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에 의해 축출됐던 탈레반이 지난 8월 15일, 지방 장악에 이어 수도 카불에 입성하면서 20년간의 무장 항쟁 끝에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8월 30일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로부터 이제 한 달이 지나가고 있다. 그동안 아프가니스탄 안팎으로는 급작스러운 변화가 계속되어왔다. 안으로는 새로 정권을 잡은 탈레반에 의해서 재정비가 한창 계속되고 있으며, 주변 국가 사이에서는 모두 자국의 이익을 계산하며 어느 쪽에 서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이 와중에 수많은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발생해서 이미 봉쇄된 하늘길 대신 주변 국경을 통해 대거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지금 탈레반 정권은 제2의 이란이 되어 국제적으로 봉쇄당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모습으로 국제무대에 나설 것인지에 대한 기로에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탈레반 정권의 모습은, 처음 카불 입성 직후 8월 17일 탈레반 자비훌라 무자히드 대변인이 내외신 기자를 상대로 열었던 첫 기자회견 내용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지금 어부지리로 새로 정권을 잡은 탈레반 정권에게 가장 중요한 사안은 누가 뭐라고 해도 국내 경제안정과 민심의 동요를 막는 것이다. 하지만, 탈레반 정권은 이 두 사안을 전부 다 잊을 만큼 벌써 무모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어서 이 지역을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지는지 알고도 뛰어든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전 세계는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계속 주목하고 있다. 탈레반의 정권 재장악에 이어 무력을 사용한 그들의 폭력적 행태로 아프가니스탄 국민은 마치 나라 잃은 사람들처럼 피난의 대행렬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미군의 철수가 갖고 올 작지 않은 파장에 대해, 그 땅을 사이에 두고 인접 국가 사이에서 치열한 외교 각축전이 시작되었고, 자국의 이익이 최우선인 국제 외교에서 이 지역을 놓고 득과 실을 논하면서 세계의 관심이 이 지역을 향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정작 고난을 겪은 아프가니스탄 국민은 세계 최대의 난민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고, 전 세계가 우려와 안타까움의 눈길로 그들을 주시하고 있다.

세계의 보안관 미국이 지난 20년 동안 이 지역을 향해 막대한 물자와 재정, 그리고 20만 명에 가까운 미군의 희생을 감수하고도 얻은 것은 반복된 역사의 쓰라린 교훈뿐이다. 자립-자전-자치를 바랐건만, 그러기에는 너무 무능했고, 너무 부패했던 아프간 정부의 끊임없는 부정은 ‘사필귀정’이라는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이번 사태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지난 2020년 2월 29일 카타르 도하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탈레반 지도자 물라(Mullah, 이슬람 법·교의에 정통한 학자나 성직자, 사원 지도자를 높여 부르는 말) 압둘 살람 자이프 등이 참석한 가운데 도하 협정이 최종 체결되었다.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무장 조직 탈레반이 20년 가깝게 이어온 무력 충돌을 마감하는 평화 협정에 서명하면서 미국과 나토 동맹국은 탈레반이 합의 내용을 지키는 조건으로 14개월 안에 모두 철군하기로 했다. 잘마이 칼릴자드 미국 아프간 특사와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 탈레반 지도자가 서명하며 성사된 당시의 평화 협정으로 2020년 5월까지 5천 명의 미군 병력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시키게 되었다. 물론 이 협정 안에는 탈레반은 향후 알카에다 같은 극단주의 이슬람 무장 세력과는 함께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협정이 결코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 협정 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9년 9월 8일 그의 트윗 메시지를 통해서 “미국-탈레반 협상은 죽었다”(US-Taleban negotiations were “dead”)라고 부정적 견해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도하 협정을 성사시켰지만, 그 후 본 서명식을 위한 탈레반의 미국 방문은 거부되었으며, 이 와중에 탈레반의 카불 공격으로 미군 한 명과 민간인 열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파키스탄의 난민 캠프 모습
▲파키스탄의 난민 캠프 모습 ⓒ김종일 교수
아프가니스탄, 아무도 풀 수 없을 것 같은 엉켜진 실타래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을 이해하려면 ‘듀랜드 라인’(Durand Line)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듀랜드 라인은 약 2,640km에 이르는 현재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말한다. 듀랜드 라인은 1893년에 영국령 인도 제국의 외무 장관이었던 모티머 듀랜드(Mortimer Durand)와 아프가니스탄의 국왕 압두르 라만 칸 사이에 체결된 조약의 결과로 만들어졌다.

듀랜드 라인은 1800년대 영국과 러시아 간에 수십 년간 이어졌던 ‘그레이트 게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시아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는 영국과 러시아의 상호 갈등이 계속되던 중, 1877년 영국이 인도 제국을 영국령으로 선포하고 아시아 지역에서 우위를 선점한다. 러시아는 방향을 돌려 만주 쪽으로 진출을 시도하고, 당시 만주 지역에 경제적 이권을 가지고 있던 일본이 이에 반발하여 러일전쟁이 발생한다.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미국과 영국은 일본군을 지원하고,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군은 길고 긴 영국과의 세력 확장 싸움을 이어갈 동력을 잃게 된다. 이에 고무된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확실히 점령하고자 전쟁을 벌였지만 1차 전쟁에서는 패배하고, 2차 전쟁에서 승리하여 압두르 라만 칸이라는 꼭두각시 왕을 아프가니스탄 국왕으로 앉히게 된다. 압두르 라만 칸은 영국령 인도 제국이 요구한 대로 불평등한 조약에 순순히 응하고, 듀랜드 라인이라는 국경선이 그어지게 된다.

1947년 2차 대전 종식과 더불어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는 끝이 나고, 영국령 인도는 인도공화국, 파키스탄, 미얀마 3개의 국가로 독립하게 된다. 파키스탄은 듀랜드 라인을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선으로 계승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조약 당사국이었던 ‘영국령 인도’ 자체가 소멸했기 때문에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하게 된다. 듀랜드 라인으로 인해 졸지에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3분의 1은 파키스탄 소유가 되었고, 해당 지역에 거주하던 토착민 파슈툰족의 절반 이상이 파키스탄 국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실생활에서는 거의 의미가 없는 듀랜드 라인과는 관계없이 파슈툰족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끈끈한 동포애로 살아왔다. 탈레반이나 알카에다 등 테러 조직과 관련된 위험인물들도 동포라면 얼마든지 숨겨주고, 무기도 옮겨주면서 평화롭지만 평화롭지 않은 삶을 이어가고 있다(참고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kiepinfo&logNo=222216332265&redirect=Dlog& widgetTypeCall=true&directAccess=false, 검색일: 2021년 9월 1일). <계속>

김종일 교수
▲김종일 교수
◈김종일 교수=예장통합 측 목사로, 현재 KWMA 난민선교위원회 코디네이터와 국내 초교파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로 알려진 M. NET KOREA(일명 열무김치)의 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중동 이슬람권에서 20년 가까이 체류한 후 귀국 후에는 아신대학교(ACTS) 선교대학원 중동연구원 교수로 줄곧 재직하면서 중동학, 중동선교학, 이슬람 관련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국내 유일한 선교 저널인 『전방개척선교』 편집인과 『선교타임즈』 편집위원 등으로 중동과 이슬람 관련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