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문화 읽기[문학 속 성경]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 : “아무리 좋은 전쟁도 가장 나쁜 평화보다 나을 수 없다”

2020-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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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 없는 작은 나라는 핵을 만들려 하고, 핵을 가진 큰 나라는 핵을 억제하려 한다. 핵을 정확하고 멀리 쏘아 보낼 미사일을 개발하려는 나라가 있고, 미사일 개발하는 나라를 경제제재로 묶으려는 나라가 있다. 한반도에 휴전이 온 지 오래지만 말 그대로 휴전이라, 전쟁의 가능성은 여전하다. 필요할 때마다 전쟁의 소문으로 권력을 챙기려는 세력이 건재하고, 전쟁을 경험한 어르신들의 상처를 헤집어 그 세력을 지키는 무리는 흩어지지 않았다. 미국 군대가 한반도 서울 가까이에 상주한다. 미국 군대가 있어야 안전하다고 느낀다. 미군 주둔에 대한 방위비 분담비율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나 보다. 휴전하고 70년이 차가지만 한반도는 전쟁을 소비한다. 전쟁은 비싸다.


미국에게 유일한 패배를 안긴 전쟁이 있었다. 20세기 초강대국 미국이 진 그런 전쟁도 있었다. 비싼 전쟁이었지만 패했다. 베트남 전쟁(1964년 8월~1975년 4월)이다. 베트남 입장에선 당대 최강국을 상대로 한 위대한 승리였다. “종전 직후의 베트남은 정말 너무 가난했지만 전쟁의 승리에 모두 들떠 있었”다. 승리했기에, 그리고 통일을 이루었기에 전후 베트남 지식인들이 생산해야하는 전쟁에 관한 서사는 극적이어야 했고, 위대한 영웅들을 소개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래야 전쟁 후 지속된 미국의 베트남 경제제재 마저 견디고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 관한 극적 서사 이면엔 너무 큰 고통이 있다. 전쟁이 낳은 위대한 영웅은 너무 큰 희생 위에 서있다. 전쟁은 컴퓨터 게임이 아니니까. 네이팜탄의 불꽃과 무더기로 투하되는 폭탄의 구름은 컴퓨터 게임 같지만, 전쟁은 게임이 아니다. 불꽃과 구름 속엔 사람이 있다. 전쟁 속엔 고통당하고 희생된 사람이 있다. 베트남 전쟁의 당사자는 위대한 승리를 한 베트남과 유일한 패배를 한 미국이 아니다. 베트남 사람들, 미국 사람들이 전쟁의 당사자다. 전쟁 속에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 사람도.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 군인들을 ‘박정희 군대’라고 불렀다. 어쩔 수 없이 미국의 용병으로 왔다고 이해한다. 미국의 용병으로 온 박정희 군대가 소위 ‘전략촌’을 습격해 민간인들까지 죽이기도 했는데, 퐁니 퐁넛 마을이 그 중 하나다. 1968년 2월 12일 대한민국 해병 청룡부대가 퐁니 퐁넛 마을 주민 70여 명을 죽였다. 베트남 전쟁의 성격 중 하나를 ‘전선 없는 전쟁’이라 한다. 어디에서도 총알이 날아올 수 있고, 마을 주민도 적으로 위장했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민간인까지 화를 입었다. 전쟁은 누군가의 피를 흘리도록 강제한다. 내 피를 쏟거나 다른 사람의 피를 쏟아야 전쟁은 만족한다.


전쟁 속에 사람이 있었다. 군인이 있었고, 민간인이 있었다. 성인이 있었고, 아이도 있었다. 민간인도 아이도 전쟁 속에서는 죽어야 할 적이 되기도 했다. 전쟁 속 사람은 두 부류다. 죽이는 사람과 죽는 사람.


출처 : 경북매경 2016 년 8 월 25 일자


바오 닌(Bảo Ninh)은 전쟁 속 사람을 소개한다. 게임 동영상 보듯 전쟁 장면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전투화를 스치는 시체의 물컹거림과 시취를 느끼게 해준다. 전쟁의 장면이 아니라, 전쟁 속 살아남은 사람과 이미 죽은 사람을 소개한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사랑을 하고 공부를 하며 평범한 일상을 살았을 스무 살 전후의 청춘들을 소개한다. 스무 살 청춘들에게마저 전쟁은 “높은 하늘조차 막다른 골목처럼 느껴지던 나날이었다.”


작가 바오 닌의 분신 같은 주인공 ‘끼엔’은 열일곱 살에 입대해 10년 동안 참전한다. 끼엔의 연인이었지만 전쟁 때문에 파괴된 여성을 숙명으로 받고 지옥 같은 일상을 살던 ‘프엉’은 종전 후 끼엔을 떠난다. 열일곱 살짜리 청년들이 치러야 했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각 사람에 남아있는 전쟁에 대한 기억은 지뢰 같다. 제거되지도 않고, 터져도 사라지지 않는다. 전쟁의 기억은 지뢰처럼 박혀있을뿐더러, 터지고 터져도 다시 터진다. 끼엔과 프엉처럼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들에게 승전과 패전은 따로 구별되지 않는다. 승전국 군인이었던 ‘끼엔’에게 남은 전리품은 불면과 이별과 알콜 중독이다. ‘프엉’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전쟁 영웅 끼엔을 남편으로 맞이할 수 없다. 초강대국 미국을 이긴 위대한 승리가 있었지만, 열일곱 살 끼엔과 프엉이 누렸어야 할 일상은 전후에도 회복되지 않았다. 일상이 회복되지 않았는데, 승리일 수 없다.


사람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일상도 회복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났지만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여전히 전쟁의 기억에 잡혀있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교통사고 현장만 목격해도 그 기억이 쉬 지워지지 않을 텐데, “운동장 전체가 시신으로 덮여 있는 걸” 봐야하는 전쟁을 겪는다면, 기억 속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승전과 패전은 국가에 호응되는 말일 뿐,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전쟁의 승리란 의미 없다. 전쟁에서 이긴다는 건,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소망이다. 동그란 삼각형 같이 승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승전이란 게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인 까닭에, 전쟁 영웅 역시 있을 수 없다. 승자가 누릴 극적인 승리도 없고, 패자가 맞은 장렬한 패배도 없다. 전쟁은 어떤 방식으로도 극적이지 않고 장렬하지 않다. “정의가 승리했고, 인간애가 승리했다. 그러나 악과 죽음과 비인간적인 폭력도 승리했다.” 정의가 승리하고 인간애가 승리한다 해도, 악과 죽음과 폭력 또한 승리했다면, 누구를 무엇을 이긴 것인가. 전쟁을 통한 승리는 없다. 승전이란 동그란 삼각형이다. 승전이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전쟁은 그래서 슬프다. 죽음과 파괴만 남는 전쟁은 슬프다. 바오 닌은 참전 군인으로서 승리한 전쟁의 위대한 영웅이었지만 슬프다. 작은 나라 베트남이 어떻게 초강대국 미국을 이길 수 있었느냐는 우문(愚問)에 바오 닌은 “병사들만 진 전쟁이었다”고 현답(賢答)한다. 승전을 묻는 어리석은 자에게 바오 닌이 지혜롭게 대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슬픔 때문이다. 슬퍼하는 까닭에 바오 닌은 지혜롭고, 전쟁에 진 병사들을 위로할 수 있을 터다. 바오 닌은 슬퍼하며 “그 전쟁과 다시 싸운”다. “기타 하나 둘러메고...노래도 하고 얘기도 하면서, 아저씨, 아주머니, 형, 누님...모든 사람에게 우리 시대의 끔찍한 노래를 들려”주며 전쟁과 다시 싸운다. 그렇게 위로한다.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마태복음 5장 4절)

예수께서 산 위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하신 말씀이다. 전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서사가 전쟁문학의 주류였고, 마땅히 그래야한다는 게 당국의 지침이라 문단 전체가 순응하고 있을 때, 바오 닌은 영웅 서사가 아닌 전쟁의 슬픔을 이야기한 까닭에 당국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슬픔'은 판금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얼마인지 확인할 수 없을 만큼 해적판으로 유통되었다.

전쟁을 슬퍼하는 사람 바오 닌을 통해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과 다시 싸우고, 미국을 이기는 데 그치지 않고 전쟁을 이기려 한다. 전쟁을 슬퍼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일상으로 위로하시길. 함께 슬퍼하는 사람이 더 많아져 더 많은 일상으로 비로소 평화롭길, 그저 기도한다.

어머니가 그 자식을 위로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사야 66장 13절)

하나님께서 위로하실 것이다. 옛날 페르시아에서 노예 살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위로하셨다. 페르시아에서 노예 살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예언은 땅을 회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다. 슬퍼하는 자가 하나님에게 받는 위로는 곧 땅의 회복이다. 슬퍼하는 자들을 통해 땅이 회복된다. 전쟁을 슬퍼하는 자들이 평화의 땅을 일군다. 평화의 땅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슬픔의 빛이 구원의 빛이다. “슬픔의 빛으로 과거를 비추었다. 그것은 각성의 빛이었고, 그를 구원하는 빛이었다.”


전쟁은 비쌀 뿐, 전리품은 대단치 않다. 전쟁 영웅 끼엔이 받은 전리품이 전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불면과 사랑하는 사람의 파멸과 이별을 견딜 수 없는 알콜 중독이었다면, 전쟁은 그 가성비가 너무 낮다. 아무리 좋은 전쟁이라도 너무 비싸다. 그래서다.

“아무리 좋은 전쟁도 가장 나쁜 평화보다 나을 수 없다”

돈으로 평화를 살 수 있다면, 아니 돈으로 전쟁을 막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지불하는 게 이익일 터다. 어떤 전쟁비용보다 평화비용이 훨씬 가성비 높다. 스무 살 끼엔과 프엉이 살던 동네에서 살 수 있도록, 그냥 그렇고 그런, 진부하기도 하고 권태로운 일상, 그런 평화, 어쩌면 비루하고 비겁할 수 있는 그런 평화, 그래서 어쩌면 나쁜 평화가 아무리 좋은 전쟁보다 더 낫다. 전쟁을 슬퍼하며, 평화를 심는 자에게 예기치 못한 기쁨도 있을 것이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시126:6)



글/김영준

민들레교회 목사다. 전라도 광주에서 자랐고, 서울 이문동과 광장동에서 놀았다. 열심히 공부할 걸, 후회하는 중년 아저씨. 김포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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