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
pouv"
발 foo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푸스는 기본어이며, '발' foot을 의미한다.||(a) 비종교적인 용법에서 푸스는 인간이나 동물의 '발', 공예품의 '다리', 또는 다리와 같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무엇인가의 '아래쪽 끝'을 의미한다.|이 단어는 피트로서 길이의 단위를, 시적으로 운동을 표현하며, 따라서 참여를 가리키거나 사람들을 평가하는 표현들에 사용된다. 강한 자의 발에 대한 언급은 복종을 표현하는 것이다.||(b) 비교종교에서 신들이나 신적인 사람들의 발자국이 치유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신앙은 능력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사라피스(Sarapis)의 발 숭배가 언급된다. 발은 또한 신의 현현에 나타나며, 승천 시에는 발 밖에 보지 못한다. 예배를 드릴 때 신발을 벗는 것은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이러한 관습은 더렵혀진 덮개들을 벗어버리고, 신의 능력과 직접적인 접촉을 하거나 매듭에 의해 야기되는 주술적인 장애물들을 피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2. 구약성경과 유대교.||(a) 70인역본은 '발바닥, 뒤꿈치, 발굽, 다리, 발걸음, 발 밑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b) 푸스는 한길을 걸어가는 사람들과 관련하여 비유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즉 이 단어는 삶의 방식을 가리키기도 한다(시 57:6).||(c) 수 10:34; 수 14:9; 삼하 22:39; 시 47:3에서 다리는 능력을 상징한다. 삿 3:24에서 완곡어법으로 다리에 대한 경시가 나타난다.||(d) 출 3:5과 수 5:13이하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신발을 벗는다. 구약과 유대교에서 신발을 벗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기 위해서이다.||(e) 하나님의 현현과 관련하여, 시 18:9; 시 77:19; 출 24:10등에서 하나님의 발, 발자국 또는 발등상에 대해, 하박국은 하나님이 발로 밟는 것에 대해, 슥 14:4은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오실 때, 그의 발로 감람산을 밟을 것에 대해 언급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a) 사람을 나타냄.|신약성경에서도 역시 사람(서 있거나 걷고 있는 사람)을 나타내기 위해 푸스 또는 포데스를 사용한다. 따라서 행 5:9의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느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는 말씀은 당연히 사람들이 문 앞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 4:6과 병행구절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재촉하면서 시 91:11 상반절과 12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는 성구를 인용할 때 시 91:11 하반절을 생략한 것은 험하고 거친 돌투성이의 길에 발이 걸려 비틀리는 생생한 이미지는 제거해버리고 그 인용문을 발만이 아니라 사람 전체를 위협하는 상황에 적용시킨 것이다.||(b) 전이된 용법.|구약성경적 기초 및 발걸음과 준비와 각오를 나타내는 호도스의 비유적 용법과 관련하여 푸스는 준비되어 있거나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전이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눅 1:79(사 59:8)의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와 히 12:13(잠 4:26)의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라는 성구를 참조하라. 롬 10:15(사 52:7)에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는 말씀은 물론 전세계를 두루 여행하는 것을 나타내긴 하지만 발이 아니라 구원의 전도자들과 그들의 일을 칭송하는 것이므로 그 은유는 그것이 묘사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엡 6:15도 마찬가지다. 막 9:45에서 예수님께서 발로 인한 스칸달론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도 역시 반은 문자적으로 반은 비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본래 스칸달론은 타락한 삶의 방식이나 수치스럽게 행하는 사람에 의해 야기된다. 발은 단지 그의 악한 의도를 실행하는데 이용되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c) 힘의 상징으로서의 발.|신약성경은 또한 발을 힘의 상징으로 이용한다. 그러나 이점에서 우리는 구약성경의 신앙과 비교해 볼 때 이 세상 및 그 구성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동체의 관계에서 어떤 변화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메시지에 의해 야기된다. 구약성경에서 발은 종종 압제, 예속, 노예로 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힘의 상징으로 사용되는데, 그 주체와 객체는 사람과 사람이거나 선택된 백성과 다른 민족들이거나 강한 정복자들과 이스라엘 땅이다. 신약성경의 기록에서 그와 같은 개념은 요한계시록에서만 발견되며 여기서조차도 단지 계 3:9에서의 사 49:23의 인용에서만이 나타날 뿐이다. 그밖의 다른 곳에서는 사람은 더 이상 발로 표현되는 강력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롬 16:20에서 하나님의 공동체에게 주어진 약속은 하나님 자신이 사탄을 그들의 발 아래 상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신약성경에서 선포의 완전한 종말론적 성격에서 분명히 찾아진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때에 따라 힘(세력)의 향방이 바뀌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지 않다. 역사는 하나님과 이 세상의 군주와 그 종자들 간의 최후의 결투와 함께 끝난다.|시 8:6("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과 시 110:1("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의 약속은 예수님에 대한 강력한 종말론적 모습에서 진정으로 성취된다(고전 15:27; 엡 1:22; 히 2:8; 막 12:36과 병행구절; 행 2:35; 고전 15:25; 히 1:13; 히 10:13; Barn., 12. 10). 다른 묵시적 형상들의 경우에 그들의 인격과 힘에 대한 묘사는 힘 또는 통치 방식을 묘사하는 머리에 또는 발과 다리에 국한된다. 따라서 계 10:1에서 선포하는 천사는 땅과 바다 위에 불기둥처럼 서있는, 그래서 전 세계를 다스리는 다리들을 가지고 있다. 또 계 2:1에서 여자의 두 발이 달(moon)의 낫(sickle) 위에 위치하고 있는 모습은 그녀의 우주적인 힘을 나타내는 것이다. 똑같은 것이 계 13:2의 곰의 발을 가진 바다에서 나온 짐승에도 적용된다.||(d) 복종을 표현함.|복종의 표시로 사람의 발 앞에 앉거나 엎드리는 것은 신약성경에서 오직 그 사람의 특성이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과의 특별한 관계에 의해 묘사될 때에만 발견된다. 행 22:3에서 바울에 대한 언급에서 그런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 엄한 교훈을 받았고". 여기에서 그의 선생의 발 아래 앉아 있는 학생이라는 외면적인 상태를 반영하지만 토라에 대한 존경이 학생들로 하여금 이 자세를 취하도록 강요한다는 사실도 표현한다. 소유를 판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헌물로 두었다고 하는 구절에서 그 사도들은(행 4:35; 행 4:37; 행 5:2) 주님과 하나님을 대표한다.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삽비라가 속일 때 그녀는 성령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행 5:9). 그래서 그녀가 베드로의 발에 엎드러져 죽을 때에(행 5:10), 그것은 하나님의 재판하시고 벌하시는 권세가 사도를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인 것이다.|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막 6:11과 병행구 행 13:51)도 이런 맥락에서 언급되어야 한다. 이것은 명백히 재판하고 벌하는 행위이다. 막 6:11의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에이스 마르튀리온 아우토이스; 눅 9:5은 에이스 마르튀리온 에프 아우토이스)라는 표현이 보여주는 것처럼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은 법정의 고소 행위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권위에 근거하는 사도의 권능을 보게 된다. 그러나 사도들의 능력은 제한된다.|고넬료가 베드로의 발에 절했을 때(행 10:25), 베드로는 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도 단지 사람일 뿐이라고 말한다. 계 19:10; 계 22:8 이하에서, 천사조차도 요한계시록 기자가 경배하기 위해 그의 발에 엎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e) 예수님에 대한 경의(veneration)을 표현함.|다른 한편, 복종과 경배의 표현은 예수님의 발에 무제한적이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 세례(침례) 요한은 굽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 가치조차 없다고 고백한다(막 1:7; 참조: 행 13:25). 계 1:17에서 사도는 예수님의 형상의 신성에 압도되어 그의 발에 죽은 자처럼 엎드러진다. 그런 경우의 명백한 신성의 영향이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예수님의 발에 앉거나 엎드리거나 놓여지는 것을, 또는 그의 발을 붙잡는 것을 말할 때에도 일어나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이 의문은 퀴리오스라는 칭호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예수님의 발에 앉는 것이나 엎드리는 것은 있는 그대로 주어진 상황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거나 랍비에게 표하거나(예의)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보았다고 생각한 메시야에게 돌리는(의례) 존경의 표시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대부분 경우에 그것이 뚜렷하게 진술되어 있지 않을 때조차도, 그 행위는 경배의 행위였을 것으로 정확히 판단한다. 이것은 막 5:22=눅 8:41(야이로); 막 7:25(수로보니게 여인); 마 15:30(예수님의 발 앞에 둔 병자); 요 11:32(베다니의 마리아)에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구절들에서 신에게 행하는 경배가 도움의 요청과 함께 결합되어 있다. 사마리아 사람의 행위-그는 예수님의 발에 그의 얼굴을 던진다-는 예수님의 위엄을 보았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그의 보좌에서 천사들과 장로들과 생물들에게 경배 받으시는 것처럼(계 7:11과 계 11:16; 참조: 마 17:6; 고전 14:25) 경배 받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고침 받은 후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았다고 언급한 눅 8:35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았다고 한 눅 10:39에서 그들의 태도가 감사하는 제자의 자세와 배우고자하는 열심있는 각오 이상을 나타내는지는 거의 말할 수 없다. 다른 한편 마 28:9에서 여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한 것은 분명히 신에게 드리는 경의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이 모든 것은 눅 7:36-50의 많은 죄를 지은 여자에 대한 기사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단순히, 발과 관련하여 모든 헌신의 행동, 즉 발을 씻고 닦으며 기름을 붓고 입맞추는 행위가 이 기사에서 모두 발견되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단지 눈물이 물을 대신하고, 머리털이 수건을 대신하고, 향유가 값비싼 연고를 대신하고, 얼굴에 입맞추는 대신에 발에 입맞추는(눅 7:45 이하) 독특한 방식 때문도 아니다. 예수님에 대한 집주인의 관계-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서기관으로 대우하고 디다스칼레라고 부른다(눅 7:40)-를 그 여자와 예수님과의 관계와 비교할 때 발을 씻는 것과 기름 부음과 입맞춤의 의미는 명백해진다. 예수님을 그의 신적인 특성에 의해 죄를 용서하시는 자로 이해할 때, 그 인격 전체에서 예수님은 이미 죄 있는 인간을 초월하신다. 신의 현현에서처럼, 그의 발은 여전히 죄많은 세상에 뻗어 있으며, 그러므로 그의 발에 경의를 표하고 경배드려야 하며 희생 제물이 드려져야 한다. 이 누가복음의 기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한편으로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다른 한편으로는 요한복음의 베다니의 기름 부음에 대한 기록과 비교할 때 효과적으로 입증된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머리에 기름을 붓는 반면 요 11:2과 요 12:3에서는 발에 기름을 붓는다. 요한복음에서의 이러한 변화의 이유도 매우 명백하다. 그와 같은 헌신의 행위로 사람은 이 복음서 기자에 의해 묘사된 영광의 그리스도의 발에만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f) 발 씻기심.|마지막으로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동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이 행위는 언뜻 보아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영광의 주님이 인간의 발을 향해 몸을 굽힌다는 것은 역설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요점은 정확히 이 역설 속에 존재한다. 그것의 목적은 병원학적 기초에 근거하여 고정된 씻는 의식을 제정하기 위함도 아니고 잘못된 의식들에 대한 안전 장치를 제공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 행위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설명해준다. 그는 자신을 발을 씻기는 천한 일로 낮추신다. 즉 그는 그의 신적인 영광을 버리고 그렇게 행함으로 그가 위하여 이 봉사를 행한 그 사람을 위하여 구원을 이루신다.|그러므로 요 13:15에서 발을 씻기시는 행위를 휘데이그마("본")라고 부르고 제자들에게 똑같은 겸손으로 똑같은 봉사를 행할 것을 요청하실 때(요 13:14), 세상으로의 제자들의 파송은 그것에 의하여 예수님의 죽으심과 수난의 완전한 존엄성을 부여받는다.|딤전 5:10에서 하기오이("성도")의 발을 씻기는 것은 공동체의 과부들에게 부여되는 임무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13장에서의 행위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며 그 행위는 그 전통에 기원할 것이다.||(g) 의식적으로(cultic) 신발을 벗음.|신약성경의 어느 곳에도 이것을 행하라는 명령은 없다. 오직 스데반이 출 3:5을 인용한 행 7:33의 역사의 회상에만 그것에 대한 언급이 있다.|(참조: K. Wei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