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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_Pride가 있으면 편견도 생기기 마련

설왕은 2023. 2. 15. 09:00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윤지관, 전승희 옮김 (민음사, 2003년)

 

제인 오스틴(1775-1817)이 쓴 "오만과 편견"(1813년 작품)은 가장 유명한 영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영국 사람이 쓴 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다면 어떤 소설을 고를 것이냐고 묻는다면, 개인차가 있기는 하겠지만 가장 많은 사람이 고를 만한 소설이 바로 이 "오만과 편견"이다. 재벌이 평범한 아가씨와 결혼하는 흔해 빠진 이야기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가볍게 볼 소설은 아니다. 물론 줄거리는 그렇다. 상당한 재산가인 다아시가 중산층 계급인 베넷 가의 엘리자베스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가볍게 볼 소설이 아닌 이유는 "오만과 편견"은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또는 영화의 원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넘쳐나는 로코 드라마와 영화의 시작점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라고 한다면 이 작품의 영향력이 어땠는지 새삼 놀랄 수밖에 없다. 

 

 

제인 오스틴은 잉글랜드 남서부의 초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독신으로 살았다. 남녀 간의 심리 묘사에 뛰어난 <오만과 편견>을 지은 오스틴이 독신으로 살았다는 것을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는데 생각해 보면 결혼한 사람보다 오히려 결혼을 꿈꾸는 사람이 남녀 간의 심리 상태에 더 예민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결혼한 남녀 간에는 심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쟁 같은 현실을 버텨 내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 상태를 살펴볼 여유가 줄어든다. 하지만 이제 막 서로를 알아가고 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상대방에게 호기심을 갖는 단계라면 그 사람에 대한 심리 상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심리 상태도 열심히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19세기 초반에 나온 이 소설은 그 시대의 영국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세 시대를 지나서 근대가 시작되었고 더불어 산업 혁명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중세 시대의 신분 사회는 무너지기도 하고 그 구분이 희미해졌지만 자본의 차이는 진정한 계급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는 자본을 차지하면서 높은 계급으로 올라가는 것이 가능했지만 사회생활에 제한이 있었던 여자들에게는 그런 기회는 오직 하나였다.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 <오만과 편견>은 잉글랜드의 18세기 상황을 잘 담아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발달된 자본주의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사회에서 흔하게 발생할 수 있는 일을 재치 있게 그려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안정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가난한 사람이 사회 지도층이나 기득권 계층으로 올라가는 방법은 그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밖에 없으니까. 

 

<오만과 편견>은 첫 문장이 매우 유명하다. 한 문장만 인용하면 서운하니 그다음 문장까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런 남자가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의 모른다고 해도, 이 진리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9)

 

 

잘 읽어 보고 뜯어보아도 왜 유명한 문장이 되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을 읽으면 첫 번째 문장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감이 온다. 첫 번째 문장은 가장 중요한 게임의 법칙이다. 재산이 많은 총각은 아내가 필요하다는 게임의 법칙이 제공된다. 물론 재산이 없는 총각도 아내가 필요하겠지만 재산이 없는 총각이 인기가 있을 리는 만무하다. 재산이 많은 독신 남자가 이 소설의 무대에 떨어졌다. 그렇다면 이 남자를 발견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특별히 딸을 가진 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오스틴은 아주 재밌게 표현하고 있다. 딸을 가진 부모들은 재산깨나 있는 젊은이를 자신이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고 달려들게 된다.

 

자, 이제 게임이 시작되었다. 엄청난 보너스를 제공하는 아이템이 떨어졌고 그 아이템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아이 참 한심한 양반이네!" 하고 부인이 대꾸했다. "그 총각이 우리 애들 중 하나랑 결혼할 거라는 소리지요. 뭘."
"그럴 속셈으로 이리 온다는 거요?"
"속셈이라니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지만 뭐 우리 애들 누구하고 연애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이사 오는 즉시 방문하셔야 해요." (10)

 

재산가와 결혼하기 원하는 부모와는 달리 결혼을 해야 하는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자부심pride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 그렇다. 상대방이 단지 돈이 많다는 이유로 그 사람과 결혼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됨됨이가 어떠할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돈이라면 자신의 영혼이라도 팔 것처럼 달려드는 사람들 속에서 자란 부잣집 자제에게 고귀한 성격을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평범한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주변 사람에게 좋은 대우를 받고 자란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평범하게 자란 사람이 부잣집에서 자란 사람보다 더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편견을 가질 수 있다. 그런 편견을 가진 사람이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편견도 생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목의 번역이 아쉽다. 오만과 편견이라는 제목으로 유명해졌지만, 사실 이 제목은 소설을 읽지 않은 독자를 편견에 빠뜨리는 제목이다. 엘리자베스가 가진 것은 오만이라고 보기 어렵다. 엘리자베스가 재력가 다아시를 오만하게 바라보고 오만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만한 관계가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자기 자신과 가족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편견을 가지고 다아시를 대하고,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아무리 다아시가 부자라고 하더라도 자존감이 강한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무시할 것 같은 돈 많은 남자를 사랑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른 경우와는 달리, 그분이 오만한 게 나한테는 그렇게 거슬리지 않아." 하고 샬럿이 말했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으니까. 가문이며 재산, 모든 것을 다 갖춘, 그렇게 훌륭한 젊은이가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잖아. 이런 표현을 써도 좋다면, 그분은 오만할 권리가 있어."
"그건 맞는 말이야." 엘리자베스가 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그 사람의 오만을 쉽게 용서할 수 있을 거야." (31)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pride는 좋은 것이기도 하고 나쁜 것이기도 하다. 번역본에서는 pride라는 단어를 오만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자존심이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원문을 찾아보면 오만도 pride, 자존심도 pride이다. 오만할 권리가 있다는 말은 좀 이상한 말이다. pride라는 단어 자체를 잘 살펴봐야 하는데, pride는 단어의 기원을 보면 가치와 관련된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믿는 것은 자존심 또는 자부심이라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가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오만이다. 따라서 pride는 자부심, 자존심, 오만으로 번역될 수 있기는 하지만 "오만할 권리"보다는 '자부심을 가질 권리'가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다시 말하지만 다아시도 엘리자베스도 모두 자기 자신의 가치를 믿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편견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설은 자신의 자부심으로 생긴 편견을 극복하는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그래서 단순한 구성이 될 수 없는 소설이다. 나쁜 사람이 마음을 고쳐 먹고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둘 다 좋은 사람인데 서로에 대한 편견으로 냉랭하게 대하다가 그 편견이 허물어지면서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아주 바람직하다. 남녀 모두 자신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이어야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되었을 때 더 좋은 관계가 유지될 수 있지 않을까?

 

베넷 가족은 두 부부와 다섯 명의 딸들로 이루어진 딸부잣집이다. 딸들은 다들 성격이 확실하고 차이가 분명하다. 그중에서도 엘리자베스가 가장 총명하고 발랄한 아가씨이다. 그래서 엘리자베스가 제일 먼저 편견을 깨뜨릴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러 모로 엘리자베스라는 인물이 참 매력적인 이유는 누구보다도 pride가 있는 사람이지만 또한 편견을 깨뜨릴 줄도 아는 사람이라는 점. 결국 편견이 깨져야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닌가? 편견이 깨어지게 되는 계기는 대화이다. 

 

"다아시 씨에 대한 검토가 끝나신 것 같은데요." 빙리 양이 말했다. "제발 좀 결과를 가르쳐주세요."
"검토 결과 저는 다아시 씨에게는 아무런 결점도 없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다아시 씨 스스로도 감추지 않고 인정하고 계시고요."
"아닙니다." 다아시가 말했다. "그렇게 주장한 적은 없어요. 저도 물론 결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지적인 능력과 관계된 건 아니기를 바란다는 거죠. 제 성격에 대해서는 저도 감히 좋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너무 고집이 세니까요. 적어도 세상을 살아가기에 불편할 만큼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은 행동이나 결점, 저한테 잘못한 것 따위는 빨리 잊는 게 좋은데 그러지를 못하지요. 제 감정은 쉽게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아마도 성격이 꽁한 편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저한테 한번 잘못 보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장이니까."
"그거야말로 진짜 결점이네요!" 엘리자베스가 외쳤다. "한번 틀어지면 항상 꽁하다는 건 확실히 성격적 결함이죠. 하지만 결점을 아주 잘 고르셨는데요. 그런 성격을 비웃는 방법은 정말 모르겠어요. 안심을 하셔도 되겠어요."
"제 견해로는 누구의 성격에든 특정한 단점을 향한 지향이랄까. 최선의 교육으로도 극복될 수 없는 어떤 타고난 결점 같은 게 있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만."
"그러니까 당신의 결점은 모든 사람을 싫어하는 경향이죠."
"그리고 당신의 결점은,"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의 말을 일부러 곡해해서 듣는 것이고요." (84-85)

 

 

이 정도로 티키타카 대화가 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서로에 대한 날 선 감정과 말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 정도로 대화가 되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리고 아주 감정이 상하지 않을 정도로 대화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면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보시길. 말로 칼싸움을 하는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는 싸우면서 정이 들고 서로를 더 알아가게 된다.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대박 아이템이었지만 이내 신 포도로 간주되어 사람들이 꺼려하던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에 의해 새롭게 발견된다. 엘리자베스의 편견이 깨지면서 다아시가 스스로 두르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재수 없음'이라는 외투가 벗겨진다. 그를 재수 없게 여기던 베넷 부인과 딸의 행복을 걱정하던 베넷 씨,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언니 제인을 비롯한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다아시는 재발견된다. 편견은 이해와 사랑 앞에서 무너져 내린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대화를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특별히 다아시와 엘리자베스 사이의 대화가 그렇다. 서로 칼싸움을 하는 것과 같이 날이 서 있는 말들을 주고받으면서도 서로를 찌르지는 않는다. 이백 년 전 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지만 지금 시대 우리나라에서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주고받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대화이다. 어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머와 격식까지 겸비하고 있다. 죽일 듯이 칼을 겨누다가도 틈을 보여주면서 상대방의 공격을 허락해 주고 상대방이 자신의 약점을 파고들면 여지없이 막아낸다. 아슬아슬한 말들 속에서 스릴과 재미를 느끼며 상대방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되는 것 같다. 인물의 관계도를 대충 머릿속에 넣어 놓으면 아무 데나 펼쳐서 읽어도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명작이 괜히 명작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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