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홈 > 커뮤니티 > 햇볕같은이야기
햇볕같은이야기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기독정보닷컴

51-4: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첫 번째 표적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거듭남, 변화된 삶의 기쁜 맛을 알게 하신 거고, 두 번째 표적은 아이에게 생명을 주어서 살렸으니 이제는 성장이 있고, 건설이 있고, 확장이 있고, 행복이 있듯이 영인에게 생명을 주어서 하나님의 온전과, 영능의 실력과, 천국의 상속과, 천국의 누림을 주신다는 것을 알려주신 거다.

 

예수님께서 이 일 후에 다가오는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데, 예루살렘에 가셔서 불쌍하고 온전치 못하고 처절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게 된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제자들도 함께 갔는데, 이걸 통해 우리가 깨달을 것은 지금 이 땅에 성육신 주님이 계시지는 않지만 영적으로는 어느 장소나 어느 시대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의 역사가 있는 곳은 주님이 계신 곳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신앙사상을 따르는 성도가 있다면 이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거다. 지금 자기가 주님의 제자라면 생명운동을 해야 하겠는데, 자기가 있는 곳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느냐? 세상정신으로 살고 있는지, 사단 마귀 떼에게 정신이 지배를 받고 있는 건지?

 

유월절은 구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학대를 받으며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불러서 애굽에서 탈출을 시킨 날이요, 애굽에서 해방이 된 날이다. 이 날에 양이 잡혀 죽었고, 양은 비유적으로 예수님을 상징하니까 유월절이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우리를 죄에서 탈출시키고 영을 살리신 것을 말하는 거다.

 

2-4: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죄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기쁜 날이 다가오는데도 건강한 몸으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많았다. 지금도 이런 영적인 면의 병자들이 많이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이란 양이 드나드는 문인데, 이 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었다. ‘베데스다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름은 깨달음의 힌트를 준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인데 떡집이라는 뜻이다. 떡집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할 때는 그 이름에서 풍기는 냄새가 있는 거다. ‘베데스다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니 이름의 뜻이 신앙이라고 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냄새를 풍긴다.

 

베데스다 못은 깊은 못이 아니라 땅에서 물이 솟는 간헐천이다. 간헐천은 비가 많이 오면 흐르다가 고이기도 하고, 땅에서 물이 솟아서 고이기도 한다. 못의 바닥에서 물이 솟으면 고여 있는 물이 움직이게 되는데, 당시의 종교성이 많은 사람들이 이걸 보고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하는 거라고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천사가 와서 물이 동한다고 하는 게 예수님이 말씀한 거냐? 아니다.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져 오는 건데 성경 기록자가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성경에 그대로 넣은 거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을 할 때 그 때 당시로 예수님이 이미 이 땅에 오셨고, 물이 동한다고 하는 곳에까지 와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그 못의 물을 동하게 하시겠느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그 물을 동하게 했기 때문에 이 물에 먼저 빠진 병자가 낫는 걸까?

 

이것에 대해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그 물을 동하게 했고, 그래서 이 물에 먼저 빠진 병자가 낫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복음처럼, 진리처럼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러면 먼저 물 속에 들어가서 병이 나은 사람이 자기가 병이 나은 것이 예수님으로 통해 나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겠느냐?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을 할 거다.

 

못의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는 병자가 나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 내 생각으로는 아마 유황 온천이나, 게르마늄 온천이나, 알칼리 온천이나, 탄산 온천이나, 식염 온천이나, 마그네슘 온천 등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지금도 이런 온천에 들어가서 병이 나은 사람도 있으니까. 이걸 신앙으로 말을 한다면 하나님의 일반은총으로 병이 낫는 거다. 병원에서 병을 낫게 하는 것도 일반은총에 속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진리와 생명의 구원의 천국복음이 아니다.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행각이란 벽이 없이 기둥을 세우고 지붕만 덮어서 지은 집이라서 사방에서 들락날락 할 수 있다. 이 행각이 연못 옆에 있으니 이곳에 앉아서 쉬기 좋고 놀기가 좋다. 그런데 문제는 다섯 행각 안에 많은 병자들이 기대거나 누워 있다는 거다.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다섯 행각에 있는 사람들이 문자적으로는 병자들이라고 하지만 몸이 건강한데도 자기 할 일도 안 하며 이런 곳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 영적으로 보면 이런 사람도 병이 든 것이니 이런 사람들까지 포함이 된 거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병자도 있고, 하나님을 믿는 병자도 있고, 몸은 건강하지만 영적으로 병자도 있다.

 

우리는 주님의 온전을 기준하여 영의 눈으로 봐야 만이 정신적 사상적 성격적 성질적 병이 보인다. 다른 사람에게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성격이나 성질이 있을 수도 있는데, 이게 다 병이니 고쳐야 한다. 이런 병만 아니라 꺾어지고, 구부러지고, 가시 같고, 미달되는 등등의 병도 있다. 일반적으로 정신이 건강하고 육신이 건강해도 영적인 면으로 병이 든 사람이 많이 있는데, 안 믿는 사람들은 이런 영적인 면의 병을 전혀 모른다. 이것만 아니라 영이 중생이 되지 않은 사람은 그 자체로 영이 죽어 있는데, 이것도 창조의 목적관에서 볼 때 병이다. 성경이 말을 하고 있다,

 

세상 속화된 교회에서는 육에 속한 병만 고치려고 한다. 베데스다 병자들도 그 분위기가 세상 속화된 사람들과 닮은 데가 많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영적인 뜻이 들어 있는 건데 이걸 무시하고 육신 쪽으로만 혜택을 보려고 하는 것은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들과 다름이 없는 거다.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소경.’ 물질세상을 전혀 못 보는 사람은 육신의 소경이다. 영적인 면의 소경은 천국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안 믿는 사람이 육신의 눈을 떴다고 해서 성경을 보면서 천국을 알아볼 수 있느냐? 모른다.

 

그러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육적인 소경이냐, 영적인 소경이냐? 영적인 소경이다. 바리새교인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율법사들은 육적인 소경이냐, 영적인 소경이냐? 영적인 소경이다. 당시의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육적인 소경이냐, 영적인 소경이냐? 영적인 소경이다. 영이 죽은 자다. 성경을 통해서 봐라.

 

영적으로 눈을 떴으면 자기가 자기에게 안 속지만 눈이 감겨 있으면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다. 옛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살면 100%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다. 이렇게 되면 주님을 위해 일을 해 놓고도 하나님의 심판에 얻어맞는다. 육적으로 믿는 사람은 세상에 속한 이해타산으로 살기 때문에 항상 이유가 들어 있고 변명이 들어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잠깐 동안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을 영적 이해타산에 두고 이 면에 손해를 보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영적 소경이라. 독사의 자식들이라. 화 있을진저라고 하고 선언을 했는데도 이들은 자신들이 영적인 소경이라는 것을 인정을 안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들을 때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한 말이 옳은 거냐, 잘못된 거냐? 옳은 거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눈을 가지고 봐야 한다.

 

육적인 소경은 사람의 형태나 신장이나 평수나 색깔이나 골각이나, 어떤 활동을 하는지,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캄캄한 거다. 광명한 천지에 어떤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사랑하는 처와 자식들의 얼굴도 모르고, 심지어 자기의 얼굴도 모른다. 자기의 그림자도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에게 자기의 얼굴의 모양을 아무리 설명해 줘도, 자기의 그림자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 줘도 못 알아듣는다.

 

밤과 낮을 구별할 수도 없고, 자기 머리 위에서 무엇이 떨어지는지, 자기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지도 전혀 모른다. 뒤에서 무엇이 덮칠 런지, 앞에서 무엇과 마주칠 런지도 모른다. 자기 집안에 있으면서도 자기 집의 무엇을 도둑맞고 있는지도 모르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어디 있는지 방향감각이 없다. 소경과, 눈을 뜬 개 중에 누가 더 잘 다니겠느냐?

 

육적인 소경을 염두에 두고 영적인 면의 소경을 보면 영적인 소경은 자기의 존재목적을 모른다. 자기의 출생목적을 모른다. 나그네 세상에서 재세기간 동안에 무엇을 하고 가야 할지 전혀 모른다. 인간 자기가 지어진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전혀 모른다. 이게 영적인 소경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것들 중에는 무생명 무감각의 존재가 있고, 생명적 감각적 존재가 있고, 생명과 감각이 있으면서 영혼이 있는 존재가 있다. 무생명체는 자기의 존재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 무생명체는 누가 자기를 부수고 깨뜨려도 이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존재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 무생물체를 이용한다. 그런데 무생물체는 자기가 이용을 당하면서도 그 자체도 모른다. 짐승은 생명이 있고 감각성이 있지만 영혼과 도덕성이 없다. 우리 인간은 생명과 감각성이 있고 영혼도 있어서 무생물체와, 생명과 감각만 있는 존재를 활용한다.

 

인간은 영육 결합체로 영혼이 있고 도덕성이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는데, 나라는 존재를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들어서 예수 믿게 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감사뿐이다. 믿는 사람이 이걸 못 느낀다면 영적인 면에 무딘 거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민감해지고 민첩 민활해지고, 이렇게 되면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고, 사람들 중에 머리가 된다.

 

영적인 면의 소경은 자기의 출생목적,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기까지의 재세기간의 존재목적으로 모른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인간이 자기의 존재목적 삶의 목적을 모르고 산다면 이 인간을 어디에 쓰겠느냐? 이런 사람은 뭘 구하며 살 것인지가 빤하다. 자기를 인간으로 지으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의 존재가치도 모르는 거다. 자기를 인간으로 만든 목적은 구원이다. 즉 하나님의 온전, 신의 성품을 입는 거다. 이걸 모르고 산다면 하나님 앞에 존재가치가 없다.

 

우리들의 눈에 보석을 왜 보여주는 거냐? 보석의 존재가치가 뭐냐? 어떤 게 보석이냐? 보석은 시대와 장소와 환경과 지역에 따라 변질이 안 된다. 불 속에서도 변질이 안 된다. 금은 불에 넣을수록 더 진한 노란색으로 나온다. 그런데 인간 자기는 별 게 아닌 것에도 왜 그렇게 성격도 성질도 성분도 이리 저리 바뀌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느냐?

 

믿음의 사람 요셉이 애굽의 감옥에서 변질이 되었느냐? 외부의 모든 것이 차단이 되어 있고, 자유가 차단이 되어 있는데 주인의 아내의 꾀임까지 받았지만 전혀 변질이 되지 않았다. 사람이 여러 종류의 꾀임을 받게 되는데, 어떤 꾀임에는 빠져들지만 어떤 꾀임에는 안 빠져드는 게 있으니 자기의 약한 면을 살펴서 지혜롭게 대처해야 하고, 그런 곳에는 아예 가지 않는 게 좋다.

 

육적인 소경이나 영적인 소경이 소원이 하나 있다면 무엇일까? 부자가 되는 거냐, 눈을 뜨는 거냐? 눈을 뜨는 거다. 그런데 영적인 소경은 자기가 영적인 면의 소경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에서 부자 되는 걸 원한다. 그러면 돈을 원해서 많은 돈을 가지게 되면 그 돈이 영의 눈을 띄워주느냐?

 

니고데모는 성경을 가지고 백성을 가르치는 선생인데도 자기 앞에 구주 예수를 두고 대화를 하면서도 자기를 인간으로 만드신 그 분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냐? 주님께서 이런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라고 하셨는데, 이건 성령님의 감화성을 말하는 거다.

 

니고데모는 성령의 감화성이 어디서 어디로 흐르는 건지, 어디에 뿌리를 박고 흐르는 건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처럼 사람이 거듭나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한 거다. 니고데모는 그 생각이 예수님께, 그리고 영의 세계에 전혀 근접을 못하고 있다. 니고데모는 성경은 잘 아는데 예수님을 알아보는 지식은 캄캄한 밤이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니고데모의 신앙이 어둡다는 것을 말해준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