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

[책]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_살아남는 방법

설왕은 2021. 12. 17. 14:09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솔제니친 지음, 류필하 옮김, 소담출판사)

 

 

재밌는 글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으로 책을 집어 들었는데 예상대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미국에 있을 때 한국어로 된 책을 산 것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거의 10년이나 살았지만 한국어로 된 책이 워낙 비쌌고, 전공서적이 아닌 일반책을 읽을 시간도 별로 없었고 유학생이라 돈도 별로 없었다. 그 와중에 산 책이니 기억에 남아 있기는 한 책이었다. 내가 읽고 싶어서 산 책이 아니라 아내가 읽고 싶어서 사달라고 해서 산 책이다. 이 책을 처음 살 때도 뭐 이런 재미없는 제목의 책이 있을까 싶어서 책장에 모셔두고 보기만 겉모양만 구경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유시민 작가가 이재명 대선 후보에게 추천해 준 책이어서 이제는 나도 이 책을 읽을 때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단지 유명한 사람이 대통령이 될 것 같은 사람에게 추천해 주어서 읽어 볼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그의 추천사가 기억에 남았다. 수모를 견디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담은 책이라나. 2021년에 당했던 수모가 떠올랐고 그 수모를 견딜 수 있는 방법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책을 폈다. 

 

책은 특별한 내용이 없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맛없는 빵을 맛있게 먹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가 책 전체에 펼쳐진다. 신기하게도.

 

슈호프는 아주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잠을 청했다. 오늘 하루 동안은 그에게 꽤나 순조로운 날이었다. 재수가 썩 좋은 하루였다. 영창에도 들어가지 않았고, '사회주의 단지'로 추방되지도 않았다. 점심때는 죽그릇 수를 속여 두 그릇이나 얻어먹었다. 작업량 사정도 반장이 좋게 해결한 모양이다. 오후에는 정신없이 블록을 쌓아 올렸다. 줄칼 토막을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차례를 기다려 주고 많은 벌이를 했다. 담배도 사 왔다. 병에 걸린 줄만 알았던 몸도 가뿐하게 풀렸다. 
이렇게 하루가, 우울하고 불쾌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의 행복하기까지 한 하루가 마감되었다. 
이런 날들이 그의 형기가 시작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만 10년을, 그러니까 3,653일이나 계속되었다. 
사흘이 더 많은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끼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 내용이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솔제니친이 자신의 감옥 생활을 경험으로 쓴 작품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이반 데니소비치는 하루를 그리고 있다. 단 하루가 아니라 그냥 매일 비슷한 하루하루를 그리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반 데니소비치가 강제수용소에서 지내는 하루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강제수용소에서 보내는 하루는 아주 뻔한 삶이다. 일어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이 정해져 있고 해야 할 일이 있고 감옥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자유도 없다. 먹을 것은 당연히 형편없고 다양할 리도 없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분명히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않고 답답함을 털어놓지도 않는다. 삶을 비관하는 자세도 없고 앞날을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영창에 안 들어가고, 죽을 두 그릇 먹고 담배도 사고 돈도 벌면서 하루를 살았다면, 그 정도면 거의 행복하기까지 한 하루였다고 스스로 만족한다. 흉악한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강제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분명히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반 데니소비치는 수모를 수모로 여기지 않고 수모를 정면으로 맞부딪치지 않고 살짝 옆으로 비켜나가서 오늘 받은 딱딱한 빵껍질로 죽그릇을 닦아 먹으면서 오늘 하루 나쁘지 않았다고 위안한다. 

 

그다음 조금씩 빵을 베어 물기 시작했다. 작업복과 방한복에 싸여 체온이 미치는 데 들어 있었기 때문에 빵은 조금도 얼지 않았다.
수용소에 들어온 후부터 슈호프는 전에 고향마을에 있을 때 배불리 먹던 일을 곧잘 생각하곤 했다. 감자를 무쇠냄비에 몇 개씩이나 넣고 채소를 넣은 죽을 몇 대접씩이나, 그리고 식량 사정이 좋았던 옛날에는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닥치는 대로 먹어 댔었다. 게다가 우유는 질리도록 마셨다.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었다고 슈호프는 지금에야 절실히 느끼고 있다. 음식을 먹을 때는 그 진미를 느끼며 먹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이 조그만 빵조각을 먹듯이 먹어야 한다. 조금씩 입안에 넣고 혀끝으로 이리저리 굴리며 양쪽 볼에서 침이 흘러나오게 한다. 그렇게 하면 이 설익은 검은 빵이나마 얼마나 달콤한지 모른다. 수용소 생활 8년, 아니 이제는 9년째로 접어들지만, 그동안 슈호프가 먹어 봤던 게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전 같으면 입에 대지도 못할 것들뿐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에 이제는 질렸다는 건가? 천만에! (65-66)

 

주로 이런 이야기이다. 이반 데니소비치가 누렸던 즐거움은 빵조각을 천천히 먹으면 느낄 수 있는 미세한 달콤함이었다. 그가 다른 이에게 베풀었던 선한 행동은 배식하는 이를 속여서 죽을 한 그릇 더 받아내 다른 이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수용소 안에서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선행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억울하지 않았을까? 너무 그냥 생각 없이 산 것이 아니었을까? 적응해서 힘들지 않았던 걸까?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이반 데니소비치는 자신이 10년을 수용소에서 살았는데 윤년이 3번 끼어서 3일을 더 살았다고 말하면서 글을 마친다. 이 말은 하루하루가 정말 힘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년이 두 번 낄 수도 있었는데 세 번 끼어서 하루를 더 살아서 힘들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어렵게 살았지만 그가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았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살아남는 기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반 데니소비치가 가르쳐주는 살아남은 기술은 하루를 사는 것이다.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거나 절망하거나 좌절하는 이유는 삶을 너무 멀리 보기 때문이다. 앞날의 걱정을 모두 앞으로 당겨와서 오늘 하루에 그 걱정을 다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34, 개정) 

 

 

삶이 괴롭다면 더더군다나 하루씩 살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반 데니소비치가 가르쳐주는 살아남는 방법이다. 사람이 한 달을 잘 살기는 어렵다. 1년을 잘 살려고 마음먹으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또 평생을 훌륭하게 멋있게 살려고 생각한다면 앞날에 닥칠 것 같은 불확실한 요소와 불행을 제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긴다. 그러면 근심이 쌓일 수밖에 없다. 최고의 삶의 기술은 하루를 잘 사는 것이다. 하루의 걱정 정도는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무게이다. 걱정했지만 하루를 잘 버티고 살았으면 그날을 마감하면서 "대략 행복했다"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하루 정도는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산다면 척박한 상황에서 살아남는 최선의 삶의 방식이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재미없다. 수용소의 하루가 뭐가 그리 재미있겠는가. 하지만 강제수용소에서 이반 데니소비치는 하루를 사는 재미를 발견하고 하루하루를 살아서 결국 10년, 3653일을 버텨내 결국 살아남는다. 그가 재밌게 사는 것이 신기해서 보게 되는 책이고, 이런 말도 안 되는 환경에서 재미를 느끼고 살 수 있다면 나도 재밌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게 되는 책이다.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다면 그것을 실천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반 데니소비치도 하루 아침에 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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