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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철, "어머니, 아들입니다...당신의 아들이라는 소유격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9:26-27) - 소유격이 없다고? 본문

설교분석/이재철 목사

이재철, "어머니, 아들입니다...당신의 아들이라는 소유격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9:26-27) - 소유격이 없다고?

frog prince 2023. 3. 17. 15:47

요한복음 19:26-27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오늘, 이재철 목사의 물댄동산교회에서 목회자들을 위해 한 설교 아닌 설교를 듣고, 이 글의 주인공이 이재철 목사임을 밝힌다. 또한, 인터뷰 내용의 링크는 다음과 같다: http://dabia.net/xe/comment/490910. 앞으로 시간이 되는데로 그에 대한 비판의 글을 올려 그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겠지만, 뭔가 착각에 빠져 있는 모습과 이중성이 더욱 더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고, 그의 선지자 같은 비판이 그럴듯 한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자신을 잊어 달라고 은퇴 설교에서 말했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영웅이 되고 싶은 심리를 예전 부터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아마추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원어풀이 "강해설교"에 진절 머리가 났기 때문이다. 물론, 바른 말도 그 설교에 포함되어 있다. 그것 역시 다루려고 노력을 해 보겠다. 참고로, 목사가 프로여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사본비평, 원어주해, 해석학, 성서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이라는 설교자에게 요구되는 전문적 지식이라는 차원에서... 2023년 6월 24일.)
 
설교 시간에 늘 원어를 들먹이는 어느 목사의 인터뷰 내용을 보게 되었다. 한 10년 전의 내용인데, 그는 요한복음 19:26-27에 대해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원어 문법을 근거로 27절에서 예수님은 “요한아, 너의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셨지만,26절에서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성경에 있는 “아들이니이다”를 "당신의 아들이니이다"로 이해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며, "당신의 아들입니다"로 번역된 모든 성경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유에 대해, 원문을 보면, 27절에는 ”당신의 [아들]”이라는 소유격이 있지만, 26절에는 ”당신의 [아들]“이라는 소유격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이는 "아들이니이다"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지 요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26절에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귀네’라는 극존칭을 쓰면서 ”어머니,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자신의 해석이 전통적인 해석을 거부한 과도한 해석이라는 어느 교수의 비판에 대해, 모든 성경을 전통적인 해석의 틀에서만 해석을 해야 한다면, “더 깊고 새로운 영적해석이” 나 올 수 없다며,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루터의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며, 자신의 해석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내가 볼 때에 스스로의 해석을  종교개혁자와 동등한 개혁적인 해석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해석이 문법적으로 절대 틀렸다면 틀린 것이지만, 자신의 해석이 문법적으로  옳다면 그러한 해석을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을 한다. 그 말은 곧 자신은 성서 원어와 문법에 자신이 있다는 뜻으로 나는 받아들인다.
 
우선, 그 목사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27절에는 "너의 어머니다"에서 "너의"라는 소유격이 있다 (여기서 "너의"는 요한을 가리킨다), 그러나, 
  • 26절에는, 원어에는, “당신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신의”라는 소유격이 없다. 그렇기에 26절에서의 아들은 요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 26절에 있는 ’귀네’(γυνή)는 극존칭인 “어머니”이며,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극존칭으로 ”어머니…아들입니다“라고 말했다.
  • 따라서, 26절에서의 “아들”은 요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부분은 그가 정확하게 설명을 하지 않아서 헷갈리지만, 문맥상 그렇게 보인다.)
  • 자신의 해석은 종교 개혁자와 맞먹는, 영적으로 깊이 있는 개혁적인 해석이다. (맥락이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 목사의 해석의 문제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1. 요한복음 19장 26절을 원어로 보면, λέγει τῇ μητρί Γύναι, ἴδε ὁ υἱός σου (레게이 티 미트리 구네, 이데 호 후이오스 수)라고 되어 있는데, 그 목사의 주장과는 달리, ”너의" 혹은 "당신의"를 뜻하는 소유격 2인칭 대명사인 '수'(σου)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당신의 아들”을 뜻하는 ὁ υἱός σου (호 후이오스 수)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요한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26절에 "너의" 혹은 "당신의"라는 소유격이 없기에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원어로 본문을 읽고 번역할 능력이 있다면, 그리고 기초 문법이라도 안다면, 이런 황당한 주장과 해석을 절대로 할 수 없다.
 
2. 그 목사는 26절의 "여자여"를 뜻하는 헬라어 ‘귀네’(γυνή)를 언급하며, 그것은 극 존칭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마지막 문구를 “어머니, 아들입니다”라고 번역을 함으로써, ‘귀네’를 “어머니”로 오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 귀네’는 “어머니”가 아니고 우리말 성경과 여러 언어 역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자여”이며, ‘미트리’가 “[그의] 어머니”이다. 또한, ’ 귀네’는 극존칭이 아니다. ‘귀네’는 문맥 혹은 상황에 따라 “여성"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일 수 도 있고 (Euripides, Medea; IonSophocles, Oedipus Tyrannus), 부부 사이에서의 애칭일 수 도 있으며 (Plutarch, Consolation ad Uxorem), 신약성경에서는 보편적으로 여성을 일컫는 일반적인 표현으로서 여성을 함부로 부르거나 무시하는 표현은 아니며, 예의를 지키는 표현으로서 존칭으로 볼 수 도 있다. 그러나 그 목사의 주장처럼 극 존칭은 아니다 (마 15:28; 누 13:12, 22:57; 요 4:21, 8:10, 20:13).
 
3. 위에 1과 2를 정리를 하자면, 26절에 소유격 대명사가 있으며, 따라서 26절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요한을 가리키며 “여자여, 보시요,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셨으며,  “여자여”로 번역이 된 ‘귀네’는 “어머니가 아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번역과 해석이 문법적으로 그리고 문맥적으로 충실하며 옳은 것이다. 그는, "당신의"를 뜻하는 소유격이 있다면 전통적 해석이 옳다고 했는데, 위에서 입증한 데로, 원어로 소유격 대명사가 있고, 따라서, 전통적 해석이 옳은 것이다. 그의 해석에 대해서는 설명을 안 하기로 한다.
 
4.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주관적인 "더 깊고 새로운 영적 해석"이라는 결과가 그러한 자의적 해석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깊고 새로운 영적 해석"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또한, 한국의 수많은 이단들 역시 원어를 제대로 모르면서도 원어를 들먹이며 영적으로 깊이 있고 새로운 해석들을 하고 있는데, 그것과 다른 기준이 무엇인가? 그는 이러한 해석을 종교개혁과 연관을 시키는데, 어떠한 해석학적 기준이 없거나 또는 올바른 원어 해석을 할 실력이 안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옳다는 자신감과 영웅의식에 사로잡혀 용감하게 원어를 풀어 해석을 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것이 과연 개혁을 이루어 내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가? 개혁을 위한 자의적 해석은 깊이가 있는 것이며 영적이기에 용납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성서 해석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논할 수 도 없으며, 이단 사상을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 잣대를 논할 수 조차 없게 된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해석이 맞다면 그것은 개혁적이고 혹 틀렸으면 그만이라는, 자신의 틀린 것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따르지 않는다는 그 자세에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또한, 문제는, 해석을 전통적인 해석의 틀속에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의 해석은 불온전한 성서 원어 지식을 가지고 어떤 성서해석학적 법칙도 없는 자의적인 해석을 하여, 근거 없이 전통적인 해석을 거부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해석을 거부하려면 학적으로 성립이 되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전통적인 해석의 틀 속에 갇혀 있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학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렇게 할 지식 곧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5. 종교개혁자들은 오로지 개혁을 위한 개혁을 한 것이 아니며, 자의적 해석을 한 것이 아니고, 전통적 해석의 틀 속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성경을 꾸준한 해석적 기준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했으며, 새로운 것을 위하여 혹은 영적 깊이를 위하여 혹은 개혁을 위하여 성경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정직히 해석한 것이고, 특히 어거스틴의 해석 곧 교회가 상실한 “전통적” 신학을 재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해석은 원어를 빙자한 알레고리 해석 그리고 헬라어 지식의 한계에 의한 황당한 해석과는 달리, 실력 있는 학적인 해석이며, 잊고 있던 전통적 신학/교리를 충실히 주해하고 펼친 것이다. 또한, 그들의 전통적 신학의 재 발견은 성경 주해에 있어서 맞으면 좋고 틀리면 그만이라는 종류의 주해와 해석이 아니라, 당시 교회 전체를 뒤집어 놓은, 참으로 개혁적인 전통적 신학의 재 발견이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들은 개혁을 위한 해석, 영적으로 깊이 있는 새로운 해석에 목을 맨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자!라는 예언자적 행위였으며, 성서 중심의 전통적 신앙을 추구한 것이었다. 어쨌건, 종교 개혁자들의 실력을 과소 평가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실력을 과대 평가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의문 투성의 원어 단어 풀이와 확실하지 않은 문법을 기반으로 한 해석을 가지고 종교 개혁자들에게 비벼대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전통적인 해석을 거부하려면, 학적으로 성립이 되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깊이 있는 해석은 꼭 전통적 해석과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6. 마지막으로, 성경의 깊이를 파헤치는 방법 중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동안 한국 최고의 강해 설교가로 인정받았던 박영선 목사님의 창세기 설교가 출판 되었을 때 (자신이 스스로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타인들 곧 목사들과 성도들과 신학자들이 그를 인정했고, 자신이 시무하던 교회가 그의 설교집을 출판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관계없는 출판사가 그의 설교집을 출판한 것이다), 그 설교집은 그것을 읽은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그의 설교가 전통적 해석과 다른 새로운 것을 제시해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만의 성경을 보는 눈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본문에서 (원어 단어 풀이가 아니라) 찾아 조명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설교집 제목처럼 “하나님의 열심”이다. 그것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렌즈가 되었고,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 곧 그의 열심을 자신의 체험과 특유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또는 충격적인 언어로 설교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집요하게 파헤침으로써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곧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인본적 영역들을 하나하나 깨뜨렸기 때문이며, 인간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들의 반항에 대해 적나라하게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만의 성경을 보는 눈을 키우는 것이 성경을 깊게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런데, 제대로 된 눈을 키우려면, 소논문과 신학서적들을 열심히 읽고 그 내용들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 이기적인 교회성장과 명예욕을 포기하고, 선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고, 그 시간을 말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연구와 관찰과 깊은 생각에 바쳐야 된다. 시간이 안 된다면, 걸으면서, 밥을 먹으면서, 운전을 하면서,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하고, 그것에서 발생하는 신학적 및 실질적 문제들과 교인들이 직면한 문제들과 씨름을 하다 보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 눈을 뜨게 해 주신다고 나는 확신을 한다. 엉터리 원어 풀이에서 말씀의 깊이와 개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대한 묵상과 연구와 관찰과 깊이 있는 생각/고민, 그리고 기도가 깊이 있는 말씀으로 이어지며,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개혁을 일으키고, 자신의 가정에 개혁을 불러오고, 더 나아가 교회에 개혁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한 순간을 위한 잔머리 개혁이 아니라, 오래 남아 영향을 끼치는 개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