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
▲배재학당 학생들과 아펜젤러 선교사(맨 뒷줄 오른쪽 끝)

배재학당 학생들이 월급을 안 준다고 동맹휴학을 한 일도 있었다. 그때는 양학(洋學)을 하러 가면 양인들이 약에 쓰려고 눈을 빼거나 아이들을 미국에 팔아버린다는 소문이 돌아서 어느 부모고 신교육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대개 교인들의 가정이나 벼슬을 하려는 청년들이 모여왔다. 양재홍이라는 학생이 주동이 되어 동맹휴학을 한 일이 다음과 같이 조선일보에 보도되었다.

“학생 매 명에 대해서 하루에 일원씩을 준다니까 학생들이 그 말을 듣고 기대를 많이 가졌지요. 그런 것이 결국 공책 한 권에 연필 밖에 안주니까 양재홍이 일어나서 ‘여보게, 나가세. 무관학교로 가세. 거기서는 학생 대접을 잘한다네.’ 하며 공책과 연필을 집어 던졌다.”1)

요즈음 학생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생각하나 이것이 선교사들이 겪은 현실이었으니, 그들의 사역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다음은 1886년 아펜젤러의 선교 보고서이다.

 

배재학당
▲배재학당 전경

“한국인들 사이에 영어를 배우려는 열정은 대단합니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이곳에서는 새로운 언어에 대해 조금만 알고 있어도 출세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조선인에게 영어를 왜 배우려 합니까?’ 하고 물으면 대부분 ‘출세하려고요’라고 같은 대답을 합니다.

탐색전 성격으로 우리 선교학교는 6월 8일 문을 열어 7월 2일까지 수업하였는데, 그 기간 중 6명이 등록을 하였습니다. 1명은 지방에 일이 있어서 하는 식의 상투적인 핑계를 대었고, 또 1명은 6월 들어 새 언어 공부가 너무 어렵다는 것을 알고 떠났으며, 세 번째 인물은 집안에 장례가 나서 학교에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1886년 9월 1일 개학할 때 학생은 1명뿐이었습니다. 학생들의 빈자리는 오겠다는 사람들로 일부 채워졌습니다. 10월 6일 현재 20명이 등록해 있는데 실제로 출석하는 학생은 18명 수준입니다. 거의 매일 입학 지망생들이 찾아옵니다.”2)

당시 조선은 배재학당과 같은 근대식 서양 스타일의 학교를 경험해 보지 못한 상태였다. 대부분 서당이나 향교와 같은 유학(儒學)을 가르치는 한학교육 기관이 운영되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새롭게 시작된 학당의 질서가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개화(開化)하면서 점차로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의 청년들은 영어를 공부하려 하였고, 그 영어를 통해 출세하려고 하는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계속>

[미주]
1) 조선일보 1934년 11월 29일 기사를 김세한, 『배재 80년사』 p. 185에서 재인용.
2) Annual Report of the Board of Foreign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86, p. 267.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