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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대 칼럼

새의 알이 부화하기까지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2. 10. 11.

 

새 중에 가장 큰 새가  타조라면 가장 작은 새는 벌새일 것이다. 이들이 낳은 알의 크기나 무게는 그들의 몸집 크기에 비례한다. 타조 알이 대략 1.5킬로그램이고 벌새는 이보다 4,500배 정도 가벼운 0.35그램이다.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큰 타조도 너무나 미미한 벌새도 그들의 처지와 형편에 맞는 알을 낳는다. 물론 그 알은 성장했을 때 부모의 모습이 될 요소와 가능성이 담긴 완벽한 알이다. 크기가 아무리 차이가 나더라도 타조와 벌새는 그들의 알을 낳고 알을 지키며,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하나의 알을 낳아서 부화시키는 데에는 새마다 다르다. 타조는 42일 정도가 걸리고 벌새는 14~17일 정도 걸린다. 부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 즉 42와 14 혹은 17이라는 숫자는 참 많은 것들을 검은 보자기로 덮어버린다. 알을 낳아서 그 알이 스스로 껍데기를 깨고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올 때까지의 그 시간이 단순히 42와 14라는 양적인 숫자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예컨대, 42와 14 내지 17은 생명의 보전을 위한 절대 시간으로, 그 시간을 견뎌내야만 마침내 생명의 보전과 생명의 출현이 가능해진다. 천적들로부터 알을 지키는 시간이고 새끼로 태어날 때까지 적당한 온도를 제공하는 시간이다. 누군가로부터, 무엇인가로부터 지켜낸다는 것은 사실 전쟁이지 않은가. 더구나 그것이 생과 사의 문제라면, 엄습하는 공포와 두려움의 크기의 몇 곱절에 해당하는 용기를 부풀려 내야 한다. 알을 지키고 품고 있는 시간은, 생의 시간을 담보로 배팅하는 것이다. 너와 내가 한 덩어리로 생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천적의 배를 채우고, 천적의 새끼를 먹여 살리는 먹이가 되어야 한다. 생명은 먹고 먹히면서 세상을 채운다는 제1원리를 되새겨 볼 일이다.

부모가 되는 과정은 새에게도 치열하고 처절한 전쟁이다. 자기 목숨도 기꺼이 내어놓는 희생을 지불해야 간신히 겨우겨우 부모의 대열에 설 수 있다. 인간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아니 어찌 보면 야생에서 사는 새들이 오히려 부모가 되는 과정이 더 험난해 보이기도 한다. 

 

알의 색깔은 새의 종류만큼이나 다르다. 위험에 노출되는 정도가 클수록 짙은 색을 띤다. 낮은 곳이나 바닥에 둥지가 있으면 그곳의 알은 더 단단하고 보호색도 많고 색도 진하다. 이는 천적의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스스로 보호를 하는 것이다. 생명은 스스로 보전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며 자연 일부가 되어간다. 강렬한 햇빛이나 천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몸부림이  색으로 표현된다. 색은 참으로 정치적이며 사회화되고 생명과 밀접하게 닿아있다. 

 


어디 색깔만 그러한가. 알의 생김새도 그들의 보전에 매우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바다오리는 둥지가 없이 알을 절벽 턱에 낳는다. 만일 알이 둥그렇다면 데굴데굴 굴러떨어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바다오리 알은 끝이 뾰족하다. 그래야 굴러떨어지지 않고 빙그르르 돌다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아직 기관 없는 신체인 알도 생명의 보전력(코나투스)을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자신을 바꿔나갔을 것이라 짐작된다. 존재(being)에의 의지 앞에서 서열은 무의미하다. 누구랄 것 없이 그 의지 자체가 곧 존재 전체이다. 변화를 통한 생명의 존속이 환경과 사회와 연결된 공진화 과정임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저마다의 충족이유율이 있다.

 

타조도 알을 낳고 벌새도 알을 낳고, 그들의 알이 크든 작든 그 알은 그 자체로 완결된 최고의 알일 것이다. 못나고 잘나고의 기준이란 인간에게나 있을 뿐, 생사를 걸고 지켜야 할 생명 덩어리,  오직 "생명"이다. 그 알을 천적으로부터 지키고, 온전히 알을 깨고 나올 때까지 목숨과 맞바꾸는 시간을 지내며 알은 알대로 살아남기 위해 갖은 변화를 지속한다. 또한, 알에서 깨고 나오기 위해 하루를 꼬박 죽을 힘을 다해 난치라는 돌기로 알껍데기를 깨부순다. 

거저 주어지는 생명은 지구 상 어디에도 없다. 하나의 생명은 죽음을 무릅쓴, 죽음과 맞바꾼 생명의 의지, 존재(being)의지 그 자체다. 이렇듯 분투하는 생명 앞에서 인간만이 고귀한 생명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글 | 백우인

감신대 종교철학과 박사 수료. 새물결플러스 <한달한권> 튜터. 신학 공부하면서 과학 에세이와 시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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