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질: 구원의 목적, 그리고 표적
아슬란이 질에게 요구하는 것은 딱 두 가지, 즉 네 가지 표적들을 반복해서 기억하고, 그 표적들을 만났을 때 그가 알려준 그대로 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슬란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모세는 40년의 광야 방랑을 마치고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한다. “기억하라.”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일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그와 같이 행하실 것이요(신 7:19).” 그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과, 구원하실 때 행하신 ‘표적’이다.
신명기의 기록에 의하면, 모세는 이 말을 열 두 번도 넘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다. 아슬란 역시 질에게, 자신이 알려준 표적을 기억하라고 신신당부한다. 왜 그럴까?
“여기 산 위에서는 공기도 맑고 네 마음도 맑지만, 나니아로 내려가면서 공기가 점점 탁해질 것이니라. 그것 때문에 네 마음이 혼란스러워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여라. 그리고 막상 그곳에서 여기서 배운 표적들과 맞닥뜨리게 돼도 네가 상상했던 것과는 딴판으로 보일 것이니라.”
그렇다. 제아무리 구원의 감격이 컸다 하더라도, 또 그로 인하여 감사가 마음 가득히 채우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이제부터 걸어가야 하는 십자가의 길을 가리켜 주는 표적을 달달 외우고 있다 하더라도, 막상 현실에 맞닥뜨리게 되면 감격은 불안으로 바뀌고, 감사는 원망으로 바뀌며,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억되던 표적은 신기루로 바뀌고 만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휘파람을 불면서 완주할 수 있을 것 같던 제자의 길은 점점 바위와 모래만 가득한 광야로 변하고, 급기야는 마치 안개가 둘러싼 것 같이 주변에 아무 것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어 제자리에 멈춰 서게 된다.
질은 아슬란이 알려준 첫 번째 표적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유스터스는 나니아에 들어서자 마자 오랜 친구를 만날 것이고 그러는 즉시 그 친구에게 인사를 해야 하느니라. 그러면 너희는 둘 다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니라.” 그런데 그것을 알려줘야 할 유스터스를 다시 만나자 마자, 그가 엄청 더럽고 지저분하다는 생각에 그에게 아슬란을 만났다는 것이나 그가 네 가지 표적을 일러주더라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왕처럼 보이는 노인과 그 일행의 놀라운 행렬을 보면서 표적 이야기를 까맣게 잊고 만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30분이나 지난 후에야 첫 번째 표적을 기억하고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한다. “유스터스 스크러브, 빨리! 아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보여?” 그가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그제야 그녀는 아슬란을 만난 이야기이며 그가 알려준 표적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유스터스가 만나야 했던 오랜 친구는 캐스피언 왕이었고, 얼마 전 그들이 행렬에서 보았던 왕처럼 보이는 노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