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

[책]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_나도 나무를 심고 싶다

설왕은 2022. 11. 28. 11:12

도서관에서 볼 만한 책을 찾다가 좋은 제목을 가진 작은 책이 눈에 띄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를 심는 일은 거의 절대적으로 좋은 일이다. 어떤 행동이 주변 상황과 상관없이 선한 행동이 되기는 매우 어렵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선한 일이지만 사람들이 조용히 공부하는 곳에서 노래를 부른다면 그 노래가 아무리 아름다운 노래라고 하더라도 선한 행동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나무를 심는 일은 거의 늘 언제나 옳은 일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를 찾을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대환경위기를 겪고 있는 시기에 나무를 심는 일은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래서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작가는 "장 지오노"라는 사람인데 모르는 사람이었다. 책을 펼쳐 보니 글자가 많지 않고 중간에 그림에 들어가 있어서 금세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새 하기 싫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지쳤는데 이렇게 글자도 별로 없고 그림도 있고 제목도 좋은 책을 읽으면 쉼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책을 빌렸다. 

 

이 책은 좋게 말하면 착한 소설이고 나쁘게 말하면 심심한 소설이다. 줄거리가 아주 단순하고 반전이 없다. 착하게 살면 복받는다는 식의 소설이다. 여기에 나온 주인공이 복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그래도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가고 좋은 결말을 보여 준다. 그래서 나는 아주 좋았다. 요새 나오는 글과 드라마, 영화는 너무 복잡할 때가 많다. 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쁜 사람이고,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착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해피 엔딩으로 가고 있다가 갑자기 비극으로 끝나거나 비극인 줄 알고 슬퍼하고 있는데 갑자기 좋은 결말이 될 때도 있다. 반전이 많고 스릴러가 많다. 맑고 밝은 이야기가 별로 없다. 자극적이고 엽기적인 이야기가 판을 친다. 그래야 사람들의 시선을 끄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삶이라는 것은 복잡한 것이니까 여러 가지 맛이 함께 들어가 있는 음식처럼 이야기도 그런 식일 수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맛이 함께 들어가서 맛의 향연을 폭발시키는 음식을 계속 먹으면 그것도 지겹고 지치기 마련이다. 그냥 맨밥만 먹어도 열심히 씹고 맛을 음미하면 심심하지만 쌀이 가진 고유의 맛을 느낄 수 있어서 좋은데 이 책이 딱 그런 책이다. 심심하지만 착한 이야기를 읽고 싶은 분에게 추천한다. 그리고 이 착한 이야기를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음미해 보고 싶은 분에게 추천한다. 

 

 

심심한 이야기여서 스포일러라는 것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아래 내용부터는 책의 내용을 담고 있으니 책을 직접 보고 싶으신 분은 아래 내용은 나중에 읽으시길...

 


 

이 책은 정말 나무를 심은 사람의 이야기이다. 실제 있었던 일을 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이야기는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서 소설의 화자인 '나'는 나무를 심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때는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나무를 심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낫겠다.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나는 해발 1,200~1,300미터의 산악지대에 있는 헐벗고 단조로운 황무지를 향해 긴 산책을 떠났다. 그곳엔 야생 라벤더 외에는 아무것도 자라나 있지 않았다. 폭이 가장 넓은 곳을 가로질러 사흘을 걷고 나니 더없이 황폐한 지역이 나왔다. 나는 뼈대만 남은 버려진 마을 옆에 텐트를 쳤다. 마실 물이 전날부터 떨어져서 물을 찾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폐허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낡은 말벌집처럼 집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니 옛날엔 이곳에 샘이나 우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과연 샘이 있긴 했지만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비바람에 사그라져 지붕이 없어져버린 여섯 채의 집들, 종탑이 무너져버린 작은 교회가 마치 사람들이 사는 마을 속의 집이나 교회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그곳엔 살아 있는 것들이 전혀 없었다. (16-17)

 

 

 

그래서 소설 속 '나'는 나무를 심은 사람 집에 머물게 된다. 황폐한 지역이라 머물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나무를 심은 사람 집에 머물렀다. 그는 아주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었다. 작가는 나무를 심은 사람인 엘제아르 부피에가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인물의 성격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만, 작가는 부피에를 묵묵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으로 표현한다. 그의 나이는 55세였고, 특이한 행동을 했는데 도토리를 모아서 그중에 좋은 도토리를 100개 선별해서 황무지에 심는 것이었다. 부피에는 날마다 그런 식으로 나무를 심는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사람들은 궁금할 것이다. 그는 왜 나무를 심고 있을까? 

 

지난날 그는 평야지대에 농장을 하나 가지고 자신의 꿈을 가꾸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고 뒤이어 아내마저 잃었다. 그 뒤 그는 고독 속으로 물러나 양들과 개와 더불어 한가롭게 살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그는 나무가 없기 때문에 이곳의 땅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달리 해야 할 중요한 일도 없었으므로 이런 상태를 바꾸어 보기로 결심했다고 덧붙였다. (33-34)

 

뭐 대단한 이유나 엄청난 사명감도 없다. 그리고 그가 나무를 심고 있기 때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에 대한 큰 희망도 없다. 그냥 딱히 할 일이 없고 땅이 죽어가고 있고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나무가 필요했기 때문에 나무를 심는 것이다. 말없이. 그것도 55세에 말이다. 그가 심은 나무들이 자라서 숲을 이루는 것을 보려면 적어도 10년 이상은 기다려야 할 텐데 55세라면 나무가 자라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는 나이이다. 1차 세계 대전에 참여한 소설 속 '나'는 전쟁이 끝나고 다시 그 황무지를 찾았다. 5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엘제아르 부피에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전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너무나도 많이 본 소설 속 '나'는 그렇게 예상한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고 계속 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로 인해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1910년에 심은 떡갈나무들은 그때 10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무들은 나보다, 엘제아르 부피에보다 더 높이 자라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말문이 막혔다. 엘제아르 부피에도 말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침묵 속에서 숲 속을 거닐며 하루를 보냈다. 숲은 세 구역으로 되어 있었는데, 가장 넓은 곳은 폭이 11킬로미터나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아무런 기술적인 도구도 지니지 못한 오직 한 사람의 손과 영혼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니, 인간이란 파괴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하느님처럼 유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그 황무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숲이 조성된 것이라 생각하고 신기하게 생각한다. 기자들도 찾아오고 국회의원도 찾아오고 공무원들도 찾아오게 된다. 자연스럽게 자라난 숲을 보호해야 한다고 여기고 그런 조치들을 취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거대한 숲이 단 한 사람에 의해서 생길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인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부피에는 나무 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말없이 그저 묵묵히 날마다 나무를 심는다. 그가 심은 나무가 모두 다 잘 자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백 그루의 나무를 심으니 그중에 절반만 제대로 성장한다고 하더라도 한 해에도 수만 그루의 나무가 새롭게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계산해 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하루하루 묵묵히 나무를 심는 일은 보통 사람이라면 며칠도 하기 힘든 일이다. 결국 그 황무지는 엘제아르 부피에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바뀐다. 소설 속 주인공 '나'는 1945년에 다시 그 황무지를 찾는다. 그때 부피에의 나이는 87세였다. 

 

그런데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공기까지도 달라져 있었다. 옛날에 나를 맞아주었던 메마르고 거친 바람 대신에 향긋한 냄새를 실은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 같은 것이 저 높은 언덕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숲 속에서 부는 바람소리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못 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진짜 물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만들어진 샘에 물이 넘쳐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그 샘 곁에 이미 네 살의 나이를 먹었음직한 보리수가 심어져 있는 것이었다. 벌써 잎이 무성하게 자란 이 나무는 분명히 부활의 한 상징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62)

 

 

1913년에 황무지였던 곳이 그래서 아무런 희망이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나고 남아 있는 사람들조차 서로를 미워하며 살던 그곳은 숲으로 인해서 완전히 바뀌었다. 그리고 그 숲을 만든 사람은 엘제아르 부피에 한 사람이었다. 황무지였던 곳에 나무가 자라고 새들이 모이고 물이 흐르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1947년 바농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짧은 소설이었고 심심한 이야기였는데 여운이 꽤 오랫동안 남았다. 나도 모르게 엘제아르 부피에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 그는 30여 년 동안 나무를 심었고 결국 사람이 살 수 없는 절망의 땅을 희망의 장소로 변모시켰다. 어떤 대가를 바란 것도 아니고 돈을 받는 일도 아니었고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려고 한 일도 아니었다. 이유는 단순했는데, 나무가 있어야 땅이 살고 땅이 살아야 사람도 살 수 있으니까 그 일을 한 것이다. 아주 단순한 진리이다. 그의 뚝심으로 인해서 땅도 살고 사람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마음속으로 엘제아르 부피에를 칭찬했다.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삶이었다. 그리고 나도 나무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짜 나무를 심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나도 나무를 심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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