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문화 읽기[문학 속 성경] 현기영의 <아스팔트> : 길은 아스팔트 아래에 있다

2020-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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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이 갈 곳을 알려준다. 대꾸 없는 운전자에게 내비게이션은 친절하게 끝까지 말을 건넨다. 무시당해도 목적지까지 충성하는 내비게이션 덕에 늑장 부리지 않았다면 제시간에 갈 곳에 닿는다. 내비게이션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도로망이 잘 갖춰져 있어서다. 일반 자동차 운행이 금지된 농로마저 닦여있고 포장된 까닭에 못 갈 곳이 없다.


옛날 로마군단도 못 갈 곳이 없었다. 전차와 수레가 다닐 수 있는 도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광대한 제국 어디라도 반란이 일어나면 신속하게 로마 군단의 전차와 수레가 이동할 수 있었다. 제국이 워낙 넓어 구석구석까지 군단을 배치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도로망을 잘 갖춘 까닭에 군단은 식민지 어디에서 일어난 반란이라도 수일 내에 제압할 수 있었다. 지중해 세계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었다. 로마 전역으로 뻗어나간 넓은 길은 군단이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길, 누군가를 죽이러가는 길이었다.


당연히 예수께서는 넓은 길을 경계하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13~14)

넓은 길은 빠르고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다. 예수께선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넓고 빠른 길을 경계하신다. 넓고 빠른 길은 누군가를 죽이는 길이기 때문이다.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로마 군단이 이동하는 넓고 빠른 길이란 결국 죽임이 목표였기에, 길이라 불리나 길이 아니다.


지금 현대인들이 다니는 길은 옛날 로마인들의 길보다 훨씬 발달해 더 넓고 더 빠르다. 로마제국이 지중해 세계에 구축했던 길은 육로와 해로뿐이었지만, 지금 현대인들은 구름 위에도 길을 열었다. 어디에나 길이 있고, 어디라도 갈 수 있다.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어디든 간다. 아스팔트 도로는 로마 제국에 났던 가도보다 넓고 빠를뿐더러 울퉁불퉁하지 않아 흔들림도 적다.


까만 아스팔트를 잡아채며 달리는 매끈한 바퀴는 로마 전차를 끌던 어떤 말보다 힘이 세다. 아무리 작은 자동차도 그 힘이 100마력이 넘는다. 100마리 말이 끄는 힘으로 아스팔트 도로를 달릴 수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생명체 중에 자동차보다 빠른 건 없다.


그래서다. 바람도 빗물도 심지어 경치도 자동차 유리 속을 파고들지 못한다. 끈질기게 따라오는 일몰의 태양이야 자동차 유리 안쪽으로 끈질기게 남겠지만, 석양마저 무시받기 일쑤다. 아스팔트 도로 위엔 출발지와 목적지만 남는다. 인디언들은 말을 달리다가 잠시 멈춰 서서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었다는데, 아스팔트 도로 위를 뒤따라오는 영혼을 기다려야 하는 고속도로 휴게소는 너무 분주하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달리지 않을 뿐 멈춰 선 곳이 아니다.


아무리 멀리 가도 멈출 수 없는 고속도로엔 속도만 있을 뿐 과정이 없다. 지평선 너머에서 너머로 빠르고 수월하게 다니지만, 출발지와 목적지 외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빠른 속도 때문에 고속도로에선 길 위에 있을 모든 과정이 휘발된다.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까만 아스팔트가 인도하는 대로 가야 목적지에 닿는다. 아스팔트를 벗어날 수 없다. 이미 있고, 확정돼 있는 도로에 올라타는 순간 뒤돌 수 없다. 뒤돌아 달리는 역주행이 허락되지 않고, 막히지 않은 도로에서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인터체인지로 빠져나오는 건 길치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런데 말이다.

정해진 목적지 외에 기억하지 않으려는 도로의 아스팔트 아래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걷다가 지쳐 넘어진 사람들, 마저 가지 못한 길을 이어가던 사람들, 가다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살아남은 슬픔을 한숨으로만 토하던 사람들, 발자국 지우며 쫓기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아스팔트 아래에 깔려버린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는 30년 동안 새까만 아스팔트 아래에서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소리로도 말할 수 없었다.


풀씨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는 아스팔트, 어떤 생명력도 그 강인한 불모성을 꿰뚫지는 못한다. 비정의 아스팔트. 산 자는 이렇게 말한다. 

“비행장에서도 사람 많이 죽어 무데기로 묻혔쥬. 아이고, 활주로 넓히길 잘했쥬기. 아스팔트로 꽉 봉해불고 비행기 소리가 벽력같은디, 귀신들이 당최 맥을 쓸 수 있나.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도 귓것들이 막 해꼬지하려고 냅뛸 거라.”(89쪽)


현기영 작가(출처: 오마이뉴스 2018년 3월 21일자)


아스팔트 아래에 깔려서, 아스팔트 활주로를 달리는 비행기 굉음에 파묻혀서, 4․3 사건 속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건 이후 30년 동안 존재하는 줄 몰랐었다. 1941년 생 현기영이 제주 전역에 깔려있는 아스팔트 일주도로 아래에 묻혀 있는 4·3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사건 발생 후 30년이 지났을 때 너븐숭이 총살 현장에서 기절해 살아남았던 ‘순이 삼촌’의 이야기를 아스팔트 위로 솟아나게 했다. 여덟 살짜리 현기영이 보았던 4·3사건은 아스팔트 아래에 묻혔지만, 끝내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솟아 나왔다.. 현기영이 아스팔트 도로를 훼손한 건 엄연히 실정법 위반이라, 고문을 당했고, 책은 판금 되었다.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흙먼지 날리는 좁은 길을 선택한 대가는 혹독했다.


정해진 이데올로기를 목적지로 삼는 고속도로가 길일까. 비가 오면 더 반반해지고 깨끔해지는 아스팔트 고속도로를 예수께서 보신다면 길이라 하실까. 예수께서는 진리를 말씀하시면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길이라 하셨는데, 지금 아스팔트 도로를 보신다면, 자신을 아스팔트 도로에 비유하실까. 아닐 거다. 비가 오면 신발에 달라붙는 찰진 흙 때문에 느리게 걸을 수밖에 없는 길, 바람 불면 안개 같은 흙먼지에 눈뜰 수 없는 길, 신발이 무겁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빠르게 갈 수 없는 길, 그 길이 예수께서 진리요 생명이라 하신 길이다. 거기에 사람이 있다. 아스팔트 도로 위를 달릴 때 만날 수 없던 사람들이 거기 길에 있고, 그 사람들의 곡진한 이야기가 있다. 아스팔트 아래에 깔려 있는 사람들을 예수께서 만나시고, 그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기도로 받으신다.


길은 아스팔트 아래에 있다.



글/김영준

민들레교회 목사다. 전라도 광주에서 자랐고, 서울 이문동과 광장동에서 놀았다. 열심히 공부할 걸, 후회하는 중년 아저씨. 김포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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