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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번역이 잘못 되었다고? (마 1:19-20) - '엔티메오마이'(ἐνθυμέομαι)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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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번역이 잘못 되었다고? (마 1:19-20) - '엔티메오마이'(ἐνθυμέομαι)

frog prince 2023. 1. 2. 09:15

마태복음 1:19-20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다.”
 
성탄을 맞이하여 여러 설교를 유튜브에서 듣고 있었는데, 성경의 번역 이 잘못되었다는 설교를 들었다. (한국어 성경만이 아닌, 그와 같이 번역된 모든 언어의 성경이 잘못 번역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자신의 발언의 범위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한국의 스카이대를 졸업하고 미국의 명문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인데, 마태복음 1:19-20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20절에 “[요셉이] 이 일을 생각할 때에”라는 “번역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라고 하고 난 후 또다시 “번역 잘못된 거예요”라고 강대상에서 확신에 찬 설교를 했다. 그의 이유는 바로 “이 일을 생각할 때에”로 번역이 된 단어는 헬라어 ‘엔티메오마이’(ἐνθυμέομαι)인데,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심사숙고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속이 뒤집히다”이다. 그는 자신이 헬라어를 잘 모르지만 주석을 참고했다고 하며, ‘엔티메오마이’라는 단어를 찾아봤다고 한다.
 
우선, 헬라어를 잘 모른다면서 어떻게 한국어 성경과 다른 역번들이 “이 일을 생각할 때에”라고 번역한 것이 틀렸다고 강대상에서 성도들에게 확신에 찬 선포를 할 수 있는지 참 궁금하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속마음은 자신이 실력 있는 목사라는 것을 성도들에게 심어 주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려는 것인가? 도대체 왜 원어에 “원”자도 모르는 성도들에게 번역성경의 권위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인가? 물론 번역이 그 성격상 (번역이라는 성격) 정확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고, 따라서 그러한 부분에 대해 바른 의미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언어학적으로 그리고 해석학적으로 실력이 될 때에나 가능한 것이고, 또한 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된다. 내가 여기서 해석학을 언급하는 것은 원어 풀이에 있어서 해석학은 떼어 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해석학적 방법들이 원어 해석에 적용이 되는 부분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엔티메오마이’라는 단어를 “속이 뒤집히다”로 번역을 하고서는, 그것을 근거로 설교를 전개해 나갔다는 데에 있다: 정혼한 여자 [마리아]가 임신했는데, 요셉의 속이 뒤집혔다는 것이며, 결론은 “의인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어도 속이 뒤집힐 때가 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그의 설교는 성서 텍스트에 순종한 설교가 아니라, 센세이셔널한 아이디어를 찾고자 혹은 이미 정해놓은 색다른 설교 아이디어를 원어 번역이라는 이름하에 정당화 한 설교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왜냐 하면, 문맥을 보면, 그러한 번역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의 그러한 주장이 왜 잘못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본문은 원어로 다음과 같다.
ταῦτα δὲ αὐτοῦ ἐνθυμηθέντος ἰδοὺ ἄγγελος κυρίου κατ’ ὄναρ ἐφάνη αὐτῷ λέγων· Ἰωσὴφ υἱὸς Δαυίδ, μὴ φοβηθῇς παραλαβεῖν Μαρίαν τὴν γυναῖκά σου· τὸ γὰρ ἐν αὐτῇ γεννηθὲν ἐκ πνεύματός ἐστιν ἁγίου. (NA28)
 
첫째, 번역이 틀렸다고 한 목사의 주장과는 달리, “이 일을 생각할 때에”라는 문구는 ‘엔티메오마이’라는 한 단어가 아니라 ‘ταῦτα δὲ αὐτοῦ ἐνθυμηθέντος’ (타우타 데 아우투 엔투미텐토스)이다. (실제로는, '엔티메오마이'가 아니라 '엔투메오마이'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일을”이라고 번역된 문구는 ‘타우타 데 아우투’이고, “생각할 때에”로 번역이 된 단어가 '엔투메오마이'(엔투미텐토스)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번역도 못하면서 어떻게 용감하게 기존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강대상에서 확신에 찬 선포를 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둘째, 성경이라는 콘텍스트에 중점을 둔 헬라어 어휘사전인 BDAG를 찾아보면, “속이 뒤집히다”라는 뜻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클래식 헬라어 어휘사전 리델-스콧-존스를 살펴보면, BDAG와 마찬가지로 “심사숙고하다”는 압도적인 의미 외에, 그와 비슷한 “마음에 담아두다”, “근심하다”, “[마음에] 상처를 입다”라는 뜻을 볼 수 있으며, 예외적으로 “…에 노여워하다”라는 뜻을 발견할 수 있다. 리델-스콧-존스 어휘사전은 “.. 에 노여워하다”의 근거를 아이스킬루스(Aeschylus)의 “자비로운 여신들”(Eumenides; 직역: “자비로운 그녀들”) 222 줄에서 찾고 있는데, τὰ μὲν γὰρ οἶδα κάρτα σ᾽ ἐνθυμουμένην이라고 되어 있으며, 번역을 하자면 “나는 네가 그것을 마음에 깊이 담아두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인데 (κάρτα는 “매우”라는 뜻인데, 문맥상 “깊이”로 번역을 하였다), 그에 앞서, 오레스테를 그의 집에서 부당하게 쫓아내었을 것이라는 추측, 그리고 “죽이다” 와 “노여움”라는 단어들이 등장하는데, 그것에 따라 “마음에 담아둔” 상태가 “노여움”이라는 차원에서 ‘엔투메오마이’는 문맥상 “노여움”을 암시하는 차원에서 “노여워하다”로 해석적 표현을 한 것인데, ‘엔투메오마이’라는 단어 자체에 “노여워하다”라는 뜻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엔투메오마이’에 “노여워하다”의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휘사전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이다. 또한, 어휘사전은 그 단어가 사용된 문맥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인데, 따라서 그 사전에 여러 의미가 포함되었다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원하는 뜻을 선택해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맥을 무시하고 “노여워하다”라는 의미를 선택해서 “속이 뒤집히다”라는 뜻을 입혀 사용한 것은 바로 기존의 해석과 색다른 설교를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설교는 새로운 뜻을 발견하는 신선하게 성경을 보는 눈을 가진 설교라는 인식을 심겨 주려는 욕심에 의한 선택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셋째, 문맥적으로 “속이 뒤집히다”라는 번역을 할 수 없다. 물론 요셉의 속이 뒤집어졌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그러한 해석을 뒷 바침해줄 근거를 성경은 제시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본문은 행함으로 이루어질 요셉의 선택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그 결과는 바로 그는 의인이었다는 것이다. 왜 그를 의인이라고 했는가? 바로 그가 조용히 마리아와 헤어지려고 했기 때문이며, 어떻게 그 일을 행할가에 대해 심사숙고 했기 때문이다. 그가 감정적으로 그 상황에 대처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선택을 했으며, 그 선택을 실행하기 위한 방법을 깊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가 조용히 헤어지기로 결정한 마음의 행위가 그가 의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결정에 따른 방법을 찾고 있었다는 것인데, 방법을 찾는 생각의 과정 역시 의로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조용히 헤어지기로 결정이 난 상황에서 “속이 뒤집어질 때에”라고 번역을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은, 분노한 상태에서 어떻게 마리아와 “가만히 끊고자” 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속이 뒤집어질 때에”를 계속해서 고집한다면, 해석학적으로나 원어적으로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상식적으로도 문맥에 맞지 않는, 말이 않되는 황당한 번역이 될 것이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속이 뒤집힐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그는 성서 본문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튀는 설교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한 단어를 가지고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은혜롭고 깊이 있는” 말씀을 전한 것이다.
 
이천 년 기독교 역사의 해석을 뒤집어 놓는 능력의 종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