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윤리 (마 5: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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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윤리 (마 5: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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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윤리

5:13~20 주현 후 5, 202325

 

 

교회를 시원치 않게 여기고 성경을 무시하는 사람들도 마 5~7장에 나오는 내용만은 높이 평가합니다. ‘산상수훈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대목에서 매우 수준 높은 윤리 강령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 장에서 한 대목씩만 발췌하면 이렇습니다. 5:21절 이하는 실제로 살인한 사람만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친구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사람도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경고합니다. 6:2절 이하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충고합니다. 7:12절은 황금률로 알려진 경구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세상이 이런 말씀대로 돌아간다면 그야말로 천국이라 부를만합니다. 세상은 오히려 거꾸로 돌아갑니다. 겉으로 표시만 나지 않으면 친구를 모욕하고 특정한 이들을 혐오합니다. 자신의 선행을 선전하는 게 미덕처럼 받아들여집니다. 대접을 받으려고 애를 쓰지만 대접하는 일은 마음 내켜 하지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몇몇 사람은 모르겠으나 보통 사람들에게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멀고도 먼 이야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여기에 예외가 아닙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도 이런 가르침이 현실에서 지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윤리 강령을 강요받으면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이 맑아지기보다는 오히려 위축된다는 사실을 뚫어보았을 그가 왜 이렇게 엄청나게 부담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유대 기독교

오늘 본문 바로 앞 대목에는 팔복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덟 가지 내용을 실제 복된 삶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예를 들어서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 살기를 우리는 원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이 복이 있으리라 열거한 이들은 한마디로 박해받는 사람들입니다. ‘팔복의 결론에 해당하는 11절을 들어보십시오.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이 진술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당한 고난과 박해에 대한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그들은 모욕받았고, 온갖 중상모략을 겪었습니다. 그런 박해는 일차적으로 유대교로부터 받은 겁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계기는 수년에 걸친 반로마 유대 전쟁이 유대의 참담한 실패로 끝난 역사적 사건입니다. 로마군의 공격을 받은 예루살렘은 기원후 70년에 괴멸되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성전을 잃은 유대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전통인 율법주의 신앙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회당 신앙을 유지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했고, 그리스도인들은 시나브로 회당에서 축출당했습니다. 유대교의 종교재판과 로마의 정치재판에 넘겨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은 조롱과 박해를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증인으로 나서서 그리스도인에게 온갖 불리한 말을 쏟아냈습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재판과정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 당국자들은 거짓 증언자들을 찾아서 피의자 예수의 범죄 사실을 증언하게 했습니다. 예수의 말을 왜곡하거나 과장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종의 비유인 성전을 허물라.’라는 예수의 말씀을 성전 모독죄와 폭력 교사죄로 몰아가는 겁니다. 마태 공동체도 그런 모욕과 비난을 당했습니다.

성서신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마태복음은 유대 기독교에 속한 사람이 쓴 성경이라고 합니다. 그들 유대 기독교는 이방 기독교와 성격이 달랐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지역적으로 시리아-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기에 정통적인 유대교인들과 뿌리가 같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따르면 베드로는 여전히 유대교의 기도 시간을 지켰고, 성전을 출입했습니다. 바울도 선교 여행 중에 어느 지역을 가든지 유대인들의 회당을 먼저 찾았습니다. 마태복음의 배경이 되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가능한 한 유대교와의 연대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유대교 당국도 상당 기간 유대 기독교인들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 격인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유대교 당국자들과 일정한 정도로 친분을 맺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70년 유대 전쟁으로 인해서 그런 관계가 유지되기 힘들었습니다. 정통 유대교가 유대 기독교를 불편하게 여기면서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해서 유대교가 기독교인들을 이단으로 내몬 것입니다.

이런 기회에 기독교가 따로 살림을 차리면 되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으나 상황은 그렇게 녹록한 게 아닙니다. 유대교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은 자신들의 미래가 불확실해진다는 의미입니다. 핵우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유대교라는 우산을 잃으면 비를 그냥 맞아야 합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유대교는 나름으로 종교로서의 독립성을 인정받았으나 기독교는 그야말로 듣보잡이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가 종교로 승격한 4세기 일은 지금 마태복음 공동체가 처한 1세기 후반에서 볼 때 전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의 도움 없이 홀로 생존을 도모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유대교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철저하고 더 치열하게, 그리고 더 모범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단순히 율법 조문을 잘 지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율법의 본래 정신을, 즉 율법의 본질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게 곧 율법의 완성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오늘날의 윤리 도덕 규범을, 즉 실제적인 삶을 가리킵니다.

 

소금과 빛

5:13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으로 규정됩니다.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씀입니다. 다시 <새번역>으로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움을 잃어버리면, 즉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버림받는다는 뜻입니다. 마태 공동체가 느꼈던 위기의식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이런 구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가 집을 나와 독립한 상황과 비슷합니다. 부모의 도움으로 살던 시절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겁니다. 자기 스스로 돈을 벌어서 살아야 합니다. 자칫하면 세상에서 도태됩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14절과 15절에 나옵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세상의 빛으로 나옵니다. 빛은 숨길 수 없습니다. 밤에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집안사람 모두가 잘 보이는 자리에 놓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빛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버림받습니다.

이런 구절을 근거로 많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소금과 빛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16절에서는 이를 착한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소금과 빛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지면 세상이 교회를 다르게 보겠지요.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고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그런데 평범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소금과 빛으로 살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서 오히려 낙심하거나 혼란스러울 겁니다. 여러분은 실제로 어떻습니까? 저도 역시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말 성경 13절에 나오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표현과 14절에 나오는 세상의 빛이라는 표현에서 세상이라는 단어가 똑같이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 나오는 τὸ ἅλας τς γςτφς τοκόσμου의 번역입니다. 직역하면 땅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입니다. KJV은 헬라어에 맞게 번역했습니다. the salt of the earth, the light of the world라고 말입니다. 루터 성경도 소금을 말할 때는 ’(Erde)이라고 하고, 빛을 말할 때는 세상’(Welt)이라고 구별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흙으로 된 물리적인 세상과 사람들이 어울려서 사는 세상을 다 포괄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삶의 우주론적 차원을 강조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을 외면하고 골방에 숨어서 자기들끼리 밀의적인 종교현상에 빠져들려는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말씀이라고 말입니다.

앞에서 1세기 말 그리스도인들이 심한 박해를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리새파와 서기관들로 재편된 유대교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자는 그리스도인들도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유대교가 요구하는 율법을 지키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되니까요. 반면에 율법 자체를 폐기하려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을 겁니다. 율법 폐기를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이들을 가리켜서 요한계시록은 니골라당(2:6)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구원받았으니 일체의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영육 이원론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영지주의의 한 분파입니다. 유대 기독교를 대표하는 마태 공동체는 다시 유대교 전통으로 회귀하려는 율법주의를 수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율법 해체론도 배격했습니다. 율법의 본질에 투철한 교회 공동체로 방향을 새롭게 정했습니다. 감당 못 할 윤리 강령과 동의하기 어려운 팔복을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 17절이 율법과 교회의 관계를 이렇게 설정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아무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는 없습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한다는 말은 앞에서 짚었듯이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데 열중한다는 게 아니라 율법의 본래 정신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율법 형식주의와 율법 폐기론이라는 양극단에 떨어지지 않고 율법의 본질을 향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수행하듯이 쉬지 않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율법의 본질을 부단히 외치셨습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노라고 말입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곧 율법의 완성입니다.

 

천국 윤리

율법의 본질을 일상에서 살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세속의 원리로 작동하는 우리의 일상에는 본질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율법의 본질을 향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녹음기나 사진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경제 윤리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윤리적으로 돈을 벌고, 어떻게 돈을 쓰는 게 율법의 본질에 합당한 것인지를 측정하기 어렵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자녀를 키우는 일에 돈이 필요합니다. 사회 구호단체 등에 기부도 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헌금도 합니다. 이를 딱 부러지게 수치로 계량화할 수 없습니다. 삶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율법의 본질을 살아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다른 차원이 곧 오늘 설교 제목인 천국 윤리입니다. 19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본문은 천국에서의 평가가 세상에서의 평가와 완전히 다르다고 말합니다. 천국은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의 번역입니다. KJV“the kingdom of heave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늘 나라또는 하늘 왕권입니다. 복음서에 더 일반적인 형태로 나오는 바실레이아 두 데우’(하나님 나라)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는 큰일과 작은 일 사이에 차이가 없습니다.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는 큰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와 똑같습니다. 그가 하는 일이 작다고 해서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큰일 쪽으로만 마음이 기울어진 사람은 오히려 천국에서는 작은 자가 됩니다. 동의가 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 그의 통치, 그의 왕권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예수께서 선포하신 천국, 즉 생명 왕권이 실감이 됩니까?

하늘 왕권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6:3) 모세의 호렙산 경험과 시내산 경험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이 우리를 휩싸고 있다.’라는 말도 하늘 왕권을 가리킵니다. 엄청난 일이나 소소한 일이나 차이 없이 일체가 하나님의 생명 왕권 안에 들어 있습니다. 지구에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골고루 퍼져 있듯이 말입니다. 미국에 살든지, 아프가니스탄에 살든지, 그리고 대도시 100평 아파트에 살든지 시골 단칸방에 살든지 숨쉬기에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대학교 총장이나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해서 숨쉬기를 다른 사람보다 열 배나 더 많이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존경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기를 쓰고 그런 자리에 올라서려고 하겠으나 하나님의 사랑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천국(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을 제대로 실감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실감하십니까? 이에 관한 작은 팁만 말씀드립니다.

천국을 실감하려면 세상의 작동원리를 일단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삶을 너무 과도하게 지배하고 있어서 천국에 마음을 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이미 하나님께 받은 것들에 집중하는 겁니다. 일용할 양식이 있다면 그것으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걸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생명 충만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가진 게 너무 많습니다. 일상에서 거품만 걷어낸다면 우리는 기뻐할 일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소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 생명 왕권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더는 바랄 게 없는 충만함의 경지에 들어가서 기쁨 충만하게 사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천국에서의 큰 사람이고, 따라서 천국 윤리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십시오. 소금이 아니면서 소금 흉내를 내려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빛이 아니면서 빛 흉내를 내려면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존재가 소금으로 변화되었다면 굳이 짠맛을 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존재가 이미 빛이라면 빛을 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즉 소금과 빛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천국 시민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소한 일상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삶을 충만하게 누리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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