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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대 칼럼

'확실성', 역사의 뒤안길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2. 12. 22.

확실성이라는 신기루는 어디에서 출몰하였을까? 길에 있는 돌멩이 하나에도 그것의 기원이 있으니 확실성의 화석을 찾아 역사의 지층을 탐색해 보자.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신교와 구교의 싸움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을 의심하게 했기 때문에 '확실성'에 대해 목마르게 하였다. 확고한 진리가 없다는 것은 마치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 없어지거나 '신'이 사라져버린 것과 같다. 마땅히 해야만 한다는 인간 내면에서 울리는 정언명령은 메아리 없는 목소리가 된다. 인간 세상은 만인이 만인을 향해 적이 되어 아비규환의 장이 되고 만다. 투쟁을 규압할 횃불이 있어야 한다.

리바이어던을 깨우는 신호다. 정치 철학자인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벌거벗은 시민의 평화를 위해 정치적인 통일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날한시에 모든 권한을 주권자에게 양도하기로 서명하여 사회계약을 맺었으니 주권자의 이름은 리바이어던이다. 이제 모든 사실과 진리는 리바이어던에게서 나오며 그의 통치하에서 질서가 수립되고 평화가 임할 것이었다. 시민들은 생각과 판단 따위는 하지도 말고 기계처럼 움직이면 된다.

그렇다면 리바이어던의 실체는 무엇인가? 주권자가 말하는 주체라 해도 그는 시민들의 입을 모아 놓은 것이므로 시민 전체이면서 하나의 인격이다. 리바이어던은 오직 시민과 수학적 계산과 동의 그리고 분쟁으로 구성된다. 그러니까 신조차도 밀어내고 하나로 통일된 주권자인 '리바이어던'은 사회적 관계로만 구성된다.

그런데 횃불은 홉스의 리바이어던만 깨운 것이 아니라 로버트 보일의 공기펌프도 불러낸다. 샤핀과 셰퍼의 저서 『리바이어던과 공기펌프: 홉스, 보일, 그리고 실험실 생활』(Leviathan and the Air-Pump: Hobbes, Boyle, and the Experimental Life)는 과학이 자연을 탐구하면서 어떻게 진리의 발견이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책은 보일이 공기펌프를 이용해 기체의 압력과 부피의 관계를 실험으로 시연하는 것을 보여준다. 보일은 그가 믿을만한 신사들만 초대하고(귀부인들은 오기 어려운 시간을 선택), 재판을 흉내 내는 퍼포먼스 속에서  신사들이 그 실험의 증인이 되게 했다. 보일은 완벽히 통제된 그의 실험실에서 최첨단의 실험장비인 공기펌프를 사용하여 압력이 증가하면 공기의 부피가 감소한다는 사실을 구축했다. 보일은 조건을 통제하여 어디서든 실험을 할 수 있도록 실험 매뉴얼도 만들고, 실험장면을 직접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이야기식으로 자료를 정리하였다. 사람들이 실감 나는 그의 이야기를 접할수록 보일은 '원리로 환원시킬 수 없고, 굽힐 수도 없는 엄연한 사실'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이 사실은 형이상학이 바뀌어도 통치체제가 바뀌어도 통제된 조건에서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다시 말해 보일은 실험실이라는 폐쇄된 공간과 실험실의 기자재들 안에서 공기펌프라는 인위적인 중재자에 의해 사실을 구축해냈다. 사실은 제조되는 것임을 우리는 보일의 실험 시연에서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완벽하게 통제된 상황에 개발되었다. 실험에 관여한 공동체가 만들어낸 과학적 사실이란 주어진 것도 아니고 보편적인 것도 아니며 아주 특정한 정치적, 기술적, 우발적, 사회적인 조건 속에서 생산된 것이라 하겠다.   

 


 

글 | 백우인

감신대 종교철학과 박사 수료. 새물결플러스 <한달한권> 튜터. 신학 공부하면서 과학 에세이와 시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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