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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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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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33: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1-32: 우리가 예수님의 절대적인 교훈을 안 믿어서 손해를 보지 은밀한 뜻, 그 말씀대로 순종을 하면 우리에게 영원히 손해는 없다. 제자들이나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이나 진리진실로 신실한 종들로 통해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의 효력성은 우리가 세상의 유혹과 미혹을 이길 수 있고, 사망적인 것과, 어두운 것과, 거짓과, 이단자들과, 비진리와 악령류의 모든 것을 구별하고 분별하여 이길 수 있는 교훈이다. 거짓 종은 그렇지를 않다. 거짓 종은 사람을 어느 한 쪽으로 밀어붙인다. 세상성적인 성질로 밀어붙인다. ‘체험을 해야 한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하는 이건 성경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사단일의 본질로 바로 깨닫고 세워나간다면 우리 주님이 무엇으로 안 쓰시겠느냐?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자꾸 이치를 어기며 예수를 믿고 있다. 나중에 그 심판을 어떻게 받으려고 저럴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이 시간에 우리는 그런 것을 생각을 하고 받아야 한다.

 

 

32절 말씀은 일반적으로 맞는 말이다. 싸움에 질 것을 알고 강한 군대에게 화친을 청하면 강한 그 나라가 요구하는 대로 들어줘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은 그런 차원의 교훈이 아니다.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뚜렷하고, 인간 자기의 출생목적과 자기가 세상에 사는 재세기간의 존재목적 활동목적을 뚜렷하고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려줘서 세상을 절대로 헛살지 않게 하고, 하나님의 형벌의 심판을 받지 않을 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하고, 영원히 존귀와 영광자 능력자 실력자로 나타날 수 있도록 하는 교훈이다.

 

 

예수님의 이 교훈의 효력은 예를 들면 사람이 공사를 시작했으면 준공이 있듯이, 준공이 없는 공사는 시작할 수가 없는 거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반드시 준공이 있다. 즉 결과와 끝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은 기초는 주님이 닦아놨는데 준공이 없는 즉, 신앙 믿음의 집이 없는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이 없다. 이게 뭐냐?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하는 것은 준공을 시켜주려는 것이지 죽여 버리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 안에는 그렇게 살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영능의 실력이 들어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이걸 그렇게 보느냐? ‘예수 믿고 충성봉사하면 상급 많다하며 무조건 충성봉사로 내몰고 있으니 이건 준공이 없는 거다. 참 허망한 거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사람이 바로 되겠느냐? 정신이 바로 되겠느냐?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건 거짓 신앙이다. 하나님 앞에 그 심판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이 일반개념으로 너 죄 지었지? 잘못했지?’ 하며 세상의 재판장이 내리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네가 구굴 닮았느냐하는 그 심판이다. ‘누굴 얼마나 닮고 성장을 했느냐하는 그 심판이다.

 

 

학교에서 졸업을 하면 그 사람이 사회에 나와서 활동을 하는 것을 통해서 학교에서 뭘 배웠는지? 얼마나 잘 배웠는지?’ 하는 그 심판이 나온다. 아무 것도 못한다면 공부를 한 보람이 뭐냐? 사회를 탓할 게 아니라 공부를 한 보람이 뭐냐? 그런 것처럼 예수님의 교훈을 받은 효력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했으면 준공이 있듯이, 준공이 없는 공사를 시작할 수는 없는 거다. 다리를 놓는 것도 준공이 없는 공사 즉, 다리를 놓다가 말려고 하는 공사는 시작할 수는 없는 것처럼 예수를 믿었다면 예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성장한 것이 있어야 하는 거다.

 

 

자기가 옳은 이치를 만났으면 자기의 영능의 실력을 깨달음으로 키우고 써먹고 해야지 예수 믿는 사람이 영능의 실력도 안 키우고, 깨닫는 것도 없고, 충성봉사 한다고 교회에만 돌아다니면 사람이 바로 되겠느냐? 신앙이 바로 서겠느냐? 그런 교인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와서 살까? 집을 짓다가 중단하고 방치되어 있으면 보기에 흉할 뿐만 아니라 들쥐들의 집이 되고, 도둑고양이의 집이 되고, 각종 악한 자들의 소굴이 된다. 나약한 사람들을 붙잡아다가 여러 가지 죄악을 행하는 양성소가 된다. 그런 것과 같이 된다.

 

 

진리생명의 말씀을 듣고 배운다면 사람 자기가 진리생명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신 즉, 성령님에 붙들림을 받아야지 자기가 경험적으로 안다고 하는 그 위에 진리를 포장하면, 가르치는 포장을 하면 자기의 마음 집, 자기의 마음 밭은 가시밭이 되고, 들쥐들의 집이 되고, 뱀이 기어 다니고, 사람의 생명을 사냥하는 도둑이 되고, 강도가 되고 만다.

 

 

포장하지 말아라. 포장하지 말고 자기 속을 잘 뒤집고 가꿔야 한다. 인격과 성품적으로 말씀의 열매가 열리는 그 인격이 돼야지 그 면은 안 하고 포장만 자꾸 갖다 씌우면 말쟁이만 되고, 말꾼만 되고, 진리를 전한다고 하면서 성질이나 부리고 하게 된다. 짓다 만 집처럼 허구성이 뚫려있게 된다.

 

 

괜히 군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이 되는 영적인 무장은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무장이다. 내가 교훈을 하는 것을 우리교인들은 다른 데 가서 싸움이 붙어도 진리실력에 안 지게 하려는 욕심을 가지고 하는 거다. 모든 거짓되고 이질적인 교훈과 사상을 전부 이겨내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의 언행심사의 그 뒤에 무슨 영이 움직였는지, 무엇이 활동을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주님의 군대의 이 비유는 영적 무장을 하면 반드시 승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 즉, 비진리와 화친은 할 수가 없다 그 말이다. 될 수가 없다. 거짓 종이 나와 같이 일하자하며 그게 주격이 되면 그것과는 같이 손을 잡을 수 없는 거다. 그건 헛 믿고 헛 노력 헛 투자가 된다.

 

 

우리의 싸움은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싸우는 싸움이다. 그러니까 그 뜻이 뭐냐? 일반적으로 면류관은 싸운 후에 받는 거냐, 받은 후에 싸우는 거냐? 싸운 후에 받는 거다. 그런데 우리의 면류관은 받고 나가서 싸우는 거다. 이 말이 무슨 의미냐? 우리의 싸움은 싸웠다 하면 이기고 들어가는 싸움이라는 뜻이다. 그러려면 이치가 명확하고 분명해야 한다.

 

 

베데스다 연못의 많은 병자들이 선착순으로 1차로 들어가면 낫는 것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된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라도 그건 말이 안 되는 거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찌그러져 버린다. 하나님이 공의와 사랑이라면 들어간 자는 다 낫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낫는 그것부터 자꾸 생각을 하니까, 천사를 좋게 생각을 하고 병 낫는 걸 좋게 생각을 하게 되니까 바로 뒤에 있는 예수는 없어져 버렸다.

 

 

예수 없이 좋게 말을 하려고 하니 뭐가 되느냐?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살리고 낫게 하는 질이 없어져 버린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판도가 이상해진다.

 

 

하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하라고 예수님을 일꾼으로 내보내 놓고 천사로 물을 동하게 해서 낫게 한다고 말을 하니 이게 말이 되느냐? 이치에 안 맞는 말이다. 오늘날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으냐? 길과 진리와 생명이 없는 그런 곳에서 펄펄 뛰면서 성령이 왔다고 한다. 성령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헛일하는 분이 아니다. 뒤의 계신 예수님을 바로 발견을 해야 물이 동한다는 그 상태가 무엇을 묘사하는가가 나오는 거다.

 

 

우리의 싸움은 미리 면류관을 받고 나가는 싸움이다. 싸워서 이겨서 받는 게 아니라 받고 나가는 싸움이다. 우리의 싸움은 예수께서 죄와 죽음과 마귀와 싸워서 이긴 그 실력이 들어있는 싸움이요, 그 면류관이요, 그 사상이다. 면류관은 발에 신느냐, 손에 끼는 거냐? 머리에 씌운다. 머리란 사상을 말한다.

 

 

우리의 싸움은 말하자면 안 싸웠더라도 이긴 싸움이다. 이미 이긴 것으로 전제가 되고 들어갔으니까 안 싸워도 이긴 거나 마찬가지다. 즉 우리가 싸우기만 하면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라는 말이다. 승리가 보장된 무장이다. 그럼에도 이 진리를 수 년 수십 년을 들으면서 무장이 없다면 한심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이겼으니까 죄를 정복하고 세상을 이긴 것이다. 교회마다 인도자들은 이 교훈, 이 사상을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라야 한다. 이게 원리원칙이다. 당신의 종들에게는 그걸 다 줬는데도 안 받았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또한 받을 마음도 없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주신 교훈이 아니란다면 그것은 주님의 가르침이 아니니 그런 곳을 떠나서 주님의 진리이치가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거기에 예수님이 계신다.

 

 

어느 성경에 보면 찾는 자가 만난다고 했다. 뭘 찾느냐?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이 예수를 찾는 자, 주님이 가르친 그 구원을 찾는 자는 반드시 만나게 돼 있다. 그러면 이게 네 마음대로냐? 아니다. 성령님의 인도가 들어있다는 그게 전제가 돼 있다. 그 마음을 아시는 성령님이시고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소원 목적이, 교회를 가르치는 교훈이 세상과 더불어 화친하자는 것이더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이방 불신세상과 화친을 못해서 억울하게 죽은 것이냐? 주님은 죽어도 이방 불신세상과는 화친을 안 한다. ‘그 죄를 내가 짊어지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들이 주격이 된 거기에 내가 소유격으로 종처럼 화친을 안 한다하는 것이다. 그 이치가 분명한 것이니 여기에 비추어 오늘날 교회를 보면 어느 것이 주격인지 신앙 사상적으로 다 나오는 거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이 이방 불신세상과 화친하자는 것이더냐? 성령님의 역사가 이방세상과 화친하자는 역사더냐? 거짓 종들과 화찬하자는 성령님의 역사더냐? 진리이치의 교훈이 세상과 화찬하자는 교훈이더냐? 진리이치의 교훈을 네 마음대로 이용해 먹으라는 것이냐, 자체화 실상화 인격화 하라는 말씀이냐?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 당신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고. 성경 속에 모든 만물이 총동원이 된 그 뜻은 그 사건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격의 온전 성품의 온전이 목적적으로 들어있다.

 

 

그러니 우리의 육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마귀와 세상과 모든 사망적인 요소를 다 이기고 죽어야지 지고 오래 오래 살면 되겠느냐? 이긴 죽음에는 최고로 존귀와 영광이 들어있고 영광스런 첫째 부활이 들어있다. 죽더라도 그렇다. 그렇게 살다가 죽지 않더라도 머리가 되고 첫째가 되는 게 들어있다. 그러니 뭐가 손해냐? 주님의 말씀의 이치대로 순종하는 게 뭐가 손해냐?

 

 

33: 자기의 소유는 자타의 구원에 쓰이는 거다. 우리교회는 아무리 예배처소가 없어도 집사님들의 집을 전당잡히고 하는 건 없다.

 

 

자기의 모든 소유가 무엇이냐? 뭘 가졌기에 모든 소유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다 자기 소유다. 은행에서 빌린 돈을 안 갚으면 차압이 들어온다. 그렇게 되면 자기 집의 것이라도 함부로 못 쓴다. 자기 소유지만 쓸 수가 없다. 쓸 수 있는 게 자기 소유다.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사용할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는 이게 자기 소유다.

 

 

자기가 배우고 알고 있는 세상지식. 들어서 알고, 경험해서 알고, 생각하고 깨달아서 알고 한 것, 그리고 자기가 자기고 있는 물질의 소유, 자기의 건강, 힘 등등 전부는 임시적인 소유이다. 영원히 가는 소유는 아니다. 또한 자기의 그런 모든 지식이나 계산을 하는 헤아림도 선악과 먹은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 건 전부가 세상살이의 방편적 활용성이다. 이런 임시적인 것은 예수님처럼 되는, 참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기초는 아니다. 영생되는 것도 아니고, 참 인간으로 성장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영적인 무장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은 영생이 되는 생명의 교훈이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며, 죽음 저 너머에 가서도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교훈이다.

 

 

따라서 교회 인도자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주님의 이 심령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종들은 물질적 이해타산, 사람숫자, 인간정실, 자기의 자랑, 죽고 사는 것 등등을 자기가 계산하고 있으면 안 되고, 자기 정신태도 마음의 태도가 하나님 앞에 분명하고 명확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말세라서 그런지 교회에 얼마나 거짓된 게 많은지?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이건 하나님 앞에 분명한 종들이 아니로구나.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했는데, 문제. 첫 번째, 부자였는데 살다가 가난해졌다. 이것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린 것이냐? 이건 버리고 말고가 없는 거다. ‘나는 가난하니까 버린 게 없다그렇게만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면 건강하고 부자로 살면 다 구원을 얻은 것이냐? 부자이고 건강해도 그 속에는 구원이 있는 거다. 아픈 사람은 아픈 데서 나음을 받는 건강체로 되는 구원도 있어야 되지만 아픈 사람은 그 아픔 속에서 깊숙이 얻어야 할 구원이 있는 거다. 영인성장 면에 건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구원이란 말을 계시적으로 깨달을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이다. 이걸 빼놓고는 구원이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그건 껍데기다. 베데스다 연못에 첫 번째로 들어가서 나은 사람이 구원을 얻은 것이냐?

 

 

두 번째는 처음부터 가난했다면 이것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린 사람이냐? 틀리다.

 

 

세 번째는 예수 믿기 전에도 부자였고 예수를 믿은 후에는 부자 그대로인데, 이 부자가 예수님을 안 믿는 부자를 보고 너의 모든 소유를 버리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라고 한다면 맞는 말이냐, 틀린 말이냐? 틀리다.

 

 

네 번째는 부자라도 주님의 일에 주님의 뜻대로 쓴다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린 것이냐? 맞다.

 

 

다섯 번째는 가난하더라도 주님의 일에 충성을 다하는 자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린 자다? 맞다.

 

 

여섯 번째는 가난해서 물질을 구하고 있다면 이것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린 거다? 틀리다.

 

 

일곱 번째는 물질부자였는데 모두 팔아서 교회에 다 바치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린 거냐? 틀리다.

 

 

여덟 번째는 물질부자였는데 허랑 방탕으로 다 날리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린 것이냐? 틀리다.

 

 

아홉 번째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친 것은 재산도 다 바친 셈이다? 맞다. 마리아도 자신을 드렸으니 다 드린 거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무슨 말씀 끝에 33절을 말씀한 것이냐? 물질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영인의 성장과 영능의 실력을 위해서 쓰라는 것이다. 물질을 모으지만 말고 어떻게 써야할지 잘 헤아려 보라는 것이다. 다 팔아서 교회에 갖다 바치지 않아도 된다.

 

 

내 제자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영인성장과 영능의 실력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고, 영능의 실력이 있어야 제자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학생이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선생님에게 물질투자 시간투자 노력투자를 하면서 배워야 한다. 그래야 제자가 된다.

 

 

오늘날 옳은 헤아림이 없는 비진리를 받으면 거짓 인도자가 되는 줄도 모르고 많은 시간투자 노력투자 돈을 들여서 신학교에서 비진리를 배우고 나와서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으로 착각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저 독일이나 미국이나 외국에서 배운 목사님은 예수님의 제자냐? 왜 예수님의 제자를 그런 식으로 아느냐?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 세상이 요구하고 좋게 보는 그 기준으로 보지를 않는다. 그래서 당신의 종들을 부를 때 저 시골의 어부를 불렀다. 배운 사람들은 학문이 있으니까 내가 주의 종이 되리이다해도 안 받았다. 서기관을 안 받았다. 많이 배워서 안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자의 속에 든 예수님의 일을 하겠다는 정신이 틀렸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일을 하려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하늘로부터 받은 그것을 가지고 하는 거지 세상에서 공부를 많이 한 것으로 하는 게 아니다. 그건 천국복음이 아니다. 사도바울은 다 내버렸다. 다 내버렸다는 게 뭐냐? 율법해석을 다 예수님 쪽으로 맞추는 거다. 바울 전의 사울은 자꾸 율법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겠다고 했지만 그가 많은 지식은 가졌으나 그의 속이 사람을 죽이는 속이었다. 그걸 다 버리고 예수님만을 증거 했다.

 

 

그런데 오늘날 착가 속에 살고 있는 목회자들이 사울 적의 사도바울처럼 알고 있으면서 목회를 시작했는데 아는 것이 없으니 쩔쩔 매고 있다가 다행스럽게 어느 집회에서 많은 깨달음을 받았다면 자기의 영능의 실력과 영인성장을 위해서 투자성이 있어야 그게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인데 그렇게 하는 데는 인색하고 물질 소유욕으로 자기를 부풀리고 있다면, 그런 경우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린 거냐, 안 버린 거냐? 안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도 안 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목회자를 보는 눈을 바로 가져야 한다. 모든 이단들을 다 깨우치려면 이치가 분명해야 한다. 이치 없이 그냥 믿어나간다면 무당이 된다. 이런 게 얼마나 많으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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