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위에 은혜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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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위에 은혜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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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18: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한다.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면 누구의 말씀을 전해야 하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야 옳다. 세례요한의 증거를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세례요한의 증거가 참 증거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신실한 종은 인류의 근원자이신 선재적 그리스도를 말하게 된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먼저 계시다고 하는 것은 나이적으로 많다는 말도 아니고, 나이는 젊지만 아는 것이 무엇이든 나보다 앞선다는 말도 아니고, 인간 내가 생겨나기 전에 그 분은 그리스도로서 먼저 선재적으로 계셨다는 거다.

 

마지막 시대에는 세상 넓은 길, 사망 길,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자가 많다고 했는데, 만일 A 목사님 앞에서 설교를 듣던 교인들이 진리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은 후에 우리교회 목사님은 설교가 질적으로 엉터리다라고 말을 한다면 A목사님의 얼굴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A 목사님의 얼굴이 뭐가 될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이게 아니면 참 종이 아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은 성도들이 그동안 자신들이 목사님들을 통해 받았던 말씀과 비교를 해서 우리 목사님이 주님이 보내신 참 종이구나. 아니구나하는 게 확실히 드러난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만다면 주의 종이라고 하던 사람이 참 종이었는지, 거짓 종이었는지를 명확하게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당시에 로마라고 하는 세상도 알아주고, 교권도 알아주고, 교세도 알아주던 세계적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서 죽인 후에 주후 70년에 주님의 심판으로 자신들이 쓸어버림을 당할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을 걸이런 생각을 했을까? ‘세상에서 부자로 살려면 예수 믿고 충성봉사 잘 하고 하늘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면 복을 넘치도록 부어주신다라는 가르침을 받았다면 이 사람은 참 생명의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을 알지 못하고 거짓 인도자, 거짓 목사에게 속은 거다. 인간들이 어떻게 보건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강도라고 하신다.

 

목회자라도 마음 속에서 돈 계산, 세상 계산, 업적 계산, 사역 계산이 들어 있으면 주님은 이 목사를 둘러 엎어버린다. 성전에서 장사꾼들의 상을 둘러엎은 게 주님은 이런 분이라는 걸 말해주는 거다. 성경에는 인간들과 모든 만물이 사는 이치가 다 들어 있다. 창세 이후 마지막 그 날까지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아무리 사람이 바껴도 모든 인간은 질적으로 선악과 따먹은 차원이다. 이게 공통성이다. 이걸 깔고 사람을 봐야 한다.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그의 충만이라는 게 세례요한이 충만이라는 말이냐, 예수님이 충만이라는 말이냐?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신령한 천국의 것으로 그 충만성이 철철 넘치는 무한이다. 지구상의 모든 물질을 사람이 다 헤아릴 수 없다는 면에서 무한인데,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만물을 만드셨기 때문에 당신의 말 한 마디에 세상의 모든 것이 동원이 된다. 세상만물이 당신의 말을 듣는다. 하물며 신령세계의 것이겠느냐?

 

무한한 신령세계는 시작과 끝이 없다. 영원부터 영원까지다. 그러면 누구를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하는 거냐?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지식성이, 신적인 도덕성이, 신적인 능력성이 무한이고, 영적 기능과 지능이 무한이고, 이 무한이 철철 넘친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는 다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다. 계속 솟아난다. 바로 이것을 우리들에게 주시려고 당신의 무한하심을 말씀하는 거다. 그러니 금은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져라. 이 안에는 모든 게 들어 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말씀을 듣고 깨달아지면 은혜고, 많은 이치를 들을수록 더 깨달아지고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니 또 은혜 위에 은혜가 되고, 땅으로부터 받지 못하는 신령한 것을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다. 말씀을 들을 적마다 이치에 이치, 이치에 이치가 핵폭탄처럼 확산이 되고, 이 이치와 저 이치가 맞물려서 또 깨달음이 되는 게 은혜 위에 은혜다. 말씀을 깨달아서 이것을 자타의 구원을 위해 응용 활용 이용 사용이 얼마나 좋으냐? 우리교회 교인들은 말씀을 깨달아 나가면서 이게 되어 나와야 한다. ‘예수 믿어 부자 되라하는 건 이용 활용할 데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의 것으로 충만이다. 그리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믿는 자기가 하나님의 본질의 것을 가졌다면 이것이 자꾸 확대가 되어나간다. 죽을 때까지 써먹어도 다함이 없다. 그리고 이걸 가지고 있으면 말씀을 들을 때 자꾸 더 깨달아지고 쓰면 쓸수록 하나님은 자꾸 부어주신다. 이런 사람은 받은 것으로 영원한 구제를 할 수 있다. 이게 예수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먹으면 금방 없어지고 배가 고플 것을 자꾸 달라고 하고, 불타질 것을 자꾸 달라고 한다면 이건 안 믿는 사람들보다 심보가 안 좋은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은 달라고 하지 않고 자기 노력 것 해서 가지려고 하니까 정직한 면이 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노력도 안 하면서 달라고만 하고 있으니 누가 더 정직한 마음이냐?

 

예수를 믿는 현재의 자기는 과연 예수님을 바로 만났느냐? 교훈적으로 진리본질의 교훈을 바로 만났느냐? 누가 교회에 가자고 해서 나왔던, 소문을 듣고 스스로 나왔던 교회에 나왔다면 하나님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어느 교회를 가든지 그냥 다니면 안 된다. 예수 믿으면서 지금까지 그만큼 속아왔으면 되었지 계속 거짓에 속고 이용을 당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뚜렷한데 왜 하나님의 이 목적에 맞게 살려고 하지 않느냐?

 

일생을 헛 살면 안 된다. 몰라서 헛 산 자기, 몰라서 이용 된 자기의 원수를 갚을 줄 알아야 한다. 자기가 어느 면에 억울한 건지? 신앙 면의 억울성을 하나님 앞에서 갚지 못하면 안 된다. 그런데 말세의 성도들은 억울함을 풀 줄 모른다. 일반적으로 인인관계에서 사화하는 건 있지만 영적인 면의 억울함을 풀 줄 모른다.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 자기의 억울함을 풀 줄 알아야 한다. 무슨 말이냐? 그동안 자기에게 하나님의 것이 없어서 억울함을 받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것을 잔뜩 받는다면 이게 억울함을 푸는 거다. 이렇게 억울함이 풀리는 것을 표현하면 원수를 갚은 거다. 이 원수를 갚는 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억울함을 풀려고 하면 자기에게 재앙이 돌아온다.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서 당신의 백성들을 가르치라고 율법을 주셨다. 이 율법은 애굽을 탈출해서 광야로 나와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이 창조의 목적대로 영적 실력을 닦아나갈 수 있는 기본적인 교과서다. 믿는 사람이라면 이 지침서대로 마음도 정신도 행동도 고쳐야 한다.

 

율법은 몽학선생이라. 성문계시가 있어야 읽고 생각을 할 수 있다. 성문계시가 없다면 무엇을 가지고 생각을 하겠느냐? 그리고 몽학선생은 지식적으로 신지식으로 인도를 하고, 즉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신적 도적성으로 예수님께 인도를 하고, 능력적으로도 신적 능력적으로 예수님께 인도를 한다. 한 마디로 율법의 역할은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를 하고 마침이 된다.

 

그래서 몽학선생을 따라가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데,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율법의 전문가들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왜 예수를 못 만났을까? 말씀을 좇아 정확히 따라가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어 있고, 예수를 믿으면서 생각과 마음과 소원과 목적이 바로만 들어간다면 성경을 한 번 읽고 두 번 읽을 때마다 인격과 성품이, 그리고 소원 목적적으로, 창조의 목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왜 예수님을 못 만났을까? 역사적으로 보면 이들이 세례요한의 교훈을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교회에 다니며 진리말씀을 받고 적중성으로만 들어가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적중성이 아닌 다른 길로 인도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다.

 

주님께서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라고 하셨는데, 여기의 사자란 세례요한을 의미한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만날 길을 닦는 역할을 했듯이 오늘날 목사들도 이름은 세례요한이 아니라도 성도들을 예수님과 만나게 하고 밀착시키는 일을 한다면 세례요한의 역할을 하는 거다.

 

세례요한의 역할에 대해 3장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했다. 교회는 교인이 많고 적고 간에 모든 성도가 그 분과 밀착이 되어서 속성적으로 질적으로 그 덩어리가 자꾸 커져야 한다. 이렇게 될수록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이 실현되어 나간다. 그런데 주님은 못 만나고 자꾸 주님을 소개하는 쪽으로만 커지면 언제 예수를 만나느냐? 교회에서는 성도를 바로 가르쳐서 인격적 성품적으로 주님의 사람으로 커지도록 해야 되겠는데 이게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어라. 그 사람이 진짜다라고 하고만 있으면 언제 주님을 만나느냐? 이건 비정상이다. 질적으로 보면 오늘날 이런 교회가 많다.

 

세례요한의 교훈을 듣고 세례요한이 주님께서 보내신 사자임을 믿고 회개의 세례를 받아들이면 세상 쪽으로 가던 신앙이 주님을 만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게 회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들은 이방 로마황제를 우리의 왕이라고 했고, 로마황제가 유대나라에 보낸 총독 빌라도를 모셨고, 또한 이들을 등에 업은 분봉 왕 헤롯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들 밑에 들어가서 시녀노릇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

 

우리도 말씀을 받을 때 설교자의 말만 듣지 말고 누구의 지도로 그 말씀이 내려오는 건지를 봐야 한다. 이걸 못 보면 속는다. ‘예수 믿는 교회이니 예수님의 지도겠지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많이 속아오지 않았느냐?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모세로 통해 율법을 주신 것은 당신의 백성들을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은혜와 진리의 참 사람으로 만들어 주려 하심이다. 사람이 율법을 깨달으면 율법의 사람이 되고, 더 깊이 들어가면 성품적 인격적으로 은혜와 진리의 사람으로 속성적으로 살상화 된다. 예를 들면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면 이 사람은 주기도문의 내용으로 실상화 된 거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죽음이 없고, 영원히 존귀 영광자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은혜와 진리의 사람이 안 된다. 모세에게 미리 율법을 주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여 우리를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율법을 주심은 기본구원을 위해 주심이냐, 이룰구원을 위해 주심이냐? 이룰구원이다.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창세 이후로 사람이 마치 이웃사람을 만나듯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낮아져서 인간차원으로 내려오셔서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 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뒤를 보았다는 말씀도 있는데,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루고 지나가신 흔적을 보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없지만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냈다고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려니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심을 말하는 거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나타내는 일을 누가 하겠느냐? 인류부흥사가? 성경 원어학자가?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가? 누가 하나님을 100% 정확하게 나타내겠느냐?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100% 나타낼 수 없다. 그러면 50%만 나타낼 자는 있느냐? 아니, 10%라도 나타낼 자가 있느냐?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1%라도 나타낼 자가 없다. 즉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아예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전혀 나타날 수 없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본질적으로 100% 나타내실 분은 바로 하나님 당신이라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당신이 독생의 방편으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을 나타내신 거다.

 

그러면 왜 독생의 방편으로 오신 거냐? 독생의 방편이 아닌 두 사람으로 왔다면 어떻게 되느냐? 이건 안 된다. 반드시 독생이라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을 하나님의 성품을 입히려면 하나님이라야 하고, 이 하나님은 한 분뿐이기 때문에 독생의 방편밖에 없는 거다. 그러니까 독생자란 육신적으로 아들 하나밖에 없다는 개념보다 하나님을 나타내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라는 점에서의 독생자다.

 

그렇다면 영적인 면으로 하나님의 본질의 것을 누가 가지고 오겠느냐? 하나님을 100% 나타내려면 누가 와야 하겠느냐? 사람을 구원하려면 사람과 접촉을 해야 하니 하나님이 사람으로 와야 했고, 죄가 없어야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으니 유전죄가 없이 오시려고 부정모혈의 결합이 아닌 성령으로 오셔야 했고, 성도들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100% 나타내셔야 하니 하나님의 의중을 가지고 오셨다. 쉽게 알아들으라고 압축을 해서 말을 한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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