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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쎄인트의 책 이야기 Jun 02. 2022

미래의 오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_옥타비아 버틀러 / 비채               





최근(아니 좀 오래전부터)출간되는 책들의 제목은 제법 길기도 하다. 때론 책제목이 반이다. 제목만 보고도 책 내용이 대충 짐작이 간다는 이야기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라는 제목을 보면 파울로 코엘료나 류시화 작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나무를 심는 사람」도 생각난다. 그러나 막상 이 책을 읽다보면, 책 제목과 내용 간에 다소 거리감이 생긴다. 그렇다고 전혀 다른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는 이야기다. 특히 ‘우화’라는 단어가 걸림돌이다. 책이 번역되는 과정 중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의역을 하고, 편집자의 머리에서 독자들의 시선을 끌만한 근사하거나 좀 엉뚱한 제목이 뽑아지기도 한다. 이 책의 원제는 《Parable of the Sower》이다. 원제를 그대로 번역했다.          




소설의 지역적 배경은 미국 LA에서 30km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한때 경치도 좋고 부유한 사람들도 제법 있는 평화로운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동서남북이 두껍고 높은 장벽으로 둘러싸여있다. “근처에서 사람들이 서로 죽이려고 기를 쓰고, 우리는 땅바닥에 드러누워 총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런 일이 일상이 되다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다.” 장벽의 안과 밖은 서로 딴 세상이기도 하고, 공존한다는 말이 우습지만 장벽의 안과 밖이 서로 공유되기도 한다. 그때는 서로 침입자와 방어자가 된다. “누구든 먼저 죽이고 살아남은 쪽이 다 차지한다.”              


시대적 배경이 중요하다. 2024년부터 2027년 사이의 이야기다. 소설의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가 이 소설을 발표한 때는 1993년이다. 약 30년의 시차가 있다. 작가가 글을 쓸 때는 미래 소설이었지만, 그 미래가 현재가 되어버렸다. ‘미래 속 오늘’이 되었다. 그 미래는 해피하지 않다. 디스토피아이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로런 올라미나의 기록을 토대로 했다. 로런이 기록을 하기 시작한 2024년에 그녀는 15살이었다.           




장벽으로 둘러싸인 폐쇄형 주택단지. 장벽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방 벽이 막힌 집이 있고, 삼시세끼를 챙겨먹을 정도이다(대체적으로). 수시로 장벽 밖 거주자들(마약 중독자들이 대부분인 노숙자들)이 장벽 안으로 들어와서 방화, 약탈, 살인을 벌이다보니 장벽 안 사람들은 총을 휴대한 자경단까지 조직한다. 디스토피아 소설이나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소재지만, 물이 귀하다(어느 영화에선 산소통 때문에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 소설의 배경도 물이 귀하다. 기후변화는 비가 몇 년에 한번 소나기처럼 지나갈 정도로 안 좋아졌다. 어느 날, 장벽 밖 사람들이 작정하고 장벽 안을 쳐들어왔다. 장벽 안 많은 사람들이 죽고, 실종되고, 모두 불타는 상황에 주인공인 로런은 간신히 그곳을 탈출한다.                 






로런은 15세가 되기 전부터 마음속으로 결행했던 북쪽으로(사람살기가 남쪽보다는 좀 낫다는)향한다. “북으로 난 고속도로를 따라 걷는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간절히 바라는 것은 고작 해마다 비가 내리는 땅이었다. 못 배운 사람도 급료를 콩이나 물이나 감자가 아니라, 등을 붙이고 잘 수 있는 바닥 한 뼘이 아니라, 돈으로 받는 일자리가 있는 땅이었다.” 북으로 향한 사람은 로런 혼자가 아니었다. 알고 지내던 마을 청년 두 사람과 함께 길을 나섰다. 북으로 향하는 길에 같은 방향과 목적을 가진 일행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팀의 리더는 로런이 된다. 로런에겐 꿈이 있다.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환경에 대한 희망과 욕망이다.             




각 챕터 서두 또는 중간에 굵은 글씨의 문장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구종 : 산 자들의 책》이다. 《死者의 書》를 패러디 했다. ‘지구종’이라는 책은 로런이 쓴 책이다. 혹시 이런 책 진짜 있나 검색해보려는 독자가 있을까봐 밝히는 바이다.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해서 종교 알레르기환자들에겐 거부감이 느껴 질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종교적이지는 않다. 모든 것이 망가져서 어찌 손을 써볼 수 없는 상황, 암울한 미래에 로런이 매달리고 있는 한 가닥 밧줄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로런은 ‘초공감자(초공감증후군)’로 설정되어있다. ‘초공감자’를 내 마음대로 다시 풀면 ‘공감과잉’이 될 것이다. 내 주변의 누군가(육안으로 보이는 곳에 있는)가 질병으로 또는 상해로 고통을 받으면 그 고통이 본인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동질의 고통을 느낀다. 특히 이 소설의 일상은 “누구든 먼저 죽이고 살아남은 쪽이 다 차지한다.”는 분위기인지라, 로런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쪽이 더 많다)이 수시로 일어난다. 상대방이 피를 흘리면, 같이 피를 흘리기도 하고 잠시 죽었다 깨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로런이 겪는 고통은 ‘초공감자’인 경우보다는 ‘초민감자’쪽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초민감자는 외부의 에너지를 느끼고 자신의 몸으로 흡수하지만, 초공감자는 에너지는 느끼지만 대체적으로 흡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런이 장벽마을을 탈출해서 북으로 향하는 과정이 전개되는 후반부는 스릴러물 같은 긴장감이 동반된다. 존 그린 (소설가)은 이 책이 《1984》 《시녀 이야기》와 나란히 놓이는 뛰어난 소설이라고 극찬했다. 뭐, 거기엔 좀 못 미칠지라도 암튼 잘 쓰인 소설이다. 가독성이 좋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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