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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작고 귀엽지만 내용은 알차네_칸트 "영구 평화론"

설왕은 2021. 10. 27. 17:41

 

 

칸트의 철학은 쉽지 않습니다. 대체로 철학책은 다 쉽지 않죠. 칸트가 워낙 유명하니까 철학에 손을 댈 때 칸트가 쓴 책을 읽어 볼 생각을 많이들 하는데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순수이성비판 같은 책을 읽다 보면 '역시 철학은 어렵구나' 생각하면서 멀리하게 되죠. 계속 철학을 공부하면 칸트보다는 다른 철학자들에 집중하기가 쉽죠. 아무래도 18세기 철학자보다는 현대 철학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될 때가 많고 현대 철학자는 과거의 철학을 섭렵하면서 이야기하니까 굳이 옛날 철학자들을 읽어야 하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딱 그런 경우여서 칸트와는 친해질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초반에는 이해하기 힘들어서 먼 느낌이었고 나중에는 다른 철학자들에게 관심을 갖다 보니 칸트의 책을 공들여서 읽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칸트의 "영구 평화론"은 칸트가 쓴 다른 책들과는 다르게 참 작고 귀여운 책입니다. 내용이 많지 않아서 금방 다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만해 보이기도 합니다. 제목은 거창하게 "영구 평화론"입니다. 인류 역사상 평화를 누린 시기가 별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제목이 참 거창합니다. 그냥 평화론이 아니라 영원한 평화론입니다. 칸트가 가지고 있었던 인류와 미래에 대한 긍정의 시각을 알 수 있는 제목입니다. 아니면 좀 더 견고한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영구 평화론이라는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주요 내용은 딱 두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1장 국가 간의 영구적인 평화를 위한 예비 조항

제2장 국가 간의 영구 평화를 위하여 확정된 조항

 

두 개의 장이 주요 내용이지만 그다음에 보충 조항과 부록이 주요 내용만큼의 분량보다 더 많습니다. 

 

제1 보충 조항 영구 평화의 보장에 관하여

제2 보충 조항 영구 평화를 위한 비밀조항

 

부록도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영구 평화의 견지에서 본 도덕과 정치의 불일치에 관하여

(2) 공법의 선험적 개념에 의한 정치와 도덕의 일치에 관하여

 

영구 평화론인데 왜 국가 간에 체결하는 조항에 관심을 기울였는지 다소 의문이 들기는 했습니다. 평화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과 역사적인 검토 같은 것을 할 것 같은데 내용이 바로 실천 조항을 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영구 평화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죠. 전쟁은 주로 국가 간에 하는 것이고요. 전쟁을 막으려면 국가 간에 지켜야 할 것들이 있는 것이죠. 

 

 

칸트가 제안하는 국가 간 영구평화를 위한 예비 조항 첫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장래에 있을 전쟁의 씨앗을 비밀리에 유보한 채 체결된 평화 조약은 결단코 평화 조약이라고 할 수 없다. 

 

추상적인 조항이라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몇 개는 이렇게 모호한 조항이고 몇 개는 실천이 가능할 수도 있는 조항입니다. 저는 세 번째 조항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 일치해서 반가웠습니다. 세 번째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3. 상비군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완전히 폐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상비군은 항상 무장한 채로 출격 준비를 갖추고 있음으로써 다른 나라들을 끊임없이 전쟁으로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군대를 없애자는 말인데 당장 없애자는 것은 아니고 시대의 흐름과 함께 적당한 때에 없애라는 말입니다. 저도 국가 간의 평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군대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이상적인 바람이기는 한데 그래야 결국 평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군대가 없어지면 국가 간의 분쟁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대화를 통해 타협하면 되죠. 개인 간에도 갈등이 생기면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적절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국가 간에도 그와 같이 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렇게 못 하더라도 나중에는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칸트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2장의 초반부도 내용이 좋았습니다. 

 

함께 생활하는 인간 사이의 평화 상태는 자연 상태는 아니다. 자연 상태는 오히려 전쟁 상태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예를 들어 적대 행위가 언제나 발생한 상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대 행위에 의한 위협을 받고 있는 상태이다. 그 때문에 평화 상태는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34)

 

이 말 자체는 그다지 새로운 정보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홉스가 했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나 옛날 로마 희극에 나왔던 대사인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 호모 호미니 루푸스)보다 훨씬 약한 말이죠. 인간 사회의 자연 상태는 전쟁 상태이기 때문에 평화는 자연스럽게 발생하지 않는다는 칸트의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평화는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고요. 그런데 인간 사회의 자연 상태는 왜 전쟁 상태일까요? 칸트는 각주를 달아서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순수하게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은 바로 이 자연 상태에서 그가 내 곁에 있음으로써, 이미 나로부터 이러한 보장을 빼앗고 나에게 위해를 가하고 있는 것이 된다. 더욱이 그것은 행위를 통해서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의 상태의 무법칙성(무법 상태)을 통해서인데, 이 무법적 상태를 통해 나는 그로부터 지속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으며, 그때 나는 그가 나와 함께 공통적, 합법적 상태에 들어가던가 아니면 내 곁을 떠나든가를 요구할 수 있다. (35)

 

칸트는 인간의 기본 상태는 무법 상태라고 말합니다. 무법칙성이라고 번역하고 괄호 안에 무법 상태라고 했는데, 무법 상태가 훨씬 더 이해하기 좋은 말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나고 사회를 이루고 살고 있기 때문에 공존, 공생하기 위해서는 법칙이 필요한데 자연 상태의 인간 사회에는 법이 없습니다. 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서로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텐데, 인간은 다른 존재들에 비해서 훨씬 더 자유롭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서로 충돌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실제로 충돌이 일어납니다. 법이 없이 인간의 양심에 쓰인 대로 판단하고 서로 갈등을 조정하면 될 텐데, 그 양심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또한 양심이 작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법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칸트가 말하는 법은 크게 세 가지 종류입니다. 국민법, 국제법, 세계 시민법입니다. 국민법은 작동합니다. 국가가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벌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제법과 세계 시민법은 법이 있어도 강제력을 가지고 제재를 가하는 조직이 없기 때문에 사실 유명무실하죠. 있다고 하더라도 강대국에 의해서 무시되기 쉽습니다. 

 

칸트가 제시하는 영구 평화를 위한 체제는 공화적 체제입니다.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공화국입니다. 공화국이라는 말은 특별한 의미를 주지는 않습니다. 공화국의 어원도 레스 푸블리카로 공적인 것을 의미하고 우리말로는 '함께 공'에 '화할 화'를 쓰기 때문에 공화국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하기 나름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공화국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한 사회의 구성원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원리이고, 둘째는 모든 구성원이 유일 공통적인 입법에 종속된다고 하는 제 원칙이며, 셋째는 모든 구성원이 평등하다고 하는 법칙, 이 세 개에 기초하여 설립된 체제--이것은 근원적인 계약의 이념에서 비롯된 유일한 체제로서, 한 민족의 모든 합법적인 입법은 이러한 이념에 토대를 두지 않으면 안 되며, 바로 이러한 체제가 공화적 체제인 것이다. (37)

 

 

공화국에 대해서 짧고 명료하게 잘 정의했습니다. 칸트는 국제 사회도 공화국과 비슷한 원칙에 입각해서 연방제로 가야 한다고 영구 평화를 위한 제2확정 조항에서 주장했습니다. 

 

이 책은 칸트라는 어려운 철학자가 쓴 깜찍하고 귀여운 책인데요. 내용은 엄중하고 이론보다는 실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말로 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없고 실제로 평화를 만들어야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칸트가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평화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번에 두 번 정도 읽어 보았는데 나중에 다시 또 읽어 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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