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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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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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저희가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한 두령의 집에 떡을 잡수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본다. 그러니까 그 집 주인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도 따라 들어온 것이다. 사람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 약점을 잡기 위해서 식사자리로 청해서 엿본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악랄한 짓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들의 그 마음을 모르실까? 알고 계신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시는데, 또한 지금도 자기 마음속에서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 것도 다 아시는 건데 이걸 예수님이 아실까하는 건 아예 생각을 안 하며 산다.

 

그것을 아시면서 식자자리로 가신다는 것은 참 바보짓이 아니냐? 우리들 같으면 그걸 알면 식사자리에 청한다고 해서 가겠느냐? 바보스런 짓 같으나 실은 그곳에 구원해야 할 한 병자가 있었고, 그리고 그들에게 책망을 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가신 것이다.

 

식사자리에 가시는 중에 주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이런 이런 일을 당한다면 너희들이 어쩌겠느냐하니까 그들이 할 말이 없다. 잠잠했다. 그래서 고창병 든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식사자리로 들어가서 앉으셨다.

 

고창병은 몸이 붓는 수종병인데, 식사자리에서 예수님 앞에 이 사람이 앉혀놓은 것은 안식일 날 병을 고치나, 안 고치나하는 것을 보려고 일부러 앉힌 거냐? 어쨌든 그 사람이 앞에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한 그들의 악한 마음을 아신다.

 

그런데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란 말이 있다. 바리새인들이 언제 예수님께 질문한 일이 있느냐? 질문도 안 했는데 대답하여란 말이 있다. 그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대답하여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은 것이 오늘 안식일인데 병자를 고쳐줘야 하느냐, 그대로 둬야 하느냐하는 질문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답하여란 말을 쓴 것이다. 그러니까 말로는 안 했으나 바리새인들의 속에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하고 묻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되물은 것이다. 그들의 속에 있는 말을 하니까 모르긴 해도 그들이 깜짝 놀랐을 것이다. 이 물음에 그들은 잠잠했다. 이에 예수님은 고창병 든 자를 고쳐서 돌려보냈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들이 대답이 없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은 안식일 날 한 사람도 구원으로 고치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들이 대답을 안 하는 것을 봐서 그들이 사람을 구원해내지 않았구나하는 대답이 되는 거다. 그러면 그들이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은 구원을 했느냐? 다른 날도 못 고친 것이고, 결국 그들은 사람 구원과는 상관없는 하나의 종교인으로 살았다는 말이 된다.

 

기독교는 종교인으로 사는 게 아니라 구원으로 들어있다. 이 구원도 날마다 믿으면 날마다 구원이요, 성장적인 면에서도 날마다 구원이요, 깨닫는 면에서 날마다 자꾸 깨달아 나가는 것도 구원이다. 그런데 이걸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밥만 먹고 시간만 낭비하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인간세상만 봐도 어린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젖을 먹고 싸라는 게 아니라 자람성이 그 안에 들어있다. 그런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도 믿는 첫 날부터 자람성이 있어야 한다. 깨달음이 자라고, 모든 언행심사가 자라고, 고쳐지는 면이 자라고, 봉사심이 자라고, 사랑이 자라고, 도덕성이 자라고, 기도하는 면도 자라야 한다. 안 자라면 그거 어디에 쓸 거냐? 아무 것도 못한다면 밥 먹는 입은 있으니까 기도는 할 수 있지 않느냐? 사람은 자라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의 종교인으로 사는 기독교인들이 참 많다.

 

안식일이라도 사람이나 소나 개가 우물에 빠지면 빨리 끄집어내야 한다. 만일 자기 아들이 우물에 빠졌는데 오늘은 안식일이니 그대로 두고 내일 끌어내자할 수 있느냐? 안식일은 율법이 있기 전에 창:에 나온다. 6일 동안 세상을 만드시고 7일째 되는 날 하나님이 쉬셨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만드셨다. 이건 대 계명이다. 기본이다. 믿는 사람이 주일을 어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구약에 주의 백성들이 안식일을 안 지킨 것은 하나님의 대 명령, 기본적인 것까지 어긴 것이니 이건 끝난 것이다. 동생이 형의 말도 안 듣고, 누나 말도 안 듣고, 아버지 말도 안 듣는다면 이건 끝난 것이다. 예수 믿는 교인이 집사 말도 안 듣고, 장로 말도 안 듣고, 목사 말도 안 듣고, 하나님 말도 안 들으면 이건 끝난 것이다. 무슨 어려운 일이 있어서 안식일을 안 지키는 게 아니라 놀러가고 하느라고 안 지킨다면 끝내는 하나님의 재앙이 도사리고 있다.

 

교회 안에서 덕을 못 세우고 대적하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잘라야 한다. 그대로 두면 안 된다. 교회 안에서는 의사단일이다. 하나님의 의사단일에는 만 있고 는 없다. 설교가 그렇고, 모든 것이 의사단일 합시다할 때 하면 안 된다. 이건 반기다. 순종밖에 없다.

 

그리고 율법이 있기 전에 안식일은 쉬셨나니했는데 어느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밤과 낮으로 일을 하신다고 했다. 그러면 오늘이 안식일인데, 이 안식일에 하나님이 쉬시느냐? 만일 하나님이 쉬신다고 하면 세상만물 모두가 정지 상태로 들어간다. 오늘도 해가 뜨고 지고, 모든 산천초목이 동화작용을 하고 있고, 우리 몸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일을 하고 계시고 몸 밖에서도 일을 하고 계신다.

 

‘6일 동안 창조를 하시고 7일 날 쉬셨나니했는데,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이 의미는 계시인데,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일을 하셨다. 그러니까 영의 일은 계속 쉴 새가 없는 거다. 영의 일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달라붙어서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계속 밤낮 주무시지 않고 일을 하신다. 그러면 언제 쉬시느냐? 성도가 세상이 있을 때는 일을 하셨으니까 성도를 다 하늘나라에 데리고 올라가면 하나님은 세상에서 할 일이 없다. 말하자면 그 때서 하나님은 쉬시는 거다.

 

그러면 쉬신다는 게 무슨 말이냐? 안식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인간의 표현으로 할 일이 없어 잠을 자는 게 안식이 아니고 기쁘고 즐거운 게 안식이다. 사람이 아무 일이 없으면 편안할 것처럼 느껴지지만 아니다. 이건 기쁨이 없다. 이건 사람을 못 쓰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이 기쁘시다는 건 평안하다. 참 좋다. 즐겁다그런 면이 들어있는 거다. 안식이란 그런 마음이 들어있는 것이다. 천국에 가면 날마다 기쁘다. 그래서 천국은 안식의 세계다.

 

안식일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만드신 것이다. 우리에겐 이룰구원이 있고, 또 전도를 해서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구원도 있다. 그런데 안식일을 사람구원이 아닌 자기를 위한 날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자타의 구원이 들어있다. 할 일이 없다고 잠을 잔다고 해서 안식은 아니다. 사람은 기뻐야 한다. 기뻐야 사람이 생산도 되고.

 

우물에 빠지면 안 건지겠느냐? 우물이 깊을수록 캄캄하다. 햇빛이 들어가지 않으니 어둡다. 물은 어둑하고 차갑다. 이따금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사람이 빠지면 사람소리가 밖으로는 잘 안 들린다. 소리가 안에서만 돈다. 물을 먹고 배가 뚱뚱하고 죽는다. 우물 속에 사람이 빠지면 그 우물은 못 먹는다. 다 퍼내야 한다. 사람이 우물에 빠지면 누가 빠진 거냐하는 건 가리지 말고, 동네방네 다니며 찾지 말고 신속히 구해내야 한다. 그 의미를 알 수 있겠느냐?

 

그리고 이단자들에게 빠졌다 하면 오래 둘수록 안 된다. 오래 두면 둘수록 이단자들의 그 물이 자꾸 스며드는 것이니까 빠른 시일 내에 건져내야 한다. 사람이 넘어지기만 해도 빨리 일으켜야 한다.

 

사람이 빠졌는데 왜 안 건지겠느냐? 그런데 바리새교인들은, 당시 유대 종교인들은 사람이 어디에 빠졌는지를 모르는 거다. 그러면 그들이 안다면 건져내겠느냐? 그것도 아니다. 건져낼 수 있는 지식이 없다. 몰라서 못 건지고, 지식이 없어서 못 건진다.

 

6: 의인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다가 주님의 함정에 자기가 걸려들면 통곡하는 일이 생긴다. 자기 속도 못 고친 주제에 구원의 일을 하는 사람을 모함하면 하나님의 형벌이 임한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막으면 안 된다.

 

교회 안에 전도하는 일도 있고, 전도뿐만이 아니라 모여서 대화도 있을 수 있고, 지도자가 있다면 무슨 뜻으로하는 그게 있다. 그게 자타의 구원 면으로 들어가 있다면 그건 말리면 안 된다. 허락이 돼야 한다. 도가 지나치면 곁길로 가기 쉬우니까 그것도 안 된다.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전도할 사람이 있고, 성경공부를 할 사람이 있고, 대화로 할 사람이 있다. 그 수준에 따라서 여러 층층이다. 어린아이를 데려다 놓고 신학공부를 하면 어떠냐? 어린이는 노는 것으로써 교육이 들어간다. 또 노인을 어린아이처럼 짝짝꿍 하면 믿음이 잘 들어가느냐? 나이가 든 사람은 생산적으로 머리를 쓰는 거다. 머리를 쓰는데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그 머리가 살아나기도 하고, 썩기도 한다. 맨날 세상을 걱정하면 그 머리는 병이 든다. 정신이 나쁘면 피도 나빠진다.

 

연못에 고인 물이 진흙탕 물이면 그 물을 쓰는 수도꼭지에서 맑은 물이 나오느냐? 흙탕물이 나온다. 저수지에 맑은 물이 고여야 수도꼭지에서 맑은 물이 나온다. 이치를 말하는 거다. 이치를 어기면 안 된다.

 

자기도 하기 어려운 일을 다른 사람이 했는데 그 일에 잘 했네. 못 했네하며 시시비를 걸면 자기가 어려움에 봉착해도 자기를 돌아볼 자가 없게 된다. 그 다음에 사람의 영 구원운동에 율법을 가지고 성경구절을 가지고 사사건건 따지고 있다면 그 자는 하나님 앞에 외식자로서 멸망을 받게 된다. 그 다음에 살리는 일에 동참을 않고 있다면 동정이 없는 죽음을 맞게 된다.

 

7-11: 음식의 자리도 상좌가 있다. 이를테면 나이 든 분을 방문 앞에 사람이 들어오는 쪽으로 앉히면 안 된다. 방문을 쳐다보도록 앉혀야 한다. 음식자라도 높은 자리가 있고, 낮은 자리가 있는 거다. 그리고 나이든 사람을 상 모퉁이에 앉히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청함을 받았을 때 버릇없는 바리새교인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제각기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 듯하다. 또 그렇게 앉은 듯하다. 예수를 무시했을 테니까. 그 장면을 상상해 봐라. 이건 교양도 없고 버릇도 없고 무식하구나. 왜냐하면 예수님을 일부러 청했으면 예수님을 상좌에 앉혀드려야지. 상좌가 뭐냐? 상좌란 중앙. 예수님을 중앙에 앉혀드려야 예의인데 제일 낮은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몸이 뚱뚱 부은 고창병 든 사람을 턱 앉혔다. 이 교만한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이기에 고창병 든 사람을 상좌에 앉혔겠느냐?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식사자리 앉는 것을 비유하심은 예수님이 속이 상해서 저것들은 높은 자리에 앉고 나는 제일 낮은 자리에 앉혀놓고 나에게는 보잘 것 없는 음식을 주었구나해서가 아니라 구원이 들어있어서 말씀하심이다. 영원 궁극적 영능의 실력에 의해서 격차가 날 것을 염두에 두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말씀하심이다.

 

8-10: 상좌에 턱 앉아있는데 저 밑에 가서 앉으라하면 얼굴이 뭐가 될까? 차라리 말석에 가서 앉으면 청한 자가 와서 벗이여, 올라앉으라할 때 마음이 얼마나 편할까? 세상에서 식탁에 앉는 예의가 있듯이 하물며 마지막 날에야. 그 날에 만일 바리새교인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제일 상석에 앉은 예수님 곁에 앉는다면?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 곁에 누가 앉느냐하는 그 면이 들어있다.

 

바리새교인들이 고창병 든 사람 앞에 예수님을 앉혀놓았는데, 마지막 그 날에 그들이 예수님 곁에 와서 앉는다면 천사가 와서 발로 툭툭 치면서 일어나라. 거기가 네 자리가 아니다. 저 끝에 가서 앉아라해서 바리새교인이 그 말을 듣고 중간쯤에 앉으려고 하면서 이 자리요?’ 하니까 그 자리 말고 맨 끝에 가서 앉아라한다면 그 얼굴이 뭐가 될까? 밥을 먹다가 쥐똥 씹은 얼굴처럼 된다. 평소 세상에서 교만하여 주님과 의사단일로 통하지도 않아놓고 이제 와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면 그게 되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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