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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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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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34: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지난 설교 보충.

 

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 말을 그대로 들으면 육의 말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이걸 영의 눈으로 보면 맞는 말이다. 야곱의 물질적인 신앙사상에는 영생의 물이 없으니 영생의 물을 나에게 줘서 야곱의 신앙성의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 그런 세상성의 말씀을 듣지 않게 해 주옵소서이렇게 되는 것이니 영적으로 맞는 말이다.

 

야곱의 물질 축복적 사상에는 생수가 없다. 이런 곳에서 생수를 찾으려고 하면 못 찾는다. 여자가 육의 개념을 가지고, 세상개념을 가지고 말을 했다고 해도 예수님은 지금 여자와 영 주격으로 말씀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자의 말을 영적으로 돌려서 들으면 여자의 말이 옳은 거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찾아오신 의도성을 놓고 생각을 하면 예수님은 여자가 육적으로 하는 말인 줄을 잘 알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해 주려고 이 장면을 일으킨 것이니 우리가 여자의 육적인 말을 영적으로 돌려서 생각을 하면 생수를 찾고 있다는 말이 되니 예수님의 마음에 합격이 되는 말이 되는 거다.

 

16-18: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은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는데도 남편이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신 것은 여자의 마음 속에 참 의지자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거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참 의지할 곳이 없고, 사랑 받을 곳이 없고, 영원히 가는 게 없다는 거다.

 

사람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이든 의지하면 그만큼 마음 상하고, 눈물 흘리고, 고통이다. 믿는 우리는 세상에 있는 동안에 옳은 것을 주고 옳은 관계를 짓고 갈 뿐이지 절대로 세상 것을 의지하지 말아라. 세상과 세상의 것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다가는 큰일 난다.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여자가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은 예수님께 합격이 되는 말이다.

 

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여자가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아본 것은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서 그만큼 깨달음이 앞으로 나간 거다. 이 여자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선생으로 알고 있다. ‘선생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가르치는 자인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하는 게 영적인 면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알고 있는 건지, 종교적인 면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알고 있는 건지? 우리는 누가 무슨 말을 할 때 저 사람이 어디에 정신을 두고 이 말을 하는 건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자칫하면 오해하고 속상하고 한다.

 

20-23: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여자는 예배장소에 대해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에게는 말씀이 있다는 것과, 약속이 있는 구원이 있다고 알려주셨고, 그 다음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는 지금 이 때, 즉 주님이 여자와 대화를 하는 지금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셨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여자가 그가 오시면 그가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너에게 말을 하고 있는 내가 그니라라고 했고, 여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척 알아들었다.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예수님이 여자와 대화를 하고 있는데 묻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이상하게 생각이 되어도 묻는 이가 없고, ‘무엇을 구합니까? 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를 합니까?’ 하고 묻는 이가 없었다. 말하자면 진리문제로 주님과 대화할 때는 끼어들면 안 된다는 거다.

 

방송에서 정치인이나 전문가들이 나와서 대담하는 걸 보면 많이 배운 사람인데도 남의 말을 막고 자기 말만 계속하기도 하고, 상대가 말을 하는데 동시에 말을 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무슨 말을 할 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하는데, 이건 타락된 세상에서의 일이고, 우리는 믿는 사람으로서 누구와 말을 하다가 말상대가 되지 않으면 피하는 게 이기는 거다. 싸워봐야 자기의 인격이 떨어지고 얼굴이 부끄러워진다. 이런 곳에 끼어들면 안 된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들어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여자와 대화를 하는 내용과 내가 그로라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처음부터 다 들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 그 당시의 제자들이 아닌 지금의 믿는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이니 지금의 우리는 예수님께서 여자와 대화한 것을 성경으로 통해 다 들었다. 그러니까 이 장면도 우리에게 신앙의 이치를 깨닫게 해 주시려는 것이니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간 것처럼 현재의 내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면 사마리아 여자처럼, 제자들처럼 깨달음을 못 받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생수를 못 받는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그 때의 장면을 보는 것은 계시적으로 우리가 지금 그 장소에 가 있는 거다. 몸은 그곳에 갈 수 없지만 정신과 마음은 얼마든지 그곳에 갈 수 있는 거다. 영적인 면은 시간초월이다. 우리의 실상이 성경을 통해 지금 그 장면을 보고 있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여자와 대화하는 내용을 처음부터 다 들은 거다. 그러나 먹을 것을 사러 간 제자들은, 즉 현재적으로도 먹을 것을 위해 믿는 사람은 이 대화를 못 듣는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생수문제, 참 남편문제, 예배문제, 구원문제를 말씀하시는데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가지고 그 대화에 끼어 들 수 있겠느냐? 예배식순의 문제로 끼어 들 수 있느냐? 찬양의 문제로 끼어 들 수 있느냐? 건물문제로 끼어 들 수 있느냐? 축복문제로 끼어 들 수 있느냐?

 

이 여자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문제로 예수님과 대화를 했는데, 성경을 통해 이 장면을 보고 있는 지금의 나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기도로 예수님과 대화를 한 일이 있느냐? 여자가 예수님과 예배에 대해 대화를 한 것을 보고도 이런 기도를 한 일이 없다면 우리는 이 여자만도 못한 게 아니겠느냐?

 

본 설교.

 

28-30: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여자가 동네사람들에게 내가 한 일을 낱낱이 깨닫게 해 주신 이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라고 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자기가 보여져야 한다. 세상창조 때 첫째 날에 빛을 만드셨는데, 이 빛으로 자기 속이 비춰지면 구별 분별이 나오고, 정관 정돈 정시가 나온다. 이렇게 되어야 그 다음에 안식이 된다. 이치가 그렇다. 사람이 알지 못하면 빛이 없는 사람이니 이러면 안식이 안 된다.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항상 불안 속에서 어떻게 먹고 마시고 사나?’ 하게 된다. 이건 주님에게서 떠난 거다.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자기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알게 해 줬다는 거다. 구세주를 만나면 이걸 알게 되는 거다. 이건 점쟁이가 점을 봐주는 것과는 다른 거다. 자기에게 무슨 일만 생기면 점쟁이에게 가서 묻는 사람이 있는데, 사람은 말이나 행동에서 자기의 성격이 드러나기 때문에 점쟁이는 그걸 보고 맞히는 거다. 우리가 볼 때 점쟁이는 마귀 짓을 하는 거다. 세상만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건데 사람의 운수를 점쟁이가 어떻게 아느냐?

 

이 여자는 예수님과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가 된 사람은 우물가가 문제가 아니고, 장소가 문제가 아니고, 성가대가 문제가 아니고, 안수기도 축복기도가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된다. 빛 앞에서 자기가 완전히 드러난다. 여자는 주님의 뜻에 적중으로 말씀을 깨달으니 성령님의 감화 감동의 역사가 되어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서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이건 하나님의 신의 역사다. 성령님의 역사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자기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선포를 하니 동네사람들이 여자를 따라 예수님께 나왔는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오늘날 설교도 전도인데, 전도를 하는데 있어서 사람을 예배당으로 인도하는 것과,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말세가 되면 거짓 종이 많다고 했는데, 말세 된 오늘날 교회 안에 거짓된 종들과 이단자들의 이질적인 가르침과 사역이 아주 많다. 즉 세상 물질축복 중심의 가르침이나, 무당처럼 신비주의의 가르침이나, 이방신관과 같은 가르침이 많다. 이런 것은 예수님께로 일치성 적중성으로 인도가 아니다. 하나님과 의사단일로 일치성이 되게 하는 게 예수께로 인도하는 거다.

 

31-34: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제자들이 랍비여, 잡수소서라고 하니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육신적인 물을 얻어먹을 목적으로 오신 거냐, 말은 그렇게 되어 있지만 생수를 주러 오신 거냐? 생수를 주러 오신 거다. 이걸 봐야 한다.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의 양식이 무엇이냐? ‘양식이라고 하신 것은 먹음으로써 힘을 얻고 기쁘고 즐겁고 만족하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라고 하신 것을 육신이 먹는 음식으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 힘을 얻고 지혜지식을 얻어서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당신의 양식이라고 말씀을 하시느냐?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하셨다. ‘보내신 이란 하나님 아버지를 말하는 거고, 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게 당신의 양식이라는 건데, 아버지의 뜻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시키는 것으로, 첫째는 선악과 먹고 영이 죽은 우리의 영을 영원히 살리는 거고, 둘째는 살리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성장케 하는 거고, 셋째는 신령천국에서 영능의 실력대로 영원히 누리게 하는 거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 뜻을 행하려니 성령으로 잉태를 하셨고, 33년을 하나님의 지공법의 말씀에 흠과 티가 없이 사셨고, 이로 인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되셨고, 주님의 이 삶은 죽은 거, 죽을 게 없으니 부활 승천을 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장차 우리를 변화 부활시킬 수 있게 된 거다. 부활 승천이 되려면 육신을 입고 사시면서 죽은 것도 없고, 죽을 것도 없고, 썩을 것도 없이 전부는 신령한 산 것으로 살아야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하신 것과, 인간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이 안에 다 들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사마리아 여자를 보면서 자기가 발견이 되어야 한다. 지금의 자기는 세상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동분서주했으나 만족이 있었느냐? 잡은 것 같으나 없고, 잡은 것 같으나 다 도망을 가고, 잡은 것 같으나 다 내버리고 간다. 그러니 출생을 해서 죽음의 선을 넘어가기까지 나그네 생활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이룰구원을 온전히 이뤄가야 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의 온전으로 이뤄가는 것을 보고 기쁨과 만족으로 여기시니 이게 주님의 양식이라는 거다. 오늘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기의 양식도 이래야 한다.

 

본문을 보면서 말세 된 오늘날 교회들이 어떤 기쁨과 만족의 배부름을 원하고 있는 건지? 주님의 양식과,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양식이 같으냐, 다르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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