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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대 칼럼

확실성이라는 신기루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2. 11. 9.

 

퇴화해 버린 심해어류의 시력만큼이나 침침한 밤. 밖을 보여주던 유리창은 거울이 되어 바깥 대신 안에 있는 나를 비춘다. 거울이 된 유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와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는 나를 세어본다. 내 안에 내가 도대체 몇이나 있는지 모르겠어서, 많은 모습 중에 진짜인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서 참으로 하염없는 미궁이다. 

몇 해 전 제주도에 갔을 때, 거울의 방에서 수도 없이 반사되어 보이는 내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바라보고 있을수록 실재와 허상을 구별할 자신이 없어 난감하고 혼란스러웠다. 단정 지을 수 없는 모호하고 애매한 상황은 불안하다. 인간의 원형질은 감각(지각)을 함과 동시에 '무엇이다'로 규정짓는 것에 익숙하다. 먼먼 인류의 조상에게 혹독한 삶의 터전에서 생존은 곧 순간의 판단과 직결되는 것이었음을 상기해보자. 산과 들에서 발견한 버섯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저만치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는 내 동료의 것인지 아니면 나를 잡아 뜯을 맹수의 것인지 매 순간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들에게 모호한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나와 내 가족과 내 동료를 지키기 위해서는 확실하다는 판단을 재빨리 내려야만 했다. 생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확실한 것은 좋은 것이고 그것의 대립항은 나쁜 것이다.

확실한 것은 곧 진리가 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알고 싶어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결국 생존하기 위한 앎에서부터 발원한 것일 터이다. 인간은 이제 확실한 것을 위해 그들의 역사를 바친다. 진리에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다. 경험이 많은 노인의 지혜와 영적인 힘을 가진 존재의 예언이나 공동체 리더의 판단은 확실한 것이다. 자연현상이 보여주는 어떤 신호 또한 확실한 것으로 그것을 해석하는 자 또한 확실하다. 그럼에도 소위 진리라는 것에 어긋나고 비껴가는 상황들이 발생하며 그 횟수가 잦아지면 추앙받던 지혜자와 예언자와 판단자와 해석자들은 미움의 대상이 되고 죄인이 되어 죽임을 당하기에 이른다. 그들이 맹렬하게 원하는 것은 확실성 곧 진리다. 또한, 맹렬하게 거부하며 자신을 포악하게 몰아가는 것은 모호함이다. 확실성을 획득하는 것이 인류의 최대 과제이며 우린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성이라는 깃발을 흔들며 과학이라는 전차를 타고 여기까지 달려오고 있다. 

확실하다는 것, 확실한 것의 내용이 지식이든 기억이든 소신이든 판단이든 그것은 스스로를 향해 믿음을 되먹음질 시킨다. 이것은 마치 데카르트의 보텍스 이론처럼 회전하는 믿음이 일으킨 소용돌이에 힘과 복종도 저절로 회전하면서 공고해진다. 다시 말해, 확실하다고 여기는 그 지각이 확실시하는 것의 내용을 보다 더 확고부동하게 명석 판명한 것으로 강화시킨다. 확실한 것은 믿음을 넘어 힘의 원천이 되고 복종의 근거가 된다. 확실한 것은 우리를 안심하게 하며, 존재의 구심점이 됨으로써 영원한 진리가 된다. 소크라테스를 흠모하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소크라테스만이 가진 것처럼 보이는 매력을 생각해 보자. 소크라테스에게서 유독 무엇인가 알키비아데스의 동공을 확장시킬만한 어떤 포인트를 포착했을 때, 알키비아데스 그는 직관적으로 소크라테스를 사랑한다고 판단했으며 그것을 스스로 기정사실화해서 믿음으로 안착시켰을 것이다. 알키비아데스가 매료된 소크라테스의 어떤 포인트인 아갈마(agalma)는 이제부터 소크라테스의 것이라기보다 알키비아데스의 것이 된다. 말하자면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있는 아갈마를 소유하게 되었다. 소유한 것은 믿음의 대상이 된다. 믿음은 곧 진리로 도약하고 믿음의 대상이 있는 자는 믿음에서 오는 막강한 힘이 차오른다. 신에 대한 믿음이 숭배로 전이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믿음의 대상은 숭배의 대상이요 마침내 생의 의미가 되어버린다. 

 


우린 저마다 확실한 것을 믿음의 대상과 동일시한다. 때로는 불확실한 것조차도 불안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무조건 믿어버림으로써 확실한 것의 범주로 만들어서 믿음의 대상으로 모신다. 불확실하다는 것, 그것의 기분은 샤갈의 그림 속 주인공이 땅에 발을 딛지 못한 채 공중에 떠있는 것과 같이 공허하고 불안하다. 어딘가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사실만큼 견고한 사실성이 어디 있겠는가. 발을 딛고 설 곳은 곧 다름 아닌 샤갈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답변이므로. 생의 의미가 수놓아지는 자리이므로. 인간은 삶을 보존하고 보전하기 위해 확실한 것을 욕망한다. 인간만이 확실한 것을 원하며 그것을 발굴해낼 수 있는 자도 유일하게 인간만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의 사다리에서 꼭대기는 인간의 자리여야 한다. 꼭대기에 있는 인간은 진리의 담지자로 인간 이외의 어떤 것들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구분 짓고 구별되어야 한다. 확실성을 얻기 위해 생각하며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왕관을 쓰고서 우아하게 이족보행을 하며 사다리를 오르도록 팡파르를 울린다. 더 나아가 언어를 가진 인간은 언어적 거세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분명하게 그어 놓는다. 진리는 충성을 요구하며 배타적이어서 "절대"의 권위를 가진다.

확실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는 무엇일까? 경계가 있을까? 자연계에 확실성이 존재하기는 할까? 확실한 것은 인간이 만들어놓고 인간이 발견하는 신기루이다. 실제와  허구가 마치 빛의 온도 차가 일으킨 착시처럼 확실성은 인간의 진리를 향한 강한 욕망과 실재가 빚어낸 착시일 뿐이다. 세계에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인간이 만든 규정에만 있을 뿐이며 이 규정을 위해 인간은 범주를 만들어 분류하며 거기에 이름을 붙인다. 이를테면 어류, 파충류, 조류, 인간, 동물, 식물, 정상, 비정상 등등. 이 분류는 이제 모든 것들의 견고한 기준이 된다. 같은 것과 다른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 이렇게 선명하고 분명한 분류와 구분 아래에서 인간은 안전함을 느끼며 산다. 그러나 니체의 말처럼 그 안전함을 몰락시키지 않는다면 다양성이 공존하는 생명세계에 대한 인간의 창조성은 싹을 틔울 수 없다. 확실성이라는 신기루에 인간은 결국 기갈증으로 자멸하고 말 것이다.

 


 

글 | 백우인

감신대 종교철학과 박사 수료. 새물결플러스 <한달한권> 튜터. 신학 공부하면서 과학 에세이와 시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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