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성도들에 의해 설립된 소래교회 전경
▲한국인 성도들에 의해 설립된 소래교회 전경 ⓒ『UNDERWOOD OF KOREA』(Fleming H. Revell Company, 1918)

선시(先時, 지난 때)에 서울 원 목사 사랑방에서 서울 교우와 우리들이 한 계(契)를 조직하고 당오전46) 10량씩을 내어 이식(利殖)하다가 조선에 처음 짓는 예배당에 쓰자고 한 일이 있는지라.

을미년 봄(乙未年 春)에 송천에서 처음 예배당을 지으니 그 돈을 보내라 하였더니, 서울 교우들이 발분하여 어찌 서울이 시골에 떨어진단 말이냐 하고, 예배당 기지를 사고 주춧돌을 놓고 회답하기를 서울에서도 예배당을 짓기 시작하였으니 이 돈을 반씩 나누는 것이 옳다 하고, 당오전 500냥을 보내니라. 송천 예배당에 마루를 놓고 애벌 벽을 할 때 김(맥켄지) 목사가 전도하러 장연읍과 각 처를 순행하고 돌아올 때 열기와 풍양을 쏘이고 두통으로 병중에 필역하지 못한 예배당에서 새 예배하였으니 때는 1895년 을미년 음력으로 5월이라(乙未陰五月).

곧 병석에 누워 5일 동안에 열기가 대발하여 제6일 째는 실성한 모양이더니 주일 오정(午正)에 참혹히 자살하니, 교우의 애통은 다 말할 것이 없거니와 인근 외인까지도 애석하여 하더라. 즉시 서울에 전인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한 후 영국 공사의 사명으로 윌쓰(Dr. Wells) 의사와 원 목사가 내려와 조사하여 가지고 가니라. 이때 교우의 열심이 불길 일어나듯 하여 동네와 인근에 전도하여 많이 믿어 나오니 집집이 찬미성이더라.

이해 가을에 원 목사가 내려와 교회 일을 처리하고 직분을 택할 새 내가 장로(長老)47) 피택이 되고 김윤오(金允五)와 안제경(安制卿)은 집사가 되니라. 이해 겨울에 서울에서 또 사경회를 하는데 송천에서 10명이 올라가 한동안 사경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니 교인 수가 늘어서 예배당이 좁아 앉을 곳이 없는지라. 1896년 병신(丙申)에 예배당 8간을 가축(加築) 하니라.

송천교회에 또 핍박이 생기니 을미년(乙未年) 11월 17일에 단발령48)이 난지라. 장연 군수 염중모 씨가 단발을 심히 시킴으로 송천교회는 다 단발을 하였더니 단발을 반대하는 자들이 송천에서 70리가량에 4~5백 명이 둔취하여 명왈 산포(山包)라 하고, 단발은 예수교에서 난 것이니, 먼저 송천을 소탕하고 장연읍을 소탕한다고 떠들고 송천을 향하고 오니, 이날 송천에 행인이 끊어지고 송천 사람의 친척들이 와서 소식을 전하고 그날로 돌아가며 동네가 황황하여 피난 가는 사람도 있는지라.

송천서 40리 되는 오리정이라는 곳에 와서 자는 날 밤에 본 군수가 먼저 이 소식을 알고 병대를 매복하였다가 일장 대전이 되어 마침 산포가 패산하고 무사한지라. 그 후에 산포 중에도 송천에 피난하여 와서 예수를 믿고 영수까지 한 사람도 있더라. 이때 교우의 수는 200여 명이라. 칭찬 아니 할 수 없는 일이 몇 가지 있으니, 첫째는 금식 기도니, 금식하고 밤새도록 기도함이요, 둘째는 시제니, 교회로는 교우들이 농사지은 것의 십일조를 교회에 바쳐 3~4월에 교내 교외를 물론 하고 시제하고, 개인으로는 서로 다 도와가며 남의 뒤떨어진 것을 부끄러이 여김이오. 셋째는 근농(勤農)이니 송천은 본래 토박49)하고 땅이 흔한 곳이라. 동네가 극빈하더니 교회가 선지 3~4년에 박토(薄土)가 옥토(沃土)가 되고, 전에 허비하던 술과 노름과 우상숭배 하던 것을 모두 버림으로 풍족한 동네가 되니라. 넷째는 열심 전도니, 두 사람씩 자비하여 책을 사서 각각 자기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혹 한 주일 동안, 혹 3~4일씩 그곳에 교회가 일어나도록 다녔으니, 장연, 송화, 은률, 풍천(豐川), 문화, 해주, 옹진 7읍 경내 교회가 차례로 수십 처가 일어나고 서해안 지역은 다 송천으로 말미암아 된 지라.

학교는 을미년(乙未年)에 김(맥켄지) 목사 생시에 교인 자매를 위하여 선생을 초빙하여 교인 자제 7~8인을 교수하더니 김 목사 돌아가신 후에 원 목사와 윌쓰(Wells) 의사가 영국 공사의 사명으로 와서 김 목사의 물건을 서울로 가져갈 때, 내가 김 목사의 돈을 맡아 쓰다가 남은 돈 당오전 3,000량이 있는지라. 내가 원 목사께 알게 하고 부탁하여 이 돈을 영국 공사에게 청구하여 나를 주면 김 목사가 설립한 학당을 계속하여 김 목사의 이름이 그치지 않게 할 터라 하였더니 원 목사의 주선으로 영국 공사의 허락을 받은지라. 이 돈으로 밭 27두락(斗落)50)을 사고 시판30명찰처(柴坂三十名刹處)51)를 사고 또 종중 소유 밭 3두락과 시판40명찰처와 당오전 400량을 기부하고 병설하여 이 학교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나니라.

원 목사가 송천교회를 맡은 후 서울에서 여러 사람을 데리고 내려와 송천에서 대사경회를 3주일간이나 하므로 서울 사람 중에서 중생하여 간 사람도 많고, 해마다 각 군에 다니며 대사경회를 3주일씩 하며 대전도를 하므로 교회들이 왕성하니라.

이같이 조선에 교회가 왕성하는 이때 교회에 큰 위험한 일이 또 생기니, 이는 전 조선에 있는 예수교(개신교)나 로마교(가톨릭)를 물론 하고 박멸하라는 음모가 서울 대관으로부터 계획이 되니라. 이 음모가 발각되기는 은률로부터 되었으니, 하루는 황혼에 은률 홍성서(洪性瑞) 씨가 보낸 사람이 왔는데, 그 편지 내용을 보니 법부대신 김영준(金永俊)이 각 도 각 군에 있는 유향을 일으켜 합하여 일어나 경내에 있는 교회를 박멸하기로 한지라. 은률 향장은 홍성서 씨의 일가 사람이라. 홍성서 씨의 한 가문을 구해주기 위하여 와서 발표한지라. 이 편지를 보고 즉시 사람을 60리 정도에 있는 김윤오(金允五)에게 보내어 내일 해주에서 만나자 하고 그 밤으로 떠나 이튿날 다 같이 윤선(輪船, 증기선)을 타고 인천에 내려 원 목사는 쫀(존스, 조원시)52) 목사한테 가서 이 말을 하고 존스 목사도 같이 서울로 올라오니라.

이후 일은 눈으로 보지 못하였으니 듣는 말대로 각국 공사가 대궐에 들어가 황제께 질문하니 태황제는 알지 못하는 일이라 하더니, 이튿날 또 각국 공사가 들어가 강경하게 질문함으로 그때는 아노라 하였다 하며, 각국 병선을 부른다고 한참 떠들더니 법부대신 김영준을 잡아 가두며 각 군 향장들을 잡아 올리는데 풍천 향장은 우리 교인 이모(李某)가 대신 갔다가 몇 달 후에 내려오고 다른 향장들은 1년 넘어 갇혀 있다가 풀려오고 더러 죽은 향장들도 있다 하며, 법부대신 김영준을 죽이고 차차 일이 무사하니라.

또 로마교와 재판하던 일은 1902~1903년 어간인지 미상 하나 아는 이가 많을듯하여 대강 기록하노라. 서울에서 대사경회를 하는 때에 나도 참예하였더니 사경회를 마치기 전에 제중원 사랑에서 한치순, 황덕영 두 사람을 만나니 로마교와 싸우는 일로 한위렴53) 목사가 평양에서 일을 보다가 할 수 없다고 서울 긔일54) 목사께 위탁하여 수삭(數朔, 몇 달)을 유하는 중이라 하는데, 또 장연 금동 김윤오55)도 로마 교인에게 매를 맞고 잡혀가 갇혔다고56) 그 아들이 올라온 지라.

즉시 원 목사에게 이 사연을 다 말하니 원 목사는 깜짝 놀라며 나는 지금 처음 듣는 말이오 하고, 즉시 인력거를 불러 타고 어비신(에비슨)57) 의사한테 가서 같이 게일 목사한테 가서 의논하고 종현(명동 성당) 주교한테 다녀서 미국 공관과 법국(프랑스) 공관에 다녀오니 날이 어두웠더라. 이튿날 각국 공사가 예궐하여 사핵사(査覈使)58)를 내어 해주59)에 내려가 재판하기로 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올 새 해주를 지나 중도에서 송천 사람을 만나니, 로마 교인들이 나를 때려죽이겠다고 중도에 매복하였다고 하여 집으로 오지 말고 서울로 도로 올라가라고 사람을 마조(마주) 보낸지라. 나는 두려울 것 없으니 돌아가자 하고 집에 오니 김윤오는 도망60)하여 송천에 있는지라.

이때 장연읍에 로마교인 3~400명이 모여서 송천을 소탕하러 나온다고 날마다 소문이 오는지라. 송천에서는 수백 명이 대항하기 위하여 준비하여 가지고 있는 중이라. 해주에서 사람이 왔는데 지금 재판을 시작하는데 본교회 장로가 없어서는 안 되겠으니 급히 올라오라 한지라. 올라가니 사핵사와 원 목사와 서울 주교 대표로 정 신부가 다 와서 재판을 시작하는데, 방안에는 사핵사61)와 원(언더우드)62) 목사와 정63) 신부 세 사람만 있고 나는 그 문밖에 거행하는 주사(主事)64) 하고 둘이 꼭 앉아서 재판이 끝나도록 그같이 한지라.

주사 안치삼은 해주에서 세력도 많고 신천 안태훈65)의 일가 사람이요 나하고도 친한 사람이라. 은근히 로마교를 위하여 밖으로 주선함이 있으므로 나는 황덕영을 시켜서 해주 오는 길에 요긴한 참소 2~3곳에 사람을 세워 로마교인 내왕하는 소식을 통하게 하고 나는 주사 안치삼을 꼭 감시하니라. 매 재판에 예수교인은 중계에 올려 온유하게 묻고 로마교인을 잡아들일 때는 하속배(下屬輩, 하인의 무리)에게 매를 맞고 반 주검이 되어 재판 마당에 들어오더라. 때려 풀어줄 자는 때려 놓아주고, 때려 가둘 자는 때려 가두는데, 한 놈은 장틀에 올려 매고 태장(笞杖)으로 때리는데, 12대를 때리니 양 볼기에 숯 기왓장 엎어 놓은 것 같으니, 사핵사가 매를 그치라 하고 하는 말이 그놈 한 30대 때리려 하였더니 그 때리는 것을 보니 30대 전에 죽겠구나 하더라.

괴수 몇 놈을 잡아 오려 갔는데, 기별이 오기를 괴수 몇 놈이 도망하려고 말을 타고 해주로 올라간다 하거늘, 주사 안치삼을 보며 지금 괴수 몇 놈이 해주로 올라온다 하니 어서 사핵사께 품의(稟議)하고66) 출발을 하라 하니 예 예 하면서 지연하는지라. 손목을 끌다시피 하여 품하고 발포하니 벌써 지연하는 사이에 발포한다는 말을 먼저 통하여 다른 데로 도망하여 못 잡아 온지라. 그럭저럭 몇 놈은 도망하고 재판은 끝나니라.

나는 송천에서 12년 동안 장로로 시무하다가 1907년에 신학을 졸업하고 목사 장립을 받으니 나이 56세라. 해서(海西) 각 교회에 전도목사로 2년을 시무하고 경성(서울)에 올라가 염정동(廉井洞, 현 새문안) 교회와 제중원67) 교회와 서편 6군에 있는 교회를 5년 동안 시무하다가 1913년에 교회 사무를 다 놓고 근로퇴로목사(勤勞退老牧師)로 도로 송천에 내려와 있다가 사정에 부득이하여 1916년 병진(丙辰)에 경성 안국동교회에 임시 목사 시무를 하고 세말에 다시 송천에 내려와 한양(閑養)68)하니 나이 65세라. <끝>

[미주]
46) 당오전(當五錢)은 국가 재정의 궁핍을 구하고자 1883년(고종 20년)에 구리를 재료로 주조한 화폐로, 엽전 100푼이 당오전 5푼에 해당되었다. 1885년까지 쓰였다.
47)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는 남편 언더우드 선교사의 일기를 기초로 해 쓴 전기 『언더우드』에서 서경조의 장로 장립 일자를 1900년 10월 1일, 그가 세례를 받은 일자는 1887년 1월 23일로 기록했다.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언더우드』,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5
48) 조선 후기에 김홍집 내각이 1895년 음력 11월 15일(양력 12월 30일)에 공포한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하라는 내용의 칙령이다. [출처] 역사채널 e
49)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메마름.
50) 두락(斗落), 논밭 넓이의 단위. ‘마지기’의 이두식 한자어로 한 말의 씨앗을 뿌릴 만한 넓이를 말한다. 대개 논은 150~300평, 밭은 100평 정도에 해당한다. ‘마지기’란 ‘말(斗)짓기’가 음운 변천된 것으로 ‘말’에서 ‘ㄹ’, ‘짓’에서 ‘ㅅ’이 생략된 표현이며, 두락은 한 말·두 말 하는 두(斗)와 씨앗을 뿌리는 낙종(落種)에서 두(斗) 자와 낙(落) 자를 취한 표현이다. 상지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김은철 교수
51) 시판(柴坂)은 숲 언덕이라는 뜻으로 야산을 말한다. 따라서 30명이 머물만한 좋은 터라고 볼 수 있다. 상지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김은철 교수
52) 조지 허버 존스(George Herber Jones, 1867.8~1919.5, 조원시 趙元時), 1892~1903년 제물포 지방 감리사
53) 미북장로교 선교부에서 1897년에 황해도 재령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윌리엄 헌트(William B. Hunt, 1869~1953)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54) 제임스 게일(J. S. Gale, 1863~1937, 기일 奇一) 선교사
55) 김윤오를 감금한 곳은 한국명 홍석구(洪錫九)로 통하는 프랑스 신부 요제푸스 빌렘(Josephus Wilhelm) 주택인데, 이 구타 및 감금 사건을 보고 받은 언더우드는 1903년 1월 15일 빌렘 신부에게 속달로 항의 및 석방할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어서 1월 17일에는 게일(Gale), 애비슨(Avison)과 함께 뮈텔 주교를 방문했다. 『뮈텔주교일기』, 213쪽.
56) 해서교안(海西敎案) 중 장연 사건을 말한다. 1901년 7월 장연의 향장(鄕長)인 김윤오(金允五)가 부당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공금을 부정 유출한 사실을 천주교인 조병길(趙秉吉)이 알고서, 본군(本郡)과 관찰부(觀察府)에 고소했으나 기각당하고 오히려 조병길이 체포되었다. 그 후 1903년 1월 5일 신천(信川) 출신의 안태건(安泰建)을 비롯한 12명의 가톨릭 교인이 장연 관청에 난입하여 부정 염출한 돈의 반환을 요구하자, 장연 군수가 관찰부에 이를 보고하고 교우 6명을 구속하면서 교안으로 확대되었다. 『황해도 천주교회사』. 92~94쪽.
57) 올리버 애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 어비신 魚丕信), 제중원 원장 역임, 세브란스 건립,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한국 의료선교에 많은 공헌을 했다.
58) 사핵사로 내려간 사람은 외부 정치국장 이응익(李應益)이 사절로 임명받아 내려갔으며, 1903년 1월 하순 이응익은 육로로 해서 해주로 떠났다. 『뮈텔주교일기』, 217쪽.
59) 당시 남편 언더우드와 함께 해주에 내려가 7주를 보낸 릴리어스는 그의 책 황해도 천주교 신부 ‘빌헬름 씨의 여덟 가지 죄상’에서 관찰사가 지적한 여덟 가지 죄상을, “한낱 시민인 당신이 조선인을 잡아 가두고 때린 일, 신도들에게 명령을 내려 정부의 권위에 반항하고 내 부하들을 때리고 납세를 거부한 일, 성당과 모임 장소에서 그들을 재판한 일, 마구잡이로 떼를 지어 사또에게 몰려가 겁을 준 일, 성당을 지을 돈이라고 하면서 강제로 사람들에게 기부금을 우려낸 일, 성당 짓는 일에 쓰려고 불법으로 나무를 잘라낸 일, 작당을 해서 강제로 송장을 묻고 묘지를 옮긴 일, 사람들에게 강제로 성당에 들어오라고 강요한 일”이라고 정리했다.
60) 1903년 1월 17일 자 『뮈텔주교일기』에 의하면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으로 천주교인들이 개신교인들을 구타하고, 장연(長淵) 빌렘 신부댁에 전임 장연 향장(鄕長) 김윤오를 감금한 사건이다. 이 일기에서 뮈텔은 김윤오를 “그들의 주요 전도사”로 지칭해 당시 김윤오는 전도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61) 해서교안이 일어나자 중앙 정부에서는 1903년 1월 22일 당시 외부(外部) 교섭국장 겸 변리공사 이응익을 사핵사로 임명하여 그 사실을 주사토록 했다. 『언더우드』,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5, 237쪽.
62) 당시 언더우드는 이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부인과 함께 해주에 내려와 7주 동안 체류했다.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생활』, 뿌리깊은나무, 1984, 201쪽.
63) 당시 재판에 참석한 가톨릭의 대표 정 신부는 서울교구의 부주교 두세(Doucet, Camille-Eugene, 1853~1917, 한국명 정가미 丁加彌) 신부였다. 1881년 뮈텔(Mutel) 신부와 리우빌(Liouville) 신부가 조선 입국에 성공한 후, 두세 신부는 충청도 지방을 전담하여 근 10년간 이곳에서 복음 전파에 전력을 다하였다. 1890년에 서울에 올라온 그는 곧 약현(藥峴, 현 중림동) 성당의 건축을 담당했고, 성당이 준공되자 1892년 초대 약현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사망하기까지 25년간 그곳에서 일생을 바쳤다. 출처: [가톨릭대사전]
64) 조선 시대 함경도와 평안도의 큰 고을에 둔 향리직. 지방의 토관(土官)들 아래에서 지방 행정 및 군사업무를 담당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5) 안태훈(?~1905). 본관은 순흥(順興). 진해(鎭海) 현감을 지낸 안인수(安仁壽)의 3남으로 안중근 의사의 부친이다. 1874년 개화파의 박영효에 의해 외국 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갑신정변 실패 후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로 이주하였다. 『황해도 천주교회사』. 188~192쪽.
66) 웃어른이나 상사에게 말이나 글로 여쭈어 의논함.
67)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에 부설된 교회. 제중원교회는 선교사 알렌(Allen, H. N., 安連) 및 헤론(Heron, J. W., 惠論) 부부와 의사 스크랜턴(Scranton, W. B.)의 어머니 등에 의하여 1887년(고종 24) 11월 21일에 설립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남대문교회, 南大門敎會)
68) 한가로이 몸과 마음을 안정하여 휴양함.

리진만 선교사
▲리진만 선교사

역자 리진만(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