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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철 - '사도행전'은 바른 제목이 아니다? 본문

설교분석/이재철 목사

이재철 - '사도행전'은 바른 제목이 아니다?

frog prince 2023. 3. 21. 13:56

사도행전 1장 1—2절: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최근에 올라온 이재철 목사의 물댄동산교회에서의 설교를 듣고, 이 글의 주인공이 이재철 목사임을 밝힌다. 목사는 프로가 되야한다고 하셨기에... 2023년 6월 23일.)
 
어느 설교자의 사도행전 강해설교를 들었다. 사도행전 1장 1-2절의 설교인데, “행하시며”를 가지고 한 설교였다. 그는 한글성경의 “사도행전”이라는 제목이 틀렸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정리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 사도행전 1장 1-2절에서 먼저 사용된 동사는 “가르치시기를”이 아닌 “행하시며”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먼저 하신일은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선행을 하셨다. 
  •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 역사상 유례없이 성경 공부에 열심”이기에 가르침을 강조하지만, 누가는 “행하시며”라는 동사를 먼저 사용했다.
  • 사도행전이라는 책 제목은 헬라어로 ‘프락세이스 아포스톨론’이다. 우리말 “행전”은 단수와 복수를 구별하지 않지만, 헬라어의 “행함”을 뜻하는 ‘프락세이스’는 복수형이다. 따라서 영어 성경은 이를 “Acts”로 정확하게 번역을 하고 있다. 따라서 “사도행전”은 정확하지 않다

이러한 주장의 문제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사도행전 1장 1절을 원어로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있는데, Τὸν μὲν πρῶτον λόγον ἐποιησάμην περὶ πάντων, ὦ Θεόφιλε, ὧν ἤρξατο ὁ Ἰησοῦς ποιεῖν τε καὶ διδάσκειν, 여기서 “가르치시고” “행하시며”는 ποιεῖν διδάσκειν 인데, 더 중요한 것은 바로 τε καὶ이다. τε καὶ는 영어로 both - and로 번역이 되는데 “행하시며” 와 “가르치시며” 둘 다를 뜻하는데, 두 단어를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행하시며”와 “가르치시며”라는 동사의 순서와 상관이 없이, 그 둘이 동시에 혹은 함께 행해진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의 하신 “일”의 양면성을 가리킨다. 이것은, “행하심”이 먼저가 아니라, “행하심”과 “가르치심” 그 둘다 함께 행하셨다  라는 것이다. 따라서, 행함과 가르침을 분리해서 보고 있지 않다. 행함이 있는 곳에 가르침이 있고, 가르침이 있는 곳에 행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면, 항상 행하심만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심이 먼저 있을 셨을 때도 있었고, 그 둘은 항상 함께 행해졌으며, 떼어 낼래야 떼어 낼 수 없는 관계이다. 문제는, 원어로 성경을 읽고 이해한 것이 아니라, 단어 풀이에 집중하니, 중요한 문법적 구조와 단어들의 사용을 모른 것이다.
 
2.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 역사상 유례없이 성경 공부에 열심”이다라고 하는데, 착각이 너무 심하다. 도데체 무슨 성경 공부에 열심이란 말인가? 실제로, 성경 공부라는 것은 미국과 캐나다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고, 오히려 미국이 한때는 더 열심이었다. 그뿐 아니라, 목회자나 평신도의 신학 지식 역시 한국 보다 더 뛰어나다. 하긴, 수십년전 어느 신학생의 말이 생각난다. 한국의 성도들을 우숩게 보지 말라고 하던. 그런데, 정말 웃긴게, 한국 성도들이 읽는 서적들은 신학의 깊이가 전혀 없는, 신앙적 수박 겉핥기식의 신앙 서적들이 대부분이다. 미국은 침례교단에서는 교회에 불이 꺼지지 않는 다는 말이 있었을 때에는 성경 공부를 체계적으로 가르쳤고, 교리를 열심히 가르쳤다. 지금도 성경공부에 열심이 있는 교단중 하나이고, 특히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대표적인 미국침례교회는 성경공부가 단순한 성경 내용에 대한 공부가 아니라, 신학 교수들이 직접 가르치는 신학과 교리반 도 있으며, 미국에서 손가락 안에드는 기독교 철학자가 가르치는 변증학 반도 있다. 그뿐 아니라, 이 동네에서 대표적인 미국장로교회 역시 체계적으로 성경을 가르치며, 교리와 신학을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또한, 미국에서 강해 설교로 유명한 존 맥아더 목사의 교회만을 보더라도, 그곳의 성경공부는 신학교수들이 직접, 평신도들에 맞춘 수준 높은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아니, 성경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존 맥아더 목사의 강해 설교 자체는, 보편적으로, 한국의 이름 있는 그 어느 목사의 설교보다 그 내용의 깊이가 보편적으로 뛰어나다. (성경을 관찰하는 면에서는 박영선 목사님을 제외하고.) 또한, 내가 다니던 백인교회에는 틸리히의 신학에 대해 논문을 쓰는 장로도 있었으며, 신학원생들이 읽는 신학책을 읽고 이해하는 성도들도 있었다. 또한, 성서사본비평에 대한 수준 높은 지식을 지닌 대학생들도 여럿을 봤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수년간 배워, 황당한 원어 실력으로 원어를 알레고리 해석으로 사용하면서 그것을 강해라고 착각하는, 매주 원어를 사용하는 한국의 목사들 보다 더 실력있는 성도들도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일까? 역사를 제대로 공부했다면, 청교도들은 한때 성도들도 원어로 성경을 연구하고 배웠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긴, 보편적으로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세계 최고 아니면 최악이라는 이상한 생각속에 사로 잡혀 사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 데, 이러한 주장을 하는 목사도 역시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으며, 지식과 생각의 한계를 나타내 주는 발언이다. 어쩌면, 집단으로서의 보여주기식 모임을 중요시한 한국교회로서는 그와 반대이며 개인적인 성경공부와 성장에 더 촛점을 맞춘 서양의 교회들이 우습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3. “사도행전”의 제목인 “사도들의 행함” (프락세이스 아포스탈론)은 원본에는 없었다. (참고로, 파피루 46에는 '프락세이스'라는 한 단어만 적혀있다.) 제목인 ‘프락세이스 아포스탈론’(ΠΡΑΞΕΙΣ ΑΠΟΣΤΟΛΩΝ)은 나중에 더해진 것이다 (시내 사본과 바디칸 사본). 그뿐 아니라, 원본에는 제목이 없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사본비평을 제대로 안했기에 사본에 적힌 제목을 원본의 제목으로 착각한 것인다. 또한 헬라어 명사(noun) '프락세이스'(πρᾶξις) 혹은 '프락시스', 그리고 영어의 Acts라는 단어는, "activity" 곧 어떤 행한 일들을 뜻하는 것으로서 행동으로 취한 모든 일들을 뜻하는데 (활동, 행위, 관행), 이는 가르침을 제외한 일들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한 모든 행한 일들을 뜻한다. 이것은 사도행전 1장1절에 "행하시고"를 뜻하는 헬라어 동사(verb) '포이에오'(ποιέω)와 "가르치다"를 뜻하는 동사 '디다스코'(διδάσκω)라는 두가지의 행한 일들 (activity) 포함하고 있는데, 라틴 불가타에서도 제목에는 헬라어와 영어와 같은 의미의 명사 Actus, 그리고 1장1절에는 동사 facere(행하시고)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한글 성경의 “사도행전”이라는 제목은 전혀 문제가 없다. 특히, 1장 1절의 “행하시며” 와 “가르치시며”가 동시에 이루어진 사건임을 인식할때에, “사도행전”이라는 제목은 정말 훌륭한 제목이다. 물론, 사도행전의 주인공이신 “성령님”이 빠진 것이 아쉽고, 보편적으로 유대인들에게로 향한 사도 베드로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의 대한 이야기 뿐이지만, 근본적으로 그게 그것이다.  특히, 사도행전 전체에서 성령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하신 일, 곧 가르침과 행함에 대한 것임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사도행전이라는 제목은 사도행전의 전체적인 내용의 핵심을 제대로 반영한것은 물론, 사도행전 1장1절에 나온 핵심을 내용을 있는 그대로 나타낸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