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부제-유대인 예배력에 따른 예수의 의미
존 쉘비 스퐁, 변영권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저자 스퐁은 한국에서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꽤 유명한 신학자이다. 한국기독교연구소 김준우목사님이 스퐁의 책을 열심히 번역 소개한 덕이다. 내 책장에도 스퐁의 책이 여러 권 꽂혀 있다.
<성경과 폭력>, <예수를 해방시켜라>,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영생에 대한 새로운 전망>,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 <요한복음> 등이다. 이 책들을 통해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근본주의 신앙행태가 얼마나 문제인지를 통렬히 깨달아서 스퐁의 책에 더욱 매료됐었다.
스퐁은 1931년 태어나서 2021년 9월 향년 91세로 타계했다. 제목들을 봐서 느끼겠지만 그의 책 제목들은 한눈에 봐도 문제적이며 도전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스퐁은 관성적 타성적 기독교신앙을 흔들어 깨우기 위해 전 생애를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고백이다. “나는 성서 문자주의자들로부터 성서를 해방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36쪽)
일관되게 자기 길을 간 사람. 이것 하나만으로도 스퐁의 말은 귀 기울일 만 하다.
오늘 리뷰할 책, <마태복음>은 제목이 지극히 평범하다. 스퐁이 85세 때 썼다. 그러나 이 책은 그동안 스퐁이 저술한 책들 중에서 가장 전복적인 책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스퐁이 평생 몰두한 주제를 이 책에 다 실어 넣은 것 같다. 문자주의 신앙이 기독교 본질과는 무관하며 얼마나 해로운지를 전심으로 흔들어 깨운다.
“나는 성서 문자주의를 이방인들의 이단으로 생각한다. 나는 그리스도 교회 스스로가 성서 문자주의에 대해 확실하게 도전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죽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28쪽) 문자주의가 이단이라니!
한국교회 교인들도 문자주의에 대해서는 세계 어느 기독교인들보다 더욱 맹종적인지라 자기 신앙이 지존이라고 자처할 테지만, 나도 그전부터 느끼던 바인데, 문자주의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앙이라고 말했었다. 나 역시 근본주의 교회에서 문자주의를 철저히 배우고 믿고 따랐던 시절이 있었기에 그에 대한 폐단, 문제의식이 골수에 사무쳤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그렇게 스폰지처럼 빨아들였던 근본주의를 떠나 전향한 일이다. 그러니 스퐁의 문제의식이 바로 나의 문제의식이 될 수밖에.
이제 책 내용으로 들어가보자. 그의 문제의식이다.
“별들은 인간의 탄생을 알려주지 않는다.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이 쫓아갈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는 별들을 따라가지 않는다. 천사들은 깊은 밤, 하늘에서 내려와 언덕의 목동들에게 노래를 불러주지 않는다. 처녀는 임신하지 않는다.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와 세례받는 사람 위에 임하도록 하늘이 열리지도 않으며, 세례받은 사람이 정말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 구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지도 않는다. 한 소년의 점심식사인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가 기적으로 증식되어 수많은 사람을 먹일 수도 없다. 어느 누구도 물 위로 걸을 수 없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무덤에 묻혀 있는 나사로를 불러내 이승의 삶을 다시 살게 할 수는 없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다시 시력을 회복할 수도 없다. 기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바꿀 수는 없다. 금요일에 십자가 처형을 당해 무덤에 묻힌 사람이 기적적으로 소생하여 일요일에 무덤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다.”(39-40쪽)
위 내용은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이적, 죽음, 부활 등 예수 생애에서 핵심 내용들이다. 우리는 이 사건들을 별로 의심하지 않고 사실로 믿었다. 그런데 스퐁은 그 이야기들이 문자적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말이다. “나는 복음서들이 문자적으로 읽도록 고안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게 읽는다면 우리는 복음서를 무의미하고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그가 정말로 말했던 것들의 녹취록 같은 것은 담겨 있지 않다. 복음서들은 그가 실제로 했던 일들에 대한 역사적 연대기가 아니다. 복음서가 언제 기록되었는지,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기록하던 당시의 역사적 배경은 어땠는지 같은 문제들에 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이런 이야기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거나 완전한 사실이라고 믿기란 불가능할 것이다.”(40쪽) 좀 길지만 이 책을 쓰는 핵심이유인지라 모두 인용했다.
이 책 부제가 말하듯이, 마태복음은 유대 회당에서 예배 때 낭독용으로 쓰기 위해 나왔다. 역사 예수가 살았던 1세기 유대인 달력도 1월부터 12월까지 있다. 니산월, 이야르월, 시안월, 담무스월, 압월, 엘룰월, 티쉬리월, 헤스완월, 기슬르월, 데벳월, 스밧월, 아달월이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력에서 한 해의 시작을 대림절부터 시작해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로 끝나듯이, 1세기 유대인 예배력에도 거룩한 절기들이 있었다. 유월절, 오순절, 압월 아홉째 날, 신년절, 속죄일, 초막절, 수전절, 부림절 등이다. 유월절은 애굽 노예살이로부터 탈출한 것을 기념하여 8일동안 경축하는 특별한 날이다. 이처럼 절기마다 기념하는 뜻이 다 있다.
1세기 유대 회당은 예수의 삶이 끝난 무렵에서 시작해서, 사복음서가 기록되기 전까지의 안식일 동안에, 예수에 대한 기억(그의 생애, 행적, 가르침)을 보존하고 있었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안식일마다, 매달마다, 해마다, 안식일 회당예배의 성서 읽기와 1세기 유대교 예배라는 배경에서 예수의 삶을 구전하였다. 예수는 30년에 죽었고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72년에 나왔다. 즉 마가복음서가 나오기까지 예수 사후 40여 년 동안 추종자들은 예수의 삶을 구전으로 공유해왔다. 회당예배에서 히브리성서(구약)의 내용을 토대로 예수를 감쌌다. 즉 복음서들 자체가 매우 유대적인 책이며, 그 미묘한 의미들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당시 유대적 배경과 생활을 공유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원시 그리스도교 외형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자신이 탄생한 유대인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그 유대적 배경, 유대적 상징, 유대인들의 경전과 그 예배 관행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복음서를 읽게 되면서, 이 복음서들은 불가피하게 오해되고 오독되었다. 비유대인 독자들은 복음서들에 기록된 예수 전승이 문자 그대로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예수에게 돌려진 말들이 문자 그대로 예수가 한 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방인 지도자들은 예수에 관한 기억을 감싸고 있는 히브리 경전에서 가져온 익숙한 본문들을 더 이상 해석적인 이야기들로 이해하지 않았고, 실제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그렇게 해서 문자주의는 넘쳐났고 사람들은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의 생애에서 실제로 일어난 역사를 기록하려 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마태가 히브리 경전을 어떻게 예수이야기에 덧붙였는지, 한 가지 예를 보자.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오직 마태복음서의 탄생이야기에만 등장한다. 스퐁은 요셉이라는 사람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를 보면, 아하, 무릎을 칠 것이다. “요셉이 문학적인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요셉이라고 해야만 했던 어떤 강력한 유대적 이유가 있었을까?” 물론이다. 유대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들만이 그 상징적인 연관성을 발견할 것이다. 히브리 민족은 하나가 된 적이 없었다. 남북 두 국가의 중심 족장은 유다와 요셉이다. 유다 자손으로 나오는 예수 안에서 이 두 명의 족장이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완벽한 메시아 역할이다. 그 설정을 위해서 요셉이 어떻게 창작되는지 보자.
첫째, 요셉에게는 야곱이라는 아버지가 있었다.(마 1:16) 둘째, 마태의 탄생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오직 꿈을 통해서만 요셉과 대화를 나눈다. 꿈을 통해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고 헤롯을 피해 도망가고 갈릴리 나사렛으로 가서 살라는 말을 듣는다. 셋째, 요셉의 역할은 약속의 자녀를 헤롯의 죽음의 손길에서 구원하여 애굽으로 피신시키는 것이다.(마 2:13)
이상의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창세기의 족장 요셉 이야기로 가보자. 족장 요셉의 아버지도 야곱이다. 둘째, 이 요셉은 꿈과 관련한 매우 강력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형제들은 요셉을 꿈꾸는 녀석이라고 불렀다. 셋째,족장 요셉의 역할은 언약의 백성들을 애굽으로 데려감으로써 기근으로 인한 위협으로부터 구원한다.(창 45장) 어떤가. 예수의 아버지 요셉의 역할이 족장 요셉의 역할과 딱 맞아떨어진다.
스퐁의 말이다. “요셉은 예수의 탄생을 통해 분열된 히브리 지파들을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유대 민족을 하나의 백성으로 만드는 메시아적 사명을 상징하는, 문학적으로 창조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방인 독자들에게는 아무런 실마리가 없었을 것이다”(118쪽)
내친 김에 하나 더. 동방박사 이야기다. 동방박사들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여행은 없었다. 선물들도 없었다. 이 신화적 이야기에 담긴 모든 내용들은 역사의 산물이 아니라, 마태복음 저자의 풍부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럼, 저자가 이 이야기를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나사렛 예수의 삶 에서 그리스도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그는 세상의 빛이신 분임을 발견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인간성의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어디인가? 이사야 60장이다.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다.”(사 60:1) 어둠이 온 땅을 뒤덮지만 그 백성에게는 새로운 빛이 떠오를 것이다.(60:2) “그들이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찬양할 것이다.”(60:6) 이 이사야의 본문에서 마태의 동방박사들 이야기의 기본 이미지를 본다.
저자의 평이다. “이사야의 본문에 기반을 둔 이 설교가 회당에서 처음으로 선포되었을 때, 그것은 예수의 삶을 심오한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마태는 생일 선물을 드리기 위한 동방박사들의 여행 이야기가 문자 그대로의 역사로 받아들여지도록 의도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익숙한 경전과 상징을 사용해서, 예수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를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이었다.”(128쪽)
예수의 기적이야기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저자의 긴 설명이 있지만 결론적 서술만 인용한다. “하나님나라를 시작할 메시아에 관한 생각을 유대인들이 처음 발전시키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그 시대의 도래에 관한 꿈을 인간의 불완전함을 대신할 인간의 온전함, 질병을 대신할 치유, 죽음의 힘을 극복할 생명의 힘으로 가득 채웠다. 히브리경전 이사야 35장은 이런 기대를 모아서 강력하고 인상적인 주님의 날에 대해 묘사한다.
거기에서 예언자는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게 되고,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듣게 되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뛰게 되고, 말 못 하던 사람이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추종자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식하면서 이사야가 말하는 메시아의 표적들로 예수의 기억을 감싼 것이다.
예수의 유대인 추종자들은 복음서 저자들이 사용한 자료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서사를 이해했지만 후대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이런 기적이야기들이 예수의 생애동안 일어난 문자적 사건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복음서의 유대인 저자들에게 기적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192-193쪽)
400쪽이 넘는 책 전체가 복음서가 이렇게 유대인의 절기따라 예수의 삶을 히브리경전과 연관지어서 해석하고 예배하기 위해 나온 것임을 입증한다.
대속신앙 비판은 나도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책 여러 곳에서 대속의 문제점을 설파하는데, 내가 이해한 대로 압축해 보자. “대속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개념은 속죄일의 유대적 의미에 대한 이방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80쪽) 창세기 3장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실과를 먹은 일에 대해 유대인들은 이 이야기를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야기가 아니라, 자의식 탄생의 비유로 본다. 죄로 인한 타락이 아니라, 인간성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4세기 말,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합법적인 종교가 되었고, 이후 수세기동안 신조와 도그마에 근거하여 전례를 만들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으로 속죄에 관한 유대적 개념을 끌어내리고 대리적 속죄로 둔갑시킨 것이 이 때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오해에 뿌리를 둔 고대 신화와 그 뒤에 이어진 문자적 오해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의 주문이 된 표현, “예수는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구원에 관한 그리스도교 관점이 된 대리적 속죄는 궁극적으로 처벌하는 괴물인 하나님, 하나님의 영원한 희생자인 그리스도, 죄책감으로 나약해진 특성을 지닌 인간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왜 이렇게 됐나? 그리스도 교회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은, 유대인들의 속죄일 관습으로부터 잘못 도출해 낸 속죄 교리에 대한 오해를 문자했을 때 시작된 것이다.
당신은 스퐁의 속죄교리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독교의 근간을 뒤흔드는 주장이지만, 우리도 대속신앙이 기독교의 전부란 말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바, 제대로 직면하여 극복해야 할 쟁점임은 분명하다.
이제 예수 삶의 절정인 수난이야기를 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마태의 수난이야기는 유월절 철야예배를 위해 기록한 것이다. 주님의 삶 마지막 24시간 동안 깨어있기 위해 8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읽도록 구성한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관한 원래 이야기가 역사가 아니라 전례를 위해 기록한 것임을 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전례적 묘사가 아닌 목격자들의 이야기로 수백 년 동안 잘못 읽어온 것이다.
유대추종자들이 수난이야기를 어떻게 24시간 철야예배용 8개의 단락으로 나눴는지 초간단으로 보자. 저자는 제 2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의 모습에서 예수의 수난이야기를 만들었다.
첫째 단락은 오후 6시-9시다. 유월절 철야예배 시작이다. 밤의 경들 중 처음 세 시간의 경이 이제 끝났다. 둘째 단락은 오후 9시-12시 자정, 24시간 철야의 두 번째 경이 끝났다.
셋째 단락, 12시 자정-새벽 3시. 먼저 유다에게 배신당하고, 그 뒤에 민족에게 배신당한다. 철야예배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다.
넷째 단락,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 베드로는 닭이 울며 동이 트기 전, 경의 각 한 시간마다 한 번씩 세 번 예수를 부인한다. 타이밍이 절묘하다.
다섯 단락, 오전 6시-9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는다. 바라바가 예수 대신 풀려난다. 바라바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와 바라바라는 두 명의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한다. 복음서 저자가 속죄일 전례의 수난이야기에 맞게 의도적인 설정을 했다.
여섯 단락, 오전 9시-12시 정오다. 8개의 경으로 나누어진 24시간 철야예배의 여섯 번째 경이 막 시작된다. 일곱 단락,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책 전반에 걸쳐서 저자의 독특한 표현이 있다. 마태는 예수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했다는 식의 표현이다. “마태는 예수로 하여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울부짖게 만든다.” 예수가 직접 했다는 게 아니라 예수가 그렇게 하도록 저자가 말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역사기록이 아니라 저자의 설정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여덟 단락, 오후 3시부터 오후 6시, 즉 24시간 철야예배의 마지막 세 시간 동안, 복음서 저자들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어떻게 십자가에서 내려서 장례를 치뤘는지를 설명한다. 이 모든 일은 오후 6시 전에 이루어졌다. 시신을 매장하는 일은 안식일이 시작되는 해질녘 전에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례를 마쳤고, 해가 졌으며, 24시간의 철야예배가 완료됐다.
부활이야기도 명징하다. 하나님과 인간, 하늘과 땅,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예수의 삶 속에서 무너졌다는 절대적인 확신이 부활이야기의 전체다. 하지만 유대 전승에 익숙하지 않은 후대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부활을 이해하게 되면서, 부활절 경험에 대한 육체적인 이해가 서서히 끼어들기 시작했다. 처음 추종자들의 부활이야기는 후에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완전하게 문자화되었고, 부활은 거대한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일어난 객관적이고 기적적인 사건으로 여겨진 것이다. 아니다!
이제 저자의 마지막 말을 보자. 스퐁은 마태복음이 전례 문서이며, 회당의 창작물임을 치열하게 입증했다. 왜 이런 작업을 하는가? 기독교의 만연한 문자주의는 미래의 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질문이다. “우리는 왜 이러한 문자적인 표현들로 제시된 그리스도교 신앙이 현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점점 더 믿을 수 없는 것이 돼 가는지 물어야 한다! 우리는 신화적인 언어를 문자적으로 이해해야만 할까?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에 그리스도교의 미래가 달려 있다.
넘쳐나는 진귀한 서술들을 많이 생략했는데도 분량이 길어졌다.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부득이했다. 나는 스퐁주교가 작고한 것을 이번에 알았다. 이렇게 기독교세계에 귀한 저작으로 경종과 교훈을 준 스퐁주교. 감사합니다. 당신의 일관된 수고는 값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