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질: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가 되는 조건을 말씀하실 때,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이 두 가지를 항상 붙여서 제시하신다.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다른 종교에도 개념적으로 존재한다. 불교에서 ‘해탈’이나 ‘열반’과 같은 것은 자기 존재, 자기 행위를 자기 자신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을 ‘아상’이라고 하는데, 해탈은 이 ‘아상’에서 자유로워진 상태를 말하며, 이것은 ‘열반’으로 성취된다. 그러니까 불교도 ‘자기 부인’을 추구한다. 『금강경』에 보면 ‘자기 자신이나 자기 행위로 다른 사람이 은혜를 입었다 해도,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자기 것이라고 인식하고 인정하는 순간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된다’는 부처의 말이 나온다.
도교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지는 노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가 지은 『도덕경』에는 영화 제목으로 유명한 ‘천장지구’라는 말이 나오는데, 단락 전체를 보면 이렇다. ‘하늘과 땅은 길게 오래간다. 하늘과 땅이 길게 오래가는 것은 스스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하므로 능히 오래 사는 것이다.’ 또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 ‘공을 이루었으면 몸은 물러난다. 그것이 천지의 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기 부인’이 아니다. 예수님의 자기 부인은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그분과 함께 새사람으로 부활했다는 공적 고백이다.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욕구를 포기한다는 것, 그래서 이제는 성령님으로 거듭난 사람답게 오직 성령님의 욕구를 바라고 행하며 살겠다는 선언이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욕심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갈 5:16-17).”
자기 부인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에서 배우는 겸손함과 온유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자기 부인’은 ‘천지와 하나 되는 열반에 드는 길’이거나 ‘천지의 도’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는 것이다. 즉, ‘자기 부인’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에 필수 요건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은 ‘자기 부인’의 필수 목적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자기 십자가’는 주님께서 각 제자에게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사명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맡기신 사명, 즉 사람의 몸을 입어 하나님 나라 백성의 구속을 이루는 것이 그분의 십자가였던 것 같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신 사람에게 맡기시는 사명이 그에게 ‘자기 십자가’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고통의 길이며 치욕의 길이다. 십자가를 지고 이 땅에서 사신 예수님께서 모든 고통과 치욕을 당하신 것 같이, 예수님께서 주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따라 사는 사람은 고통과 치욕을 당한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그렇다. “너희가 이 세상에 속하였으면 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이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