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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허먼 멜빌 "모비딕"_죽이려고 아니면 죽으려고?

설왕은 2023. 2. 10. 09:00

모비딕이라는 제목이 내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백경이라는 제목은 많이 들어본 것 같다. '백경'이라는 제목은 전혀 읽고 싶지 않은 제목이다. 차라리 '흰고래'라고 했다면 훨씬 더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 같다. 꽤나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백경'이라는 제목으로 허먼 멜빌(1819-1891)의 소설이 알려졌던 것 같다. 나는 멜빌의 모비딕을 이제야 읽고 싶어졌는데 이유는 알베르 카뮈 때문이었다. 카뮈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소설이 모비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이 오래된 소설, 고래를 잡는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카뮈는 실력 있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그의 취향은 독특할 수도 있다. 그래서 모비딕을 읽고 싶기도 했지만 머뭇거렸다. 또 한 번의 계기가 있었다. 바로 스타벅이라는 소설 속 인물. 우연히 성격 테스트를 통해 내가 소설 속 어떤 캐릭터와 비슷한지 알아보았는데 결과로 '스타벅'이 나왔다. 나는 스타벅이 누군지 몰랐다. 스타백은 '모비딕'에 나온 일등항해사이다. 지금도 거리 곳곳에 있는 스타벅스는 그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스타벅스 커피란, 스타벅의 커피라는 뜻이다. 스타벅스의 창업자가 모비딕의 팬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모비딕'을 샀다. 엄청 두꺼웠다. 

 

 

1851년에 세상에 나온 모비딕은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멜빌이 죽을 때까지도 모비딕의 판매부수는 매우 저조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모비딕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이 많이 읽기 시작했다. 멜빌은 모비딕을 쓰고 의기양양했다고 하는데 그럴 만도 할 책이다. 멜빌은 모비딕을 쓰고 나서 주홍 글씨를 쓴 호손에게 "사악한 책"을 썼다고 자랑했다는데,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으니 자존심이 꽤 상했을 것 같다. 

 

* 줄거리

모비딕은 이슈마엘이라는 도시 출신 젊은이의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서술된다. 세상의 젖은 구석을 보고자 선원이 된 이슈마엘은 포경선 피쿼드 호에 합류한다. 피쿼드 호의 선장 에이해브는 전설의 흰 고래 모비딕을 쫓고 있다. 에이해브는 모비딕과 맞서다가 다리를 물려서 한쪽 다리를 잃고 의족을 차게 되었다. 모비딕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오르는 에이해브는 선원들에게 자신의 복수에 동참하도록 부추긴다. 피쿼드 호의 선원들은 에이해브를 교주처럼 모시면서 모비딕을 죽이고자 전의를 불태운다. 이 와중에 정신줄을 잡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 이름도 유명한 스타벅이다. 피쿼드 호는 모비딕을 발견하고 에이해브는 모비딕과 결전을 벌인다. 그러나 결국 에이해브는 모비딕과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 이것은 소설인가, 논문인가, 시인가, 희곡인가?

이 소설은 발췌록으로 시작한다. 고래에 대한 묘사나 기록 또는 문학 작품 중에서 특기할 만한 문장을 발췌하면서 소설은 출발한다. 선장 에이해브나 다른 등장인물들의 말이 연극의 대사나 시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도 많다. 고래의 특성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한 장도 여러 개가 있다. 그래서 모비딕은 장르 구분이 모호한 소설이다. 20세기에 이 소설이 나왔다면 장르를 파괴한 실험적인 포스트모던 소설로 추앙을 받았을 것 같은데, 이 작품이 나올 1851년에는 굉장히 위험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많이 안 팔렸는지도...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독자들도 보면 알겠지만, 부지런한 두더지나 굼벵이처럼 가련한 이 사서 보조의 조수는 바티칸 도서관 같은 큰 도서관들과 이 세상의 노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스러운 책이거나 속된 책이거나 간에 어떤 책에서든 그가 찾을 수 있는 고래에 관한 것이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수집했음을 알 수 있다. (13)

 

 

고래에 관한 멋있는 구절이 꽤 많이 있다. 

 

그 거대한 리바이어던은 소용돌이를 일으켜, 바다를 끓어오르는 냄비처럼 만들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시편 주해"

살아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거대한 것,
심연에 곶처럼 누워서 잠자고, 헤엄치고,
흡사 움직이는 육지처럼 보인다.
아가미로 바다를 삼키고, 숨을 내쉴 때는 바다를 내뿜는다.
- 존 밀턴의 "실낙원"

 

* 서른한 살의 멜빌이 이걸 썼다고?

가끔은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글을 썼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컴퓨터도 없는데 어떻게 글을 쓰고 수정하고 정리할 수 있었을까? 지금은 컴퓨터로 작업을 해도 글을 많이 쓰는 것이 어려워서 짧게 한두 줄 쓰는 글들로 인터넷이 도배가 되는데, 옛날 사람들의 글은 무척 길기도 하다. 모비딕의 두께도 장난이 아니다. 뭐 이렇게까지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싶다. 자료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테고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텐데 말이다. 마치 머릿속에서 영감이 쉴 새 없이 나와서 미친 듯이 글을 쓰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기도 한다. 글을 보면 진짜 그런 것 같다. 서른한 살의 멜빌이 모비딕을 썼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렵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참나리를 헤치며 수십 마일이나 걸어갈 때, 뭔가 한 가지 매력이 빠진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물이다. 그곳에는 한 방울의 물도 없는 것이다. 나이아가라가 모래 폭포라면, 어느 누가 그것을 보려고 수천 마일이나 먼 길을 떠나겠는가? 테네시 주의 어느 가난한 시인이 어쩌다 두 줌의 은화를 얻었을 때, 그토록 절실히 필요했던 외투를 살 것인가, 아니면 로커웨이 해변으로 도보여행을 하는 데 쓸 것인가를 놓고 한참 고민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33)

 

무지는 두려움의 아버지다. 나는 그 낯선 사내에 대해 완전히 당황하고 어리둥절했기 때문에, 솔직히 고백하면 한밤중에 그렇게 내 방에 침입한 녀석이 악마라도 되는 것처럼 그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55)

 

 

* 고래가 의미하는 것

사람들은 커다란 흰 고래 모비딕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 의견을 내세웠다. 무심한 우주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신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단순하게 괴물과 같은 거대한 생명체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선장 에이해브는 모비딕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쫓지만 사실 모비딕은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저 사고로 인해 에이해브의 다리를 물었을 뿐이고 에이해브가 모비딕을 잡으려고 할 때도 그에 대한 감정을 가지고 피쿼드 호를 침몰시킨 것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무심한 우주인 것 같기도 하다. 무심한 우주인 것 같으나 사람에게 심각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무심한 우주는 사람을 해할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니라서 그래서 에이해브는 더 강렬하게 모비딕에게 도전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을까? 거대한 존재를 정복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존재에게 자신을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왠지 에이해브의 적개심은 신에 대한 도전이었을까? 신에게 자기를 알아달라고 떼를 썼던 것일까?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 한복판에서 너를 찔러 죽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뱉어주마. 관도, 관대도 모두 같은 웅덩이에 가라앉혀라! 어떤 관도, 어떤 관대도 내 것일 수는 없으니까. 빌어먹을 고래여. 나는 너한테 묶여서도 여전히 너를 추적하면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겠다. 그래서 나는 창을 포기한다!" (681-682)

 

카뮈가 멜빌의 모비딕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모비딕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 멜빌에게 물어봐도 똑같이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실존주의인데... 거대한 흰 고래는 그냥 거기에 존재할 뿐이다. 인간을 해할 수도 있고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인간에게 외경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모비딕이 신이냐고?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무심한 우주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냥 모비딕은 모비딕이다. 모비딕에 상징성을 부여해서 그를 정복하려고 했던 에이해브가 문제였다. 결국 이 이야기의 관찰자였던 이슈마엘만 살아남는다.

 

사나운 물수리도 주둥이에 칼집을 씌운 듯 조용히 날고 있었다. 둘째 날, 배 한 척이 다가와서 마침내 나를 건져주었다. 그 배는 구불구불 항해하고 있던 레이첼 호였다. 잃어버린 아이들을 찾아 헤매다가 엉뚱한 고아를 발견한 것이다. (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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