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The Korea Mission Field』 10월호
전도자로서 매서인 / 토마스 홉즈(Thomas Hobbs)

매서인의 주된 일은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이며, 그러한 이유에서 책을 판매하는 것은 가장 비중이 낮은 일이다. 매서인이 집을 나설 때는, 그의 복음 꾸러미를 메고 떠나는데, 1센짜리 책 100~150권, 복음서, 사도행전, 잠언서, 그리고 저렴한 신약성서가 들어있다. 그는 마을을 방문해 첫 집부터 마지막 집까지 들르며 그의 책을 소개한다.

오직 이러한 일은 해 본 사람만이 이 일의 어려움, 그들이 마주치는 낙심에 대해 이해한다. 방문처에서 되돌아오는 답은 좀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글을 못 읽는데요!” “살 돈이 없어요!”라는 말이다. 매서인들은 이 대답을 마지막 대답으로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다수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들은 거짓말로 답하기 때문이다. 종종 읽을 줄 모른다는 사람은, 책을 펼치면 매서인이 그에게 말하는 동안 그의 눈길은 책을 따라 읽기 때문이다. 대답한 사람이 읽으려 하는 모습을 안 보이면 그에게 영감을 주어 배우려는 동기를 부여해 주는데, 매서인은 한글을 읽지 못하는 구매자에게 무료로 한글 자모 읽기표를 배포해서 매서인의 도움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이것은 이 자체만으로도 신자를 늘릴 수 있는 커다란 자산이다.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이 현금이 없다 하면 가끔 달걀, 쌀, 짚신 등을 받기도 한다. 어떤 마을에서는 그의 전도보다는 이상한 사람의 출현이 오랜만에 일어나는 일이므로, 마을 사람들이 매서인에게 직접적으로 관심을 가진다.

내가 기억하는 하나의 사례는 멀리 떨어진 이교도 마을 방문 중 일어난 사건이다. 나이 든 부인이 문 앞으로 다가오기에 매서인은 그가 어디서 무슨 이유로 방문했는지를 설명했다. 그가 설명하는 중 다른 부인이 다가와서 두 여인이 아주 큰 관심을 보였다. 이를 보고 매서인의 열정이 커졌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한 부인이 다른 부인을 보면서 얘기했다. “저 이빨 움직이는 것 좀 봐!” 그들은 관심을 보였지만, 그가 전하는 전도에 관심을 보인 게 아니었다. 아마 그 부인들은 한두 마디 들었을 것이다. 그들이 온통 관심을 쏟았던 것은 매서인의 금이빨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매서인들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매서인은 그가 하는 매서인 활동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요? 그는 자신을 단순히 책 파는 사람이라 할까요, 전도하는 사람이라 할까요?” 매서인들의 보고서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 그들의 매월보고서 ‘의견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된 것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에 의해 남녀 모든 사람의 생활이 사악한 것에서 선한 것으로 바뀌는 것을 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나는 내가 뿌린 씨앗이 100배 추수하기를 기도한다.”

“나는 이 섬사람들이 지금껏 예수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지만, 복음을 받게 된 것을 보며 기쁜 마음이다.”

이렇게 그들의 사역지에서 일하는 매서인들을 격려하고 고무하기 위해 성서공회 관리자들이 채워졌고, 그들의 사역지를 방문하고 그들과 함께 일하며 가능한 여러 방법으로 그들을 도울 방안을 찾을 것이다.

1938년 『민휴선생실기』
선생과 그리스도 신문

민휴선생실기
▲민휴선생실기
“1899년경에 조선 내에서 신문계로 말하면, 조선인의 경영으로 <제국신문>은 한글로, <황성신문>은 한글 한문으로 발행되었고, 일본인의 경영으로는 <한성신문>이 또한 한글 한문으로 간행될 뿐이라. 예수교회에서도 장래에 무한히 발전될 교회사무에 대하여 통신기관이 없지 못할 것을 원두우박사가 생각하고 <그리스도신문>을 한글의 주간(週刊)으로 정동사저에서 발행하여 각처 교회에 배부할 뿐 아니라 그때에 내부대신(內部大臣)의 승낙으로 이 신문을 각 관찰사(觀察使)와 각 군수(郡守)와 기하(其下)로 모든 공리(公吏)에게 송달하고 그 요금의 수합(收合)을 관찰사의 지령(指令)으로 독려하게 된지라.

13도에 총(總)히 관계되어 사무가 거대하고 중요한고로 원박사가 선생에게 이 사무를 협조하도록 위탁하는지라. 즉시 응락(應諾)하고 1899년 12월부터 1901년 7월까지 강원도,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를 2회나 순행하여 그리스도 신문을 선전도 하며, 그 요금도 수봉(收捧)하였다. 그 때에 경인선 외에는 철로부설이 도무(都無)하여 각처에 여행이 기마(騎馬) 아니면 도보이다. 안내인으로 고 고상익 씨와 동행하는 도중에 말 한필을 사용하나 행장(行裝)을 태송(駄送)할 뿐이요 두 사람은 보행이 상례이다. 최초로 춘천에 전왕(專徃) 하였다가 돌아올 때에는 토요일 인고로 당일로 경성에 도착코져 하여 심동단구(深冬短晷)에 150리를 보행함도 있었으며, 광주에서는 그 때에 관찰사로 있는 윤웅렬각하(尹雄烈閣下)가 선생을 지면(知面)의 더욱 특별히 관대(款待)하고, 전남 1개도의 신문요금 합계로 180원금(圓金)을 엽전(葉錢)으로 출급(出給)하니, 그 중량이 장정(壯丁)의 10배 이상이라. 이것을 목포로 태래(駄來)하여 은행에서 종이돈으로 교환하였다. 재차순회에는 자전차를 사용하였으나, 이 같은 노고를 능히 망각할 만한 유쾌는 각처에 인심이 관후(寬厚)하여, 초면의 외국인을 선대(善待)하는 것이다. 하숙이나 혹은 시골집에서 숙식을 청하면, 주인의 가족은 하등실로 이거(移去)하고 외객을 상등실로 영접하며, 식료로도 자계(煮鷄:삶은 닭)과 팽란(烹卵)같은 별미를 의례히 공급하니 선생은 이것에 무한히 감격하여, 일생에 불망(不忘)하며, 동방의 예의가 실로 탁월하다고 칭송하더라. 이 같은 경험이 후일에 전선내(全鮮內)의 성서전파를 관리함에 중요한 효력을 줄 것은 예측할 사람이 없었거니와 이 후에 이 신문이 예수교서회로 이관되어 <基督申報>로 개칭된 이래로도 선생의 협조가 그치지 아니하여, 어떤 때는 발행자로, 어떤 때는 이사(理事)로, 이것이 서회(書會)로부터 탈퇴 되던 때 까지 있었으니, 내·외국인 중에서 <기독신보>에 대하여 가장 장구(長久)히 가장 다대(多大)히 노역(勞役)한 사람은 곧 선생이라 할 것이다.”

1938년 『민휴선생실기』
권서총회

“200여명의 권서(勸書)가 산군(山郡)이나 도촌(島村)을 불구하고 전선각지(全鮮各地)뿐 아니라 북간도까지에 산재하여 한서(寒暑)와 풍우(風雨)를 불피(不避)하고 복음을 전파(傳播)하기에 간단(間斷) 없이 노역하여 흥미를 얻는 때도 있지마는 난고(難苦)와 핍박(逼迫)을 당하는 것이 상례이라. 이 같은 동역자들을 한 곳으로 소집하여 피차가 서로 위로하며 간담(懇談)하는 것이 사업에 큰 유익이 될까 하여 다년간에 숙의 하였으되 기회가 없더니 1915년은 곧 조선시정(朝鮮始政)의 5주년이라. 총독부에서 기념으로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경성(京城)에서 공진회(共進會)를 개설하게 되었다.

해회(該會)의 설비가 충분하여 13도로서 관광인이 쟁지(爭至)할 예정이라. 이 같은 기회에 전선(全鮮)에서 활동하는 권서제원(勸書諸員)을 경성으로 소집하여 1주 한으로 관광도 하며 회의도 하는 것이 양행(兩幸)이 될 줄로 신중히 고려 후에 각 권서에게 통신하여 10월 1일로 경성에 도달하도록 초청 하였더니 권서 중에 177명이 정기(定期)에 래도(來到)한지라.

예정한 순서대로 1주를 한하여 매일 상오에는 경성 내에 저명한 목사와 박사를 초청하여 전도사업에 노력을 줄만한 강연이 있었고, 공회직원의 전부가 중요한 토의도 행하였으며, 기념하기 위하여 신축한 회관에서 공동으로 촬영하여 일매(一枚)를 각취(各取)하고 명월관에서 신우(信友)의 특별한 초대도 있었다.

7일의 기한이 순간에 마친 고로 무한한 감상을 가지고 경성역에서 일전(日前)에 환영이 다시 전송(餞送)으로 병하여 피차가 석별(惜別)하는 중에 동서와 남북으로 무사히 환가(還家)하였다.

특별히 이 장거(壯擧)에 대하여 가나다장로교회(加那多長老敎會)의 선교사로 함남에서 근무하는 매도날목사(梅道捺牧師, Rev. D. A. McDonald)의 서신에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금년으로 귀 공회 권서에게 전무(前無)한 특별한 사태(事態)는 그들로 공진회를 이용하여 경성을 심방(尋訪)케 한 것입니다. 그들이 수월(數月)을 앞에 두고 기대하다가 적합한 기회에 1주간을 경성에서 유(留)한 것은 실로 기문(奇聞)과 장관(壯觀)으로 다대한 감상을 얻어 앞으로 누년(累年) 동안에 기념될 것입니다. 북선(北鮮)에 산재한 산촌에서 거주하는 인민(人民)들은 세계의 실정을 전연(全然)히 알지 못하나니 권서들이 조선의 수부(首府)에서 이번에 박람(博覽)한 모든 기이한 것을 그들에게 심방하는 대로 지리(支離)한 동야(冬夜)에 형용(形容)하여 설명하면 얼마나 환영을 받겠습니까? 본인의 감독하에 있는 권서 1명은 경성이 초행이라 경성역에 모든 설비와 고루(高樓)와 거각(巨閣)에 찬란한 전등을 처음으로 주목할 때의 감상이 무한하여, 인간의 도시가 이 같을진대 천국의 진경(眞境)은 어떠할까 자탄(自歎) 하였다 합니다.’” <끝>

『매서인은 교회설립의 선구자였다』에서 발췌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