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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안토니오 다마지오 "느낌의 진화"_느낌이 모든 것을 이끌었다

설왕은 2023. 1. 18. 19:20

제목이 아주 흥미롭다. "느낌의 진화"라... 느낌이 있는 제목이다. 책에서는 저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를 심리학자로 소개하고 있지만 다양한 학문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강의를 하고 있는 교수인 것 같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의 교수 겸 뇌과학연구소 소장이기도 하면서 신경과 전문의이고 신경과학자이기도 하다. 책을 읽어 보니, 심리학자라는 칭호보다는 신경과학자라는 칭호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저자 소개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다마지오가 꽤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디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마구 서술한 것이 아니라 학자의 글이기 때문에 이 책은 꽤 믿을 수 있는 책이다. 

 


원제는 The Strange Order of Things: Life, Feeling, and the Making of Cultures이다. "느낌의 진화"라는 우리말 제목과는 사뭇 다른 제목이다. "진화의 이상한 순서: 생명, 느낌, 그리고 문화 만들기"라는 제목으로 했다면 잘 안 팔렸을 것 같다. "느낌의 진화"라는 우리말 제목은 흥미롭게 잘 지은 것 같다. 느낌이 어떻게 진화되었을지 그리고 언제부터 느낌이라는 것을 가지게 된 것인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장에 돈을 주고 살 만한 책이다.

다마지오가 심리학자라고 생각하고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글을 읽으면서 이 책은 진화생물학자가 쓴 책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느낌이 중요하니까 느낌을 무시하면 안 된다.) 그 정도로 이 책은 철저하게 진화론의 관점에서 쓴 책이다. 진화론의 관점이라기보다는 오래된 생명 역사의 관점에서 쓴 책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한 설명일 것 같다. 심리학적 설명보다는 진화 역사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난해한 주제로 책을 쓰지 않는다. 책을 써 봐야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반론할 거리도 너무 많다. 나도 사실 원제에 나온 진화의 순서에 동의하지 않는다. 생명이 먼저 나타났고, 그다음에 느낌, 그다음에 문화가 생성되었다는 것은 느낌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진다. 생명에 대한 정의도 쉽지 않고 느낌에 대한 정의는 어쩌면 더 모호할 것 같다. 나도 생명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서 공부를 좀 했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 결국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생명에 대한 어떤 정의를 내리느냐에 따라서 어떤 것은 생명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생명이 되지 않기도 한다. 다마지오도 이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마음, 감정, 의식의 시작은? 사회적 행동이나 문화는 언제 처음 나타났을까? 그와 같은 답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생물학으로 관심을 돌려서 고전이 된 저작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썼을 때 그가 책 제목을 생명의 기원이라고 짓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할 만한다. 생명의 세계를 들여다본 그는 생명의 기원에 관해 논하는 것이 헛고생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17)

 


느낌도 마찬가지이다. 느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생명 다음에 느낌이라고 할 수도 있고 느낌 다음에 생명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다마지오는 느낌을 생명 뒤에 두었고 특별히 지능을 가진 존재 다음에 두었다. 이와 같은 순서는 다마지오가 느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마지오가 이해하는 느낌이란 종합적인 판단 능력과 같은 것이다. (책의 뒷부분에서는 다마지오의 생각이 또 달라지는 것 같다.) 느낌은 인간의 이성을 포함할 뿐 아니라 신경계에 있는 모든 것 심지어 인간 안에 살고 있는 박테리아가 주는 미세한 신호까지 종합해서 내리는 판단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다마지오의 관점에서는 적어도 어느 정도 지능을 가지고 있는 생물에게만 느낌이나 감정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사실 나는 이 부분에 동의하기 어려운데, 일단 의식consciousness이라는 것도 인간이나 인간과 비슷한 유인원만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느낌도 이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그러나 그의 관점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다마지오가 느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느낌이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느낌이 문화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감정은 세 가지 방식으로 문화 형성에 기여한다.
1. 지적 창조의 동기 유발자 역할
a. 항상성의 결핍을 감지하고 진단하기
b. 창조적 노력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바람직한 상태를 식별하기
2. 문화적 도구와 실행의 성공과 실패 여부를 살피는 감시자 역할
3. 긴 시간에 걸친 문화 형성 과정에서 요구되는 조정을 위한 협상자 역할 (25-26)


문명을 만드는 것은 이성일까, 아니면 느낌일까? 아마도 다마지오는 느낌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왠지 문명을 만들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인간은 결국 문화를 통해 문명을 만드는 것이다. 이 설명은 매우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생존만을 추구하는 존재라면 문화를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성으로는 설명이 잘 안 된다. 그러나 느낌으로 설명하면 오히려 납득이 된다.

 

타인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해 주라는 도덕적 황금률이 있다. 타인에게 험한 대우를 받거나 그런 대우를 받는 타인을 보고 느낀 공감을 통해 만들어진 황금률이다. 이 법칙이 작동하려면 논리적인 이성이 있어야 하지만, 감정이 없었다면 법칙이 생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28)


느낌을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다마지오가 주목한 것은 항상성이다. 항상성에 도움이 되면 좋은 느낌, 그렇지 않다면 나쁜 느낌이 발생한다고 보면 된다. 생물은 당연히 좋은 느낌 쪽으로 움직인다.

 

항상성은 단순히 생존에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개체 수준으로나 종 수준으로나 생명이 후대로 이어지고 번성하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39-40)

 

항상성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느낌은 인간의 문화를 탄생시킨 반응의 촉매로 작용했다. (41)

 

다마지오가 느낌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 단어가 바로 항상성이다. 항상성이란 진화생물학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인 생존과 비슷한 단어이다. 물론 다마지오는 상당히 다른 단어라고 주장할 테지만. 생존이라는 단어보다 항상성이라는 단어가 훨씬 더 범위가 넓은 단어이기는 하다. 항상성을 기준으로 느낌을 설명하는 것이 너무 단순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는 하지만 꽤나 일리가 있는 설명이기는 하다. 반론할 거리가 많기도 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은데 그중에 하나가 생명의 탄생에 관련된 것이다. 생명이라고 하면 또 모호하니까 자기 복제가 가능한 세포라고 하자. 세포의 발생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DNA 정보를 가지고 있는 세포는 저절로 발생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반대하는 과학자들도 많다고 다마지오는 지적한다. (56) 어떻게 생명이 발생했느냐는 엄청난 질문에 크게 두 가지 종류의 대답이 있는데 하나는 '복제자 먼저'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대사 먼저' 이론이 있다. 다마지오는 후자 쪽에 동의하고 있고 나도 후자 쪽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성이 인간의 행동을 총괄할 수 없는 이유는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세포와 박테리아에서 세포는 대충 조정할 수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세포는 조직과 기관을 이루기 때문에 몸을 움직일 때 협력한다. 하지만 박테리아는 완전히 조절 불가능이다. 그런데 인간의 몸 안에 있는 세포의 수보다 박테리아의 수가 훨씬 많다는 사실. 

 

우리 인간의 몸 안에는 세포의 수보다 더 많은 박테리아가 있다. 그 차이는 놀랍게도 10배가 넘는다. 인간의 내장에만 대략 100조 개의 박테리아가 살고 있는데, 우리 몸의 세포 수는 모든 종류의 세포들을 다 합쳐서 약 10조 개다. "식물과 동물은 미생물 세계에 놓인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던 미생물학자 마거릿 맥폴나이의 말은 일리가 있다. (78)

 

신경계는 몇 가지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신경계의 독특한 성질을 규정하는 신경세포, 즉 뉴런이다. 뉴런은 흥분할 수 있다. (81)

 

느낌은 신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뉴런은 흥분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고 다마지오는 지적하는데, 느낌의 특징과 비슷하다. 느낌으로 인해서 사람은 특정한 행동을 하거나 이성적으로 상상하기 힘든 목표를 세우고 움직이기도 한다. 흥분이 되니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인데, 뉴런의 특징과 비슷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신경계가 풍부한 기능을 장착하고 놀라운 수준의 능력을 갖추게 되면서 마지막으로 느낌이 나타났다. 이것은 내부 상태를 지도화하고 이미지를 만들어 낸 성취에 대해 주어진 커다란 상과 같은 것이었다. 지도와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동물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상은 의식이었다. (90)

 

다마지오는 신경계가 발달된 이후에 느낌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다른 곳에서는 이와 다르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다마지오가 이해하는 느낌이란 고도로 발달된 항상성 유지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느낌에 대해서 정의하기 나름이겠지만, 나는 불만이 있다. 느낌은 이성이 없어도 가질 수 있는 능력인데 굳이 이성적 지능을 포함하고 고도로 발달된 신경 체계까지 포함할 필요가 있을까?

뉴런

 

바깥 세계의 모든 이미지는 거의 병렬적으로 처리되고 동시에 이 이미지들이 뇌의 다른 영역에 작용함으로써 ‘감정’ 반응이 생성된다. 그것이 다시 말해서 우리의 뇌가 다양한 외부 감각의 원천에서 들어오는 신호를 통합하고 지도화하는 데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고 동시에 내부 상태에서 비롯된 신호의 통합과 지도화를 수행한다는 뜻이다. 이 내부 상태의 통합과 지도화의 결과물이 바로 느낌이다.(121-122)

 

느낌은 단순히 신경계에 국한된 작용이 아니다. 신경계를 제외한 몸의 나머지 부분들이 중요하게 관여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다른 중요한 항상성 관련 시스템, 즉 내분비계나 면역계의 활동도 포함된다. 느낌은 신체와 신경계 모두가 동시에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 내는 현상이다. (170)

 

다마지오에 따르면 느낌이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만들어 내는 하나의 결과이다.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종합하여 만들어 내는 편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요소 중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고 조정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으므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느낌을 따르는 것이 항상성을 유지하거나 생존하는 데 더 유리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 느낌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믿을 수 있을지 그것은 의문이다. 

 

최근에는 장 신경계를 ‘제2의 뇌’라고 부른다. 이처럼 영예로운 지위에 오른 것은 장 신경계가 차지하는 커다란 부피와 이것이 수행하는 자율적 기능 때문이다. 진화의 현시점에서 장 신경계가 구조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상위 계급인 뇌 바로 다음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는 장 신경계가 중추신경계보다 앞서 발달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 있다.(182)

 

장 신경계가 '제2의 뇌'라니... 놀라운 주장이다. 생각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는데 장 신경계가 두 번째 뇌로 불릴 만하다는 주장은 의외이다. 장 신경계는 복잡한 기능을 자율적으로 수행하고 있으므로 제2의 뇌로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장 신경계가 인간이 가지는 느낌에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항상성 상태와 항상성 결핍 상태를 바로잡을 수 있는 문화적 도구의 생성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앞에서 제안했듯이, 그 연결 고리는 느낌, 즉 항상성 상태의 정신적 표현이다. 느낌은 현재의 가장 중요한 항상성 상태를 정신적으로 나타내고 격변 상태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창의적인 지능을 동원하는 동기로 작용한다. 또한 창의적 지능은 문화적 행위나 도구를 실제로 가능하게 하는 연쇄반응에서 연결 고리 역할을 한다.(223)

 

다마지오는 문화가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라고 주장한다. 종교를 문화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으나 다마지오의 관점에서는 종교도 항상성 유지를 위해서 발달된 것으로 본다.

 

종교적 믿음과 관습 측면에서 느낌과 항상성의 동기부여가 가장 두드러진 종교는 불교이다. 불교의 창시자이자, 통찰력 있고 박식하고 철학적으로 친절한 왕자 고타나는 고통이 인간 속성을 갉아먹는다고 생각해 고통의 가장 흔한 원인을 줄임으로써 고통을 없애려 했다. 그 원인으로 그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쾌락에 탐닉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런 괘락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 없는 상태를 지목했다. 고타마는 존재의 경험 자체를 얻기 위해 자아를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구원이란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원을 추구하는 항상성이 불안정한 상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상태를 말한다. (235)

 

 

불교에서 추구하는 해탈을 불안정한 항상성으로부터 탈출이라고 해석한 것이 흥미롭다. 종교를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재밌다. 하지만 어설픈 반론을 펼쳐 보자면, 항상성의 관점에서 보면 몸을 가지는 것이 가지지 않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몸보다 더 불안정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해탈은 인간이 어떤 생물로든 다시 몸을 갖지 않는 것인데 그렇다면 항상성이 더 불안정해질 수도 있지 않나?

 

기본적인 항상성 측면에서 불멸은 완성이다. 자연이 꿈꾸지 못했던 영원한 생명이라는 꿈이 실현되는 것이다. 항상성의 초기 상태는 진행되고 있는 생명을 촉진하고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미래로 그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었다. 미래의 생명을 보장하는 장치로 예정에 없이 나타난 것 중 하나가 유전적 장치였다. (263)


다마지오의 관점에서는 의학의 발달도 항상성 유지라는 목표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다.  인간에게 삶이 주어졌는데 그 삶의 항상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곧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해 보면 의학은 정말 그 방향으로 발전되어 온 것이 맞는 것 같다. 이렇게 다마지오는 항상성으로 의학의 발전도 설명해 낸다. 

 

첫째, 새롭고 강력한 과학적 발견들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이 지나면 가차 없이 버려질 섣부른 확신과 해석들에 자칫하면 속아 넘어가기 쉽다. 나는 느낌, 의식, 문화적 마음의 근원에 대한 현재의 내 생각을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이런 내 생각도 오래지 않아 수정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두 번째, 살아 있는 유기체들과, 그 유기체들에게 나타난 진화의 특징과 작용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으며, 그 유기체들이 살고 있는 우주는 약 130억 년 전에 생겨났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우주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 만족스러운 과학적 설명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이 아직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난 노력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불확실한지 그리고 미지의 것을 만났을 때 얼마나 겸손한 자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준엄한 목소리로 알려 준다. (320-321)

 

약간 허무한 결론이기는 하나 올바른 결론으로 보인다. 느낌이 뭔지 설명하기도 어렵고 언제 발생했는지 알기도 어렵다. 느낌을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기원 역시도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의식도 주관성의 측면에서 보면 과연 어떤 것이 의식이 있고 어떤 것이 의식이 없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하물며 느낌에 대해서는 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사실 "느낌의 진화"라는 제목은 사기에 가깝다. 사실 느낌이 언제 어떻게 발생했는지 아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느낌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의 느낌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신경과학적인 설명을 들을 수는 있다. 그리고 다마지오가 이해하는 느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고 느낌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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