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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기자단 칼럼

"세계는 시다" <당신의 수식어>를 읽고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1. 10. 12.

당신의 수식어, 전후석 지음

 

<당신의 수식어>는 눈이 아름다운 청년의 책입니다.

 

그의 눈은 세상을 향해 그의 생각을 투사합니다. 보아야 할 것들을 보는 행동하는 눈입니다. 그의 눈은 때로는 들어야 할 것을 듣는 귀입니다. 그의 눈은 가야 할 곳을 찾아 나서는 발입니다. 그의 눈은 간과되고 희미해진 것들에 주목합니다. 잊혀지고 퇴색된 것들을 현재의 시간으로 데리고 옵니다.

 

<당신의 수식어>는 열정의 온도가 데일 것 처럼 뜨거운 청년의 눈, 그 눈이 경험한 디아스포라의 이야기 입니다.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을 말합니다. 청년의 눈에는  본국을 떠나 이방 땅 쿠바에 사는 헤로니모의 삶이 디아스포라와  중첩됩니다. 청년에게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대대로 이어온 삶의 무늬가 새겨진 본국을 떠나 타지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디아스포라입니다.

 

내면에서 던져오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이것은 저마다의 서 있는 곳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심연으로 이끕니다. 이 질문을 안고 사는 이들은  자신이 바닥이 없어 휘청거리며 부유하는 존재라는 현실 앞에서 혼란을 겪습니다.

 

그의 눈을 따라 이야기를 읽는 동안 그 이야기 속에서 저는 그물망을 이루고 있는 구슬을 봤습니다.

 

수많은 구슬은 거울의 방 속에서 보았던 수많은 내가 똑같은 모습으로 사방에 존재하던 그 모습이었습니다. 서로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는 매듭점에는 구슬이 박혀  있었고 연결된 것들은 또 잘 짜여진 뜨개옷처럼 얽혀있으면서 촘촘했습니다. 어디서부터가 시작인지 어디가 중심인지를 찾는 것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내 시선이 머무는 곳, 그곳이 시작이고 중심이 되었습니다. 시선이 머무는 곳의 구슬이 유독 크게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시선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하면 이제 그곳이 전경으로 드러나고 나머지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시선을 바꿔 보아도 구슬들은 항상 다른 구슬들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존재방식을 불교에서는 인드라망이라고 합니다.

 

인드라망은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작은 입자든 길가의 돌멩이든 말입니다. 작고 달콤한 대추 한 알도 해와 바람과 흙과 물과 거두는 이가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 저는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며 가을의 맛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책 한권이 손에 들려지기까지도 여러 요소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도 사물의 현상도 우리가 당면한 상황도 어느 것 하나 홀로 된 것은 없습니다.

 

인드라망 안에서는 힘의 크기로 인해 위와 아래로 나누어지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들의 서열도 없습니다. 제각각 다른 것들이 다름을 그대로 지닌 채 커다란 전체 안에서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느 한 부분만 가지고는 사물의 진실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하나의 프리즘 같아서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사물에 관한 이해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집니다. 그러니 우리의 이성은 성급하게 한 가지만으로 혹은 몇 가지 만으로 판단을 굳힐 수 없습니다. 세계는 언제나 이성에 앞서 있고  이성을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 불가능성이라는 세계현실과 확정 불가능성이라는 세계의 존재 구조는 감성이라는 마술봉을  필요로 합니다. 이성이 고체적인 구조라면 감성이라는 마술봉은 액체적인 것을 넘어 기체적인 구조입니다. 이것은 유연성과 자유로움의 문제입니다.  인드라망에서는 기세등등하던 이성의 날개가 꺾입니다. 대신 가장 자리로  밀려나 있던 감성의 더듬이로 조심스럽게 사태를 느껴야 합니다.

 

세계의 존재방식이 인드라망이라면 이것의 변양태는 아마도 '시'일것입니다. 세계는 시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시는 고체적인 이성으로  분석하기보다 감성으로 다가가야 하니까요. 시를  단어 하나하나로 나누어 분석하고 철자로 분석하면서  읽지는  않습니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  마음과 몸으로 읽습니다. 읽는다기보다 차라리 느낍니다. 세계는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불확정성에 놓여있다면 감성으로 느껴야만 합니다. 그러니 세계는 시입니다. 세계를 지으시고 이끄시는 그분은 세계의 시인이겠습니다. 양자물리학자인 뒤르는 일찍이 이것을 간파하고 세계의 현실을 한편의 시에 비유했지요.

 

그런데 제게 시는 물방울 같습니다. 하나의 물방울 속에는 세계가 놓여있으니 물방울은 곧 세계이겠습니다. 세계는 시고  시는 물방울이라는 명제가 탄생합니다. 물방울을 관찰해보니 족히 60가지도 넘는 은유와 비유와 상징으로 기술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단단한 바위에 균열을 낸다.'

'견고한 것들을 말랑말랑하게 한다'

'뾰족한 생각들을 둥그렇게 한다'

'냉랭한 금속성 마음을 부식시킨다.'

'하염없이 투명한 것 안에 우주가 들어있다' 등이 그 예입니다.

 

시를 매개로 이해할 수 있는 세계는, 세계의 구성원들은 저마다 유기체적인 관계 안에서 함께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종과 민족과 국가의 구별이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고 이념과 종교가  다를지라도 연령의 차이와 성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 모든 것들이 세계의 구성원이며 동등한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양성을 이루는 생태적인 환경 요소들이기에 하나같이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느 곳이든지 누구든지 존재의 위협과 정체성의 혼란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수식어>에서 청년은 세계 시민을 말하려고 합니다. 제 식으로 하자면  저마다 제각각 세계라는 한 편의 시를 구성하는 세계의 시민 말입니다. 휠더린의 말처럼 이미 우리는 시적으로 이 세계에 거주하고 있으며 시를 이루는 시의 철자들입니다. <당신의 수식어>는 우리에게 발랄한 상상력을 요청하는 매혹적인 청년의 책입니다.

 


 

글 | 백우인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새물결플러스에서 튜터로 활동하고 있다. 과신VIEW에서는 과학과 예술과 신학이 교차하는 지점을 글로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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