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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스티븐 제이 굴드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_우연의 힘

설왕은 2023. 1. 24. 09:00

유명한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의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은 일반인이 읽기에는 좀 버거운 책이다. 진화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과 설명을 다루어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아주 전문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버제스 혈암에 관한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데 진화론 학자나 생물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보편적인 것일지도 모르나 일반인에게는 들어도 들어도 생소한 이름이다. 제목으로 봐서는 아주 재밌을 것 같은데 내용이 꽤나 복잡하고 전문적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정말 유명한 생물학자이다. 책 앞날개에 나온 소개를 인용하자면 굴드는 "찰스 다윈 이후 가장 잘 알려진 생물학자"이다. 우리나라에서보다 미국에서 훨씬 유명한 생물학자이며 매스컴도 많이 탄 사람이기 때문에 대중에게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지질학과 동물학 교수로 재직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진화생물학자는 리처드 도킨스인데 나는 도킨스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도킨스의 대표 저서인 "이기적인 유전자"는 과학자가 쓴 책이라고 보기에는 편견이 너무 심해서 그는 과학자라기보다는 대중 저술가 정도로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굴드의 책은 도킨스의 책과는 다르다. 좀 어렵고 학문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그가 쓴 글은 편견을 줄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려고 노력했다. 

 

이 책은 캄브리아 시기에 있었던 다세포 생물의 폭발적인 진화를 다룬 책이다. 버제스 혈암에서 발견된 다세포 생물에 대해서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일반인이 뭐 이렇게까지 알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설명했다. 아마도 연구한 것을 스스로 정리하기 위해서 쓴 책이 아닐까 싶다. 캄브리아 시기의 많은 생물이 화석으로 발견된 버제스 혈암이 이 책이 주인공으로 보일 정도로 버제스 혈암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브리티시컴럼비아주의 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요호 국립공원 내의 캐나다 로키 산맥의 고지대에서 발견된 버제스 혈암의 무척주동물군이야말로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화석동물군이다. 현생 다세포 동물이 화석 기록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은 지금부터 5억 7천만 년 전부터였다. 그 출현은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그 숫자를 늘려온 것이 아니라 폭발적인 출현이었다. '캄브리아기 대폭발'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동물 집단들이 불과 수백만 년 동안에 출현한 것이다. 수백만 년은 지질학적 관점에서 이야기하자면 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50)

 

 

그렇지만 굴드가 주장하는 명제는 아주 단순하다. 생물은 우연하게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주장에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을 아주 많이 덧붙인 것뿐이다. 다윈도 "종의 기원"에서 종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화한다는 단순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매우 길게 서술했던 것과 비슷하다. 즉 이 말인즉슨, 자기주장에 근거가 차고 넘친다는 말이다. 

 

굴드가 쓴 책 중에 이렇게 그림이 많은 책은 내가 알기로는 없다. 그래서 쉬울 것 같은데 그런 것은 전혀 아니다.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예술적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지금까지 이만큼 그림에 많이 의존한 책을 출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장류는 시각에 가장 많이 의존하는 동물이고, 특히 해부학 서적은 언어만큼이나 그림에 많은 것을 의존한다. (19)

 

 

 

 

보통 학문의 영역에서는 그림보다는 글을 좀 더 우위에 놓는다. 그림은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쉽게 보여주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고 소위 '배운 사람'은 글자만 보고 충분히 상상하고 머릿속으로 그려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영장류는 시각에 많이 의존하는 생물이라는 것은 기억할 필요가 있는 말이다. 하긴 그렇지 않다면 눈이 발달한 이유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인간 역시 보는 것으로 가장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것 같다. 

 

굴드는 우연성에 의한 진화를 주장하면서 진화가 선형적인 연쇄적 진보라는 주장은 심각한 오해라고 말한다. 그런데 진화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널리 퍼져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에서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까지 진화는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점차 발달된 것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그냥 단순한 예로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의 뇌보다도 큰 뇌를 가지고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생명은 많은 가지를 분기시키며, 멸종이라는 냉혹한 죽음의 신에 의해 끊임없이 가지치기를 당하는 나무일 뿐 예측 가능한 진보의 사다리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설령 말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몰라도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생명관을 분명하게 부정할 때조차도 진보의 사다리라는 무의식적인 믿음 때문에 곧잘 잘못을 범하곤 한다. (45-46)

 

굴드는 캄브리아 시기에 일어난 다양한 다세포 동물의 출현에 주목한다. 보통 우리에게 익숙한 진화 발생의 그림은 다양성이 증가하는 역원뿔형의 그림이다. 그러나 굴드는 이와 같은 그림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역원뿔형 그림은 진화가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생물의 진화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편견을 주기 때문이다. 굴드는 버제스 혈암의 화석을 통해서 수정된 모형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 멋진 신세계가 갖는 중심적인 함축을 파악할 수 없다. 만약 호모 사피엔스가 무성한 나무의 많은 가지 중 하나의 작은 가지에서 발생했다면, 어떤 의미에서든 생물은 인류를 위해 존재하는 것도 인류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인류는 결과적으로 발생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일종의 우주적인 우연 또는 진화라는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값싼 방울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58)

 

굴드는 계속 어쩌다 보니 인류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굴드의 주장이기도 하지만 다윈의 진화론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다윈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진화론이 가지고 있는 철학을 극단으로 몰고 가면 굴드의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어떤 면에서 굴드는 다윈의 주장을 과장해서 아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인류는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값싼 방울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굴드는 주장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선택을 촉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질학이 밝혀낸 가장 경악스러운 사실에 직면했을 때, 우리에게는 어떤 선택 가능성이 남아 있는가? 실제로 그 선택지는 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양자택일의 가능성밖에 없는 셈이다. 하나는 이 책에서 내가 채택하는 태도이다. 즉, 그 함축을 받아들여 도덕률의 원천을 포함해서 인생의 의미를 과학 이외의 더 적절한 영역에서 탐색하는 법을 배우고, 상실감에 젖어 금욕적인 삶을 살거나, 낙천적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의욕적으로 도전하면서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곡된 관점으로 생물 진화의 역사를 파악함으로써 자연 속에서 우주적 안락함을 추구하는 노력을 계속할 수도 있다. (58)

 

솔직히  굴드의 주장이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어째서 진화론을 믿지 않으면 금욕적인 삶을 살게 되고 진화론을 믿으면 낙천적인 삶을 살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 굴드의 주관적인 관점일 수도 있다. 그가 진화론을 믿기 때문에 낙천적으로 도전하면서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이 완전히 우연히 발생했다는 사실이 낙천, 즐거움, 도전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우연히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이 나에게 어떤 즐거움을 줄까? 

 

해부학적 다양성의 폭이 최대에 달한 것은 다세포 동물이 최초의 다양화를 이룬 직후의 일이었다. 그 이후의 생물 진화의 역사는 확대의 과정이 아니라 제거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어쩌면 현재의 지구가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종들을 보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해부학적 관점에서 보면, 몇 안 되는 기본적인 설계의 반복에 불과하다. (60-61)

 

버제스 동물군이 우리를 가장 매료시키는 점은 그것이 과거와 현대의 생물 사이의 놀라운 차이를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 있는--폭이 도시의 한 블록에도 미치지 않는--화석 발굴장의 버제스 혈암은 종수는 훨씬 적지만 오늘날 전 세계에서 나타나는 해부학적 설계의 범주를 훨씬 능가하는 큰 이질성을 나타내고 있다. (91)

 

 

캄브리아 시기에 다세포 동물의 다양성이 지금보다 훨씬 더 큰 폭이었다고 지적한다. 생물의 종이나 개체수 자체는 지금이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질성의 측면에서 보면 그때가 지금보다 훨씬 그 정도가 심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이다. 캄브리아 시기에 이상한 생물이 많이 탄생했다는 말이고 그중에 특정한 종만 살아남아서 지금의 생태계를 이루었다는 말인데 마치 6억 년 전에 엄청난 실험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어떤 종이 지구에서 살아남기에 가장 적합한지 다양한 생물이 나타나서 실험이 이루어진 후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나는 휘팅턴이 1975년 발표한 오파비니아의 복원도가 인류의 지식 획득 역사에서 이룰 수 있었던 가장 위대한 성과 중 하나일 것이라고 믿는다. 생명의 역사에 대한 관점을 그 뿌리에서부터 바꾸어놓은 경험적 연구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티라노사우루스의 위용에 경외심을 느끼고, 아르케에옵테릭스(시조새)의 깃털에 놀란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인류 화석이 발견될 때마다 큰 소동이 벌어진다. 그러나 몸길이가 겨우 5센티미터에 불과한 오파비니아라는 캄브리아기의 기묘한 무척추동물만큼 진화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 생물은 없었다. (205-206)

 

버제스 혈암에서 발견한 무척추동물의 화석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굴드는 말한다. 나는 생물학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그의 말이 그렇게 막 와닿지는 않는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티라노사우루스나 시조새에게 영감을 받는데 그는 5센티미터에 불과한 오파비니아를 보면서 진화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나 보다. 

 

브릭스는 다시 한번 버제스 절지동물에 대한 슬로건이 '독특한 분화'이지 '원시적인 단순성'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했다. (267)

 

잘 들여다보고 생각해 보면 진화생물학자가 말하는 이와 같은 발언은 일종의 메시지에 가깝다. 6억 년 전에 있었던 다세포 생물이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독특한 분화를 통해 그 당시 환경에 가장 적합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물이 점점 더 고등 동물로 발전해 간다는 인간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릴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인간이 더 발전된 생물의 형태로 진화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반대로 갈 수도 있다. 더 단순하게 변할 수도 있다. 인간이 6억 년을 더 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보다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생존의 근거가 적응적 우월성이라는 주장은 순환 논법이라는 고전적인 오류를 저지를 위험이 다분하다. 생존은 설명되어야 하는 현상이고, 그 자체가 살아남은 것이 죽은 것보다 '잘 적응했다'는 증명이 아니다. 이 문제는 이미 한 세기 이상에 걸쳐 다윈주의 이론의 앞마당에서 과도하게 혹사당해 왔다. 심지어는 '동어반본적 논변'이라는 명칭까지 얻을 정도였다. 비판자들은 우리의 모토인 '적자생존'이 무의미한 동어 반복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적응도가 생존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에 실제로 자연선택의 정의는 '생존하는 것의 생존'이라는 공허한 말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356-357)

 

적자생존의 원칙을 가진 진화론이 이런 논리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보고 처음 알았다. 적자생존의 원칙이 말이 되는 것 같은데 결국 살아남은 것이 적자였다는 논리와도 같다는 말이다. 적자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한 것을 적자로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적자생존의 원칙이 정말 맞는 말이라면, 예측이 가능해야 한다. 어떤 자연환경 속에서 적자로 판단되는 종이 살아남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경쟁하게 될 때 어떻게 적자가 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적자생존의 원리는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다윈이 이야기하는 '더 잘 적응한'이라는 말은 '변화하는 국소적 환경에 좀 더 적합한'이라는 의미일 뿐, 일반적인 해부학적 의미에서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생물이 진보의 사다리를 오르기보다 변화하는 환경을 따라잡을 때 살아남을 수 있다면, 필연적으로 우연성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462)

 

진화는 고등한 생물과 하등한 생물을 구분하지 않는다. 고등한 생물과 하등한 생물은 없고, 환경에 잘 적응한 생물과 그렇지 않은 생물만 있을 뿐이다. 아무리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연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죽음을 맞이할 뿐이고, 자연환경에 적응한다면 결국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화생물학자들이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가장 원시적인 세포라고 할지라도 정말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 세포의 DNA 구조와 인간의 DNA 구조의 차이도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의 중심적인 주장은 버제스 혈암에서 획득된 중요한 통찰에 의해 우연성의 의미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464)

 

굴드는 정말 계속 반복해서 자신의 주장을 들이민다. 결국 우연이 모든 것을 이룩했다고 주장한다. 버제스 혈암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연의 힘이다. 굴드는 피카이아에 대한 에필로그로 이 책을 마무리한다. 

 

따라서 만약 여러분이 왜 인간이 존재하는가라는 해묵은 물음을 제기한다면, 과학이 다룰 수 있는 문제의 측면에서 볼 때 그 답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것은 피카이아가 버제스 격감을 이겨내고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답은 자연의 법칙을 하나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측 가능한 진화적 경로에 대한 어떤 선언도 구현하지 않으며, 해부학이나 생태학의 일반 법칙에 근거한 확률 계산도 다루지 않는다. 피카이아의 생존은 '바로 그 역사'의 우연성이었다. (501)

 

피카이아

 

인간이 왜 존재하냐고? 그것은 바로 피카이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카이아는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을까? 답은 정해져 있다. 우연히... 굴드는 말한다. 우연의 힘을 믿으라.

 

끝까지 자신의 논지를 놓치지 않는 그의 집중력이 참 대단하다. 이건 우연이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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