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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넘어서

조회 수 977 추천 수 1 2023.02.04 13:4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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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와 사랑 안에서 풀리기 시작하는 역사의 수수께끼"(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넘어서)

 

이 글은 조직신학자 김균진 교수님(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명예교수)의 저서 <기독교 신학 5: 종말론> 중에서 일부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기독교 종말론이 역사의 목적으로 제시하는 하나님나라를 공산주의 사회로 대체한다. 역사의 목적은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에 있다.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이 역사의 종말, 곧 목적이다. “기독교의 인간적 기초는 공산주의 사회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역사의 해결되지 않은 수수께끼”, 곧 하나님나라는 하나님과 종교 없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실현될 것으로 그는 기대한다. 그에게 공산주의 사회는 역사의 수수께끼가 해결된 사회.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역사의 목적, 곧 공산주의 사회는 사실상 성서가 이야기하는 하나님나라다. 유대인 태생으로 개신교회 신자가 된 마르크스는 신구약성서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의 뿌리는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나라에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하나님 없이, 기독교 종교 없이 하나님나라를 이루고자 한다. 이것은 하나님 신앙을 통해 역사의 목적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도전은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기독교 종말론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는 하나님 없이 역사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가? 하나님 없이 이상적인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런데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로 인류가 경험한 공산주의 사회는 마르크스가 기대하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회였다. 그것은 모든 소유를 함께 나누고,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과 존엄성이 보장되는 사회가 아니라 무서운 독재사회였다.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라 공산당원과 인민 간의 철저한 계급사회였고, 공산당원의 특권사회였다. 빈부 차이가 없고 굶주림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수많은 인민이 굶주림과 영양 결핍과 질병으로 죽음을 당하는데, 당수와 당원들은 비만증을 염려하는 사회, 인간의 기본 권리인 거주 이전의 자유마저 박탈된 사회였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장 높은 존재가 아니라 위대하신 영도자 동무의 위대한 목적을 위해 얼마든지 희생당할 수 있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사회임을 우리는 지금도 눈으로 보고 있다.

 

마르크스의 꿈이 실패로 끝난 근본 원인은 인간의 본성을 깊이 성찰하지 못한 점에 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는 자기의 이웃을 희생시킬 수 있고, 소유에 소유를 쌓고자 하는 이기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은 이기적 본성을 버릴 수 없다. 성서에 의하면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이 썩은 마음, 곧 죄의 본성은 무산 계급자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마르크스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체제 역시 역사의 목적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 눈으로 보고 있다. 끝없는 경제성장과 더 많은 돈을 최고의 가치로 꼽는 자본주의 사회는 목적이 없는 사회, 곧 맹목적인 사회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진보주의도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 수 없다.

 

문제의 뿌리는 인간 자신에게 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도 인간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먼저 인간의 악한 본성이 변화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사회제도와 질서를 세운다 해도,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역사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우리 인간의 본성의 변화를 요구한다.“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태복음 548)는 말씀은 너희들의 악한 본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본성을 취하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이기적이고 악한 본성이 하나님의 신적 사랑의 본성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자기를 희생하는 무한한 사랑에 있다. “역사의 목적”, 곧 역사의 수수께끼는 끝까지 자기의 것을 챙기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으로 변화될 때 풀릴 수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회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하나님 없이(!) 법적 제도를 통해 실천하고자 한다. 그런데 법적 제도는 강제성을 띤다. 소유의 나눔이 강제성을 띤 법적 제도를 통해 집행될 때 사랑과 자유가 사라진다. 사람들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게 된다. 억지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법을 통해 강요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느껴진다. 역사의 목적은 강요와 억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다. 법적 구속력을 가진 제도와 질서는 인간의 본성을 억제할 수 있지만, 악한 본성 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물론 인간의 악한 본성을 제어하는 법적 제도와 질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역사의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는 인간의 악한 본성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으로 철저히 변화될 때 저절로 풀릴 것이다. 그것은 자유로운 사랑을 통해 가능하다. 이 길 외에 어떤 다른 길이 있을까?

 

20세기에 등장한 혁명의 신학,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불의한 사회 제도와 구조를 변혁함으로써 보다 더 정의로운 세계를 이루고자 하였다. 물론 이것은 필요한 일이다. 불의한 제도와 사회 구조는 변화되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세계는 인간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이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본성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인간의 신격화를 뜻하지 않는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들은 부유층에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꾀하는 조세정책을 통해 보다 나은 세계를 이루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부작용이 따른다. 부유층에게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면 자본과 기업을 외국으로 옮기고 새로운 투자를 꾀한다. 이리하여 국가경제가 위축되고, 실업자와 신용불량자가 양산된다. 이것은 좌파 정부가 통치하는 모든 나라의 공통된 현상이다. 이 같은 현상의 원인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있다. 모든 문제의 뿌리는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사람의 마음에 있다(예레미야서 179).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역사 목적은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인간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빌립보서 25)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의 생명 유지를 기본 욕구로 가진 모든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완전한 신적 사랑의 본성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부자 청년처럼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의 마지막 권고를 거부하지 않겠는가? 모든 인류의 본성이 변화되어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유토피아적 공상이 아닌가?

 

물론 이것은 까마득한 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길밖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 교육도 필요하고 인간의 양심과 도덕성의 개발도 필요하다. 민주주의 제도와 엄격한 법질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교육을 통한 양심과 도덕성의 개발, 사회 제도의 개혁은 인간 본성 속에 깊이 숨어 있는 사탄의 세력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민주화가 이루어져도 인간의 이기적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루터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죄 용서를 받고 세례를 통해 새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인간의 자기중심적 본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한계상황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통해 새로운 영새로운 마음을 가질 때, 우리의 자기중심적 본성은 힘을 잃어버린다. “죄의 몸을 죽여야 한다.”는 로마서 66절의 말씀에서 죄의 몸은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을 가리킨다. 이 본성을 죽인다는 그리스어 카타르케오’(καταργέω)파괴하다”, “무력하게 하다”, “제거하다”, “멸하다를 뜻한다. 히브리서 214절은 이 개념을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자기희생을 통해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을 꺾으셨다. 이것을 믿고 성령을 받을 때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은 힘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남아 있지만,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은 성화의 과정을 통해 차츰 하나님의 본성을 닮게 된다. 어둡게 보이던 사람의 얼굴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한다. 돌처럼 굳은 마음이 부드럽게 변화된다. 더 많이 움켜쥐려고 했던 손을 풀게 된다. “하나님처럼 너희도 완전하여라.”는 말씀을 위시한 산상설교의 계명들은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본성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에스겔서 3626).

 

타락한 인간의 악한 본성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본성으로 변화될 수 있는 첫걸음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앞에서 자기의 죄를 통회, 자복하고 회개하는 데 있다.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이를 자복하지 않는 한 역사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는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을 얻을 수 있다. “너희가 지은 죄를 너희 자신에게서 떨쳐내 버리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을 얻으라.”(에스겔서 1831) 회개를 통해 악한 인간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 “새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 톨스토이는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회개는 완전히 새로운 마음의 선물에 이르는 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면서 회개하라고 요구한다. 회개하는 사람에게서 하늘 문(시편 7823; 말라기 310) 열린다. 곧 역사의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죄의 세력은 그리스도인들을 계속 자신의 노예로 삼고자 유혹한다. 그리스도인들 속에 숨어 있는 악한 본성을 활성화시키고자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저항해야 한다. 죄의 노예가 되지 않아야 한다.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해야 한다(로마서 612).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말을 찾을 수 없고,흠잡을 데가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요한계시록 145). 각 신자들의 인격과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로마서 812; 갈라디아서 419; 산상설교의 팔복 참조).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일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 있다. 모든 계명의 중심은 무아적(無我的) 사랑에 있다. 무아적 사랑은 무아적 용서와 소유의 나눔으로 구체화된다. 각 사람이 각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가 되는 공동체, 계급 없는 사회”, “형제자매들의 공동체로 나타난다.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역사의 목적이 여기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하나로 통일되는 현실이 앞당겨 온다. 이것을 우리는 세계 곳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소규모 공유 공동체에서 볼 수 있다(예를 들어 메노나이트 공동체, 한국 포천의 사랑방공동체).

 

성서는 사유재산을 부인하지 않는다. 자기 재산을 다 내어놓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서는 소유를 끝없이 비축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경고하고(광야의 메추라기 이야기 참조; 출애굽기 1613~21),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소유의 자발적 나눔을 요청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 곧 형제의 고통을 보고도 자기의 소유를 나누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서 213~26).

 

일반적으로 돈이 많으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돈은 인간을 자기의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마성을 가진다. 돈에 대한 만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얻으면 얻을수록 더 많이 갖고 싶어 한다. 그래서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자유인이 되는 길은 더 많은 돈을 쌓는 데 있지 않다. 자유인이 되는 길은 의롭고 선한 일을 위해 돈을 쓰는 데 있다. 곧 사랑을 행하는 데 있다. 성령이 계신 곳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참 자유가 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린도후서 317).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발적 나눔과 용서와 위로와 상부상조 속에서 역사의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한다.

 

역사의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궁극적 열쇠는 유산 계급에 대한 무산 계급의 증오와 공산주의 혁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하나님은 사랑이다.”를 교리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완전한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속에서 역사의 수수께끼가 풀릴 수 있다. 연약한 생명들에게 손길을 내미는 사랑 안에 역사의 목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마르크스의 위대한 꿈이 해결될 수 있는 길은 십자가에 달린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 사랑 안에 생명이 있다(요한일서 314). 생명이 살 수 있는 길은 이기적 욕망과 경쟁과 투쟁이 아니라 사랑에 있다. 갓 태어난 어린 생명도 부모의 깊은 사랑을 통해 살아남는다.

 

출처: 김균진, <기독교 신학 5: 종말론>, 새물결플러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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