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의 노트

[신학노트] 혼돈의 카오스_존 호트 "과학과 종교, 상생의 길을 가다" 7장을 기반으로

설왕은 2021. 5. 26. 22:34

* 존 호트가 쓴 "과학과 종교, 상생의 길을 가다" Science & Religion의 7장 내용을 기반으로 카오스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혼돈의 카오스'는 같은 단어의 반복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물론 혼돈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는 카오스이지만 과학에서 말하는 카오스는 좀 특별합니다. 단순한 무질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은 무질서 속에서 나타나는 질서를 발견하고 그것을 카오스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카오스는 무질서 같은 질서, 혹은 질서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무질서를 의미합니다. 

 

과학자들이 카오스 이론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이고 다른 하나는 혼돈 속에서 나타나는 질서입니다.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은 나비 효과라는 말로 대표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기상학자 애드워드 로렌츠가 1972년에 한 강연의 제목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 제목은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일으키는가?"입니다. "에이 설마, 나비의 날갯짓이 어떻게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미세한 차이에 의해서 엄청난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과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알아낸 것입니다. 특별히 기상 분야에서 미세한 차이로 인해 변화가 심합니다. 그래서 단기간 혹은 짧은 시간 후에 일어날 날씨의 변화는 예측이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장기적인 날씨 예측은 불가능합니다. 또 미국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기상 이변 중 하나가 토네이도인데 이것은 아예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유령처럼 갑자기 나타나죠. 로렌츠의 말대로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토네이도를 일으킨다면 토네이도의 예측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비 효과는 과학의 기초를 이룬 생각을 뒤집는 이론입니다. 

 

 

“서구 과학의 기초를 이룬 생각은 , 여러분이 지구 상의 당구대에 놓여 있는 당구공의 운동을 계산하려 할 때 , 다른 은하계의 어떤 혹성에서 나뭇잎이 하나 떨어지는 것까지 고려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극히 미세한 영향은 무시될 수 있다. 사물이 행동하는 양식에는 수렴 현상이 존재하며 , 작은 힘이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카오스, p.27)

 

카오스 이론이 말하는 혼돈 속의 질서는 어떤 시스템에 에너지가 집중되면 무질서도가 계속 증가하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갑자기 일정한 패턴이 반복되면서 질서가 생기는 현상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물이 끓을 때 발생하는 대류 세포를 들 수 있습니다. 물을 끓이기 시작하면 물분자에 에너지가 모이면서 물분자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데요. 끓는점에 이르게 되면 대류 세포 convection cell이 생기면서 일정한 패턴을 만들면서 물분자들이 돌기 시작합니다. 이것도 되게 특이한 현상입니다. 과학자들이 발견한 원리 중 하나가 열역학 제2법칙입니다. 열역학 제2법칙은 물질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유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물이 담겨 있는 수조에 파란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확산이 되죠. 자유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영원히 물을 놔두고 관찰을 해도 흩어졌던 잉크가 다시 모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현상이 자연의 기본 법칙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신기하게도 어떤 시스템에 에너지가 과도하게 집중되면 무질서가 점점 커지다가 어느 순간에 질서로 보이는 패턴이 발생합니다. 어떻게 보면 열역학 제2법칙을 거스르는 현상이 국지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존 호트가 과학과 종교 상생의 길을 가다 제7장 "왜 자연에는 복잡성이 존재하는가?"에서 카오스 이론이 가지는 신학적 함축에 대해서 다섯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첫째, 과학이 과학을 흔들어 과학의 문을 열었습니다. 과학은 한 동안 굉장히 자신만만했습니다. 과학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통제하고 앞날을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과학이 좀 더 발전하고 계산 능력이 개선된다면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던 과학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카오스 이론이 과학자들이 전제로 삼고 있었던 원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죠. 그동안 진리라고 믿어 왔던 것들이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문을 닫아 놓고 자신들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카오스 이론이 그들의 자신감을 흔들어 무너뜨리고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 대화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죠. 그 대화 상대에 신학자들이 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문이 열렸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양자 물리학을 통해서 과학은 미시 세계에 고전 물리학이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고 그래서 그쪽에서는 문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거시 세계는 그렇지 않다고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카오스 현상을 통해 거시 세계에서도 문이 열렸죠. 

 

둘째, 무질서는 새로운 창조의 기회일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무질서가 질서가 되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우주 생성의 순간에 무질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물질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카오스 이론을 통해서 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 넓힐 수 있습니다. 물론 카오스 현상을 통해서 신을 카오스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혹은 무질서 속에서 질서가 나타나는 것을 신의 활동이라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무질서에서 새로운 질서가 발생하는 것은 그냥 물질세계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신의 특별한 활동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카오스의 신학적 함축은 질서는 좋은 것이고 혼돈은 나쁜 것이라는 우리의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보통 이런 관점에서 신을 혼돈에서 질서를 만드는 분으로 이해합니다. 신은 어둠 속에서 빛을, 혼돈 속에서 질서를 만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혼돈을 통해 새롭고 신비한 질서가 발생할 수 있다면, 신을 질서의 하나님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무질서의 하나님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신은 질서의 근원이면서 무질서의 근원일 수 있습니다. 혼돈이 신이 없는 상황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위해 신이 큰 에너지를 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카오스의 신학적 함축은 세상이 이런 식으로 움직이니까 신도 그럴 것이라고 물리 세계의 법칙을 신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카오스 이론은 세상도 이게 신기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된다는 자극이면서 동시에 암시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신은 물리 세계 이상의 존재일 테니까요. 

 

 

셋째, 지극히 작은 것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지극히 작은 선행, 지극히 작은 헌금, 지극히 작은 한숨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보통 우리는 이런 것을 비유적인 표현이고 동시에 작은 선행을 장려하는 의도로 과장된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작은 것은 작은 것일 뿐이고 큰 것이 큰 것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작은 것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해서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카오스 현상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주 전체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비중도 그렇습니다. 비율로 생각하면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기 곤란합니다. 인간은 우주의 먼지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카오스의 언저리에서 질서가 발생하는 것과 같이 인간이라는 작은 존재를 위해서 우주 전체가 그 에너지를 모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는 신학은 카오스 이론의 지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카오스 이론은 사고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영화 '콘택트'Contact에서 조디 포스터는 외계인을 열심히 찾는데 그 논리적 근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우주 안에 생명체가 인간뿐이라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라는 것이죠. 과연 그럴까요? 

 

 

넷째, 신은 부드럽게 설득하고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 존재이지 않을까요? 프로크루스테스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침대를 눕혀 놓고 그 사람이 침대보다 크면 도끼로 다리를 잘라서 죽이고 침대보다 작으면 잡아 늘여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것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하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앞날은 신의 섭리에 따라서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일까요? 사람은 말이나 행동과 같은 작은 사건에 의해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항로를 따라서 묵묵히 물살을 가르는 거대한 배처럼 역사는 신의 거대담론을 따라서 흘러가는 것일까요? 카오스는 이 세상이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도 그렇지 않을까요? 호트는 고전 물리학이 제시하는 비인격적 필연성과 맹목적 우연성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경이와 신뢰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카오스가 주는 교훈입니다. 세상이 혼돈으로 가득 차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불현듯 새로운 질서가 생기는 것이죠. 

 

다섯째, 진화의 방향이 미리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진화는 신학에서 큰 문제입니다. 진화에 신이 개입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과학의 방법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신의 개입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신이 개입했다고 믿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화는 형이상학의 원리로 발전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은 수없는 우연한 사건이 아무런 의도 없이 일어나고 일어난 사건들 중에 생존에 적합한 사건만이 살아남아 세상을 이루게 되었고 지금도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진화론에 따라서 어쩌다 보니 사람이 태어났다는 주장을 펼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카오스 현상을 기반으로 생각해 보면 물이 마치 100도에서 끓는 것처럼 인간의 발생은 미리 결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인간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에너지가 응축되어서 인간이 태어날 시점이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카오스는 신의 존재 유무를 알려주거나 신의 활동 영역을 제시해 주지 않습니다. 단지 세상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신기해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려 주죠. 그리고 앞날을 예측하려고 하는 우리의 시도는 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도 헛된 시도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카오스를 이해하는 신학의 올바른 자세는 저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신은 카오스보다 더 신비로운 존재이다. 

둘째,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이며 우리의 작은 행동이 우주의 앞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일단 이 정도입니다.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