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당시 배재학당 수업 모습
▲1930년대 당시 배재학당 수업 모습
1. 특별과(特別科)

아펜젤러가 조선에서 처음으로 신교육을 실시할 때 어떤 학제를 택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문학(漢文學)을 10년 혹은 15년씩 이미 수학(修學)한 학생들에게 신교육 과정을 어디서부터 가르칠지 그 기준을 잡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선 보통(普通)과와 만국지지(萬國地誌)과를 설치하여 주로 한문(漢文)과 영어(英語), 만국지지(萬國地誌)를 가르쳤으니, 오늘의 중학교 정도의 학과다. 보통과와 특별과의 연한은 4년 혹은 5년이었다.

2. 본과(本科)

본과 안에는 영문과, 한문과 등 2개의 과가 있어서 대학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방학식 날에 식순의 하나로서 한문과 영어를 시험하는데, 한문학도 혹은 영문학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졸업생 명부에 본과 몇 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대학과정의 본과가 유지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처음 상당 기간은 분명하고 고정적인 학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의 사회적 요구에 따라 다양한 학제를 유동성 있게 운영한 것이 분명하다.

3. 대학부(大學部)

본과를 마치면 다음에 대학부로 진학할 수 있었다. 본과는 학생의 실력에 따라 5년에 마치기도 하고, 6년에 마치기도 한 것으로 보이며, 대학과정은 아펜젤러와 더불어 끝나고 말았다. 아펜젤러가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배재대학은 훌륭하게 성장하였을 것이다. 그는 생존 당시 학생들에게 말하기를 “경비와 시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참으면 훌륭한 대학을 만들 터”라고 하였던 것이다.

백낙준의 개신교선교사(改新敎宣敎史)에는 “1889년 82명의 재학했으며 두 명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1895년 이미 관립학교의 선생이었던 벙커가 감리회의 선교사가 되어 대학부를 담당해 주었다”1)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벙커가 학당 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배재대학이란 이름을 떼었다고 했다.2) <계속>

[미주]
1) 백낙준, 『개신교 선교사』 p. 218.
2) 송수천, 『배재 80년사 1885-1865』, p. 155.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