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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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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mountain, 산맥 혹은 산악지방 mountain chain or regio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오로스는 '산, 산지'를 의미하며, 복수로 '개개의 산, 산지'를 의미한다.||(a) 고대에서 산의 인상적인 자연적 현상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종교적 개념들을 일깨웠다. 첫째로 산의 위력은 강, 샘, 폭포와 함께 신(神)으로 숭배케 하였다.|다음에 산과 높은 곳에는 신령들(spirits)이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높은 지역들에서 산 봉우리는 신들의 거처로 여기거나 그 봉우리에 있는 보다 높은 신들의 제의 예배로 이끌었다. 빛의 신이나 생명의 신은 산의 봉우리와 연관되며, 어두움의 신이나 흑암의 신은 산의 안쪽 부분 또는 산의 나무들이나 광야들과 연관된다. 최초의 산의 개념은 일반적인 신화적 개념이다.||(b) 근동 지방에서 산은 종종 힘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바빌로니아인들에게 있어서 산은 멀고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동쪽과 서쪽의 산들 위에 하늘이 얹혀 있고, 거기서 태양이 뜨고 진다. 만다야 교도들의 두 개의 순결한 산과 두 개의 어두운 산은 이러한 사상을 반영한다. 신들의 거처인 백향목산, 신들이 태어난 산, 신들이 모이는 회합의 산, 그 꼭대기가 하늘에까지 닿아 있으며, 그 기초가 푸른 바닷물 심연에 있는 바람의 산 등에 대한 다양한 언급들이 있다.|역사시대에서 '큰 산'은 큰 세력, 대주제를 의미하며, '산 당'(mountain house)는 사원의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이 용어와, 그리고 지구랫(zigurrat)의 건축은 신의 접근 장소나 신들의 거처로서의 산을 생각 나게 한다. 서쪽에 해지는 언덕과 그 내부는 생의 어두운 면, 죽음과 심판과 관련되어 있으며, 거기서 또한 죽은 자의 심판이 행해질 것이라고 한다.||(c) 헬라인들의 산들에 대한 사상은 바벨론 인들과 다르다. 그리스의 국도는 숲이 울창한 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산들이 여행자들에게는 위험할지라도 헬라인들은 그 산들을 그들의 조국의 장식으로 찬양한다. 잘 자란 산림과 만년설 지역으로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은 헬라인이나 로마인들에게 신의 능력이라는 감각을 준다. 신들과 정령(nymphs)들과 뮤즈신들(muses)이 살고 있는 많은 봉우리들 중에서 올림푸스는 곧 신들의 최고의 집으로 구별되었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이 산은 최고 의미로서 자연적, 윤리적 완전의 상징인 것이다.||(d) 소아시아에서 위대한 어머니에 대한 숭배는 산과 연결되어 있다. 자연의 어머니는 산 주위나 숲속에서 몰아치는 폭풍 가운데 감지되며, 밤중에 난무하는 나무들의 춤 속에서 볼 수 있다. 산은 여기서 삶의 어두운 측면에 속한다(참조: 키벨레 산의 동굴들과의 연결).||(e)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는 산에 대하여 신성한 경의를 표하여, 제의적인 예배가 산에서 행해진다. 산은 신들의 거처이자 신들이 회합하는 장소이다. 여기서도 산은 힘의 상징들로 사용된다.||#2. 70인역본의 용법.||오로스는 70인역본에서 매우 많이 나타나며, 7개의 히브리어형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지만 주로 히브리어 하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a) 구약성경은 산이나 작은 산(언덕)에 대해 많이 언급하였다. 산에서 풀이 자라 푸른 초장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다. 하나님이 "산에 풀이 자라게"하신다(시 147:8이하)|팔레스틴에 있는 대부분의 산들은 3000피이트 이상을 넘지 않으며 따라서 봉화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침략의 신호대로 사용된 봉화대는 심판의 신탁에서도 사용되었다(사 13:2; 참조: 사 30:17).|산에서는 멀리 바라볼 수 있다. 모세가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본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실 모든 것에 대한 계시였지만(신 34:1-4) 모세는 약속된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지 않았다.|음성들이 산들을 가로 지른다. 예언과 비유가 산에서 전달되어(삿 9:7) 백성들이 그곳에서부터 그 말씀을 받기도 하였다(삼하 2:25이하; 대하 13:4).|그러나 산과 협곡은 교통, 곧 여행의 장애물이 되기도 하였다(왕하 19:23; 사 37:24). 산들은 외롭게도(삼상 23:14) 부끄러운 죽음의 장소가 되기도 하지만(Ps. Sol. 2:26),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삼 6:2; 시 11:1).||(b) 예언과 시에 있어서 산은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한다. 하나님은 산을 설정하시고(시 65:6), 산의 무게를 측량하시며(사 40:12), 산을 쳐서 부셔 버리며(사 41:15), 산을 옮겨 놓으시며(욥 9:5), 산을 평탄하게 하신다(사 40:4). 산들은 하나님 앞에서 떨며(삼 5:5), 하나님에 의해서 불살라지고(신 32:22), 하나님 앞에서 녹는다(미 1:4). 산은 또한 정치적 권력을 상징할 수 있다(렘 51:25; 단 2:44).||(c) 산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삭을 산에서 바치도록 하셨고, 하나님은 그 때 거기에 나타나셨다(창 22:2).|모세는 아말렉족과 전쟁하는 동안 산꼭대기에서 기도하였다(출 17:9이하).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로 기도하러 올라갔다(왕상 18:42). 축복과 저주는 에발산과 그리심산에서 선포되었다(신 11:29; 신 27:12이하; 수 8:33). 이스라엘 사람들의 할례는 할례산(Haaraloth)에서 거행되었다(수 5:3).|법궤는 산에 안치되었다(삼상 7:1; 삼하 6:3). 사무엘은 산당에서 희생제사로 드렸다(삼상 9:12이하; 삼상 19:25; 왕상 3:4; 대상 16:39; 대상 21:29; 대하 1:3, 대하 1:13). 산당에서 제사에 대한 선지자들의 반대는 결국 예루살렘을 예배 중심지가 되게 하였는데(신 12:2-9) 그들의 반대는 예배 중심지가 산 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중심지가 가난안 사람들의 생각 및 행동과 결부된 것이기 때문이었다(W. Foerster, TDNT 481이하).|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던 여부스 사람들의 성채를 점령하였으며(삼하 5:6-10) 그 후 솔로몬은 높은 곳에 성전을 세웠다. 따라서 시온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적이 되며,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한 유일한 장소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산의 신이 아니라고 강조되어 지며(왕상 10:23, 왕상 10:28-29), 시내산과 시온산은 그러한 의미에서 거룩한 곳들은 아니다. 시온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산이다. 예언들이 산으로부터 발해진다(민 23:7에서의 발람, 그리고 참조: 삼상 10:5).||(d) 산들은 지형학적 변화와 함께 종말론 기대에도 나타난다. 산은 충만의 상징인 포도주로 흠뻑 젖어 들 것이다(암 9:13; 욜 3:18). 산들은 돌아오는 포로들을 위하여 평평해질 것이다. 이는 포로 생활에서 귀환할 때의 하나님의 지배 하심에 대한 상징이다(사 40:4; 사 45:2). 성전을 내려다보고 있는 감람산은 갈라질 것이다(슥 14:4). 시온산은 다른 산들보다 더 높아질 것이며 이방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올 것이다(사 2:2-4; 미 4:1-3). 여기에서 시온은 여호와와 만나는 중심지로 간주된다. 이방인들도 그들이 여호와의 길을 찾으면 이스라엘의 일원이 될 것이며 세상은 평화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e) 구약성경에는 산의 신화가 거의 없다. 신화적인 암시들이나 반향들이 창 49:26; 시 68:15; 시 48:2; 슥 6:1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사 14:12이하와 겔 28:11이하는 이교도 통치자들의 몰락을 조롱하는 노래들에서 신들의 산에 대한 신화를 역설적으로 사용한다.|위경은 신화적인 주제들을 보다 강하게 인용한다. 예를 들면 낙원과 하나님의 산을 동일시 하는 경우이다(Eth. En. 24-25장). 구약에서 신화적인 비유적 표현이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구약성경이 영적인 서술과 감각적인 서술을 대립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관심이 역사 안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3. 신약성경의 용법.||오로스는 신약성경에서 일반 헬라어와 구약성경의 하르와 같이, 단수는 '산'(요 4:20이하; 행 7:30; 히 12:22 등), '산맥이나 산지'(막 5:11 등)에 대해, 그리고 많은 경우에 복수는 '산맥이나 산지'에 대해 사용되었다(마 18:12; 막 13:14 등).||(a) 팔레스타인의 지형은 복음서에 반영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교훈도 보여준다.|팔레스타인에서 산 위에 세운 도시들을 찾아볼 수 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 5:14). 이 말씀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 바로 뒤에 온다. 이 말씀 뒤에는 등불을 등경위에 둔다는 말씀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는 권면이 온다 → 소금에 관한 말씀은(마 5:13) 소금의 유용성에 그 초점이 있고 빛과 동네에 관한 말씀들은 제자들의 존재 이유에 그 초점이 있다.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모호한 태도를 취할 수는 없다. 그들의 삶의 특성은 사람들이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삶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사 2:2, 사 2:5이 암시되어 있다: "만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참조: 미 4:1-3). 종말론적인 약속은 제자들의 무리 안에서 성취될 수 있다. 우리도 여기에서 그를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혹은 축복하리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창 12:3; 창 18:8; 창 22:18; 창 26:4; 창 28:14; 참조: 행 3:25; 갈 3:8). 빛이 하나님의 백성인 제자들의 공동체 내에서 분명해 지듯이, 열방들도 새 예루살렘인 그들에게로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나아올 것이다. 이 마태복음의 말씀은 산 위에 성채와 같이, 교회의 무적성(invincibility)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의 성취와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하고 있다.|마 18:12에서 잃은 양 비유에서 목자는 "산에" 곧 위험한 고립 상태에 99마리를 남겨 두었다.|마 17:20(병행구절, 막 11:23)에서 산들을 옮기는 믿음에 관한 말씀은 실제 산 앞에서 언급되었다. 산을 움직인다는 신앙의 위력에 관한 말씀(마 17:20) 배후에는 아마도 어려움을 극복하라는 속담 투의 말이 있는 것 같다(참조: 사 40:4; 사 49:11; 사 54:10). 그렇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이 산"은 세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변형의 산을 의미하는 것 같다(마 17:1 병행구. 막 9:2; 눅 9:28; 마 17:9 병행구. 막 9:9; 눅 9:37). 그렇지만 마가복음에는 이 말씀이 생략되어 있으며 눅 17:6에서는 이 산이 "이 뽕나무"로 바뀌어 진다. 전통적으로 이 산은 다볼산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몇몇 학자들은 헬몬이나 메론산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변형과 연관시켜 볼 때, "이 산"을 움직일만한 신앙의 위력이 더욱 더 인상적이다. 그렇지만 마가는 무화과 나무에 대한 저주와 기도의 위력과 관련지어 이 말씀을 한다(막 11:20-26). 마가의 문맥은 "이 산"이 감람산임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 맨슨(W. Manson)은 이 구절이 슥 14:4를 암시하고 있다고 보았다(Jesus the Messiah, 1943, 29이하). 앤더슨(H. Anderson)은 이 말씀의 마가적 형태가 최초에는 생생한 믿음은 인간의 업적이라는 사실, 즉 믿음은 노력으로 만들어지고 장애물은 극복될 것이다"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것 같다고 추측한다(The Gospel of Mark, New Century Bible, 1976, 268). 그러나 그는 그러한 추측이 그가 더 원문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말씀의 마태판에서 거부되긴 하지만 마가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믿음은 하찮은 겨자씨에 비교되기 때문이다. 부르심은 보다 더 위대하고 강한 믿음에로의 부르심이 아니라 "믿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하고 그 자체로부터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든 것을 약속 받은 믿음" 에로의 부르심이다(E. Schweizer, Jesus, 1971,234). 마가복음에서 무화과 나무는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 때문에 말라 죽는다. 믿음은 중보기도와 인간 상호간의 용서에로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이렇게 해서 죄가 제거되며 이것은 산을 움직이는 것에 비할 수 있다).|눅 23:30(호 10:8)는 유대의 지형을 전제로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참조: 계 6:15이하).|유사하게 히 11:38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에 관하여 언급한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막 13:14에서 예수님의 재난의 때에 예루살렘을 피해 산으로 도망하라는 명령은 산과 거기에 있는 동굴들을 피난처로 삼으라는 말이며, 주후 66년에 펠라(pella)로 도피함으로 성취된 것이다.|막 5:11(눅 8:32)에서 게네사렛 호수 동쪽 해안 이방의 산지에 있는 돼지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오직 이 구절에서만 귀신들이 묘지 뿐만 아니라 산지에 거하였다고 말해 준다.||(b) 복음서는 예수님이 산에서 한 일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예수님은 종종 산에 올라 가셨다(마 5:1; 마 8:1; 막 3:13; 눅 6:12; 마 15:29; 요 6:3, 요 6:15; 막 6:46; 마 14:23; 눅 9:28).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셨다(막 6:46; 마 14:23; 눅 6:12; 눅 9:28). 막 1:35에 보면 그가 산으로 들어가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였다. 예수님은 산에서 12제자, 곧 사도들을 선택하셨다: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막 3:13-14).|예수님은 산에서 병자들을 고치셨다(마 15:29이하).|예수님은 산에서 가르치셨다: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마 5:1이하). 예수님께서 베푼 수훈의 산은 바로 가까이 있는 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확하다. 일부 주석가들 관사를 강조하여, '그 산' 곧 '새 시내산'이나 '거룩한 역사의 산'이라고 말하나 이 같은 강조는 본 수훈이 이 산에서 행해졌음을 말한다. 이 연상은 마태가 고의적으로 그의 이야기 안에 출애굽 주제를 확립시킨 것이라는 가설에 근거한 것이다. 그 산은 가버나움 근처인 것 같다. 후기의 전언은 이곳이 '하틴 첨봉'(The Horns of Hattin)이라고 한다.|예수님은 천국의 왕으로서 천국의 최고의 법(헌범)을 제자들에게 주기 위하여 산으로 올라가셨다. 예수님께서 산 위로 올라가실 때 그의 올라가심은 하나님 편에서 행하시는 어떤 행동에 대한 전조였다(기도와 가르침과 병고치심과 부르심 등의 실례들, 마 3:16; 막 1:10; 마 5:1; 마 14:23; 마 15:29; 막 3:13; 눅 9:28).|예수님은 "지극히 높은 산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 시험의 산은 그 위치가 정확히 지적되어 있지 않다. 병행구절인 눅 4:5에는 "산"이란 표현이 없다. 실제로 성지(聖地)에서나 세상의 어느 산에서도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한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마귀가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나라를 보였다는 표현은 문자에 구애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세상의 전시(展市)가 어떻게 수행되었는지, 특히 그 영광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어떻게 예수님의 눈 앞에 보여졌는지에 대하여는 우리의 이해의 범위를 넘어 있다. 어쨌든 예수님이 실제적인 산정(山頂)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이 세상 임금(마귀)이 그의 비법적 능력으로 그가 지배하는 강대한 영역을 바로 예수님의 눈 앞에 순식간에 보여 주었던 것이다(R. C. H. Lenski).|계 21:10에 병행 내용이 있다(참조: 겔 40:2). 여기서 높은 산으로부터 내려다보는 것은 성령 안에서 종말론적인 사건을 살피는 것을 상징한다.|예수님은 산에서 변형되었다. 변형의 산의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변형은 다볼산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다볼산은 요새로 이용되었으며 헬몬 산은 그 기슭에 몇몇 서기관들을 포함한 큰 무리들이 모였다는 것과(막 9:14) "갈릴리를 지나" 되돌아왔다고(막 9:30) 말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갈릴리(그리고 현대 이스라엘의 경계 내에서)에서 가장 높은 산은 메론 산(3,926피이트)인데, 마 17:1; 막 9:2의 묘사는 이 산을 일컫는다. 눅 9:28에 기록되어 있는 정관사 "the"는 특별한 산이나 산맥을 나타내지만 너무나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그것이 잘 알려진 어떤 지역을 암시해 준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한편 확실히 예수님의 변형은 시내산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즉 모세의 출현, 구름, 초막에 관한 언급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눅 9:31, 직역하면 "출애굽" exodus)이 그러하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산에서 제자들과 만났다(마 28:17). "예수님께서 [가라고] 명하시던 산"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 관한 기사가 누가복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산은 특정한 산의 특정한 장소를 지적한다. 이 지정은 이전에 나타나셨던 때 중의 어느 한 때에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 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지난날에 예수님께서 설교하시고 가르치신 어느 산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산에 모인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중대한 사건을 표한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그의 대 설교(마 5~7장)를 하셨고, 산에서 열 두 제자를 택하셨고, 산에서 변형된 영광 속에서 자기를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산정에서는 말하자면 하늘과 땅이 맞닿는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영화된 구주께서 하늘과 땅에서의 그의 권세를 말씀하셨다. (R. C. H. Lenski).||(c) 신약성경은 산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종말론적인 기사들을 포함한다. 눅 3:4-5은 사 40:3이하에 보다 넣은 영역을 제시한다. 누가가 사 40:3-5를 인용하여 주님이 오실 때 산과 언덕이 평평해지리라고 언급하고(눅 3:4-6) 눅 21:5-7에 감란산이란 말을 생략한 것은 그가 산 없는 종말론적 상황을 상상하고 있었는지에 관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가 심지어 장엄한 산조차도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는 성경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 주님께서 "구원"을 가져오실 때(눅 3:6; 누가 신학의 주요 주제를 강조하고 있음), 모든 것들은 그가 오시는 길을 예비해야 한다.|계 8:8에서 '불 붙는 큰 산 같은 것'은 주후 79년에 일어난 베수비우스(Vesuvius)산의 분출과 같은 동시대의 사건으로 볼 수 없다. 산은 능력을 표현한다. 산이 불 붙었다면 그 산의 능력이 파괴적인 힘이라는 의미이다. 렘 51:25은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유사한 묘사를 담고 있다. 거기에서 산은 이교의 세력이며, 여기서 산은 경건치 않은 세상을 형벌하는 도구이다.|계 6:14에서 "산과 섬이 … 옮기우는"(움직이거나 이동하는 것) 것은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린다.|계 16:20에서는 산들과 섬들이 사라지며, 계 20:11에서는 그 절정에서 하늘과 땅이 멸망한다. 섬들은 이방인들을 위한 안전의 장소이며, 산들은 힘의 상징들이다. 따라서 요점은 흔들림이며, 그 다음으로는 이교도의 힘과 안전의 파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사이에 거하시는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성전이나 제단이 없듯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새로운 산이 옛 산들을 대신하지 않는다(계 21:3). 요한계시록은 여인이 앉아있는 일곱 산들에 대하여 $3735를 사용한다. 이 산들은 어떤 구체적인 의미에서 로마의 일곱 언덕들은 아닐 것이다. 바벨론이 보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세속적인 권력과 문화를 대표하기 때문이며, 그 일곱이라는 수가 이러한 완전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세상(참조: 요일 2:16)은 모든 세상 권력들, 즉 산들의 보좌 위에 앉아 있으며, 적그리스도, 즉 짐승은 이러한 권력들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계 17:11).|(참조: C. Brown; W. L. Liefeid; W. Foerster).
오륏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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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 파내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오륏소(Homer 이래)는 기본 동사이며,||(a) '파다' dig(Pla.),|(b) '파내다' dig out, '파서 준비하다'(X., Cyr.),|(c) '구멍을 내다'(X., Oec.)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오륏소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마 25:18에서 돈을 감추기 위해서 땅을 '파는 것'을 나타낸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b) 막 12:1(병행구 마 21:33)에서 구덩이를 '파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고아와
ojrfanov"
고아 orphan.||#1. 고전 헬라어 문헌||세속 일반 헬라어에서 오르파노스는 호머 시대부터 나타나는데, 형용사로서는 '부모 없는, 아비 없는', 혹은 더 일반적으로 '...을 잃은'을 의미이며, 명사로서는 '고아'를 의미한다.|고대 헬라에서는 고아를 위해 따뜻한 배려를 하였다. 보통 가까운 친척이 후견인이 되어 고아의 생계와 교육을 책임졌다. 그 아이가 상속받은 모든 재산은 그가 성년이 될 때까지 엄격하게 보호되었다. 고아들은 정규세금 부과에서 면제되었다. 전사한 병정들의 자녀들의 생계는 국가가 맡았다(Demosthenes).|오르파노스는 비유적으로 선생을 여윈 제자를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참조: Plato, Phaedo I,16a).||#2. 70인역본의 용법.||오르파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48회 나오며, 히브리어 야톰(고아, 아버지가 없는 자)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고아는 어머니가 죽었든 살아있든 간에(참조: 욥 24:9) 아버지를 잃은 상태를 의미한다. 아버지 없이는 가정생활의 기본 단위인 "아버지의 집"은 존재하지 못하며 남은 가족들은 비정상적이며 비극적인 존재가 되는 허약한 개인일 따름인 것이다. 따라서 많은 문맥에서 고아와 과부는 같이 언급되고 있다(신 10:18; 시 146:9).|과부와 함께 나오는 고아는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다. 어떤 사람의 경건은 그가 과부와 고아를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따라서 측정된다. 공의는 그들에게 베풀어져야 한다(신 24:17).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저주가 회중에 임한다(신 24:19). 그들을 착취하거나 악용하는 것보다 사악한 일은 없다(신 27:19; 욥 6:27; 22:9; 24:3,9; 시 1:23; 10:2; 렘 5:28). 타락한 사회는 체류자를 착취하며, 고아와 과부를 부당하게 대하며, 부모를 모욕한다(겔 22:7). 예를 들어 그들은 고아의 당나귀를 쫓아내며, 과부의 소를 저당 잡는다(욥 24:3). 말 3:5에서 고아와 과부를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은 간음자, 마술사, 위증자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구약의 율법은 고아의 권리가 보장되며 그들의 요구가 충족되도록 명하고 있다. 고아는 특별한 십일조의 몫을 받게 되어 있었으며(신 14:28,29; 26:12-15) 연례 절기에 참예하게 되어 있었다(신 16:11,14). 추수 후에 남은 곡식단과 감람나무 열매와 포도들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두었다(신 24:17-22). 선지자들이 부르짖었던 회개와 도덕의 쇄신에는 고아를 돌보는 것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사 1:17; 렘 7:6; 22:3; 슥 7:1O).|고아를 위한 배려에 대한 이런 주장의 배후에는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여호와 그분이다는 신앙이 놓여 있다(신 10:18; 참조: 출 22:22-24; 잠23:10-11; 시 146:9; 호 14:3). 여호와께서는 "고아의 아버지"이시다(시 68:5; 참조 :시10:14).||#3. 신약성경의 용법||오르파노스는 신약성경에서 두번 나타난다.||(a) 약 1:27에서 야고보는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자들, 즉 "고아와 과부"에 대해 실제적인 관심을 가지도록 명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그는 고아와 과부를 같이 언급하는데 있어서 구약성경의 개념을 따르고 있으며, 경건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정의와 동정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 경건함은 헛된 것이라고 역설한다는 점에서 보다 근본적으로 구약성경를 쫓고 있다(참조: 특히 렘 7장).||(b) 요 14:18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성경에서 오르파노스를 비유로 사용한 일례이다. 세속 헬라어에서 이 용어가 선생을 여윈 제자들의 감정을 묘사하는 용법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가족을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집", 즉 아버지가 그 중심과 근원이 되는 일치단결된 공동생활로 평가한데서 그 이미지의 효과가 비롯된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집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며, 따라서 고아의 외로움은 삶의 모든 근거를 잃었다는 것에 있다.|여기서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표현된다(참조: 요 13:3). 예수님의 죽음은 그 제자들을 '고아들'로 만든 것이다. 그들의 상실의 척도에 대한 이보다 더 강렬한 어떤 상징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가련한 상황에 버려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올 것이다. 신속한 배려가 없이는 "고아들"이 존속할 희망이 적기 때문에, 오르파노스의 비유는 그리스도의 부활 때에(성령의 강림이나 재림 때라기보다도) 이 언약이 이루어지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부활절은 제자들이 선생을 여윈 슬픔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들의 슬픔을 표현하는 바로 그 말은 그들의 아들 됨을 말해주는 것이다'(B.F. westcott).|(참조: Walter Bauer; J.Pridmore; J.E.Hartley).
춤을 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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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다 danc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오르케오마이(Homer 이래)는 오르코스(%380: 줄)에서 유래했으며, '춤추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오르케오마이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공관복음에만 사용되었다.||(a) 막 6:22(병행구, 마 14:6)에서 살로메가 헤롯을 위해 춤을 추었다: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b) 마 11:17(병행구, 눅 7:32):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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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이 사람, 저것, 저 사람, ~하는 바의.||호스(Homer. 이래)는 기본 대명사이다.||(a) 이 단어는 지시 대명사로 '이것, 이 사람, 저것, 그것, 저 사람'을 의미한다.|(b) 이 단어는 관계 대명사로 '~하는(바의) (사람)' who, '~하는 바의' which, '(~하는)바 (것, 일)' what를 의미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때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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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때마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관계 부사 호사키스(Lysias)는 호소스($3745: 얼마나 많은)에서 유래했으며, '~할 때 마다'를 의미하며, 안($302)이나 에안($1437)과 함께 '언제든지 ~할 때 마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이 관계 부사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TR 헬라어 성경에는 안($302)과 함께, 넷슬판에는 에안($1437)과 함께 사용되었다.||(a) 고전 11:25; 고전 11:26,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b) 계 11: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호시오스
o{sio"
거룩한 holy, 경건한, 신앙심이 깊은 devout, pious.||#1. 헬라어 문헌의 용법||(a) 호시오스는 최초의 언급은 `신선한, 합법적인, 또는 의무에 따른' 것으로 간주되는 행위들, 즉 그 행위들이 신의 교훈에 기초한 것이든, 자연법이나 고대 관습이나 내적인 성향에 근거한 것이든, 도덕과 종교의 관점에서 선한 것으로 간주되는 행위들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헤 호시아는 거룩한 습관, 신적 법, 자연적 법이다.|호시오스는 제의에 있어서 사람에게 부과된 의무나 예컨대 장례의식 따위의 의식에 있어서 사람에게 부과된 의무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신의 법 또는 자연법에 의하여 인정되거나 허용된'이란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 호시오스의 의미는 디카이오스($1342:의로운)와 비교할 때 보다 잘 드러난다. 즉 타 호시아 카이 디카이아는 신의 법과 인간의 법 모두에 일치하는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b) 호시오스는 신들과 영원한 법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고 행동하는 사람의 자질로서 `경건한, 독실한, 신앙심 깊은`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좁은 의미로 호시오스는 신참자(입교자)들, 보기로 오르패우스 교단의 입교자들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아마도 헌신의 결례때문일 것이다.|신들을 묘사하는 말로서는 디카이오스($1342)와 함께 후대에 극히 드물게 사용되었다(CIG 3830).||(c) 호시오스는 사물이나 행위에 관해 쓰일 때에는 '신성하게된, 깨끗한, 정결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Emp.,4,2에서는 입에 관하여, Aesch.,Cho.378에서는 손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참조: 딤전2:8).||#2. 70인역본의 용법||호시오스는 주로 시편에 나오는 하시드의 역어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 하시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계로부터 발생한 계율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 즉 '충성된 사람, 경건한 사람'Koehler Baumgarter, 3l9)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자신의 언약(Covenant)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가지고 계신 신실하심과 인애하심을 가리키는 단어인 헤세드와 관련이 있다(참조: W.Eichrodt,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호시오스는 신 33:8에 나오는 레위에 대한 축복에 최초로 나온다: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여기서 레위의 하나님께 대한 관계가 '당신의 하시드/호시오스라는 말로써 표현되었다. 이것은 레위가 하나님의 시험에서 충실 한 것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또한 호시오스는는 복수형으로 가장 자주 나다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여든 회중을 의미한다(예: 시 85:8; 시 79:2의 "성도"). 시 50:5의 "나의 성도 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니와 언약한 자니라"라는 표현에서도 이런 예를 찾을 수 있다. 율법의 엄밀한 준수를 강조하는 문맥데서 조차도 하시드/호시오스는 '신뢰하는` 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여호와께서는 죄들을 사하여 주셨으므로, 그분께 하시드/호시오스는인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다(시 32:6; 시 52:9 이하).|호시오스는 하나님에 대하여 2회 사용되었다. 신 32:4에서 이 단어는 `정직한|upright` 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야샤르의 역어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곧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손수 제정하는 규례를 준수하신다는 뜻이다. 시 145:17에서 이 단어는 히브리어 하시드를 번역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신 29:19에에 나오는 타 호시아는 히브리어 샬롬의 역어로서 사람이 하나님께 기대하는 인애하심을 뜻하며, 사 55:3의 타 호시아는 히브리어 헤세드의 복수의 영역으로서 다윗이 하나님께 기대하는 성공들을 의미한다(여기서 다윗은 열방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의 증인이다).||#3. 신약 성경의 용법||호시오스는 신약성경에서 모두 8회 나오는데, 그 중 5회가 인용문에 나타난다. 구약성경에서 호시오스의 가장 중요한 용법(즉 호시오이가 회중을 의미하는 용법)은 발견되지 않는다.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은 하시딤(hasidim)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에클레크토이)이며 성도(하기오스)이다. 이 단어는 헬레니즘의 색체를 보다 강하게 띠는 작품에서만 간혹 나타난다.||(a) 호시오스는 인용문에서 2회에 걸쳐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계 15:3,4에 나오는 찬송은 시 145:17과 그 문맥을 인용하는데, 여기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계 16:5은 신 32:4을 연상시키는데, 여기에서 하나 님은 행악자를 정죄하실 때에 디카이오스(재판에 있어 의로우심)하며 호시오스(재판에 있어 거룩하심)하다고 언급한다.||(b) 호시오스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3회 사용되었다. 히 7:26에서의 호시오스의 용법은 독특하다. 여기에서 이 단어는 독립적 용법으로 나오는데, 다른 곳에서 라면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용될 수 있는 방식이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완전히 호시오스하여, 즉 주님은 죄가 없고 완벽하게 깨끗하여, 주님이 드린 제물은 단 한번으로 충분한 것이 되었다.|행 2:27과 행 13:35(시l6:l0의 인용)은 다른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주님의 거룩한 자(호시오스;참조 :히브리어 하시드)를 썩지 않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에게는 성취되지 않았다. 그 약속은 이제야 비로소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성취되었다. 예수께서는 종교 권력자들에게 종교적 범법자로 단죄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통하여 진정한 하시드가 되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대했던 인애하심의 상속자로 되었고(행 13:34; 이 구절은 사 55:3의 인용), 모든 나라를 심판할 권세를 부여받으셨다( 행l7:31).||(c) 호시오스는 사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딛 1:8의 감독의 자격에 대한 열거에서 호시오스는 카이오스($1342:의로운)와 함께 나온다. 감독은 그의 직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려면 하나님께 위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딤전 2:8에서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불경한 생각과 행위에서 자유하는 것을 상징한다.|(참조: Walter Bauer; F. Hauck; H. Seebass).
성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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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 holiness, 경건, 신앙심 devoutness, piety||#1. 헬라어 문헌의 용법||호시오테스는 호시오스($3741:거룩한, 경건한)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영원한 법령을 생각해서 행동하는, 개인적인 `경건'이나 효심`(piety)을 의미한다. 호시오테스는 부모에 대한 효심(piety)이다. 호시오테스는 내적 성향으로 나타나며, 외적 경건은 신들에 대한 제의적 예배에서 표현된다. 이 단어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묘사하기도 한다.||#2. 70인 역본의 용법||호시오테스는 70인역본 구약성경에서 4회 나오는데, `개인적 경건'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잠 14:32에서 호시오테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다(잠 14:32)라는 뜻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호시오테스를 정복할 수 없는 방패로 삼으셨다(참조: 계 l5:4). 이 단어는 신 9:5; 삼상 14:41; 왕상 9:4에서 나타난다.||#3. 신약성경의 용법||호시오테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타나며, `개인적 경건'을 의미한다. 눅 1:75("성결")에서는 구원의 시대에 의인의 생활에 대하여, 엡 4:24("거룩함")에서는 새 사람의 본성에 대하여 언급한다|(참조: Walter Bauer; F. Hauck).
거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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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하게, 거룩하게||#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호시오스(Eur. 이래)는 호시오스($3741)에서 유래했으며, '경건하게, 거룩하게'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호시오스는 신약성경에서 살전 2:10에 한번 나온다: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냄새
ojsmhv
냄새 smell, scen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오스메(Thu. 이래로)는 오조($3605: 냄새가 나다)에서 유래했으며, 좋든, 나쁘든, 중성이든 '냄새'를 의미한다. 고대에는 물의 냄새가 시들은 나무에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생각되었다(욥 14:9). 냄새는 생명이나 죽음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안개나 공기의 발산으로 간주된다.|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살아있는 피조물 중 어떤 것은 냄새를 맡고 산다"는 피타고라스의 견해를 언급하였다(De Sensu 5). 그러므로, 냄새는 문자 그대로 생명을 주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었다.|냄새가 어떤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다고 하는 냄새에 대한 이와 같은 물질적 개념은 또한 종교적인 면에서도 나타난다. 신이 계시될 때에 그로부터 발생하는 냄새는 "신적인 생명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을 산출해 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E. Lohmeyer).|한 비문은 달콤한 향기를 뿜는 신격화된 한 소년을 언급하는데, 이 향기는 그 무덤으로부터 자라나는 꽃들에게 생명을 준다고 한다. 달콤한 향기를 지닌 나무는 의인에게 생명을 준다고 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오스메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나오며, 대부분 히브리어 레아흐(냄새, 향기)의 역어로 사용되었다.|구약성경의 몇몇 구절은 냄새를 통하여 생명력을 부여받는다는 사상을 보여주기도 한다(욥 14:9).|아 4:10; 아 4:16 등에서 신부는 그의 연인의 매혹적인 향기를 노래한다.|렘 48:11에서 모압의 힘이 잘 익은 포도주와 그 향내의 힘에 비교되었다.|창 27:27에서 새로 잡은 신선한 짐승 가죽의 냄새로써 이삭은 그의 첫아들, 에서의 옷을 알아내었다. 구약성경은 제사의 향기를 언급하는데, 이 향기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예배자들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게 된다.|제물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기 위한 것이다(창 8:21; 레 2:12; 참조: 레 1:9; 레 1:13; 레 1:17; 민 28:1 등). 향기가 없는 것은 거절의 표현이다(레 26:31). 레 26:31과 암 5:21은 이러한 물질적인 개념의 한계를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바치는 것에도 그리고 그의 냄새에도 의존하지 않으신다.|비유적, 영적 의미에서, 지혜는 향내를 발한다. 즉 의인들의 삶을 위한 생명력을 발하는 것이다(집회서 24:11). 집회서 39:14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하였다. 토빗 8:2-3에서 향기들이 적대적인 세력들에 대항하는 안전 장치로 사용될 수 있다는 관념을 반영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오스메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다음의 의미를 나타낸다.||(a) 요 12:3에서 오스메는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이 구절에는 문자적 의미에 덧붙여 상징적 측면도 있다. 그 기름의 향기가 온 집안을 채운 것처럼, 복음의 향기가 곧 온 세상을 채우리라는 것이다(참조: R.Bultmann).||(b) 엡 5:2에서 오스메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의 향기를 묘사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여기서 "향기로운 제물"은 직역하면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한 제물'이다. 사랑과 오스메가 결합된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 예수님의 사랑하심과 대리적 자기 헌신에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이러한 비유적인 용례는 특히 빌 4:18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이 구절에서는 바울이 빌립보인들이 그에게 보낸 재정적인 원조를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칭한다. 여기에서의 개념은 단순히 여자적(如字的)인 엄격한 의미에서의 희생 제물이 아니다. 빌리보인들의 헌금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가져가는 온갖 종류의 증여를 상징한다"(E.Lohmeyer).|사랑의 표시로서 향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다.||(c) 고후 2:14에서 오스메는 생명을 불어 넣거나 혹은 죽음을 불어 넣은 힘이라는 개념을 나타낸다: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향기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발산되고 있다. 사실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지닌 자이다. 그러나 그의 설교를 통하여 바깥으로 퍼져가는 이 향기는 두 가지의 효과를 지니고 있다. 곧 복음에 복종하는 자들에게는 하늘이 준 생명을 가져다 주며, 그 반면에 그 메시지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가져다 준다. 바울이 이러한 자연물에 대한 비유를 채택한 까닭은 복음이 어떻게 인간들을 구별하며 또한 개개인의 결단을 요구하는 가를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또한 복음 안에 본래부터 내재해 있는 신적 능력을 강조하기 위한 것도 있다.|(참조: G.Delling; O.Flender).
호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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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큼 큰, 얼마나 큰||호소스(Homer. 이래)는 토수토스($5118)에 상당하며, '~만큼 큰, 얼마나 큰, ~만큼 먼, 얼마나 먼, ~만큼 많은, 얼마나 많은, ~만큼 긴, 얼마나 긴'을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호소스는 110회 사용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호스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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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3739)와 페르($4007)을 보라.||호스페르는 '참으로...하는 자(것)'를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 막 15:6TR을 참조하라.(EDNT).
뼈
ojstevon
뼈 bon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오스테온(Homer 이래)은 '뼈' bone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오스테온은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마태복음, 누가복음, 에베소서, 히브리서에 각각 한번 사용되었다.||(a) 눅 24:39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과 뼈를 언급함으로 그의 육체성을 증명하신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b) 마 23:27에서 바리새인들은 죽은 자의 뼈로 가득찬 무덤들과 같다고 한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c) 히 11:22에서 요셉의 뼈(해골)에 대해 언급한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d) 요 19:36에서 예언의 성취로서 예수님의 뼈가 하나도 꺽이우지 않는 것을 언급한다.||(e) 엡 5:30TR에도 언급되어 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호스티스
o{sti"
%788 헤티스,||호스티스등은 '누구든지' whoever, '~사람은 누구든지' everyone who를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48회 사용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질
ojstravkino"
흙이나 진흙으로 만든, 질그릇의.||#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오스트라키노스는 오스트라콘(%90: 토기)에서 유래했으며, '흙으로 만든, 질그릇의'를 의미한다. 이 형용사는 이동 중에 있는(이태리 붉은 진흙으로 만든) 이방 테라코타(terracotta) 우상을 쓸모 없고 생명 없는 것으로 묘사한 시빌라인 오라클(Sibylline Oracles 5, 495)을 작곡한 유대인 작곡자에 의하여 사용되었다(참조: Epistle of Diognetus 2:2, 7). 2세기에 아데미도루스(Artemidorus)가 사람의 몸을 질그릇으로 묘사할 때까지 그 이전의 고대에는 줄곧 오스트라키노스(ostrakinos)를 은유적으로 사용한 흔적은 별로 없다(5, 25).||#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오스트라키노스는 70인역본에서 19회 나오며, 아람어 하사프('진흙, 질그릇 조각', 단 2:33이하)와 헤레스(토기, 질그릇; 레 6:21; 레 11:33; 레 14:5, 레 14:50; 레 15:12; 민 5:17; 렘 19:1; 렘 32:14; 애 4:9)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오스트라키노스는 신약성경에서 '질'그릇이라는 뜻으로 두번 나온다.||(a) 고후 4:7에서 오스트라키노스는 보배, 곧 복음을 담은 질그릇에 대해 사용되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6에서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라고 묘사했다. 그 다음 구절은 "이 보배가 [질]그릇에" 담겨져 있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것은 사도와 그의 동료들을 보통 항아리에 비유하는 것이다. 보배의 광채와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의 평범함 사이의 이 현저한 대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설교자들로부터 설교자들이 선포하는 복음의 말씀의 영광에로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방향 제시이다. 이런 정황에서 볼 때 오스트라키노스는 복음을 위탁받은 모든 인간을 말한다. 이러한 묘사는 사람을 모세오경이나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담고있는 질그릇들로 표현한 랍비적인 기사들과 비슷한 점들이 있다. 예를 들면(Sifre Deut.48; 84a on Deut.11:22), 포도주를 금그릇이나 은그릇에 보관할 수 없고 그릇들 가운데 가장 천한 그릇들 중에 하나인 질그릇에 보관할 수 있는 것처럼 모세오경의 말씀도 스스로 보기에 겸손한 사람들 속에만이 간직될 수 있다(참조: b. Taanith 7a). 거기서 여호수아 벤 차나이아(Jehoshua ben Chanaiah)는 "영화로운 지혜는 아주 못생긴 질그릇 속에 있기 때문에" 그의 외모가 매력이 없다고 말한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그의 외모를 나약하다고 말했고 그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제쳐놓았다(고후 10:10; 참조: 고후 10:1; 고후 11:6). 바울이 자신을 오스트라키노스(질그릇)라고 칭함은 인간의 나약함이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으로 덧입혀질 때 하나님의 의도를 성취하는데 지장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참조: 고후 3:5; 고후 4:7; 고후 12:9-고후 12:10; 고후 13:3-고후 13:4).||(b) 딤후 2:20에서 오스트라키노스는 교회에서 유용한 인물을 비유하는데 사용되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바울은 교회를 큰 집에다 비유한다. 즉 큰 집에는 보통 여러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그릇들이 있는데 그 그릇들은 여러가지 용도에 쓰인다. 사실 정반대의 용도에 쓰이기도 한다(딤후 2:20). 나무 그릇과 질그릇이 있어서 이런 집에서는 천하게 사용된다 할지라도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의 집에 거짓된 자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금그릇이든 은그릇이든 질그릇이든 주인에게 영광스러운 봉사를 하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디모데는 자신을 거짓 교사들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그리고 그들의 천박한 행위들에서 자신을 깨끗이 함으로써 주께서 그를 부르셔서 맡기시는 어떤 과제라도 감당할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참조: W.L.Lane; J.H.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