발적인 결의에 의해서 연장되었다.
성 경: [대하30:24]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백성들의 희락]
본절에 해당하는 히브리 본문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로 시작된다. 따라소 본절은 유월절 행사가 한 주간 더 연장된 이유들이 서술되고 있다(Keil, Zockler, Payne). 그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왕과 방백들이 회중에게 준 제물용 가축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온 회중이 다시 칠일을 지키기로 결의'한 것은 자발적이고, 신앙 고백적인 감사의 표현이었지만, 이처럼 연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풍부한 음식이 제공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절은 밝히고 있다. 이처럼 많은 제물을 백성들을 위해 내놓음으로 온 백성들의 기쁨이 더하였고, 지속적으로 좋은 인상이 남도록 하였을 것이다.
(주); 성결케 한 제사장도 많았는지라 - 이미 성결함을 받은, 많은 제사장들은 그처럼 많은 제물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Keil, Curtis). 이는 연장된
주간에 제사가 새로이 치루어졌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절기의 첫 주간에 제물들을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는 의미인 것 같다. 왜냐하면, 유월절
행사를 열지 못한 이유가 '성경케 한 제사장'의 부족 때문이었는데(3절), 연기된 유월절을 준비하면서, '성결케 한 제사장들'이 충분하게
확보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대하30:25]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백성들의 희락]
본절에서는 유월절에 참여한 구성원들을 설명하고 있다. 즉, (1)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포함한 유다 백성들, (2) 북왕국에서 온 백성들, (3)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나그네들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나그네들'(*, 게림)은 유다와 북 이스라엘에 있던 개종자들을 가리킨다는
견해(Curtis)는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한 듯하고, 사실상 '게림'이라는 말은 '거류민', '체류자'를 뜻하는 것이며(Barker), 15:9에 의하면
그들(개역 성경에는 '우거하는 자'로 번역됨)은 에브라임, 므낫세, 시므온 출신으로 언급되어 있다(Zockler). 솔로몬 시대에는 이방인들이 부역자로
쓰이기 위해 모여졌는데(2:17 ; 대상 22:2), 여기서는 이들이 유월절 규례에 따라 유월절에 참예하고 있다(Curtis). '나그네'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 이전에는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면서, 이스라엘 종교를 받아들인 '체류 외국인'이었다. 그들은 떠돌이 부랑자와 달리 유월절에 동참할 수
있었다(Williamson).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된 자들은 그 혈통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구속(救贖)이 적용되었다.
성 경: [대하30:26]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백성들의 희락]
(주); 솔로몬 때로부터...없었더라 - 이는 이 축제가 솔로몬의 성전 봉헌의 축제에 비할 만큼 성대하였음을 보여 주며, 그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에서 돌이켜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며, 그로 인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하여 '큰 희락'은 회중들로 하여금 결단하게 하고, 우상들을
깨뜨리는 결과(31:1)를 가져오게 하는 진정한 회복이었다. 또한, 외형적으로 보아도 절기의 기간을 2주로 연장한 것이나, 참가자의 수, 그리고
기쁨의 크기 등에서 과히 솔로몬의 축제와 비견할만 했다는 것이다.
성 경: [대하30:27]
주제1: [히스기야의 유월절 축제]
주제2: [백성들의 희락]
(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 대부분의 역본들에게서는 본문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사이에 연결사 '와우'(* ; and)가 나온다(70인역, 벧게이트, 수리아역, 아라비아역 등). 하지만, 맛소라 본문(MT)에는 연결사 '와우'(*)가 없어서 '레위인 제사장들'(Levitical priests, 레위인이면서 제사장인 사람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JB ; Keil, Williamson, Barker, Payne). 따라서, 이 사람들은 레위인 전체을 말하지 않고 제사장들을 말한다(신 17:18 ; 수 3:3). 축복할 수 있는 권한은 제사장들에게 있었다(민 6:23-26 ; 대상 23:13).
(주); 축복하였으니...상달(上達)하였더라 - 제사장들이 축복하는 것으로 유월절 행사가 끝나는 것 같다(31:1). 그리고 그 기도가 하늘에
상달하였다는 역대기 기자의 진술은 이 유월절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응답의 확신을 표현한 것이다(Zockler).
성 경: [대하31:1]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백성들의 우상 타파]
본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유월절 행사를 2주에 걸쳐 마치고 나서, 아세라 목상과 바알 주상을 파괴하는 등, 우상 타파 운동을 전개한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왕하 18:4에도 우상 타파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는데, 역대기에는 나타나지 않는 '놋뱀'(느후스단)도 파괴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열왕기 기자는 우상 타파가 히스기야 왕의 행적인 것으로 서술한 반면, 역대기 기자는 유월절 행사를 마친 후 백성들이 행하였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주); 에브라임과 므난세 온 땅에서 - B.C. 722년 사마리아가 멸망한 이후 그곳은 앗수르에 의해 점령당하였다(왕하 17:24). 그렇다면 그 당시 과연
북왕국의 우상들까지 파괴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 이러한 문제 때문에 혹자는 유월절 행사을 이스라엘 왕 호세아가 포로로 잡혀 있을 때,
북 이스라엘이 왕 호세아가 포로로 잡혀 있을때,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 구체적으로 히스기야 통치 원년(元年) 2월에 있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O. Zockler).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30:1 주석을 참조하라. 그러나 앗수르가 피지배 국가의 종교적인 행사까지 금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성 경: [대하31:2]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제사 직무 정비]
(주); 히스기야가...반차를 정하고 - 여기서 히스기야는 다윗이 처음에 정했던 대로(대상 24;1) 제사장과 레위인의 반차를 재조직한 회복자로 소개되고 있다. 이 반차는 아하스의 통치 기간 동안에 사라졌었다.
(주); 여호와의 영문(營門) - 이는 성전을 지칭하는 비유적 표현으로(대상 9:18, 19),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성막을 중심으로 진쳤던 것을
연상시키는 말이다(민 2장).
성 경: [대하31:3]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제사 직무 정비]
(주); 또 자기의 재산 중에서 얼마를 정하여 - 히스기야 왕은 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자기 재산의 일부를 바쳤다. 그리고 그것을 공적인
예배의 번제로 드리게 했는데, 이와 같이 공적인 제사에 번제물을 제공하는 것은 왕의 당연한 의무였다. 이로 보아 히스기야는 이 의무를 충실히
행한 모범적인 왕이었다(Curtis). 혹자는 이때에 히스기야가 낸 재물이 '십일조'였다고 하는데(Barker), 그것보다는 오히려 성전 예배를 보존하기
위한 왕의 임무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Curtis). 1절에서는 백성들이 우상 타파를 주도 하였던 반면, 본 구절에서는 히스기야 왕이 먼저
번제물을 내고 나서 백성들에게 명령하는 것(4절)으로 보아 히스기야 왕이 구체적인 면에서 본을 보이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대하31:4]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제사장과 레위인의 응식]
(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응식(應食)을 주어 - '제사장들'에게 주어지는 응식은 원래 제물의 일정한 부분(레 6, 7장)과 토지에서 나는 첫
열매(출 23:19 ; 민 18:12)였고, '레위인들'에게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5절 ; 레 27:30-33 ; 민 18:21-24)가 주어졌다. 이러한 규정은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율법을 힘써 지키고, 율법에 규정한 대로 성전 예배에 전념하여 봉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느 13:10-13). 그러나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신앙적인 열의가 식었을 때는 이러한 규정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생계에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삿 17장). 반면에 신실히 히스기야 왕은 그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을 위하여 살도록 생계 보장을 확실하게 해 준
것이다.
성 경: [대하31:5]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제사장과 레위인의 응식]
(주); 이스라엘의 자손 - 이는 일차적으로 예루살렘에 거한 백성들(4절)을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는 유다 백성들 전체를 가리킨다. 북왕국 백성들의 십일조에 관해서는 6절에서 소개하고 있다.
(주); 모든 소산의 처음 것 - 민 18:12, 13에 따르면, 이것은 제사장들의 응식이다. 한편 밭에서 나는 소산 가운데 꿀은 여기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Curtis). 난외주의 '대추야자'로 고쳐져서 소개되고 있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주); 풍성히 드렸고...많이 가져 왔으며 -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의 첫 소산과 십일조를 낸 때에 인색하지 않았으며, 히스기야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주); 모든 것의 십일조 - 이는 레위인들의 응식으로 주어졌으며(민 18:21-24 ; 느 12:44), 이 가운데 또 십의 일은 여호와께 거제물로 드렸으며,
그 거제물은 제사장의 응식이 되었다(민 18:26).
성 경: [대하31:6]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제사장과 레위인의 응식]
(주); 유다 여러 성읍에 거한 이스라엘 - 이는 북왕국에서 이주하여 정착한 이스라엘 거주민들을 가리킨다.
(주); 유다 자손 - 이는 5절의 예루살렘 거민들 이외의 다른 유다 성읍들에 있는 거민들을 가리킨다.
(주); 소와 양의 십일조 - 이에 관해서는 레 27:31-33에서만 언급된다.
(주);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 - '구별하여 드릴 성물'이란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바친 십일조를 가리켜 성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한
제사장들에게 바치는 첫 소산물도 성물이라고 칭했다(레 23:20). 그런데 '그 성물의 십일조'란 레위인들이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렸던 거제물을
가리킨다(민 18:8, 11, 19). 따라서 이 문맥은 '거제물'을 풀어 설명한 것으로서 '성물의 성물'이라고 설명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가
모든 육축과 밭의 소산물의 일부분(remnant)인 것처럼 거제물(*, 테루모트)은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하여 드린 성물의 일부분인 것이다(Keil, O.
Zockler).
성 경: [대하31:7]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제사장과 레위인의 응식]
(주); 삼 월에 쌓기를 시작하여 칠 월에 마친지라 - 3월에는 칠칠절 또는 맥추절, 오순절이라고 부르는 절기가 있는데, 이 때에는 그 해의 발의 첫
소산물을 거두어 여호와께 요제로 드렸다(출 23:16 ; 34:22 ; 레 23:15-21 ; 민 28:26-31 ; 신 16:9-12). 그리고 칠월에는 장막절 또는
수장절이라는 절기가 있는데, 이 때에는 모든 곡식의 추수를 바치게 된다.
성 경: [대하31:8]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제사장과 레위인의 응식]
(주); 더미를 보고 여호와를 송축하고 - 모든 백성이 성심(誠心)으로 일년 동안 추수한 것의 십일조를 바친 것은 모든 수확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편, 백성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바친 십일조의 더미는 기대 이상의 것이었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더욱
인식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히스기야와 방백들은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고 백성들을 위해 복을 기원하였다.
성 경: [대하31:9]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제사장과 레위인의 응식]
(주); 히스기야가...물으니 - 히스기야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이렇게 많은 성물들이 더미로 쌓여 있는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즉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충분히 응식으로 가져 갔다면, 성물이 이렇게 많이 남지 않았을 것이므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었던 것이다.
성 경: [대하31:10]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제사장과 레위인의 응식]
(주); 대제사장 아사랴 - 이 사람이 웃시야 시대에 활동하던 대제사장인지는 분명치 않다(26:17, 20). 만일 그가 웃시야 시대의 대제사장과 동일 인물이었다면, 아하스 시대에는 우상 숭배가 극심하여 대제사장직에서 쫓겨나 있다가, 히스기야에 의해서 재등용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아하스 시대에 대표적인 제사장이었던 우리야는 우상 숭배에 적극 참여하였다(왕하 16:10). 한편 솔로몬 당시에도 사독의 자손인 '아사랴'(개역 성경, 아사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제사장이 있었다(왕상 4:2).
(주); 예물 - 여기에는 거제물을 포함한 모든 희생 제물, 즉 소제, 속소제, 속건제를 위해 드리는 제물들이 포함된다(민 18:8-11). 이것은 백성들이 제사장들에게 십일조와 첫 소산물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성전에 출입하여 많은 예물을 드렸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 예물은 모세의 규례에 따라 제물로 드려졌고, 제사장들의 응식으로 소비되었는데, 상당히 많은 예물이 남을 정도로 풍족하였다.
(주); 그 남은 것이 이렇게 많이 쓰였나이다 -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가 이처럼 많이 남을 정도로 풍족했다는 것은 백성들의 수확이 얼마나
풍성했는지 짐작케 해준다. 제사장 아사랴는 이러한 결과가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잘
관리하여 모든 제사장과 레위 족속들에게 나누어 주었고(11절-19절),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것인 줄로 알고 신실하게 잘 보관하였다.
성 경: [대하31:11]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성물(聖物) 분배]
(주); 전 안에 방 - 성소와 지성소의 벽 주위에는 다락들이 있었는데 하층, 중층, 상층의 다락들로 구분되었다(왕상 6:5, 6). 이 다락들은 주로
저장소로 쓰였다.
성 경: [대하31:12]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성물(聖物) 분배]
(주); 성심으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에무나'(*)는 '진실하다' 또는 '충성되다'라는 뜻을 가진 '아만'(*)에서 파생된 말로서 거짓과 외식(外飾)이 없이 맡은 의무들을 성실히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19:9).
(주); 고나냐 -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세우셨다'이다. 이 사람은 예물들을 관리하고 배분하는 총책임자였다.
(주); 시므이는 버금이 되며 - 여기서 '버금이 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네'(*)는 '두 번째가 되다'라는 뜻의 동사 '솨나'(*)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서열이나 직위상 '제 2위'라는 뜻이다.
성 경: [대하31:13]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성물(聖物) 분배]
본절에 나오는 10명의 레위인들은 고나냐와 시므이의 수하에서 돕는 감독자들이었다. 이 가운데 여히엘과 마핫은 29:12, 14에서도 나온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을 관리하는 '아사랴'는 10절에서 언급된 제사장이다.
성 경: [대하31:14]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성물(聖物) 분배]
본절은 하나님께서 자원하여 드린 예물을 담당하는 자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주); 임나의 아들 고레 - 대상 9:19에서는 고레의 아들 살룸이 문지기로 소개되고, 대상 26:1에서는 고레의 아들 므셀레먀가 문지기로 소개된다.
(주); 즐거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 이는 의식(儀式)을 치르기 위한(ritual) 것이 아니고, 순수한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예물이었음을 가리킨다. 이는 율법에 규정된 첫 소산이나 십일조 뿐만 아니라, 그 외에 바치는 예물들을 포함한다(레 23:38 ; 신 12:17).
(주); 여호와께 드리는 것 - 이는 거제물과 화목 제물로서 제사장들에게 속한 것이다(레 7:14, 32; 10:14, 15 ; 민 5:9).
(주); 지성물 - 이는 속죄 제물과 속건 제물로서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먹었다(레 2:3,10 ; 6:18,30 ; 7:6 ; 10:12,17 ; 14:13 ; 민 18:9). 한편
혹자는 '자원제'속에는 성전에 바치는 선물들도 포함된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은금이나 그릇들을 가리킨다고 한다(출 35:29 ; 36:3 ; 스 1:6 ;
8:28, Curtis).
성 경: [대하31:15-19]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성물(聖物) 분배]
본문은 고레의 수하에 있는 6명의 레위인들이 제사장의 성읍들에게서 맡은 직임(職任)을 따라 성물을 나누는 일에 대해 소개한다.
성 경: [대하31:15]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성물(聖物) 분배]
(주); 무론 대소하고 나눠 주되 - 히스기야는 성전에서 직분을 수행하지 않는 레위인과 그 형제들에게 예물을 나누어 주도록 6명의 레위인들을
세웠다. 한편 14절에서 고레가 자원하는 예물과 거제물과 지성물을 나누어 주었다고 했는데, 제사장의 성읍에 있는 사람들에게 첫 소산과 십일조,
자원하는 예물 등은 분배되었으나, 지성물은 분배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14절) 설명한 바와 같이 지성물은 성소에서 먹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Curtis).
성 경: [대하31:16]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성물(聖物) 분배]
(주); 삼 세 이상 -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세살 때부터 공적으로 응식(분깃)을 받았다(Curtis, Keil). 그리고 3세 이하의 아이들은 당연히 보호받아야 할 아기로 취급되었다. 그러므로 3세 이상만 되면 그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자기 몫을 먹었기 때문에 제사장의 성읍에서 따로 나누어 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Keil).
(주); 날마다...나눠 주며 - 한글 개역 성경에 의하면, '날마다'가 '들어가서'를 수식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히브리어의 어순 구조상 '날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몫'으로 수식되어 나타난다(느 11:23).
성 경: [대하31:17]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성물(聖物) 분배]
(주); 그 족속대로...제사장들에게 나눠 주며 - 제사장들이 맡은 직임은 그 순서나 봉사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차이에 근거해서 나누었을 것이다.
(주); 레위 사람들에게 나눠 주며 - 20세 이상으로서, 직임을 맡은 레위인들은 그 반대차로 즉 그들이 봉사하는 일의 종류와 시간에 따라 몫을
나누어 받았다(Curtis). 한편 레위인들은 20세 이상이 되어야만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었다(23:24, 27).
성 경: [대하31:18]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성물(聖物) 분배]
(주); 온 회중 - 본절은 15절과 연결되며, 16, 17절은 삽입절로서, '온 회중'은 '그 형제'에 해당된다(Keil, Barker, O. Zockler). 또한, '온 회중'은 삽입절(16, 17절)에서 언급되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Curtis). 따라서 본 구절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의 가문 전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이다(Keil, Barker, O. Zockler, Curtis). 한편 제사장과 레위인 가문 전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언급하는 방식에 있어서, '족보에 기록된 제사장들'과 '직임 맡은 레위 사람들'을 기준으로 그들의 가족 전체를 언급하는 것 같다.
(주); 성결하고 충실히 그 직분을 다하는 자며 - 이 구문은 자신을 성결케 하여 그들의 거룩한 직분을 충실히 행한 제사장들을 가리킨다(Curtis).
그리고 본절은 그들이 성실하게 직무를 다 이행했기 때문에 그들의 가족들 또한 몫을 배당받을 수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성 경: [대하31:19]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 회복]
주제2: [성물(聖物) 분배]
본절은 성읍에 거주한 제사장들 외에 성읍 외부 들에 거주한 제사장들에게도 그들의 응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 가까운 들에 거한 아론 자손 제사장들 - 성읍 가까운 들에 제사장들이 거하고 있었다는 기록은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한편 그들이 여기서
무엇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마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기업으로 배당된 들에서 가축과 짐승들을 키우고, 기타 농산물을 경작했을
것이다(레 25:32-34 ; 민 35:2-5).
성 경: [대하31:20,21]
주제1: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직책 회복]
주제2: [히스기야 형통]
본문은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및 결론 부분이다. 이러한 평가는 흔히 통치 기사 서론에서 언급되는데(29:2), 역대기 저자는 여기서 한번 더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한편 본문은 강력하고도 간결하게 구약 역사를 표현하는 형식의 한 예로서(Barker), 히스기야 개혁의 위대성을 나타내고 있다.
(주);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 여기서 '선'과 '정의'는 우상을 타파하고, 율법과 계명들과 여호와 예배의 질서 등을 회복한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진실함'이란 이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히스기야의 마음 자세, 즉 그의 중심이 어떠했는가를 보여 준다(12절). 그는 자기의 명예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개혁을 추진했던 것이다.
(주); 그 하나님을 구하고 일심으로 행하여 - 이것은 히스기야가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서 쏟은 열정과 노력과 수고를 나타내 주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주의 사역(使役)을 감당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과, 그 도우심을 따라 행하는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성 경: [대하32:1-23]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앗수르의 침입]
본문은 산헤립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침공한 사건을 기록한 것인데, 왕하 18:13-19 :37과 사 36, 37장에서도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
성 경: [대하32:1]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앗수르의 침입]
(주); 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 - 본절은 히스기야 종교 개혁을 실시한 이후로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하였음을 보여 준다. 이는 '히스기야 즉위 14년째'의 일이었다. 관련된 연대기 문제에 대해서는 왕하 18:13 주석울 참조하라.
(주);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 사르곤의 아들인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한 것은 B.C. 701년 이었다.
(주); 견고한 성읍들을...취하고자 한지라 - 왕하 18:13에서는 산헤립이 이 성읍들을 쳐서 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앗수르 비문에 의하면,
이때에 앗수르가 유다를 쳐서 취한 유다 성읍의 수가 46개라고 한다(Curtis). 열왕기 기자는 이 사실과 함께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많은 뇌물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왕하 18:13-16), 역대기 기자는 자신의 의도에 맞추려고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듯하다. 즉, 역대기 저자는 히스기야에게 불리한 평가를 내리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도우셨는가하는 측면에서 기록하고자 했던 것같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히스기야가 산헤립의 유다 침공에 대해서는 아래 지도를 참조하라.
성 경: [대하32:2]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방비]
(주);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 산헤립에게 뇌물을 주고 나서, 그 뇌물이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또 다른 조치를 취했을
것이며(왕하 18:13ff). 그 조치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방어 자세를 계속 견지하는 것이었다(3-8절).
성 경: [대하32:3]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방비]
(주); 더불어 의논하고 - 이와같이 히스기야 왕은 항상 나라의 중대사를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방백들이나 백성들과 의논하여 처리하는 자상한 면을 갖고 있었다(30:2).
(주); 성밖에 모든 물 근원(根源)을 막고자 하매 - 여기서 '막고자 하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싸탐'(*)은 '막다'(shut up),
'은닉하다'(conceal)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여기서는 한쪽 방향에서 물을 막아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히스기야 왕은
지하 수로를 만들어 기혼 샘물을 다윗 성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성 경: [대하32:4]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방비]
(주); 어찌 앗수르 왕들로 와서 많은 물을 얻게 하리요 - 이때에 히스기야가 수로를 만들어 기혼 샘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인 것은(30절) 앗수르
왕들이 예루살렘 성 외곽지에서 물을 얻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본절에서는 '앗수르 왕들'이란 복수형을 쓰고 있는데, 28:16에서도
동일하게 복수형을 쓰고 있다(단, 한글 개역 성경에는 단수로 표기되어 있음). 이것이 단지 수사적 표현인지(Keil), 아니면 앗수르와 동맹을 맺고
있던 동맹국들(왕하 19:12, 13)의 왕들을 지칭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성 경: [대하32:5]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방비]
(주); 히스기야가 세력을 내어 - 이는 히스기야가 예루살렘 성을 방비하기 위하여 용기를 내고 최선을 다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였음을 가리킨다(15:8).
(주); 퇴락한 성을 중수(重修)하되 - 요아스 때에 에브라임 문에서 모퉁이 문까지 약 400규빗의 무너진 성벽(25:23)은 웃시야(26:9)와 요담(27:3)에 의해서 대부분 수리되었지만,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침략에 가비하여 다시 한번 허술하거나 무너진 성벽을 수리했다.
(주); 망대까지 높이 쌓고 - 본 구절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한데, 다음과 같이 대략 세 가지로 열거할 수 있다. 즉, (1) 망대들을 높이 쌓았다는 견해(Zockler), (2) 성벽 위에 망대를 쌓았다는 견해(Berthau, Ewald), (3) 성벽 위 망대까지 기계들을(26:15) 올렸다는 견해(Keil) 등이 있다. 이 세가지 해석은 모두 가능하지만 (2)의 해석이 원문에 가까운 듯하다.
(주); 외성을 쌓고 - 히스기야는 성벽을 보수하고 그 위에 망대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외침을 방어하는 데 용이하도록 또 한겹의 성벽을 외부에 쌓았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는 예루살렘 남동쪽 실로암 못을 둘러 싸고 있는 외벽의 잔재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연대가 히스기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Bliss's Excavations at Jerusalem).
(주); 다윗 성의 밀로를 견고케 하고 - 이에 대해서는 대상 11: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32:6]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방비]
(주); 성문 광장 - 본절이 어느 성문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29:4에서 언급된 '동편 광장'을 말하는 것 같다(Curtis). 하지만,
이 표현으로는 그곳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O. Zockler). 어째든 히스기야는 그곳에 군대 장관들을 모으고 격려의 말을 하였다.
성 경: [대하32:7]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방비]
(주);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 이에 대해서는 20:15 ; 신 31:6 등을 참조하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우시며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사용된 것이었다(수 1:9). 이처럼 히스기야가 결연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아사야의 충고에서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사 37:5-7).
(주); 우리와 함께하는 자가 저와 함께하는 자보다 크니 - 여기서는 '보다 크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브'(*)는 형용사로서 '수가 많은', 또는
'강력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사가 보았던 '불말과 불병거'(왕하 6:17)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출 3:12).
성 경: [대하32:8]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방비]
(주); 육신의 팔이요 - '팔'은 흔히 '힘'(power)을 상징하는데, 여기서의 '육신의 팔'이란 인간의 보잘 것 없는 힘을 의미한다(사 31:3 ; 렘 17:5).
(주); 우리와 함께하는 자 - 여기서 우리는 이사야가 말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즉 '임마누엘'(*)을 연상할 수 있다(사 7:14 ; 8:8, 10).
한편 7, 8절에 나타난 히스기야의 모습은 왕하 18:14-16에 기록된 유다에 대한 산헤립의 1차 침입 때에 보여 준 그의 태도와는 완전히 대조 된다.
열왕기에 의하면, 산헤립이 라스기까지 쳐들어왔을 때, 히스기야는 굴욕적으로 강화(講和)하여 공물을 바치고 성전문에 입힌 금까지 취해서 다
내주었다. 그러나 역대기 제자는 이 사실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히스기야의 의연한 모습만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는 역대기 기자가
역사가로서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섬겼던 왕임을 부각시키려 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나름대로의
신학적인 관점을 가지고, 히스기야의 여호와 신앙을 통하여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담대할 수 있고, 무슨 일이든지 가능할 수
있음(빌 4:13)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 같다.
성 경: [대하32:9]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하나님을 모독하는 앗수르]
(주); 그 후에 - 이것은 물론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공에 대비해서 히스기야 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단단히 무장시키고 난 이후를 가리킨다. 앗수르가 라기스를 정복하고 예루살렘 성까지 올라오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왕하 18:17). 한편 라기스에 대해서는 25:27 주석을 참조하라.
(주); 그 신복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 산헤립은 자신의 수하에 있던 장군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를 예루살렘에 보내고(왕하 18:17), 자신은
라기스 부근에 진을 치고 남아 있으면서 근처의 성읍들을 공략하였다(왕하 19:8).
성 경: [대하32:10]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하나님을 모독하는 앗수르]
(주); 너희가...무엇을 의뢰(依賴)하느냐 - 이는 이미 포위된 상태에서 무엇을 믿고 항거하느냐는 뜻이다. 여기서 '의뢰하느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보트힘'(*)은 신앙적으로 의뢰하는 것을 뜻하는 '아만'(*)과는 달리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한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즉, 이 말은
유다 백성이 더 이상 의지할 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며, 다만 성 안에 갇혀서 기갈에 허덕이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위협이 섞인 회유의
말인 것이다(왕하 18:27).
성 경: [대하32:11]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하나님을 모독하는 앗수르]
(주); 히스기야가 너희를 꾀어 - 본절은 히스기야가 산헤립의 침입에 대비하여 여호와 유일신앙으로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실제적으로 물
근원을 막는 등의 대책을 편 사실을 앗수르 왕 산헤립이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열왕기에는 앗수르 왕의 신복 랍사게가 히스기야가 애굽
군대의 원조를 청한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그의 신앙이 헛것임을 입증하는 구절이 있으나(왕하 18:21), 역대기 저자는 외국 군대의 원조를 구한
히스기야의 태도를 옳지 않게 여겼으나(Curtis), 히스기야의 진심이 사실상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생략해버렸을 것이다.
또한 역대기 기자는 역사적인 사실만을 열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히스기야의 신앙과 하나님의 도우심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애굽에게
지원을 요청한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성 경: [대하32:12]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하나님을 모독하는 앗수르]
(주); 이 히스기야가...분향하라 하지 아니 하였느냐 - 본절은 지금 주림과 목마름으로 죽게 된 마당에(11절) 히스기야의 개혁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란 뜻이다. 이는 히스기야의 유일신 사상과 그의 개혁에 대한 산헤립의 공격적인 말이다(왕하 18:22). 앗수르의 산헤립은 히스기야의 우상
척결을 가리켜 '여호와의 산당들과 단들을 제하여 버린'행위였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앗수르 왕의 주장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 있던 우상들과 단들이 여호의 종교를 표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히스기야가 척결한 우상 중의 하나가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처럼 왜곡된 '여호와 신앙'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종교는 하나의 소수 민족이 가진 고유 종교 정도로
밖애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고, 유일신 신앙이 타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여호와 신앙(신 6:4)을 회복하기 위해 종교 개혁을 시도했고, 이러한 종교 개혁이 앗수르 제국을 반역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
같다.
성 경: [대하32:13]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하나님을 모독하는 앗수르]
(주); 열방의 신들 - 이는 구체적으로 앗수르 군대에 의해 정복 당한 하맛, 아르밧, 스발와임, 헤나, 아와의 신들을 가리키는데, 이것들은
북이스라엘에서 숭배하던 우상들이다(왕하 18:34). 여기서 앗수르 왕 산헤립은 히스기야의 하나님 여호와도 결국 열방의 신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만들어낸 신에 불과하다고 단정 짓고 있다.
성 경: [대하32:14]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하나님을 모독하는 앗수르]
(주); 너희 하나님이...건지겠느냐 - 이는 결국 여호와에 대한 신앙만으로는 앗수르를 대항할 수 없다는 단정적인 표현이다. 즉, 여호와는 의뢰할
만한 신이 되지못한다는 것이다(10절). 여기서 앗수르인들이 가지고 있던 신(神)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는데, 랍사게를 비롯한 앗수르인의 신앙은
외형적인 변화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앗수르인들이 섬긴다고 하는 신이란 외형적인 현상으로 파악이 가능하고, 변화하는 유한한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대하32:15]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하나님을 모독하는 앗수르]
(주); 그런즉 이와 같이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 본절은 랍사게가 전한 앗수르왕 산헤립의 말(10-15절 ; 왕하 18:19-35)을 결론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결국, 산헤립의 논지는 자신의 앗수르 제국이 모든 나라를 차지했는데, 히스기야만이 유별나게 여호와 신앙을 벌지 않았으며,
히스기야가 그렇게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헤립의 희롱 속에는 결과적으로 히스기야가 지닌 신앙의 특성과 위대함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히스기야가 가진 유일신 신앙과 보이는 것에 의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뢰하는 믿음이 돋보인다.
성 경: [대하32:16]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하나님을 모독하는 앗수르]
(주); 산헤립의 신복들도...비방하였으며 - 위에 기록된 산헤립의 전갈 외에 산헤립의 신복까지 여호와 하나님과 그 종 히스기야를 비방했다. 여기서 우리는 역대기 저자가 풍부한 자료들로부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발췌하여 여기에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Barker). 즉, 역대기 기자는 '신복들'의 비방하는 말의 내용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주); 여호와 하나님과 그 종 히스기야 - 산 헤립은 히스기야를 비방한 반면(10-15절), 신복들은 히스기야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비방의
대상으로 첨가 되었다. 또한 히스기야에게 그의 종'(*, 아벱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히스기야를 비방한 것은 바로 여호와를 비방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역대기 기자는 이해한 것 같다.
성 경: [대하32:17]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하나님을 모독하는 앗수르]
(주); 산헤립이 또 편지를 써서 - 산헤립은 랍사게와 다른 두 신복들(왕하 18:17)에게 보낸 전갈 이외에 또다른 편지를 급히 보냈다. 이와 같이
산헤립이 다시 편지를 보낸 이유는 대개 두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즉, 첫째 이유는 랍사게가 비방의 말로써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항복을
유도하였으나, 오히려 히스기야와 그의 백성의 신앙은 더욱 견고해져 강력한 저항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왕하 19:14-19). 그리고 또한 다른 이유는
구스 왕 디르하가의 공격으로 인하여(왕하 19:9), 산헤립의 마음이 다급해져 유다를 조기(早期)에 항복시키기 위해서였다(Keil, O.Zckler, Curtis).
성 경: [대하32:18]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하나님을 모독하는 앗수르]
(주); 유다 방언으로 크게 소리 질러 - 산헤립의 신하 랍사게가 유다 방언으로 크게 소리 질러 이야기함으로써, 성안의 백성들을 놀라게 하고
괴롭혔기 때문에,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랍사에게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말고 아람 방언으로 말할 것을 요청한 사실이 열왕기에 나타난다(왕하
18:26-28).
성 경: [대하32:19]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하나님을 모독하는 앗수르]
(주);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세상 백성의 신들 -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와 이방인들의 거짓 신들과의 분명한 구별을
지으면서, 산헤립과 랍사게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앗수르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피조물인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 신들처럼 취급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성 경: [대하32:20]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구원]
(주); 이사야로 더불어...기도하였더니 - 히스기야의 구체적인 기도 내용은 왕하 19:15-19에 나타나 있고,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왕하19:20-34에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로서 나타나 있다. 열왕기에는 직접적으로 히스기야가 이사야와 함께 기도했다는 표현은 없으나, 히스기야의 요청에 따라
이사야도 함께 기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왕하 19:2 ; 사 37:2).
성 경: [대하32:21]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구원]
(주); 한 천사를 보내어 - 본절과 병행 구절인 왕하 19:35-37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35절)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본절과 동일한 의미이다.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라는 표현은 직접적인 신의 현현(顯現)이라기 보다는 사자를 통한 여호와의 직접적인 사역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 이때 앗수르는 역병(pestilence)에 의해 전멸되었을 것으로 보인다(Curtis). 이는 들쥐들이 앗수르 군대의 무기들을 갉아 먹었기 때문에 히스기야가 승리했다는 애굽의 전설에 근거한 것이다(Herodotus, Histories II. 141 ; Payne).
(주);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장관들을 멸하신지라 - 왕하 19:35에는 단지 군사 십 팔만 오천 명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역대기 기자는 대표성이 있는 '대장'과 '장관들'까지 특별히 첨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는 앗수르 군대가 전력상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자 한 의도에서 였던 것 같다.
(주); 얼굴이 뜨뜻하여 - 이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베보쉐트 파님'(*)을 직역하면, '수치스런 얼굴로'란 뜻이다. 즉, 심한 수치심 때문에 얼굴이 붉어지며 달아오른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스 9:7 ; 시 44:16을 참조하라.
(주); 그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죽였더라 - 여기서 '그 신의 전'이란 니스록 신전을 가리키는데, 니스록은 앗수르의 불신(god of fire)
누스쿠(Nusku)와 동일한 신으로 추측된다(왕하 19:37 ; 사 37:38 ; Curtis). 산헤립은 이 신전에서 그의 몸에서 난 아들 아드멜렉과 사레셀에 의해
피살되었다(왕하 19:37). 한편 앗수르 역사를 살펴보면, 이드람멜렉과 사레셀은 자기들의 부왕(父王)을 죽인 죄목으로 아르메니아(아라랏)로
도망가야만 했고, 산헤립의 후계자로서 에살핫돈이 즉위하였다. 역대기 저자는 이러한 산헤립의 죽음을 열왕기 기자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함으로써(Curtis) 앗수르 왕 산헤립의 죽음이 여호와의 저주에서 기인한 것이고, 이스라엘은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성 경: [대하32:22]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구원]
본 구절에서 역대기 기자는 자신의 결론을 추가하고 있다. 즉, 히스기야가 누리고 있는 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주);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보호하시매 - 이 구절을 1절과 연결시켜 볼때, 여호와께서 히스기야를 보호하신 이유는 그의 모든 충성된 일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 모든 적국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사 - 본절이 산헤립 침입 이외에 또 다른 전쟁이 있었음을 가리키는지(Barker), 아니면 앗수르가 물러나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이었다는 사실이 다른 나라에 퍼지게 되어 그 소문을 들은 다른 이방 나라들이 유다를 넘보지 못했음을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쩌든 본절은 분명히 여호와께서는 산헤립 뿐만 아니라 어떠한 적국의 침입으로부터라도 유다를 보호해 주셨음을
말하고 있다(14:6 ; 15:15 ; 20:30).
성 경: [대하32:23]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구원]
(주); 여러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 여기서 '여러 사람'이란 유다 근방의 이웃 나라들로부터 찾아온 대사들일 것으로 추측된다(O. Zockler). 이들이
히스기야에게 예물을 가지고 온 이유는 유다가 앗수르의 팔레스틴 진출을 저지시킴으로써 그들도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감사의 표현으로 예물을 가져왔을 것이다. 또한, 히스기야의 세력이 강해졌음으로 주변 국가들이 히스기야와 평화 조약을 맺으려 했을
것이다. 한편 이처럼 이웃 나라의 예물들을 받은 왕으로서는 솔로몬(9:23, 24)과 웃시야(26:8)가 있다.
성 경: [대하32:24-26]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교만을 뉘우치는 히스기야]
본문은 히스기야의 병과 그의 교만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히스기야의 회개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왕하 20:1-8의 요약적
해석이다.
성 경: [대하32:25]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교만을 뉘우치는 히스기야]
본절은 병행 구절인 왕하 20:12-19에 기록된 사건에 대한 역대기 저자의 해석이다.
(주);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 히스기야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것은 그의 부(富)가 아니라 그를 부요케 하며, 그의 생명을 구하여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궁의 보물과 성전의 창고를 부로닥발라단의 사자들에게 내 보임으로써(31절 ; 왕하 20:12, 13 ; 사 39:1, 2), 자신의 교만을 드러내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지 않았다.
(주); 진노가...임하게 되었더니 - 여호와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히스기야에게 보내셔서 예언하게 하셨다.그런데 그것은 히스기야 왕의 모든
보물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고, 그의 아들 중에 바벨론 왕의 환관이 될 자가 있을 것이라는 진노의 예언이었다(왕하 20:16-18 ; 사
39:5-7).
성 경: [대하32:24]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교만을 뉘우치는 히스기야]
(주); 그 때에 - 히스기야가 중병에 걸렸던 시기에 관해서는 왕하 20:1 주석을 참조하라.
(주);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으로 보이셨으나 - 이는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수명을 15년간 연장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의
징표로서 일영표(日影表) 위에 머무른 해의 그림자를 뒤로 10도 물러나게 하신 사건(왕하 20:8-11 ; 사 38:8)을 가리킨다.
성 경: [대하32:26]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교만을 뉘우치는 히스기야]
(주);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 히스기야가 회개한 사실은 왕하 20:19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회개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미 3:12)은 연기되었는데 이 같은 그의 태도야말로 그가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었음을 증거해 주는 실례라 아니할 수 없다.
성 경: [대하32:27]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부귀 영화]
(주); 히스기야가 부와 영광이 극한지라 - 이와 유사한 표현이 여호사밧(17:5 ; 18:1)과 솔로몬(1:12), 그리고 다윗 왕(대상 29:28)에게도 쓰였다. 본절의 '부와 영광이 극하다'라는 표현은 선왕(善王)들의 성품과 통치를 나타내주는 전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Curtis).
(주); 은금과...국고(國庫)를 세우며 - 왕하 20:13에 따르면 히스기야는 여기에 언급된 각종 보물들과 군기고(軍器庫)와 내탕고(內帑庫)를
부로닥발라단의 사자들에게 다 보내어 주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성 경: [대하32:28]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부귀 영화]
(주);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 - 이것들은 주로 이스라엘 땅에서 나는 대표적인 산물들로서 함께 자주 언급되고 있다(31:5 ; 민 18:12 ; 신 7:13
등). 다윗과 웃시야 때에도 이와같이 풍부한 산물들로 인하여 창고들을 만들었고 온갖 짐승과 양떼를 위하여 우리를 만들었다(26:10 ; 대상 27:25).
이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신 결과이다(29, 30절). 한편, 본절에 나타난 '외양간'은 히브리어로 '우라오토'(*)를 번역한 말로서 원어의
의미는 '사료 선반'(O. Zockler), 혹은 '양떼를 위한 우리'(Keil)이다.
성 경: [대하32:29]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부귀 영화]
(주); 위하여 성읍들을 세웠으니 - 본절의 '성읍들'(*, 아림)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학자들 간에는 몇 가지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1) 이것은 일반 성읍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소떼와 양떼를 지키기 위한 '망대들'을 가리킨다는 견해(Keil, zocker). 즉, 왕하 17:9에 의하면 가축을 지키는 목동들의 거처인 망대가 성읍 주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2) 본절에 해당하는 원문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견해(Kautzsch, Benzinger). 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본절을 수정하여 해석하기를 '히스기야는 자신을 위하여 국고성(國庫城)을 만들었고 많은 양떼와 소떼를 소유하게 되었다'라고 해석한다. (3) 본래대로 '성읍들'로 해석해야 된다고 보는 견해(Kittel, Barnes). 그래서 바르너스(Barnes)는 주장하기를 이 성읍들은 전시(戰時)에 양떼와 소떼를 도피시키기 위한 장소라고 한다. (4)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의 본문 비평가인 루돌프(W. Rudolf)는 '성읍들'에 해당하는 이 단어를 생략하여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상의 네 가지 견해 가운데 (1)의 견해가 기장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본 히브리어 '아림'(*)은 '눈을 뜬다', '잠깨다', '일어나다'를 의미하는 '우르'(*)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은 양떼와 많은 소떼를 지키기 위해 세운 망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 하나님이 저에게 재산을 심히 많이 주셨음이며 - 여호와는 바로 부(wealth)의 근원이시다(대상 29:12). 여기서 '재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레쿠쉬'(*)는 31:3에서 보듯이 많은 소떼와 육축의 소유를 가리킨다(Keil).
성 경: [대하32:30]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부귀 영화]
(주); 기혼의 윗 샘물을 막아 - 역대기 저자는 히스기야가 공사했던 수로(水路) 사업을 굉장히 큰 치적 중의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3, 4절 참조).
(주); 다윗성 서편으로 곧게 인도하였으니 - 히스기야가 만든 이 수로는 다윗 성의 서쪽 방향으로 곧장 내려가도록 만들어졌는데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바에 의하면 그 수로는 높이 60cm-1.5m, 너비 60cm, 총길이 약 520m의 S자형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왕하 20:20). 한편, 히스기야가 이처럼 기혼 시냇물을 끌어들여 저장한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 백성들의 식수 공급 : 팔레스틴 지방은 연평균 강우량이 500mm 내외인 건조한 지방이다. 따라서 식수를 확보하기가 용이치 않았다. (2) 전쟁의 방비용 : 이는 3, 4절에 의해 명확히 입증된다. 즉, 히스기야는 수로를 건설함으로써 외국 군대가 침입했을 때 그들이 식수를 공급받지 못하도록 하고, 한편으로 우군(友軍)의 식수를 원활히 공급하려고 의도하였다.
(주); 저의 모든 일이 형통하였더라 - 이에 대해서는 31:21 ; 대상 29:23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32:31]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부귀 영화]
(주); 그러나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웨켄'(*)은 30절의 마지막 부분인 '저의 모든 일이 형통하였더라'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따라서 이 접속사 히스기야가 형통한 사실과 본절의 내용이 어떻게 연결되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그런데 이 접속사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는 서로 다른 해석을 한다. (1) 역접 관계를 보이는 '그러나'로 해석하는 경우(A.V., Luther) : 이렇게 해석할 때 본절은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되는데, 즉 히스기야는 바벨론 방백들이 왔을 때 범죄하여 형통치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시험으로 인해 나타난 부정적 결과로 말미암은 해석이다.(왕하 19:12-19). (2) 순접 관계를 보이는 '그래서'(and thus)로 해석하는 경우(Bertheau, Keil, Barker) : 이것은 본절의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하게 해 주는데, 즉 히스기야가 자신의 무궁한 번영을 마음껏 누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를 시험하셔서 그를 교만치 않고 겸손하게 만드셨다는 의미가 된다(Zockler, Curtis). 이상의 견해에서 후자의 해석이 더욱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시험하신 것은 그의 형통함을 깨뜨리고 죄에 빠지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히스기야가 그 시험에 실패하여 교만하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를 겸손케 하여 계속 형통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26절). 한편 왕하 19:19에는 후손들에 대한 불행한 예언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인 히스기야의 겸손한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주); 그 땅에 나타난 이적 - 바벨론 방백들은 히스기야의 병문안을 위해 보냄을 받았지만(왕하 20:12 이하), 실상 히스기야를 위해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던 천체의 변화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24절).
(주); 그 심중에 있는 것을 알고자 하사 - 여호와께서 시험을 통하여 히스기야에게 알고자 하셨던 것은 아마 여호와의 행사에 대한 '그의 전적인
순종'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순종은 범사에 여호와를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잠 3:6). 한편 이와 유사하게
여호와께서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을 통하여 진실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고자 하셨다(창 22:12).
성 경: [대하32:32]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죽음]
(주); 히스기야의 남은 행적 - 그의 생애 중에 있었던 사건들은 열왕기서와 이사야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의 환상'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본문이 원문이고, 열왕기서의 설명은 이사야를 발췌한 것임을 시사하는 듯하다(왕하 18:9-20:19 ; 사 36-39장). 한편, 전설에 따르면 이사야는 B.C. 697년 12살의 나이로 즉위한 므낫세 왕(B.C. 697-642)의 신복들에 의해서 톱으로 잘려 순교했다는 한다. 이사야(B.C. 740-681)는 아마도 히스기야보다는 오래 살았기 때문에 앗수르 왕 산헤립의 사망으로 그를 계승하여 B.C. 681년에 즉위한 에살핫돈(B.C.681-699)과 관련이 있는 사건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합당한 것 같다(사 37:37, 38).
(주); 모든 선한 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씨딤'(*)은 단순히 '경건한 행위', '선한 일'(Keil, O. Zockler)을 가리킴과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함과 사람에 대한 친절한 행위 모두를 포함하는 말로 이해된다(Curtis). 한편 이러한 표현으로 평가 받은 사람은 히스기야와 요시야, 느헤미야(느 13:14) 뿐이다.
(주); 이사야의 묵시책 - 사 1:1의 말씀과 연결해서 볼 때 이것은 산헤립의 침입과 히스기야의 병에 대한 사실을 포함하고 있는 이사야의 예언서를
가리키는 것 같다(Keil, Curtis).
성 경: [대하32:33]
주제1: [히스기야의 승리와 영광]
주제2: [히스기야의 죽음]
(주);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하여 -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다른 해석들이 있다. (1) 묘실이 부족하여 새롭게 묘실을 높은 곳에 만들었다는
견해(Barker, Thenius). (2) 묘실 중에서 제일 높은 곳, 또는 윗쪽에 장사했다는 견해(Keil, Curtis). 그러나 '높은 곳'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알레'(*)는 묘실의 상층부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므로 후자의 견해가 더 옳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이는 '저의 죽음에 존경함을
표하였더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16:14 ; 21:19).
성 경: [대하33:1-9]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우상 숭배]
본문은 므낫세의 우상 숭배에 관한 기록으로 왕하 21:1-9과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본문은 열왕기의 기록과는 달리 이방 문화의 본질과 근원에 대해
첨언하고 있다(Williamson).
성 경: [대하33:1]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우상 숭배]
(주); 나이 십 이 세라 - 이로 볼 때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생명을 연장받은 15년 동안의 기간에 태어난 아들임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히스기야가
15년간의 생명을 연장받은 때로부터 제3년째 태어난 셈이다(왕하 20:6). 한편, 병행 구절(왕하 21:1)에는 므낫세 모친의 이름이 '나는 그녀 안에
있다'란 뜻의 '헵시바'(Hephzibah)였다고 소개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생략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본절에서 므낫세(Manasseh)의 모친 이름이
생략된 기록 형태에 대해 월리 암슨(Williamson)은 이것을 본서 저자의 규칙적인 습관이라고 이해한다(II Chronicles, p. 390).
성 경: [대하33:2]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우상 숭배]
(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 이는 주로 열왕기서에서 우상 숭배의 죄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Curtis). 3-7절에서 보듯 므낫세는 본래 가나안 원주민들이 숭배하던 가중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직접 악을 시행했다(28:3 ; 왕하 16:3 ; 17:8, 11).
(주); 이방 사람의 가증(可憎)한 일을 본받아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왕하 21:2의 주석을 참조하라(신 18:9-14).
성 경: [대하33:3]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우상 숭배]
(주); 히스기야의 헐어 버린 산당 - 이에 대해서는 31:1을 참조하라.
(주); 바알들...아세라 목상 - 여기서 바알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원어는 복수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병행 구절인 왕하 21:3에는 바알과 아세라 목상 둘 가다 단수로 언급되어 있으며 이와 같은 표현 뒤에 '아합의 소위(所爲)를 본받아'라는 설명이 첨가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열왕기 기자는 구체적인 어떤 바알상과 아세라 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한 듯하다. 이에 반해 역대기 저자는 바알들이란 표현으로 가나안인들의 신들을 지칭하고 있으며(17:3), 아세라 목상은 따로 구별하여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14:3, Curtis). 한편, 아세라(Asherahs)는 가나안 땅에 있던 어떤 신들 중 하나로 우가릿(Ugarit) 문서에는 '바라의 여신'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신은 가나안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의 여러 지방에서 숭배되었는데 남부 아라비아인들에게는 엘(El) 신의 배우자로, 아람인들에게는 여인의 출산과 관련된 신으로 이해 되었다.
(주);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며 - 해, 달, 별들과 같은 천재들을 숭배하는 것은 고대 이방 종교에서 널리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 같은
천체 숭배가 남유다와는 달리 북 이스라엘에서는 널리 만연해 있던 것처럼 보인다(왕하 17:16). 그러나 남유다에도 일월 성신(日月星辰) 숭배가
아하스 때 처음으로 소개되어(왕하 23:12) 므낫세 때에 비로소 널리 유행한 듯하다. 그런데 율법에서는 이런 것들을 숭배치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신 4:19 ; 17:3). 한편 학자들은 앗수르의 영향 때문에 므낫세가 일월 성신을 숭배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Curtis, Payne, Wycliff), 이
시대에 이러한 우상 숭배가 만연해 있었던 사실에 관해서는 습 1:5과 렘 8:2 ; 19:13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33:4]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우상 숭배]
(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영영히 두리라 - 여호와께서 한 곳을 택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이미 신 12:14에 나타나 있다(6:6 ; 7:16 ; 왕상 8:16 ; 9:3).
(주); 단들을 쌓고 - 이는 여호와의 전에 바알 주상들과 다른 이방 신들의 우상들을 세웠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므낫세는 단지 우상들을 숭배함으로
여호와를 배교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더 사악하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이 같은 므낫세의 행동을 여호와의
주권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여호와의 신앙(신 5:7)에 대한 반항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성 경: [대하33:5]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우상 숭배]
(주); 여호와의 전(殿) 두 마당에 - 이는 성전의 안뜰과 바깥뜰을 가리킨다. 여기서 안뜰을 다른 말로 '제사장의 뜰'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4:9의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33:6]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우상 숭배]
본절에는 므낫세가 신 18:10, 11에서 금하고 있는 가증한 행위 6가지를 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 그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 여기서 '아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바나요'(*)는 '세우다', '짓다', '건축하다'를 뜻하는 '바나'(*)에서 유래한 복수형이다. 그러나 병행 구절인 왕하 21:6에는 단수 '베노'(*)가 언급되어 있어 이곳의 표현과 약간 다르게 나타나 있다. 아하스의 이 같은 범죄를 언급하고 있는 28:3에서도 아들을 복수로 언급하고 있고, 왕하 16:3에는 단수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므낫세는 한 아들만을 희생 제물로 바쳤을 것이라는 생각이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Keil, Zockler). 왜냐하면 역대기에 나타난 복수형을 저자와 사상을 자연스런 방법으로 기술하기 위한 수학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열왕기에는 이 제사가 '한 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드려졌다는 표현이 없다.
(주); 점치며 - 점(soothsaying)에 대해서는 성경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다(레 19:26 ; 사 2:6 ; 렘 27:9 ; 미 5:12).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넨'(*)을 '구름' 또는 '하늘'이란 뜻의 어근 '아난'(*)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Davidson), 또 '눈'이란 어근 '아인'(*)에서 파생돤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것은 점치는 행위가 구름의 현상들을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것과 연관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또 다른 학자들은 이 단어가 '뱀이 내는 쉿하는 소리' 또는 '목이 쉰 거친 소리'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Curtis). 어찌 되었든 이같은 점치는 행위에 대해서 성경은 엄격히 금하고 있다(출 22:18 ; 레 20:6, 27 ; 신 18:14).
(주); 사술(邪術)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훼쉬'(*)의 어근 '나하쉬'(*)가 '뱀'을 뜻하는 '나하쉬(*)와 비슷하기 때문에 사술의 행위는 뱀을 이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다(Davidson). 그러나 어근이 이와 같이 비슷한 것은 마술사가 내는 소리가 뱀의 소리와 유사하기 때문인지 사술이 뱀을 사용해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창 44:5, 15에서 요셉은 컵으로 점을 쳤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당시 애굽에서 유행했던 것으로서 아마 컵에 담은 물의 파장이나 빛의 굴절을 보고 예언하는 점인 듯이 보인다. 여기에서 사용된 '사술'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어떤 징조를 보기 위한 점술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레 19:26).
(주); 요술(妖術) - 이에 해당하는 동사 '카솨프'(*)의 의미는 매우 여러 가지로 설명이 된다. 즉, (1) 풀잎이나 약초를 자른다'는 의미로 설명되는 경우이다(Curtis). 요술의 행위를 약초나 마법의 풀을 잘게 부수어 끓여서 '마법의 물'을 만든 뒤에 무당과 같이 신적 행위를 하며 사용하는 점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2) '주문을 속삭이다', '흐리다', '마술을 걸다'는 뜻으로 해석한다(Zockler). 요술의 행위를 상대에게 주문을 걸어 청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율법(신 18:10-12)은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
(주);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 이는 일반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점, 사술, 요술등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신접자'는 '접신술'(接神術)을 하는 사람, 곧 '죽은 자와 교통하는 자'를 가리키고, '박수'는 남자 무당을 가리킨다. 한편, 삼상 28:8에 신접한
여인이 나오고, 행 16:16 이후에도 귀신들린 여자가 점을 친 사실이 언급되어 있음을 보아 이러한 자들은 유대인들이 생활 깊숙히 침투해 들어
왔었던 것 같다. 므낫세 또한 이런 사람들을 곁에 두고 수시로 자문을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대하33:7]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우상 숭배]
(주);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목상 - 왕하 21:7에는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목상은 '아세라 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Keil). 한편 '목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세멜'(*)은 '닮다'란 뜻의 어근에서 유래한 용어로 '우상', '형상'을 뜻한다(신 4:16 ; 겔
8:3). 그러므로 28:2의 '부어 만든 우상'(*, 마쎄케)과는 구별된다. 그래서 '아로새긴 상'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로 '새기다', '조각하다', '베다'를
뜻하는 용어에서 유래한 '페셀'(*)을 쓴 것이다.
성 경: [대하33:8]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우상 숭배]
(주); 정하여 준 땅에서 옮기지 않게 하리라 - 이는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땅에 관한 하나님의 언약(삼하 7:10)으로서 율법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영원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유다의 백성들에게 율법에의 순종만이 요구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신12:10 ; 수 21:44).
성 경: [대하33:9]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우상 숭배]
(주);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 므낫세는 신정 왕국인 유다의 최고 통치자로서 자신이 마땅히 참 여호와 신앙을 준수하는 모범을 백성들에게 보였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우상을 숭배해 섬겼을 뿐만 아니라 이 같은 행위를 백성들이 본 받도록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범죄를 가중시켰다. 이로써 유다는 바벨론의 침입을 받았으며 므낫세 자신도 바벨론으로 잡혀가게 되었다. 흔히 지도자들의 타락은 그 자신 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를 위기에 몰아 넣는다. 실례로 르호보암의 타락은(12:1) 애굽 왕 시삭의 침입을 초래했으며(12:2-12), 여호람은 자신의 사악함으로 인해(21:4-6) 에돔과 립나의 반역을 당했다(21:8-10). 그러므로 국가나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힘써야 하며, 공의로 백성들은 통치하기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주);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 이는 유다에 죄가 관영하는 심판의 때가 찼음을 보여주고 있다. 역대기 저자는 이러한 유다의 죄악과 배반을
회상시켜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하나님 앞에 더욱 신실한 백성이 되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 글을 썼을 것이다.
성 경: [대하33:10]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여호와의 징계]
(주); 여호와께서...이르셨으나 - 병행 구절인 왕하 21:10-15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여호와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들에게
심판의 말씀을 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므낫세의 통치 기간(B.C.697-642)에 어떤 선지자가 활동했는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으나 열왕기와 비교해서
본절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또는 익명의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선포되었음이 분명하다(왕하
21:10). 한편 11절은 므낫세가 바로 그 경고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형벌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 경: [대하33:11]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여호와의 징계]
(주); 앗수르 왕 - 이 왕은 에살핫돈(B.C.681-669)이거나 그의 아들 앗술바니팔(B.C.669-626)일 것이다(Curtis, Barker). 그러나 므낫세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때를 B.C.648년으로 추측해 보면 여기에 언급된 앗술 왕은 앗술바니팔이 틀림없다. 이유인 즉, 이 때는 바벨론에서 4년 동안 지속되던 형제들의 반란을 앗술바니팔(Asurbanipal)이 진압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주); 므낫세를 사로 잡고 - 여기서 '사로잡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호힘'(*)은 유일하게 여기서만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학자들에 따라서 이 단어는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1) 야생동물의 코를 꿰어 끌고 가듯 므낫세를 그렇게 다루었다는 뜻(Baker, Keil). 왜냐하면 원형 '호아흐'(*)는 '찌르다'라는 뜻의 어근에서 유래한 용어로 '가시 고리', '고기를 끌어내는 갈고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2) 쇠사슬과 비슷한 족쇄(足鎖)를 채웠다는 뜻(LXX, Targum). (3) 가시로 만든 울에 가두었다는 뜻(Starke). (4)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엘로힘'이라는 어떤 장소로 끌려갔다는 뜻(Thenius). 그런데 대영 박물관에 보관된 앗수르 시대의 부조(浮彫)에서 당시 앗수르 왕들이 때때로 포로들의 코에 갈고리를 꿰고 끌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Barnes). 따라서 이것은 문자적인 의미로 므낫세의 코를 갈고리로 꿰고 또 쇠사슬로 결박하여 끌고갔다고 볼 수 있다(Zockler, Williamson, Curtis).
(주); 바벨론으로 - 혹자는 바벨론이 아니고 니드웨라고 하기도 한다(McCurdy).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적 성향을 띠는 학자들은 이곳이
바벨론(Babylon) 이라고 여긴다(Keil, Williamson, Zockler).
성 경: [대하33:12]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여호와의 징계]
(주); 여호와께 간구하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구문의 문자적인 의미는 '여호와의 면전(面前)에서 애걸하다', '신음하여 앓다', '자비를
구하다' 혹은 '여호와의 얼굴을 어루만지다'이다(출 32:11 ; 삼상 13:12 ; 왕상 13:6 ; 단 9:13).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환난을 통해 겸비하게도 하시며 간구케 하셔서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신다.
성 경: [대하33:13]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여호와의 징계]
(주); 기도한고로 - 므낫세가 기도한 내용은 모두 이스라엘 열왕의 행장(18절)과 호새의 사기(19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외경 가운데 하나인 '므낫세의 기도'와는 그 내용이 다른 것으로 이해된다(P. C. Barker, Keil, Zockler).
(주);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 므낫세의 이러한 깨달음과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므낫세는 여호와를 이방신들과 동일하게
여겼다가 그제서야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깨달은 것이다. 욥과 비교해 볼 때 그 신앙의 차원은 다르지만 이것을 계기로 하여 므낫세는
지금까지의 정책을 바꾸어 일대 개혁을 단행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여호와를 참하나님으로 깨달을 때만이 진정한 신앙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대하33:14-17]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종교 개혁]
본문에는 므낫세가 성벽을 확장하여 세우고 우상을 제하며 그 단을 파괴하는 등의 개혁을 시행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종교 개혁은 앞에서
언급된 므낫세의 회개와 관련된 것으로 그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본문의 이러한 내용이 열왕기에는 언급되지
있지 않다.
성 경: [대하33:14]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종교 개혁]
본절에서는 므낫세가 외성(外城)을 쌓은 사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히스기야가 쌓은 외성(32:5)을 다시 더 확장하고 높게 쌓아 그 공사를 마무리 한 것을 의미하는지(Zockler), 아니면 므낫세가 새로 다른 외성을 쌓은 것을 가리키는지(Keil) 분명치 않다(Barker).
(주); 기혼 서편 골짜기 - 이는 다윗성의 서편에 있는 골짜기(Keil), 즉 다윗 성과 그 아래 성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쌓은 외성이 예루살렘의 남동쪽(32:5 주석 참조)인 것을 고려해 볼 때 이곳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Curtis).
(주); 생선문 어귀 - 느 13:16에도 암시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이 문은 예루살렘 성전의 북쪽 방향에 있다(Baker,Wycliff, Cuetis). 그러나 재클러(O. Zockler)는 이 문이 성의 동쪽 방향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양자의 견해를 종합해 볼 때 생선문 어귀는 성벽의 동쪽 끝, 북동쪽 모퉁이에 있는 망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임을 알 수 있다(Keil).
(주); 오벧을 둘러 심히 높이 쌓고 - 여기서 '오벧'(*, 오펠)은 작은 산, 또는 언덕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이 말의 원뜻은 '부풀다', '치켜
올리다'에서 유래한 '둔덕', '성채', '튼튼한 요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므낫세는 성의 서쪽에서부터 북쪽 생선문 어귀까지 언덕을 쌓고 언덕을
이용하여 성을 아주 높이 쌓았을 것이다(Zockler). 그렇게 해서 므낫세는 내성(內城)인 예루살렘 이외에 외성(外成)까지 쌓아서 방비벽을 이중으로
구축하여 앗수르의 침입에 대비했던 것 같다.
성 경: [대하33:15]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종교 개혁]
(주); 우상을 제하며...다 성밖에 던지고 - 왕하 23:6, 12에 따르면 므낫세가 섬기던 우상들을 완전히 제거한 왕은 요시야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학자는 므낫세가 우상들을 제거하였다가 다시 우상들을 섬겼다(Eward)고 말한다. 그러나 우상들은 므낫세에 의해 완전히 제거되어 성밖에
버리워졌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던지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라크'(*)는 '멀리 던지다', '아래로 던지다', '밖으로 세게 던지다'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제하여'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원형 '수르'(*)는 '쫓아버리다', '치우다', '잡아 찢다'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악한 므낫세의 아들 아몬이 다시 그것들을 제자리에 세웠기 때문에 요시야 때 가서야 비로소 완전히 부수어 지고 태워졌음이
분명하다(Keil). 그래야만 이러한 견해는 34:3-7의 말씀과도 완전히 일치한다. 즉, 므낫세는 우상들을 여호와의 전에서 옮겨 밖에 버리기는
하였으나(*, 헤씨르) 완전히 부수고 빻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카라트).
성 경: [대하33:16]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종교 개혁]
(주);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 이는 므낫세가 번제단을 다시 세웠다는 뜻이다. 여기서 '중수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이켄'(*)의 의미는
'세우다', '고정시키다'로서 다시 건축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므낫세가 번제단을 언제 제거했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에 대한 본절의 의미를 축소하여 '수리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O. Zockler). 그러나 아마 므낫세는 아하스 왕이 했듯이(왕하 16:14)
일월 성신을 위하여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단을 쌓을 때에 번제단을 다른 곳으로 옮겼을 것이 분명하다(5절, Eward). 그래서 므낫세는 이 번제단을
본래의 자리에 되세우는 것을 개혁의 큰 성과로 생각하고 실행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부의 성경 번역본들이 이를 '세우다'라고 옮기고
있다(공동 번역, '세워' ; Living Bibble, rebuil).
성 경: [대하33:17]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우상 숭배]
(주); 백성이 ...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더라 - 본절은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만을 섬기라고 한 므낫세의 명령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즉, 백성들은 므낫세의 명령 때문에 겉으로는 여호와만을 섬겼으나 실제로는 중앙 성소에서 예배드리지 않고
옛적 산당 예배를 다시 부활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한 이유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고려할 수 있다. (1) 므낫세의 개혁이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 15절을 보면 므낫세가 우상과 그 단을 제거하기는 하였으나,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15절 주석
참조).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중앙 성소에서 예배드리도록 적극적으로 장려하지 못하고 산당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그냥 방치하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2) 장기간의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백성들을 참여호와 신앙으로 회복시키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즉, 므낫세가 B.C. 697년에
즉위하여 B.C. 650년경 앗수르의 포로로 끌려가기까지 약 반세기 동안 우상 숭배를 적극적으로 강요했었기 때문에 당연히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있었을 것이다(Payne). 그래서 그러한 백성들의 악습을 6년이라는 짧은 기간의 개혁으로 고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3) 중앙 성소가
므낫세에 의해 이미 더럽혀졌었기 때문이다. 비록 므낫세가 여호와께 회개하고 종교 개혁을 실시했다고는 하나 한번 우상 숭배에 빠졌었기 때문에
그의 참된 명령은 백성들로부터 큰 신뢰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예배의 중앙 집중화는 붕괴되고 산당 예배가 활상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성 경: [대하33:18]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종교 개혁]
(주); 하나님께 기도한 말씀 - 왕하 21:17에는 '므낫세의 기도'에 대한 언급이 없고 다만 선지자의 권고한 말씀만을 왕하 21:10-15에서 언급하고 있다. 한편 혹자는 본서 저자가 말하는 '므낫세의 기도'는 외경에 나오는 '므낫세의 기도' 내용의 근거가 된다고 말한다(Dictionary of the Bible).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적인 학자들은 외경에 나오는 므낫세의 기도와 본문의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이해한다(13절 주석 참조, Barker, Keil, Zockler).
(주); 이스라엘 열왕의 행장(行狀) - 좀더 현대적인 감각에 의해서 의역해 펴향하면 '이스라엘 왕조 실록'(공동 번역)을 가리킨다. 대부분의 영어
역본들은 이것을 '이스라엘 왕들의 연대기 혹은 역사'라고 기술하고 있다(Living, NIV, the Annals of the kings of Israle ; RSV,the chronicles
of the kings of Israel).
성 경: [대하33:19]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종교 개혁]
(주); 호새의 사기 - 이는 역대기 저자가 사용한 독립적인 자료로서 열왕기 저자와 다른 자료를 사용한 사실을 입증해 준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것은
35:20-27 주제 강해 '구약 성서 기록에 사용된 자료들'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33:20]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므낫세의 종교 정책]
(주); 그 궁에 장사하고 - 왕하 21:18에서는 보다 정확하게 '웃사의 동산'에 장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웃사의 동산'의 위치에 관해서는
왕하 21:1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33:21-25]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아몬의 행적]
(주); 본문은 므낫세의 뒤를 이은 아몬의 통치에 관한 기록이다. 이것은 왕하 21:19-24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는데 다만 본서에는 그가 므낫세와
같이 스스로 겸비치 않고 더욱 범죄하였다는 기록만이 첨가되었을 뿐 오히려 그 내용은 보다 더 축소되었다.
성 경: [대하33:21]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아몬의 행적]
(주); 아몬이 위에 나아갈 때에 - 이는 B.C. 642년을 가리킨다. 아몬은 이때에 므낫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므낫세가 오랜 기간 동안 (B.C. 697-642) 통치한 것과는 달리 그는 단 2년간이라는 짧은 기간만 통치하였다.
(주); 아몬이...이십 이 세라 - 이로 볼 때 아몬의 아들 요시야(B.C. 640-609)는 결국 그가 16세 때 낳은 아들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왕하
21:19에는 아몬의 모친이 욧바 하루스의 딸 므술레멧(Meshullemeth) 이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본서에서는 밝히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 모친이
이방 여인이기 때문일 것이다(왕하 21:9 주석 참조).
성 경: [대하33:22]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아몬의 행적]
(주); 그 부친 므낫세가 만든 아로새긴 모든 우상...섬겼으며 - 왕하 21:21에는 '그 부친의 섬기던 우상을 섬겨 경배하고'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본서 저자는 아몬이 므낫세가 제하여 버린 바로 그 우상을 다시 세우고 섬겼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15절 주석 참조).
그래서 페인(Paynx)은 이같은 기록이 므낫세가 우상을 파괴시키지 않았으며, 예루살렘에만 개혁을 집중시켜 오히려 우상 숭배를 분산시켜 행케 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보고 있다(17절 주석 참조).
성 경: [대하33:23]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아몬의 행적]
(주); 아몬이...스스로 겸비치 아니하고 - 이 대목은 본서 저자에 의해 첨가된 듯하다. 이는 앞에서 언급된 므낫세의 겸비함(12절)과 비교했을 때
아몬은 전적으로 겸비치 아니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Williamson). 한편 므낫세가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친 앗수르 정책을 펼쳤듯이 아몬도 마찬가지로 부친과 같은 정책을 취했다. 그리고 아몬은 아마 부친 므낫세의 종교 개혁이 친 앗수르
정책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계속 우상 숭배를 장려했을 것이다(Curtis).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겸비치 아니했다는 본서
저자의 평가를 받은 듯하다.
성 경: [대하33:24]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아몬의 정책]
(주); 그 신복이 반역하여 - 아몬은 요아스와 아마샤처럼 신복들의 반역으로 죽임을 당했다(24:25, 26 ; 25:27). 그런데 어떤 학자는 그 신복들이
친애굽 세력이기 때문에 애굽의 사주(使嗾)에 의해 아몬을 죽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Curtis). 그러나 성경에서는 아몬의 신복들이 왕을 반역한
이유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성 경: [대하33:25]
주제1: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
주제2: [아몬의 정책]
(주); 국민이...반역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 여기에 등장하는 '국민'이 어떤 성격의 부류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다. 즉, (1)
친앗수르파이든가 아니면 (2) 왕의 권위에 대하여 절대적인 충성심 갖고 있는 일반 백성이라고 본다(Barker, Curtis). 그런데 역대기 뿐만 아니라
열왕기 전체에 등장하고 있는 '국민'의 성격은 (1)처럼 특정한 부류를 지칭하지 않고, (2)처럼 포괄적인 성격의 부류들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국민'은 다윗 왕조의 회복을 갈망하는 유다 백성을 지칭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왕하 21:24 주석 참조).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23:16-21
주제 강해, ;'역대기에 나타난 하나님 백성의 특징'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34:1]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요시야의 우상 타파]
(주); 요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 33:25의 기록에 의하면 요시야는 국민들에 의하여 추대된 왕이었다. 즉, 그는 유다 최후의 선왕(善王)으로서
31년 동안(B.C. 640-609) 유다를 통치해, 패망으로 질주해 가는 유다를 잠시 동안이나마 선(善)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한편 본절에는 열왕기에
소개된 왕의 모친 즉, 여디다가 소개되어 있지 않다(왕하 22:1).
성 경: [대하34:2]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요시야의 우상 타파]
(주);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 이는 요시야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에 의해서만 판단하고 행동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성왕(聖王) 다윗과 비교하여 이같이 표현한 것이다. 사실 여호와 보시기에 선을 행한 유다 왕은 여럿 있었다(14:2 ; 27:2 ; 29:2 등). 그러나 그
조상 '다윗과 같이' 행한 왕은 여호사밧(17:3)과 히스기야(29:2), 그리고 요시야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난 바와 같이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평가는 오직 요시야 왕에게만 주어졌다.
성 경: [대하34:3-7]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요시야의 우상 타파]
본문은 요시야 제8년에 있었던 그의 개혁에 관한 기록이다.
성 경: [대하34:3]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요시야의 우상 타파]
(주); 위에 있은 지 팔 년 - 열왕기에서는 율법책을 발견하기 이전 어릴 때의 요시야의 종교적 행위, 즉 다윗의 하나님을 구한 사실에 대하여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하여 비평주의 학자들은 요시야 18년, 다시 말해서 율법책 발견 이후에 시행된 개혁 기사(왕하 23:4-20)를 역대기 저자가 요약하여 요시야의 어린 시절의 경건을 설명하는 자료로 변경 사용하였다고 한다(Bertheau, Oettli). 그러나 요시야가 개혁을 시작한 것은 그의 재위 12년째, 즉 그가 20세가 되던 해였으며 그때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때와 거의 일치하는 시점이다(렘 1:2). 따라서 요시야의 개혁은 이미 율법책을 발견하기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 분명한데,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의 공헌이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Barker). 그리고 8절을 보면 율법책을 발견한 해인 요시야 제 18년이 개혁을 처음 시작한 해가 아니라 단지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 해임을 알 수 있다(왕하 22:3, 8 주석 참조).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열왕기에서도 요시야 18년은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 해로, 즉 율법책을 발견하고(22:8), 유월절을 실시한 해(23:23)로 언급하고 있을 뿐, 정확히 연대기를 따라 모든 사건들을 기록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B hr). 따라서 열왕기의 기록과 여기 나타난 사실은 연대기적으로 결코 모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서로 상반되지 않는다. 한편 카일(Keil)처럼 요시야가 즉위 18년 이전 즉, 재위 12년에와 그 이후 18년이 되던해에 두 번에 걸쳐 개혁을 단행했다고 가정해서도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요시야의 개혁은 그의 통치 12년에 각종 우상을 파괴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18년에 성전 수리 사역을 한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는 것은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멸망으로 치닫는 유다를 잠시 동안이라도 선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주); 그 십 이 년에...비로소 정결케 하여 - 요시야의 이때 나이는 20세이다. 즉 즉위 8년째 되던 해부터 12년째 되던 해까지 개혁의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그의 나이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상 척결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시야가 개혁을 실시할 수 있었던 요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1) 정치적인면 : 당시 흑해 북방 지역에 살던 유목민인 스구디아인(Scythian)의 침입(B.C. 628-626)으로 근동 지역은 일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애굽인들의 저지로 인해 유다는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것이 유다 백성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쳐 개혁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요인은 스구아디아인의 침입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유다의 멍에였던 앗수르가 크게
쇠퇴하여 유다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요시야는 이러한 호기(好期)를 틈타 다윗이 차지했던 영역 전체를 장악하여
과거처럼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재확립할 수 있었다. (2) 종교적인 면 : 당시 스구디아인들의 침입으로 고대 근동 전지역은 국제적인 혼란기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유다에는 예레미야 선지자(B.C. 627-580)와 스바냐 선지자(B.C. 640-621)가 활동하게 되었는데(렘 1:2, 14 ; 습 1:2),
이것이 요시야의 개혁과 밀접한 연관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Payne).
성 경: [대하34:4]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요시야의 우상 타파]
여기에서는 3절에서 언급한 개혁을 그 내용별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주); 바알들 - 이에 대해서는 17:3 ; 33:3 주석을 참조하라.
(주); 그 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들 - 이에 대해서는 레 26:1, 30을 참조하라. 그리고 바알 숭배와 태양신 숭배와의 밀접성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4:5 주석을 참조하라.
(주); 가루를 만들어 - 모세가 금송아지를 파괴할 때 이와 같이 기루로 만들었다(출 32:20). 또한 아사 왕도 이와 마찬가지로 모친 마아가가 섬기던 우상을 찍고 빻아 가루로 만들었다(15:16). 한편,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조각으로 난도질하다', '찧어 빻다', '티끌로 만들다', '가루로 만들다'란 뜻의 '타카크'(*)에서 유래한 '도크'(*)로서 '부서진 것', 즉 곱고 얇은 천 같은 상태로 된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발로 부수다', '짓밟다'를 의미하는 '하다크'(*)와는 분명히 구별된다(15:16).
(주); 거기 제사하던 자들이 무덤에 뿌리고 - 왕하 23:6에서는 '그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렸다고'고 기록하고 있는데 역대기 저자는 이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우상 숭배자들의 무덤에 뿌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일반적으로 천연 동굴 또는 연한 암석이나 산허리를 깎아 만든 무덤에다
장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러한 장소를 준비하지 못한 하층민들은 그냥 땅을 파서 시체를 매장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묘지가 모인 공동 장소를
대체적으로 부정한 곳으로 여겼다(민 19:16). 그러므로 요시야가 이곳에서 이러한 행위를 했다는 것은 부정한 우상을 부정한 곳에다 완전히 없애
버리려는 의도에서 였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대하34:5]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요시야의 우상 타파]
(주); 제사장들의 뼈를 단 위에서 불살라 - 이에 대한 전후 상황 설명은 왕하 23:20을 참조하라. 그리고 산당에서 우상을 숭배하던 제사장들이
무덤에서 뼈를 파내어 요시야가 불태우고 재를 만들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왕상 13:2에서 예언되었던 사실이다(왕하 23:20 주석 참조). 한편,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해 이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죽은 자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치욕으로 간주되었다(J. Wolfendale).
성 경: [대하34:6]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요시야의 우상 타파]
(주);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시므온과 납달리까지 -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지리적으로 이스라엘의 중앙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므온은 유다의 남단에 있었고 납달리는 이스라엘의 북단에 위치했었다. 그러므로 이 같은 표현은 유다 전역 뿐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까지 개혁의 손길이 미쳤음을 나타낸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본서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본 표현과 같은 서술을 가끔씩 사용했다(15:9 ; 30:10, Williamson). 한편, 앞에서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을 설명했듯이(3절 주석 참조) 요시야는 앗수르의 세력이 더 이상 사마리아 땅까지 영향을 미치지못하는 틈을 타 북쪽 이스라엘까지 과감히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왕하 23:15, 19). 그리고 히스기야 때에도 이와 같은 개혁이 있었으나(30:1,5,10,11,18)요시야 때 만큼 광범위하게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또한 여기에서 유다 남쪽에 위치하고 있던 시므온 지파가 북쪽 10지파 가운데 한 지파로 언급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15:9 주석을 참조하라.
(주); 황폐한 성읍들에게도 그렇게 행하여 - 여기서 '황폐한 성읍'은 이스라엘의 멸망 상태를 표현한다. 병행 구절인 왕하 23:19을 보면 구체적으로
각 성읍의 산당들을 어떻게 파괴했나를 알 수 있다.
성 경: [대하34:7]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요시야의 우상 타파]
(주); 온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태양상 - 유다 땅의 태양신은 이미 파괴되었으므로(4절)여기서 말하는 '온 이스라엘'은 북 왕국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성 경: [대하34:8]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요시야의 성전 수리]
(주); 십 팔 년에...정결케 하기를 마치고 - 여기서 '정결케 하기를 마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타헤르'(*)의 해석에 관해 학자들 간에는 여러 이견(異見)들이 대두 된다. (1) 정결케 한 후(Luther, de Wette, 한글 개역 성경, KJV, Living Bible, RSV). (2) 정결케 하기 위하여(Bertheau, Kamphausen).(3) 정결케 할 즈음에(Keil, Netler, O. Zockler). 그런데 이같이 학자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는 이유는 요시야 즉위 18년이 개혁의 시발점인지, 아니면 한창 개혁이 진행되던 도중인지, 아니면 개혁이 끝난 후인지를 정확하게 규정짓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요시야 제8년에 시행한 개혁 운동(3절)을 언급하지 아니한 왕하 22:3에서는 요시야 즉위 18년이 마치 개혁의 첫 출발 연도처럼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해석이 옳다고 판단 내리기가 매우 힘들다. 왜냐하면 요시야의 개혁이 2차에 걸쳐서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1차에 걸친 개혁이 계속 이어진 것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이미 개혁이 수년간 진행 도중에 있었으며(3절), 그의 18년은 성전을 수리하는 개혁이 새로운 국면을 이룬 해였다고 밝히고 있다. 즉, 본절에서는 요시야의 8년에 시작한 개혁 운동이 제18년에 와서 대댈적으로 그 절정을 이루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1)의 해석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한편 이 같은 사례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잇다. 즉, 역대기 저자는 요시야의 삶 전체를 등정적인 측면에서 선왕(善王)으로 자세히 소개하려고 애쓴 반면, 열왕기 기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만을 중심으로 기록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주); 아살랴의 아들 사반 - 20절을 보면 사반의 직업이 '서기관'으로 나와 있으며 아히김의 아버지로 언급되어 있고, 렘 29:3을 보면 그가 엘리사(Elasah)의 아버지로 나타난다. 그리고 왕하 22:3에는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사반의 집안은 대대 손손 유력 인사로 언급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반증해 주는 예로서 그의 아들 그마랴는 여호야김 시대에 상당한 귀족으로 나타나 있고(렘 36:12, 25), 그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인 그다랴는 예루살렘 멸망후 바벨론의 포로 가운데 중요한 인물로 언급되어 있다(렘 40:5). 부윤(府尹)
(주); 마아세야와 서기관 요하아스의 아들 요아 - 이들 두 사람이 왕하 22:3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이미 알려져 있던
마아세야(렘 35:4)와 요아(왕하 18:18)인지는 불분명하다. 한편 '부윤'이란 직함은 예루살렘 성읍을 관장하던 우두머리로서 왕궁의 고관인
듯하다(Keil).
성 경: [대하34:9]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요시야의 성전 수리]
(주); 저희가...저에게 붙이니 - 본절은 왕하 22:4과 그 내용 면에서 조금 다르다. 그곳에서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메시지를 전하여 말하되 '은을 계수하여...수리하되'(4, 5절)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사반과 다른 두 사람이 직접 대제사장에게 돈을 전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24:11, 12을 보면 성전에 연보한 돈을 왕의 서기관과 아전(衙前)이 계수하여 보관하였다가 대제사장 여호야다에게 전해준 것을 보게 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열왕기서와 본서의 두 병행 구절은 서로 모순되지 않고 내용을 보완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 힐기야 - 유다 왕 요시야 때의 제사장이다. 그런데 본서에 나오는 현군(賢君)들의 배후에는 항상 이같은 유력한 대제사장들이 있어서 그들의 개혁 운동을 뒷받침해 주었다. 즉, 아사에게는 아사랴가(15장), 여호사밧에게는 예후가(19장)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유다 왕국의 역사를 왕과 제사장 혹은 선견자와의 연합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본서 저자의 사관(史觀)이러고 할 수 있다.
(주); 이 돈은 문을 지키는 레위 사람이...거둔 것이라 - 성전세에 관해서는 24:6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34:10]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요시야의 성전 수리]
(주); 역사를 감독하는 자...공장(工匠) - 24:12을 보면 목수와 건축하는 자와 같은 공장은 모두 감독에 의해서 고용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임금(賃金)도 감독이 직접 그들에게 전해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 경: [대하34:11]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요시야의 성전 수리]
(주); 목수 - 이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하라쉼'(*)은 단순히 나무만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만을 가리키지 않고, 돌이나 금속을 다루는 사람도 포함한다(Curtis). 왜냐하면 이 단어는 '쟁기질 하다', '공작하다'를 가리키는 '하라쉬'(*)에서 온 말로 '공작하는 사람', '숙련공', '장인(匠人)', '석공', '철공' 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주); 유다 왕들이 헐어 버린 전들 - 여기서 '헐어버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쉬히투'(*)는 '파괴하다', '더럽히다'라는 뜻의 동사
'솨하트'(*)의 히필형(Hiphil ; 사역형 능동)으로서, '그들(유다 왕들)이 파괴하게 하였다'란 뜻이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아달랴의 아들들이 전을
깨뜨린 것(24:7)과 같은 적극적인 파괴를 의미하는 자는 분명치 않다. 그래서 카일(Keil)은 '유다 왕들이 태만하여 전을 돌보지 않고 방치하여
여호와의 전이 저절로 파괴 되었다'란 뜻으로 이것을 해석한다. 즉, 그는 여호와 전이 훼손되는 것을 방치한 것도 적극적인 파괴 행위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므낫세와 아몬이 우상을 위하여 단을 쌓았을 때 여호와의 전에 딸린 방들이 파괴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한편 성전은 아달랴(22:12). 아하스(28:21, 24), 히스기야(왕하 18:15, 16), 므낫세(33:1-7), 아몬(33:22) 당시에 더럽혀지고
훼손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언급된 헐어버린 전은 므낫세와 아몬에 의해 훼파된 전을 가리키는 듯하다. 왜냐하면 요시야의 전대(前代)
악왕(惡王)은 므낫세와 아몬이기 때문이다.
성 경: [대하34:12]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요시야의 성전 수리]
(주); 진실히 그 일을 하니라 - 왕하 22:7에서는 '진실함'을 나타내는 원어가 돈과 관련지어져 있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31:12에서와 마찬가지로 '일'과 관련시켜 '진실함'을 말하고 있다(Willamson). 한편, '진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무나'(*)는 문자적으로 '확고함'을 가리킨다. 그러나 상징적으로는 '안전', '도덕적인 신실성', '확립된 업무' 등을 나타낼때도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를 '능숙', '열심'으로 번역하기도 한다(J. Wolfendale).
(주); 그 감독은 레위 사람 - 왕하 22:7에는 감독들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여기에 레위인의 족보를 기록한 것은 역대기의 특징이다.
(주); 음악에 익숙한 레위 사람 - 이들은 '음악과 노래로 일꾼들에게 용기와 격려를 준 사람들'(Bertheau)이 아니라, 13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담부하는 자를 관할하여 범백(凡百) 공장을 감독하는 사람들이다(Keil).
성 경: [대하34:13]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요시야의 성전 수리]
(주); 서기와 관리와 문지기 - 여기서 '서기'는 8절에 나오는 서기관 사반과 요아와는 다른 서기로서, 성전을 수리하는 일에 직접 개입하여 감독(출
5:10, 패장)과 함께 물자를 관리, 계수하고 공급하는 일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서기는 레위인들로 구성된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을(KJV, NIV, RSV, Scribes) 지칭할 것이다(J. Wolfendale). 그리고 '문지기'는 계속해서 수납되는 성전세를 대제사장에게 전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성 경: [대하34:14]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
(주); 무리가...돈을 꺼낼 때에 - 여기서 '무리'는 문지기일 가능성이 있다(9절). 그런데 병행 구절인 왕하 22:8에서는 이와 같은 문구가 없이 단지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했다는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서 율법책이 연보한 돈이 놓여있는 곳에서 발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역대기 저자는 어떤 식으로든 이 연보와 발견돤 율법책이 서로 관계가 있음을 말하려고 하는 듯하다(Curtis). 그런데 다른 학자는 힐기야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율법책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본서 저자의 노력이 없었다고 이해한다(P.C. Barker).
(주); 모세의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 - 이것은 모세가 직접 쓴 율법책을 의미한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병행 구절인 왕하 22:8에는 '모세의
전한'이란 문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에 발견된 율법책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1) 신명기, (2) 모세
오경과 법령, (3)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4) 출애굽기 등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 모세 오경 전부를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세페르 하토라'(*)는 구약에서 모세 오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신 17:18 ;
수 1:8 ; 8:31 ; 24:26 ; 느 8:1 등).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하 22: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34:15]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
(주); 여호와의 전에서...발견하였노라 - 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책은 성전 비치용으로서 대체로 언약궤 곁에 보관되던 것이었다(신 31:25,
26). 따라서 이 율법책은 므낫세나 아몬과 같은 배교(背敎)적인 왕들에 의해서 다른 곳으로 치워졌다가 잃어버린 듯하다(33:7, Payne).
성 경: [대하34:16]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
(주); 사반이 책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가서 - 왕하 22:9에는 단지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서'라고 기록되어 있어 '책'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본절의 독법(讀法)이 다음과 같이 잘못되었다고 한다. 즉, 히브리어 '돌아가서'와 '가지고 나아가서'에 해당하는
단어(*, 위보)가 서로 동일하고 '서기관'과 '그 책'에 해당하는 단어(*, 하세페르)가 같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혼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Curtis).
그러나 열왕기의 기록과 이곳의 서술을 종합하면 '사반이 책을 왕에게 가지고 갔다'는 것은 '사반이 왕에게 갔다'란 말과 조금도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의미를 명확히 밝혀준다 하겠다. 왜냐하면 본절에서는 사반이 힐기야로부터 책을 받은 사실을 언급하고 있고, 왕하에게는 사반이
자신이 그것을 읽은 후에 왕께 나아갔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Keil). 그러나 열왕기 저자와는 달리 역대기 저자가 여기서 중요하게 여겼던
바는 사반이 그 율법책을 지체하지 않고 즉시 왕에게로 가져갔다는 사실일 것이다(Keil). 사반은 성전 수리가 완료되었음을 보고하러 왕에게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서기관 사반에게 성전의 재정 관리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과 왕 사이, 혹은 성전 수리에 관계된 사항을
연락하는 매개자(媒介者)의 임무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대하34:17]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성전에서 발견된 성경책]
(주); 여호와의 전에 있던 돈을 쏟아서 - '쏟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흘러나가다', '쏟아 붓다', '떨어지다'란 뜻의 동사 '나타크'(*)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학자의 주장처럼 돈을 '모아서'라는 뜻을 가리키는
것(J. Wolfendale)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성전 수리를 위해 백성들이 현금궤에 바친 모든 돈을 헛되지 않게 전부
사용하였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성 경: [대하34:18]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성전에서 발견된 성경책]
(주);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 여기서 '읽으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와이크라 보'(*)로서 직역하면 '그 속에 있는 것(일부만)을 그가
읽었다'가 된다. 그러나 왕하 22:10을 보면 '와이크라에후'(*)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가 그것들을 읽었다', 즉 '율법책 전부를 읽었다'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역대기 저자가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때 사반이 읽은 부분은 신
28장, 저주의 내용을 담은 부분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Payne).
성 경: [대하34:19]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
(주); 왕이...곧 자기 옷을 찢더라 - 이는 사반이 읽어준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요시야 왕이 극한 슬픔과 공포를 느꼈음을 나타낸다(창 37:29 ; 민
14:6 ; 수 7:6 ; 삿 11:35). 왜냐하면 율법의 내용을 듣고 요시야는 자신과 백성들의 형편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회개하는 자가 일반적으로 취하는 행동 양태, 즉 자신의 옷을 찢었을 것이다.
성 경: [대하34:20-28]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
본문은 왕하 22:12-20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는 대목으로 대제사장 힐기야와 요시야 왕이 여선지자가 훌다에게 율법에서 경고한 심판에 관해
문의하는 장면이다.
성 경: [대하34:20]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
(주); 아히감 - '내 형제가 일어났다'란 뜻의 이름으로 아히감은 렘 26:24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호하여 백성들의 손에 죽지 않게 한 장본인으로 나온다. 한편, 그는 예루살렘 멸망 후 유다 성읍을 다스린 그다랴의 부친이다(렘 39:14 ; 40:5).
(주); 압돈 - 왕하 22:12에는 '악볼'로 나와 있다. 그런데 렘 26:22 ; 36:12을 보면 '악볼의 아들 엘라단' 이라고 언급되어 있어 여기에 표현된 '압돈'보다는 '악볼'이 바른 독법(讀法)인 것 같다(Keil, Barker, O. Zockler).
(주); 왕의 시신(侍臣) 아사야 - 이와 같은 이름의 인물은 성경에서 여럿 언급되지만(대상 4:36 ; 6:30 ; 15:6, 11) 이 사람은 여기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한편 '시신'이란 직책은 주로 왕과 관련해서 나타난다. 그런데 한 곳에서는 귀족으로(창 40:20 ; 삼하 10:2, 4) 언급되어 있어
페인(Payne)은 이를 '특별한 고위직'으로 본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다른 한 곳에서는 일반 병사로(삼하 2:12-23)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직책이 분명하게 무엇을 가리킨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성 경: [대하34:21]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
(주);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를 위하여 - 이와 병행 구절인 왕하 22:13에는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로 언급되어 있을 뿐,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북왕국이 멸망한 후 그 남은 자들을 유다 백성과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한편, 여기서 '유다의 남은 자들'이란 므낫세 치하에서 하나님의 형벌 가운데 살아난 백성들을 뜻한다(Keil).
(주); 쏟으신 진노 - 여기에서 '쏟으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테카'(*)는 '물을 쏟는다', '금속이 녹아내리다'란 뜻의 단어로 극심한 진노를
표할 때 쓰인다. 이와 유사하게 병행 구절인 왕하 22:13에는 이것이 '발하신'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니체타'(*)이다. 이는
'노를 발하다'란 뜻의 동사 '야차르'(*)에서 온 말로 '불을 피우다', '태워 소멸시키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들은 앞으로
나타날 여호와의 진노를 각 저자의 관점에서 유사하게 나타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 경: [대하34:22]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여선지자 홀다의 권면]
(주); 왕의 보낸 사람들 - 왕하 22:14에는 구체적으로 아히감, 악볼과 사반, 아사야로 그 이름들이 명시되어 있다.
(주); 여선지자 홀다 - 이에 대해서는 본절의 기록 외에 다른 곳에서는 언급이 없다. 한편, 성경에 명시된 여선지자로는 미리암(출 15:20), 드보라(삿 4:4), 이사야(느 6:14)등이 있는데, 선지자로서 행한 그녀들의 전(全) 활동에 대해서는 자료가 빈약한 듯하다.
(주); 하스라의 손자 독핫의 아들 - 왕하 22:14에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자료는 찾기 힘들다.
(주); 예복을 주관하는 - 이 예복은 왕이나 귀족들이 절기에 왕궁에서 입었던 옷인 듯하다. 한편 왕하 10:22에는 종교 행사를 위하여 바알을 숭배하는 제사장들이 특별한 예복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 살롬 - 렘 32:7을 보면 홀다의 남편 살롬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숙부로 언급되어 있다.
(주); 예루살렘 둘째 구역 - 이곳은 왕조 시대에 들어와서 예루살렘 성이 확장될 때 포함되었던 장소이다. 이에 대해서는 왕하 22:14 주석과 습
1:10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34:23]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여선지자 홀다의 권면]
(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으로 - 훌다가 전한 신탁(神託)의 말씀을 통해 볼 때(24-28절) 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고 요시야
왕이 그 내용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여선지자 훌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왕하 1:6) 권고한 것이다.
성 경: [대하34:24]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여선지자 훌다의 권면]
(주);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 이에 대해서는 신 28:15-68을 참조하라. 한편, 이러한 저주의 언약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은 곳에서도 자주
나타난다(왕상 9:6 이후 ; 14:9, 10 ; 렘 7:20 ; 19:3 ; 32:30).
성 경: [대하34:25]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여선지자 훌다의 권면]
(주); 나의 노를 이곳에 쏟으매 꺼지지 아니하리라 - 여기서도 21절에서와 동일하게 '쏟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나타크'(*)로 쓰고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병행 구절인 왕하 22:17에서도 왕하 22:13과 동일하게 '발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니체타'(*)로 쓰고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1절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꺼지지 아니하리라'와 잘 어울리는 단어는 '발한'인 듯하다. 그래서 70인역(LXX)에서는 이
단어로 쓰고 있다(Barker).
성 경: [대하34:26]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여선지자 홀다의 권면]
(주); 네가 들은 말을 의논컨대 - 이에 해당하는 원어를 직역하면, '네가 들을 말들 때문에'라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여기에 나타난 것과 같은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과 공동 번역('너는 나의 말을 받아들였다')은 재고되어야 할 부분으로 여겨 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히브리 원어의
감각을 그대로 살린 듯하다(KJV, commcerning the words which thou hast heard ; NIV, concering the words you heard ; RSV, Regarding the words
which you have heard). 한편 이것은 요시야 왕이 들었던 저주에 대한 유보, 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인한 연기를 의미하는 듯하다.
성 경: [대하34:27]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여선지자 홀다의 권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연기된 이유에 대해서 잘 나타나 있다.
(주); 마음이 연하여 - 마음이 부드럽게되었다(KJV, was tender)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완악한 자신을 버리고 회개하였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RSV, heart was penitent).
(주);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 요시야가 율법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연하여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도
그의 회개를 들으시고 심판을 연기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한편,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다'라는 표현은 왕하 22:19에도 동일하게
나온다. 그런데 이는 본서 저자가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의 한 실례로 소개하기 위해 요시야의 행위를 자세히 기술한 것
같다(Williamson).
성 경: [대하34:28]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여선지자 홀다의 권면]
(주);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 실제로 요시야는 므깃도 전투에서 살해되었다(35:22, 23). 그래서 여기에서 언급된 '평안히'라는 단어가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떤 학자는 이를 근거로 본문이 요시야 사망 이전에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하나(Curtis), 그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따라서 여기서 '평안히'라는 단어는 요시야가 참혹한 유다의 멸망을 보지 않고 므깃도에서 전사(戰死)하여 왕의 묘실에 장사(葬事)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주); 모든 재앙 - 장차 유다가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갈 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한다. 그러기에 이 같은 표현은 앞에서 언급된
'평안히'라는 말의 의미를 구체화시켜 준다. 한편, 이러한 재앙이 내리게 되는 원인 중 하나는 백성들의 패역과 더불어 므낫세의 모든 죄(우상
숭배)로 인한 것이었다(왕하 24:3).
성 경: [대하34:29]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율법서 낭독과 언약 갱신]
(주); 모든 장로를 불러 모으고 - 이런 일은 국가의 중대사가 발생했을 때에만 있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왕조 시대 때 장로들은 어느 정도 정치적,
종교적 역량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하 23:1-3 강해, '장로(長老)가 지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참조하라.
여기서 우리는 요시야가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바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차원의 개혁을 결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대하34:30]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율법서 낭독과 언약 갱신]
(주); 레위 사람들과 - 병행 구절인 왕하 23:2에는 '레위 사람들' 대신 '선지자들'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선지자들이 어느 한 계층의 인물로 분류되지 않았는데 레위인들 중에도 선지자 역할을 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표현한 듯하다. 그런데 본절에서 이를 '레위인'으로 나타낸 것은 본서 저자의 관심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Williamson).
(주); 무론 노소하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문의 문자적인 뜻은 '큰 자들로부터 작은 자들까지'이다. 이는 모인 군중들의 구성이 매우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 전체가 다 모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주);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읽어 들려준 말씀을 율법책 가운데 언약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여기서의 '언약책'은 율법책 전부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언약책의 일부로 추측할 수 있다.
성 경: [대하34:31]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율법서 낭독과 언약 갱신]
(주); 자기 처소에 서서 - 이는 왕이 '대' 위에 섰다는 뜻이다(왕하 23:3). 다시 말해서 이는 요시야가 '기둥처럼 생긴 사열대'(column)에 섰다는 말이다(P.C. Barker). 이 '대'에 관해서는 23:13 ; 왕하 11:14 ; 23:3 주석을 참조하라.
(주); 언약을 세우되 - 여기서 '세우되'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외이크로트'(*)는 '자르다', '언약을 맺다', '서로 연맹하다'를 뜻하는
'카라트'(*)에서 파생된 말로 '그가 잘랐다'(cut), '언약을 맺었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희생 제물을 둘로 갈라 그 사이로 지나며 언약을
세운 사실에서(창 15:17 ; 렘 34:18, 19) 유래하였기 때문에 언약 의식의 본질을 짐작케 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같은 형식을 취해서
언약을 세웠다기 보다는 언약책에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여 맹세하였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Curtis).
성 경: [대하34:32]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율법서 낭독과 언약 갱신]
(주); 다 이에 참가하게 하매 - 여기서 '참가하게 하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야아메드'(*)는 '서다(stand)라는 뜻의 '아마드(*) 히필형(Hiphil
; 사역형 능동)으로서 '세우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왕하 23:3에는 '아마드'(*)의 칼형(Qal ; 기본형 능동)인 '와야아모드'(*)가 쓰여져 모든
백성이 자발적인 순종심보다는 요시야 왕의 개혁 의지를 더욱 강조하려고 한 의도에서 였던 것 같다.
성 경: [대하34:33]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율법서 낭독과 언약 갱신]
(주); 이와 같이 ...다 제하여 버리고 -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율법책의 발견과 새로운 언약적 행사를 통하여 개혁이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미 3-7절에서 언급하였으며 이러한 내용은 왕하 23:4-20에도 나온다.
(주); 모든 땅 - 여기에는 남유다 뿐만 아니라 북왕국까지도 포함된다. 이런 광범위한 개혁에는 수년의 기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왕하 23:4-20에 기록된 개혁의 사건이 요시야 18년 당 해에 모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인 듯하다. 왜냐하면 그 해에는 또 유월절 행사가 치르어 졌는데, 한 해에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왕하 23:23).
(주);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 - 예루살렘 지역의 주민, 베냐민과 유다 지파 사람들을 제외한 열 지파의 지역에 거주한 사람들을 가리킨다(Keil, O. Zockler).
(주); 요시야가 사는 날에 -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1) 요시야가 가졌던 경건의 영향력과, (20 백성들이 소유했던 신앙의 한계인데, 즉 요시야가 죽은 후 여호야김의 통치하에서 백성들은 곧장 타락하여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제사장 여호야다가 사는 날 동안에는 요아스가 하나님을 경외하다가 그가 죽자 곧 타락한 사실과 유사하다.
(주); 복종 - 앞에서 기술한 사실을 내증이라도 하듯 이것은 백성들이 내적인 순종없이 외적으로만 굴종했음을 보여 준다(Payne, O. Zockler).
그래서 카일(Keil)은 요시야가 백성들에게 강제적으로 여호야를 경배케 했다고 밝히고 있다.
성 경: [대하34:34,35]
주제1: [요시야의 통치]
주제2: [요시야의 우상 타파]
요시야의 통치에 관한 기록이 두장에 나누어져 기록되어 있는데 왕하 22, 23장의 내용보다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기에서 역대기와
열왕기에 나타난 기록상의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열왕기에서는 우상을 제거하는 일이 보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역대기에서는 종교 의식적인 면이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성 경: [대하35:1-19]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명령]
왕하 23:21-23에 따르면 요시야는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를 엄격히
준행하였는데 이전에는 결코 이와 같이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다. 이런 열왕기의 간략한 묘사와는 달리 역대기 저자는 이 행사를 보다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활동에 관하여 세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성 경: [대하35:16-19]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유월절 준수]
요시야의 왕이 지킨 유월절과 무교절 축제의 특징을 묘사한다. 유월절과 함께 무교절은 7일 동안 지켜졌는데 사무엘 이후 가장 철절하게 지켜진
절기 행사였다.
성 경: [대하35:1]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명령]
(주); 예루살렘 여호와 앞에서 - 신 16:5, 6을 보면 유월절은 각 성에서 따로 드리지 말고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공동체적으로 함께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요시야 이전까지는 유월절 절기를 지키지 않거나, 혹은 준수했다고 하더라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지 않고 대부분 자기 성읍에서 드렸던 것 같다. 그래서 요시야는 예루살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킬 것을 명하고 백성들과 함께 준수한 것이다. 한편, 히스기야 때에도 유월절 절기는 지켜졌는데 그 당시에는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달 연기하여 이 월에 거행되었다(30:2,3).
(주); 정월 십사 일에 - 이는 유월절 준수를 위해 율법에서 정한 때이다(출 12:6 ; 레 23:5 ; 민 9:3). 한편, 여기에 나타난 정월은 히브리 종교력
제1월을 가리키는데 민간력으로는 제7월이고, 바벨론식의 이름으로는 '니산(Nisan)월'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본서 저자는 바벨론의 포로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귀환한 백성들에게 선조들의 역사를 회상시켜 주기 위하여 본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전통에 의하여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대하35:2]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명령]
(주); 면려하여...사무를 행하게 하고 - 여기서 '면려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하제켐'(*)은 강하게 하다', '용기를 내다', '고무하다'라는
뜻의 동사 '하자크'(*)에서 온 말로 율법에서 명하는 대로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용기를 준 것을 가리킨다(O. Zocker, Curtis). 이것은 히스기야가
설득력있는 설교(29:5-11 ; 30:22)로 강한 도전을 준 것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한편 이때의 제사장들은 규정된 규례와 율례로 재확립된 사람들일
것이다(29:5 ; 30:16, J. Wolfendale).
성 경: [대하35:3]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명령]
(주);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 - 레위 사람들의 가르치는 직분에 관해서는 17:7-9 ; 신 33:8-10 ; 느 8:7, 9을 참조하라.
(주); 거룩한 궤를...전 가운데 두고 - 여기서 '두고'에 해당되는 동사 '테누'(*)는 '두다', '가져오다', '들어올리다', '복원하다'라는 뜻의 동사'나탄'(*)에서 온 것으로 본절에서는 본래 장소에 있지 않던 언약궤를 다시 제자리에 두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본절에 나타난 언약궤에 관련된 견해들은 매우 다양하다. (1) 사악한 므낫세나 아몬에 의해서 옮겨졌거나, 요시야가 성전을 복구하는 동안에 잠시 옮겼을 것이라는 가정(Bertheau, Barker, O. Zocker). 그래서 랍비들은 성전을 수리하는 지하방에 옮겼다고 말한다. 그러나 랍비들의 견해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미약하다. (2) 여기서 벧도우(Bertheau)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유월절에 레위인들이 율법에 따라 새로 성결된 법궤를 메었으나(광야에서의 장막 생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요시야가 이 행사를 금했다"는 것이다. 요시야가 그것을 금한 이유는 더 이상 장막이 존재하지 않고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는 달리 어떤 학자들은 레위인들이 법궤를 메고 백성들의 신앙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전국을 순회했는데 요시야가 이를 금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Calmet).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분명한 다른 증거는 없다. (3) 본절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가정(Keil). 즉, 성전이 세워지기 이전에 하던 것 같이 법궤를 더 중요시하지 말고 4-6절에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이 여호와와 백성들을 섬기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Curtis). (4) 본절이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견해(Benzinger)로, 즉 '보라 이제 법궤는 성전 안에 있다'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법궤가 사악한 왕들에 의해 옮겨졌을 것이라고 보는 (1)의 견해가 옳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본문에서는 성전과 장막을 비교하여 상상하기는 힘들 뿐만 아니라 요시야가 준수한 유월절을 언약책의 발견으로 인한 과거 조상들의 죄에 대한 회개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34:24, 25). 그리고 이와 더불어 요시야는 궤를 다시 하나님의 전에 옮겨 여호와를 섬기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므낫세가 성전 안에 우상의 제단을 쌓았기 때문에 법궤를 다른 곳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며, 언약궤의 유실(遺失)도 이때에 발생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34:15 주석 참조). 한편, 므낫세와 아몬 당시 법궤를 옮긴 주체에 대해서 페인(Payne)은 신실한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주); 섬길 것이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브두'(*)는 '일하다', '봉사하다', '종살이 하다', '노예가 되다'란 뜻의 '아바다'(*)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그러므로 이는 자신의 의지와 생각, 그리고 뜻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그 직무에만 충실할 것을 나타낸 말이다.
성 경: [대하35:4]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명령]
(주); 다윗의 글...솔로몬의 글을 준행하여 - 이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반차와 직무를 분류할 때 다윗과 솔로몬이 규정한 규례들을
가리킨다(8:14 ; 대상 9:10-34 ; 23:6).
성 경: [대하35:5]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요기야의 유월절 준수 명령]
(주); 레위 족속의 차서(次序)대로 -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전체적으로 모여서 제사드릴 때는 미리 순번이 결정된 레위인들에 의해서
드려졌다(대상 24장)
성 경: [대하35:6]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명령]
(주);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너희 형제를 위하여 예비하되 - 30:16-18을 보면 레위인들이 부정한 사람들을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아 그들을 성결케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레위인들이 유월절 양을 잡는 것이 그들의 일상적인 직무인 것처럼 언급되어 있는 듯하다(Keil, Curtis).
그러나 하나님께서 출애굽 직전에 모세에게 일러준 규례에 의하면 유월절 양은 이스라엘 회중이 잡는 것으로 되어 있다(출 12:6).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들이 유월절 양을 잡은 것 같이 본절에 언급된 것은 유월절 행사가 크게 확장되면서 이러한 업무를 레의인들이 전담케 되었음을
나타낸 것이라는 의견(Curtis)은 가정에 불과한 것 같다. 왜냐하면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근거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에서 '스스로
정결케 하고 유월절 피를 뿌리기 전에 정결케 해야 할 것(30:16, O. Zockler)을 가리킨 것인지 고살한 레위인들이 제사장에게 피를 건네 주기 전에
깨끗케 해야 할 것을 명하는 것(Keil)인지 분명치 않다.
성 경: [대하35:7]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유월절 제물 준비]
(주); 요시야가...유월절 제물로 주매 - 히스기야도 이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에게 유월절 제물을 제공했었다(30:24). 왜냐하면 멀리서 제사를 모시기
위해 모인 백성들에게는 온전한 제물이 없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Keil). 한편 이 제물들 가운데 양과 염소는 유월절 제물로 사용되었고(출 12:5),
수소는 번제와 화목제의 제물로 사용되었다(민 28:16-25).
성 경: [대하35:8]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유월절 제물 준비]
(주); 방백들 - 여기에 나오는 방백들은 '하나님의 전을 주장하는 자' 세 사람과 '레위 사람들이다(Keil). 왜냐하면 이들은 세속 직무를 맡은 자들로서 방금 언급한 9명과는 다른 인물이기 때문이다(O. Zocker).
(주); 즐거이 희생을 드려 - 여기서 '즐거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린다바'(*)는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아낌없이'라는 뜻이다. 이는 왕이 자신의 의무와 책무에 따라 제물을 내놓는 것(31:3 ; 겔 45:21 ; 46:2)과는 달리 방백들이 의무와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희생 제물을 내놓은 것을 가리킨다.
(주); 하나님의 전을 주장(主掌)하는 자 힐기야와 스가랴와 여히엘 - 이 세 방백들 가운데 힐기야는 대제사장이고(34:9), 스가랴는 대제사장 다음
가는 인물로 추측된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여히엘은 이다말 가계의 두목인 듯하다(Bertheau, Keil, O. Zockler).
성 경: [대하35:9]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유월절 제물 준비]
(주); 레위 사람의 두목을 곧...요사밧은 - 이중에서 고나냐와 스마야와 요사밧은 히스기야때의 레위인들의 명단에도 나타난다(31:12-15). 그리고
하사뱌와 여이엘은 매우 흔한 이름이다(대상 5:7 ; 6:45 ; 9:14, 35).
성 경: [대하35:10]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유월절 준수]
(주); 구비하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형 '쿤'(*)은 '준비하다', '적합하다', '채비하다'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8:16 ; 29:35과 같이 완전히 준비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 왕의 명령을 좇아 - 30:16에서는 히스기야 왕의 명령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을 좇아'라고 묘사되었는데 본절도 이와 비슷하게 쓰여진 것 같다.
(주); 제사장들은 자기 처소에 서고 - 이는 제사장들이 자기 직무에 따라 섰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레위인들은 4, 5절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백성들의 반열을 따라 섰다. 이처럼 본서 저자는 유월절을 준비한 모습과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성 경: [대하35:11]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유월절 준수]
(주); 유월절 양을 잡으니 - 유월절 양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제물로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대속하신 예수를 상징한다(벧전 1:19).
(주); 피를 받아 뿌리고 - 레위인들이 백성들을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고 그 피를 제사장들에게 주면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뿔에 바르고 또 제단 아래에 뿌렸다(29:22).
(주);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29:34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35:12]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유월절 준수]
(주); 그 번제물을 옮겨 - 여기서 '옮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씨르'(*)는 '잡아 찢다', '분리하다'는 동사 '쑤르'(*)에서 온 말이다. 이것은 번제 제물로 사용할 짐승을 각을 떠서 조각조각 분류헤 놓는 것을 가리킨다(레 3:9-11).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바커(P.C. Barker)는 이 용어를 '잘랐다'(cut off)라고 해석한다.
(주);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 - 분류된 번제 제물의 조각들을 각 가계(家系)의 두목들에게 나누어 주며 그들은 다시 그것들을 제사장에게 주어 번제를 드리게 했다. 그런데 12장에는 이와 같은 의식에 관해서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유월절 양이 화목제의 양과 같이 다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제물의 기름진 부분은 여호와께 드리는 저녁 화제로 온전히 불태워져 향기로운 냄새를 드렸음에 틀림없다(레 3:6-16, Keil, Curtis).
(주); 소도 그와 같이 하고 - 7-9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여기서의 '소'는 황소를 언급한다. 그러나 다 태운 후(레 3:3-5) 나머지 제물은
화목제물로 나누어 먹었다(13절).
성 경: [대하35:13]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유월절 준수]
(주); 유월절 양을 불에 굽고 - 출 12:7-9과 신 16:7에 규정된 바에 따르면 유월절 양은 구워야 했다.
(주); 그 나머지 성물 - 이는 살진 소를 가리키는데 솥과 가마와 냄비에 삶아서 유월절 음식으로 사용토록 했다. 그런데 구운 양고기와 삶은 소고기를 언제 먹느냐에 대해 벌도우(Bertheau)는 니산월(이스라엘의 종교력 1월, 민간력 7월) 14일저녁 당일 하루 분이라고 하고, 카일(Keil)은 유월절 14일과 함께 계속되는 무교절의 7일 동안 먹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카일(Keil)의 견해가 옳은 것 같다. 왜냐하면 유월절 음식으로 삶은 고기는 적당하지 않가 때문이다.(출 12:9).
(주); 삶아 - 위에서 언급된 카일(Keil)의 견해를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삶은 제물이나 화목 제물은 무교절에 먹었다(레 23:4-8).
(주); 속히 분배하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달리게 하다', '재빨리 가지고 가다'라는 뜻의 동사 '루츠'(*)에서 왔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역
성경들도 이를 '급히'(quickly 또는 speedily)라는 부사를 사용하여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적인 제약(출 12:10, 11) 때문에 급히
서둘렀다기 보다는 많은 백성들에게 골고루 음식이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주의깊게 행동했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Barker).
그러기에 어떤 학자는 이것을 레위인들의 열심 있고 자발적인 봉사 행위를 나타낸 것이라고 이해한다(Williamson).
성 경: [대하35:14]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유월절 준수]
(주); 그 후에 자기와 제사장들을 위하여 준비하니 - '그 후에', 즉 평민들을 위해 준비한 후 레위인들은 자신들과 제사장들을 위하여 준비 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나중에 준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번제와 기름을 드리는 일로 저녘까지 분주했기 때문이라고 본절은 말한다. 한편, 여기서 '저녁'은 14일 저녁 하루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7일간의 축제 기간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Keil).
(주); 번제와 기름 - 여기서 '번제'(*, 하올라)는 유월절 어린양을 가리키고 '기름'(*, 하할라빔)은 소위 기름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에 언급된 번제와 기름은 동일한 의미(O. Zockler)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기름을 뜻하는 '하할라빔'은 소, 양, 염소 등 제단에서
태우는 모든 제물의 기름을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이다(Keil). 그리고 소위 기름은 꼭 유월절 14일 저녁에 다 태워야 할 필요가 없기에 아마
무교절의 7일 동안 계속 제물로 드려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 경: [대하35:15]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유월절 준수]
본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업무가 아무리 과다하다 할 지라도 자기 처소를 떠나 자기
업무가 아닌 다른 일에 종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대상 25:1-6). 그런데 여기에서 그 기능이 전혀 다른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을 함께 언급한
것은 당시의 전체 광경을 그리려고 한 의도에서 비롯된 듯하다(O. Zockler). 한편 유대인의 전승에 따르면 유월절 양이 성전 마당에서 죽임을
당하는 동안에 레위인들은 '할렐송'(Hallel)을 불렀다고 한다(Curtis).
성 경: [대하35:16]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유월절 준수]
본절은 지금까지 앞에서 소개한 축제의 진행 과정을 총괄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주); 당일에 - 이에 대해서는 (1) 14일 하루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Curtis), (2) 7일 간의 축제 기간 전체를 가리킨다고 본느 견해(Keil, O. Zockler, Barker)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욤'(*)은 창 2:4에서 '욤'이 창조기간인 7일 전부를 가리키는 것처럼 어떤 일정한 기간 전체를 통칭하는 경우로 쓰였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또한 17절에서 '그 때에'라는 표현이 축제 전(全) 기간을 칭하고 있기 때문에 (2)의 견해가 옳다고 보아야 한다.
(주); 요시야의 왕의 명대로 - 이는 모든 행사가 요시야 왕의 주관하에 진행되었음을 가리킨다.
성 경: [대하35:17]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유월절 준수]
(주); 연하여 무교절을 칠 일 동안 지켰으니 - 무교절은 항상 유월절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가리켜 유월절이라 부르기도
하고(30:1), 무교절이라 칭하기도 한다(30:13, 21 주석 참조).
성 경: [대하35:18]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유월절 준수]
(주);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 왕하 23:22에는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로 기록되어 있어 본절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여기에는 요시야가 지킨 유월절의 특징이 소개되고 있는데 (1) 참석자들의 수, (2) 제물의 수, (3) 정해진 달에 시행된 점 등에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유월절 행사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Murphy).
(주); 모인 온...거민과 함께 - 이는 광범위하게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음을 가리킨다(O. Zockler). 이 같은 범국가적인 유월절 행사를 통하여
그들은 다시금 여호와 안에서의 새 삶을 가능케 해주는 영적 동력(power)을 얻을 수 있었다.
성 경: [대하35:19]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유월절 준수]
(주); 요시야...십 팔 년 - 요시야 18년이 34:8에 이어 두 번째로 강조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요시야 18년 본서 기자가 열왕기 저자와 같이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보았음(왕하 22:3 ; 23:23)을 반영한 것이다. 여기서 요시야의 개혁은 유월절 행사로 절정을 이루었고, 그것과 함께
종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유월절 행사와 성전 수리가 다같이 요시야 즉위 18년째에 있었는데(34:8), 그렇다면 성전 수리는 종교력으로 정월
14일 이전에 있었을 것이다. 한편, 카일(Keil)은 율법책 발견과 유월절 행사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고, 아마 유월절 행사 이후에 율법책이
발견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왕하 23:21을 보면 유월절 행사는 율법책의 발견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뿐만 아이라 유월절이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진행되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카일의 견해는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왕하 23:23 주석 참조).
성 경: [대하35:20-27]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애굽의 침입과 요시야의 전사]
본문은 요시야가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戰死)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서 왕하 23:29, 30의 기록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성 경: [대하35:20]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애굽의 침입과 요시야의 전사]
(주); 애굽 왕 느고 - 이는 애굽의 26왕조의 두 번째 왕 사메티투스(Psammetichus)의 아들인 바로느고(Pharaoh Neco) II를 가리킨다. 그는 B.C.609년에서 594년까지 통치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하 23:29 주석을 참조하라.
(주);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온 고로 - 여기서는 애굽 왕 느고의 공격 목표가 '갈그미스'라는 지역으로 나와 있지만 왕하 23:29에는 앗수르 왕을 치는 것이 목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느고가 왕위에 오른 때(B.C. 610) 이후이다. 따라서 열왕기의 기록은 좀더 정확히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본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느고가 갈그미스에 간 것은 갈그미스를 '치러'(KJV, against) 올라간 것이 아니라 갈그미스에서(NIV, RSV, at) 싸우려고 간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에 위치한 하란을 재 점령하기 위해 취한 조치이다(Payne). 한편 갈그미스 지중해 북동쪽 유프라테스 강의 서쪽 변방 지역에 위치한 오늘날의 '제라비스'(Jerabis)로서 고대 힛타이트(Hittite) 제국의 수도이자 시리아(Syria)에서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로 통하는 관문이었다(Curtis).
(주); 요시야가 나가서 방비하였더니 - 요시야가 느고를 대항하여 싸우려고 했던 이유에 대해서 학자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유다가
앗수르의 속국이었기에 요시야가 앗수르의 명령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 그러나 그 당시 앗수르 제국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거의 멸망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이 견해는 타당치 못한 것으로 이해된다. (2) 요시야가 팔레스틴에서 애굽의 지배권이 부활되는 것을 저지하고, 유다 왕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싸웠다는 견해(Curtis). (3) 유다가 바벨론의 나보폴라살(Nabopolassar) 치하의 속국으로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Barker).
그러나 비록 당시 바벨론이 앗수르 제국의 쇠퇴 이후 팔레스틴을 장악하는 신흥 제국 세력으로 등장하긴 했지만 아직은 바벨론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나보폴라살이 자기 아들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이 지휘하는 바벨론 군대를 갈그미스로 보내어 애굽 왕
바로느고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것(36:6)은 그후 2년 뒤의 일이었던 것(Curtis)으로 보아 이 견해는 타당치 않다. 따라서, 비교적 (2)의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의 역사 정황으로 나타난 가시적인 원인으로서 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요시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함에 있었다(21, 22절). 그리고 이와 더불어 멸망으로 치닫는 유다 왕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결과(34:27, 28)였다고 할 수
있다(본장 강해 참조).
성 경: [대하35:21]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애굽의 침입과 요시야의 전사]
(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 느고가 요시야에게 보낸 이 메시지의 출처가 어디냐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1) 고대
주석가들은 이 메시지가 느고의 꿈을 통해서이거나 어떤 선지자의 신탁에 의해서 온것이라고 생각했다 (2) 헤로도투스(Heroddtus)는 애굽의
신(神)에게서 온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3) 느고는 분명히 여호와께로부터 계시를 받고 이 메시지를 요시야에게 전했음이 분명하다(Keil).
여호와께서 이방인들을 감동시키사 당신의 뜻을 나타내신 것은 여기에서 뿐만 아니라 36:23의 고레스 칙령에서도 볼 수 있다(O. Zocker). 그러므로
이것은 선한 요시야가 당한 죽음의 원인을 제시하기 위해 역대기 저자가 꾸민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Curtis).
성 경: [대하35:22]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애굽의 침입과 요시야의 전사]
(주);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 요시야는 느고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그가 전한 하나님의 명령을 믿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즉, 그는 애굽 왕 느고에 대한 지나친 적대감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시야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전쟁을 적대감에 불타 수행함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주); 변장하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트하페스'(*)는 의복 같은 것으로 자신을 덮어 위장하는 것을 뜻한다(18:29 ; 왕상 20:38 ; 22:30 ; 욥 30:18). 여기서 요시야는 아합 왕처럼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으나 이를 무시하고 변장하여 싸움터에 나갔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데(O. Zockler는 의견을 전적으로 부인함). 이는 결국 요시야가 느고의 말이 하나님의 명령인 줄 알고도 고의적으로 거역했다는 말이 된다. 한편, 이 단어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1) 완전하게 무장하고(P.C. Barker), (2) 열성적으로, (3) 스스로 튼튼히 무장하여(LXX, O. Zockler), (4) 변장하여(Payne, Keil) 등 학자들 사이에 많은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는 많은 영역 성경이 번역하는 것처럼, 또한 한글 개역 성경과 공동 번역이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이 (4)의 견해를 지지하여 '변장하여'(KJV, NIV, RSV, disguised himself)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
(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 요시야가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든지, 아니면 지나친 적대감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든지 간에 그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주); 므깃도 골짜기 - 이곳은 고대부터 유명한 전투지로서 애굽 군대를 맞아 저항하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였다. 즉, 이곳은 팔레스틴위 해안
평원과 북부 에스드렐론(Esdraelon) 계곡 사이의 능선에 위치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B.C.15세기부터 세계 1차 대전까지 주요한 전투 장소였던
것이다(Payne).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하 23:29 ; 대상 7:29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대하35:23]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애굽의 침입과 요시야의 전사]
(주); 활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 요시야의 죽음은 아합의 죽음과 동일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18:33).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암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반영하지 못하고 경건한 왕이 사라졌음을 보여준다(Keil).
성 경: [대하35:24]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애굽의 침입과 요시야의 전사]
(주); 저의 버금 병거에 태워 - 이렇게 한 것이 (1) 요시야의 죽음을 위장하여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2) 이 병거가 첫번째 병거보다 환자를 안락하게 수송할 수 있는 더 널찍한(O. Zockler) 병거라서 옮겨 태운 것인지는(Keil) 분명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병거가 일반 병거보다 가벼운 병거라면 도망치기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J. Wolffendale).
(주);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저가 죽으니 - 왕하 23:30에서 '신복들이 그 시체를 병거에 싣고'왔다는 것과 본절의 내용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화살에 맞았을 때 이미 죽은 바와 다름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왕하 23:29, 30 주석 참조).
성 경: [대하35:25]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애굽의 침입과 요시야의 전사]
(주); 예레미야는 저를 위하여 애가(哀歌)를 지었으며 - 요시야는 경건한 왕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백성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다 주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를 위해 애가를 지었는데 그 애가는 현재 보존되어있지 않다.
(주); 오늘 날까지 - 역대기 저자가 기록하던 당시까지를 가리킨다.
(주); 애가 중에 - 이것은 오늘날 성경 속에 있는 '예레미야 애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 애가집은 현재 소실되고 없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애가서 내의 비가(悲歌) 전체를 본 애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J. Wolfendale).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분명치 않다.
성 경: [대하35:26]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요시야의 남은 사적]
(주); 모든 선한 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리어 '하사다우'(*)의 기본형은 '헤세드'(*)로서 '인자', '경건', '선행', '친절'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것은 요시야가 백성들에게 베푼 선정(善政)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32:32). 한편, 바커(Barker)는 저자가 이같이 표현한 것은
요시야가 하나님의 뜻을 준행키 위해 말씀을 연구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Pulpit Commentaey). 그러나 어쨌든 본절의
이러한 표현이 요시야의 선한 특징을 서술하기 위한 것임에는 분명하다(O. Zockler).
성 경: [대하35:27]
주제1: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
주제2: [요시야의 남은 사적]
(주); 그 시종(始終) 행적 - 처음과 나중에 행한 일에 대한 강조는 역대기 저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다(9:29 ; 12:15).
성 경: [대하36:1-4]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느고에 의해 폐위당하는 여호야스]
본문에는 여호야스의 통치가 기록되어 있는데 왕하 23:31-34의 서술보다 그 내용이 더 간략하다.
성 경: [대하36:1]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느고에 의해 폐위당하는 여호야스]
(주); 국민이...그 부친을 대신하여...왕을 삼으니 - 국민들이 왕을 옹위한 이와 같은 방식은 26:1과 33:25에도 나온다. 그런데 국민들이 장남이
아닌 여호야스를 왕으로 삼은 것(렘 22:10-12)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커티스(Curtis)는 요시야의 반 애굽 전책을 치하하기 위해
특별히 다른 형제들에 비해 반애굽적인 성향이 강한 그를 왕으로 세웠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보다는 오히려 나이 많은 여호야김에게
나타났던 폭군적 행위(8절) 떠문에 백성들이 여호야스를 왕으로 선택한 듯하다(O. Zockler). 한편 , '여호아하스'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붙드신다'인데 '살롬'이라고도 불리워졌다(렘 22:11). 그리고 왕하 23:31에는 그의 모친이 '하무달'이라고 언급되어 있으나 본서에서는 침묵하고
있다.
성 경: [대하36:2]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느고에 의해 폐위당하는 여호아하스]
(주); 예루살렘에서 치리한 지 석달에 - 그는 B.C. 609년에 3개월 동안 통치하였다. 그런데 왕하 23:32에는 "여호아하스가...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의 통치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첨언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역대기 저자가 이 사실을 생략한 이유는 (1)
3개월 짧은 기간 동안 어떤 특정한 우상 숭배 행위가 있었다고 보기도 힘들고, (2) 젊은 여호아하스(여호야김보다 2살이 어림, 5절과 비교)는 아마
부친 요시야의 정책을 본받아 반애굽 정책을 행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Curtis).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주장에 대해 긍정하고 있는
자료는 그리 흔하지 않은 것 같다.
성 경: [대하36:3]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느고에 의해 폐위당하는 여호아하스]
(주); 애굽 왕이...그 위를 폐하고 - 왕하 23:33에는 '바로느고가 저를 하맛 땅 립나에게 가두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폐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원형은 '수르'(*)로서 '쫓아버리다', '제거하다', '떠나다'라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이는 애굽 왕이 여호아하스를 왕위에서 '물러나게' 했음을 가리킨다.
(주); 벌금으로 내게 하며 - '벌금'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아나쉬'(*)는 '벌을 주다', '유죄 판결을 내리다', '촉구하다'란 의미로 어떤 잘못에
대해 내리는 처벌의 일종을 가리킨다(출 21:22 ; 암 2:8). 그런데 한 국가가 다른 나라를 침입하고 그곳을 점령한 후에 전쟁의 대가로 받은 것은
보통 '조공'(*, 민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느고가 벌금을 받은 것은 애굽이 유다의 내정(內政)에 깊이 관여했음을 반영함과 더불어
여호아하스가 반애굽 정책을 취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성 경: [대하36:4]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느고에 의해 폐위당하는 여호아하스]
(주); 그 형제 엘리아김을 세워 - 엘리아김은 요시야의 둘째 아들로서 (대상 3:15)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세우신다'이고 , '여호야김'은 '여호와가 세우신다'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한편 애굽 왕 느고가 그의 이름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넣은 식민지 백성들에게 애굽의 정책이 옳음을 홍보하고, 여호와께 대한 존경을 보임으로써 원활한 통치를 이룩하고자 한 의도에서 였을 것이라고 커티스(Curits)는 추측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은 유다 백성들과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기 위해 취한 조치인 듯하다(Barker).
(주); 여호아하스를 애굽으로 잡아갔더라 - 왕하 23:34과 렘 22:12에 따르면 그는 거기서 죽었다.
성 경: [대하36:5]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바벨론으로 잡혀간 여호야김]
(주); 나이 이십 오 세라 - 여호야김은 여호아하스보다 2살 위이다(2절). 그런데 여호아하스의 소개 때에 그의 모친의 이름을 생략한 것과 같이 본절에서도 여호야김의 모친을 소개하고 있지 않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친의 이름을 생략하는 것이 역대기 저자의 특징인 듯하다(Curtis).
(주); 악을 행하였더라 - 왕하 23:37에서 여호야김은 '그 열조의 모든 행한 일을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의
행악을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한편, 여호야김은 애굽 왕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들을 숭배함으로써 애굽 왕을 기쁘게 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성 경: [대하36:5-8]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바벨론으로 잡혀간 여호아하스]
본문은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은 여호야김의 통치에 관한 기록으로, 왕하 23:35-24:6의 언급보다 생략 형태로 나타나 있다.
성 경: [대하36:6]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바벨론으로 잡혀간 여호야김]
(주); 느부갓네살 - 그의 이름이 앗수르 바벨론 비문에는 '나비웁쿠두리우술'(Nabiuvkudurriusur)이라고 기록되어 있고(Keil, Zockler), 히브리 성경 여러 곳에서도 그와 유사한 형태로 언급되어 있다(스 2:1 ; 렘 49:28). 그는 B.C. 605년에서 562년까지 바벨론을 통치한 자로서 그 이름의 뜻을 '느보(사 46:1)는 질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자다' 또는 '느보는 면류관을 보호해 준다'이다. 또한 그는 B.C. 625년 니느웨 성을 멸망시킨 나보폴라살(Nabopolassar, B.C. 625-605)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갈그미스 전투에 나아가 그곳에서 애굽을 크게 패하게 했던 장본인이다. 한편, 왕하 24:1에 따르면 이미 여호야김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겼는데 3년후 그가 느부갓네살을 배반했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이 그를 바벨론으로 잡아간 것이다. 여기에 관련된 연대기 문제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하 24:1 주석을 참조하라.
(주); 쇠사슬로 결박하여 - 이 같은 방법은 므낫세에게도 행했던 것으로(33:11) 당시 근동 지방의 통치자들이 정복국의 지도자들을 잡아갈 때 쓰던 관습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 여호야김이 실제로 바벨론으로 잡혀 갔는지에 대해서는 찬반(贊反) 양론으로 나누어진다. 즉, (1) 폐인(Payne)은
여기에 언급된 대로 그가 바벨론으로 결박당해 끌려갔다고 생각한다(Wycliffe Commentary). (2) 대부분의 보수적 성향을 띤 학자들은 여호야김이
바벨론으로 잡혀가지 않았다고 추정한다(P.C.Barker, Keil). 왜냐하면 그가 예루살렘에서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렘 22:18, 19 ; 36:30). 그러나
이에 대한 성경의 다른 곳의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의견이 맞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성 경: [대하36:7]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바벨론으로 잡혀 간 여호야김]
(주); 여호야의 전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 이 사실이 열왕기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단 1:2에서 그 역사적 사실성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열왕기에 없다고 하여 역대기 기자의 창작으로 보는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주); 자기 신당 - 이는 바벨론의 전쟁의 신(神)인 '므로닥'의 산당일 것으로 추측된다(Barker).
성 경: [대하36:8]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바벨론으로 잡혀 간 여호야김]
(주); 그 행한 모든 가증한 일 - 그가 범한 구체적인 악행에 대해서는 예레미야서(26:23 ; 36:20-23, 26)와 에스겔서(19:6)에 잘 나타나 있다(왕하 24:4).그
(주); 심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한님차 알라이우'(*)는 '그에게서 발견된 것', 또는 '그의 표면 위에 드러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악한 생각이나 불신앙적 사고가 겉으로 드러나 발산된 것을 의미한다. 즉, 이는 여호야김이 행한 모든 도덕적, 신앙적 행위와 태도를 전체적으로 묘사한 것이다(Keil).
(주); 여호야긴 - 이 이름은 '여고냐'(대상 3:16), 혹은 '고니야'(렘 22:24)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성 경: [대하36:9]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바벨론으로 잡혀 간 여호야긴]
(주); 나이 팔 세 - 왕하 24:8의 18세가 보다 정확한 기록이다. 그런데 혹자는 렘 13:18 ; 22:26 ; 29:2 등을 근거로 여호야긴은 매우 어려서 항상 어머니가 보호자로 따라다녔다고 말하면서 8살이 정확한 기록이라고 주장한다(Bertheau). 그러나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 그리고 사리아 탈굼역 등은 분명히 18살이 옳은 것으로 지지하고 있고 많은 주석가들도 이에 찬성하고 있다(Keil, Barker, Payne).
(주); 석달 열흘을 치리하며 - 왕하 24:8에는 대략적으로 석달을 치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한편, 그의 통치는 느부갓네살의 역사 기록이 증거하는 것과 같이 B.C. 598년 12월부터 B.C. 597년 3월 16일 까지를 말할 가능성이 크다(Payne).
성 경: [대하36:9,10]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바벨론으로 잡혀 간 여호야긴]
본문은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의 통치 기사로 왕하 24:8-17보다 비교적 약술 형태로 언급되어 있다.
성 경: [대하36:10]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바벨론으로 잡혀 간 여호야긴]
(주); 세초(歲初)에 - 이에 대한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해가 돌아올 때'(NIV, At the turn of the year)로서 봄철을 가리킨다. 그런데 대체로 이 시기는 건기(乾基)가 시작더가는 계절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전쟁을 완비하고 전투를 개시하던 때였다. 왜냐하면 근동 지방의 겨울을 우기(雨期)에 해당하므로 전쟁을 하기에 적당치 않았기 때문이다(삼하 11:1 ; 왕상 20:26 ; 대상 20:1).
(주);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 왕하 24:10-16을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이 부친 여호야김(Jehoiakim)을 잡아 간 후(6절) 다시 2차로 유다를 침입하여 여호야긴(Jehoiachin)을 잡아간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호야긴은 부왕(父王) 여호야김의 뒤를 이은 후 다시 부왕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다가 느부갓네살의 응징을 받았든지, 아니면 여호야김의 응징에 대한 후속 조치로 재차 응징을 받았든지 했을 것이다(Curtis).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여호야긴이 바벨론으로 잡혀간 이유에 대한 추측에 불과하지,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에 에스겔 뿐만 아니라 유다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많은 수의 지도자둘과 기술자들이 잡혀 갔다(Payne, J. Wolfendale). 한편 여호야긴은 약 37년간을 바벨론에서 감옥 생활을 하면서 그곳에서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산 듯하다(대상 3:17, 18). 그리고 느부갓네살에 이어 에월므드락(Evil-Merodach)이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B.C. 562) 감옥에서 풀려나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왕들 가운데 가장 존경 받는 위치로 회복되었다(왕하 25:27 이하 ; 렘 52:31 이하).
(주); 그 아자비 시드기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역대기 본문에는 '그의 형제'로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을 좀더 정확히 말하면 '삼촌'(uncle)이다.
왜냐하면 시드기야는 분명히 요시야의 셋째 아들(대상 3:15)이기에 , 여호야긴에게는 삼촌이 되기 때문이다(왕하 24:17). 그리고 이와 더불어
시드기야의 모친은 여호아하스와 동일하게 '하무달'이기 때문에 이 사실은 자명하다. 한편, 본래 그의 이름은 '맛다니야'였으나 느부갓네살이
개명하여 '시드기야'로 불렀다.
성 경: [대하36:11-21]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시드기야와 백성들의 패역]
본문에서는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통치(11-16절)와 예루살렘의 멸망(17-21절)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의 병행 본문은 왕하
24:18-25:21이다.
성 경: [대하36:11]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시드기야 백성들의 패역]
(주); 나이 이십 일 세 - 그는 21세에 왕위에 올라 유다를 11년 동안 통치(B.C.597-586)했는데 악행을 많이 범하여, 유다가 갈대아에게 패망 당하는
모습을 목도한 비극의 인물이다. 한편, 본절에서도 역시 그의 모친에 대한 소개가 없다.
성 경: [대하36:12]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시드기야와 백성들의 패역]
(주);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더 - 이는 예레미야가 시드기야로 하여금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바벨론에게 항복할 것을 촉구한 사실(렘 32:4 ; 34:3) 등을 가리킨다. 시드기야는 이 같은 예언들을 묵살함으로써 멸망을 자초하였다(왕하 24:20 ; 25:7). 한편, 시드기야가 이때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은 이유를 귀족들의 반발과 시드기야 자신의 헛된 망상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학자(Curtis)가 있는데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듯하다.
(주); 겸비치 아니하였으니 - 이것은 시드기야의 행악 가운데서 특히 렘 37장(특별히 2절), 38장, 그리고 렘 21:4-22:9에 나오는 사건들을 생각케
한다(Keil).
성 경: [대하36:13]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시드기야 백성들의 패망]
(주); 맹세케 하였으나 - 맹세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는 이 맹세의 언약을 잘 지켰더라면 능히 쓰러져 가는 나라를 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겔 17:12-21 ; 21:25).
(주); 저가 배반하고 - 이는 단지 바벨론 왕에 대한 배반 뿐만 아니라(왕하 24:20) 예레미야의 충고를 거절한 것이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는 이 큰 배반에 대해 비난한 것이다(겔 17:13-16). 한편, 바벨론 왕에 대해 시드기야가 배반한 것은 애굽의 26대 왕조인 호프라(Hophra), 혹은 아프리스(B.C. 588-568)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고 페인(Payne)은 밝히고 있다.
(주); 마음을 강팍케 하여 - 강퍅케 한 주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신 2:30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목을 곧게하고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는 견해(O. Zockler, Bertheau), (2) '자신 스스로가 곧게 하고 강퍅케 했다'는 견해(Keil). 그러나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시드기야 자신이 스스로 마음을 강퍅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2)의 견해가 더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과 자기 백성들을 대우하시는 방법이 다르며,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에게는 징계보다는 사랑으로 대우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는 마지막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거부하여 패망하였던 것이다.
(주);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 맹세의 언약에 대한 파기와 예레미야 선지자의 충고에 대한 거부는 곧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고
본서 저자는 밝히고 있다.
성 경: [대하36:14]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시드기야와 백성들의 패역]
(주); 제사장의 어른들과 백성도 크게 범죄하여 - 이는 유다의 온 백성들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지도자 역할을 했던 제자장들도 행악에 빠져
있었다는 의미이다. 즉, 그 당시 유다의 모든 사람들은 범죄 행위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언급된 '제사장의 어른들'은 24반열의
족장들과 대제사장을 가리키는 것인 바(대상 24;1, 3-19, P.C. Barker). 이를 다 합하면 에스겔서에서 언급된 동방 태양에게 경배한 우상 숭배자
25명과 동일하다(겔 8:16, Pulpit Commentary, Curtis). 한편, 어떤 학자들은 본절에서 나타난 우상 숭배와 성전이 더럽혀진 기사가 므낫세 시대에
적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Bertheau). 즉, 그들은 예레미야서에 근거해 시드기야 시대에는 우상 숭배에 대한 책망을 받지 않았고, 혹 있다 하더라도
성행하지 않앗다고 한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에스겔에 의하면 시드기야 시대에는 백성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도 깊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겔 5:1-7 ; 8:5-18 ; 14:1-5 등).
성 경: [대하36:15]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시드기야와 백성들의 패역]
(주);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 여기서 '아끼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말'(*)은 '동정하다', '용서하다', '긍휼히 여기다'라는 뜻으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온갖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셨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선택된 백성들이 계속해서 범죄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참으시고, 파괴하고 심판하시기를 인내하셨다는 의미이다(Keil, Zockler).
(주); 부지런한 그 사자들을...보내어 - 이러한 표현 형태는 예레미야에서도 자주 발견된다(렘 26:5 ; 29:19 ; 35:14, 15). 한편 여기서
'사자들'이란 '선지자'들을 가리키는데, 당시에 활약했던 에스겔(B.C. 593-570), 예레미야(B.C. 627-580), 다니엘(B.C. 605-530), 하박국(B.C.
612-589)등을 지칭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여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예언자들도 있었을 것이다(Curtis).
성 경: [대하36:16]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시드기야와 백성들의 패역]
(주); 만회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가 너무 극심하여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하게 된 상태에 이르렀음을
가리킨다(왕하 24:4). 한편, 여기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이 부득이하게 내려 갈 수 밖에 없는 경우를 우리는 성경 다른 부분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21:18 ; 잠 6:15 ; 29:1 ; 렘 8:15 ; 145:19).
성 경: [대하36:17]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유다의 멸망]
(주);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붙이시매 - 여기서 갈대아 왕은 느부갓네살을 가리킨다. 그는 시드기야가 애굽에 사자를 보내서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하고 바벨론을 배반하자(겔 17:11-21) 예루살렘을 침공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한 끝에 성전과 성벽을 파괴하고 유다 왕국 전체를 붕괴시킨 장본인이다(왕하 25:1-7 ; 렘 34:1-7 ' 39:1-7 ; 52:2-11). 한편, '붙이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내어 주다'(gave, KJV, RSV) 또는 '양도하다'(handeddver, NIV)란 뜻이다. 그래서 이말은 범죄한 유다를 징계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방인 느부갓네살을 도구로 사용하셨음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주);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문구에서 청년을 죽인 주체가 누구인지 애매하다, 왜냐하면 이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와예헤로고'(*)는 '살륙하다' 혹은 '살륙하게 하다'란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벌도우(Bertheau)는 '하나님이 성소에서 칼로
청년을 죽였다'로 해석한다. 그러나 문맥을 살펴볼 때 하나님이 갈대아 왕을 도구로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 주체는 갈대아 왕으로 보아야
옳다(Keil). 한편 이러한 심판은 그들이 행한 범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성전을 더럽히고(14절), 그들 자신들도 성전에서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겔 9:1-11을 보라.
성 경: [대하36:18]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유다의 멸망]
(주); 다 바벨론으로 가져 가고 - 이에 대해서는 왕하 25:13-17과 렘 52:17-23을 보라.
성 경: [대하36:19]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유다의 멸망]
(주);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 성전의 유실(遺失)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실들은 왕하 25:9 주석과 강해를 참조하라.
(주); 모든 귀한 기명을 훼파하고 - 평행 구절인 왕하 25:13-17에는 기명을 훼파하고 탈취해 간 사실에 대해서 언급함과 더불어 그 기명들이 자세히
열거되어 있다. 이러한 약탈은 여호야김 시대에 있었던 것보다 더 광범위하고 철저했던 것 같다(렘 39:1-8, J. Wolfendale).
성 경: [대하36:20]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유다의 멸망]
(주); 칼에서 벗어난 자 - 이에 대한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칼에서 남은 자', 즉 '칼로 살해되지 않은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쟁에서 죽거나 쓰러지지 않은 자들을 의미한다(Keil).
(주);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매 - 이들은 예레미야의 예언과 같이(렘 27:7) 바사가 일어날 때까지 그곳에서 있었다. 그런데 이들 중 대부분은 노예가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였으나(Payne, Keil), 그 중에서 몇 사람은 상당한 지위와 총애를 받았다(왕하 25:27-30 ; 단 1:19 ; 2:49 ; 6:3). 한편, 이때 유다의 백성들은 계속되는 압제로 인해(사 14:2, 3) 대부분 포로 초기에 낙망을 경험하고 점점 세속화되어 갔다(겔 33:31, 32). 그러나 이와는 달리 영적으로 깨어 있음을 더불어 경건했던 자들은 더욱 신앙이 성숙되어 갔다(느 1:4 ; 에 4:14-16 ; 단 1:8, Payne).
(주); 갈대아 왕과 그 자손 - 이는 느부갓네살과 그의 계승자들, 즉 에월므로닥(Evil-Merodach, B.C. 562-560), 네리글리살(Neriglissar, 혹은 네르갈사레셀, B.C. 560-556), 나보니두스(Nabonidus, B.C. 556-539)를 가리킨다.
(주); 바사국이 주재(主宰)할 때까지 - 이는 B.C. 539년 바사 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할 때까지를 가리킨다.
성 경: [대하36:21]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유다의 멸망]
(주);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 이스라엘이 포로되어 적국에 있는 동안에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는 사실은 레 26:34의 예언이다. 그래서 역대기 저자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이스라엘 백성의 70년간의 포로생활(렘 25:11 ; 29:10)을 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례 26:34을 기초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는 여기서 땅의 안식년 70년을 정확한 연대기적으로 해석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 시대 이후 490년 동안 7년 주기 안식년을 70번 지내지 못한 것으로 이해한다(Bertheau). 그러나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경외하는 통치자였던 다뒷, 솔로몬, 여호사밧 등이 이 법을 지키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 이것을 정확하게 연대기적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이것을 '안식년의 율법을 무시한 자들에 의해서 빼앗긴 땅의 안식이, 그 법을 어긴 자들이 형벌을 받아 포로되어 감으로써 비로소 회복될 수 있었다'(Keil)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 칠십 년 - 바벨론 포로 기간은 대체적으로 1차 포로 때인 여호야김 3년부터(단 1:1-5, B.C. 605) 고레스의 조사로 인해 1차로 귀환한 시점(스
2:1-70, B.C. 536)까지로 본다.
성 경: [대하36:22]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바사왕 고레스의 조서]
(주);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 바사(Persia)왕 고레는 B.C. 539년부터 529년까지 왕국을 통치했다. 고레스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스 1:1 ; 사 44:28 주석을 참조하라.
(주); 여호와께서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 여호와께서 고레스를 일으켜 예루살렘 성전은 중건케 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은 사 41:25 ; 44:28 ; 45:1-4, 13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고레스의 이 같은 마음의 변화는 바벨론 포로들의 회복 정책과 지역 종교의 융화 정책으로 나타난다(Payne). 한편, 여기에서 '감동시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이르'(*)는 '일어나다', '들어올리다', '분발시키다'라는 뜻의 '우르(*)에서 온 말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단순히 '움직이는 것'(moved, NIV, 공동 번역) 뿐만 아니라 마음을 '돋우는 것'(stirred up, KJV, Living Bible, RSV)을 가리킨다.
(주);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 -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이 포로생활 70년 후에 다시 본국으로 귀환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렘 25:11 ;
29:10-14).
성 경: [대하36:23]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바사왕 고레스의 조서]
(주);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 본절에서 고레스가 '여호와'라는 히브리적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고레스는
다니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그는 히브리어의 거룩한 문학들(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에 대해서도 알았을 것이다(P.C. Barker). 따라서 그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데 이같이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자로 자신을
자처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듯하다(O. Zockler, J. Wolfendale). 한편 고레스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데 대해 페인(Payne)은 당시 사용된
외교적인 어법에 의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Wycliffe COMMENTARY). 그러나 전자의 주장이든, 혹은 후자의 주장이든 관계없이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레스(Cyrus)가 이스라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사 44:28-45:5).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땅으로
되돌아와 하나님을 다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참조하라.
성 경: [대하36:22,23]
주제1: [유다의 멸망]
주제2: [유다의 멸망]
본문은 스 1:1-3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소개되어 있는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이다. 그런데 이 칙령은 b.c. 538년 고레스 원년(元年)에 선포되었기
때문에 유다가 멸망한지 약 70년 이후의 일이어서 연대기적으로는 크게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세 가지로 추측
설명하고 있다. (1) 역대기와 에스라가 본래 한권의 책이었는데 책이 분리될 때 우연히 이 구문이 양쪽에 다 남아 있게 되었거나, (2) 이 두 책이
본래 한권의 책이었음을 보여 주기 위한 증거로서 의도적으로 양쪽에 사 기록되었거나, (3) 역대기서의 부록으로 이 책의 독자들 즉, 포로
생활로부터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다 희망적인 결론을 보여 주기 위해 역대기 저자가 추가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것은 (3)의 견해인 듯하다. 왜냐하면 역대기 저자의 의도는 유다의 포로를 땅의 안식과 관련하여 보다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열왕기 저자도 여호야긴이 감옥에서 풀려 나와 존귀하게 된 사실을 기록하여 본서 저자의 의도와 비슷하게
희망적인 결론을 맺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